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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상반기 신인발굴]_소설_조윤재_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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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66회 작성일 17-03-17 00:45

본문

<소설부문>


이름 : 조윤재

성별 :

연령 : 25

주소 : 서울시 금천구 독산동 47-35 우현캐슬 202

연락처 : 010-6847-4984

 










죽음을 팝니다





오후 5, 한적한 역 앞 카페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검은색 긴 생머리를 가진, 하얀 얼굴의 그녀. 마스크와 후드 탓에 드러난 곳이라곤 눈뿐이었지만 제법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자기 관리에 소홀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는 몸태. 여태껏 봐왔던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지금까지의 그들은 전부 후줄근하고, 생기가 없고, 어둡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반면에 그녀는, 적어도 외적으로 삶에 불편함이 없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예뻤고 날씬했으며 목소리엔 자신감이 담겨있었다.

죄송해요, 좀 늦었죠?”

괜찮아요. 안 오는 사람들도 있는 걸요.”

여자는 잠시 만요, 하고 커피를 하나 주문해와 내 앞에 앉았다. 네 번째 손가락엔 반지가 있었다. 빛바랜 은색 반지였다. 커피를 마시려 마스크를 벗은 그녀의 얼굴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난 가방에서 준비한 작은 약봉지를 꺼내 보였다. 투명한 약봉지 안에는 하얀색 알약이 두 알 들어있었다. 여자는 약을 보자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처럼.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후 약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넣는 와중에도 여자의 시선은 약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자세를 고쳐 앉아 그녀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수면을 유도해 최대한 고통 없이 안락사에 빠지게 하는 약이에요. 아시다시피 이 약의 복용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제가 보는 앞에서 하셔야합니다. 아무래도 불법이다 보니 제 신변의 보호를 위해서구요. 금액은 지금 당장 지불하셔도 되고 사용하는 곳에 도착해서 주셔도 됩니다. 그 외에 질문 있으세요?”

제법 사무적인 말투에 여자는 굳은 얼굴이 되어 애꿎은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여자의 질문이 없다고 생각되어 말을 이었다.

그럼 우선 자리를 옮길까요?”

 

카페를 나와 거리를 걸었다. 언제나 그렇듯, 많은 대화를 하진 않았다. 우리 관계에서의 대화는 불필요했으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까.

근처 ATM기에서 여자는 준비한 돈을 인출했다.

그런데요.”

그녀가 돈을 지갑에 넣으며 말했다.

보통 다들 어디서 약을 먹나요?”

대부분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숙박업소에서 먹어요. 집 근처에서는 왠지 죄책감이 든다나…….”

통상 그랬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최대한 관련이 없는 곳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목적으로, 입소문에 오르지 않을 목적으로, 발견을 늦출 목적으로, 어떤 이들은 심지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현실과 현재 자신에게 관련이 없는 곳을 찾았다.

내 답변을 듣고 여자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죽음을 기다릴 곳을 정하지 않은 채 날 찾은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의문이 들었다. 여태의 사람들과 많은 부분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다짐으로 끝을 찾는 걸까.

그럼 저희 집으로 가실래요?”

생각을 마친 그녀가 말했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 그녀의 눈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을 만큼 또렷하게. 이유를 묻진 않았다. 그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 죄책감이란 단어가 무색할 만큼의 이유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 그러죠. 하고 그녀를 뒤따랐다.

 

여기에요. 우리 집.”

골목을 돌고 돌아 도착한 허름한 아파트를 여자가 가리키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회색 아파트의 벽면에는 넝쿨이 반 정도 올라와 있었다. 그녀와 아파트를 번갈아 바라보니 이질감이 느껴졌다. 정갈하게 정돈된 그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탓이다. 그녀는 나를 힐끗 보더니 지체 없이 건물로 들어섰다.

