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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기/단편/맹인과 등불/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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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일산3동 후곡주공 1206-1304
김성기 남 49세
017-318-1679
맹인과 등불
의사가 눈에 감았던 붕대를 풀어내며 손가락이 몇 개냐고 물었어. 너는 그 초보적인 질문조차 대답할 수가 없어 얼굴을 더듬었지. 덜 풀어낸 붕대가 없는데도 눈에는 붕대만 보였지. 정말 안보여? 그녀가 무너지듯이 물었어. 너는 포도당 주사바늘이 꽂혀있는 왼손대신 오른 손을 한 번 더 들어 얼굴을 더듬었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수술은 반복되었어, 그러나 원발성 녹내장으로 인한 실명이라는 최종선고를 들었지. 의사는 굳이 핑계를 댄다면 스트레스와 당뇨 합병증에 의한 것이라고, 낮은 도보다는 한 음계 높은, 그러나 례보다는 반음계 낮은 소리로 말했지. 그 소리는 꼭 서투른 솜씨로 교과서를 읽는 것 같았어. 띄어쓰기와 발음이 명확하지 않은 그 모호한 소리만큼 만큼 눈앞이 망막했지. 그러나 너는 그냥 세상이 망막하게 보였을 뿐 그렇게 절망하지는 않았어. 너의 세상은 원래 앞이 잘 보일 때도 망막했음으로. 너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여기가 끝이구나 하는 깨끗한 체념의 순간을 그렇게 맞이했지.
“왜, 불이나 켜고 앉아있지 않고?”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가 거실스위치를 올리는 소리가 ‘똑’하고 났어. 순간 너의 가슴에도 ‘똑’하고 불이 켜졌지. 돌아 왔구나. 독 오른 코브라처럼 너는 머리를 세운 채 돌아보지 않았어. 너는 하루 종일 맹인견을 따라다니는 꿈을 꾸다가 깨어났지. 언제나 너의 꿈은 잔인했고, 깨어 봐도 세상은 여전히 붕대에 감겨 있었지.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 밤길에 등불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대.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말했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군.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니지? 맹인이 대답했어. 당신이 저에게 부딪힐까 염려에서지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너는 그녀에게서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는 그녀가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불을 켰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위한 것이라며. 거실 가운데 매달려 파리똥에 절어가는 형광등은 울컥, 울컥, 토악질을 하다가 ‘주르르’ 빛을 쏟아냈어. 그것만이 하루 중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지. 너는 그녀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돌아올 때까지 오직 불을 켜기 위해 기다렸어. 한번도 빠짐없이 괘종시계 울리는 소리를 헤아리며, 좁고 어두운 전세방에 포획된 야수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그러나 그런 생활이 그렇게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지. 그녀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불안감만 빼고 나면 세상은 고래 뱃속보다도 더 조용하고 아득했지.
그렇게 삼년이 지났어. 당연한 일이겠지만 너는 눈이 안 보이는 대신 후각과 청각과 촉각, 거기다가 미각까지,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보통사람의 열배 이상으로 발달 되었지. 청각의 경우는 거의 백배로 예민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 그 때문에 너는 마치 지상에서 네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겠다는 듯, 그렇게 단호하게 웅크리고 앉아있었지. 가급적 세상을 향해 열린 몸의 부분을 작게 하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소리라는 소리는 다 감지해버릴 것 같아서였지.
그래, 네가 세상의 소리를 감지해 내기 시작한 첫 단초는 남세스럽게도 위층여자 오줌 누는 소리였어. 그 다음은 그 집 딸, 그다음은 그 집 아들, 그다음은 그 집 남자, 그다음은 그녀가 떠나는 발자국소리, 그다음은 그녀의 노랫소리, 그다음은 그녀의 교성소리 순 이었지. 그렇게 발달을 계속한 너의 청각은 마침내 개미가 싸우거나 바퀴벌레가 성교를 하는 소리까지 감지해 내기 시작했어.
너는 정말 바퀴벌레가 그렇게 자주 관계를 하는 줄 몰랐지. 그것들은 하루 종일 관계하고 먹고 관계하고 먹고를 반복할 뿐이었지. 그야말로 그것들은 오직 생육하고 번식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어. 그렇게 해서 4억년을 버텼을 거야. 그러니 고작 3백만 년의 역사를 가진 인간하고 비할 바가 아니지. 하기야 인간 이라고 해서 3백 만년 동안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 말고 특별히 세상을 위해 무었을 그렇게 많이 한 것 같지는 않아.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것들도 이른바 질서라는 것이 있었어. 어떤 것이냐 하면, 그것들도 일부종사를 한다는 것이었지. 끝없이 생육하고 번식하지만 오직 한 상대하고만 교미를 하는 것이었어. 그러니 배우자가 있으면서도 이사람 저사람 교미를 하고 다니는 사람은 바퀴만도 못하다 할 수 있지. 그런데 문제는 그들 중에도 아주 드물게는 변종이 있어 다른 상대하고 관계를 하는 것이 있었어. 그 때문에 화가 난 그 상대바퀴의 배우자는 복수의 일환으로 다른 상대와 관계를 하고, 그 다른 상대의 배우자는 또 다른 상대와 관계를 하고, 관계를 하고, 관계를 하고, 고, 고, 고……바퀴들의 관계가 매우 복잡해져 가기 시작했어.
그 무렵 그녀의 귀가도 늦어지기 시작하더군. 그렇게 늦게 돌아온 날의 그녀에게는 비누냄새가 유난히 짙게 배어있었어.
“먼저 자지 않고……”
그런 날의 그녀는 쉽게 짜증을 냈어. 그러자 갑자기 바퀴벌레들의 관계소리가 조용해 졌어. 네가 그들의 관계에 귀를 기울였듯이, 이제부터는 그들이 너희들의 관계에 귀를 기우릴 모양이었어.
“당신 지금 몇 시야, 야, 야,”
이렇게 첫마디를 시작해야겠지만, 너는 그런 승산 없는 싸움을 걸만큼 어리석지가 않았어. 너는 오직 그녀가 이 바퀴 득실거리는 허름한 집으로 다시 돌아와 준 것 만에도 감사했지.
“늦었네!”
아침의 비누냄새와 다른 냄새를 안고 들어오는 그녀에게 너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지. 그 냄새는 여름날 흐트러러지게 핀 밤나무 꽃 아래를 지나갈 때 맡았던 냄새와 흡사했어.
“나는 밤꽃 냄새가 싫어.”
밤나무 농원에 놀러갔을 때 그녀가 한 말이었지. 밤꽃 냄새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그런 그녀의 생리적 거부반응과는 관계없이 그녀는 지금 밤의 꽃이 되어가는 것일까. 네가 그녀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뭇지 않듯이 그녀도 너에게 무엇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네가 시력을 잃고 처음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일년간 그녀는 매일 역겨울 정도로 불고기 냄새를 달고 들어왔지. 더러는 반쯤 탄 불고기를 가지고와서 탄 부분을 가위로 잘라내고 먹여주기도 했지. 그럴 때면 너는 그녀에게 안마를 선사했어. 시력과 함께 성력도 잃어버린 너는 그녀가 잠들 때 까지 안마를 하는 것이 유일한 관계였지.
그녀의 팔과 다리와 어깨를 주무르면서 너는 그녀가 많이 야위었다는 것을 알았어. 너는 밤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의 야윈 몸을 정성껏 주물렀지. 그러나 맹인이라 하여 아무나 다 안마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어. 너의 안마는 서툴렀고, 주물러야 할 곳과 주무르지 말아야 할 곳을 분간하지 못했어. 주무르지 말아야 할 곳에 손이 오래 머무를수록 그녀는 힘들어했고, 너는 어떻게 하던 그녀를 주무르기라도 하고 싶었어. 그래서 찾아간 곳이 맹인 안마시술소였지. 그곳에서 너는 인형을 눕혀놓고 안마시술연습을 했어. 그리고 당당하게 맹인 안마사 자격증을 습득했지.
“아유 시원해, 안마솜씨가 하루가 다르네!”
밤꽃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는 너는 맹인안마사였어. 그러나 너는 맹인안마사 자격증을 땄다는 말을 그녀에게 하지 않았어. 맹인안마사라는 어휘가 어쩐지 그녀를 더욱 슬프게 할 것 같아서였지. 서른다섯 살의 그녀,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도, 포기해 버릴 수도 없는 목요일과 같은 그녀가 불구의 남편과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몇 가지나 될까. 너는 가랑잎 같은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 내렸지.
초등학교라고 불리는 학교를 다닐 때였어.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가에 산골아이들이 엎드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네잎클로버를 찾고 있었지. 그런데 코를 박고 이를 잡듯이 뒤져도 네잎클로버가 없는 것이었어. 산그늘이 길게 산을 내려 올 때쯤이면 아이들도 지치고, 배도 고프고, 당초부터 네잎클로버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때 한 여자아이가 벌떡 일어나며 독립군처럼 두 손을 높이 들었어.
