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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아-미술평론(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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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72회 작성일 04-11-15 20:42

본문

트래스젠더를 꿈꾼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Ⅰ. 서론

-문제 제기-

구스타프 클림트는 농익은 표정, 요염한 자태의 여자들을 화폭에 그림으로써 에로티시즘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고 있다.
대표작 ‘키스’에 등장하는 여인의 전율하는 듯한 손끝과 발끝의 섬세한 표현은 쾌감으로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드러난 어깨와 발목, 그 위를 마치 팔찌처럼 흘러내린 넝쿨은 흡사 노예 같은 모습을 연상시킨다.
반대로 남자는 표정이 보이지 않으며 여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은 덤덤한 동시에 강인해 보인다. 여인의 존재 자체를 지배하고 있는 듯 하다.
여인 역시 몽롱한 표정으로 남자의 지배에 만족하고 있다. 서로 다른 감정과 몸놀림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한 몸으로 보인다. 황금빛의 옷이 그 둘을 하나로 묶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클림트의 ‘키스’는 남녀의 화해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빛 옷에 감싸인 이들의 실루엣은 곳곳이 발기한 남성의 성기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강한 이중적 자아를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여성에 대한 동경과 사랑이 그에게 그녀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안겨주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다시 말하면 구스타프 클림트는 주어진 젠더(Gender)를 거부하며 불완전한 성 정체성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이중적인 자아가 강하게 드러났던 삶과 그림을 에로티시즘이 아닌 트레스젠더로의 시각으로 관찰해 보자.
앞에서 언급한 ‘키스’라는 작품의 표면에는 누구나가 알다시피 몽롱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 뒤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남근의 모양을 한 묵직한 덩어리 감이다.
물론 그는 여자의 몸이나 연인의 실루엣을 남근과 흡사하게 그리기 위해 수 없는 스케치를 했었다고 한다.
즉 구스타프 클림트의 자의식 안에는 ‘키스’에 등장하는 남자처럼 여자를 리드하는 강인한 남성의 모습과 한없이 나약하고 매혹적인 여성이 되고 싶은 욕망이 함께 공존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럼에도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것은 그 당시 사회가 트래스젠더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회이며 클림트 자신 역시 이중적 젠더의 자아를 수많은 이브로 재 탄생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름다운 장신구로 치장하고 요염한 교태를 부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이브를 통해 대리만족감과 불완전한 성 정체성의 벽을 극복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타임머신을 타고 21C로 시간여행을 한다면 그림 속 이브가 되어 과감하게 바지를 벗어버리고 화려한 장신구와 화장을 하며 도심을 활보하고 다닐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키스’를 보자. 여인은 손가락, 발가락의 섬세한 떨림으로 성적 쾌감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남자들에게 질문을 던져보겠다.
사랑하는 연인과 키스를 나누거나 포옹을 할 때 손가락 끝이 떨려오는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발기한 성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반대로 여성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키스씬 속 여주인공은 살며시 두 눈을 감고 손가락 끝을 떨거나 한쪽 발을 들곤 한다. 그것도 아주 사랑스럽고 수줍게.
이런 여성의 심리를 구스타프 클림트는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많은 여성을 사랑했기 때문일 수 도 있다.
빈의 바람둥이라 일컬어지던 그에게 여성의 심리쯤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모델을 비롯하여 대단한 여성편력의 소유자였던 그가 여성의 작은 몸짓까지 놓치지 않고 체크할 정도의 사랑이 존재했을까 싶다.
클림트의 영원한 사랑, 동경의 대상이었던 에밀리 역시 ‘키스’의 여인처럼 관능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랬더라면 사춘기 소년처럼 성을 탐닉하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정신적인 사랑을 지속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키스’의 여인은 눈을 감고 있다. 남자 또한 고개를 돌린 채 외면하고 있다.
이들은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있으며 무언가 비밀스러움까지 가지고 있다.
과연 그는 무엇을 인정하기 싫어했으며 무엇을 그토록 숨기려 했을까?
구스타프 클림트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은 화가로 유명하다.

