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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평론/잡담, 호기심, 애매성/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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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93회 작성일 06-07-20 14:46

본문


지원부문 :평론

제목: 잡담, 호기심, 애매성
     (김원우의 <젊은 천사> , <벙어리의 말>에 대한 평론)


성명: 홍윤기

성별: 남

연령: 28

주소: 서울 성동구 행당1동 138-42 8/8
이메일: animus3@hanmail.net

전화번호: 019-9151-6322, 02-2295-7320























                                                                                  
김원우의 작품은 난해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특히 그가 사용하는 단어 중에는 우리말이면서도 외국어보다 낯선 것도 있다. 생소한 언어의 사용, 문학인들을 향한 이러한 자극은 문학을 세련되고 반듯하게 다듬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대중이 선호하는 낭만성이나 감동과는 거리가 먼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지적 허용을 탓하기도 할 테지만 문학인이 지녀야할 기본 소양을 강조하는 작가의 태도 또한 귀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다.
언어를 엄격히 조탁하여 탄생한 한 두 작품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려는 내용은 무엇일까? 처음 글을 읽고 난 후, 필자는 왠지 느슨하게 풀린 등장인물들을 팽팽하게 엮어 가는 작가의 의식을 느낄 수 있었지만 주위에 함께 글을 읽었던 사람들은 정확히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눈치였다. 단지 작품 속 김 교수가 하는 말처럼 문학을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즉 계몽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 전부였을까?
다시 말하지만 필자나 혹은 김원우의 작품을 읽은 독자가 가장 알고자 하는 것은 작가가 김 교수의 입을 빌려 하고자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일텐데 이는 심 교수나 허영숙의 행동이나 말과 어떤 연관성을 띄고 있는가 하는 점도 함께 아우른다. 이 점에 대한 해석은 잠시 뒤로 미루고 맨 처음 서론에서 이야기한 작품의 외적인 평을 좀더 구체적으로 거론해볼까 한다.
작가 김원우의 작품은 문장 자체를 놓고 볼 때 특출할 지는 몰라도 높이 평가받는 문학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풍족한 인간미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국문과 교수님들에게 들었던 말을 빌려 보자면 문학이라는 것은 사상을 드러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정서를 드러내는 것인데 이 작품은 정서를 드러내는 측면이 비교적 약하다 할 수 있다. 김 교수 개인의 내면적 사정이 소개되고는 있지만 그것이 진한 감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일반적 소설에 맞지 않는 노골적인 논설, 혹은 설명조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문학을 지향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벙어리의 말>의 경우 글쓰기에 대한 이런 저런 조언을 얻게 되어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역시 이 작품은 작가의 특정 사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쪽으로 치우친 것만은 사실이다. 소설이 재미나 감동이 주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없겠으나, 동시에 사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도구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니 말이다. 김원우의 이 두 작품은 언뜻 보면 문학의 定石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반듯하지만 문학은 유연하게 대중과 엉켜드는 맛 또한 고유의 가치로써 인정받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느 작품이든 그 내용을 파악하는데 수월한 방법은 작가가 나타내려는 사상이나 철학을 알아내는 것일 것이다. 우선 두 작품 안에서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할 한 가지를 짚어보자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지적할 수 있다. 작품 안에 직접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 두 작품에 대해 정신분석 비평을 하게 된다면 아버지와 관련된 트라우마 정도 이외의 논의를 펼칠 만한 여지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아무리 뜯어봐도 그러한 인간의 깊은 내면을 나타낸 작품이라고 하기 어렵다.
