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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상반기 신인발굴]_평론_엄진희_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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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5회 작성일 17-02-16 14:38

본문

<평론 부문>


성명 : 엄진희

연령:  , 38

주소 : 서울 중랑구 용마산로 5835-24, 101.

연락처: 02-6082-8477 









  

용서의 아포리아, 벌레 이야기(이청준, 1985)

 

내 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읽을 수있는 이야기인가. 읽혀지는 소설인가. 데리다는 진정한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기? 이게 가능한가. 신이 아니고서 말이다. 이 난관 앞에서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볼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한 가족의 비극적 이야기다. 젊은 부부가 어느 날 아이를 유괴당하고, 아이는 결국 주검으로 발견된다. 살인자가 밝혀지고 아이 엄마는 그 살인자를 용서하고자 하지만 그 용서마저 실패로 끝나고 그녀는 자살하고 만다. 어찌보면 한 가정의 비극사에 불과한 이 소설은 영화 <밀양>으로 다시 회자되기도 했지만, 그냥 읽고 버리기에는 뭔가가 강하게 남는다. 뭔가는 무엇일까. 현실에서 있을 법한 하나의 사건, 이런 사건과 마주쳤을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자살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무엇일까. 이런 물음들이 떠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위에 말한 데리다의 명제를 다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게 (진정한)용서라니. 용서 불가능한 것을 용서하라고?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명제들을 일치시키라고?(용서=용서할 수 없는 것) 이게 가능한가?

나의 질문을 틀렸다. 불가능한 것을 행하고 사유하라는데 자꾸 나는 다시 묻는다. 그게 가능해? 라고. 저 명제에서 문제는 두 가지다. ‘용서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와 불가능한 것을 사유해야 하는 이유, 이걸 알아야 사유하든 행동하든 할 것 아닌가.

먼저 용서에 대해 말해보자.

우리는 대체 왜 용서해야 하는가. 네 가지 정도의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우리는 여러 복합적 사회 관계망 속에서 항상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동시에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존재다. 둘째, 인간은 함께-존재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셋째, 인간은 제도 속 존재이다. 인간은 제도를 필요로 하지만 그 제도에 의해 구속되고 상처 받는다. 그래서 개인 간 용서도 필요하지만 집단 간, 국가 간 용서도 필요하다. 넷째, 용서는 과거와 연관된다.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상처로 얼룩진 과거를 넘어서 새로운 미래를 지속하기 위해서도 용서는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도 음미해 보자. 불가능한 것을 왜 사유해야 할까.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 가령 신이나 유령에 대해 말한다는 것? 오래 전에 칸트는 인간이 사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한계선을 긋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런 문제들은 인간 사회의 문제가 아닌 종교나 믿음, 신앙의 문제로 치워놓지 않았던가.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불가능한일들은 여전히 일어난다. 현실적이지 않은 일, 우리의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 계산할 수 없는 것, 셈해지지 않는 것들은 계속해서 출몰한다. 그 불가능한 일이 현실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나 쉽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에 마주쳤을 때,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내 상식과 이성에 어긋나는 일들 앞에서, 정신을 놓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제서야 부랴부랴 절이나 교회라도 나가야 하는가. 그러면 모든 일은 해결이 되는가. 내 마음의 평화, 안정을 위해 기도하는 것, 믿을게 그러니 나를 구원해줘, 이런 기브 앤 테이크 식의 조건적기도는 진정한 기도이고 믿음인가. 데리다 같으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소설 속에서 알암이 엄마는 애초에 틀린 시도를 했을 뿐이다.

 

대립의 일치?

더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사유한다는 것에 대해. 현실에서 누군가가 연봉 얼마로 값(가치)이 정해져 있다고 해보자. /녀는 그걸로 깨끗이 승복할 수 있는가. 혹자는 만족하지 못할 수 있고 혹자는 만족할 수 있지만 항상 이렇게 그것 이상이나 이하남는’(나머지). 가령 나는 연봉 3천이지만 그 이상일수도 이하일 수도 있다. 그걸로는 나를 다 말할 수 없다. 항상 나에게는 나=연봉 얼마계산되지 않는무엇인가가 남는다. 유령처럼. 그것을 불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령 같은 것, 셈해지지 않는 것, 무엇인지 모를 어떤 것, 이런 불가능한 것들 앞에서 우리는 당황한다. 셈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불가능한 것들이 있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안다. 그래서 우리 현실은 모든 게 가능해 보이지만(나는 교환 경제 논리에서는 같은 값으로 다른 사람과 교환이나 대체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나는 누구와도 대체불가인 독특한 한 사람 아닌가) 사실은 불가능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현실이 불가능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는 그걸 사유해야 한다. 종교적 차원으로 밀쳐놓을 게 아니라.