“야! 드디어 찾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아이에게로 날아갔지. 모두들 부러운 눈빛으로 수수께끼를 보듯 그 아이를 쳐다보았어. 화판을 들고 다니거나, 천재 병이라 불리는 폐결핵에 걸린 희고 가는 목이 선망의 대상이었던 시절, 그 여자아이는 생긴 것 차체가 산골아이와는 달랐어. 창백한 얼굴과 호리병 같은 긴 목의 그 아이는 늘 나른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지. 세상이 좀 가소롭다는듯한 그 아이의 표정에서 너는 접근할 수없는 귀족의 성체 같은 것이 느껴졌었어. 그 아이는 네잎클로버를 들고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지. 그날따라 석양을 등진 그 아이의 모습은 정말 신비스럽기까지 했었어.
그 아이를 중심으로 해바라기 꽃잎처럼 둘러선 아이들이 네잎클로버를 한번 만져볼 것을 소원했었어. 그러나 그 아이는 한사코 그것을 거절 했었지. 마치 행운이 옮겨가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 아이의 거절은 칼질을 하듯 단호했어.
그날 행운 찾기는 그것으로 끝이 났지만, 그 이후로도 그 아이는 네잎클로버를 참 잘 찾는 아이였어. 그 아이는 정말 신비스런 아이였지. 그때 그 여자아이는 4학년 이였고 너는 5학년이었어. 그리고 15년 후 두 아이는 부부가 되었지. 아! 드디어 네잎클로버를 찾았다. 너는 외쳤지.
“앗 차가!”
그녀가 깜짝 놀라며 돌아누웠지. 눈물방울이 그녀의 등에 떨어진 것이었어. 자정의 텅빈 골목 같은 맹인의 눈에서 떨어지는 물이라니. 얼마나 몰골사납겠어. 너는 서둘러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지.
“어머! 당신 울고 있잖아.”
그러나 그녀는 그날 밤도 핸드폰을 들고 나가서 두시간정도 있다가 돌아왔지. 그녀의 입술에서는 덜 익은 술 냄새가 났어. 너는 이유를 묻지 않았지. 네가 묻지 않는 한 그녀는 말하지 않았고, 일상에도 변화가 없었지. 아침 열시쯤 나가고, 저녁 9시쯤 돌아오고, 퇴근 후에도 전화를 받고 나가면 두 시간쯤 후에 돌아오고…… 뭐 그 뿐이었어.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바퀴벌레들의 싸움이 조용해지기 시작했어. 어떻게 그 삼 검불처럼 얽히고설킨 삼~사각관계가 해결되었는지 세상이 다 조용했지. 그 무렵 그녀가 커다란 거울을 하나 사다 거실에 걸었어. 아무래도 외모에 신경을 써야할 일이 많은 그녀에게 당연히 필요한 물건이었을 것이라 생각했지. 너는 그녀가 없는 빈 전세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거울 앞에 섰어. 무엇이 보이는가. 너는 너의 눈이 볼품없이 일그러진 모습을 본적이 없어. 너의 상상속의 너는 항상 실명 당시의 모습에 머물러 있었지. 아니 그보다 훨씬 젊고 멋있을 때에 머물고 있었지. 그것은 축복이자 형벌이었어. 너는 거울을 향해 악수할 것처럼 오른손을 내밀었어. 매끄럽게 잡히는 거울의 표면, 그 속에서 남자는 아마 왼손을 내밀었을 것이야. 웃어봤지. 거울 속에 남자도 웃을 것이야. 한쪽이 허물어진 미소를, 가까이, 아주 가까이, 코가 달 때까지 거울에 얼굴을 대고 들여다보았지. 뭔가가 희미하게 보였어. 화장이 짙은 그녀였어. 그러고 놀라고 이 거울을 사다놨나, 이상의 날개처럼 그렇게 놀라고, 이름과 성을 바꾸고 암호처럼 살다간 이상처럼 살라고, 으흐흐흐 금홍아! 너의 밤을 나는 비껴주마. 너는 주먹으로 거울을 힘껏 쳤지. 짝 소리가 난 것이 아마 거울에 금이 간 모양이었어. 와장창 깨어지지 않는 것에 너는 더욱 화가 났어. 너는 한 번 더 거울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내질렀지. 헛손질이었어. 거울은 저만큼 있었던 것이야. 이런, 병신이 육갑을 한다더니.
“당신 왜 그래.”
그날따라 일찍 돌아온 그녀가 손에다 붕대를 감아주며 물었지. 그리고는 내손을 안타깝다는 듯이 주물럭거렸어.
평상시나 다름없이 저녁 먹고 영화를 보고 있는데 설거지를 끝낸 아내가 너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었지. 더운데 무슨 심뽄가 하고 엉덩이를 달싹 한 발짝 물러앉자 아내도 엉덩이를 달싹하며 한 발짝 더 붙어 앉았지.
그리고는 다시 고전영화에 집중하느라 잠깐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보니 아내가 너의 손을 주물럭거리고 있었지. 그냥 만지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왼손으로 너의 오른손을 악수하듯이 잡고, 흔들고 비틀고 손바닥을 긁고, 부비고 별 해괴한 동작을 다하는 것이었지. 너는 이것이 갑자기 무슨 신혼가 하고 ‘왜 그래?’ 하는 표정으로 돌아 봤지. 그래도 아내는 피식 피식 웃으면서 계속 주물럭대는 것이었어.
그래 그냥 ‘싱겁기는!’하면서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데 안 되겠다싶은지 너의 아내가 볼따구니를 꼬집어 비트는 것이었어. 이 여인이 뭐 못 먹을 것을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볼따구니를 꼬집힌 채로 돌아다보니 ‘못 알아듣겠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꼬집은 채로 볼따구니를 흔들었어. 초저녁부터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는 표정으로 황소 눈을 부릅뜨자 그때야 아내가 말을 했어.
“못 알아듣겠어?”
“뭔 소린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을 때 일이란다. 그때 교대로 어머니 병실을 한 삼개월간 지킨 적이 있었어. 그 병실은 노인성 중풍 환자만 있어 어머니 옆에도 어떤 할머니가 중풍으로 몇 년째 누워 있었지. 그 할머니는 유복했던지 (다른 시각으로 보면 박복한 것도 되지만) 간병인을 두고 있었어. 그리고는 매일 한 번씩 할아버지가 찾아왔었지.
아내가 보니까, 그 할머니는 오른팔과 외쪽다리가 마비되고 말도 못하는데, 할아버지가 오면, 왼손으로 할아버지의 오른 손을 잡고, 비비고, 긁고, 꽉꽉 쥐고 그러더라는 것이었어. 아내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는데, 할아버지는 그 말을 잘 알아듣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고, 같이 손을 비비고, 긁고, 꽉꽉 쥐더라는 것이었어.
그래, 젊어서는 눈으로 말한다더니, 늙으면 손으로 말을 하나보다, 도무지 서로의 의견이 잘 일치될 것 같지 않던 그녀와 너, 그러나 그렇게 쉽게 손으로 말하는 사이가 될 줄은 몰랐었어.
아무튼 그녀는 언제나 아홉시쯤 퇴근을 했다가도 핸드폰이 오면 거리낌 없이 집을 나갔어. 두 시간쯤 후에 들어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자정에 나가 새벽에 돌아왔고, 어떤 날은 아침에 돌아왔지. 돌아오기는 꼬박꼬박 돌아왔어.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보약을 사들고 들어왔어.
“이거 어렵게 구한 건데 엄청 비싼 약이야. 이것 먹고 눈이 보이기 시작한 사람도 있대.”
그날도 그녀는 그 이상한 약을 지어와가지고 매일 달여 먹였어. 아, 이제야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보약 속에는 미세한 량의 독이 들어 있을 것이다. 현대의학으로도 도저히 검출할 수없을 만큼 미세한 량의 독약, 그리고 보험도 들어놨겠지. 너는 그렇게 서서히 보약 속에서 죽어갈 것이야, 거대한 보험금을 남기고, 너는 더 없이 행복했어.
그녀는 무슨 연유인지 신혼 때부터 누가 손대는 것을 싫어했지. 그러니 장난으로라도 툭 치기만 할라치면 흡사 고양이처럼 움츠리며 기겁을 하는 것이었어. ‘왜 이래!’하며 몸을 꼬는 그녀는 정말 ‘야옹’하며 몸을 사리는 앙칼진 암고양이처럼 자극적이었어. 너는 그러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귀엽고 즐거웠지. 그 때문에 무료하거나 좀더 자극적인 분위기가 필요할 때면 너는 의례히 그녀를 툭툭 쳤지. 그때마다 그녀는 공벌레처럼 몸을 도르르 말고, 너는 그것이 재미있고, 그러던 것이 발전하여 결국에는 폭력이 되었지.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폭력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너의 의식에 있었어. 그래서 너는 밖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은 의례히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일상화 되어버렸지.
