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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화-수필(200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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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73회 작성일 04-11-15 20:36

본문

심의 대상 아님
손가락 외


얼마 전부터 내 손가락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프다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나 피부가 남들보다 많이 건조한 나는 늘 환절기나 겨울철이 되면 한바탕 고생을 치르고는 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건조증이라는 불청객이 내 손에 찾아 온 것이다. 으레 치르는 행사려니 넘기려고 했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바셀린을 바르고 자도 어김없이 손이 쓰리고 아팠다. 특히 왼손의 넷째 손가락과 오른손의 가운데 손가락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손가락 두 개 아픈 것 때문에 병원을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 그냥 두고보기로 했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보내며 잊고 지내던 중 급히 메모할 것이 있어 펜을 쥐고 쓰려고 하니 손가락이 퉁퉁 부어 펜이 닿기만 해도 통증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의 왼쪽부분이 빨갛게 달아올라 둥그렇게 부어 있었고 만져보니 열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왼손의 넷째 손가락은 손톱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당장 메모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니 답답해졌다. 물론 컴퓨터 워드를 이용하면 소소한 리포트나 과제물을 처리할 수 있으니 문제가 없지만 아무래도 공부를 할 때는 그게 아니었다. 항상 하던 버릇처럼 줄을 긋거나 써가며 공부를 하지 못하니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또 항상 주의한다고 하는데 하필이면 그 퉁퉁 부은 부위가 옷깃에도 스치고 모서리에도 부딪히고는 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이 손가락이 도대체 왜 이런가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까부터 같은 페이지를 읽고 있지만 손가락의 통증이 상당해서 제대로 읽히지가 않는 것이다.
시간은 꽤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병원은 문을 닫은 지 오래이다. 온통 신경이 손가락에 쏠려 있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만 이 것 때문에 지금 병원에 가면 이 나라에서는 응급환자에 상당하는 병원비를 내어야 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하필이면 시험기간에 상태가 심해지는 걸 보니 원망스러웠다. 나는 잠시 쉬는 셈치고 책상에 앉아 가만히 펜을 쥐어 보았다.  익숙한 이 촉감. 오히려 펜이라도 쥐고 있으니 초조함이 덜했고 시험기간에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조금 덜어주고 있었다. 살살 줄을 그어 보았다. 역시 찌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나는 그대로 힘을 주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펜을 쥘 때 가운데 손가락에 가장 힘이 들어간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한번 펜을 쥐어보면 알 것이다. 둘째와 엄지손가락이 펜에 들이는 힘을 고스란히 가운데 손가락이 지탱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또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하다가 그 부분이 평소의 기능을 하지 못할 때가 되어야 비로소 그 부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느끼게 되는 것인지.
공부를 많이 하면 엄지손가락에 흔히 말하는 굳은살이 베기지만 -어렸을 때는 친구들끼리 이 엄지손가락의 굳은살을 보고 우등생을 판별했었다- 그 굳은살이 베기는 동안 들어간 힘을 그대로 셋째손가락이 받는 것이다. 또 그 부분을 검지손가락은 아래로 내리누른다. 이 때문에 가운데 손가락은 이중고를 겪는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회사에서는 모험과 위험을 감수하는 동료직원일 수도 있고 가족에서는 그 존재가 어머니일 수도 있다. 또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는 나를 비롯한 전 가족원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버릴 수 있는 강아지 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러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존재가 사라지거나 그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가 겪는 불편과 어색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청명다도학원(淸明茶道學院)