불가능한 것, 내 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 이제 이 문제에 집중해보자. 용서=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이 겉으로 보기에 대립하는 것들의 일치를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지젝은 이런 대립의 일치가 우리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사라졌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 현상을 사랑이라는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랑은 계산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것이 아닌 하나의 이해 불가능한기적 같은 사건이다. 사랑은 역설적인 사건이다. 사랑하는 주체는 자신을 탈주체화 하는 계기 속에서만 사랑을 할 수 있다. 나는 나이지만 동시에 나를 버리는(포기하는) 한에서만 타자로서의 상대와 온전히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사랑의 기적은 대립이 일치(절대적 주체성과 근본적 자기 대상화라는 대립의 일치, 주체와 탈주체의 일치의 지점)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합리적이고 충분히 이성적인 현대인으로서 우리는 이런 기적 같은 것, 계산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거나 사유하고자하는가.

진정한 사건, 만남, 사랑 같은 것은 이제 찾아보기 힘든 것일까. 그래서 만남은 결혼정보 회사를 통해서나 이루어지는 것일까(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조건 있는’, ‘조건 보는사랑만 할 수 있게 된 걸까. 조건 없는 사랑, 계산할 수 없는 사랑은 이제 불가능한가. 용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가. 최소한 뉘우치는 시늉(조건)이라도 해야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 그것도 없다면? 내가 그를 왜 용서할 것인가.

네가 사랑을 주면 나도 줄게, 네가 뉘우치면 용서할게, 말고 아무런 조건도 전제도 없는 어떤 사랑, 용서는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무조건적 사랑, 무조건적 용서, 무한한 용서는 이제, ‘정말불가능한 것일까.

 

살인보다 더한 것

벌레이야기에서 주산 학원장 김도섭은 살인자이다. 살인은 나빠, 악이야 그러니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해, 이것만으로는 이 소설을 온전히 읽어낼 수가 없다. 이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알암이 엄마는 소설 속에서 자살할 수 없다. 알암이 엄마는 왜 자살할 수 밖에 없었을까. 우선 이걸 해명해야 한다.

살인자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죄의 사함을 받았을 때 알암이 엄마는 자신 말고 감히 누가 그의 죄를 사해줄 수 있는지 절규한다. 그녀는 하느님이라는 대타자는 믿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자식을 대입해 놓았다. 시간이 지나 알암이 엄마는 살인자를 용서해보고자 했다. 그게 그녀가 다시 정상적인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인 듯 보였다. 하지만 이게 문제였다. 그녀는 데리다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근본적으로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없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데리다는 조건 없는용서를 용서라고 불렀다. 알암이 엄마는 알암이의 구원과 자신의 평안과 맞바꾸기(교환) 위해 용서하고자 했다. 또 그것은 권력(주권) 없이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용서하는 자의 위치에, 즉 용서하는 자, 라는 권력적 위치에 서 있었다. 이 순간 순수한 용서는 이미 실패한 셈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부모의 그 이해 불가능함, 거기서 오는 불안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그들이 알지 못하는 한그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유괴되었다면 만일 살해되었다면 그 시체라도 찾아야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되는 불안은 인간을 지치게 할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알암이 엄마가 택한 것은 아이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과 기원이었고, 아이가 시신으로 발견된 후에는 용서로서 아이의 구원과 자신의 안정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용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언어화되지 않는 것에 마주쳤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살인자조차 내 자식을 죽인 자 살인자’, 라고 언어로 이름 붙여지고 의미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지배할 수 있다. 나아가 그래야만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가능한가. 나는 저 한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고 지배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게 가능하다면 그 폭력은(한 인간을 식민화하는 폭력, 그게 설사 살인자라해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용서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을 때 알암이 엄마는 무력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소유할 수도 아이를 죽인 살인자도 소유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을 범죄자, 유대인, 여자, 동성애자라고 결정지을 때 우리는 어떤 일을 자행하는 것인가. 그의 무한한 가능성, 잠재성을 모두 삭제하고 너는 이런 사람, 이라고 내가 규정하고 판단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자크 랑시에르라는 프랑스 사상가는 우리가 이런 정체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한 인간을 유한하게 가두어 둘 때 그 사람이 지닌 잠재성, 그 무한한 가능성은 소멸된다. 이런 폭력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타자에게 아무렇지 않게 행사하고 있다. 너는 범죄자야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해, 너는 학생이야, 그러니 1등 해야 해, 당신은 가장이야 그러니 돈을 벌어와야 해, 하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조용한 살인자들이다.