“난 선인장이 좋아. 선인장 가시를 온 몸에 고슴도치처럼 심고 싶어”
그녀는 그런 일이 있는 다음날은 어김없이 선인장 화분을 사왔지. 선인장 화분은 날이 갈수록 하나둘씩 불어났어. 그러면서도 그녀는 선인장에 한번도 물을 주지 않았지. 말라죽으면 죽은 대로 그대로 두었어. 그런데도 선인장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별 표시가 나지 않았어.
식생활의 서구화로 숟가락공장이 부도위기에 몰리자 너는 생활비는커녕 집을 담보로 회사자금을 융통해 써야했어. 거기에다 손찌검까지 하는 너를 아내는 조금씩 무시하기 시작했어. 그럴수록 너는 더욱 난폭해 졌고, 술만 마시면 더욱 거칠어 졌고, 급기야는 너 자신도 너를 통제하기가 힘들어졌어. 술을 마시고 나면 가슴속에서 아주 날카롭고 비겁한가시가 하나 둘씩 돋아났어. 그녀의 선인장 화분은 자꾸만 불어났고, 고만고만한 선인장 화분이 스무 개쯤 되었을 무렵이었지. 너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집안 여기저기를 서성이기 시작했어. 너는 언제부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어.
그 날도 목마름과 가위눌림에 잠이 깼지. 냉장고에서 물 한 컵을 따라 마신다음 다시 한 컵을 따라들고 불 꺼진 거실을 서성였지. 그러다가 독사에게 물린 것 같이 따끔한 것이 복사뼈를 쑤시는 느낌을 받았어. 여기저기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전화들이 네 옆구리를 끊임없이 찔러대고 있을 때였지. 화들짝 놀란 너는 내려다보았어. 선인장 화분이었어.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았어. 너는 화분을 머리끝까지 들어올렸다가 거실 바닥에 처박아버렸어. 놀란 아내가 달려 나와 불을 켰어. 형광등이 할딱할딱 빛을 토해냈어. 깨진 화분조각과 뿌리 뽑힌 선인장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그녀가 선인장과 너를 번갈아 쳐다보았어. 너도 돌발적인 네 행동에 너무 놀라 어리둥절하게 서있었지. 너는 놀라 떨고 있는 그녀를 보며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어. 하지만 도가 지나치게 미안한 마음은 전혀 다른 행동으로 터져 나오고 말았지. 너는 또 다른 화분 하나를 역기처럼 번쩍 들어올려 보기 좋게 박살을 내고 말았어. 그녀보다 네가 더 놀랐을 거야.
그날 밤 네가 잠든 사이 그녀는 집을 나갔어. 해변에 발자국이 지워지듯 그렇게 사라져버렸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아내의 가출, 그것은 참으로 생경스러운 단어였어. 사람들은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상다반사라고 너에게 한마디씩 위로를 했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기다려 보라고 경험자처럼 충고했지. 곳 돌아올 것처럼 아무것도 가지고가지 않고 나간 아내가 두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어. 변화는 집을 나간 그녀에게서가 아니라 그녀와 반대쪽에 있는 너의 세상에서 먼저 일어났어. 너는 선인장화분에 불을 주지 않는 대신 네 목구멍에 더욱 많은 술을 부었지. 선인장 화분은 모두 말라죽어 버렸어. 벽에 걸린 아내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말라죽은 선인장은 살아있을 때 보다 더울 날카롭게 가시를 세웠지. 너는 두 달 동안 정확하게 열세 번 장모가 혼자 사는 가리봉동을 찾아갔었어.
“이 사람아, 그 불쌍한 것을” 눈물을 훔치며 장모는 말했지. “고것이 제일 못 참고 살 일을 저질렀네. 자네 장인이 날 때리곤 했어. 그럴 때마다 그것이 어찌나 울고불고 했는지 아나. 얼마나 그 아가 제 애빌 미워했는지 죽었을 때도 동네 애들하고 줄넘기를 하고 놀았다네.” 너는 어렸을 때 이웃동네에서 살면서도 단란해 보이기만 한 그 집에 그런 애환이 있는지 정말 몰랐었지. 아무튼 가출은 매우 환불이 까다로운 쇼핑이었어. 너는 늘 빈손으로 장모의 집을 나서야했고, 얼마 후에는 회사에서도 빈손으로 나서야 했지. 아니, 빈손이 아니라 세상에서 너 하나뿐이라는 듯이 끝빨 조이던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 쥔 팔목에 쇠고랑을 차고 나섰지. 부정수표단속법위반으로 복역 중 당뇨악화로 가석방 되었고 급기야는 눈이 멀었지. 차가운 감방보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어. “차라리 꺼꾸러져 죽지.”더 이상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하던 날 그녀는 의사 앞에서 악을 썼어.
이제 네가 거꾸러지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에게 보험금을 남겨주는 것, 그것뿐이야. 너는 열심히 보약을 먹었지. 그런데 정말 독기가 퍼지는지 눈에 핏발이 서는 것처럼 간질간질하고 이상해지기 시작했어. 그러는 너를 보고 그녀가 말했어.
“어머, 몰라보게 좋아졌네!”
그래 몰라보게 좋아졌을 거야. 너는 매일매일 거울 앞에 서서 너를 비춰 보고 더듬어보고 만져 보았지. 그러다가 너는 깜짝 놀랐어. 거울 속에는, 조금은 낮 설지만 익숙한 모습…… 이게 누구야? 감격보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 너는 한참 연설을 잘하다가 원고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거울속의 너를 응시했어. 참 우습지. 너의 맹인으로써의 한살이는 그렇게 장난처럼 끝나버렸어. 그러나 눈을 뜨자 세상은 몹시도 어수선하고 분주했어. 도무지 바퀴벌레들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어. 차라리 눈을 감고 있을 때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는 눈을 뜨고 살 일이 두려웠어. 그래서 다시 눈을 감았지. 그러나 아무리 억지로 두 눈을 꼭 감아도 이제는 바퀴벌레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밤이 되고 그녀가 돌아왔지. 너는 선글라스를 쓴 채 소파에 고집스런 물웅덩이처럼 고여 있었어. 어제나 그랬던 것처럼 거실 벽을 똑바로 바라본 채 인사를 했지.
“이제 완.”
의지와는 달리 목소리가 기타의 육 번 선처럼 떨고 있었어. 너의 떨림을 감지하지 못한 그녀의 행동은 거리낌 하나 없었어. 너는 그녀를 거울을 통해서 지켜보고 있었지. 그녀가 돌아 올 때 소리 너는 쪽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형광등불아래 선글라스를 쓰고 화살 텅빈 새벽 골목길을 바라보듯 돌아보는 너의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오래된 습관 이었지. 길게 대각선으로 금이 간 거울은 그녀의 모습을 약간 삐딱하게 비추었어. 오년 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낮 설었지.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화려하고 반짝이는 주현미의 무대의상 같은 옷을 입었으리라고 생각했던 네 상상을 많이 비껴간 그녀는 정갈하고 단정한 청바지 차림이었어. 그러나 너는 결정적인 단서를 찾는 사립탐정처럼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짙고 검은 안경 속에서 눈동자만을 굴렸지. 자세히 보니 그녀의 머리는 저져있었어. 그러면 그렇지! 하마터면 너는 탄성을 지를 뻔 했어. 진실로 기대했던 것을 찾은 것처럼 너는 무릎을 칠 뻔 했지. 아, 네가 정말 그녀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니?
“저녁 챙겨 먹었어?”
그녀는 처다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물었어. 그리고는 대답도 하기 전에 또 물었어.
“약은?”
그래 무엇보다도 약이 중요하겠지. 그래, 먹었다, 먹었어. 그러나 사실 너는 오늘밤 약을 먹지 않았어. 살아야겠다는 더러운 욕구, 그녀를 잃고, 사랑을 잃어도, 목숨만은 살아야겠다는, 서럽고 구차한 생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었지. 너는 알고 싶었어, 너의 부재 속에 살아온 그녀의 오년에 대하여. 비열하다 비열해 하면서도 그것은 익숙한 생의 한 모습이었었어.
너는 마주보이는 거대한 거울을 통하여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어. 그럴 때 선글라스와 거울은 정말 편리한 문명의 혜택이었어. 너의 그런 엿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그녀의 행동은 칼날처럼 거침이 없었어. 그녀는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모자를 벗어서 던지다 싶게 신발장위에 올려놓고는, 청바지를 거꾸로 벗어 발로 툭 차 네가 앉아있는 거실 쪽으로 밀어놓았지. 그리고는 화장실을 다녀왔고, 팬티차림으로 설거지를 했어. 그녀는 조금 야위기는 했으나 아직도 물방울이 도르르 굴러 떨어질 것처럼 각선다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설거지를 했어. 왼발에서 오른발로, 다시 오른발에서 왼발로 힘의 균형을 옳길 때마다 복숭아 같은 히프의 근육이 삐뚤거렸지.
