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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단편소설2(2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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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目擊)
“쉰세 집요.”
“쉰일곱 집.”
“겨우 넉 집 이긴 거예요 그럼? 많이 이긴 줄 알았는데.”
“잘 둔 거야 그래도.”
“덤이라도 있었으면 제가 지는 거잖아요.”
“접바둑에 덤은 무슨…….”
“한 수 더 두시겠어요?”
“정리해야지 이제.”
“시간이……, 벌써 열한시네!”
“한창 시간 가는 줄 모를 때지. 머리통도 바둑돌로 보이고.”
“하하.”
오금에 쥐가 나는지 아기작아기작, 형님이 슈퍼로 들어간다. 나는 바둑판 등 챙겨 문방구로 들어와 캐시 박스를 연다. 27만 원. 신선경에서 세파로 기분이 끌어내려진다.
눈알, 연예인 사진, 뿅망치, 물총, 바비 인형을 가게 안으로 들인다. 곁에서 형님은 세일차 진열해 놓은 과자류에 천막을 씌우고 수담의 장(場) 파라솔을 접는다. 나는 오락기 두 대도 문 안으로 들여 놓고 셔터를 내린다.
“내일 봐요 형님.”
“그래, 들어가.”
매상이 시원찮다. 원가며 가겟세, 이거저거 빼고 제우 월(月) 백육십이 남는다. 해가 다르게 주는 액수……. 집에서 가깝다고 얼른 얻은 가게가 아무래도 목이 신통찮은 게다. 가게를 옮겨야 되는지, 업종을 바꿔야 하는지. 터 잡기가 녹록하기만 하다면야 무에 문제랴.
인륜지대사라고 그렇게 결혼을 일찍 한 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는다. 돈이나 좀 쟁여 놓고 살림을 내도 냈어야 하는데 어버이 말씀 틀린 거 없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자식새끼 대가리는 자꾸 커 가지, 웬수 같은 집값은 천정부지지, 원형탈모증이 왜 나한테 안 걸리는지 모를 노릇이다.
서울 하늘이라 별이 없다. 달도 어디 처박혔는지 안 뵈고 시궁창처럼 먹장이 오가는 게 내일은 비라도 올 모양이다.
담배를 입에 빼 문다. 이 주머니, 저 주머니 라이터를 찾는데 소리가 들린다. 아직 반만 지어진 연립주택 속에서. 공사를 밤에 할 리도 없고, 드러내 놓고 나는 소리도 아니라 새록새록 이상하다. 큼직한 쥐새끼가 부스럭대는 거 같은 소리. 찍찍대기도 하는데 한 마리도 아니다.
나는 ‘공사중’ 팻말 사이를 지난다. 현관이니 대문이니 모양도 갖춰지지 않은 흉물이라 계단에서 문간을 지나 쑤욱 고개만 디밀어도 내부가 확인된다.
“뭐……?”
나는 ‘쥐새끼’ 셋을 목도한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들춰진 여자의 옷가지 아래로 가슴과 허벅지 깊은 곳이 드러나 있다. 그 위에서 엉덩이를 깐 남자의 손에 잭나이프. 마스카라가 범벅된 여자의 눈물과 당혹한 남자의 눈깔이 곧장 나를 향한다.
“저 새끼 잡아!”
남자가 겁탈의 지척에 있던 자를 다그친다. 씨름 선수의 몸피가 곧바로 내게 닥쳐, 나는 머리끄덩이를 휘어잡히고 무릎이 바닥에 꿇린다.
“문방구 주인이야, 저 밑에…….”
“망을 어떻게 본 거야, 좆같고 김새게 진짜…….”
‘잭나이프’가 긴 팔로 바지를 올린다. 좁은 미간을 더 우그러뜨리고 얄팍한 입술로 살의 서린 말을 뱉으면서 다가온다.
“야밤에 이런 덴 왜 기웃거려? 뭘 어쩌자고?”
술 냄새가 대뜸 풍긴다. 맹독을 타 마신 거 같은.
“이 새끼 이거 어쩌면 좋지…….”
잭나이프를 접지 않은 채 남자가 발길질하려는 것처럼 몸을 움찔거린다. 움칫움칫, 나는 몸이 경직된다.
“지갑 꺼내 봐.”
손을 돌려 나는 지갑을 꺼낸다. 왼손이 주는 동작을 거든다. 만 원짜리 뭉치가 빠져나가고 빈 지갑이 무릎맡에 떨어진다.
“친고죄라고 알어?”
“……?”
“피해자가 고솔 해야 사건성립이 되는 죄가 친고죄란 말이지. 이 방면으론 내가 좀 알거든. 강간이 바로 친고죄라고.”
“…….”
“무슨 소린지 알아먹어? 니가 어쩔 수 있는 건 암것도 없단 소리야. 강간다운 강간 하지도 않았고 아자씨 때메.”
“…….”
“그 사지, 말짱허니 보내 줄 참이니까 조용히 사셔. 배창시 꺼내 주는 수가 있으니까 참고하고.”
날 끝이 오른 눈 앞에서 왼 눈 앞으로 오간다.
“알아들었어?”
“…….”
“알았냐고 이 새꺄아.”
“네.”
존대가 튀어나온다. 기껏 스물대여섯 먹었을 자한테 서른둘이.
“가자.”
잭나이프가 발을 뗀다. 바닥에 처박히는 품으로 머리끄덩이가 놓이고, 여자와 나만 건물에 남는다.
마스카라를 아직도 닦지 않은 여자가 옷매무새를 만지기 시작한다. 어깨 파인 천 쪼가리에 미니스커트가 고작이라 만질 데가 많지는 않다. 미니스커트만 잡아 늘인다. 여자는 백을 찾아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확인한다. 마스카라를 닦는다. 간단없이 눈물이 솟아, 닦은 곳을 엉망으로 만든다. 참 많이도 마스카라를 처바른 게다. 여자는 눈물로 화장을 다 지우고서야 몸뚱이를 일으킨다. 비척비척 걷기 시작해 나를 지나친다. 나는 없는 모양이다.
입때껏 무릎이 꿇려 있는 걸 자각하고 지갑을 집어 올려 뒷주머니에 꽂는다. 손을 짚어 일어서서 온기가 남아 있을지 모를 겁탈의 장을 건너다본다. 다시 엉덩이를 목격한다. 건물을 빠져나와 ‘공사중’을 건너면서 길의 위아래를 돌아본다. 막 오르는 반백의 남자가 보일 뿐이어 ‘쥐새끼’는 보이지 않는다.
위쪽 방향으로 ‘집’이 적히고 아래쪽으로 ‘경찰서’가 쓰인 이정표가 발 앞에 놓인다. ‘경찰서’는 ‘112’로 바뀌어 글씨가 훨씬 커지고 더욱 가까워진다.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만 몇 차례 놀리면 되는데 친고죄 어쩌고 남자가 뇌까린 말이 떠오른다. 일단 ‘집’으로 발을 떼기로 한다.
머릿속에서 구더기 수만 마리가 꾸물꾸물거린다. 벌려진 가랑이 사이로 오르내리는 엉덩이와 박힐 듯이 와 닿은 칼 끝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다.
피우지 못한 담배를 집 앞에서 빤다. 한 모금, 한 모금 진창에서 게워 낸 연기는 충충한 대기를 더 탁하게 만든다. 타고 남은 재가 고개를 숙이다 제 무게를 못 이겨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더 빨 데 없는 꽁초를 나는 손가락을 벌려 놓아주고 발끝으로 짓이긴다.
공사중인 건물과 흡사한 구조의 연립에 든다. 2층에 올라 초인종을 대하는데 눌러야 하는지 잠깐 고민이 된다. 이 버튼을 누르고 집에 들어갈 수 있느냐.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 나 왔어, 아빠 왔다, 눈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겠느냐. 얼른 깃들이고 싶다는 욕구하에, 나는 버튼을 누른다. 딩동. 안에서 아내 음성이 비어져 나온다.
“자기야?”
“…….”
시원스런 품으로 문이 열린다. 현관에 들어 나는 신을 벗는다.
“……왜, 무슨 일 있었어?”
“…….”
윗도리를 벗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건다.
“문까지 잠그네? 자기야.”
