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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상반기 신인발굴]_소설_김지영_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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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문>
인적사항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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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반장님을 모셔다 드리려고 이따금 왔던 곳이라 막내 녀석은 길이 익숙했다.
일요일 오전. 발길이 뜸한 곳에 차를 세우고 용석과 막내는 현장으로 서둘렀다. 한적한 주
택가 한켠 작은 놀이터였다.
구경꾼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둘러친 하얀 비닐시트를 헤치고 들어가며 용석은 마지막까
지 소식이 틀렸기를 빌었다.
먼저 와 있던 감식반이며 현장지원을 나온 지구대 소속 순경 대여섯 명이 황망한 얼굴로 그
를 맞았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녹색 우레탄 바닥의 커다란 검붉은 얼룩이 용석의 눈에
들어왔다.
“임형사님...”
누군가 용석에게 아는 체를 했다.
“시체가 어디 있다는 거야”
*
“본인인 게 확실해”
“감식반이 미리 사진을 찍어놓아서, 저희가 보고 확인했습니다. 반장님이 확실합니다.”
“사인은”
“복부에 난 열두 군데 정도의 자상입니다.”
“복부에 열두 군데 자상을 입은 시체가 제 발로 걸어나갔다는 소리야”
“그렇게 보입니다.”
“으으음...”
푹신한 팔걸이 소파에 깊숙이 파묻힌 청장에게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용의자는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 흉기를 들고 피칠갑을 한 놈이 아예 제 발로 현장에 되돌
아왔다. 그 자리에서 놈을 체포했고 놈은 범행을 자백했다. 수년 전 반장님께 체포당한 원
한 때문에 저질렀다고 했다. 거기까진 순조로웠다. 문제는 피해자였다.
피해자인 반장님이 사라졌다.
처음에 누군가가 ‘죽음에서 살아돌아왔다’고 주장했을 때, 그저 그런 임사체험을 파는 사
이비 종교인 취급을 당했다. 그러나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실체를 가
진 문제들이 하나 둘 등장하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현상을 바로 바라봤다.
먼저 경찰과 사법계, 그리고 출판계가 혼란에 빠졌다.
이번 사건과 같이 현장에서 시체가 사라지는 경우 문제가 컸다. 아무리 명명백백한 용의자
가 있어도 시체가 없으니 사건이 성립되지 않았고, 사건이 성립되지 않으니 용의자를 기소
하고 벌을 줄 수가 없었다. 세상의 살인자들이 기를 쓰고 시체를 없애려는 이유였다.
출판계에선 반대의 경우가 문제가 됐다. 자신을 죽인 범인을 직접 지목하고 재판정에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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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직접 진술할 수 있는 피해자의 등장은,‘죽은 (피해)자는 말이 없다’는 철칙을 깨트리
며 추리소설과 판타지소설의 경계를 흔들어 놨다.
그에 못지 않게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뒤죽박죽이 됐다.
시체가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시체가 없이도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
며 장의사 연합회가 파업을 벌였다. 유족들은 시체가 없어 사망진단서를 뗄 수 없으니 연금
을 계속 받아야겠다고 주장했고 연금관리공단은 황급히 연금제도의 존망을 검토하는 긴급
태스크포스를 꾸렸다. 시민들은 주민세를 내지 않는 사람에게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항의했다. 그렇다면 공공서비스를 받지 않는 대신 초코파이를 사먹을 때 부가가치세
나 담배를 살 때 담뱃세를 내고 싶지 않다고 누군가가 맞받아쳤다. 어느 저명한 변호사가
자신의 SNS에 ‘그들은 살아있는 자연인이 아니니 ‘인격’이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누
군가의 소유물도 아니다. 법률적으로는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버려진 개와 비슷한 존재’라
고 했다가 인권단체와 유기견 보호협회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시중에는 병을 안고 죽
은 자(정확하게는 죽음을 회피한 자)의 생리현상을 묘사하는 넘세스러운 농담이 대유행이었
다. 이제 사람들은 죽음에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죽음은 우스워지고 있었다.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이 어떤 ‘괴수첩’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제기됐다. 거기에 적혀 있는
어떤 정보가 죽음을 피하는 방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지목한
괴수첩의 존재에 대해서 당국은 아직 공식적인 조사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으... 자식이 이렇게 뒤통수를 쳐”
청장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히자 그의 양날개 아래 정렬해 앉은 간부들의 이마에는 더 깊
은 주름이 잡혔다.
