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 신인상
- 수상자
- 투고작
하상만-단편소설2(2004.3.30)
페이지 정보

본문
자장면집 김씨
그녀의 이름은 수정. 사람들은 크리스탈이라고 부른다.
이름만큼 고상한 취미를 가진 여자다. 독서와 사색. 참다운 인생의 가치가 그곳에 있다고 믿는다. 그녀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어린 왕자’. 들판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와 대화를 나눈다. 여우는 약속에 대해 말한다. 4시에 만나기로 하면 3시부터 즐거워지는 법이라고. 그것은 하나의 의례다.
수정은 수화기를 든다. 오늘은 더욱 자장면이 댕기는 날이다. 이 동네에서 자장면이 가장 맛있는 집은 제일 반점이다. 번호를 누르고 주문을 한다.
자장면집 김씨는 정확히 12시 50분에 전산실 앞에서 수정을 기다린다.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다. 그것은 고객을 철저하게 관리하여야 한다는 김씨 자신의 소신이기도 하지만 수정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기도 하다.
수정은 계단을 내려오다 김씨를 발견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인다. 그러면 김씨는 어깨를 약간 숙여 답례한다.
수정은 점심과 저녁을 밖에서 해결한다. 곱게 자라 손에 물 묻히기를 싫어한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대개 자장면을 먹는다. 저녁은 불규칙하다. 회식을 할 때도 있고 선생들끼리 모여 이리저리 군것질 거리를 하다 보면 배가 부르다.
자장면 하나를 달랑 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김씨를 보며 수정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문앞에 두고 가도 된다고 말한다. 김씨는 음식만큼은 함부로 바깥에 둘 수 있는 게 아니라며 거절한다. 그러면 자신의 책상 위에 놓고 가라고 한다. 그 역시 김씨는 거절한다. 주인 없는 곳에 함부로 들어가기가 민망하다는 이유에서다.
토요일 오후 시골학교 선생들은 일찍 학교를 비운다. 딱히 가야할 곳이 없는 수정은 토요일마다 혼자서 자장면을 먹는다. 비슷한 처지의 선생이 있긴 하지만 별로 부르고 싶지 않다.
수정은 학교 분위기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삼진종고에는 나이 든 선생이 많다. 그것은 이 학교가 지닌 장점 때문이다. 여기서 근무하는 선생들에게는 농어촌 점수라는 것이 부여된다. 거기에다가 이 학교를 거쳐 벽지 학교로 전근을 갈 수도 있다. 벽지학교에 가면 더 많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세월만 보내면 점수는 쌓여 간다. 점수는 승진할 때 요긴하게 쓰인다. 교직경력 20년 이상이 된 분들은 이것을 노리고 들어온다.
나이든 선생이 많다는 것이 불만의 전부는 아니다. 여자는 꽃과 같고 남자는 나무와 같다. 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윤기가 나고 멋있어 보인다. 그런 면에서 나이 든 일부 선생들은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수정에게 늘 친절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젊은 축에서는 그런 사내를 찾기가 힘들다. 섬세한 수정의 심리를 간파해낼 재간들이 없다. 금방 구워낸 질그릇 같다. 윤기가 하나도 없는.
수정은 두 가지 소원이 있다. 하나는 가슴 아픈 사랑을 해보는 것이다. 여기서 가슴이 아프다는 것은 그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든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완전히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경우는 요즘 흔치 않다. 의학 기술이 발달을 해서 사람들이 도통 죽을 줄 모른다. 생떽쥐 베리와 같은 비행기 조종사도 수정의 주변엔 없다. 죽을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수정에게는 거세되어 있는 것이다. 완전히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경우란 유부남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학교에 멋있어 보이는 유부남들이 더러 있다. 윤병장이 그렇고 이방원이 그렇다. 윤병장은 해병대를 나와서인지 리더쉽이 강해 보인다. 거칠기로 소문난 자동차과 아이들을 능숙하게 다룬다. 그가 거느린 반 아이들은 언제나 절도가 있다. 반면 이방원은 백만 불짜리 미소를 가진 사내다. 부드러운 남자다. 처음 수정이 부임했을 때 거울을 사기 위해 읍내로 나간 적이 있다. 돌아오는 길에 이방원을 만났다. 그는 EF 소나타의 윈도우를 내리며 수정에게 ‘집까지 데려다 줄까’ 하고 물었다. 그때 머금고 있던 미소를 수정은 잊지 못한다. 누구에게도 발견하지 못한 넉넉함과 편안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 이후 몇 번 이방원이 테니스 치는 장면을 수정은 훔쳐보았다. 가슴이 설레었다. 두 번째 소원은 시집가서 10년쯤 살다가 비 내리고 눈 내리는 날 커피를 마시다 남편 말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마련해 두는 일이다. 일종의 정신적 불륜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정신적 불륜도 이혼사유가 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수정은 남편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 들키지 않는 한 그것은 로맨스다. 그러자면 연애를 폼 나게 한 번 해야하는데 자신의 주변엔 그럴 남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젊은 남선생들이 몇 있지만 분위기라고는 눈을 씻어도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어안이가 좀 나아 보이긴 하지만.
어안이가 수정의 마음 속으로 들어 온 것은 노래방에서였다. 생일을 맞은 민수의 제안으로 노래방엘 갔다. 사실 민수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웬만하면 자신의 18번을 한 곡씩 가지고 있는데 민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없을 뿐더러 자신의 목소리가 미성이 아닌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강요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가 노래방을 제안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민수는 자율학습 감독을 하다 우연히 수정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수정은 늦게까지 성적 처리를 하고 있었다. 도학력 평가 채점 마무리를 하며 수정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늦게 학교에 남게 된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흥얼흥얼대던 노래에 스스로 심취한 수정은 목소리가 높아져 가는 줄 몰랐다. 스스로의 목소리에 도취되어 황홀할 정도였다. 부르는 노래는 ‘일상으로의 초대’. 후렴구는 ‘내게로 와줘, 나의 꿈속으로’ 였다. 특히 후렴구가 얇은 문을 흔들며 복도로 새어 나가는 것을 몰랐다.
노래의 후렴구는 무념하게 복도를 지나는 민수의 마음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마른 장작 같던 민수의 맘이 열 손가락 모두를 벌리며 쪼개졌다.
