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리토피아 신인상

신인상
수상자
투고작

전석순/단편/꽃 진 자리/06.07.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37회 작성일 06-07-20 14:40

본문

꽃 진 자리

  저는 마음에 드는데 그이는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남편이랑 아이랑 다시 올게요.
  서른의 문턱을 넘는 발걸음과 마흔의 문턱을 넘는 발걸음은 전혀 다른 형태의 감정을 만들어 낸다. 서른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마흔이란 아주 더디게, 내가 아직까지 이 나이인 것이 지겨워질 때쯤 뿌연 그림자처럼 찾아올 줄 알았다. 이제 차츰 무뎌진 감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흔이란 것은 나에게 예전과는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다가와 무뎌진 감정을 날카롭게 만든다. 그러나 이 날카로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이에게도 나는 서른 살 어디쯤에 아직도 단단하게 묶여져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도 시어머니에게도 형님과 동서에게도 나는 그저 서른 후반쯤으로 밋밋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 날카로운 감정도 뭉뚝해져서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어느 날 갑자기 그이는 그런 말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벌써 마흔이란 말이야?

  정교하게 짜여 진 식탁 위에는 투명한 유리가 정갈하게 깔려져있다. 식탁 한가운데에는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장미가 꽂혀있는 꽃바구니가 놓여 있다. 그이가 보면 당장 치우라고 격앙도니 음성을 낼 것이다. 입고 있는 검은 치마를 한 번 쓸어내리고 식탁의자에 조심스레 앉는다. 금색 테가 둘러져있는 찻잔은 비어있다. 커피메이커 안도 역시 비어있다. 천장에는 촛불처럼 솟은 전등이 빵을 구울 때와 같은 연한 갈색을 띈다. 그이는 전등 빛이 닿은 내 손이라면 쓰다듬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스오븐레인지 위에는 큰 냄비가 뚜껑을 비스듬히 연 채로 올려 있다. 냄비 안도, 차갑지 않은 냉장고 안도 비어있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누군가가 열어볼 줄 몰랐던 것처럼. 그이와 아이는 오늘 저녁 반찬에 뭐가 나올지 궁금해 할 것이다. 저는 마음에 드는데 그이는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화장실 바닥에는 물때하나 끼어있지 않다. 꽃이 새겨져 있는 세면대 안에는 투명한 유리구슬이 한 움큼 들어있다. 수도꼭지를 틀어보지만 물은 안 나오고 마른 공기만 피식 새어나온다. 저 구슬은 오래 전 물방울이 화석처럼 굳어진 것일까. 아이는 세면대 위에 새겨진 꽃무늬를 계집 아이 같다며 지우고 싶어 할 것이다. 세면대 위에는 외제향수가 가득 차 있고 뒤에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수건이 흐트러짐 없이 걸려있다. 욕조 앞에는 통유리가 있고 하얀 커튼이 끝까지 밀려나와 있다. 욕조 안에는 아무도 없는데 마치 누군가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바깥에는 실내화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안마형 샤워기. 시어머니께서 좋아하실 만한 욕실이다. 나중에 남편이랑 아이랑 다시 올게요.  
  가구는 모두 한꺼번에 마련한 듯 일정하다. 액자형 텔레비전이 걸린 맞은편에는 방금 누군가가 앉았는지 구김이 잔뜩 내려앉은 소파가 있다. 그 옆으로 베란다가 나 있지만 앞은 벽에 막혀있다. 액자에는 가족사진 하나 없이 그림들만 걸려있다. 그림만 보아서는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을 상상하기 힘들다. 이 집은 빨래 하나 걸려있지 않고 더렵혀진 접시 하나 없는 곳이다. 잠시 손과 앞이 막혀있는 실내화를 신은 발이 시려온다.
  “사모님 또 오셨네요.”