-나는 결코 자화상을 그린 적이 없다. 나 자신이 그림의 소재로는 그다지 흥미를 끌지 않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내 관심을 끈다. 내가 특별히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끌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내게는 특이한 점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일 뿐이다. -      구스타프 클림트

그가 자신에 대해 언급한 몇 안되는 글귀다.
그는 결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필자는 혹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자신이 자신의 젠더를 싫어했던 것은 아닌가 또 한번 의심하게 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자기 몸에 없는 것을 강렬하게 원하면 결국 자신이 그 욕망의 대상으로 직접 변해간다고 말했다.
여성이 되고 싶었던 클림트는 여성들만의 매혹적인 모습과 몽롱함으로 그림 속에서 여자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Ⅱ. 본론

- 문제제기에 대한 근거와 사례 -

구스타프 클림트는 14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그렇지만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왔다.
어머니와 누이의 정신질환으로 괴로운 유년기를 보낸 클림트는 그로 인한 정신적인 미성숙으로 마더 콤플렉스라 불릴 정도로 어머니라는 존재 안에 갇혀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성장 후 그의 정신적인 어머니가 되어준 것은 다름 아닌 앞서 언급한 에밀리이다.
‘로텐부르크 야외 무대의 광대’라는 그림 속에 어머니, 누이 동생 헤르민네와 클라라를 그려던 클림트는 그들 속에 에밀리의 모습도 넣음으로써 그녀의 존재를 우리에게 확고부동하게 주지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클림트는 모두가 알다시피 에밀리와는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한다.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이 철저하게 분리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에밀리의 테두리 안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클림트는 온전한 성인의 남성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은 그에게 14명이라는 사생아를 만들어 주었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을 얻고자 부르던 여인은 다름 아닌 에밀리였다.
다시 말해 이중적인 자아가 강했던 클림트는 쉽게 성을 가질 수 있는 창부라는 이름의 여성과 어머니와 에밀리처럼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여신이라는 이분법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있다. 클림트에게는 에밀리 이외에 무수한 여자가 있었지만 중요시 되는 여자는 미치 침머만과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이다.
미치 침머만은 클림트의 모델이었고 그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
완전한 성인 남자가 아니었던 클림트는 미치 침머만에게 행복한 가정을 선물하지는 못 했다. 그녀가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희망’이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부유한 금융인의 딸로서 매우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오랫동안 정부관계를 유지했으며 '유디트'와 '키스'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1)절대적인 여성관을 표현한 학부회의
① 철학
논란을 불러일으킨 학부회의는 클림트의 절대적인 여성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세기말적인 혼란과 불안감을 그린 철학은 인간의 삶을 아이에서 늙고 병들어 괴로워하는 노인의 모습까지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상징주의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스핑크스와 흡사한 물체는 사나운 빛의 소용돌이를 발산하며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 껍데기뿐인 육체를 던져주고 있다.
고통 속에 신음하며 몸부림치는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미동 없는 두 눈으로 관람하는 검은 베일의 여인은 절대적인 자리에서 그들을, 아니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거역할 수 없는 냉소와 지성을 함께 겸비한 이 여인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뇌리 속에 강하게 남긴다.
② 의학
의학 역시 건강의 여신 히게이아를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시켰다.
거만하게 내려보는 히게이아의 시선과 그녀의 손 위에 놓인 접시는 인간의 표피를 훑고 지나가는 양수의 원천이 되어 탄생의 시작을 알리는 태아의 기억을 더듬케 한다.
갓난 아이 역시 등을 돌려 희망보다는 고통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자의식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생소하다는 듯 벌거벗은 채 무방비하게 둥둥 떠 있는 여성은 사유할 수 없는, 자아를 느낄 수 없는 모습이다.
자아를 상실한 육신은 모든 껍데기를 흙과 함께 묻어버린 채 앙상하게 남아 있는 해골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마치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뱀 한 마리를 온 몸에 감고 건강의 신이라 말하는 것 같다. 건강의 여신을 죽음의 여신, 복수의 여신처럼 무섭고 섬뜩하게 표현한 의학은 사회 비판이라는 메시지 뒤로 이중적인 젠더로 인해 분리된 클림트의 어긋난 자의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
③ 법학
학부회의의 마지막 그림 법학 역시 준법정신이라는 단어를 무색하게 하기 충분하다.
철학, 의학과 마찬가지로 음산한 기운이 가득한 가운데 세명의 여인이 늙고 초라한 한 남자를 심판하고 있다. 사악한 여자를 의미하는 문어는 노인을 휘감고 있으며 평면적이고 추상적으로 표현 된 여인과 문어와는 달리 노인의 앙상한 뼈마디와 주름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는지를 단편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학부회의는 오랜 시간 많은 관점에서 다루어 졌다.
하지만 필자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모호한 젠더에 초점을 두어 학부회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에밀리라는 여성에게 귀속되었던 클림트의 정신세계는 언제나 자신의 삶 속에 절대적인 여신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절대적인 여신에 대한 사랑과 동경은 여성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으로 변이되었던 것이다.  
