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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단편소설1(2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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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84회 작성일 04-11-15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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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삽니다


PBPR(Passbook Printer, 통장 프린터)의 알루미늄 뼈대를 조립하는 일이 송명진(宋銘眞)의 생업이었다. 생긴 모양은 눈동자가 다 드러나는 큰 눈 위에 장수(將帥)의 눈썹이 붙어 있고, 코는 뭉뚝하며 입술은 흑인처럼 두꺼웠다. 또 억실억실한 몸피를 보면 아무래도 힘깨나 쓸 듯한데, 손을 놀리는 품이나 한껏 움츠린 자세는 평화주의자 내지 피난자의 냄새를 풍겼다. 등껍질 속으로 제 오체(五體)를 언제든지 집어넣을 준비가 되어 있는 거북처럼.
생산품이 고가인 관계로 공장은 주문생산 방식으로 돌아갔다. 라인이라기보다 특정의 구획에서 근로자(勤勞者)가 제 할당된 업무를 수행하는. 작업 중에 고전 음악이나 라디오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책임 공정에 있어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어떠한 것도 용납할 수 없음이 공장장 방침인 탓인데, 덕분으로 작업장에는 철컹, 윙──, 금속 소리만 떠돌았다.
피로를 어루만져 줄 선율이 없는 것처럼 오전에 한 번뿐인 휴식 시간을 알리는 멜로디 역시 없었다. 작업 시간은 지옥이다, 휴식 시간은 천국이다, 굳이 멜로디로서 구분하지 않으려는, 휴식 시간도 잊을 만큼 일에 몰두할 이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공장장의 뜻이지만, 유사 이래 제자리를 고수하는 인물은 없었다. 공구를 내려놓고 장갑을 벗고 정전기 방지 띠를 손목에서 빼고 하면서 매점으로 걸음들을 떼었다.
“여어!”
“상봉이로군.”
매점으로 통하는 출입구 앞에서 지류가 모이고 모여 환담을 키웠다. 명진이 출입문 어귀에서 바로 뵈건만 그만 하고 좀 쉬어, 하고 손짓해 주는 이는 없었다. 명진의 전동 드라이버가 혼자 위잉, 위잉, 하고 알루미늄에 나사못을 돌려 박아도.
명진은 웅성거림과 출입문이 절로 쿵,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 알루미늄 고정대 곁에 드라이버를 내려놓았다. 목장갑도 한 짝, 한 짝 벗어 드라이버 옆에 포개 놓고, 고개를 곧추세우지 못한 채 출입문으로 발을 떼었다. 모두 빠져나가고 장내가 퍽 조용하건만 명진의 발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출입문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만 겨우 찰칵, 장내에 남았다.
매점이 들여다보이는 복도와 봄임을 웅변하는 뜰에서 삼삼오오가 음료수 캔 혹은 종이컵을 들고 손가락 새에 담배도 걸고 저마다의 음색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매점 안에 비치된 소파에서는 일단(一團)이 노랑 파랑 아이스크림을 쪽쪽쪽 빨다가 혀를 내밀어 보이기도 했다. 명진은 복도 구석에 딸린 커피 자동판매기에 다가갔다.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동전 두 닢만 세어서 꺼내고, 찰그락, 찰그락,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투입구에 넣었다. ‘밀크커피’. 붉은 표시등이 자판기 중앙에서 깜박거렸다. 명진은 고개를 숙여 커피가 차는 모습만 바라보다가, 종이컵을 빼고 한 모금 맛을 보는 모양새로 밖에 나왔다. ATM(Automated Teller Machines, 자동입출금기) 테스트과 셋이 말을 주고받는 게 들렸다.
“인제 술 좀 깨냐?”
“말 시키지 마. 죽을 거 같어.”
“몇 차까지 간 건데?”
“4차.”
“잠도 못 잤겠네?”
“사우나서 쫌 자고 출근한 거야.”
명진은 셋에 합류한 것도, 외따로 떨어진 것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커피를 홀짝였다.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도 명진은 사우(社友)로부터 두 자리 격한 자리에 앉았다. 우거지국이나 한 숟갈 떠 입에 넣고 우측의 진호를 건너다보았다. 감길 듯 말 듯한 눈에 얄팍한 입술도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헤어스타일을 이렇게 저렇게 물들이고 바꾸고 해서 상대 시선을 머리로 끌어올려 버리는 사람이 진호였다. 또 브랜드다 뭐다 자신을 꾸밀 줄도 알았으며 한 마디, 한 마디 꺼내는 말이 비록 신빙성은 좀 떨어질지언정 같이 있는 자로 하여금 다른 데 쳐다보거나 꾸벅꾸벅 졸 틈을 전연 주지 않았다. 몰입 아니면 파안대소로 청자의 반응을 제한할 수 있는 언변인 것인데, 그 까닭으로 항시 자신감이 충만해 있는 진호의 기세가, 명진은 답답하도록 부러웠다. 더군다나 이날처럼 청자가 인영일 때는 더더욱.
명진은 계란말이 한 점을 입속에 넣었다. 진호 씨하고 나는 동갑내기인데도 왜 이렇게 다를까. 운명이 과연 있기 때문일까. 그 운명을 변하게 할 수는 없을까. 과거의 결과가 현재라고 하더니……. 뒤 테이블에서 걸쭉한 목소리와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도란거렸다.
“간밤에, 공자랑 면담하는 꿈 꿨다.”
“누구?”
“공자.”
“인자요산 어쩌고 그 공자?”
“그래에.”
“공잔지 웬 할아범인지 니가 어떻게 알고?”
“어디로 내가 막 뛰어가고 있는데, 땀 삘삘 흘리면서, 누가 막아서더라고. 누구세요? 그랬더니 지가 공자래.”