  “…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런 기회 이젠 정말 없습니다. 아까운 기회예요. 터미널이랑 역이랑 가까운 것은 물론이고, 최신식 시설을 갖춘 C초등학교와 명문으로 소문난 N중학교와도 가까워요. 자녀분이 충분히 걸어서 통학할만한 거리죠. 거기에 애들 집어넣으려고 부모님들께서 안달이시잖아요. 여기에 입주하시면 아주 유리한 조건에 놓이게 되죠. 거의 간다고 봐도 무관합니다. 대형할인마트에 조각공원까지 옆에 있는데 뭘 망설이세요? 이번 기회 놓치시면 정말 두고두고 후회하실 겁니다. 뭐 저희 건설이야 워낙에 유명하니 모르실 리 없을 테고. 오늘 이렇게 나오신 김에 계약하고 가시죠. 36평형은 이제 거의 다 나가서 최상층이나 최하층밖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점점 크는 자녀 분 생각을 하신다면 넉넉하게 49평형 정도는 하셔 야죠.”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내게 따라붙는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소지품처럼 내게 매달려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마흔의 여자에게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생소한 것들이 많아진다. 난 이 감정을 느껴보려고 모델하우스 안에 있는 것일까. 그는 오렌지 주스를 한 손에 쥐어주며, 카탈로그를 펼쳐서 재봉틀 같은 음성을 계속 내뱉는다. 내게 모델하우스 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빠르게 다가온다. 저는 마음에 드는데 그이는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남편이랑 아이랑 다시 올게요. 저는 마음에 드는데…
  “사모님 계약하시겠습니까?”
  “아뇨, 됐어요. 저는 마음에 드는데…… 어차피 살 생각은 아예 없었어요. 그럴 형편도 안 되고. 그냥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하려고 왔어요. 수고하세요.”
  아무 곳에나 주스 잔을 내려놓고 그물에서 벗어난 물고기처럼 서둘러 안을 빠져 나온다. 현관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가족들과 살짝 부딪힌다. 내 나이쯤으로 보이는 여자와 어깨를 마주칠 뻔하지만 그 여자는 유연하게 몸을 옆으로 튼다. 조심하셔야죠. 왠지 그 여자는 이 모델하우스와 어울려 보인다. 내게 따라 붙으며 설명을 늘어놓던 남자는 이제 그 여자에게 따라붙을 것이다. 찬 오렌지 주스 한 잔도 잊지 않겠지. 저 여자도 마흔 살을 넘는 문턱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새 36평형은 다 나갔는지 36평 모델하우스 입구에는 빨간 테두리가 둘러져있고 그 테두리 가운데에는 이미 분양이 끝났다고 써져 있다. 불이 꺼진 입구는 이제 하나의 구멍이 되어버린다. 모델하우스 문을 열자 더운 바람이 나를 덥석 안는다.

*

  잎은 아직 매끈하다. 채 한 뼘도 자라지 않은 줄기도 아직 단단하지 못하다. 잎이 몇 장 더 나오고 줄기는 단단하게 굵어져 마디가 뚜렷하게 잡혀야할 것이다. 그리고 잎 가장자리도 톱니바퀴처럼 거칠어질 때쯤이면 서서히 꽃봉오리가 생길 것이다. 수돗가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다가 손가락 끝으로 물을 뿌린다. 그리고 남은 물을 기름진 흙 위에 고스란히 부어주고 화분을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옮겨놓는다. 줄기와 잎이 파르르 떨리면서 물이 튄다. 예전에 아이는 화초에 물을 주는 것을 참 좋아했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며 흙 속으로 물이 다 스며들 동안 화분을 바라보고 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으로 난 작은 공터에는 열 개 남짓한 화분들이 키를 맞추어 서있다. 2층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창고로 쓰기 위해 공터의 반을 사들이고 병원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병원 측에서 미관상 안 좋다는 이유로 담을 쌓아버리면 화분은 버려져야할 것이다. 그 전에 꽃이 피었으면 좋으련만. 병원 정원 쪽에서 매미의 긴 울음소리가 떨려온다. 부수어진 바닥의 콘크리트 조각을 쓸어내고,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찍혀진 도둑고양이 발자국이 그대로 굳어진 바닥을 밟아 기사식당 맞은편에 있는 2층 집 안으로 들어선다.
