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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아-단편소설1(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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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ancholy (멜랑콜리)
꽁무니에 반짝이는 반딧불을 켜고 여름이면 제 짝을 찾아 밤하늘을 비행하는 반딧불이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그들은 서로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이 제게 또 하나의 삶을 허락해주신다면 그때는 반딧불이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당신을 행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작은 반딧불이처럼 깜깜한 어둠 속에도 밝은 빛을 비쳐주고 싶어. 너무 작아서 책을 읽을 수도 밤길을 찾을 수도 없겠지만 보는 것만으로 네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 널 향해 날아가는 날 위해 아름다운 빛을 영원히 간직 해죠. 그러면 언제 어디서든 난 널 찾아낼 수 있거든.” 라고 말하던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새벽 4시 45분 가로등 불빛도, 인적도 모두 끊긴 밤거리 속에서 당신이 보고 싶군요.
꼬깃꼬깃 접힌 편지에 성냥불을 붙인 후 밤하늘 속으로 높이 던져버립니다.
당신이 되고 싶다던 반딧불이를 제가 이렇게 만들어 봅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정말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해도 이렇게 허전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가 봅니다. 드디어 내일이면 저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됩니다. 몇 시간 후면 신부가 된다는 것이 설레고 두렵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지금 이 시간 저처럼 설렘과 두려움, 기쁨과 슬픔이라는 모순 된 감정 속에 밤잠을 설치고 계신가요. 아니면 달콤한 꿈나라로 여행을 하시나요?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납니다. 봄치고는 조금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쳤던 4월의 어느 날이었지요. 하얀색 스웨터를 입고 엷게 웃던 당신의 모습은 지금도 제게 작은 미소를 띠게 만듭니다.
그대를 만나고 무엇보다 그대가 저를 사랑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기억도 있군요. 당신이 군 입대하던 날 말입니다. 밤새도록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 잠도 잘 수 없었답니다.
아침에 얼굴을 보니 당신 또한 한 잠도 못 주무신 것 같더군요.
푸석한 얼굴에 온갖 수심과 걱정이 가득했잖아요.
그때 당신 친구들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훈련소에서 헤어질 때 많이 울수록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다나요.
그래서 안 울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날 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에 당신은 그날 제 모습이 조금은 야속했다 했지요.
그 말에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전 언제나 당신이 슬픈 건 싫었던 것뿐인데.
당신을 처음으로 면회 가던 날 밤도 아마 오늘처럼 설레고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당신을 만나는 것이 너무 좋았지만 한편으로 당신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거든요. 바보 같지요. 앞으로의 일을 벌써부터 걱정하던 제 모습.
씩씩한 군인 아저씨가 된 당신을 보고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던 것 같아요.
부드럽고 섬세하던 손이 어느새 갈라지고 거칠어졌기 때문이었죠.
그렇지만 아름다운 미소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제 곁에 돌아와 주었습니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은 저에게 당신 친구들은 모두 장하다고 칭찬해 주었어요. 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때가 제가 24살이었던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취직했던 화랑에서 많이 힘들었답니다.
뿔테 안경에 검은 색 정장을 입고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바라보는 제 모습은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 끝나고 말았거든요.
현실에서 제 모습은 하루 종일 졸린 눈을 끔벅이며 문 앞을 지키는 작은 여자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답니다.
하지만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상상과 현실 속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당신이 그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길 정말이지 간절히 원했답니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나 철부지 같았습니다. 그런 당신이 미웠던 것도 사실이랍니다.
누구나가 납득할 만한 구실을 찾아 당신과 이별하고 싶었으니까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당신과 헤어질 기회를 찾았던 거지요. 당신 또한 불안한 미래가 버거웠을 텐데 말입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결국은 제 자신을 더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과의 헤어짐은 생각했던 것만큼 슬프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 삶에 있어 당신의 존재가 영원한 부재로 자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어리석게도 우리의 사랑은 동화책처럼 행복한 결말일 거라고 믿었나 봅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제게도 소중한 당신의 아버지.
지금도 눈을 감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그 안에는 당신의 부모님과 활짝 웃고 있는 당신 모습이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장 슬펐던 시간에도 늘 당신은 계시는 군요.
돌아올 수 없는 아버님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
아버님의 장례식장에서 전 너무나 작고 초라했습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간사한 존재인지 아버님의 죽음보다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현실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신의 친구들처럼 눈물을 닦아줄 수도,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 낼 수도 없었습니다.
늘 받기만 했던 저는 당신이 가장 힘들어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이 대체 무엇입니까? 영겁의 시간을 사랑한다고 속삭였는데 찰나와 같던 순간들로 인해 서로의 상처조차 보듬어 줄 수 없다니?
당신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만일 하늘이 네 몫의 슬픔을 마련해 놓았다면 모두 내 몫으로 주고 넌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내 가장 큰 바람이야.” 라며 당신은 조용히 제 눈물을 닦아주곤 했었습니다.
저의 나쁜 생각들이, 당신의 스쳐지나 가는 말들 속에 뼈를 담고 당신을 고통으로 몰고 간 것 같아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내 몫의 슬픔을 당신이 감당하는 것 같아 끝없는 원죄의 굴레에서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당신의 눈물이 제 심장에 와 닿는 순간 제 안의 모든 것들은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소멸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작은 기억의 편린들은 제 안에 똬리를 틀고 이세상과 저를 분리시켰습니다.
슬픔, 분노 경계선이 없는 감정에 휩싸인 채 저는 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으니까요.
무엇이 그토록 저를 힘들게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건 아마도 제 자신의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욕심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에 대한 모든 욕심을 버린 후에야 얼룩진 제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욕심은 자아를 상처 입히고 결국 당신을 향한 사랑까지 병들게 했습니다.