그녀는 설거지를 하다말고 핸드폰을 받았지. 전에 없이 허리를 숙이고 너를 -정확하게 말하면 거울속의 너를- 흘긋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녀의 통화내용을 너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전에 없이 작은 소리로 통화를 하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눈이 보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이었어. 그녀는 전화를 끊고는 휴지통에서 약봉지를 꺼내들었어. 그리고는 형광등에 약봉지를 비춰보며, 다 먹었나, 먹지 않았나, 확인했어. 너는 이미 그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싱크대에 쏟아 부어버렸었지. 그녀는 한모금도 남기지 않고 빨아먹은 약봉지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어. 그리고는 잠깐 네 쪽을 바라보았지. 그 모습에는 비장감이 서려 있었어. 너는 오싹 했으나, 여전히 거울을 처다 보고 있었으므로 눈이 마주칠 일은 없었지. 그녀는 다시 파마기가 다 풀어진 머리를 질끈 동여맨 다음 청바지를 입고 모자를 썼어.
“나, 좀 나갔다 올께.”
그녀는 횡 하니 나가버렸지. 이상했어. 왜 화장을 안 하고 나갈까. 너는 불이 나게 그녀를 따라나섰지. 그러나 오랜만에 너무나 오랜만에 지팡이 없이 걷는 길이라 손등이 핏줄처럼 어지러운 산동네 골목에서 길을 잃고 말았지. 눈을 감고도 친숙했던 길이 그렇게 낮 설수가 없었어. 결국 허둥대다 집으로 돌아왔지. 돌아오자마자 너는 그녀의 화장대를 뒤졌어. 어라, 그런데 이상하네. 대충 방치한 듯한 그녀의 화장품이라는 것에는 크림이나 파운데이션 같은 기초화장품 말고는 그 흔한 랑콤사 아이샤도우는 고사하고 붉은색 립스틱 하나 없었어.
두 시간 만에 그녀는 돌아왔어. 너는 자는 척 빨랫감처럼 늘어져 있었지. 여전히 그녀에게서는 진한 밤꽃 냄새가 났어. 그녀는 이불을 끌어다 깊게 덮어준 다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어. 그녀는 너에게 보약을 사오던 날부터 아무리 피곤해도 잠자리에 들기 전 컴퓨터를 켰지. 바퀴벌레의 정사를 엿들을 정도로 예민해진 너의 청력은 자판기 소리만 듣고도 그것이 ‘ㄱ’을 치는 ‘ㄴ’을 쓰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지. 심지어 너는 그녀가 먼 곳에서 외간 남자의 화대를 세는 소리까지 들을 경지에 있었으니 그 정도를 읽어내는 것은 식은 죽 마시기나 다름없었지.
오늘도 남편은 약을 잘 먹었다……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아마 이 대목은 네가 이제 거의 시들어가고 있다는 표현을 차마 은유적으로 것 같았어- 사랑하는 이와 언제나……새로운 삶을……. 너같이 천재적인 청력을 가지고도 그 타이핑 내용을 다 해독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의 타이핑 솜씨가 워낙 엉망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새로운 무슨 삶 ’이라는 대목에서 감격에 받쳐 그녀가 그녀의 인생을 지우고 다시 쓰듯이 딜레트 키로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타이핑하는 바람에 심기가 어지러워 청력이 추적을 놓치고만 것이었어.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났어. 그녀는 언제나 똑같이 그렇게 들어오고 그렇게 나갔어. 아직도 너는 거울을 통해서 그녀를 감시하고만 있을 뿐 결정적인 단서를 잡지는 못했어. 심증뿐인 범죄, 너는 혼란스럽고 지루해 지기 시작했어. 너는 안방을 빠져나와 거울 앞에 섰지. 거울 앞에 서 있는 네 모습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거울의 저편에 있는 그녀를 보고 싶어서였어. 그러나 거울은 너무나 정직하게 네 모습만 비출 뿐 정작 제 속내는 들어내지 않았어. 과연 거울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이는 것은 거울의 표면과 거기에 비치는 너의 모습뿐, 거울의 내면은 들여다볼 수가 없었어. 그리고 그 너의 모습이라는 것 또한 네가 고개를 외로 돌렸을 때 고개를 좌로 돌리는, 그는 진정 네가 아니었어. 너는 주먹을 힘껏 뻗었지. 눈이 안보일 때와는 달리 주먹은 거울의 정 중앙을 정확하게 강타했어. ‘와장창’ 거울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지.
“당신 왜? 또? 그래?”
그녀는 붕대를 감아주고, 밥과 약을 챙겨놓고, 어제 밤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던 청바지를 껴입고, 서둘러 나가버렸어. 거울로만 보았던 그녀를 정면으로 보는 것은 정말 생경스러웠어. 그녀가 나가자 너는 이제정말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울부짖었지. 울다가 웃다가. 그러다가 생각났지. 컴퓨터.
너는 서러운 손으로 컴퓨터를 켰지. 아니 컴퓨터를 킬 필요는 없었어. 그녀는 언제나 컴퓨터를 치다가 그대로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나가기 때문이었지. 마우스 위에 손을 대자 LCD화면은 자동으로 아는 체를 했어. 그러나 너는 낮 설었어. 사실 모든 것은 다 낮 설었지. 낮 설은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며 낮 설을 그녀의 일기를 점자를 더듬듯 읽기 시작했어.
10월 11일, 오늘 나는 퇴근 후 한탕을 더 뛰었다. 도합 세 탕… 모든 것이 너무 힘들다. 이 산동네 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불빛은 마치 별빛 같다. 하지만 별은 올려다 볼 때 아름다운 것, 발아래에 별이 있다는 것은 슬프다는 것이다.
11월 6일, 남편의 생일이니 오늘만은 노래방에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망설이다 나갔더니 역시나 너무나 힘들게 했다. 도대체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왜 그럴까. 거기다가 스커트를 입고 나오라고 노래방 주인까지 성화다. 그러나 이 청바지는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11월 27일, 어제는 손님을 여섯 명이나 받았더니 너무 피곤해서 그냥 쓰러졌다. 때 미리가 있어서 때를 미는 여자가 있을까. 때를 미는 여자가 있어서 때 미리가 있을까. 다행히 노래방도우미를 찾는 손님은 없어서 퇴근했다가 또 불려 나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사우나도 노래방도 손님이 없다. 남편 약값도 걱정이다. 그나저나 반년이나 먹고도 차도가 없으니 더 먹여야 하나, 포기해야하나. 그러나 포기는 곳 끝이다. 남편은 그 끝이 언제일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벽만 바라보고 있다. 돌부처처럼 앉아있는 저 낮 설음, 나는 언제부턴가 신랑이 타인처럼 낮 설다. 마주보기가 민망하여 큰 거울을 하나 사다 걸었다.
12월 5일, 오늘은 손님이 너무 많아 일을 마치고나니 파김치다. 미역 사들고 집에 오니 남편은 여전히 고물차처럼 웅크리고 있다. 한때는 내 인생의 네비게이션 이었던 저 고물차를 밀고 산마루를 올라간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가는 뒤로 물러나는 저 고물차의 무게에 눌려 쥐포처럼 깔리고 말 것이다. 나는 어느 신의 테스트에 낙제점을 받았기에 이 말똥구리 같은 삶을 개미처럼 가는 팔로 끝없이 밀어 올려야만 하는가. 내가 굴려 올리고 있는 이것이 말똥이 아니라 희망이라 믿으며 가파른 언덕길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나는 행복한 시지프스인가. 불행한 시지프스인가.
12월 13일, 한때 다른 남자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혹은 다른 삶, 동반자살, 가능한 모든 것을 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조리에 대한 굴복이고, 참삶에 대한 도피이며, 스스로에 대한 배반이다. 서럽고 억울하지만 맞닥뜨린 것들에게 항거하는 것, 그것이 생의 실체다. 내일은 정말 ‘치워야지, 치워야지’ 하면서도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여러 해 동안 방치해 두었던, 날카롭던 가시마져 다 흐물흐물해져버린 선인장 화분을 모두 치워버려야겠다.
12월 22일, '시지프스의 신화'를 다시 읽는다. 시지프스가 반복하는 여러 단계 중에서, 나는 지금 돌이 다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그 시점에 와 있을까, 아니면 팔부능선쯤 밀고 올라간 단계에 있을까. ‘까뮈’씨는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야 한다고 끝을 맺고 있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덮는다. 책갈피의 ‘까뮈’씨는 손가락 하나를 쳐들고 나에게 미소를 보낸다. 나도 그에게 미소를 보낸다. 겨우 세포하나를 움직인 아주 작은 미소를.
