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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단편/무슨 일이 일어났을까/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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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마나
710517-
ekdtlsdl01@hanmail.net
남양주시 호평동 우림필유아파트 106-903
010-4321-0101 031-594-0316
남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남자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의심한다. 그는 지금 자신이 만든 이미지 속에서 서성이고 있다.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다. 남자는 집근처 초등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있다. 몇몇 아이들이 공놀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길을 채비한다. 학교 건물 안에 숨겨져 있던 자동차들이 하나둘 흘러나온다. 놀이터에는 발자국이 수도 없이 찍혀있다. 가을의 마침표라도 찍듯 마지막 남은 낙엽이 흔들리다 떨어진다. 그는 멍하니 앉아 어딘가를 보고 있지만 사실 그는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제 그의 연인이 이별을 선고했다. 여자는 피곤해졌다고 말했다. 작고 통통한 몸매에 쌍꺼풀 없는 눈과 귓불이 유난히 예쁜 여자를 알게 된지도 6개월이 지났다. 이번 여자는 성인 나이트였다. 천장이 우주 정거장 같은 곳, 모두들 미쳐 있는 곳이다. 미치고 싶을 때 남자는 그곳을 찾는다. 자리에 앉자마자 웨이터의 손에 이끌려온 여자는 술에 취해있었다. 여자는 나긋나긋 말도 잘했고 후배와 남자는 짝을 짓고 맥주를 마신 후 밖으로 나왔다. 얼마 후 그들은 그곳을 나와 흘러간 팝송이 흐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카페의 위층에 위치한 모텔로 각자의 파트너와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에 그곳을 따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 왔을 때 남자의 아내와 아들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은 아내를 따라 간 마트에서였다. 남편의 팔에 매달려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들은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마 후 엘리베이터 안에서 술에 취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남자를 알아보았다. 같은 아파트에다 같은 동에 살면서도 서로의 몸을 더듬기 전까지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친해졌다. 한두 번 우연으로 마주치니 각자의 가족들이 있을 때도 종종 부딪쳤다. 오히려 그것이 그들을 자극하곤 했다.
갑작스런 이별의 통고였다. 이유는 없다. 그러나 잡아선 안 된다. 그것은 불문율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알아서도 안 된다. 덕분에 남자는 여자의 이름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깊이 알지 말자고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남자는 여자가 어디에 사는지만 알뿐이다. 사는 곳을 안다고 그녀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함께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온 적도 없다. 함께 거리를 걸었던 적도 없다. 여관으로 각자 들어가고 각자 나오는 것이 다였다. 지나고 나니 남자는 여자가 궁금해졌다. 남편의 직업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왜 그동안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남자는 여자가 떠나고 난 이후에야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사실 남자는 여자의 몸이 벌써 그립다. 잡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을 했고 아파트 주위를 배회하다 생전 가지 않던 초등학교 운동장 벤치까지 찾아갔다.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다시 나이트에 가볼까하는 생각을 하다 그만 두었다. 자신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아파트 입구에서 몇 가피의 담배를 피웠다. 여자를 만날 수는 없었다. 몸이 아프냐고 묻는 아내에게 몸살 기운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7층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혹시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고 싶다.
다음날, 남자의 회사로 몇 장의 사진이 배달되었다. 퀵서비스였다. 남자는 숨이 막혔다. 아내의 이름이 적혀 있는 봉투 속에는 여자의 사진이 들어 있다. 오전에 배달된 사진 덕분에 남자는 종일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부부관계라곤 없었던 가족관계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붙든다 해도 남자는 아내를 책임질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내는 어쩌면 그 여자 말고도 그 앞의 여자들까지 모두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다. 퇴근 시간을 한 시간정도 남겨두고 아내에게 문자메세지가 왔다. 자신은 이미 집을 나왔다고 했다. 목적지는 강원도 영월 어딘가에 있는 작은 절이라고 했다. 서류는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과연 아내는 없다. 아들도 없다. 중학생이 된 아들의 얼굴을 본 것도 언제인지 모르겠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아들은 돌아왔다. 아들은 거실에 앉아 일없이 채널을 돌리고 있는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아들에게 무슨 이야긴가를 해야 할 것도 같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낼 수가 없다. 아내가 없는 집은 쓸쓸하다. 기다리면 아내가 돌아올 것만 같다. 아내는 착하고 순한 여자이다. 잔소리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남자는 착한 아내 옆에만 누우면 아무 짓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남자가 아내에게 아무 짓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부부관계를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내의 몸이 차가웠다. 아내의 몸은 차갑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늘 세운 물고기 같았다. 남자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혼자 많은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아내 앞에서는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돈을 주고 여자를 샀다. 총각시절에도 찾지 않던 창녀에게 참았던 정욕을 쏟아 부었다. 생각은 범죄를 짓고 몸은 따뜻한 쾌락에 빠졌다. 돈을 더 얹어준다는 조건으로 아예 하룻밤을 사기도 했다. 돈을 제법 준 탓인지 여자는 남자를 밤새 안아주었다. 남자는 창녀를 생각하며 다시 아내와 잠자리를 시도했다. 그러나 아내의 피부가 닿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몸은 쪼그라들었다.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의 생각일 뿐 다시 아내 몸에 손을 대는 일은 없어졌다. 이미 삼년은 더 된 일이다. 그러나 아내는 아내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화는 조금씩 사라져갔다. 아내가 남자 몰래 다른 이를 끌어 들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질투를 불러일으킨 반면 남자의 죄의식을 삭감시켜주었다. 그런데 이번 여자의 사진과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는 것은 남자와 그만 살고 싶다는 아내의 의지이다. 남자는 아내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쇼파에서 밤을 보냈다. 아들과 아침을 대충 지어 먹고 출근을 했다. 출근길 내내 그는 이혼에 대해서 생각했다. 위자료와 또한 주위 사람들의 입방아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자신이 아내에게 불능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그는 괴로웠다. 그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남자는 다짐처럼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이혼에 합당한 어떤 이유라도 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불능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주변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제멋대로 지어져서 떠돌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언짢다. 어제 저녁 식탁위에 놓여있던 이혼서류를 들여다볼 때만 해도 아내에게 미안했던 마음이 아침이 되자 남자는 자신이 정말 불행한 사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버렸다. 자신이 아내와 같은 여자를 만나지만 않았던들 아내 앞에서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으로 세월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남자는 대기업에서 한 팀의 팀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몇 년 후에는 임원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집안 자체가 한 나라의 70프로 이상 헤게머니를 쥐고 있는 유명대 출신이다. 탄력 있는 선후배를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대를 잇고 있다. 남자는 자신의 환경에 매우 만족한다. 그러나 이혼을 하면 지금까지 닦아온 그의 사회적인 것들은 한번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사회라는 것은 관습에 관한한 용서에 둔감하다. 입사 동기 중, 진급에서 몇 번이나 누락한 이들은 남자의 불행을 진심으로 기뻐할 것이다. 남자는 아내의 마음이나 생각이 궁금하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잘 견뎌주었던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을 봐서 한 결혼이지만 몇 년 동안 알콩달콩 잘 살지 않았던가, 남자는 아내가 싫지 않다. 사랑은 아니라도 아내와 사는 동안 나쁘지 않았다. 누나처럼 여동생처럼 살면 되지 않을까, 남자는 혼자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이혼은 하면 안 된다. 아들에게도 그것은 못할 짓이다. 남자는 이혼만은 막아야한다고 결심한다. 아내를 찾아 설득하기로 한다. 마지막까지 안 된다고 하면 호적만 그대로 두자고 해야겠다.
