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리토피아 신인상

신인상
수상자
투고작

김경희/단편/산세베리아/06.07.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43회 작성일 06-07-20 13:55

본문

    이  름 : 김  경희
    성  별 : 여
    나  이 : 44세
    경  력 : 강원대학교 졸업. 중등 교사, 현 학원 강사
    주  소 : (200-881) 춘천시 동내면 거두리 974-10  3F
               (joma86@hanmail.net)
    전  화 : 016-686-6540  /  033-262-6540  
    부  문 : 단편소설  ‘산 세베리아’


                           산 세베리아

                                                              

  잔뜩 찌푸린 미간과 유연함 없는 태도만 봐도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알 수 있다. 그래도 잠시 참고 기다리면 드디어 말을 시작하려고 입술이 달싹거리는데 그때부턴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민다. 앞뒤 다 잘라먹고 오직 안 오르는 성적에 대해 말하는 미련한 학부형을 더할 수 없이 증오하면서 나는 시험지철과 출석부를 습관적으로 들춰본다.
  증오의 정체는 항상 원인이 없는 것에서 한계가 느껴진다. 언제나 그쯤에서 그만두거나 저항을 집어치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집어 치운다기보다 무시한다는 것이 맞겠다. 그 지극한 애정의 꺼풀을 벗겨내려 애쓸 필요는 없다. 한 달쯤 후에 다시 와서 똑같은 행태를 한 후 지갑에서 마지못해 한 달 분 수강료를 내놓을 것이고 아무 법적 효력 없는 학원용 영수증을 담보 맡아 가듯이 간직하고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사무장 에게 지난번 감기로 빠진 날만큼 날짜를 뒤로 밀어달라는 말소리가 들리자 증오는 한 겹 더 쌓이고 갑자기 배 아래쪽에 물컹한 기운이 느껴진다. 학부형이 나가고 사무장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입을 삐죽거린다.

  종소리가 나고 산발적으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강사들이 교무실로 들어와 앉는다. 나는 가급적 강한 어조로 진도 못 마친 학생은 주말을 이용해 보강 꼭 해주라는 말을 하면서 이번 기말고사 때 등수를 최소 10등 정도는 다 올려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험 준비 들어가면 다시 반복할 테니 보강은 안 해도 되지 않겠냐고 수학강사가 얼굴만 내 쪽으로 돌려 묻는다. 안 된다고, 그래도 보강은 따로 해주라고 단호히 대답한다. 산달이 다가와 무거워진 몸을 그대로 두고 모든 질문과 대답을 얼굴만 돌려 말하는 수학강사에게 몸이 그러니 두 배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만둔다. 다시 또 배에 물컹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제부터 4시간을 계속 수업해야 한다. 책상에 쌓여있는 문제지 철을 들여다보면서 이번 주까지 500문제를 다 풀어주고 다음 주엔 전년도 각 학교 기말고사 문제들을 다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시도 발가벗기고 수필도 발가벗기고 소설도 다 발가벗겨서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문제를 만들어내고 답을 유도하면서 다 외워라, 무조건 외워버려야 한다를 강조해 실전에서 한 문제도 놓치지 않게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시를 대하면 머릿속에서 재빨리 연이 나뉘고 중심시어가 뚜렷이 나타나며 쓰여 진 문법이 정리되는 것은 나를 흡족하게 해준다. 학생들은 미사여구 없이, 속된 감상의 부추김 없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알짜배기를 열심히 받아먹고 우리는 서로의 역할에 공감한다.
나는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예전에는 그런 것 같지 않았는데 점점 일에 맞게 목소리가 변해간다. 이건 중요하다, 꼭 시험에 나온다, 반드시 암기해두지 않으면 한 문제 날아간다는 말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종이 울리고 500문제를 뽑아 복사해 책으로 만든 나만의 문제지를 갖고 강의실로 향한다. 강의실 앞에서 강사들이 다 들어갔는가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는 3학년만을 가르친다. 한반에 15명이 정원이지만 내 수업은 늘 20명이 넘는다. 이 빽빽함은 가르치는 열정을 최고조에 달하게 해줄뿐더러 학생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학업에 대한 열정이 꽉 찬 밀도로 숨 가쁘게 전해져 온다. 공부 못하는 애들은 내 수업을 따라오지 못해 허덕이다 그냥 떨어져 나가고 나는 그런 애들에게 절대 환불을 안 해 준다. 시작하기 전에 학교 등수를 보고 학부모와 다짐을 해두기 때문에 환불 조치는 있을 수 없다. 내 수업을 들으면 국어는 안심이라고 생각하는 학부형과 학생들의 기대는 나를 뜨겁게 달군다. 4시간을 떠들고 나면 목구멍의 통로에 얇은 막이 한 꺼풀 얹힌 듯하다. 커피를 한잔 만들어 그 뜨거움으로 목을 천천히 데운다.