9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는 쉼 없이 비명을 질러대는 반면, 그녀와 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녀가 내 표정을 본 탓인지, 그녀와 아파트 사이의 이질감에 말을 잃은 내 탓일지도 모른다. 기계의 비명은 9층에 다다라 문이 열리고서야 끝이 났다.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복도는 양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집은 오른쪽 제일 구석에 있는 집이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중에도 이곳에 과연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저녁 시간임에도 가정의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철저한 고요가 덮고 있는 복도엔 그녀와 내 발자국 소리만 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의 집은 글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속옷을 포함한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지저분한 식기들은 싱크대에 탑을 쌓고 있었다. 벽 군데군데에는 무언가 날아와 부딪혀 파인 자국도 있었다. 여자는 멋쩍은 표정을 짓고는 날 방으로 안내했다.

여자의 방은 완전히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도배를 새로 한 듯한 하얀 벽지에는 그림이 들어간 작은 액자가 걸려있었고 모든 물건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옅은 노란색 솜이불이 덮고 있는 침대, 그 옆으로 작은 화장대. 벽 한 쪽을 차지한 책상과 의자, 책상 위에 놓인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들. 그녀의 외모와 어울리는 정갈하고 깔끔한 공간이었다.

여자는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의자에 앉아 검은색 공책을 꺼냈다. 난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었다. 여자는 몇 글자 끄적끄적 적어 내려가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이어리에요, 일기장. 오늘 있었던 일 쓰려구요.”

여자는 다시 일기장에 몰입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둔 지금을 기록했다.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글을 적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떤 심정과 상황을 적어가고 있을지, 그녀의 일기장은 어떤 목소리로 그녀의 글을 읊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일기장 한 쪽 면을 채울 정도로 빼곡히 글을 쓰고 나서야 여자는 펜을 놓았다. 한결 개운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펴는 그녀. 입가엔 옅게 미소까지 걸려있었다.

봐도 돼요?”

궁금증은 결국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녀를 좀 더 알고 싶어서, 그녀의 기록에 어떤 의미를 찾고 싶어서, 굳이 불필요한 말을 하고 말았다. 뜬금없는,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에 여자는 퉁명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마치 언제나 그랬다는 듯, 자신의 일기장은 자신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는 듯.

오히려 당황한 쪽은 일기장을 건네받은 나였다. 매일 이 곳에 그녀를 기다린 채 오롯이 놓여 있었을 일기장. 고스란히 그녀를 담고 있을 일기장. 그녀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떨림을 뒤로하고 마지막 페이지, 그러니까 그녀가 방금 기록을 마친 장을 펼쳤다.

 

일기는 마치 편지처럼 쓰여 있었다. 아마도 반지의 주인인 에게 향하는 편지일 테다. 여자는 자신을 그에게 이야기하듯 일기에 적어 내린 것이다. 그녀에게 처음 연락을 받았던 날의 일기를 펼쳤다. 군데군데 물 자국이 일기의 글씨를 번져 놓고 있었다. 아마 그날, 그가 떠난 듯했다. 그 탓에 그녀는 죽음을 생각하고, 내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방을 나가더니 곧 캔 맥주 2개를 들고 들어왔다. 멋쩍게 맥주를 받았다.

맨 정신으로 누구한테 얘기를 해본 적은 없어서요.”

, …….”

여자는 맥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전 사실 몸 파는 여자에요.”

맥주를 비운 그녀가 말했다. 느닷없는 고백이었다.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수수하단 수식어가 어울리는 여자였다. 내 머리 속의 몸 파는 여자는 짙은 화장과 매니큐어, 어지러울 정도로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그와 정반대였다. 한 듯 안한 듯 옅은 화장과 깔끔한 손톱, 향이라곤 가끔씩 풍기는 샴푸향이 전부인 여자. 난 가볍게 맥주로 목을 축였다. 그녀는 말없이 맥주를 마시는 날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처음엔 가게에서 만났어요. 그러니까, 제가 일하는 곳이요.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랑 다를 바 없는 손님이었어요. 다른 점은……. 조금 잘생겼다는 거? 따로 특별한 건 없었어요. 술을 마셨고, 몸이 달아올랐는데 지갑에 돈이 있었으니까 저를 찾았거니 생각했죠. 흔한 남자들처럼. 그래도 괜찮았어요. 술 취한 배불뚝이 아저씨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내 나이 또래를 받는 건 엄청 오랜만이었거든요.”