토요일 오후 팀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월요일까지 월차를 냈다. 아내를 만나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 볼 참이다. 오랫동안 아내를 안아보지 못했지만 공기도 좋고 물도 좋다는 강원도에 가서 아내를 보면 남자 몸이 달라질 지도 모른다. 남자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부정은 부정을 낳고 긍정은 긍정을 낳는다했다. 어쩌면 아내는 이번 여자만 아는 지도 모른다. 남자란 한두 번 정도 바람을 피울 수도 있다는 역사적 관습적 침묵에 대해 말해보자. 아내만 이해 해 준다면 다시 아내를 안아보리라. 남자는 몇 번이나 생각과 마음을 정돈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여행용 가방을 챙겼다. 아내가 하던 일이라 남자는 속옷이나 양말 따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 한다. 그는 서재에서 주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안방이라는 아내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 낯설다. 아내의 방에는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다. 장롱의 문을 열자 남자의 옷이 가지런하다. 속옷도 장롱의 작은 서랍에 정리되어 있다. 평소에 그가 입던 옷이지만 아내가 없으니 옷조차도 낯설다. 짠한 마음이 폭포수처럼 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는 다시 한번 더 결심을 굳혔다. 정말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내의 손을 붙들고 병원이라도 찾아가야겠다고 그는 내심 비장한 각오까지 한다. 남자는 그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상에 젖는다. 화장대에는 아내가 없던 며칠 동안 미세한 먼지가 앉았다. 남자는 아내의 서랍에서 오래된 결혼사진을 발견했다. 결혼사진을 보자 마음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결혼사진 속의 부부는 어색한 표정을 감출 수 없다. 남자는 차렷 자세이고 아내도 차렷 자세에 팔만 남자의 팔에 끼워져 있다. 그는 여행용 가방 속에다 결혼사진을 넣었다. 여차하면 아내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쓰리라 결심한다. 그러다 아내와 아내의 남동생 사진을 보게 되었다. 한없이 우울해 보이는 남동생, 아내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다. 남매는 다른 이들보다 우애가 좋다. 이제 혈육이라고는 남동생이 전부이다. 아내는 남동생을 각별히 챙겨 준다. 최근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은 남동생을 아내가 보살펴 주고 있다. 아내의 남동생은 가까운 곳에 산다. 그러나 남자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아내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 그들은 더 멀어졌다. 그러나 아내는 남자 몰래 동생의 생활비도 보태고 있다. 남동생은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미대를 나오기는 했지만 이렇다할 대내외적인 성과도 없이 남동생은 그림만 그린다. 남자도 그가 그린 그림을 몇 번 보았다. 그러나 무엇을 그렸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내 밖에 없다. 아내는 동생이 그린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대번에 알았다. 그러나 아내도 추상화의 형태를 띤 동생의 그림에 대해서 설명하는 법이 없다. 아내는 성물을 보듯 그림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듯 했다. 남자의 집에도 동생의 그림이 한 점 있다. 풍경화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동물의 그림 같기도 한, 벗은 사람들이 야외에서 목욕을 하는 것 같기도 한, 내용을 알 수 없는 그림이지만 아내는 그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사실 남자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내는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겨울방학에 그림을 집으로 가져왔다. 그림은 그들이 함께 썼던 침대 발치에 걸려있다. 크기도 어지간한 대문짝만한 그림이 눈을 뜰 때도 감을 때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아내가 유독 좋아하는 그림인지라 또한 아내의 부모님들이 한꺼번에 돌아가시고 난 이후, 우울해 있던 아내라서 남자는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못했다. 남자가 아내의 방을 나오고 난 이후에도 그림은 항상 그 자리에 걸려 있었다. 그림을 집에다 들여놓은 얼마간 하루의 시작과 끝을 그림과 함께 해야 했지만 남자는 그림의 내용을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는 그 그림을 자세히 본 적도 없다.
사진 속의 아내와 남동생의 표정은 슬퍼보였다. 남자는 괜한 감정에 휩쓸렸다. 아내는 웃는 듯 했지만 울고 있다. 남동생도 비슷한 표정이다. 둘은 나란히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들이 보는 대상은 카메라가 아닌 다른 세상을 향한 것 같다. 꿈꾸는 듯한 눈동자가 아주 닮아 있다. 그들은 한 뱃속에서 나온 남매임이 확실한 듯 아주 닮아 있다. 남매가 닮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남자는 그 사진이 못 마땅하다. 남자의 눈에 그들은 영혼까지 닮아보였던 것이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처남이 그린 그림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 언제 사라졌는지 남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내가 집을 나가면서 가지고 나간 것인지, 아니면 남자가 아내의 방에서 나간 이후 그림이 사라졌는지는 아내만이 알고 있다. 남자는 아내의 방에서 잠시 창 밖을 바라본다. 아파트들이 나란히 줄 서 있음으로 다른 이의 거실과 안방이 보인다. 낮이라 자세히 볼 수 없지만 밤이 되면 그들은 커튼으로 그들의 세계를 가릴 것이다.
아들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아들은 오지 않았다. 남자는 아들에게 휴대전화의 문자메세지로 엄마를 찾으러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온다. 급한 일이 생기면 전화하라는 내용도 포함된다. 아들은 남자에게 전화를 거는 법이 없다. 아들의 휴대전화에 남자의 전화번호가 입력되어 있는지 의심스럽다. 남자는 자신이 가정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곤 돈을 벌어다 통장에 채워주는 일 밖에 없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시내를 빠져나오는데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밀리고 밀리는 차 안에서 남자는 쉴 사이 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차 안을 맴돌기만 했다. 가족들이 탄 자가용들이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히히덕거리는 연인들이나 아이들이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남자 마음은 더욱 울적했다.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처음이란 것이 결혼식을 하던 처음 그날인지 아니면 아내의 방을 나오기 직전인지, 그것이 아니면 자신과 하룻밤을 자 줄 수 있는 여자들을 찾아 나서기 전인지 남자는 모른다. 그들의 가족에게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하다 남자는 아내를 처음 만나던 그 시각으로 시계 바늘을 옮겼다. 남자는 감상에 젖어 들었다. 아내의 순결한 몸을 처음 더듬을 때를 생각하자 몸이 발기한다. 다시 아내를 안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남자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부담이었다. 왜인지는 남자 자신도 알 수가 없다. 남자는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러나 아내가 없는 집은 쓸쓸하다. 남자는 자신이 아내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은 한층 더 수위를 높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워두고 네비게이션으로 아내가 머물고 있다고 절의 위치를 조회하고 기계를 작동 시켰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다. 자신이 찾으러 가고 있다는 문자메세지를 남기고 다시 운전석에 앉는다. 고속도로에서도 정체가 심하다. 국도로 빠지는 길을 택한다.