거울 속 나를 본다. 핏발이 눈알에 서 있고 각진 턱이 실기룩거린다. 벌어진 어깨는 꼭 항우장사처럼 비치며 상고머리도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가 아주 쉬웠을 법하다. 또 투욱 불거진 광대뼈는 인상을 누구보다 험악히 만드는 데 일조하건만 목하 개기름만 흘리고 있다. 목부터 피가 들어차 나는 세수로 혈류를 식힌다. 물이 많이 튄다.
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옷이 푹 젖지 않을 만큼 푸슬푸슬.
애들을 호릴 갖가지 물건이 평상시처럼 안팎에 진열되어 있다. 나도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카운터에 엉덩이를 붙여 앉아 있고.
형님이 들어온다.
“바둑이나 두지, 손님도 없는데.”
화생방 교육장에서 빠져나가는 심정으로 바둑돌 챙겨 형님 뒤를 따른다. 파라솔 아래 앉아 형님과 머리를 마주하니 초식동물처럼 안도감이 슬슬 피어오른다. 무리를 이루었으므로.
빗방울 소리 전하지 않는 보슬비 아래 하나, 하나 바둑돌을 열십자에 놓는다. 장고에 임하지도, 형님 착수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는 덕에 대국은 속기가 된다. 돌의 다음 모양이 어렴풋이도 안 보이고 형님 손 가는 대로 따라만 둔다.
“기자절야. 배경 돌이 이렇게 강한데 무조건 끊고 봐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떨이에 꽁초를 누른다. 말라깽이 형님은 담배를 안 태우니까 여남은 개 꽁초 모두 내가 피워 죽인 시체다.
“단수.”
나는 어디가 단수인지 살핀다. 대마 생사 여부는 그래도 보이지 않아 다시 담배를 문다.
때 되서 짬뽕을 시켜 먹고 몇 판째인지 모르는 판을 다시 짜 가는데 ‘잭나이프’가 지척에 와 선다. ‘밤’과 ‘낮’이 다르고 ‘음침한 건물 속’과 ‘탁 트인 대로변’이 달라 윤곽이 조금 달리 보이지만 새끼가 분명하다. 침이 마르는 것으로 몸이 반응하므로. 씨──, 새끼가 웃는다. 나는 새끼를 쳐다보기 위해서 고개를 들어야만 한다.
“볼펜 하나 주세요.”
“……, 네.”
나는 가게로 들어온다. 네, 라고 말한 건가 내가……? 볼펜 꽂이대 앞에 서니 어떤 볼펜을 달라고 하는 걸까, 의문도 인다. 피라도 토할 만큼 기가 막히는데 볼펜의 종류는 너무 많다. 새끼가 한 말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누런 이가 보일 듯 말 듯한 냉소(冷笑)만 떠오르는 가운데, 꽂이대 구획을 훑던 눈은 한 구획에 와서 머무른다. 제일 비싼 품목이 꽂혀 있는. 하나를 뽑아 들고 파라솔로 나온다.
“얼마예요?”
나는 멍멍하다. 돈 받을 생각은 하지 않은 터라 가격을 생각해 낸다.
“……, 삼천 원요.”
“삼천 원…….”
천 원짜리 석 장을 새끼가 건넨다. 받는 동작에 나는 왼손을 동원한다. 새끼가 돈을 놓지 않는다. 나는 새끼를 쳐다본다. 일층 진하게 씨이익── 새끼가 웃는다. 저 입술을 찢어 버리고 싶은 생각보다는 오금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피부 위로 신경이 곤두선다. 내 반응이 흡족스러웠는지 새끼가 돈을 놓고 돌아간다. 손에 남은 삼천 원을 나는 내려다본다.
“오늘 좀 이상해 보이네?”
“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뇨, 바둑이나 둬요. 나 둘 차례였나?”
한 점 아무 데나 놓고 절실하여 담배를 입에 문다. 입안이 꺼칠한 가운데 라이터돌을 엄지로 튕긴다. 네 번 만에야 불꽃이 서고 연기를 밭게 빨아들인다. 허파가 깎여 나간다.
이제 그만 두자는 형님을 저녁에도 잡아 앉히지는 못한다. 퍼붓지도, 멈추지도 않는 비는 지지리도 꾸준하여 넌더리를 부른다. 목이 졸리는 지경을 카운터에서 맛보다가 장사고 뭐고 핸드폰 폴더를 연다.
약속 시간에서 15분을 초과해서야 상규와 기열이 자리에 나타나 앉는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가게는 어떡하고 소집이냐?”
“그냥 일찍 닫았어.”
진즉 구워진 삼겹살을 두고 내가 잔을 드니 누가 쫓아오냐, 말은 하면서도 둘이 건배에 응하고 잔을 비운다. 맹물 맛으로 소주가 혀를 거쳐 안주가 필요 없는데, 그래도 손을 놀리기 뭣하고 입 다물고 있기도 켕겨서 담배나 한 개비 뽑는다.
“니네 전자, 노조 라인 바꼈다며?”
“야──,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았냐.”
“다 손바닥 안이지 뭐.”
근황이 두 입에서 오간다. 내가 잔을 따로 드는 동안.
“우리 벤처는 상장했어.”
“그래?”
“우리사주 좀 받았지.”
세 병째 소주가 나오는 판에야 구청에 자리 꿰찬 동오가 배를 디민다. 삼겹살 집에 어울리는 세 겹 배.
“조용필 납신다야.”
“일 좀 마무리하고 오느라고.”
“벌주 마셔 인마.”
“…….”
후래삼배(後來三杯)라고 나는 석 잔을 디민다. 얘 취했냐, 눈빛을 주거나 말거나 한 잔 마시고 말기에 한 잔이 무슨 벌주냐고 늦게 왔으면 주흥 깨지 말고 보조를 맞추라고 기어이 석 잔을 채워 앞에 들이대니 알았다 알았어, 동오가 호탕한 척하는 품으로 날름날름 잔을 들이켜 엎고, 상규는 기껍게 고기 한 점을 먹인다. 쩍쩍 고깃살을 씹으면서도 민원 터져 죽을 맛이라는 둥, 항상 여편네들이 문제라는 둥 수다가 제 궤도를 찾는다. 나도 운을 뗀다.
“친고죄라고 니들 아냐?”
“친고죄?”
아니나 다를까 동오가 개중 알은척을 한다.
“뜬금없이 친고죈 왜?”
“…….”
“피해자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는 죄 아냐.”
“그걸 누가 모르냐!”
“그럼 뭐?”
“…….”
“변호산 뒀다 뭐하냐. 사이버 시대니까 인터넷으로 상담해도 되고.”
“하여간 하나 마나 한 소린…….”
“얘 오늘 왜 이렇게 공격적이냐.”
술이나 마시자고 상규가 잔을 든다. 마다할 이유 없어 나는 술을 술술 넘긴다.
고깃점이 동나고 난 후 변화 한번 주어 보자고 술자리를 바꾼다. 왁자한 육성이 곧 배경 음악이 되는 실내 포장마차가 이차로 낙점된다.
살려 달라 매끈한 몸뚱이를 버둥거리는 낙지가 탁자에 놓인다. 자근자근, 낙지가 꼬숩게도 씹힌다. 혀를 쩍쩍 감아 도는 것이 감칠맛까지 난다. 허연 몸뚱이를 만신창이로 만들어서 꿀꺽 삼켜 버릴 때 밀려드는 정복감이라니!
일품 안주라 자연 술이 술을 부른다. 또한 들어가는 게 많으니 오줌보도 묵직하다.
나는 화장실에서 자지를 꺼내 소변을 본다. 찌이이── 배설의 쾌감을 맛보다가, 아깝게도 먹은 술을 되쏟는다. 고깃덩어리가 발등으로 튀고 신물이 입을 타고 지일질 흐른다. 숨이 쉬어질 만해서야, 목젖에 엉긴 위액을 카아악, 뱉어 낸다. 까불고들 있어.
“건배!”
잔을 높이 치든다.
“너 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무리는, 이제 시작이다 인마.”
마신 술 다 토해 냈으므로 다시 시작인 게 맞는 거다. 꾸욱, 꾹, 목구멍 속으로 소주를 밟아 넣는다.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넌!”
언성이 높게 뒤에서 들린다. 나는 돌아본다. 중년 연배 두 자가 대작을 하는데 얼굴이며 목은 시뻘건 것이 술발이 있는 대로 올라서는 주먹이라도 휘두를 태세로 꼴값을 떨고 있다. 행색 꾀죄죄하고 쪼만한 것들이.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죽고 싶냐?”