  남편은 손님용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놓은 채 일하고 있다. 일하고 있는 남편을 보는 것은 좋다. 사무장을 퇴근시키고 남편에게 언제 왔냐고 물어보니 30분쯤 되었다고 말한 후 당신 수업하는 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다고 모니터를 쳐다본 채 말한다. 남편은 나에게 친절하다. 나도 남편에게 친절하다.
우리는 캠퍼스에서 만나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렇게 사랑했으므로 지금 결혼한 지 15년이 되어 가는데도 서로에게 친절한 것이다. 사랑의 끝은 친절로 남는다. 시간이 지나 사랑이 스쳐간 자국을 더듬을 수 없어졌을 때 손에 쥐어 지는 게 있다면 친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15년을 살면 몸에 남아있는 서로에 대한 친절함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 모니터를 보고 이야기해도 화나지 않는 것은 15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화가 나지 않는 것은 그 뿐이 아니다. 연락 없이 늦게 들어와도 그렇고 외박을 해도 그리 화가 나지 않는다.
남편은 술을 많이 마신 날은 외박을 한다. 새벽녘에 미끄러지듯 조용히 들어와 소리 나지 않게 잠옷을 갈아입고 잠들기 때문에 남편의 외박이 나를 화나게 할 일은 없다. 술집근처 여관쯤에서 자다 오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남편이 자고 들어오는 이유는 내가 술 먹은 남편의 모습을 싫어하기 때문이므로 나는 그것을 나에 대한 배려이며 보통의 부부들이 갖고 있는 일상의 예의로 여긴다.
  남편은 1시간이 넘게 더 일을 했고 나는 강사들이 제출한 문제지 철을 훑어보며 부실한 부분을 체크했다. 여기저기서 뽑은 문제들에 일련번호를 붙여 500번까지 나갔는지 확인하고 주관식이 너무 많은 것을 골라냈다. 주관식은 문제를 골라내 오려붙이기는 쉬워도 정작 실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므로 부실한 것으로 분류된다. 내일 아침 10시까지 출근 하라는 말을 한 이유는 지적받은 부분을 그 자리에서 보충하고 오후 수업 전에 문제지 원본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다.
나는 어제부터 이 일을 했다. 오늘 새벽 두시에 퇴근했고 아침 10시에 출근해 문제지철만 들여다보았다. 내 과목이 아니라도 좋은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를 고르는 안목이 나에겐 있다. 나는 부실한 문제들을 성분이 좋지 않은 문제라고 표현한다. 성분이 좋지 않은 문제에 빨간 색연필로 표시를 해서 되돌려주면 강사들은 군말 없이 재작업을 한다.
  남편이 엔터키를 탁 때리면서 다 했다고 기지개를 펼 때 나도 일을 마쳤다. 보지 않아도 남편의 눈은 충혈 되어 있을 것이고 내 눈도 그럴 것이다.

