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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신인발굴]_소설_서민주_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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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45회 작성일 17-04-11 12:03

본문

<소설 부문>


성명: 서민주

연령: 20

주소: 대구광역시 달서구 장기동 821-2

연락처: 010-3025-3770

  








줄타기



  

보이지 않는 줄 위를 걷는다. 언젠가 떨어질지도 모를 줄 위에는 수만 가지 갈림길이 있다. 교차된 줄 사이로 밀려 나오는 어둠. 저 어둠이 나의 다음 걸음이 아니길. 눈빛을 줄 위로 쏟아붓는다. 그러나 줄은 보이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다. 긴장된 가슴을 쓸어내리는 손짓에 잠시 흔들릴 뿐. 흐물거리는 어둠이 발걸음을 느리게 한다. 발목이 잡혀 휘청거린다. 영원할 어둠 속, 발에 오목하게 맞는 외줄. 느껴지는 한기. 뒤돌아 갈 수도 앞으로 갈 수도 없는 절망적인 외줄 위의 홀로인 나. 남은 것은 어둠에 묻혀 태아처럼 웅크리는 것뿐. 기다리면 언젠가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것이라 믿으며 묵직한 피로와 골치 아픈 생각들을 버무리고 하나씩 퍼내는 것뿐. 식은땀이 진득하다. 잡히지 않은 발을 앞으로 내디딘다. 있을 리 없겠지만 다담스런 구원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낯선 시원함과 보송함이 간절함으로 범벅된 몸을 달래준다. 동시에 시근한 노곤함이 발등부터 쓸려왔다. 잡을 수 없는,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애초에 존재했는지도 모르나 잡을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유일한 빛을 위해 모든 것을 뿌리친다. 빛은 외롭고 비참한 줄을 비춰주지 않았다. 뿌리내린 어둠을 잘라내지 않았다. 오로지 신성한 빛 덩어리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 모든 것을 매혹하는 뜨거운 기운을 스몄다. 배어드는 열기가 서늘하고 눅눅한 천으로 사그라든다. 눈을 뜨면 역시 3시 35분. 얼음처럼 굳어진 세상이 검푸른 바람으로 더욱 차게 식는 시간. 특유의 진하고 쓸쓸한 공기.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라고 재촉해봐도 사라지지 않는 몽롱한 생각들은 뇌를 두 팔로 포근히 감싸 안고 저릿할 정도로 품에 가둔다. 이제 지칠 법도 한데 달은 쓸데없이 쨍하다. 봄볕을 흡수했다고 꽃잎처럼 은은하게 빛났지만, 왠지 고달파 보이는 저 달이 머릿속으로 내려온다. 무딘 눈꺼풀이 내려온다. 고달픈 몸이 이부자리로 내려온다.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야 할까. 의미 없는 저항이 의식을 잡아당긴다. 먹잇감을 본 상어의 아가리가 벌어지듯 두 눈이 떠진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조금 일찍 나서야 할 듯하다. 대명은 습습한 이불을 개키고 나갈 채비를 한다. 신경 쓸 사람이 없기에 면도는 하지 않는다. 대충 마른세수를 하고 바스락거리는 패딩 점퍼를 걸친다. 몇 년간의 땀내가 지독한 운동화에 발을 쑤셔 넣는다. 일찍 나서는 발걸음이 사납기 그지없었다.