낡은 헝겊인형처럼 찢겨진 저를 다시 예쁘게 고쳐준 것은 우정이라는 이름에 또 다른 사랑이었습니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상처 받고 치유 받는 것인가 봅니다. 우정과 새로운 사랑은 제 눈에 가리어졌던 어두운 커튼을 걷어 주었습니다.
비로소 저는 제 자신을 다시금 보듬어 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당신은 곁에 없지만 제게는 소중한 친구가 있고 내일이면 평생을 함께 할 벗도 있으니까요.
당신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우습지요.
차가운 바람이 제 곁에서 당신을 데려간다면 작은 섬에서 에너벨리를 노래한 어느 시인처럼 생을 마감할 줄로 믿었습니다.
시간이란……. 기억이란…….
베르테르는 사랑을 잃은 슬픔에 목숨도 기꺼이 내던졌건만 당신을 향한 제 사랑이 베르테르에 비해 작았을까요?
대답은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저였다면 단언컨대 제 사랑의 무게를 의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어떤 것도 확신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만 이제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희미하니까요. 인간이란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인가 봅니다.
어린 시절 꿈도 미래도, 자신과의 약속도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요즘은 제가 누군지 조차 잊곤 해요. 스스로 지키기로 했던 맹세도, 기억도 모두 희미해져서 그 기억을 놓고 있는 순간마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거겠죠. 내 모습을 잊는 다는 것, 나를 잃어버린다는 것 말입니다 세상살이와 타협하는 건가요 아니면 어른이 된다는 뜻 인가요?
스무 살 때 저는 사랑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이 곧 사랑이라고 믿었거든요. 전 왜 그토록 당신을 사랑한 것일까요?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 영원히 당신을 내 안에서 밀어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흔히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하잖아요. 정말일까요?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건 아마도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으니 당신과 함께한 추억들이 텅 빈 극장에서 관객 없이 돌아가는 영사기처럼 슬픈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런 슬픔에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이런 애잔함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잔함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도 당신과 연결된 끈이 있다는 것 아닐까요.
그 끈을 놓고 싶지 않은데 가끔 당신을 까맣게 잊곤 해요. 함께 한 추억이 있는 장소에서조차 당신의 존재를 잊는 제게 놀라곤 한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도 이렇게 절 잊어가겠죠.
예전에 저는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꽃무늬에 레이스가 달린 예쁜 앞치마를 입고 당신의 아침을 준비하는 제 모습을요.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당신은 식탁 앞에서 제 이마에 살짝 키스 해주겠죠. 식사 후에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넥타이를 꺼내 당신 목에 예쁘게 매주는 기분 좋은 상상을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이겠죠. 현실에서 저는 퉁퉁 부은 눈과 부스스한 머리로 아침상을 준비할 거예요. 제 앞에서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선 듬직한 어깨조차 당신의 것이 아닐 테지요.
그렇지만 상상과 현실이 다르다고 해서 슬프지는 않습니다.
당신 못지않게 그 사람의 어깨도 제게 행복감을 안겨 줄 테니까요.
참을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이라고 당신께서는 생각하십니까?
제가 결혼을 꿈 꾼 건 아마도 당신을 알고부터였을 겁니다. 처음 보는 순간 당신 주변으로 밝은 빛이 반짝거렸거든요. 그 불빛이 저를 당신께 안내했다고 믿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예쁘게, 근사하게 웃을 수 있는 남자입니다.
늦은 시간까지 통화를 하다 당신께서 먼저 잠드시면 수화기를 들고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그냥 그렇게 있었답니다.
당신의 숨소리는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아기처럼 쌔근쌔근 주무시는 당신의 숨결은 제게 그 어떤 클래식보다 감미로웠고 따스합니다.
잠든 당신에게 수화기 너머로 제 마음을 고백하곤 했답니다.
당신이 제 앞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볼 때면 꼭 마음속으로 다짐했었죠.
당신의 아내, 당신의 사랑스런 아이들의 엄마가 될 거라고 말입니다. 당신과 함께 할 때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 많았답니다.
물론 당신, 당신의 부모님, 당신이 주신 소중한 목걸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내주셨던 편지…….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도 없습니다.
시간은 제게 환한 미소뿐만 아니라 소중한 것들도 많이 빼앗아 갔습니다.
그맘때쯤 창문 너머로 비치는 화창한 가을 햇살에도 저는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밝은 햇살만으로 살아있음을 감사했던 그 아름답던 기억의 찰나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요. 한참 후에 생각했어요.
이렇듯 삶을 감사하지 못하고 산다면 영겁의 시간이 지난 후에 작은 굼벵이로 태어나 햇살을 피해, 무시무시한 곤충의 이빨을 피해 갈잎 그늘아래 온 몸을 웅크리고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다시 햇살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평생을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줄 그 사람 덕분입니다. 당신처럼 아름답게 웃지는 않지만 그의 웃음은 제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많이 아끼고 사랑합니다. 당신처럼 감미롭게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는 못하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줍니다.
맹세를 하지 말라던 성경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맹세란 쉽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했으며,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전 한없이 약하고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당신에 대한 맹세를 두 번이나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이제 당신에게 어떠한 약속도 맹세도 하지 않을 거예요.
분명 저는 또 한번 당신에게 거짓 맹세를 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맹세도 덧없는 것이었거늘 서로를 꾸짖지 말기로 해요.
우리의 맹세처럼 우리의 삶도 덧없기에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랑도 가볍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긋나 버린 사랑은 한 번뿐인 우리의 삶처럼 되돌릴 수 없으니 그만큼 소중하고 아련한 것이겠지요. 당신의 사랑은 제게 있어 생명의 근원과도 같았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가 봅니다.