물론 현장에서 시체가 사라진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용석이 근무하는 지방 경찰청에서도
올해 들어 벌써 두 건의 현장에서 시체가 홀연히 사라진 터였다. 하지만 청장과 간부들을
일요일 아침 전화 한 통으로 반 시간 만에 집결시킬 수 있었던 이유이자, 용석이 현장을 파
하기가 무섭게 청장실에 불려들어간 이유, 그리고 보고체계를 수 단 건너뛴 긴급하고 이례
적인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 그것은 사라진 피해자가 바로 경찰조직의 인간이었기 때문이
었다.
형수님은 그렇다 치고 영제는 이제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참이었다. 그 조그만 아이에게 아
빠가 저지른 짓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두 사람에게 찾아가 소식을 전할 생각에 용석은
마음이 무거웠다.
*
“절개를 시작합니다.”
최박사는 간이 녹음기의 스위치를 끄고 메스를 들었다. 조명이 꺼진 부검실 안. 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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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내리쬐는 부검 테이블 위에서 최박사의 손이 커다란 Y자를 천천히 그렸다.
용석은 몇 걸음 떨어진 어둠 속에서 막내와 함께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경찰에 들
어온 이래 수십번 어쩌면 수백번은 보았을 모를 최박사의 부검. 용석은 수없이 많은 배가
갈라지는 동안 최박사의 손이 떠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있지도 않은
시체의 배를 가르며 그의 손은 떨고 있었다.
막내가 어둠 속에서 한걸음 앞으로 나와 끼어들었다.
“박사님! 출혈상태는 어떻, 윽.”
용석의 옆구리 지르기에 막내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막내는 최박사의 침울
을 이해하기엔 아직 29년 4개월쯤 근무경력이 모자랐다.
‘에어air’부검. 기타 없이 에어 기타를 치는 사람도 있고 피아노 없이 에어 피아노를 연
주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런 류의 것들은 일종의 농담이다. 멋이다. 하지만 부검의에게 있
어 시체 없이 부검을 하는 것은 농담도 아니고 멋도 아니다. 농담으로라도 멋이라고 할 수
없다. 오직 굴욕일 뿐이다.
“저... 박사님.”
“뭔가.”
“이게 있으면 좀 나으실까 싶어서...”
용석은 머뭇거리며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A4용지에 컬러
프린트한 사진 속에서 죽은 반장님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팀 야유회 단체 사진에서 잘라낸
것이었다. 용석은 그것을 죽은 반장님의 머리가 있어야 하는 자리를 가늠하여 조심조심 올
려놓았다.
내장에서 끓어나오는 듯한 깊은 한숨을 쉬며 최박사가 말했다.
“심장 320 그램... 이상 소견 없음.”
*
별다른 진전이 없이 시간만 지났다. 며칠 후 용석이 다시 청장실에 발을 들여놓자 기다렸다
는 듯 청장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대책을 마련했네. 일단 만나보게. 어이.”
청장이 신호를 하자 똑똑 노크를 하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어떤가? 자네가 보기에도 이만하면 쉽게 들통나진 않겠지”
못 보던 얼굴이었다. 용석이 청장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짓자 간부들
의 얼굴에 가벼운 웃음이 스쳤다.
“찾느라 고생을 많이 했네. 임형사가 앞으로 여러가지로 도와주어야 할 것일세. 이름
은... 글쎄, 뭐 이름에 큰 의미가 있겠나. 그냥 김반장이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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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무언가 용석의 뇌리를 퍼뜩 스쳐지나갔다. 에이... 설마.
“가짜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듣기 거북하군. 우리는 인사人事를 한 것뿐일세. 언제까지고 그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
지 않겠나.
엄밀히 말하면 이 남자는 죽은 반장과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단지 ‘우연히’반장과 체격과 나이, 생김새가 비슷해 보일 뿐이지.”
