리토피아 신인상
- 신인상
- 수상자
- 투고작
이민구-단편소설2(2004.3.16) 1차심의
페이지 정보

본문
녹색 수첩
열 시에 가까웠지만 온도는 쉽게 떨어질 줄 모르는 고집스러움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가로등의 불빛마저도 따갑게 느껴지는 여름밤. 정현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6월말부터 시작된 여름방학 기간이었지만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에 매달려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오전부터 습기가 넘치는 주방에서 식료품들과 씨름을 하고 나면 금방 탈진 상태에 이르곤 한다. 하지만 남들처럼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현실에 대한 불만은 잊은 지 오래였다. 지금은, 군대에서 취사병으로 근무했던 경험 때문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차분할 뿐이다.
하루종일 몸에 스민 땀을 말려주는 바람이 불어오면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주유소 옆에서 10미터쯤 떨어져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지나치려는데 불현듯 집에 계실 부모님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부모님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고민한 적도 있었다. 결국 자신의 운명일 거라는 체념과 늙어 가는 부모님에 대한 연민으로 원망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연락을 하지 못했다. 두 내외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현은 그 네모나고 조금은 소원해지기까지 한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동전을 꺼내려고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동전을 먼저 보는 대신 전화기 위에 올려진 수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깜박하고 두고 간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전을 넣고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정현은 수첩을 들추어보며 대답을 했다. 집에는 별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고향에도 시간이 흐르고 더위와 모기들, 매미 소리와 냉장고에 과일,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교훈을 들으며 계속해서 예, 예, 예를 반복하다가 통화는 끝이 났다.
수첩은 얼마 사용하지도 못한 채였다. 맨 앞과 뒷장을 보았지만 이름이나 연락처는 써있지 않았다. 한 달씩 그려져 있는 스케줄 표를 몇 장 사용한 게 다였다. 그런 수첩쯤이야 그대로 두고 무심하게 돌아서려는데 자신도 계획적인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냥 놓고 간다고 해도 다시 버려질 테고 저런 낡은 수첩을 다시 찾으러 올 사람도 없을 걸. 새 다이어리를 사는 대신 그냥 한번 써보자.
몇 초밖에 안 되는 시간에 많은 생각으로 결정을 내린 정현은 짙은 녹색의 낡은 인조 가죽 표지를 한 여름밤에 발견한 수첩을 들고 발걸음을 밖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막 방향을 잡고 걸어가기를 시작하려 하는데 자신이 왔던 쪽에서 한 여자가 다가오는 것이 눈에 스쳤다. 살피며 느릿하게 있는데 여자가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가려는 게 아닌가. 정현은 무의식적으로 수첩을 찾으러 왔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오히려 이상한 표정을 하며 냉랭하게 아니라고 말했다.
정현은 입을 한번 삐쭉 내민 다음 집으로 향했다. 여자는 그냥 전화를 건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까지는 넓고 평평한 도로지만 자취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언덕을 자꾸만 올라가야 했다. 이제는 숙달이 되어서 숨도 차지 않게 오르막길을 오르지만 골목길에 들어설 때부터 답답한 건 언제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가장 답답한 것은 추억 속에나 묻혀 있으면 좋을 법한 정현의 자취방. 녹이 슬어서 구멍이 숭숭 뚫리고 조금만 있으면 길바닥으로 처박히고 말 것만 같은 철문을 끼익 소리로 밀고 들어가서 마당을 지르고 주인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거기에 허름한 나무문에 간유리가 쳐진 입구. 정현에게 유일하게 허락되어진 개인적인 공간이 초라한 모습을 숨기며 돌아서 있다. 형식적인 역할의 자물쇠를 풀고 끝도 없이 뻗어있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손을 놀려 불을 밝히면 이제야 돌아왔느냐고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세간살이들.
부엌 겸 샤워 부스 겸 세탁실인, 딱히 다른 말을 붙일 게 없어서 그냥 부엌이라고 부르는 곳을 두 발짝 지나 신발을 벗으면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밖으로부터 안식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지만 정현의 방은 다시 밖으로 이어진다. 그 방의 창문을 열면 다시 골목길이 나오기 때문이다. 낮에는 사람들의 발과 다리가 지나가는 창문이다. 하지만 거기를 통해서 밖으로 나간 적은 없다. 몸을 통과시킬 수도 없을 만큼 작은 크기이기 때문이다. 가끔 아침에 그대로 누워서 사람들의 다리를 구경한 적은 있다. 위로 아래로 꽤 많은 다리들이 지나쳐 갔지만 그런 곳에 나있는 창문 따위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정현은 직접 그 길로 나가서 자신의 방 창문을 지나가 보았다. 그리고 가슴이 턱 막혀서 실소가 나왔다. 스스로도 그게 창문인지 잊어버릴 정도로 아무 느낌이 없었던 것이다.
방에서 옷을 벗고 부엌으로 나왔다. 땀에 젖은 옷들은 중고 세탁기에 넣고 쭈그리고 앉은 채로 물을 끼얹었다. 서서 닦든 앉아서 씻든 시원함의 차이는 없었다. 몸을 씻고 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일 아침까지 잠잘 시간을 빼고도 한참이나 남았다는 여유가 더 기분 좋게 만들었다. 방안에서 옷을 입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집에서 전화 왔어. 받아봐."
주인집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정현은 밖을 향해 대답을 했지만 의아해졌다. 방금 전화를 했는데 무슨 일인지.
"다른 게 아니고 등록금 고지서가 왔는데 아까는 깜박했지 뭐냐. 그나저나 이번에는 어떻게 한다니? 융자를 받을 데도 없고. . ."
"알았어요. 제가 어떻게 해볼게요. 그만 들어가세요."
"그려. 내가도 알아보고 다닐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들어가자."
전화를 끊으면서 엄마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해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어쩔 방법은 사실 없었다. '이번 방학 때 배를 타러 가는 건데. . .' 두 달만 배를 타면 등록금은 만들고 남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가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 정현은 다시 현실에 쫓기는 신세였다. 그러나 고민만 할거면 차라리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가방을 열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을 꺼내려는데 좀 전에 주운 수첩이 따라나왔다. 그것을 밥상 겸 책상에 툭 던져놓고 옆으로 누워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잊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등록금 납부기한을 적어놓기로 했다. 달력에 적을까 하다가 책상에 척 붙어 있는 게 신통한 수첩에 적었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여자 글씨 같았다. 이젠 내가 잘 쓸게요, 라는 생각을 하며 전 주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몇 장을 칼로 잘라냈다. 맨 위에는 8월이라고 쓰고 요일에 맞추어서 날짜도 적었다. 말일에는 '등록금'이라고 빨간 색 볼펜으로 단단히 표시를 했다. 15일부터 18일까지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당의 여름 휴가였다. 휴가 기간이라고 해봤자 갈 곳도 없었고 놀기만 할 형편도 아니었지만 일단 표시는 했다. 그때쯤엔 며칠간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서 그랬는지 꿈을 많이 꾼 아침이었다. 거대한 휴대폰을 갖는 꿈, 그리고 어딘가를 헤매는 꿈이 기억났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하는 단순한 생활은 계속되었다.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더위에 거의 잊혀진 상태였고 휴가를 떠난다거나 놀고 싶다거나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시간에 몸을 맡긴 사람처럼 지금 하고 있어야 할 일만을 하기로 했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편했다.
"휴가 때 뭐 할거니?"
주방장이 갑작스럽게 물은 것은 한가한 월요일 오후였다. 고기를 튀기고 면을 삶아내느라 한참동안 흘린 땀을 식히며 한숨 돌리고 있던 정현은 뜻밖의 질문에 자세하게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그냥 집에 있을 거라는 말만 툭 떨어졌다.
