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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규-수필-고향하늘 저녁노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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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부문 응모작
* 성명 : 전성규(남)
* 생년월일 : 64.11.15
* 주소 : (200-190) 춘천시 퇴계동 한주아파트 101-503
* 연락처 : 010-7345-7185
고향하늘 저녁노을
어릴 때만 해도 우리 동네에는 집집마다 삽짝문이 없는 집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삽짝문은 싸리나무 같은 나무를 얼키설키 엮어 만든 사립문을 말하는데, 서산마루에 해가질 무렵이면 할머님은 늘 삽짝문을 걸어 닫곤 하셨다. 할머님 손때가 묻은 삽짝문 손잡이는 팔 뒤꿈치처럼 늘 반들반들 닳아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여름철, 봉숭아 물이 오른 당근 빛 노을이 서산위에 곱게 물들고, 낮 동안의 열기가 팍팍하게 식어갈 무렵이면 어김없이 삽짝문이 있는 마당 한가운데에 멍석을 깔고 온 가족이 모여 앉았다. 멍석위에 앉아 밀가루로 빚어내온 수제비로 온 식구가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어머님이 솥에서 금방 찐 옥수수나 감자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내 오시면 시원한 바람 한 줄기에 낮 동안의 더위를 식혀가며, 우리는 찰지고 쫀득한 옥수수와 하얀 분이 나는 감자를 까먹기도 했다. 때론 이웃에서 마실을 오신 할머님도 같이 합석을 하시기도 하고, 어떤 날은 옆집 삽살개까지 마당가로 모여들기도 했다. 멍석 위에서 할머님 무릎을 배고 누워 하늘아래 첫 동네인 ‘하일리’와 ‘원당리’가 바라보이는 강 건너 서산을 바라보면, 발그레한 물감을 칠해놓은 듯한 붉은 노을이 아름답기만 했다. 장작불처럼 달아오른 노을 진 저녁 하늘, 그 노을 위를 빨간 고추잠자리가 푸른 금을 그으며 씽씽 달음박질을 치곤 했다.
어깨동무를 하고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은 먼 산의 나무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울타리처럼 언제나 든든하고 정겹게만 느껴졌다.
그 시절 서녘하늘에 물든 노을은 울타리 밑에 피어난 봉숭아 꽃잎보다도 더 붉고 아름다웠다. 지금은 아무리 노을빛이 아름답다고 해도 그때 보아왔던 맑고 정겨운 맛의 그 노을빛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이다. 요즘의 노을은 어딘지 모르게 색이 바랜 것 같고, 자연보다는 사람을, 사람보다는 물질을 더 중시하는 현실문명이 노을에 마저도 녹아있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환경도 많이 바뀌고 인심도 팍팍해진 탓이리라.
어릴 적 우리 집 울타리 밑에는 채송화며 봉숭아며 달맞이꽃이며 코스모스 같은 들꽃들이 계절을 따라 앞을 다투어 피어나곤 했다. 할머님은 울타리 밑에서 따오신 봉숭아 꽃잎으로 우리들의 고사리 같은 손톱마다 봉숭아물을 빨갛게 들여 주곤 하셨다. 아직도 봉숭아 꽃잎을 보면 할머님 무릎팍에 누워 곱게 찧은 봉숭아를 손가락에 동여매고 빨간 봉숭아물이 물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때 그 기억이 떠오른다.
노을 진 고향의 파아란 하늘에는 언제나 고추잠자리가 어지럽게 허공을 맴돌곤 했다. 빨랫줄 위에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동화 속 이야기처럼 평온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붉은 노을이 모두 지고 푸른 하늘 위로 하얀 초승달이 빼꼼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면 하늘에선 무수히 많은 별들이 마치 보석처럼 우두두 쏟아지기 시작했다. 까만 어둠속에는 반딧불이가 저마다 현란한 춤을 추며 적막한 밤하늘을 반짝반짝 아름답게 물들이곤 했다.