너의 목덜미가 자꾸만 서늘해진다. 끈적끈적한 눈물이 자판기위에 떨어진다. 눈을 뜨면 골방 같은 막막함이, 눈을 감으면 안개 같은 자욱한 의심이, 너의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게 한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이제 그녀가 돌아올 시간이다. 그녀는 청바지를 입고 씩씩하게 돌아올 것이다. 너는 어떻게 그녀를 맞이할 거니. 깜빡 꿈속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그렇게 맞이할 거니? 끝. (200*77)
김성기 남 49세
017-318-1679
맹인과 등불
의사가 눈에 감았던 붕대를 풀어내며 손가락이 몇 개냐고 물었어. 너는 그 초보적인 질문조차 대답할 수가 없어 얼굴을 더듬었지. 덜 풀어낸 붕대가 없는데도 눈에는 붕대만 보였지. 정말 안보여? 그녀가 무너지듯이 물었어. 너는 포도당 주사바늘이 꽂혀있는 왼손대신 오른 손을 한 번 더 들어 얼굴을 더듬었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수술은 반복되었어, 그러나 원발성 녹내장으로 인한 실명이라는 최종선고를 들었지. 의사는 굳이 핑계를 댄다면 스트레스와 당뇨 합병증에 의한 것이라고, 낮은 도보다는 한 음계 높은, 그러나 례보다는 반음계 낮은 소리로 말했지. 그 소리는 꼭 서투른 솜씨로 교과서를 읽는 것 같았어. 띄어쓰기와 발음이 명확하지 않은 그 모호한 소리만큼 만큼 눈앞이 망막했지. 그러나 너는 그냥 세상이 망막하게 보였을 뿐 그렇게 절망하지는 않았어. 너의 세상은 원래 앞이 잘 보일 때도 망막했음으로. 너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여기가 끝이구나 하는 깨끗한 체념의 순간을 그렇게 맞이했지.
“왜, 불이나 켜고 앉아있지 않고?”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가 거실스위치를 올리는 소리가 ‘똑’하고 났어. 순간 너의 가슴에도 ‘똑’하고 불이 켜졌지. 돌아 왔구나. 독 오른 코브라처럼 너는 머리를 세운 채 돌아보지 않았어. 너는 하루 종일 맹인견을 따라다니는 꿈을 꾸다가 깨어났지. 언제나 너의 꿈은 잔인했고, 깨어 봐도 세상은 여전히 붕대에 감겨 있었지.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 밤길에 등불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대.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말했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군.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니지? 맹인이 대답했어. 당신이 저에게 부딪힐까 염려에서지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너는 그녀에게서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는 그녀가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불을 켰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위한 것이라며. 거실 가운데 매달려 파리똥에 절어가는 형광등은 울컥, 울컥, 토악질을 하다가 ‘주르르’ 빛을 쏟아냈어. 그것만이 하루 중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지. 너는 그녀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돌아올 때까지 오직 불을 켜기 위해 기다렸어. 한번도 빠짐없이 괘종시계 울리는 소리를 헤아리며, 좁고 어두운 전세방에 포획된 야수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그러나 그런 생활이 그렇게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지. 그녀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불안감만 빼고 나면 세상은 고래 뱃속보다도 더 조용하고 아득했지.
그렇게 삼년이 지났어. 당연한 일이겠지만 너는 눈이 안 보이는 대신 후각과 청각과 촉각, 거기다가 미각까지,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보통사람의 열배 이상으로 발달 되었지. 청각의 경우는 거의 백배로 예민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 그 때문에 너는 마치 지상에서 네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겠다는 듯, 그렇게 단호하게 웅크리고 앉아있었지. 가급적 세상을 향해 열린 몸의 부분을 작게 하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소리라는 소리는 다 감지해버릴 것 같아서였지.
그래, 네가 세상의 소리를 감지해 내기 시작한 첫 단초는 남세스럽게도 위층여자 오줌 누는 소리였어. 그 다음은 그 집 딸, 그다음은 그 집 아들, 그다음은 그 집 남자, 그다음은 그녀가 떠나는 발자국소리, 그다음은 그녀의 노랫소리, 그다음은 그녀의 교성소리 순 이었지. 그렇게 발달을 계속한 너의 청각은 마침내 개미가 싸우거나 바퀴벌레가 성교를 하는 소리까지 감지해 내기 시작했어.
너는 정말 바퀴벌레가 그렇게 자주 관계를 하는 줄 몰랐지. 그것들은 하루 종일 관계하고 먹고 관계하고 먹고를 반복할 뿐이었지. 그야말로 그것들은 오직 생육하고 번식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어. 그렇게 해서 4억년을 버텼을 거야. 그러니 고작 3백만 년의 역사를 가진 인간하고 비할 바가 아니지. 하기야 인간 이라고 해서 3백 만년 동안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 말고 특별히 세상을 위해 무었을 그렇게 많이 한 것 같지는 않아.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것들도 이른바 질서라는 것이 있었어. 어떤 것이냐 하면, 그것들도 일부종사를 한다는 것이었지. 끝없이 생육하고 번식하지만 오직 한 상대하고만 교미를 하는 것이었어. 그러니 배우자가 있으면서도 이사람 저사람 교미를 하고 다니는 사람은 바퀴만도 못하다 할 수 있지. 그런데 문제는 그들 중에도 아주 드물게는 변종이 있어 다른 상대하고 관계를 하는 것이 있었어. 그 때문에 화가 난 그 상대바퀴의 배우자는 복수의 일환으로 다른 상대와 관계를 하고, 그 다른 상대의 배우자는 또 다른 상대와 관계를 하고, 관계를 하고, 관계를 하고, 고, 고, 고……바퀴들의 관계가 매우 복잡해져 가기 시작했어.
그 무렵 그녀의 귀가도 늦어지기 시작하더군. 그렇게 늦게 돌아온 날의 그녀에게는 비누냄새가 유난히 짙게 배어있었어.
“먼저 자지 않고……”
그런 날의 그녀는 쉽게 짜증을 냈어. 그러자 갑자기 바퀴벌레들의 관계소리가 조용해 졌어. 네가 그들의 관계에 귀를 기울였듯이, 이제부터는 그들이 너희들의 관계에 귀를 기우릴 모양이었어.
“당신 지금 몇 시야, 야, 야,”
이렇게 첫마디를 시작해야겠지만, 너는 그런 승산 없는 싸움을 걸만큼 어리석지가 않았어. 너는 오직 그녀가 이 바퀴 득실거리는 허름한 집으로 다시 돌아와 준 것 만에도 감사했지.
“늦었네!”
아침의 비누냄새와 다른 냄새를 안고 들어오는 그녀에게 너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지. 그 냄새는 여름날 흐트러러지게 핀 밤나무 꽃 아래를 지나갈 때 맡았던 냄새와 흡사했어.
“나는 밤꽃 냄새가 싫어.”
밤나무 농원에 놀러갔을 때 그녀가 한 말이었지. 밤꽃 냄새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그런 그녀의 생리적 거부반응과는 관계없이 그녀는 지금 밤의 꽃이 되어가는 것일까. 네가 그녀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뭇지 않듯이 그녀도 너에게 무엇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네가 시력을 잃고 처음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일년간 그녀는 매일 역겨울 정도로 불고기 냄새를 달고 들어왔지. 더러는 반쯤 탄 불고기를 가지고와서 탄 부분을 가위로 잘라내고 먹여주기도 했지. 그럴 때면 너는 그녀에게 안마를 선사했어. 시력과 함께 성력도 잃어버린 너는 그녀가 잠들 때 까지 안마를 하는 것이 유일한 관계였지.
그녀의 팔과 다리와 어깨를 주무르면서 너는 그녀가 많이 야위었다는 것을 알았어. 너는 밤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의 야윈 몸을 정성껏 주물렀지. 그러나 맹인이라 하여 아무나 다 안마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어. 너의 안마는 서툴렀고, 주물러야 할 곳과 주무르지 말아야 할 곳을 분간하지 못했어. 주무르지 말아야 할 곳에 손이 오래 머무를수록 그녀는 힘들어했고, 너는 어떻게 하던 그녀를 주무르기라도 하고 싶었어. 그래서 찾아간 곳이 맹인 안마시술소였지. 그곳에서 너는 인형을 눕혀놓고 안마시술연습을 했어. 그리고 당당하게 맹인 안마사 자격증을 습득했지.
“아유 시원해, 안마솜씨가 하루가 다르네!”
밤꽃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는 너는 맹인안마사였어. 그러나 너는 맹인안마사 자격증을 땄다는 말을 그녀에게 하지 않았어. 맹인안마사라는 어휘가 어쩐지 그녀를 더욱 슬프게 할 것 같아서였지. 서른다섯 살의 그녀,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도, 포기해 버릴 수도 없는 목요일과 같은 그녀가 불구의 남편과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몇 가지나 될까. 너는 가랑잎 같은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 내렸지.
초등학교라고 불리는 학교를 다닐 때였어.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가에 산골아이들이 엎드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네잎클로버를 찾고 있었지. 그런데 코를 박고 이를 잡듯이 뒤져도 네잎클로버가 없는 것이었어. 산그늘이 길게 산을 내려 올 때쯤이면 아이들도 지치고, 배도 고프고, 당초부터 네잎클로버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때 한 여자아이가 벌떡 일어나며 독립군처럼 두 손을 높이 들었어.