당신과 헤어진 그 순간들은 지옥 불처럼 뜨겁고 무서웠는데 당신과의 추억들은 천국의 아늑함을 제 가슴 속에 남겨 놓았으니까요.
그럼에도 계속 눈물이 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일 아름다운 신부가 되고 싶은데 큰일이네요. 언젠가 시간이 흘러 누군가가 제게 당신의 이야기를 묻는다면 무엇이라 해야 하나요?
예전에 친했던 친구라도 대답해야 할까요?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진 시간은 고작 몇 시간뿐인데 아직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아닙니다. 어떤 누구도 내게 있어 당신의 존재를 묻지 않을 것 같군요.
인간이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절 보며 당신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군요.
사랑이란 중독성이 있다고들 하던데 그래서 당신에게 중독 되었는지도 몰라요.
중독 된 사랑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아편쟁이처럼 온 몸을 떨어가며 몇 날 며칠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싸워왔던 것 같은데 결국 세월이 망각이라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결혼을 앞둔 요즘 이상한 꿈을 꾸곤 한답니다. 검은 모자를 쓴 누군가가 제게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안겨줍니다.
아름다운 꽃은 고운 빛과 감미로운 향기를 가지고 있어요.
작은 손바닥 위에 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너무나 즐겁습니다. 즐거운 마음에 저는 시간이 흐른 것도 몰랐답니다.
눈을 들어 보니 주변은 어느새 어두컴컴한 땅거미가 내려앉았어요.
저는 덜컥 겁이 났답니다.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불안한 마음에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힘껏 달렸어요.
달리다 보니 문득 손바닥 위에 있던 꽃이 궁금해지더군요. 가만히 손바닥을 펴보았습니다.
꽃잎은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줄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꽃잎에서 밴 붉은 물이 손바닥에 작은 얼룩을 남겼어요.
저는 꽃을 바닥에 던지고 손바닥을 엉덩이에 문질렀어요. 그럴수록 얼룩은 더 짙어져 가는 것 같았습니다.
빗줄기는 그칠 줄 모르고 거칠게 제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어요.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습니다. 하늘은 그렇게 계속 제 머리 위에 있었습니다. 달라진 건 고작해야 몇 방울에 빗줄기뿐이었는데 전 하늘과 땅이 바뀌기라도 한 듯 꽃을 내팽개쳤습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조금 전에 그 꽃이 제게 주었던 작은 행복을 말입니다.
햇빛이 반짝거릴 때는 꽃의 아름다움에 행복했는데 정작 꽃이 제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존재조차 귀찮아했으니까요.
꽃이 남겨준 흔적까지 지우려 했다니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미안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내리는 비를 모두 맞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하늘로 다시 거둘 수 없듯이 시간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스러진 꽃잎은 좀 전의 아름다운 빛도, 향기도 갖고 있지 않더군요.
저는 어쩔 줄 몰라 꽃잎을 보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다 눈을 뜹니다. 피식 웃음이 나올 때도 있고 꿈속에서처럼 눈물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혹시 당신도 그 작은 꽃잎처럼 제 도움이 필요하셨나요? 아니면 제가 당신을 도울만한 무엇이 있었나요.
어리석고 이기적인 제 모습은 꿈속과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요. 당신이 제게 주신 작은 행복을 쉽게 놓아버렸으니까요. 그리고 흔적마저 부정하려 했었습니다. 헤어졌던 시간동안 제 안에서 당신은 서서히 소멸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 다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눈물이 나는 것일까요?
눈물로 인해 세상이 흐릿하게 보이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흐릿한 눈 속으로 솜사탕 같은 꽃가루가 아른거립니다. 봄바람에 아름답던 벚꽃은 힘없이 발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 모습이 서글픈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름다운 벚꽃은 작은 바람에도 나약하게 쓰러지고 말아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벚꽃을 모질게 땅바닥으로 내몰던 봄바람은 보도블록 사이에 핀 이름 모를 꽃들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어 그들을 멀리 멀리 날려 보냅니다.
사각형의 돌멩이 사이사이 고작해야 1cm의 공간에서 삐죽하게 피어 있는 민들레의 강한 생명력은 기특함과 동시에 서글프기도 합니다.
떨어지는 벚꽃은, 아름다웠지만 그래서 더 위태로웠던 당신과의 깨어진 사랑의 기억을 더듬게 합니다. 기특한 민들레는 결혼이라는 출발선에 서 있는 제 모습과 퍽 닮은 듯해요.
작은 바람에 생명을 실어 보내는 민들레처럼 새로운 사랑에 제 자신을 실어 보내고 있으니까요.
벚꽃처럼 작은 봄바람에 꽃잎을 떨어뜨리고 주저앉는다면 민들레에게는 소멸이라는 단어 밖에 존재하지 않겠죠. 그러나 신비로운 자연의 섭리는 인간에게나 작은 식물에게나 살아갈 수 있는 자생력을 제공해 준답니다.
탄생과 공존하는 소멸은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지 않나요.
소멸은 또 다른 탄생을 알리는 신호이니까요.
언젠가 산에 올랐다가 잣 대롱을 하나 주웠습니다. 마치 파인애플 꼭지 같더군요. 부엌칼을 가져다가 끝 부분을 뚝 잘랐어요.
잘려진 안에는 듬성듬성 잣이 들어 있었어요.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에 의해 조각조각 부서져 도저히 꺼내 먹을 수가 없었어요.
버릴까 하다 잣 대롱의 옆면을 조금씩, 조금씩 잘라나갔습니다.
잘라진 부분으로 잣의 딱딱한 껍질이 느껴지더군요. 잣의 껍질을 다치지 않게 조심이 칼질을 했어요.
