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 신인상
- 수상자
- 투고작
[2017상반기 신인발굴]_소설_임하민_03.11
페이지 정보

본문
<소설부문>
성명: 임하민
성별: 남자
연령: 24세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도솔빌리지 1동 301호
연락처:010-5160-0970
<시계를 팔아보시오>
'이번 면접이 마지막 기회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면접실로 들어갔다.
월세는 세 달째 밀렸고 나이도 먹을 정도로 먹었다. 올 해를 넘기면 신입사원으로 채용될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다. 이 입사면접에 내 모든 것을 걸었다. 네이버 지식인에서 찾은 입사면접 질문 100문 100답 - 입사동기,앞으로의 비젼,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 등등 - 을 거울 앞에서 백 번도 넘게 연습했다. 회사 설립일과 연혁, 설립동기도 달달 외웠다.
'자, 뭐든지 질문해 봐라. 난 준비되어 있으니깐.'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 직후, 입사담당관이 자신의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서 내게 건냈다.
"내게 이 시계를 팔아보시오."
입사담당관이 말했다.
"10분 주겠소."
빌어먹을. 이건 예상 못했는데.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나는 시계를 집어들고 재빨리 살펴봤다.
기계식 시계. 비싸보인다. 난 시계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 그 이상 까지는 모른다. 셜록 홈즈였으면 이 시계에 대해서 별의 별 추리를 해댔겠지. 알콜중독자가 태엽을 감았다던가 뭐 그딴 식으로. 하지만 난 셜록 홈즈가 아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일반인이 시계에 대해 아는 정도가 내 지식의 전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기 전에 나무위키에서 시계 항목이라도 찾아 보는건데.
침묵 속에서 1분이 흘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거요?" 입사담당관이 말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겉보기에는 아주 태연하고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지만, 시계를 쥔 내 손에는 미칠듯이 땀이 배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생각해라. 어서, 생각하라고. 내 머릿속에서 시계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열람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태엽을 감아서 시간을 돌리는 기계식 시계..그게 전부다. 뭐 어쩌라는 건데?
나는 머리가 새하얘졌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젠장.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가. 올해 마지막 입사면접 기횐데. 이것까지 놓치면 난 끝이란 말이다. 이 뭣같은 입사담당관 놈아. 네놈이 들고 있는 그 빌어먹을 서류철에는 내가 준비해온 스테레오타입의 질문들이 있는거 다 알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온 놈들한테는 그 질문을 했겠지. 나한테 이따위 질문을 하는 건 내가 지잡대 문창과를 나왔기 때문이겠지? 어차피 낙방시킬거니깐, 그 전에 심심풀이 삼아 남들한테는 하지 않을 흥미 위주의 질문이라도 던져 본 거고, 내가 무슨 대답을 하던 넌 나를 낙방시킬 생각인거지. 다 보인다고 이 개자식아. 여기가 무슨 시계 제조업체냐? 그것도 아니면 내가 판촉물 세일즈맨으로 지원한걸로 보이냐? 시계를 팔아보라고? 그 전에 왜 내가 너한테 시계를 팔아야 하는지 이유나 말해보시지. 네가 진짜 하고싶은 말은 이거 아니냐? 내 쩔어주는 명품시계를 보고 열폭하라고. 넌 평생 이런건 만져보지도 못할테니 실컷 만져보고 10분 후에 뒤돌아서서 면접장을 나가라고. 그뒤로는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그게 하고싶은 말이지? 응? 넌 그냥 재롱부릴 동물원 원숭이가 필요한거잖아. 내가 쩔쩔 매면서 땀흘리는 거 보면서 웃어재끼려고. 그리고 오늘 저녁 회식자리에서는 부하직원들 앞에서 술안주로 내 이야기를 꺼내겠지.이봐 내가 오늘 그 지잡대 찌질이 녀석 면접을 봤는데 말야. 10분을 줬는데 10분 내내 한마디도 못하더군. 지잡대 놈들은 원래 다 그 모양인가봐. 다음부턴 아예 서류단계에서 걸러버리라고 말해 둬야겠어. 요즘 서류면접 수준이 너무 낮아졌다니깐. 그리고 술 한잔 마시고 또 내 이야기 하고 또 술 한잔 마시고 내 이야기하겠지. 그 생각을 하는동안에도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렀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놈의 시계는 또 째깍거리는 소리가 왜이렇게 크냐는 말이다.