겨울이었지만 산까지 오르기는나는 얼마 전에 다도강습을 수료했다. 종교단체에서 여는 저렴한 다도강습에 참여한 것인데 전에부터 관심이 많았던 터라 꽤 즐겁게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는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지방의 한 절에서 청명다도(淸明茶道)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좋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꽤 힘들었고 몸이 다소 약한 편인 나는 거친 산세가 부담되어서 다른 사람보다 많이 뒤쳐졌다. 그때 우리를 마중 나온 나이가 지긋한 스님이 껄껄 웃으시며 저 위에만 올라가면 금방 인데 여기까지 온 게 헛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라고 하시며 줄곧 함께 걸어주셨다.
그렇게 쉬다 걷다를 반복해서 도착한 작은 절. 난 도착하자마자 별채의 마당에 누워버렸고 낯선 이방인의 다소 예의 없다 싶을 행동에도 싫은 내색 없이 웃어주시던 스님들의 얼굴도 생각이 난다.
불교신자였던 다른 사람들은 법당에 들어 가 절을 올리고 불교신자가 아닌 몇 명은 돌계단에 앉아 있다가 마중 나오신 노스님과 함께 작은 방에 들어가 다도를 즐기기로 했다. 방주 (다도에서 주인을 뜻한다) 한 명에 손님 세 분이 기본형식인데 인원은 딱 맞았다. 한 아주머니가 방주가 되기로 했고 스님이 주빈(가장 귀한 손님) 선빈(형식상 서열이 주빈 다음)은 30대 화가 분, 말빈(마지막 서열)은 그 중 어린 나였다.  
엄숙한 분위기였다. 그 동안의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방주의 손놀림은 약간 긴장하고 있었고 더불어 약간 피곤하고 나른했던 내 정신도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물을 물 식힘 그릇(큼직한 대접)에 부은 후 다시 다관(일종의 주전자)에 붓는다. 이 다관 속의 물은 각각의 잔에 부어지고 이는 차가운 잔을 차를 마시기 전에 따뜻하게 해 두기 위한 것이다. 차 가루를 덜어 다관에 넣은 뒤 다시 한번 물을 물식힘그릇에 넣어 온도를 조절한 뒤 이 물을 차가루가 든 다관에 붓는다. 이렇게 물식힘그릇을 거친 물은 적당한 온도가 되어 우러나게 된다. 우러나는 동안 미리 물을 담아놓은 잔을 살살 시계방향으로 흔들어준다.
그리고 약 1분 30여 초 정도 우려낸 후 이 물을 다시 물식힘그릇에 붓는데 이것은 온도를 맞추려는 목적보다는 농도를 균일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그릇의 물을 각각의 잔에 따르고 방주가 손님에게 권하는 것이다.
복잡하고 바쁜 시대에 있어서는 비효율적인 예절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이 작은 하나 하나의 손놀림과 과정에 우리 선조 들의 지혜와 풍류가 담겨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기를 만드는 도공의 마음가짐에서부터 다실의 배치와 가마의 위치까지 태극의 원리와 우주삼라만상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 행복한 순간!
비록 방금 만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엄숙하고 부드러운 시간 속에서 떫으면서도 달콤한 차를 함께 마신다면 10년을 함께 한 것처럼 친근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 앞자리에서 차를 드시는 노스님의 희끗한 눈썹을 바라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톨스토이는 말한다. <가장 중요한 사업은 사랑하는 일이다. 지금 가장 소중한 사람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다.> 라고. 과거, 현재, 미래. 이 중에서 과거와 미래는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현재만큼은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놓여진 가능성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니 가족도 애인도 지금 내 앞에 없다면 그건 미래나 과거의 일이라는 논리이다.
또 일기일회라는 말도 있다. 일생에 한번뿐인 인연이라는 말인데 다도의 정신을 한마디로 집약시킨 말이라고 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일생에 단 한번밖에 만나지 못하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생각하면 그 만큼 더 정성스럽게 대하게 된다는 뜻일 게다. 바로 다도의 정신이다. 비단 다도에만 국한시킬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이러한 다도의 정신을 갖고 사람들을 대한하면 인간사의 갈증이라던지 울분 같은 것은 차 한잔에 씻어내고 차 한잔에 삼켜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처마 밑의 풍경 소리는 고요하고 바람은 열려진 문을 지나 내 머리 내 심장 내 발끝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했다. 방주가 다시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흡사 폭포소리 같다. 모든 것은 씻겨내는 몸짓이다. 하하,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난다. 다도를 좋아해서 배웠기에 부담은 없었지만 쉬지는 않았다. 바쁜 도시생활. 실용이나 능률이니 하는 것들에 익숙해진 내게 가끔은 이러한 돌아가는 방식. 느리게 사는 방식이 전적으로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조상들의 전통을 배운다는 마음이었지 지금 이 순간처럼 다도가 내가 무슨 의미를 주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하였다. 깨달은 것처럼 자꾸만 크게 웃고 싶다. 그런 내 표정을 이해했는지 노스님은 숙연한 다도의 분위기를 깨며 크게 웃으셨다. 나도 함께 웃었다. 후련하다. 방주는 멍히 우리를 바라보다가 마지막 차를 우려내기 시작하셨다.
이제 다시 가을이 오고 있다. 두터운 옷과 헤어져 있는 벗. 첫사랑. 그리운 은사님. 가슴이 아파 차마 꺼내지 못하는 이름들도 다시 한번 내 앞에 섰다. 이러한 때 은은한 미소로 나를 반기던 벗에게 그를 닮은 차 한잔을 대접하고 싶다.
서로 마주앉아 몇 시간이고 말없이 대화하고 싶다. 그 어떠한 입에 발린 형식적인 대화는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앞에 앉아 있을 사람에게 귀를 열고 마음의 문을 열고자 한다. 그가 바로 나의 현재일 테니까.



