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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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미선/단편/프시케의 날개/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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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 신인상 응모작
(제목 : 프시케의 날개)
지원부문
단편소설
작 품 명
프시케의 날개
성 명
명 미 선(여)
연 령
28세(만26세)
주 소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3동 3-148
이 메 일
impalpable@hanmail.net
연 락 처
016-239-6486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려 하네. 예정된 시간 속으로 떠나려 하네."
라디오에선 귀에 익은 트롯가수의 걸쭉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준석은 오늘도 반 이상이나 남은 야채와 과일을 고스란히 트럭에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장사가 녹록치 않은 탓에 예전에 비해 물건 떼 오는 양도 거의 절반이나 줄었건만 요즘은 그마저도 반타작이다. 할인마트가 곳곳에 들어서고 체인점이 대형화 되면서 야채며 과일도 이젠 도매를 거치지 않고 직거래를 하기 때문에 어디서든 싸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잔일 싫어하는 요즘 젊은 주부들은 흙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트럭행상의 야채들 보다는 할인마트에서 파는 깔끔하게 손질해서 세척까지 되어 나오는 것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벌이가 시원찮은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아무래도 이제 종목을 바꿀 때가 됐다보다 하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노래가 끝나자 라디오에선 뉴스가 흘러나온다. 준석은 손을 뻗어 좀 더 볼륨을 높인다.
뉴스에선 연일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고조에 달했다며 최근의 경제사정을 20대의 실업률로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매스컴에서는 마치 그게 어제, 오늘 닥친 일처럼 떠들어 대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미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대학졸업을 앞둔 젊은이들은 어려운 취업문을 뚫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도서관에 쳐 박혀 고시준비를 하는 게 다반사가 되었다.
5년 전 준석이 남들보다 2년이나 더 걸려 학사모를 쓸 때만 해도 준석에게도 남들 못지않은 부푼 꿈과 기대가 있었다.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준석은 군대를 제대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간신히 등록금을 마련해 지방의 전문대에 입학을 했고, 남들보다 두 배로 열심히 뛰면서 2년 동안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준석은 전자업체에 수없이 원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실패를 하고 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이 부족한 것은 낮은 토익점수 뿐이라는 것 외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로 상념에 잠겼던 준석은 쓴 웃음을 지으며 채널을 바꾸려고 손을 뻗는다.
‘끼~익~’
귀를 찌르는 듯한 브레이크 소음이 멈추는 순간 준석의 등에서도 한줄기 식은땀이 등을 타고 내린다.
준석의 트럭으로 뛰어들었던 녀석은 공을 들고 어느새 저만치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준석의 손에 잡히기라도 할까봐 꽁지가 빠지게 뛰는 녀석의 뒤통수에다 대고
"이 망할 놈의 자식!"
하고 소리쳐 보지만, 이미 소년은 준석의 외침이 닿지 않을 만큼 멀리 가 버린 후였다.
분이 삭지 않아 벌개진 얼굴로 씩씩대며 거칠게 트럭을 출발시킨다.
뒤쪽에서 앰뷸런스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준석은 앰뷸런스가 지나갈 수 있게 차를 옆으로 비켜준다.
과거의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준석의 머릿속을 자꾸만 헤집어 놓는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한적한 시내 변두리 곳곳에선 어둠을 밝히려는 조명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다. 준석의 기억은 어느새 과거 속으로 자꾸만 줄달음친다.
고단한 몸을 좀 쉬어야겠다고, 목이 쉴 때까지 내내 같은 말을 반복하느라 쉭쉭 바람소리가 나는 목도 좀 달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뻐근해진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조금이나마 피로를 풀 양으로 가볍게 목운동을 하던 준석의 눈앞에 갑자기 차로로 뛰어드는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끼~익!’
급브레이크와 함께 핸들위로 쏠린 상체를 재빨리 수습한 준석은 부리나케 트럭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한 여자가 이마에 상처를 입은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허둥지둥 여자를 차에 태우고 급히 병원을 찾아 차를 출발시키며 준석은 생각한다.
내일은 공과금을 내는 날이고, 다음주엔 25만원이나 하는 월세를 내야한다고.
응급실 침대위에는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여자가 팔뚝에 링거 바늘을 꽂은 채 잠들어 있다.
응급실로 들어오는 준석의 머릿속에 조금 전 담당의사가 한 이야기가 메아리처럼 맴돈다.
"차와 부딪친 순간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습니다. 충격이 심하지 않아 특이하거나 심한 외상은 없습니다. 잠시 의식을 잃은 상태니까 깨어나는 데로 퇴원해도 괜찮습니다."