“그래서?”
“뭘 그래서. 어딜 그리 바삐 가느냐, 쉬엄쉬엄 가그라, 메뚜기도 한철이느니라, 어쩌고저쩌고 수업 들었지.”
“이야아.”
“뭐가 이야야, 악몽이 따로 없었구만.”
“귀인하고 대화하는 꿈은 배필 생기는 꿈이야!”
“배필은 무슨. 고런 해몽만 믿고 접때 복권 오만 원어치나 샀다가 말짱 황 됐잖아 인마.”
“그 꿈 나한테 팔어라.”
“뭐?”
“내가 살게, 넌 깔치도 있겠다, 필요도 없는 꿈이네.”
“을마 줄 건데?”
“배춧잎 한 장 준다.”
“진짜? 얘가 비싼 밥 먹고 돈 쓸 데가 그렇게 없나아, 좋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너야말로 내 여자 눈독 들이지나 마 이담에. ……, 자 만 원. 내가 산 거다?”
“오냐.”
과거……. 과거를 버릴 수만 있다면……. 새 과거로 바꾸기만 하면 내가 이렇지는 않을 텐데. 백화점에서 과거도 팔았으면……. 과거를 산다……. 꿈 사듯이…….

호프에서 PBPR팀이 회식을 벌였다. 명진은 진호가 침을 튀겨 가며 풀어놓는 언담에 귀를 기울였지만 머릿속에서만큼은 과거……, 추억……, 꿈……, 산다……, 메아리가 고동을 쳤다.
“골목대장 정도가 아니었지이. 짱이라고 들어들 보셨나 몰라.”
“하이고.”
“진짜야. 중학교 때부터 키가 안 자라 갖고 요 모양 요 꼴이지 초등학교 땐 날렸다니까. 가시나들 서로 옆에 앉을라구 머리끄덩이 쥐어뜯고, 선상님은 반장보다 나한테 통솔시키고, 명실상부 천상천하 유아독존!”
여기 쓸어, 저기 걸레질해, 대걸레 다시 빨아 와, 호통하고 명령하는 게 생맥주를 한 모금 마신 명진에게 보이는 듯했다.
“학교장 도장 받아 와라, 그럼 믿어 줄게.”
“야아아, 이렇게 안 믿어 주나? 육상부에, 대가리가 축구공만한 놈이 있었거든. 운동회 계주 하면 꼭 나랑 마지막 주자로 뛴 놈인데, 내 물주가 그놈아한테 삥 뜯긴 거야. 어쨌겠어? 빅 매치. 소각장 옆에 테니스 코트가 있었거든. 한 삼십 분 거기서 치고받는데, 결국은 지 코피 보고 울더라고. 으아아앙!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바로 등극하는 순간이었제.”
위풍당당, 진호가 어깨까지 으쓱해 보였다. 키부터가 진호보다 한 뼘은 더 큰 명진에게, ‘짱’의 모습은 참 거칠 것 없어 보였다. 역경을 때려눕혀 발 아래 두고 높이 주먹을 쥐어 올리는 용사(勇士)의 모습. 나도 용사였으면……. 초등학교 시절을 지우고 우르르 병사들을 몰고 다니는 용사의 추억이 내 어린 시절이 된다면…….
“감히 모반 세력도 못 나오고, 자타가 공인하는 황제 자체였다아 이 말씀이야.”
“알았다 인마. 암튼 썰 푸는 거 하곤.”
꿈……. 산다…….
“저…… 진호 씨…….”
명진이 입을 열었다. 가뭄에 콩 나는 진기한 광경을 지켜보겠다고──빙충이가 입을 열었다고──좌중이 금세 이목을 집중했다.
“그 때려눕힌 추억……, 저한테 파실래요……?”
“네?”
“……제가 샀으면 좋겠는데…….”
“뭘 어떻게 팔아요?”
실소가 진호에게 터졌다. 조소로 전이되는 실소도 좌중에서 불거졌다.
“꿈도…… 사고 그러잖아요…….”
“꿈? 아, 그러니까 지금 꿈 사는 것처럼 내……, 추억을 사겠다는 거예요?”
진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명진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마나 줄 생각인데요?”
“……십만 원 드릴게요.”
“야아 십만 원씩이나? 그래요. 팝시다 까짓거.”
가뭄을 뚫고 올라온 콩이 듣도 보도 못한 콩이라 헤에, 피식, 일행이 흥겨워했다. 맞장구쳐 주는 진호의 작태(作態)도 물론 흥을 배가했다.
“자, 그만들 하고 술이나 마셔. 진호 너도.”
쨍, 쨍, 글라스가 부딪는 속에서 명진이 진호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일순 자리가 조용해졌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기분의 정체가 불분명한 것인데, 진호로서 글라스를 기울이다 푸우, 맥주까지 뿜고 나니, 무리가 한바탕 가가대소로 기분의 가닥을 잡았다.

명진은 인영이 PCB(Printed Circuit Board, 인쇄 회로 기판)에 CPU며 메모리를 꽂는 모습을 아침부터 건너다보았다. 조금은 달라졌을까? 힘이 솟는 추억이 내게도 생겼는데…….
인영은 언제 보아도 푸근해 보였다. 비록 성희롱 운운하며 톡톡 쏘아붙이는 것이 최인영, 하면 공장이 떠올리는 이미지였지만, 동글동글한 얼굴에 부담스럽게 크지 않아 고운 이목구비며 고전 미인처럼 틀어 올린 머리칼이 명진에게는 따뜻하고 친절하게만 다가왔다. 훌륭한 어머니가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자태인 데다, 통통하여 비실대지도 않으니 쉬이 요절해 버릴 걱정도 없었다.