옆면으로 조심이 넣은 칼은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가르쳐주었어요.
그 작은 대롱 안에는 상상할 수 없는 무수한 잣들이 겹겹이 비슷하게 숨겨져 있었답니다.
어림잡아 백 개도 넘는 것 같았어요. 단면을 껑충 썰어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잣들은 어떤 상처도 없었습니다.
천천히 잣을 모두 뽑아냈어요.
신기한 건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칼 가는 대로, 잣이 있는 방향대로 무질서하게 칼을 넣었는데 모든 잣을 토해낸 대롱은 산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솔방울과 같았습니다.
오묘하지 않습니까. 자연의 섭리로 떨어진 솔방울과 인간의 손에 의해 난도질 당한 솔방울이 같은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요.
고향이란, 존재의 근원이란 그 어떤 외부 영향에 관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구나 감탄했습니다.
작은 빗방울에 흔들리는 나약한 저와는 사뭇 달라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당신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어떤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제게 있어 고향은 당신일 것 같습니다.
육체가 소멸한다 해도 언제가 다시 탄생한다면 다시 한번 당신이라는 고향 안에서 존재성을 찾고 싶습니다.
이것 또한 헛된 제 욕심일 테지만 말입니다.
사랑하는 당신, 이렇게 당신께 편지를 쓰고 있노라니 당신 모습이 간절히 그리워집니다.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볼 수 있었던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인위적으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 있어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수화기를 들어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거겠죠.
서랍 속 낡은 액자 안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당신 사진으로 대신 해야겠네요.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사진이라는 것 말입니다. 약속도, 맹세도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 진다 해도 사진 안에는 그 때의 약속, 맹세, 기쁨 모든 것이 그 시간 그대로 있으니까요.
시간이란 흐르는 것입니다. 정지 되어진 시간은 그렇기에 더 이상 의미가 없어요.
정지된 시간, 그 안에서만 행복한 우리들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살아 숨쉬지 않는 쇼윈도에 마네킹 같습니다.
그래서 전 언젠가부터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었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사진 속에서 들리는 그 모든 약속과 맹세들이 다시금 들려오는 것이 두렵거든요. 당신이 떠난 후 저는 사진 속의 목소리들에게 그만 백기를 들고 항복하고 말았답니다.
사진과 함께 모든 기억들이 버려지기를 바라면서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붉은 빛 속으로 내던지고 말았거든요.
우리의 추억은 반딧불이가 되어 제 주변을 날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덧없는 우리의 사랑처럼 찰나의 시간 속에 작은 바람에도 바스러지는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이제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추억들을 왜 그렇게 버리려 했는지 후회가 됩니다. 모든 것을 시간의 흐름에 맡겼다면 젖은 베개를 품고 잠드는 일은 훨씬 적었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은 그것 또한 좋은 추억이었다고 미소 지을 수 있습니다. 그저 내일이면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이 제 안에 감정들을 감성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을 뿐입니다.
펜을 놓고 노트를 덮는 순간 감정들도 함께 덮여질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아요.
사진 속 당신은 아름답게 웃고 있군요. 버려진 사진 속에 한 장의 사진만이 몸을 숨긴 채 은신처에 숨어 있었나 봅니다. 지금은 재빠르게 몸을 숨겼던 이 사진한테 감사합니다.
이렇게 당신이 그리운 밤에 제 곁에 있어주니까요.
내일이면 새롭게 만들어질 사진들은 영원히 제 삶의 기록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늘 비슷한 소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망 속에 당신이 없다는 것은 달라졌지만요.
앞으로 주어진 제 삶 속에 당신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담담하기도 합니다.
당신의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그리 슬프지는 않습니다. 당신 역시 서글픔보다는 담담함으로 새로운 사진을 만들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슬프다면 저도 많이 슬플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당신을 만난다면 그때도 아름답게 웃는 당신이길 기도합니다.
늘 당신을 위해 기도하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조금은 낯설지만 언제나 익숙한 모습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영원한 헤어짐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뜨리며 제 어깨를 흔들던 당신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촉촉하게 젖어 든 당신의 눈동자와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던 제 모습…….
“어둠 속에서도 짝을 찾아 날아다니는 반딧불이처럼 깜깜한 어둠 속에 있어도 너를 금방 찾을 수 있어. 하지만 네가 만일 곁에 없다면 난 스스로의 모습조차 기억하지 못 하게 될 꺼야.
내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사랑하는 네 모습도, 사랑했던 기억도 모두 잊게 되는 거야. 결국 밝은 빛 속에 있어도 너를 찾아낼 수 없어. 난 영원히 빛을 잃은 반딧불이가 되고 말겠지.” 라고 나지막이 말씀했습니다.
제가 곁에 없다 해도 스스로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빛을 잃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내일 하루만 약속을 지켜주세요.
반짝이는 조명과 아름다운 꽃들에 둘러싸인 제 모습을 본다 해도 제 이름을 부르지 말아주세요. 손을 흔들지도 말아주세요. 또 한번 어리석은 제 욕심일 테지만 당신의 마지막 약속을 꼭 지켜주세요.
절 찾을 수 없다면, 기억할 수 없다면 당신 눈동자에 슬픔도 머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미소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전 언제나 당신이 슬픈 건 싫거든요.
검은 머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백발이 되는 것처럼 뭐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미해질 테니 서로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사랑하는 당신, 좋은 꿈꾸세요.