준석은 이만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칫 했다가 어마어마한 수술비까지 낼 뻔 했으니 얼마나 식겁했던지,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호흡을 한다.
지나던 간호사들이 저희들끼리 대화하는 소리가 얼핏 귀에 스친다.
"핸드폰도 없고, 가방에는 지갑도 없어요. 신분 확인이 안 되서 보호자에겐 어떻게 연락하죠?"
여자는 준석이 막 병원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치료비까지 계산했으니 그냥 가도 되겠다 싶었던 준석은 여자가 깨어나자 조심스럽게 다가가 나지막하지만 감정실린 목소리로 한마디 쏘아붙인다.
"이것 봐요~ 웬만하면 아무 말 않고 가려고 했는데, 죽으려면 혼자 죽지 엄한 사람까지 살인자 만들려고 작정 했수? 안 죽고 살았으니 망정이지. 젠장.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네."
십년감수한 탓에 여자에게 한바탕 퍼붓고 나오긴 했지만, 준석은 여자가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왜 자살하려고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여기서 나가서 또 다른 차에 뛰어들면 어쩌나 내심 걱정도 된다. 응급실을 나와서도 자꾸만 이런 저런 생각들로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 준석의 시선에 여자의 가냘픈 모습이 잡힌다.
"저기~ 잠깐 나 좀 봐요!"
딴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자는 준석을 뒤로 하고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식당에 앉아서 두어 개 되는 반찬이 상에 놓일 때 까지도 준석과 여자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머쓱해진 준석이 한마디 내뱉는다.
"지금은 시간도 늦었고, 어찌 됐든 내 차에 치일 뻔 했으니 오늘은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리다. 차림새는 어디 부잣집 고명딸 같은데 무슨 일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기운 차리고 마음 단단히 먹고 살아요. 인생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멍한 눈으로 바닥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준석은 여자의 눈이 참 깊고 어둡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머쓱해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는 사이 주문한 두 그릇의 설렁탕이 상위에 놓였다. 준석은 여자에게 어서 먹으라는 시늉을 하고 벌건 깍두기 국물을 설렁탕 그릇에 붓고는 한 숟갈 푸짐히 떠서 입안에 넣는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국물을 두어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는다. 그러다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식당 밖으로 뛰쳐나간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뛰쳐나가는 여자에게 쏠리지만, 준석은 아무렇지 않게 입안에 있던 밥과 깍두기를 씹어 넘기며 여자가 뛰쳐나간 식당입구로 걸음을 옮긴다.
동이 트기 시작한 동쪽하늘은 어느새 붉은 기운이 넘쳐난다.
준석은 피곤하지만 동틀 무렵의 서늘한 바람이 부는 새벽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하루를 기대하게 만드는 설렘의 시간, 시작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간, 준석은 하루하루를 그렇게 희망에 기대 살아가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채 하품을 한번 길게 하고는 집에 있는 여자를 생각한다.
어제 준석은 여자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왔다.
여자에게 어떤 흑심이 있거나, 아니면 나쁜 맘을 먹고 어떻게 해 볼 요량으로 데리고 간 건 아니었다.
여자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집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여자는 갈 곳이 없다고 했다.
물론, 그 말을 믿은 건 아니지만, 여자에겐 무언가 생각하고 결정할 시간이 필요할거라고 혼자 단정 지어 버렸다.
준석의 집으로 온 여자는 처음에는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니만, 이내 준석이 봐 준 잠자리에 들어 곤히 잠이 들어버렸다.
준석은 쌔엑쌔엑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여자의 곁에서 쭈그리고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마치 악몽을 꾼 듯 어제의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준석은 방에 식사를 차려놓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곤 여자가 다시는 어제와 같은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아마 퇴근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면 여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아야~ 점심은 묵었냐?"
이 동네로 양말장사를 나오는 최씨가 준석의 트럭 뒤에 주차를 하며 준석을 부른다.
"네. 아까 여기서 자장면 시켜 먹었어요."
"아따 자슥. 니는 맨날 자장면만 묵냐? 그랑께 몸이 부실하제. 우리같이 여그 저그 떠돌믄서 장사하는 치들한테는 체력이 질이랑께. 만날 그런 밀가리 음석만 묵지 말고 밥도 묵고 그래야써."
"네. 아저씨는 식사하셨어요?"
"그람. 오전에 저짝 돌고 오믄서 식당에서 혼자 묵었다. 나 잠깐 화장실 잠 댕겨올랑께 손님오믄 니가 쪼까 봐줘라잉~"
"네. 다녀오세요."