용석은 ‘김반장’을 쳐다보았다. 김반장도 용석을 쳐다보았다. 특징도 없고 흐릿한 인상이
었다. 기억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이 사람이 죽은 반장님과 닮았다고
“정말로 이 사람 이름이 김반장입니까”
“정말로 김반장일세. 성은 김. 이름은 반장.”
청장이 자신의 위트에 만족해하는 것을 재빨리 눈치챈 간부들이 하하하 하고 웃었다.
“가족들에게는 뭐라고 하실 겁니까.”
“김반장은 그 집에 가서 살게 될 걸세. 마침 놀리는 방이 하나 있다고 하니 부인은 하숙
을 치는 셈으로 함께 살면 좋겠지.”
용석이 개운치 않은 표정을 하자 청장이 덧붙였다.
“걱정말게. 부인께는 이미 다 양해를 구해놓았네.”
“제가 한번 반장님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답답한 소리. 자네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군. 찾으면 더 문제일세.”
의아한 얼굴의 용석을 향해 청장이 근엄하게 답했다.
“현직 경찰관이 살해당해 사신으로부터 도주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생각해보게. 경찰
의 체면이 뭐가 되나”
*
“김반장님이야.”
김반장님. 용석은 팀원들에게 그 사람에 대해서 이 이상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김반장
이니까 김반장이라고 할 수밖에. 물론 어거지라는 것을 용석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앙다문
청장의 입술 위에 서려 있던, 어거지를 통하게 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떠올리자 용석
도 별 도리가 없었다.
사실 맘먹고 시비를 걸라 치면 새로 온 김반장은 허술함 투성이였다.
새로 온 김반장은 죽은 반장님과 외모부터가 너무 달랐다. 비록 최근에 운동부족으로 많이
무너졌다고는 해도, 죽은 반장님이 살집이 있고 단단한 남자다운 체격이라면 새로 온 김반
장은 극단적으로 마른 체형이었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성품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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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처박힌 청첩장을 찾아내는 데 삼 일이 걸렸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죽은 반장님의 지
옥 같은 책상. 김반장이 새로 온 다음날에는 벌써 기합이 꽉 들어간 군대 행렬처럼 가지런
하게 정리정돈이 되었음은 물론, 매일 말끔하게 걸레질이 됐고 새로운 종류의 꽃이 장식됐
다. 죽은 반장님은 부하들에게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하지만 새로 온 김반장은 늦게까
지 잔업하는 부하들에게 손수 커피를 타주고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죽은 반장님이 배를 내
놓고 낮잠을 자 여형사들에게 빈축을 샀다면 새로 온 김반장은 집에서 손수 구운 쿠키를 가
져와 여형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이렇게 다르다면 위화감이 느껴져야 마땅하지만 희한하게도 팀원들 가운데 아무도 그런 기
색이 없었다.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딴지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출근 이튿
날에는 벌써 김반장에게 꽃말을 묻는 등 자연스럽게 대화를 걸었다. 호칭도 처음에는 ‘김반
장님’이라고 어색하게 ‘김’이 붙어 있었지만 곧 인터넷 동호회의 닉네임처럼 성이 떨어지
고 그냥‘반장님’이 되었다. 죽은 반장님을 그렇게 불렀던 것처럼. 새로 온 김반장을 위한
깜짝 생일파티도 열렸다.
팀의 외부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력반 김반장 말이야. 요새 키가 좀 큰 것 같지 않아”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키가 커졌지? 하하하!”
모르는 소리. 사람이 바뀐 것‘처럼’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었다고! 용석은 목구멍까지 차
오른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청장이 차라리 ‘가짜’라고 확실히 못을 박았더라면 용석도 이
렇게 심란하진 않았을 터인데. 그들이 하는 말이 꽤 틀리긴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용석을 더욱 미치게 했다. 죽은 반장님은 아니지만 죽은 반장님의
자리를 채우며 죽은 반장님과 같이 ‘반장님’으로 불리우는 남자. 가짜라고 하기도 그렇지
만 그렇다고 진짜도 아닌 사람. 용석은 아직까지도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 지 결정하지 못
한 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
술친구가 되고 말았다.