여자는 잠깐만요, 하고선 맥주를 하나 더 들고 왔다.

언젠가 TV를 보는데 그 사람이 나오더라고요. 화장을 해서 그런지 더 멋있는 얼굴로 멀끔한 옷을 입고서는. 조금 놀랐어요. 유명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배우였나 봐요. 단역이라 하나? 별로 비중 있는 배역은 아니었어요.”

여자가 맥주를 마셨다. 난 책상 구석에 맥주를 놓고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여자는 크- 하고 짧은 숨을 뱉었다.

그 다음에, 딱 다음 주 그 날이었던 거 같아요. 그 남자가 또 왔어요. 그땐 사람이 좀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렇잖아요. TV에 나오면 그래도 연예인이라는 건데, 지금 내가 연예인이랑 몸을 섞는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연예인도 이런 데를 다닌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물론 유명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지만요. 그날엔 제가 일부러 신음을 낼 필요가 없었어요. 연예인이랑 몸을 섞는단 생각이 강해서였을까요, 자연스레 흥분되더라구요. 그 남자가 부드럽게 만져줘서 그랬는지도 모르고요.”

여자는 제법 부끄러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오히려 얼굴이 뜨거워진 건 내 쪽이었다. 난 책상 구석의 맥주를 집어 한 모금 마셨다. 맥주를 놓았던 자리에 동그랗게 물 자국이 남았다.

그날 그 사람이 옷을 입으면서 저한테 물었어요.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그래서 제가 말했죠. 왜 그런 걸 물어요? 하고. 그랬더니 그 남자가 뭐랬는지 알아요?”

글쎄요.”

내 대답에 여자는 미소를 짓고 맥주를 마셨다. 캔에 맺힌 물방울 하나가 여자의 쇄골로 톡 떨어졌다. 여자의 어깨가 잠깐 움찔, 했다. 책상의 맥주를 집었다. 캔은 이미 비어있었다. 여자는 또 잠깐만요, 하더니 차가운 맥주를 가져왔다.

술이 많네요.”

좋아하니까요.”

맥주를 마시고 빈 캔 옆에 내려놓았다. 금세 캔에 물방울이 맺혔다. 여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맘에 들어서요. 라고 말하더라고요. 말도 안 되죠. 기껏해야 두 번 본 건데. 그것도 일반인도 아닌 연예인이, 일반인도 아닌 홍등가에서 돈 주면 몸 내주는 여자한테 맘에 든다니요. 장난하는 거냐고 꺼지라 욕도 했겠죠, 근데…….”

여자가 말을 멈췄다. 잠깐의 침묵. 세상이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흔한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철저하게 고요했다. 그 사이 여자는 미세하게 손을 떨었다. 그게 분노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꺼낸 추억에 젖은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맥주를 들어 입을 적셨다. 캔에 맺힌 물방울 하나가 여자의 쇄골로 톡 떨어졌다. 여자의 어깨가 잠깐 움찔, 했다. 그녀가 맥주 삼키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죠. 그 와중에 설레더라고요. 자격도 없는데 말이에요.”

말하는 여자의 표정에 슬픔이 앉았다. 여자는 들릴 듯 말 듯 후- 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책상의 맥주를 집었다. 캔에 맺힌 물방울이 손을 적셨다. 책상에는 동그란 물 자국이 나란히 두 개가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사람 명함이 제 손에 쥐어져있었어요. 남자가 가고 전 그 날부터 하루 종일 남자 생각밖에 안 났어요. 다른 손님을 받으면서도 그 사람 생각뿐이었어요. 빨리 다음 주가 와서 그 사람을 안고 싶다는 생각 밖에요. 참 웃기죠.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영화처럼 첫눈에 반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연예인이란 이유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런 내가 좋다고 말한 것 때문인지…….”