겨울의 밤은 쉽게 내린다. 저녁노을이 걸려 있는 산을 바라보면서 남자는 자신의 삶도 저렇게 지는 해의 마지막 부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둠은 남자가 인식하기도 전에 내렸다. 어스름에서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시각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국도변의 풍경도 사라졌다. 어둠이 이렇게 쉽게 오는지 예전에 미처 몰랐다. 국도변의 가로등은 대부분 꺼져 있다. 켜져 있는 것은 흐리고 어두워 남자의 길을 밝혀주지 못한다. 남자는 어둠에 익숙지 않다. 그는 빛에 익숙해진 사람이다. 남자가 걸었던 밤거리는 낮보다 밝았다. 국도로 처음 길을 낼 때는 몇 대의 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렸다. 그러나 이제 밖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푸른빛을 반짝이는 시계는 고작 6시 30분이다. 그 시간이면 저녁 중에서도 초저녁이다. 평소에는 근무를 마치지도 않을 시간이다. 하지만 도시를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은 소리 없이 남자를 덮쳤다. 남자는 혼자라는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속도를 높이자 차가 붕 떠서 달리는 것 같다. 얼마 후 뒤에서 희미한 불빛이 다가온다. 남자는 속력을 낮춘다. 길동무가 생긴 것 같아 안심이 된다. 뒤에서 따라오는 차는 작은 트럭이다. 덜컥대는 소리가 남자의 차안까지 스민다. 그러나 남자는 소리가 반갑다. 트럭을 앞세워주기까지 했다. 트럭에는 소가 한 마리 서 있다. 소는 크고 맑은 눈망울을 끔뻑인다. 목에는 방울이 하나 달려 있다. 어미 소는 아닌 듯하다. 실려 가는 소를 보자 남자는 비로소 자신이 시골길을 달리고 있구나 생각한다. 서울에서 자란 남자는 소에 익숙하지 않다. 사실 소고기에만 익숙해져 있는 그였지만 소를 보자 자신의 고향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남자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 익숙한 것을 찾는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 소꼬리를 따라 가고 있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의 엉덩이를 쫓아간다. 소는 가끔 머리를 흔들어 방울 소리를 내곤 한다. 어둠 속에서 무서운 속도로 자가용이 한 대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남자의 차와 트럭을 앞질렀다. 산 속의 커브길이다. 남자와 소는 함께 놀랐다. 바람같이 나타난 차가 전속력을 다해 그의 차를 앞질러 가는 동안 어둠은 잠시 흔들렸다. 남자는 허옇고 빠른 바람이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고 또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남자는 어둠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일만 반복한다. 네비게이션의 목소리가 방향을 표시하자 세 갈래의 길이 나타난다. 돌고 돌던 산을 다 내려온 듯하다. 왔던 길에서 반만큼 더 가면 될 듯하다. 방울 매단 소는 옆길로 지나갔다. 남자는 소와 반대방향의 길로 가야 한다. 세 갈래 길의 안쪽에는 주유와 식당이 있다. 뼈다귀해장국이라는 간판 불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가 있어 뼈귀라는 글자만 보인다. 남자는 주유소에 들러 차에 기름을 채우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오래된 집이다. 늙은 여자가 일어나 남자를 맞이한다. 메뉴는 뼈다귀해장국 하나뿐이다. 남자는 주문과 동시에 자리에 앉는다. 가게는 낡았다. 난로를 피워놓은 것이 산 속에 있는 오래된 별장에라도 온 것 같다. 남자는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신문 중 맨 위에 것을 집어들었다. 작년 날짜가 찍힌 신문이다. 식당은 무엇이든 오래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또 다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젊은 여자는 기껏해야 갓 스무 살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여자 옆에는 서너 살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있다. 아이는 젊다 못해 어린 여자를 엄마라고 부른다. 식당 안 주방에서는 삼십대 중반의 여자가 남자가 주문한 음식을 들고 나왔다. 세 명의 여자가 모두 닮았다. 모녀 사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아이는 도장을 가지고 논다. 식탁 위의 휴지에다 연신 도장을 찍는다. 남자는 자신이 그들을 지나치게 열심히 본다는 생각에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다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한 장 발견했다. 그럴싸한 표구는 없고 테이프로 아무렇게나 붙여진 그림이다. 그림은 식당의 역사만큼 그 곳에 있었던 것 같다.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흡사 먼지도 그림처럼 보인다. 남자의 시선을 끈 그림은 아내의 방에 있던 그림과 같은 것이다. 물론 크기도 작고 낡아 훼손되어 있지만 그것은 분명 처남이 아내에게 준 그림이다. 남자는 그림을 보고 무척 놀랐다. 처남이 남의 작품을 모사했다는 것이다. 남자는 아내가 늘 처남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던 것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유명한 예술가가 그린 그림을 처남이 모사했을 것이다. 남자는 어쩐지 처남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예술가랍시고 우울을 뒤집어쓰고 사는 껍데기 속이 역겨웠다. 남자는 식사를 끝내고 세 여자 중에 늙은 여자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주고 거스름돈으로 담배도 한 갑 샀다. 예술가라는 것들은 놀고먹으면서 자신들이 무엇이라도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운다. 그림 한 장 달랑 그려놓고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해 낸 양 무게 잡는 폼도 싫었다. 특히나 처남은 말 수도 없고 뭔가를 물어보면 대답만 네네 했다. 비위 상하는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처남은 술을 마실 때도 혼자 따라 마시고 말없이 일어나 나가버리곤 했다.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려고 시도해도 처남은 송아지 성님 쳐다보듯 눈만 껌뻑거리곤 했다. 무슨 저런 인간이 다 있나, 할 정도였다. 그렇게 잘난 체를 하더니 남의 그림이나 복사해서 누나에게 자기가 그린 것처럼 선물하다니. 남자는 아내를 만나면 그림에 대해서 말할 참이다. 남자는 늙은 여자에게 그림에 대해 슬쩍 물었다. 늙은 여자는 그를 한 번 올려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민망해졌다. 그래도 작가라도 알아야 아내에게 말할 수 있다. 남자는 끈질기게 다시 물었다. 여자는 “아들이 그린거요” 라고 딱 잘라 말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른 여자들도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남자는 식당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식당의 문을 열고 닫자 “잠자는 방 있습니다.” 라는 푯말이 혼자 달랑거린다.
