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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만-단편소설1(200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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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94회 작성일 04-11-15 21:12

본문

파리로 가는 편지


1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야. 일 년 중 달이 가장 크게 뜨는 날이지. 나는 일년에 한 번씩 소원을 빌어. 그 소원이 이루어 질 때까지. 이제 저 달을 보면서 세 번째 소원을 빌 차례야. 오늘 핸드폰을 켰는데 네 문자가 들어와 있었어. 문자를 보는 순간 네가 몇 번이나 나에게 전화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 오랫동안 전화기를 꺼 두었거든. 아마 겨울이 시작되고부터일  거야. 사람들을 만나기가 부쩍 겁이 났던 건. 그래서 책상 서랍 속에 핸드폰을 두고 다녔지. 핸드폰이 원래 족쇄 같은 데가 있잖아. 편리하다가도 벨소리가 울리면 영락없이 받아야 하는. 그래서 애인 사이에 핸드폰을 선물하는 것이 한 때 유행이었지. 바람 피지 말라고. 이 핸드폰도 네가 사준 거야. 우리가 찍었던 스티커 사진이 아직 베터리 위에 붙어 있어. 너는 노란 가발을 썼고 나는 파란 가발을 썼지. 진이는 긴 생머리를 하고. 내가 가운데 서서 어깨동무를 하는데 서로 얼굴을 내밀려 다투었잖아. 기억나니 대학로였는데. 스티커 사진을 찍는 것이 계면쩍다고 하였는데 너는 고집을 부렸지. 마지막 사진이 될 거라고. 그리고 나서 너는 제일 잘 나온 사진을 내 핸드폰 뒷면에다 붙였어. 하도 만진 탓일까? 이제는 스티커의 빛들도 낡고 선들마저 뭉개져서 우리 얼굴이 꼭 하나인 것 같아.
  이제 며칠 후면 신학기야. 내 책상을 쓸 새 선생님이 오신다고 해서 정리할 게 있나 하고 학교에 나왔어. 서랍 속에는 시시콜콜한 것들이 많았지. 여러 해 보관해온 교무수첩들하며 소풍 사진들. 시집 몇 권. 말라붙은 인주, 쓸모 없는 연습장들과 아무렇게나 흩어진 클립들. 버릴 것은 버리고 모아 둘 것은 모아 두려고 책상 위에 다 끄집어 내다가 편지 묶음들을 발견했어. 모양도 크기도 같은 하얀 봉투들이 투명 테이프에 양 허리를 감겨 조금의 틈도 없이 서로를 안고 있었지. 나는 그 허리를 끊어 잠깐 쉬게 한 후 가운데에 또 하얀 봉투를 하나 집어넣었어. 그리고는 처음의 모양으로 허리를 감았지. 오늘 내게 온 하얀 편지를 나는 읽지도 않고 똑같은 봉투들 속으로 감금해 버린 거야. 그러고 나니 갑자기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더라. 진이와 나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준 적 없었잖아.
  우리가 만난 것은 4월이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달하고도 며칠쯤 후지. 이곳은 다른 지방보다 더딘 봄이 시작되는 날이고 아이들은 아무렇게나 거짓말을 하고 돌아다녀도 되는 날이었어. 만우절이니까. 1교시부터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어. 나는 아이들을 찾으러 2층 복도를 돌아 다녔지. 혹시나 다른 반에 가서 섞여 있지 않나 하고 조심스럽게 다른 반 문을 열어 보기도 하면서. 교실에서 수업을 하던 아이들과 선생님은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내가 재미있는지 문을 여닫을 때마다 웃음소리를 냈어. 그 웃음소리가 나는 싫지 않았어. 매년 벌어지는 연례행사이기도 하였지만 아무래도 학교에 있는 모든 선생님들 중 내가 제일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내가 가장 어린 나이였으니까.