“조용히 좀 해라 이것들아, 술 좀 먹게!”
내가 눈을 부라리니까 둘이 성깔 있다고 몸을 일으킨다. 나도 벌떡 일어나 턱을 치킨다. 둘이 아래에 보인다. 한자리에는 친구로 셋을 두고 있다.
“니들이 일어나면 어쩔 건데? 어쩔 거냐고!”
나는 냅다 테이블을 걷어차 버린다. ‘와장창창’ 소리가 크고도 시원하게 고막을 울리고 소주병이 바닥에 ‘퍽’ 깨져 나가 사방으로 소주가 흩어진다. 여차하면 다 죽는 거야 새끼들아!
주먹질까지는 안 갔다고 한다. 주먹을 휘두른 것도 같은데 기열이 뜯어말리느라고 술이 다 깼단다.
“이거 얼마예요?”
“500원.”
“여기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말할 때마다 두개골이 산산조각 바수어지려 한다. 알콜 파편이 머릿속 여기저기 깊숙이 박힌 탓이다. 파편을 툭툭 건드리고 다니는 단어도 있다. 변호사. 변호사는 파편을 건드려 점점 박힌 틈을 벌리고 그만큼 제 몸피를 불려 간다. 무게가 붙는다. 변호산 뒀다 뭐하냐, 동오가 이기죽이기죽 비웃는다. 인터넷으로 상담해도 되고.
짓무른 수박과 같이 머릿속이 흐물흐물해지고서야 ‘익명성’을 떠올려 낸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면서도 익명성의 요새인 것이다.
형님에게 가게를 부탁하고 피시방을 찾는다. 혹여 내 일거수일투족을 단속하는 눈이 있는지 두리번거리게 되지만 발만은 힘이 들어차기 시작함을 느낀다. 뒤엉켜 버린 실타래가 한 올 풀리기 시작하는 것도 같다.
피시방에 친고죄와 어울리게 생긴 자가 있는지 살핀 연후 구석 자리에 가 앉는다. 모니터의 바탕화면에 놓인 아이콘을 살피고 ‘Internet Explorer’를 클릭한다. ‘NAVER’가 화면에 찬다. 나는 검색창에 ‘변호사’를 쳐 넣고 ‘검색’을 누른다. 금방 서비스와 카테고리, 사이트 등이 결과로 나타난다. ‘법률 상담’ 표제가 그중 눈에 들어온다. 나는 화살표를 가져가 딸깍, 눌러 본다.
‘변호사 문기수 법률사무소’가 새로운 창으로 열린다. ‘학력’, ‘경력’, ‘게시판’ 등 사이에 ‘법률 상담’ 코너가 버젓이 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면서 근처에 앉은 자는 무얼 하고 있나 둘러보고 ‘법률 상담’을 누른다. 쫙, 여러 글이 여남은 줄 불거진다. 일반인이 올린 글에 ‘문기수’가 ‘Re’를 붙여 답글을 단 형태로. ‘Re’가 달리지 않은 글도 꼭대기에 석 줄 있다.
나는 필터만 남도록 연기를 빨아 내고 니코틴에 절은 침을 삼킨다. 꽁초는 재떨이에 내려놓고, 마우스에 손을 올려 ‘Write’를 누른다.
환한 창이 새로 드러난다. ‘성명’ 칸. 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정동오’을 써 넣는다. ‘전자우편’ 칸은 비워 놓고, 휑한 ‘제목’ 줄에 ‘친고죄에 대하여’라고 썼다가 ‘강간에 대하여’로 고친다. 다음으로 ‘내용’ 칸. 문구보다 영상이 미간에 치민다. 엉덩이. 마스카라. 잭나이프…….
거의 30분 동안 고치고 고쳐 문장을 이룬다. 친구의 처제가 강간당했습니다. 20대 두 명이 가해자인데 칼을 들었다고 합니다. 친고죄가 정확히 무엇이고 이 경우에 친고죄가 성립하는지 궁금합니다.
마침표를 찍은 후 써 놓은 글을 검토한다. 열 번을 넘게 읽어도 글자만 보이고 내용은 보이지 않아, 꼭 재래식 변소에 신발 한 짝을 빠뜨렸을 때 나머지 한 짝도 똥 더미에 처박는 심정으로 ‘저장’ 버튼을 누른다. 새로 목록 화면이 턱 떠오른다. ‘정동오’의 글이 맨 윗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윈도우를 종료한다. 모니터가 빛을 잃는 것을 확인하고 요금을 치른다.
하루, 하루 답글을 기다림에 따라 양날의 검이 가슴속에 서 간다. 새끼를 베어 버릴. 내 ‘배창시’를 끊을지도 모를. 신경도 검날이 설수록 날카로워진다. 왼쪽 귀께는 아주 바늘로 콕콕 쑤셔 댄다. 친고죄라고, 검을 버리게 되는 것이 필연이라고 논리적인 결론도 도출해 보지만 통각을 일소하지는 못한다. 답글만 재판정 선고처럼 기다린다.
손님이 들어온다. 여자. ‘천 쪼가리’와 ‘미니 스커트’ 대신 티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마스카라 범벅 된 얼굴도 아니라 “어서 오세요.” 하고 입이 떨어질 뻔하다가, 체취를 기억해 내고 벙어리가 되어 버린다. 간질 환자처럼 몸이 뻣뻣해진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모자챙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술을 뗀다.
“네, 안녕하세요…….”
“……, 제가 온 이유는요…… 아저씨가…… 다니시면서 제 얘길 말아 주셨으면 하고…….”
“물론이죠.”
“경찰에도 신고 안 해 주셨으면…….”
“저야 어떻게 해 볼 처지도 아니지만……, 아가씬 얘기가 다르잖아요.”
“…….”
“그놈들 그거 가만 놔두면 안 되잖아요? 거리 활보하고 다니게 그냥 놓아두려고요?”
눈물이 모자챙 아래로 흘러서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아가씨만 고소하면 몇 년은 콩밥 먹일 수 있다구요 그 새끼들.”
“……전 미친개한테 물린 셈 쳤으니까요……. 아저씨도 그렇게 아세요…….”
“…….”
눈물 한 번 닦지 않고 여자가 가게를 나간다. 바글바글 속이 끓어오르건만, 뒤통수는 조금 이완이 된다. 통각도 슬슬 누그러질 기미를 보인다.
나흘 만에 답글이 달린 것을 목도한다. 친고죄는 피해자나 그 밖의 법률에서 정한 사람이 고소를 해야 기소할 수 있는 범죄를 말합니다. 형법 제297조에 해당하는 강간죄는 대표적인 친고죄로서 고소가 없으면 형법 제306조에 의해 처벌하지 못합니다. 또 고소가 제기된 경우라도 제1심 판결 선고 전까지 고소가 취소되면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5호에 의해 범죄자를 처벌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귀하의 경우는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제6조 제1항의 흉기 기타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거나 2인 이상이 합동하여 강간한 ‘특수강간’에 해당하므로 친고죄가 아니며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습니다.
말이 길고 예상한 바와도 달라 몇 번을 반복해 읽는다. 친고죄가 아니며…….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습니다…….
문방구로 돌아와 연탄가스 같은 공기를 들이쉰다. 내가 신고하는 것만으로도 온전히 사건 성립이 된다는……. 그러니까 내 신고 여하에 따라 백팔십도 모든 것이 갈린다는…….
가게 안에서는 담배를 물지 않는다는 금기를 깬다. 두 모금 빨고 재떨이가 없는 것도 알게 되지만 개의하지 않는다. 야누스로 전락하고 정신의 분열만 맛본다. 이대로 독버섯을 방치하느냐, 감방에 옮겨 심느냐. 여자로 하여금 일생 악몽을 꾸게 하느냐, 치욕을 갚아 주느냐. 비겁한 삶을 이어가느냐, 굴레를 벗어 버리느냐. 암덩어리를 감방에 처넣는다고 치자. 출소 후에 더 큰 암세포로 세상을 휘저을지 모른다. 여자의 치욕을 갚아 준다 치자. 백일하 여자는 치부를 드러내고 살아야 한다. 또한 비굴의 굴레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진다 한들 엄연한 해코지가 있다. 그때는 잭나이프가 내게만 향하지도 않을 터다. 지척에 아내와 아들이 있다.