밖으로 나오자 어둠은 한층 더 깊이 내려앉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 남자는 담배를 피워 물고 차에 시동을 건다. 하늘의 별이 차 지붕위로 떨어져 부서질 듯 반짝인다. 빛은 고요하다. 어둠 앞에서 별은 남자에게 큰 위안을 주지 못한다. 어둠 때문에 별이 더 빛나지만 별이 그에게 길을 안내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남자와는 상관없는 하늘에 관한 것이다. 닿을 수 없는 곳에 머무는 것들이다. 네비게이션은 다시 길을 안내했다. 다시 산길이다. 굽은 길을 돌면 또 영락없는 굽은 길이다. 간간이 집들이 보였지만 남자가 가는 길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런 산 속에 저런 집들이 있다니. 도시의 집들에 비해 산 속에 사는 이들은 참으로 외로울 것 같다. 남자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지만 누군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고 살았다. 누가 사는가, 가 무슨 대수랴, 저렇게 멀리 떨어져 사는 것보다는 훨씬 위안이 된다. 다닥다닥 붙어살게 되면서 옆집에서 들리는 부부싸움이나 아래 위층에서 못을 박는 소리나 들을 뿐,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지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남자는 그것이 오히려 안심이다. 그래도 남자는 저렇게 외따로 떨어져서 사는 이들보다 자신의 삶이 더욱 윤택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남자는 다시 그림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림을 그린 늙은 여자의 아들도 처남처럼 남의 그림을 모사했다는 말인가, 그 그림이 꽤나 유명한 그림인가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따라 그리고 싶은 그런 그림의 종류일 것이다. 남자는 모사를 일삼는 예술가들이 더욱 못마땅해졌다. 그들은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물들이다. 아까 식당의 늙은 여자도 아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랑할 만한 아들이었다면 분명 그의 손을 붙들고 미주알고주알 아들에 대해 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하듯 부엌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 아들은 그의 어머니에게 상처일 가능성이 크다. 남자는 몇 개의 산을 넘어 앞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러나 길은 끝이 없다. 얼마나 갔을까, 네비게이션이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안내말을 한다. 남자는 잘못 들어설 길이 없었다. 지금까지 한 길로만 왔다. 길은 하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계는 잘못 가고 있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남자는 난감하다. 아내가 있다는 절을 검색해서 방향을 새로 설정한다. 그러나 기계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남자는 차를 세운다. 차를 세워 내리고 보니 찬 공기가 스산하다. 산 속의 밤안개가 남자의 몸을 감싸고돈다. 남자는 오늘 안으로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혼자 밤길을 더 달리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하룻밤을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왔던 길로 차를 돌렸다. 한참을 온 것 같은데 돌아가는 길은 가까웠다. 주유소와 식당이 있던 곳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 여관이 있을 것이다. 식당은 불이 꺼져 있고, 주유소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는 졸고 계신다. 남자는 할아버지를 깨워 여관의 위치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읍내로 나가야만 여관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읍내까지 가는 길을 남자는 알아듣지 못한다. 읍내로 향하는 길인지 다시 산속으로 올라가는 길인지 남자는 같은 곳만 빙빙 돌았다. 시계는 자정을 향해 가고 있다. 남자는 주유소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는 주유소의 불도 꺼져 있다. 남자는 하는 수 없이 식당의 문을 두드렸다. 잠자는 방이 있다는 말은 하룻밤 방을 빌려 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이가 어려 보이던 여자가 문을 연다. 부스스한 머리칼에 몸에서는 냄새가 심하게 난다. 아까는 느끼지 못한 냄새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도 모를 사람냄새가 진동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다. 하룻밤 묵을 수 있는 방이 있는가 물으니 여자는 자신을 따라 들어오라고 한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방이 여러 개 나왔다. 민박을 치는 집 같다. 여자가 여러 방 중 가운데 방으로 들어가 보일러 작동하는 법을 알려주고 이불이 있는 위치와 화장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여자는 돈을 받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여자의 방도 복도에 늘어선 방 중에 하나이다. 남자의 방과는 두개의 방을 더 지나친 방이다. 남자는 에이포지 한 장 정도의 창문이 있는 좁고 작은 방에 앉았다. 피곤이 몰려온다. 씻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씻을 수가 없다. 찢어지고 군데군데 흠집 난 벽지 사이에서는 벌레들이 기어 나올 것만 같다. 아무래도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남자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은 받지 않는다. 다시 아내에게 걸어본다. 아내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다. 곰곰이 누군가를 생각해내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어떤 누구도 생각나지 않는다. 남자에게는 그 흔한 첫사랑도 없다. 부모님을 생각해보려다 그만 둔다. 남자는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이지만 집이라는 느낌과 누군가 가까운 곳에 잠들어 있다는 느낌 때문인지 외로움은 덜하다. 화장실에는 좌변기와 함께 세숫대야와 차가운 물이 담겨 있는 고무물통이 어지럽다. 비누를 담은 통도 샴푸도 물때가 끼여 만지기도 싫을 정도이다. 남자는 변기뚜껑을 내리고 화장실의 주변을 둘러보는데 다시 아내 생각이 났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아내에게 보여주자고 또다시 결심한다. 아내는 잘하면 이사 사모님도 될 수 있다. 남부럽지 않을 인생의 장을 열 수 있다. 남자는 자신이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들뜬다. 남자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안내해주던 여자의 방에 불이 켜져 있음을 발견했다. 남자는 말이 하고 싶다. 그러나 여자가 어찌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남자는 잠시 머뭇대다 방 앞에서 서서 헛기침을 한다. 여자가 문을 열었다. 여자의 방에서는 사람 비린내가 확 끼쳐 나왔다. 특유의 사람 비린내, 처음 맡을 때는 그렇게 역겨웠는데 이번에는 그 냄새가 오히려 좋다. 알 수 없는 냄새이다. 여자는 문을 열고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남자를 부르고 있다. 남자는 지갑에서 얼마의 돈을 꺼낸다. 그리고 방 한 쪽에다 그것을 놓았다. 여자가 옷을 벗으니 냄새가 더욱 진동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의 성욕을 더욱 민감하게 자극했다. 여자는 따뜻한 몸을 가지고 있다. 여자의 체온이 남자를 덥혀 주고 있다. 관계가 끝나자 여자는 차분히 일어나 옷을 입는다.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지만 여자가 원하지 않는 눈치이다. 남자는 나가려다말고 그림에 대해서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남편의 그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늙은 여자가 시어머니냐고 물었다. 여자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여자는 오히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는다. 그렇다면 삼십대 여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여자는 같은 처지의 언니뻘 된다고 했다. 그들은 아주 닮았지만 각자 다른 피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들이라고 말한 남자는 늙은 여자의 아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자의 남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남편과 자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식당에서 일을 하고 각자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남자는 알 수 없는 여자들이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던 여자의 냄새가 다시 비위 상하는 냄새로 바뀌었다. 남자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 떠나리라 결심한다.