  2층 복도에 일렬로 늘어선 교실 어디에서도 우리 반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어. 마지막 교실은 맨 처음의 교실처럼 비어 있었지. 체육시간이었나 봐. 책상 위에는 교복이 놓여 있었거든. 어떤 것은 잘 개어져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고 지나가다가 누군가 스쳤는지 땅바닥에 나뒹구는 것들도 있었어. 그때 내가 무엇에 취했나봐. 나는 교실문을 닫고 들어가서 아무도 없는 남의 반 교실에 가만히 앉았지.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연초록의 커튼이 날리는 데, 날릴 때마다 연한 살결에 빛이 촘촘히 걸려 있는 모양이 드러났어. 마치 고래가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지.  뭍으로 올라온 고래의 숨. 허파를 오므렸다 펴면서 고래는 힘겨워 하는데 사람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러. 고래가 뭍으로 나오는 일은 드무니까. 텔레비전에서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은 흥분된 목소리였지만 뭍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고래의 숨겨진 상처를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어. 이해한다면 그렇게 얼굴이 밝지는 않았을 테니. 나는 고래가 헐떡거리는 모양을 상상하며 커튼이 부풀어오를 때마다 들숨을 쉬었어. 천천히 갈아 앉을 때는 날숨을 쉬고. 마치 내가 고래가 된 것처럼 흔들리는 커튼이 친근하게 느껴져서 창가로 다가가자 얇은 허파의 혈관 사이로 한 사람의 실루엣이 드러났지. 이제 막 교문을 들어서던 참이었어. 그땐 우리가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막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는 진입로를 지나 중앙 현관으로 향하던 그녀는 분명히 내 허파 속으로 걸어오고 있었어. 헐떡이던 바람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지.
  바람의 방향이 바뀌듯 나는 할아버지를 떠올렸어. 이상한 일이지. 목련처럼 하얀 젊은 여자를 보면서 온몸에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퍼질 대로 퍼진 늙은이를 생각하다니. 일천 구백 구십 삼 년 일흔 일곱의 나이로 돌아가셨던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낚시를 다니셨어. 네가 지금 서 있는 가포는 바로 할아버지와 내가 낚시를 하던 곳이지. 바다가 보고 싶었다고? 할아버지도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어. 할아버지가 바다를 보고 싶어 한 데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었어. 할아버지에겐 보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거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감히 티조차 낼 수 없었던 바다 건너로 가 버린 사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할머니는 4년 동안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지 않았어. 명절날만 되면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셨으니깐. 가족들은 교통이 복잡하네 하는 말을 주고받으며 보기 좋게 할머니의 편을 들었지만 실상 그것은 할머니가 가진 상처를 위장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어. 어느 날 할머니는 가족 누구도 몰래 나를 불렀지. 할아버지 산소에 가보자고. 실상은 혼자 가시고 싶은 거였는데 노환이 든 할머니가 그 길을 혼자 가기엔 무리였던 거야. 할머니가 할아버지처럼 일흔 일곱이 되던 날이었어. 세상은 온통 비 맞은 짚단 모양이었지. 