서로 의도한 건 아니었다. 생일축하파티에 대한 답례로 새로 온 김반장이 연 연회가 있던
날, 자리가 파하고 웬지 허전하여 간 술집에서 용석과 새로 온 김반장은 우연히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혼자였다.
이후로 이따금 두 사람은 이 이자카야에서 만났다.
그러는 동안 용석은 새로 온 김반장에 대해서 이런 저런 것들을 알게 됐다. 여러 가지로 불
편하여 여태껏 새로 온 김반장을 되도록 피하고 있었던 용석으로선 신선한 발견이었다. 자
기와 동향이라든지, 기아 팬이라든지, 술이 좀 들어가면 평소와는 달리 열렬한 웅변가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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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든지... 새로 온 김반장은 여자한테 차인 지 얼마 안 돼 의기소침한 용석에게 아는 여자
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기도 했다. 용석은 거절했으나 그가 한사코 우겨 기어이 약속을 잡
고 말았다. 의외로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용석은 새로 온 김반장과 막상 이야기해 보니
생각보다 말도 통하고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느껴졌다. 처한 입장이 서로 어려
워서 그렇지 인간적으로라면 혹시 사귈만한 사람이 아닐까고 생각했다.
“저... 형이라고 불러도 되요”
용석은 새로 온 김반장의 의아해하는 표정에 얼른 손사레를 쳤다.
“죄, 죄송합니다. 잊어버리십시오. 어쩐지 시골에 계신 저희 큰형님과 닮으신 것 같아
서...”
새로 온 김반장은 환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석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반장님’으로 부를까말까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비로소 그를 부르기 위한 적절한 호칭
을 찾아낸 것이었다. 문득 용석은 깨달았다. 새로 온 김반장은 청장실에서 용석과 처음 만
난 이후로 바로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그의 외로움과 고충을 이해해줄 사람은 바
로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용석은 새로 온 김반장이 죽은 반장님과 닮은 점을
찾은 것 같았다. 그것은 크게 웃을 때밖에 보이지 않는 보조개였다.
*
용석은 탈진하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사불성으로 취한 새로 온 김반장을 그 이상으
로 취한 용석이 자신의 집에 업고 들어왔다. 용석은 침대에 기대서 넥타이를 풀고 양말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침대 위에 죽은 듯이 엎어져 있는 새로 온 김반장의 양말을 벗겨주려고
등뒤로 손을 뻗었다.
하나. 검은색 신사양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둘. 후줄근하게 늘어난 흰색 면양말이었다.
셋. 또다시 늘어난 면양말. 그리고 넷...
응? 넷? 새로 온 김반장에게 네 짝의 양말이 필요한가? 용석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용
석은 침대를 짚고 일어나려고 하다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
다.
*
새벽의 한기를 느끼며 용석은 문득 눈을 떴다. 손을 움츠릴 때 그의 오른쪽 손끝이 무엇인
가 차갑고 낯선 것을 스쳤다.
“이불 좀 덮고 주무시지...”
하품을 하며 용석은 손끝이 닿았던 남자의 드러난 복부에 눈길을 주다가 자기도 모르게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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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일어났다. 남자의 배가 슬롯머신의 슬롯과 같은 길쭉하고 까만 구멍으로 뒤덮여 있는 게
아닌가. 슬롯머신 남자가 부스스 눈을 뜨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이구 속이야... 용석아, 물 좀 마시자.”
“바, 반장님”
용석은 찬물 양동이를 뒤집어쓴 것처럼 술과 잠이 동시에 깼다. 어젯밤의 기억들이 용석의
머릿속에 드문드문 떠올랐다.
새로 온 김반장과 야간경기를 함께 본 게 기억났다. 이자카야에서 경기 뒷얘기에 열을 올렸
던 것도 기억났다. 그때였나? 누군가 합석을 하게 된 것 같았다.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
는다. 서로 인사불성이었던 같다. 그러고 보니 택시 기사의 말이 얼핏 떠오르는 것도 같았
다. 왜 ‘세 분’이 꽉 끼어 앉으세요? 앞에 한 분 오시지.