고향의 여름은 마을 앞산과 뒷산에서 귀가 따갑게 울어대는 매미소리와 오뉴월 햇살 아래 활짝 핀 하얀 아카시아 꽃잎, 그리고 들판의 수줍은 감자 꽃이 수다스런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시작됐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감자를 재배하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였으니 자연히 감자가 지천에 흔할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 하면 감자바위를 제일 먼저 떠올리지만 고향 평창이야말로 감자 재배에 적합한 해발 700m의 고랭지 지역이라 감자바위의 원조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 시절에는 여름 한 낮이면 집 앞 냇가로 나가 벌건 땡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갓 캐온 감자를 돌판 위에 구워 먹는 맛이 참으로 일품이었다. 고향에서는 감자를 돌 위에 익혀 먹는 것을 ‘땡곳’이라고 불렀다. ‘땡곳’을 할 때는 먼저 넓적한 돌판을 골라 감자를 그 위에 올려놓고 모래를 덮는다. 그리고 돌 밑으로 약 30분 정도 불을 지피고 나면, 달아오른 돌판 위로 뜨거운 열이 전달되고 모랫속에서는 모락모락 김을 내며 감자가 골고루 익어간다. 이윽고 감자가 다 익고 나면 땡볕 더위도 잊은 채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훔쳐가며 속살까지 맛있게 익은 감자를 까먹는다. 그리고는 곧바로 강물로 뛰어들어 멱을 감으며 한여름의 지루한 더위를 식히곤 했다.
냇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그렇게 감자를 구워 먹는 맛도 맛이었지만 친구들과 뜻이 맞으면 족대를 들고 도랑으로 나가 수풀을 헤쳐 가며 물고기를 잡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한 친구는 좁은 도랑 아래에서 족대를 대고 서 있고, 다른 한 친구는 수풀을 발로 헤치며 연신 흙탕물을 튕겨가며 고기몰이를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족대를 들어 올리면 불거지, 피라미, 미꾸라지, 꺽지 같은 물고기들이 하얀 배를 펄떡 거리며 족대 안으로 여러 마리씩 들어갔다. 재수가 좋은 날은 커다란 뱀장어나 묵직한 메기를 잡는 경우도 있었다. 간혹 뱀장어 대신 물뱀이 들어가는 수도 있는데 이때는 고기고 뭐고 다 팽개치고 줄행랑을 치기가 일쑤였다.
학교를 오가는 길목에 가로 놓여있는 마을 도랑은 폭이 제법 넓은 곳이라 수초가 유난히 많았다. 여름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방을 다리 위에 밀어놓고 친구들과 팬티차림으로 그 속에 들어가 수초를 엮어 배를 만들어 타고 놀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도랑이나 개울마다 물고기도 참 많았다. 피라미, 버들치, 불거지, 쉬리, 꺽지, 메자, 돌나리, 미꾸라지, 탱가리, 빠가사리, 돌메기······. 일일이 그 이름을 나열하기가 끝이 없을 정도로 물고기가 흔했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졸졸졸 물이 흐르는 도랑이나 개울에서 떼로 몰려다니는 물고기를 발견할 때면 어김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살랑살랑 한가로이 꼬리를 치며 노니는 물고기들을 구경하곤 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논물이 마를 무렵이면 아무 곳이나 땅을 파 헤치기만 해도 미꾸라지가 한 움큼씩 펄떡거리며 튀어나올 정도였다. 지금은 농촌에도 대부분 경지정리가 되었고 홍수를 대비하여 도랑마다 시멘트로 수로를 만들어 물고기가 서식을 할 수 없다. 당연히 도랑에서는 여간해서 물고기를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논바닥이나 수초가 우거진 도랑마다 그 많던 미꾸라지며 물고기들, 그리고 물고기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꼬리를 치며 노닐던, 눈이 부시도록 맑고 푸른 추억속의 강물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산업화의 물결은 머나 먼 시골 산간마을에까지 불어오게 되었다. 물질문명이 가속화 될수록 편리함의 이면으로는 파괴되고 잊혀져가는 아름다운 옛 정취들, 그 속에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간성마저도 문명의 물살 속에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지난날의 고향을 생각할 때면 안타까운 생각이 밀려들곤 한다.
초등학교 친구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억지로 아버님 손에 이끌려 낯설게 첫 대면을 한 시골 학교.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천방지축으로 뛰어놀기만 하다가 아버님을 따라 학교에 다다르고 보니 운동장에는 벌써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공을 차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 학년에 고작 한 개 반밖에 없는 자그만 시골학교였기에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그렇게 같은 학년 겸 반 동창생이 되어 학교생활을 함께하게 되었다. 당시 전교생은 총 300명 정도였다. 우리 학년은 한 개 반에 50명 정도가 전부였는데 입학이후 졸업 때까지 무려 6년 동안을 줄곧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를 하며 지냈다. 도시학교 보다는 훨씬 적은 학생 수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요즘의 농촌학교에 비해서는 제법 많은 학생 수가 아니었나 싶다. 50 여명이 한 반에 모여 무려 6년 동안이나 코를 흘리며 공부를 했으니 누구네 집 형제들이 몇 명이고 아버지가 누구며 친구네 집의 개똥이 이름이 무엇인지까지도 훤히 꿰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코를 흘리고 다녀 옷소매는 언제나 얼룩 때로 절어 있었다. 목욕시설도 변변치 않던 시절이다 보니 어쩌다 학교에서 용의검사라도 하는 날은 다들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기만 했었다. 가끔은 공부가 하기 싫어 뒷동산에 올라가 친구들과 땡땡이를 치고 놀기도 했었는데, 그 일로 선생님께 벌을 받고 1주일 내내 교실청소를 했던 기억도 난다.
