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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신인발굴]_시_명호경_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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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추천 시
<시 부문>
성명 : 명호경
연령: 50세
주소: 경남 사천시 사남면 월성리 사천리가아파트 116-602
연락처: 010-7751-6678
봄동
푸름에 웅크린
지난 겨울날의 음산한 그늘
체온보다 낮은 언 땅에서
끝내 봄을 키워낸다
계절보다 먼저
계절보다 더 푸른
서러움 말끔히 지운
달달한 부드러움
입안에서 사근거리는
봄 또는 겨울
꽃들의 다툼
햇살 좋은 어느 날
두 며느리가
목련과 매화 중 어느 꽃이 먼저 피는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가곡 목련화에서
봄의 전령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분명 목련이 먼저 온다고 말하자
설중매화雪中梅花라고
눈 속에서 피는 꽃인데
봄의 시작은 매화부터라고 우겼습니다
결론이 나질 않자
그럼 시어머니께 물어 보기로 했는데요
“어머님, 목련이 먼저 피지요?”
“어머니, 매화가 먼저 피잖아요? 그렇죠?”
잠시 고민을 하시더니
“내 얼굴 저승꽃은 지난겨울부터 피어 있었니라”
세 여자가 서로를 보고 깔깔대며 웃는 사이
봄은 사립문 앞에서 아른거렸습니다
어머니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산에서부터 소나무가 쳐내려오고
마을 쪽에서부터 대나무 밀고 올라오고
유자 밭이 진퇴양난이다
성근 두충나무 방호벽을 뚫고
가장자리는 대나무 첨병들이 점령하자
유자 밭을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노모는 낫을 들고 올라갔으나
웃자란 잡초들의 저항에
낫질할 엄두조차 내질 못하고 내려오고 말았다
놉을 사려해도 젊은 사람이 마을에 없다는 현실에 시름하다
봉화를 대신한 휴대폰을 들고
만만한 막내아들에게 지원요청을 한 후
주말에 내려가 풀을 베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신다
토요일 내내 예초기 굉음이 유자 밭을 지배하고
대나무와 어린 소나무 밑둥이 잘리며 내는
단말마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포연탄우砲煙彈雨 시간이 지나고
유자 밭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자
이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아들에게 수건을 건네시는데
노모는 내년 봄까지는 휴전을 이어갈 것이다
잡초들이 차지했던 자리마다
유자나무는 푸른 햇살을 받으며 노란 꿈을 키우다
은은한 향을 바람결에 풀어놓을 것이다
고장 난 벽시계
하루에 딱 두 번
정확한 시간을 맞추는 벽시계
늦잠을 자고 만 아침
벽시계를 보면 안심이 된다
6시 37분,
서두를 필요가 없는 시작이다
회식을 하고 퇴근이 늦은 밤
6시 37분,
여유로운 저녁이 보장된 삶이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조급하게 살지 마라는 무거운 묵언
그놈 참 호상好喪이다
세상을 향한 고함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고희를 훌쩍 넘기시는 동안
딱 세 가지 욕만 하셨답니다
나쁜 사람에게는 “이런 상렬의 자식”
아주 나쁜 사람에게는 “호로 상렬의 자식”
죄질이 최고로 나쁜 놈에게는 “개 상렬의 자식”
얼마 전부터 아는 욕을 하나로 묶어
“이런 호로 개 상렬의 자식”이라고
문밖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시는데
그러고 보면
요즘 세상이 참 많이 화나게 하는 모양입니다
깊은 집
기왓장에 낀 검은 이끼로
세월을 가늠할 수 있는 오래된 집은
스스로 깊어진다
새로 난 아스팔트 아래로 낮아지고
고층 아파트 그림자에 묻혀
기억으로부터 멀어지자
스스로 낮은 자리를 폈다
뒤뜰 늙은 도토리나무가
가슴에 담아 지켜 온 그리움
저녁 햇살에 키를 늘리자
마당 풀 사이 바람이 사각대더니
아이들 수런거림이 파동으로 전해진다
낯익은 얼굴들도
헛간 누렁이도
끝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기다림 깊어지는 집에
이른 어둠이 깊다
나비, 검은 무늬를 지우다
마늘쪽 같은 불알을 흔들며
능숙하게 돌담을 타고 넘는 노랑무늬 고양이
앞마당을 마치 제집처럼 어슬렁거리는
보무도 당당하다
대문밖에 있던 놈은 등치가 커지자
우리 집 마당을 허락도 없이
자신의 영역으로 등기하고선
처음엔 나비 밥그릇을 노리더니
보름 전부터는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놈을 완강하게 거부하던 나비가
며칠 전 대가리를 바닥에 문대는 틈을 타서
잽싸게 나비목덜미를 물며 덮쳤는데
나비 울음이 처절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 놈은 앞마당에 상주하며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꼴이 볼썽사나워
헛 돌팔매질로 쫒아 보았지만
금세 돌담을 타고 다시 넘어 들어와
나비 밥그릇에 코를 처박는다
그 순간, 나비가 놈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부비며 얼굴을 핥아준다
나비는 이제 곧 검정무늬를 지우고
노랑무늬 새끼를 낳을 것이다
가을날의 일상
하늘에 걸린 벚나무 정수리가
벼보다 먼저 익어가는 휴일 오후,
뒷짐을 지고 돌산 우두리 길을
바쁠 것 없이 느긋하게 걸었다
가로수에 기댄 투명 비닐봉투 속
차곡차곡 담긴 낙엽으로 계절은 깊어지고
청솔 선구점 담벼락에 걸친 닻의 녹물이 내려와
시멘트벽에는 붉은 능소화가 피었다
아직 어둠이 내리기엔 이른 시간인데
저만치 잠자리가 가을을 끌고
오페라 모텔 입구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오빠 믿지?”