이는 언뜻 제 어머니와 잠자리를 하고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던 자가 누구인가? 스핑크스를 죽인 자 또한 누구인가?
바로 오이디푸스이다. 철학에 등장하는 강렬한 에너지의 근원인 듯한 스핑크스의 형상은 클림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잠재울 수 있는 사례이다.
빛을 뿜어내는 스핑크스의 형상과는 달리 세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라.
오이디푸스의 용맹스러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철학과 의학에 등장하는 남자는 뒷모습만이 존재하는 얼굴 없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의학에 등장하는 남자는 웅크리고 앉아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를 연상시킨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젠더를 다시 재정립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철학, 의학과는 달리 법학에서는 남자의 얼굴이 조금 비취고 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안 보니 만 못할 정도로 초췌하고 형편없다.
절대적인 여성 즉 어머니와 에밀리 앞에서 그녀들과 다른 젠더를 가진 자신의 모습을 감히 보일 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있다. 모델에서 금융가의 딸까지 다양한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던 남자로서의 클림트와는 너무나 다른 나약한 모습이다.
왜 그는 이다지도 절대적인 여신을 그림 속에 존재시키는 것일까?
또한 왜 이토록 남자들의 모습을 나약하고 초라하게 표현했을까?
남자와 여자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젠더 속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던 탓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 사라진 남자? 숨어버린 남자!
- 아크리시오스는 그의 딸인 다니에가 낳은 아들에 의해 죽는다는 신탁(神託)을 받는다. 그 후 아크리시오스는 딸을 지하에 있는 청동 방안에 가두어 놓고 어떤 남자도 접근할 수 없도록 하였으나, 하늘에서 이를 지켜 본 제우스가 황금 빗물로 변신하여 그녀의 두 무릎 사이로 스며들어가 교접(交接)하여 페르세우스가 태어났다.
왕은 다나에와 페르세우스 모자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이들은 세리포스섬에 표착, 이 섬의 왕 폴리데크테스의 동생인 디크티스에게 구조되어 페르세우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뒤에 경기회(競技會)에서 페르세우스가 던진 원반(圓盤)에 경기를 관람하고 있던 아크리시오스 왕이 맞아 왕은 죽고 말았다. -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다나에’는 바람둥이 신 제우스와 사랑을 나누는 다나에의 모습을 관능적이고 에로틱하게 표현했다.
그녀의 풍만한 허벅지는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황홀한 듯 감은 눈, 무엇인가를 쥐고 있는 듯한 오른손과 그 끝으로 반쯤 열린 붉은 입술,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격렬한 욕정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엉덩이와 허벅지를 따라 흐르는 금빛 빗물은 자궁 속의 태아처럼 웅크린 다나에에게 순결의 맹세보다는 달콤한 쾌락을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림 속 어디에도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클림트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듯 남자의 모습을 그림 속에서 삭제시켰다. 삭제된 남자의 모습은 더욱 강인한 성적본능으로 남자의 모습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삭제 된 남자. 본능에 의한 오르가즘.
자신 안에 존재하는 남성을 배제시킴과 동시에 내제된 남성의 성적 욕구라는 두 가지 모습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레다’에서도 보여 진다.
야릇하게 웅크린 레다 주변에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레다의 엉덩이 위로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 있는 흑조의 모습만이 존재한다.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레다 역시 다나에 못지않게 격렬한 욕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하얗고 풍만하게 과장된 엉덩이 위에 고개를 내민 흑조는 쾌감에 사로잡힌 레다로 인해 단순한 흑조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나에와 레다 그녀들은 왜 모두 눈을 감고 있는 것일까?
눈을 감은 그녀들은 전지전능한 신 제우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정신세계에서의 쾌락과는 달리 눈을 뜨면 아무도 없는 텅 빈 현실만이 존재한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그녀들의 성적 쾌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감은 그녀들의 눈꺼풀 뒤 세계는 클림트가 이브로 거듭 태어나며 바라보는, 그네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무아지경의 이데아이다.
‘다나에’와 마찬가지로 신화를 바탕으로 그려진 ‘레다’ 역시 남근을 상징하는 흑조의 머리를 제외한다면 또 한번의 숨은 그림 찾기라 말할 수 있다.
이는 ‘유디티’에서도 보여 진다. ‘유디티Ⅰ, Ⅱ’의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나라를 구한 정의의 여인이라기보다는 사악한 욕정에 사로잡힌 살로메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야릇하게 내려다보는 반쯤 감긴 눈, 풀어진 가슴, 목과 허리를 동여맨 황금 장식의 유디티는 어렴풋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움켜진 채 전쟁에 승리보다는 개인적인 쾌감에 사로잡혀 있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는 그녀에게 적개심과 복수심의 대상이 아닌 사랑스런 전유물로써 부드러운 애무를 받고 있는 듯 하다. 이는 절대적인 여성관과도 일맥상통한다.
‘유디티Ⅱ’의 여인은 ‘유디티Ⅰ’에서 보여지듯 성적 욕구가 느껴지지 않는 냉소적인 표정을 담고 있지만 족장의 머리를 들고 있는 손가락의 섬세함은 클림트가 자위하는 여자를 모티브로 스케치 할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시신을 보며 오르가즘을 느낀다는 네크로필리아 (Necrophillia)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남자는 사라졌지만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관능적이고 에로틱함을 풍기고 있다.