무덤에 입혀 진 잔디는 누런 빛깔로 죽어가고 있었어. 할머니는 오래도록 아랫입술을 물며 볼을 움찔거리다가 정말 고우면서도 처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열 여섯 나이에 사랑을 했다오 나의 사람아 그러나 무정한 세월이 나를 데려 갔다오.’ 이렇게 시작된 노래의 선율을 따라 나는 할아버지가 낚시를 하며 뚜렷이 내 머릿속에 새겨준 한 여성을 떠올렸어. 할아버지의 첫사랑. 할아버지는 그 여인과 함께 일본으로 가려고 했지. 가포는 일본의 바다와 이어지는 곳이야. 가포를 곁에 둔 무학산에 오르면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일본의 어느 섬이 보인대. 진달래 꽃술처럼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 해무에 가려 또는 좋지 않은 나의 시력 때문에 나는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할아버지는 정확히 방향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한 곳을 응시했지. 방향을 알고 있지만 길떠나지 못하는 자의 심정을 할머니는 이해한 걸까? 20살이 갓 넘어 사랑만이 오직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하던 시절, 부둣가에서 할아버지를 부여잡았던 자신이 원망스럽다는 말씀을 하셨어. 젊은 날 앓았던 폐병이 그렇게 오래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작은 못이라도 가슴에 박힐 땐 아물지 않는 큰 상처를 남긴단다.’ 할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내게 그 말은 육십 년도 더 된 녹슨 못을 자신의 가슴속에서 뽑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할머니의 푸념처럼 들렸어. 아무리 사랑해도 차마 다 말 못하는 것이 살아가다 보면 생기나 봐. 가족들에겐 아예 못조차 없는 것처럼 할머니는 사셨거든.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것을 보면 왜 외로워지는 걸까. 할아버지와 함께 바라보던 바다와 섬들. 이렇게 소원을 빌고 있는 누런 달. 아이들이 사라진 교실에서 지켜보던 고래의 허파며 떠나간 연인의 소매. ‘그린 슬리브’의 음향을 들으며 교무실로 돌아 왔을 때 나는 이제 남의 허파를 막 찢고 들어와 숨을 고르는 한 마리 고래를 보았어. 어렸을 때 가졌던 내 첫 번째 소원은 아주 큰 낚싯대를 가지고 나가 고래를 잡는 거였지. 고래를 처음 본 것은 여섯 살 때 즘이야.  ‘백경’이란 영화에서. 그 영화를 보기 위해 동네 꼬마들이 다 모였지.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텔레비전을 가진 아이의 집으로. 빳빳한 잡지로 접어낸 네모딱지를 서너 장씩 쥐고서. 나는 태양빛이 반사될 때마다 내 눈을 시리게 만들든 딱지를 구할 수 없어서 신문지로 내 나이의 두 배만큼 딱지를 접어 냈어. 그러고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가 미안했지. 그때 신문은 잉크 상태가 좋지 않아 딱지를 접다보면 손길에 밀려 글씨들이 퍼져 나갔거든. 그러면 꼭 흑인 애들의 피부 같았어. 그 시절 우리가 보든 영화에서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노예이거나 죄인들이 대부분이었지. 그래서 나는 맨 뒤에 앉아 친구들의 머리와 머리 사이에 또는 어깨와 어깨 사이에 나의 시선을 아이들의 몸놀림에 따라 억지로 꽂아 넣었어. 다리 하나가 없는 ‘에이험’이란 사내가 큰 배를 타고  ‘모비 딕’을 잡으러 간다는 이야기 자체도 흥미가 있었지만 망망한 대해에서 큰 포말을 일으키며 뛰어 오르던 고래의 자태는 어린 내 가슴을 모두 빼앗고 말았지. 모든 것을 빼앗기고만 사람의 가슴엔 무엇이 남는지 너도 알지? 다른 것으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허구(虛溝). 그 속으로 진이가 들어온 거야.