필자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과거 철학과 수업을 통해 접했던 하이데거의 철학이었다. <존재와 시간>으로 유명한 그는 자신의 역작을 통해 현존재라는 개념을 비롯한 인간에 대한 나름의 통찰을 풀어놓았다. 테크놀로지의 세상, 이제 막 현대의 물질 문명이 꽃피우려는 시대에 나타나 미래를 예언하고 간 철학자의 사상은, 결론적인 말이지만 김원우의 작품을 통해 구체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하이데거라는 거창한 이름을 인용하지 않는다 해도 김원우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현대 사회를 사는 이들의 느슨하고 흐리멍덩함  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화자의 시각에서 볼 때 얼마나 어수룩한가? 이러한 단면만 보더라도 군중이 군중을 향해 내뱉는 욕설과 조롱, 바로 그것이 작가가 드러내려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필자가 지금 하려는 해석은 하이데거의 명민하고 체계적인 현대인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작가 김원우가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는지 천착해 보는, 한갓 유희에 그칠지 모를 일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현존재(dasein)일반 현대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가 일상성에서 보이는 실존론적 구조로 잡담, 호기심, 애매성 이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아마도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세 단어를 듣는 순간 작품을 관통하는 연결 축이 번뜩 떠오를지 모른다. 뒤죽박죽 엉켜있는 듯한 내용, 아니 엉켜있다고 하는 그런 복잡성보다는 그저 화자의 뜬금 없는 주변의 가십거리들을 늘어놓은 듯한 내용은 위의 세 가지 주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정말 그러한지 하나씩 검토해 보도록 하자.  
먼저 잡담이란 하이데거식 개념을 빌리자면 ‘뿌리뽑힌 존재자’ 현존재의 비본래성, 世人으로 표현된다.
들의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벌써 그 명칭부터가 뭔가를 나타내려는지 가슴에 와 닿는 표현이지만 좀더 풀어서 설명하기 이전에 작품에 등장하는 잡담의 예를 살펴보자. 우선 <젊은 천사>의 경우 교수회의가 열리는 상황에서 작품이 시작이 된다. 바로 이 상황은 잡담에 대한 환기라고 볼 수 있는데 직접 문장을 인용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관행으로서의 이런 연례행사에 이른바 민주적 절차로서의 난상토의 한두 자락쯤은 반드시 끼워 넣어야 구색을 맞춘 게 아닌가 하는 소견은 내놓을 만했고, 그러자면 특정사안에 대한 발언을.....<중략>....질의를 무제한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데,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 그런 피상적인 절차 자체에 내심 불평불만이야 없을까만, 유야무야로 끝내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낌새였다.’<젊은 천사 p147>  작가의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이 드러나는 이 부분은 등장 인물들이 벌이는 대화가 어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논의가 아닌, 이미 이야기되어온 것들을 그저 관행에 따라 구색을 맞추는 시늉만 하다가 결국 잡담으로 시간을 흘려버리는 것을 나타낸다. 민주적 절차라고 믿고 있던 ‘난상토의’, 이를 통해 서로간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부딪치고 하는 갈등을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시각을 모색해야 할 테지만 괜한 분쟁을 일으켜봤자 자신에게 이득보다는 손해가 올까 두려워하는 학자들의 모습은 곧 자신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또 어디에 있어야 할지 알지 못하고, 그로 인한 허탈감과 서로간의 시선을 무마시키기 위해 잡담이 활용되는 것이다. 교수회의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기에는 남 보기에, 또 자신들 스스로에게 떳떳치 못한 그들, 잡담은 곤란스러운 시간을 잊게 해주는 효과 또한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한 김 교수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김 교수는 매번 그랬듯이 심드렁한 채로나마 조마조마하니 어떤 파격을, 한창나이의 소장파 교수 한둘쯤의 돌출행위를 촘촘히 기대하고 있었건만...’<젊은 천사 p147> 이렇듯 현대인들이 무사안일주의에 휩쓸려 있다고 자각한 김 교수이지만 이를 타파할 해결책을 스스로 제시하거나 행동하지 못한 채 뒤에 숨어 손가락질만 하는 입장에 머물 고 있을 뿐이다. <젊은 천사>에서 교수들의 어색한 대화내용, <벙어리의 말>에 등장하는 허영숙에 대한 김 교수의 빗나간 대화 내용은 작가가 이러한 잡담의 현장을 비판적으로 고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두 작품 중 특히 <벙어리의 말>은 제목에서부터 잡담에 대한 비판적 냄새를 절묘하게 드러내는데 김 교수가 허영숙과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벙어리가 된 듯한 장면을 보면 더욱 극명하게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부분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야, 이 친구야 마감 일이 며칠 남았다고 이제 사 그걸 들고 오면 나보고 어떡하란 말인가”....<중략>...