머리칼 한 올이 진열장 위에 떨어져 내린다. 얼굴을 쓸고 있는 손바닥이 꺼칠꺼칠하며 몇 줄의 글을 보아 버린 눈이 언제보다 피로하다.
몬스터 세트를 실내화 주머니에 집어넣는 애가 있다. 부스럭거리면서 이거저거 아까부터 만지작대던 사내애. 애한테 가 뒤통수를 친다. 퍽. 사색이 돼서 애가 나를 쳐다본다. 꼬옥 쥐고 있는 실내화 주머니를 뺏어서 열어젖힌다. 만천 원짜리 몬스터 세트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나는 뒤통수를 때린다.
“뭐하는 짓이야?”
애 얼굴이 탈색된다. 뒤통수를 후려친다. 울먹울먹 애가 눈물을 짓기 시작한다.
“울어? 니가 뭘 잘했다고?”
이번에는 ‘쩍’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애──, 울음이 소리를 발한다. 옷 꼬라지답게 빈티 풍기는 소리를 참 잘도 찢뜨린다.
“안 되겠다 경찰서 가자.”
“아──!”
아예 애가 목을 놓는다. 콧물도 줄줄 흘리는데 더럽게 눈물과 섞여서는 범벅을 이룬다.
“경찰서 가자고!”
“아아──!”
“왜, 경찰서 가는 건 싫으냐?”
빼꼼, 형님이 들어온다.
“무슨 일이야……?”
“글쎄 이놈이 도적질을 하잖아요.”
“…….”
“엄마 어딨어? 엄마 전화번호 대!”
“으아아아──!”
아주 떠나가라고 애새끼가 소리소리를 지른다. 나는 냅다 뒤통수를 올려붙인다.
“왜 애를 때리고 그래.”
“싹싹 빌어도 션찮을 놈이 어디서 빽빽 울어 울길.”
“담부턴 안 그럴 거지?”
형님이 뭐라도 되는 양 다짐을 받는다. 목이 쉬어라 울어젖히면서도 애가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가라고 형님이 등을 민다.
“애를 왜 보내고 그래요!”
“애잖아.”
“애면 이거저거 훔쳐도 돼요?”
“이제 안 그런다잖아 참나.”
슈퍼로 형님이 돌아가고 용광로 같은 가게 안에 나만 덩그러니 남는다. 하필 담배도 떨어지고 똑 미칠 노릇이어 되는 대로 물건을 안으로 들이고 셔터를 내린다.
이웃 여편네의 알은척도 받는 둥 마는 둥, 해가 막 졌거나 말거나 집 문을 열고 들어선다. 왜 벌써 들어왔냐고 아내가 묻는다.
“난 꼭 오밤중까지 일해야 되냐?”
“다녀오셨어요.”
형준이가 고개만 돌려 인사하고 보던 티브이로 눈을 되돌린다.
“자식새끼라고 하나 있는 게 인사하는 거 하곤…….”
“밥은?”
“밥이 문제가 아니라 애 교육 좀 똑바로 시켜. 허구한 날 드라마만 보지 말고.”
“……, 또 무슨 일 있었어?”
“애 얘기하는데 일은 무슨 일!”
“들어오자마자 왜 화부터 내?”
“뭐?”
“집이 무슨 스트레스 푸는 데고 아니고 왜 그래 요새?”
“애 교육 시키라는데 스트레스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내 말이 넌 그렇게 우습니?”
“이러려고 일찍 들어왔어?”
“…….”
“소리칠 데 필요해서?”
귀싸대기를 올린다. 짝. 형준이가 얼굴을 우그러뜨리고 울기 시작한다. 아내는 손자국이 벌겋게 올라와 내 눈을 노려본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
“……에이 이건 집구석이라고 들어오면 편히 쉴 수가 있나.”
쾅, 현관문을 닫고 집을 나온다.
여관에서 아침을 맞는다. 문방구 문 여는 시간에 구애하지 않고 잘 수 있는 데까지 잠을 청해도, 잠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끌어올려도 눈은 떠지고야 만다.
뒹굴뒹굴 뒤치다가 끄으응, 몸을 일으킨다. 비어 가는 담뱃갑에서 허리가 구부러진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불을 댕기고, 꽁초가 숲을 이룬 재떨이를 발 앞에 끌어다 놓는다. 나는 어떤 족속인가. 그 밤 이후의 며칠을 돌이켜 보면 사내라고 보아 줄 수가 없다. 오로지 약자에게만 강하며 방향타가 되어야 할 이성과 논리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 모범 답안을 알고 있는데도……. 가족은 또 어떤가. 어째서 내 가족이 균열을 입어야 되는가. 집이며 일이며 무너져 가는데 이렇게 손 한 번 쓰지 않고 묵과할 것인가. 어떻게든 마무리는 지어야 한다.
마지막 개비를 꽁초로 만들고 바짓가랑이에 발을 집어넣는다. 여관을 빠져나와 당연히 가야 되는 곳, 고작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경찰서로 발을 재게 놀린다. 입술이 쪼글쪼글하다. 혀를 뽑아 침을 묻혀 보지만 혀마저 까실까실하니 뻑뻑한 기운이 가시지는 않는다. 대신 몸이 건조하므로 쉬이 열이 오른다.
정문 입초가 벌써 보인다. 참 가까운 곳에 경찰서는 위치해 있다. 입초가 나를 의식한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두 새끼가 똑같은 형을 받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강간한 자와 달리 퉁퉁한 새끼는 망만 본 데다 칼도 소지하지 않은 정황이라 실형이 5년까지 떨어질 리 없다. 설령 5년으로 언도된다고 해도 5년이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더군다나 칼을 들이댄 새끼마저 사정(射精)까지는 안 갔다는 이유로 형이 줄어들지 모르는 일이다. 대한민국 법망은 그리 촘촘하지도 않거니와 냉엄하지는 더더군다나 아니하다.
“신분증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입초를 쳐다본다. 위압을 입초가 뿜는다. 과연 제 죄 값을 치르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피바다로 한 시절을 참(斬)한 자가 고개 빳빳이 쳐들고 사는 세상,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고 밝히는 자리에 경호원 무리 대동하고 출두하는 세상인 게다. 이런 세상에서는 양심을 좇는 자가 손해 보고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물론 모난 돌은 세상을 어떻게 해 보려고 나서는 돌이다.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나는 발을 돌린다. 입초가 동료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뛰기까지 한다. 모퉁이를 돌고, 골목에 들어선 후에야 발이 제 속도를 찾아 입술 끝으로 조소가 비어진다. 주머니에 두 손을 지르는데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득도라도 한 양.
정오가 다 돼 가게 문을 올려 여니 형님이 요새 무슨 일 있는 거 맞다며 치근덕거린다. 나는 아니라고, 씨익── 웃어 준다.
짬뽕을 시켜 먹고 파라솔 아래 형님과 이마를 맞대고 앉아 오순도순 바둑을 둔다. 안에서 티브이도 보다가, 문 닫을 시간이 돼서 셔터를 내린다.
집에 들어가려다 어제 일도 있고 하니 주기(酒氣)를 빌릴 요량으로 형님과 소주 세 병을 비운다. 캬아──. 쓰다 써어──.
제법 술 냄새가 텁텁한 입에서 퍼지는 것 같아 진작 눈이 감겨 가는 형님을 남기고 일어난다.
“들어갑니다 형님.”
“그래 그럼. 내일 봐.”
나는 집으로 향한다. 아내와 형준이가 있는 곳.
담배 한 대 시원스레 다 빠니 공사 현장을 지나게 된다. 더디 공사가 진척되어 동네의 애물단지로 화한 곳. 나는 ‘공사중’ 팻말 사이를 지난다. 오줌이라도 갈기고 가자.
……! 엉덩이. 잭나이프. 나는 재방송을 목격한다. 퉁퉁한 새끼가 보이지는 않지만 볼펜까지 사 간 새끼가 제대로 엉덩이를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번은 리허설이었다는 양. 겁탈당하는 여배우가 다르기는 하다. 아내.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새끼가 나를 의식하지 못한다. 척후병이 없으므로. 질끈 감은 아내의 눈에서 예의 여자가 흘린 것과 비슷한 눈물이 번지고 있다. 나는 새끼와 아내가 이루는 덩어리를 본다. 어떡하지?