  짙게 녹이 슬어있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다. 머리 위를 덮고 있는 천막이 처음에는 파란색이었는데 이제는 햇살이 그대로 비춰질 정도로 색이 바래져있다. 문은 한 번에 열리지 않는다. 녹이 손에 묻을까봐 살짝 쥔 손잡이를 그 위에 새겨진 무늬가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꽉 쥐고서 몇 번 더 힘을 주어야 문은 거친 신음소리와 함께 열린다. 집 안은 동굴 속 같다. 반투명 슬레이트 지붕으로 안개처럼 뿌옇게 햇살이 비친다. 길다랗게 이어진 방들이 분무기로 뿌린 것처럼 흐릿하다. 방은 세 개가 이어져있고 맨 끝 문은 부엌문이다. 그리고 부엌 옆으로는 예전에 연탄을 쌓아 놓았던 자리에 쓰레기봉투 하나가 반도 못 채워진 채로 앉아있다. 첫 번째 방은 수선 집이다. 아주 오랫동안 수선을 해온 것을 매번 강조하던 여자가 앉아 있을 것이다. 문에 귀를 대고 있으면 귓속으로 재봉틀 소리가 착착 한 겹씩 감겨온다. 두 번째 방에는 치킨박스가 가득 있을 것이다. 아래층에서 통닭집을 하는 부부가 창고로 쓰기도 하고 가끔 둘이 교대로 낮잠도 자는 방이다. 저 방에서 둘이 함께 잠을 잔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방과 부엌이 나와 남편과 아이가 쓰는 방이다.  
  문 바로 아래에 복도의 반쯤을 차지하고 있는 수돗가를 빗겨서 발을 내딛는다. 수도관에는 지난겨울, 얼까봐 감아두었던 스펀지가 그대로 감겨있다. 스펀지는 많이 뜯겨져있다. 다시 겨울이 찾아온다면 새로 스펀지를 입혀야할 것이다. 첫 번째 방과 두 번째 방 사이에는 보일러가 놓여 있고 두 번째 방과 마지막 방 사이에는 커다란 신발장이 놓여 있다. 신발장 안에는 신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축구공이나 접히지 않는 우산 같은 것도 함께 들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방과 부엌 사이에는 가스통이 놓여 있다. 비가 내릴 때마다 지붕 사이로 벽을 타고 벌레처럼 내려오던 빗물은 복도에 긴 웅덩이를 만들어낸다. 웅덩이는 쓸어내도 다음 날이면 다시 생겨났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도 벽을 타고 벌레처럼 빗물이 내려와 웅덩이를 만든다. 별안간 슬레이트 지붕 위로 후두둑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간다. 고양이 그림자는 복도 끝까지 이어진다. 창문이 없는 벽을 어깨로 쓰다듬지 않으려고 몸을 빗겨 복도를 지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다. 첫 번째 방 문 앞에는 양장점 여자의 검은 슬리퍼가, 두 번째 방 문 앞에는 통닭 집 남자의 낡은 운동화가 놓여 있다. 그리고 유난히 색이 바랜 마지막 방 문 앞에는 누구의 신발도 놓여 있지 않다. 오래 전 이사 오던 날, 방에 반이나 차지하는 큰 농을 들여놓느라 벽에 생긴 깊은 생채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장식이 없는 구두를 벗어 신발장 안쪽 깊숙이 넣어놓고 방안으로 들어선다. 양장점 여자는 아직 구두가 없어진 줄 모르는 것 같다. 그녀의 발은 나보다 한 치수 작았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발을 오므리고 있었다. 구두를 벗고도 발은 한동안 곧게 펴지질 않는다. 문을 닫자 양장점 집 여자의 재봉틀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두 손으로 가려질 창문을 연다. 창문을 열어도 바람은 들어오지 못한 채로 부러지는 것 같고 병원 앞 주차장에서 들리는 지저분한 차 소리만이 들어와 방안에 번지기 시작한다. 방 한가운데에 있던 형광등은 큰 농이 들어서자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 누군가가 형광등에 대해서 얘기했을 때는 그이도 나도 원래 형광등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차츰 그이도 나도 좁은 방 한쪽으로 형광등이 치우쳐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보 형광등이 왜 이렇게 천장 구석에 매달려있지? 