2

  어제 지오다노에서 옷 구경을 했어. 연두색을 보면 나는 마음이 편안해져. 윈도우 너머로 서 있는 마네킹들은 모두 봄옷을 입고 있었지. 매장에 전시된 것들도 모두 밝은 색뿐이고. 사람들은 이상해. 아직 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표정에는 봄옷들을 사지 못해 안달이었거든. 나만 아직 겨울을 보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아직 겨울이 끝나려면 한 달은 훨씬 더 지나야 하고 또 꽃샘 추위라는 것도 남았잖아. 나는 좀 두터운 니트를 하나 살까하고 왔는데 괜한 사람이 되어 실컷 옷 구경만 하다 왔지.
  옷을 살 뻔하기도 했어. 내가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으니까 매장의 한 아가씨가 와서 내게 얇은 연두색 니트를 내밀어 주더군. 아주 잘 어울린다는 찬사와 함께 말이야. 아가씨는 혼자 옷을 사러온 나를 처음엔 좀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나봐. 사실 혼자 옷을 사러 나온 것은 처음이었어. 계절이 바뀌고 의정부에 한 번씩 나들이 할 때마다 꼭 네가 있었잖아. 네가 내 옷을 골라 주었잖아. 네가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떠났을 때는 진이가 곁에 있었거든. 아가씨가 내밀어 준 니트를 몸에 몇 번이나 대어 보아도 그 색깔이 정녕 내게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 색깔은 진이에게는 아주 잘 맞는 색이었어. 막 자란 어린 나무들의 겨드랑이 사이에서만 피어나는 연한 잎사귀의 빛. 그 빛이 마치 가포의 맑은 물처럼 일렁이더니 진이의 얼굴을 떠 올렸어. 진이는 내 뒷자리에 앉았지. 담당이 국사였거든. 지도 선생님과는 마주보고 있었지만 나와는 등을 진 자리였어. 몇 년만에 받게 된 교생 때문에 학교가 좀 술렁이었던 것 같아. 성인이 된 여자라고는 학교에 가정 선생님밖에 없었으니까. 가정 선생님은 가끔 남자들은 왜 나를 여자로 보지 않는 거냐 면서 농담을 하는 분이셨어. 남자들 틈에서 나이와 함께 여성으로의 매력을 상실했음을 곱게 인정하는 분이셨지. 그런 분의 입에서 단발마의 비명을 들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질투심이 도화선이 되어 자신의 생을 다시 불사르려는 몸부림을 보았다고 하면 거짓일까? 진이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모든 회식 자리에 불려 갔고 그때마다 교생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주의를 들어야 했어.
  우리가 처음 대화를 나눈 것은 1주쯤 지나고서의 일이야. 전날 밤에 문자 메시지가 들어 왔지. ‘마지막 기차가 지나가네요. 선생님도 저 기차소리가 들리나요.’ 나는 방에 누워 가만히 기차소리를 기다렸어. 한 시간에 한 번씩 기차가 지나가잖아. 육중한 차체가 휘어 감는 바람소리는 이제 자장가 소리처럼 들려. 처음엔 꽤나 성가셨는데 이제 마지막 경적 소리는 군대에서 불어대는 취침 나팔 소리 같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기차소리를 어디에서 듣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의 왼쪽에 위치한 센드 버튼을 눌렀지. 여자가 받더군. “선생님 죄송하지만 문자 메시지를 하나 더 보내는 중이거든요.” 아마도 플립을 열어 문자를 입력하는 중간에 내 전화를 받은 거였나 봐. “그래.” 나는 그냥 학생 중 한 명이겠거니 하고 잊어 버렸어. 다음 날 진이가 내 책상 옆을 지나는 길에 노트를 펼쳐 보였지. ‘선생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이를 쳐다 보았어. “문자 메시지.” 그제서야 나는 눈치를 채고 물었지. “두 번째 메시지는요?” “가지 않았나요?” “안 왔던데요.” 진이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서 있자 내가 말했어. “오늘밤에 다시 보내 주실 거죠?”