“야! 드디어 찾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아이에게로 날아갔지. 모두들 부러운 눈빛으로 수수께끼를 보듯 그 아이를 쳐다보았어. 화판을 들고 다니거나, 천재 병이라 불리는 폐결핵에 걸린 희고 가는 목이 선망의 대상이었던 시절, 그 여자아이는 생긴 것 차체가 산골아이와는 달랐어. 창백한 얼굴과 호리병 같은 긴 목의 그 아이는 늘 나른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지. 세상이 좀 가소롭다는듯한 그 아이의 표정에서 너는 접근할 수없는 귀족의 성체 같은 것이 느껴졌었어. 그 아이는 네잎클로버를 들고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지. 그날따라 석양을 등진 그 아이의 모습은 정말 신비스럽기까지 했었어.
그 아이를 중심으로 해바라기 꽃잎처럼 둘러선 아이들이 네잎클로버를 한번 만져볼 것을 소원했었어. 그러나 그 아이는 한사코 그것을 거절 했었지. 마치 행운이 옮겨가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 아이의 거절은 칼질을 하듯 단호했어.
그날 행운 찾기는 그것으로 끝이 났지만, 그 이후로도 그 아이는 네잎클로버를 참 잘 찾는 아이였어. 그 아이는 정말 신비스런 아이였지. 그때 그 여자아이는 4학년 이였고 너는 5학년이었어. 그리고 15년 후 두 아이는 부부가 되었지. 아! 드디어 네잎클로버를 찾았다. 너는 외쳤지.
“앗 차가!”
그녀가 깜짝 놀라며 돌아누웠지. 눈물방울이 그녀의 등에 떨어진 것이었어. 자정의 텅빈 골목 같은 맹인의 눈에서 떨어지는 물이라니. 얼마나 몰골사납겠어. 너는 서둘러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지.
“어머! 당신 울고 있잖아.”
그러나 그녀는 그날 밤도 핸드폰을 들고 나가서 두시간정도 있다가 돌아왔지. 그녀의 입술에서는 덜 익은 술 냄새가 났어. 너는 이유를 묻지 않았지. 네가 묻지 않는 한 그녀는 말하지 않았고, 일상에도 변화가 없었지. 아침 열시쯤 나가고, 저녁 9시쯤 돌아오고, 퇴근 후에도 전화를 받고 나가면 두 시간쯤 후에 돌아오고…… 뭐 그 뿐이었어.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바퀴벌레들의 싸움이 조용해지기 시작했어. 어떻게 그 삼 검불처럼 얽히고설킨 삼~사각관계가 해결되었는지 세상이 다 조용했지. 그 무렵 그녀가 커다란 거울을 하나 사다 거실에 걸었어. 아무래도 외모에 신경을 써야할 일이 많은 그녀에게 당연히 필요한 물건이었을 것이라 생각했지. 너는 그녀가 없는 빈 전세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거울 앞에 섰어. 무엇이 보이는가. 너는 너의 눈이 볼품없이 일그러진 모습을 본적이 없어. 너의 상상속의 너는 항상 실명 당시의 모습에 머물러 있었지. 아니 그보다 훨씬 젊고 멋있을 때에 머물고 있었지. 그것은 축복이자 형벌이었어. 너는 거울을 향해 악수할 것처럼 오른손을 내밀었어. 매끄럽게 잡히는 거울의 표면, 그 속에서 남자는 아마 왼손을 내밀었을 것이야. 웃어봤지. 거울 속에 남자도 웃을 것이야. 한쪽이 허물어진 미소를, 가까이, 아주 가까이, 코가 달 때까지 거울에 얼굴을 대고 들여다보았지. 뭔가가 희미하게 보였어. 화장이 짙은 그녀였어. 그러고 놀라고 이 거울을 사다놨나, 이상의 날개처럼 그렇게 놀라고, 이름과 성을 바꾸고 암호처럼 살다간 이상처럼 살라고, 으흐흐흐 금홍아! 너의 밤을 나는 비껴주마. 너는 주먹으로 거울을 힘껏 쳤지. 짝 소리가 난 것이 아마 거울에 금이 간 모양이었어. 와장창 깨어지지 않는 것에 너는 더욱 화가 났어. 너는 한 번 더 거울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내질렀지. 헛손질이었어. 거울은 저만큼 있었던 것이야. 이런, 병신이 육갑을 한다더니.
“당신 왜 그래.”
그날따라 일찍 돌아온 그녀가 손에다 붕대를 감아주며 물었지. 그리고는 내손을 안타깝다는 듯이 주물럭거렸어.
평상시나 다름없이 저녁 먹고 영화를 보고 있는데 설거지를 끝낸 아내가 너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었지. 더운데 무슨 심뽄가 하고 엉덩이를 달싹 한 발짝 물러앉자 아내도 엉덩이를 달싹하며 한 발짝 더 붙어 앉았지.
그리고는 다시 고전영화에 집중하느라 잠깐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보니 아내가 너의 손을 주물럭거리고 있었지. 그냥 만지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왼손으로 너의 오른손을 악수하듯이 잡고, 흔들고 비틀고 손바닥을 긁고, 부비고 별 해괴한 동작을 다하는 것이었지. 너는 이것이 갑자기 무슨 신혼가 하고 ‘왜 그래?’ 하는 표정으로 돌아 봤지. 그래도 아내는 피식 피식 웃으면서 계속 주물럭대는 것이었어.
그래 그냥 ‘싱겁기는!’하면서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데 안 되겠다싶은지 너의 아내가 볼따구니를 꼬집어 비트는 것이었어. 이 여인이 뭐 못 먹을 것을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볼따구니를 꼬집힌 채로 돌아다보니 ‘못 알아듣겠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꼬집은 채로 볼따구니를 흔들었어. 초저녁부터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는 표정으로 황소 눈을 부릅뜨자 그때야 아내가 말을 했어.
“못 알아듣겠어?”
“뭔 소린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을 때 일이란다. 그때 교대로 어머니 병실을 한 삼개월간 지킨 적이 있었어. 그 병실은 노인성 중풍 환자만 있어 어머니 옆에도 어떤 할머니가 중풍으로 몇 년째 누워 있었지. 그 할머니는 유복했던지 (다른 시각으로 보면 박복한 것도 되지만) 간병인을 두고 있었어. 그리고는 매일 한 번씩 할아버지가 찾아왔었지.
아내가 보니까, 그 할머니는 오른팔과 외쪽다리가 마비되고 말도 못하는데, 할아버지가 오면, 왼손으로 할아버지의 오른 손을 잡고, 비비고, 긁고, 꽉꽉 쥐고 그러더라는 것이었어. 아내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는데, 할아버지는 그 말을 잘 알아듣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고, 같이 손을 비비고, 긁고, 꽉꽉 쥐더라는 것이었어.
그래, 젊어서는 눈으로 말한다더니, 늙으면 손으로 말을 하나보다, 도무지 서로의 의견이 잘 일치될 것 같지 않던 그녀와 너, 그러나 그렇게 쉽게 손으로 말하는 사이가 될 줄은 몰랐었어.
아무튼 그녀는 언제나 아홉시쯤 퇴근을 했다가도 핸드폰이 오면 거리낌 없이 집을 나갔어. 두 시간쯤 후에 들어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자정에 나가 새벽에 돌아왔고, 어떤 날은 아침에 돌아왔지. 돌아오기는 꼬박꼬박 돌아왔어.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보약을 사들고 들어왔어.
“이거 어렵게 구한 건데 엄청 비싼 약이야. 이것 먹고 눈이 보이기 시작한 사람도 있대.”
그날도 그녀는 그 이상한 약을 지어와가지고 매일 달여 먹였어. 아, 이제야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보약 속에는 미세한 량의 독이 들어 있을 것이다. 현대의학으로도 도저히 검출할 수없을 만큼 미세한 량의 독약, 그리고 보험도 들어놨겠지. 너는 그렇게 서서히 보약 속에서 죽어갈 것이야, 거대한 보험금을 남기고, 너는 더 없이 행복했어.
그녀는 무슨 연유인지 신혼 때부터 누가 손대는 것을 싫어했지. 그러니 장난으로라도 툭 치기만 할라치면 흡사 고양이처럼 움츠리며 기겁을 하는 것이었어. ‘왜 이래!’하며 몸을 꼬는 그녀는 정말 ‘야옹’하며 몸을 사리는 앙칼진 암고양이처럼 자극적이었어. 너는 그러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귀엽고 즐거웠지. 그 때문에 무료하거나 좀더 자극적인 분위기가 필요할 때면 너는 의례히 그녀를 툭툭 쳤지. 그때마다 그녀는 공벌레처럼 몸을 도르르 말고, 너는 그것이 재미있고, 그러던 것이 발전하여 결국에는 폭력이 되었지.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폭력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너의 의식에 있었어. 그래서 너는 밖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은 의례히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일상화 되어버렸지.