여자는 말을 흐렸다. 여자의 시선은 여자의 발끝에 머물렀다. 바닥 너머를 보는 시선. 무심결에 본 여자의 볼이 발갛다. 여자는 나머지 맥주를 전부 마신 후, 캔을 내려놓았다.

언젠가 쉬는 날에, 가게 언니들이랑 술을 마신 적이 있어요. 그 날 엄청나게 취해서 기억이 끊어졌어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핸드폰을 보니까 모르는 번호로 제가 전화를 했더라고요. 설마 하는 생각에 남자가 준 명함을 보니까, 그 번호였어요. 취해서 그 사람한테 전화한 거예요. 전화해서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술 먹고 전화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민망하고……. 차라리 다시는 만나지 않길 바랐어요.”

그리고 침묵. 난 애꿎은 빈 캔만 만지작거렸다. 여자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머뭇대다 말을 이었다.

그 다음날에, 그 사람이 왔어요. 한 손에는 작은 종이가방을 들고요. 그 전과 똑같이 마담과 이야기를 하고 돈을 내고, 저랑 방으로 들어갔어요. 전 얼굴도 못 든 채로 끌려가다시피 따라갔죠. 평소처럼 옷을 벗으려는데 제 손목을 잡으면서 말리더라고요. 그냥 옆에 앉아서 얘기 좀 하자면서. 괜히 더 민망해졌죠. 둘이 나란히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고개만 처박고 있었어요. 옆에서 부스럭거리더니 그 사람이 종이가방에서 뭘 꺼내더라고요. 그게 이 반지였어요.”

여자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난 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납득이 되질 않았다. 느닷없는 남자의 등장과 고백이라니. 그런 남자에게 마음을 준 여자 역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거나 사랑에 빠지는 일에는 명백한 이유가 없다지만……. 언뜻 동화 속 백마 탄 왕자가 생각났다.

말도 안 되네요.”

무심코 말을 뱉었다. 여자는 대꾸 없이 빈 맥주 캔을 두어 번 돌리더니 새로운 맥주를 들고 왔다. 이젠 자연스럽게 내 몫을 건네줬다. 술 때문인지 여자의 볼이 점점 발간빛을 띠고 있었다.

그렇게 그 사람이랑 연애를 시작했어요. 자연스럽게 제가 일하던 데에서도 나와서 비교적 평범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구했어요. 벌이는 홍등가에서 일할 때랑 비하면 비교도 안 될 만큼 적었지만 떳떳하게 일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 사람은 가끔 대학로 같은 곳에서 연기도 했어요. 작은 극단 같은 데서요. 공연이 있을 때면 매번 가서 보곤 했어요. 무대 위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제일 행복한 표정이었어요.”

세 번째 맥주를 비우고 있으려니 배가 더부룩했다. 덩달아 머리도 어지러웠다. 반면에 여자는 말하는 사이사이에 맥주를 아무렇지 않게 마셔댔다. 맥주를 삼킬 때마다 여자의 목젖이 따라서 움직였다.

행복했어요. 가끔은 그 사람 공연을 보고, 떳떳하게 편의점 일을 하고, 벌이가 줄어든 만큼 돈 쓰는 것도 줄이고……. 흔한 연인들처럼 데이트도 하고요. 평생을 이렇게 살아도 좋을 만큼,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고 생각이 들 만큼.”

여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맥주를 비우고 캔을 내려놓는 여자의 몸이 잠깐 휘청였다. 여자는 목까지 분홍빛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취기가 오르는 듯했다.

하루는 그녀가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연기해볼 생각은 없느냐고. 자기가 아는 사람한테 말하면 될 수 있다고. 처음엔 작은 배역으로 시작하지만, 저라면 금방 유명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면서요. 한참 고민했죠.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긴 한데, 어쩌면 이건 인생 일대의 기회가 아닐까 하고요. 그 사람이 나타난 것도,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도 어쩌면 운명 같은 게 아닐까. 결국 몇날며칠 고민하다가 그러겠다고 했어요. 스크린에서 둘이 다정히 손을 맞잡는 상상을 하면서요.”