글쎄요. 처음부터 그랬잖아요. 아… 그랬나? 떨어진 사탕주변에 까맣게 모여든 개미들처럼 액자 속에는 빈틈없이 사진이 꽂혀져 있다. 전체가 드러난 사진은 한 장도 없어 보인다. 어떤 사진이든 조금씩 한 부분이 가려져 있다. 화장대와 4단 짜리 서랍장을 놓자 방안에는 더 이상 뭘 놓을 수가 없었다. 서랍장 모서리와 농문이 맞물려 서랍장 모서리는 하얀 속살을 오랫동안 드러내고 있다. 그 사이에 껴있는 아이의 공부책상은 다리를 접힌 채 농 문이 열릴 때나 가끔 덜그럭 소리를 낸다. 세 평 남짓한 이런 방에서는 세  평짜리 행복밖에는 느껴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던 그이였다. 지금 내 감정은 그가 그어버린 선을 넘지 못하고 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마흔이란 남편을 ‘그’라는 남자로 부르기도 많이 껄끄러워질 수 있는 나이다.
  기사식당 안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몇 겹으로 겹쳐져서 나온다. 나는 오래된 쟁반에 가득 반찬과 밥그릇을 얹고 복도 안을 빠져나간다. 손톱 끝으로 쟁반 가장자리가 긁히는 느낌이 날카롭게 베인다. 시선을 아래로 흘렸을 때 발이 안 보인다는 것은 오랫동안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가져다준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손톱은 자꾸 쟁반 끝을 긁어댄다. 두 번째 방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고 수선 집 여자의 방 앞에는 자장면 그릇이 신문지를 덮지도 않은 채로 그녀의 검은 슬리퍼 옆에 놓여 있다. 보일러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 다시 문을 연다. 문은 바깥에서 열 때와는 달리 깔끔하게 끝까지 열린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에 이제 난간은 없어졌다. 얼마 전까지 검은 테이프가 촘촘하게 감겨져있는 철제 난간이 있었다. 촘촘한 검은 테이프 사이로 녹슨 물이 흘러나올 때까지 건물 주인은 난간을 새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올해 봄에 사람들을 불러 난간을 뜯어냈다. 그러나 새로 난간을 만들지는 않았다. 주인은 이제 이 건물에서 난간이 없어서 계단을 무서워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정말 이제 아이는 난간 없이도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을까. 잡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나는 화분 앞에 생선조각을 놓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고양이는 생선만 집어먹고 화분들은 건들지 않을 것이다. 모종의 약속이다.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뒤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택시 운전기사들의 웅성거림을 듣게 된다. 그래도 내 걸음은 빨라지지 않는다.

  “당신 밥할 때 딴 생각했지?”
  “예? 아니… 왜요?”
  “프라이가 왜 이리 밋밋해? 소금 대신 설탕 넣은 거 아냐?”
  낮은 책장 위에 쟁반이 놓이고 그이는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좁은 가게 안에 빼곡하게 들어 차있는 작은 책장이나 장식장, 텔레비전 받침대, 문갑 따위들이 복잡한 미로를 만들었다. 가게 밖까지 늘어져 있는 이런 것들은 미로가 터져 새어나온 것 같다. 매일 쟁반이 놓이는 이 낮은 책장은 그이가 쟁반이 치워질 때마다 마른 걸레로 닦는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팔수는 없을 것이다. 난 잠시 수저를 들다말고 책장 안을 손으로 저어본다. 비어있다는 것이 눈으로 보일 때와 손에 아무 것도 잡혀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느껴질 때는 조금 다르다. 가게 안은 비어있는 책장들로 가득 차있다.
