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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신인발굴]_시_노재순_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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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부문>
성명: 노 재 순
성별: 여
연령: 1959년 3월 25일생
주소: 서울시 강동구 천호2동 456-2 천호연세정형외과 물리치료실
연락처: 010 8862 2484
1. 산이 푸른 이유
산길에서 불쑥 튀어나온 박새 한 마리
나도 놀라고 저는 더 놀랬는데
도망도 안 가고 날개를 푸득거린다
어미 잃은 아기새인 줄 알았더니
바위틈에 부숭숭 다섯 아이가 숨겨져있다
온몸으로 나를 막아서는 대책없는 맹목으로
맹금류와 뱀이나 들쥐를 쫓아내고
그 어미의 마음으로 산은 또 푸르겠구나
산다는 건 이렇게나 눈물겹다
저 작은 날개짓으로 세상을 지켜내다니
비에 젖은 새끼들 울음소리 자꾸 눈에 밟혀서
돌아보니 산이 청청,
2. 탕진잼*
낯선 곳에 부려져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낙인처럼 이천 오백 원짜리 가격표가 붙었다
차디찬 바닥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며
열리지 않는 지갑만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다
더미더미 쌓여있는 수면바지 헤집으며
별도 줍고 하트도 찾고 곰돌이도 너무 귀여워서
빨주노초파남보 세트로 안고 돌아왔다
가치의 기준이 무너진 마당에
자존감마저 이대로 꺾을 수는 없는 일
싸구려 바지라도 사 제껴야 살아있음을 느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에는
고양이도 물 수 있는 것이다
동그라미 하나 더 붙여주고 싶은 심정으로
풀 죽은 마음 팽팽하게 당기면서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주문처럼 되뇌이며
또다시 처음처럼 새해를 맞이한다
*탕진잼 : 탕진과 재미를 합친 신조어로 비싸지 않은 물건들을
소비하는 불황 속 새로운 소비 트랜드
3. 시간의 잔고
마른 수숫대처럼 가벼워진 팔순의 엄니와
큰 맘 먹고 해외여행을 떠났다
시간이 뭉텅뭉텅 빠져나가기 전에
바다 건너 훨훨 날아가서
바깥세상을 꼭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도연명이 노래하던 세외도화원,
주름진 얼굴에 복사꽃 웃음소리 피어났다
머지않아 다가올 기나긴 잉여의 시간 빌려와
마이너스 통장도 챙겨 들고
잔고 바닥까지 흔전만전 쓰고 나면
먼 길 보내고 홀로 남겨져 안고 갈 시간
그리움의 무게도 줄일 수 있을까
4. 다시 시작을
멈추지 않고 빙빙 돌아가는
어지러운 세상
중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가치의 기준이 사라지고
참과 거짓이 없는 혼돈의 연속
길이 보이지 않는다
가슴 깊숙이 묻어 두었던
마지막 불씨 하나씩 꺼내 들고
릴레이로 이어지는 주말 저녁
추위도 잊은 광화문 광장에는
높푸른 해일 출렁이지만
이 또한 축제 한 마당
마음과 마음을 나누면서
소리 없는 함성으로
세종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하얗게 밤을 지새우고 맞이한
정유년, 다시 시작이다
5. 물리치료실에서
만만치 않은 놈을 만났다
시퍼렇게 독이 올라 물어뜯을 기세다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녀석의 정체가 궁금하다
승천하지 못한 동굴 속 이무기처럼
관심의 손길 받아보지 못하고
펄펄 지독한 외로움으로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온 건 아닐까
차카게 살자는 다짐을 세기고
뜨거운 마음으로 하트를 그리면서
그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심기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뭉쳐있는 비늘마다 촘촘히 만져주었더니
응어리진 용의 똬리가 풀어졌다
좌골신경으로 찌릿찌릿 뻗쳐가던 성깔도
한 풀 누그러져 얌전해졌다
6. 잃어버린 계절
눈꼽 낀 해가 위태롭게 걸려있다
로켓처럼 솟구치던 스투키도
말없이 식구들 돌보던 산세베리아도
가쁜 숨 몰아쉬며 헐떡거린다
쿨럭쿨럭 밭은기침소리에
겨우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여준다
불온한 생각 없이 제 자리 지키던
저들마저 모두 마스크를 쓰게 되었구나
공기정화기를 돌려달라,
산소호흡기를 달아달라,
기어이 한 마디씩 외쳐야 하는구나
시커먼 괴물이 삼켜버린 계절
종다리가 펼쳐놓은 푸른 하늘을 빼앗겼다
촛불로도 바꿀 수 없는 풍경이다
7. 깜장고무신
삽작문 밖에서 송이눈들 손짓하면
부뚜막 위의 노글노글하게 데워진 신발 신고
온 들판을 씽씽 날아다녔다
소꿉놀이로 흙도 실어 나르고
통통한 올챙이도 키우며 놀았다
오빠는 벌을 낚아채 빙빙 돌리다가
힘껏 패대기쳐서 기절하면 꿀도 빨아먹었다
오늘은 달아날 생각일랑 말어
골 부리며 깻망아지 잡아 담던 신발짝을
엄니 몰래 돌방구에 북북 문지르는데
나는 깨꽃 위에 날아가는 나비만 바라보았다
개울물에 고무신배 띄워 보내고
멀리까지 출렁출렁 한참을 따라가다가
잃어버리기도 했었던
그렇게 떠나보낸 내 어릴적 신발은
지금쯤 어디를 걸어가고 있을까
8. 그 이름이 오래 남아
잔치 중의 잔치는 단종제*였다
호미와 곡괭이를 내려놓고 숨 돌리던 읍내 나들이길
빨간 세숫비누로 푹푹 쉰내도 말끔히 지우고
골짝 골짝에서 흘러내린 새까만 사람들이 동강으로 모였다
비탈진 화전마을은 호롱불 심지 돋구어도
여전히 깜깜할 뿐이었다
그가 어떻게 우리 마을에 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고
난 친구처럼 단종이라고 불렀다
호송했던 금부도사도 눈물 쏟았다는
의지가지없는 어린 나이에 그는 얼마나 서러웠을까
철조망 같은 서강의 물소리에도
대답 없는 하늘은 다만 귀머거리였을 뿐
그렇게 꽃잎 같은 생의 봄날 이울었으리라
* 단종제 : 1967년부터 한식날에 열리는 영월의 대표적인 문화행사이다
9. 개망초
재잘재잘 말 건네는 누이 같은 꽃
작은 키 옭아매는 모진 이름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가지가 서럽다
죄 없는 강아지 걷어차는 심정으로
만만한 발길질에 개망초라 불렀는데
년년이 무리 지어 끝없이 손짓한다
여리고 하얀 꽃잎에 노른자 꽃술로
동굴동굴 순한 너를 계란꽃이라 불렀더니
조그만 얼굴에 반짝 이슬 맺힌다
휴전선 가로질러 피어나는 개망초꽃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서로 먼저 손 내밀며 달려가는 유월의 꽃
10. 첫사랑
그녀가 왕숙천 둔치에 앉아
삐릿 삐릿 삐리리
호드기를 불고 있다
아직 살아 있었구나
노란 버들강아지 실눈을 뜨고
늦도록 소식 없는 산골 마을에
봄의 전령사인 듯
오빠는 물 오른 껍질 뱅뱅 벗겨서
삐비처럼 입에 물려주었지
하늘에 피리소리 들려오자
파릇파릇 새 순 돋듯
핫둘핫둘 오리들 봄맞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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