  사무장이 화초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묻는다. 집으로 가져가봤자 하루 종일 비어있는 집안에서 살아내기 힘들 것이다. 분리수거봉투에 죽은 화초 하나 달랑 담아서 내다 놓는 것이 싫어 그냥 여기서 죽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죽일 거 남이 살리는 것은 더욱 내키지 않으므로 집으로 가져가면 살 수 있을 텐데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사무장이 가지고 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동안 규모를 늘리느라 학원을 세 번 옮겼으나 그때마다 들어온 화분들은 다 죽었다. 처음 개원했을 때는 몽땅 집으로 가지고 갔다. 하루 종일 빛과 공기가 차단된 불멸의 콘크리트 벽에 갇혀 있다가 늦은 밤 형광등 불빛에 몸을 말리는 화초들은 내 보기에도 오래 살 것 같지 않았다. 어떤 것은 잎이 다 떨어지고 어떤 것은 누렇게 가을 잎처럼 변색되었다가 종래는 가지가 휘고 끊어졌다. 몇 주 간격으로 화초를 분리수거봉투에 넣어 마당에 내 놓았다. 처음에는 화분에서 화초를 분리해 버리다가 흙 속 깊은 곳까지 하얗게 엉켜 흙을 움키고 있는 잔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줄기는 바싹 말라비틀어졌는데 그 아래에 이리도 억센 생명력이 남아 있다니. 그 후론 화분 째 내다 버렸으며 다시는 집에 화초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물론 학원에서도 화초는 잘 자라지 않는다. 잘 살다가도 늦은 밤부터 다음 날 점심때까지 난방을 하지 않는 겨울이 올 즈음에는 시들시들해지다가 결국 죽어버렸다.
  이곳으로 옮긴지 3년이 지났으므로 그때 받은 화초들은 이미 없다. 사무장이 말하는 화초는 두 달 전 친구가 사온 것이다. 실내공기 정화작용에 최고라면서 환경에 민감하지 않으니 잘 자랄 것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두고 갔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약간씩 흔들린다는 말을 들었다. 지나다가 슬쩍 건드려보니 한쪽 뿌리부분이 짓물러 있었다.
  높이가 50센티 정도 되는 흰색의 사각 도자기위로 짙은 녹색과 연두가 적절히 배색된, 수초 같은 잎이 여러 줄기 길게 뻗어있는 화초는 우아했다. 대나무 화분에 꽂힌 조화가 전부였던 로비에 놓이자마자 싱싱한 생명력을 뿜어내 조화가 얼마나 조악한 장식물이었던 가를 낱낱이 고해바쳤다. 그랬는데 또 죽으려 하다니, 나는 그동안 내 곁에 있었던 온갖 화초의 유한했음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없앴다. 그러나 아직 내다버리기엔 아까운 우아한 자태를 지니고 있으며 주변 공간에 날리는 생명력도 그냥 눈으로 보기엔 무리가 없으므로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두고 보다가 버려도 괜찮을 것이다.

  상담을 하러 온 학부형은 앉자마자 줄줄이 푸념을 해댄다. 끝없이 이어질 요점 없고 조리 없는 푸념을 그쯤에서 잘라버리기 위해 학생학습기록부라고 쓰인 파일을 꺼낸다. 거기에는 학원에서 수강하는 모든 과목의 일주일 테스트부터 시작하여 사소하게 치른 쪽지시험 점수까지 다 나와 있다. 또한 출결상황을 비롯해 지각, 조퇴가 사유와 함께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학부형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일주일 단위로 표시 가능한 그래프가 그려진 종이에 최근 두 달 동안 학생의 학업상태를 직접 그려보였다. 각 점을 연결하니 하향하고 있는 선이 뚜렷이 나타난다.
  학부형은 짙은 탄식의 숨을 몰아쉰다. 당신의 자식이 지금 불치병에 걸려있다는 선고를 받은 듯 탄식의 소리는 깊고 암울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무너진 벽을 다시 쌓듯, 자식으로 인해 찌그러진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듯, 학부형의 눈빛은 기력을 회복하며 탄식의 소리는 공격직전의 거친 콧김으로 변한다. 원래 머리가 좋은 수재에 가까운데 단지 집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불찰이므로 학원에서 잘 해주면 문제없을 것이라는 말이 학부형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두터운 볼 살과 기미로 뒤덮인 얼굴에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덕지덕지 붙은 학부형에게 맹렬한 증오가 솟아오른다. 나도 수재였다. 나는 미련한 부모만 알아차리는 수재가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였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자궁 속에 열 달이나 넣어두었던, 15년을 끼고 살아온 자식의 본질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자를 상대로 통하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래도 수재였으니 이쯤이나 하고 있다고 말해줄까. 너의 귀한 아들은 아주 평범하다고 말해줄까. 평범한데다가 어리석은 부모를 만나 되지도 않을 열정에 앞으로도 10년은 더 시달릴 거라고 말해줄까.
  아들이 얼마나 착하고 정직하며 게다가 성실한 아이인지 학부형은 계속 말한다. 말하고 있는 그녀의 입이 점점 클로즈업 된다. 치석이 덕지덕지 끼고 쌈뿌라찌를 한 어금니도 다 들여다보인다. 귀한 아들은 금으로 이빨을 싸줄지언정 자신은 싸구려로 치장을 해도 마음이 흡족한 그 모정이 칙칙하고 하찮게 느껴진다. 귀한 아들을 앞세워 수재였던 내 앞에 앉아 미련한 이론을 내세우고 있는 그녀의 자랑스런 자궁이 이가 갈리도록 혐오스럽다. 할 수만 있다면 네거리 한복판에 그녀의 자궁을 내다걸고 이속에 들어있던 그저 그런 애를 이 자궁주인은 수재로 알고 있노라 떠들고 싶다.
  다시 아랫배에 뭉클한 기운이 느껴지며 예리한 통증이 한 획 빠르게 지나간다. 수학과 과학이 부족하니 담당선생님께 특별히 부탁해서 과제물을 더 많이 내주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어리석은 학부형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는다. 그렇게 하면 성적이 단번에 뛰어 오를 것으로 믿는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첫걸음을 힘들게 뗀다. 사무실을 나가는 구부정하고 계획 없이 살찐 뒷모습이 잠시 애잔하게 다가왔으나 증오가 훨씬 가까워 사무장의 입이 삐죽거리는 것을 보기위해 쳐다본다.