그 표정 연기는 제법 진실이 묻어나서 이번에는 내가 좀 당황스러웠다. “거기 앉아라” 나도 그에게 더러 그랬지만 그도 가끔씩 나로 하여금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경우를 만들었는데 그때가 바로 그랬다. 물론 내가 잠시나마 벙어리로서 무슨 말인지를 찾느라고 애를 먹은 경우는 그 후에 자주 일어났다.’<벙어리의 말 p39> 허영숙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 그녀가 아마도 이러이러할 것이라 규정했던 김 교수의 착각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현실에서의 실제 모습과 괴리를 일으키며 곧 그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린다. 대부분 문학을 하는 학생들이라면 관행적으로 신춘문예에 뜻을 두게 될 것이라 미리 짐작한 김 교수가 허영숙을 보채지만 사실 그녀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다. 김 교수의 호통은 삶에 온전히 뿌리를 내린 대화가 되지 못하고 마치 신기루처럼 들뜬 잡담이 되어버리고 마는 순간이다. 그나마 김 교수는 자신을 반추해가며 현재의 사태를 금세 직감할 줄 아는 인물이었기에 더 이상 말을 늘어뜨리지 않고 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잡담을 통해 비본질적인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벙어리가 되는 것에 지나지 않거나 혹은 그 무가치함을 직감하고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리게 된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짧은 논의를 통해 <젊은 천사>에서 심 교수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심 교수가 그토록 견디지 못했던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이해를 망각한 채 잡담에 빠져드는 인간 군상들이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허무주의자는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 <젊은 천사> p212
도 사회적 원망과 개인적 기대의 착종이 빚어내는 억울한 신체반응 <젊은 천사> p213
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심 교수 역시 김 교수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갑갑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점에 있어 공통적이었지만 김 교수는 아지트형 인간이라 자기 방으로 숨고 심 교수는 천사형 인간이라 해외로 피신해 버리는 것이다. 둘 다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나름의 방책일 뿐 흐름 자체를 바꾸거나 정면으로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는 듯 하다. 날개가 달린 사람은 어디론가 휩쓸리지 않기 위해 오히려 외딴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그런 날개, 아니 용기가 없는 사람은 자기 방으로 숨고 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 할 것은 호기심이다. 현대인의 호기심에 대한 예로써 가장 쉽게 고를 수 있는 예는 끊임없이 인터넷에 골몰한다거나 뭔가에 빠져버려 자기 존재를 망각해 버리는 경우이다. 이 부분과 관련해 필자로서는 명쾌히 해석하기에 조금 애매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호기심의 본래 속성은 가까운 것에 머물지 않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앞서 심 교수는 잡담을 피해 자기 본질을 찾아갔지만 호기심의 관점에서 보면 되려 또 다른 비존재적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는 외래적이고 이색적인 문명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는데 그 때문에 타문화, 특히 아시아 문화에 대한 배타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어쨌거나 심 교수는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자면 호기심에 빠져 인터넷에 중독된 사람들처럼 매몰된 인물인 것일까? 작품에 인용된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욕심이 사나운 거지, 욕심이 많은 사람은 참을 줄을 몰라. 물론 쓸데없이 부지런을 떨지. 주위에 그런 사람이 많아. 신문에는 더 흔해빠졌고, 난 그런 천사형 인간을 믿지 않아...<중략>..현대문명의 골자들, 이를테면 산업사회, 합리화, 컴퓨터, 제도화, 자동차와 비행기, 통제화, 인간복제, 형식화, 자연파괴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천사형 인물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으니 숨이 막히는 거고, 그게 이 세속 계의 한계이자 아포리아야.’<젊은 천사 p216~p217> 이렇듯 호기심에 빠진 인간들을 비판하는 김 교수의 말에 대해 심 교수가 말하길 자신은 그런 욕심은 없고 제 직분에 맞게 오감한 천직에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즉 자신의 본래적 존재성을 자각하고 그에 맞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말의 진위여부야 의심이 들지만 어쨌든 심 교수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러한 호기심으로부터 빗겨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물리적 거리 상 멀리서 무언가를 찾는다고 해서 그것만 두고 단순한 호기심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는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심 교수는 더 나아가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인지 현존재의 호기심에 대한 명시적인 비판을 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물질문명의 향유사인 동시에 물질들 개개의 부침사거든요....