“난 선인장이 좋아. 선인장 가시를 온 몸에 고슴도치처럼 심고 싶어”
그녀는 그런 일이 있는 다음날은 어김없이 선인장 화분을 사왔지. 선인장 화분은 날이 갈수록 하나둘씩 불어났어. 그러면서도 그녀는 선인장에 한번도 물을 주지 않았지. 말라죽으면 죽은 대로 그대로 두었어. 그런데도 선인장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별 표시가 나지 않았어.
식생활의 서구화로 숟가락공장이 부도위기에 몰리자 너는 생활비는커녕 집을 담보로 회사자금을 융통해 써야했어. 거기에다 손찌검까지 하는 너를 아내는 조금씩 무시하기 시작했어. 그럴수록 너는 더욱 난폭해 졌고, 술만 마시면 더욱 거칠어 졌고, 급기야는 너 자신도 너를 통제하기가 힘들어졌어. 술을 마시고 나면 가슴속에서 아주 날카롭고 비겁한가시가 하나 둘씩 돋아났어. 그녀의 선인장 화분은 자꾸만 불어났고, 고만고만한 선인장 화분이 스무 개쯤 되었을 무렵이었지. 너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집안 여기저기를 서성이기 시작했어. 너는 언제부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어.
그 날도 목마름과 가위눌림에 잠이 깼지. 냉장고에서 물 한 컵을 따라 마신다음 다시 한 컵을 따라들고 불 꺼진 거실을 서성였지. 그러다가 독사에게 물린 것 같이 따끔한 것이 복사뼈를 쑤시는 느낌을 받았어. 여기저기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전화들이 네 옆구리를 끊임없이 찔러대고 있을 때였지. 화들짝 놀란 너는 내려다보았어. 선인장 화분이었어.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았어. 너는 화분을 머리끝까지 들어올렸다가 거실 바닥에 처박아버렸어. 놀란 아내가 달려 나와 불을 켰어. 형광등이 할딱할딱 빛을 토해냈어. 깨진 화분조각과 뿌리 뽑힌 선인장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그녀가 선인장과 너를 번갈아 쳐다보았어. 너도 돌발적인 네 행동에 너무 놀라 어리둥절하게 서있었지. 너는 놀라 떨고 있는 그녀를 보며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어. 하지만 도가 지나치게 미안한 마음은 전혀 다른 행동으로 터져 나오고 말았지. 너는 또 다른 화분 하나를 역기처럼 번쩍 들어올려 보기 좋게 박살을 내고 말았어. 그녀보다 네가 더 놀랐을 거야.
그날 밤 네가 잠든 사이 그녀는 집을 나갔어. 해변에 발자국이 지워지듯 그렇게 사라져버렸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아내의 가출, 그것은 참으로 생경스러운 단어였어. 사람들은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상다반사라고 너에게 한마디씩 위로를 했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기다려 보라고 경험자처럼 충고했지. 곳 돌아올 것처럼 아무것도 가지고가지 않고 나간 아내가 두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어. 변화는 집을 나간 그녀에게서가 아니라 그녀와 반대쪽에 있는 너의 세상에서 먼저 일어났어. 너는 선인장화분에 불을 주지 않는 대신 네 목구멍에 더욱 많은 술을 부었지. 선인장 화분은 모두 말라죽어 버렸어. 벽에 걸린 아내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말라죽은 선인장은 살아있을 때 보다 더울 날카롭게 가시를 세웠지. 너는 두 달 동안 정확하게 열세 번 장모가 혼자 사는 가리봉동을 찾아갔었어.
“이 사람아, 그 불쌍한 것을” 눈물을 훔치며 장모는 말했지. “고것이 제일 못 참고 살 일을 저질렀네. 자네 장인이 날 때리곤 했어. 그럴 때마다 그것이 어찌나 울고불고 했는지 아나. 얼마나 그 아가 제 애빌 미워했는지 죽었을 때도 동네 애들하고 줄넘기를 하고 놀았다네.” 너는 어렸을 때 이웃동네에서 살면서도 단란해 보이기만 한 그 집에 그런 애환이 있는지 정말 몰랐었지. 아무튼 가출은 매우 환불이 까다로운 쇼핑이었어. 너는 늘 빈손으로 장모의 집을 나서야했고, 얼마 후에는 회사에서도 빈손으로 나서야 했지. 아니, 빈손이 아니라 세상에서 너 하나뿐이라는 듯이 끝빨 조이던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 쥔 팔목에 쇠고랑을 차고 나섰지. 부정수표단속법위반으로 복역 중 당뇨악화로 가석방 되었고 급기야는 눈이 멀었지. 차가운 감방보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어. “차라리 꺼꾸러져 죽지.”더 이상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하던 날 그녀는 의사 앞에서 악을 썼어.
이제 네가 거꾸러지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에게 보험금을 남겨주는 것, 그것뿐이야. 너는 열심히 보약을 먹었지. 그런데 정말 독기가 퍼지는지 눈에 핏발이 서는 것처럼 간질간질하고 이상해지기 시작했어. 그러는 너를 보고 그녀가 말했어.
“어머, 몰라보게 좋아졌네!”
그래 몰라보게 좋아졌을 거야. 너는 매일매일 거울 앞에 서서 너를 비춰 보고 더듬어보고 만져 보았지. 그러다가 너는 깜짝 놀랐어. 거울 속에는, 조금은 낮 설지만 익숙한 모습…… 이게 누구야? 감격보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 너는 한참 연설을 잘하다가 원고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거울속의 너를 응시했어. 참 우습지. 너의 맹인으로써의 한살이는 그렇게 장난처럼 끝나버렸어. 그러나 눈을 뜨자 세상은 몹시도 어수선하고 분주했어. 도무지 바퀴벌레들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어. 차라리 눈을 감고 있을 때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는 눈을 뜨고 살 일이 두려웠어. 그래서 다시 눈을 감았지. 그러나 아무리 억지로 두 눈을 꼭 감아도 이제는 바퀴벌레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밤이 되고 그녀가 돌아왔지. 너는 선글라스를 쓴 채 소파에 고집스런 물웅덩이처럼 고여 있었어. 어제나 그랬던 것처럼 거실 벽을 똑바로 바라본 채 인사를 했지.
“이제 완.”
의지와는 달리 목소리가 기타의 육 번 선처럼 떨고 있었어. 너의 떨림을 감지하지 못한 그녀의 행동은 거리낌 하나 없었어. 너는 그녀를 거울을 통해서 지켜보고 있었지. 그녀가 돌아 올 때 소리 너는 쪽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형광등불아래 선글라스를 쓰고 화살 텅빈 새벽 골목길을 바라보듯 돌아보는 너의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오래된 습관 이었지. 길게 대각선으로 금이 간 거울은 그녀의 모습을 약간 삐딱하게 비추었어. 오년 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낮 설었지.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화려하고 반짝이는 주현미의 무대의상 같은 옷을 입었으리라고 생각했던 네 상상을 많이 비껴간 그녀는 정갈하고 단정한 청바지 차림이었어. 그러나 너는 결정적인 단서를 찾는 사립탐정처럼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짙고 검은 안경 속에서 눈동자만을 굴렸지. 자세히 보니 그녀의 머리는 저져있었어. 그러면 그렇지! 하마터면 너는 탄성을 지를 뻔 했어. 진실로 기대했던 것을 찾은 것처럼 너는 무릎을 칠 뻔 했지. 아, 네가 정말 그녀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니?
“저녁 챙겨 먹었어?”
그녀는 처다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물었어. 그리고는 대답도 하기 전에 또 물었어.
“약은?”
그래 무엇보다도 약이 중요하겠지. 그래, 먹었다, 먹었어. 그러나 사실 너는 오늘밤 약을 먹지 않았어. 살아야겠다는 더러운 욕구, 그녀를 잃고, 사랑을 잃어도, 목숨만은 살아야겠다는, 서럽고 구차한 생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었지. 너는 알고 싶었어, 너의 부재 속에 살아온 그녀의 오년에 대하여. 비열하다 비열해 하면서도 그것은 익숙한 생의 한 모습이었었어.
너는 마주보이는 거대한 거울을 통하여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어. 그럴 때 선글라스와 거울은 정말 편리한 문명의 혜택이었어. 너의 그런 엿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그녀의 행동은 칼날처럼 거침이 없었어. 그녀는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모자를 벗어서 던지다 싶게 신발장위에 올려놓고는, 청바지를 거꾸로 벗어 발로 툭 차 네가 앉아있는 거실 쪽으로 밀어놓았지. 그리고는 화장실을 다녀왔고, 팬티차림으로 설거지를 했어. 그녀는 조금 야위기는 했으나 아직도 물방울이 도르르 굴러 떨어질 것처럼 각선다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설거지를 했어. 왼발에서 오른발로, 다시 오른발에서 왼발로 힘의 균형을 옳길 때마다 복숭아 같은 히프의 근육이 삐뚤거렸지.