 

대명은 정해진 일자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의 타고난 운명 탓인지 살아온 노력 탓인지는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인력 사무소에 찾아오는 사람 중 하나였고, 제대로 이름 불러주는 사람 하나 없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대명이라는 이름은 그가 주로 대명동에서 일하기 때문에 편의상 지어진 이름이었다. 대명은 그러나 이름이 생긴 유래에 크게 의의를 두지 않았다. 이래나 저래나 이름이 불리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그 안에 담긴 사연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의미 없는 존재라고 못 박아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아를 의식하는 것이 있으나 마나인 자신을 세상에 비벼댈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거역할 수 없는 섭리를 인정한다면 그건 서양의 어느 철학자가 말했던 나는 생각하고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일 테다. 대명은 초점 없이 소파 위에 널브러져 양담배를 피고 있는 소장을 의식했다. 그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의식된 것이 대명 본인에게는 의미 있는 짓이라고 여기며 무안함을 허술한 희망에 문댔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신을 견고하게 해준다는 모순적인 착각을 의식하고 괴로워했다. 고개를 들어 어눌한 말투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소장이 그의 마음속에 어두침침히 돌아가는 위로 체계를 반딱히 닦아 주었다.

 

“오늘은 일없소?”

 

소장은 몇 년간 갇혀있던 사람이 세상에 더듬거리며 기어 나와 여태 볼 수 없었던 빛을 끌어모으듯 흉부에 가득히 담배 연기를 채웠다. 콧구멍으로 썩은 폐를 머물던 공기를 뱉어내는 그의 모습이 느긋했다. 대명은 바싹 마른 입을 털어 다시 소리 냈다.

 

“오늘은 들어온 일 없소?”

 

소장은 폐 속으로 찌든 공기를 가두고 풀어주는 행위를 몇 번 반복하더니 먹먹히 창밖을 바라봤다.

 

“지하철 타봤소?”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명은 잠시 멍해진다.

 

“탈 일이 어디 있겠소. 나 같은 사람한테.”

 

“이 돈 가져가서 오늘 하루는 원 없이 타고 오쇼.”

 

소장은 대명에게 이만 원을 건넨다.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에 대명은 할 말을 잊는다. 소장은 다 타지 않은 양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축 처진 다리를 끌어모아 땅 위에 지진다. 그가 서 있는 자리에는 그림자만 자국 남는다.

 

“오늘은 들어온 일 없고, 아마 내일모레쯤 들어올 거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쇼.”

 

낮은 진동이 울리는 하품을 하면서 자리를 떠나는 소장을 멀거니 바라보던 대명은 손에 쥐어진 이만 원의 행각을 계획해본다. 소주 몇 병과 안줏거리 조금이면 하루 이틀은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소장의 뜻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사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며칠만 기다려 보라는 심산으로 준 것이 저명하나 대명은 소장이 입 밖으로 꺼낸 지하철이라는 단어에 알 수 없이 현혹된다. 소장의 말을 들어보는 척 지하철을 타고 와도 돈은 남는다. 시간은 물론 넉넉하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은 잠깐 구경하고 와도 할 수 있다. 손해 볼 것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대명은 근처에 있는 지하철역을 물어본다.

 