남자는 다음날 일찍 그 곳을 나왔다. 그 집에서 밥을 먹는 것도 싫었다. 자신과 몸을 섞은 여자의 아들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저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커서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남자는 미처 완전히 오지 않은 아침을 밟으며 아내가 있다는 절로 달려갔다. 그곳은 의외로 찾기가 쉬웠다. 그러나 절이라기보다는 암자처럼 보였다. 오래된 절이라고 했지만 절의 반은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하고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방을 기웃거린다, 스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부엌처럼 보이는 곳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도 사람은 없다. 대신 아내의 그림이 그 곳에 있다. 남자는 제법 놀랐다. 장작을 떼는 아궁이 옆에 그림이 세워져 있다. 누군가 그것을 태울 작정이었음이 분명하다. 남자는 물이 끓고 있는 아궁이 가까이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맑고 투명한 아침햇살을 받아 그림은 선명하다. 그림의 왼쪽 끄트머리에 자화상이라는 글귀가 날카로운 칼로 새겨져 있다. 남자는 처음으로 그림을 자세히 뜯어본다. 짙은 청색의 어둠이 깔린 하늘과 별, 그리고 얼기설기 기운 몸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 그들은 모두 나체이고 한사람 한사람이 특이한 몸짓을 하고 있다. 조각난 유리처럼 투명해 보이는 여자들은 그들끼리 또 다른 자세로 엉겨 있다. 산처럼 혹은 섬처럼 보이는 먼 풍경,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림 속의 작은 것 하나하나가 모두 한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과는 외따로 떨어져 자화상이라는 글자가 박힌 곳. 그곳에도 온 몸이 상처와 기운 흔적이 역력한 남자가 알몸으로 쪼그리고 앉아있다. 아궁이 앞에서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엉덩이를 들었다내리며 남자가 유심히 그를 본다. 순간, 알몸의 남자가 고개를 쳐든다. 어느새 그들의 몸 크기가 같아진다. 그들은 아주 닮아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상당히 오랫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마나
710517-
ekdtlsdl01@hanmail.net
남양주시 호평동 우림필유아파트 106-903
010-4321-0101 031-594-0316
남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남자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의심한다. 그는 지금 자신이 만든 이미지 속에서 서성이고 있다.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다. 남자는 집근처 초등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있다. 몇몇 아이들이 공놀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길을 채비한다. 학교 건물 안에 숨겨져 있던 자동차들이 하나둘 흘러나온다. 놀이터에는 발자국이 수도 없이 찍혀있다. 가을의 마침표라도 찍듯 마지막 남은 낙엽이 흔들리다 떨어진다. 그는 멍하니 앉아 어딘가를 보고 있지만 사실 그는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제 그의 연인이 이별을 선고했다. 여자는 피곤해졌다고 말했다. 작고 통통한 몸매에 쌍꺼풀 없는 눈과 귓불이 유난히 예쁜 여자를 알게 된지도 6개월이 지났다. 이번 여자는 성인 나이트였다. 천장이 우주 정거장 같은 곳, 모두들 미쳐 있는 곳이다. 미치고 싶을 때 남자는 그곳을 찾는다. 자리에 앉자마자 웨이터의 손에 이끌려온 여자는 술에 취해있었다. 여자는 나긋나긋 말도 잘했고 후배와 남자는 짝을 짓고 맥주를 마신 후 밖으로 나왔다. 얼마 후 그들은 그곳을 나와 흘러간 팝송이 흐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카페의 위층에 위치한 모텔로 각자의 파트너와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에 그곳을 따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 왔을 때 남자의 아내와 아들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은 아내를 따라 간 마트에서였다. 남편의 팔에 매달려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들은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마 후 엘리베이터 안에서 술에 취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남자를 알아보았다. 같은 아파트에다 같은 동에 살면서도 서로의 몸을 더듬기 전까지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친해졌다. 한두 번 우연으로 마주치니 각자의 가족들이 있을 때도 종종 부딪쳤다. 오히려 그것이 그들을 자극하곤 했다.
갑작스런 이별의 통고였다. 이유는 없다. 그러나 잡아선 안 된다. 그것은 불문율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알아서도 안 된다. 덕분에 남자는 여자의 이름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깊이 알지 말자고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남자는 여자가 어디에 사는지만 알뿐이다. 사는 곳을 안다고 그녀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함께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온 적도 없다. 함께 거리를 걸었던 적도 없다. 여관으로 각자 들어가고 각자 나오는 것이 다였다. 지나고 나니 남자는 여자가 궁금해졌다. 남편의 직업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왜 그동안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남자는 여자가 떠나고 난 이후에야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사실 남자는 여자의 몸이 벌써 그립다. 잡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을 했고 아파트 주위를 배회하다 생전 가지 않던 초등학교 운동장 벤치까지 찾아갔다.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다시 나이트에 가볼까하는 생각을 하다 그만 두었다. 자신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아파트 입구에서 몇 가피의 담배를 피웠다. 여자를 만날 수는 없었다. 몸이 아프냐고 묻는 아내에게 몸살 기운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7층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혹시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고 싶다.
다음날, 남자의 회사로 몇 장의 사진이 배달되었다. 퀵서비스였다. 남자는 숨이 막혔다. 아내의 이름이 적혀 있는 봉투 속에는 여자의 사진이 들어 있다. 오전에 배달된 사진 덕분에 남자는 종일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부부관계라곤 없었던 가족관계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붙든다 해도 남자는 아내를 책임질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내는 어쩌면 그 여자 말고도 그 앞의 여자들까지 모두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다. 퇴근 시간을 한 시간정도 남겨두고 아내에게 문자메세지가 왔다. 자신은 이미 집을 나왔다고 했다. 목적지는 강원도 영월 어딘가에 있는 작은 절이라고 했다. 서류는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과연 아내는 없다. 아들도 없다. 중학생이 된 아들의 얼굴을 본 것도 언제인지 모르겠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아들은 돌아왔다. 아들은 거실에 앉아 일없이 채널을 돌리고 있는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아들에게 무슨 이야긴가를 해야 할 것도 같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낼 수가 없다. 아내가 없는 집은 쓸쓸하다. 기다리면 아내가 돌아올 것만 같다. 아내는 착하고 순한 여자이다. 잔소리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남자는 착한 아내 옆에만 누우면 아무 짓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남자가 아내에게 아무 짓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부부관계를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내의 몸이 차가웠다. 아내의 몸은 차갑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늘 세운 물고기 같았다. 남자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혼자 많은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아내 앞에서는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돈을 주고 여자를 샀다. 총각시절에도 찾지 않던 창녀에게 참았던 정욕을 쏟아 부었다. 생각은 범죄를 짓고 몸은 따뜻한 쾌락에 빠졌다. 돈을 더 얹어준다는 조건으로 아예 하룻밤을 사기도 했다. 돈을 제법 준 탓인지 여자는 남자를 밤새 안아주었다. 남자는 창녀를 생각하며 다시 아내와 잠자리를 시도했다. 그러나 아내의 피부가 닿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몸은 쪼그라들었다.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의 생각일 뿐 다시 아내 몸에 손을 대는 일은 없어졌다. 이미 삼년은 더 된 일이다. 그러나 아내는 아내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화는 조금씩 사라져갔다. 아내가 남자 몰래 다른 이를 끌어 들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질투를 불러일으킨 반면 남자의 죄의식을 삭감시켜주었다. 그런데 이번 여자의 사진과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는 것은 남자와 그만 살고 싶다는 아내의 의지이다. 남자는 아내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쇼파에서 밤을 보냈다. 아들과 아침을 대충 지어 먹고 출근을 했다. 출근길 내내 그는 이혼에 대해서 생각했다. 위자료와 또한 주위 사람들의 입방아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자신이 아내에게 불능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그는 괴로웠다. 그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남자는 다짐처럼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이혼에 합당한 어떤 이유라도 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불능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주변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제멋대로 지어져서 떠돌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언짢다. 어제 저녁 식탁위에 놓여있던 이혼서류를 들여다볼 때만 해도 아내에게 미안했던 마음이 아침이 되자 남자는 자신이 정말 불행한 사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버렸다. 자신이 아내와 같은 여자를 만나지만 않았던들 아내 앞에서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으로 세월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남자는 대기업에서 한 팀의 팀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몇 년 후에는 임원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집안 자체가 한 나라의 70프로 이상 헤게머니를 쥐고 있는 유명대 출신이다. 탄력 있는 선후배를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대를 잇고 있다. 남자는 자신의 환경에 매우 만족한다. 그러나 이혼을 하면 지금까지 닦아온 그의 사회적인 것들은 한번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사회라는 것은 관습에 관한한 용서에 둔감하다. 입사 동기 중, 진급에서 몇 번이나 누락한 이들은 남자의 불행을 진심으로 기뻐할 것이다. 남자는 아내의 마음이나 생각이 궁금하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잘 견뎌주었던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을 봐서 한 결혼이지만 몇 년 동안 알콩달콩 잘 살지 않았던가, 남자는 아내가 싫지 않다. 사랑은 아니라도 아내와 사는 동안 나쁘지 않았다. 누나처럼 여동생처럼 살면 되지 않을까, 남자는 혼자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이혼은 하면 안 된다. 아들에게도 그것은 못할 짓이다. 남자는 이혼만은 막아야한다고 결심한다. 아내를 찾아 설득하기로 한다. 마지막까지 안 된다고 하면 호적만 그대로 두자고 해야겠다.
