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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순/단편/은행나무/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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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 신인작품 모집 응모작
<인적사항>
응모부문 : 단편소설
응모작품 : 「은행나무」,「꽃 진 자리」총2편
성 명 : 전 석 순
성 별 : 남
주 소 : 강원도 춘천시 퇴계동 금호타운 207동 908호
이 메 일 : dikiblue@hanmail.net
전화번호 : 010-9797-8472
은행나무
혹시 내가 정신병자는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정도의 느낌을 가져다준다.
마지막 책상 위에 오일 파스텔과 8절지 종이를 놓고 난 잠시 길을 잃은 아이처럼 머뭇거린다. 그리고는 곧 8절지 종이 대신에 좀 더 큰 종이를 펼쳐놓는다. 종이는 책상을 완전히 덮어버린다. 마지막 책상에 앉을 소년은 요즘 점점 감정이 격해져서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더 큰 종이를 준비해달라는 슈퍼바이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인턴생활을 책임지는 슈퍼바이저의 이름은 윤현락이었다. 어제 만난 그는 자신을 슈퍼바이저가 아닌 그냥 현락씨라고 불러 달라 했다. 그때 난 오늘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짧게 대답했다. 짧은 머리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소년의 뾰족한 눈매를 떠올리면서 난 환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하얀 테이블 위에는 아무렇게나 찰흙 덩어리들이 흩어져있다. 자세히 가서 들여다보니 그것은 환자들의 작품이다. 로봇을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새를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것에는 날카로운 것으로 이름을 새긴 흔적도 있다. 건조하게 굳어버린 찰흙은 양지에서 말렸는지 여기저기 갈라진 틈이 보인다. 높은 책장 위에는 누렇게 때가 낀 석고상들이 엇갈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책장은 칸칸마다 어지럽게 미술도구들이 쌓여있다. 연필꽂이에는 펜 하나 들어갈 자리 없이 색연필과 붓이 꽂혀져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빨간 색연필을 주워서 연필꽂이에 꽂으려다 말고 옆에 살짝 누워놓는다. 책장의 가장 아래 칸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점토와 찰흙들이 차곡차곡 빈 공간 없이 쌓여있다. 답답해. 나는 나도 모르게 낮게 중얼거린다. 그리고 창 밖에 촘촘히 들어와 박혀있는 쇠창살을 보면서 같은 말을 조금 더 큰 소리로 중얼거린다. 여기는 5층인데. 누군가가 예전에 이곳에서 뛰어내렸을 거라고 난 잠시 생각한다. 햇빛은 반듯하게 잘려져서 바닥에 눕는다. 창에 새겨진 「푸른 미술치료실」이라는 글씨와 꽃 모양 스티커가 그 위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창문을 열자 베어진 바람이 들어와 천장의 형광등 아래 달려있는 모빌에서 얇게 소리가 난다. 파란 쇠기둥 네 개 사이를 은빛 물고기가 돌아다닌다. 잠시 천장에 물방울이 돋아났다가 사라진다.
예닐곱 명의 환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미술치료실 안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처럼 거의 망설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슈퍼바이저의 말처럼 요즘 감정이 격해진다는 소년은 조금 더 큰 종이가 있는 마지막 책상에 앉았다. 뾰족한 눈매가 여전한 그 소년이다. 처음 만난 그들의 선명한 기억은 냄새였다. 첨예하게 날이 선 냄새가 콧속을 깊숙하게 찔러댔다. 코를 막으려고 올리던 손을 슈퍼바이저는 막아 내린다. 무거운 손길이었다. 나는 2주일 정도 내 슈퍼바이저 미술치료사가 하는 치료그룹을 관찰하게만 되어있다. 그 그룹들 사이에 서툴게 끼어든다는 것은 무리라는 슈퍼바이저의 생각 때문이다. 난 가장 뒤에 서서 그들을 관찰했다. 마치 내가 책장 앞에 서있는 이젤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참 느렸다. 내 슈퍼바이저가 하는 이야기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하였다. 벌써 3월 중순이 되어 가는데도 두터운 갈색 코트를 입고 있는 늙은 남자는 종이 위에 눈사람을 그리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봄이다. 나는 빨리 그들과 나를 하나로 묶으려고 같이 책상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노란색을 찾는 아이에게 쓰고 있던 파스텔을 손에 쥐어줬더니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든다. 그들은 외부자극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거 줄게요.”
눈사람을 그리던 늙은 남자가 그림 뒤에 크게 김진혁, 이라고 이름을 쓰고선 내게 내민다. 김진혁. 입으로 이름을 되새기면서 난 그림을 받아야할지 아니면 거절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데, 내 슈퍼바이저가 받아도 된다는 눈짓을 했다. 다음 시간에 그 정도 크기의 그림을 그려서 저 남자에게 주세요. 지금 저 환자는 그것을 원하고 있으니까요. 슈퍼바이저가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환자들이 못 듣도록 속삭였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한 시간이 주어졌는데 대부분 환자들은 채 반 시간도 안 되어서 그림을 다 그리고는 멍하게 앉아있다. 소년만이 그림에 단단하게 몰두하고 있다. 파스텔을 번지게 하는 스펀지에는 하얀 부분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 환자들은 이건 산을 그린 거예요, 이건 집이고 이건 사람이에요, 처럼 짧게 이야기하고 빠르게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검은색과 회색을 겹겹이 칠해놓은 종이를 들고서 나예요, 라고 끊어내듯이 말하고 잠시 창 밖의 쇠창살에 시선을 둔 뒤 앉았다. 그 사이 긴 머리가 가볍게 날렸다. 이제 마지막 책상에 앉은 소년의 차례였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어깨를 들썩이다가 눈을 감은 채로 일어섰다. 엄마랑 아빠예요. 섬뜩하게 보이는 선 몇 개와 여러 개를 겹쳐 그린 동그라미가 전부였다. 사람처럼 보이기는 했다. 낙서 같은 그림들.
미술치료 시간이 끝나고 슈퍼바이저는 환자들이 자기가 쓴 오일파스텔과 스펀지는 자기가 치우도록 했다. 그는 어지렵혀진 자리를 치우는 순서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다섯 번은 해야 했다.
“환자들 첫 인상이 어때요?”
환자들이 다 나간 후 슈퍼바이저는 내게 환자에 대한 인상을 물어왔다. 나는 그들에게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말하려다가 그들은 어두워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는 녹차 두 잔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한 잔에만 티스푼으로 설탕을 넣었다. 그는 설탕을 넣은 녹차를 입에 가득 한 모금 마시고는 지금 미술치료실에 다녀간 사람들은 CRP그룹이라고 했다.
“CRP라면…”
“윤주씨도 알텐데. 한국미술치료연구센터에 있었다고 했지요? 거기 교육에서 배우지 않았나요? Cognitive Rehabilitation Program.”
“아… 기억…, 기억나요. 인지능력이 떨어지면서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 맞죠?”
그들은 아마 가끔은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더울 때에는 얇은 옷을 입고 추울 때에는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가르쳐줘야 할 것이다. 눈사람을 그리던 늙은 남자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을 지도 모르겠다. 요즘 왜 이렇게 땀이 많이 나지?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그랬었구나. 괜히 난 미안한 생각이 든다. 슈퍼바이저는 오랫동안 환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검은색과 회색을 종이 위에 겹겹이 칠해놓은 여자아이는 성폭행을 당한 경험 때문에 자신을 숨기려고 든다고. 마지막 책상에 앉은 소년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고아원에 넘겨질 뻔해서 그 이후로 애정결핍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눈사람을 그린 늙은 남자는 지난겨울 사업이 부도났다고. 창밖의 쇠창살과 「푸른 미술치료실」이라는 글씨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슈퍼바이저와 나의 얼굴까지 닿았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윤주씨 애인 있어?”
나는 다급하게 쥐고 있던 녹차 잔을 들어올린다. 그러나 찻잔 안에 티백은 이미 터져 버렸다. 안이 어지러웠다. 글쎄요. 그는 앞으로 자기를 슈퍼바이저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현락씨라고 불러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 들었던 그의 이름을 난 이미 잊은 상태였다. 찻잔 두 개를 개수대 안에 넣어놓는다. 그의 잔 밑바닥에는 아직 녹지 않은 설탕이 남아있다.
*
연락이 거의 닿지 않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조심스러워야만 한다. 그 편지는 당혹스러움과 함께 말도 안 되는 그리움과 쓸데없는 감정들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상호의 편지가 내겐 그랬다. 마치 어제도 만났던 사람에게 대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써 내려간 편지.
버스는 30분 만에 역 앞을 지나서 철길을 따라 깊숙이 빨려 들어가듯 달린다. 버스 위로는 이제 막 세워진 고가도로가 짙은 어둠을 만들어내고 창밖으로는 멀리 공사가 중단된 채 서있는 아파트 단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몇 달째 아직 칠도 안 되어있는 아파트. 버스기사는 벨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습관처럼 한주아파트 앞 정류장에 서서 내리는 문을 연다.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있는 버스 안은 이제 비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완전히 내리기도 전에 버스 안에는 불이 꺼진다. 이미 늦어버린 저녁이지만 아직도 여기에 잠시 서 있다 보면 굴삭기가 흙을 퍼 올리는 소리나 트럭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잠깐 동안 몸서리를 치고 약국으로 간다. 그러나 약국의 문 앞에 서툴게 써진 글씨를 한참동안 쳐다봤을 뿐 난 약국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의약분업예외지역」. 약국은 내일쯤 들러도 상관없겠지.
아파트 단지는 늘 어느 일요일의 늦은 오후를 생각나게 한다. 모래처럼 거칠고 누런 햇살이 가득한.
주차장엔 차가 거의 안 보인다. 난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차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늦은 밤이 되어서도 아파트엔 불이 켜져 있는 집이 눈에 안 들어온다. 난 이 아파트 사람들은 거의 일찍 잠자리에 든다고 생각한다. 쓰레기장에 단 한 개의 종량제 봉투만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난 생각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집 안에 쓰레기를 안고 살아가거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쓰레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치워간다고.
꼭 그런 곳으로 가야겠니? 시내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는 곳으로. 교통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듣기로는 그 아파트에 반의반도 입주세대가 안 찼다고 하더라. 대학 내내 혼자 살았으면 이제라도 부모랑 같이 살면 좀 좋아. 고집 좀 그만 부리고.
난 아직 보도블록이 깔리지 않은 길을 따라 엄마의 목소리를 밟으면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다. 608호 우체통에는 편지가 꽂혀있다. 하나도 빠짐없이 광고전단지가 빽빽하게 꽂혀있는 우체통 사이에 그 편지는 유난히 눈에 띈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건가. 난 누구도 빼가지 않은 광고전단지를 바라보다가 편지만 빼들고 간다. 편지는 입구가 단단하게 붙여져 있다.
엘리베이터는 유난히 더디게 내려온다. 9층에서 내려오는 동안 복도의 센서등은 세 번 꺼졌다가 켜졌다. 센서등이 꺼질 때마다 난 허공에 팔을 휘젓는다. 마치 여기 사람 있어요, 라고 외치는 것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그 안에는 생뚱맞게 강아지를 안고 있는 여자 하나가 타고 있다. 파마를 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강아지의 몸에 살짝 닿아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종의 강아지는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난 나도 모르게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잠든 모습이 참 귀엽네요. 이 강아지 무슨 종이에요?”
“만지지 말아요. 잠든 게 아니라 죽은 거니까.”
여자는 밖으로 나간다. 한 쪽 손에는 작은 모종삽이 들려져있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다시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다시 팔을 휘젓는다면 센서등은 다시 켜질까.
열쇠구멍을 한주철물점 광고스티커가 막고 있다. 나는 그것을 떼어 문 앞에 붙여진 중국집 광고전단지와 함께 구겨버린다.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면 온통 검은 짐승들이 는적는적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불을 켜면 집 안은 깨끗하다기 보다는 비어있다. 이사 오던 날 가구를 옮기는 도중 서랍이 안 열리도록 하기 위해 붙였던 박스테이프도 아직 그대로이다. 장식장 아래에는 아직까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할 것이다. 열 두 평 남짓한 공간에는 특별히 가구라고 할 것도 없다. 오늘따라 그림하나 없는 벽면에 소름이 돋는다. 연두색 카디건을 벗어 앙상한 빨래건조대에 던져 놓는다. 빨래건조대에는 잎이 피어난 것 같다. 짧은 통로를 따라 좁은 주방 안으로 들어간다. 가구점을 하시는 엄마 친구 분께서 사주신 2인용 식탁이 아버지처럼 쓸쓸해 보인다. 주방에는 식탁을 들여놓자 더 이상 뭘 들여놓을 공간이 없었다. 나는 늘 발코니 쪽 의자에 앉는다. 거기에 앉아서 고개를 살짝 내밀면 거실 겸 안방이 보인다. 텔레비전을 문이 바로 마주보는 쪽에 놓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본 적은 아직 없다. 언젠가는 고개를 살짝 내밀면 텔레비전 대신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 얼굴이 상호와 비슷했으면 좋겠다.
물을 올려놓는다. 뒤집어져 있는 꽃무늬 컵을 똑바로 세워놓고 커피 한 봉지를 털어 넣는다. 설탕조절부분 이라고 써진 곳을 잘라 설탕을 모조리 털어 넣고서도 난 한 스푼의 설탕을 더 넣는다. 물이 끊는 동안 난 전자레인지를 들여 놓을만한 공간을 찾아본다. 역시 전자레인지는 무리야. 컵의 반쯤 뜨거운 물을 붓고 아주 오랫동안 해왔던 일처럼 발코니에 나간다. 창문에는 아직 방충망이 없다. 방충망 시공업체에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다. 뭐 아직은 봄이니까. 커피 잔을 세탁기 위에 올려놓고 난 창문을 연다.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창문이 열린다. 찬바람이 순식간에 얼굴 전체를 덮는다. 휑한 발코니를 보면서 엄마가 가져가라던 행운목을 가져올 걸, 하는 후회가 든다. 그리고 시선을 곧게 뻗어나가다가 끄트머리에 이른다. 어제 같았으면 목이 꺾여 있었을 내 그림자가 오늘은 곧게 뻗어있다. 점점 가까이 가본다. 그림자는 점점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여기 분명 벽이 있었는데. 나는 아무 것도 없이 깔끔하게 이어진 바닥을 큰 걸음으로 뛰어넘는다. 마치 이국으로 단번에 들어서 듯.
“…어떻게 된 거야?”
“왔어? 보고 있는 그대로야.”
“……진혁 오빠.”
“아까 낮에 인테리어 하는 친구가 인부들이랑 다녀갔어. 그리 오래 걸리진 않더라고. 이런 공사는 요즘 흔히들 한다고 하더라. 들어와.”
진혁 오빠는 줄무늬 팬티 속에 넣고 있던 오른손을 꺼내어 내 손목을 힘껏 잡는다. 오빠의 손이 끈끈하게 달라붙는다.
여기나 내가 살고 있는 집이나 똑같을 것이다. 똑같은 구조일 텐데. 느낌이 전혀 다르다. 복잡한 미로 속을 걷는 느낌이다. 한 가지 똑같은 점은 이곳도 불을 끄면 검은 짐승이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 그러나 그 짐승이 이번에는 더 사납다. 진혁 오빠는 벌써부터 내 위에 있다. 나는 천장 위에 제멋대로 붙어있는 야광별을 바라본다. 손가락으로는 견고한 그의 몸을 찔러본다. 손가락 끝으로 엷은 울음소리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는 놓아주었던 내 손목을 다시 잡고 아래쪽으로 이끌어낸다. 더 끈끈한 그의 성기가 가득 잡힌다. 아주 단단하다. 그 사이 그는 천천히 내 옷을 벗겨 내리기 시작한다. 내 셔츠를 완전히 벗겨 내리지도 못한 채로 그는 내 가슴을 쓰다듬듯이 핥아 댄다. 그는 팬티 안에 있는 내 손을 거두고 팔을 벌리게 한다. 그리고 겨드랑이 사이로 무릎을 끼워 넣는다. 무릎을 꿇은 그대로 그는 팬티를 내린다. 곧 벽을 집고 다시 천천히 앞으로 넘어지기 시작한다. 난 고개를 뒤로 젖혀보려고 했지만 그의 한쪽 손이 이미 내 뒷머리를 꽉 잡고 있다. 입술을 틀어지고야 만다. 커피 향이 채 가시지 않은 입안에 그의 성기가 가득 차오른다. 난 나도 모르는 사이 혓바닥으로 그의 성기를 쓸어내린다. 다시 그의 손이 가슴으로 간다. 결국 난 스스로 브레이지어 끈을 푼다. 이제 견고한 그의 몸을 손에 넣으려 해도 팔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나는 마치 묶여있는 것 같다. 비린내가 나기 시작한다. 그 사이 난 야광별에 꽂혀있는 시선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너 상호란 사람한테 또 편지 왔더라.”
“…응. 알고 있어.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인데 다시 만나자고 자꾸 편지를 보내네.”
“너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냐?”
내 몸은 가느다란 떨림을 멈추질 않고 있지만 옷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이제 그만 가. 진혁 오빠의 음성이 꼭 동굴 속 같다.
그래도 바로 옆에 진혁이가 살고 있어 얼마나 다행이냐? 그나마 마음이 좀 놓인다. 엄마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난 집에서 나와 혼자 살 수 있었다.
세탁기 위에 올려놓은 커피는 이제 다 식어버렸겠지.
*
“은행나무 밖에 없습니다.”
무심코 창밖에 서서, 마주하고 있는 두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슈퍼바이저가 다가와 말했다. 은행나무 밖에 없다고. 환자들이 시간의 개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창 밖의 은행나무 밖에 없다고. 그들은 처음 여기에 왔을 때의 은행나무 모습을 대부분 기억한다고 했다. 정원에서 가장 큰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 나무의 모습을 기억했다가 은행나무의 모습이 다시 그렇게 바뀌면 1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새싹이 돋아나고 짙푸른 은행잎들이 미술치료실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고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하늘을 가득 메워내고 결국엔 앙상한 나뭇가지가 허공에 균열을 만들다가 그 끝에서부터 다시 싹이 트고. 난 이제 오톨도톨하게 올라오는 은행나무 잎을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기억한다.
“그럼 가을에는 열매도 열리겠네요.”
“아뇨. 두 그루 다 수나무라서 열매는 열리지 않습니다. 관리인이 한쪽 수나무에 암나무의 새가지를 여러 개 접목하여 암나무화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야말았죠.”
“아, 그렇군요. ……현락씨.”
그는 어제 숙직실에서 그림을 정리하면서 밤을 새고 있을 때 은행나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예로부터 은행나무는 잎이 싹트는 모양에 따라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고 나무가 밤에 울면 그 마을에 재앙이 온다는 말과 함께 그는 말꼬리를 내렸다.
은행나무.
어느 날인가 현락씨는 내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더니 나와 환자만 남겨두고 사라져버린 일이 있었다. 은행나무. 나는 멍하게 환자들의 눈빛을 피한 채 서있었다. 현락씨는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저희 치료실에서는 은행나무라고 합니다. 어떤 치료실에서는 장미라고도 하고.”
“응급상황을 그렇게들 부르는군요.”
치료실에 있다 보면 일주일에 두어 번은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고 한다. 환자가 갑자기 발작 증세를 보인다거나 자살소동을 벌인다든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하든지. 이렇게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목격한 치료사가 프론트로 연락을 하고 그곳에서는 8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은행나무 팀의 비상호출기로 연락을 하게 된다. 은행나무 팀은 두 명 정도의 남자 치료사와 말로 진정시키는 치료사 한 명, 간호사 한 명 그리고 발작을 일으킨 환자가 속해있는 그룹을 진정시키는 치료사 한 명, 입원 병동이나 시설에 연락을 취하는 치료사 한 명, 끝으로 전체를 관리하는 책임자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난 다음 주부터 은행나무 팀에서 연락을 취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환자들에게는 은행나무라는 말이 그나마 안정적이라고 한다. 다른 말들은 환자들을 자극시킬 수 있지만 은행나무는 그들에게 막연한 편안함을 주었다. 현락씨는 첫 날에 가장 마지막 책상에 앉았던 소년이 은행나무를 제일 자주 외치게 한다고 했다.