대명역까지 걸어가는 길은 조용하나 부산스러웠다. 오전 6시, 동이 틀 무렵 허옇게 퍼지는 햇빛이 눈을 콕콕 찌른다. 깨끗한 하늘이 제 모습과는 대조적이라 대명은 살짝 고개를 숙인다. 날이 많이 풀려서 나무마다 새 꽃을 꺼내 장식하기 바쁘다. 연한 분홍색, 붉은빛이 많이 도는 자주색, 샛노란 색, 흐릿한 연 라임 색, 구름 같은 순백색. 고운 색들이 끝없이 펼쳐져 그것을 향유하는 자들의 흥을 고취한다. 대명은 꽃 무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벌레들을 구경한다. 저도 못 누리는 봄을 즐긴다는 생각이 대명의 속에서 치솟았다. 그러나 큰 감흥은 없었다. 짜증도, 서글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명은 걷던 길을 걸었다. 주변의 차분한 소란스러움이 봄기운으로 뒤덮인 대명을 뚫고 스며들었다. 모두 제각기 갈 길을 걷는다. 대명의 머릿속에 꿈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 줄 위를 걷는 사람들. 줄에 이끌려 쉴 새 없이 어디로 향하는 사람들. 그들은 발밑의 어둠을 감지할 틈도 없이 바쁘게 걷는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도 잊어버린 채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 사람들. 차라리 배부른 돼지라도 되면 망정이지, 그들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비웃으며 배부른 돼지들 아래에서 서로를 무너뜨리기 바쁘다. 배고픈 돼지들은 반항할 생각도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씹어먹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길 몇 세기일까. 대명은 얕은 막을 들춰내고 예전에 잠시 담아둔 생각들을 조금씩 꺼내 들었다. 갉아 먹힌 것도, 문드러진 것도 다시 보니 반가웠다. 대명은 생각을 차곡히 쌓아두고 더 깊은 곳에 묻어둘 때까지 대명역 출구를 어슬렁거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로 들어가야 길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자세로 정신을 가다듬고 대명은 밑으로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하철역은 서늘했다. 위쪽에서는 따끈한 날씨에 약간씩 땀이 차올랐지만 밑에 들어오니 슬그머니 소름이 돋았다. 패딩 점퍼 주머니 안으로 찔러 넣은 손에 이만 원이 잡힌다. 대명은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으로 가서 주위를 살펴본다. 할인권, 우대권, 교통카드 충전. 생소한 단어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하나씩 눌러보려던 그는 잠시 손을 멈추고 그곳에서 조금 멀어진다. 가만 보니 우대권은 주로 흰머리의 노인들이 가져갔다. 교통카드 충전은 카드를 갖고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할인권이라 적힌 팻말 아래 투입구에 돈을 넣고 화면에서 매수를 선택하면 된다는 것까지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하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척 돈을 넣고 동글 넓적한 것을 가져갔다. 거스름돈과 함께 짤랑거리는 것을 집어 표시된 곳에 갖다 대니 팅 하는 소리와 함께 고무 판때기 같은 것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재빨리 넘어가 오른쪽에 있는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쫓기는 것처럼 헐레벌떡 뛰는 사람들 사이로 저도 급한 볼일이 있는 것처럼 분위기에 어울렸다. 이어 눈이 멀 것같이 발사되는 빛을 받으며 빠르게 지나가는 열차를 쳐다봤다. 다 같이 멀건 표정으로 문이 열리길 기다리니 왠지 모르는 안정감이 들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수조 안의 금붕어가 밥을 기다리는 표정과 같다고 생각한 대명은 맹맹한 회색빛의 말뚝보다 눈 속에 팽개쳐지는 살구빛의 향연을 감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멀미가 날 정도로 어지러운 광경에 대명은 열차가 열리자마자 빈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구겨 넣었다. 옆에 앉은 여자애가 움찔거리더니 일어서서 사람 틈 사이로 들어갔다. 공백을 견딜 수 없었는지 나이 든 여자가 와서 짐보따리를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진공이 있으면 채우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했던가. 그 당연한 흐름이 일상에도 적용되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지배한 줄 알았던 자에게 배신당하는 모욕을 느끼는가, 차라리 체념을 하는가. 대명은 실속 없는 생각으로 열차 안을 빼곡히 메웠다.

 

맞은편의 대학생은 연한 베이지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봄기운이 사물에도 씌는지 남학생은 담백하고 밝은 미소로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한 칸 띄어진 자리에 앉은 베레모를 쓴 할아버지를 보는 대명은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눈에 생기가 가득했다. 휴대전화를 뚫어지게 보는 외국인, 캐리어를 든 여자, 정자세로 앉은 노인, 책을 읽는 남자, 두리번거리는 아줌마, 노래를 들으며 본인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학생. 지하철 안은 답답할 정도로 정적이 구석구석을 채웠지만 틈새로는 다채로움이 공존했다. 그 모순적인 공간에서 소리 없이 자신만의 세상에 스스로 유수 하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형형색색의 펼쳐진 환상에 둥글게 감싸진 사람들. 옆에 있는 사람도 먼 은하에서 보내는 빛처럼 아득한 느낌. 이색적인 감각이 목적 없는 지하 세계 탐방에 명분을 심어주었다. 다양한 우주를 관찰하는 것이 인간사의 시작이라면 다른 일도 호기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명의 정신은 지하철을 따라 저 앞까지 달려간다. 열차가 덜컹거리자 대명의 몸도 따라 덜컹거린다. 사람은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지하철은 어딘가로 움직인다. 옛날에는 이런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사람 대신 움직여주는 물건을 만드는 것을 성리학자는 찬성했을까. 흔들리는 대명의 마음은 열차를 따라 이것저것에 뒤섞인다.