남 31세
018-507-1773
031-761-1463
seogsaga@hanafos.com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도평리 신일아파트 105-902
“쉰세 집요.”
“쉰일곱 집.”
“겨우 넉 집 이긴 거예요 그럼? 많이 이긴 줄 알았는데.”
“잘 둔 거야 그래도.”
“덤이라도 있었으면 제가 지는 거잖아요.”
“접바둑에 덤은 무슨…….”
“한 수 더 두시겠어요?”
“정리해야지 이제.”
“시간이……, 벌써 열한시네!”
“한창 시간 가는 줄 모를 때지. 머리통도 바둑돌로 보이고.”
“하하.”
오금에 쥐가 나는지 아기작아기작, 형님이 슈퍼로 들어간다. 나는 바둑판 등 챙겨 문방구로 들어와 캐시 박스를 연다. 27만 원. 신선경에서 세파로 기분이 끌어내려진다.
눈알, 연예인 사진, 뿅망치, 물총, 바비 인형을 가게 안으로 들인다. 곁에서 형님은 세일차 진열해 놓은 과자류에 천막을 씌우고 수담의 장(場) 파라솔을 접는다. 나는 오락기 두 대도 문 안으로 들여 놓고 셔터를 내린다.
“내일 봐요 형님.”
“그래, 들어가.”
매상이 시원찮다. 원가며 가겟세, 이거저거 빼고 제우 월(月) 백육십이 남는다. 해가 다르게 주는 액수……. 집에서 가깝다고 얼른 얻은 가게가 아무래도 목이 신통찮은 게다. 가게를 옮겨야 되는지, 업종을 바꿔야 하는지. 터 잡기가 녹록하기만 하다면야 무에 문제랴.
인륜지대사라고 그렇게 결혼을 일찍 한 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는다. 돈이나 좀 쟁여 놓고 살림을 내도 냈어야 하는데 어버이 말씀 틀린 거 없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자식새끼 대가리는 자꾸 커 가지, 웬수 같은 집값은 천정부지지, 원형탈모증이 왜 나한테 안 걸리는지 모를 노릇이다.
서울 하늘이라 별이 없다. 달도 어디 처박혔는지 안 뵈고 시궁창처럼 먹장이 오가는 게 내일은 비라도 올 모양이다.
담배를 입에 빼 문다. 이 주머니, 저 주머니 라이터를 찾는데 소리가 들린다. 아직 반만 지어진 연립주택 속에서. 공사를 밤에 할 리도 없고, 드러내 놓고 나는 소리도 아니라 새록새록 이상하다. 큼직한 쥐새끼가 부스럭대는 거 같은 소리. 찍찍대기도 하는데 한 마리도 아니다.
나는 ‘공사중’ 팻말 사이를 지난다. 현관이니 대문이니 모양도 갖춰지지 않은 흉물이라 계단에서 문간을 지나 쑤욱 고개만 디밀어도 내부가 확인된다.
“뭐……?”
나는 ‘쥐새끼’ 셋을 목도한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들춰진 여자의 옷가지 아래로 가슴과 허벅지 깊은 곳이 드러나 있다. 그 위에서 엉덩이를 깐 남자의 손에 잭나이프. 마스카라가 범벅된 여자의 눈물과 당혹한 남자의 눈깔이 곧장 나를 향한다.
“저 새끼 잡아!”
남자가 겁탈의 지척에 있던 자를 다그친다. 씨름 선수의 몸피가 곧바로 내게 닥쳐, 나는 머리끄덩이를 휘어잡히고 무릎이 바닥에 꿇린다.
“문방구 주인이야, 저 밑에…….”
“망을 어떻게 본 거야, 좆같고 김새게 진짜…….”
‘잭나이프’가 긴 팔로 바지를 올린다. 좁은 미간을 더 우그러뜨리고 얄팍한 입술로 살의 서린 말을 뱉으면서 다가온다.
“야밤에 이런 덴 왜 기웃거려? 뭘 어쩌자고?”
술 냄새가 대뜸 풍긴다. 맹독을 타 마신 거 같은.
“이 새끼 이거 어쩌면 좋지…….”
잭나이프를 접지 않은 채 남자가 발길질하려는 것처럼 몸을 움찔거린다. 움칫움칫, 나는 몸이 경직된다.
“지갑 꺼내 봐.”
손을 돌려 나는 지갑을 꺼낸다. 왼손이 주는 동작을 거든다. 만 원짜리 뭉치가 빠져나가고 빈 지갑이 무릎맡에 떨어진다.
“친고죄라고 알어?”
“……?”
“피해자가 고솔 해야 사건성립이 되는 죄가 친고죄란 말이지. 이 방면으론 내가 좀 알거든. 강간이 바로 친고죄라고.”
“…….”
“무슨 소린지 알아먹어? 니가 어쩔 수 있는 건 암것도 없단 소리야. 강간다운 강간 하지도 않았고 아자씨 때메.”
“…….”
“그 사지, 말짱허니 보내 줄 참이니까 조용히 사셔. 배창시 꺼내 주는 수가 있으니까 참고하고.”
날 끝이 오른 눈 앞에서 왼 눈 앞으로 오간다.
“알아들었어?”
“…….”
“알았냐고 이 새꺄아.”
“네.”
존대가 튀어나온다. 기껏 스물대여섯 먹었을 자한테 서른둘이.
“가자.”
잭나이프가 발을 뗀다. 바닥에 처박히는 품으로 머리끄덩이가 놓이고, 여자와 나만 건물에 남는다.
마스카라를 아직도 닦지 않은 여자가 옷매무새를 만지기 시작한다. 어깨 파인 천 쪼가리에 미니스커트가 고작이라 만질 데가 많지는 않다. 미니스커트만 잡아 늘인다. 여자는 백을 찾아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확인한다. 마스카라를 닦는다. 간단없이 눈물이 솟아, 닦은 곳을 엉망으로 만든다. 참 많이도 마스카라를 처바른 게다. 여자는 눈물로 화장을 다 지우고서야 몸뚱이를 일으킨다. 비척비척 걷기 시작해 나를 지나친다. 나는 없는 모양이다.
입때껏 무릎이 꿇려 있는 걸 자각하고 지갑을 집어 올려 뒷주머니에 꽂는다. 손을 짚어 일어서서 온기가 남아 있을지 모를 겁탈의 장을 건너다본다. 다시 엉덩이를 목격한다. 건물을 빠져나와 ‘공사중’을 건너면서 길의 위아래를 돌아본다. 막 오르는 반백의 남자가 보일 뿐이어 ‘쥐새끼’는 보이지 않는다.
위쪽 방향으로 ‘집’이 적히고 아래쪽으로 ‘경찰서’가 쓰인 이정표가 발 앞에 놓인다. ‘경찰서’는 ‘112’로 바뀌어 글씨가 훨씬 커지고 더욱 가까워진다.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만 몇 차례 놀리면 되는데 친고죄 어쩌고 남자가 뇌까린 말이 떠오른다. 일단 ‘집’으로 발을 떼기로 한다.
머릿속에서 구더기 수만 마리가 꾸물꾸물거린다. 벌려진 가랑이 사이로 오르내리는 엉덩이와 박힐 듯이 와 닿은 칼 끝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다.
피우지 못한 담배를 집 앞에서 빤다. 한 모금, 한 모금 진창에서 게워 낸 연기는 충충한 대기를 더 탁하게 만든다. 타고 남은 재가 고개를 숙이다 제 무게를 못 이겨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더 빨 데 없는 꽁초를 나는 손가락을 벌려 놓아주고 발끝으로 짓이긴다.
공사중인 건물과 흡사한 구조의 연립에 든다. 2층에 올라 초인종을 대하는데 눌러야 하는지 잠깐 고민이 된다. 이 버튼을 누르고 집에 들어갈 수 있느냐.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 나 왔어, 아빠 왔다, 눈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겠느냐. 얼른 깃들이고 싶다는 욕구하에, 나는 버튼을 누른다. 딩동. 안에서 아내 음성이 비어져 나온다.
“자기야?”
“…….”
시원스런 품으로 문이 열린다. 현관에 들어 나는 신을 벗는다.
“……왜, 무슨 일 있었어?”
“…….”
윗도리를 벗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건다.
“문까지 잠그네? 자기야.”