3

  달을 만지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아니? 원통에 있을 때도 달은 저렇게 밝았어. 우리가 원통에 가게 된 것은 속초를 가기 위해서였고 속초를 가게 된 것은 우리의 갑작스런 의기투합 때문이었지.
  교생 마지막 날을 사람들은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했어. 점심 모임을 누군가 제안했고 여러 사람들이 동조했지. 4월 마지막 날 그리고 토요일. 아마도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은 그 날 떨어지던 벚꽃이 아니었나 싶어. 승용차를 타고 포천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은 만개한 벚꽃들의 천지였지. 차창을 열고 손바닥을 펴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연분홍 꽃잎들이 바람을 타다가 차곡차곡 내려앉았어. 주먹을 쥐었다 다시 펴면 꽃잎은 또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지. 어떤 것은 너무도 가벼워서 오랫동안 하늘에 떠있는가 하면 바람이 내모는 데로 아주 멀리 날아가 버리는 것들도 있었어. 그래도 향기는 남았지. 그것은 여운 같은 거였어.  진이에게 4월은 20대의 마지막 봄이었어. 나머지 사람들은 듣지 못했겠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아마 꽃이 떨어지는 순간 ‘뚝뚝’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을 거야. ‘뚜욱뚝 뚜욱뚝’ 이것은 제 풀에 꺾이는 소리지. 싫어도 바람에 실려 갈 수밖에 없는 꽃의 숙명을 그녀도 알았던 거야. 우리는 따로 종로에서 만났지. 청하를 다섯 병이나 먹었어. 한 모금 마셔댈 때마다 그녀는 장대비처럼 길게 쏟아지던 꽃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 향기에 취해 시를 읊었어. “한 잔 먹세거려 또 한 잔 먹세거려 꽃 꺾어 셈하며 무진무진 먹세거려” 다음을 이어가려는 순간 진이가 말머리를 낚아 채었지.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 메고 가나 오색실 화려한 휘장에 만인이 울며 따라 가나,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회오리바람 불 때 누가 한잔 먹자할꼬” 그러다 마지막엔 젓가락을 아주 살짝 두드리며 함께 읊조렸지.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때야 뉘우친들 어쩌리.” 좀 웃겼어. 요즘 누가 시를 좋아하겠니. 게다가 몇 백년이나 된 아주 오래된 시를 휘황찬란한 종로 속에서, 이제 겨우 스물 아홉 번째 봄을 보내는 우리가 삶을 그토록 허무하게 느끼며 노래하고 있었으니. 죽기 전에 술로써 그 허무함을 잊어버리자고 했으니. 눈앞이 약간 가려지는 것 같았어. 희멀거래지는 것 같기도 하고. 진이의 얼굴이 옆으로 길게 퍼져나갔지. 끔뻑끔뻑 브러시로 창을 닦아 내자 분홍색 조명을 받은 것이 꽃처럼 그녀의 눈을 떠나 내 맘속에 푹하고 묻혀 버렸어. “바다에 갈래?” “언제?” “되도록 빨리. 꽃이 다 지기 전에.”
  차는 원통에서 멈추어 버렸어. 시동을 꺼뜨리고 난 다음부터는 아예 전원조차 들어오지 않았지. 견인차가 오기까지 우리는 오랫동안 하늘을 봤어. “너 비밀 있으면 하나 이야기해 볼래?” 나는 하마터면 네 이야기를 할 뻔했지. 지상에서는 어둠이 모든 쓸모 없는 빛을 잡아먹고 비로소 사물이 제 스스로의 빛을 은은히 내던 밤이었거든. 옷을 벗을 수도 있는 밤이었지. “그런데 비밀이라는 것은 정말 웃기는 것 같아.” 내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자 그녀가 말했어. “자신에게는 은밀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웃기는 것일 수 있거든. 내가 처음 가졌던 비밀은 저 달이야. 나는 일곱 살 때까지 정말 저 달이 나만 따라 다니는 줄 알았어. 내가 뛰면 저 달도 멀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 오고 내가 걸어가면 걸어오고. 이 신비스러운 일을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았는데 이런 밤이었을 거야. 언니랑 둘이서 비밀 교환을 하기로 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나이에 비밀이라고 말할 게 있나 싶지만 어쨌든 언니는 나보다 훨씬 영리한 사람이었어. 내 것만 훔쳐 갔으니. 그리고 내 것을 사정없이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교환이란 원래 비슷한 것끼리 하는 거잖아. 언니는 내게 먼저 이야기를 하게 했고 다 듣고 난 다음에는 내 비밀이 비밀의 가치가 없다고 했지. 끝내 나는 언니의 비밀을 듣지 못하고 바보 취급만 받았어.”
  견인차를 타고 우리는 인제까지 가야 했어. 주말이라 근처에서는 잘 곳이 없었거든. 거기가 원래 군인들의 도시잖아. 면회객들이 모두 방을 차지하고 있었지. 토요일은 주변 여인숙마저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어. 변두리였지만 우리가 간 곳도 방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잠시 어색해 있다가 씻고 불을 끄자 온 세상은 다시 어둠에 잠겼어. 그리고 나는 내 마음속에 떠오른 하나의 달을 보았지.
  달은 말이야 하나도 뜨겁지 않아. 해처럼 스스로 빛을 내지 않거든. 달에는 오르는 계단이 있기 때문에 신비로와. 누구나 그 계단을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열쇠가 있어야 하는데 열쇠는 달이 원할 때만 열쇠가 돼. 내가 뒤에서 안았을 때 그녀의 마른 몸매에서 느껴진 갈비뼈가 내 손자국이 되었던 것처럼. 그 밤 내내 나는 내 몸에서 계단을 이룬 갈비뼈들을 만져 보았어. 갈비뼈가 손자국이라고 하면 그건 누군가 나를 뒤에서 안았던 흔적이겠지? 나를 이렇게 세차게 끌어안았던 사람은 누구일까?