  “미안해요. 제가 정신이 없었나 봐요.”
  점점 그릇들이 지저분해지고 단단하게 마르기 시작한다. 그 사이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이 내 뒷목을 감았다가 끌었다가를 반복한다. 그이가 소리를 내며 부주의하게 물을 마시고 라디오가 켜지자 낡은 음성들이 쏟아져 나온다. 일어나서 장식장 옆으로 몸을 돌리자 그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아선 나의 모습도 그이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 이번 주말에 명숙이 딸 결혼식 가요.”
  “뭐? 결혼식?”
  물을 마시던 그이가 컵을 내려놓자마자 난 좁은 틈에 들이밀 듯이 말을 한다. 급히 쟁반을 쥐었을 때 다시 끝에서 느껴지는 금속의 날카로움에 잠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숨은그림찾기에서 이미 찾았던 것을 다시 바라보듯이 선명해진 문을 찾아서 가게 안에 책장들이, 장식장들이 만들어낸 미로를 헤맨다. 낮에도 불을 켜야만 하는 가게 안의 어두움은 매번 문을 나설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다. 라디오 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가게에서 나와 위층을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박스 하나가 위에 얹혀있는 것 같다. 그 박스를 까만 전깃줄이 그물처럼 끌어안고 있다. 올라가는 계단은 여섯 개의 가게들 한가운데에 구멍처럼 나있다. 빨간 돼지저금통 몇 십 개가 묶여 꽃처럼 문방구 앞에 달려있다. 계단 바로 옆에 있는 통닭집을 지날 때면 요란한 환풍기 소리와 함께 누런 기름 냄새가 다가온다. 처음에는 투명했던 창이 이제는 닭을 튀기는 남자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누가 본다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줄 알 것 같다. 환풍기 앞에는 검은 그을음이 딱딱하게 윤기를 내고 있다. 계단 오른 편으로 나있는 스포츠기구 상설 할인 매장은 며칠 동안 문을 닫고 있다. 들어가는 문 앞에는 주인의 핸드폰 번호와 함께 조그마한 글씨가 얇게 써져있다. 점포 세 줌. 아래에 붙인 테이프는 벌써 떨어지고 주름이 잡힌 위쪽 테이프만 간신히 종이를 잡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위태롭다. 첫 번째 계단 옆으로는 공동화장실이 나있다. 견고한 철문으로 닫혀져 얼마 전부터 자물쇠를 채워놓고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열쇠를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누군가의 변이 화장실에 그대로 있고 나서부터였다. 화장실에는 물이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수돗물을 받아서 써야한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화장실을 썼다면 분명 기사식당 손님일거라고 수선집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기사식당 아줌마는 화장실을 가는 손님에겐 그런 일을 일일이 다 알려준다고 했다. 그리고 식당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얼마나 껄끄러운지 아냐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화장실 문 아래에 뚫린 구멍으로 잠시 서늘한 바람이 나와 내 발목을 스친다. 다행히 계단을 오르는 동안 식당에서 나오는 손님들과 마주치지는 않았다. 화분 앞에는 수도관을 감고 있는 스펀지보다 더 잘 뜯겨진 생선조각이 있다. 그새 화초는 더 커 보인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와 냉장고 위에 붙어있는 종이를 떼어 벽에다가 대고 적기 시작한다. 보험회사 이름이 흐리게 찍혀있는 종이는 다시 냉장고 위에 붙여진다.