창밖은 어느새 어두컴컴해져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는 진작 그녀에게 약을 주고 자리를 떠났어야했다. 그러나 나는 머뭇거렸다. 약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궁금했고, 그녀의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그가 그녀를 떠난 이야기, 그녀가 나를 찾은 이야기가.

여자의 시선이 그녀의 발치에 나란히 놓인 빈 캔으로 향했다. 바닥 너머를 보는 시선. 그녀의 분홍색 쇄골이 눈에 들어왔다. 맥주 탓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방의 열기 탓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 하면 딱, 하고 발을 맞추며 울렸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감긴 눈 사이로 그녀의 슬픔이 흘렀다. 그녀의 허벅지로 뚝, 하면 뚝, 하고 시간의 소리에 맞춰 떨어졌다. 여자는 굳이 울음을 참았다.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여자의 울음은 새지 않았다.

옆으로 가 앉았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그제야 여자는 얼굴을 파묻으며 울었다. 시간의 소리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여자의 울분만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감긴 눈이 닿은 왼쪽 어깨가 따뜻하게 젖어갔다. 여자는 그랬는데, 그랬는데 하고 소리치듯 되뇌다가 나쁜 새끼 하고 말했다. 난 말 없이 토닥였다. 손바닥이 그녀의 등에 닿을 때마다 어깨가 젖었다.

한참을 울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헝클어져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뗐다. 손끝에 스친 여자의 살이 부드러웠다. 눈물이 흐른 자리가 뜨거웠다. 술 때문에 붉은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쇄골에 남은 물방울 자국이 보였다.

느닷없이 여자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을 감았다 떴다. 내 눈 앞에 그녀의 눈이 있었다. 맞닿은 입술이 차가웠다. 숨에선 옅은 알코올 냄새가 났다. 순식간에 그녀가 내게 입을 맞춘 것이었다. 입안으로 그녀의 혀가 들어왔다. 그녀는 능숙하게 내 혀를 어루만졌다. 빳빳해진 성기 탓에 바지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입을 떼자 모든 소리가 사라져있었다. 약간 거칠어진 그녀와 내 숨소리만 남았다.

우린 서로 눈을 맞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벗으며 키스했다. 곧 침대 위에 발가벗은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우린 서로를 어루만지고, 삼킬 듯 입술을 물어댔다. 여자는 내 성기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손가락에 있는 반지가 차가웠다. , 여자가 날 눕히고 위로 올라 능숙하게 괴롭혔다. 그녀의 속은 입술과 다르게 뜨거웠다. 여자는 입술을 깨문 채 거칠게 움직였다. 무언가를 털어내려는 듯.

몸을 비틀어 그녀를 눕혔다. 이제는 내가 그녀 위에 있었다. 그녀에게 들어가자 그녀는 입술을 앙다문 채 신음을 참았다. 닫힌 그녀의 입에 키스했다. 그제야 그녀의 혀 밑에 숨어 있던 신음이 뜨거운 숨과 함께 터져 나왔다.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에 내 입이 닿을 때마다 술 냄새 사이로 옅은 그녀의 향이 났다. 어디서도 맡아보지 못했던 향. 온전한 그녀의 살 냄새. 입을 떼고 내려다 본 그녀의 몸은 붉었다. 약간의 분홍빛. 방안은 숨소리와 사이사이 침대의 삐걱 소리, 살 맞닿는 소리만 가득했다.

내 가슴팍을 밀면서 그녀가 다시 날 눕혔다. 날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보였다. 그 아래로 홍조 가득한 볼, 그 아래로 약간 벌린 입술, 그 아래로 군더더기 없는 목선. 그 아래, 아래로……. 시선이 그녀의 배꼽에 닿을 때 난 사정했다. , 그녀가 내게로 쓰러졌다. 그 무게감이 편했다. 그 온도가 뜨거웠다. 나와 달리 천천히 식어갔다. 그녀의 귀는 내 심장을 향해있었다. 방금 관계를 끝낸 내 심장은 진정할 법을 몰랐다.