거울 속 나를 본다. 핏발이 눈알에 서 있고 각진 턱이 실기룩거린다. 벌어진 어깨는 꼭 항우장사처럼 비치며 상고머리도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가 아주 쉬웠을 법하다. 또 투욱 불거진 광대뼈는 인상을 누구보다 험악히 만드는 데 일조하건만 목하 개기름만 흘리고 있다. 목부터 피가 들어차 나는 세수로 혈류를 식힌다. 물이 많이 튄다.
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옷이 푹 젖지 않을 만큼 푸슬푸슬.
애들을 호릴 갖가지 물건이 평상시처럼 안팎에 진열되어 있다. 나도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카운터에 엉덩이를 붙여 앉아 있고.
형님이 들어온다.
“바둑이나 두지, 손님도 없는데.”
화생방 교육장에서 빠져나가는 심정으로 바둑돌 챙겨 형님 뒤를 따른다. 파라솔 아래 앉아 형님과 머리를 마주하니 초식동물처럼 안도감이 슬슬 피어오른다. 무리를 이루었으므로.
빗방울 소리 전하지 않는 보슬비 아래 하나, 하나 바둑돌을 열십자에 놓는다. 장고에 임하지도, 형님 착수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는 덕에 대국은 속기가 된다. 돌의 다음 모양이 어렴풋이도 안 보이고 형님 손 가는 대로 따라만 둔다.
“기자절야. 배경 돌이 이렇게 강한데 무조건 끊고 봐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떨이에 꽁초를 누른다. 말라깽이 형님은 담배를 안 태우니까 여남은 개 꽁초 모두 내가 피워 죽인 시체다.
“단수.”
나는 어디가 단수인지 살핀다. 대마 생사 여부는 그래도 보이지 않아 다시 담배를 문다.
때 되서 짬뽕을 시켜 먹고 몇 판째인지 모르는 판을 다시 짜 가는데 ‘잭나이프’가 지척에 와 선다. ‘밤’과 ‘낮’이 다르고 ‘음침한 건물 속’과 ‘탁 트인 대로변’이 달라 윤곽이 조금 달리 보이지만 새끼가 분명하다. 침이 마르는 것으로 몸이 반응하므로. 씨──, 새끼가 웃는다. 나는 새끼를 쳐다보기 위해서 고개를 들어야만 한다.
“볼펜 하나 주세요.”
“……, 네.”
나는 가게로 들어온다. 네, 라고 말한 건가 내가……? 볼펜 꽂이대 앞에 서니 어떤 볼펜을 달라고 하는 걸까, 의문도 인다. 피라도 토할 만큼 기가 막히는데 볼펜의 종류는 너무 많다. 새끼가 한 말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누런 이가 보일 듯 말 듯한 냉소(冷笑)만 떠오르는 가운데, 꽂이대 구획을 훑던 눈은 한 구획에 와서 머무른다. 제일 비싼 품목이 꽂혀 있는. 하나를 뽑아 들고 파라솔로 나온다.
“얼마예요?”
나는 멍멍하다. 돈 받을 생각은 하지 않은 터라 가격을 생각해 낸다.
“……, 삼천 원요.”
“삼천 원…….”
천 원짜리 석 장을 새끼가 건넨다. 받는 동작에 나는 왼손을 동원한다. 새끼가 돈을 놓지 않는다. 나는 새끼를 쳐다본다. 일층 진하게 씨이익── 새끼가 웃는다. 저 입술을 찢어 버리고 싶은 생각보다는 오금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피부 위로 신경이 곤두선다. 내 반응이 흡족스러웠는지 새끼가 돈을 놓고 돌아간다. 손에 남은 삼천 원을 나는 내려다본다.
“오늘 좀 이상해 보이네?”
“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뇨, 바둑이나 둬요. 나 둘 차례였나?”
한 점 아무 데나 놓고 절실하여 담배를 입에 문다. 입안이 꺼칠한 가운데 라이터돌을 엄지로 튕긴다. 네 번 만에야 불꽃이 서고 연기를 밭게 빨아들인다. 허파가 깎여 나간다.
이제 그만 두자는 형님을 저녁에도 잡아 앉히지는 못한다. 퍼붓지도, 멈추지도 않는 비는 지지리도 꾸준하여 넌더리를 부른다. 목이 졸리는 지경을 카운터에서 맛보다가 장사고 뭐고 핸드폰 폴더를 연다.
약속 시간에서 15분을 초과해서야 상규와 기열이 자리에 나타나 앉는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가게는 어떡하고 소집이냐?”
“그냥 일찍 닫았어.”
진즉 구워진 삼겹살을 두고 내가 잔을 드니 누가 쫓아오냐, 말은 하면서도 둘이 건배에 응하고 잔을 비운다. 맹물 맛으로 소주가 혀를 거쳐 안주가 필요 없는데, 그래도 손을 놀리기 뭣하고 입 다물고 있기도 켕겨서 담배나 한 개비 뽑는다.
“니네 전자, 노조 라인 바꼈다며?”
“야──,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았냐.”
“다 손바닥 안이지 뭐.”
근황이 두 입에서 오간다. 내가 잔을 따로 드는 동안.
“우리 벤처는 상장했어.”
“그래?”
“우리사주 좀 받았지.”
세 병째 소주가 나오는 판에야 구청에 자리 꿰찬 동오가 배를 디민다. 삼겹살 집에 어울리는 세 겹 배.
“조용필 납신다야.”
“일 좀 마무리하고 오느라고.”
“벌주 마셔 인마.”
“…….”
후래삼배(後來三杯)라고 나는 석 잔을 디민다. 얘 취했냐, 눈빛을 주거나 말거나 한 잔 마시고 말기에 한 잔이 무슨 벌주냐고 늦게 왔으면 주흥 깨지 말고 보조를 맞추라고 기어이 석 잔을 채워 앞에 들이대니 알았다 알았어, 동오가 호탕한 척하는 품으로 날름날름 잔을 들이켜 엎고, 상규는 기껍게 고기 한 점을 먹인다. 쩍쩍 고깃살을 씹으면서도 민원 터져 죽을 맛이라는 둥, 항상 여편네들이 문제라는 둥 수다가 제 궤도를 찾는다. 나도 운을 뗀다.
“친고죄라고 니들 아냐?”
“친고죄?”
아니나 다를까 동오가 개중 알은척을 한다.
“뜬금없이 친고죈 왜?”
“…….”
“피해자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는 죄 아냐.”
“그걸 누가 모르냐!”
“그럼 뭐?”
“…….”
“변호산 뒀다 뭐하냐. 사이버 시대니까 인터넷으로 상담해도 되고.”
“하여간 하나 마나 한 소린…….”
“얘 오늘 왜 이렇게 공격적이냐.”
술이나 마시자고 상규가 잔을 든다. 마다할 이유 없어 나는 술을 술술 넘긴다.
고깃점이 동나고 난 후 변화 한번 주어 보자고 술자리를 바꾼다. 왁자한 육성이 곧 배경 음악이 되는 실내 포장마차가 이차로 낙점된다.
살려 달라 매끈한 몸뚱이를 버둥거리는 낙지가 탁자에 놓인다. 자근자근, 낙지가 꼬숩게도 씹힌다. 혀를 쩍쩍 감아 도는 것이 감칠맛까지 난다. 허연 몸뚱이를 만신창이로 만들어서 꿀꺽 삼켜 버릴 때 밀려드는 정복감이라니!
일품 안주라 자연 술이 술을 부른다. 또한 들어가는 게 많으니 오줌보도 묵직하다.
나는 화장실에서 자지를 꺼내 소변을 본다. 찌이이── 배설의 쾌감을 맛보다가, 아깝게도 먹은 술을 되쏟는다. 고깃덩어리가 발등으로 튀고 신물이 입을 타고 지일질 흐른다. 숨이 쉬어질 만해서야, 목젖에 엉긴 위액을 카아악, 뱉어 낸다. 까불고들 있어.
“건배!”
잔을 높이 치든다.
“너 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무리는, 이제 시작이다 인마.”
마신 술 다 토해 냈으므로 다시 시작인 게 맞는 거다. 꾸욱, 꾹, 목구멍 속으로 소주를 밟아 넣는다.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넌!”
언성이 높게 뒤에서 들린다. 나는 돌아본다. 중년 연배 두 자가 대작을 하는데 얼굴이며 목은 시뻘건 것이 술발이 있는 대로 올라서는 주먹이라도 휘두를 태세로 꼴값을 떨고 있다. 행색 꾀죄죄하고 쪼만한 것들이.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죽고 싶냐?”