당시에는 ‘남녀 7세 부동석’이라는 공식이 충실히 지켜지던 보수적인 시절이라 같은 동네, 같은 반 아이들끼리도 말을 잘 하질 않았다. 심지어 짝꿍끼리도 책상에 금을 그어 놓고 지내기까지 했다. 어쩌다 남녀가 짝을 이뤄 운동회 연습이라도 할 때면 서로 손을 잡지 않으려고 나무토막을 반씩 나눠 잡고 운동회 연습을 했을 정도였으니······. 아이들 중에는 짓궂은 친구들이 꼭 있게 마련이어서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라도 하면 고무줄을 툭 끊어놓고 도망을 가기도 하고, 쉬는 시간이면 도시락에 몰래 올챙이를 집어넣기도 하여 여학생으로부터 원성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간혹 이성 간에 서로 얘기라도 하다 들키는 날엔 화장실 담벼락에 누구누구는 어쩌구 저쩌구 하는 낙서를 해놓거나 이리저리 소문을 내서 주변에서 놀림을 받는 일도 종종 생기곤 했다. 그렇게 6년 동안을 철저하게 남녀 간에 평행선을 긋고 학교생활을 했다. 하지만 막상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춘기를 훌쩍 지나면서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들 자연스레 같이 어울려 다니게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팔장까지 끼고 다닐 정도로 절친한 친구가 돼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남녀 간 이성 친구라기보다는 동성 간의 친구에 가까울 정도로 부담 없고 격의 없는 우정을 유지했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동창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갖게 되었고 지금도 매년 한 번씩은 고향마을에서 동창 모임을 갖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30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만큼은 여전히 너나 할 것 없이 반갑고 편하기만 한 코흘리개 친구 것이다. 사회에서는 자신의 이름 대신 누구누구의 엄마나 아빠로 불리거나 직장 내의 직위에 따라 호칭이 불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동창 모임에서 만큼은 서로의 이름이나 별명까지 부를 수 있으니 그야말로 격의 없는 동심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컴퓨터도 핸드폰도 오락기도 없었다. 오직 아날로그 체계에 의존하여 모든 걸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야했던 시절이라 놀이문화라곤 함께 어울려 공을 차고, 강으로 산으로 들판으로 몰려다니며 뛰어놀던 어프라인 방식밖에 없었다. 혼자 놀 수 있는 시스템이 따로 없다보니 자연스레 여러 친구들과 그렇게 어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친구들 간에도 더욱 돈독한 정이 쌓이게 됐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바닥만 한 운동장에 불과한데 그때는 왜 운동장이 그리 넓게만 보이던지······. 졸업을 하고나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지만 손바닥만한 운동장에서 어떻게 축구시합을 하고 100m 달리기를 하고 학교 운동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은 볼품없이 작고 초라해 보이기만 한다. 그나마도 지금은 농촌 인구 감소로 모교마저 폐교가 되고 말았다. 아직도 모교 교정에 서면 코흘리개 시절 동심의 추억이 눈에 선하기만 한데, 이끼 낀 세월의 바닥 위로 잡초만 무성한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렸을 때는 선생님 말씀보다는 아이들과 밖에나가 뛰어놀 생각만 하던 철없던 촌동들이었는데, 지금은 돈 잘 버는 사업가도, 공직에 있는 친구도, 개인택시를 하는 친구도, 어엿한 세탁소 사장님도 있다. 당시만 해도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이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절반 이상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도회로 나가 공장을 다니며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몇 안 되는 친구들만이 고등학교까지 겨우 진학을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난하던 그 시절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기 몫을 다하며 사회의 든든한 구성원으로서 모두가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내 일처럼 흐뭇하기만 하다.
벌써 초등학교를 졸업한지도 어언 30년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이런 저런 이유로 세상을 등진 친구도 더러 생겼다. 생활 전선에서 각박하게 살다보면 세상의 때가 묻을 법도 하건만 우리 친구들은 여전히 어질고 소박한 마음으로 순박한 감성들을 잃지 않고 사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모임이 있지만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초등학교 동창모임 만큼은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달려가고 싶은 모임이다.