아아! 용석은 머리를 잡아뜯었다. 이 사람은 죽은 반장님이다! 우연인지 의도된 것인지 모
르지만 죽은 반장님도 어제 단골이었던 그 술집에 왔던 거다. 그리고-
“같이 있던 그 사람은 새벽에 일찍 나가는 것 같더라. 어떻게 아는 사람이야”
“처, 처음 모시고 온 겁니다. 아니 데리고...
다행히도 죽은 반장님은 새로 온 김반장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용석은 죽은 반장님
께 물을 떠서 드렸다.
“어제 영제를 봤다. 비록 멀리서이긴 하지만...”
죽은 반장님의 얼굴이 많이 핼쓱해져 있었다. 용석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체 왜 그러셨어요”
“글쎄... 사실은 나도 기억이 잘 안 나.”
“기억이 안 난다니...”
“아무리 애써봐도 그때 일이 떠오르지가 않아. 내가 대체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날까
싶어서 현장에도 몇 번이나 가 보았다. 가 보았는데...”
핸드폰 벨 소리가 죽은 반장님의 말을 막았다. 아. 응. 그래... 알았다. 용석은 짧은 대답
만으로 통화를 마쳤다.
“형, 저 현장에 나가봐야 될 것 같아요. 자세한 이야기는 또 하기로 하고. 우선은 여기
서 좀 계세요.”
용석으로부터 듣는 간만의 ‘형’소리가 새삼스러워 죽은 반장님은 가슴이 싸했다. 용석은
출근 준비를 서두르며 샤워실로 향했다.
*
“기자들한테 연락하길 잘 했죠? 반장님 돌아가셨을 때랑 다르게-”
말하는 저도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합!’하며 막내는 제 입을 막았다. 경찰서로 돌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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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 혀를 낼름 내밀고 머리를 긁적이는 막내의 옆얼굴을 용석은 짜증스레 노려보았다.
이 녀석은 언제나 입이 방정이군. 녀석은 자기가 용석의 불안의 정가운데를 쑤셔댄 것도 알
지 못했다.
이날 사건의 주인공은 95세 노인이었다. 자연사였다. 이토록 평범하고 좋은 죽음은 요즘은
뉴스거리가 됐다. 다루기도 쉬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건의 뒷처리와 기자들에 대한 대응
을 하면서 용석은 조금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집에 남겨두고 온 죽
은 반장님에 쏠려 있었다.
만약 죽은 반장님이 자수라도 할 셈이라면 어쩌나.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용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경찰이라는 이름에 이보다 지독한 먹칠을 한 스캔들이 과연 이
제껏 존재했던가. 청장과 그의 양날개 아래 일렬로 앉은 간부들의 이마에 새겨진 깊은 주름
이 떠올랐다. 있던 사건을 없애고 없는 반장님을 새로 만들어 세우는 상상력과 실행력을 갖
춘 자들이었다. 그들이 사태의 모든 책임을 사건의 담당자였던 용석 오직 한 사람에게 돌리
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이 한 일은 ‘인사人事’를 한 것뿐이 아닌가. ‘경찰
○○년 역사의 치욕의 아이콘.’이 문구는 용석이 죽어서도 그의 이름 앞에 영원히 남겨질
수사가 될 것이었다.
*
죽은 반장님은 미적대는 자신을 다독이려고 영제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어제 학교에서 돌
아가는 영제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그는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말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터였다. 그는 한달 여 만에 청사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고 있었다. 영제가 아빠의 손을
다시 꼭 쥐며 눈짓으로 재촉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현관을 지키던 의경 한 명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커다란 것이 부딪히는 듯한 둔탁한 소
리가 들렸다. 경찰서 정문 앞 8차선 도로 건너편에서 난 사고였다. 사람들이 비명을 저지르
며 몰려드는 것을 보니 꽤 큰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의경 한 명이 ‘여기에 계십시요!’라
는 말을 남기고 재빨리 현장으로 달려나갔다. 또다른 의경이 무전으로 어디엔가 보고를 하
며 손짓으로 죽은 반장님과 영제를 건물 안으로 유도하였다. 죽은 반장님은 꿈에도 몰랐다.