토요일 오후 팀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월요일까지 월차를 냈다. 아내를 만나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 볼 참이다. 오랫동안 아내를 안아보지 못했지만 공기도 좋고 물도 좋다는 강원도에 가서 아내를 보면 남자 몸이 달라질 지도 모른다. 남자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부정은 부정을 낳고 긍정은 긍정을 낳는다했다. 어쩌면 아내는 이번 여자만 아는 지도 모른다. 남자란 한두 번 정도 바람을 피울 수도 있다는 역사적 관습적 침묵에 대해 말해보자. 아내만 이해 해 준다면 다시 아내를 안아보리라. 남자는 몇 번이나 생각과 마음을 정돈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여행용 가방을 챙겼다. 아내가 하던 일이라 남자는 속옷이나 양말 따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 한다. 그는 서재에서 주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안방이라는 아내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 낯설다. 아내의 방에는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다. 장롱의 문을 열자 남자의 옷이 가지런하다. 속옷도 장롱의 작은 서랍에 정리되어 있다. 평소에 그가 입던 옷이지만 아내가 없으니 옷조차도 낯설다. 짠한 마음이 폭포수처럼 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는 다시 한번 더 결심을 굳혔다. 정말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내의 손을 붙들고 병원이라도 찾아가야겠다고 그는 내심 비장한 각오까지 한다. 남자는 그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상에 젖는다. 화장대에는 아내가 없던 며칠 동안 미세한 먼지가 앉았다. 남자는 아내의 서랍에서 오래된 결혼사진을 발견했다. 결혼사진을 보자 마음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결혼사진 속의 부부는 어색한 표정을 감출 수 없다. 남자는 차렷 자세이고 아내도 차렷 자세에 팔만 남자의 팔에 끼워져 있다. 그는 여행용 가방 속에다 결혼사진을 넣었다. 여차하면 아내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쓰리라 결심한다. 그러다 아내와 아내의 남동생 사진을 보게 되었다. 한없이 우울해 보이는 남동생, 아내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다. 남매는 다른 이들보다 우애가 좋다. 이제 혈육이라고는 남동생이 전부이다. 아내는 남동생을 각별히 챙겨 준다. 최근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은 남동생을 아내가 보살펴 주고 있다. 아내의 남동생은 가까운 곳에 산다. 그러나 남자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아내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 그들은 더 멀어졌다. 그러나 아내는 남자 몰래 동생의 생활비도 보태고 있다. 남동생은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미대를 나오기는 했지만 이렇다할 대내외적인 성과도 없이 남동생은 그림만 그린다. 남자도 그가 그린 그림을 몇 번 보았다. 그러나 무엇을 그렸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내 밖에 없다. 아내는 동생이 그린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대번에 알았다. 그러나 아내도 추상화의 형태를 띤 동생의 그림에 대해서 설명하는 법이 없다. 아내는 성물을 보듯 그림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듯 했다. 남자의 집에도 동생의 그림이 한 점 있다. 풍경화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동물의 그림 같기도 한, 벗은 사람들이 야외에서 목욕을 하는 것 같기도 한, 내용을 알 수 없는 그림이지만 아내는 그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사실 남자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내는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겨울방학에 그림을 집으로 가져왔다. 그림은 그들이 함께 썼던 침대 발치에 걸려있다. 크기도 어지간한 대문짝만한 그림이 눈을 뜰 때도 감을 때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아내가 유독 좋아하는 그림인지라 또한 아내의 부모님들이 한꺼번에 돌아가시고 난 이후, 우울해 있던 아내라서 남자는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못했다. 남자가 아내의 방을 나오고 난 이후에도 그림은 항상 그 자리에 걸려 있었다. 그림을 집에다 들여놓은 얼마간 하루의 시작과 끝을 그림과 함께 해야 했지만 남자는 그림의 내용을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는 그 그림을 자세히 본 적도 없다.
사진 속의 아내와 남동생의 표정은 슬퍼보였다. 남자는 괜한 감정에 휩쓸렸다. 아내는 웃는 듯 했지만 울고 있다. 남동생도 비슷한 표정이다. 둘은 나란히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들이 보는 대상은 카메라가 아닌 다른 세상을 향한 것 같다. 꿈꾸는 듯한 눈동자가 아주 닮아 있다. 그들은 한 뱃속에서 나온 남매임이 확실한 듯 아주 닮아 있다. 남매가 닮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남자는 그 사진이 못 마땅하다. 남자의 눈에 그들은 영혼까지 닮아보였던 것이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처남이 그린 그림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 언제 사라졌는지 남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내가 집을 나가면서 가지고 나간 것인지, 아니면 남자가 아내의 방에서 나간 이후 그림이 사라졌는지는 아내만이 알고 있다. 남자는 아내의 방에서 잠시 창 밖을 바라본다. 아파트들이 나란히 줄 서 있음으로 다른 이의 거실과 안방이 보인다. 낮이라 자세히 볼 수 없지만 밤이 되면 그들은 커튼으로 그들의 세계를 가릴 것이다.
아들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아들은 오지 않았다. 남자는 아들에게 휴대전화의 문자메세지로 엄마를 찾으러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온다. 급한 일이 생기면 전화하라는 내용도 포함된다. 아들은 남자에게 전화를 거는 법이 없다. 아들의 휴대전화에 남자의 전화번호가 입력되어 있는지 의심스럽다. 남자는 자신이 가정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곤 돈을 벌어다 통장에 채워주는 일 밖에 없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시내를 빠져나오는데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밀리고 밀리는 차 안에서 남자는 쉴 사이 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차 안을 맴돌기만 했다. 가족들이 탄 자가용들이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히히덕거리는 연인들이나 아이들이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남자 마음은 더욱 울적했다.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처음이란 것이 결혼식을 하던 처음 그날인지 아니면 아내의 방을 나오기 직전인지, 그것이 아니면 자신과 하룻밤을 자 줄 수 있는 여자들을 찾아 나서기 전인지 남자는 모른다. 그들의 가족에게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하다 남자는 아내를 처음 만나던 그 시각으로 시계 바늘을 옮겼다. 남자는 감상에 젖어 들었다. 아내의 순결한 몸을 처음 더듬을 때를 생각하자 몸이 발기한다. 다시 아내를 안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남자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부담이었다. 왜인지는 남자 자신도 알 수가 없다. 남자는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러나 아내가 없는 집은 쓸쓸하다. 남자는 자신이 아내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은 한층 더 수위를 높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워두고 네비게이션으로 아내가 머물고 있다고 절의 위치를 조회하고 기계를 작동 시켰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다. 자신이 찾으러 가고 있다는 문자메세지를 남기고 다시 운전석에 앉는다. 고속도로에서도 정체가 심하다. 국도로 빠지는 길을 택한다.