 

꽃이 만발한 낙원은 마찰로 일그러지는 선로 위 지하철 안에도 존재한다.

 

잠깐씩 멈추는 지하철의 질주도, 각각의 머리를 기점으로 구체의 우주가 펼쳐지는 지하철 안도 익숙해진 대명은 드디어 쏜살같이 지나가는 창밖의 장면을 보기로 했다. 때마침 지하철은 멈춰 섰다. 가문 담이 무너지듯 쏟아지는 사람들이 대명의 시야를 가렸다. 생소한 냄새, 낯선 소리. 좀전의 다양함은 그저 장난이었나 싶을 정도로 가지각색인 사람들 무리가 입구부터 꽉꽉 채워졌다. 그러나 대명은 집중해서 보면 다들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슷한 출생, 비슷한 교육, 비슷한 꿈.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곳에 있을 리 만무했다. 대명은 사람들이 서 있는 틈 사이로 시퍼런 패딩 점퍼를 입은 노인을 봤다. 호 하는 입 모양에서, 앞을 향한 시선에서 열기가 뿜어나오는 할아버지는 퍼런 패딩을 입고 있었다. 허리가 반쯤 굽어 입을 벌리고 앞으로 걷는 게 일본 전설 속의 요괴 같기도 했지만, 그는 시퍼런 패딩을 입고 있었다. 집착인지 갈망인지 모르겠으나 대명의 눈에 비친 그는 무언가를 원했다. 그러나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원했다. 손에 들어오길. 지하철 문이 닫히고 풍경이 바람에 날리는 잔해처럼 흩어졌다. 등이 굽은 노인도 이내 연기처럼 사라졌다.

 

대명은 조금 전까지 눈을 쪼면서 들이 부어진 시각적 정보들을 머릿속에 뭉쳐 넣었다. 아무런 제약 없이 보이는 것들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루 대부분을 노동으로 보내는 대명에게 사치와도 같았다. 의자에 편히 앉아 자유롭게 구경을 하고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저장하는 것을 어제의 그가 알았더라면 당장에 달려와서 핀잔을 주었으리라. 평화롭고 여유로운 것은 어울리지 않으니 집어치우고 일이라 하라는 소리가 주변을 즐기면서 살라는 소리와 충돌한다. 대포처럼 쏟아지는 쓴소리는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메아리치는 푸념을 피해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가기로 했다. 꽃이 만발한, 낙원과도 같은 곳으로.

 