아이를 유괴까지 해야만 했던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왜 우리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양산하는 것인가. 이런 사람을 양산하는 사회를 나는 유지하고 있으면서 순수하게 무죄인가. 너는 낙오자가 되어선 안돼, 너는 좋은 회사에 취직해야해, 너는 좋은 대학에 가야해,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관심과 사랑을 받을 처지에 놓여 있지 않은 사람들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면서 나는 철저하게 무죄인가. 나는 누군가를 이 사회 밖으로 밀어낼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한 사회의 구성원인 어떤 익명의 타자에게 나는 평소 어떤 폭력을 행사해왔던 것일까.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비판적 사유의 부재는 그 자체로 이라 말한 적 있다. ‘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을 생각하기

우리 인간은 유한하다. 하지만 동물도 유한하다. 인간이 정말 동물과 동급일 수 없다면 그 유한성을 넘어서는 일 밖에 없을지 모른다. 동물과 달리 인간이 내 (유한한)생명 유지만이 아니라 이웃의 생명과 안전(유한한 나를 넘어서는 타자를 향한 무한성)에도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 세계의 경쟁주의 성과주의는 점점 가족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 인간들만을 양산하고, 그런 인간이 되라고 강요한다.

이 세계는 그렇게 자신을 유한성으로 축소하고 있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이 지점에서 계산 불가능한 것, 눈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사랑, 우정, 용서 등)는 서서히 사멸해 간다. 우리는 내게 이익이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을 상품화 하는 자본주의 패러다임은 세계의 불확실한 측면들, 계산할 수 없는 것들, 즉 가격으로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철저히 배제하며 세계를 폐쇄된 유한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세계에서는 유령 같은 것, 실체가 없는 것, 규정할 수 없는 것, 계산할 수 없는 것, 사랑이나 우정, 용서와 같은 가치들은 유예시킨다.

알암이 엄마는 조건 없는 용서, 무한한 용서를 할 용기가 있었을까. 김 집사는 알암이 엄마에게 알암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으려면 그걸 바라기 전에 당신의 믿음을 먼저 그분께 바쳐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 집사는 믿음을 줘야 그 보답으로 사랑을 베푸는 주님을 전제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주든 말든 무한한 사랑을 줘야 하는 분 아닌가. 하지만 이런 기브 앤 테이크식의 주님은 알암이 엄마를 끊임없이 유혹한다. 알암이 엄마는 얼마든지 주님을 믿는 척할 수 있다. 그녀는 믿을 테니 제발 내 아이를 돌려달라고 기도한다. 이런 신앙 체계, 믿음의 구조는 애초에 거짓일 수 밖에 없다. 알암이 엄마의 파국은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용서에는 한계도, 제한도, 어떤 조건도 없다. 그것은 이질적인 것,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살인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은 살인자를 용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알암이 엄마는 살인자를 용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그녀의 용서의 실패가 있다. 용서한다는 것이 이러한 역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암이 엄마는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용서의 아포리아(대립하는 것들의 일치)는 지상의 질서, 교환 경제 체제로서의 현실 질서를 넘어서는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이나 믿음은 가시적인 차원 너머에 있다. 그것은 상징적 현실 질서 너머에 있다. 알암이 엄마는 그 너머를 보려고 했던 사람인가. 아니면 그 너머를 부인하려 했던 사람인가. 제대로 된 신앙 즉 종교성, 초월성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적이고 유한한 존재의, 시장에서 비교 가능한 모든 가치 너머의 절대적 가치의 존엄성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누군가를 무한히 존엄한 존재로 여기기, 무작정 용서하기, 불가능한것을 행하기, 이것은 어쩌면 아직 우리에게 도래하지 않은 어떤 다른 세계로의 초대일지 모른다. 기브 앤 테이크 너머의 세계 말이다. 우리는 진정, 기브 앤 테이크 주체 말고 다른 주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주체의 문제