아침 중으로 재료를 준비해야 해서 나는 현락씨와 함께 화방에 들렀다. 미술치료실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그와 아주 멀리 떠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기어이 나는 건널목을 건널 때 어젯밤처럼 큰 걸음으로 마지막 선을 뛰어넘는다. 이른 아침의 시내라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하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도 많이 눈에 띈다. 봄치고는 꽤 쌀쌀한 아침이다. 나는 오른손으로 천천히 팔을 쓸어내린다. 얇은 셔츠 안의 팔에는 은행나무 새싹처럼 오톨도톨하게 소름이 돋아나 있을 것이다.
대학 합격자 명단이 촘촘하게 새겨진 어느 미술학원의 광고포스터를 따라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화방 안은 그나마 좀 따뜻했다.
“사람들은 가끔 참 말도 안 되는 하찮은 이유로 사랑에 빠지기도 해요.”
“그런데 그 소년은 정말 이혼 때문에 우울증이 찾아온 건가요?”
“부모의 말에 의하면 당뇨병에 걸린 할머니 때문이래요. 어릴 때부터 유난히 단 것을 좋아했는데 당뇨병에 걸린 할머니를 보고서 달콤하다는 것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답니다. 그 순간 입 속에 있는 사탕 때문에 혀가 베이고 그때부터 우울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데요. 끝까지 이혼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됐다고는 얘기하지 않더군요.”
“부모 말이 맞다면 사탕에 혀를 베어서……, 조금 우스운 이유네요.”
“그래도 아무 이유 없이 그러는 것보다는 좀 낫겠죠.”
재료를 고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노인들에게는 쓰기 쉬운 마카나 크레파스가 좋고 붓은 예민한 환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고. 현락씨의 말을 주워 삼키면서 나는 몸을 옆으로 세워 좁은 통로를 돌아다녔다. 찰흙을 집어 들다가 갈라진 틈이 생각나 좀 더 부드러운 점토를 찾았다.
“윤주씨도 예전에 미술치료를 받아본 적이 있죠?”
“아, 예…….”
“…이제 그만 갑시다. 오후엔 병원 복도에 그림을 걸어놓아야 하니까.”
그림을 걸어놓는 일은 환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준다. 자기 그림이 어딘가에 걸린다는 기분. 그래서 아주 혐오스러운 그림이 아니라면 치료실 복도에는 환자들의 그림이 거의 모두 걸린다. 유난히 화려한 액자 속에.
“참, 윤주씨.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나는 못들은 체하고 복잡하게 얽혀진 시내로 빠르게 스며든다. 아까와는 달리 거리는 붐비고 난 얇은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오늘은 얼마 전 치료실을 떠난 한 여자의 가슴 석고상도 놓일 것이다. 그녀는 유방암 수술을 받기 전에 가슴을 석고상으로 뜨고 싶다고 했었다. 그 석고상 밑에는 그녀의 서툰 글씨도 함께 새겨져있다. 몇 년 동안은 써보지 않은 듯한 글씨.
「사랑하는 내 가슴이여, 안녕.」
*
몸에는 아직 날카로운 소독약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왔다. 인슐린 주사를 놓는 위치가 그려진 종이 위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 주사를 맞을 때마다 아버지의 어깨에, 허벅지에 선명한 선이 그어졌다. 진한 글씨로 같은 자리에 주사하면 절대 안 된다고 써져있다. 엄마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꺼지면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어 텔레비전에 넣는 일을 반복하고 계셨다. 텔레비전은 동전을 넣어야만 나왔다. 옆 침대에서는 간병인이 노인의 가래를 뽑아내고 있었다. 지저분한 소리가 여섯 명이 있는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노인은 가끔 몸을 뒤척이기만 했다. 간병인은 침대 시트를 크게 걷어낸다.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리고 빠르게 노인의 환자복을 벗겨낸다. 이제 탁자 위에 엷은 분홍빛 타월로 천천히 뿌연 몸을 닦아내기 시작한다.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같이 벗겨내자 노인의 성기가 드러난다. 노인은 다시 몸을 뒤척인다. 그 사이 간호사 하나가 들어오려다 말고 다시 문을 닫는다. 사타구니를 닦아낼 때마다 노인의 성기가 간병인의 손등에 부딪힌다. 그 손길을 따라 힘없이 성기가 흔들린다. 간병인은 마른기침을 여러 번 뱉어내고 그대로 타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창으로 걸러져서 쏟아지는 불투명한 햇살이 노인의 벌거벗은 몸을 그대로 비춰낸다. 몸은 여기저기 울긋불긋 달아올라 있다. 천장을 향하고 있는 노인의 눈 속이 깊어지는 듯하다. 나는 계속 노인을 쳐다보고 있다.
“네 엄마가 수의는 벌써 준비해 뒀다는구나. 장기도… 기증하기로 했다.”
아버지의 낡은 음성이 병원 바닥에 잘게 부수어진다. 엄마는 아직도 꼿꼿하게 텔레비전을 보신다. 암사자 한 마리가 얼룩말의 넓적다리를 무는 장면에서 다시 텔레비전이 꺼진다. 화면은 아득하게 멀어진다. 엄마는 다시 동전을 넣지 않으신다.
“윤주 와있었구나. 마침 잘 됐네.”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작은 엄마가 들어왔다. 한 손에는 음료수 한 상자가 들려있다. 난 선반 아래 가득 꽂혀져 있는 똑같은 음료수를 생각한다. 일어나려던 내 앞에 작은 엄마가 바짝 다가와 앉는다. 눈에 보이는 듯한 독한 향수 냄새가 콧속을 뭉기적거린다.
“우리 윤진이가 요즘 무슨 일이 있나봐. 밥도 통 안 먹고, 말도 잘 안하고. 왜 걔가 어려서부터 좀 특출 난 데가 있잖니. 공부도 곧잘 하고. 그래서 내가 학교에서 윤진이가 그린 그림을 가져왔는데 좀 봐줄래? 얘가 요즘 왜 이러는 건지.”
줄무늬가 세세하게 새겨진 핸드백에서 작은 엄마는 그림 한 장을 꺼내신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을 텐데, 그림솜씨가 형편없다. 그 아이가 못하는 것도 다 있구나. 나는 건성으로 그림을 바라본다. 서툰 풍경화였다.
“직접 윤진이한테 물어보세요. 왜 그러냐고. 그러시면 되잖아요. 그럼 전 가볼게요.”
서둘러 병원 안을 빠져나온다.
넌 정말 매력적이야. 다른 남자들은 아니라고 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 매일 밤마다 너의 얼굴이 떠올라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너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아. 제발 한 번만 만나주면 안되겠니?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 사랑해.
이제 다 지워져버린 개나리를 보며 상호가.
집에 들어오면서 난 유난히 단단하게 입구를 봉한 편지를 뜯고 읽는다. 아마 상호는 밤에 편지를 쓰고 다시 한 번 읽어보지도 않고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카디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데 발코니 쪽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아닌데요, 라고 낮게 읊조리는 진혁 오빠의 말이 들려온다. 카디건에는 아직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배어있다. 난 순간 몸서리를 치며 카디건을 벗고 있는데 이번에는 현관문 쪽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인터폰을 들고 난 지금까지 듣지 못한 낯선 목소리를 상상한다. 누구세요?
“여기가 김영남 씨 댁 맞나요?”
“아뇨, 아닌데요.”
아주 여린 목소리에 살짝 울음이 묻어난다. 난 달려 나가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언젠가 현관문 가득 붙여진 광고 전단지를 보며 언젠가는 그것이 붙여지는 순간 문을 열어젖히고 놀란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쳐다볼 것이라는 욕망으로. 개나리 유치원 이름이 새겨진 노란 가방을 맨 조그마한 여자아이는 이제 609호의 초인종을 누르려고 까치발을 한다. 땋아 내린 머리가 많이 흐트러져 있다.
“꼬마야. 너 왜 장난치니?”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집이 어딘지 까먹어서 하나씩 눌러보고 있는 중이란 말이에요. 이 중에 우리 집이 있어요.”
아이는 다시 초인종을 누르고 묻는다. 여기가 김영남씨 댁이 맞느냐고.
반쯤 벗어 내린 카디건을 완전히 벗고 다시 발코니로 나간다. 아마 한동안은 이곳에 행운목 같은 화분은 들어서지 않겠지. 행운목을 놓으리라고 생각했던 자리를 피해서 끄트머리로 가, 난 큰 걸음을 한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아버지한테.”
“너 또 편지 왔더라.”
진혁오빠는 고집스러워 보이는 나무색 소파에 앉아 신문을 내리지 않고 말한다. 팬티만 입고 있는 그의 몸은 언제나 단단한 기계 같다. 신문지를 아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탁자 위에 내려놓는 손길이 딱딱 끊어지는 듯하다. 발코니 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어느새 잔뜩 흐려져 있다. 금세 여기저기 잿빛무늬가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오빠는 내게 걸어오고 있다. 은행나무. 은행나무. 나는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오빠는 언제나 알 수 없이 지저분한 감정을 흘리고 다닌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마치 몇 년은 알고 지낸 듯한 사람처럼 대하는 태도. 일상적인 관계에서는 문제될 게 없지만 그것이 사랑이라면 다르다.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사랑을 느끼고 충분히 섹스를 할 것이다. 오빠는 혼자 자라 와서, 외로워서 그런다고 자주 말한다. 그리고는 너한테만 이러는 거야, 라는 식의 말로 사람을 안심시키며 다시 애정결핍을 들먹거린다. 하지만 난 오빠가 혼자 자라왔단 것을 알면서도 어쩌면 혼자서 자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혼자 지내온 시간이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유 없이 흘리는 그 지저분한 애정이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견디기 어려운 상처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구걸하는 것 같아. 제발 나 좀 사랑해달라고. 다리를 벌리고 당신에게 구걸하는 것 같아.
“상호라는 녀석은 누군데 자꾸 너한테 이상한 편지 보내는 거야?”
“이상한 편지라니. 모르겠어.”
“이리 좀 와봐.”
“싫어. 치료실에 나가 봐야해. 집 안에 혼자 있는 것도 답답하고.”
진혁 오빠의 손이 내 손목을 잡기 전에 난 뒤로 물러난다. 지금은 불을 끈다고 해도 야광별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빠는 혼자라는 말을 들었을까. 밖에는 스믈스믈 비가 내려앉기 시작한다.
*
“윤주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비도 오는데.”
“그냥 집에 있기 답답해서 나와 봤어요. 그림 거는 일도 도와드릴 겸해서.”
“나 보고 싶어서 나온 건 아니고요?”
“…그런 것도 있고요.”
데칼코마니를 한 그림들이 마치 시체인 양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난 발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건너가려다가 젖은 머리를 만져보고는 내딛으려던 걸음을 거두어낸다. 화장실에 수건이 있을 거야. 나를 보고 있었는지 현락씨가 눈가에 잔주름을 만들며 말한다. 시리도록 하얀 복도를 걷는다. 복도에 걸려있던 액자는 모두 비어있다. 한쪽으로 붙어 서서 밋밋한 벽을 손으로 집어가며 조심스럽게 걷는다. 화장실 안은 세 번째 칸을 빼고는 문이 활짝 열려있다. 바닥이 말라있지 않고 흠뻑 젖어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누군가가 청소를 한 모양이다.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선다. 난 테두리에 조밀하게 맺혀있는 물방울을 보면서 여기까지 비가 내렸는지 생각해본다. 물을 틀자 거울에 맺힌 물방울들이 하나 둘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난 좀 더 세게 물을 튼다. 그리고 새겨진 비누 이름이 아직 남아있는 비누로 손을 가득 감싸 쥔다. 비누는 미끄러지지 않고 손안에 머문다. 금방 손에 가득 하얀 거품이 생긴다. 손금까지 꼼꼼하게 거품이 들어찬다. 그리고 잠시 나를 바라본다.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자세히 바라본다. 쌍꺼풀이 없는 내 눈 속에는 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손을 씻을 때 난 일부러 거칠게 비벼댄다. 울긋불긋 달아오른 손을 아버지가 머물러있는 병원에서 본 타월과 똑같은 빛깔의 타월로 닦는다. 바싹 말라있던 타월에 얼룩이 생겨났다.
세 번째 칸에서 나온 것은 그 소년이다. 눈매가 뾰족하다는 것만 기억되던. 물소리에 소년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스며든다. 소년은 나를 쳐다보면서 나간다. 그리고 나도 곧 소년을 뒤따라 나간다.
“선생님은 내 이름 알아요?”
“아니, 아직…”
“난 선생님 이름 아는데… 윤주……. 선생님,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요.”
내 이름이 불려지자 난 잠시 놀랐다. 소년은 팔을 걷어붙이고 손을 어항 속에 넣는다.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손은 금붕어와 부딪힌다. 화장실 앞에 놓인 어항 속에 있던 금붕어들의 움직임이 급해진다. 공기방울이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갈 시간도 없어 보인다. 정말 힘이 없어요. 소년은 계속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물은 점점 흐려져 간다. 물레방아가 쓰러지고 자갈 밑에 깔아두었던 하얀 솜이 드러났다. 소년은 금붕어를 움켜쥐려는 것 같지만 금붕어는 쉽게 잡혀지지 않는다. 다른 한 쪽 손을 마저 어항 속에 낳으려는 소년을 간신히 막았다. 소년의 손이 끈적하다. 내 손목을 잡던 진혁오빠의 손과 비슷하다. 소년은 그제야 다시 나를 쳐다본다.
“누가 내 옷을 벗긴다고 해도, 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 할 거예요.”
기어이 금붕어 한 마리를 손에 쥐었다. 빨간 비늘이 고운 금붕어는 지쳤는지 물에서 꺼냈는데도 가만히 있는다.
난 소년의 손을 좀 더 세게 잡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미술치료실 안으로 이끌어낸다. 불이 꺼진 안에는 창가의 쇠창살 틈으로 쉴 새 없이 빗소리가 파고들고 있다. 이제 소년의 얼굴이 희미하게 윤곽만 잡힌다. 달려오는 게 힘들었는지 숨이 서로 거칠다. 나는 마치 미끼를 던지는 것처럼 뒤에 잡고 있던 소년의 손을 이끌어 내던진다. 넓은 책상 위에 누워있는 소년이 점점 드러난다. 난 그 위로 올라가 벌어진 소년의 팔 사이에 무릎을 끼워 넣고 앉는다. 허벅지 끝쯤 소년의 단단해진 성기가 느껴진다. 줄무늬 남방의 단추를 하나씩 뜯어내듯이 풀어낸다. 그러나 난 단 두 개의 단추만을 풀어내다가 소년의 입술에 입을 가져가 댄다. 강렬한 차가움이 순식간에 몸속에 빠져든다. 이미 단추는 한꺼번에 다 풀어져있다. 안의 셔츠를 걷어 올리고 부드러운 소년의 배와 갈비뼈를 하나씩 쓰다듬는다. 조금 더 깊숙이 누른다면 부수어질 것만 같다. 굳이 깊이 찔러보지 않아도 여린 떨림은 이미 밖으로 나와 있다. 소년은 가슴을 핥을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마치 어딘가에 단단히 묶여있는 것 같다. 소년의 손을 내 가슴속으로 들이민다. 수줍게 움직이는 손이 간지럽다. 난 허벅지를 들어 무릎을 뒤로 하고 소년의 바지를 벗겨 내린다. 쉽게 벗겨지는 바지 안의 팬티는 묘하게 끈적거린다. 끝을 잡고 천천히 벗겨 내리자 성기가 불쑥 올라온다. 아직 성숙되지 않아 음모도 듬성듬성 나있다. 끈적한 성기를 꼼꼼히 핥다가 입 속에 넣는다. 소년의 입술에서 얇은 소리가 새어나온다. 비린내는 맡아지지 않는다. 이제 그만 가. 난 낮게 중얼거리며 동굴 같은 음성을 내뱉는다.
마치 진혁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 그래, 당신. 언젠가는 당신에게서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했어. 근데 왜 그게 안 되지? 당신 앞에서는 내가 짐승 같아. 견딜 수도 없이. 더러운 짐승같이, 그렇게 느껴져. 그런대도 내가 당신 옆에 있어야만 해? 사랑? 아니잖아. 그런 거 아니잖아. 동그라미를 그려내듯이 이어지는 섹스. 어떤 날에는 교통사고 사망자 명단에 당신의 이름이라도 나오면…… 난 행복했어. 분명 당신이 아닐 텐데. 누군가가 내 삶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아. 지겨워. 당신. 그래, 당신.
은행나무! 은행나무!
밤새 내린 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친 모양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사방에서 은행나무를 속삭였다. 미술치료실 안은 그대로였다. 그림이 차있는 액자들이 복도에 걸려있다. 현락씨가 다가와 급히 내게 말한다.
“윤주씨, 어서 경찰이랑 여기저기 연락을 해놔요.”
지난밤에 소년은 여자화장실에서 자살을 했다. 경찰들이 몰려와 수근거렸다. 독하게 죽었다고. 진짜 죽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목을 매어 자살하는 사람들은 사실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했다. 목을 옭아매는 고통이 극도에 다다랐을 때 사람들은 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나 소년은 다리만 뻗으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굽었던 다리만 펴면 바닥에 닿는데. 고통이 가득 찰 때까지 다리를 펴지 않았다. 우울증 환자는 보통 우울증이 거의 회복될 때 자살을 시도한다. 우울증일 때에는 자살조차 하기 힘겨우니까. 소년은 자살을 했다. 나는 할 수 없는.
“혹시 이번 사건에 대해 아시는 점이나 의심 가는 부분이 있습니까? 이상한 점이라던가…….”
“아뇨, 없습니다. 전혀.”
*
오늘은 견뎌내고, 다시 내일은 견뎌낸다면… 이듬해 봄도 견뎌낼 수 있겠지.
어느 순간 나는 이제 모든 것이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난 아직 한주아파트 608호에 산다. 그 사이 아파트단지에는 깔끔하게 보도블록이 깔리고 쓰레기 배출량이 많아서 하루에 두 번씩 쓰레기차가 다녀간다. 새로 생긴 쇼핑타운에 병원이 들어서면서 약국에는 이제 더 이상 「의약분업예외지역」이라는 종이가 붙지 않았다. 가을쯤에는 앞에 초등학교가 하나 들어선다고 한다. 이제 저녁때 주차를 하려면 단지를 몇 바퀴 돌아야 겨우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쯤이면 상호이름의 편지가 한 통 더 올 것이다. 그때마다 진혁오빠는 뜯기 쉽게 살짝 붙여진 편지를 뜯어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단단하게 입구를 봉하고 편지함에 넣어놓은 후 내게 말할 것이다. 너 상호란 사람한테 또 편지 왔더라. 내 글씨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이제 더 이상 첫사랑이었던 상호에게 편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난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이 더는 없다. 상호란 이름으로 내가 내게 편지를 쓰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벌써 봄이 다 지나갔다니 좀 억울하지 않아? 난 발코니로 가면서 가만히 중얼거린다. 사랑은 뷔페 같았다.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에서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덜어 와야 했다.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약간의 음식만 덜어오기도 하고 욕심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음식을 가져오기도 한다. 부족할 땐 상관이 없지만 남겼을 땐 벌금을 내야한다. 어쩌면 벌금이 먹은 음식값보다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벌금을 내면 그 뿐이다. 세상에 뷔페는 도처에 널렸으니까.
미술치료실 자리에는 이제 공예강좌실이 새로 들어섰다. 지금쯤이면 은행나무 가지에는 오톨도톨 돌기처럼 새싹이 한 층 더 붉어져 잎새를 터뜨릴 것이다. 하지만 가을이 되어서도 두 은행나무 사이에는 은행이 열리지 않겠지.
꽃 진 자리
저는 마음에 드는데 그이는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남편이랑 아이랑 다시 올게요.
서른의 문턱을 넘는 발걸음과 마흔의 문턱을 넘는 발걸음은 전혀 다른 형태의 감정을 만들어 낸다. 서른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마흔이란 아주 더디게, 내가 아직까지 이 나이인 것이 지겨워질 때쯤 뿌연 그림자처럼 찾아올 줄 알았다. 이제 차츰 무뎌진 감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흔이란 것은 나에게 예전과는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다가와 무뎌진 감정을 날카롭게 만든다. 그러나 이 날카로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이에게도 나는 서른 살 어디쯤에 아직도 단단하게 묶여져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도 시어머니에게도 형님과 동서에게도 나는 그저 서른 후반쯤으로 밋밋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 날카로운 감정도 뭉뚝해져서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어느 날 갑자기 그이는 그런 말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벌써 마흔이란 말이야?