"그럼 나하고 같이 갈래? 설악산 쪽에 콘도를 쓸 수 있게 됐는데 너도 알다시피 같이 갈 여자도 없잖냐, 게다가 친구들도 날짜가 통 맞질 않아서 말이야. 어때? 경비는 내가 다 댈 테니까 대신 식사준비만 네가 해라. 설거지도 내가 할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듣고만 있어도 얼굴에 웃음이 흘렀다. 경치 좋은 산과 시원한 바다가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예, 하고 대답만 하면 이틀 후에 한 여름밤을 시원하게 보낼 산으로 떠날 수 있게 된다. 정현은 머릿속에 맴도는 산과 바다가 지워질 새라 주방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을 했다.
3박 4일간의 휴가는 갑작스럽고 너무도 오랜만의 사건이었지만 굉장히 훌륭했다. 낮에는 바닷가에서 파도를 맞고 저녁이면 산으로 돌아와 바람을 즐겼다. 약속대로 정현은 요리만 하면 땡이었다. 나머지는 주방장을 따라다니거나 혼자서 느긋하게 경치와 여유를 즐기면서 보냈다. 주방장은 밤이 되면 어디선가 여자들을 데려오곤 했는데 처음 만났음에도 아주 친한 사이처럼 방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정현은 안주를 만들어주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동참하는 것이다. 술에 취해 히히거리며 수다를 떨다가, 한 여자가 정현이 맘에 든다며 산책을 하자고 했다. 여자와 함께 걷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었고 그 때가 밤이라는 것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것 같았다. 그런 설렘을 잊고 지낸 지가 그만큼 길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달빛을 받고 있는 그날 밤에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산장 주변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잠시 달빛이 가려지는 나무 뒤에서 정현은 그녀의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었지. . .'
누군가를 사랑할 겨를도 없는 시간이 길었던 탓일까. 달빛여인의 입술은 너무나도 감미로웠다.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이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어쩌다 마주친 사람처럼 서로가 그냥 지나쳐 가는 운명이라는 것을.
정현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그가 금방 꿈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개강 날짜가 2주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낮에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시간도 그것과 같았으며 등록금을 내야하는 시한도 그러했다. 추가등록까지 버틴다고 해도 기껏해야 한 달이었다. 그래도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저기 찾아보고 전화해보고 물어보고 두드려보았으며 서류를 제출해보고 비굴해져보고 안면을 몰수해보기도 하며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등록금을 선뜻 건네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안 되면 카드깡이라도 해야되나.'
개강 이틀 전날. 정현은 창 밖으로 골목길을 올려다보며 최후의 수단, 비장의 카드를 찾고 있었다. 한참을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정현이 있냐?"
누군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생각은 그랬지만 얼른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과사무실에서 과돌이로 근무하고 있는 4학년 선배 병섭이었다.
"와본지가 오래돼서 찾느라고 고생 좀 했네. 아따, 너 안 덥냐이? 방안이 찜통이구마."
키가 큰 병섭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이 머리에 닿았다.
"가만있으면 안 더워요."
정현은 반가운 마음에 농담을 섞어서 말했다. 그것은 선풍기도 없이 여름을 버티는 그의 철학이기도 했다.
"지랄말고 나가서 소주나 한잔하자. 할 야그도 쪼매 있고 더워서 여기는 못 있겄다."
성격이 괄괄한 병섭은 느리광이 같이 구는 정현을 끌고 골목을 벗어났다. 도로변에 있는 고치구이 집에서 서늘한 에어컨 바람에 몸을 누그러뜨린 병섭은 문득 정현에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예? 뭘요?"
집에 마실 물이 없던 차에 잘됐다며 마음껏 냉수를 들이키던 정현이 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니 핸드폰 안 할거냐? 좋은 소식이라 직접 전해도 뭐 기분은 안 나쁜디 이 바쁘신 몸이 한가할 시간에 여기까지 와야 쓰겄냔 말이다."
"딴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말해봐요. 뭐를 축하한다는 거요?"
채근을 해서 답을 들었지만 처음부터 정말이라고 믿어지지는 않았다.
"참말이라니까, 네가 장학금 수혜자로 추천되가꼬 등록금 전액을 받게 되었어야. 물론 이 형님이 니를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에 가능했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소주는 네가 사라. 어떠냐?"
믿고 싶었다. 언제나 그런 행운이 찾아와 주길 바랬으니까. 하지만 속는 거라면 아주 큰 웃음거리가 되겠지. 하지만 병섭은 남의 약점을 잡아들고 장난이나 칠 실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정말 크게 웃어도 상관없겠지 싶었다.
"그래요. 형! 오늘 제가 한잔 살게요. 많이 드세요."
"정말이냐? 자식, 네가 나의 공로를 인정하는구나. 어쨌든 나도 정말 축하한다. 자 한잔 마시자."
정현의 얼굴에서 마음껏 웃음이 묻어 났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술이 덜 깨서 머리가 아팠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스스로도 거울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웃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버스를 타고 있을 때에도, 햇볕 아래에서 학교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더워서 땀이 흘러도 정현은 웃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던 순간에도 안으로는 더 크게 웃고 있었고 과사무실에 도착해서 장학금을 전달받았을 때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이 극에 달해서 소리가 흘러나올 뻔하기도 했다. 병섭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현의 실정을 잘 아는 터여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축하한다고 다시 말했다.
'잠시라도 웃을 때가 있어야지. . .'
정현은 며칠 남지 않은 개강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대략 6개월 동안은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직접 일을 하고 싶은 생각도 컸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며 남은 세 학기를 버티기로 했다. 걱정은 없어졌지만 생각은 또 이어지고 미래를 계획하게 되고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고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건을 미리 대비하려는 조급함마저 생겼다.
그런 무작위적인 생각들 중에 하나는 성적으로 장학금을 타는 것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기.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하기로 하곤 했었고 또, 지금에도 계획이고 목표라는 게 겨우 공부 열심히 하기라니 웃음이 나오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것만이 최선이고 학업을 제외하면 다른 것은 계획할 의미도 사라지니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정현은 그만 방에 불을 밝히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 머릿속에서 떠다니던 생각들을 표시해 놓기 위해서였다. 금방 잊어버릴 생각은 생산성이 떨어지니까 잊혀지지 않게 어디에든 적어두어야 한다. 며칠 새 언제보다도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불이 켜진 방안 그곳에는 낮 동안 집을 비운 사이와 불이 꺼졌던 저녁에도 가만히 지키고 있던 책상. 나무 무늬를 가장해서 만든 플라스틱 코팅이 여기 저기 벗겨지기 시작한 책상 위. 거기에라도 철썩 달라붙어 있는 주인 잃은 수첩이 도도하게 정현을 노려보고 있다. 갈 곳 없는 주제에 무얼 믿고 저리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지. 정현은 절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릎을 꿇고 방바닥을 기어서 책상 앞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이제는 선명한 푸른색으로까지 보이는 낡은 인조가죽의 수첩을 펼쳐 들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는 9월 달의 날짜들을 써넣고 생각했던 대로 계획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느새 지나버린 8월을 넘기고 그 뒷장에 요일에 맞는 숫자들을 차례차례 적어갔다. 일요일과 추석 연휴는 빨간 볼펜으로 쓰는 꼼꼼함을 티내면서 아직 오지도 않은 9월을 다 채웠다. 그리곤 막상 뭔가 쓸만한 계획을 찾았지만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그냥 '공부 잘 하기.'는 어느 날에 특별하게 쓸만한 게 못되니 말이다. 바로 며칠 후인데 사실은 아무 계획도 없군.
정현은 무심코 한 장을 뒤로 넘겨보았다. 지나버린 날들을 돌이켜 본다면 뭔가 쓸만한 게 생각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8월도 거의 비어있는 상태. 그저 8월 둘째 주의 휴가 기간을 적은 것과 등록금 납부 일을 표시한 게 전부였다. 별거 없다고 느끼며 다시 앞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순간적으로 등골을 스치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동공이 커지고 땀구멍이 열렸다. 온몸의 털이 똑바로 섰으며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근육들은 팽팽하게 긴장이 되었다. 아주 갑작스러웠고, 공식을 이해했을 때 나타나는 희열보다도 더 빠르게 깨달음을 얻은 즉시 온몸이 녹초가 될 것처럼 에너지를 분출했다.
