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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상반기 신인발굴]_수필_조윤재_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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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4회 작성일 17-03-24 13:25

본문

<수필 부문>


성명: 박 상 준

연령 27세

주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중리상곡로 114,동신아파트 101508

연락처: 010-4915-8389







 

      

 

 

나눔이라는 큰 뜻


 

2006, 처음 시작한 헌혈이 어느덧 103회가 되었다. 문득 처음 헌혈할 때가 생각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교내로 헌혈차량이 들어왔었는데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헌혈을 하면 햄버거 교환권을 준다는 말에 홀려 시작했다. 그때 시작하게 된 것이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시작해왔던 모든 일들 중에 가장 값진 시작이었음을 얼마 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얼마 전, 나는 무릎이 아파 종합병원 정형외과에 들렀다. 그날따라 환자가 많아서인지 대기하면서 나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구급차 사이렌소리가 병원 내에 크게 울려 퍼졌다. 젊은 남자가 교통사고로 피를 많이 흘린 채 들것에 실려 응급실로 황급히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모님께서도 응급실 앞으로 뛰어 들어오셨다.

 

수술 중이라는 표지판에 불이 켜진 채 굳게 닫힌 문을 보시며 서글픈 눈물을 흘리셨다. 우리 아들 부디 무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늘에게 간절히 기도하셨다. 정형외과 진료가 이제 내 차례가 되어 의사선생님께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다 오니 그의 부모님께서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계셨다. 엿들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얼떨결에 듣게 되었다. 통화 속 누군가에게 헌혈증 기부를 부탁하고 계셨다.

 

한 장이라도 좋습니더. 부탁 좀 드릴게요. 교통사고가 나서 지금 우리 아들이 지금 수술실에 있습니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간절하게 부탁하시는 모습을 뵈었다. 예전에 나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교통사고가 났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우리 부모님 모습을 뵈는 것 같아 가슴이 저며 왔다. 그래서 나는 용기 내어 그분들에게로 다가갔다.

 

저기제가 도움을 좀 드리고 싶은데 받아주시면 안될까요?”

그러자 놀라셨는지 내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말씀하셨다.

, 말씀만으로도 정말 고맙습니더. 혹시 헌혈증 가지고 계신거 있으십니꺼?”

. 저 헌혈 많이 했어요. 그래서 여유가 있어요. 몇 장 필요하세요?”

“1장을 빌려주셔도 정말 고맙습니더.”

아니에요. 제가 10장 드릴게요. 꼭 무사하길 기도하면서요.”

 

당시 나는 헌혈증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헌혈증 10장을 가지고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내 힘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고, 내가 가진 것으로 하여금 상대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뿌듯하고 기뻤다.

정말 고맙습니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더. 혹시 명함이나 연락처 하나 있으시면 적어주이소. 언젠가 꼭 은혜 갚겠습니더. 부탁드릴게예.”

그분들이 잡은 내 손등 위로 고마움이 담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난 울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흑흑아니에요. 아저씨, 아주머니 정말 저는 괜찮아요. 제가 헌혈을 해왔던 이유가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서인걸요. , 그러면 연락처 남겨드릴 테니 혹시나 헌혈증 더 필요하시면 꼭 말씀해주세요. 수술은 꼭 잘 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로부터 며칠 후 내게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죄송하지만 모르는 번호인데 누구인지 알려주시면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저 얼마 전에 병원에서 헌혈증 받았던 사람입니더.”

! 안녕하세요. 혹시 헌혈증 더 필요하신가요?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

아닙니더. 그게 아니라 우리 아들 수술 잘 끝났습니더. 빌려주신 헌혈증 덕분에 피도 충분히 받을 수 있었고예. 정말 고맙다는 말 전해드릴라고 전화 드린겁니더.”

정말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걱정되었는데 이제 한숨 돌리겠네요. 정말 축하드려요. 이렇게 전화주신 것도 감사하구요.”

아니라예. 당연히 드려야지요.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더. 지금은 일이 바빠서 제가 조만간 다시 연락드릴게예.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더.”

 

괜찮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지만 끝끝내 식사라도 대접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는 통화를 끝마쳤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부의 뿌듯함을 죽기 전까지 아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몸이 건강해서 헌혈을 할 수 있었다는 것조차 정말 기뻤다.

 

오늘로 수술이 잘 끝났다는 전화가 온지도 며칠이 흘렀다. 과연 그분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을까. 부디 많이 좋아졌으면 좋겠다. 언젠가 연()이 되어 만난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땐 어쩌다가 그토록 심하게 다친 것이냐고, 앞으로는 몸 관리 잘해서 다치는 일 없도록 해달라고. 그것이 아팠던 당신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사람들에게 살면서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고.

 

그리고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꿈을 꾸게 되었다.

헌혈을 하면서 수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자.’

진정한 자세는 느끼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치중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자.’