4

  네가 내 방에 왔던 날 기억하니? 그때도 너는 메시지를 보냈지.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나는 자율 학습 감독을 하고 있었어. 까만 운동장을 쳐다보며 한참 동안 망설였지. 내게 오겠다는 너를 내버려두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하고. 이제 막 동굴에서 나와 밝은 곳을 본 것처럼 세상은 멍했어. 어둠 속으로 다시 돌아가기 싫었지만 너에게도 매듭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었겠지. 그래서 더 묻지 않고 현관문을 연 거야.
  그 즈음 진이는 너에게 메일을 보내었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 싫다는 말에 너는 당신이 꿈꾸고 원하는 대로 맘껏 사랑하라고 했다지. 꽃같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 때에 청춘을 몸바쳐 해야 할 일이 많은 이십대에 당신이 진정 그렇게 전력투구를 해야할 만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서 당신에게 무엇이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너는 젊기에 사랑할 것이 너무나 많다고. 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했지. 네가 메일을 보내고 나서야 진이는 좀 진정이 되었던 것 같아. 그녀도 다른 여자들처럼 남자친구의 메일을 한 번 열어 보고 싶었나봐. 왜 허락도 없이 내 메일을  열었냐고 했을 때 ‘내 친구들은 다들 남자 친구 메일을 관리해 줘’ 라고 했거든. 그전까지 그녀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했는지 몰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문자를 보내고 답변이 없으면 전화를 해서 신경질을 부렸어. 저녁 회식을 나갔을 때도 어디냐 누구랑 있냐 물었고.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고. 그래도 내게 매일 그날그날의 일기와 가끔은 시들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붙여 보내는 사람이 너라는 것을, 너와 내가 어떤 관계였는지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니. 그녀는 너의 이름을 여자의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어. ‘주현’ 그렇게 남성미가 넘치는 이름은 아니잖아. 내가 그녀의 아우성과 내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겨우 입술을 떼어 말했을 때 그녀는 네가 남자라는 것을 믿지 않았어. “그럼 우리 만나자.”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만나야 했지.
  그날 너는 귀걸이를 하고 나왔지만 진이는 그것에 대해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어. 남자가 작은 귀걸이 하나쯤 달고 다니는 것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문화로 인정받는 분위기였으니. “어쩜 남자들끼리도 그렇게 편지를 써요?” “사랑하니까요.” 술에 취해 진이는 그게 어떤 의민지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어. “내가 어떻게 네 메일을 열 수 있었는지 아니?” 나는 네 귀에 달린 검은 별모양의 귀걸이가 낯설다고 생각하며 ‘몰라’ 라고 대답했어.  “데미안. 비밀번호를 알려면 주민등록 번호와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하잖아. 주민등록 번호야 아니까 문제없었지만 무슨 질문을 선택하고 무슨 답을 썼을까를 아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어. 하룻밤 꼴딱.” 진이는 모든 오해가 풀린 밝은 얼굴이었지. “아버지 이름은? 첫사랑 이름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뭐 이런 질문들이 있잖아. 하나씩 클릭을 해서 답을 만들어 보았어. 아쉬웠던 것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에 아무리 내 이름을 쳐 넣어도 에러가 나는 거야. 에러. 에러. 다른 질문을 찾다가 가장 좋아하는 책 하니까 네가 헤르만 헤세를 제일 좋아했다는 기억이 떠올랐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꽤나 유명한 책이잖아.” 너는 우리가 데미안과 징글레어 같은 사이라고 말했지. 나이 차이가 있지만 단단한 우정을 가졌다고. “선생님의 소원이 뭔지 아세요.” “내게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잖아. 그런 거 없는 줄 알았는데.” 진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어. “몽마르뜨 언덕에서 도보로 독일 국경을 넘어 헤르만 헤세 생가까지 가는 거예요. 이제 두 분이 가시면 되겠네요” 스티커 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가슴 한쪽이 연속적으로 실룩이는 것을 느꼈어. 네가 내 방에 누워 천장에 붙은 야광별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젊어서의 상처는 모두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너는 친구가 생겼다고 했어. 네 말에 나는 가졌던 죄책감을 씻어 버리려했지만 차마 껄끄러운 마음에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너를 바로 쳐다보지 못했지.

5

  저녁을 먹으러 나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어. 늦은 밤이 되었는데도. 그대로 퇴근을 해버렸나 봐. 오늘 숙직 당번이 방금 왔다 갔어. 세콤을 걸어야 한다고. 세콤을 걸어야 편히 잠들 수 있을 테니 나도 곧 나가봐야겠지.