그렇게 2분이 흘렀다.
나는 이제 아예 희망을 버렸다. 이제 뭐 어떻게 되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아무 생각이나 하기 시작했다. 이젠 이 면접이 통과하든 통과하지 않든 상관없어졌다. 집 가자마자 핸드폰 꺼놓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잠든 채로 죽고 싶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대학 시절이 생각났다. 내가 여태동안 해온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경제학과를 나왔다면 이 시계를 삼으로써 얻는 시간의 이득과 그것으로 창출 가능한 경제적 이윤에 대해 현란한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설명할 수도 있었겠지. 기계공학과를 나왔으면 시계 안에 숨어있는 수많은 기계적 원리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있었을 거고. 물리학과를 나왔으면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에 대해 설명할 수도 있었으리라. 물론 그런 곳에서 실제로 그런 걸 배우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곳을 졸업한 다음 그런 소리를 지껄이면 설득력은 생긴다. 하지만 내가 그런 소리를 지껄이면, 그건 진짜 개소리가 된다. 난 애초에 작가 지망생이었다. 어릴때부터 작가가 되고싶었다.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실기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둬 운 좋게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동기들 가운데에서는 비교적 재능 있고 운 좋은 편이었다. 특출나지는 않았지만, 평가는 좋았다. 젊은 나이에 공모전도 몇 번 입상했고, 운 좋게 단행본도 출판사에서 냈다. 하지만 아무도 내 책을 읽지 않았다. 난 생계를 유지하는데 한계를 느꼈고, 망설임 없이 작가로의 길을 버리고 취업전선에 참가했다.
그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옛날 일이 생각났다. 대학 시절에 한 교수가 냈던 조별과제가 생각났다. 그 교수는 기존의 고리타분한 커리큘럼에서 벗어난 독특한 과제를 내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동기들은 그 교수를 싫어했다. 한 번은 일종의 스피드 테스트를 시행한 적이 있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기가 들고 있던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주고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그것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생각해 내도록 했다.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낸 학생은 가산점을 받았다. 학기가 끝날 때 나는 그 강의에서 a+를 받았다.
그러니깐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류 이야기꾼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짓말이 사실같이 느껴지도록 꾸며낸다. 일류 소설가는 일류 거짓말쟁이다. 스티븐 킹이 감옥에 갇혀 봐서 쇼생크 탈출을 쓴 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할 수 있을까?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저 감독관을 속여넘길 수 있을까? 내가 평생 해온, 유일하게 잘하는 짓을 해야 한다. 지금부터는 내 인생을 건 사상 최대의 거짓말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거짓말이 그럴듯한지 교차검증하고 퇴고할 시간도 없다. 거짓말을 꾸며내는 동시에 입으로 그것을 말해야 한다. 이것은 이야기꾼이 만날 수 있는 최대의 시련이다. 편한 자세로 앉아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던 순간과는 전혀 다르다. 이건 차라리 랩퍼들이 랩을 하는것과 비슷하다. 생각할 시간은 좉도 안주고, 존나게 빠른 비트에 맞춰 말을 뱉어내야 하니깐. 그리고 내 앞에는 스포트라이트가 켜져 있고 관객들이 기대에 가득 차서 날 쳐다보고 있다.
씨발. 그래 이왕 랩퍼가 될거면 어디 한번 에미넴이 되어 보자고.
"3분 지났네. 아직도 생각중인가?"감독관이 말했다.
나는 씨익 웃었다. "혹시 마스터피스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한 시계공이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였죠. 시계공은 4살 때 처음으로 시계를 만났습니다. 거실에 앉아 부모님이 사놓은 패션 잡지를 뒤적거리다 명품 시계 브랜드의 광고사진을 접했죠. 시계가 뭔지, 뭐에 쓰는 물건인지도 몰랐고 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하던 꼬마였는데도 그 사진을 본 순간 홀딱 빠져들었습니다. 꼬마는 한참동안이나 그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넋나간 듯 바라보았죠. 소년은 직감했습니다. 앞으로 나는 평생을 시계를 위해 바치겠다."
떨지 말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하기. 그것이 뛰어난 거짓말쟁이의 첫 번째 규율이다.