야학에서


얼마 전 짬을 내어 야학에서 국사(國史)를 가르쳤던 적이 있었다. 없는 실력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고 나에게는 더 없이 보람 있는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담 없이 하자!
그렇게 마음먹었건만 전날 밤에는 텍스트 준비에 밤을 새다시피 했고 침대에 누운 후에도 몇 시간을 뒤척거리다 교단에 섰다.
첫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끝내고 나니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고 역시 가르치는 건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가 정말 수업을 하긴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손에 묻은 하얀 백묵 흔적은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나를 기쁘게 했었다.
진땀나던 첫 수업이 지나고 시간은 흘러 바람은 어느덧 여름과 가을의 어귀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그때는 시선처리(?)도 제법 자연스러워지고 눈을 바라보며 얘기하거나 학생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도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내 눈에 유독 학구열이 대단한 아주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야학의 특성상 낮에는 고된 생업에 종사하시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업을 받는 분들이 많기에 꾸벅꾸벅 조는 분들도 계시지만 이 분은 적어도 내가 수업하는 시간에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다른 분들에게도 물어 보았더니 다들 그 분이 남들보다 열심히 하는 분이라며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항상 5분 먼저 도착해서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면서 슬그머니 말이라도 걸어볼까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내가 대 놓고 말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용기가 없어서 그냥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라고만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그러던 중 사람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아주머니에 대해서 듣게 되었는데 사실인 즉 그 아주머니의 아들이 음식점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고 지금 뇌사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적잖이 놀랐다. 비록 말 한마디 해 본적은 없지만 항상 밝은 모습이었기에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분이 말하길 자기 아들이 깨어나고 다 나으면 하반신 마비로 움직이는 게 불편 할 테니 본인이 대신 가르치겠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자신도 처음 배우는 것들이라 가르치기가 힘들어도 도움이 되어 줄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야학에 등록하고 열심히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일종의 주문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분은 자신의 아들이 반드시 깨어날 테고 그 날은 반드시 오기에 미리 자신이 공부를 해 둬야 한다는. 그러니까 일종의 완벽한 미래를 가정하고 그 틀에 모든 것이 맞추어 지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후로 수업시간만 되면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아주머니에게 더 눈길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분도 내가 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내가 야학을 그만두던 날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손수 만든 빵을 건네 줘 나를 고마움에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낮에는 아들의 수발을 하며 틈틈이 부업도 하고 밤에는 정말 없는 시간을 쪼개 공부를 하는 분이 나를 위해서 이 빵은 또 언제 만들었을지 생각하니 눈물까지 핑 돌았다. 새벽에 감기는 눈을 비벼가며 빵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여태껏 그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부족한 것 많은 내가 이렇게 귀한 선물을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기도 해서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었다.
그 후로 몇 개월이 더 지나 그분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하고 야학에서 함께 하던 분들이 보고 싶어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잠깐 들러 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나 대신 국사를 가르치시는 다른 대학생 교사에게 이러저러한 분이 계신데 아시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 분은 잘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의외다 싶어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 분은 야학을 그만두셨다는 말밖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섭섭함이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으나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했다.
나는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실연을 당한 사람처럼 하염없었다.
어느 쪽일까?
나는 몇 가지 상황들을 추려 보았으나 이내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 분의 주소를 수소문하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좋은 상황이라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라면? 내가 무어라고 위로의 말을 해 드릴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자신이 없었다. 나는 단지 그 분의 빛나는 눈동자 살아있는 표정이 보고 싶은 것이다.  
그 분의 아들은 필시 깨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밤낮 없이 일을 해야 할 테고 그래서 야학을 그만 둘 것일 게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틀림없다.
또 나는 그 날이 언제가 되었건 그 분을 꼭 한번은 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꼭 한번은 찾아뵈리라.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무엇이 두려운 건지 나조차 알 수 없지만.
지난 여름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변변치 않던 그 뜨거운 교실 안에서 공부와 앎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던 때가 기억난다. 나이도 하는 일도 제각각이었지만 우리는 영혼이 통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직업. 우리의 인생. 우리의 가치관. 항상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길은 열려 있듯이 한 마음으로 닫혀져 있는 문을 열고 또 선택하기 위해 힘차게 노를 저어 나아간 것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여름의 습기는 우리의 이마에 등에 땀방울을 맺히게 했고 그 땀방울들에 핑그르르 내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아 힘들다는 생각마저도 죄스러웠다.
이제 광화문 거리에는 제법 쌀쌀한 바람마저 불고 나무는 마지막 청춘을 떨구려 하고 있다. 지난 여름 우리들의 땀방울을 추억하듯이.

저는 박 영화(朴榮華) 이고요 1984년생 입니다.
연락처는 011-9039-1181 입니다
제가 첨부하는 작품은 최근에 쓴 것은 아니고 약 1년전~올해초봄 까지 쓴 것들입니다.
연말이라서 바쁘실테지만 꼭 읽고 연락주세요..^^
물론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지만.. 2004년 1월 3일 오전 12시 정도에는 꼭 연락을 주세요
거절이라면 그냥 메일로 다음 기회를.. 이렇게 보내주셔도 됩니다
읽어줄 사람이 없어서 어떠한 평이라도 듣고 싶습니다.
또 리토피아에 등단하게 되면 본지에 게재할 기회를 주는걸로 알고 있는데 부족하다면 (조건부로) 라는 것도 좋고요
아무튼 어떠한 것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럼 2003년 마무리 잘하시고 꼭 2004년 1월3일 오전 12시 안에는 연락을 주세요..
말씀드렸듯이 거절이라도 단 한줄의 메일이라도 좋으니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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