그럴 리가! 놀라움은 의심으로 이어졌고 쉽게 믿지 못하는 영혼의 소유자인 정현은 멈칫하며 수첩을 덮고 뒤로 물러났다. '그냥 우연이겠지. 잠깐동안 바램이 이루어진 것뿐이잖아. 바보같이 놀라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한번 더 수첩을 열어보았을 때, 가슴이 또 울렁거렸다. 그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스쳐보내기엔 두 가지 사건이 이루어진 날짜가 수첩에 적은 것과 정확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하하하! 바보처럼. 그런 게 어디 있겠어?' 정현은 부정했다. 그 순간은 말 잘하는 외판원에 잡혀서 혹하는 생각에 비싼 물건을 사거나 뭔가 꺼림칙한 배경을 안고 있는 집을 계약하려는 시점과도 같았다. 확률이 낮은 도박을 거는 것과 같아서 지고 나면 스스로에게 굉장한 웃음거리가 될게 뻔했기 때문에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즈넉한 강물 위를 스치는 바람처럼 이성을 메스로 살며시 가르고 자꾸만 솟아 나오는 섣부른 기대를 억누를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떠오르는 풍선처럼 한동안 판단력을 상실했던 정현은 고민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서 그의 방식대로이면서 가장 그럴 듯한 결론이 나왔다. 그것은 바로 실험을 해보는 것이었다. 9월 달에도 두 가지 항목을 정해 수첩에 기록을 한다. 그러면 한달 안에 어떻게 되는지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짓인 것 같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두 가지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 때는. 그 때는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내가 있는 장소와 시간, 함께 있는 사람들, 둘러싸고 있을 공기, 마시고 있는 것과 바라보고 있는 것들. 그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세 가지 소원'이라는, 단어처럼 되어버린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무언가.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삼각형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원점이 나온다. 세 가지는 위험하니 두 가지 소원에서 끝내라는 지시가 아닐까. 정현은 마치 예언자라도 된 것처럼 깊이 헤아리려고 애썼다.
개강을 하고 학교로 간 정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넘쳤다. 변한 거라곤 없었고 단지 가을 학기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뿐이었지만 그를 빈 허공 속으로도 붕붕 띄우는 것은 만약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에 대한 기대였다. 거짓된 희망이라고 해도 하루를 사는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무형의 양식 그 자체였다. 종교와 술을 대신할 수도 있고 어디에서나 누구 앞에서나 당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몇몇 가까운 친구들은 그의 그런 변화에 대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주 토요일. 강의가 없는 날인데도 중요한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일찌감치 도서관으로 향한 정현은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주말이라고 해서 신나게 놀거나 휴식을 취하기에도 급급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한칸한칸 옮겨가는 시계 바늘이 축복처럼 느껴졌고 가만히 앉아서도 벅찬 희열을 온몸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시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자신만만했다. 결국에 가서는 스스로에게 웃음거리가 된다고 해도 좋았다. 그래도 아무런 손해가 날 게 없었다. 벌써 열흘이나 기분 좋게 보낸 것만으로도 큰 이익을 본 것이니 말이다. 좁은 방안에서 책상 겸 밥상 위에서 밥을 먹고, 없는 텔레비전 대신 라디오를 들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 그랬듯이. 뭔가 일어날 징조일 테지. 주인집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으라고 소리친다. 판결 앞에 선 죄인이라도 그렇게 가슴이 조마조마했을까. 어디에서 왔냐고 묻자 시큰둥하게 집이라고 대답하는 중년의 여인이여 제 가슴을 눌러 질식하게 할 셈인가요. 집에서 온 전화가 기쁜 소식을 전했던 적은 없었다. 정현은 터벅터벅 주인집 거실로 들어섰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언덕 뒤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렸다. 그녀는 언제나 침울하고 낮아진 톤의 목소리 대신 약간 격양된 채였다. 정현은 그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미국에 가있던 네 당숙이 있는데 이번에 들어왔다가 네 얘기를 듣고 등록금에 보태라고 돈을 놓고 갔단다. 내일 당장 네 통장으로 부쳐줄게."
소식을 전하면서 어머니는 눈물이 나는지 목소리가 떨리곤 했다.
"잘 됐네요. 알겠어요.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정현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그가 수첩에 적었듯이 바로 오늘 돈이 생겼고 따라서, 앞으로는 모든 꿈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는 고민하는 내용도 바뀔 것이다. 전화를 끊은 정현은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얼른 방으로 돌아와 잠그지도 않던 문을 잠그고 수첩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방안을 굴러다니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책상 밑에 놓았던 수첩을 꺼내서 비키니 옷장 속에 숨기기도 하고 그랬다가는 꺼내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다시 숨기고. 스스로도 이상해진 자신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낀 정현은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 반병쯤 남아있던 소주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숨이 턱 멎을 것 같다가 금방 몸이 축 처져서 방안으로 돌아왔다. 술을 마셨다는 기분 때문인지 가만히 누워있을 수는 있었지만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해졌다. 잠을 자야할 시간, 아침에 먹을 밥, 강의 때 낼 리포트 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해야할 일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비약되는 사고가 이유나 목적지도 없이 날아다녔다.
너무 늦게 잠이 들어서 아침에 눈을 뜨기가 힘이 들었다. 길고 괴로운 꿈을 꾼 것처럼 머리가 쑤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분이 들뜨기 시작한 정현은 아침도 먹지 않은 채 학교로 향했다.
도서관에 일찍 도착했지만 자리에 앉아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집에 두고 온 수첩이 걱정되기도 하고 집에서 부쳐준다던 돈이 생각나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며 왔다갔다하다가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학교 식당으로 가서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이것저것 샀다가 남겨서 버리기도 했다.
세시 강의가 끝날 때까지 그런 종잡을 수 없이 산만한 행동은 계속되었다. 강의을 마치고 은행으로 간 정현은 잔액조회를 해보았다. 언제나 0이라는 숫자만 처량하게 남아있던 액정화면에 3,000,000이라는 숫자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웃음이 났다. 그대로 흘러 내려와서 심장까지 웃음이 가득 찼다. '분명히 내가 미친 건 아니야.' 라고 생각하면서 돈을 인출했다.
은행을 나서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같은 과 동기인 용호를 만났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정현은 가방에 두둑하게 들어가 있는 돈이 떠올랐고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용호는 갑작스러운 친절에 의아해했지만 즐거워하며 정현을 따랐다.
저녁을 먹으면서 시작된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정현은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과 사람들을 불러내며 함께 취할 상대를 찾았다. 처음에 함께 있던 용호는 많이 취했지만 정현의 이상한 변화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호의에 감동하는 동안 정현은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취했고 그들의 손에 이끌려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머리는 쑤셨지만 웃음이 멈추지는 않았다. 다음 주 토요일에 있을 일이 벌써부터 기다려졌고 그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도 돈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술자리는 거의 매일같이 이어졌고 밤새도록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의 잔치에서 실컷 즐기려는 사람들은 행복해하며 정현을 칭송했지만 병섭 선배라든가 용호 같이 의식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은 정현이 베푸는 술자리에 다시 오지 않았다. 어느새 자신과는 별로 친하지도 않고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열흘이나 이어진 술자리가 끝나고 나서야 문득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혼자였던 것이다.
정현은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정현의 파티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쾌락주의자들은 정현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금방 돌아서서 자신의 자리로 갔다. 늦었지만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정현은 밀렸던 방 값에 선불치를 더해서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그때, 그렇게 자신을 반기는 모습은 입주하고 처음이었다. 스스로도 미소가 지어졌다.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고 조금은 비웃는 듯한 미소가 입가에 성숙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토요일.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온 기쁨을 느끼며 눈을 뜬 다음 서점으로 향했다. 사서 읽을 수도 있었지만 정현은 한 귀퉁이를 장악하고 선 채로 책을 읽었다. 배가 아주 고파서 더 이상 글자를 소화해낼 수 없을 때까지 책 한 권을 거의 다 읽었다. 혼자서 사과를 하고 또한 괜찮다고 용서를 하면서 책장을 살짝 접어 원래 있던 자리에 꼽고 서점 옆에 있는 분식점에 가서 라면을 먹었다.
