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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단편/오래 된 영혼/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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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87회 작성일 06-07-20 14:11

본문

<단편소설>

오래된 영혼

마나
710517-
ekdtlsdl01@hanmail.net
남양주시 호평동 우림필유아파트 106동 903호
010-4321-0101   031-594-0316





손목시계는 정지되어 있다. 언젠가부터 시계는 손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한다는 것. 시계의 초침은 쉬지 않고 움직이지만 결코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장도 시계의 초침 따라 움직이지만, 분침이나 시침은 움직이는 법이 없다. 정지된 시간 속의 나는 무중력 상태의 우주에서 붕붕 떠다닌다. 중력의 힘이 나를 밀어내고 난 어느 날 이후, 어느 날이란 말이 조금은 가상적이긴 하지만 내게 있어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이고 따라서 이제는 믿기로 했다. 우주 속에서의 혼돈.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 이라는 것. 나는 결국 되돌아 왔다. 사실 내가 떠난 적이 있었던 사람인지 그 부분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고민을 했지만, 주위의 사람들의 행동이나 표정이나 말투로 미루어 한시도 떠난 적이 없는 듯 하다.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 내 삶이 결정되는 일이 다반사이므로 자신보다 주위 사람들을 더 믿고 사는 지도 모를 일이다. 답이란 것이 있을 것 같지 않은 혼돈의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 분침과 시침이 움직이지 않음과 잠시도 쉬지 않는 맥박의 울림으로 인해 중심에서 기다란 선을 들이밀며 움직이는 초침만이 알 것이다. 일어나니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믿지는 않는다. 지금의 현실이 꿈인지 아니면 가끔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이 꿈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나조차도 모르는 공간에서 밀려난 순간이 있었음도 틀림없듯이.

안개로 둘러싸인 아침이다. 아니 이런 시간은 새벽이라고 말해야 한다. 옅은 빛줄기가 베란다의 커다란 유리문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것이 감은 눈으로 보인다. 어젯밤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매일 아침 눈을 뜨지 못해 이불과 바닥을 사이에 두고 열애를 하던 것이 습관인 내가 오늘은 깨우는 사람이 없는데도 저절로 눈이 떠진다. 속이 쓰리고 신물이 올라온다. 어제 사둔 생수병이 빈소주병과 함께 거실 바닥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생수병 하나를 집어 들고 동쪽으로 나 있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지금 나는 이곳이 조금 낯설다. 아직도 짐은 트렁크 속에 있다. 출장을 간다고 나왔으니 별다른 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벌의 속옷과 가벼운 평상복, 간단한 취사도구, 등이 아내의 성격에 맞게 챙겨져 있을 것이다.
아이와 아내에게는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을 내기엔 조금 더 미안한 마음이들지만 나로서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나는 어제의 시간으로 그들과 살기를 포기했다. 아니 그들로부터 내 삶을 돌려받았다,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은 아니었지만 지금 와서 책임의 근원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아내는 평범한 주부이고 내 피를 이어받은 아이도 내 발목을 잡는 도구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두고자 하는 것은 내가 집을 나온 것이 그들에게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다. 결혼생활의 허점이나 감당 못할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도 아니다. 단지,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일탈이다. 내 삶에서의 일탈, 다른 말로 하자면 가출인 셈이다. 가출, 사춘기 때도 한 번 해 보지 않았던 이 가출 사건은 정체성을 찾는 문제이고 또 내 자신의 본연의 문제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나니 조금 위안도 되고 자신이 대단하게도 느껴진다. 하지만 부모님에게는 다소 충격적일 것이다. 다 커서 이놈의 자식이 뒤통수를 때리는군, 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고 아내와 아이도 이 일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재앙처럼 느껴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히 헝클어져버렸다고 느끼는 순간에 길을 찾게 마련이니까. 나란 존재는 차츰 잊혀 질지도 모른다. 이부분에서 조금의 위안과 서운함이 교차를 한다. 아니다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자. 냉정해야 할 때는 정확하게 냉정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므로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나를 잊어야 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결정한 일이다. 누구와도 의논한 일 없이 스스로 결정한 대단한 일이다. 나는 한 남자로서 한 여자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 죽도록 사랑한다, 라는 말이 누구의 대사이며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나만의 언어이다. 나는 그녀와 살고 싶다. 그것 말고는 어떤 것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내 사랑에 대해서 누구도 함부로 말할 자격이 없다. 어차피 내 인생이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관객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녀는 오늘 도착하기로 되어 있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 인적이 드문  곳에 이런 빌라가 있다는 것. 어쩌면 이 집은 우리를 위해서 신이 내려준 선물일 지도 모른다. 우리의 새 인생을 살아가기에는 더없이 안성맞춤이다. 사층 건물인 빌라는 어제 하룻밤을 제외하고도 몇 번은 다녀갔다. 주인은 전화로만 대화를 나눴고 등기소에서 집의 소유자도 확인했으며 주인은 친절하게도 선금을 걸기도 전에 전세 계약서를 작성해 이곳의 주소로 보내주었다.
계약서를 받아 든 그날도 우리는 이곳 베란다에서 바다와 태양을 관객으로 사랑을 나눴다. 그녀는 단둘이 남은 공간이면 어디서든 옷을 벗었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는 것조차 그녀는 답답해했다. 내 눈에는 그녀가 옷을 입은 모습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이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하얀 살결에 봉긋한 가슴, 껴안으면 품에 꽉 끼는 잘록한 허리, 언제나 생글거리는 눈매, 검고 탄력 있는 머릿결, 그녀가 내 시야에서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흔들며 욕실을 드나드는 모습이나 싱크대에서 양치를 하는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가슴 벅찬 사건이다.