여자의 얼굴 뒤로 숨어버림으로써 실제보다 더 부각되는 남자의 모습과 제 3자의 시점에서 관찰하려는 관음적인 모습은 그림 속에서 클림트 식의 젠더와 자의식을 표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3) 여성 안에 꿈틀대는 남성
앞서 밝혔듯이 구스타프 클림트는 여인의 실루엣을 남근과 같게 그리기 위해 많은 드로잉을 했었다. 이는 ‘키스’에서 잘 나타난다.
필자는 이러한 근거를 ‘여인의 세 단계’를 통해 다시 한번 재조명하였다.
‘여인의 세 단계’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여인들의 삶을 단계별로 표현한 작품이다.
곱슬머리에 붉은 뺨을 가진 아이, 아이를 안고 몽롱한 환상의 세계에 빠져 있는 아기엄마 그리고 그 옆에 자연주의 기법으로 표현된 늙고 추레한 모습의 여인.
이들은 여인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인간의 삶을 비유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세 여인의 공통점은 모두가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깊은 잠에 빠진 듯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지만 정확하게 어머니의 가슴을 만지고 있다. 모정에 대한, 생존에 대한 동물적 본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젊은 여인은 자신의 가슴을 더듬고 있는 아이를 모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붉은 뺨과 꿈꾸는 듯 감은 눈은 어머니로서가 아닌 하나의 여자로서의 삶을 갈구하는 듯 하다.
늙은 여인은 고통에 짓눌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는 곧 삶의 고뇌를 뜻하는 동시에 육체적인 아름다움의 소멸, 즉 여성으로서 성적 매력을 상실한 여인의 고독함과 비애를 단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악한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은 이브에게 내려진 형벌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종족 번성의 의무를 갖고 태어난 여자에게 잉태란 형벌이며 신성한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 등장하는 늙은 여인은 더 이상 자신의 의무를 이행할 힘이 없다.
늙은 여인은 형벌을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젊은 여인의 육체가 부러운 듯 그녀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 그림 속에도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늙은 여인의 몸을 감싸고 있는 붉은 기둥 역시 남근의 형상을 띠고 있다.
아름다운 육체의 소멸로 인한 성적 욕구 제로의 육신을 둘러싼 실루엣이 남근이라는 것 또한 아이러니 하다.
마치 아이라도 임신한 듯 앙상한 손가락 마디와는 달리 튀어 나온 늙은 여인의 배는 안쓰러운 동정심마저 불러일으킨다.
고개를 숙인 채 고통 속에 흐느끼는 늙은 여인의 모습은 클림트의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은 아닌 가 의심해 본다.
남근 속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자신. 그로 인해 비탄과 자기혐오에 빠져보지만 결코 아이를 잉태할 수도, 젊은 아기엄마처럼 아름다운 육신을 가질 수도 없는 불행한 자아를 표현한 그림이 아닐까 한다.
요즘 트래스젠더로 인기몰이를 했던 여배우의 등장으로 그늘 속에 숨어 있던 트래스젠더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하나 둘씩 나오고 있다.
그녀들은 아름답다. 그녀들은 대부분 현재의 자신의 육체에 만족한다. 그러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실이 가장 슬프다고 토로했다.
남성을 거부하고 여성이기를 갈구하는 그녀들은 차가운 면도날이 아닌 부드러운 립스틱을 선택하며 화려한 장신구로 육체를 치장한다. 그녀들은 겉모습만 아니라 내면조차 여성으로 변이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이브들은 모두 아름답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브들은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다. 보석을 사랑하는 여인처럼 클림트 역시 보석을, 황금을 사랑한다.
클림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젠더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4) 자웅동체(雌雄同體)로 묘사된 인어
짐승의 머리를 비롯하여 물고기나 인어의 하체는 남근을 상징한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여인들을 많이 그렸다. ‘일렁이는 물, 은빛 물고기들, 물뱀, 황금 물고기’ 등이며 이러한 그림 안에도 클림트 식의 남자 찾기는 계속된다.
흐르는 물과 여성의 결합은 에로티시즘의 극을 치닫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필자는 에로티시즘보다는 클림트의 트레스젠더적 성향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황금빛과 화려한 금박 장식이 신비스럽게 그려진 ‘물뱀 1’에서 그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레즈비언처럼 서로를 안고 있는 인어들은 마치 한 몸에서 파생된 듯 하나의 꼬리만이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다.
자웅동체인 듯 인어들은 같은 모습이지만 서로 다른 젠더를 갖고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몽롱함에 빠져 있는 인어는 든든한 남자인 듯 자신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또 다른 인어를 사랑스럽게 안고 있다.
안긴 인어의 등 뒤로 수줍음과 행복함이 느껴진다. 신비롭게 서로를 안고 있는 인어들은 물고기의 등장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남근을 상징하는 물고기는 그녀들을 바라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 멍청하고 무기력해 보인다.
흐느적거리는 인어들은 물뱀이라는 제목 하에 한 마리 뱀에게서 파생된 자웅동체와 같아 클림트의 자아 속에 자리한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구스타프 클림트는 육체적으로 남녀의 성을 모두 갖지는 않았지만 육체는 남자의 성, 정신은 여성의 성을 갖고 있는 정신적 자웅동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몸에 두 가지의 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의 자웅동체.
클림트의 그림은(키스, 여인의 세 단계 등) 여자의 얼굴 뒤에 남자의 성을 포함시켜 그림 속 자웅동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젠더를 거부하며 동시에 또 다른 성을 갈구하는 트래스젠더는 어찌 보면 자신 안에 두 가지 성을 모두 갖고 있는 자웅동체 성향의 인간군일 수 있다.