그녀는 설거지를 하다말고 핸드폰을 받았지. 전에 없이 허리를 숙이고 너를 -정확하게 말하면 거울속의 너를- 흘긋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녀의 통화내용을 너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전에 없이 작은 소리로 통화를 하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눈이 보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이었어. 그녀는 전화를 끊고는 휴지통에서 약봉지를 꺼내들었어. 그리고는 형광등에 약봉지를 비춰보며, 다 먹었나, 먹지 않았나, 확인했어. 너는 이미 그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싱크대에 쏟아 부어버렸었지. 그녀는 한모금도 남기지 않고 빨아먹은 약봉지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어. 그리고는 잠깐 네 쪽을 바라보았지. 그 모습에는 비장감이 서려 있었어. 너는 오싹 했으나, 여전히 거울을 처다 보고 있었으므로 눈이 마주칠 일은 없었지. 그녀는 다시 파마기가 다 풀어진 머리를 질끈 동여맨 다음 청바지를 입고 모자를 썼어.
“나, 좀 나갔다 올께.”
그녀는 횡 하니 나가버렸지. 이상했어. 왜 화장을 안 하고 나갈까. 너는 불이 나게 그녀를 따라나섰지. 그러나 오랜만에 너무나 오랜만에 지팡이 없이 걷는 길이라 손등이 핏줄처럼 어지러운 산동네 골목에서 길을 잃고 말았지. 눈을 감고도 친숙했던 길이 그렇게 낮 설수가 없었어. 결국 허둥대다 집으로 돌아왔지. 돌아오자마자 너는 그녀의 화장대를 뒤졌어. 어라, 그런데 이상하네. 대충 방치한 듯한 그녀의 화장품이라는 것에는 크림이나 파운데이션 같은 기초화장품 말고는 그 흔한 랑콤사 아이샤도우는 고사하고 붉은색 립스틱 하나 없었어.
두 시간 만에 그녀는 돌아왔어. 너는 자는 척 빨랫감처럼 늘어져 있었지. 여전히 그녀에게서는 진한 밤꽃 냄새가 났어. 그녀는 이불을 끌어다 깊게 덮어준 다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어. 그녀는 너에게 보약을 사오던 날부터 아무리 피곤해도 잠자리에 들기 전 컴퓨터를 켰지. 바퀴벌레의 정사를 엿들을 정도로 예민해진 너의 청력은 자판기 소리만 듣고도 그것이 ‘ㄱ’을 치는 ‘ㄴ’을 쓰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지. 심지어 너는 그녀가 먼 곳에서 외간 남자의 화대를 세는 소리까지 들을 경지에 있었으니 그 정도를 읽어내는 것은 식은 죽 마시기나 다름없었지.
오늘도 남편은 약을 잘 먹었다……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아마 이 대목은 네가 이제 거의 시들어가고 있다는 표현을 차마 은유적으로 것 같았어- 사랑하는 이와 언제나……새로운 삶을……. 너같이 천재적인 청력을 가지고도 그 타이핑 내용을 다 해독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의 타이핑 솜씨가 워낙 엉망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새로운 무슨 삶 ’이라는 대목에서 감격에 받쳐 그녀가 그녀의 인생을 지우고 다시 쓰듯이 딜레트 키로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타이핑하는 바람에 심기가 어지러워 청력이 추적을 놓치고만 것이었어.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났어. 그녀는 언제나 똑같이 그렇게 들어오고 그렇게 나갔어. 아직도 너는 거울을 통해서 그녀를 감시하고만 있을 뿐 결정적인 단서를 잡지는 못했어. 심증뿐인 범죄, 너는 혼란스럽고 지루해 지기 시작했어. 너는 안방을 빠져나와 거울 앞에 섰지. 거울 앞에 서 있는 네 모습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거울의 저편에 있는 그녀를 보고 싶어서였어. 그러나 거울은 너무나 정직하게 네 모습만 비출 뿐 정작 제 속내는 들어내지 않았어. 과연 거울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이는 것은 거울의 표면과 거기에 비치는 너의 모습뿐, 거울의 내면은 들여다볼 수가 없었어. 그리고 그 너의 모습이라는 것 또한 네가 고개를 외로 돌렸을 때 고개를 좌로 돌리는, 그는 진정 네가 아니었어. 너는 주먹을 힘껏 뻗었지. 눈이 안보일 때와는 달리 주먹은 거울의 정 중앙을 정확하게 강타했어. ‘와장창’ 거울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지.
“당신 왜? 또? 그래?”
그녀는 붕대를 감아주고, 밥과 약을 챙겨놓고, 어제 밤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던 청바지를 껴입고, 서둘러 나가버렸어. 거울로만 보았던 그녀를 정면으로 보는 것은 정말 생경스러웠어. 그녀가 나가자 너는 이제정말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울부짖었지. 울다가 웃다가. 그러다가 생각났지. 컴퓨터.
너는 서러운 손으로 컴퓨터를 켰지. 아니 컴퓨터를 킬 필요는 없었어. 그녀는 언제나 컴퓨터를 치다가 그대로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나가기 때문이었지. 마우스 위에 손을 대자 LCD화면은 자동으로 아는 체를 했어. 그러나 너는 낮 설었어. 사실 모든 것은 다 낮 설었지. 낮 설은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며 낮 설을 그녀의 일기를 점자를 더듬듯 읽기 시작했어.
10월 11일, 오늘 나는 퇴근 후 한탕을 더 뛰었다. 도합 세 탕… 모든 것이 너무 힘들다. 이 산동네 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불빛은 마치 별빛 같다. 하지만 별은 올려다 볼 때 아름다운 것, 발아래에 별이 있다는 것은 슬프다는 것이다.
11월 6일, 남편의 생일이니 오늘만은 노래방에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망설이다 나갔더니 역시나 너무나 힘들게 했다. 도대체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왜 그럴까. 거기다가 스커트를 입고 나오라고 노래방 주인까지 성화다. 그러나 이 청바지는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11월 27일, 어제는 손님을 여섯 명이나 받았더니 너무 피곤해서 그냥 쓰러졌다. 때 미리가 있어서 때를 미는 여자가 있을까. 때를 미는 여자가 있어서 때 미리가 있을까. 다행히 노래방도우미를 찾는 손님은 없어서 퇴근했다가 또 불려 나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사우나도 노래방도 손님이 없다. 남편 약값도 걱정이다. 그나저나 반년이나 먹고도 차도가 없으니 더 먹여야 하나, 포기해야하나. 그러나 포기는 곳 끝이다. 남편은 그 끝이 언제일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벽만 바라보고 있다. 돌부처처럼 앉아있는 저 낮 설음, 나는 언제부턴가 신랑이 타인처럼 낮 설다. 마주보기가 민망하여 큰 거울을 하나 사다 걸었다.
12월 5일, 오늘은 손님이 너무 많아 일을 마치고나니 파김치다. 미역 사들고 집에 오니 남편은 여전히 고물차처럼 웅크리고 있다. 한때는 내 인생의 네비게이션 이었던 저 고물차를 밀고 산마루를 올라간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가는 뒤로 물러나는 저 고물차의 무게에 눌려 쥐포처럼 깔리고 말 것이다. 나는 어느 신의 테스트에 낙제점을 받았기에 이 말똥구리 같은 삶을 개미처럼 가는 팔로 끝없이 밀어 올려야만 하는가. 내가 굴려 올리고 있는 이것이 말똥이 아니라 희망이라 믿으며 가파른 언덕길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나는 행복한 시지프스인가. 불행한 시지프스인가.
12월 13일, 한때 다른 남자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혹은 다른 삶, 동반자살, 가능한 모든 것을 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조리에 대한 굴복이고, 참삶에 대한 도피이며, 스스로에 대한 배반이다. 서럽고 억울하지만 맞닥뜨린 것들에게 항거하는 것, 그것이 생의 실체다. 내일은 정말 ‘치워야지, 치워야지’ 하면서도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여러 해 동안 방치해 두었던, 날카롭던 가시마져 다 흐물흐물해져버린 선인장 화분을 모두 치워버려야겠다.
12월 22일, '시지프스의 신화'를 다시 읽는다. 시지프스가 반복하는 여러 단계 중에서, 나는 지금 돌이 다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그 시점에 와 있을까, 아니면 팔부능선쯤 밀고 올라간 단계에 있을까. ‘까뮈’씨는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야 한다고 끝을 맺고 있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덮는다. 책갈피의 ‘까뮈’씨는 손가락 하나를 쳐들고 나에게 미소를 보낸다. 나도 그에게 미소를 보낸다. 겨우 세포하나를 움직인 아주 작은 미소를.
너의 목덜미가 자꾸만 서늘해진다. 끈적끈적한 눈물이 자판기위에 떨어진다. 눈을 뜨면 골방 같은 막막함이, 눈을 감으면 안개 같은 자욱한 의심이, 너의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게 한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이제 그녀가 돌아올 시간이다. 그녀는 청바지를 입고 씩씩하게 돌아올 것이다. 너는 어떻게 그녀를 맞이할 거니. 깜빡 꿈속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그렇게 맞이할 거니? 끝. (2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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