민수는 그날 밤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수정에게 마이크를 잡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안이도 노래를 듣고 있었다. 약간 술에 취해서인지 천장에 매달려 형형색색으로 돌아가는 조명들이 희멀거래졌다.
수정의 노래는 정말 대단했다. 유명한 성악가 조수미도 흉내낼 수 없는 천상의 목소리를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목석같은 남자들의 마음에 내리는 흥건한 비였다. 포근하고 촉촉한 단비. 어안이도 노래를 들으며 철옹성 같은 자신의 마음이 한 번에 허물어 지는 것을 느꼈다.
“이름이 수정? 그럼 크리스탈이네!”
어안이가 노래를 다 부른 수정에게 별명을 붙이자 모두들 적당하다며 동의를 했다.
“목소리도 완전히 크리스탈이네.”
옆에서 민수가 끼어들자 동의는 어떤 확신 같은 것으로 굳어졌다.
그때부터 수정은 크리스탈이라 불리어졌다.
수정은 자신의 별명이 싫지 않았다. 그 날부터 수정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어안이를 생각했다.
전화가 오는 시간은 오후 10시다. 대개 6시에 퇴근을 하고 이것저것 하다보면 8시가 된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끝내고 9시 뉴스를 본다. 뉴스가 끝나면 대략 9시 40분. 언제부턴가 수정은 이 전화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오늘은 토요일. 수정은 자장면을 먹고 전산실을 잠근 후 2시에 퇴근을 한다. 세탁물을 가지러 집에 들른 후 읍내로 나간다. 일주일에 한 번 세탁소에 들르지만 이것마저 수정은 귀찮다. 누군가 대신 해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그녀를 구제할 백마의 왕자는 아직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읍내를 지나다 수정은 제일반점 김씨와 마주친다. 이런 일은 자주 있다. 좁은 동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조그만 소문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수정은 쓸 데 없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 오늘도 모른척하며 그냥 지나친다. 그런데 매번 김씨는 수정을 저만치 가게 내버려두고는 오토바이를 몰고 수정에게로 와 어깨를 툭 친다. 수정은 놀란다. 혹시 자신을 지켜보는 이가 있지는 않나 걱정을 하며 주위를 살펴 본다. 어떤 시선도 수정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껄끄러운 인상을 지을 때마다 김씨는 변명처럼 말한다.
“태워드릴까요?”
수정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고객 관리 차원이니까 부담 안가지셔도 되는데.”
“댁의 자장면이 맛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이런 식으로 고객 관리를 하시지 않아도 되요.”
수정은 처음으로 대거리를 한다.
철가방을 앞에 두고 지저분한 잠바떼기를 걸친 김씨의 등뒤엔 아무래도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없다고 수정은 생각한다.
김씨는 인사를 하고 수정을 앞질러 달리기 시작한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달리는 소리가 쌩쌩하다.
김씨는 수정의 자장면에 여간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는 수정에게서 주문을 받기 전부터 자장면을 준비한다. 냉장고 맨 위층에 쌓아 둔 제일 좋은 고기를 꺼집어 낸다. 해동을 시켜서 살짝 볶은 다음 양파를 넣고 다시 볶는다. 장이 잘 섞이게 주걱으로 백 번은 족히 휘젓는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면발을 꺼집어 낸다. 면발 위에 잘 믹스된 장을 얹는다. 그리고 정확히 12시 50분 전산실에 도착한다. 2분쯤 지나 수정은 수업을 끝내고 돌아온다. 수정이 자장면을 먹는다. 가장 맛있을 때다. 자장면은 조리된 지 15분부터 본래의 맛을 잃기 시작한다. 배달하는 시간까지 합하여 수정의 입으로 자장면이 들어가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자장면 경력 10년. 이런 정성을 들였던 적이 없다. 자장면이 맛있다는 수정의 말은 김씨가 지금껏 기울인 노력에 충분한 보답이 된다.
김씨는 36살 노총각이다. 그의 생은 좀 파란만장하다. 이 지역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도 한 때 삼진종고 학생이었다. 학교를 그만 둔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정사정 때문이었다. 술집에서 일을 한 적도 있고 배를 잠깐 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적성에 맞는 것이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는 자장면집 배달원으로 취직을 했다. 이곳은 유난히 자장면집이 잘 되었다. 외박을 나오거나 휴가를 나온 군인들은 반드시 자장면집을 거쳐 갔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어깨너머로 자장면 만드는 법을 배워두었다. 요리사가 잠깐 병원에 입원한 것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주방을 들락날락거렸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돈을 모아 그는 독립했다. 배우지 못한 설움을 풀기 위해 검정고시도 보고 올해엔 방송통신대학에도 합격했다. 자수성가를 했다며 사람들은 칭찬이 대단했지만 아무래도 수정에게 비할 바는 아니라고 김씨는 생각했다. 얼마 전 사건은 그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어안이와 민수는 제일반점에 와서 팔보채를 시켜 놓고 술을 먹었다. 술이 거나하게 돌자 민수는 어안이에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민수는 32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느긋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친구들이 결혼을 많이 했다. 위기감을 느꼈다. 평생 노총각으로 늙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어안이는 민수를 위로했다. 결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라고. 또 요즘에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으니 나이에 쫓기지 말고 하고 싶을 때 하라고.
인륜지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김씨는 남일 같지 않아 카운터에 앉아 있으면서도 귀를 연신 열어 놓고 있었다. 그러다 수정의 이름을 들었다. 귀가 번뜩였다. 민수는 수정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이야기의 주 골격이었다. 어안이는 피식 한 번 웃고는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
“노래 부르는 것 봐라. 그게 어디 사람의 목소리니? 천사의 목소리지. 내가 거기에 필링이 꽂혔잖아.”
민수는 좀 취해서 자신의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었다.
“그렇지요. 눈감고 들으면 황홀할 정도지요.”
민수의 푸념을 듣는 김씨는 마음이 아팠다. 눈, 코, 입 똑바로 박히고 번듯한 직장을 가진 민수 같은 인간이 주변에서 계속 맴을 도는 한 자신이 수정의 마음에 들기는 더더욱 힘들다고 김씨는 생각했다. 화가 난 김에 김씨는 만두를 서비스로 제공했다. 그리고 간장에다가 겨자 쏘스를 듬뿍 뿌렸다. 술에 취해서 민수와 어안이는 간장색이 녹색빛을 짙게 띠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민수와 어안이가 차례로 만두를 먹다가 코를 잡고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수정은 매일 밤 10시에 자신의 집으로 전화를 거는 사람은 어안이라고 생각을 한다. 수정이 보기에 어안이는 좀체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전화를 해놓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은 그의 성격 탓이라 수정은 믿는다.