그날 우리가 이곳에서 나눈 사랑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결정 된 듯한 안도감과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면서도 가득한 희열감, 거실에서 베란다로 방으로 숨바꼭질을 하듯 나는 그녀의 몸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기 싫어 안달했다. 겨울 찬 바람이 거침없이 살의 결을 파고들었지만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우리는 세상의 처음으로 돌아가 소리를 질러가면서 섹스를 했다.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였다.
우리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언제나 그렇게 살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가슴을 어찌 할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온전히 내 여자가 되는 것이고 나는 그녀만의 남자가 되는 것이다. 오직 머릿속과 가슴속에는 이 그림만이 있을 뿐이다.
여태까지 나는 내 생각과 타인이 할 수 있는 생각을 동시에 해야 했다. 사람들과의 관계란 것이 그런 것이라고 누가 일러준 적은 없지만 스스로 터득한 상대의 심리읽기, 그건 살아내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어쩌면 그녀와 나는 원래가 한 몸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몸이 내게 꼭 맞는다는 느낌, 하지만 우린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의 사건일 것이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조상의 죄로 인해 하나의 몸이 둘로 갈라져 살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내 생각이 그녀의 생각일 것이므로. 신은 내게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축복을 허락 하신 것이다.

생수를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아직도 안개로 뒤덮인 뿌연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와 하늘은 구분되지 않아 보인다. 검고 희미한 해변에는 갓 스물을 넘겼을까 싶은 어린여자가 빨간 모자가 달린 하프코트를 입고 해안선을 따라 걷고 있다. 바닷물에 발이 젖을까 싶어 그런지 가볍게 뛰는 모습이 꽤나 귀엽고 상쾌하게 느껴진다. 뒤로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데 두 손을 호주머니 속에 깊이 넣어둔 채 폴짝대는 뒷모습이 마냥 어린애 같다. 저 어린여자의 모습에서 언뜻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처음 이 해변을 찾았을 때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며 또 다른 세상이라고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젖어 있었는데 바다를 무척 사랑하지만 발을 담글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바다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세상이며 꿈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휘감을 파도와 바위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설명을 한 것 같은데 꼭 죽으러 바다에 온 사람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는 슬픔에 젖어 있었고 말끝은 흐려져 불분명했다. 허옇게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파도가 덮치기 전에 자기가 먼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도 했던 것 같다. 나는 도통 그 말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고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내가 무슨 재주로 이해하겠는가, 평소 나는 논리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했으므로 못 알아듣는다, 혹은 신뢰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군, 이라는 표정조차도 지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와 나란히 서서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그녀와의 미래를 꿈꾸면서 자꾸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한참을 바다 위에다 우리들의 집을 짓는 상상을 했다. 그녀와 나는 조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데, 그리고 남자라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이해하는 척 해야 한다. 그때 바다는 꽤나 멋있었다. 검푸른 색이 일렁이다 또 어찌 보면 아주 엷은 하늘빛 같기도 했다. 그리고 솔직히 그녀의 말이 중요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종종 뜬금없는 소리를 자주 하는 편이어서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무슨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옆에 있는 한 하늘이 두 조각이 난다해도 그녀가 스스로 바다에 들어가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고, 바다가 그녀를 삼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를 언제까지나 지켜줄 자신도 있다. 그녀는 나만을 믿으면 된다.
이 말을 그녀가 오면 꼭 해 줘야겠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바다는 어느새 환해졌다. 조금 전 그 어린여자는 아직도 해안선을 따라 걷고 있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듯 우두커니 서서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다가 또다시 폴짝대기도 하는 모습이 눈에 자꾸 밟힌다. 뒷모습만 보이다가 설핏 옆모습이 나의 그녀와 아주 닮았다. 몸을 베란다 창틀에 매달아 그녀의 앞모습을 보려고 하지만 여간해서 보이질 않는다. 어린여자의 얼굴 윤곽선이나 웃는 듯한 표정이 영락없이 그녀와 흡사하다. 하지만 헤어스타일이나 마음으로 가늠할 수 있는 나이가 그녀일 리가 없다. 저 여자는 아무리 봐도 스무 살을 넘지 않을 것이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서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그녀 일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가 저 정도의 나이였다면 아주 그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생김새나 몸놀림이 아주 닮았다. 아, 잠깐 그녀가 몸을 돌려 나와 눈을 맞추며 웃는 듯한, 아니 약간 일그러지는 듯한, 표정이다. 아니, 아니다, 그녀 일 리가 없는데 왜 나는 자꾸 그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이런 느낌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다. 바다 저 멀리서 커다란 기둥 같은 것이 일어서는 듯 하더니 곧바로 허리를 꺾으며 달려온다. 해안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한 맹렬한 속도로 달려드는 저, 저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볼 여력도 없이 저 저걸 어떡해, 뭐라고 고함을 지를 여유도 없이 너무나 순식간에 거대는 파도는 빠른 속도로 바다를 반으로 잘라 그 가운뎃길로 갑작스럽게 달려든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베란다 문을 닫고 방으로 숨어들었다.