한 동네를 자주 다니다 보면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 안면도 트이게 마련이다.
이 바닥 역시 종목이 같은 장사치들 사이에선 서로의 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또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싸움이 일기도 하는 치열한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자연섭리가 어김없이 존재한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발악이란 건 밥그릇만은 뺏기지 않으려는 악착같은 생존욕구랄까, 그래서 남들 보다 더 독하게 으르렁대는 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건 그렇게 고지탈환을 위해 생사를 거는 전쟁과도 같다.
그렇게 살벌한 영역다툼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건 참으로 큰 마음의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종목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또 그 나름대로의 유대관계가 형성이 되고, 동병상련인지 통하는 게 있어서 일까 서로에 대한 어떤 신뢰 같은 것도 생기게 마련이다.
지루하게 혼자 서서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것 보다야 말동무라도 있는 게 조금이라도 고단함을 덜 수 있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데에도 그들은 적이 아니라 동지이기 때문이다.
단 하루 동안의 짧은 만남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와의 인연을 지속하게 된 연유가 첫 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여자가 떠났으리라 생각하고 집으로 갔을 때 준석의 큼지막한 옷을 입고 저녁준비를 하고 있던 여자를 그냥 둔 때문만도 아니었다.
준석이 여자와 두 번째 식사를 마주하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내일은 여자에게 옷이라도 한 벌 사다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아마 그때부터 였으리라고.
어쨌든 준석은 죽을 결심으로 자신의 트럭으로 뛰어들었던 낯선 여자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에 대해서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녀의 이름이 수인이라는 것 외에는...
준석은 오늘 점심도 자장면을 시켜놓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리에 서서 그릇째 들고 식사를 했다. 자리를 비우면 물건을 대신 봐 줄 이도 없거니와 내심 그 사이에 손님이라도 놓칠까봐 걱정스런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벌써 세 시간째 이 길목을 지키고 있건만 이 구역에선 아직도 개시 전이다. 찾아가지 않은 자장면 그릇에는 남은 자장이 식은 채 굳어가고 어느 새 파리들이 떼로 몰려 활개를 친다.
혼자 사는 데는 꽤나 익숙해진 준석이지만, 아직까지도 혼자서 밥을 먹으려면 목이 매여 잘 넘어가지 않았다. 비워진 그릇을 보니 집에 있는 여자가 생각난다.
여자는 속이 좋지 않아 식사를 많이 하지도 못하고, 어쩌다 많이 먹었다 싶을 때면 금새 방문 앞 숫제 구멍에 다 게워내 버리곤 했다.
오늘도 장사를 나오면서 여자에게 병원에 가보라고 2만원을 두고 나오긴 했지만, 갔을지는 의문이다.
준석은 장사길목의 돌계단 위에 앉아 다시 여자의 생각에 몰두한다.
요즘 들어 부쩍 여자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기 시작한다.
어제는 집에 갔더니 책상으로 쓰는 소반위에 비누조각 3개가 놓여 있었다.
크기가 비슷한 백조 두 마리와 앙증맞고 귀엽게 생긴 새끼백조 한 마리였다.
비누로 깎아 만든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잘 만들기도 했기에 어디서 샀냐고 물었더니, 여자는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시간도 꽤나 흘렀고, 이젠 제법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다.
친구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느 연인들 같은 관계도 아니고 두 사람의 관계는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나름대로 서로에게 편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속이 좋지 않은 여자는 식사량에 비해 제법 살이 오른 것도 같다.
준석은 여자에게 가끔 용돈을 주었고, 준석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올 때 쯤 이면 여자는 저녁준비를 해 놓고서도 순대며 족발이며 군것질거리를 사다놓고 먹기도 했다.
그런 여자를 보면서 보기와는 다르게 먹성이 좋구나 하고 혼자 생각하곤 했다.
오늘도 장사는 고만고만하다.
뭐 아쉬운 데로 하루벌이는 하긴 했지만, 날이 갈수록 장사가 신통치 않은 게 이러다 물건이나 제대로 댈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준석은 트럭 안에 있을 때면 내내 여자에 대한 추리와 상상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대체 무얼 하는 여자일까? 여자의 존재는 촉수 낮은 가로등 밑을 가로질러 가는 낯선 사람의 윤곽처럼 희미하다.
준석이 여자에게 무언가를 물어도 여자는 한번도 제대로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
처음 여자를 만났을 때 왜 죽으려고 했느냐고 물으면 여자는 금새 어두운 얼굴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곤 해서 이제 더는 묻지도 않는다.