그리고 정말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명 : 한경아
성별 : 여
연령 : 1977년생
주소 : 송파구 방이동 163-14호
e-mail : h-kyunga@hanmail.net
전화번호 : 02-416-9251
핸드폰 : 011-341-9251
* 숙명여자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논문 과정
* 격월간전문지 귀금속과 보석 편집장으로 근무
* 현재 월간미술문화 객원기자 겸 프리랜서
꽁무니에 반짝이는 반딧불을 켜고 여름이면 제 짝을 찾아 밤하늘을 비행하는 반딧불이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그들은 서로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이 제게 또 하나의 삶을 허락해주신다면 그때는 반딧불이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당신을 행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작은 반딧불이처럼 깜깜한 어둠 속에도 밝은 빛을 비쳐주고 싶어. 너무 작아서 책을 읽을 수도 밤길을 찾을 수도 없겠지만 보는 것만으로 네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 널 향해 날아가는 날 위해 아름다운 빛을 영원히 간직 해죠. 그러면 언제 어디서든 난 널 찾아낼 수 있거든.” 라고 말하던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새벽 4시 45분 가로등 불빛도, 인적도 모두 끊긴 밤거리 속에서 당신이 보고 싶군요.
꼬깃꼬깃 접힌 편지에 성냥불을 붙인 후 밤하늘 속으로 높이 던져버립니다.
당신이 되고 싶다던 반딧불이를 제가 이렇게 만들어 봅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정말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해도 이렇게 허전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가 봅니다. 드디어 내일이면 저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됩니다. 몇 시간 후면 신부가 된다는 것이 설레고 두렵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지금 이 시간 저처럼 설렘과 두려움, 기쁨과 슬픔이라는 모순 된 감정 속에 밤잠을 설치고 계신가요. 아니면 달콤한 꿈나라로 여행을 하시나요?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납니다. 봄치고는 조금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쳤던 4월의 어느 날이었지요. 하얀색 스웨터를 입고 엷게 웃던 당신의 모습은 지금도 제게 작은 미소를 띠게 만듭니다.
그대를 만나고 무엇보다 그대가 저를 사랑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기억도 있군요. 당신이 군 입대하던 날 말입니다. 밤새도록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 잠도 잘 수 없었답니다.
아침에 얼굴을 보니 당신 또한 한 잠도 못 주무신 것 같더군요.
푸석한 얼굴에 온갖 수심과 걱정이 가득했잖아요.
그때 당신 친구들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훈련소에서 헤어질 때 많이 울수록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다나요.
그래서 안 울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날 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에 당신은 그날 제 모습이 조금은 야속했다 했지요.
그 말에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전 언제나 당신이 슬픈 건 싫었던 것뿐인데.
당신을 처음으로 면회 가던 날 밤도 아마 오늘처럼 설레고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당신을 만나는 것이 너무 좋았지만 한편으로 당신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거든요. 바보 같지요. 앞으로의 일을 벌써부터 걱정하던 제 모습.
씩씩한 군인 아저씨가 된 당신을 보고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던 것 같아요.
부드럽고 섬세하던 손이 어느새 갈라지고 거칠어졌기 때문이었죠.
그렇지만 아름다운 미소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제 곁에 돌아와 주었습니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은 저에게 당신 친구들은 모두 장하다고 칭찬해 주었어요. 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때가 제가 24살이었던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취직했던 화랑에서 많이 힘들었답니다.
뿔테 안경에 검은 색 정장을 입고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바라보는 제 모습은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 끝나고 말았거든요.
현실에서 제 모습은 하루 종일 졸린 눈을 끔벅이며 문 앞을 지키는 작은 여자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답니다.
하지만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상상과 현실 속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당신이 그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길 정말이지 간절히 원했답니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나 철부지 같았습니다. 그런 당신이 미웠던 것도 사실이랍니다.
누구나가 납득할 만한 구실을 찾아 당신과 이별하고 싶었으니까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당신과 헤어질 기회를 찾았던 거지요. 당신 또한 불안한 미래가 버거웠을 텐데 말입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결국은 제 자신을 더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과의 헤어짐은 생각했던 것만큼 슬프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 삶에 있어 당신의 존재가 영원한 부재로 자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어리석게도 우리의 사랑은 동화책처럼 행복한 결말일 거라고 믿었나 봅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제게도 소중한 당신의 아버지.
지금도 눈을 감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그 안에는 당신의 부모님과 활짝 웃고 있는 당신 모습이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장 슬펐던 시간에도 늘 당신은 계시는 군요.
돌아올 수 없는 아버님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
아버님의 장례식장에서 전 너무나 작고 초라했습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간사한 존재인지 아버님의 죽음보다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현실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신의 친구들처럼 눈물을 닦아줄 수도,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 낼 수도 없었습니다.
늘 받기만 했던 저는 당신이 가장 힘들어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이 대체 무엇입니까? 영겁의 시간을 사랑한다고 속삭였는데 찰나와 같던 순간들로 인해 서로의 상처조차 보듬어 줄 수 없다니?
당신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만일 하늘이 네 몫의 슬픔을 마련해 놓았다면 모두 내 몫으로 주고 넌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내 가장 큰 바람이야.” 라며 당신은 조용히 제 눈물을 닦아주곤 했었습니다.
저의 나쁜 생각들이, 당신의 스쳐지나 가는 말들 속에 뼈를 담고 당신을 고통으로 몰고 간 것 같아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내 몫의 슬픔을 당신이 감당하는 것 같아 끝없는 원죄의 굴레에서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당신의 눈물이 제 심장에 와 닿는 순간 제 안의 모든 것들은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소멸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작은 기억의 편린들은 제 안에 똬리를 틀고 이세상과 저를 분리시켰습니다.
슬픔, 분노 경계선이 없는 감정에 휩싸인 채 저는 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으니까요.
무엇이 그토록 저를 힘들게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건 아마도 제 자신의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욕심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에 대한 모든 욕심을 버린 후에야 얼룩진 제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욕심은 자아를 상처 입히고 결국 당신을 향한 사랑까지 병들게 했습니다.