어안이를 지목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소문 때문이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은 이 동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어안이가 밤에 한 말을 어떤 쥐새끼가 물고 동네를 돌아다녔는지 민수와 나눈 대화가 속속들이 사람들 귀에 들어 앉았다. 수정은 자장면을 먹으며 소문을 들었다. 누군가 수정의 목소리에 어안이가 ‘황홀한’이라고 수식어를 붙였다고 말하자 수정은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토요일 오후는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 수정이 세탁물을 맡기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4시쯤이다. 수정은 특별히 하고 놀만한 게 없다. 도시라고 하면 친구들을 만나 술이라도 마실 수 있을 터이다. 술을 어떻게 마시던 신경 쓸 사람도 없다. 무수히 흘러 다니는 사람들의 줄기 속에 한 마리 고등어처럼 유영을 해대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친구도 없을 뿐더러 마음 놓고 술을 마셔댈 수조차 없다. 지느러미를 마음놓고 흔들라 치면 곧 암초에 부딪치고 만다. 거리엔 학생들과 학부모들뿐이다. 그들에게 헛점을 보였다간 맘놓고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다.
수정은 학교에서 읽던 책을 끄집어낸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친다. 길들인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길들인 만큼의 책임. 수정은 수화기를 한 번 본다. 오늘은 그가 책임을 지려고 할 것이다.
오늘 오전 수정의 컴퓨터로 이상한 쪽지가 날아 왔다.
‘눈을 감고 당신의 노래를 들을 때가 참 좋아요.’
수정은 곧 IP를 추적했다. 쪽지는 어안이의 컴퓨터에서 날아 왔다. 그리고 20분쯤 지나 어안이가 전산실 문을 열었다. 어안이는 그냥 지나는 길에 커피 생각이 났다고 말했다. 수정은 일어나서 커피포터의 ON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캐비넷을 열어 ‘카푸치노’를 꺼내었다.
수정이 ‘카푸치노’를 내놓는다는 것은 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가끔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전산실에 들른다. 유부남들이 주로 들러서 수정과 농담 따먹기를 한다. 유부남들은 수정이 타 주는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를 좋아한다기 보다 그것을 핑계삼아 새파란 처녀와 이야기 나누길 좋아한다. 한 때 잘나가던 시절의 연애담을 늘어 놓는다. 그리곤 끝에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내지는 20년만 젊었어도 수정같은 여자를 쫓아 다녔을 거라 칭찬을 한다. 칭찬의 값으로 수정은 커피를 미리 타낸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카푸치노’를 내놓는 것은 아니다. ‘맥심’ 커피는 2000원에 믹스가 20개 들어 있다. 하나를 타낼 때마다 100원씩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푸치노’는 2000원에 믹스가 5개 들어 있다. 거품이 많이 일어나는 고급 커피다. 삼진종고에서 이 커피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윤병장이 그렇고 이방원이 그렇다. 이 커피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수정의 입장에서 수정의 마음을 흔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만 수정은 꼭꼭 숨겨둔 ‘카푸치노’를 내 놓는다. 그러니까 전산실에 들렀을 때 수정이 쓴 ‘맥심’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은근히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커피가 맛있군요.”
“카푸치노예요.”
수정은 특별히 강조했다. 이 말의 의미를 어안이는 몰랐다.
“2년 차시라고요?”
나이 어린 수정이지만 어안이는 깍듯이 선배 대접을 했다.
“여기 있으니까 답답하지 않아요?”
“점점 견디기가 힘들어 지는 건 사실이에요.”
“토요일인데 뭐하세요?”
수정은 어떻게 대답할까 잠깐 망설였다. 수정은 이 말을 데이트 신청이라 여겼다.
“좀 쉬려고요. 지난 한 주일 성적 처리하느라 힘들었거든요.”
수정은 한 번 빼보았다.
“아, 그러세요.”
어안이는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안이와 수정은 가만히 커피잔만 내려보았다.
“몇 학번이세요?
어안이는 뻔히 아는 일을 수정에게 물어 보았다.
“제가 교직 경력은 짧아도 그쪽보다 선배인 것 같은데 우리말 놓고 지낼까요?”
수정은 어안이가 자신과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것이 별로 싫지 않았다. 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부터 반말이다. 너 쉬는 날 주로 뭐하니?”
수정은 독서라고 말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기념으로 내가 책 한 권 빌려주지.”
그러면서 놓고 간 것이 ‘어린 왕자’다. 어안이가 돌아가고 나서 수정은 책을 펼쳐 보았다. 책을 들고 주르륵 넘겨보는데 한 군데에 가서 갑자기 책이 기지개를 폈다. 어린 왕자가 여우와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을 수정은 10번도 넘게 되읽었다. 무슨 암시와 메시지를 수정은 느꼈다.
9시가 되자 수정은 텔레비젼을 켠다. 9시 뉴스가 귀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김씨 역시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다. 그는 도통 퇴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동네 자장면집은 대개 8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그러나 김씨네 제일 반점은 10시가 넘어도 좀체 불이 꺼지지 않는다. 밤손님을 받는 것도 아니다. 농촌총각들이 처녀를 구하지 못해 조선족 여인네들과 결혼을 많이 한다는 뉴스가 지나간다. 심지어 러시아 여성들과 혼인한 남자 이야기도 나온다. 조선족 여인 몇과 러시아 여성 몇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을 가버렸단다. 그들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무심한 김씨의 표정에 뭔가 굳은 결심이 보인다.
스포츠 뉴스마저 끝난다. 시간은 9시 59분 .............초
10, 9, 8, 7, 6, 5, 4, 3, 2, 1, 0
수정과 김씨는 동시에 카운트 다운을 센다.
김씨는 수화기를 들었고 수정의 집에 전화벨이 울린다.
수정은 수화기를 든다. 오늘따라 유난히 침묵이 깊다.