<중략>....깃털 달린 철필에서 연필, 만년필, 볼펜, 수동식 타자기 컴퓨터로 진화해왔잖아요. 그런 진화가 생활의 질을 높였다는 관점은 보기 나름이라서 일단 논외로 친다면.....<중략>....과학의 무한한 가능성이 인류의 생활사에 활력을 준다기보다도 생활의 항구적 유동성을 담보하는 일방 발명품의 생산 및 그 향유에 관한 사람의 변덕부림을 부추긴다고 보면 대체로 맞을 거에요’ <젊은 천사 p205>여기서 ‘향유에 관한 사람의 변덕부림’ 이라는 말은 곧 호기심에 대한 풍자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벙어리의 말>에서는 호기심과 관련해 어떤 부분을 거론할 수 있을까? 허영숙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경영학을 전공하다가 국문과로 편입을 했다. 경영학을 전공했던 것은 자신 자신의 본래 주체성을 망각한 채 그저 주변의 상황에 맞는 길을 걸었던 것이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가다 뒤늦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은 호기심에 빠져 지내다 그로부터 벗어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밖에 허영숙의 아버지가 도금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 이 역시 호기심에 따른 행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어쩌면 그런 단순한 해석보다는 작가가 도금이라는 은유적 장치를 통해 사람들이 자기 본래성 보다는 남들이 하는 일에 눈을 돌리게 되는 상황을 표현하려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따라 온 나라가 우르르 도금을 했던 것, 그러한 호기심에 의한 현존재의 존재 망각이 작가가 지적하려던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구체적으로 인용된 내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무슨 상품이든 모양을 낼라면 죄다 도금을 해야해요. 오죽했으면 옛날부터 나무에도 옻칠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금물을 들였을까. 장식을 안하고서야 어디 물건이 팔리나요. 여자도 그런지 어떤지 모르지만 대번에 물건값이 달라지는데요...'<벙어리의 말 p13> 이 부분은 인간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도금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건 뿐 아니라 여자도 하나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마치 물건처럼 값이 매겨지는 현실의 작태에 대해 작가는 냉소적 문장으로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허영숙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반미치광이가 되고 만다. 가혹하다고 할만한 작품상 설정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껍데기에 대한 화자나 혹은 작가의 혐오감이 얼마만한 것인지 가늠케 한다. 껍데기를 은유한 도금에 대한 비난은 공무원들의 한심한 작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데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기 지방 출신의 유명 문인의 우거나 내력 있는 가문의 웅거지를 관광자원으로 만든답시고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심지어는 막대한 예산을 경쟁적으로 헛되이 쓰고 있는데, 적어도 내가 둘러본 그 형용들은 하나같이 얼토당토않은 꼴불견들이었다.'<벙어리의 말 p18> , '아른아른한 장막을 사치스럽게 드리우고 있는 그 광경을 나는 노려보았다. 이 땅에서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머리를 석이는 짓거리 일체는 고역이 아니라 사치였고, 분수에 안 맞는 허영이었다....<중략>...막강한 주체란 저런 조악한 관광상품도 크게는 문화로, 작게는 문학으로 포장하느라고 기를 쓰며 달려든 관과 민의 여러 울려꾼들일 것이었다. <벙어리의 말 p19> 이러한 인용문들은 특별히 하이데거의 호기심이란 개념을 빌리지 않는다 해도 세상을 허위적인 가식으로 덮어버리려는 것에 대한 김 교수의 반감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작가가 계속 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행과 풍속에 대한 비판이며 하이데거 역시 전통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말해왔듯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물음을 은폐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대적인 개축’, ‘얼토당토않은 꼴불견’인 형용, ‘아른아른한 장막’을 사치스럽게 드리우거나 돈이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조악한 관광상품을 문화나 문학으로 포장하려드는 태도에 대해 김 교수는 특유의 독설을 내뱉는다. 우리가 진정 가슴에 품어야 할 것은 겉치장을 통해 사람들의 호기심 따위를 끌어 모으는 일이 아니라고 작가는 강변하는 것이다. 맨 처음 이야기했듯 대중이 이 작품의 의도를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스스로의 생활 모습을 잊고 살기 때문이며 작가는 날카로운 시각으로 느슨해진 독자의 의식을 긴장시키고 은폐되어있는 것들, 무심코 흘려버리는 것들을 탈 은폐시켜 우리 앞에 내 보이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애매성이다. 애매성이란 소음 속에 사는 우리의 모습이며 그 소음에는 앞서 얘기했던 잡담도 포함된다. 