자학하는 수도자처럼 밥을 먹은 후에도 서서 책읽기를 계속했다. 아침에 뽑아든 책이 끝나갈 무렵, 정현은 잠시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20대 중반의 여자로 호기심이 생길 만큼 특별한 느낌의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고르고 있는 듯 보였다. 과연 어떤 책을 고르고 있는 것일까. 정현은 궁금해졌다. 몇 장 남지 않은 책을 마저 읽으려고 했지만 그 사이에 그녀가 사라질 것 같은 불안 때문에 더 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 책을 꼽아놓고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쪽으로, 옆으로, 근처에서 맴돌며 책을 구경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바로 옆에서 본 그녀의 얼굴은 더욱 끌리는 데가 있었다. 뭔가 후회하고 상심에 차있으며 끝없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여자. 조금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그녀는 마음에 드는 책이 없는지 시선을 들고 입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현의 가슴도 뛰고 있었다.
입구를 벗어나 계단을 오르고, 다리가 보이고 뒤를 따르는 정현. 점점 빠르게 걷는 여자는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다. 이러다간 정말 놓쳐버리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자 몇 걸음 훌쩍 뛰어 여자의 앞으로 간 정현이 몸을 돌리며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저녁 약속 있으세요?"
평소 때와 같았다면 처음 보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건넬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확신이 있는 한 그건 도발도 아니었고 객기도 아닌 당위였다.
그녀도 놀라기만 했던 처음과는 달리 저녁을 먹으면서, 그리고 가볍게 맥주를 마시면서 웃는 횟수가 늘어났다. 녹색과 흰색의 꽃나무 뒤에 숨어서 미소짓고 있던 여인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얼마 전처럼 행복에 취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흩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지윤을 만나고 난 후부터 정현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해서 아주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우선 아직 몇 달치나 남아있는 셋방을 떠나 전세를 얻어 이사를 했다. 그가 이사한 3층 짜리 다가구 주택은 온통 흰색으로 마감을 한 신축건물이었다. 집안에 가구들도 새로 들였다. 비키니 옷장이 아니고 진짜 원목으로 만든 옷장. 그리고 역시 원목으로 만든 침대와 책상. 예쁘고 성능이 좋은 비싼 가전제품들을 들여놓으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 같다.
주말이면 더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지윤과 함께 쇼핑에 몰두했다. 필요하기만 하다면 모든 것을 살 수 있었다. 아니 필요치 않더라도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철없이 웃음을 흘리거나 자만해하지 말고 조용히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겉으로는 평범함을 은밀하게 내세우고 실제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행복과 사치를 누릴 계획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계획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윤을 만난 지 100일이 되는 날.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정현은 얼마 전에 주문한 차를 수령하기 위해 아침부터 자동차 대리점을 찾았다. 최고급 사양을 원하는 최고 고객인 정현에게 직원들은 하나같이 깍듯했다. 차를 내오고 안부를 물어주며 그냥 앉아 있는 사이에 모든 복잡한 절차를 처리해주었다.
정현이 차에 오르자 앞을 막고 있던 거대한 유리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길을 터 주었다. 손을 흔들어주고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대리점을 뒤로하고 세단은 미끄러지듯 달려나갔다.
지윤을 만나기 전까지 혼자서 드라이브를 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 난데없이 차를 몰고 온 정현을 보며 그녀는 놀라고 기뻐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정현은 흐뭇했다.
차가 생긴 덕분에 데이트는 더 즐거웠고 쇼핑도 더 쉬워졌다. 어디라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더 너그러워지고 주위에는 온통 평화가 가득 찼다. 열린 창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지윤은 차에 대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도 가난하다면서 돈은 다 어디서 난 거냐고 물었다. 그런 물음이 있을 때마다 장학금 탄 돈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오늘은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물론 믿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나에게 요술램프 같은 수첩이 있다면 믿겠어?"
들고 있던 담배에서 재가 톡하고 떨어졌다. 지윤은 놀라는 듯 하다가 웃어버렸다.
"물어본 내가 바보지. . . 좋으시겠네요. 그런 수첩이 있다니."
웃어넘기는 지윤을 보고 정현은 더 이상 수첩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태리식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포도주를 마셨다. 대화는 늘 사랑스러웠고 푸근했다. 흠잡을 데라고는 어디에도 없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술을 한잔 더 마시고 싶다는 지윤의 말에 따라 집에 차를 주차하고 근처의 술집으로 향했다.
코냑의 부드러운 향기를 마시면서도 정현은 계획대로 되어간다는 생각에 조금은 미안했지만 가슴이 설鵖다. 큰 병 하나를 거의 다 비웠을 때 취기를 느끼며 준비했던 반지를 선물했다. 지윤은 감동 어린 얼굴을 하며 웃었다.
"나한테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런 때가 온다면 바보처럼 망치지 말고 잘 처신해야 한다고 상상하곤 했었지. 잘못하다가는 행운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날아가 버리는 수가 있거든. 너와 함께 그 행운을 누리고 싶어."
정현의 말에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잔을 비우고 일어난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수줍어하는 여자와 자꾸만 집안으로 이끄는 남자의 모습이 막 피어나려는 꽃을 연상시켰다.
사랑을 확인하기로 결심한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아주 길고 깊어서 헤어 나오지 못할 만큼 진한 입맞춤은 온몸으로 퍼져나가 긴 떨림을 만들었다. 알몸이 되어서도 서두르지 않은 둘은 서로를 느끼며 아주 오랜 시간동안 사랑을 나누었다.
마침내 완벽한 사랑을 이루어낸 연인은 조용히 몸을 뉘었고 손을 잡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숨소리만이 들려오던 고요가 한참 있은 후에 정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윤은 대답이 없었고 가늘고 긴 숨소리만이 이어졌다. 꿈에 빠진 모양이다. 정현은 소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씻고 돌아와서 다시 지윤의 옆에 누웠을 때에는 더 이상 각성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쉽게 잠이 들었다.
꿈을 꾼 것 같았지만 기억이 날 것 같지도 않았다. 점점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면서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뜬 그 순간부터 계속 잠을 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게다가 엄청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거세게 이어졌다.
간밤에 옆에서 잠들었던 지윤은 화장실에라도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섰을 때는 빈혈이 있는 것처럼 휘청했다. 방안에 존재하는 모든 서랍과 문들이 열려 있었고 수색을 당한 것처럼 내용물이 완벽하게 뒤집혀져 있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실도 마찬가지였다. 집 전체가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의 신발이 없었다. 떠나버린 것이다. 왜? 정현은 황급히 방으로 돌아와 의자를 받치고 형광등 위를 살폈다. 그리고 얼마 높지도 않은 그 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거기에 숨겨두었던 수첩이 사라진 것이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깨어난 지 몇 분만에 탈진상태가 된 정현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방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방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수첩이 책상 위에서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수첩이 아니라 사용한 몇 장을 찢어낸 것이었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사용한 면들이 뜯겨져 나와 있었다. 정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섰다. 거기에는 '이건 원래 내 거야!' 라고 지윤의 솜씨로 보이는 글씨가 크게 적혀 있었다. '그럴 리가? 나쁜 년.' 욕설이 쏟아졌지만 당장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망연자실한 정현은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바로 어제까지 사용했던 몇 장의 수첩을 쳐다보았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었다. 녹색의 표지를 열고 계획한 일들을 그곳에 적기만 하면, 단지 그렇게만 하면 어떤 일이라도 일어났다. 그런데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다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니.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만 젓고 있는 사이 두 눈이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어제였는데 거기에는 '100일', '첫날밤' 이라고 정현이 썼던 것 외에도 궁금하기만 했던 작은 글씨가 문제에서 해답으로 바뀐 채 빛나고 있었다. '다시 찾음.' 이라고 써있던 그 글씨체는 바로 오늘 지윤이 쓴 글씨와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머리가 좋은 여자였다.