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숨을 몰아쉬는데 가슴에 커다란 벽시계를 달아 놓은 듯 쿵쾅대며 심장이 뛰고 온 몸에는 땀이 배여 난다. 자리를 잡고 앉고 나서야 아차, 그 빨간 코트 여자가 생각이 났다. 조금 전까지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녀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니 일이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걸까,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밖은 어느새 고요하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될 것만 같다. 다리를 모으고 온 몸을 꽉 끌어안은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온 몸이 굳어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좀체 변화가 없다. 밖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하다. 아니다 조용한 것이 아니라 닫힌 문 틈 사이로 간간히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바다 냄새가 슬며시 코의 감각을 자극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듯 평온하다. 천천히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열어본다. 소금기 잔뜩 묻은 바다냄새가 얼굴에 확 끼친다. 파도의 높이가 약간 높아진 듯하지만 별다른 조짐은 없다. 찬찬히 바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별반 바뀐 것이 없다. 무엇인가 분명 왔다간 것 같은데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느새 붉은 기운이 바다 주변을 비추고 주위는 제법 붉은 빛이 안개를 걷어 두고 작은 사물하나하나 비추고 있다. 이제 온전한 아침의 바다와 하늘이 있을 뿐이다. 그 높은 파도의 기둥이 왔다간 흔적은 어디를 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허리를 굽혀가며 조급하게 빨간 코트 여자를 찾는다. 해안선은 제법 길지만 아무도 없는 바닷가이고 빨간 코트라서 쉽게 눈에 띠기도 할 텐데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그녀의 눈빛이 내게 머물었던 기억도 이상하리만큼 꿈처럼 느껴진다. 단지 몇 분이 지났을 뿐이다. 손목의 시계를 쳐다보는데, 단 한번도 멈춘 적이 없는 시계는 멈추어 있다. 허기사 시계바늘이 잘 가고 있다고 해도 몇 분이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시계는 8시에 멈추어있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아마도 어제 저녁 8시일 것 같다. 몸을 더 깊이 내밀어 천천히 처음부터 다시 주변을 둘러보아도 여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뭔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혼란스러워 진다. 평온한 바다도 혼란이고 저 하늘빛도 혼란이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사방은 방금 전, 파도가 밀어 닥칠 때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내가 눈을 감았을 수도 있었다, 손쳐도 빨간 코트의 어린여자는 분명 머리를 뒤로 묶고 모자가 달린 하프코트를 입은 채 연신 폴짝대고 있었다. 그건 분명하다. 그 모습이 꽤나 인상이 깊어서 한참을 바라보았으므로, 그런데 그 마지막 모습 나의 그녀와 흡사해 보이던 옆모습이랄까, 슬쩍 뒤를 돌아보면서 나를 보는 듯한 눈빛, 그것은 또 무엇인가? 그리고 그 파도, 내가 잘못 본 것으로 온몸을 벌벌 떨며 땀까지 흘렸다? 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갑자기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려야 할 것만 같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닐 것이다. 그 넓은 해변에 어린소녀는 혼자 있었다. 이런 외딴 곳에 누군가 있을 턱이 없다. 가까운 곳에 내가 모르는 인가 있다고 해도 그녀는 일행과 동떨어져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을 본 것은 나뿐일 것이고, 높은 파도가 그녀를 순식간에 삼킨 것이 분명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누군가에게 반드시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제한구역, 이라는 선명한 글귀가 액정 화면에 떠 있다. 그 마저도 충전이 다 되어가는 듯 깜박이고 있다.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정리가 되자 마음이 급해진다. 잠바를 걸치고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 문득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가, 나는 지금 현실로부터 도망 온 사람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이 나를 찾아 나설 것이고 부모님이 이곳을 아시게 된다면 내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내가 선택한 미래는 초장부터 박살이다. 익명으로 공중전화를 찾아 경찰서에 알리는 방법은 어떨까, 아마도 믿지 않을 것이다. 장난 전화 정도로만 여길 것이다. 익명으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가까운 파출소를 찾아가볼까, 하지만 그녀가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새 생활의 초입부터 이런 찝찝한 일에 얽히는 것이 그녀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리고 정말 내가 본 일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다시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그러다 누군가 나를 바라본다는 느낌이 스쳐 언뜻 뒤를 돌아본다. 이상한 기운에 온몸에 소름이 확 돋는다. 나도 모르게 멈칫 섰다.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느낌. 그러나 주위는 고요하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다. 멀리서 간간히 파도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벌써 아침은 계단으로 햇살을 부려놓을 만큼 밝아 있다. 계단을 오르는 내 발자국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린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무엇인가 휙 눈가를 스쳤다. 이십 평 남짓한 이 빌라에는 방이 두개, 거실과 주방이 연결되어 있고 욕실이 전부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 방문을 차례로 다 열어본다. 벽장도 열어보고 욕실, 뒤 베란다 문까지 다 열어보지만 별달리 바뀐 것도 없고 무엇이 있을 리도 없다. 가구가 준비된 것도 아니고 거실 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트렁크가 전부이다. 트렁크는 나가기 전 모습 그대로 놓여 있고 바닥엔 아직도 생수병과 소주병이 그 자리가 자신의 처음자리이자 마지막 자리인양 놓여 있다. 베란다 문도 나가기 전에 열어 둔 모습 그대로이다. 그새 집안이 싸늘하다. 베란다 문을 닫고 보일러는 작동시킨다. 전에 누군가가 살았는지 기름이 꽤 남아 있고 주인은 열쇠를 현관 바깥 창틀에 두었는데 처음 이곳을 발견 했을 때 그녀는 열쇠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사층으로 올라와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지금 생각하니 마치 자기 집인 듯 행동한 것 같다.