  출근했을 때보다 눈이 움푹 들어가고 전체적으로 까칠해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확실히 처녀적보다 총기가 없어졌음을 확신하면서 어서 말하라고 눈으로 재촉한다. 둘째라 그런지 몸이 무거워 출산 2주 전부터 쉬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10년 전 학원을 처음 개원할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있었다. 채용할 때 대학을 막 졸업한 신출내기라 망설여졌지만 학교 다니는 4년 내내 고3 과외만 했으므로 웬만한 경력자보다 자신 있다고 말하는 당돌함이 마음에 들었다. 바싹 마른 몸에 날카로운 눈매도 마음에 들었고 말을 할 때 어절을 딱딱 끊어서 하는 투도 마음에 들었다. 강의실에 나 혼자 앉혀놓고 하는 시강 때는 둘만의 어색함 없이 함수와 그래프를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흥미 있게 설명해서 채용을 결심했다.
그녀는 늘 나를 만족시켰다. 학생들을 꽉 잡고 수업은 기가 막히게 잘했다. 학원의 성장에 그녀는 단단히 한몫을 하면서 유명강사가 될 가능성을 서서히 쌓아갔다.
  그러나 4년 전 결혼을 하고 첫째아이를 낳은 후 조금씩 살이 붙으면서 그와 비례해 총기는 떨어져 갔다.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집에 두고 온 아기에게 가 있었으므로 그녀의 수업은 그전처럼 아이들을 뜨겁게 달구지 못했다. 몰아치고 돌려 쳐서 아이들 혼을 쏙 빼놓아야 하는 학원수업을 하기에 그녀의 정열은 분산되어 깊이가 없었다. 둘째를 임신하고는 총기가 더 떨어졌다. 수업을 마치기가 무섭게 퇴근할 궁리를 하고 수업할 때 복도에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훅 불면 산산이 흩어질 것처럼 힘이 없었다. 학원의 자랑거리였던 그녀는 임신과 더불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낡고 커다란 가구가 되었다.
  회의를 할 때 나는 그녀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의견은 일상의 때가 묻어 신선하지 않다. 휴가를 당기겠다는 말은 누구나 막달이 되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므로 너무 진부하다. 출산 전 2주와 출산 휴가까지 합해서 두 달이면 되겠냐고 물어보는 내 말엔 짜증이 배어있다. 예정일보다 출산이 늦어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내가 책임질 것이 원생관리, 강사관리를 비롯하여 강사의 자궁 속 태아까지 범위가 미치는가 묻고 싶지만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이참에 몇 년 쉬면서 아이를 잘 기르는 것도 좋지 않겠냐고 말해주고 싶은데 아랫배에 익숙한 감각이 느껴져서 잠시 사이를 두었더니 이야기가 끝난 줄 알고 인사를 한다.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부풀은 몸을 꾸겨 넣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 머리에 남아있는 예전의 날렵한 모습을 산산이 조각내 버린다.