"꼬마는 자라 소년이 되었습니다. 틈만 나면 집의 시계들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했습니다. 주말이 되면 도서관에 가 시계 관련 자료와 책들을 읽었죠. 소년의 방은 또래 소년의 방과는 다르게 시계 부품의 잔해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운 좋게도 그의 꿈을 진지하게 믿어주고 아낌없이 지원해주는 부모님을 가졌습니다. 소년은 자라 청년이 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세계 최고의 시계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방 최고의 장인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빛나는 재능의 원석은 어디서나 눈에 뛰는 것이니깐요. 물론 그것이 쉬운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재능이 빛날 수록 주변인들은 그를 질투했죠. 그와 함께 입사한 동기들, 선배들, 윗사람들. 나중에는 그의 스승조차 그를 질투했습니다. 그가 설계한 아이디어를 자기 것으로 가로채버려서, 그걸로 말다툼을 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결국은 그는 세계 최고의 시계공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했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시계를 다루는 것을 즐겼으니깐요. 처음 시계를 손님으로부터 건너받는 순간. 그 시계에 담긴 역사와 주인의 손길을 상상하는 순간. 작은 루페를 통해서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톱니바퀴들을 쳐다보는 순간. 그는 그 모든 순간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입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지껄이면서도 동시에 그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그걸 어떤 순서로 설명해야 가장 흥미진진하면서도 간결할지 생각했다. 동시에 앞에 한 이야기와는 모순되어서는 안된다.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수능 칠 때도 이정도로 머리를 굴리지는 않았다. 이게 바로 거짓말쟁이가 힘든 직업인 이유다.
"시계공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시계공방을 그만뒀습니다. 그는 저축한 월급, 퇴직금, 은행 대출금, 3년 전 죽은 부모가 남긴 유산 등등을 전부 긁어모아 건물을 하나 샀습니다. 그는 그곳에 자신의 시계공방을 열었죠. 직원은 그 혼자 뿐인 작은 공방이었습니다. 그는 시계를 만지는 것을 좋아했지,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그 공방은 엄청나게 잘나갔습니다. 그에게는 시계를 만드는 능력 뿐 아니라 장사 안목도 있었거든요. 가게의 입지조건도 좋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값이 싸더라도 진짜로 성능이 좋은 시계를 추천해주고, 아무리 상태가 나쁜 시계라 해도 완벽하게, 심지어는 그 시계를 처음 산 순간보다도 더 좋게 수리해줬으니깐요. 20세기엔 그런게 통했죠. 성실함과 솔직함, 입소문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시계를 만지는 것 외에는 취미도, 돈 욕심도 없었기에 매우 저렴한 가격에 시계를 수리해줬으니 더더욱 인기가 좋았죠. 시계공의 삶은 오직 시계로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직접 차린 토스트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오전 내내 의뢰가 들어온 시계를 수리했습니다. 그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돌아와 오후 내내 새로운 시계를 설계하고 제작했죠. 그는 하루종일 그곳에서 일하고 그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일터가 곧 생활공간이었죠.저녁 7시에 가게 문을 닫고 나면 늘 가던 술집에 가서 맥주 한 잔 하는게 그의 유일한 사치였습니다. 물론 그 순간에도 머릿속은 시계 생각 뿐이었죠."
그런 말을 지껄이고 있으니 마치 내가 그 시계공 본인이 된 것 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 시계공이 앞으로 뭘 할지, 어떤 인생을 살지 눈 앞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들어 본 적 있나? 거짓말쟁이가 자신의 거짓말에 하도 몰입하고 나면 자기 자신조차 그게 사실이라고 믿게 된다는 정신병이다. 내가 보기에 모든 소설가는 리플리 증후군 환자다.
"그는 일년에 한 두 개의 시계를 만들었습니다. 그 시계들은 세계 최고의 시계였습니다. 당대의 그 어떤 시계보다도 정확했고, 작고 가벼웠습니다.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정밀도로 만들었죠. 수십년간은 고장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발전했습니다. 그가 시계를 발표할 때마다 시계는 더욱 정확하고 가벼워졌죠. 그는 시계제조업이라는 분야의 가장 선두에 서서 업계를 인도하는 자였습니다. 코코 샤넬이 패션업계를 인도했고,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인도했듯이 말입니다. "
거짓말에 진실 한두 개를 끼워넣으면 그 거짓말이 훨씬 더 설득력을 가진다. 프로 거짓말쟁이들 사이에선 유명한 방법이다.