지금 이 곳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아직은 아침이고 그녀는 오후나 되서야 올 것이다. 그녀와 함께 출발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보증금을 빼와야 하고 그녀의 직장인 카페에서도 마지막 일한 돈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라디오도 티브도 없는 외딴 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영 별루다. 그녀가 빨리 와줬음 좋겠다. 어제는 출발하기 전에 소주와 라면, 담배와 간식거리를 제법 사왔다. 혼자라는 것이 마음처럼 넉넉하지 않아서 소주를 제법 마셨다. 이곳까지 찾아 들어 올 때는 제법 무서웠다. 무서움이 그다지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불빛 하나 없는 산길을 어떻게 차를 몰고 들어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차는 꼭 누군가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혹은 오래된 습관처럼 달렸고, 어느 순간 나는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어젯밤 이곳은 불빛하나 없이 캄캄했다. 지어진 지 족히 십여 년은 넘어 보이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이 건물에 누군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형광등이 켜지는 것도 수돗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의심스러울 만큼 빌라는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
빌라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도 산을 두어 개 더 넘어야 한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해봐야 열 가구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곳을 알게 되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저 아무 곳이나 우리를 모르는 아니 우리가 모르는 세상을 향해 발길 닿는 대로 달렸다. 서울에서 속초로 향하는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다시 국도를 탔고 중간 어디쯤 길 내키는 대로 빠져 들었다. 포장도 안 된 비좁은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작은 산을 하나 넘으니 널찍이 떨어진 집들이 군데군데 보였고 비포장 길을 따라 또 한참을 들어와 보니 이곳이 나왔다. 옥빛보다 연한 바다 빛에 낡은 이 빌라만 빼고는 어느 곳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환호성을 질렀다. 모래 위를 맨발로 달리면서 옷을 벗어 던졌다. 마치 아이로 돌아간 듯 그녀는 폴짝대기도 하고 뭐가 그리 재미난 지 혼자 바닷물을 튕기며 깔깔대며 웃기도 했는데 그토록 행복해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멀찌감치 물러서 바라본 알몸 된 그녀는 신비로웠다. 바위에 얼굴을 부비더니 뭔가 좋은 것을 보여주겠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빌라 뒤 작은 산으로 내 손목을 이끌었다. 나무는 하늘 높이 솟아 어두컴컴했지만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우리 이곳에서 함께 살아요.’ 라는 말을 혼자 말하듯 중얼거렸다. 귓가에 전해진 그녀의 목소리에 문득 그녀와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고, 그때 처음으로 그녀와 살아야겠다, 라는 각오라든가, 결심 같은 것이 선 것 같다. 나뭇잎이 쌓여 땅은 푹신했으며 바람도 스미지 않는 그 길에는 새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고요해서 자칫 세상에 이런 곳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고요라는 것이 그토록 가슴 저미게 슬프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고,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빼곡히 들어선 키 큰 나무와 그 사이로 가볍게 스며든 빛줄기, 그때까지도 그녀는 맨발이었다. 땅이 푹신하기는 했어도 작은 가시에라도 찔리면 안 된다고 내 신발을 벗어 주겠노라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신발이 필요 없어요.’ 라고 말했다. 나는 신발을 그녀에게 벗어 주지도 않았고 그녀의 말대라면 필요 없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들어간 곳에는 맑고 투명한 물이 고여 있는 연못이 나왔다. 처음 보는 듯한 둥글고 빨간 사과처럼 생긴 열매가 있는 나무들이 연못 주위를 둘러 안고 있었고 키 낮은 꽃들이 즐비하게 피어있었다. 꽃에서 나는 향기인지 열매에서 나는 향기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달지도 독하지도 않은 향은 은근히 사람을 취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평온함이었고 따뜻한 취기였다. 갑자기 잠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잡은 내 손에 힘을 주며 다시 한 번 ‘우리 여기서 살까요?’ 라고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래 그러자 우리 여기서 살자.’ 라고 답했다. 그런데 그 풍경은 흡사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그림이었다. 연못과 나무, 꽃의 그림을 나는 언젠가 그녀의 집에서 본 기억이 있다.

나는 딱 한 번 그녀의 집에 간 적이 있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다세대 주택의 열 평 남짓한 지하방이었다. 그녀의 집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이기도 했다.
그날도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을 탔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한 시간이건 두 시간이건 지하철을 타고 싶다. 그것도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발 디딜 틈도 없는 지하철을 타고 싶다. 내 생활의 유일한 즐거움이 아침 출근길 지하철 속이다. 나는 이 시간동안 흥분게임을 한다. 게임을 제대로 하려면 아침 일곱 시에서 여덟시 삼십 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시간보다 빠르거나 늦으면 지하철 안은 조금 한산해져 공간이 생기는데 그렇게 되면 나의 취미생활이자 유일한 낙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대상에 접근하는 일이다. 무턱대고 아무에게나 접근하는 일은 없다. 될 수 있는 한 늘씬하고 예쁜 여자 뒤에 바짝 다가서면서 지하철 속으로 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뒷사람들이 밀어주게 되고 은근슬쩍 그녀의 허리를 살짝 만지면서 나의 완벽한 작업장으로 들어서면 된다. 요즘 젊은 여자들은 다소 성질이 괴팍스러워 고르는데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재수 없게 무대포 아줌마에게 걸리면 대책도 없다. 게임의 숙련된 힘은 다년간 쌓은 내공의 힘으로 이젠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알아볼 수 있다. 어떤 여인이 나와 상쾌한 아침을 즐길 것인가, 그녀를 나는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충분히 있다. 포르노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짜릿한 게임은 그녀의 허리부터 시작되는 내 손가락의 힘에 달려 있다. 그녀의 성감대가 어디인지 금방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손가락은 여자들의 사타구니에서 가슴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밀리고 당김을 리듬으로 삼아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그러다 사람들이 타거나 내리게 되면 다시 상황을 수습하여 본격적으로 아랫도리를 그녀들의 엉덩이나 앞부분으로 들이밀면 된다. 바짝 긴장한 내 물건은 내 손이 아닌 그녀의 몸으로 자극되어 뇌파는 흥분의 도가니로 술렁대고 심장은 사정없이 뜀박질을 한다. 전철보다 몇 백배나 빨리 펌프질을 해대는 것이다. 신음소리는 아주 리드미컬하고도 낮은 소리로 그녀가 꼭 아니더라도 주위 다른 여자의 귓속으로 전한다. 지하철은 하도 붐비는 상황인지라 그것이 흥분으로 오는 것인지 사람들의 부대끼는 억눌림에 의해 마지못해 터져 나오는 소리인지 여자들은 분간하지 못한다. 