살인마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으로 가득 찼던 알암이 엄마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정상적 삶을 회복해야 했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삶일 수가 없었다. 아내는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언젠가는 어차피 아이의 일을 잊고 자기 파괴의 원망과 복수심에서 벗어나야 했다.

 

여기서 아내 자신, ‘정상적인 자신이라는 관념은 환상일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애초에 그런 온전한 자아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지 모른다. 그래서 라캉은 주체를 빗금쳐진 주체(주체에subject 빗금 ‘$’)로 표기하기도 했다. 우리는 법과 질서 속에 태어나고 언어의 법에 따라야만 사회 속에 진입할 수 있다. 주체는 그렇게 처음부터 거세된다. 포근한 엄마 품에서 나와서 이제 학교로 사회로 적응해야 하는 주체는 그 포근함을 거세당하고 현실에서 엄마 품과는 다른 무엇, 하지만 내게 안락함을 주는 다른 것을 찾아 해매야 한다. 우리는 가장 안락했던 순간을 반복하고 싶어 한다. 나를 편하게 하고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줄 사람, 그런 존재는 내게 소중한 보물같은 것 아닐까. 누군가에겐 그런 존재가 연인일 수도 있고, 부모에게는 자식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알암이 엄마에게는 알암이였을 것이다. 알암이는 엄마에게 일종의 (욕망의 대상-원인인)대상a로서 그 아이 이상이면서 동시에 그 이하인 존재로서 내가 사랑하는 특별한 대상이자 항상 안쓰러운 대상, 결핍되어서 사랑을 더 많이 줘야할 것 같은 대상이다. 그래서 그 존재는 내 욕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욕망하게 하는 존재이기에 사라지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대상a는 이런식으로 인간 존재의 삶의 추동력, 충동이다. 이게 사라졌을 때 인간은 삶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의 리비도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욕망하는 어떤 일에 투여된다.

알암이 엄마는 욕망의 대상-원인(알암이)을 상실하고 리비도 투여를 멈춘 채, 제 스스로 삶을 놓아 버렸다. 정신분석에서는 욕망과 충동을 구분하는데 욕망이 (특정)대상을 추구한다면 충동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주위를 배회하며 차라리 대상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욕망은 대상을 결여하기와 결여에서 오는 불만족에 관여하지만 충동은 결여 자체를 대상으로 취하면서 불만족의 만족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충동은 라캉에 따르면 사실 죽음충동이고 이것은 쾌락원칙(항상성의 원칙, 근친상간 금지)넘어서있다.

죽음충동은 말하자면 자기 파괴적 자유이다. 이 죽음충동은 죽음을 향한 존재의 충동, , 세계의 실재(세계 즉, 상징화에 저항하는) 혹은 불가능성과의 만남을 받아들이는 충동이다. 이 지점에 대한 사유 없는 닫힌 체계는 죽음의 체계, 전체주의적 체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알암이 엄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전체 내의 불가능성(비전체의) 차원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래서 충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식과 믿음 사이