낡은 헝겊인형처럼 찢겨진 저를 다시 예쁘게 고쳐준 것은 우정이라는 이름에 또 다른 사랑이었습니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상처 받고 치유 받는 것인가 봅니다. 우정과 새로운 사랑은 제 눈에 가리어졌던 어두운 커튼을 걷어 주었습니다.
비로소 저는 제 자신을 다시금 보듬어 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당신은 곁에 없지만 제게는 소중한 친구가 있고 내일이면 평생을 함께 할 벗도 있으니까요.
당신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우습지요.
차가운 바람이 제 곁에서 당신을 데려간다면 작은 섬에서 에너벨리를 노래한 어느 시인처럼 생을 마감할 줄로 믿었습니다.
시간이란……. 기억이란…….
베르테르는 사랑을 잃은 슬픔에 목숨도 기꺼이 내던졌건만 당신을 향한 제 사랑이 베르테르에 비해 작았을까요?
대답은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저였다면 단언컨대 제 사랑의 무게를 의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어떤 것도 확신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만 이제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희미하니까요. 인간이란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인가 봅니다.
어린 시절 꿈도 미래도, 자신과의 약속도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요즘은 제가 누군지 조차 잊곤 해요. 스스로 지키기로 했던 맹세도, 기억도 모두 희미해져서 그 기억을 놓고 있는 순간마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거겠죠. 내 모습을 잊는 다는 것, 나를 잃어버린다는 것 말입니다 세상살이와 타협하는 건가요 아니면 어른이 된다는 뜻 인가요?
스무 살 때 저는 사랑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이 곧 사랑이라고 믿었거든요. 전 왜 그토록 당신을 사랑한 것일까요?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 영원히 당신을 내 안에서 밀어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흔히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하잖아요. 정말일까요?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건 아마도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으니 당신과 함께한 추억들이 텅 빈 극장에서 관객 없이 돌아가는 영사기처럼 슬픈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런 슬픔에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이런 애잔함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잔함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도 당신과 연결된 끈이 있다는 것 아닐까요.
그 끈을 놓고 싶지 않은데 가끔 당신을 까맣게 잊곤 해요. 함께 한 추억이 있는 장소에서조차 당신의 존재를 잊는 제게 놀라곤 한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도 이렇게 절 잊어가겠죠.
예전에 저는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꽃무늬에 레이스가 달린 예쁜 앞치마를 입고 당신의 아침을 준비하는 제 모습을요.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당신은 식탁 앞에서 제 이마에 살짝 키스 해주겠죠. 식사 후에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넥타이를 꺼내 당신 목에 예쁘게 매주는 기분 좋은 상상을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이겠죠. 현실에서 저는 퉁퉁 부은 눈과 부스스한 머리로 아침상을 준비할 거예요. 제 앞에서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선 듬직한 어깨조차 당신의 것이 아닐 테지요.
그렇지만 상상과 현실이 다르다고 해서 슬프지는 않습니다.
당신 못지않게 그 사람의 어깨도 제게 행복감을 안겨 줄 테니까요.
참을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이라고 당신께서는 생각하십니까?
제가 결혼을 꿈 꾼 건 아마도 당신을 알고부터였을 겁니다. 처음 보는 순간 당신 주변으로 밝은 빛이 반짝거렸거든요. 그 불빛이 저를 당신께 안내했다고 믿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예쁘게, 근사하게 웃을 수 있는 남자입니다.
늦은 시간까지 통화를 하다 당신께서 먼저 잠드시면 수화기를 들고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그냥 그렇게 있었답니다.
당신의 숨소리는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아기처럼 쌔근쌔근 주무시는 당신의 숨결은 제게 그 어떤 클래식보다 감미로웠고 따스합니다.
잠든 당신에게 수화기 너머로 제 마음을 고백하곤 했답니다.
당신이 제 앞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볼 때면 꼭 마음속으로 다짐했었죠.
당신의 아내, 당신의 사랑스런 아이들의 엄마가 될 거라고 말입니다. 당신과 함께 할 때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 많았답니다.
물론 당신, 당신의 부모님, 당신이 주신 소중한 목걸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내주셨던 편지…….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도 없습니다.
시간은 제게 환한 미소뿐만 아니라 소중한 것들도 많이 빼앗아 갔습니다.
그맘때쯤 창문 너머로 비치는 화창한 가을 햇살에도 저는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밝은 햇살만으로 살아있음을 감사했던 그 아름답던 기억의 찰나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요. 한참 후에 생각했어요.
이렇듯 삶을 감사하지 못하고 산다면 영겁의 시간이 지난 후에 작은 굼벵이로 태어나 햇살을 피해, 무시무시한 곤충의 이빨을 피해 갈잎 그늘아래 온 몸을 웅크리고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다시 햇살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평생을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줄 그 사람 덕분입니다. 당신처럼 아름답게 웃지는 않지만 그의 웃음은 제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많이 아끼고 사랑합니다. 당신처럼 감미롭게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는 못하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줍니다.
맹세를 하지 말라던 성경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맹세란 쉽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했으며,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전 한없이 약하고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당신에 대한 맹세를 두 번이나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이제 당신에게 어떠한 약속도 맹세도 하지 않을 거예요.
분명 저는 또 한번 당신에게 거짓 맹세를 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맹세도 덧없는 것이었거늘 서로를 꾸짖지 말기로 해요.
우리의 맹세처럼 우리의 삶도 덧없기에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랑도 가볍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긋나 버린 사랑은 한 번뿐인 우리의 삶처럼 되돌릴 수 없으니 그만큼 소중하고 아련한 것이겠지요. 당신의 사랑은 제게 있어 생명의 근원과도 같았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가 봅니다.