  가포에서 고기를 잡으시던 할아버지는 일요일 아침마다 우리 집에 오셨어. 그 바닷가에 나는 잠시 고래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하였지만 할아버지가 건네던 어망을 쳐다보며 내 믿음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았지.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 고래는 태평양이나 대서양 같은 큰 바다에만 산다는 것을 배웠어.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잡아 온 터라 흔하지 않다는 것도. 할아버지의 집과 우리 집은 자전거로 불과 10분 거리라서 할아버지가 일요일마다 오시기는 하였지만 아버지를 보기 위해 집으로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의 배웅을 한 적이 없고. 어머니나 내가 할아버지의 물건을 건네 받고 나면 할아버지는 ‘다음에 오마’ 라고 한 후 뒤를 보지 않고 페달을 밟으셨지. 바다 기운에 약간 녹이 나서 돌아가는 페달은 규칙적으로 들려 오는 파도소리 같았어. 어머니는 급히 아침을 준비하러 들어갔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점이 될 때까지 자리에 서 있곤 했지. 배를 타고 섬을 떠날 때처럼 할아버지는 잠기어 갔어. ‘다음에 오마, 다음에 오마.............’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그것은 아쉬운 감정을 극복하게 하진 못했지.
  잊어버려야 할 것을 제 때에 잊어버리지 않으면 타인에게도 상처가 돼. 한 사내를 평생 바다에 나가게 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버리지 못한 것은 관습 때문이었어. 그 당시 유행했던 자유연애의 열풍을 할아버지도 타긴 하였지만 그리고 그것이 삶의 목표였기도 하였지만 그는 김해 김씨 57대손 장남이었지. 자식 하나 남기지 않고 어딜 가냐고 할머니가 매달렸을 때 그는 그 굴레를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어. 할머니 역시 함께 굴레를 쓰고 따로 굴러가지 않게 가슴에 못 하나를 박아 놓고 자신을 묶어버렸지. 그러면 잊어 버려야 했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되도록 빨리 버려야 했어. 가슴에 박힌 못의 흔적도 깨끗이 지워버려야 했어.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녹이 슨 페달을 계속 밟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거야. 마흔이 되도록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자식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늘 자신의 어머니 자리에 다른 사람을 채우고 살던 사내를 인정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늦게서야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어 왔다는 것을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너무 어색해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거야. 내가 더 이상 낚시를 따라다지지 않고부터 그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지. 젊은 날 그가 선택한 길의 결과였어.

6

  진이에게 갑작스런 결별을 선언한 것은 반짇고리 때문이었어. 그녀는 반짇고리에 들어 있는 것을 하나씩 꺼내어 탁자 위에 늘어 놓았지. “할머니가 주셨어. 내가 마지막이라고” 나는 처음엔 그 의미를 모르고 별스럽게 생긴 물건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어. 그녀가 설명을 시작했지. “이건 골무야” 광목을 여러 번 덧대어 만든 누런 엄지손가락 모양의 것을 가리켰어. “이건 자, 이건 가위, 이건 오색실”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을 그녀는 조목조목 짚어 갔지. 내가 장난스럽게 그녀의 말을 이어 받아 ‘이건 오색실, 이건 단추’라고 하자 ‘맞아! 맞아!’ 천진하게 웃더니 ‘그럼 이건 뭔지 아니?’ 라고 물었어. 오재미처럼 생긴 불룩한 물건을 나는 금방 알아보고 바늘을 하나 뽑아 들었지. 그러면서 그 물건의 허리쯤에 천천히 깊게 찔러 넣으면서 ‘바늘쌈지잖아’ 라고 했어. 나는 싱겁다는 듯이 한 번 웃어 보였어. “틀렸어,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그녀는 다시 허리춤에 꽂힌 바늘을 슥 뽑아내더니 오른쪽 머리앞부분에다 문질렀지. 조심스럽게 바느질하는 여인처럼. 그러고는 다시 제자리에다 조용히 찔러 넣었어. 내가 숨을 세 번쯤 고를 시간 동안. 그런데 그 세 번의 숨에 나는 자지러지는 줄 알았지. 바늘 끝이 내 심장을 파고드는 것 같았거든. 알 수 없는 공포에, 잠시 정신이 아찔한 찰나에 그녀는 ‘이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아니?’ 라고 물었어. 붉은색과 푸른색이 한데 어우러진 들판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모양을 한 바늘 쌈지 속에 그녀는 보물이라도 묻혀 있는 듯 속삭였지. “우리 할머니 머리카락.” 나는 더욱더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어 성급하게 물었어. “그래서?” “우리 집안에는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반짇고리를 선물하는 게 풍습이야. 할머니는 그것을 만들기 위해 매일 아침마다 자고 난 자리에서 머리카락을 모아. 왜냐하면 머리카락 속에 묻혀 있는 바늘은 녹이 나지 않으니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거 받아 줄래?” 그것을 얼른 받아 쥐지 않는 나를 보며 진이는 좀 당황했지. 나에게 이유를 물어왔지만 그 때에 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내가 내 속에서 감지한 변화를 어떻게 진이에게 설명할 수 있겠니.