"시계공은 늘 혼자 일했습니다. 한 종류의 시계를 한 번 만들고 나면 더이상 두 번 다시 똑같은 것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세계 최고의 시계.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거죠.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들에게 팔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시계공은 단 한번도 자신의 작품에 만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내 눈에는 아직 시계가 발전해야 하는 부분들이 보인다고. 아직 이 시계는 완전하지 않다고, 이런 잡품에는 이름을 붙일 가치조차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비싼 가격에 팔려 나가도 그는 액수에 별 감흥을 가지지 않았죠. 사람들은 그가 지나치게 겸손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부터 그는 더 이상 새로운 시계를 출시하지 않았습니다. 가게 문을 닫고 수리 의뢰도 받지 않았죠. 밤마다 작업실에 등불은 켜져 있었지만, 그가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저택에는 그 혼자 살았으니깐요. 사람들은 궁금해했습니다. 그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온 것인가? 끝없이 샘솟는 분수처럼 보이던 그의 천재성에도 한계가 온 것인가?"
자, 잠시 시간을 두고 관객들에게 궁금증을 일으키도록 하자. 이런 질문이 가지는 장점은, 설령 그 질문이 관객들 누구나 쉽게 정답을 맞출 정도로 뻔한 질문이라 해도, 관객이 정답을 추측하는 과정에서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추측한 정답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이야기를 끝까지 듣게 된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꾼의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가게 문을 닫은 지 15년이 지났습니다. 시계공은 중년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기자들을 불러모으고 명망있는 국립 시계학회 회원들을 전부 소집했습니다. 대중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자신이 만든 새 시계를 공개하겠다고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기대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았죠. 그가 아무리 천재였고 위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옛날 일이다. 그가 시계를 만들지 않은지 15년이 지났다. 흥청망청 놀다 보니 슬슬 먹고 살 돈이 부족해져서 다시 시계업을 시작하는 것 아니겠냐고. 이미 퇴물에 지나지 않는 그의 작품에 큰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을 거라고."
"발표날, 잔뜩 모인 군중들 앞에서 시계공은 말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걸작(masterpiece)이오'. 그가 시계를 보이자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너무나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시계였기 때문이죠. 처음부터 그는 이 시계를 만들기 위해 15년을 바칠 계획이었습니다. 자신의 재능이 가장 찬란한 순간, 자신의 실력이 가장 빛나는 순간에 자신의 인생 최고의 시계를 만들겠노라고 계획했고, 자신의 청년기가 오자 망설임 없이 그 계획을 실행했죠. 이 순간보다 더 일찍 시작해도, 더 늦게 시작해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계는 시계공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그 모든 지식과 기술이 압축시켜 넣은 시계였습니다. 이 세상에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시계였죠. 이 세상 어떤 시계보다도 정확하고, 구현 가능한 온갖 기능이 담겨있으며, 너무나도 구조가 섬세한 동시에 완벽해서, 앞으로도 수십년은 따라잡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본인 자신조차 지금의 구조에서 나사 하나조차 더하거나 줄이지 못하는 완벽한 시계였죠. 시계에 문외한인 군중조차 압도되었습니다.전문가들은 더했죠. 그들은 시계의 구조를 오랫동안 감정한 끝에 발표했습니다. 이제 시계는 끝났다. 그가 시계를 끝내버렸다."
"호사가들은 물었습니다. 그 시계를 얼마에 팔 것이오? 누구에게 팔 것이오? 시계공은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를 위한 시계도 아니오. 이것은 나를 위한 시계요.'"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시계공은 늘 그 시계를 손목에 차고 일을 했습니다. 새로운 시계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수리 의뢰를 받았죠. 어쨌거나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으니깐요. 시간이 흘러 시계공은 어느덧 노인이 되었습니다. 눈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손이 떨려 시계부품을 만질 수도 없게 되자 그는 이번엔 진짜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정말로 가게 문을 걸어닫고 간판을 내렸죠.그는 손목시계의 가죽줄을 제거하고 그것을 벽에다 걸어놓았습니다. 매일 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생각했죠. '나는 이 시계를 만들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었다. 그것만으로도 내 삶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았는가?' 과거에 시계공이었던 노인은 그 생각 덕분에 춥고 어두운 밤에도 두려움이나 후회 없이 잠들었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취미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결코 외롭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수십년은 자신의 시계를 뛰어넘는 시계가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 노인은 어느날 밤 자다가 고통 없이 죽었습니다......면 정말로 좋았겠죠."