정교하게 짜여 진 식탁 위에는 투명한 유리가 정갈하게 깔려져있다. 식탁 한가운데에는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장미가 꽂혀있는 꽃바구니가 놓여 있다. 그이가 보면 당장 치우라고 격앙도니 음성을 낼 것이다. 입고 있는 검은 치마를 한 번 쓸어내리고 식탁의자에 조심스레 앉는다. 금색 테가 둘러져있는 찻잔은 비어있다. 커피메이커 안도 역시 비어있다. 천장에는 촛불처럼 솟은 전등이 빵을 구울 때와 같은 연한 갈색을 띈다. 그이는 전등 빛이 닿은 내 손이라면 쓰다듬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스오븐레인지 위에는 큰 냄비가 뚜껑을 비스듬히 연 채로 올려 있다. 냄비 안도, 차갑지 않은 냉장고 안도 비어있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누군가가 열어볼 줄 몰랐던 것처럼. 그이와 아이는 오늘 저녁 반찬에 뭐가 나올지 궁금해 할 것이다. 저는 마음에 드는데 그이는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화장실 바닥에는 물때하나 끼어있지 않다. 꽃이 새겨져 있는 세면대 안에는 투명한 유리구슬이 한 움큼 들어있다. 수도꼭지를 틀어보지만 물은 안 나오고 마른 공기만 피식 새어나온다. 저 구슬은 오래 전 물방울이 화석처럼 굳어진 것일까. 아이는 세면대 위에 새겨진 꽃무늬를 계집 아이 같다며 지우고 싶어 할 것이다. 세면대 위에는 외제향수가 가득 차 있고 뒤에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수건이 흐트러짐 없이 걸려있다. 욕조 앞에는 통유리가 있고 하얀 커튼이 끝까지 밀려나와 있다. 욕조 안에는 아무도 없는데 마치 누군가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바깥에는 실내화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안마형 샤워기. 시어머니께서 좋아하실 만한 욕실이다. 나중에 남편이랑 아이랑 다시 올게요.
가구는 모두 한꺼번에 마련한 듯 일정하다. 액자형 텔레비전이 걸린 맞은편에는 방금 누군가가 앉았는지 구김이 잔뜩 내려앉은 소파가 있다. 그 옆으로 베란다가 나 있지만 앞은 벽에 막혀있다. 액자에는 가족사진 하나 없이 그림들만 걸려있다. 그림만 보아서는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을 상상하기 힘들다. 이 집은 빨래 하나 걸려있지 않고 더렵혀진 접시 하나 없는 곳이다. 잠시 손과 앞이 막혀있는 실내화를 신은 발이 시려온다.
“사모님 또 오셨네요.”
“…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런 기회 이젠 정말 없습니다. 아까운 기회예요. 터미널이랑 역이랑 가까운 것은 물론이고, 최신식 시설을 갖춘 C초등학교와 명문으로 소문난 N중학교와도 가까워요. 자녀분이 충분히 걸어서 통학할만한 거리죠. 거기에 애들 집어넣으려고 부모님들께서 안달이시잖아요. 여기에 입주하시면 아주 유리한 조건에 놓이게 되죠. 거의 간다고 봐도 무관합니다. 대형할인마트에 조각공원까지 옆에 있는데 뭘 망설이세요? 이번 기회 놓치시면 정말 두고두고 후회하실 겁니다. 뭐 저희 건설이야 워낙에 유명하니 모르실 리 없을 테고. 오늘 이렇게 나오신 김에 계약하고 가시죠. 36평형은 이제 거의 다 나가서 최상층이나 최하층밖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점점 크는 자녀 분 생각을 하신다면 넉넉하게 49평형 정도는 하셔 야죠.”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내게 따라붙는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소지품처럼 내게 매달려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마흔의 여자에게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생소한 것들이 많아진다. 난 이 감정을 느껴보려고 모델하우스 안에 있는 것일까. 그는 오렌지 주스를 한 손에 쥐어주며, 카탈로그를 펼쳐서 재봉틀 같은 음성을 계속 내뱉는다. 내게 모델하우스 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빠르게 다가온다. 저는 마음에 드는데 그이는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남편이랑 아이랑 다시 올게요. 저는 마음에 드는데…
“사모님 계약하시겠습니까?”
“아뇨, 됐어요. 저는 마음에 드는데…… 어차피 살 생각은 아예 없었어요. 그럴 형편도 안 되고. 그냥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하려고 왔어요. 수고하세요.”
아무 곳에나 주스 잔을 내려놓고 그물에서 벗어난 물고기처럼 서둘러 안을 빠져 나온다. 현관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가족들과 살짝 부딪힌다. 내 나이쯤으로 보이는 여자와 어깨를 마주칠 뻔하지만 그 여자는 유연하게 몸을 옆으로 튼다. 조심하셔야죠. 왠지 그 여자는 이 모델하우스와 어울려 보인다. 내게 따라 붙으며 설명을 늘어놓던 남자는 이제 그 여자에게 따라붙을 것이다. 찬 오렌지 주스 한 잔도 잊지 않겠지. 저 여자도 마흔 살을 넘는 문턱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새 36평형은 다 나갔는지 36평 모델하우스 입구에는 빨간 테두리가 둘러져있고 그 테두리 가운데에는 이미 분양이 끝났다고 써져 있다. 불이 꺼진 입구는 이제 하나의 구멍이 되어버린다. 모델하우스 문을 열자 더운 바람이 나를 덥석 안는다.
*
잎은 아직 매끈하다. 채 한 뼘도 자라지 않은 줄기도 아직 단단하지 못하다. 잎이 몇 장 더 나오고 줄기는 단단하게 굵어져 마디가 뚜렷하게 잡혀야할 것이다. 그리고 잎 가장자리도 톱니바퀴처럼 거칠어질 때쯤이면 서서히 꽃봉오리가 생길 것이다. 수돗가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다가 손가락 끝으로 물을 뿌린다. 그리고 남은 물을 기름진 흙 위에 고스란히 부어주고 화분을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옮겨놓는다. 줄기와 잎이 파르르 떨리면서 물이 튄다. 예전에 아이는 화초에 물을 주는 것을 참 좋아했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며 흙 속으로 물이 다 스며들 동안 화분을 바라보고 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으로 난 작은 공터에는 열 개 남짓한 화분들이 키를 맞추어 서있다. 2층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창고로 쓰기 위해 공터의 반을 사들이고 병원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병원 측에서 미관상 안 좋다는 이유로 담을 쌓아버리면 화분은 버려져야할 것이다. 그 전에 꽃이 피었으면 좋으련만. 병원 정원 쪽에서 매미의 긴 울음소리가 떨려온다. 부수어진 바닥의 콘크리트 조각을 쓸어내고,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찍혀진 도둑고양이 발자국이 그대로 굳어진 바닥을 밟아 기사식당 맞은편에 있는 2층 집 안으로 들어선다.
짙게 녹이 슬어있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다. 머리 위를 덮고 있는 천막이 처음에는 파란색이었는데 이제는 햇살이 그대로 비춰질 정도로 색이 바래져있다. 문은 한 번에 열리지 않는다. 녹이 손에 묻을까봐 살짝 쥔 손잡이를 그 위에 새겨진 무늬가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꽉 쥐고서 몇 번 더 힘을 주어야 문은 거친 신음소리와 함께 열린다. 집 안은 동굴 속 같다. 반투명 슬레이트 지붕으로 안개처럼 뿌옇게 햇살이 비친다. 길다랗게 이어진 방들이 분무기로 뿌린 것처럼 흐릿하다. 방은 세 개가 이어져있고 맨 끝 문은 부엌문이다. 그리고 부엌 옆으로는 예전에 연탄을 쌓아 놓았던 자리에 쓰레기봉투 하나가 반도 못 채워진 채로 앉아있다. 첫 번째 방은 수선 집이다. 아주 오랫동안 수선을 해온 것을 매번 강조하던 여자가 앉아 있을 것이다. 문에 귀를 대고 있으면 귓속으로 재봉틀 소리가 착착 한 겹씩 감겨온다. 두 번째 방에는 치킨박스가 가득 있을 것이다. 아래층에서 통닭집을 하는 부부가 창고로 쓰기도 하고 가끔 둘이 교대로 낮잠도 자는 방이다. 저 방에서 둘이 함께 잠을 잔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방과 부엌이 나와 남편과 아이가 쓰는 방이다.
문 바로 아래에 복도의 반쯤을 차지하고 있는 수돗가를 빗겨서 발을 내딛는다. 수도관에는 지난겨울, 얼까봐 감아두었던 스펀지가 그대로 감겨있다. 스펀지는 많이 뜯겨져있다. 다시 겨울이 찾아온다면 새로 스펀지를 입혀야할 것이다. 첫 번째 방과 두 번째 방 사이에는 보일러가 놓여 있고 두 번째 방과 마지막 방 사이에는 커다란 신발장이 놓여 있다. 신발장 안에는 신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축구공이나 접히지 않는 우산 같은 것도 함께 들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방과 부엌 사이에는 가스통이 놓여 있다. 비가 내릴 때마다 지붕 사이로 벽을 타고 벌레처럼 내려오던 빗물은 복도에 긴 웅덩이를 만들어낸다. 웅덩이는 쓸어내도 다음 날이면 다시 생겨났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도 벽을 타고 벌레처럼 빗물이 내려와 웅덩이를 만든다. 별안간 슬레이트 지붕 위로 후두둑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간다. 고양이 그림자는 복도 끝까지 이어진다. 창문이 없는 벽을 어깨로 쓰다듬지 않으려고 몸을 빗겨 복도를 지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다. 첫 번째 방 문 앞에는 양장점 여자의 검은 슬리퍼가, 두 번째 방 문 앞에는 통닭 집 남자의 낡은 운동화가 놓여 있다. 그리고 유난히 색이 바랜 마지막 방 문 앞에는 누구의 신발도 놓여 있지 않다. 오래 전 이사 오던 날, 방에 반이나 차지하는 큰 농을 들여놓느라 벽에 생긴 깊은 생채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장식이 없는 구두를 벗어 신발장 안쪽 깊숙이 넣어놓고 방안으로 들어선다. 양장점 여자는 아직 구두가 없어진 줄 모르는 것 같다. 그녀의 발은 나보다 한 치수 작았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발을 오므리고 있었다. 구두를 벗고도 발은 한동안 곧게 펴지질 않는다. 문을 닫자 양장점 집 여자의 재봉틀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두 손으로 가려질 창문을 연다. 창문을 열어도 바람은 들어오지 못한 채로 부러지는 것 같고 병원 앞 주차장에서 들리는 지저분한 차 소리만이 들어와 방안에 번지기 시작한다. 방 한가운데에 있던 형광등은 큰 농이 들어서자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 누군가가 형광등에 대해서 얘기했을 때는 그이도 나도 원래 형광등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차츰 그이도 나도 좁은 방 한쪽으로 형광등이 치우쳐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보 형광등이 왜 이렇게 천장 구석에 매달려있지? 글쎄요. 처음부터 그랬잖아요. 아… 그랬나? 떨어진 사탕주변에 까맣게 모여든 개미들처럼 액자 속에는 빈틈없이 사진이 꽂혀져 있다. 전체가 드러난 사진은 한 장도 없어 보인다. 어떤 사진이든 조금씩 한 부분이 가려져 있다. 화장대와 4단 짜리 서랍장을 놓자 방안에는 더 이상 뭘 놓을 수가 없었다. 서랍장 모서리와 농문이 맞물려 서랍장 모서리는 하얀 속살을 오랫동안 드러내고 있다. 그 사이에 껴있는 아이의 공부책상은 다리를 접힌 채 농 문이 열릴 때나 가끔 덜그럭 소리를 낸다. 세 평 남짓한 이런 방에서는 세 평짜리 행복밖에는 느껴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던 그이였다. 지금 내 감정은 그가 그어버린 선을 넘지 못하고 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마흔이란 남편을 ‘그’라는 남자로 부르기도 많이 껄끄러워질 수 있는 나이다.
기사식당 안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몇 겹으로 겹쳐져서 나온다. 나는 오래된 쟁반에 가득 반찬과 밥그릇을 얹고 복도 안을 빠져나간다. 손톱 끝으로 쟁반 가장자리가 긁히는 느낌이 날카롭게 베인다. 시선을 아래로 흘렸을 때 발이 안 보인다는 것은 오랫동안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가져다준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손톱은 자꾸 쟁반 끝을 긁어댄다. 두 번째 방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고 수선 집 여자의 방 앞에는 자장면 그릇이 신문지를 덮지도 않은 채로 그녀의 검은 슬리퍼 옆에 놓여 있다. 보일러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 다시 문을 연다. 문은 바깥에서 열 때와는 달리 깔끔하게 끝까지 열린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에 이제 난간은 없어졌다. 얼마 전까지 검은 테이프가 촘촘하게 감겨져있는 철제 난간이 있었다. 촘촘한 검은 테이프 사이로 녹슨 물이 흘러나올 때까지 건물 주인은 난간을 새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올해 봄에 사람들을 불러 난간을 뜯어냈다. 그러나 새로 난간을 만들지는 않았다. 주인은 이제 이 건물에서 난간이 없어서 계단을 무서워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정말 이제 아이는 난간 없이도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을까. 잡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나는 화분 앞에 생선조각을 놓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고양이는 생선만 집어먹고 화분들은 건들지 않을 것이다. 모종의 약속이다.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뒤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택시 운전기사들의 웅성거림을 듣게 된다. 그래도 내 걸음은 빨라지지 않는다.
“당신 밥할 때 딴 생각했지?”
“예? 아니… 왜요?”
“프라이가 왜 이리 밋밋해? 소금 대신 설탕 넣은 거 아냐?”
낮은 책장 위에 쟁반이 놓이고 그이는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좁은 가게 안에 빼곡하게 들어 차있는 작은 책장이나 장식장, 텔레비전 받침대, 문갑 따위들이 복잡한 미로를 만들었다. 가게 밖까지 늘어져 있는 이런 것들은 미로가 터져 새어나온 것 같다. 매일 쟁반이 놓이는 이 낮은 책장은 그이가 쟁반이 치워질 때마다 마른 걸레로 닦는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팔수는 없을 것이다. 난 잠시 수저를 들다말고 책장 안을 손으로 저어본다. 비어있다는 것이 눈으로 보일 때와 손에 아무 것도 잡혀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느껴질 때는 조금 다르다. 가게 안은 비어있는 책장들로 가득 차있다.
“미안해요. 제가 정신이 없었나 봐요.”
점점 그릇들이 지저분해지고 단단하게 마르기 시작한다. 그 사이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이 내 뒷목을 감았다가 끌었다가를 반복한다. 그이가 소리를 내며 부주의하게 물을 마시고 라디오가 켜지자 낡은 음성들이 쏟아져 나온다. 일어나서 장식장 옆으로 몸을 돌리자 그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아선 나의 모습도 그이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 이번 주말에 명숙이 딸 결혼식 가요.”
“뭐? 결혼식?”
물을 마시던 그이가 컵을 내려놓자마자 난 좁은 틈에 들이밀 듯이 말을 한다. 급히 쟁반을 쥐었을 때 다시 끝에서 느껴지는 금속의 날카로움에 잠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숨은그림찾기에서 이미 찾았던 것을 다시 바라보듯이 선명해진 문을 찾아서 가게 안에 책장들이, 장식장들이 만들어낸 미로를 헤맨다. 낮에도 불을 켜야만 하는 가게 안의 어두움은 매번 문을 나설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다. 라디오 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가게에서 나와 위층을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박스 하나가 위에 얹혀있는 것 같다. 그 박스를 까만 전깃줄이 그물처럼 끌어안고 있다. 올라가는 계단은 여섯 개의 가게들 한가운데에 구멍처럼 나있다. 빨간 돼지저금통 몇 십 개가 묶여 꽃처럼 문방구 앞에 달려있다. 계단 바로 옆에 있는 통닭집을 지날 때면 요란한 환풍기 소리와 함께 누런 기름 냄새가 다가온다. 처음에는 투명했던 창이 이제는 닭을 튀기는 남자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누가 본다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줄 알 것 같다. 환풍기 앞에는 검은 그을음이 딱딱하게 윤기를 내고 있다. 계단 오른 편으로 나있는 스포츠기구 상설 할인 매장은 며칠 동안 문을 닫고 있다. 들어가는 문 앞에는 주인의 핸드폰 번호와 함께 조그마한 글씨가 얇게 써져있다. 점포 세 줌. 아래에 붙인 테이프는 벌써 떨어지고 주름이 잡힌 위쪽 테이프만 간신히 종이를 잡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위태롭다. 첫 번째 계단 옆으로는 공동화장실이 나있다. 견고한 철문으로 닫혀져 얼마 전부터 자물쇠를 채워놓고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열쇠를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누군가의 변이 화장실에 그대로 있고 나서부터였다. 화장실에는 물이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수돗물을 받아서 써야한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화장실을 썼다면 분명 기사식당 손님일거라고 수선집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기사식당 아줌마는 화장실을 가는 손님에겐 그런 일을 일일이 다 알려준다고 했다. 그리고 식당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얼마나 껄끄러운지 아냐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화장실 문 아래에 뚫린 구멍으로 잠시 서늘한 바람이 나와 내 발목을 스친다. 다행히 계단을 오르는 동안 식당에서 나오는 손님들과 마주치지는 않았다. 화분 앞에는 수도관을 감고 있는 스펀지보다 더 잘 뜯겨진 생선조각이 있다. 그새 화초는 더 커 보인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와 냉장고 위에 붙어있는 종이를 떼어 벽에다가 대고 적기 시작한다. 보험회사 이름이 흐리게 찍혀있는 종이는 다시 냉장고 위에 붙여진다.
18일 화요일 시아버지 제사준비, 20일 목요일 어머니회 참석, 화분에 하루 한 번 물 주기, 염색하기, 23일 일요일 명숙이 딸 결혼식 가기. 냉장고 위에 종이가 붙여져 있는 것을 그이도 아이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이와의 관계는 끊겼다. 어떤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 전에 그렇게 되어버렸다. 통닭 집 유리창처럼 어느 샌가 투명했던 창이 불투명해졌다. 월경일이 고르지 못하고 점점 끊어지기 시작하자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런 것들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물그림자가 비친 듯 엷게 주름이 잡혀가는 내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건조함이 손가락에 따라 붙는다. 나는 모레처럼 점점 건조해져 간다. 내 몸의 꽃도 건조함으로 딱딱해져 간다. 아래로 손을 가져가 긁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붉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손끝이 함께 붉어지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냄새가 차오른다. 다시 손을 아래로 가져가 살며시 부수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싸 쥔다. 거짓으로라도 날 사랑해야하는 그이가 지금 나를 쓰다듬는다고 해도 난 뒤돌아 누울 것이다. 나의 건조함이 그에게는 관계를 맺을 때 선인장 숲을 헤매고 다니는 감정을 전해줄 테니까.
아이는 들어오자마자 아이스크림부터 찾는다. 교복 뒤에 찍혀있는 땀자국이 아이의 뒷모습을 덥고 눅눅하게 만들어낸다. 아이의 입 주변이 거뭇거뭇해질 때마다 목 아래 돋아난 여드름과 커진 키를 볼 때마다 난 조심스러워진다. 선풍기를 가장 세게 틀어놓고 교복을 벗어 바람을 쐬는 아이의 등은 이제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신발이나 옷을 사러갈 때에도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제 아이는 난간이 없는 계단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나 옷 갈아입을게.”
“그래.”
“참, 이번 주 일요일에 엄마 친구 딸 결혼식이 있어서 집 비울 거야. 아빠도 가게일 하실 거고.”
“그러면 집에 나 혼자 있는 거야? 혼자 있기 싫은데. 이럴 땐 형이나 누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목요일에 있는 어머니회는 알지?”
난 밖에 서서 말을 하고 아이는 안에서 말을 한다. 서랍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난 방문을 연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관계는 아이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이가 혼자 자라긴 했지만 그것이 문제될 건 없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은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고 착실한 아이라고들 했다. 가끔 내가 혼자 자라는 것이 외롭지 않느냐고 물으면 단번에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하곤 했다. 아이에게 형이나 누나가 있었으면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을까.