그날도 나를 즐겁게 해줄 상대를 지하철 승강장을 걸으며 물색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 눈에 띠인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누구의 눈에라도 금세 띠일 만큼 아름다웠고, 앞가슴이 푹 파인 적당히 몸매를 가늠할 수 있는 붉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가을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여름이라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날씨에 그녀의 옷차림은 화사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화장을 나름대로 하긴 했어도 어린 티가 많이 나는 여자였다. 내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진 여자가 내 앞으로 자진해서 걸어오는 것을 보며 지하철에 오르기도 전에 온 몸의 근육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지하철이 도착하고 나는 뒤에서 그녀의 허리에 손을 살짝 갖다대며 껴안다시피 지하철 안으로 그녀를 집어넣었다. 내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몰려 왔기 때문에 나의 숙련된 솜씨를 그녀가 눈치 채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거대한 동굴 속으로 밀어 넣고 평소 하던 대로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애써 몸을 빼내려 했지만 사람들로 꽉 차 있는 동굴 안에서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었다. 그날 나는 꽤나 흥분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가끔 밀리는 척 앞모습을 훔쳐보며 내 손과 물건은 쉴 사이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 옆에도 남자가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몸을 비틀며 고개를 쳐들더니 그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은 듯 약간의 미소를 보였다. 직감으로 작업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그만해!>라고 소지를 질렀다. 순식간에 지하철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내 손은 바지 호주머니 속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사람들의 웅성임이 박자와 상관없는 음악처럼 흐르고 그들의 눈빛은 남자와 여자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시선의 소리는 웅성임보다 더 격렬했다. 나는 억지로 몇 발자국 몸을 뒤로 당겼고 그녀와 등을 돌린 자세로 섰다. 지하철 안의 술렁임은 점점 커져갔다. 남자의 표정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가 그녀의 목소리로 당황해 하며 또한 황당해 하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단호한 목소리로 <더러운 인간!> 이라는 간결하고도 강한 어투를 사용했다. 그러자 그는 어설프게 무슨 소리냐는 둥, 왜 그러냐는 ... 어쩌고저쩌고 말이 지나갔으나 그의 말을 나도 끝까지 듣지 못했다. 지하 동굴 속 사람들은 아가씨의 편이 되어버렸고, 그 남자를 금세라도 어떻게 해야 할 것처럼 수근대며 더러 큰 목소리의 사람들은 <아가씨가 참아요. 저런 것들이 어디 한 둘이어야지. 어디 딸자식 키우며 살겠나, ... 아니야 혼줄을 내줘야 해.> 등등의 말들이 내 머리 위로 오가고 있었다. 남자가 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은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그가 한 일만 같았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 같기도 했다. 남자가 드디어 소리를 지르며 몸을 흔들었다. 더 이상 못 참겠다, 라는 단호한 몸짓과 어투가 분명했다. <무슨 소리야 이 여자가 미쳤나!>라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번쩍 올라가는 듯 하더니 그녀의 뺨을 향해 내리꽂혔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있었고 이내 지하철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웅성임과 찰라의 정적, 지하철 안내 방송이 흘렀다. 내리실 분은 오른쪽이나 왼쪽이나 어디든 서서 준비하라는 상냥한 기계음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고 모두들 일제히 그녀와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도 다음편이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어떻게든 말려보겠다는 사람들이 약간의 몸짓을 했지만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지하철 문은 열렸다. 남자는 제 분에 못 이겨 여자를 질질 끌고 내렸다. 그 뒤를 이어 하나둘 굴 안을 빠져 나가는 사람들과 들어오는 사람들이 엉키고 있었다. 나도 얼떨결에 인파에 밀려서 지하철을 내렸다. 남자는 그녀의 몸을 바닥에 내리쳤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커다란 팔이 오르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경찰서에 가자고 윽박지르는 것은 오히려 남자였다. 승강장은 남자의 목소리 울림으로 꽉 차 있었고 여자는 한 마리 어린 짐승 같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가 또 흩어졌다 반복 되었다. 모두들 출근길을 바빠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빨리 경찰서로 전화를 하라는 소리가 들렸고 실제로 몇 명의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남자의 등 뒤로 갔다. 일종의 종족에 대한 배려라고나 할까, 그 정도면 충분하고 경찰이 오면 일이 복잡해 질것이고 당신에게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은 증명된 것과 마찬가지니 그냥 가라고 알려 주었다. 솔직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남자는 누군가가 들어 주길 바라는 목소리로 <재수가 없으려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보폭을 넓게 잡아 재빨리 그 자리를 빠져 나갔다. 모두들 출근길로 자리를 잡아 제각각 그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나도 그 자리를 뜨려고 하는 순간 여자가 그림자처럼 스르륵 쓰려졌다. 여자는 맞으면서도 이를 악다물며 남자를 노려보았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남자를 가만 두지 않을 것처럼 보였고 어쩌다 보면 가장 가까이 있었던 나까지 엮어지게 될까봐 내심 걱정도 되고 괜히 따라 내렸다 싶기도 해서 남자에게 귀뜸도 해 준 것인데 여자가 내 앞에서 쓰러지다니, 나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쓰러진 그녀를 두고 가기에도 그런 것이 주위 사람들이 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모두들 앞에서 내가 죽일 놈이 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그녀를 흔들다 의식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들쳐 업었다. 그녀의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졌으나 무겁지는 않았다. 역사를 빠져 나와 택시를 잡았고 인근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를 등에 업었을 때 그녀의 심장 박동이 촉촉하게 전해지는 것을 느꼈는데 기분이 묘한 것이 처음으로 그녀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응급실로 옮기고 그녀의 가족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그녀의 가방을 찾았으나 없었다. 그녀만 들쳐 업고 온 것이다. 그런데 주위에 그녀의 소지품 같은 것이 있었다면 내가 챙겼을 텐데, 아마도 지하철 안에서 그 난리가 났을 때 없어진 듯 하다. 하는 수 없이 내 이름을 보호자란에 써넣고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최대리가 받아서 대충의 이야기를 하고 늦게 출근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간단한 치료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그녀의 초췌한 모습이 안스러웠다. ‘그러게 가만히 있으면 괜찮았을 걸, 이게 뭐니....’ 하는 말이 속으로 삼켜졌다. 화장이 지워진 그녀는 참 맑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는 그녀가 마다하는 것을 무릅쓰고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의 집은 작은 거실과 방 하나가 전부인 듯 보였는데 현관 입구에 걸려 있는 그림, 연못 주위의 풍경과 한 여자가 작은 늪에 잠자듯 누워 있는 그림이 흡사 지금 내가 서 있는 연못과 닮아 있었다.