우린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면 내 가슴에 닿은 그녀의 얼굴도 부풀어지는 가슴을 따라 올랐다. 몸이 식어가며 찾아온 평온함 사이로 다시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 하면 딱, 하고 발을 맞추며 울렸다.

그 사람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만나러 간 곳은 노래방이 딸린 술집이었어요. 흔히 가라오케라고 부르는 곳이요. 사무실 같은 곳이 아니라요.”

여자는 가슴에 귀를 댄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나는 어쩌면 낙하산 같은 거라서 이런 곳에서 만나기로 하는 걸까 싶었죠.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줄 생각도 있었구요. 세상에 공짜는 없단 걸 아니까. 제 옆에 그 사람이 있었으니까, 무서울 건 없었어요.”

여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슴에 닿은 그녀의 숨이 뜨거웠다.

아직도 기억나요. 제일 구석에 있던 9번방. 다른 방들을 지나가는데 왜인지 모든 방에서 소리가 하나도 새질 않는, 이상한 곳이었어요. 안내해주는 사람을 따라서 들어간 9번방에는 한 눈에 봐도 돈이 제법 많아 보이는 아저씨가 어떤 여자랑 앉아있었어요. 커다란 테이블에는 온갖 술, 값비싸 보이는 양주, 과일안주까지. 정말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제 눈앞에 펼쳐진 거예요.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어요. 고개 들어서 본 그 사람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어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술을 마시면서 바로 본론을 얘기하더군요. 배우 되고 싶어서 온 거 아니냐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사장은 그렇게 말하더니 옆에 앉아있던 여자를 내보냈어요. 여자가 나가자 분위기가 묘해졌어요. 아무도 말이 없었어요. 바깥 소리도 들어오질 않아서 물에 잠긴 느낌이었어요. 귀가 먹먹해지는 그런 느낌 있죠. 한참 후에 사장이 먼저 입을 뗐어요. 얘기 듣던 대로 예쁘다, 로 시작해서 이상한 헛소리를 늘어놓는 거예요. 괜히 제 손에 손을 겹치면서. 옆에 있는 그에게 곤란한 표정을 지어도 그는 아는 체도 안하더라고요. 쓸 데 없는 소리를 들으면서 술을 한 잔, 두 잔 마셨어요. 취기가 슬슬 오르기 시작했죠. 사장은 그런 저를 보더니 그에게 눈짓을 줬어요. 그러더니 그가 갑자기 일어나서 문을 잠갔어요.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기도 전에 사장이 제 손목을 덥석 잡았어요. 그러고선 말했어요. 배우 되는 거 자기가 도와준다고. 그 손목을 겨우 뿌리치고 뭐하는 짓이냐 소리 지르는데, 사장의 손바닥이 갑자기 날아와서 제 뺨을 후려쳤어요.”

그 남자는 뭐하고 있었어요?”

여자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깐 거친 숨을 내쉬다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아무것도 하질 않고 제가 맞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전 뺨을 맞은 그 순간이 이해가 되질 않아서 멍하니 있었어요. 그 때, 사장이 말했어요. ‘함부로 몸 굴리던 년이라고요. 멍하니 있는 저를 앞에 두고 사장은 목소리가 커졌어요. 눈 딱 감고 한 번 대주면 쉬울 것을, 배우 되기 싫으면 지금 먹은 술값이라도 몸으로 때워라, 예쁘장하게 생겨서 좋게 말했더니 씨발, 이라면서……. 살면서 그렇게 수치스러운 적이 없었어요.”

여자는 사장의 말을 하나하나 읊었다. 여자의 눈물이 내 가슴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난 울고 있는 여자를 조용히 팔로 감쌌다. 여자는 끄윽 끄윽 소리를 삼키며 울어댔다.