골목길에 가득 찬 버스는 위엄 있는 상어 같았다. 그 안에 탄 사람들은 상어의 이빨같이 새로 타는 사람들에 떠밀려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상어의 옆을 지나는 작은 물고기들은 무리 짓거나 몸을 사리기 위해 기척도 없이 조용히 헤엄친다. 거대한 버스 옆의 작은 오토바이 한 대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으로 쓸모없는 위협을 해본다. 그래도 버스는 꿋꿋이 가야 할 길을 간다. 정해진 길을 노쇠하여 삭을 때까지 움직여야 하는 저 버스보다는 잠깐의 일탈이라도 가능한 오토바이가 젊은이들에겐 좋아 보이나 보다. 버스는 낡아 더는 새로 날 이가 없었고 태고의 모습처럼 맨들한 잇몸을 보여줄 것이다. 이 몸도 늙으면 오래전 그때처럼 웅크릴 것이다. 어둠을 찢는 버스의 불빛은 도로 위를 달리는 수많은 오토바이 위로 쏟아진다. 들이붓는 빛에 대명의 등어리가 따뜻해졌다. 잠시 나른한 기운에 몸을 뒤척이다 옆에 가는 오토바이 한 대와 부딪힐 뻔했다. 젊은 남자는 욕지기를 퍼부으며 속도를 높인다. 대명은 절대 그날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정신을 몰아세운다. 달려가는 길 위는 한치의 방심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거칠고 딱딱했다. 대명은 정신을 곧추세우고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뭐 하나 빼어난 구석은 필요했다. 대명은 몇 년간 매연과 욕설을 들이마시고 얻은 노련함으로 몇십 년은 어린 녀석들을 제치고 오토바이 배달을 하게 됐다. 같이 일하는 젊은이들의 조롱도, 동정을 가장한 아니꼬운 시선도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라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제는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존재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대명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의미를 잊었다. 오로지 아내를 위한 노력만이 그의 마음속 유일한 살아있는 것이었다.

 

대명은 유복한 가정의 아이였다. 당시에는 쉽게 접하지 못했을 질 좋은 외국 제품의 촉감과 갓난아기 때부터 닿아왔었고, 6남매가 흔한 시대였으나 외동으로서 부모님의 애정 어린 돌봄을 누려왔었다. 대명의 아버지는 글을 읽기 시작한 무렵의 대명에게 지식의 중요성을 특히나 강조했었다. 자고로 거품처럼 쉽게 사라지는 것들은 깊게 뿌리박힌 것들을 좇다 보면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말의 뜻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대명은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기대 이상으로 똑똑했던 대명은 늘 학년에서 가장 우수한 아이였고, 월반을 연거푸 하다 보니 친구들이 아직 때 묻은 교복을 입을 나이에 대학을 진학했다. 철학을 전공하기로 했다는 대명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그의 부모님은 어느 날 세상을 떠나셨다. 갑작스러운 사고였기에 젊은 대명은 한마디 말도 못한 채 그들을 흙집에 안착시켜야 했다. 뿌리가 뽑힌 대명은 자신의 줄 위에서 뒤돌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해야 했었다. 평생 사전적 단어로만 기억될 친척들이 찾아와서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 가을에 볏단 쌓듯 집적할 지식을 위한 자금을 조금씩 가져갔다. 그의 부모님과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의 흔적도 모두 손에 실려 떠나가, 꿈에서나 대명의 눈앞을 기웃거렸다. 대명이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타인에 대한 기피와 사진 몇 장 그리고 희뿌연 막막함만 남아 있었다. 그의 학벌이라면 나쁘지 않은 회사에 취직해서 그럭저럭 먹고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대받지 못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었고, 알 수 없는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 속으로 섞이는 것에 부담을 느꼈었다. 결국 낮에는 공사판을 전전하고 밤에는 책에 몰두하여 깊은 밤을 지내기로 하고 근근이 모은 돈으로는 작은 월셋집을 구해 몇 안 되는 보물인 사진과 책을 고이 넣었다. 최소한으로 먹고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책을 가까이 한 그는 주변에 꽃이 피는지도 모르고 살아왔었다.