거실 바닥에 누워 베란다 창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다. 빨간 코트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새벽에 어린 여자가 혼자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일행이 있었다면 일행들은 여자를 찾게 될 것이다. 여기 빌라 근처까지 오게 된다면 내 차를 발견하겠지. 그리고 내게 물어 볼 것이다. 혹시 고등학생이나 갓대학생이 된 정도의 어린 여자를 본 적이 없냐고, 그러면 나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하나, 모른다고 딱 잘라 말 해야겠지. 아니, 갑자기 파도가 덮쳤는데 그 뒤로는 나도 모른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그들은 나를 의심하게 될 지도 모른다. 자칫 바다이야기를 했다가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누가 믿겠는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녀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애초에 없었다고 말하기에도 난처하다. 이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아내도 이런 내가 몹시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나는 집안 문제에 별 관여를 하지 않는다. 아내는 은근히 우리 집안에 대해서 졸부라는 말을 써가며 우리 엄마가 땅 투기로 돈을 벌었다는 것도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염마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아내를 불러 들여 이것저것 가르치려 드셨고 집안의 대소사를 눈에 띄게 주위사람들을 불러 거창하게 치르시길 좋아하신다. 엄마는 당신이 가진 것들을 남에게 자랑삼아 내보이는 것을 특히나 즐기시는데 아내는 그런 엄마를 못마땅해 했다. 나는 아내와 엄마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는 척 하려는 편이고 별로 개입하고 싶지도 않다. 아내도 명품 타령하는 거나, 나긋나긋하게 뭐든 가르치려 드는 말투,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 등이 영락없이 엄마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아내가 싫다, 좋다 그런 건 아니다. 나는 이미 그런 것에 익숙해진 사람이다. 사실 처음 아내는 다소곳하니 참한 여자였다. 선을 봐서 결혼을 했지만 나는 아내의 그런 얌전해 보이는 면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내세우는 법 없이 처음 그녀는 조용한 몸가짐과 허술해 보이는 부분이 없었다. 아버지 보다 엄마의 입김이 센 집안에서 자란 나로서는 얌전하고 순종적인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는 엄마를 닮아갔다. 엄마는 내가 밥을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친구 사귀는 문제까지 사사건건 개입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 엄마의 치맛바람은 참으로 화려했다. 덕택에 나는 알랑거리는 친구 몇은 얻었지만 홀로 있음에 익숙해졌다. 주위에 반 아이들은 나를 조롱하거나 멸시하는 듯 했지만 선생님의 수호아래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어쩌지는 못했고 나는 등하교도 엄마의 수호 아래 움직였다. 서울에서 명문 소리를 듣는 대학을 나온 것도 어찌 보면 엄마 덕택이다.연애란 것도 제대로 해 본 기억이 없다. 엄마는 내가 누구와 만나는 지를 나보다 더 잘 알았다. 그런데 지훈이를 낳고부터 아내가 엄마와 너무 흡사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나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편이지만 아이에 대해서는 제법 완강했다. 자신의 계획에 어긋남 없이 아이는 어릴 적부터 행동해야 했다. 그러나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낮고 매몰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아, 착한 아이는 그러면 안돼는 거예요. 지훈아 말은 가려서 조심스럽게 하는거예요. 밥을 먹을 때는 소리를 내서는 안돼요. 허리는 세우고 꼿꼿하게 앉아야 하는 거예요. 등등의 말들은 아이에게 하는 잔소리가 아니라 어쩌면 내게 하는 경고의 말 같기도 했다. 언제나 몸에 밴 듯 옳고 바른 것의 잣대가 철저한 아내가 나는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터득한 습관 중에 내 마음으로 가장 좋은 습관이라면 어느 자리든 나서지 않는 것. 입을 꼭 다물고 남의 말을 다 들어 주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사이 다른 생각에 집중하는 편이다. 예를 들자면, 아침 지하철의 게임에 대해서 자칫 실수한 것이 있지 않았나, 혹은 정말 생각할 만한 일이 없을 때는 말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상상으로 만들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는 일 또한 없다. 쓸데없는 참견은 제 명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라는 것이 내 평소 생활 지론이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그 일이 있은 후 한 달가량 지나서였다. 고등학교 동창 놈 하나가 서울에 볼일이 있어 올라온다며 전화를 걸어와 나간 약속 장소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그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이었다. 그녀도 나를 금세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러나 먼저 다가가 아는 척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친구와 카페 사장은 각별한 사이처럼 보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 친구와 사장은 지나간 이야기를 쉬지 않고 떠들었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 사이에 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 그녀에게 눈길이 가는 것을 알아챈 사장이 그녀를 자리로 불렀다. 내 옆자리에 앉게 된 그녀에게 몸은 괜찮으냐고 슬쩍 말을 건넸고 그녀는 고마웠다고 말했다. 카페는 제법 고급스러운 분위기였고 우리는 술기운을 빌어 제법 친해졌다. 어둠과 흔들리는 조명아래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그 자리에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사이 사장에게 그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일한 지는 대략 한 달 가량 되었고 신상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다고 했다. 광고를 보고 왔다고 했고, 미모가 있어서 채용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관심이 있으면 자리를 주선하겠다는 말까지 넌지시 비추었다. 가족은 없어 보인다는 말에 사장은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친구는 이참에 너도 애인 하나 만들어 보지 그러냐, 요즘 애인 없는 놈이 어딨냐, 넌 잘 나가는데 아직 애인도 없냐, 라고 타박을 주기도 했다. 애인이라는 말이 그처럼 생동감 있게 들리긴 처음이었다. 첫사랑이 있었지만 바라보기에 그쳤고, 애인이나 연인이라는 말은 영화 속이나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하는 인물로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종종 카페를 찾았고 그녀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녀의 미모도 미모지만 그녀를 들쳐 업고 뛰던 그날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녀가 내 등에서 가늘게 숨 쉬던 그날의 느낌은 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해낸 날, 아니다 그것보다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느낌. 