  18일 화요일 시아버지 제사준비, 20일 목요일 어머니회 참석, 화분에 하루 한 번 물 주기, 염색하기, 23일 일요일 명숙이 딸 결혼식 가기. 냉장고 위에 종이가 붙여져 있는 것을 그이도 아이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이와의 관계는 끊겼다. 어떤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 전에 그렇게 되어버렸다. 통닭 집 유리창처럼 어느 샌가 투명했던 창이 불투명해졌다. 월경일이 고르지 못하고 점점 끊어지기 시작하자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런 것들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물그림자가 비친 듯 엷게 주름이 잡혀가는 내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건조함이 손가락에 따라 붙는다. 나는 모레처럼 점점 건조해져 간다. 내 몸의 꽃도 건조함으로 딱딱해져 간다. 아래로 손을 가져가 긁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붉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손끝이 함께 붉어지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냄새가 차오른다. 다시 손을 아래로 가져가 살며시 부수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싸 쥔다. 거짓으로라도 날 사랑해야하는 그이가 지금 나를 쓰다듬는다고 해도 난 뒤돌아 누울 것이다. 나의 건조함이 그에게는 관계를 맺을 때 선인장 숲을 헤매고 다니는 감정을 전해줄 테니까.  

  아이는 들어오자마자 아이스크림부터 찾는다. 교복 뒤에 찍혀있는 땀자국이 아이의 뒷모습을 덥고 눅눅하게 만들어낸다. 아이의 입 주변이 거뭇거뭇해질 때마다 목 아래 돋아난 여드름과 커진 키를 볼 때마다 난 조심스러워진다. 선풍기를 가장 세게 틀어놓고 교복을 벗어 바람을 쐬는 아이의 등은 이제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신발이나 옷을 사러갈 때에도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제 아이는 난간이 없는 계단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나 옷 갈아입을게.”
  “그래.”
  “참, 이번 주 일요일에 엄마 친구 딸 결혼식이 있어서 집 비울 거야. 아빠도 가게일 하실 거고.”
  “그러면 집에 나 혼자 있는 거야? 혼자 있기 싫은데. 이럴 땐 형이나 누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목요일에 있는 어머니회는 알지?”
  난 밖에 서서 말을 하고 아이는 안에서 말을 한다. 서랍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난 방문을 연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관계는 아이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이가 혼자 자라긴 했지만 그것이 문제될 건 없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은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고 착실한 아이라고들 했다. 가끔 내가 혼자 자라는 것이 외롭지 않느냐고 물으면 단번에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하곤 했다. 아이에게 형이나 누나가 있었으면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을까.
  아이가 나간 방은 먼지처럼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단지 선풍기를 가장 약한 바람으로 바꾸었을 뿐인데도. 일요일에 쓸까, 하고 카메라를 꺼내다가 밑에 깔려있는 사진들을 몇 장 보게 된다. 지난 봄, 아이의 입학식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사진 속 아이는 얼마 전의 모습인데도 마치 오래 전 사진을 앨범에서 찾아낸 것처럼 낯설다. 농 위에 꽂힌 앨범을 꺼내어 사진을 꽂는다. 앨범에는 이제 사진을 꽂을 빈 페이지가 얼마 남아있지 않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새 앨범을 사야할 것이다. 예전 앨범의 맨 뒤 페이지에 꽂힌 사진과 새 앨범의 첫 사진은 뚜렷한 구분이 없이 이어지는 사진이지만, 난 나도 모르게 그 둘 사이를 구분할지도 모른다. 내 생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만큼 단조로울 때, 난 내 생을 첫 번째 앨범에 담긴 것과 두 번째 앨범에 담긴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새해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금처럼 앨범을 혼자 꺼내본 적이 있었다. 이걸 다 언제 채우지. 반도 안 채워진 앨범을 두 번째로 보고 있었는데 아이가 문을 열더니 거친 숨을 쉬면서 내게 물었다. 엄마 이상해. 뭐가? 식당 아줌마가 나 한 살 더 먹게 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나는 오랫동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진을 꽂고 앨범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나갔던 아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칠게 숨을 쉬면서 느슨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엄마, 나 오천 원만.”