전 그날 무참하게 강간당했어요. 그것도 사랑하던 사람 앞에서요. 믿었던 사람 때문에요. 날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마지막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난 정말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지도 몰라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면, 살아서 뭐하겠어요.”

여자의 길고 길었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여자는 한동안 아무 움직임 없이 내 가슴을 베고 엎드려있었다. 여자의 거칠고 뜨거웠던 숨이 점차 잔잔해졌다. 둘의 심장은 이제 각자 박자를 찾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쿵, .

그녀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날 바라봤다. 눈을 맞추자 여자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누구한테 털어본 거 처음이네요.”

여자가 말했다. 잠시 동안 침묵, 그리고는.

고마워요.”

하고 덧붙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는 진작 그녀에게 약을 주고 자리를 떠났어야했다. 그녀 스스로 털어놓은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야 난 가방을 열어 작은 약봉지를 건네주었다. 구깃구깃해진 봉지에 하얀색 알약이 두 알 들어있었다. 약을 받는 그녀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여자는 물을 가져와 내 앞에서 알약을 한입에 삼켰다. 꿀꺽- 하고 약이 넘어가는 소리.

이제 끝이네요.”

여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씁쓸한 그 미소에서 어딘가 후련함을 엿볼 수 있었다. 여자는 미소를 지은 채 손가락의 반지를 빼냈다. 반지가 있던 자리가 유독 하얬다. 여자는 침대에 털썩 앉아 내게 같이 있자고 했다. 마지막까지 혼자이긴 싫다고 말하면서. 여자의 표정에 난 그러기로 했다.

그녀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눈을 네댓 번 깜빡이던 그녀가 말했다.

사실, 내일 제 생일이에요. 이제 마지막 생일이겠네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자는 눈을 감았다. 창을 통해 옅은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까는 듣지 못했던, 저 멀리 지나가는 차 소리와 그녀의 새근새근 숨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그 소리를 세어보다 이내 나도 잠에 들었다.

 

흐느끼는 소리에 눈을 떴다. 새어 들어오던 달빛은 햇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햇빛이 닿은 곳에 여자가 없었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여자는 화장대 앞에서 울고 있었다. 내 인기척을 느끼고 여자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어제와 같은 눈물범벅이었다.

나 왜 살아있어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여자가 물었다. 난 대꾸 없이 헝클어진 그녀의 초점만 바라봤다.

나 왜 살아있냐고요. 이거 지금 꿈이에요?”

꿈 아니에요.”

높아지는 여자의 목소리에 내가 답했다. 여자는 표정을 잃은 채 날 바라봤다. 난 일어나 옷을 입었다.

사실 내가 준 약, 그거 흔한 감기약이에요, 항히스타민제. 그래서 아주 미약하게나마 잠이 올 순 있어요.”

그럼, 이게……. 뭐에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요!”

여자가 소리쳤다. 그러고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난 아랑곳 하지 않고 옷을 입었다.

그런데 정말 웃긴 게 뭔지 알아요?”

울음이 잦아들자 그녀가 말했다. 서로 시선은 맞추지 않았다.

내가 살아있다는 게 정말 고마워요, 지금. 죽기 싫었나 봐요.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동시에 엄청 부끄러워요. 어제 처음 만난 당신한테 그런 얘기를 다 꺼냈다는 게. 죽고 싶어서 불렀던 사람이 날 살렸다는 게.”

옷을 전부 입은 난 가방에서 전날 그녀에게 받았던 돈을 꺼내 책상에 내려놨다.

생일 축하해요.”

여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엉망진창인 거실을 지나 문을 나섰다. 햇살이 밝았다. 비명을 지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를 내려왔다. 기억을 더듬으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수많은 차와 사람들이 각자 바삐 지나고 있었다. 나 혼자만 멈춰 서있었다. 핸드폰을 바라봤다. 수십 개의 문자가 있었다. 죽음을 찾는 사람이, 죽음을 파는 나를 찾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 전과는 다른 차들과 사람들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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