인영이 부속물을 다 끼운 기판을 왼쪽에 놓으면서 명진의 시선을 눈치 챘다. 또 나 보고 있네, 하는 눈빛이 곧 명진에게 닥쳤다. 기왕의 경우였으면 퍼뜩 명진은 시선을 수그렸을 테지만 목하 인영을 마주 보았다, 눈 한 번 깜빡일 동안만큼일지언정. 효과가 있다! 추억이 있는데 당연하지. 과거가 바뀌면 현재도 바뀔 수밖에. 그런데 너무 조금 바뀐 게 아닐까? 아니다, 추억 한 덩어리로 백팔십도 달라질 수야 없다. 감히 욕심 부리지 마라. 한 술, 한 술 떠 먹다 보면 배도 부르게 될 테니까…….

‘밀크커피’ 한 잔을 뽑아 든 명진은 행여 누구와 부딪히지 않을까, 상대 옷에 커피를 쏟지나 않을까 퍽 조심하며 밖으로 나왔다. 진호가 시원스레 담배를 빨면서 포장과 둘하고 농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명진은 농의 추이를 살펴 얘기가 한풀 꺾이기를 기다렸다. 워낙 입심이 거침없는 진호이고 보니 골을 짚어 끼어들기에는 시간과 땀이 필요했다.
진호를 위시해 셋이 주윗사람 들으라고 흐하하하 웃어젖혔다. 명진이 빈 종이컵을 들고 있다 쭈뼛이 다가갔다.
“저…….”
“……?”
명진은 얼른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십만 원을 진호에게 내밀었다.
“여기…….”
돈과 명진을 번갈아 본 진호는 간밤의 해프닝이 눈에 훤했지만, 이게 정말로 돈을 가지고 올까 궁금 반 기대 반을 품고 있었지만 짐짓 의아스러워했다.
“뭐……예요 이거?”
“……어제 드린다고 한 돈이에요. 추억 값…….”
“농담, 아니었어요?”
“…….”
“진짜 줄려구요?”
“……제가 샀잖아요…….”
“…….”
진호가 흔쾌히 대금을 수령하지 않으니 그 앞에서 명진은 덜컥, 불안해졌다. 나는 샀는데……. 판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나……? 꼭 필요한데…….
“판다고 하셨잖아요…….”
“……, 하는 수 없네요 그럼. 카운셀링비 받는 셈 칠 수밖에.”
진호가 십만 원을 받아 들었다.
“이 돈으로, 이따가 내가 한잔 살게요, 카운셀링도 마저 할 겸.”
“안 그러셔도 되는데……. 고맙습니다.”
대작(對酌)은 명진에게 극도로 어색한 일이라 전연 반갑지 않았지만 ‘카운셀링’을 더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굳건히 버티어 섰다. 추억을 또 사게 될지도 몰라……. 아마. 우리 거래를 이렇게 만족스러워하잖아.

진호는 일과 후 명진을 곱창 집에 들였다. 대작과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이유로 식사와 음주를 대충 얼버무릴 수 있는 곱창 집을 찾았다.
물수건과 물이 테이블에 놓일 때 진호가 막창 2인분에 소주 한 병을 달랑 시키고 말을 꺼냈다.
“근데, 추억거리가 그렇게 없어요? 돈 주고 살 정도로?”
“…….”
“과거 얘기나 좀 해 봐요, 이왕 카운셀링 하는 판에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
소주 한 병이 천엽, 동치미 등과 함께 먼저 나왔다. 진호가 명진에게 잔을 건네고 술을 따라 주면서 한마디 했다.
“명진 씨에 대해서 내가 뭐라도 알아야 말을 거들어도 거들죠. 안 그래요?”
“…….”
“맞춤 판매라고도 안 합디까.”
제 비유가 제가 생각해도 뛰어나다고 씨익, 진호가 웃었다. 대꾸의 웃음을 명진이 지어 보이는데, 볼은 일그러지고야 말았다.
“한 잔 하고, 깡그리 한번 읊어 봐요. 불알 단 사내들끼리 숨길 건 또 뭐겠어요.”
진호가 잔을 쳐들었다. 얼른 명진은 톡, 건배에 응하고 소주를 비웠다.
“별로…… 재밌게 살아왔을 거 같진 않은데, 맞죠?”
진호가 담배나 찾는 품으로 넌지시 물었다.
“……네.”
“지루하게만 지내 온 거예요 그럼?”
“……잘 모르겠어요 지루한 게 뭔지…….”
막창이 불판 위에 얹히고 양파 조각도 틈새틈새 놓였다. 나무주걱으로 익지도 않은 막창을 진호가 뒤집어대니, 무언(無言)의 무게가 고스란히 명진에게 끼쳐, 명진은 물 한 모금 마셔 내고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땐 할머니하고 살았어요.”
“단둘이……?”
“네. 엄마가 아프셨거든요.”
“…….”
“다섯 살 때 돌아가셔서 사진 말곤 뵌 적 없어요. ……, 세 살 돼서 할머니하고 살았다니까 한두 살 땐 엄마, 아버지하고 같이 살았을 텐데…… 기억나지 않고요.”
꿀꺽꿀꺽, 진호가 동치미 국물을 마셨다.
“……여섯 살 때 아버지 집에 들어갔는데요, 새엄마, 동생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복동생…….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여기 취직해 들어온 거예요.”
“……, 가족은 자주 봐요?”
“추석에 한 번…….”
명진이 기숙사를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진호로서 ‘한 번’은 의외가 아니었다. 군대에서는 고문관이요 학교에서는 왕따였을 터라는 짐작을, 십중팔구 명진의 설명이 증명해 주었다.