  앨범의 첫 페이지에는 그이와 나의 결혼식 사진이 꽂혀있다.    

*

  ―그러 길래 내가 애초에 결혼을 전제로 해서 가지는 만남은 싫다고 했잖아.
  ―너 정말 이럴 거야? 인물도 저만하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고 시내에 자기 손으로 가구점까지 떡하니 하나 굴리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다시 한 번 찬찬히 생각해봐. 언니 얼굴을 봐서라도… 응?
  ―몰라.
  개울 건너에 사는 동네 언니가 시집을 간 뒤로는 얼굴보기가 뜸해지더니 한 계절이 지나서야 다시 동네에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빗질을 해놓은 것처럼 잘 심어진 고추밭을 돌아서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면서 시내로 나가자고 했다. 일도 한가해지고 신작로에 나가본지도 오래되어서 나는 선뜻 언니를 따라 나섰다. 언니가 꽃무늬 원피스와 리본이 달린 구두를 빌려줄 때 알아 봤어야하는 건데. 입술에 연한 분홍빛 립스틱까지 발라주고 레이스가 달린 양산까지 씌워주면서 정류장까지 걸어 나와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터미널 지하에 있는 다방에 도착했다. 난 언니가 자기 신랑을 소개시켜주겠거니 했다. 그 사이 언니는 손수건으로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여기예요. 진선아, 인사해. 우리 시동생이야. 잘 생겼지?
  ―응. …언니.
  난 수족관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계속 언니와 그 사람을 돌아가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신문지를 반으로 접어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 내 머리카락이 조금씩 날렸다. 반바지를 입고 벌린 그의 종아리는 찰흙 덩어리처럼 위로 쓸어 올려져 뭉쳐있었다. 그 위로 여기저기 긁힌 자국들이 선명하게 혹은 흐릿하게 나있었다. 땀에 젖어서 속이 다 비치는 셔츠를 입고 그 사람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웃음을 머금자 눈가에 주름이 가지런하게 잡히는 사람이었다.
  ―전 김준기입니다. 형수님한테 듣던 대로 미인이시네요.
  그게 남편과의 첫 만남이었다. 일 년쯤 동안 몇 번 만났고 그보다는 편지를 자주 했다. 내가 다섯 통쯤 보내면 그에게서 한 통이 올까말까였지만. 시내에서 만난다고 해도 일이 바빠서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결혼을 약속한 거나 다름이 없는 우리는 그이가 돈을 어느 정도 모으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나는 결혼이 내 생의 모든 것을 보호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럴 때쯤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는 대부분 이런 내용의 것들이었다. 이제 돈 많이 번 거 아냐? 아냐. 아직 좀 더  벌어야 해. 나 일하는데 가보면 안 될까?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여자가 어딜 겁도 없이 혼자 시내를 나온다고 해? 때가 되면 내가 구경시켜줄게. 나 봉숭아물 새로 들였어.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그래도 우리 조금만 참자. 그이는 유난히 봉숭아물이 새빨갛게 들여져 있는 손가락을 가진 여자를 좋아했다.
  오지 말라면 내가 못 찾아갈 줄 알고? 난 주말 아침 시내로 가는 첫 버스를 타고 그이가 운영하는 시내의 가구점을 찾아갔다. 언니가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며 약도를 그려줬지만 불안스럽기만 했다. 밤에는 시내에 내 또래 여자 애들을 붙잡아 가는 남자들이 설친다는 말에 해가 뜨지도 않은 짙푸른 새벽에 출발하면서도. 가구점은 시계방을 돌아 언덕길을 조금만 오르면 있었다. 언니가 그려준 약도와는 반대의 길이었다. 터미널에서 세 시간동안 돌아다니다가 가구점을 찾았다. 이른 아침이라 여기저기 장사를 준비하는 손길이 황망하게 움직였다. 수건을 목에 걸고 용달차에 가구를 싣고 있는 그이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처음으로 내 도장을 만들었을 때처럼 마음이 들썩거렸다. 난 건너편 구멍가게로 들어가 요구르트를 하나 사 마시면서 몰래 그이를 바라보았다.