그녀의 체계는 불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닫힌 체계였다. 알암이 엄마는 철저하게 근대적(이성적)인간 형상이었다. 하지만 근대가 합리적 이성으로 자신을 정립하고자 했을 때 근대는 비이성적인 것을 추방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또 다른 비이성에 불과했다. (근대적)이성의 체계로 만들어진 지식은 그 안에 불가능성, 지식으로 포획되지 않는 무엇(‘나머지’)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계산되지 않는 불가능한 것, 데리다의 용어로 하자면 유령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알암이 엄마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데리다에 의하면 우리 현실 질서가 만들어 놓은 저와 같은 대립 구조(믿음과 지식 같은) 속에서는 정의도, 사랑도, 용서도 존재할 수가 없다. 믿음과 지식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멍(공백) 속에 달라붙어 있는 다른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립이 무너지는 곳에서 저 둘이 일치하는 곳에서 용서와 사랑이 가능하게 된다.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이런 의미에서이다. 하지만 알암이 엄마는 살인자와 희생자가 (이 대립이)동등해질 수 있다는 것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중략) 김 집사는 그러면서 그의 영혼이 이미 주님의 용서를 받은 이상, 그는 아내와도 똑같은 여호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는 아들딸이 된 것이라 하였다.

 

그녀는 살인자와 희생자인 내가 똑같이 하느님 안에 아들딸이라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정체성은 살인자이고 나의 정체성은 희생자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녀는 살인자와 희생자인 내가 같은 사람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유대인과 내가 동일한 인간이라는 의식이 있었다면 홀로코스트는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는 영원히 살인자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 편이 내가 그를 지배하는 데 용이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나의 정신은 혼돈스러워진다. 알암이 엄마는 살인자를 만나고 돌아와서 밥을 먹을 수도 물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실재(상징적으로 이름 불려진, 살인자라는 정체성에 저항하는 존재, 불가능하고 이해되지 않는 존재)와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이 불가능한 실재와의 만남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나가며

우울증자로서 알암이 엄마는 정신병과 신경증의 어디엔가 우리 의식으로는 종잡을 수 없는 무의식처럼 존재하고 있다. 그녀는 애도의 실패로 우울증에 빠졌다. 그리고 알암이에게 일어난 일은 부인되어야 했다. 마치 어린 남자 아이가 엄마에게 페니스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부인한 채 성장해서 페니스의 대체물로 스타킹 같은 것에 몰두하는 성도착의 경우처럼. 도착적 사유 속에서는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 세계는 결코 완결된 것이 아니므로(‘불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속적으로 비판받아야 하고 나아가 지속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추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위험하고 불온한 생각으로 간주된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이제 그 사건 이후 사건 자체를 받아들이기보다 편집증적으로 그 결핍, 알암이의 빈자리를 무언가로 메꾸려고 했다. 그것은 그 살인자를 용서함으로써 알암이를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구원하는 것이었다. 자신 또한 그 과정 속에서 치유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던 것이다. 다시 우리의 문제는 용서이다.

우리는 교환 경제 속에서 살면서 불가능한 것, 셈할 수 없는 것, 교환되지 않는 무엇에 대해 생각하는 게 낯설다. 무한한 용서? 그게 가능해? 누군가의 무한한 사랑? 나는 그것을 받아낼 자신은 있어도 자신은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손해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자연히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무엇이라도 줘야하지 않나 하는 마음의 빚이라도 생기기 마련이다. 주고 받고의, 기브 앤 테이크라고 하는 게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냉정한 것이 인간 관계의 참 모습일까. 이게 다 일까. 그렇다면 우리 인간사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싱거운 것 아닌가. 이렇게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다면 간편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왜 인간은 좋은 삶에 대해 고민하고 좋은 글을 쓰려고 밤을 새우는가, 왜 사랑을 하고 누군가를 무한히 돌보는가, 돌아오는 것도 없이, 왜 누군가는 광화문 촛불 광장에서 분신하는가. 이런 불가능한 일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등가 교환경제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교환 경제 체제 내에서는 불가능한것이다. 사유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바로 그 교환 경제 논리를 벗어나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라고 주문한다.