저는 이 민 구(1975년생 4,5년 경력)
주소 충남 천안시 안서동 468-6 도솔빌리지 1-102호
전화 016-601-2789
열 시에 가까웠지만 온도는 쉽게 떨어질 줄 모르는 고집스러움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가로등의 불빛마저도 따갑게 느껴지는 여름밤. 정현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6월말부터 시작된 여름방학 기간이었지만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에 매달려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오전부터 습기가 넘치는 주방에서 식료품들과 씨름을 하고 나면 금방 탈진 상태에 이르곤 한다. 하지만 남들처럼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현실에 대한 불만은 잊은 지 오래였다. 지금은, 군대에서 취사병으로 근무했던 경험 때문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차분할 뿐이다.
하루종일 몸에 스민 땀을 말려주는 바람이 불어오면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주유소 옆에서 10미터쯤 떨어져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지나치려는데 불현듯 집에 계실 부모님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부모님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고민한 적도 있었다. 결국 자신의 운명일 거라는 체념과 늙어 가는 부모님에 대한 연민으로 원망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연락을 하지 못했다. 두 내외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현은 그 네모나고 조금은 소원해지기까지 한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동전을 꺼내려고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동전을 먼저 보는 대신 전화기 위에 올려진 수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깜박하고 두고 간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전을 넣고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정현은 수첩을 들추어보며 대답을 했다. 집에는 별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고향에도 시간이 흐르고 더위와 모기들, 매미 소리와 냉장고에 과일,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교훈을 들으며 계속해서 예, 예, 예를 반복하다가 통화는 끝이 났다.
수첩은 얼마 사용하지도 못한 채였다. 맨 앞과 뒷장을 보았지만 이름이나 연락처는 써있지 않았다. 한 달씩 그려져 있는 스케줄 표를 몇 장 사용한 게 다였다. 그런 수첩쯤이야 그대로 두고 무심하게 돌아서려는데 자신도 계획적인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냥 놓고 간다고 해도 다시 버려질 테고 저런 낡은 수첩을 다시 찾으러 올 사람도 없을 걸. 새 다이어리를 사는 대신 그냥 한번 써보자.
몇 초밖에 안 되는 시간에 많은 생각으로 결정을 내린 정현은 짙은 녹색의 낡은 인조 가죽 표지를 한 여름밤에 발견한 수첩을 들고 발걸음을 밖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막 방향을 잡고 걸어가기를 시작하려 하는데 자신이 왔던 쪽에서 한 여자가 다가오는 것이 눈에 스쳤다. 살피며 느릿하게 있는데 여자가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가려는 게 아닌가. 정현은 무의식적으로 수첩을 찾으러 왔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오히려 이상한 표정을 하며 냉랭하게 아니라고 말했다.
정현은 입을 한번 삐쭉 내민 다음 집으로 향했다. 여자는 그냥 전화를 건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까지는 넓고 평평한 도로지만 자취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언덕을 자꾸만 올라가야 했다. 이제는 숙달이 되어서 숨도 차지 않게 오르막길을 오르지만 골목길에 들어설 때부터 답답한 건 언제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가장 답답한 것은 추억 속에나 묻혀 있으면 좋을 법한 정현의 자취방. 녹이 슬어서 구멍이 숭숭 뚫리고 조금만 있으면 길바닥으로 처박히고 말 것만 같은 철문을 끼익 소리로 밀고 들어가서 마당을 지르고 주인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거기에 허름한 나무문에 간유리가 쳐진 입구. 정현에게 유일하게 허락되어진 개인적인 공간이 초라한 모습을 숨기며 돌아서 있다. 형식적인 역할의 자물쇠를 풀고 끝도 없이 뻗어있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손을 놀려 불을 밝히면 이제야 돌아왔느냐고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세간살이들.
부엌 겸 샤워 부스 겸 세탁실인, 딱히 다른 말을 붙일 게 없어서 그냥 부엌이라고 부르는 곳을 두 발짝 지나 신발을 벗으면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밖으로부터 안식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지만 정현의 방은 다시 밖으로 이어진다. 그 방의 창문을 열면 다시 골목길이 나오기 때문이다. 낮에는 사람들의 발과 다리가 지나가는 창문이다. 하지만 거기를 통해서 밖으로 나간 적은 없다. 몸을 통과시킬 수도 없을 만큼 작은 크기이기 때문이다. 가끔 아침에 그대로 누워서 사람들의 다리를 구경한 적은 있다. 위로 아래로 꽤 많은 다리들이 지나쳐 갔지만 그런 곳에 나있는 창문 따위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정현은 직접 그 길로 나가서 자신의 방 창문을 지나가 보았다. 그리고 가슴이 턱 막혀서 실소가 나왔다. 스스로도 그게 창문인지 잊어버릴 정도로 아무 느낌이 없었던 것이다.
방에서 옷을 벗고 부엌으로 나왔다. 땀에 젖은 옷들은 중고 세탁기에 넣고 쭈그리고 앉은 채로 물을 끼얹었다. 서서 닦든 앉아서 씻든 시원함의 차이는 없었다. 몸을 씻고 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일 아침까지 잠잘 시간을 빼고도 한참이나 남았다는 여유가 더 기분 좋게 만들었다. 방안에서 옷을 입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집에서 전화 왔어. 받아봐."
주인집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정현은 밖을 향해 대답을 했지만 의아해졌다. 방금 전화를 했는데 무슨 일인지.
"다른 게 아니고 등록금 고지서가 왔는데 아까는 깜박했지 뭐냐. 그나저나 이번에는 어떻게 한다니? 융자를 받을 데도 없고. . ."
"알았어요. 제가 어떻게 해볼게요. 그만 들어가세요."
"그려. 내가도 알아보고 다닐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들어가자."
전화를 끊으면서 엄마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해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어쩔 방법은 사실 없었다. '이번 방학 때 배를 타러 가는 건데. . .' 두 달만 배를 타면 등록금은 만들고 남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가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 정현은 다시 현실에 쫓기는 신세였다. 그러나 고민만 할거면 차라리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가방을 열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을 꺼내려는데 좀 전에 주운 수첩이 따라나왔다. 그것을 밥상 겸 책상에 툭 던져놓고 옆으로 누워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잊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등록금 납부기한을 적어놓기로 했다. 달력에 적을까 하다가 책상에 척 붙어 있는 게 신통한 수첩에 적었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여자 글씨 같았다. 이젠 내가 잘 쓸게요, 라는 생각을 하며 전 주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몇 장을 칼로 잘라냈다. 맨 위에는 8월이라고 쓰고 요일에 맞추어서 날짜도 적었다. 말일에는 '등록금'이라고 빨간 색 볼펜으로 단단히 표시를 했다. 15일부터 18일까지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당의 여름 휴가였다. 휴가 기간이라고 해봤자 갈 곳도 없었고 놀기만 할 형편도 아니었지만 일단 표시는 했다. 그때쯤엔 며칠간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서 그랬는지 꿈을 많이 꾼 아침이었다. 거대한 휴대폰을 갖는 꿈, 그리고 어딘가를 헤매는 꿈이 기억났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하는 단순한 생활은 계속되었다.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더위에 거의 잊혀진 상태였고 휴가를 떠난다거나 놀고 싶다거나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시간에 몸을 맡긴 사람처럼 지금 하고 있어야 할 일만을 하기로 했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편했다.
"휴가 때 뭐 할거니?"
주방장이 갑작스럽게 물은 것은 한가한 월요일 오후였다. 고기를 튀기고 면을 삶아내느라 한참동안 흘린 땀을 식히며 한숨 돌리고 있던 정현은 뜻밖의 질문에 자세하게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그냥 집에 있을 거라는 말만 툭 떨어졌다.
"그럼 나하고 같이 갈래? 설악산 쪽에 콘도를 쓸 수 있게 됐는데 너도 알다시피 같이 갈 여자도 없잖냐, 게다가 친구들도 날짜가 통 맞질 않아서 말이야. 어때? 경비는 내가 다 댈 테니까 대신 식사준비만 네가 해라. 설거지도 내가 할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듣고만 있어도 얼굴에 웃음이 흘렀다. 경치 좋은 산과 시원한 바다가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예, 하고 대답만 하면 이틀 후에 한 여름밤을 시원하게 보낼 산으로 떠날 수 있게 된다. 정현은 머릿속에 맴도는 산과 바다가 지워질 새라 주방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을 했다.