“친척……이 별로 없나 봐요, 회동 별로 없는 거 보면?”
“할머니가 일찍 과부 되셔서 독자세요 아버지. 엄마 쪽은 왕래가 끊겼고요…….”
위로한답시고 진호가 잔을 들었다. 막창 익는 냄새가 제법 꼬수운 가운데, 꾸역꾸역 명진은 소주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입에 흘려 넣었다.
“……추억다운 추억이 전 특별한 게 없어요. 그래서 추억을 사려고…….”
“할머니하고 살았던 기억은 어때요, 동화 같은 거 보면 제법 훈훈하던데.”
“그다지……. 기역 니은하고 a b c 배운 기억밖에는……, 천자문하고.”
“에이, 아무리 그래도.”
“좀 엄하셔서…….”
“…….”
“……어제 진호 씨한테 산 추억은 도움이 되고 있거든요.”
“하, 그래요?”
“더 샀으면 좋겠는데…….”
명진이 의사를 표현하고 지갑까지 꺼내 보이는 용기를 내었다.
“돈도 더 뽑아 왔어요.”
“햐아, 이렇게까지 절실하다면야 어떻게…… 거절할 명분이 없어지는데요.”
사정까지 알겠다, 진호가 하는 수 없다고 헛헛, 팔겠다 하니, 명진의 얼굴에서는 기대가 차올라 갔다.
“무슨…… 얘길 듣고 싶어요?”
“……어린 시절요……. 엄마하고 아빠가 함께한 추억…….”
“보자, 어린 시절이라……. 같이 석화촌 간 얘길 해 줘야겠구나. 우선 한 잔 해요.”
테이블에 지갑이 여전히 놓인 채, 두 사람이 다른 색깔로 신명이 올라서 챙, 잔을 부딪뜨리고 비웠다.
“철쭉, 영산홍, 뭐 그런 거도 물론 좋았지만 그날이 바로 아부지가 첨으로 차 뽑은 날이었거든요. 미니카도 아니고 승용찰 뽑아서 고속도로, 국도 그냥 밟아 주는데 어찌나 신나던지…….”
“…….”
“창문 있는 대로 열어 제끼고 슝, 슝 달려대는 그 첫 경험이란, 혼자 열댓 명 갈아 버리는 기분이랄까? 석조상이다 뭐다 석화촌이 별천지기도 했지만서도, 난 울 아버지가 오너 된 날이라 못 잊으니깐.”
“엄마……도 같이 타고 있었어요?”
“물론이죠! 엄마, 형 다 타고 있었죠. 형이랑은 서로 앞자리 앉는다고 대판 싸울 뻔하기도 하고.”
“어디…… 앉았어요 그래서?”
“갈 땐 앞에, 올 땐 뒤에요. 가위바위보 해서 이겼거든요.”
“엄만…… 아버지 뒤에 앉고요?”
“음……, 네.”
취기도 일조하고 하여 명진의 얼굴에서 다소 긴장이 사그라졌다. 신났겠다……. 그런 추억이 있으면 어떻게 쾌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
“……파실래요?”
“……!”
“사고 싶은데…….”
“……, 그러죠 뭐 굳이 사고 싶다면야.”
“고마워요 정말…….”
“고맙긴요, 도움 된다니까 내가 기쁘죠.”
“얼마…… 드리면 돼요?”
“알아서 줘요 명진 씨가.”
진호가 건배 없이 혼자 잔을 비웠다.
“제가 어떻게…….”
“값 매기기 뭐하면 어제처럼 주든지요.”
“……값어치가 다른 거 같은데…….”
“다르다면……?”
“오늘 게 훨씬 비싸 보이는데…….”
“……, 깎아 주는 셈 칠게요, 더 얘기 말고 술이나 마저 마십시다.”
짐짓 호탕한 품으로 진호가 잔을 채워 들었다. 명진은 미안한 안색으로 건배를 좇았다.

흰색의, 윤곽이 우아한 세단이 꽃길을 달렸다. 힘차게 엔진 음을 부르르릉 울리면서 뻐엉 뚫린 가도를 미끄러졌다. 거스르는 차는 물론 앞서 가는 차도, 뒤를 쫓는 차도 없었다. 오직 시워언한 바람만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뒷자리에서 명진은 엄마와 나란히 앉아 머리를 흩날려 주는 바람을 맞았다. 엄마 손을 꼬옥 잡고 길가에 핀 철쭉이며 영산홍을 보고, 맡았다. 아, 좋다……. 아버지는 운전대를 가볍게 돌리다가 허밍을 시작했다. 음, 음음──.
“음, 음음──!”
PBPR 뼈대를 수거대에 올려놓다 명진은 제가 콧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콧노래를 부르다니……. 모록모록 위화감이 솟아 몸을 감쌌고, 쨍그랑, 거울을 깨는 심정처럼 저릿하게 흥분도 일었다.
명진은 알루미늄 고정대에 새 알루미늄 편린을 집어넣으며 인영을 건너다보았다. 이제는 얼마나 눈을 안 뗄 수 있을까. 혹시 웃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규정할 수 없는 에너지가 심장에서 만들어졌다. 세상에, 콧노래라니…….
위잉, 명진은 나사못 두 개를 돌려 박고 재차 인영을 보았다. 발광 다이오드를 한 무더기 쌓아 놓고서 다리 한 쪽을 니퍼로 짧게 잘라 내는 일에 여념이 없는. 복숭아 빛으로 발그레한 볼과, 싸구려로 보이지 않는 새까만 흑발.