위기, 절정, 결말, 그리고 반전. 식스센스의 개봉 이후 모든 반전 영화의 교과서가 된 서사구조다. 다른 내용은 지껄이는 동시에 그때그때 꾸며냈지만, 이 부분만은 내가 손목시계를 처음 집어 든 순간부터 생각한 부분이다. 자 들어라 관객들아. 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하지만, 어느날 쿼츠 시계가 나왔습니다. 노인이 70세였을 때입니다. 그것은 시계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무너뜨렸습니다. 노인은 평생을 통해 믿어왔습니다. 뛰어난 시계란 극도로 정밀한 톱니바퀴, 극도로 미세한 나사, 경량화와 복잡화를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위대한 기술력이란 밑바닥부터 서서히 쌓아 올리는 것이라고요. 하지만 노인이 평생을 바쳐 추구해 온 가치를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통째로 박살내버렸죠. 노인의 작품은 더 이상 무가치해졌습니다. 대중은 더이상 기계식 시계를 사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괴짜들은 여전히 기계식 시계와 위대한 노인을 기억했지만, 그마저도 세월이 지나자 잊혀졌죠. 아무도 더 이상 노인의 위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작고 성능 좋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발명되고 쓸데없이 크기만 차지하고 수명도 짧은 진공관 라디오가 잊혀졌듯, 기계식 시계는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슬픈 사실은 노인이 만든 최고의 마스터피스 조차 가장 값싼 쿼츠 시계(저녁식사 한 끼 먹을 돈이면 살 수 있는 녀석) 보다도 부정확했다는 것입니다. 노인의 평생의 위업은 고철조각이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노인은 그 소식을 믿고싶지 않았습니다. 애써 변화를 피해 저항했죠.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손목을 보지 않으려고, 식당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나중에는 시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노인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판대에서 파는 쿼츠 시계를 하나 사서 돌아왔습니다. 먼지 쌓인 작업실에서 그것을 분해해서 살펴보았고, 잠시 후 그것을 벽에 던져 박살내버렸습니다."
"노인은 그 날 밤 밧줄에 목을 매고 자살했습니다. 그의 작업실 벽을 가득 채운 낡은 기계식 시계들이 째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말입니다. 아무도 노인을 방문하지 않았기에, 노인의 죽음은 한참 후에야 발견되었습니다. 우편물이 지나치게 오래 쌓여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우편배달부의 신고 덕분이었죠. 작업실은 썩는 냄새로 진동했습니다. 경찰관들과 보건복지부 직원이 그의 시체를 수습했고 저택은 헐값에 경매로 넘어갔습니다. 그곳이 시계 공방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죠. 새로운 주인은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그곳을 여행자를 위한 숙박업소로 리모델링 할 생각이었습니다. 규모나 위치도 좋았고, 무엇보다 여행객들은 현지인들과 다르게 그곳에서 사람이 죽었는지 어떤지 알지 못하니깐요. 그저 값싸고 시설만 좋으면 만족하죠. 노인이 평생을 사용한 정밀기구들과 도구들은 버려졌습니다. 사업가가 보기엔 그저 녹슨 고철덩어리들일 뿐이었으니깐요."
"벽에 걸린 수많은 시계들도 처분되었습니다 괘종시계. 손목시계. 벽시계. 해와 달의 운행과 별의 일주운동을 가장 창의적인 방식으로 나타내던 시계들. 세상에서 가장 맑고 아름다운 소리로 우는 뻐꾸기 시계. 한 때는 시대를 이끌어가는 최초였던 것들. 하지만 더이상은 아닌 것들. 그것들은 더 이상 태엽을 감아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업가에게 멈춘 시계는 곧 고장난 시계였죠. 그것들은 도끼로 쪼개져 박살난 채 쓰레기장으로 실려가 불태워졌습니다. 하지만 사업가는 단 하나의 시계 만은 팔지 않고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그 시계의 특별한 가치를 느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단순하고 실리적인 이유였죠. 다른 시계가 모두 멈춘 가운데 그 시계만이 유일하게 작동하고 있었거든요. 어쨌거나 숙박업소에도 벽에 걸어놓을 시계 하나 정도는 필요했으니 말입니다. 새 시계를 살 돈은 아낄 수 있었죠. 이제 그 시계가 어떤 시계였는지는 감이 오실겁니다. 바로 최후의 마스터피스지요."