 

여느 때처럼 세수를 하고 일터로 가려던 그에게 낯선 여자가 불쑥 인사를 건넸다.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갈 길을 갔다. 그날 오후에 월셋집 주인은 자신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외지에서 대학을 다니다 잠시 휴가 삼아 고향집에 내려왔고 몇 달은 이곳에 있을 거라고 했다. 원체 사근사근한 성격 탓인지 타인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고 고치 속에 싸매여 있었던 대명에게도 그녀의 인영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종종 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거나 필요하다고 한 것을 사다 주던 호의는 복잡하고 미묘하게 그녀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그녀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 중이라는 주인의 말 속에는 그녀의 수줍음도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 며칠 뒤 인사하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자 그녀는 아주 사소하고 건덕지 없는 소리까지 볼을 붉혀가며 얘기했다. 전공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던 그는 밝은 그녀의 웃음에 하릴없이 잡다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다정하게 구는 그녀가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그녀와 이야기하면 모든 곳이 그리웠고 모든 것이 즐거웠다. 사소한 얘기도 쪼르르 달려와서 늘어놓는 그녀의 버릇은 결혼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왕벚나무가 늘어지게 핀다는 거리에 가자고 조르는 것도, 저녁 반찬거리를 정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대명이 잊고 지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자극하는 묘술을 부렸다. 실바람이 보드라운 아침에 대명이 속삭이듯 불러준 이름이 듣고 싶다고 했던 아내의 목소리가 솔바람을 타고 책을 읽던 대명의 귓가에 어른거렸었다. 아내는 대명이 종일 책만 읽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에게 땀 흘려서 얻는 것들의 가치를 알려 주고 싶어 했었다. 그녀에게 임신 소식은 그에게 활기와 생기를 전해줄 수 있는 생명력의 뿌리와 같았다. 그랬기에 아내는 또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과 그로 인해 그와의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춤을 추듯 가볍게 뛰어갔다. 맞은편 신호등에 선 남자가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아내는 그 소녀 같던 마음씨로 부드럽게 날아왔다. 그리고 급하게 옆 차를 피하던 오토바이가 있었다. 그날 그 시간. 그 일이 대명이 구역질 나도록 지겨운 노동을 가능하게끔 만드는 전지 역할을 했다. 그녀가 쓰러지기 전 흩어 보낸 속삭임이 가끔 솔바람을 타고 오는 날에는 되돌아 갈 길을 찾아 헤매다 대명의 마음에 물집이 터지곤 했었다.

 

구레나룻을 건드리는 바람이 새어왔다. 얼마나 기억의 늪에 잠식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명은 기대 누운 상태로 고개만 움직여 안내 방송 화면을 봤다. 지하철은 종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종점이라는 마침표같이 묵직한 느낌이 진절머리나는 하루의 피곤을 뼛속까지 실어줄 것 같았지만, 지하철을 나선 대명은 묵은 선입견을 바람과 함께 날려 보냈다. 밖은 햇살이 찬란한 봄의 오후였다. 대명은 보통 해가 질 때까지 허리 굽혀 일만 했었기에 또는 방에 들어앉아 책만 봤었기에 영양분 가득한 햇빛이 희망의 씨앗을 발아시킬 줄은 몰랐다. 나사가 풀린 것처럼 흔들거리는 발걸음은 불안함이 아니라 생동감이 묻어났다. 주체할 수 없는 발걸음을 기억의 올가미가 거둬들였다. 유난히 익숙한 간판의 아래에는 아내가 입맛이 없을 때면 대명을 꼬드겨 사러 오던 콩국 가게가 위치해 있었다. 대명은 취한 듯이 몸을 가게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게 주인은 반갑다는 듯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대명을 자리에 앉혔다.

 

“오랜만에 오시네예.”

 

“제가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옛날에 색시랑 같이 콩국 사러 오신 분 아입니꺼. 통 못 봤디만 많이 수척해 지셨네예. 아내분은 잘 계십니꺼?”

 

대명은 대답 대신 콩국 하나를 주문했다. 주인은 머쓱했는지 다른 얘깃거리를 물어온다.

 

“요새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가 끓이는데 쪼매 걸릴 낍니더.”

 

“괜찮습니다.”