아이가 나간 방은 먼지처럼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단지 선풍기를 가장 약한 바람으로 바꾸었을 뿐인데도. 일요일에 쓸까, 하고 카메라를 꺼내다가 밑에 깔려있는 사진들을 몇 장 보게 된다. 지난 봄, 아이의 입학식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사진 속 아이는 얼마 전의 모습인데도 마치 오래 전 사진을 앨범에서 찾아낸 것처럼 낯설다. 농 위에 꽂힌 앨범을 꺼내어 사진을 꽂는다. 앨범에는 이제 사진을 꽂을 빈 페이지가 얼마 남아있지 않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새 앨범을 사야할 것이다. 예전 앨범의 맨 뒤 페이지에 꽂힌 사진과 새 앨범의 첫 사진은 뚜렷한 구분이 없이 이어지는 사진이지만, 난 나도 모르게 그 둘 사이를 구분할지도 모른다. 내 생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만큼 단조로울 때, 난 내 생을 첫 번째 앨범에 담긴 것과 두 번째 앨범에 담긴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새해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금처럼 앨범을 혼자 꺼내본 적이 있었다. 이걸 다 언제 채우지. 반도 안 채워진 앨범을 두 번째로 보고 있었는데 아이가 문을 열더니 거친 숨을 쉬면서 내게 물었다. 엄마 이상해. 뭐가? 식당 아줌마가 나 한 살 더 먹게 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나는 오랫동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진을 꽂고 앨범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나갔던 아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칠게 숨을 쉬면서 느슨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엄마, 나 오천 원만.”
앨범의 첫 페이지에는 그이와 나의 결혼식 사진이 꽂혀있다.
*
―그러 길래 내가 애초에 결혼을 전제로 해서 가지는 만남은 싫다고 했잖아.
―너 정말 이럴 거야? 인물도 저만하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고 시내에 자기 손으로 가구점까지 떡하니 하나 굴리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다시 한 번 찬찬히 생각해봐. 언니 얼굴을 봐서라도… 응?
―몰라.
개울 건너에 사는 동네 언니가 시집을 간 뒤로는 얼굴보기가 뜸해지더니 한 계절이 지나서야 다시 동네에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빗질을 해놓은 것처럼 잘 심어진 고추밭을 돌아서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면서 시내로 나가자고 했다. 일도 한가해지고 신작로에 나가본지도 오래되어서 나는 선뜻 언니를 따라 나섰다. 언니가 꽃무늬 원피스와 리본이 달린 구두를 빌려줄 때 알아 봤어야하는 건데. 입술에 연한 분홍빛 립스틱까지 발라주고 레이스가 달린 양산까지 씌워주면서 정류장까지 걸어 나와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터미널 지하에 있는 다방에 도착했다. 난 언니가 자기 신랑을 소개시켜주겠거니 했다. 그 사이 언니는 손수건으로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여기예요. 진선아, 인사해. 우리 시동생이야. 잘 생겼지?
―응. …언니.
난 수족관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계속 언니와 그 사람을 돌아가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신문지를 반으로 접어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 내 머리카락이 조금씩 날렸다. 반바지를 입고 벌린 그의 종아리는 찰흙 덩어리처럼 위로 쓸어 올려져 뭉쳐있었다. 그 위로 여기저기 긁힌 자국들이 선명하게 혹은 흐릿하게 나있었다. 땀에 젖어서 속이 다 비치는 셔츠를 입고 그 사람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웃음을 머금자 눈가에 주름이 가지런하게 잡히는 사람이었다.
―전 김준기입니다. 형수님한테 듣던 대로 미인이시네요.
그게 남편과의 첫 만남이었다. 일 년쯤 동안 몇 번 만났고 그보다는 편지를 자주 했다. 내가 다섯 통쯤 보내면 그에게서 한 통이 올까말까였지만. 시내에서 만난다고 해도 일이 바빠서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결혼을 약속한 거나 다름이 없는 우리는 그이가 돈을 어느 정도 모으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나는 결혼이 내 생의 모든 것을 보호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럴 때쯤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는 대부분 이런 내용의 것들이었다. 이제 돈 많이 번 거 아냐? 아냐. 아직 좀 더 벌어야 해. 나 일하는데 가보면 안 될까?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여자가 어딜 겁도 없이 혼자 시내를 나온다고 해? 때가 되면 내가 구경시켜줄게. 나 봉숭아물 새로 들였어.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그래도 우리 조금만 참자. 그이는 유난히 봉숭아물이 새빨갛게 들여져 있는 손가락을 가진 여자를 좋아했다.
오지 말라면 내가 못 찾아갈 줄 알고? 난 주말 아침 시내로 가는 첫 버스를 타고 그이가 운영하는 시내의 가구점을 찾아갔다. 언니가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며 약도를 그려줬지만 불안스럽기만 했다. 밤에는 시내에 내 또래 여자 애들을 붙잡아 가는 남자들이 설친다는 말에 해가 뜨지도 않은 짙푸른 새벽에 출발하면서도. 가구점은 시계방을 돌아 언덕길을 조금만 오르면 있었다. 언니가 그려준 약도와는 반대의 길이었다. 터미널에서 세 시간동안 돌아다니다가 가구점을 찾았다. 이른 아침이라 여기저기 장사를 준비하는 손길이 황망하게 움직였다. 수건을 목에 걸고 용달차에 가구를 싣고 있는 그이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처음으로 내 도장을 만들었을 때처럼 마음이 들썩거렸다. 난 건너편 구멍가게로 들어가 요구르트를 하나 사 마시면서 몰래 그이를 바라보았다.
―건너편 가구집 주인은 아침마다 저렇게 가구를 나르나 봐요. 사람들 시키지 않고.
―주인은 점심이 지나서야 나오는데…….
―저기 지금 책장 들고 나오는 사람이 주인 아니에요?
―아! 저 총각. 저기서 일 한지 몇 년 됐는데 곧 있으면 장가든다고 하던데… 사람 하난 참 성실하지.
―…예. 여기 요구르트 얼마예요?
나는 다시 시계방을 돌아 다시 터미널로 왔다. 괜찮았다.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내에서 가구점을 하고 있는 사장에게 딸을 시집보낸다며 좋아하던 엄마가 많이 무연하실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난 더 이상 그이에게 결혼을 서두르자고 하거나 가게를 구경시켜 달라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네 신랑 될 사람한테 말복 때 한 번 들르라고 좀 해라. 뭔 일도 좋지만 몸 생각도 좀 해야지. 내가 닭 한 마리 잡아줄 테니 그 날 하루는 가게 문 닫고 여기 좀 들르라고 해. 알았지?
―주인이 보내줘야 오지. 마음대로 올 수가 있나.
―오빠!
―그게 무슨 소리냐?
오빠가 어떻게 알았는지 며칠 후 저녁 밥상에서 엄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빠는 내 일기를 훔쳐봤을 것이다. 그때부터 오빠는 그런 자식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그이와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결혼을 했다. 이 층에 방 하나가 딸린 작은 가게를 마련할 보증금을 만들고 나서야.
첫 번째 아이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하얀 시트가 깔린 보건소 침대 위에서 죽었다. 나는 젖이 잘 나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언니는 돈을 받고 젖을 물리는 아이가 둘이나 있어 내 아이까지 젖을 물리기는 어려웠다.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내가 기억하는 거라고는 유난히 까만 아이의 머리. 그것밖에 없다. 눈도 못 뜬 얼굴도, 꽃봉오리처럼 움켜쥐고 있던 손도 아주 오래 전 일처럼 기억하지 못했다.
―이 사람은 누군지 알아보겠어?
―우리… 신랑.
―그럼 이 사람은 누구야?
―친정엄마. 우리… 엄마. 언니 이제 그만해.
언니는 내가 정신을 놓을까봐 누워있는 내 앞에 앨범을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하나씩 얼굴을 집어가면서 내게 이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봤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난 언니에게 형님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시어머니 앞에서야 신경 써서 형님이라고 부르지만 이렇게 둘이 있을 때는 그냥 언니라고 부르게 된다. 바닥의 그 차가움이 요즘도 가끔 내 몸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을 느낀다. 그 차가움은 늘 유난히 까만 아이의 머리를 동반한다. 그럴 때 그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결혼을 하고 나서는 엄마를 손님처럼 만나야만 했다. 집 안에 일이 있을 때나 만날 수 있었다. 가끔 생신이라고 찾아가서는 결국 하룻밤을 자지 못하고 막차로 떠나와야 했었다. 오히려 어둠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버스 안의 전등 불빛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과 함께 나를 쓰다듬었다. 그때마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며 친정엄마가 손에 쥐어준 지폐 몇 장이 주머니 속에서 만져졌다. 아마 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돈을 한 번도 그이나 시어머니께 말씀드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자주 집에 들려 밥을 먹고 내게 돈을 타가던 시동생은 지금의 아이를 낳았을 때쯤 세련된 동서와 결혼했다. 시내에서만 살아왔던 동서와 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모아두었던 돈은 그럴 때나 쓰여 졌었다.
첫 아이가 살아있었으면 지금쯤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커서도 그렇게 머리가 유난히 까맸을까.
*
모델하우스는 전 보다 더 북적이기 시작했다. 큰 평수는 잘 안 나가던 모양인지 분양가를 좀 낮춘다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델하우스는 다시 축제 분위기가 됐다. 점점 시들어가던 화환들이 치워지고 새로 포장된 화환들이 들어가는 입구에 늘어서 있다. 60평형과 79평형의 분양가를 낮춘다는 현수막도 길게 늘어져있다. 나에게 주스를 쥐어주며 아파트에 대해 설명하던 남자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와 나와서 들어가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아직도 귓가에는 그가 말끝마다 붙이던 사모님 소리가 남아있다. 그는 사모님이라고 불렀던 날 기억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앞을 지날 때마다 괜한 조바심이 났다. 처음에는 그가 날 알아 볼까봐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입구에 적힌 아직 분양이 안 된 세대수가 점점 적어질수록 난 괜히 급한 마음에 얼굴을 붉혔다. 우리 집에서는 어차피 분양할 수가 없는 아파트인데도. 게다가 24평형도 아니고 60평형, 79평형이라니. 그래도 언젠가는 아파트 분양에 마음을 졸일 날이 오겠지.
병원에서는 결국 담을 높이는 공사를 곧 시작하겠다고 했다. 화분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빨래 줄에 걸린 빨래들과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들이 환자들에게 안 좋다는 얘기를 했다. 식당은 공터의 반을 창고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새 봉숭아는 붉은 꽃봉오리를 매달고 있었다. 꼬옥 쥔 주먹처럼 꽃봉오리는 가득 차 있다. 밑이 제법 붉어진 줄기가 유난히 단단해 보인다. 곧 꽃이 필 것이다.
“명숙이 걔가 사위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얻었지. 사실 명숙이 딸이 인물이 좀 빠지잖니.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남자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지. 너도 일요일 날 올 거지? 다들 네 소식 궁금해 하더라.”
“그럼. 가봐야지.”
“그래. 그럼 일요일 날 보자. 애 아빠 들어올 시간 다 됐다.”
전화를 받는 동안 머리는 거의 다 말려져 있었다. 멋내기용 자연 갈색 염색약이 전화기 옆에 거꾸로 세워져있다.
몇 번 시계를 쳐다보는 동안 예리하게 날이 선 염색약 냄새는 많이 무뎌져있다. 이젠 코 속으로 깊숙하게 찔려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있을 정도다. 비닐장갑을 끼고서는 답답해서 도저히 염색약을 바를 수가 없다. 아무 것도 끼지 않은 맨손이 낫다. 손바닥은 염색하는 동안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따가웠다. 쉽게 씻겨 질 줄 알았던 염색약은 수돗물을 제일 세게 틀어놓아도 잘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손톱 끝에는 볼펜으로 선을 그은 것처럼 검은 줄이 생겼다. 그리고 손톱 위에는 매니큐어를 칠했을 때보다는 조금 여리게 어두워져있다. 나는 어차피 손톱 위에 봉숭아물을 들일 거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봉숭아물은 어두워진 손톱 위에 물들어 손톱을 붉게 만들어줄 것이다.
염색은 전혀 되질 않았다. 물로 헹구고 나서 거울 봤을 때 검은머리 그대로였다. 그것이 산화제와 염모제를 잘 안 섞었기 때문인지, 시간을 잘 못 맞췄기 때문인지, 빗질을 잘못해서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화가 난 듯이 거칠고 뻣뻣해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무뎌졌던 염색약 냄새는 머릿속에서 다시 날을 세우기 시작한다.
“내 이름은 왜 안 넣었어요?”
“당신이야 그냥 결혼식 날 내 옆에 앉아있으면 되는 거지.”
“아니, 이름도 없이 그냥 앉아만 있어요?”
형님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있다가 몇 달 지나서 아주버님도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형님이 돌아가신 병원은 싫다고 하셔서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리 오랜 시간을 견뎌내시진 못하셨다. 그렇게 몇 번의 여름이 더 지나고 병우는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꼭 세 번째 맞는 형님의 기일에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여자를 데리고 왔다. 까만 안경을 낀 여자는 웃을 때에도 이가 드러나지 않았고 낮은 목소리만 냈다. 작은아버지가 되는 그이와 시어머니는 별 반대를 하지 않으셨다. 옆에서 동서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내게 비밀처럼 은밀하게 속삭였다. 여자가 좀 멍청해 보여요.
그이가 들고 온 청첩장에는 내 이름이 없다. 사돈댁 이름 두 칸을 그이의 이름이 가운데에 차지하고 있다. 마치 전 김준기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하다. 난 청첩장을 들어 손으로 찢기 시작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청첩장은 이미 친지들에게 다 돌리고 남은 마지막 한 장이었다. 단 한 번에 그이의 이름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내 이름이 생각 안 났던 건 아니고요?”
“무슨 소리야? 당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자꾸 왜 그래?”
갈라진 그이의 이름을 밟고 이층 부엌으로 달려간다. 난간이 없는 계단이 순간 아찔하게 다가오고 좁은 복도가 더 좁아진 것도 아닌데 양장점 여자의 검은 슬리퍼가 나로 인해 흐트러진다. 창문이 없는 복도에 여러 번 부딪히고 매번 잘 빗겨갔던 수돗가와 바닥에 생긴 웅덩이를 밟아 바닥에는 고르지 못한 내 발자국이 난삽하게 찍혀있다. 냉장고는 사나운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난 냉장고 위에 붙어있는 종이를 떼서 아래쪽에 여러 번 겹쳐서 글씨를 쓴다. 종이 뒤에는 선명한 자국이 생긴다.
18일 화요일 시아버지 제사준비, 20일 목요일 어머니회 참석, 화분에 하루 한 번 물 주기, 염색하기, 23일 일요일 명숙이 딸 결혼식 가기, 떠나기.
냉장고 위에 종이는 내가 잊지 않도록 해준다.
*
나는 신간코너 책장 아래로 밀어 넣은 책에 대해서 점원에게 되도록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제목과 출판사 그리고 크기나 가격, 두께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도. 서점 안은 순식간에 호수 속에 돌을 던진 것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일렁이기 시작한다. 책장 아래에 있는 책은 누구도 찾지 못할 것이다.
“어떡하죠? 분명 그 책이 있었는데… 분실된 것 같습니다. 다음주에 오시면 저희가 책을 가져다 놓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다음에 사죠.”
늦은 저녁이라 그런지 서점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난 종교․철학 코너를 지나 통유리로 된 테라스에 가서 앉는다. 이 층 아래에서는 로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난 창문이 없는 이 층 복도가 생각나서 끔찍스러움에 잠시 몸서리를 친다. 앉아있는 동안 신호는 한 번도 어긋나지 않고 그것을 어기는 차도 없다. 발밑으로 택시가, 지붕이 단조로운 버스가, 매끈한 스포츠카가 지나가는 것이 순간순간을 짜릿하게 만든다. 시청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는 표시판은 바로 내 눈높이에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주택가들이 레고처럼 쌓여져있다. 끄트머리에 앉은 남자가 다리를 흔드는 바람에 그 떨림으로 나도 다리를 움찔한다. 난 「전국도로교통관광지도」란 책을 사들고 서점 안을 빠져나온다. 지도 하나쯤은 있어야 될 테니까. 빠르면 오늘 서점 문을 닫기 전 점원은 신간코너 밑에 깔린 그 책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터미널로 가는 동안 우산을 접었다가 폈다하는 일이 자주 반복된다. K군으로 가는 버스는 자정쯤에야 한 대가 있다. 표를 끊고 빗방울이 더 굵어지면 우산을 펼칠 생각으로 간지럽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터미널 밖으로 나선다. 문득 모퉁이를 돌아가면 그이가 장식장을 용달차에 싣고 있을 것만 같다. 불이 켜져 있어도 벌써 의자를 테이블 위에 뒤집어서 얹어놓고 있어, 마땅히 들어가 밥을 먹을 만한 가게도 없어 보인다. 옆에 누군가가 바짝 다가와도 모를 것만 같은 터미널 밖이다. 시선을 돌리다가 별처럼 반짝이는 곳에서 멈춘다. 한동안 명멸하다가 가운데에 빨간색 불빛으로 글씨들이 하나씩 켜진다. 노. 래. 방.
노래방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또 하나의 구멍이다. 어둡기는커녕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구멍. 언젠가 내 구멍도 이렇게 화려하고 현란했었던가. 나는 점점 깊숙하게 파고든다. 30분만 주세요. 차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른 손님들은 없는지 안에서 노래 소리는 새어나오지 않는다. 가운데 테이블을 중심으로 소파가 둘러져 있다. 난 탬버린을 소리 나지 않게 밀어낸 다음 책을 들어 노래를 찾기 시작한다. 8834, 태진아, 사랑은 아무나 하나. 시작 버튼을 누르자 어두웠던 사방이 다시 한 겹 더 어두워지고 그나마 보였던 것들이 사라진다. 난 반주를 계속 들으며 책을 처음부터 펼쳐서 조금이라도 아는 노래가 있으면 예약을 한다. 반주가 다 끝날 때쯤 난 책을 거의 끝까지 넘겼다. 자세히 보니 책에는 노래가 순서대로 나와 있지 않다. 3월 신곡 뒤에 1월 신곡이 들어가 있는가하면 ‘나’로 시작되는 노래는 「나는 널 사랑해」에서 끊어져 있고 그 뒤에는 ‘다’로 시작되는 노래가 이어져있다. 다시 시작 버튼을 누르고 마저 책을 넘기기 시작한다. 아마 예약한 노래들은 반도 못 부를 것이다. 문이 완전히 닫혀 지지 않고 살짝 열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노래방에서 나올 때였다. 밖으로 내 목소리가 새어나왔겠지. 나는 노래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느꼈었던 감정을 안으며 노래방을 나왔다.
노래방을 나오자 내가 마지막 손님이었는지 들어가는 구멍과 간판의 불들이 한꺼번에 꺼진다. 내가 빠져나온 길이 안보이도록 노래방 안으로 들어가는 구멍은 진하게 어두워져있다.
“이런, 미친 년!”
노래방에서 나오자마자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내 목덜미를 잡는다. 건널목 건너편에서 나이가 좀 차 보이는 사내가 여자의 머리를 휘어잡으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그 속에 여자의 음성은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허공에 팔을 휘젓기는 하지만 그 손은 남자의 몸에 닿지 않는다. 건널목의 빨간 신호등이 그 둘을 비춘다. 남자는 이제 내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여자에게 말한다. 여자도 더 이상 팔을 휘젓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곧 남자는 여자의 머리를 놓고 여자는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핸드백 속에서 거울을 꺼낸다. 그리고 신호가 바뀌기 전에 그들은 택시를 잡아탄다. 택시를 탈 때는 남자가 뒷문을 열어 여자가 먼저 타도록 해준다. 신호가 바뀌자 난 서늘해진 뒷목과 머리를 감싸며 그들이 사라진 건너편으로 다가간다.