이러한 애매성으로 인해 우리는 존재가능성, 즉 주체적으로, 본질적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망각하게 된다. 먼저 <벙어리의 말>에 등장하는 애매성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취사장 개선안이나 각방거처식 기숙사 개조안 따위로 회의를 열면 각자가 내놓는 말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도 막상 회의는 겉돌아요. 나중에는 왜 회의를 하고 있는지 오리무중이다가 최종적으로는 흐지부지되고 말거나, 아무렇게나 결정돼버려도 누구 하나 걸고 넘어지는 법도 없어요. ....<중략>....도대체 이게 뭔가, 머야 이게, 이런 말같잖은 코미디를 언제까지 보고 겪어야 하나하는 자문자답만 되뇌게 된다니까요.“ <벙어리의 말 p19> 정작 이야기하려는 주제의 핵심은 놓친 채 그저 소음으로 둘러싸여 애매한 상황에 빠져버리는 현대인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난다. 어째서 회의는 겉도는 것인가? 절대자나 권력자가 말을 막는 것도 아닐진데, 차라리 독재시대라면 의사소통의 단절은 쉽게 설명이 되지만 민주적 대화의 장이 허용된 공간에서 사람들은 헤매기 시작한다. 반복되는 코미디, 무의미한 대화의 연속은 사람들을 지치게 할 뿐 본래 찾으려고 했던 개선안이나 개조안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작가는 이에 더 나아가 명시적으로 소음에 관한 애매성을 지적하는데 앞서 제시한 인용문의 연장선상에서 인터넷에 범람하는 온갖 잡다한 정보들에 대한 냉소적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써 드러난다. 직접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축자식으로 곧 그대로 베끼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중략>.... pc의 그 마우스라는 것만 깔짝거리면 언제라도 온갖 정보가....<중략>....수다스런 상식, 유치한 정보, 김빠진 인용, 없었으면 더 좋은 온갖 종류의 범서와 악서가 범람하고 횡행하는 오늘날의 이 희한한 지적 유희화 사회에서 진정한 지식, 나아가서 미처 몰랐던 여러 인식의 개발은 옳은 작가라면 누구나 곱다시 짊어져야 할 멍에다.‘ <벙어리의 말 p30> 이를 통해 작가는 온갖 잡다한 정보 속에서 나름의 본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 대중은 그 안에 휩쓸릴지언정 작가는 그것을 비틀어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젊은 천사>의 경우에서는 잡담을 이야기하는 내용 내에서 이미 애매성에 관한 것도 함께 설명되었다고 생각된다. 애매성과 관련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려진 ’아테네 학당‘을 보며 김 교수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장면이다. ‘오늘날 이 땅의 <아테네 학당>, 나아가서 그 속을 보무도 당당히 걸어다니는 접장들이나 가끔씩 떼지어 웅성거리다가도 제 전공의 벽장 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지내는 먹물바치들의 위상도 꼭 저 베낀 그림의 힘 없는 운동감을 재현하고 있는 것 같다.’<젊은 천사 p149> 아테네라는 지역이 주는 자유로운 느낌, 떼지어 웅성거리고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소음. 그러나 그 안에서 진정 인간에게 중요한 하나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방향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애매한 모습은 ‘힘 없는 운동감’으로 표현된다. ‘전공의 벽장 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지내는 먹물바치들’, 앞서 김 교수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일컬었던 아지트형 인간이 아닌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스스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한 채 자기 안에 갇혀 지내는 지식인은 더 이상 현대인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기 벽장 안에서 벌벌 떨며 무사안일만을 기도한다.
  지금까지 김원우의 두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의 행동 원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하이데거의 철학을 바탕으로 해석해 보았다. 물론 이 작품에는 보고 배워야 할 점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필자의 미흡한 해석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용문 역시 대표적인 몇 가지만 지적했을 뿐 그 밖에 세밀하게 더 살펴보아야 할 꺼리는 무궁무진하다. 감히 작가가 최종 결론으로 말하려던 것을 간략히 추측해 보자면 일상성 속에서 본래성을 잃지 않고 자기 결정권을 가진 현존재의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가 앓게 되는 용종 역시 이와 관련지어 짐작해 보면 죽음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을 통해 존재가능과 존재의미가 밝혀진다고 보았다. 죽음이 어떻게 인간의 존재가능을 밝힌다는 말일까? 생각하기에 따라 어쩌면 더욱 나태해지고 세속적인 것에 무작정 휩쓸려 버릴 수도 있다. 이것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인지 모른다.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본연의 모습을 찾아 끊임없이 반성하고 잠재된 능력을 찾으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비록 잡담, 호기심, 애매성이 우리 주위를 휘감고 있을지언정 인간은 꿋꿋이 이겨 나아가야 한다는, 현존재의 자기 이해에 관한 작가의 성찰이라 할 것이다.