  저 화초는 추위에 약하다고 사무장이 말한다. 앞으로 더 추워질 텐데 어떻게 하냐고 중중거리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죽어가는 화초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초는 한번 시들면 그만이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거슬러 갈 수 없듯이, 한번 저질러진 명백한 사실을 뒤집을 수 없듯이, 화초도 시든 잎을 싱싱하게 되돌릴 수는 없다. 화초에 나이가 있다면 시들었을 때 그때가 노쇠한 나이일 것이다. 그러므로 화초의 나이는 종류가 같더라도 환경에 따라 다르다. 애초에 태어날 때 제 나이를 갖고 태어나 팔자만큼 살다 시드는 것이다.

  남편은 오늘 회식이 있다고 전화로 알려준다. 나는 알았다고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대답한다. 아마 남편은 술을 많이 마실 것이다. 그리고 오늘밤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컴컴한 집에 들어가 거실 등을 켜고 소파에 앉아 아담하고 작은 집으로 이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남편은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한번 마시면 폭음을 한다. 언제부터인가 술에 흠뻑 젖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소파에 구겨지듯이 처박혀 끊임없이 중얼댔다. 너는 몰라, 너는 틀렸어, 니가 뭘 알아. 흰자가 가득 차 풀려있는 눈에 힘을 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남편에게서 내가 본 것은 살기였다. 웃옷을 벗겨주다 언뜻 마주친 남편의 눈은 나를 향해 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나는 그 후 남편의 눈을 쳐다보지 않는다. 남편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얼마쯤 지났을 때 남편은 또 술에 취해 들어왔다. 이번엔 중얼거리는 소리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나 싫어하지, 내가 싫지, 내가 병신 같지. 앞으로 술 마신 날은 집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내가 말했다. 그날 남편은 거실의 장식장을 박살냈다. 벌떡 일어서더니 장식장으로 비척거리면서 다가가 주먹으로 유리문을 뚫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남편이 다가와 나를 한대 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앉아 있었으나 남편은 주저앉아 울다가 옆으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남편의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유리문은 불규칙하게 깨졌고 그 울림에 안에 있던 인형들이 쓰러졌다. 태국에서 사온 인형, 일본에서 사온 인형, 폴란드에서 사온 인형, 스위스에서 사온 인형들이 파리의 에펠탑을 중심으로 쓰러져 엉켜있다. 에펠탑은 아래는 넓고 위는 좁으므로 견고하다. 네 다리가 든든히 받치고 있으므로 더한 요동에도 끄떡없을 것이다. 두 다리로 서있는 것은 결코 안정된 자세가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방치하고 앉아 있었다. 피를 흘리며 잠든 남편, 깨진 장식장, 쓰러진 인형들, 나는 오랜만에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 다 드러나니 속이 후련하다. 남편이 나를 한대 쳤더라면 코피쯤은 터졌을 터인데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은 미안하다고 말했다. 놀랬지, 놀랬을 거야, 기억이 안나, 내가 미쳤었나봐, 병원 앞에서 차를 타기 전 붕대감은 손으로 나를 가만히 안고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라고 말했다.
그 후로 남편은 술을 마시면 밖에서 자고 들어왔다. 자고 들어오라는 내 말을 기억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취한 남편의 모습을 안 봐도 되었다. 그러나 새벽에 들어와 채 깨지 않은 술기운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남편을 환한 아침 햇살에 보는 것은 마음이 불편하다. 걷어찬 이불 위에 얹힌 시커먼 털이 무성한 다리는 싱싱해서 얼굴을 돌리고 트렁크팬티 사이로 삐져나온 축 늘어진 성기는 낯설어서 외면하게 된다. 같이 잠들고 같이 깼으면 좋겠다. 말짱한 정신으로 의식 없는 사람을 보는 것은 잡념이 생기므로 싫다.
  살아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컴컴하고 넓은 집을 생각하며 여기서 일하다 새벽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기말고사 성적들이 좋다. 덕분에 겨울방학 특강엔 학생들이 몰릴 것이다. 다음 주에 광고를 하고 방학시간표를 발표해야한다. 오늘 시간표를 다 짜고 강사들 배치까지 마쳐야겠다.
시간표를 짜는 것은 복잡한 작업이다. 강의실이 겹치면 안 되고 강사가 겹치면 안 되는 것은 기본이며 일주일에 정해진 과목이 고루 배치되어야 한다. 학년별, 반별로 엉키지 않게 잘 짜고 나서 강사들에게 확인하라고 나누어주면 겹쳐진 시간이 꼭 나타난다. 그러므로 더 신중을 기해 짜야한다. 그래도 10년을 하고나니 이력이 나서 이젠 몇 장의 종이만 꾸겨버리면 완성된다.
  핸드폰 벨 소리에 잠이 깼다.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 동안 밖은 훤하게 밝아있었다. 전화를 받으니 모르는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남편의 사고 소식을 알려준다. 계속 뭐라고 말했는데 기억나지 않고 병원이름만 머릿속에서 뱅뱅 돈다.
  남편은 응급실에 누워있다. 내가 오면서 줄곧 상상한 처참한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남편은 눈을 꼭 감고 있다.
남편은 빌라 옆 골목에 세워둔 차에서 의자를 젖히고 자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차가 들이받았단다. 얼마나 세게 받았는지 차는 폐차해야 될 것 같단다. 왜 집 앞에서 자고 있었는지를 경찰이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내가 그러라고 했어요 라고 말해야 되는데 대답하지 못한다.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려 자고 있었는지 남편은 배꼽 밑에서부터 허벅지 중간까지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차 망가진 것에 비하면 경미한 상태라고 의사가 말한다. 그러나 타박상이 심한만큼 충격에 의한 성기손상이 염려된다고 했다. 나중에 정밀검사를 해봐야겠지만 현재 걱정되는 것은 성기능 장애라고 조심스레 알려준다. 입원실로 가면서 다행이야, 다행이지,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 많이 다치지 않았으니 괜찮아, 라고 자꾸 말한다.