“조용히 좀 해라 이것들아, 술 좀 먹게!”
내가 눈을 부라리니까 둘이 성깔 있다고 몸을 일으킨다. 나도 벌떡 일어나 턱을 치킨다. 둘이 아래에 보인다. 한자리에는 친구로 셋을 두고 있다.
“니들이 일어나면 어쩔 건데? 어쩔 거냐고!”
나는 냅다 테이블을 걷어차 버린다. ‘와장창창’ 소리가 크고도 시원하게 고막을 울리고 소주병이 바닥에 ‘퍽’ 깨져 나가 사방으로 소주가 흩어진다. 여차하면 다 죽는 거야 새끼들아!
주먹질까지는 안 갔다고 한다. 주먹을 휘두른 것도 같은데 기열이 뜯어말리느라고 술이 다 깼단다.
“이거 얼마예요?”
“500원.”
“여기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말할 때마다 두개골이 산산조각 바수어지려 한다. 알콜 파편이 머릿속 여기저기 깊숙이 박힌 탓이다. 파편을 툭툭 건드리고 다니는 단어도 있다. 변호사. 변호사는 파편을 건드려 점점 박힌 틈을 벌리고 그만큼 제 몸피를 불려 간다. 무게가 붙는다. 변호산 뒀다 뭐하냐, 동오가 이기죽이기죽 비웃는다. 인터넷으로 상담해도 되고.
짓무른 수박과 같이 머릿속이 흐물흐물해지고서야 ‘익명성’을 떠올려 낸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면서도 익명성의 요새인 것이다.
형님에게 가게를 부탁하고 피시방을 찾는다. 혹여 내 일거수일투족을 단속하는 눈이 있는지 두리번거리게 되지만 발만은 힘이 들어차기 시작함을 느낀다. 뒤엉켜 버린 실타래가 한 올 풀리기 시작하는 것도 같다.
피시방에 친고죄와 어울리게 생긴 자가 있는지 살핀 연후 구석 자리에 가 앉는다. 모니터의 바탕화면에 놓인 아이콘을 살피고 ‘Internet Explorer’를 클릭한다. ‘NAVER’가 화면에 찬다. 나는 검색창에 ‘변호사’를 쳐 넣고 ‘검색’을 누른다. 금방 서비스와 카테고리, 사이트 등이 결과로 나타난다. ‘법률 상담’ 표제가 그중 눈에 들어온다. 나는 화살표를 가져가 딸깍, 눌러 본다.
‘변호사 문기수 법률사무소’가 새로운 창으로 열린다. ‘학력’, ‘경력’, ‘게시판’ 등 사이에 ‘법률 상담’ 코너가 버젓이 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면서 근처에 앉은 자는 무얼 하고 있나 둘러보고 ‘법률 상담’을 누른다. 쫙, 여러 글이 여남은 줄 불거진다. 일반인이 올린 글에 ‘문기수’가 ‘Re’를 붙여 답글을 단 형태로. ‘Re’가 달리지 않은 글도 꼭대기에 석 줄 있다.
나는 필터만 남도록 연기를 빨아 내고 니코틴에 절은 침을 삼킨다. 꽁초는 재떨이에 내려놓고, 마우스에 손을 올려 ‘Write’를 누른다.
환한 창이 새로 드러난다. ‘성명’ 칸. 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정동오’을 써 넣는다. ‘전자우편’ 칸은 비워 놓고, 휑한 ‘제목’ 줄에 ‘친고죄에 대하여’라고 썼다가 ‘강간에 대하여’로 고친다. 다음으로 ‘내용’ 칸. 문구보다 영상이 미간에 치민다. 엉덩이. 마스카라. 잭나이프…….
거의 30분 동안 고치고 고쳐 문장을 이룬다. 친구의 처제가 강간당했습니다. 20대 두 명이 가해자인데 칼을 들었다고 합니다. 친고죄가 정확히 무엇이고 이 경우에 친고죄가 성립하는지 궁금합니다.
마침표를 찍은 후 써 놓은 글을 검토한다. 열 번을 넘게 읽어도 글자만 보이고 내용은 보이지 않아, 꼭 재래식 변소에 신발 한 짝을 빠뜨렸을 때 나머지 한 짝도 똥 더미에 처박는 심정으로 ‘저장’ 버튼을 누른다. 새로 목록 화면이 턱 떠오른다. ‘정동오’의 글이 맨 윗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윈도우를 종료한다. 모니터가 빛을 잃는 것을 확인하고 요금을 치른다.
하루, 하루 답글을 기다림에 따라 양날의 검이 가슴속에 서 간다. 새끼를 베어 버릴. 내 ‘배창시’를 끊을지도 모를. 신경도 검날이 설수록 날카로워진다. 왼쪽 귀께는 아주 바늘로 콕콕 쑤셔 댄다. 친고죄라고, 검을 버리게 되는 것이 필연이라고 논리적인 결론도 도출해 보지만 통각을 일소하지는 못한다. 답글만 재판정 선고처럼 기다린다.
손님이 들어온다. 여자. ‘천 쪼가리’와 ‘미니 스커트’ 대신 티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마스카라 범벅 된 얼굴도 아니라 “어서 오세요.” 하고 입이 떨어질 뻔하다가, 체취를 기억해 내고 벙어리가 되어 버린다. 간질 환자처럼 몸이 뻣뻣해진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모자챙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술을 뗀다.
“네, 안녕하세요…….”
“……, 제가 온 이유는요…… 아저씨가…… 다니시면서 제 얘길 말아 주셨으면 하고…….”
“물론이죠.”
“경찰에도 신고 안 해 주셨으면…….”
“저야 어떻게 해 볼 처지도 아니지만……, 아가씬 얘기가 다르잖아요.”
“…….”
“그놈들 그거 가만 놔두면 안 되잖아요? 거리 활보하고 다니게 그냥 놓아두려고요?”
눈물이 모자챙 아래로 흘러서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아가씨만 고소하면 몇 년은 콩밥 먹일 수 있다구요 그 새끼들.”
“……전 미친개한테 물린 셈 쳤으니까요……. 아저씨도 그렇게 아세요…….”
“…….”
눈물 한 번 닦지 않고 여자가 가게를 나간다. 바글바글 속이 끓어오르건만, 뒤통수는 조금 이완이 된다. 통각도 슬슬 누그러질 기미를 보인다.
나흘 만에 답글이 달린 것을 목도한다. 친고죄는 피해자나 그 밖의 법률에서 정한 사람이 고소를 해야 기소할 수 있는 범죄를 말합니다. 형법 제297조에 해당하는 강간죄는 대표적인 친고죄로서 고소가 없으면 형법 제306조에 의해 처벌하지 못합니다. 또 고소가 제기된 경우라도 제1심 판결 선고 전까지 고소가 취소되면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5호에 의해 범죄자를 처벌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귀하의 경우는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제6조 제1항의 흉기 기타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거나 2인 이상이 합동하여 강간한 ‘특수강간’에 해당하므로 친고죄가 아니며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습니다.
말이 길고 예상한 바와도 달라 몇 번을 반복해 읽는다. 친고죄가 아니며…….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습니다…….
문방구로 돌아와 연탄가스 같은 공기를 들이쉰다. 내가 신고하는 것만으로도 온전히 사건 성립이 된다는……. 그러니까 내 신고 여하에 따라 백팔십도 모든 것이 갈린다는…….
가게 안에서는 담배를 물지 않는다는 금기를 깬다. 두 모금 빨고 재떨이가 없는 것도 알게 되지만 개의하지 않는다. 야누스로 전락하고 정신의 분열만 맛본다. 이대로 독버섯을 방치하느냐, 감방에 옮겨 심느냐. 여자로 하여금 일생 악몽을 꾸게 하느냐, 치욕을 갚아 주느냐. 비겁한 삶을 이어가느냐, 굴레를 벗어 버리느냐. 암덩어리를 감방에 처넣는다고 치자. 출소 후에 더 큰 암세포로 세상을 휘저을지 모른다. 여자의 치욕을 갚아 준다 치자. 백일하 여자는 치부를 드러내고 살아야 한다. 또한 비굴의 굴레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진다 한들 엄연한 해코지가 있다. 그때는 잭나이프가 내게만 향하지도 않을 터다. 지척에 아내와 아들이 있다.