터미널에 들어가 펼쳐본 지도에는 K군이 나와 있지 않다. 조금 외진 곳이라고는 해도 여기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곳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도통 나와 있지 않다.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난 지도책이 만들어진지 십 년은 되었다는 것과 초등학교가 모조리 국민학교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내가 사는 곳을 지도에서 보니 이전되었던 시청이 예전에 있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고 강을 건너는 다리도 아직 놓
<인적사항>
응모부문 : 단편소설
응모작품 : 「은행나무」,「꽃 진 자리」총2편
성 명 : 전 석 순
성 별 : 남
주 소 : 강원도 춘천시 퇴계동 금호타운 207동 908호
이 메 일 : dikiblue@hanmail.net
전화번호 : 010-9797-8472
은행나무
혹시 내가 정신병자는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정도의 느낌을 가져다준다.
마지막 책상 위에 오일 파스텔과 8절지 종이를 놓고 난 잠시 길을 잃은 아이처럼 머뭇거린다. 그리고는 곧 8절지 종이 대신에 좀 더 큰 종이를 펼쳐놓는다. 종이는 책상을 완전히 덮어버린다. 마지막 책상에 앉을 소년은 요즘 점점 감정이 격해져서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더 큰 종이를 준비해달라는 슈퍼바이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인턴생활을 책임지는 슈퍼바이저의 이름은 윤현락이었다. 어제 만난 그는 자신을 슈퍼바이저가 아닌 그냥 현락씨라고 불러 달라 했다. 그때 난 오늘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짧게 대답했다. 짧은 머리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소년의 뾰족한 눈매를 떠올리면서 난 환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하얀 테이블 위에는 아무렇게나 찰흙 덩어리들이 흩어져있다. 자세히 가서 들여다보니 그것은 환자들의 작품이다. 로봇을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새를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것에는 날카로운 것으로 이름을 새긴 흔적도 있다. 건조하게 굳어버린 찰흙은 양지에서 말렸는지 여기저기 갈라진 틈이 보인다. 높은 책장 위에는 누렇게 때가 낀 석고상들이 엇갈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책장은 칸칸마다 어지럽게 미술도구들이 쌓여있다. 연필꽂이에는 펜 하나 들어갈 자리 없이 색연필과 붓이 꽂혀져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빨간 색연필을 주워서 연필꽂이에 꽂으려다 말고 옆에 살짝 누워놓는다. 책장의 가장 아래 칸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점토와 찰흙들이 차곡차곡 빈 공간 없이 쌓여있다. 답답해. 나는 나도 모르게 낮게 중얼거린다. 그리고 창 밖에 촘촘히 들어와 박혀있는 쇠창살을 보면서 같은 말을 조금 더 큰 소리로 중얼거린다. 여기는 5층인데. 누군가가 예전에 이곳에서 뛰어내렸을 거라고 난 잠시 생각한다. 햇빛은 반듯하게 잘려져서 바닥에 눕는다. 창에 새겨진 「푸른 미술치료실」이라는 글씨와 꽃 모양 스티커가 그 위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창문을 열자 베어진 바람이 들어와 천장의 형광등 아래 달려있는 모빌에서 얇게 소리가 난다. 파란 쇠기둥 네 개 사이를 은빛 물고기가 돌아다닌다. 잠시 천장에 물방울이 돋아났다가 사라진다.
예닐곱 명의 환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미술치료실 안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처럼 거의 망설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슈퍼바이저의 말처럼 요즘 감정이 격해진다는 소년은 조금 더 큰 종이가 있는 마지막 책상에 앉았다. 뾰족한 눈매가 여전한 그 소년이다. 처음 만난 그들의 선명한 기억은 냄새였다. 첨예하게 날이 선 냄새가 콧속을 깊숙하게 찔러댔다. 코를 막으려고 올리던 손을 슈퍼바이저는 막아 내린다. 무거운 손길이었다. 나는 2주일 정도 내 슈퍼바이저 미술치료사가 하는 치료그룹을 관찰하게만 되어있다. 그 그룹들 사이에 서툴게 끼어든다는 것은 무리라는 슈퍼바이저의 생각 때문이다. 난 가장 뒤에 서서 그들을 관찰했다. 마치 내가 책장 앞에 서있는 이젤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참 느렸다. 내 슈퍼바이저가 하는 이야기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하였다. 벌써 3월 중순이 되어 가는데도 두터운 갈색 코트를 입고 있는 늙은 남자는 종이 위에 눈사람을 그리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봄이다. 나는 빨리 그들과 나를 하나로 묶으려고 같이 책상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노란색을 찾는 아이에게 쓰고 있던 파스텔을 손에 쥐어줬더니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든다. 그들은 외부자극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거 줄게요.”
눈사람을 그리던 늙은 남자가 그림 뒤에 크게 김진혁, 이라고 이름을 쓰고선 내게 내민다. 김진혁. 입으로 이름을 되새기면서 난 그림을 받아야할지 아니면 거절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데, 내 슈퍼바이저가 받아도 된다는 눈짓을 했다. 다음 시간에 그 정도 크기의 그림을 그려서 저 남자에게 주세요. 지금 저 환자는 그것을 원하고 있으니까요. 슈퍼바이저가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환자들이 못 듣도록 속삭였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한 시간이 주어졌는데 대부분 환자들은 채 반 시간도 안 되어서 그림을 다 그리고는 멍하게 앉아있다. 소년만이 그림에 단단하게 몰두하고 있다. 파스텔을 번지게 하는 스펀지에는 하얀 부분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 환자들은 이건 산을 그린 거예요, 이건 집이고 이건 사람이에요, 처럼 짧게 이야기하고 빠르게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검은색과 회색을 겹겹이 칠해놓은 종이를 들고서 나예요, 라고 끊어내듯이 말하고 잠시 창 밖의 쇠창살에 시선을 둔 뒤 앉았다. 그 사이 긴 머리가 가볍게 날렸다. 이제 마지막 책상에 앉은 소년의 차례였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어깨를 들썩이다가 눈을 감은 채로 일어섰다. 엄마랑 아빠예요. 섬뜩하게 보이는 선 몇 개와 여러 개를 겹쳐 그린 동그라미가 전부였다. 사람처럼 보이기는 했다. 낙서 같은 그림들.
미술치료 시간이 끝나고 슈퍼바이저는 환자들이 자기가 쓴 오일파스텔과 스펀지는 자기가 치우도록 했다. 그는 어지렵혀진 자리를 치우는 순서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다섯 번은 해야 했다.
“환자들 첫 인상이 어때요?”
환자들이 다 나간 후 슈퍼바이저는 내게 환자에 대한 인상을 물어왔다. 나는 그들에게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말하려다가 그들은 어두워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는 녹차 두 잔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한 잔에만 티스푼으로 설탕을 넣었다. 그는 설탕을 넣은 녹차를 입에 가득 한 모금 마시고는 지금 미술치료실에 다녀간 사람들은 CRP그룹이라고 했다.
“CRP라면…”
“윤주씨도 알텐데. 한국미술치료연구센터에 있었다고 했지요? 거기 교육에서 배우지 않았나요? Cognitive Rehabilitation Program.”
“아… 기억…, 기억나요. 인지능력이 떨어지면서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 맞죠?”
그들은 아마 가끔은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더울 때에는 얇은 옷을 입고 추울 때에는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가르쳐줘야 할 것이다. 눈사람을 그리던 늙은 남자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을 지도 모르겠다. 요즘 왜 이렇게 땀이 많이 나지?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그랬었구나. 괜히 난 미안한 생각이 든다. 슈퍼바이저는 오랫동안 환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검은색과 회색을 종이 위에 겹겹이 칠해놓은 여자아이는 성폭행을 당한 경험 때문에 자신을 숨기려고 든다고. 마지막 책상에 앉은 소년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고아원에 넘겨질 뻔해서 그 이후로 애정결핍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눈사람을 그린 늙은 남자는 지난겨울 사업이 부도났다고. 창밖의 쇠창살과 「푸른 미술치료실」이라는 글씨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슈퍼바이저와 나의 얼굴까지 닿았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윤주씨 애인 있어?”
나는 다급하게 쥐고 있던 녹차 잔을 들어올린다. 그러나 찻잔 안에 티백은 이미 터져 버렸다. 안이 어지러웠다. 글쎄요. 그는 앞으로 자기를 슈퍼바이저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현락씨라고 불러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 들었던 그의 이름을 난 이미 잊은 상태였다. 찻잔 두 개를 개수대 안에 넣어놓는다. 그의 잔 밑바닥에는 아직 녹지 않은 설탕이 남아있다.
*
연락이 거의 닿지 않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조심스러워야만 한다. 그 편지는 당혹스러움과 함께 말도 안 되는 그리움과 쓸데없는 감정들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상호의 편지가 내겐 그랬다. 마치 어제도 만났던 사람에게 대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써 내려간 편지.
버스는 30분 만에 역 앞을 지나서 철길을 따라 깊숙이 빨려 들어가듯 달린다. 버스 위로는 이제 막 세워진 고가도로가 짙은 어둠을 만들어내고 창밖으로는 멀리 공사가 중단된 채 서있는 아파트 단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몇 달째 아직 칠도 안 되어있는 아파트. 버스기사는 벨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습관처럼 한주아파트 앞 정류장에 서서 내리는 문을 연다.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있는 버스 안은 이제 비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완전히 내리기도 전에 버스 안에는 불이 꺼진다. 이미 늦어버린 저녁이지만 아직도 여기에 잠시 서 있다 보면 굴삭기가 흙을 퍼 올리는 소리나 트럭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잠깐 동안 몸서리를 치고 약국으로 간다. 그러나 약국의 문 앞에 서툴게 써진 글씨를 한참동안 쳐다봤을 뿐 난 약국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의약분업예외지역」. 약국은 내일쯤 들러도 상관없겠지.
아파트 단지는 늘 어느 일요일의 늦은 오후를 생각나게 한다. 모래처럼 거칠고 누런 햇살이 가득한.
주차장엔 차가 거의 안 보인다. 난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차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늦은 밤이 되어서도 아파트엔 불이 켜져 있는 집이 눈에 안 들어온다. 난 이 아파트 사람들은 거의 일찍 잠자리에 든다고 생각한다. 쓰레기장에 단 한 개의 종량제 봉투만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난 생각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집 안에 쓰레기를 안고 살아가거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쓰레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치워간다고.
꼭 그런 곳으로 가야겠니? 시내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는 곳으로. 교통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듣기로는 그 아파트에 반의반도 입주세대가 안 찼다고 하더라. 대학 내내 혼자 살았으면 이제라도 부모랑 같이 살면 좀 좋아. 고집 좀 그만 부리고.
난 아직 보도블록이 깔리지 않은 길을 따라 엄마의 목소리를 밟으면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다. 608호 우체통에는 편지가 꽂혀있다. 하나도 빠짐없이 광고전단지가 빽빽하게 꽂혀있는 우체통 사이에 그 편지는 유난히 눈에 띈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건가. 난 누구도 빼가지 않은 광고전단지를 바라보다가 편지만 빼들고 간다. 편지는 입구가 단단하게 붙여져 있다.
엘리베이터는 유난히 더디게 내려온다. 9층에서 내려오는 동안 복도의 센서등은 세 번 꺼졌다가 켜졌다. 센서등이 꺼질 때마다 난 허공에 팔을 휘젓는다. 마치 여기 사람 있어요, 라고 외치는 것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그 안에는 생뚱맞게 강아지를 안고 있는 여자 하나가 타고 있다. 파마를 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강아지의 몸에 살짝 닿아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종의 강아지는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난 나도 모르게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잠든 모습이 참 귀엽네요. 이 강아지 무슨 종이에요?”
“만지지 말아요. 잠든 게 아니라 죽은 거니까.”
여자는 밖으로 나간다. 한 쪽 손에는 작은 모종삽이 들려져있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다시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다시 팔을 휘젓는다면 센서등은 다시 켜질까.
열쇠구멍을 한주철물점 광고스티커가 막고 있다. 나는 그것을 떼어 문 앞에 붙여진 중국집 광고전단지와 함께 구겨버린다.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면 온통 검은 짐승들이 는적는적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불을 켜면 집 안은 깨끗하다기 보다는 비어있다. 이사 오던 날 가구를 옮기는 도중 서랍이 안 열리도록 하기 위해 붙였던 박스테이프도 아직 그대로이다. 장식장 아래에는 아직까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할 것이다. 열 두 평 남짓한 공간에는 특별히 가구라고 할 것도 없다. 오늘따라 그림하나 없는 벽면에 소름이 돋는다. 연두색 카디건을 벗어 앙상한 빨래건조대에 던져 놓는다. 빨래건조대에는 잎이 피어난 것 같다. 짧은 통로를 따라 좁은 주방 안으로 들어간다. 가구점을 하시는 엄마 친구 분께서 사주신 2인용 식탁이 아버지처럼 쓸쓸해 보인다. 주방에는 식탁을 들여놓자 더 이상 뭘 들여놓을 공간이 없었다. 나는 늘 발코니 쪽 의자에 앉는다. 거기에 앉아서 고개를 살짝 내밀면 거실 겸 안방이 보인다. 텔레비전을 문이 바로 마주보는 쪽에 놓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본 적은 아직 없다. 언젠가는 고개를 살짝 내밀면 텔레비전 대신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 얼굴이 상호와 비슷했으면 좋겠다.
물을 올려놓는다. 뒤집어져 있는 꽃무늬 컵을 똑바로 세워놓고 커피 한 봉지를 털어 넣는다. 설탕조절부분 이라고 써진 곳을 잘라 설탕을 모조리 털어 넣고서도 난 한 스푼의 설탕을 더 넣는다. 물이 끊는 동안 난 전자레인지를 들여 놓을만한 공간을 찾아본다. 역시 전자레인지는 무리야. 컵의 반쯤 뜨거운 물을 붓고 아주 오랫동안 해왔던 일처럼 발코니에 나간다. 창문에는 아직 방충망이 없다. 방충망 시공업체에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다. 뭐 아직은 봄이니까. 커피 잔을 세탁기 위에 올려놓고 난 창문을 연다.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창문이 열린다. 찬바람이 순식간에 얼굴 전체를 덮는다. 휑한 발코니를 보면서 엄마가 가져가라던 행운목을 가져올 걸, 하는 후회가 든다. 그리고 시선을 곧게 뻗어나가다가 끄트머리에 이른다. 어제 같았으면 목이 꺾여 있었을 내 그림자가 오늘은 곧게 뻗어있다. 점점 가까이 가본다. 그림자는 점점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여기 분명 벽이 있었는데. 나는 아무 것도 없이 깔끔하게 이어진 바닥을 큰 걸음으로 뛰어넘는다. 마치 이국으로 단번에 들어서 듯.
“…어떻게 된 거야?”
“왔어? 보고 있는 그대로야.”
“……진혁 오빠.”
“아까 낮에 인테리어 하는 친구가 인부들이랑 다녀갔어. 그리 오래 걸리진 않더라고. 이런 공사는 요즘 흔히들 한다고 하더라. 들어와.”
진혁 오빠는 줄무늬 팬티 속에 넣고 있던 오른손을 꺼내어 내 손목을 힘껏 잡는다. 오빠의 손이 끈끈하게 달라붙는다.
여기나 내가 살고 있는 집이나 똑같을 것이다. 똑같은 구조일 텐데. 느낌이 전혀 다르다. 복잡한 미로 속을 걷는 느낌이다. 한 가지 똑같은 점은 이곳도 불을 끄면 검은 짐승이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 그러나 그 짐승이 이번에는 더 사납다. 진혁 오빠는 벌써부터 내 위에 있다. 나는 천장 위에 제멋대로 붙어있는 야광별을 바라본다. 손가락으로는 견고한 그의 몸을 찔러본다. 손가락 끝으로 엷은 울음소리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는 놓아주었던 내 손목을 다시 잡고 아래쪽으로 이끌어낸다. 더 끈끈한 그의 성기가 가득 잡힌다. 아주 단단하다. 그 사이 그는 천천히 내 옷을 벗겨 내리기 시작한다. 내 셔츠를 완전히 벗겨 내리지도 못한 채로 그는 내 가슴을 쓰다듬듯이 핥아 댄다. 그는 팬티 안에 있는 내 손을 거두고 팔을 벌리게 한다. 그리고 겨드랑이 사이로 무릎을 끼워 넣는다. 무릎을 꿇은 그대로 그는 팬티를 내린다. 곧 벽을 집고 다시 천천히 앞으로 넘어지기 시작한다. 난 고개를 뒤로 젖혀보려고 했지만 그의 한쪽 손이 이미 내 뒷머리를 꽉 잡고 있다. 입술을 틀어지고야 만다. 커피 향이 채 가시지 않은 입안에 그의 성기가 가득 차오른다. 난 나도 모르는 사이 혓바닥으로 그의 성기를 쓸어내린다. 다시 그의 손이 가슴으로 간다. 결국 난 스스로 브레이지어 끈을 푼다. 이제 견고한 그의 몸을 손에 넣으려 해도 팔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나는 마치 묶여있는 것 같다. 비린내가 나기 시작한다. 그 사이 난 야광별에 꽂혀있는 시선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너 상호란 사람한테 또 편지 왔더라.”
“…응. 알고 있어.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인데 다시 만나자고 자꾸 편지를 보내네.”
“너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냐?”
내 몸은 가느다란 떨림을 멈추질 않고 있지만 옷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이제 그만 가. 진혁 오빠의 음성이 꼭 동굴 속 같다.
그래도 바로 옆에 진혁이가 살고 있어 얼마나 다행이냐? 그나마 마음이 좀 놓인다. 엄마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난 집에서 나와 혼자 살 수 있었다.
세탁기 위에 올려놓은 커피는 이제 다 식어버렸겠지.
*
“은행나무 밖에 없습니다.”
무심코 창밖에 서서, 마주하고 있는 두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슈퍼바이저가 다가와 말했다. 은행나무 밖에 없다고. 환자들이 시간의 개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창 밖의 은행나무 밖에 없다고. 그들은 처음 여기에 왔을 때의 은행나무 모습을 대부분 기억한다고 했다. 정원에서 가장 큰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 나무의 모습을 기억했다가 은행나무의 모습이 다시 그렇게 바뀌면 1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새싹이 돋아나고 짙푸른 은행잎들이 미술치료실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고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하늘을 가득 메워내고 결국엔 앙상한 나뭇가지가 허공에 균열을 만들다가 그 끝에서부터 다시 싹이 트고. 난 이제 오톨도톨하게 올라오는 은행나무 잎을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기억한다.
“그럼 가을에는 열매도 열리겠네요.”
“아뇨. 두 그루 다 수나무라서 열매는 열리지 않습니다. 관리인이 한쪽 수나무에 암나무의 새가지를 여러 개 접목하여 암나무화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야말았죠.”
“아, 그렇군요. ……현락씨.”
그는 어제 숙직실에서 그림을 정리하면서 밤을 새고 있을 때 은행나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예로부터 은행나무는 잎이 싹트는 모양에 따라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고 나무가 밤에 울면 그 마을에 재앙이 온다는 말과 함께 그는 말꼬리를 내렸다.
은행나무.
어느 날인가 현락씨는 내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더니 나와 환자만 남겨두고 사라져버린 일이 있었다. 은행나무. 나는 멍하게 환자들의 눈빛을 피한 채 서있었다. 현락씨는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저희 치료실에서는 은행나무라고 합니다. 어떤 치료실에서는 장미라고도 하고.”
“응급상황을 그렇게들 부르는군요.”
치료실에 있다 보면 일주일에 두어 번은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고 한다. 환자가 갑자기 발작 증세를 보인다거나 자살소동을 벌인다든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하든지. 이렇게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목격한 치료사가 프론트로 연락을 하고 그곳에서는 8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은행나무 팀의 비상호출기로 연락을 하게 된다. 은행나무 팀은 두 명 정도의 남자 치료사와 말로 진정시키는 치료사 한 명, 간호사 한 명 그리고 발작을 일으킨 환자가 속해있는 그룹을 진정시키는 치료사 한 명, 입원 병동이나 시설에 연락을 취하는 치료사 한 명, 끝으로 전체를 관리하는 책임자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난 다음 주부터 은행나무 팀에서 연락을 취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환자들에게는 은행나무라는 말이 그나마 안정적이라고 한다. 다른 말들은 환자들을 자극시킬 수 있지만 은행나무는 그들에게 막연한 편안함을 주었다. 현락씨는 첫 날에 가장 마지막 책상에 앉았던 소년이 은행나무를 제일 자주 외치게 한다고 했다.