인영이 손등으로 콧방울을 쓸더니 명진을 보았다. 깊게 검은 눈동자가, 또 나를 보고 있니, 하고 말했다. 명진은 어깨와 턱, 목, 미간까지 굳었지만, 시선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엄마 손이라도 되는 양 전동 드라이버를 꼭 쥐고, 눈썹을 움찔거렸다. 인사를 건네자. 미소를 짓자. 인영이 시선을 거두어들여 제 업무로 돌아갔다.
명진의 구획에서는 한동안 드라이버 소리가 돋아나지 않았다. 내가 시선을 안 피했다! 비록 미소를 주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눈을 마주 하고 한 사람을 대했다……. 검은 커튼이 활짝 걷히는 해방감이, 명진은 발끝부터 밀물로 차 올랐다. 꽃길의 가볍고 향긋한 공기를, 부담스러울 만큼 들이쉬었다. 추억의 어마어마한 힘아! 두 번 샀을 뿐인데 이 정도라면……. 품질 좋은 추억을 사기야 했지. 이만한 추억을 또 사게 된다는 보장이 있을까. 그저 꾸준히 사야지. 하나하나 사 모으다 보면 뭉치고 뭉쳐서 하나의 근사한 과거로 자리잡힌다……. 명진은 막 웃고 싶어졌다. 얼굴 근육 한 줄, 한 줄이 웃음을 원했다. 아직 이르지……. 부족한 부분을 꼼꼼히 채우면 그때 웃을 수 있다……. 진호 씨와 인영 씨 곁에서.

명진의 과거가 공장에 퍼졌다. 가벼운 진호의 입술이, 명진이 ‘빙충이’에서 ‘불쌍한 빙충이’로 거듭나도록 일조한 셈이었다.
명진은 휴식 시간에 종이컵을 들고 사우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했다. 점심시간에도 일부러 한산한 테이블로 돌아 들어가지는 않았으며, 웬만하면 회식 자리도 기피하지 않아 혹시 추억담이 흘러나오나 귀를 세웠다. 일행에게 술이 오르고 얘기들이 뜸해질 즈음에는 말을 꺼내는 일에도 애썼다.
“추억…… 뭐 없으세요, 제가 살 수 있는데…….”
애초 기대만큼, 금방금방 갈퀴로 추억을 긁어 모을 수는 없었다.
“그만 좀 해라 인마. 니가 그러니까 천치 소릴 듣는 거야.”
주사를 부리거나, 추억담을 얘기는 해도 팔지는 않는 동료가 많았다. 겨우겨우 돈을 쥐여 주면 다음부터는 아예 추억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해서, 단골로 남는 이는 진호 혼자였다.
여하간 세일즈가 힘들기는 해도 수확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기에, 명진의 기억 창고에는 추억이 하나, 하나 조용히 쌓여 갔다.
“추억이라……, 난 엄니 자장가 소릴 못 잊거든. 밤마다 어렸을 땐 흐물흐물한 덩어리 하나가 찾아와 가지고, 왜 있잖아 아메바 같은 거, 그놈의 게 온 방을 돌아댕기니까, 엄마 자장가가 꼭 필요했다고. 또 엄만 그런 날 이용해 먹었어요오. 이번 시험 잘 보면 불러 준다, 20등 안에만 들어라. 거기다 대고 난 또 흥정을 했지. 한 달 동안 불러 줘야 돼. 하여튼 간에, 자장가 소리 참 편안했어. 족보도 없는 이상한 노래긴 했지만서도. ──, 뭘 또 불러 봐. ──, 참나 알았어 그럼, 대충 불러 볼게.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그대가 떠나가도, 갈 테면 가라아지, 하하아하하, 대충 이런 식이야.”
“제가 이래 뵈도 웅변은 쫌 하거든요. 전국 남녀 웅변 대회서 우수상까지 받았어요. 한 백 명…… 참가했나? 청중만 해도 거의 천 명은 됐을 테니까 꽤 큰 대회였다구요. ──, 4학년 때요. 떡하니 천 명 앞에 올라갈레니까, 아주 땀이 줄줄 나더라구요. 연단 알죠? 청중 굽어보는 데. 연상 내려치면서 빨갱이가 어떻고 일장 연설 하는 거죠 뭐.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학원에서 써 준 대로 타이밍 맞춰서 제스처 지르고, 부르으짖습니다아 악도 쓰고요. ──, 그럼요, 엄마, 아빠, 이모, 다 있었죠. 현수막만 안 걸었지 할 건 다 했어요, 우수상까지 탄 걸 보면 치맛바람도 일으켰는지 모르죠, 헤헤. 아주 나라믄 엄만 극성이셨으니까.”
“추억이랄 거까진 없고 그냥 들어. 초등학교 5학년 때, 벌써 삐죽삐죽 털이 나기 시작했거덩 나. 좀 이른 편인 건 맞는데 뭐가 자랑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게야 어무이가. 하여간 내가 밖에만 나가면 ‘형철이 다 컸다메?’ 인사 받기 바빴으니까. 어떻게 반 애들도 다 알어. 여자애들까지. 헤이고, 가출할 생각 십수 번도 더 했다 어린 맘에. ……돌아가신 지 올해로 6년이거드은. 기일만 되면 그 생각이 젤 먼저 떠오르더라고.”

명진은 부드러운 품으로 알루미늄 단편들을 이었다. 하나, 하나 직각으로, 수평으로 맞대고 엮어 나사못으로 고정했다. 등에 지고 있던 껍질은 벗어 낸 듯하여 운신이 가벼웠다. 공장장 고집대로 어떤 음악도 장내에 떠돌지 않았지만 새록새록 영혼의 곡조가 명진에게는 작곡되었다. 음, 음음──.