당신과 헤어진 그 순간들은 지옥 불처럼 뜨겁고 무서웠는데 당신과의 추억들은 천국의 아늑함을 제 가슴 속에 남겨 놓았으니까요.
그럼에도 계속 눈물이 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일 아름다운 신부가 되고 싶은데 큰일이네요. 언젠가 시간이 흘러 누군가가 제게 당신의 이야기를 묻는다면 무엇이라 해야 하나요?
예전에 친했던 친구라도 대답해야 할까요?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진 시간은 고작 몇 시간뿐인데 아직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아닙니다. 어떤 누구도 내게 있어 당신의 존재를 묻지 않을 것 같군요.
인간이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절 보며 당신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군요.
사랑이란 중독성이 있다고들 하던데 그래서 당신에게 중독 되었는지도 몰라요.
중독 된 사랑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아편쟁이처럼 온 몸을 떨어가며 몇 날 며칠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싸워왔던 것 같은데 결국 세월이 망각이라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결혼을 앞둔 요즘 이상한 꿈을 꾸곤 한답니다. 검은 모자를 쓴 누군가가 제게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안겨줍니다.
아름다운 꽃은 고운 빛과 감미로운 향기를 가지고 있어요.
작은 손바닥 위에 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너무나 즐겁습니다. 즐거운 마음에 저는 시간이 흐른 것도 몰랐답니다.
눈을 들어 보니 주변은 어느새 어두컴컴한 땅거미가 내려앉았어요.
저는 덜컥 겁이 났답니다.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불안한 마음에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힘껏 달렸어요.
달리다 보니 문득 손바닥 위에 있던 꽃이 궁금해지더군요. 가만히 손바닥을 펴보았습니다.
꽃잎은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줄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꽃잎에서 밴 붉은 물이 손바닥에 작은 얼룩을 남겼어요.
저는 꽃을 바닥에 던지고 손바닥을 엉덩이에 문질렀어요. 그럴수록 얼룩은 더 짙어져 가는 것 같았습니다.
빗줄기는 그칠 줄 모르고 거칠게 제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어요.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습니다. 하늘은 그렇게 계속 제 머리 위에 있었습니다. 달라진 건 고작해야 몇 방울에 빗줄기뿐이었는데 전 하늘과 땅이 바뀌기라도 한 듯 꽃을 내팽개쳤습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조금 전에 그 꽃이 제게 주었던 작은 행복을 말입니다.
햇빛이 반짝거릴 때는 꽃의 아름다움에 행복했는데 정작 꽃이 제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존재조차 귀찮아했으니까요.
꽃이 남겨준 흔적까지 지우려 했다니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미안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내리는 비를 모두 맞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하늘로 다시 거둘 수 없듯이 시간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스러진 꽃잎은 좀 전의 아름다운 빛도, 향기도 갖고 있지 않더군요.
저는 어쩔 줄 몰라 꽃잎을 보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다 눈을 뜹니다. 피식 웃음이 나올 때도 있고 꿈속에서처럼 눈물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혹시 당신도 그 작은 꽃잎처럼 제 도움이 필요하셨나요? 아니면 제가 당신을 도울만한 무엇이 있었나요.
어리석고 이기적인 제 모습은 꿈속과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요. 당신이 제게 주신 작은 행복을 쉽게 놓아버렸으니까요. 그리고 흔적마저 부정하려 했었습니다. 헤어졌던 시간동안 제 안에서 당신은 서서히 소멸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 다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눈물이 나는 것일까요?
눈물로 인해 세상이 흐릿하게 보이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흐릿한 눈 속으로 솜사탕 같은 꽃가루가 아른거립니다. 봄바람에 아름답던 벚꽃은 힘없이 발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 모습이 서글픈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름다운 벚꽃은 작은 바람에도 나약하게 쓰러지고 말아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벚꽃을 모질게 땅바닥으로 내몰던 봄바람은 보도블록 사이에 핀 이름 모를 꽃들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어 그들을 멀리 멀리 날려 보냅니다.
사각형의 돌멩이 사이사이 고작해야 1cm의 공간에서 삐죽하게 피어 있는 민들레의 강한 생명력은 기특함과 동시에 서글프기도 합니다.
떨어지는 벚꽃은, 아름다웠지만 그래서 더 위태로웠던 당신과의 깨어진 사랑의 기억을 더듬게 합니다. 기특한 민들레는 결혼이라는 출발선에 서 있는 제 모습과 퍽 닮은 듯해요.
작은 바람에 생명을 실어 보내는 민들레처럼 새로운 사랑에 제 자신을 실어 보내고 있으니까요.
벚꽃처럼 작은 봄바람에 꽃잎을 떨어뜨리고 주저앉는다면 민들레에게는 소멸이라는 단어 밖에 존재하지 않겠죠. 그러나 신비로운 자연의 섭리는 인간에게나 작은 식물에게나 살아갈 수 있는 자생력을 제공해 준답니다.
탄생과 공존하는 소멸은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지 않나요.
소멸은 또 다른 탄생을 알리는 신호이니까요.
언젠가 산에 올랐다가 잣 대롱을 하나 주웠습니다. 마치 파인애플 꼭지 같더군요. 부엌칼을 가져다가 끝 부분을 뚝 잘랐어요.
잘려진 안에는 듬성듬성 잣이 들어 있었어요.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에 의해 조각조각 부서져 도저히 꺼내 먹을 수가 없었어요.
버릴까 하다 잣 대롱의 옆면을 조금씩, 조금씩 잘라나갔습니다.