머리칼 한 올이 진열장 위에 떨어져 내린다. 얼굴을 쓸고 있는 손바닥이 꺼칠꺼칠하며 몇 줄의 글을 보아 버린 눈이 언제보다 피로하다.
몬스터 세트를 실내화 주머니에 집어넣는 애가 있다. 부스럭거리면서 이거저거 아까부터 만지작대던 사내애. 애한테 가 뒤통수를 친다. 퍽. 사색이 돼서 애가 나를 쳐다본다. 꼬옥 쥐고 있는 실내화 주머니를 뺏어서 열어젖힌다. 만천 원짜리 몬스터 세트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나는 뒤통수를 때린다.
“뭐하는 짓이야?”
애 얼굴이 탈색된다. 뒤통수를 후려친다. 울먹울먹 애가 눈물을 짓기 시작한다.
“울어? 니가 뭘 잘했다고?”
이번에는 ‘쩍’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애──, 울음이 소리를 발한다. 옷 꼬라지답게 빈티 풍기는 소리를 참 잘도 찢뜨린다.
“안 되겠다 경찰서 가자.”
“아──!”
아예 애가 목을 놓는다. 콧물도 줄줄 흘리는데 더럽게 눈물과 섞여서는 범벅을 이룬다.
“경찰서 가자고!”
“아아──!”
“왜, 경찰서 가는 건 싫으냐?”
빼꼼, 형님이 들어온다.
“무슨 일이야……?”
“글쎄 이놈이 도적질을 하잖아요.”
“…….”
“엄마 어딨어? 엄마 전화번호 대!”
“으아아아──!”
아주 떠나가라고 애새끼가 소리소리를 지른다. 나는 냅다 뒤통수를 올려붙인다.
“왜 애를 때리고 그래.”
“싹싹 빌어도 션찮을 놈이 어디서 빽빽 울어 울길.”
“담부턴 안 그럴 거지?”
형님이 뭐라도 되는 양 다짐을 받는다. 목이 쉬어라 울어젖히면서도 애가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가라고 형님이 등을 민다.
“애를 왜 보내고 그래요!”
“애잖아.”
“애면 이거저거 훔쳐도 돼요?”
“이제 안 그런다잖아 참나.”
슈퍼로 형님이 돌아가고 용광로 같은 가게 안에 나만 덩그러니 남는다. 하필 담배도 떨어지고 똑 미칠 노릇이어 되는 대로 물건을 안으로 들이고 셔터를 내린다.
이웃 여편네의 알은척도 받는 둥 마는 둥, 해가 막 졌거나 말거나 집 문을 열고 들어선다. 왜 벌써 들어왔냐고 아내가 묻는다.
“난 꼭 오밤중까지 일해야 되냐?”
“다녀오셨어요.”
형준이가 고개만 돌려 인사하고 보던 티브이로 눈을 되돌린다.
“자식새끼라고 하나 있는 게 인사하는 거 하곤…….”
“밥은?”
“밥이 문제가 아니라 애 교육 좀 똑바로 시켜. 허구한 날 드라마만 보지 말고.”
“……, 또 무슨 일 있었어?”
“애 얘기하는데 일은 무슨 일!”
“들어오자마자 왜 화부터 내?”
“뭐?”
“집이 무슨 스트레스 푸는 데고 아니고 왜 그래 요새?”
“애 교육 시키라는데 스트레스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내 말이 넌 그렇게 우습니?”
“이러려고 일찍 들어왔어?”
“…….”
“소리칠 데 필요해서?”
귀싸대기를 올린다. 짝. 형준이가 얼굴을 우그러뜨리고 울기 시작한다. 아내는 손자국이 벌겋게 올라와 내 눈을 노려본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
“……에이 이건 집구석이라고 들어오면 편히 쉴 수가 있나.”
쾅, 현관문을 닫고 집을 나온다.
여관에서 아침을 맞는다. 문방구 문 여는 시간에 구애하지 않고 잘 수 있는 데까지 잠을 청해도, 잠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끌어올려도 눈은 떠지고야 만다.
뒹굴뒹굴 뒤치다가 끄으응, 몸을 일으킨다. 비어 가는 담뱃갑에서 허리가 구부러진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불을 댕기고, 꽁초가 숲을 이룬 재떨이를 발 앞에 끌어다 놓는다. 나는 어떤 족속인가. 그 밤 이후의 며칠을 돌이켜 보면 사내라고 보아 줄 수가 없다. 오로지 약자에게만 강하며 방향타가 되어야 할 이성과 논리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 모범 답안을 알고 있는데도……. 가족은 또 어떤가. 어째서 내 가족이 균열을 입어야 되는가. 집이며 일이며 무너져 가는데 이렇게 손 한 번 쓰지 않고 묵과할 것인가. 어떻게든 마무리는 지어야 한다.
마지막 개비를 꽁초로 만들고 바짓가랑이에 발을 집어넣는다. 여관을 빠져나와 당연히 가야 되는 곳, 고작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경찰서로 발을 재게 놀린다. 입술이 쪼글쪼글하다. 혀를 뽑아 침을 묻혀 보지만 혀마저 까실까실하니 뻑뻑한 기운이 가시지는 않는다. 대신 몸이 건조하므로 쉬이 열이 오른다.
정문 입초가 벌써 보인다. 참 가까운 곳에 경찰서는 위치해 있다. 입초가 나를 의식한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두 새끼가 똑같은 형을 받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강간한 자와 달리 퉁퉁한 새끼는 망만 본 데다 칼도 소지하지 않은 정황이라 실형이 5년까지 떨어질 리 없다. 설령 5년으로 언도된다고 해도 5년이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더군다나 칼을 들이댄 새끼마저 사정(射精)까지는 안 갔다는 이유로 형이 줄어들지 모르는 일이다. 대한민국 법망은 그리 촘촘하지도 않거니와 냉엄하지는 더더군다나 아니하다.
“신분증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입초를 쳐다본다. 위압을 입초가 뿜는다. 과연 제 죄 값을 치르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피바다로 한 시절을 참(斬)한 자가 고개 빳빳이 쳐들고 사는 세상,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고 밝히는 자리에 경호원 무리 대동하고 출두하는 세상인 게다. 이런 세상에서는 양심을 좇는 자가 손해 보고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물론 모난 돌은 세상을 어떻게 해 보려고 나서는 돌이다.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나는 발을 돌린다. 입초가 동료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뛰기까지 한다. 모퉁이를 돌고, 골목에 들어선 후에야 발이 제 속도를 찾아 입술 끝으로 조소가 비어진다. 주머니에 두 손을 지르는데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득도라도 한 양.
정오가 다 돼 가게 문을 올려 여니 형님이 요새 무슨 일 있는 거 맞다며 치근덕거린다. 나는 아니라고, 씨익── 웃어 준다.
짬뽕을 시켜 먹고 파라솔 아래 형님과 이마를 맞대고 앉아 오순도순 바둑을 둔다. 안에서 티브이도 보다가, 문 닫을 시간이 돼서 셔터를 내린다.
집에 들어가려다 어제 일도 있고 하니 주기(酒氣)를 빌릴 요량으로 형님과 소주 세 병을 비운다. 캬아──. 쓰다 써어──.
제법 술 냄새가 텁텁한 입에서 퍼지는 것 같아 진작 눈이 감겨 가는 형님을 남기고 일어난다.
“들어갑니다 형님.”
“그래 그럼. 내일 봐.”
나는 집으로 향한다. 아내와 형준이가 있는 곳.
담배 한 대 시원스레 다 빠니 공사 현장을 지나게 된다. 더디 공사가 진척되어 동네의 애물단지로 화한 곳. 나는 ‘공사중’ 팻말 사이를 지난다. 오줌이라도 갈기고 가자.
……! 엉덩이. 잭나이프. 나는 재방송을 목격한다. 퉁퉁한 새끼가 보이지는 않지만 볼펜까지 사 간 새끼가 제대로 엉덩이를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번은 리허설이었다는 양. 겁탈당하는 여배우가 다르기는 하다. 아내.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새끼가 나를 의식하지 못한다. 척후병이 없으므로. 질끈 감은 아내의 눈에서 예의 여자가 흘린 것과 비슷한 눈물이 번지고 있다. 나는 새끼와 아내가 이루는 덩어리를 본다.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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