7

  할아버지가 나가려 했던 그 넓은 바닷가에 사는 물고기 중에는 이상한 고기가 있어. 수컷 한 마리를 두고 암컷이 무리를 지어서 생활을 하다가 수컷이 늙거나 병들어서 죽게되면 암컷들 중 가장 지위가 높고 힘이 센 놈이 수컷으로 변해. 암컷에서 완벽한 수컷으로 변화하는데는 불과 하루 남짓한 시간이 걸리는데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나봐. 그 고기의 경우는 알 수 없지만 대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지.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으니까. 내가 진이를 사랑한 것은 너에게서 달아나기 위함이었어. 너와 나 사이는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들 것이라 생각했거든. 우리 같은 사람들 대개가 마치 죄를 짓고 목에 칼을 차고 동굴에 유폐된 것처럼 생활을 하잖아. 그게 나는 싫었어. 진이를 열심히 사랑하는 일이 네게서 완전히 떠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
  나를 잊으라고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라고 했을 때 진이는 시간을 더 달라고 했어. 우리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을 그러면 나아질 것이라고. 내가 완강하게 나오자 진이는 체념하듯이 ‘우리 친구로도 남을 수 없는 거니?’ 라고 물었지. 친구. 친구란 서로가 극복할 수 없는 단점을 발견할 때라야 가능하잖아. 그래야 기차의 선로처럼 평행선을 달리면서 멀어지지도 않고 더 이상 가까워지지도 않게 살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않다면 두 선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지. 진이에게는 내가 극복할 수 없는 단점이 없었거든. 나에겐 단점이 있지만 말할 수 없었고 내가 그것을 꾹꾹 숨기고 살다가 우연히 진이가 그것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때는 너무 늦을 거라 생각했어. 그때면 나는 내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가슴 어딘가에 녹슨 페달을 굴리며 바다로 나가고 있을 테니.  
  친구의 장례식에 내려 가지 못했다고? 가지 않은 편이 옳았어. 네가 아무리 친구의 초상 앞에서 목놓아 울어도 그의 부모는 너희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 오히려 너를 사랑한 자식을 더더욱 부끄럽게 생각할 테니.
  이제 바다를 보니 마음은 편안해졌니? 달빛아래 날아가는 새라도 한 마리 보이니? 보이지 않을 거야. 이제 그 바다는 고기 한 마리 살지 못할 정도로 오염되었으니. 밝은 달빛만이 더 없이 네 마음을 뺏어 가고 있겠지. 그러면 너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돌아올 테지만 해결 된 것은 하나도 없을 거야.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네게 풀리지 않는 깊은 앙금만 쌓여 갈 거야.
  어렸을 때 친구들의 어깨 뒤에 웅크리고 앉아 내가 바라보던 ‘모비 딕’은 찬연한 물빛과 함께 어우러져 ‘에이험’을 깊은 바다 속으로 끌고 가버렸어. 그 후 ‘에이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 어쩌면 지금도 어느 큰 바다에서 ‘모비 딕’은 가끔 허파로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잠깐 떠오를 테지만 또 운이 좋은 사람은 보게 될 테지만 ‘모비 딕’을 잡으려고 욕심을 내는 순간 누구든 저 깊은 바다 속으로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어. 아름다운 것은 마음을 빼앗는 게 그 속성이고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는 게 사람의 속성이거든. 그래서 나는 저 달을 보면서 지금 세 번째 소원을 빌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의 내 소원이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이루지 못하고 수많은 달을 지나 정월의 달을 보며 빌고 또 빌겠지. 달은 지금 겹겹이 쌓인 구름 속을 지나고 있어. 달무리를 지나 별똥별이 하나 선을 그으면서 사라졌어. 내가 지금 선택한 이 방향으로 가고 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겠지? 모든 것이 변해 있을 거야. 그래도 너만은 나와 함께 가 주겠지. 파리로.............

        

하상만(017-543-8494)
sihoa@hanmail.net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석미 아파트 102동 13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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