두 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내게는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그때의 그 일이 고맙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는 말이 내게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헌혈을 갓 시작하던 그때, 그 두꺼운 바늘이 내 팔을 뚫고 들어오는 것이 정말 무서웠다. 헌혈센터까지 오가는 것도 내게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103번이라는 헌혈을 한 오늘에야 나는 다시금 꿈을 가졌다. 수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사람이 되자. 꿈을 갖게 된 내가 지금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 손을 잡은 그분들의 따뜻한 온기가 손에서 가시질 않는다.















민주화의 중심지, 마산.


 

마산(馬山) 이곳은 민주화 정신의 근원이다. 또한 내 고향 마산은 4.19혁명의 시작점이다. 그런 만큼 대한민국 민주화의 횃불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마산의 역사에는 김주열 열사가 있다. 그 덕분에 4.19혁명의 실질적 도화선이 되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김주열 열사의 뜻 깊은 죽음 덕분이기도 했다.

 

1960315. 정ᆞ/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집권체제를 더 연장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부통령 직책에 이기붕을 당선시키려고 대대적인 부정행위를 실시했다. 당시에 김주열 열사는 18세의 나이로 마산상업고등학교의 합격자발표를 확인하러 왔었다.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으로 넘어왔었다. 그러나 선거가 치러지던 날이라 교육청에서는 합격자발표를 선거 다음날인 16일로 연기시켰다. 어쩔 수 없는 경우로 하루를 숙박해야 했다. 만약 그때 그대로 돌아갔더라면 참담한 비극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주열은 김광렬과 함께 숙박했다. 김주열의 이모할머니께서는 민주당의 당원이셨다. 선거 당일임에도 투표용지조차 주어지지 않는 현실을 가슴 아파하셨다. 그리곤 얼마 후 마산에서 부정선거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시위가 일어났다. 이모할머니의 권유로 김주열과 김광렬도 함께 시위에 뛰어들었다. 그 모습이 김 열사의 마지막 모습이 되어버렸다.

 

김주열 열사는 거리로 나갔다. 아마 가슴에 뜨거운 피가 솟구치셨으리라. 그러나 그는 며칠이 지나도록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머니 권찬주 여사께서 거리를 온통 찾아 헤매셨다. 혹시 고향 남원에 갔을까 하여 거기도 가보았다. 가다가 오던 411일 오전 11시경.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처참히 죽은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그 시신이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산 시민들은 일어섰다. 시위를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김주열 열사의 죽음으로 그 규모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역사적으로 아주 뜻 깊은 일을 해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마산. 마산의 민주 정신은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여느 지역보다도 굵고 단단하다. 김주열 열사의 뜨거운 피와 4. 19혁명의 위대한 기운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때 김주열 열사가 정상적 발표가 나서 마산에 머무르지 않고 고향인 남원으로 바로 돌아갔더라면 시민들의 시위가 과연 그토록 확산될 수 있었을까. 4.19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도화선이 될 수가 있었을까?’

 

김주열 열사의 머리에 박힌 그 최루탄은 시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냄새조차 맡아선 안 된다는 최루탄이 머리에 박혔다는 상상, 과연 어느 누가 할 수 있으랴. 그 최루탄에는 “Don't use on the crowd.”이라고 써져 있었다. 이 문구의 뜻은 군중을 향해 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경찰들은 최루탄을 학생을 향해 발포했다. 부정선거를 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그로 인해 꽃다운 나이의 김주열 열사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을 바꾸었다. 결코 헛된 죽음은 아니었다.

 

이처럼 마산은 보다 나은 민주화로 가는 큰 견인차 역할을 했다. 3.15선거가 부정선거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그리고 끊임없는 시위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하게 했다. 그래서 마산은 민주정신 역시나 그 유래가 깊고, 혼이 깃들어 있는 도시라고 자부할 수 있다.

 

1960419일로부터 5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지난 반백년동안 우리 마산에서도 많은 변화와 민주국가에 걸 맞는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이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정권철폐를 외치던 부산과 마산시민 일부가 시위를 펼쳤던 사건이다. 19791015일 부산대학교에 민주선언문이 발표된다. 16일에는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주도적으로 일으켰다. 부산시민 일부도 합세하는 바람에 대대적인 시위로 규모가 커졌다.

시위대에서는 16일과 17일 이틀간 공공기관들을 부수기까지 하며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18일과 19일에는 창원과 마산지역으로까지 시위가 확산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정확히 1,058명을 연행했다. 그리고 군사재판에 66명을 세우게 되었다. 20일에는 마산과 창원에도 위수령(衛戍令)을 선포하면서 505명을 연행했다. 결과론적으로는 그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게 되면서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길 수 있는 효과를 얻었다.

 

유신정치란, 국가발전을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모든 면에서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되는 현상의 정권을 말한다. 그러나 이가 지속될 경우 권력 남용 시 심화될 우려가 현실로 발생하기도 하는 위험한 체제이다. 이를 막았으니 우리나라가 점차 민주적으로 성장하는데 마산이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충분한 증명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처럼 선조들께서 거룩한 피와 땀으로 일궈놓으신 내 고향 마산을 더욱 더 민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상황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민주주의에 걸맞게 선거가 있을 경우 높은 투표율로 뽑혀야 한다.