크레인이 달린 10톤 트럭 밑에 깔려 누워 있는 사람이 용석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용석이
경찰서 입구에 선 자신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당황해서 길을 건너던 중이었다는 사실은 더더
욱 알 턱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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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닫겠습니다.”
손을 포개고 얌전히 누운 죽은 반장님에게 시체안치소 담당직원이 말했다. 죽은 반장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직원은 트레이를 천천히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 퍽 길었던 지난 이 주를 생각하면 비로소 쉬게 됐다는 생각이 앞섰다.
취조과정에서 혼쭐이 났고 일단 풀어주었던 용의자를 다시 잡는 데 잡음이 좀 일었지만 그
외에는 다행히 큰 소동없이 마무리가 됐다.
죽은 반장님의 얕은 숨소리가 좁고 막힌 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해 유독 크게 들렸다. 잠시
후 직원이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는 눈을 떠보았다. 자신
이 눈을 떴는지 어쩐지조차 구분이 안 가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알몸인 것이 민망하고 딱딱하고 차가운 트레이가 어색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달린 이름
표를 애써 꼼지락거려보았다. 죽은 반장님의 머릿속은 깊은 어둠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점
점 잃어버리며 이런 기억과 저런 상념이 어지러이 오갔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또
가족들은? 집... 아내... 영제... 집... 아내... 영제...
아아앗! 그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갑작스레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낮은 천장에 머리를
힘껏 부딪혔다. 격한 통증이 그의 이마를 덮쳤지만 머릿속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또렷하
고 맑았다.
그는 기억해냈다.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져왔던 그 질문. 취조실에서 아무리 시달려도 떠올
리지 못했던 바로 ‘그 순간.’
열두 군데 자상을 입고 쓰러져 있을 때.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눈이 흐릿해지고 소리
가 멀어지며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을 때. 집... 아내...
영제... 집... 아내... 영제... 그의 어지러운 상념이 지금과 똑같은 연상작용을 일으키며
다시 한 번 그를 같은 결론으로 이끌었다. 집에 계란이 떨어졌다!
그때 그는 계란을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
다. 계란이 떨어졌으면 계란을 사러 가야 했다.
“아아아 계란 때문에...!”
그는 맥이 탁 빠졌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나서 일으켰던 몸을 천천히 다시 눕히고 다시 두
손을 가슴 위로 가지런히 모았다. 이제 그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잠을 잘 준비가 된 것이
었다.
그때였다. 환한 빛이 갑작스레 그의 눈을 찔렀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그의 트레
이를 밖으로 끌어냈다.
“왜 그러시죠”
부신 눈을 비비며 반장님은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거무스름한 형체를 향해 말
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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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원래 모월 모일 모시에 나랑 함께 갔어야 됐는데, 한 달 반 정도 늦었군.”
중절모를 쓴 낯선 중년 남자가 손에 든 작고 검은 수첩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죽은
반장님은 그가 누구이며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저를 데려가려고 오셨군요. 그 때는 실례했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죽은 반장님은 수갑이라도 채우는가 싶어 양손을 내밀고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사신은
팔짱을 낀 채 죽은 반장님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어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기분이.”
“처음 아빠가 됐을 때보단 덜 긴장되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죽은 반장님의 농담에 사신도 빙긋이 웃음지었다.
“소질이 있군. 하던 일도 우리랑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고.
좋아. 널 스카우트 하지. 마침 우리가 결원이 생겨서 말이야.”
“스카우트? 절 채용하시는 건가요”
대답도 않고 사신은 가지고 온 검은 서류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자잘한 몇 가지 물
건을 꺼냈다. 수첩과 삐삐, 알람시계였다. 사신은 그것들을 죽은 반장님에게 건넸다.
“따라와. 너의 첫번째 임무를 알려주지.”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의 죽은 반장님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사신은 수첩을 뒤적거렸다.
“어디보자... 임용석. 2주일 전 xx월xx시. 경찰서 앞에서 트럭에 치여 사망. 그리고 그대
로 도주. 어때, 잡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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