3박 4일간의 휴가는 갑작스럽고 너무도 오랜만의 사건이었지만 굉장히 훌륭했다. 낮에는 바닷가에서 파도를 맞고 저녁이면 산으로 돌아와 바람을 즐겼다. 약속대로 정현은 요리만 하면 땡이었다. 나머지는 주방장을 따라다니거나 혼자서 느긋하게 경치와 여유를 즐기면서 보냈다. 주방장은 밤이 되면 어디선가 여자들을 데려오곤 했는데 처음 만났음에도 아주 친한 사이처럼 방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정현은 안주를 만들어주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동참하는 것이다. 술에 취해 히히거리며 수다를 떨다가, 한 여자가 정현이 맘에 든다며 산책을 하자고 했다. 여자와 함께 걷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었고 그 때가 밤이라는 것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것 같았다. 그런 설렘을 잊고 지낸 지가 그만큼 길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달빛을 받고 있는 그날 밤에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산장 주변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잠시 달빛이 가려지는 나무 뒤에서 정현은 그녀의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었지. . .'
누군가를 사랑할 겨를도 없는 시간이 길었던 탓일까. 달빛여인의 입술은 너무나도 감미로웠다.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이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어쩌다 마주친 사람처럼 서로가 그냥 지나쳐 가는 운명이라는 것을.
정현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그가 금방 꿈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개강 날짜가 2주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낮에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시간도 그것과 같았으며 등록금을 내야하는 시한도 그러했다. 추가등록까지 버틴다고 해도 기껏해야 한 달이었다. 그래도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저기 찾아보고 전화해보고 물어보고 두드려보았으며 서류를 제출해보고 비굴해져보고 안면을 몰수해보기도 하며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등록금을 선뜻 건네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안 되면 카드깡이라도 해야되나.'
개강 이틀 전날. 정현은 창 밖으로 골목길을 올려다보며 최후의 수단, 비장의 카드를 찾고 있었다. 한참을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정현이 있냐?"
누군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생각은 그랬지만 얼른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과사무실에서 과돌이로 근무하고 있는 4학년 선배 병섭이었다.
"와본지가 오래돼서 찾느라고 고생 좀 했네. 아따, 너 안 덥냐이? 방안이 찜통이구마."
키가 큰 병섭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이 머리에 닿았다.
"가만있으면 안 더워요."
정현은 반가운 마음에 농담을 섞어서 말했다. 그것은 선풍기도 없이 여름을 버티는 그의 철학이기도 했다.
"지랄말고 나가서 소주나 한잔하자. 할 야그도 쪼매 있고 더워서 여기는 못 있겄다."
성격이 괄괄한 병섭은 느리광이 같이 구는 정현을 끌고 골목을 벗어났다. 도로변에 있는 고치구이 집에서 서늘한 에어컨 바람에 몸을 누그러뜨린 병섭은 문득 정현에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예? 뭘요?"
집에 마실 물이 없던 차에 잘됐다며 마음껏 냉수를 들이키던 정현이 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니 핸드폰 안 할거냐? 좋은 소식이라 직접 전해도 뭐 기분은 안 나쁜디 이 바쁘신 몸이 한가할 시간에 여기까지 와야 쓰겄냔 말이다."
"딴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말해봐요. 뭐를 축하한다는 거요?"
채근을 해서 답을 들었지만 처음부터 정말이라고 믿어지지는 않았다.
"참말이라니까, 네가 장학금 수혜자로 추천되가꼬 등록금 전액을 받게 되었어야. 물론 이 형님이 니를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에 가능했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소주는 네가 사라. 어떠냐?"
믿고 싶었다. 언제나 그런 행운이 찾아와 주길 바랬으니까. 하지만 속는 거라면 아주 큰 웃음거리가 되겠지. 하지만 병섭은 남의 약점을 잡아들고 장난이나 칠 실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정말 크게 웃어도 상관없겠지 싶었다.
"그래요. 형! 오늘 제가 한잔 살게요. 많이 드세요."
"정말이냐? 자식, 네가 나의 공로를 인정하는구나. 어쨌든 나도 정말 축하한다. 자 한잔 마시자."
정현의 얼굴에서 마음껏 웃음이 묻어 났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술이 덜 깨서 머리가 아팠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스스로도 거울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웃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버스를 타고 있을 때에도, 햇볕 아래에서 학교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더워서 땀이 흘러도 정현은 웃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던 순간에도 안으로는 더 크게 웃고 있었고 과사무실에 도착해서 장학금을 전달받았을 때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이 극에 달해서 소리가 흘러나올 뻔하기도 했다. 병섭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현의 실정을 잘 아는 터여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축하한다고 다시 말했다.
'잠시라도 웃을 때가 있어야지. . .'
정현은 며칠 남지 않은 개강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대략 6개월 동안은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직접 일을 하고 싶은 생각도 컸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며 남은 세 학기를 버티기로 했다. 걱정은 없어졌지만 생각은 또 이어지고 미래를 계획하게 되고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고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건을 미리 대비하려는 조급함마저 생겼다.
그런 무작위적인 생각들 중에 하나는 성적으로 장학금을 타는 것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기.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하기로 하곤 했었고 또, 지금에도 계획이고 목표라는 게 겨우 공부 열심히 하기라니 웃음이 나오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것만이 최선이고 학업을 제외하면 다른 것은 계획할 의미도 사라지니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정현은 그만 방에 불을 밝히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 머릿속에서 떠다니던 생각들을 표시해 놓기 위해서였다. 금방 잊어버릴 생각은 생산성이 떨어지니까 잊혀지지 않게 어디에든 적어두어야 한다. 며칠 새 언제보다도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불이 켜진 방안 그곳에는 낮 동안 집을 비운 사이와 불이 꺼졌던 저녁에도 가만히 지키고 있던 책상. 나무 무늬를 가장해서 만든 플라스틱 코팅이 여기 저기 벗겨지기 시작한 책상 위. 거기에라도 철썩 달라붙어 있는 주인 잃은 수첩이 도도하게 정현을 노려보고 있다. 갈 곳 없는 주제에 무얼 믿고 저리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지. 정현은 절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릎을 꿇고 방바닥을 기어서 책상 앞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이제는 선명한 푸른색으로까지 보이는 낡은 인조가죽의 수첩을 펼쳐 들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는 9월 달의 날짜들을 써넣고 생각했던 대로 계획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느새 지나버린 8월을 넘기고 그 뒷장에 요일에 맞는 숫자들을 차례차례 적어갔다. 일요일과 추석 연휴는 빨간 볼펜으로 쓰는 꼼꼼함을 티내면서 아직 오지도 않은 9월을 다 채웠다. 그리곤 막상 뭔가 쓸만한 계획을 찾았지만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그냥 '공부 잘 하기.'는 어느 날에 특별하게 쓸만한 게 못되니 말이다. 바로 며칠 후인데 사실은 아무 계획도 없군.
정현은 무심코 한 장을 뒤로 넘겨보았다. 지나버린 날들을 돌이켜 본다면 뭔가 쓸만한 게 생각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8월도 거의 비어있는 상태. 그저 8월 둘째 주의 휴가 기간을 적은 것과 등록금 납부 일을 표시한 게 전부였다. 별거 없다고 느끼며 다시 앞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순간적으로 등골을 스치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동공이 커지고 땀구멍이 열렸다. 온몸의 털이 똑바로 섰으며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근육들은 팽팽하게 긴장이 되었다. 아주 갑작스러웠고, 공식을 이해했을 때 나타나는 희열보다도 더 빠르게 깨달음을 얻은 즉시 온몸이 녹초가 될 것처럼 에너지를 분출했다.