메인 보드 박스를 한 수레 손수 밀고 오는 인영이 명진에게 보였다. 키가 작은 편인 인영으로서 강철 수레는 퍽 버거우리라, 명진은 전동 드라이버를 내려 놓고 구획에서 나와 자박자박 인영에게 다가갔다. 수레를 끌어 주었다. 깜짝, 놀란 것은 비단 인영뿐이 아니었다. 내가 인영 씨를 돕고 있네! 환락이 명진을 어지럽혔다. 미소가 절로 입가에서 비어져 나왔다.
수레가 인영의 일터에 도착해 멈추었다. 모든 것이 정지하자, 아담하지만 실로 큰 자태가 지척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차리자 명진은 미소가 꼬리를 감추어 갔다. 한마디 해야 해. 나도 이제 날씨를 즐길 정도는 되잖아. 몇 마디 말쯤 입만 열면 낼 수 있어. 어서 입을 열자. 무슨 말을 할까?
“고마운데요, 혼자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인영이 호의에 일단락을 지었다. ‘무슨 말’에 대한 궁리와, 대답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한데 합쳐지는 판국을 맞아 명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구획으로 돌아왔다.

퇴근 시간이 다 돼서 진호가 명진을 찾아왔다. 그 이유가 진기한 것이 둘이 술이나 한잔 하자는 게였다. 뭐 다른 약속 있느냐 진호가 묻지는 않았다. 이제 명진이 기숙사로 직행할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소주나 한잔 하죠, 내가 갈비 쏠게요. 명진으로서 얼떨떨했지만 제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네.
소갈비 2인분이 쟁반에 담겨 나와 숯불 위에 올려졌다. 진호가 업무만큼이나 익숙하게 소주잔을 채워 주고 채웠다.
“그래, 요즘 추억 좀 사는 거 같던데 많이 샀어요?”
“……그냥 좀…….”
“별로 발 벗고 팔거나 하진 않죠?”
“네…….”
“소 닭 보듯 하는 거죠 뭐. 제 일 아닌 담에야 어디 신경들 쓰나요?”
“그렇겠죠……?”
“명진 씨 지켜보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한잔도 해야겠다 싶어서 부른 겁니다.”
채 갈빗덩이가 조각나기도 전에 진호가 건배를 청했다.
“꽤 큰 추억이 있긴 하거든요.”
“……?”
“어째야 될까 사실 잘 모르겠어요. 분명히 명진 씨한테 도움은 되겠지만, 나로서도 이걸 팔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떤 건데요, 호기심 가득 찬 표정이 대번에 명진에게서 표출되었다. 진호는 첫 잔이 쓰다는 양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진호 씬 몇 번 팔기도 하셨고, 또 큰 거라면……, 제가 욕심 부릴 수야 없죠.”
“…….”
“추억이 많이 없어지면 안 되니까……, 이해해요.”
“에이, 요번 거 팔아도 추억 아직 많으니까, 별로 팔아도 해 될 건 없어요. 명진 씨가 문젠데……, 사게 되면 이번 건 비쌀 테고, 무리하는 건 아닌가 괜히……, 그런 거죠 뭐.”
“돈은 괜찮아요, 저보다 진호 씨가 큰 추억을 파시면 아무래도…… 힘드실 텐데…….”
“아 난 괜찮다니까요. 기억력이 좋아서요, 이것 말고도 기억하는 거 쎄고 쎘어요.”
유머 한 방 날렸다는 품으로 진호가 입술을 찢었다. 어느새 고깃점은 먹기 좋게 잘려, 노릇노릇한 기름기를 흘리고 모락모락 연기를 피웠다.
“고기 타네, 들어요. ……, 그냥 얘기나 할게요, 사는 건 둘째 문제니까.”
진호가 상추도 없이 두 점을 포개 입에 구겨 넣고 회고에 젖었다.
“초등학교 졸업하는 해였어요, 졸업 선물 겸해서 떠난 여행이니까. 주말 끼고 3박 4일 동안 그리스 갔어요, 온 가족이.”
제주도에도 가 본 적 없는 명진에게 ‘그리스’는 벌써 마법 같은 환열을 무럭무럭 불러일으켰다.
“11월에 갔거든요. 거긴 여름이 성수기라 바가지도 안 쓰고 사람들 치이지도 않고, 아주 편하게 돌아다녔어요, 가이드 같은 거 없이. 어디부터 들려줘 볼까……, 아, 산티그마 광장이라고 있어요, 아테네 중심에. 마침 주말에 갔으니까 근위병 사열식이라고 있었죠. 뭐라더라…… 무슨 조네스라던가? 복장이 아래위 온통 하얀색에 검정 조낄 입었는데, 수가 참 예뻐 갖고 뭔 군인 복장이 저래, 그랬더랬죠. 신발도 워커 같은 건 절대 아니고 이만한 방울이 신발코에 붙어 있고요. 그러고선 또 무슨 인형같이 착, 착, 발 들면서 교대식 하는 거예요. 총만 안 들었으믄 완전 광대였다니까요. 한잔 해요, 또 신나지네.”
명진이 산티그마 광장에서 갈비 집으로 돌아와 잔을 들었다.
“미트로…… 미트로……, 아, 미트로 폴레오스 대성당. 뭔 놈의 예배가 그렇게 긴지. 또 예배당엔 왜 그리 노인네들만 있는지. 성화 좀 보고, 신자 쫓아서 거기다 입도 맞추고, 빵 조각 하나 집어 먹고 나왔죠. 그리구…… 올림픽 스타디움에 갔나? 한창 마라톤 벌어지데요. 원랜 못 들어가는 덴데 마라톤 경기 때메 입장할 수 있더라구요. 올림픽 스타디움이 어떤 덴진 알죠?”