Ⅲ. 결론

이중적 자아가 강했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삶은 극히 평범하지는 않았다.
그의 제자이며 친구였던 에곤쉴레처럼 굴곡 많은 삶은 아니었을지언정 그의 정신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행을 그에게 야기 시켰을 것이다.
필자가 제시했던 문제, 즉 주어진 남자로의 성을 거부하며 여성의 성을 갈구하는 트래스젠더적 성향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예술적인 감성을 더욱 고양시키며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붉은 입술과 농익은 표정, 화려한 장신구의 이브들은 캔버스라는 거울 속에 비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또 다른 모습이다.
필자는 지금도 가끔 에밀리가 태워버린 클림트에 관한 자료들이 궁금해진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 군림했던 클림트에게 있어 밝혀져서는 안돼는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에로티시즘의 아름다움 뒤로 트래스젠더를 꿈꾼 클림트의 소망이 에밀리에 의해 작은 바람에도 바스러지는 잿더미로 변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 사람들은 회화로든 글로든 내 자화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다지 유감스러운 일은 아니다.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싶다면 내 그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면 될 것이다. -   구스타프 클림트

필자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말처럼 그의 그림 안에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누구인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의 말처럼 그것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이브를 보라. 그녀들의 목소리에,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성명 : 한경아
성별 : 여
연령 : 1977년생
주소 : 송파구 방이동 163-14호
e-mail : h-kyunga@hanmail.net
전화번호 : 02-416-9251
핸드폰 : 011-341-9251

* 숙명여자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논문 과정
* 격월간전문지 귀금속과 보석 편집장으로 근무
* 현재 월간미술문화 객원기자 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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