수정은 뭔가를 기대하며 열심히 수화기에 귀를 대고 있다. 한 남자의 숨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갈수록 수정은 불안해진다. 그가 오늘도 그냥 수화기를 내려 놓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사실 수정이 남자들에게 좀 새침맞게 굴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것 때문에 많은 남자들이 수정에게 접근을 했다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 수정은 남자에게 자신의 호락호락한 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양반은 추워도 곁불을 쪼이지 않듯 공주는 아무리 마음이 허해도 아무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오늘 어안이가 하고 간 말은 수정의 마음을 좀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어안이는 공주들이 대개 왕자와 결혼을 하지 못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유인 즉 이웃나라 왕자들은 주변에 여자들이 많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공주는 자신을 정말 공주 이상으로 떠 받들어 줄 사람을 내심 바라지만 왕자들은 자신들 주변에 여자가 넘쳐 나는 한 까다로운 공주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주는 결국 이웃나라 왕자가 아닌 자신의 곁에서 모든 희생을 감내해 내는 하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풍습이라고 했다.
“왕자들도 공주만큼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야. 사랑을 표현하고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지. 네가 기다리는 왕자도 그 중 한 사람일 거야.”
적당히 마음을 표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거절하지 말고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수정은 침묵 저 밑바닥에서 고민하고 있는 영혼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저기요. 매일 10시마다 제게 전화하시는 분이지요. 저는 당신 전화를 기다리며 9시 아니 8시부터 마음이 설레인답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지금 해주시겠어요. 당신의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요.”
김씨는 배달을 준비한다. 오늘 12시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래도 평상시와 똑같이 김씨는 제일 좋은 고기와 야채들을 집어 넣고 장을 만든다. 일이 여기까지 이른 바 이제는 이판사판이다. 끝이 어떻게 되든 토요일 밤에 다 내뱉지 못한 말을 꼭 해주고 싶다.
토요일 밤 김씨는 수정의 목소리에 용기를 얻어 자신의 목소리를 흘렸다.
“접니다.”
수화기 저쪽 너머에서 수정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어안이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수정은
“누구시죠?”
“저 김씨입니다.”
한숨을 쉬는 소리가 오고 갔다. 수정의 입장에서 보면 잔뜩 부푼 기대가 한 번에 무너지는 소리고 김씨의 입장에서 보면 앞으로 대화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걱정하는 소리였다.
“저 할 말이 있습니다.”
“하세요.”
“제가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사사...랑... 해도 될까요? 저한테 지금 말씀하신 거예요.”
수정이 듣기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감히 자신을 사랑한다니. 자장면집 김씨와의 사랑을 한 번도 수정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떠올려보면 끔찍했다.
“예, 그렇습니다.”
김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안돼요.”
수정의 목소리 역시 단호했다.
내친김에 김씨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기로 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나요?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
어이가 없어진 수정은
“그걸 몰라서 물어요?”
하고 수화기를 확 내려 버렸다.
김씨는 토요일 밤 내내 생각했다. 자신이 수정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심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사실을 당사자에게서 확인을 받은 꼴이고 보니 김씨는 더욱 비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죄인가. 김씨는 마치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쓴 듯 했다. 누명을 벗기 위해 김씨는 수정을 찾아가기로 했다.
월요일. 수정은 오전 내내 수업이 되지 않는다. 12시가 되어도 자장면집에 전화를 하지 않는다. 토요일 밤 황당한 일을 겪은 후로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다.
12시 50분. 수업이 끝나자 평상시와 같은 모습의 수정이 계단을 내려 온다. 전산실 앞에는 평상시와 같은 모습으로 김씨가 서 있다. 수정은 김씨를 보고 놀란다. 무시하고 전산실 문을 열고 들어 간다. 김씨가 따라 들어 간다.
“전 자장면 시킨 적 없는데요.”
앙칼진 목소리에도 김씨는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 댁이랑 할 말이 없어요.”
철가방을 내려 놓고 김씨는 소파에 앉는다. 수정은 그런 김씨를 무시한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할 말이 끝나면 조용히 돌아갈테니. 당신을 귀찮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위엄 있는 기세에 눌려 수정은 맞은 편 소파에 앉는다. 황당한 배달부라고 수정은 생각한다.
김씨는 차분히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한다.
“저는 죄가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물론 당신은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생각하겠죠. 하지만 당신이 내 사정을 들어주지 않는 한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이야기를 들어야하는 이유입니다. 연애를 기준으로 볼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끊임없이 연애를 잘 하는 쪽과 연애를 못하는 쪽입니다. 저는 연애를 잘 못하는 쪽에 포함이 됩니다. 연애를 못하는 이유는 또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사람의 마음을 두드릴 줄 모르는 사람과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두드릴 때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두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자신이 없거나 상대편을 너무 겁내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두드릴 때 문을 열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에 있어 너무 재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의 직업은 무엇인가. 돈은 얼마쯤 될까. 성격이 나와는 정말 맞는 것인가. 저 사람과 함께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은 것을 재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잴 수 없는 사람이지요. 대개 재기만 하다가 너무 지쳐서 연애를 하지 못합니다. 저는 어느 쪽이든 둘 다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끊임없이 연애를 잘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해 쓸 데 없는 생각을 하지 않지요. 누군가 마음에 들기 시작하면 자신의 마음을 순수하게 내어주지요. 계산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랑을 못하는 사람은 유죄입니다. 저 역시 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는데 있어 어떤 것도 재지 않았지만 저는 용기 없는 사람에 포함되었지요. 당신에게 걸어가서 마음의 문을 당당히 두드릴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무 것도 내세울게 없는 제가 당신에게 감히 사랑한다는 말을 던졌다는 사실 자체로 죄인으로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토요일 밤부터 저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지금껏 제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과 당신을 사랑한다는 저의 심정을 떳떳이 밝혔으니까요. 이제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언제 연애를 하고 지금껏 혼자 있는 것입니까? 만일 당신이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저는 분명히 당신이 유죄임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알려 드리는 이유는 내가 한 때 당신을 사랑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 수정의 앞에 김씨는 자장면을 올려 놓는다. 그리고 준비한 마지막 멘트를 읊어댄다.
“앞으로도 배달은 계속 될 것입니다. 당신이 전화를 하든 안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토요일 밤의 저처럼 당신이 스스로 당신 죄에서 벗어 날 때까지 배달은 계속될 것입니다.”
배달은 계속 될 것입니다. 배달은 계속 될 것입니다. 환청 같은 김씨의 말이 여러 번 수정의 귓속을 파고 든다. 그리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배달은 계속된다.
하상만(017-543-8494)
sihoa@hanmail.net
경기도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석미 아파트 102동 1301호
그녀의 이름은 수정. 사람들은 크리스탈이라고 부른다.