두 번째, 부정부패 없는 청렴결백한 도시가 되어야 한다.

 

 

위와 같이 지켜지는 도시가 될 때 민주의 성지 우리 마산을 보다 더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며, 의식은 더욱 성숙하게 끌어올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정신을 잃지 않고 선조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게 함께 노력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두려움과 아픔의 경계선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내 나라 내 조국을 위해 한 목숨 바쳐 싸울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1945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이후, 우리의 조상님들께서는 크고 작은 수많은 일들로부터 조국을 위해 피와 땀으로 헌신하셨다. 만약 우리 조상님들의 현명한 지혜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 가슴 깊이 새기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전해드리고 싶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국민의 4대 의무(교육, 납세, 국방, 근로의 의무)를 열심히 이루어내고 있다. 각자가 맡은 바에서 최선을 다해주신다. 군인들은 국가를 수호하고 방어해내기 위해서, 공무원들은 국민들과 공적인 업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일하신다. 그러한 최선들이 국가의 발전에 있어 근간(根幹)이 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이 글로벌 국가로, 또한 G-20을 주최하는 국가로,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도움을 주는 국가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계기는 6.25전쟁을 비롯해 수많은 아픈 역사와 어려움으로부터 이겨내었기 때문이다. 만약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조국 수호보다, 용기보다 자기 목숨과 안전만을 우선시 했었더라면 만약 그랬더라면 아마 지금은 없다.

 

그런데 요즘 일각에서는 6.25전쟁은 옛 일일 뿐이다. 심지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다. ‘북침이냐, 남침이냐?’라는 것을 헷갈려한다. 우리는 종전이 아닌 휴전일 뿐인데 말이다. 1953727일의 휴전협정으로 잠시 휴전이 된 상태일 뿐이다.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우리가 앞으로 더욱 번영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안보와 군사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나라의 기둥이라는 학생들이라면 적어도 전쟁이 어떻게 발발했으며, 현재 어떤 상황인지, 그리고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 개성공단 철수에 대해서만큼은 앞뒤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북한은 국가 난에 봉착해있다. 국방력을 위주로 한 강성대국, 군사대국이 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 올바르지 못한 체제를 유지하는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물론 북한 동포들은 우리가 감싸 안아야 할 한민족이다. 그러나 총칼을 맞대고 있는 주적이라는 점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유비무환의 자세로 국가안보를 위해 개개인이 더욱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 튼튼한 안보가 갖추어졌을 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처럼 행복한 나라, 안전한 나라, 글로벌 국가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이 땅을 아름답고,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으려면 조상님들께서 지켜 내오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삶속에서 노력할 때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나는 한 번씩 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북한군이 쳐들어온다면 나는 나의 생존보다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러나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만큼 사람에게는 목숨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켜 내주신 선조분들처럼 될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리라 라고 반성하게 되는 계기로 가졌다. 내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보호해주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게 해주는 내 조국을 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 된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20099월에 육군 훈련소로 입대했다. 하루하루 훈련받느라 힘이 들었다. 그러나 수양 록을 작성하는 일을 한 번도 빼먹지는 않았다. 군대에서의 일을 나만의 메모로 순화시켜 기억하는 것보다 국가안보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믿어서였다.

 

일병을 달고 첫 휴가를 나갈 때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천안함 피격사태가 벌어졌다. 명백한 북한의 도발이었다. 전쟁이 날까봐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죄 없고 꽃다운 장병들의 목숨을 허무하게 앗아간다는 점에서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추후 피격을 당했던 천안함을 실제로 보니 이 배안에 타고 있었을 전우들이 얼마나 무서웠겠는지 상상도 되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나부터 국군대비태세 확립을 선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더 억울하고 분했던 것이 있었다. 북한의 소행이 명백하다고 밝혀졌음에도 좌초를 포함한 여러 근거 없는 루머들이 확산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국방부에서 언론을 통해 결론을 내렸음에도 루머가 확산되는 모습에 같은 장병으로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따라서 앞으로 더는 도발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꽃다운 나이에 전사해야만 했던 해군장병 46용사들의 원통함과 애국심을 보아서라도 안보의식을 확고히 가져야 할 것이다. 2의 피해자는 없어야 한다. 조상님들의 애국정신과 호국정신 그리고 용기를 본받아 강력하게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훌륭한 안보의식이 갖춰질 때 북한의 도발행위를 근절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끝으로, 현재 우리 대한민국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국군장병들을 언제나 응원한다. 자신이 맡은 바를 완수했을 때 국민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군복무에 임해주길 바란다. 다시금 조국을 위해 헌신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이 지금처럼 좋은 복지와 강한 국방력을 지닌 조국에서 살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조상님들의 현명한 안보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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