두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세속적 휩쓸림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심 교수와 허영숙이다. 한 사람은 안정적인 자리에서 벗어나 외국으로 가고 다른 한 사람 역시 남들이 가라는 길을 마다하고 국문과로 편입을 한다. 게다가 세속적인 목표, 사람들이 흔하게 바라는 목적지가 아닌 자기 내면으로의 천착, 남들은 이해하기 힘든 자기만의 세계를 개척한다. 이들의 유목민적인 습성은 이제 하이데거를 벗어나 들뢰즈의 가르침을 따라간다.
이것은 보다 근본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판단에 달린 문제일지 모른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오랜 기근을 벗어난 사람들은 과거로 회귀하지 않으려고 독재자의 그들 속에서 살다가 이제 막 껍질을 깨고 나온 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된다. 자유, 이것은 ‘선택의 강요’라는 이름의 이면이다. 실사구시를 제외한 그 밖의 것은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기술, 자기 손아귀에 잡히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세상을 산다. 오랜 체험에 바탕을 둔 이러한 생활철학을 아무나 쉽게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자 세상에 처한 입장과 위치가 다른데 어떻게 삶에 궁색해 질 수밖에 없는 남을 비판할 수 있을까? 그 비판의 화살이 나에게 꽂힐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겨우 어렵사리 차지한 사회의 한 귀퉁이, 자신만의 아지트에서 밖으로 나갔다가는 또 다시 냉혹한 현실에 부딪칠까 두려워하는 현대인들, 잡담을 통해 불안감을 잊고, 그렇게 보낸 헛된 시간이 허탈해 지면 호기심에 매몰된다. 마치 습관처럼 마우스를 클릭하며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여러 사이트들을 돌아다니고 그러다 쇼핑에 중독 되기도 하는 현대인들, 가족들은 이제 서로간의 대화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친구들은 만나면 새로 나온 상품가치에 대한 논쟁을 한다. 그러나 그 논쟁은 어차피 어떤 구체적인 결론을 지향하고 있지 않다. 각자 자신의 생각을 말하되 그것은 마치 자신만의 진공관 안에서 홀로 떠드는 것과 같다. 구체적인 결론, 이것은 새로운 방향지움이다. 한번 방향이 잡히면 그곳으로 가야할텐데 왠지 또 불안해지는 현대인들은 차라리 애매성을 선택하고 만다. 이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지나고 나면 기다리는 것은 편안한 무덤, 그러나 그런 무덤일지언정 괴롭고 수고스러움을 감내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김원우의 소설이 얼마만한 설득력을 지녔는지는 의문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 할지라도 독자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김원우의 어려운 문장을 읽느니 차라리 일상을 탈 은폐시킨다는 점에서 유사한 영화 ‘매트릭스’를 보러 갈 것이다. 파란 약을 선택하느냐 빨간 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길. 인간에게 있어 진실이란, 자신의 발가벗겨진 본연의 모습이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아니, 되려 초라하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먼저 받아들이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간다는 것, 이것이 지상과제다. 그렇다면 과연 그 새로운 곳에서 반드시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될 수 있을까? 작품 내에서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는 경우를 보여줄 뿐, 새로운 세계가 지상낙원이거나 장밋빛 미래를 열어주는 곳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자신과 맞닥뜨린다는 것은 희열과 동시에 고통을 던져주는 일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 자기 자신을 파고들어 새로운 세계와 접변하는 것이 편하고 즐거운 일인가? 작가 김원우는 분명 은폐된 실존을 찾으라고 하겠지만 사실 이것은 생존을 담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오랜 숙제로 남게될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 자리를 지킬 것이냐?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경계선 밖으로 질주해 나아갈 것이냐?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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