  ―건너편 가구집 주인은 아침마다 저렇게 가구를 나르나 봐요. 사람들 시키지 않고.
  ―주인은 점심이 지나서야 나오는데…….
  ―저기 지금 책장 들고 나오는 사람이 주인 아니에요?
  ―아! 저 총각. 저기서 일 한지 몇 년 됐는데 곧 있으면 장가든다고 하던데… 사람 하난 참 성실하지.
  ―…예. 여기 요구르트 얼마예요?  
  나는 다시 시계방을 돌아 다시 터미널로 왔다. 괜찮았다.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내에서 가구점을 하고 있는 사장에게 딸을 시집보낸다며 좋아하던 엄마가 많이 무연하실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난 더 이상 그이에게 결혼을 서두르자고 하거나 가게를 구경시켜 달라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네 신랑 될 사람한테 말복 때 한 번 들르라고 좀 해라. 뭔 일도 좋지만 몸 생각도 좀 해야지. 내가 닭 한 마리 잡아줄 테니 그 날 하루는 가게 문 닫고 여기 좀 들르라고 해. 알았지?
  ―주인이 보내줘야 오지. 마음대로 올 수가 있나.
  ―오빠!
  ―그게 무슨 소리냐?
  오빠가 어떻게 알았는지 며칠 후 저녁 밥상에서 엄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빠는 내 일기를 훔쳐봤을 것이다. 그때부터 오빠는 그런 자식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그이와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결혼을 했다. 이 층에 방 하나가 딸린 작은 가게를 마련할 보증금을 만들고 나서야.
  첫 번째 아이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하얀 시트가 깔린 보건소 침대 위에서 죽었다. 나는 젖이 잘 나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언니는 돈을 받고 젖을 물리는 아이가 둘이나 있어 내 아이까지 젖을 물리기는 어려웠다.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내가 기억하는 거라고는 유난히 까만 아이의 머리. 그것밖에 없다. 눈도 못 뜬 얼굴도, 꽃봉오리처럼 움켜쥐고 있던 손도 아주 오래 전 일처럼 기억하지 못했다.
  ―이 사람은 누군지 알아보겠어?
  ―우리… 신랑.
  ―그럼 이 사람은 누구야?
  ―친정엄마. 우리… 엄마. 언니 이제 그만해.
  언니는 내가 정신을 놓을까봐 누워있는 내 앞에 앨범을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하나씩 얼굴을 집어가면서 내게 이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봤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난 언니에게 형님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시어머니 앞에서야 신경 써서 형님이라고 부르지만 이렇게 둘이 있을 때는 그냥 언니라고 부르게 된다. 바닥의 그 차가움이 요즘도 가끔 내 몸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을 느낀다. 그 차가움은 늘 유난히 까만 아이의 머리를 동반한다. 그럴 때 그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결혼을 하고 나서는 엄마를 손님처럼 만나야만 했다. 집 안에 일이 있을 때나 만날 수 있었다. 가끔 생신이라고 찾아가서는 결국 하룻밤을 자지 못하고 막차로 떠나와야 했었다. 오히려 어둠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버스 안의 전등 불빛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과 함께 나를 쓰다듬었다. 그때마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며 친정엄마가 손에 쥐어준 지폐 몇 장이 주머니 속에서 만져졌다. 아마 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돈을 한 번도 그이나 시어머니께 말씀드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자주 집에 들려 밥을 먹고 내게 돈을 타가던 시동생은 지금의 아이를 낳았을 때쯤 세련된 동서와 결혼했다. 시내에서만 살아왔던 동서와 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모아두었던 돈은 그럴 때나 쓰여 졌었다.
  첫 아이가 살아있었으면 지금쯤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커서도 그렇게 머리가 유난히 까맸을까.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