겨울의 밤은 쉽게 내린다. 저녁노을이 걸려 있는 산을 바라보면서 남자는 자신의 삶도 저렇게 지는 해의 마지막 부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둠은 남자가 인식하기도 전에 내렸다. 어스름에서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시각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국도변의 풍경도 사라졌다. 어둠이 이렇게 쉽게 오는지 예전에 미처 몰랐다. 국도변의 가로등은 대부분 꺼져 있다. 켜져 있는 것은 흐리고 어두워 남자의 길을 밝혀주지 못한다. 남자는 어둠에 익숙지 않다. 그는 빛에 익숙해진 사람이다. 남자가 걸었던 밤거리는 낮보다 밝았다. 국도로 처음 길을 낼 때는 몇 대의 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렸다. 그러나 이제 밖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푸른빛을 반짝이는 시계는 고작 6시 30분이다. 그 시간이면 저녁 중에서도 초저녁이다. 평소에는 근무를 마치지도 않을 시간이다. 하지만 도시를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은 소리 없이 남자를 덮쳤다. 남자는 혼자라는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속도를 높이자 차가 붕 떠서 달리는 것 같다. 얼마 후 뒤에서 희미한 불빛이 다가온다. 남자는 속력을 낮춘다. 길동무가 생긴 것 같아 안심이 된다. 뒤에서 따라오는 차는 작은 트럭이다. 덜컥대는 소리가 남자의 차안까지 스민다. 그러나 남자는 소리가 반갑다. 트럭을 앞세워주기까지 했다. 트럭에는 소가 한 마리 서 있다. 소는 크고 맑은 눈망울을 끔뻑인다. 목에는 방울이 하나 달려 있다. 어미 소는 아닌 듯하다. 실려 가는 소를 보자 남자는 비로소 자신이 시골길을 달리고 있구나 생각한다. 서울에서 자란 남자는 소에 익숙하지 않다. 사실 소고기에만 익숙해져 있는 그였지만 소를 보자 자신의 고향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남자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 익숙한 것을 찾는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 소꼬리를 따라 가고 있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의 엉덩이를 쫓아간다. 소는 가끔 머리를 흔들어 방울 소리를 내곤 한다. 어둠 속에서 무서운 속도로 자가용이 한 대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남자의 차와 트럭을 앞질렀다. 산 속의 커브길이다. 남자와 소는 함께 놀랐다. 바람같이 나타난 차가 전속력을 다해 그의 차를 앞질러 가는 동안 어둠은 잠시 흔들렸다. 남자는 허옇고 빠른 바람이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고 또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남자는 어둠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일만 반복한다. 네비게이션의 목소리가 방향을 표시하자 세 갈래의 길이 나타난다. 돌고 돌던 산을 다 내려온 듯하다. 왔던 길에서 반만큼 더 가면 될 듯하다. 방울 매단 소는 옆길로 지나갔다. 남자는 소와 반대방향의 길로 가야 한다. 세 갈래 길의 안쪽에는 주유와 식당이 있다. 뼈다귀해장국이라는 간판 불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가 있어 뼈귀라는 글자만 보인다. 남자는 주유소에 들러 차에 기름을 채우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오래된 집이다. 늙은 여자가 일어나 남자를 맞이한다. 메뉴는 뼈다귀해장국 하나뿐이다. 남자는 주문과 동시에 자리에 앉는다. 가게는 낡았다. 난로를 피워놓은 것이 산 속에 있는 오래된 별장에라도 온 것 같다. 남자는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신문 중 맨 위에 것을 집어들었다. 작년 날짜가 찍힌 신문이다. 식당은 무엇이든 오래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또 다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젊은 여자는 기껏해야 갓 스무 살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여자 옆에는 서너 살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있다. 아이는 젊다 못해 어린 여자를 엄마라고 부른다. 식당 안 주방에서는 삼십대 중반의 여자가 남자가 주문한 음식을 들고 나왔다. 세 명의 여자가 모두 닮았다. 모녀 사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아이는 도장을 가지고 논다. 식탁 위의 휴지에다 연신 도장을 찍는다. 남자는 자신이 그들을 지나치게 열심히 본다는 생각에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다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한 장 발견했다. 그럴싸한 표구는 없고 테이프로 아무렇게나 붙여진 그림이다. 그림은 식당의 역사만큼 그 곳에 있었던 것 같다.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흡사 먼지도 그림처럼 보인다. 남자의 시선을 끈 그림은 아내의 방에 있던 그림과 같은 것이다. 물론 크기도 작고 낡아 훼손되어 있지만 그것은 분명 처남이 아내에게 준 그림이다. 남자는 그림을 보고 무척 놀랐다. 처남이 남의 작품을 모사했다는 것이다. 남자는 아내가 늘 처남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던 것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유명한 예술가가 그린 그림을 처남이 모사했을 것이다. 남자는 어쩐지 처남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예술가랍시고 우울을 뒤집어쓰고 사는 껍데기 속이 역겨웠다. 남자는 식사를 끝내고 세 여자 중에 늙은 여자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주고 거스름돈으로 담배도 한 갑 샀다. 예술가라는 것들은 놀고먹으면서 자신들이 무엇이라도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운다. 그림 한 장 달랑 그려놓고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해 낸 양 무게 잡는 폼도 싫었다. 특히나 처남은 말 수도 없고 뭔가를 물어보면 대답만 네네 했다. 비위 상하는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처남은 술을 마실 때도 혼자 따라 마시고 말없이 일어나 나가버리곤 했다.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려고 시도해도 처남은 송아지 성님 쳐다보듯 눈만 껌뻑거리곤 했다. 무슨 저런 인간이 다 있나, 할 정도였다. 그렇게 잘난 체를 하더니 남의 그림이나 복사해서 누나에게 자기가 그린 것처럼 선물하다니. 남자는 아내를 만나면 그림에 대해서 말할 참이다. 남자는 늙은 여자에게 그림에 대해 슬쩍 물었다. 늙은 여자는 그를 한 번 올려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민망해졌다. 그래도 작가라도 알아야 아내에게 말할 수 있다. 남자는 끈질기게 다시 물었다. 여자는 “아들이 그린거요” 라고 딱 잘라 말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른 여자들도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남자는 식당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식당의 문을 열고 닫자 “잠자는 방 있습니다.” 라는 푯말이 혼자 달랑거린다.