아침 중으로 재료를 준비해야 해서 나는 현락씨와 함께 화방에 들렀다. 미술치료실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그와 아주 멀리 떠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기어이 나는 건널목을 건널 때 어젯밤처럼 큰 걸음으로 마지막 선을 뛰어넘는다. 이른 아침의 시내라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하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도 많이 눈에 띈다. 봄치고는 꽤 쌀쌀한 아침이다. 나는 오른손으로 천천히 팔을 쓸어내린다. 얇은 셔츠 안의 팔에는 은행나무 새싹처럼 오톨도톨하게 소름이 돋아나 있을 것이다.
대학 합격자 명단이 촘촘하게 새겨진 어느 미술학원의 광고포스터를 따라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화방 안은 그나마 좀 따뜻했다.
“사람들은 가끔 참 말도 안 되는 하찮은 이유로 사랑에 빠지기도 해요.”
“그런데 그 소년은 정말 이혼 때문에 우울증이 찾아온 건가요?”
“부모의 말에 의하면 당뇨병에 걸린 할머니 때문이래요. 어릴 때부터 유난히 단 것을 좋아했는데 당뇨병에 걸린 할머니를 보고서 달콤하다는 것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답니다. 그 순간 입 속에 있는 사탕 때문에 혀가 베이고 그때부터 우울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데요. 끝까지 이혼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됐다고는 얘기하지 않더군요.”
“부모 말이 맞다면 사탕에 혀를 베어서……, 조금 우스운 이유네요.”
“그래도 아무 이유 없이 그러는 것보다는 좀 낫겠죠.”
재료를 고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노인들에게는 쓰기 쉬운 마카나 크레파스가 좋고 붓은 예민한 환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고. 현락씨의 말을 주워 삼키면서 나는 몸을 옆으로 세워 좁은 통로를 돌아다녔다. 찰흙을 집어 들다가 갈라진 틈이 생각나 좀 더 부드러운 점토를 찾았다.
“윤주씨도 예전에 미술치료를 받아본 적이 있죠?”
“아, 예…….”
“…이제 그만 갑시다. 오후엔 병원 복도에 그림을 걸어놓아야 하니까.”
그림을 걸어놓는 일은 환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준다. 자기 그림이 어딘가에 걸린다는 기분. 그래서 아주 혐오스러운 그림이 아니라면 치료실 복도에는 환자들의 그림이 거의 모두 걸린다. 유난히 화려한 액자 속에.
“참, 윤주씨.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나는 못들은 체하고 복잡하게 얽혀진 시내로 빠르게 스며든다. 아까와는 달리 거리는 붐비고 난 얇은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오늘은 얼마 전 치료실을 떠난 한 여자의 가슴 석고상도 놓일 것이다. 그녀는 유방암 수술을 받기 전에 가슴을 석고상으로 뜨고 싶다고 했었다. 그 석고상 밑에는 그녀의 서툰 글씨도 함께 새겨져있다. 몇 년 동안은 써보지 않은 듯한 글씨.
「사랑하는 내 가슴이여, 안녕.」
*
몸에는 아직 날카로운 소독약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왔다. 인슐린 주사를 놓는 위치가 그려진 종이 위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 주사를 맞을 때마다 아버지의 어깨에, 허벅지에 선명한 선이 그어졌다. 진한 글씨로 같은 자리에 주사하면 절대 안 된다고 써져있다. 엄마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꺼지면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어 텔레비전에 넣는 일을 반복하고 계셨다. 텔레비전은 동전을 넣어야만 나왔다. 옆 침대에서는 간병인이 노인의 가래를 뽑아내고 있었다. 지저분한 소리가 여섯 명이 있는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노인은 가끔 몸을 뒤척이기만 했다. 간병인은 침대 시트를 크게 걷어낸다.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리고 빠르게 노인의 환자복을 벗겨낸다. 이제 탁자 위에 엷은 분홍빛 타월로 천천히 뿌연 몸을 닦아내기 시작한다.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같이 벗겨내자 노인의 성기가 드러난다. 노인은 다시 몸을 뒤척인다. 그 사이 간호사 하나가 들어오려다 말고 다시 문을 닫는다. 사타구니를 닦아낼 때마다 노인의 성기가 간병인의 손등에 부딪힌다. 그 손길을 따라 힘없이 성기가 흔들린다. 간병인은 마른기침을 여러 번 뱉어내고 그대로 타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창으로 걸러져서 쏟아지는 불투명한 햇살이 노인의 벌거벗은 몸을 그대로 비춰낸다. 몸은 여기저기 울긋불긋 달아올라 있다. 천장을 향하고 있는 노인의 눈 속이 깊어지는 듯하다. 나는 계속 노인을 쳐다보고 있다.
“네 엄마가 수의는 벌써 준비해 뒀다는구나. 장기도… 기증하기로 했다.”
아버지의 낡은 음성이 병원 바닥에 잘게 부수어진다. 엄마는 아직도 꼿꼿하게 텔레비전을 보신다. 암사자 한 마리가 얼룩말의 넓적다리를 무는 장면에서 다시 텔레비전이 꺼진다. 화면은 아득하게 멀어진다. 엄마는 다시 동전을 넣지 않으신다.
“윤주 와있었구나. 마침 잘 됐네.”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작은 엄마가 들어왔다. 한 손에는 음료수 한 상자가 들려있다. 난 선반 아래 가득 꽂혀져 있는 똑같은 음료수를 생각한다. 일어나려던 내 앞에 작은 엄마가 바짝 다가와 앉는다. 눈에 보이는 듯한 독한 향수 냄새가 콧속을 뭉기적거린다.
“우리 윤진이가 요즘 무슨 일이 있나봐. 밥도 통 안 먹고, 말도 잘 안하고. 왜 걔가 어려서부터 좀 특출 난 데가 있잖니. 공부도 곧잘 하고. 그래서 내가 학교에서 윤진이가 그린 그림을 가져왔는데 좀 봐줄래? 얘가 요즘 왜 이러는 건지.”
줄무늬가 세세하게 새겨진 핸드백에서 작은 엄마는 그림 한 장을 꺼내신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을 텐데, 그림솜씨가 형편없다. 그 아이가 못하는 것도 다 있구나. 나는 건성으로 그림을 바라본다. 서툰 풍경화였다.
“직접 윤진이한테 물어보세요. 왜 그러냐고. 그러시면 되잖아요. 그럼 전 가볼게요.”
서둘러 병원 안을 빠져나온다.
넌 정말 매력적이야. 다른 남자들은 아니라고 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 매일 밤마다 너의 얼굴이 떠올라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너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아. 제발 한 번만 만나주면 안되겠니?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 사랑해.
이제 다 지워져버린 개나리를 보며 상호가.
집에 들어오면서 난 유난히 단단하게 입구를 봉한 편지를 뜯고 읽는다. 아마 상호는 밤에 편지를 쓰고 다시 한 번 읽어보지도 않고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카디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데 발코니 쪽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아닌데요, 라고 낮게 읊조리는 진혁 오빠의 말이 들려온다. 카디건에는 아직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배어있다. 난 순간 몸서리를 치며 카디건을 벗고 있는데 이번에는 현관문 쪽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인터폰을 들고 난 지금까지 듣지 못한 낯선 목소리를 상상한다. 누구세요?
“여기가 김영남 씨 댁 맞나요?”
“아뇨, 아닌데요.”
아주 여린 목소리에 살짝 울음이 묻어난다. 난 달려 나가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언젠가 현관문 가득 붙여진 광고 전단지를 보며 언젠가는 그것이 붙여지는 순간 문을 열어젖히고 놀란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쳐다볼 것이라는 욕망으로. 개나리 유치원 이름이 새겨진 노란 가방을 맨 조그마한 여자아이는 이제 609호의 초인종을 누르려고 까치발을 한다. 땋아 내린 머리가 많이 흐트러져 있다.
“꼬마야. 너 왜 장난치니?”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집이 어딘지 까먹어서 하나씩 눌러보고 있는 중이란 말이에요. 이 중에 우리 집이 있어요.”
아이는 다시 초인종을 누르고 묻는다. 여기가 김영남씨 댁이 맞느냐고.
반쯤 벗어 내린 카디건을 완전히 벗고 다시 발코니로 나간다. 아마 한동안은 이곳에 행운목 같은 화분은 들어서지 않겠지. 행운목을 놓으리라고 생각했던 자리를 피해서 끄트머리로 가, 난 큰 걸음을 한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아버지한테.”
“너 또 편지 왔더라.”
진혁오빠는 고집스러워 보이는 나무색 소파에 앉아 신문을 내리지 않고 말한다. 팬티만 입고 있는 그의 몸은 언제나 단단한 기계 같다. 신문지를 아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탁자 위에 내려놓는 손길이 딱딱 끊어지는 듯하다. 발코니 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어느새 잔뜩 흐려져 있다. 금세 여기저기 잿빛무늬가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오빠는 내게 걸어오고 있다. 은행나무. 은행나무. 나는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오빠는 언제나 알 수 없이 지저분한 감정을 흘리고 다닌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마치 몇 년은 알고 지낸 듯한 사람처럼 대하는 태도. 일상적인 관계에서는 문제될 게 없지만 그것이 사랑이라면 다르다.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사랑을 느끼고 충분히 섹스를 할 것이다. 오빠는 혼자 자라 와서, 외로워서 그런다고 자주 말한다. 그리고는 너한테만 이러는 거야, 라는 식의 말로 사람을 안심시키며 다시 애정결핍을 들먹거린다. 하지만 난 오빠가 혼자 자라왔단 것을 알면서도 어쩌면 혼자서 자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혼자 지내온 시간이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유 없이 흘리는 그 지저분한 애정이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견디기 어려운 상처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구걸하는 것 같아. 제발 나 좀 사랑해달라고. 다리를 벌리고 당신에게 구걸하는 것 같아.
“상호라는 녀석은 누군데 자꾸 너한테 이상한 편지 보내는 거야?”
“이상한 편지라니. 모르겠어.”
“이리 좀 와봐.”
“싫어. 치료실에 나가 봐야해. 집 안에 혼자 있는 것도 답답하고.”
진혁 오빠의 손이 내 손목을 잡기 전에 난 뒤로 물러난다. 지금은 불을 끈다고 해도 야광별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빠는 혼자라는 말을 들었을까. 밖에는 스믈스믈 비가 내려앉기 시작한다.
*
“윤주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비도 오는데.”
“그냥 집에 있기 답답해서 나와 봤어요. 그림 거는 일도 도와드릴 겸해서.”
“나 보고 싶어서 나온 건 아니고요?”
“…그런 것도 있고요.”
데칼코마니를 한 그림들이 마치 시체인 양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난 발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건너가려다가 젖은 머리를 만져보고는 내딛으려던 걸음을 거두어낸다. 화장실에 수건이 있을 거야. 나를 보고 있었는지 현락씨가 눈가에 잔주름을 만들며 말한다. 시리도록 하얀 복도를 걷는다. 복도에 걸려있던 액자는 모두 비어있다. 한쪽으로 붙어 서서 밋밋한 벽을 손으로 집어가며 조심스럽게 걷는다. 화장실 안은 세 번째 칸을 빼고는 문이 활짝 열려있다. 바닥이 말라있지 않고 흠뻑 젖어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누군가가 청소를 한 모양이다.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선다. 난 테두리에 조밀하게 맺혀있는 물방울을 보면서 여기까지 비가 내렸는지 생각해본다. 물을 틀자 거울에 맺힌 물방울들이 하나 둘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난 좀 더 세게 물을 튼다. 그리고 새겨진 비누 이름이 아직 남아있는 비누로 손을 가득 감싸 쥔다. 비누는 미끄러지지 않고 손안에 머문다. 금방 손에 가득 하얀 거품이 생긴다. 손금까지 꼼꼼하게 거품이 들어찬다. 그리고 잠시 나를 바라본다.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자세히 바라본다. 쌍꺼풀이 없는 내 눈 속에는 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손을 씻을 때 난 일부러 거칠게 비벼댄다. 울긋불긋 달아오른 손을 아버지가 머물러있는 병원에서 본 타월과 똑같은 빛깔의 타월로 닦는다. 바싹 말라있던 타월에 얼룩이 생겨났다.
세 번째 칸에서 나온 것은 그 소년이다. 눈매가 뾰족하다는 것만 기억되던. 물소리에 소년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스며든다. 소년은 나를 쳐다보면서 나간다. 그리고 나도 곧 소년을 뒤따라 나간다.
“선생님은 내 이름 알아요?”
“아니, 아직…”
“난 선생님 이름 아는데… 윤주……. 선생님,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요.”
내 이름이 불려지자 난 잠시 놀랐다. 소년은 팔을 걷어붙이고 손을 어항 속에 넣는다.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손은 금붕어와 부딪힌다. 화장실 앞에 놓인 어항 속에 있던 금붕어들의 움직임이 급해진다. 공기방울이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갈 시간도 없어 보인다. 정말 힘이 없어요. 소년은 계속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물은 점점 흐려져 간다. 물레방아가 쓰러지고 자갈 밑에 깔아두었던 하얀 솜이 드러났다. 소년은 금붕어를 움켜쥐려는 것 같지만 금붕어는 쉽게 잡혀지지 않는다. 다른 한 쪽 손을 마저 어항 속에 낳으려는 소년을 간신히 막았다. 소년의 손이 끈적하다. 내 손목을 잡던 진혁오빠의 손과 비슷하다. 소년은 그제야 다시 나를 쳐다본다.
“누가 내 옷을 벗긴다고 해도, 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 할 거예요.”
기어이 금붕어 한 마리를 손에 쥐었다. 빨간 비늘이 고운 금붕어는 지쳤는지 물에서 꺼냈는데도 가만히 있는다.
난 소년의 손을 좀 더 세게 잡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미술치료실 안으로 이끌어낸다. 불이 꺼진 안에는 창가의 쇠창살 틈으로 쉴 새 없이 빗소리가 파고들고 있다. 이제 소년의 얼굴이 희미하게 윤곽만 잡힌다. 달려오는 게 힘들었는지 숨이 서로 거칠다. 나는 마치 미끼를 던지는 것처럼 뒤에 잡고 있던 소년의 손을 이끌어 내던진다. 넓은 책상 위에 누워있는 소년이 점점 드러난다. 난 그 위로 올라가 벌어진 소년의 팔 사이에 무릎을 끼워 넣고 앉는다. 허벅지 끝쯤 소년의 단단해진 성기가 느껴진다. 줄무늬 남방의 단추를 하나씩 뜯어내듯이 풀어낸다. 그러나 난 단 두 개의 단추만을 풀어내다가 소년의 입술에 입을 가져가 댄다. 강렬한 차가움이 순식간에 몸속에 빠져든다. 이미 단추는 한꺼번에 다 풀어져있다. 안의 셔츠를 걷어 올리고 부드러운 소년의 배와 갈비뼈를 하나씩 쓰다듬는다. 조금 더 깊숙이 누른다면 부수어질 것만 같다. 굳이 깊이 찔러보지 않아도 여린 떨림은 이미 밖으로 나와 있다. 소년은 가슴을 핥을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마치 어딘가에 단단히 묶여있는 것 같다. 소년의 손을 내 가슴속으로 들이민다. 수줍게 움직이는 손이 간지럽다. 난 허벅지를 들어 무릎을 뒤로 하고 소년의 바지를 벗겨 내린다. 쉽게 벗겨지는 바지 안의 팬티는 묘하게 끈적거린다. 끝을 잡고 천천히 벗겨 내리자 성기가 불쑥 올라온다. 아직 성숙되지 않아 음모도 듬성듬성 나있다. 끈적한 성기를 꼼꼼히 핥다가 입 속에 넣는다. 소년의 입술에서 얇은 소리가 새어나온다. 비린내는 맡아지지 않는다. 이제 그만 가. 난 낮게 중얼거리며 동굴 같은 음성을 내뱉는다.
마치 진혁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 그래, 당신. 언젠가는 당신에게서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했어. 근데 왜 그게 안 되지? 당신 앞에서는 내가 짐승 같아. 견딜 수도 없이. 더러운 짐승같이, 그렇게 느껴져. 그런대도 내가 당신 옆에 있어야만 해? 사랑? 아니잖아. 그런 거 아니잖아. 동그라미를 그려내듯이 이어지는 섹스. 어떤 날에는 교통사고 사망자 명단에 당신의 이름이라도 나오면…… 난 행복했어. 분명 당신이 아닐 텐데. 누군가가 내 삶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아. 지겨워. 당신. 그래, 당신.
은행나무! 은행나무!
밤새 내린 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친 모양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사방에서 은행나무를 속삭였다. 미술치료실 안은 그대로였다. 그림이 차있는 액자들이 복도에 걸려있다. 현락씨가 다가와 급히 내게 말한다.
“윤주씨, 어서 경찰이랑 여기저기 연락을 해놔요.”
지난밤에 소년은 여자화장실에서 자살을 했다. 경찰들이 몰려와 수근거렸다. 독하게 죽었다고. 진짜 죽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목을 매어 자살하는 사람들은 사실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했다. 목을 옭아매는 고통이 극도에 다다랐을 때 사람들은 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나 소년은 다리만 뻗으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굽었던 다리만 펴면 바닥에 닿는데. 고통이 가득 찰 때까지 다리를 펴지 않았다. 우울증 환자는 보통 우울증이 거의 회복될 때 자살을 시도한다. 우울증일 때에는 자살조차 하기 힘겨우니까. 소년은 자살을 했다. 나는 할 수 없는.
“혹시 이번 사건에 대해 아시는 점이나 의심 가는 부분이 있습니까? 이상한 점이라던가…….”
“아뇨, 없습니다. 전혀.”
*
오늘은 견뎌내고, 다시 내일은 견뎌낸다면… 이듬해 봄도 견뎌낼 수 있겠지.
어느 순간 나는 이제 모든 것이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난 아직 한주아파트 608호에 산다. 그 사이 아파트단지에는 깔끔하게 보도블록이 깔리고 쓰레기 배출량이 많아서 하루에 두 번씩 쓰레기차가 다녀간다. 새로 생긴 쇼핑타운에 병원이 들어서면서 약국에는 이제 더 이상 「의약분업예외지역」이라는 종이가 붙지 않았다. 가을쯤에는 앞에 초등학교가 하나 들어선다고 한다. 이제 저녁때 주차를 하려면 단지를 몇 바퀴 돌아야 겨우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쯤이면 상호이름의 편지가 한 통 더 올 것이다. 그때마다 진혁오빠는 뜯기 쉽게 살짝 붙여진 편지를 뜯어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단단하게 입구를 봉하고 편지함에 넣어놓은 후 내게 말할 것이다. 너 상호란 사람한테 또 편지 왔더라. 내 글씨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이제 더 이상 첫사랑이었던 상호에게 편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난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이 더는 없다. 상호란 이름으로 내가 내게 편지를 쓰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벌써 봄이 다 지나갔다니 좀 억울하지 않아? 난 발코니로 가면서 가만히 중얼거린다. 사랑은 뷔페 같았다.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에서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덜어 와야 했다.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약간의 음식만 덜어오기도 하고 욕심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음식을 가져오기도 한다. 부족할 땐 상관이 없지만 남겼을 땐 벌금을 내야한다. 어쩌면 벌금이 먹은 음식값보다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벌금을 내면 그 뿐이다. 세상에 뷔페는 도처에 널렸으니까.
미술치료실 자리에는 이제 공예강좌실이 새로 들어섰다. 지금쯤이면 은행나무 가지에는 오톨도톨 돌기처럼 새싹이 한 층 더 붉어져 잎새를 터뜨릴 것이다. 하지만 가을이 되어서도 두 은행나무 사이에는 은행이 열리지 않겠지.
꽃 진 자리
저는 마음에 드는데 그이는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남편이랑 아이랑 다시 올게요.
서른의 문턱을 넘는 발걸음과 마흔의 문턱을 넘는 발걸음은 전혀 다른 형태의 감정을 만들어 낸다. 서른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마흔이란 아주 더디게, 내가 아직까지 이 나이인 것이 지겨워질 때쯤 뿌연 그림자처럼 찾아올 줄 알았다. 이제 차츰 무뎌진 감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흔이란 것은 나에게 예전과는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다가와 무뎌진 감정을 날카롭게 만든다. 그러나 이 날카로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이에게도 나는 서른 살 어디쯤에 아직도 단단하게 묶여져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도 시어머니에게도 형님과 동서에게도 나는 그저 서른 후반쯤으로 밋밋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 날카로운 감정도 뭉뚝해져서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어느 날 갑자기 그이는 그런 말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벌써 마흔이란 말이야?