이름만큼 고상한 취미를 가진 여자다. 독서와 사색. 참다운 인생의 가치가 그곳에 있다고 믿는다. 그녀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어린 왕자’. 들판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와 대화를 나눈다. 여우는 약속에 대해 말한다. 4시에 만나기로 하면 3시부터 즐거워지는 법이라고. 그것은 하나의 의례다.
수정은 수화기를 든다. 오늘은 더욱 자장면이 댕기는 날이다. 이 동네에서 자장면이 가장 맛있는 집은 제일 반점이다. 번호를 누르고 주문을 한다.
자장면집 김씨는 정확히 12시 50분에 전산실 앞에서 수정을 기다린다.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다. 그것은 고객을 철저하게 관리하여야 한다는 김씨 자신의 소신이기도 하지만 수정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기도 하다.
수정은 계단을 내려오다 김씨를 발견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인다. 그러면 김씨는 어깨를 약간 숙여 답례한다.
수정은 점심과 저녁을 밖에서 해결한다. 곱게 자라 손에 물 묻히기를 싫어한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대개 자장면을 먹는다. 저녁은 불규칙하다. 회식을 할 때도 있고 선생들끼리 모여 이리저리 군것질 거리를 하다 보면 배가 부르다.
자장면 하나를 달랑 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김씨를 보며 수정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문앞에 두고 가도 된다고 말한다. 김씨는 음식만큼은 함부로 바깥에 둘 수 있는 게 아니라며 거절한다. 그러면 자신의 책상 위에 놓고 가라고 한다. 그 역시 김씨는 거절한다. 주인 없는 곳에 함부로 들어가기가 민망하다는 이유에서다.
토요일 오후 시골학교 선생들은 일찍 학교를 비운다. 딱히 가야할 곳이 없는 수정은 토요일마다 혼자서 자장면을 먹는다. 비슷한 처지의 선생이 있긴 하지만 별로 부르고 싶지 않다.
수정은 학교 분위기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삼진종고에는 나이 든 선생이 많다. 그것은 이 학교가 지닌 장점 때문이다. 여기서 근무하는 선생들에게는 농어촌 점수라는 것이 부여된다. 거기에다가 이 학교를 거쳐 벽지 학교로 전근을 갈 수도 있다. 벽지학교에 가면 더 많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세월만 보내면 점수는 쌓여 간다. 점수는 승진할 때 요긴하게 쓰인다. 교직경력 20년 이상이 된 분들은 이것을 노리고 들어온다.
나이든 선생이 많다는 것이 불만의 전부는 아니다. 여자는 꽃과 같고 남자는 나무와 같다. 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윤기가 나고 멋있어 보인다. 그런 면에서 나이 든 일부 선생들은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수정에게 늘 친절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젊은 축에서는 그런 사내를 찾기가 힘들다. 섬세한 수정의 심리를 간파해낼 재간들이 없다. 금방 구워낸 질그릇 같다. 윤기가 하나도 없는.
수정은 두 가지 소원이 있다. 하나는 가슴 아픈 사랑을 해보는 것이다. 여기서 가슴이 아프다는 것은 그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든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완전히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경우는 요즘 흔치 않다. 의학 기술이 발달을 해서 사람들이 도통 죽을 줄 모른다. 생떽쥐 베리와 같은 비행기 조종사도 수정의 주변엔 없다. 죽을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수정에게는 거세되어 있는 것이다. 완전히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경우란 유부남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학교에 멋있어 보이는 유부남들이 더러 있다. 윤병장이 그렇고 이방원이 그렇다. 윤병장은 해병대를 나와서인지 리더쉽이 강해 보인다. 거칠기로 소문난 자동차과 아이들을 능숙하게 다룬다. 그가 거느린 반 아이들은 언제나 절도가 있다. 반면 이방원은 백만 불짜리 미소를 가진 사내다. 부드러운 남자다. 처음 수정이 부임했을 때 거울을 사기 위해 읍내로 나간 적이 있다. 돌아오는 길에 이방원을 만났다. 그는 EF 소나타의 윈도우를 내리며 수정에게 ‘집까지 데려다 줄까’ 하고 물었다. 그때 머금고 있던 미소를 수정은 잊지 못한다. 누구에게도 발견하지 못한 넉넉함과 편안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 이후 몇 번 이방원이 테니스 치는 장면을 수정은 훔쳐보았다. 가슴이 설레었다. 두 번째 소원은 시집가서 10년쯤 살다가 비 내리고 눈 내리는 날 커피를 마시다 남편 말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마련해 두는 일이다. 일종의 정신적 불륜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정신적 불륜도 이혼사유가 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수정은 남편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 들키지 않는 한 그것은 로맨스다. 그러자면 연애를 폼 나게 한 번 해야하는데 자신의 주변엔 그럴 남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젊은 남선생들이 몇 있지만 분위기라고는 눈을 씻어도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어안이가 좀 나아 보이긴 하지만.
어안이가 수정의 마음 속으로 들어 온 것은 노래방에서였다. 생일을 맞은 민수의 제안으로 노래방엘 갔다. 사실 민수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웬만하면 자신의 18번을 한 곡씩 가지고 있는데 민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없을 뿐더러 자신의 목소리가 미성이 아닌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강요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가 노래방을 제안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민수는 자율학습 감독을 하다 우연히 수정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수정은 늦게까지 성적 처리를 하고 있었다. 도학력 평가 채점 마무리를 하며 수정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늦게 학교에 남게 된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흥얼흥얼대던 노래에 스스로 심취한 수정은 목소리가 높아져 가는 줄 몰랐다. 스스로의 목소리에 도취되어 황홀할 정도였다. 부르는 노래는 ‘일상으로의 초대’. 후렴구는 ‘내게로 와줘, 나의 꿈속으로’ 였다. 특히 후렴구가 얇은 문을 흔들며 복도로 새어 나가는 것을 몰랐다.
노래의 후렴구는 무념하게 복도를 지나는 민수의 마음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마른 장작 같던 민수의 맘이 열 손가락 모두를 벌리며 쪼개졌다.
민수는 그날 밤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수정에게 마이크를 잡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안이도 노래를 듣고 있었다. 약간 술에 취해서인지 천장에 매달려 형형색색으로 돌아가는 조명들이 희멀거래졌다.