그럴 리가! 놀라움은 의심으로 이어졌고 쉽게 믿지 못하는 영혼의 소유자인 정현은 멈칫하며 수첩을 덮고 뒤로 물러났다. '그냥 우연이겠지. 잠깐동안 바램이 이루어진 것뿐이잖아. 바보같이 놀라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한번 더 수첩을 열어보았을 때, 가슴이 또 울렁거렸다. 그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스쳐보내기엔 두 가지 사건이 이루어진 날짜가 수첩에 적은 것과 정확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하하하! 바보처럼. 그런 게 어디 있겠어?' 정현은 부정했다. 그 순간은 말 잘하는 외판원에 잡혀서 혹하는 생각에 비싼 물건을 사거나 뭔가 꺼림칙한 배경을 안고 있는 집을 계약하려는 시점과도 같았다. 확률이 낮은 도박을 거는 것과 같아서 지고 나면 스스로에게 굉장한 웃음거리가 될게 뻔했기 때문에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즈넉한 강물 위를 스치는 바람처럼 이성을 메스로 살며시 가르고 자꾸만 솟아 나오는 섣부른 기대를 억누를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떠오르는 풍선처럼 한동안 판단력을 상실했던 정현은 고민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서 그의 방식대로이면서 가장 그럴 듯한 결론이 나왔다. 그것은 바로 실험을 해보는 것이었다. 9월 달에도 두 가지 항목을 정해 수첩에 기록을 한다. 그러면 한달 안에 어떻게 되는지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짓인 것 같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두 가지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 때는. 그 때는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내가 있는 장소와 시간, 함께 있는 사람들, 둘러싸고 있을 공기, 마시고 있는 것과 바라보고 있는 것들. 그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세 가지 소원'이라는, 단어처럼 되어버린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무언가.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삼각형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원점이 나온다. 세 가지는 위험하니 두 가지 소원에서 끝내라는 지시가 아닐까. 정현은 마치 예언자라도 된 것처럼 깊이 헤아리려고 애썼다.
개강을 하고 학교로 간 정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넘쳤다. 변한 거라곤 없었고 단지 가을 학기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뿐이었지만 그를 빈 허공 속으로도 붕붕 띄우는 것은 만약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에 대한 기대였다. 거짓된 희망이라고 해도 하루를 사는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무형의 양식 그 자체였다. 종교와 술을 대신할 수도 있고 어디에서나 누구 앞에서나 당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몇몇 가까운 친구들은 그의 그런 변화에 대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주 토요일. 강의가 없는 날인데도 중요한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일찌감치 도서관으로 향한 정현은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주말이라고 해서 신나게 놀거나 휴식을 취하기에도 급급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한칸한칸 옮겨가는 시계 바늘이 축복처럼 느껴졌고 가만히 앉아서도 벅찬 희열을 온몸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시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자신만만했다. 결국에 가서는 스스로에게 웃음거리가 된다고 해도 좋았다. 그래도 아무런 손해가 날 게 없었다. 벌써 열흘이나 기분 좋게 보낸 것만으로도 큰 이익을 본 것이니 말이다. 좁은 방안에서 책상 겸 밥상 위에서 밥을 먹고, 없는 텔레비전 대신 라디오를 들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 그랬듯이. 뭔가 일어날 징조일 테지. 주인집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으라고 소리친다. 판결 앞에 선 죄인이라도 그렇게 가슴이 조마조마했을까. 어디에서 왔냐고 묻자 시큰둥하게 집이라고 대답하는 중년의 여인이여 제 가슴을 눌러 질식하게 할 셈인가요. 집에서 온 전화가 기쁜 소식을 전했던 적은 없었다. 정현은 터벅터벅 주인집 거실로 들어섰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언덕 뒤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렸다. 그녀는 언제나 침울하고 낮아진 톤의 목소리 대신 약간 격양된 채였다. 정현은 그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미국에 가있던 네 당숙이 있는데 이번에 들어왔다가 네 얘기를 듣고 등록금에 보태라고 돈을 놓고 갔단다. 내일 당장 네 통장으로 부쳐줄게."
소식을 전하면서 어머니는 눈물이 나는지 목소리가 떨리곤 했다.
"잘 됐네요. 알겠어요.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정현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그가 수첩에 적었듯이 바로 오늘 돈이 생겼고 따라서, 앞으로는 모든 꿈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는 고민하는 내용도 바뀔 것이다. 전화를 끊은 정현은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얼른 방으로 돌아와 잠그지도 않던 문을 잠그고 수첩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방안을 굴러다니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책상 밑에 놓았던 수첩을 꺼내서 비키니 옷장 속에 숨기기도 하고 그랬다가는 꺼내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다시 숨기고. 스스로도 이상해진 자신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낀 정현은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 반병쯤 남아있던 소주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숨이 턱 멎을 것 같다가 금방 몸이 축 처져서 방안으로 돌아왔다. 술을 마셨다는 기분 때문인지 가만히 누워있을 수는 있었지만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해졌다. 잠을 자야할 시간, 아침에 먹을 밥, 강의 때 낼 리포트 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해야할 일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비약되는 사고가 이유나 목적지도 없이 날아다녔다.
너무 늦게 잠이 들어서 아침에 눈을 뜨기가 힘이 들었다. 길고 괴로운 꿈을 꾼 것처럼 머리가 쑤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분이 들뜨기 시작한 정현은 아침도 먹지 않은 채 학교로 향했다.
도서관에 일찍 도착했지만 자리에 앉아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집에 두고 온 수첩이 걱정되기도 하고 집에서 부쳐준다던 돈이 생각나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며 왔다갔다하다가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학교 식당으로 가서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이것저것 샀다가 남겨서 버리기도 했다.
세시 강의가 끝날 때까지 그런 종잡을 수 없이 산만한 행동은 계속되었다. 강의을 마치고 은행으로 간 정현은 잔액조회를 해보았다. 언제나 0이라는 숫자만 처량하게 남아있던 액정화면에 3,000,000이라는 숫자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웃음이 났다. 그대로 흘러 내려와서 심장까지 웃음이 가득 찼다. '분명히 내가 미친 건 아니야.' 라고 생각하면서 돈을 인출했다.
은행을 나서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같은 과 동기인 용호를 만났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정현은 가방에 두둑하게 들어가 있는 돈이 떠올랐고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용호는 갑작스러운 친절에 의아해했지만 즐거워하며 정현을 따랐다.
저녁을 먹으면서 시작된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정현은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과 사람들을 불러내며 함께 취할 상대를 찾았다. 처음에 함께 있던 용호는 많이 취했지만 정현의 이상한 변화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호의에 감동하는 동안 정현은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취했고 그들의 손에 이끌려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머리는 쑤셨지만 웃음이 멈추지는 않았다. 다음 주 토요일에 있을 일이 벌써부터 기다려졌고 그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도 돈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술자리는 거의 매일같이 이어졌고 밤새도록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의 잔치에서 실컷 즐기려는 사람들은 행복해하며 정현을 칭송했지만 병섭 선배라든가 용호 같이 의식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은 정현이 베푸는 술자리에 다시 오지 않았다. 어느새 자신과는 별로 친하지도 않고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열흘이나 이어진 술자리가 끝나고 나서야 문득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혼자였던 것이다.
정현은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정현의 파티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쾌락주의자들은 정현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금방 돌아서서 자신의 자리로 갔다. 늦었지만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정현은 밀렸던 방 값에 선불치를 더해서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그때, 그렇게 자신을 반기는 모습은 입주하고 처음이었다. 스스로도 미소가 지어졌다.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고 조금은 비웃는 듯한 미소가 입가에 성숙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토요일.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온 기쁨을 느끼며 눈을 뜬 다음 서점으로 향했다. 사서 읽을 수도 있었지만 정현은 한 귀퉁이를 장악하고 선 채로 책을 읽었다. 배가 아주 고파서 더 이상 글자를 소화해낼 수 없을 때까지 책 한 권을 거의 다 읽었다. 혼자서 사과를 하고 또한 괜찮다고 용서를 하면서 책장을 살짝 접어 원래 있던 자리에 꼽고 서점 옆에 있는 분식점에 가서 라면을 먹었다.