모든 것이, 인간조차 같은 값으로 매겨지고 대체, 교환될 수 있는 사회에서 인간은 벌레로 전락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그 슬픔으로 인간적인 삶을 살지 못해서 벌레인 것만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교환 경제 속에서 인간적인 것을 버리고 벌레의 삶을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살인은 이고 희생자인 우리는 인가. 우리 공동체에서 대다수의 선한 사람들, 법을 위반하지 않고 살아가는 서민들이 그들보다 약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지 않고 내 안위만을 살필 때 그 서민들은 선한자들인가 악한자들인가. 이들이 혹시라도 자기 반성과 성찰로 그런 사회를 조금씩 바꿔나가려 노력할 때 그들의 악은 선과 일치할 수 있을까. 알암이 엄마는 이런 철저한 자기 반성을 할 수 있었던 존재인가. 알암이 엄마는 철저하게 교환 경제 속에서만 살아간 인물이다. 용서마저 교환으로 이해한 그녀! 니가 뉘우친다면 용서해줄게, 이건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만일 알암이 엄마가 진정으로 용서를 하고자 했다면 살인자가 뉘우치든 뉘우치지 않든 그것은 행해질 수 있어야 한다. 사랑에서 전제 조건이 붙은 사랑을 우리는 사랑이라 말하지 않는다. 상대가 아파트가 몇 채냐에 따라서 사랑하기로 결정한다면 이런 사회는 인간의 사회인가, 벌레의 사회인가.

벌레이기를 넘어서기 위해, 상징적, 교환적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용서’, 해야 하고 문학’, 해야 하는지 모른다. 교환으로서의 용서 너머에 어떤 용서가 가능할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용서, 무한한 용서, 신적 용서에 가까울 그런 용서는 설사 그게 살인자라해도 그런 정체성 자체를 뛰어 넘는 그런 용서 아닐까. 우리 사회는 살인자에게 또는 희생자에게 그 정체성 너머의 그 정체성을 초과하는 부분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는가. 하나의 정체성에 갇힌 인간에게서 다른 가능성은 말살된다. 한번의 가해자는 영원히 가해자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반대로 희생자로서의 내가 영원히 희생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면 이 또한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알암이 엄마에게는 현실 질서(등가 교환 체계)를 넘어서, 무한한 용서(불가능한 것으로서)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공간이 없었다. 자신 안에 그럴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녀의 지식 체계, 인식 체계는 완전히 닫혀 있었다. 살인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주권자(권력자)로서 내가 용서해야 한다. 그녀에게는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 그녀는 그 이외의 다른 것, 상징적 질서의 의미체계 너머’(불가능성)를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완전한 전체로서 빈틈없는 체계를 선호하는 체계주의자의 다른 이름은 전체주의다.

이러한 주체에게는 세계와 마찬가지로 주체도 완벽해야 한다. 하지만 완벽한 주체도 없고 완벽한 세계도 없다. 라캉의 빗금친 주체처럼 주체는 그 자신에 대해 결코 완전히 알 수 없으며 언제나 그 자신으로부터 단절된다. 한 사회 또한 언제나 불가능성(교환되지 않는 것, 계산되지 않는 것)으로 물들어 있다. 이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가령 동성애), 명문학교에 가고, 성공하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인가를 열망한다는 것, 이런 것들은 사회를 균열낸다. 하지만 바로 그 균열, 간극에 문학이, 예술이 존재한다. 여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짜여져 있고 완벽하다면 주체는 어디에서 자유를 느끼며 더 이상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 아무런 욕망이 없는 삶을 우리는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현실 너머에 소설이 있고 시가 있다. 문학은 현실이 다 말해주지 못하는 것(나머지)들을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문학은 의식되지 않는 것들,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이것은 무엇이다, 로 다 말해지지 않는 의식 너머의 어떤 지점, ‘불가능의 그 지점을 현실의 언어가 다 하지 못해서 우리에겐 문학의 언어가 필요하다. 문학의 언어는 비유다. 우리가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사물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좀 더 가까운 곳에 머물기(그곳은 실재의 장소, 불가능성을 위한 장소일 것이다) 위해서다. 그리고 이 비유를 이해하는 일은 곧 하늘 나라의 문을 여는 일과 일치한다. 지상에서 하늘나라와 만나는 일, 지상과 천상이 (대립이)일치하는 기적 같은 일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하늘 나라는 어떤 곳인가. 죄인도 고아도 노숙인도 그 어떤 정체성도 없는 세상이 아닐까. 그 나라에 우리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지상의 언어로는 불가능하다. 문학의 언어를 빌려서만 가능한지 모른다. 그 언어는 또한 무의식의 언어이다.

벌레 이야기는 그 자체로 불가능성(‘견딜 수 없는 실재’)에 대한 사유의 부재가 가져오는 파국을 선취하는 무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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