“……모르는데…….”
“제1회 올림픽 열린 데잖아요. 공부 좀 하지.”
부끄럽다는 웃음이 명진의 볼에 피어올랐다.
“하여간 전부가 다 대리석인 게, 꽤 볼 만하더라구요. 2004년엔 거기서 올림픽 열려요.”
그렇구나, 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산토리니 간 얘기 해 줄게요. 초승달 모양 섬이거든요. 화산이 폭발해 갖고 섬 일부가 가라앉어서 그렇대요, 그니까 화산섬이죠. 거기 무슨 유적지 가믄 화산재로 매몰된 고대 도시 유적도 볼 수 있어요. 근방에 레드 비치라고 절벽이 새빨간 해변도 있구요. 혹시, 이아마을은 들어 본 적 있지 않아요?”
“…….”
“썬쎗이 젤로 아름답다고 유명한 곳인데.”
“…….”
“아, 일몰요. 거기선 한눈에 산토리니 다 보이거든요. 비수기라 뜰에 관광객도 거의 없고, 꼭 장난감 집만 다닥다닥 붙여 놓은 것처럼 보이죠. 에게 해는 새파랗고, 그걸 보는 가옥들은 하아얗고……. 또 노을 배경 삼아서 석양은 붉게 가라앉고…….”
“…….”
“썬쎗 포인트라고 있거든요, 사진사들도 많이 오는 덴데 거기서 그냥 넋놓고 보는 거예요. 온 가족이.”
“나란히…… 앉아서요?”
진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어 점 갈빗살 집어 먹는 것도 잊지 않고 씹으며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보자……, 담날은 수불라키 먹고, 아 수불라키가 뭐냐면 꼬치구이라고 생각하믄 돼요. 양고기하고 야챌 뭉텅이, 뭉텅이 꽂구 소금, 후추, 살짝 간해서 먹는 거죠.”
상상이 가냐고 진호가 꿀꺽, 침을 삼켜 보였다.
“조금 띠어서 고양이도 멕이고 그랬죠. 여기나 거기나 고양인 똑같더라구요. 나귀도 잊을 수 없죠. 올드 포트라고 거기 나갈려면 돌계단만 30분은 걸어 내려가야 되거든요. 케이블카도 줄줄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나귀만큼이야 운치 있겠어요? 한 마리씩 올라타고 항구까지 내려가는 거예요.”
“…….”
“내려가선 요트 한 척 어렵사리 빌려 갖고, 에게 해, 휘저어 버렸죠 뭐. 오후 내내. 한여름이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춥거나 하진 않았어요. 아주 속이 다 뻐엉 뚫렸으니깐.”
저도 모르게 명진은 입이 벌어졌다. 갈증이 일 정도로 구매욕이 치솟고 일렁였다.
“사고 싶은데, 진호 씨한테 정말 피해가 안 된다면…….”
“피해는요 무슨.”
“진짜…… 파시겠어요 그럼……?”
“사시게요? 이걸 그렇다면 얼마에 팔아야 되나? 웬만한 추억도 아니고…….”
“얼마…… 드리면 돼요? 한…… 백만 원이면 되겠어요?”
명진은 어서 매매에 도장을 찍고 싶었다. 과욕에 대한 죄책감이 뱃속에 똬리를 틀었지만 다른 데도 아니고 그리스를 여행한 추억이라는, 게다가 온 가족이 함께 떠난 여행이라는 눈앞의 사과가 너무 크게, 맛있게 보였다. 갈비 집을 에게 해의 산토리니로 탈바꿈시킨 추억담은, 진호가 며칠 전에 티브이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영상이라는 사실을, 진호의 카드 빚 총합이 천만 원대로 넘어섰다는 사실을 명진으로서는 알 리 만무했다.
“나야 뭐 명진 씨가 주는 대로 받아야지 어떡하겠어요. 돈 욕심에 팔겠다는 것도 아니고.”
“잠깐만 기다리실래요? 금방 돈 뽑아 올 수 있는데…….”
“내일 아침에 줘도 돼요.”
“얼마 안 걸려요, 조금만 나가면 현금 지급기 있잖아요.”
명진은 다소 비굴한 안색을 띠었다. 하룻밤 새 혹시 진호 씨 맘이 변하지 않을까, 이번 추억을 사고 못 사고가 앞으로의 인생을 갈리게 하는 중대 고비가 될 것만 같았다. 다행히 진호가 청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요, 정 그러고 싶으면야.”