자학하는 수도자처럼 밥을 먹은 후에도 서서 책읽기를 계속했다. 아침에 뽑아든 책이 끝나갈 무렵, 정현은 잠시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20대 중반의 여자로 호기심이 생길 만큼 특별한 느낌의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고르고 있는 듯 보였다. 과연 어떤 책을 고르고 있는 것일까. 정현은 궁금해졌다. 몇 장 남지 않은 책을 마저 읽으려고 했지만 그 사이에 그녀가 사라질 것 같은 불안 때문에 더 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 책을 꼽아놓고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쪽으로, 옆으로, 근처에서 맴돌며 책을 구경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바로 옆에서 본 그녀의 얼굴은 더욱 끌리는 데가 있었다. 뭔가 후회하고 상심에 차있으며 끝없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여자. 조금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그녀는 마음에 드는 책이 없는지 시선을 들고 입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현의 가슴도 뛰고 있었다.
입구를 벗어나 계단을 오르고, 다리가 보이고 뒤를 따르는 정현. 점점 빠르게 걷는 여자는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다. 이러다간 정말 놓쳐버리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자 몇 걸음 훌쩍 뛰어 여자의 앞으로 간 정현이 몸을 돌리며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저녁 약속 있으세요?"
평소 때와 같았다면 처음 보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건넬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확신이 있는 한 그건 도발도 아니었고 객기도 아닌 당위였다.
그녀도 놀라기만 했던 처음과는 달리 저녁을 먹으면서, 그리고 가볍게 맥주를 마시면서 웃는 횟수가 늘어났다. 녹색과 흰색의 꽃나무 뒤에 숨어서 미소짓고 있던 여인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얼마 전처럼 행복에 취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흩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지윤을 만나고 난 후부터 정현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해서 아주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우선 아직 몇 달치나 남아있는 셋방을 떠나 전세를 얻어 이사를 했다. 그가 이사한 3층 짜리 다가구 주택은 온통 흰색으로 마감을 한 신축건물이었다. 집안에 가구들도 새로 들였다. 비키니 옷장이 아니고 진짜 원목으로 만든 옷장. 그리고 역시 원목으로 만든 침대와 책상. 예쁘고 성능이 좋은 비싼 가전제품들을 들여놓으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 같다.
주말이면 더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지윤과 함께 쇼핑에 몰두했다. 필요하기만 하다면 모든 것을 살 수 있었다. 아니 필요치 않더라도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철없이 웃음을 흘리거나 자만해하지 말고 조용히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겉으로는 평범함을 은밀하게 내세우고 실제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행복과 사치를 누릴 계획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계획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윤을 만난 지 100일이 되는 날.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정현은 얼마 전에 주문한 차를 수령하기 위해 아침부터 자동차 대리점을 찾았다. 최고급 사양을 원하는 최고 고객인 정현에게 직원들은 하나같이 깍듯했다. 차를 내오고 안부를 물어주며 그냥 앉아 있는 사이에 모든 복잡한 절차를 처리해주었다.
정현이 차에 오르자 앞을 막고 있던 거대한 유리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길을 터 주었다. 손을 흔들어주고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대리점을 뒤로하고 세단은 미끄러지듯 달려나갔다.
지윤을 만나기 전까지 혼자서 드라이브를 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 난데없이 차를 몰고 온 정현을 보며 그녀는 놀라고 기뻐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정현은 흐뭇했다.
차가 생긴 덕분에 데이트는 더 즐거웠고 쇼핑도 더 쉬워졌다. 어디라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더 너그러워지고 주위에는 온통 평화가 가득 찼다. 열린 창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지윤은 차에 대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도 가난하다면서 돈은 다 어디서 난 거냐고 물었다. 그런 물음이 있을 때마다 장학금 탄 돈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오늘은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물론 믿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나에게 요술램프 같은 수첩이 있다면 믿겠어?"
들고 있던 담배에서 재가 톡하고 떨어졌다. 지윤은 놀라는 듯 하다가 웃어버렸다.
"물어본 내가 바보지. . . 좋으시겠네요. 그런 수첩이 있다니."
웃어넘기는 지윤을 보고 정현은 더 이상 수첩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태리식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포도주를 마셨다. 대화는 늘 사랑스러웠고 푸근했다. 흠잡을 데라고는 어디에도 없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술을 한잔 더 마시고 싶다는 지윤의 말에 따라 집에 차를 주차하고 근처의 술집으로 향했다.
코냑의 부드러운 향기를 마시면서도 정현은 계획대로 되어간다는 생각에 조금은 미안했지만 가슴이 설鵖다. 큰 병 하나를 거의 다 비웠을 때 취기를 느끼며 준비했던 반지를 선물했다. 지윤은 감동 어린 얼굴을 하며 웃었다.
"나한테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런 때가 온다면 바보처럼 망치지 말고 잘 처신해야 한다고 상상하곤 했었지. 잘못하다가는 행운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날아가 버리는 수가 있거든. 너와 함께 그 행운을 누리고 싶어."
정현의 말에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잔을 비우고 일어난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수줍어하는 여자와 자꾸만 집안으로 이끄는 남자의 모습이 막 피어나려는 꽃을 연상시켰다.
사랑을 확인하기로 결심한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아주 길고 깊어서 헤어 나오지 못할 만큼 진한 입맞춤은 온몸으로 퍼져나가 긴 떨림을 만들었다. 알몸이 되어서도 서두르지 않은 둘은 서로를 느끼며 아주 오랜 시간동안 사랑을 나누었다.
마침내 완벽한 사랑을 이루어낸 연인은 조용히 몸을 뉘었고 손을 잡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숨소리만이 들려오던 고요가 한참 있은 후에 정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윤은 대답이 없었고 가늘고 긴 숨소리만이 이어졌다. 꿈에 빠진 모양이다. 정현은 소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씻고 돌아와서 다시 지윤의 옆에 누웠을 때에는 더 이상 각성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쉽게 잠이 들었다.
꿈을 꾼 것 같았지만 기억이 날 것 같지도 않았다. 점점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면서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뜬 그 순간부터 계속 잠을 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게다가 엄청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거세게 이어졌다.
간밤에 옆에서 잠들었던 지윤은 화장실에라도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섰을 때는 빈혈이 있는 것처럼 휘청했다. 방안에 존재하는 모든 서랍과 문들이 열려 있었고 수색을 당한 것처럼 내용물이 완벽하게 뒤집혀져 있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실도 마찬가지였다. 집 전체가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의 신발이 없었다. 떠나버린 것이다. 왜? 정현은 황급히 방으로 돌아와 의자를 받치고 형광등 위를 살폈다. 그리고 얼마 높지도 않은 그 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거기에 숨겨두었던 수첩이 사라진 것이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깨어난 지 몇 분만에 탈진상태가 된 정현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방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방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수첩이 책상 위에서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수첩이 아니라 사용한 몇 장을 찢어낸 것이었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사용한 면들이 뜯겨져 나와 있었다. 정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섰다. 거기에는 '이건 원래 내 거야!' 라고 지윤의 솜씨로 보이는 글씨가 크게 적혀 있었다. '그럴 리가? 나쁜 년.' 욕설이 쏟아졌지만 당장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망연자실한 정현은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바로 어제까지 사용했던 몇 장의 수첩을 쳐다보았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었다. 녹색의 표지를 열고 계획한 일들을 그곳에 적기만 하면, 단지 그렇게만 하면 어떤 일이라도 일어났다. 그런데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다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니.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만 젓고 있는 사이 두 눈이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어제였는데 거기에는 '100일', '첫날밤' 이라고 정현이 썼던 것 외에도 궁금하기만 했던 작은 글씨가 문제에서 해답으로 바뀐 채 빛나고 있었다. '다시 찾음.' 이라고 써있던 그 글씨체는 바로 오늘 지윤이 쓴 글씨와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머리가 좋은 여자였다.
저는 이 민 구(1975년생 4,5년 경력)
주소 충남 천안시 안서동 468-6 도솔빌리지 1-102호
전화 016-601-2789
추천0
- 이전글강은새-시(2004.3.18) 확인 04.11.15
- 다음글이민구-단편소설1(2004.3.16) 04.11.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