 

대명은 플라스틱 의자 위에 앉아 좁은 가게를 움켜쥐는 누런 콩국 냄새와 덕지덕지 붙은 신문지 사이의 관계를 유추해본다. 벽지에 냄새가 배지 말라고 붙인 것치곤 신문지가 너덜너덜해서 벽면을 가리지 못하고 팔을 간지럽힌다. 고소한 냄새가 대명의 위를 꿈틀거리게 한다. 온기가 가득한 가게 안. 태양이 보내는 열이 작은 가게를 은근하게 덥히고 주인이 휘저으면 부글거리며 위를 자극하는 콩국. 옛날 아내와 같이 걸었던 벚꽃길도 이런 느낌이었다. 피어난 꽃처럼 연분홍빛을 띠는 하얀 미소를 짓는 사람들. 꽃 사이로 빛이 퍼지면 그녀에겐 꽃보다도 만개한 웃음이 피어올랐었다. 그녀의 따끈따끈한 머리 위로 손을 얹으면 그녀는 손을 잡아 밑으로 옮겨 달궈진 뺨을 식히곤 했었다. 별거 없이 단둘이 걷기만 해도 행복했던 날이 있었다. 예전에. 이렇게 후회가 밀려올 줄 몰랐던 젊은 시절에. 콩국을 먹는 그의 입 안에는 그날 못했던 말이 움츠리고 있었다. 주인은 납작해진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꽃비를 바라봤다. 가죽 뒤에 도사린 열망에 꽃비가 웅덩이졌다. 꽃과 새싹의 산뜻하고 올망졸망한 향기가 나른한 공기에 녹아 주인의 심장박동에 박차를 가했다. 대명은 분위기와 콩국을 떠먹으며 다음 목적지를 예상해보았다. 뇌의 지배력이 발바닥까지 닿을까에 대해 의심했지만 말이다.

 

땅거미 진 산을 타고 온 느낌의 대명은 이번엔 어떤 기억에 이끌릴까 궁금해했다.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체질에 적합하다고 확연히 와 닿은 이유는 갔었던 길도 암묵의 미로에 맞닿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였다. 질리지 않고 탐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관심 있어 하는 그의 본능은 사람과 자연을 가리지 않았다. 늘어진 버드나무가 상당히 이른 여름의 정취를 불러일으켰다. 높바람이 건듯 불어 길잃은 대명을 놀린다. 어지럽기 바이없는 아공의 우주. 대명의 머릿속에서 듬직하고 질김성 있는 울림이 산포된다. 주머니 속에 내팽개쳐진 휴대전화에서 단발성의 진동이 융융거렸다. 곤두선 목소리로 상대방의 넉살을 엎어 쳤다. 상대방은 의외의 반응에 소심하게 굴었다.

 

“어디쯤인가?”

 

“모르겠소.”

 

소장은 주춤하더니 말머리를 흐린다.

 

“그, 일이 하나 들어왔는데 말이야, 오토바이 배달. 9시까지만 해달라는데 어떻게 할 건가?”

 

대명은 잠시 고민하는 척한다. 그는 호사로움은 제 것이 아니라는 듯 소장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겠네. 어디로 가면 되는가?”

 