출입문을 열고 나오는 명진의 표정이 입사 후 언제보다 밝았다. 눈인사를 주는 사우도 몇 있어 다소 수줍게 고개를 까딱까딱해 보이고는 자판기 앞으로 갔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두 닢을 세어 투입구에 넣고, ‘밀크거피’. 쪼르르르 종이컵에 커피가 차는 동안 명진은 매점 안을 들여다보았다. 인영이 소파에서 횃불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명진은 종이컵을 뽑고 커피 한 모금 입 안에 흘려 넣은 후, 다시금 인영을 건너다보았다. 분홍빛 입술이 바닐라를 조금 베어 무는가 하면, 관리팀 수희 씨와 무어무어 말을 주고받았다. 명진은 꾸울꺽, 커피를 삼키고 인영에게 발을 떼었다. 자판기에서 소파까지는 생각처럼 멀지 않아 몇 발짝만에 인영의 발치에 가 닿았다. 인기척을 느낀 인영이 시선을 들어 물음표를 던졌다. 명진은 산티그마 광장에서 사열을 받았다. 왕방울이 코에 달린 군화를 신고 장난감처럼 행진하는 병정들이 척, 경례를 올려붙이는 게였다. 사열하다 말고 명진은 곁에 서 있는 나귀에도 올라탔다. 한 손에 고삐를 쥐고 카우보이 흉내까지 내다가, 뒤를 한번 돌아다보았다. 엄마와 아버지, 동생이 따각따각 내려오는데, 동생이 일순 고삐를 꽉 쥐고 이랴, 외치는 통에 뿌욱뿌욱 나귀가 콧김을 뿜으면서 명진을 앞질러 갔다. 금방 아버지도 그 뒤를 따랐고, 엄마도 “……어서 와…….” 들릴 듯 말 듯한 말만 남기고 동생과 아버지를 따라갔다. 돌계단의 모퉁이를 도는 것을 끝으로 엄마마저 더는 뒷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가옥의 창이며 케이블카 안에서 아이들과 그 부모가 명진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당나귀도 멈추어 버려, 명진은 머릿속이 쪼그라드는 고통을 입었다──곁과 뒤는 고사하고 앞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얼른 가아! 명진은 이를 악물고 고삐를 당겼다. 히히힝, 나귀가 몸을 채고 뛰쳐나가 하마터면 돌계단으로 떨어져 내려 머리가 깨질 뻔했지만, 꼬옥 버티었다. 모퉁이를 돌아 식당 앞에 멈출 때까지 나귀 목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엄마와 아버지, 동생은 수불라키를 하나씩 들고 한 덩이, 한 덩이 꼬치에서 뽑아 먹고 있었다. 나귀에서 내리는 명진에게 돌아오는 수불라키는 없었다. 동생이 배가 부르다고 먹다 남긴 덩어리를 고양이에게 던져 주기는 했다. 자, 요트 타러 가자, 아버지가 가족을 이끌었다. 명진에게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동생, 엄마가 차례차례 요트에 올랐다. 명진은 후미에서 달리고 달려서야 겨우 요트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부아아앙, 요트가 속력을 붙였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명진은 혼자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창창한 무변(無邊)의 에게 해가 요트의 이물에 받혀 물보라를 일으켰다. 명진은 겨우 몸을 가누고 선두로 나갔다. 갓난아기 적으로 영혼을 되돌리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차츰 시야를 드넓혀 주었다. 흐으으 심호흡을 해 보는데 켁, 기침이 목구멍을 아프게 했다. 콜록. 숨도 못 쉬어서 어따 써! 돌연 꾸짖는 소리에, 명진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어머니인 만큼 미색이 남아 있는, 키만 컸으면 여러 놈 씨 울렸을 거이다 자타가 공인하는데도 청상과부의 꼬리표를 임종 시까지 떼지 않은 할머니가, 지척에 다가와서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 사품에 명진은 푹, 고개가 숙여졌다. 다시 들이켜! 명진이 주눅 속에서 숨을 들이쉬었다. 흐으, 컥, 쿨룩. 알밤이 재차 옆머리를 짓찧었다. 다시! 흐, 커억, 쿨루욱. 알밤. 요트가 멈추었다. 명진은 할머니를 들여다보았다. 너만은 네 아비하고 다르게 키우련다 이놈아, 하는 의지가 미간에 불룩하게 보였다. 어서! 알밤! 할머니를, 명진은 바다로 밀어 버렸다. 수영이나 해 할머니. 바다색과 진배없는 하늘을 향해 명진은 고개를 쳐들었다. 흐으으으읍, 폐의 밑바닥까지 바닷바람, 하늘바람을 받아들였다. 자박, 자박 맨발소리를 내면서 엄마가 뒤에서 다가왔다. 명진은 엄마 손을 쥐었다. 망망한 대해가 엄마로 하여금 달리 갈 곳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 실은…… 제가 인영 씰 좋아하거든요.”
“……!”
“이따 끝나고…… 시간 있으세요?”
“…….”
“……, 영화 한 편 같이 봤으면 좋겠는데…….”
“……죄송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 그럼 식사……라도 같이 할래요?”
“……잘못 알아들으신 거 같은데요. 저 명진 씨랑 사귈 맘 없어요.”
“그래요……. 실례했습니다.”
명진은 고개를 숙이고 매점을 빠져나왔다. 언제부터 매점이며 복도가 조용해진 것까지, 한 몸에 온 시선을 입었다는 것까지 명진의 오감이 감지하지는 못했지만,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표정만은 아이처럼 천진했다. 이제 됐다는 성취감과 해방감이, 앞으로는 뭐든지 해 낼 수 있을 듯하다는 의욕이 만면에 흘러넘쳤다.

점심시간이 되어 명진은 구내식당에 발을 들였다. 식권을 식권함에 넣고, 수저를 챙기고, 식판에 밥과 장조림, 무생채, 시금치, 달래국을 받아 ATM 테스트과 셋의 곁에 가서 앉았다. 의자를 격해서 앉지는 않았다.
팜파라팜팜파, 배식 창구에서 핸드폰 멜로디가 관현악단이라도 납신 양 울려 퍼졌다. 식사를 하던, 배식을 기다리던 이목이 당연히 멜로디에 모였다. 진호가 전화를 받았다.
“네. ──, 네. ──, 입금해요. ──, 글쎄 입금한다고요! ──, 언제긴 언제야 봉급 타면이지! ──, 뭐요? ──, 아 맘대로 하든가!”
딱 소리가 나도록 폴더가 닫혔다. 여적 주목을 하고 있는 이목에 대고, 진호가 “구경났어요?” 일갈을 터뜨리고, 제 분을 못 이기는 걸음걸이로 빈 테이블로 가 한쪽에 식판을 놓고 앉았다.


남 31세
018-507-1773
031-761-1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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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도평리 신일아파트 10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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