바쁘고 각박한 현실은 잠시 옆으로 미뤄두고 동심으로 돌아가 반갑게 소주잔 기울일 수 있는 초등학교 모임이 젤 부담 없고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학원이다 컴퓨터다 해서 마음껏 뛰어놀 친구도 별로 없는 요즘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다음에 우리 아이들은 무슨 추억을 더듬으며 살아갈지 가슴이 답답하기만 한다.
동심의 크리스마스
누구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이와 관련한 여러 가지 추억이 있을 테지만, 코흘리개 시절의 크리스마스는 내게도 가슴 설레는 즐거움과 기다림이 있는 특별한 날이다. 한겨울의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면 온 누리마다 예수탄생의 기쁨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산골짜기 작은 우리 마을에서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한 동네 작은 교회가 제일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이맘때가 되면 교회 친구들과 같이 뒷동산에 올라, 크리스마스트리로 쓸 사철나무를 캐다가 오색 반짝이와 전구, 종, 버선, 양말, 촛불, 별무늬를 장식하며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로 초등학생으로 구성된 교회 학생부에서는 크리스마스 공연을 위해 연극이나 춤, 노래, 장기자랑 같은 공연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몇날 며칠에 걸친 나름대로의 분주한 준비 끝에 드디어 크리스마스이브를 맞게 되는 것이다.
“땡그랑~ 땡그랑~”
은은한 교회 종소리가 온 동네 골짜기마다 구석구석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나는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함께 마을 강변에 나지막하게 서있는 ‘다수교회’로 향한다.
평소에는 1년에 한 번도 교회를 나가지 않았지만 크리스마스 날 만큼은 추운 눈보라까지 헤치고 교회로 향했던 것이다. 교회는 우리 마을에만 유일하게 있었기에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면 강 건너 마을 아이들까지도 추위를 무릅쓰고 잔뜩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때는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눈이 유독 많이 내리곤 했다. 뽀드득 뽀드득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을 밟으며 구불구불한 마을길을 걸어갔고, 교회에 당도하면 우리는 나무난로가 놓인 교회 마룻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공연을 관람 했다. 공연이래야 시골교회 어린 아이들의 어설픈 연극이나 실수투성이의 서툰 장기자랑이 대부분이었지만, 볼거리가 거의 없던 그 시절에는 아이들의 공연도 나름대로 어눌한 재미가 있었다. 사실 공연 관람도 관람이지만 내심은 교회에서 나눠주는 과자나 사탕이 든 선물꾸러미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코흘리개 아이들은 모두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공연 관람과 교회 행사가 모두 끝나면 각자 과자나 사탕이 든 선물을 받아들고는 부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들 갔으니······.
이윽고 밤이 깊어지면 교회 성가대에서는 마을별로 구역을 나눠 집집마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새해의 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크리스마스 성탄가를 불러주곤 했다. 어머님은 잠을 뒤척이며 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겨울바람 새어드는 문틈으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성가대의 캐롤송이 들려오면 얼른 문을 열고 나가 미리 준비한 먹을거리를 나누어 주기도 하시고, 어떨 때는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들고 나가 그들의 손에 쥐어주기도 하셨다.
물론 요즘은 이런저런 이유로 크리스마스 날 밤, 대문 앞까지 와서 성탄가를 부르며 새해의 축복을 기원하던 예전의 정감어린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열 살이 될 무렵까지는 동생과 나는 부모님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잤는데,
“크리스마스 날은 산타할아버지가 눈썰매를 타고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시는 날이란다”
라는 어머님 말씀을 믿고 밀려드는 졸음을 참아가며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늦은 밤에야 겨우 잠이 들기도 했었다.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면 간밤에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가신 건지, 선물은 가지고 오신 건지 궁금한 생각에 머리맡부터 먼저 살펴보게 되는데, 우리들 머리맡엔 어김없이 카스테라 빵이나 색연필 같은 선물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뜻밖의 선물에 기뻐하는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어머님은 아무 말씀 없이 빙긋이 웃기만 하셨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산타할아버지 선물이라고 믿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나는 그때까지도 해마다 산타할아버지가 갖고 오실 선물을 생각하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곤 했으니 참으로 순진했었다는 생각에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넉넉하게 살지 못하던 시절,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시골 마을에서 흰 눈 소복이 내리는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던 순박한 아이들······.
동구 밖에 소복이 쌓인 하얀 눈밭 위를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던 그 아이들의 머리맡에, 세월이 많이 지나버린 지금은 어떤 크리스마스 선물이 놓여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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