수정의 노래는 정말 대단했다. 유명한 성악가 조수미도 흉내낼 수 없는 천상의 목소리를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목석같은 남자들의 마음에 내리는 흥건한 비였다. 포근하고 촉촉한 단비. 어안이도 노래를 들으며 철옹성 같은 자신의 마음이 한 번에 허물어 지는 것을 느꼈다.
“이름이 수정? 그럼 크리스탈이네!”
어안이가 노래를 다 부른 수정에게 별명을 붙이자 모두들 적당하다며 동의를 했다.
“목소리도 완전히 크리스탈이네.”
옆에서 민수가 끼어들자 동의는 어떤 확신 같은 것으로 굳어졌다.
그때부터 수정은 크리스탈이라 불리어졌다.
수정은 자신의 별명이 싫지 않았다. 그 날부터 수정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어안이를 생각했다.
전화가 오는 시간은 오후 10시다. 대개 6시에 퇴근을 하고 이것저것 하다보면 8시가 된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끝내고 9시 뉴스를 본다. 뉴스가 끝나면 대략 9시 40분. 언제부턴가 수정은 이 전화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오늘은 토요일. 수정은 자장면을 먹고 전산실을 잠근 후 2시에 퇴근을 한다. 세탁물을 가지러 집에 들른 후 읍내로 나간다. 일주일에 한 번 세탁소에 들르지만 이것마저 수정은 귀찮다. 누군가 대신 해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그녀를 구제할 백마의 왕자는 아직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읍내를 지나다 수정은 제일반점 김씨와 마주친다. 이런 일은 자주 있다. 좁은 동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조그만 소문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수정은 쓸 데 없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 오늘도 모른척하며 그냥 지나친다. 그런데 매번 김씨는 수정을 저만치 가게 내버려두고는 오토바이를 몰고 수정에게로 와 어깨를 툭 친다. 수정은 놀란다. 혹시 자신을 지켜보는 이가 있지는 않나 걱정을 하며 주위를 살펴 본다. 어떤 시선도 수정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껄끄러운 인상을 지을 때마다 김씨는 변명처럼 말한다.
“태워드릴까요?”
수정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고객 관리 차원이니까 부담 안가지셔도 되는데.”
“댁의 자장면이 맛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이런 식으로 고객 관리를 하시지 않아도 되요.”
수정은 처음으로 대거리를 한다.
철가방을 앞에 두고 지저분한 잠바떼기를 걸친 김씨의 등뒤엔 아무래도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없다고 수정은 생각한다.
김씨는 인사를 하고 수정을 앞질러 달리기 시작한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달리는 소리가 쌩쌩하다.
김씨는 수정의 자장면에 여간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는 수정에게서 주문을 받기 전부터 자장면을 준비한다. 냉장고 맨 위층에 쌓아 둔 제일 좋은 고기를 꺼집어 낸다. 해동을 시켜서 살짝 볶은 다음 양파를 넣고 다시 볶는다. 장이 잘 섞이게 주걱으로 백 번은 족히 휘젓는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면발을 꺼집어 낸다. 면발 위에 잘 믹스된 장을 얹는다. 그리고 정확히 12시 50분 전산실에 도착한다. 2분쯤 지나 수정은 수업을 끝내고 돌아온다. 수정이 자장면을 먹는다. 가장 맛있을 때다. 자장면은 조리된 지 15분부터 본래의 맛을 잃기 시작한다. 배달하는 시간까지 합하여 수정의 입으로 자장면이 들어가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자장면 경력 10년. 이런 정성을 들였던 적이 없다. 자장면이 맛있다는 수정의 말은 김씨가 지금껏 기울인 노력에 충분한 보답이 된다.
김씨는 36살 노총각이다. 그의 생은 좀 파란만장하다. 이 지역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도 한 때 삼진종고 학생이었다. 학교를 그만 둔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정사정 때문이었다. 술집에서 일을 한 적도 있고 배를 잠깐 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적성에 맞는 것이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는 자장면집 배달원으로 취직을 했다. 이곳은 유난히 자장면집이 잘 되었다. 외박을 나오거나 휴가를 나온 군인들은 반드시 자장면집을 거쳐 갔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어깨너머로 자장면 만드는 법을 배워두었다. 요리사가 잠깐 병원에 입원한 것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주방을 들락날락거렸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돈을 모아 그는 독립했다. 배우지 못한 설움을 풀기 위해 검정고시도 보고 올해엔 방송통신대학에도 합격했다. 자수성가를 했다며 사람들은 칭찬이 대단했지만 아무래도 수정에게 비할 바는 아니라고 김씨는 생각했다. 얼마 전 사건은 그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어안이와 민수는 제일반점에 와서 팔보채를 시켜 놓고 술을 먹었다. 술이 거나하게 돌자 민수는 어안이에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민수는 32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느긋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친구들이 결혼을 많이 했다. 위기감을 느꼈다. 평생 노총각으로 늙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어안이는 민수를 위로했다. 결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라고. 또 요즘에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으니 나이에 쫓기지 말고 하고 싶을 때 하라고.
인륜지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김씨는 남일 같지 않아 카운터에 앉아 있으면서도 귀를 연신 열어 놓고 있었다. 그러다 수정의 이름을 들었다. 귀가 번뜩였다. 민수는 수정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이야기의 주 골격이었다. 어안이는 피식 한 번 웃고는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
“노래 부르는 것 봐라. 그게 어디 사람의 목소리니? 천사의 목소리지. 내가 거기에 필링이 꽂혔잖아.”
민수는 좀 취해서 자신의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었다.
“그렇지요. 눈감고 들으면 황홀할 정도지요.”
민수의 푸념을 듣는 김씨는 마음이 아팠다. 눈, 코, 입 똑바로 박히고 번듯한 직장을 가진 민수 같은 인간이 주변에서 계속 맴을 도는 한 자신이 수정의 마음에 들기는 더더욱 힘들다고 김씨는 생각했다. 화가 난 김에 김씨는 만두를 서비스로 제공했다. 그리고 간장에다가 겨자 쏘스를 듬뿍 뿌렸다. 술에 취해서 민수와 어안이는 간장색이 녹색빛을 짙게 띠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민수와 어안이가 차례로 만두를 먹다가 코를 잡고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수정은 매일 밤 10시에 자신의 집으로 전화를 거는 사람은 어안이라고 생각을 한다. 수정이 보기에 어안이는 좀체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전화를 해놓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은 그의 성격 탓이라 수정은 믿는다.