거리마다 빼곡히 자리 잡은 꽃나무의 흔적이 피곤할 정도로 엉겨 붙었다. 봄기운을 툭툭 털고 사무소로 도착한 대명은 의식하지 않은 시간이 빛처럼 순식간에 사라짐을 또다시 느꼈다. 잠깐의 시간도 의식하면 끝없이 풀어진 비단포 같은데, 일이 년은 허망하게 묻혀가는 것이 그에게 잠깐이나마 못마땅한 느낌을 주었다. 탈탈거리는 구식 오토바이를 밟는 발에는 꽃잎이 새긴 소원이 욱신거렸다. 느글거리고 매캐한 매연도 오늘따라 대명의 폐를 버겁게 했다. 다 여섯 시간만 달리면 되는 일이었지만 대명은 알락 말락 한 권태에 휘어 잡혀 괜스레 늦장을 부렸다. 신호등도 제때제때 지키고, 속도제한도 꼬박꼬박 지켜가며 어두운 거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가로등을 하나하나 응시하며 갔다. 한산한 골목과 눅진한 어둠과 쌀쌀한 바람은 대명의 발에 새겨진 소원의 흉터에 강렬하게 불을 붙였다. 미적거리는 통에도 일은 얼마 안 가 끝이 났다. 대명은 나긋한 나무의 휘파람을 따라 부르며 집으로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언듯거리는 것들을 의지적으로 붙잡았다. 그곳엔 그의 몇 안 되는 보물이 나란히 놓여 대명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빛바래 변색된 사진이, 먼지 쌓인 책이 그곳에 있었다.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쓸어보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렁거렸다. 그간의 세월 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남긴 것은 무엇인가. 상처만 주고 떠나보낸 것은 아닌가. 바늘로 꿰뚫는 듯 아린 말들이 대명을 옥죄인다. 대명은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던 것을 왜 지금 와서 하는가. 그녀는 이미 떠났지 않냐. 이렇게 하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내가 그녀를 그렇게 보내고도 살 자격이 있는가. 난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가치를 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생각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존재를 허락받아야 내가 살 수 있는가. 나의 의미를 내가 입지하면 안 되는 것인가. 잘못 든 길을 되돌아갈 수 없다면 앞으로 바른길로 가면 안 되는 것인가. 대명의 들끓는 머릿속에서, 방방 뛰는 가슴속에서, 다부진 주먹에서, 만남을 기약하는 소원이 새겨진 발바닥에서 불꽃이 일어 저 안쪽에 숨겨진 대명의 속내까지 새까맣게 태웠다. 잡아먹을 듯이 활활 태우고 남은 것은 바스락거리는 분홍색 재뿐이었다. 대명은 공양을 하러 가는 스님처럼 정갈하게 몸을 가꾸고 자리에 누웠다.

 

보이지 않는 줄 위를 걷는다. 밑은 까마득한 어둠이다. 서린 공기와 끝없는 어둠이 낭자한 곳은 더는 바랄 힘도 없게끔 만들었다. 대명은 줄 위에 서서 자신을 의식한다. 이름은 잊은 지 오래다. 잊힌 이름을 되찾기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금의 이름은 실속 있는 이름일 뿐 누군가의 고뇌와 정성이 담긴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뜻을 담아 줄 것이다. 크게 빛나다. 빛이 클 수도 없고 밝기를 표현한다고 해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저 멀리 빛이 보였다. 보이지 않는 줄 위를 떠나지 않는 이상 닿지 못할 것 같았다. 줄 위를 떠난다는 것은 살아있는 이상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애초에 닿을 수 없는 빛은 누가 흩뿌리고 있는지, 줄 위를 벗어나면 닿을 수 있는지는 줄타기를 하는 자에겐 중요하지 않다. 그저 주어진 줄 위를 어떻게든 달리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다. 대명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추스른다. 마지막이 어둠과 함께라면 지금은 빛을 향할 때다. 대명은 퍼붓는 빛을 향해 다가간다. 엉덩방아를 찧을 듯 줄 위를 밟아가는 대명은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꽃처럼 고귀하고 불안해 보였다. 대명은 새로 지은 이름의 의미를 곱씹었다. 크게 빛나다. 달려갈 필요 없이 내가 빛이 되면 되지 않는가. 대명의 몸이 환하게 빛나더니 소리 없이 녹아내린다. 대명이 있던 자리엔 커다란 빛덩어리가 우두커니 서서 보이지 않는 줄을 왜곡하고 잡아당기고 밀치고 한다. 빛은 다시 대명이 된다. 대명은 줄이 되기도 하고 줄 위를 걷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빛이 되기도 한다. 대명은 죽은 듯이 아득한 어둠이 그토록 원하던 빛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바란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봄바람은 새 생명을 몰고 온다. 누군가의 우주에도 봄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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