아니다, 그것보다 더 멋진 표현이 있을 것이다. 뭔가 합해진 것 같은 느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내가 왜 이런 황당무계한 느낌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녀가 생소한 타인 같지 않았다. 그녀와 친해지자 그녀는 다소 수다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신상에 관한 이야기보다 사는 이야기, 카페 손님 이야기, 그리고 영화이야기들을 아주 진지하게 들려주기도 하고 성냥개비로 집을 짓는다거나, 모형을 만드는 것을 즐겼고 꽤 잘 만들기도 했지만 만든 직후 무너뜨렸다. 회사에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카페를 하루가 멀다하게 찾아다녔다. 지하철을 타는 일이나 흥분 게임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과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내게는 생활의 전부가 되어 버린 듯 했고, 내 생활은 예전과는 달리 바쁘면서도 활기차게 변해갔다. 그녀도 나를 언제나 기다리는 눈치였고 나는 그녀에게서 삶의 모든 것을 얻었다. 그녀는 내 일분처럼 내가 기운 없어 하면 그녀도 쉽게 지쳐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건강해야 했고, 기뻐야만 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드라이브를 좋아했다. 어린애처럼 신나했다. 차를 타면 노래를 흥얼거리고 지나가는 모든 사물에 관심을 가지며 재잘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나는 틈만 나면 그녀를 태우고 어디든지 달렸다. 결근하는 날이 있었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들도 있었지만 아내에게는 회사일이 무척 바빠졌다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아내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훈이가 자기반에서 반장을 하게 되어 아내는 학교에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회사에다가는 아이가 자주 아프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누구보다도 착실하며 겸손한 사람이었으므로 누구도 내 말에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나는 은근히 경찰이나 빨간코트 일행을 기다린다. 고작 오전을 넘긴 시간인데도 사람 그림자 하나 찾을 수가 없다. 누구라도 와줬음 좋겠다. 그들이 아니라면 이곳까지 누가 오겠는가, 자꾸 초조해진다. 그녀가 이곳까지 길을 잃지 않고 올 수가 있을까 걱정도 되고, 그녀가 오면 간단한 살림살이를 사러 가야겠단 생각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 그녀가 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를 계획하고 우리의 지난 사랑과 앞으로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그것도 점점 싫증이 나기 시작한다. 지갑에 있는 돈을 다 꺼내어 정리하고 퇴직금이 들어올 통장과 그동안 몰래 챙겨두었던 비상금 정리를 해보다 문득,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모아 이곳에서 벌이도 없이 먹고 산다면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최소의 경비를 쓴다고 해도 이 돈으로 평생을 살 수는 없다. 바다에서 낚시를 해서 고기를 잡아먹고 살 것인가, 취미로도 낚시를 해 본 경험이 없다. 농사를 짓는다? 대학 때도 그 흔한 농활 한번 가본 적이 없다. 그리고 체질에도 맞지 않는다. 지금 다니는 회사도 솔직히 말하면 엄마가 주주로 있는 회사라서 그냥저냥 다닐 수 있었다. 왜 그동안 단 한번도 그녀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먹고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은 못했던가. 평생을 이 돈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갑자기 모든 현실이 막막해진다. 숨이 턱하니 막힌다. 그래도 그녀가 올 것이다. 그녀가 오면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자. 그녀가 어떤 대책을 생각해 놓았을 것이다. 누워서 천장과 창밖을 번갈아 쳐다보는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귀를 바닥에 대고 들어본다. 아랫집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기 울음소리는 누군가 꼬집어 뜯는 것처럼 자지러진다. 그러다 다시 조용해진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기도 했고 또 어젯밤에 마신 술기운 탓에 피곤해서 들리는 환청이 아닌가 싶어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러다 얼마 후 다시 아기 울음은 그저 그런 아기 울음이 아니라 뇌를 울리며 몸속의 뼈를 다 발라내듯 자지러지며 운다. 아니다 다시 들으면 고양이의 그것 같기도 하다. 어디선가 야생 고양이가 왔나보다 하다가 간헐적인 여자의 울음소리도 섞여 들린다. 나는 벽에 기대 있다 일어섰다. 소리에 집중도 해본다. 아무래도 누군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아래층에 누군가 있는 가보다. 나는 옷을 제대로 챙겨 입고 세수도 다시 하고 머리모양도 매만지면서 나의 이웃을 찾아 나선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사층, 하나 뿐인 통로에는 101호 201호 301호 401호가 전부이다. 삼층에는 아무도 없음이 확인되었다. 이층도 일층도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두드리는 소리만이 빈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초인종 벨소리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다시 되돌아 일층부터 다시 시작해 누군가를 불렀으나 내 목소리만이 허공을 울릴 뿐이다. 소리는 흔적이 없다. 다시 401호 거처로 돌아왔다. 방마다 문을 열어보고 벽장도 열어보고 싱크대 문도 열어보다 그나마도 지쳐서 바다가 눈앞에서 찰랑이는 베란다 앞에 섰다. 어째 이 바다에는 갈매기도 한 마리 날지 않는 것일까, 이곳에는 살아있는 것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다. 또다시 아기 울음소리, 벽장에서 들려오는 것도 같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으면 안 들리는 것도 같고 아주 멀리서 누군가가 부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섬뜩한 느낌, 내 귀가 잘못 된 것이 아닌지, 이 소리들은 과연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래 그녀 생각을 하자. 그런데 왜 이렇게 그녀는 오지 않는 것일까, 기다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를 예전에는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자꾸 손에 땀이 배이고 목구멍은 타들어가는 듯 말라온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사방은 고요해졌다.어떤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다. 야생 고양이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혼자 있다는 고독감에 무서움이 느껴져 헛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생각이 정리되자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벽에 가만히 기대 앉아 있는데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졸음이 밀려온다. 조금 자야겠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잠 말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 그녀가 와줬음 좋겠다. 어쩌면 내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내 곁을 지키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조금 화를 내야겠다. 참 많이 보고 싶었다는 말과 함께.