똥꽃
도로변 노랑이 화사하다
여름코스모스라고도 불리는 금계국을
이름을 알기 전에는 그냥 ‘똥꽃’이라 불렀다
옆집 정훈이 아빠가 현장근무 중
노란 꽃무리에 숨어 급히 똥을 누었고
그냥 나오기도 머쓱했던지 금계국 한 다발을 꺾어와
정훈이 엄마에게 한 쪽 무릎을 꿇고 내밀었다
남편에게 받은 첫 꽃 선물이라며 활짝 웃으며
그 중 몇 송이를 내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노란 꽃 사이에서 엉덩이를 까고
아랫배에 힘을 주며 꽃을 꺾는 모습을 연상하며
우리 부부는 한참이나 깔깔거렸다
해마다 군락을 넓혀가는 금계국 꽃무리를 보면
가부장적 근엄한 모습에 기골이 장대한
정훈이 아빠 똥거름 효과가 아닐까 싶어
도로변 샛노란 금계국 모습에 취하다가도
코를 갖다 대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양몰이 개 보더 콜리
주차장 뒤편 마을에는 집집마다 개를 키운다
진돗개가 가장 많고
자식들이 맡겨 둔 외래종도 종종 보인다
지능이 높다는 보더 콜리종도 한 놈 있는데
족보 있는 개다보니 잡종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혼자 다니는 개 도도하다
지도 개인데 별거 있겠냐고
햄을 던져 유혹을 해 봤지만
다가오지도 먹지도 않는 양몰이 개 보더 콜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음을 굴려가며
“헤이, 컴 온 베이비”
영어로도 불러보았으나 헛일이었다
그때, 할머니가 개밥통의 사료를 흔들며
“삼순아 밥 먹자”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을 쫓듯 개 달리는 보더 콜리 삼순이,
암놈이었다
빈모 유감
오늘 심부름으로 아 들이 회사에 왔고 마침 결재를 하다 김과장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저녁에 아들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나이 많은 직원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아빠 인격의 문제라고 따졌다
얼마 전에는 고위직 공무원이 내방했을 때도 인사드리는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옆에 있던 김과장 손을 꼭 잡은 채 치사를 하는 바람에 나는 그야말로 뻘쭘하게 서 있어야만 했다. 예전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러니 했는데 알고 보니 김과장이 책임자인 줄 알았단다
몇 년 전에도 송신소 건설현장에 민원이 발생해 김과장과 함께 그곳에 상주했었다. 인근 마을 할머니들이 공사 진행을 막겠다고 몰려와 “김과장! 절대 밀리면 안돼”라고 말했다가 “싸가지 없는 놈, 형뻘 되는 사람한테 반말질이여”하시며 한 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내 머릴 내리치셨다
그때마다 억울했지만 참을 수 있었던 것은 김과장은 입사 동기고 나보다 나이도 세 살이 적었기에 순전히 어려보이는 내 외모 때문이라고 웃고 넘겼는데, 얼마 전 심는 가발을 쓰고 나타나는 바람에 빈모인 내 머리카락이 초라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김과장 삼촌 되시냐고 묻는 것이다
불꽃축제
여수 밤바다 불꽃축제를 하는 날
부산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화려한 불꽃축제 구경하러 와라”
“내 삶이 더 불꽃같은데 무슨 불꽃,”
장군도 하늘에서
불꽃 터져 꽃비로 내리던 날
녀석의 그 말이 폭죽이 되어 터졌다
얀바구 같은 놈
까마득한 옛 추억 속 어른, 호성이 형네 머슴 얀바구 아저씨는 지능이 약간 부족했지만 아이처럼 순수했다
동네서 먼 범바구 넓은 밭을 갈아야 하는 날, 주인아주머니는 도시락 싸 주셨는데 시간 개념은 없고 먹성만 좋았던 얀바구 아저씨는 점심때도 되지 않았는데 도시락을 미리 먹고 해가 떨어지기 전에 배고프다며 집으로 오기 일쑤였다
주인아주머니는 궁리를 거듭하시다 여수로 가는 여객선 신라호가 창포마을 끝단을 통과할 때가 정오라는 것을 떠올리시고 “얀바구, 신라호가 창포 앞을 지날 때 점심을 먹소”라고 알려주었고 그 이후로는 얀바구 아저씨의 점심시간은 일정하게 되었다
얼마 후, 먹성 좋던 사람이 도시락을 먹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자 주인아주머니는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건지 걱정이 되어 물었는데 “오늘 신라호가 창포 앞을 지나가질 않았어라”라고 대꾸하더란다 그날은 바람이 많이 불어 풍랑주의보가 발효되었고 여객선 신라호는 출항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우리 마을에서는 융통성 없는 사람을 빗대 “얀바구 같은 놈”이라고 비아냥거렸는데 계산적이고 약삭빠른 사람이 넘쳐나는 오늘, 얀바구 아저씨가 그립기도 한 것을 보면 “얀바구 같은 놈”은 비난이 아니라 찬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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