정교하게 짜여 진 식탁 위에는 투명한 유리가 정갈하게 깔려져있다. 식탁 한가운데에는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장미가 꽂혀있는 꽃바구니가 놓여 있다. 그이가 보면 당장 치우라고 격앙도니 음성을 낼 것이다. 입고 있는 검은 치마를 한 번 쓸어내리고 식탁의자에 조심스레 앉는다. 금색 테가 둘러져있는 찻잔은 비어있다. 커피메이커 안도 역시 비어있다. 천장에는 촛불처럼 솟은 전등이 빵을 구울 때와 같은 연한 갈색을 띈다. 그이는 전등 빛이 닿은 내 손이라면 쓰다듬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스오븐레인지 위에는 큰 냄비가 뚜껑을 비스듬히 연 채로 올려 있다. 냄비 안도, 차갑지 않은 냉장고 안도 비어있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누군가가 열어볼 줄 몰랐던 것처럼. 그이와 아이는 오늘 저녁 반찬에 뭐가 나올지 궁금해 할 것이다. 저는 마음에 드는데 그이는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화장실 바닥에는 물때하나 끼어있지 않다. 꽃이 새겨져 있는 세면대 안에는 투명한 유리구슬이 한 움큼 들어있다. 수도꼭지를 틀어보지만 물은 안 나오고 마른 공기만 피식 새어나온다. 저 구슬은 오래 전 물방울이 화석처럼 굳어진 것일까. 아이는 세면대 위에 새겨진 꽃무늬를 계집 아이 같다며 지우고 싶어 할 것이다. 세면대 위에는 외제향수가 가득 차 있고 뒤에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수건이 흐트러짐 없이 걸려있다. 욕조 앞에는 통유리가 있고 하얀 커튼이 끝까지 밀려나와 있다. 욕조 안에는 아무도 없는데 마치 누군가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바깥에는 실내화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안마형 샤워기. 시어머니께서 좋아하실 만한 욕실이다. 나중에 남편이랑 아이랑 다시 올게요.
가구는 모두 한꺼번에 마련한 듯 일정하다. 액자형 텔레비전이 걸린 맞은편에는 방금 누군가가 앉았는지 구김이 잔뜩 내려앉은 소파가 있다. 그 옆으로 베란다가 나 있지만 앞은 벽에 막혀있다. 액자에는 가족사진 하나 없이 그림들만 걸려있다. 그림만 보아서는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을 상상하기 힘들다. 이 집은 빨래 하나 걸려있지 않고 더렵혀진 접시 하나 없는 곳이다. 잠시 손과 앞이 막혀있는 실내화를 신은 발이 시려온다.
“사모님 또 오셨네요.”
“…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런 기회 이젠 정말 없습니다. 아까운 기회예요. 터미널이랑 역이랑 가까운 것은 물론이고, 최신식 시설을 갖춘 C초등학교와 명문으로 소문난 N중학교와도 가까워요. 자녀분이 충분히 걸어서 통학할만한 거리죠. 거기에 애들 집어넣으려고 부모님들께서 안달이시잖아요. 여기에 입주하시면 아주 유리한 조건에 놓이게 되죠. 거의 간다고 봐도 무관합니다. 대형할인마트에 조각공원까지 옆에 있는데 뭘 망설이세요? 이번 기회 놓치시면 정말 두고두고 후회하실 겁니다. 뭐 저희 건설이야 워낙에 유명하니 모르실 리 없을 테고. 오늘 이렇게 나오신 김에 계약하고 가시죠. 36평형은 이제 거의 다 나가서 최상층이나 최하층밖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점점 크는 자녀 분 생각을 하신다면 넉넉하게 49평형 정도는 하셔 야죠.”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내게 따라붙는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소지품처럼 내게 매달려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마흔의 여자에게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생소한 것들이 많아진다. 난 이 감정을 느껴보려고 모델하우스 안에 있는 것일까. 그는 오렌지 주스를 한 손에 쥐어주며, 카탈로그를 펼쳐서 재봉틀 같은 음성을 계속 내뱉는다. 내게 모델하우스 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빠르게 다가온다. 저는 마음에 드는데 그이는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남편이랑 아이랑 다시 올게요. 저는 마음에 드는데…
“사모님 계약하시겠습니까?”
“아뇨, 됐어요. 저는 마음에 드는데…… 어차피 살 생각은 아예 없었어요. 그럴 형편도 안 되고. 그냥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하려고 왔어요. 수고하세요.”
아무 곳에나 주스 잔을 내려놓고 그물에서 벗어난 물고기처럼 서둘러 안을 빠져 나온다. 현관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가족들과 살짝 부딪힌다. 내 나이쯤으로 보이는 여자와 어깨를 마주칠 뻔하지만 그 여자는 유연하게 몸을 옆으로 튼다. 조심하셔야죠. 왠지 그 여자는 이 모델하우스와 어울려 보인다. 내게 따라 붙으며 설명을 늘어놓던 남자는 이제 그 여자에게 따라붙을 것이다. 찬 오렌지 주스 한 잔도 잊지 않겠지. 저 여자도 마흔 살을 넘는 문턱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새 36평형은 다 나갔는지 36평 모델하우스 입구에는 빨간 테두리가 둘러져있고 그 테두리 가운데에는 이미 분양이 끝났다고 써져 있다. 불이 꺼진 입구는 이제 하나의 구멍이 되어버린다. 모델하우스 문을 열자 더운 바람이 나를 덥석 안는다.
*
잎은 아직 매끈하다. 채 한 뼘도 자라지 않은 줄기도 아직 단단하지 못하다. 잎이 몇 장 더 나오고 줄기는 단단하게 굵어져 마디가 뚜렷하게 잡혀야할 것이다. 그리고 잎 가장자리도 톱니바퀴처럼 거칠어질 때쯤이면 서서히 꽃봉오리가 생길 것이다. 수돗가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다가 손가락 끝으로 물을 뿌린다. 그리고 남은 물을 기름진 흙 위에 고스란히 부어주고 화분을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옮겨놓는다. 줄기와 잎이 파르르 떨리면서 물이 튄다. 예전에 아이는 화초에 물을 주는 것을 참 좋아했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며 흙 속으로 물이 다 스며들 동안 화분을 바라보고 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으로 난 작은 공터에는 열 개 남짓한 화분들이 키를 맞추어 서있다. 2층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창고로 쓰기 위해 공터의 반을 사들이고 병원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병원 측에서 미관상 안 좋다는 이유로 담을 쌓아버리면 화분은 버려져야할 것이다. 그 전에 꽃이 피었으면 좋으련만. 병원 정원 쪽에서 매미의 긴 울음소리가 떨려온다. 부수어진 바닥의 콘크리트 조각을 쓸어내고,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찍혀진 도둑고양이 발자국이 그대로 굳어진 바닥을 밟아 기사식당 맞은편에 있는 2층 집 안으로 들어선다.
짙게 녹이 슬어있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다. 머리 위를 덮고 있는 천막이 처음에는 파란색이었는데 이제는 햇살이 그대로 비춰질 정도로 색이 바래져있다. 문은 한 번에 열리지 않는다. 녹이 손에 묻을까봐 살짝 쥔 손잡이를 그 위에 새겨진 무늬가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꽉 쥐고서 몇 번 더 힘을 주어야 문은 거친 신음소리와 함께 열린다. 집 안은 동굴 속 같다. 반투명 슬레이트 지붕으로 안개처럼 뿌옇게 햇살이 비친다. 길다랗게 이어진 방들이 분무기로 뿌린 것처럼 흐릿하다. 방은 세 개가 이어져있고 맨 끝 문은 부엌문이다. 그리고 부엌 옆으로는 예전에 연탄을 쌓아 놓았던 자리에 쓰레기봉투 하나가 반도 못 채워진 채로 앉아있다. 첫 번째 방은 수선 집이다. 아주 오랫동안 수선을 해온 것을 매번 강조하던 여자가 앉아 있을 것이다. 문에 귀를 대고 있으면 귓속으로 재봉틀 소리가 착착 한 겹씩 감겨온다. 두 번째 방에는 치킨박스가 가득 있을 것이다. 아래층에서 통닭집을 하는 부부가 창고로 쓰기도 하고 가끔 둘이 교대로 낮잠도 자는 방이다. 저 방에서 둘이 함께 잠을 잔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방과 부엌이 나와 남편과 아이가 쓰는 방이다.
문 바로 아래에 복도의 반쯤을 차지하고 있는 수돗가를 빗겨서 발을 내딛는다. 수도관에는 지난겨울, 얼까봐 감아두었던 스펀지가 그대로 감겨있다. 스펀지는 많이 뜯겨져있다. 다시 겨울이 찾아온다면 새로 스펀지를 입혀야할 것이다. 첫 번째 방과 두 번째 방 사이에는 보일러가 놓여 있고 두 번째 방과 마지막 방 사이에는 커다란 신발장이 놓여 있다. 신발장 안에는 신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축구공이나 접히지 않는 우산 같은 것도 함께 들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방과 부엌 사이에는 가스통이 놓여 있다. 비가 내릴 때마다 지붕 사이로 벽을 타고 벌레처럼 내려오던 빗물은 복도에 긴 웅덩이를 만들어낸다. 웅덩이는 쓸어내도 다음 날이면 다시 생겨났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도 벽을 타고 벌레처럼 빗물이 내려와 웅덩이를 만든다. 별안간 슬레이트 지붕 위로 후두둑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간다. 고양이 그림자는 복도 끝까지 이어진다. 창문이 없는 벽을 어깨로 쓰다듬지 않으려고 몸을 빗겨 복도를 지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다. 첫 번째 방 문 앞에는 양장점 여자의 검은 슬리퍼가, 두 번째 방 문 앞에는 통닭 집 남자의 낡은 운동화가 놓여 있다. 그리고 유난히 색이 바랜 마지막 방 문 앞에는 누구의 신발도 놓여 있지 않다. 오래 전 이사 오던 날, 방에 반이나 차지하는 큰 농을 들여놓느라 벽에 생긴 깊은 생채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장식이 없는 구두를 벗어 신발장 안쪽 깊숙이 넣어놓고 방안으로 들어선다. 양장점 여자는 아직 구두가 없어진 줄 모르는 것 같다. 그녀의 발은 나보다 한 치수 작았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발을 오므리고 있었다. 구두를 벗고도 발은 한동안 곧게 펴지질 않는다. 문을 닫자 양장점 집 여자의 재봉틀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두 손으로 가려질 창문을 연다. 창문을 열어도 바람은 들어오지 못한 채로 부러지는 것 같고 병원 앞 주차장에서 들리는 지저분한 차 소리만이 들어와 방안에 번지기 시작한다. 방 한가운데에 있던 형광등은 큰 농이 들어서자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 누군가가 형광등에 대해서 얘기했을 때는 그이도 나도 원래 형광등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차츰 그이도 나도 좁은 방 한쪽으로 형광등이 치우쳐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보 형광등이 왜 이렇게 천장 구석에 매달려있지? 글쎄요. 처음부터 그랬잖아요. 아… 그랬나? 떨어진 사탕주변에 까맣게 모여든 개미들처럼 액자 속에는 빈틈없이 사진이 꽂혀져 있다. 전체가 드러난 사진은 한 장도 없어 보인다. 어떤 사진이든 조금씩 한 부분이 가려져 있다. 화장대와 4단 짜리 서랍장을 놓자 방안에는 더 이상 뭘 놓을 수가 없었다. 서랍장 모서리와 농문이 맞물려 서랍장 모서리는 하얀 속살을 오랫동안 드러내고 있다. 그 사이에 껴있는 아이의 공부책상은 다리를 접힌 채 농 문이 열릴 때나 가끔 덜그럭 소리를 낸다. 세 평 남짓한 이런 방에서는 세 평짜리 행복밖에는 느껴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던 그이였다. 지금 내 감정은 그가 그어버린 선을 넘지 못하고 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마흔이란 남편을 ‘그’라는 남자로 부르기도 많이 껄끄러워질 수 있는 나이다.
기사식당 안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몇 겹으로 겹쳐져서 나온다. 나는 오래된 쟁반에 가득 반찬과 밥그릇을 얹고 복도 안을 빠져나간다. 손톱 끝으로 쟁반 가장자리가 긁히는 느낌이 날카롭게 베인다. 시선을 아래로 흘렸을 때 발이 안 보인다는 것은 오랫동안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가져다준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손톱은 자꾸 쟁반 끝을 긁어댄다. 두 번째 방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고 수선 집 여자의 방 앞에는 자장면 그릇이 신문지를 덮지도 않은 채로 그녀의 검은 슬리퍼 옆에 놓여 있다. 보일러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 다시 문을 연다. 문은 바깥에서 열 때와는 달리 깔끔하게 끝까지 열린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에 이제 난간은 없어졌다. 얼마 전까지 검은 테이프가 촘촘하게 감겨져있는 철제 난간이 있었다. 촘촘한 검은 테이프 사이로 녹슨 물이 흘러나올 때까지 건물 주인은 난간을 새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올해 봄에 사람들을 불러 난간을 뜯어냈다. 그러나 새로 난간을 만들지는 않았다. 주인은 이제 이 건물에서 난간이 없어서 계단을 무서워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정말 이제 아이는 난간 없이도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을까. 잡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나는 화분 앞에 생선조각을 놓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고양이는 생선만 집어먹고 화분들은 건들지 않을 것이다. 모종의 약속이다.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뒤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택시 운전기사들의 웅성거림을 듣게 된다. 그래도 내 걸음은 빨라지지 않는다.
“당신 밥할 때 딴 생각했지?”
“예? 아니… 왜요?”
“프라이가 왜 이리 밋밋해? 소금 대신 설탕 넣은 거 아냐?”
낮은 책장 위에 쟁반이 놓이고 그이는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좁은 가게 안에 빼곡하게 들어 차있는 작은 책장이나 장식장, 텔레비전 받침대, 문갑 따위들이 복잡한 미로를 만들었다. 가게 밖까지 늘어져 있는 이런 것들은 미로가 터져 새어나온 것 같다. 매일 쟁반이 놓이는 이 낮은 책장은 그이가 쟁반이 치워질 때마다 마른 걸레로 닦는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팔수는 없을 것이다. 난 잠시 수저를 들다말고 책장 안을 손으로 저어본다. 비어있다는 것이 눈으로 보일 때와 손에 아무 것도 잡혀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느껴질 때는 조금 다르다. 가게 안은 비어있는 책장들로 가득 차있다.
“미안해요. 제가 정신이 없었나 봐요.”
점점 그릇들이 지저분해지고 단단하게 마르기 시작한다. 그 사이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이 내 뒷목을 감았다가 끌었다가를 반복한다. 그이가 소리를 내며 부주의하게 물을 마시고 라디오가 켜지자 낡은 음성들이 쏟아져 나온다. 일어나서 장식장 옆으로 몸을 돌리자 그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아선 나의 모습도 그이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 이번 주말에 명숙이 딸 결혼식 가요.”
“뭐? 결혼식?”
물을 마시던 그이가 컵을 내려놓자마자 난 좁은 틈에 들이밀 듯이 말을 한다. 급히 쟁반을 쥐었을 때 다시 끝에서 느껴지는 금속의 날카로움에 잠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숨은그림찾기에서 이미 찾았던 것을 다시 바라보듯이 선명해진 문을 찾아서 가게 안에 책장들이, 장식장들이 만들어낸 미로를 헤맨다. 낮에도 불을 켜야만 하는 가게 안의 어두움은 매번 문을 나설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다. 라디오 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가게에서 나와 위층을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박스 하나가 위에 얹혀있는 것 같다. 그 박스를 까만 전깃줄이 그물처럼 끌어안고 있다. 올라가는 계단은 여섯 개의 가게들 한가운데에 구멍처럼 나있다. 빨간 돼지저금통 몇 십 개가 묶여 꽃처럼 문방구 앞에 달려있다. 계단 바로 옆에 있는 통닭집을 지날 때면 요란한 환풍기 소리와 함께 누런 기름 냄새가 다가온다. 처음에는 투명했던 창이 이제는 닭을 튀기는 남자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누가 본다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줄 알 것 같다. 환풍기 앞에는 검은 그을음이 딱딱하게 윤기를 내고 있다. 계단 오른 편으로 나있는 스포츠기구 상설 할인 매장은 며칠 동안 문을 닫고 있다. 들어가는 문 앞에는 주인의 핸드폰 번호와 함께 조그마한 글씨가 얇게 써져있다. 점포 세 줌. 아래에 붙인 테이프는 벌써 떨어지고 주름이 잡힌 위쪽 테이프만 간신히 종이를 잡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위태롭다. 첫 번째 계단 옆으로는 공동화장실이 나있다. 견고한 철문으로 닫혀져 얼마 전부터 자물쇠를 채워놓고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열쇠를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누군가의 변이 화장실에 그대로 있고 나서부터였다. 화장실에는 물이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수돗물을 받아서 써야한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화장실을 썼다면 분명 기사식당 손님일거라고 수선집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기사식당 아줌마는 화장실을 가는 손님에겐 그런 일을 일일이 다 알려준다고 했다. 그리고 식당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얼마나 껄끄러운지 아냐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화장실 문 아래에 뚫린 구멍으로 잠시 서늘한 바람이 나와 내 발목을 스친다. 다행히 계단을 오르는 동안 식당에서 나오는 손님들과 마주치지는 않았다. 화분 앞에는 수도관을 감고 있는 스펀지보다 더 잘 뜯겨진 생선조각이 있다. 그새 화초는 더 커 보인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와 냉장고 위에 붙어있는 종이를 떼어 벽에다가 대고 적기 시작한다. 보험회사 이름이 흐리게 찍혀있는 종이는 다시 냉장고 위에 붙여진다.
18일 화요일 시아버지 제사준비, 20일 목요일 어머니회 참석, 화분에 하루 한 번 물 주기, 염색하기, 23일 일요일 명숙이 딸 결혼식 가기. 냉장고 위에 종이가 붙여져 있는 것을 그이도 아이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이와의 관계는 끊겼다. 어떤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 전에 그렇게 되어버렸다. 통닭 집 유리창처럼 어느 샌가 투명했던 창이 불투명해졌다. 월경일이 고르지 못하고 점점 끊어지기 시작하자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런 것들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물그림자가 비친 듯 엷게 주름이 잡혀가는 내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건조함이 손가락에 따라 붙는다. 나는 모레처럼 점점 건조해져 간다. 내 몸의 꽃도 건조함으로 딱딱해져 간다. 아래로 손을 가져가 긁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붉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손끝이 함께 붉어지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냄새가 차오른다. 다시 손을 아래로 가져가 살며시 부수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싸 쥔다. 거짓으로라도 날 사랑해야하는 그이가 지금 나를 쓰다듬는다고 해도 난 뒤돌아 누울 것이다. 나의 건조함이 그에게는 관계를 맺을 때 선인장 숲을 헤매고 다니는 감정을 전해줄 테니까.
아이는 들어오자마자 아이스크림부터 찾는다. 교복 뒤에 찍혀있는 땀자국이 아이의 뒷모습을 덥고 눅눅하게 만들어낸다. 아이의 입 주변이 거뭇거뭇해질 때마다 목 아래 돋아난 여드름과 커진 키를 볼 때마다 난 조심스러워진다. 선풍기를 가장 세게 틀어놓고 교복을 벗어 바람을 쐬는 아이의 등은 이제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신발이나 옷을 사러갈 때에도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제 아이는 난간이 없는 계단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나 옷 갈아입을게.”
“그래.”
“참, 이번 주 일요일에 엄마 친구 딸 결혼식이 있어서 집 비울 거야. 아빠도 가게일 하실 거고.”
“그러면 집에 나 혼자 있는 거야? 혼자 있기 싫은데. 이럴 땐 형이나 누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목요일에 있는 어머니회는 알지?”
난 밖에 서서 말을 하고 아이는 안에서 말을 한다. 서랍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난 방문을 연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관계는 아이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이가 혼자 자라긴 했지만 그것이 문제될 건 없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은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고 착실한 아이라고들 했다. 가끔 내가 혼자 자라는 것이 외롭지 않느냐고 물으면 단번에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하곤 했다. 아이에게 형이나 누나가 있었으면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을까.