잘라진 부분으로 잣의 딱딱한 껍질이 느껴지더군요. 잣의 껍질을 다치지 않게 조심이 칼질을 했어요.
옆면으로 조심이 넣은 칼은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가르쳐주었어요.
그 작은 대롱 안에는 상상할 수 없는 무수한 잣들이 겹겹이 비슷하게 숨겨져 있었답니다.
어림잡아 백 개도 넘는 것 같았어요. 단면을 껑충 썰어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잣들은 어떤 상처도 없었습니다.
천천히 잣을 모두 뽑아냈어요.
신기한 건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칼 가는 대로, 잣이 있는 방향대로 무질서하게 칼을 넣었는데 모든 잣을 토해낸 대롱은 산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솔방울과 같았습니다.
오묘하지 않습니까. 자연의 섭리로 떨어진 솔방울과 인간의 손에 의해 난도질 당한 솔방울이 같은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요.
고향이란, 존재의 근원이란 그 어떤 외부 영향에 관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구나 감탄했습니다.
작은 빗방울에 흔들리는 나약한 저와는 사뭇 달라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당신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어떤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제게 있어 고향은 당신일 것 같습니다.
육체가 소멸한다 해도 언제가 다시 탄생한다면 다시 한번 당신이라는 고향 안에서 존재성을 찾고 싶습니다.
이것 또한 헛된 제 욕심일 테지만 말입니다.
사랑하는 당신, 이렇게 당신께 편지를 쓰고 있노라니 당신 모습이 간절히 그리워집니다.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볼 수 있었던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인위적으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 있어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수화기를 들어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거겠죠.
서랍 속 낡은 액자 안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당신 사진으로 대신 해야겠네요.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사진이라는 것 말입니다. 약속도, 맹세도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 진다 해도 사진 안에는 그 때의 약속, 맹세, 기쁨 모든 것이 그 시간 그대로 있으니까요.
시간이란 흐르는 것입니다. 정지 되어진 시간은 그렇기에 더 이상 의미가 없어요.
정지된 시간, 그 안에서만 행복한 우리들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살아 숨쉬지 않는 쇼윈도에 마네킹 같습니다.
그래서 전 언젠가부터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었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사진 속에서 들리는 그 모든 약속과 맹세들이 다시금 들려오는 것이 두렵거든요. 당신이 떠난 후 저는 사진 속의 목소리들에게 그만 백기를 들고 항복하고 말았답니다.
사진과 함께 모든 기억들이 버려지기를 바라면서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붉은 빛 속으로 내던지고 말았거든요.
우리의 추억은 반딧불이가 되어 제 주변을 날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덧없는 우리의 사랑처럼 찰나의 시간 속에 작은 바람에도 바스러지는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이제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추억들을 왜 그렇게 버리려 했는지 후회가 됩니다. 모든 것을 시간의 흐름에 맡겼다면 젖은 베개를 품고 잠드는 일은 훨씬 적었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은 그것 또한 좋은 추억이었다고 미소 지을 수 있습니다. 그저 내일이면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이 제 안에 감정들을 감성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을 뿐입니다.
펜을 놓고 노트를 덮는 순간 감정들도 함께 덮여질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아요.
사진 속 당신은 아름답게 웃고 있군요. 버려진 사진 속에 한 장의 사진만이 몸을 숨긴 채 은신처에 숨어 있었나 봅니다. 지금은 재빠르게 몸을 숨겼던 이 사진한테 감사합니다.
이렇게 당신이 그리운 밤에 제 곁에 있어주니까요.
내일이면 새롭게 만들어질 사진들은 영원히 제 삶의 기록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늘 비슷한 소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망 속에 당신이 없다는 것은 달라졌지만요.
앞으로 주어진 제 삶 속에 당신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담담하기도 합니다.
당신의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그리 슬프지는 않습니다. 당신 역시 서글픔보다는 담담함으로 새로운 사진을 만들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슬프다면 저도 많이 슬플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당신을 만난다면 그때도 아름답게 웃는 당신이길 기도합니다.
늘 당신을 위해 기도하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조금은 낯설지만 언제나 익숙한 모습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영원한 헤어짐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뜨리며 제 어깨를 흔들던 당신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촉촉하게 젖어 든 당신의 눈동자와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던 제 모습…….
“어둠 속에서도 짝을 찾아 날아다니는 반딧불이처럼 깜깜한 어둠 속에 있어도 너를 금방 찾을 수 있어. 하지만 네가 만일 곁에 없다면 난 스스로의 모습조차 기억하지 못 하게 될 꺼야.
내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사랑하는 네 모습도, 사랑했던 기억도 모두 잊게 되는 거야. 결국 밝은 빛 속에 있어도 너를 찾아낼 수 없어. 난 영원히 빛을 잃은 반딧불이가 되고 말겠지.” 라고 나지막이 말씀했습니다.
제가 곁에 없다 해도 스스로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빛을 잃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내일 하루만 약속을 지켜주세요.
반짝이는 조명과 아름다운 꽃들에 둘러싸인 제 모습을 본다 해도 제 이름을 부르지 말아주세요. 손을 흔들지도 말아주세요. 또 한번 어리석은 제 욕심일 테지만 당신의 마지막 약속을 꼭 지켜주세요.
절 찾을 수 없다면, 기억할 수 없다면 당신 눈동자에 슬픔도 머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미소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전 언제나 당신이 슬픈 건 싫거든요.
검은 머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백발이 되는 것처럼 뭐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미해질 테니 서로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사랑하는 당신, 좋은 꿈꾸세요.
그리고 정말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명 : 한경아
성별 : 여
연령 : 1977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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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명여자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논문 과정
* 격월간전문지 귀금속과 보석 편집장으로 근무
* 현재 월간미술문화 객원기자 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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