  저쪽에서 남편이 손을 잡아달라고 애원하는데 손이 피투성이라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왜 잡아주지 않느냐고 화를 내는데 가만히 보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울고 있다. 울지 말라고 하면서 손을 잡으려는데 남편이 손을 감춘다. 그리곤 자꾸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한다. 나가지마, 나가지마, 아무리 말을 해도 남편은 나가려고 문을 잡아당긴다. 그러지마, 그냥 여기 같이 있자. 남편이 돌아보며 아기를 데리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한다. 남편이 돌아서는 데 아기를 안고 있다. 아기는 하얗게 형체만 있다. 왜 눈코입이 없냐고 물으니 아기가 남편을 벗어나 공중으로 올라가 떠있다. 어떻게 좀 해봐, 떠다니지 않게 잡아봐, 라고 했지만 아기는 잡히지 않고 떠있다. 아기의 주변을 수초 같은 것들이 둘러싸기 시작한다. 수초는 점점 미역처럼 변했는데 자세히 보니 미역이 아니고 학원 로비에 있는 화초 잎이다. 화분에서 떨어져 나온 화초는 갈래갈래 뜯어져 아기를 에워싸고 있다. 저 화초 좀 화분에 심어줄래, 아기는 내가 붙잡을 게. 아무리 기를 써도 아기는 점점 화초와 엉키고 남편과 나는 헛손질을 열심히 해댄다. 눈에는 보이는데 손을 대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다. 필사적으로 달려들어도 손대면 허공인 것이 너무 쓸쓸해 가슴이 아프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남편에게 말하니 남편이 나도 그래 라고 하면서 쓸쓸히 웃는다. 그렇게 웃지 마, 차라리 화를 내, 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답답해, 답답해 미치겠어, 악을 써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가슴을 쥐어뜯다가 잠에서 깬다.
  잠든 남편의 얼굴이 보인다. 이렇게 낯선 장소에서 환자복을 입고 주사를 꽂은 남편을 보는 것이 가슴을 예리하게 난도질한다. 왜 이렇게 아플까. 가슴만 아픈 것이 아니라 아랫배까지 아프다. 뭉클한 것이 돌아다니다가 쇠꼬챙이로 쑤셔대기 시작한다. 침대 옆의 의자에 간신히 걸터앉아 한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쥐고 한손으로는 배를 움켜쥔다. 너무 아파서 숨이 턱턱 막혀온다. 머리를 침대에 처박고 숨을 들이마시는데 울음이 터졌다.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운다. 참으려 해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감당할 수 없다.
  남편과 나는 만나자 마자 사랑에 빠졌다. 임신한 것을 모른 것은 나의 무지함 때문이었다. 서로의 벗은 몸을 탐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으므로 잠깐 스치는 사이 정액의 흘러 들어감을 몰랐다. 생리가 여러 달 없었어도 평소 불규칙한 생리주기여서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의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렇게 쉽게 임신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생리를 3달 거르고 아랫배가 불러오고서야 병원에 가서 5개월에 접어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남편과 나는 기차를 타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산부인과에 가서 애를 지웠다. 학생이었으니까 당연히 애를 낳을 수는 없었다.
병원복도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아랫배가 뭉클하면서 첫 태동이 느껴졌다. 의사는 벌써 5개월인데 웬만하면 그냥 낳지 그러냐고 무표정한 얼굴로 단 한번 권했다.
아이가 컸으므로 지우는 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자궁에 약을 두 차례에 걸쳐 넣고 분만하는 것과 똑같이 자궁입구가 벌어지게 해서 태아를 꺼낸다는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병원 근처에 여관을 정하고 거기 묵으면서 3일 걸려 일을 끝냈다. 아기를 꺼낼 때 나는 분만의 진통을 겪었다. 뭉클하고 따뜻한 것이 쭈욱 빠져나가면서 통증은 끝났다. 섬뜩하게 차거운 금속이 뱃속을 돌아다니며 잔여물을 박박 긁어댔다.
  우리는 그로부터 6년 후에 결혼할 때 까지 서로의 몸을 탐하지 않았다. 남편은 미안해서 그랬고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벗은 내 몸의 아래쪽을 보는 것조차 나에겐 수치스러웠다.
결혼 후 두 번 임신을 했지만 다 10주를 넘기지 못하고 유산이 되었다. 마지막 유산을 한 날 나는 병실에 누워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편을 거부했다. 기를 쓰고 거부했으므로 남편은 대개 받아들였다.
가끔 술을 마시고 들어와 달려들었지만 죽기 살기로 반항했으며 남편은 한숨을 몰아쉬고 돌아누워 잤다. 그렇게 살았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서 익숙해졌다. 왜 그러는지 남편은 묻지 않았고 나도 말하지 않았다. 5개월 된 우리의 아기를 죽인 후 한 번도 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듯 우리는 말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충실하고 친절하게 살았다.
  남편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시트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운다. 울면서 고개를 들어 남편을 보았다. 남편도 울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한 번도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남편은 이미 울었다. 아내를 등지고 자며 울었고 골목에 세워둔 차에서 자다가 새벽빛이 훤한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며 울었을 것이다. 적어도 남편은 그렇게 울며 나보다 착하게 살았다.
나도 진즉에 울었어야 했다. 아기가 내 몸을 빠져나가던 뭉클하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질 때마다 울었어야 했다. 종래는 금속의 예리한 감촉까지 기억하면서도 시침 떼지 않았던가. 병원복도에 앉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기의 움직임을 느꼈을 때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기억하면서 내내 목 놓아 울었어야 했다. 15년 동안 남들 다 가진 아이를 못 가졌던 서러움에서라도 한번쯤은 울었어야 했다. 오랜 가뭄에 쩍쩍 갈라져 버린 논바닥 같은 황폐한 가슴이 질척해지도록 우리는 한참을 더 울었다.