아이가 나간 방은 먼지처럼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단지 선풍기를 가장 약한 바람으로 바꾸었을 뿐인데도. 일요일에 쓸까, 하고 카메라를 꺼내다가 밑에 깔려있는 사진들을 몇 장 보게 된다. 지난 봄, 아이의 입학식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사진 속 아이는 얼마 전의 모습인데도 마치 오래 전 사진을 앨범에서 찾아낸 것처럼 낯설다. 농 위에 꽂힌 앨범을 꺼내어 사진을 꽂는다. 앨범에는 이제 사진을 꽂을 빈 페이지가 얼마 남아있지 않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새 앨범을 사야할 것이다. 예전 앨범의 맨 뒤 페이지에 꽂힌 사진과 새 앨범의 첫 사진은 뚜렷한 구분이 없이 이어지는 사진이지만, 난 나도 모르게 그 둘 사이를 구분할지도 모른다. 내 생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만큼 단조로울 때, 난 내 생을 첫 번째 앨범에 담긴 것과 두 번째 앨범에 담긴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새해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금처럼 앨범을 혼자 꺼내본 적이 있었다. 이걸 다 언제 채우지. 반도 안 채워진 앨범을 두 번째로 보고 있었는데 아이가 문을 열더니 거친 숨을 쉬면서 내게 물었다. 엄마 이상해. 뭐가? 식당 아줌마가 나 한 살 더 먹게 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나는 오랫동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진을 꽂고 앨범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나갔던 아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칠게 숨을 쉬면서 느슨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엄마, 나 오천 원만.”
앨범의 첫 페이지에는 그이와 나의 결혼식 사진이 꽂혀있다.
*
―그러 길래 내가 애초에 결혼을 전제로 해서 가지는 만남은 싫다고 했잖아.
―너 정말 이럴 거야? 인물도 저만하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고 시내에 자기 손으로 가구점까지 떡하니 하나 굴리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다시 한 번 찬찬히 생각해봐. 언니 얼굴을 봐서라도… 응?
―몰라.
개울 건너에 사는 동네 언니가 시집을 간 뒤로는 얼굴보기가 뜸해지더니 한 계절이 지나서야 다시 동네에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빗질을 해놓은 것처럼 잘 심어진 고추밭을 돌아서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면서 시내로 나가자고 했다. 일도 한가해지고 신작로에 나가본지도 오래되어서 나는 선뜻 언니를 따라 나섰다. 언니가 꽃무늬 원피스와 리본이 달린 구두를 빌려줄 때 알아 봤어야하는 건데. 입술에 연한 분홍빛 립스틱까지 발라주고 레이스가 달린 양산까지 씌워주면서 정류장까지 걸어 나와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터미널 지하에 있는 다방에 도착했다. 난 언니가 자기 신랑을 소개시켜주겠거니 했다. 그 사이 언니는 손수건으로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여기예요. 진선아, 인사해. 우리 시동생이야. 잘 생겼지?
―응. …언니.
난 수족관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계속 언니와 그 사람을 돌아가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신문지를 반으로 접어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 내 머리카락이 조금씩 날렸다. 반바지를 입고 벌린 그의 종아리는 찰흙 덩어리처럼 위로 쓸어 올려져 뭉쳐있었다. 그 위로 여기저기 긁힌 자국들이 선명하게 혹은 흐릿하게 나있었다. 땀에 젖어서 속이 다 비치는 셔츠를 입고 그 사람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웃음을 머금자 눈가에 주름이 가지런하게 잡히는 사람이었다.
―전 김준기입니다. 형수님한테 듣던 대로 미인이시네요.
그게 남편과의 첫 만남이었다. 일 년쯤 동안 몇 번 만났고 그보다는 편지를 자주 했다. 내가 다섯 통쯤 보내면 그에게서 한 통이 올까말까였지만. 시내에서 만난다고 해도 일이 바빠서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결혼을 약속한 거나 다름이 없는 우리는 그이가 돈을 어느 정도 모으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나는 결혼이 내 생의 모든 것을 보호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럴 때쯤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는 대부분 이런 내용의 것들이었다. 이제 돈 많이 번 거 아냐? 아냐. 아직 좀 더 벌어야 해. 나 일하는데 가보면 안 될까?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여자가 어딜 겁도 없이 혼자 시내를 나온다고 해? 때가 되면 내가 구경시켜줄게. 나 봉숭아물 새로 들였어.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그래도 우리 조금만 참자. 그이는 유난히 봉숭아물이 새빨갛게 들여져 있는 손가락을 가진 여자를 좋아했다.
오지 말라면 내가 못 찾아갈 줄 알고? 난 주말 아침 시내로 가는 첫 버스를 타고 그이가 운영하는 시내의 가구점을 찾아갔다. 언니가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며 약도를 그려줬지만 불안스럽기만 했다. 밤에는 시내에 내 또래 여자 애들을 붙잡아 가는 남자들이 설친다는 말에 해가 뜨지도 않은 짙푸른 새벽에 출발하면서도. 가구점은 시계방을 돌아 언덕길을 조금만 오르면 있었다. 언니가 그려준 약도와는 반대의 길이었다. 터미널에서 세 시간동안 돌아다니다가 가구점을 찾았다. 이른 아침이라 여기저기 장사를 준비하는 손길이 황망하게 움직였다. 수건을 목에 걸고 용달차에 가구를 싣고 있는 그이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처음으로 내 도장을 만들었을 때처럼 마음이 들썩거렸다. 난 건너편 구멍가게로 들어가 요구르트를 하나 사 마시면서 몰래 그이를 바라보았다.
―건너편 가구집 주인은 아침마다 저렇게 가구를 나르나 봐요. 사람들 시키지 않고.
―주인은 점심이 지나서야 나오는데…….
―저기 지금 책장 들고 나오는 사람이 주인 아니에요?
―아! 저 총각. 저기서 일 한지 몇 년 됐는데 곧 있으면 장가든다고 하던데… 사람 하난 참 성실하지.
―…예. 여기 요구르트 얼마예요?
나는 다시 시계방을 돌아 다시 터미널로 왔다. 괜찮았다.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내에서 가구점을 하고 있는 사장에게 딸을 시집보낸다며 좋아하던 엄마가 많이 무연하실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난 더 이상 그이에게 결혼을 서두르자고 하거나 가게를 구경시켜 달라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네 신랑 될 사람한테 말복 때 한 번 들르라고 좀 해라. 뭔 일도 좋지만 몸 생각도 좀 해야지. 내가 닭 한 마리 잡아줄 테니 그 날 하루는 가게 문 닫고 여기 좀 들르라고 해. 알았지?
―주인이 보내줘야 오지. 마음대로 올 수가 있나.
―오빠!
―그게 무슨 소리냐?
오빠가 어떻게 알았는지 며칠 후 저녁 밥상에서 엄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빠는 내 일기를 훔쳐봤을 것이다. 그때부터 오빠는 그런 자식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그이와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결혼을 했다. 이 층에 방 하나가 딸린 작은 가게를 마련할 보증금을 만들고 나서야.
첫 번째 아이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하얀 시트가 깔린 보건소 침대 위에서 죽었다. 나는 젖이 잘 나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언니는 돈을 받고 젖을 물리는 아이가 둘이나 있어 내 아이까지 젖을 물리기는 어려웠다.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내가 기억하는 거라고는 유난히 까만 아이의 머리. 그것밖에 없다. 눈도 못 뜬 얼굴도, 꽃봉오리처럼 움켜쥐고 있던 손도 아주 오래 전 일처럼 기억하지 못했다.
―이 사람은 누군지 알아보겠어?
―우리… 신랑.
―그럼 이 사람은 누구야?
―친정엄마. 우리… 엄마. 언니 이제 그만해.
언니는 내가 정신을 놓을까봐 누워있는 내 앞에 앨범을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하나씩 얼굴을 집어가면서 내게 이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봤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난 언니에게 형님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시어머니 앞에서야 신경 써서 형님이라고 부르지만 이렇게 둘이 있을 때는 그냥 언니라고 부르게 된다. 바닥의 그 차가움이 요즘도 가끔 내 몸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을 느낀다. 그 차가움은 늘 유난히 까만 아이의 머리를 동반한다. 그럴 때 그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결혼을 하고 나서는 엄마를 손님처럼 만나야만 했다. 집 안에 일이 있을 때나 만날 수 있었다. 가끔 생신이라고 찾아가서는 결국 하룻밤을 자지 못하고 막차로 떠나와야 했었다. 오히려 어둠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버스 안의 전등 불빛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과 함께 나를 쓰다듬었다. 그때마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며 친정엄마가 손에 쥐어준 지폐 몇 장이 주머니 속에서 만져졌다. 아마 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돈을 한 번도 그이나 시어머니께 말씀드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자주 집에 들려 밥을 먹고 내게 돈을 타가던 시동생은 지금의 아이를 낳았을 때쯤 세련된 동서와 결혼했다. 시내에서만 살아왔던 동서와 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모아두었던 돈은 그럴 때나 쓰여 졌었다.
첫 아이가 살아있었으면 지금쯤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커서도 그렇게 머리가 유난히 까맸을까.
*
모델하우스는 전 보다 더 북적이기 시작했다. 큰 평수는 잘 안 나가던 모양인지 분양가를 좀 낮춘다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델하우스는 다시 축제 분위기가 됐다. 점점 시들어가던 화환들이 치워지고 새로 포장된 화환들이 들어가는 입구에 늘어서 있다. 60평형과 79평형의 분양가를 낮춘다는 현수막도 길게 늘어져있다. 나에게 주스를 쥐어주며 아파트에 대해 설명하던 남자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와 나와서 들어가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아직도 귓가에는 그가 말끝마다 붙이던 사모님 소리가 남아있다. 그는 사모님이라고 불렀던 날 기억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앞을 지날 때마다 괜한 조바심이 났다. 처음에는 그가 날 알아 볼까봐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입구에 적힌 아직 분양이 안 된 세대수가 점점 적어질수록 난 괜히 급한 마음에 얼굴을 붉혔다. 우리 집에서는 어차피 분양할 수가 없는 아파트인데도. 게다가 24평형도 아니고 60평형, 79평형이라니. 그래도 언젠가는 아파트 분양에 마음을 졸일 날이 오겠지.
병원에서는 결국 담을 높이는 공사를 곧 시작하겠다고 했다. 화분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빨래 줄에 걸린 빨래들과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들이 환자들에게 안 좋다는 얘기를 했다. 식당은 공터의 반을 창고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새 봉숭아는 붉은 꽃봉오리를 매달고 있었다. 꼬옥 쥔 주먹처럼 꽃봉오리는 가득 차 있다. 밑이 제법 붉어진 줄기가 유난히 단단해 보인다. 곧 꽃이 필 것이다.
“명숙이 걔가 사위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얻었지. 사실 명숙이 딸이 인물이 좀 빠지잖니.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남자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지. 너도 일요일 날 올 거지? 다들 네 소식 궁금해 하더라.”
“그럼. 가봐야지.”
“그래. 그럼 일요일 날 보자. 애 아빠 들어올 시간 다 됐다.”
전화를 받는 동안 머리는 거의 다 말려져 있었다. 멋내기용 자연 갈색 염색약이 전화기 옆에 거꾸로 세워져있다.
몇 번 시계를 쳐다보는 동안 예리하게 날이 선 염색약 냄새는 많이 무뎌져있다. 이젠 코 속으로 깊숙하게 찔려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있을 정도다. 비닐장갑을 끼고서는 답답해서 도저히 염색약을 바를 수가 없다. 아무 것도 끼지 않은 맨손이 낫다. 손바닥은 염색하는 동안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따가웠다. 쉽게 씻겨 질 줄 알았던 염색약은 수돗물을 제일 세게 틀어놓아도 잘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손톱 끝에는 볼펜으로 선을 그은 것처럼 검은 줄이 생겼다. 그리고 손톱 위에는 매니큐어를 칠했을 때보다는 조금 여리게 어두워져있다. 나는 어차피 손톱 위에 봉숭아물을 들일 거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봉숭아물은 어두워진 손톱 위에 물들어 손톱을 붉게 만들어줄 것이다.
염색은 전혀 되질 않았다. 물로 헹구고 나서 거울 봤을 때 검은머리 그대로였다. 그것이 산화제와 염모제를 잘 안 섞었기 때문인지, 시간을 잘 못 맞췄기 때문인지, 빗질을 잘못해서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화가 난 듯이 거칠고 뻣뻣해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무뎌졌던 염색약 냄새는 머릿속에서 다시 날을 세우기 시작한다.
“내 이름은 왜 안 넣었어요?”
“당신이야 그냥 결혼식 날 내 옆에 앉아있으면 되는 거지.”
“아니, 이름도 없이 그냥 앉아만 있어요?”
형님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있다가 몇 달 지나서 아주버님도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형님이 돌아가신 병원은 싫다고 하셔서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리 오랜 시간을 견뎌내시진 못하셨다. 그렇게 몇 번의 여름이 더 지나고 병우는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꼭 세 번째 맞는 형님의 기일에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여자를 데리고 왔다. 까만 안경을 낀 여자는 웃을 때에도 이가 드러나지 않았고 낮은 목소리만 냈다. 작은아버지가 되는 그이와 시어머니는 별 반대를 하지 않으셨다. 옆에서 동서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내게 비밀처럼 은밀하게 속삭였다. 여자가 좀 멍청해 보여요.
그이가 들고 온 청첩장에는 내 이름이 없다. 사돈댁 이름 두 칸을 그이의 이름이 가운데에 차지하고 있다. 마치 전 김준기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하다. 난 청첩장을 들어 손으로 찢기 시작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청첩장은 이미 친지들에게 다 돌리고 남은 마지막 한 장이었다. 단 한 번에 그이의 이름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내 이름이 생각 안 났던 건 아니고요?”
“무슨 소리야? 당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자꾸 왜 그래?”
갈라진 그이의 이름을 밟고 이층 부엌으로 달려간다. 난간이 없는 계단이 순간 아찔하게 다가오고 좁은 복도가 더 좁아진 것도 아닌데 양장점 여자의 검은 슬리퍼가 나로 인해 흐트러진다. 창문이 없는 복도에 여러 번 부딪히고 매번 잘 빗겨갔던 수돗가와 바닥에 생긴 웅덩이를 밟아 바닥에는 고르지 못한 내 발자국이 난삽하게 찍혀있다. 냉장고는 사나운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난 냉장고 위에 붙어있는 종이를 떼서 아래쪽에 여러 번 겹쳐서 글씨를 쓴다. 종이 뒤에는 선명한 자국이 생긴다.
18일 화요일 시아버지 제사준비, 20일 목요일 어머니회 참석, 화분에 하루 한 번 물 주기, 염색하기, 23일 일요일 명숙이 딸 결혼식 가기, 떠나기.
냉장고 위에 종이는 내가 잊지 않도록 해준다.
*
나는 신간코너 책장 아래로 밀어 넣은 책에 대해서 점원에게 되도록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제목과 출판사 그리고 크기나 가격, 두께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도. 서점 안은 순식간에 호수 속에 돌을 던진 것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일렁이기 시작한다. 책장 아래에 있는 책은 누구도 찾지 못할 것이다.
“어떡하죠? 분명 그 책이 있었는데… 분실된 것 같습니다. 다음주에 오시면 저희가 책을 가져다 놓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다음에 사죠.”
늦은 저녁이라 그런지 서점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난 종교․철학 코너를 지나 통유리로 된 테라스에 가서 앉는다. 이 층 아래에서는 로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난 창문이 없는 이 층 복도가 생각나서 끔찍스러움에 잠시 몸서리를 친다. 앉아있는 동안 신호는 한 번도 어긋나지 않고 그것을 어기는 차도 없다. 발밑으로 택시가, 지붕이 단조로운 버스가, 매끈한 스포츠카가 지나가는 것이 순간순간을 짜릿하게 만든다. 시청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는 표시판은 바로 내 눈높이에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주택가들이 레고처럼 쌓여져있다. 끄트머리에 앉은 남자가 다리를 흔드는 바람에 그 떨림으로 나도 다리를 움찔한다. 난 「전국도로교통관광지도」란 책을 사들고 서점 안을 빠져나온다. 지도 하나쯤은 있어야 될 테니까. 빠르면 오늘 서점 문을 닫기 전 점원은 신간코너 밑에 깔린 그 책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터미널로 가는 동안 우산을 접었다가 폈다하는 일이 자주 반복된다. K군으로 가는 버스는 자정쯤에야 한 대가 있다. 표를 끊고 빗방울이 더 굵어지면 우산을 펼칠 생각으로 간지럽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터미널 밖으로 나선다. 문득 모퉁이를 돌아가면 그이가 장식장을 용달차에 싣고 있을 것만 같다. 불이 켜져 있어도 벌써 의자를 테이블 위에 뒤집어서 얹어놓고 있어, 마땅히 들어가 밥을 먹을 만한 가게도 없어 보인다. 옆에 누군가가 바짝 다가와도 모를 것만 같은 터미널 밖이다. 시선을 돌리다가 별처럼 반짝이는 곳에서 멈춘다. 한동안 명멸하다가 가운데에 빨간색 불빛으로 글씨들이 하나씩 켜진다. 노. 래. 방.
노래방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또 하나의 구멍이다. 어둡기는커녕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구멍. 언젠가 내 구멍도 이렇게 화려하고 현란했었던가. 나는 점점 깊숙하게 파고든다. 30분만 주세요. 차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른 손님들은 없는지 안에서 노래 소리는 새어나오지 않는다. 가운데 테이블을 중심으로 소파가 둘러져 있다. 난 탬버린을 소리 나지 않게 밀어낸 다음 책을 들어 노래를 찾기 시작한다. 8834, 태진아, 사랑은 아무나 하나. 시작 버튼을 누르자 어두웠던 사방이 다시 한 겹 더 어두워지고 그나마 보였던 것들이 사라진다. 난 반주를 계속 들으며 책을 처음부터 펼쳐서 조금이라도 아는 노래가 있으면 예약을 한다. 반주가 다 끝날 때쯤 난 책을 거의 끝까지 넘겼다. 자세히 보니 책에는 노래가 순서대로 나와 있지 않다. 3월 신곡 뒤에 1월 신곡이 들어가 있는가하면 ‘나’로 시작되는 노래는 「나는 널 사랑해」에서 끊어져 있고 그 뒤에는 ‘다’로 시작되는 노래가 이어져있다. 다시 시작 버튼을 누르고 마저 책을 넘기기 시작한다. 아마 예약한 노래들은 반도 못 부를 것이다. 문이 완전히 닫혀 지지 않고 살짝 열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노래방에서 나올 때였다. 밖으로 내 목소리가 새어나왔겠지. 나는 노래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느꼈었던 감정을 안으며 노래방을 나왔다.
노래방을 나오자 내가 마지막 손님이었는지 들어가는 구멍과 간판의 불들이 한꺼번에 꺼진다. 내가 빠져나온 길이 안보이도록 노래방 안으로 들어가는 구멍은 진하게 어두워져있다.
“이런, 미친 년!”
노래방에서 나오자마자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내 목덜미를 잡는다. 건널목 건너편에서 나이가 좀 차 보이는 사내가 여자의 머리를 휘어잡으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그 속에 여자의 음성은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허공에 팔을 휘젓기는 하지만 그 손은 남자의 몸에 닿지 않는다. 건널목의 빨간 신호등이 그 둘을 비춘다. 남자는 이제 내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여자에게 말한다. 여자도 더 이상 팔을 휘젓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곧 남자는 여자의 머리를 놓고 여자는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핸드백 속에서 거울을 꺼낸다. 그리고 신호가 바뀌기 전에 그들은 택시를 잡아탄다. 택시를 탈 때는 남자가 뒷문을 열어 여자가 먼저 타도록 해준다. 신호가 바뀌자 난 서늘해진 뒷목과 머리를 감싸며 그들이 사라진 건너편으로 다가간다.
터미널에 들어가 펼쳐본 지도에는 K군이 나와 있지 않다. 조금 외진 곳이라고는 해도 여기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곳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도통 나와 있지 않다.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난 지도책이 만들어진지 십 년은 되었다는 것과 초등학교가 모조리 국민학교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내가 사는 곳을 지도에서 보니 이전되었던 시청이 예전에 있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고 강을 건너는 다리도 아직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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