어안이를 지목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소문 때문이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은 이 동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어안이가 밤에 한 말을 어떤 쥐새끼가 물고 동네를 돌아다녔는지 민수와 나눈 대화가 속속들이 사람들 귀에 들어 앉았다. 수정은 자장면을 먹으며 소문을 들었다. 누군가 수정의 목소리에 어안이가 ‘황홀한’이라고 수식어를 붙였다고 말하자 수정은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토요일 오후는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 수정이 세탁물을 맡기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4시쯤이다. 수정은 특별히 하고 놀만한 게 없다. 도시라고 하면 친구들을 만나 술이라도 마실 수 있을 터이다. 술을 어떻게 마시던 신경 쓸 사람도 없다. 무수히 흘러 다니는 사람들의 줄기 속에 한 마리 고등어처럼 유영을 해대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친구도 없을 뿐더러 마음 놓고 술을 마셔댈 수조차 없다. 지느러미를 마음놓고 흔들라 치면 곧 암초에 부딪치고 만다. 거리엔 학생들과 학부모들뿐이다. 그들에게 헛점을 보였다간 맘놓고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다.
수정은 학교에서 읽던 책을 끄집어낸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친다. 길들인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길들인 만큼의 책임. 수정은 수화기를 한 번 본다. 오늘은 그가 책임을 지려고 할 것이다.
오늘 오전 수정의 컴퓨터로 이상한 쪽지가 날아 왔다.
‘눈을 감고 당신의 노래를 들을 때가 참 좋아요.’
수정은 곧 IP를 추적했다. 쪽지는 어안이의 컴퓨터에서 날아 왔다. 그리고 20분쯤 지나 어안이가 전산실 문을 열었다. 어안이는 그냥 지나는 길에 커피 생각이 났다고 말했다. 수정은 일어나서 커피포터의 ON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캐비넷을 열어 ‘카푸치노’를 꺼내었다.
수정이 ‘카푸치노’를 내놓는다는 것은 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가끔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전산실에 들른다. 유부남들이 주로 들러서 수정과 농담 따먹기를 한다. 유부남들은 수정이 타 주는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를 좋아한다기 보다 그것을 핑계삼아 새파란 처녀와 이야기 나누길 좋아한다. 한 때 잘나가던 시절의 연애담을 늘어 놓는다. 그리곤 끝에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내지는 20년만 젊었어도 수정같은 여자를 쫓아 다녔을 거라 칭찬을 한다. 칭찬의 값으로 수정은 커피를 미리 타낸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카푸치노’를 내놓는 것은 아니다. ‘맥심’ 커피는 2000원에 믹스가 20개 들어 있다. 하나를 타낼 때마다 100원씩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푸치노’는 2000원에 믹스가 5개 들어 있다. 거품이 많이 일어나는 고급 커피다. 삼진종고에서 이 커피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윤병장이 그렇고 이방원이 그렇다. 이 커피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수정의 입장에서 수정의 마음을 흔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만 수정은 꼭꼭 숨겨둔 ‘카푸치노’를 내 놓는다. 그러니까 전산실에 들렀을 때 수정이 쓴 ‘맥심’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은근히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커피가 맛있군요.”
“카푸치노예요.”
수정은 특별히 강조했다. 이 말의 의미를 어안이는 몰랐다.
“2년 차시라고요?”
나이 어린 수정이지만 어안이는 깍듯이 선배 대접을 했다.
“여기 있으니까 답답하지 않아요?”
“점점 견디기가 힘들어 지는 건 사실이에요.”
“토요일인데 뭐하세요?”
수정은 어떻게 대답할까 잠깐 망설였다. 수정은 이 말을 데이트 신청이라 여겼다.
“좀 쉬려고요. 지난 한 주일 성적 처리하느라 힘들었거든요.”
수정은 한 번 빼보았다.
“아, 그러세요.”
어안이는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안이와 수정은 가만히 커피잔만 내려보았다.
“몇 학번이세요?
어안이는 뻔히 아는 일을 수정에게 물어 보았다.
“제가 교직 경력은 짧아도 그쪽보다 선배인 것 같은데 우리말 놓고 지낼까요?”
수정은 어안이가 자신과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것이 별로 싫지 않았다. 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부터 반말이다. 너 쉬는 날 주로 뭐하니?”
수정은 독서라고 말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기념으로 내가 책 한 권 빌려주지.”
그러면서 놓고 간 것이 ‘어린 왕자’다. 어안이가 돌아가고 나서 수정은 책을 펼쳐 보았다. 책을 들고 주르륵 넘겨보는데 한 군데에 가서 갑자기 책이 기지개를 폈다. 어린 왕자가 여우와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을 수정은 10번도 넘게 되읽었다. 무슨 암시와 메시지를 수정은 느꼈다.
9시가 되자 수정은 텔레비젼을 켠다. 9시 뉴스가 귀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김씨 역시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다. 그는 도통 퇴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동네 자장면집은 대개 8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그러나 김씨네 제일 반점은 10시가 넘어도 좀체 불이 꺼지지 않는다. 밤손님을 받는 것도 아니다. 농촌총각들이 처녀를 구하지 못해 조선족 여인네들과 결혼을 많이 한다는 뉴스가 지나간다. 심지어 러시아 여성들과 혼인한 남자 이야기도 나온다. 조선족 여인 몇과 러시아 여성 몇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을 가버렸단다. 그들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무심한 김씨의 표정에 뭔가 굳은 결심이 보인다.
스포츠 뉴스마저 끝난다. 시간은 9시 59분 .............초
10, 9, 8, 7, 6, 5, 4, 3, 2, 1, 0
수정과 김씨는 동시에 카운트 다운을 센다.
김씨는 수화기를 들었고 수정의 집에 전화벨이 울린다.
수정은 수화기를 든다. 오늘따라 유난히 침묵이 깊다.