밖으로 나오자 어둠은 한층 더 깊이 내려앉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 남자는 담배를 피워 물고 차에 시동을 건다. 하늘의 별이 차 지붕위로 떨어져 부서질 듯 반짝인다. 빛은 고요하다. 어둠 앞에서 별은 남자에게 큰 위안을 주지 못한다. 어둠 때문에 별이 더 빛나지만 별이 그에게 길을 안내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남자와는 상관없는 하늘에 관한 것이다. 닿을 수 없는 곳에 머무는 것들이다. 네비게이션은 다시 길을 안내했다. 다시 산길이다. 굽은 길을 돌면 또 영락없는 굽은 길이다. 간간이 집들이 보였지만 남자가 가는 길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런 산 속에 저런 집들이 있다니. 도시의 집들에 비해 산 속에 사는 이들은 참으로 외로울 것 같다. 남자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지만 누군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고 살았다. 누가 사는가, 가 무슨 대수랴, 저렇게 멀리 떨어져 사는 것보다는 훨씬 위안이 된다. 다닥다닥 붙어살게 되면서 옆집에서 들리는 부부싸움이나 아래 위층에서 못을 박는 소리나 들을 뿐,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지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남자는 그것이 오히려 안심이다. 그래도 남자는 저렇게 외따로 떨어져서 사는 이들보다 자신의 삶이 더욱 윤택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남자는 다시 그림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림을 그린 늙은 여자의 아들도 처남처럼 남의 그림을 모사했다는 말인가, 그 그림이 꽤나 유명한 그림인가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따라 그리고 싶은 그런 그림의 종류일 것이다. 남자는 모사를 일삼는 예술가들이 더욱 못마땅해졌다. 그들은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물들이다. 아까 식당의 늙은 여자도 아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랑할 만한 아들이었다면 분명 그의 손을 붙들고 미주알고주알 아들에 대해 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하듯 부엌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 아들은 그의 어머니에게 상처일 가능성이 크다. 남자는 몇 개의 산을 넘어 앞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러나 길은 끝이 없다. 얼마나 갔을까, 네비게이션이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안내말을 한다. 남자는 잘못 들어설 길이 없었다. 지금까지 한 길로만 왔다. 길은 하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계는 잘못 가고 있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남자는 난감하다. 아내가 있다는 절을 검색해서 방향을 새로 설정한다. 그러나 기계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남자는 차를 세운다. 차를 세워 내리고 보니 찬 공기가 스산하다. 산 속의 밤안개가 남자의 몸을 감싸고돈다. 남자는 오늘 안으로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혼자 밤길을 더 달리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하룻밤을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왔던 길로 차를 돌렸다. 한참을 온 것 같은데 돌아가는 길은 가까웠다. 주유소와 식당이 있던 곳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 여관이 있을 것이다. 식당은 불이 꺼져 있고, 주유소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는 졸고 계신다. 남자는 할아버지를 깨워 여관의 위치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읍내로 나가야만 여관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읍내까지 가는 길을 남자는 알아듣지 못한다. 읍내로 향하는 길인지 다시 산속으로 올라가는 길인지 남자는 같은 곳만 빙빙 돌았다. 시계는 자정을 향해 가고 있다. 남자는 주유소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는 주유소의 불도 꺼져 있다. 남자는 하는 수 없이 식당의 문을 두드렸다. 잠자는 방이 있다는 말은 하룻밤 방을 빌려 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이가 어려 보이던 여자가 문을 연다. 부스스한 머리칼에 몸에서는 냄새가 심하게 난다. 아까는 느끼지 못한 냄새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도 모를 사람냄새가 진동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다. 하룻밤 묵을 수 있는 방이 있는가 물으니 여자는 자신을 따라 들어오라고 한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방이 여러 개 나왔다. 민박을 치는 집 같다. 여자가 여러 방 중 가운데 방으로 들어가 보일러 작동하는 법을 알려주고 이불이 있는 위치와 화장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여자는 돈을 받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여자의 방도 복도에 늘어선 방 중에 하나이다. 남자의 방과는 두개의 방을 더 지나친 방이다. 남자는 에이포지 한 장 정도의 창문이 있는 좁고 작은 방에 앉았다. 피곤이 몰려온다. 씻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씻을 수가 없다. 찢어지고 군데군데 흠집 난 벽지 사이에서는 벌레들이 기어 나올 것만 같다. 아무래도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남자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은 받지 않는다. 다시 아내에게 걸어본다. 아내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다. 곰곰이 누군가를 생각해내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어떤 누구도 생각나지 않는다. 남자에게는 그 흔한 첫사랑도 없다. 부모님을 생각해보려다 그만 둔다. 남자는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이지만 집이라는 느낌과 누군가 가까운 곳에 잠들어 있다는 느낌 때문인지 외로움은 덜하다. 화장실에는 좌변기와 함께 세숫대야와 차가운 물이 담겨 있는 고무물통이 어지럽다. 비누를 담은 통도 샴푸도 물때가 끼여 만지기도 싫을 정도이다. 남자는 변기뚜껑을 내리고 화장실의 주변을 둘러보는데 다시 아내 생각이 났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아내에게 보여주자고 또다시 결심한다. 아내는 잘하면 이사 사모님도 될 수 있다. 남부럽지 않을 인생의 장을 열 수 있다. 남자는 자신이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들뜬다. 남자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안내해주던 여자의 방에 불이 켜져 있음을 발견했다. 남자는 말이 하고 싶다. 그러나 여자가 어찌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남자는 잠시 머뭇대다 방 앞에서 서서 헛기침을 한다. 여자가 문을 열었다. 여자의 방에서는 사람 비린내가 확 끼쳐 나왔다. 특유의 사람 비린내, 처음 맡을 때는 그렇게 역겨웠는데 이번에는 그 냄새가 오히려 좋다. 알 수 없는 냄새이다. 여자는 문을 열고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남자를 부르고 있다. 남자는 지갑에서 얼마의 돈을 꺼낸다. 그리고 방 한 쪽에다 그것을 놓았다. 여자가 옷을 벗으니 냄새가 더욱 진동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의 성욕을 더욱 민감하게 자극했다. 여자는 따뜻한 몸을 가지고 있다. 여자의 체온이 남자를 덥혀 주고 있다. 관계가 끝나자 여자는 차분히 일어나 옷을 입는다.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지만 여자가 원하지 않는 눈치이다. 남자는 나가려다말고 그림에 대해서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남편의 그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늙은 여자가 시어머니냐고 물었다. 여자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여자는 오히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는다. 그렇다면 삼십대 여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여자는 같은 처지의 언니뻘 된다고 했다. 그들은 아주 닮았지만 각자 다른 피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들이라고 말한 남자는 늙은 여자의 아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자의 남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남편과 자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식당에서 일을 하고 각자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남자는 알 수 없는 여자들이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던 여자의 냄새가 다시 비위 상하는 냄새로 바뀌었다. 남자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 떠나리라 결심한다.
남자는 다음날 일찍 그 곳을 나왔다. 그 집에서 밥을 먹는 것도 싫었다. 자신과 몸을 섞은 여자의 아들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저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커서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남자는 미처 완전히 오지 않은 아침을 밟으며 아내가 있다는 절로 달려갔다. 그곳은 의외로 찾기가 쉬웠다. 그러나 절이라기보다는 암자처럼 보였다. 오래된 절이라고 했지만 절의 반은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하고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방을 기웃거린다, 스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부엌처럼 보이는 곳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도 사람은 없다. 대신 아내의 그림이 그 곳에 있다. 남자는 제법 놀랐다. 장작을 떼는 아궁이 옆에 그림이 세워져 있다. 누군가 그것을 태울 작정이었음이 분명하다. 남자는 물이 끓고 있는 아궁이 가까이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맑고 투명한 아침햇살을 받아 그림은 선명하다. 그림의 왼쪽 끄트머리에 자화상이라는 글귀가 날카로운 칼로 새겨져 있다. 남자는 처음으로 그림을 자세히 뜯어본다. 짙은 청색의 어둠이 깔린 하늘과 별, 그리고 얼기설기 기운 몸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 그들은 모두 나체이고 한사람 한사람이 특이한 몸짓을 하고 있다. 조각난 유리처럼 투명해 보이는 여자들은 그들끼리 또 다른 자세로 엉겨 있다. 산처럼 혹은 섬처럼 보이는 먼 풍경,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림 속의 작은 것 하나하나가 모두 한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과는 외따로 떨어져 자화상이라는 글자가 박힌 곳. 그곳에도 온 몸이 상처와 기운 흔적이 역력한 남자가 알몸으로 쪼그리고 앉아있다. 아궁이 앞에서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엉덩이를 들었다내리며 남자가 유심히 그를 본다. 순간, 알몸의 남자가 고개를 쳐든다. 어느새 그들의 몸 크기가 같아진다. 그들은 아주 닮아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상당히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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