"하지만, 그 시계가 무슨 기적의 마법이나 노인의 최후의 염원 같은게 들어가서 남들보다 오래 작동했다던가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그건 동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잖습니까. 아무리 기술력이 뛰어났다 해도 쿼츠 시계가 나오기 수십년 전 시대의 기계식 시계입니다. 커다란 벽시계조차 수명이 다했는데 어떻게 자그마한 손목시계가 혼자 작동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저 노인이 자살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행동이 그 시계에 태엽을 감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나머지 시계는 태엽을 감은 지 오래 되어서 멈춰버린거고요."
자, 이제 복선도 회수하고 반전도 전부 설명했다. 이제 남은건 매끄러운 결말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 때가 제일 힘들다. 듣는 사람이 기대를 지나치게 많이 했다면 결말에서 실망하고, 듣는 사람이 관심이 없다면 결말까지 오지도 않는다. 그 밸런스를 적절하게 조절해 결말까지 완벽한 이야기를 만들기는 정말로 쉽지 않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업가도 늙어 죽었죠. 그 뒤로 그 시계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흐르고 흘러서 전당포로, 중고시장으로, 그리고 당신에게, 그리고 제 손에 오게 된겁니다. 이 시계에 담긴 기술은 당대에는 최고였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한참 뒤쳐진 구닥다리 기술입니다. 옥션에 출품해 봤자 큰 값은 못 받겠죠. 그러니 재벌 회장님의 개인 소장품이 아니라 시시한 인사부 과장이나 시시한 신입 인턴 공채 지원자 손에 올 수 있는거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 시계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마스터피스입니다. 한 인간의 인생이 이 안에 담겨있으니 말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이 시계를 구매 하시겠습니까?"
...침묵.
정적이 흐른다. 냉랭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럴 줄 알았지. 애초부터 이렇게 될 거였다.
"구매하지 않겠소."입사담당관이 말했다.
개자식.
"...왜 구매하지 않으시겠습니까?"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자신있게 답했다.
"왜냐하면 이 시계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지 않으니깐. 이건 파텍 필립이지. 무슨 이름없는 늙어 죽은 장인이 만든 시계가 아니라 파텍 필립 소속 디자이너가 설계하고 전문가들이 조립한 시계라고. 거짓말은 그 분야에 무지한 바보들에게나 통하는 거요. 난 당신에게 동화 속 이야기를 들으려고 그 시계를 건네준 게 아니오. 내가 이 시계를 사야만 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기대했지. 그리고 애초에 당신 이야기도 별로 재미없었소. 솔직히 후반부터는 대충 결말이 예상되더군. 더 할 말 있소?"
개자식. 그렇게 시계에 대해 잘 안다면 시계 따위 없어도 인생은 충붅히 살 수 있다는 것도 잘 알텐데. 애초에 이건 저딴식으로 나온다면 이길 수가 없는 승부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넌 거짓말을 하고 있잖아.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만은 용서할 수가 없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제 이야기를 재밌게 들었잖습니까."
"무슨 근거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자네가 무슨 독심술사라도 되나? 내가 이야기를 재밌게 들었는지 어떤지 자네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자, 최후의 카드를 던지자. 나는 손목시계를 내밀어보였다.
"당초에 저한테 10분을 주셨는데, 전 지금 23분째 여기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깐요.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앉아서 이야기를 들었잖습니까. 대기하는 동안 앞 사람들 들어가고 나가는 시간을 일일이 계산해 봤습니다. 평균이 8분, 길어야 12분 정도 버티더군요. 제 이야기가 그렇게 지루하고 재미없었으면 듣는걸 중간에 그만뒀겠죠. 하지만 쉬지도 않고, 입 한번 열지도 않고, 끝까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었잖습니까. 그게 재밌었다는 증거죠. 이 정도면 합격점 아닙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게다가, 이런 조건에서 이 정도 이야기를 만들어 냈으면, 다음 번엔 제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 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끝
- 이전글[2017상반기 신인발굴]_소설_서용호_03.16 17.03.17
- 다음글[2017상반기 신인발굴]_수필_한나래_03.08 17.03.0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