  사무장에게 화초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다. 산 세베리아란다. 요즘 제일 잘 팔리는 화초인데 왜 잘 팔리는가 하면 밤에 산소를 만들어 방출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실내공기를 개선하기 때문이란다. 화초를 들춰보니 뿌리가 반 정도 짓물러 있다.
강사들에게 방학 중에 원하는 수업시간을 적어내라고 했다. 다 들어줄 수는 없지만 시간표 짜는데 참고하겠노라는 말을 덧붙인다. 교무실이 잠시 웅성거렸지만 나는 오늘 퇴근하기 전까지 써서 내 책상위에 놓아두라고 말했다.
사무장이 화초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묻는다. 오늘 집에 가지고 가겠다고 하자 인터넷에서 찾았다며 몇 가지를 알려준다. 건조에 강하고 과습에 약하니 약간 건조하게 키워야 하며 대체적으로 잘 자라지만 지나친 관수로 뿌리가 썩는 것이 가장 위협적이란다. 그리고 반그늘에서 잘 자라는 화초란다.
  반그늘에서 잘 자란다면 거실에 두어야겠다. 거실의 중간쯤에 두면 햇빛이 직접 닿지 않을 뿐더러 해가 있는 시간엔 언제나 해를 볼 수 있으니까 딱 좋을 것이다. 그러려면 이제부턴 출근할 때 거실의 커튼을 활짝 열어두고 나와야겠다.
                                                                      - 끝 -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