벽장 속에서 아기를 안은 여자가 걸어 나오더니 누워 있는 나를 눈여겨 쳐다본다. 빨간코트의 여자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얼굴 없이 내 발 밑에 서 있다. 엄마와 아내가 점점 멀어진다. 도망치고 싶다. 바다에서 커다란 손이 슬그머니 일어서더니 점점 길어지면서 나를 칭칭 동여맨다. 바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꼼짝도 할 수 없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없다. 내게 왜 이러냐고, 왜 나만 쳐다보냐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그들은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볼 뿐이다.
꿈속에서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앞뒤 연관도 없는 꿈이다. 소름끼치는 여자들이 왜 한결같이 나를 쳐다보는지 그녀들에게는 왜 얼굴이 없거나 혹은 표정이 없었다. 꿈에서도 아기는 심하게 울었다. 무서운 꿈이다. 꿈에서 얼마나 소리를 질렀던지 목이 마르다.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고 잠든 사이 밤은 쉽게 왔다. 옷을 챙겨 입고 바다로 나간다. 세상은 어느새 빛 하나 없는 밤이다. 빌라 앞에 차를 세워 두었는데 차가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검은 밤바다를 바라보다 파도 소리를 듣다 다시 401호로 올라왔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동안 이곳에서 벗어나 그녀를 찾아 나서려고 매순간 시도했지만 어느 곳에도 길은 없었다. 내가 타고 왔던 차도 없다. 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차가 다닐만한 길이 근처에는 없다. 일주일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근방의 산으로 길이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산 속을 헤매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빌라에 와 있곤 했다. 그러기를 수십 차례 이제 나는 허기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생수통의 물은 이제 거의 바닥이 났고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 속에서는 수돗물도 잘 나왔는데 수도꼭지는 오래 전에 망가져 있었다. 붉은 녹물이 툭툭 떨어진다. 첫날에는 제법 기름이 남았다고 보았던 보일러에 기름이라곤 없다. 기름이 있다하더라도 보일러가 작동이나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집은 모든 것이 망가져 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을 받아 들일 수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다. 허기와 기다림 그리고 추위에 나는 이미 많이 지쳐 있다. 이제는 그녀가 실존하는 인물인지 조차도 의심스럽다.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 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그녀 말고는 답이 없다. 그녀만 와 준다면 그녀만이 내게 구원이다.
기운이 없다. 가만히 누워 이대로 죽을 날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누렇게 뜬 벽지의 꽃무늬를 세다가 문득 그녀가 나를 처음 이곳으로 이끌었던 곳이 생각났다. 그 작은 연못에 가면 무엇인가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찾아야한다. 습지, 빽빽이 들어찬 나무속으로 비스듬히 보이던 빛줄기, 하지만 연못 주위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환했다. 어쩐지 그곳에 해답이 있을 것만 같다. 왜 나는 여태 그 생각을 못했던가,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진다. 신발도 신지 않고 정신없이 그곳을 향해 달려간다. 그곳으로 향하던 길만이 기억에 선명하여 눈감고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둠과 푹신한 땅, 차가운 바닷바람도 스미지 않는 그 길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문득 새소리가 들린다. 그녀와 함께 왔을 때는 새의 그림자조차도 없었는데, 작은 새가 내 발걸음을 재촉하듯 서너 발 앞서서 파닥이며 지저귄다.
그 곳 연못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맑은 물 가운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움직임도 없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그녀를 물에서 끌어내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 소용없는 짓이란 것을 알겠다. 그곳은 어쩌면 그녀의 무덤인 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참으로 고단하다.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흘러왔는가, 에 대해서도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가에 대해서도 내게는 이제 아무런 미래가 없다. 지금 이 순간까지의 삶이 영화속의 장면처럼 흘러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미래가 없다는 것, 내 무덤 앞에 스스로 왔다는 것, 그녀가 인도했다는 것만을 알겠다. 나는 이제 저 연못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녀의 표정은 온화하다. 잠시 잠이 든 모습이다. 물은 따뜻하면서 조금 끈끈하다. 알 수 없는 향기에 점점 취해 간다.

오랜 꿈을 꾼 것 같다. 내가 꿈에서 깨어난 것이 사무실인지, 지하철 속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매일 아침 일상적인 잠자리에서인 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녀가 일하던 카페에 찾아 간 적도 있지만 그곳은 내가 알던 그곳이 아니었고 그녀의 집을 찾아 간 적도 있었지만 그곳도 내가 알던 그 집이 아니었다. 아내는 지금도 지훈이와 씨름을 하고 있고 내 업무적 일상은 변한 것이 없다. 하지만 정지된 어느 곳에 내가 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눈에 익은 사람들과 건물과 사소한 사물들 속에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어제와 다름없이 흘러가는 것들이 가끔 생소하게 보일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삶의 모든 것이 어떤 한 기억에서만 존재 하는 나, 로 보일 때도 있다. 내가 어떤 존재 속에서 머문다는 느낌이 하늘에 떠가는 구름처럼 흩어지다 뭉쳐지면서 그림 같은 것을 만들어 내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지금도 살아 있고 과거에서도 살아 있었고 앞으로도 살아 있을 것이다. 쉼 없이 움직이면서 작은 원 안을 돌고 돌지만 결코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시침과 분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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