수정은 뭔가를 기대하며 열심히 수화기에 귀를 대고 있다. 한 남자의 숨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갈수록 수정은 불안해진다. 그가 오늘도 그냥 수화기를 내려 놓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사실 수정이 남자들에게 좀 새침맞게 굴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것 때문에 많은 남자들이 수정에게 접근을 했다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 수정은 남자에게 자신의 호락호락한 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양반은 추워도 곁불을 쪼이지 않듯 공주는 아무리 마음이 허해도 아무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오늘 어안이가 하고 간 말은 수정의 마음을 좀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어안이는 공주들이 대개 왕자와 결혼을 하지 못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유인 즉 이웃나라 왕자들은 주변에 여자들이 많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공주는 자신을 정말 공주 이상으로 떠 받들어 줄 사람을 내심 바라지만 왕자들은 자신들 주변에 여자가 넘쳐 나는 한 까다로운 공주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주는 결국 이웃나라 왕자가 아닌 자신의 곁에서 모든 희생을 감내해 내는 하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풍습이라고 했다.
“왕자들도 공주만큼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야. 사랑을 표현하고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지. 네가 기다리는 왕자도 그 중 한 사람일 거야.”
적당히 마음을 표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거절하지 말고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수정은 침묵 저 밑바닥에서 고민하고 있는 영혼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저기요. 매일 10시마다 제게 전화하시는 분이지요. 저는 당신 전화를 기다리며 9시 아니 8시부터 마음이 설레인답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지금 해주시겠어요. 당신의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요.”
김씨는 배달을 준비한다. 오늘 12시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래도 평상시와 똑같이 김씨는 제일 좋은 고기와 야채들을 집어 넣고 장을 만든다. 일이 여기까지 이른 바 이제는 이판사판이다. 끝이 어떻게 되든 토요일 밤에 다 내뱉지 못한 말을 꼭 해주고 싶다.
토요일 밤 김씨는 수정의 목소리에 용기를 얻어 자신의 목소리를 흘렸다.
“접니다.”
수화기 저쪽 너머에서 수정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어안이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수정은
“누구시죠?”
“저 김씨입니다.”
한숨을 쉬는 소리가 오고 갔다. 수정의 입장에서 보면 잔뜩 부푼 기대가 한 번에 무너지는 소리고 김씨의 입장에서 보면 앞으로 대화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걱정하는 소리였다.
“저 할 말이 있습니다.”
“하세요.”
“제가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사사...랑... 해도 될까요? 저한테 지금 말씀하신 거예요.”
수정이 듣기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감히 자신을 사랑한다니. 자장면집 김씨와의 사랑을 한 번도 수정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떠올려보면 끔찍했다.
“예, 그렇습니다.”
김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안돼요.”
수정의 목소리 역시 단호했다.
내친김에 김씨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기로 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나요?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
어이가 없어진 수정은
“그걸 몰라서 물어요?”
하고 수화기를 확 내려 버렸다.
김씨는 토요일 밤 내내 생각했다. 자신이 수정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심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사실을 당사자에게서 확인을 받은 꼴이고 보니 김씨는 더욱 비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죄인가. 김씨는 마치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쓴 듯 했다. 누명을 벗기 위해 김씨는 수정을 찾아가기로 했다.
월요일. 수정은 오전 내내 수업이 되지 않는다. 12시가 되어도 자장면집에 전화를 하지 않는다. 토요일 밤 황당한 일을 겪은 후로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다.
12시 50분. 수업이 끝나자 평상시와 같은 모습의 수정이 계단을 내려 온다. 전산실 앞에는 평상시와 같은 모습으로 김씨가 서 있다. 수정은 김씨를 보고 놀란다. 무시하고 전산실 문을 열고 들어 간다. 김씨가 따라 들어 간다.
“전 자장면 시킨 적 없는데요.”
앙칼진 목소리에도 김씨는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 댁이랑 할 말이 없어요.”
철가방을 내려 놓고 김씨는 소파에 앉는다. 수정은 그런 김씨를 무시한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할 말이 끝나면 조용히 돌아갈테니. 당신을 귀찮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위엄 있는 기세에 눌려 수정은 맞은 편 소파에 앉는다. 황당한 배달부라고 수정은 생각한다.
김씨는 차분히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한다.
“저는 죄가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물론 당신은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생각하겠죠. 하지만 당신이 내 사정을 들어주지 않는 한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이야기를 들어야하는 이유입니다. 연애를 기준으로 볼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끊임없이 연애를 잘 하는 쪽과 연애를 못하는 쪽입니다. 저는 연애를 잘 못하는 쪽에 포함이 됩니다. 연애를 못하는 이유는 또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사람의 마음을 두드릴 줄 모르는 사람과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두드릴 때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두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자신이 없거나 상대편을 너무 겁내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두드릴 때 문을 열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에 있어 너무 재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의 직업은 무엇인가. 돈은 얼마쯤 될까. 성격이 나와는 정말 맞는 것인가. 저 사람과 함께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은 것을 재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잴 수 없는 사람이지요. 대개 재기만 하다가 너무 지쳐서 연애를 하지 못합니다. 저는 어느 쪽이든 둘 다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끊임없이 연애를 잘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해 쓸 데 없는 생각을 하지 않지요. 누군가 마음에 들기 시작하면 자신의 마음을 순수하게 내어주지요. 계산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랑을 못하는 사람은 유죄입니다. 저 역시 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는데 있어 어떤 것도 재지 않았지만 저는 용기 없는 사람에 포함되었지요. 당신에게 걸어가서 마음의 문을 당당히 두드릴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무 것도 내세울게 없는 제가 당신에게 감히 사랑한다는 말을 던졌다는 사실 자체로 죄인으로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토요일 밤부터 저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지금껏 제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과 당신을 사랑한다는 저의 심정을 떳떳이 밝혔으니까요. 이제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언제 연애를 하고 지금껏 혼자 있는 것입니까? 만일 당신이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저는 분명히 당신이 유죄임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알려 드리는 이유는 내가 한 때 당신을 사랑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 수정의 앞에 김씨는 자장면을 올려 놓는다. 그리고 준비한 마지막 멘트를 읊어댄다.
“앞으로도 배달은 계속 될 것입니다. 당신이 전화를 하든 안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토요일 밤의 저처럼 당신이 스스로 당신 죄에서 벗어 날 때까지 배달은 계속될 것입니다.”
배달은 계속 될 것입니다. 배달은 계속 될 것입니다. 환청 같은 김씨의 말이 여러 번 수정의 귓속을 파고 든다. 그리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배달은 계속된다.
하상만(017-543-8494)
sihoa@hanmail.net
경기도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석미 아파트 102동 1301호
추천0
- 이전글노차돌-시(2004.4.8) 04.11.15
- 다음글하상만-단편소설1(2004.3.30) 04.11.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