혹시 영화나 드라마 에서처럼 사창가에서 도망쳐 나온 여자는 아닐까?
그래서 자신의 비참한 삶을 비관하여 자살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아니다. 그런 여자로 보기에 여잔 너무 곱게 자란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
화장을 덕지덕지 해대는 여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뾰루지도 없고, 주름 하나 없이 뽀얀 피부를 가진 그녀다.
그렇다면 혹시 부잣집 외동딸이 아닐까?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헤어지고 생면부지의 사람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 비련의 여인은 아닐까?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어야지 생전 처음 본 낯선 남자의 집에 그렇게 있을 리가 없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혹시 기억상실증에 걸린 건 아닐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방황하고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을 하려고 마음 먹게 된 건 아닐까? 그래서 준석이 묻는 질문에 아무것도 답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상상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준석은 첫 번째 추리로 심증을 굳혀 가고 있었다.
청순하고 깨끗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여자의 손은 너무도 거칠고 투박하다.
여자의 손등에 난 수많은 상처가 고생스러웠던 과거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불우한 삶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여자의 손등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생기고, 그 흉터를 지울 수 없게 된 사실을 깨달은 순간 여자는 자신의 생을 끝마치고자 했을 거라고.
준석은 그렇게 여자를 짐작해 본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저녁을 마치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안절부절 못하던 여자는 준석에게 느닷없이 돈을 좀 빌려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꼭 갚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준석은 어디다 쓸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왠지 물어봐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그러마고 했다.
다음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준석은 은행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으로 50만원을 인출했다.
집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준석은 불안하기만 하다.
여자가 그 돈을 가지고 자신을 영영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여자가 집에서 떠났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온다. 준석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집으로 향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대문을 돌아서자 준석의 방 창문에서 빛이 새어나온다.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출입문을 두드린다.
세수를 하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밥상위엔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이 끓여져 있다.
아마도 오늘이 여자의 생일인가보다 하고 준석은 생각한다. 얼핏 스친 책상위에는 한 마리의 백조만이 놓여져 있었다.
"어이~ 준석아! 요즘 얼굴이 폈다. 뭐 좋은 일 있냐?"
"아이고. 형님 오늘 좀 늦으셨어요."
오랜만에 만난 한씨 형님은 나이가 마흔을 바라보고 있지만 여태 장가를 못 든 노총각이다. 그래서 준석은 한씨를 깍듯이 형님이라고 부른다.
한씨는 고등학교까지 고아원에서 살다가 학교를 졸업 하자마자 여기저기 떠돌며 장사를 배웠다고 했다. 그래서 한씨의 가장 큰 소원은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아들, 딸 많이 낳고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 했다. 고아로 자란데다 뚜렷한 직장 없이 여기 저기 떠도는 트럭행상에게 어떤 여자가 시집을 가려고 하겠는가마는 심성이 착한 한씨인지라 요사이 어떤 과부와 눈이 맞아 곧 있으면 장가를 간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었다.
"형님도 신수가 훤해지는 거 보니 요새 뭔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짜슥~ 어디서 또 뭔 소리를 들었는갑지?"
하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연신 싱글벙글 인 게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준석은 한씨의 소원대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언젠가 한씨가 준석에게도 물은 적이 있었다.
"너는 꿈이 뭐냐?"
준석의 꿈은 4년 전에는 전자업체에 들어가 열심히 일해서 승진도 하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그런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연이은 취업의 실패로 트럭행상을 시작하게 됐다. 또래의 다른 이들이 잘 다린 고급 양복을 입고 고층 빌딩의 회전문을 밀고 회사에 출근을 할 때 준석은 트럭에 야채와 과일을 싣고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그날의 매상을 가늠하고 있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준석은 트럭행상을 하면서도 간간이 취업원서를 넣어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는 열리지 않는 좁은 문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젠 컴퓨터가 놓인 책상에 앉아 상사에게 올릴 결재서류를 준비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보다는 서울 시내에 어엿한 준석의 과일가게를 내고 찾아오는 손님에게 덤으로 아오리 사과를 한두 개 얹어주는 모습을 상상하는 게 현실이 되었다.
준석은 꺾여 버린 희망 대신 또 다른 꿈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내려다보는 성남시내는 아기자기하고 참 아담한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준석과 함께 지내면서 조금씩 밝아지는가 싶었던 여자는 최근 들어 더욱 우울해 진 것 같다. 일부러 모른 척 하긴 했지만 가끔 밤에는 몰래 울기도 하는 것 같았다.
준석에겐 아무 말도 않는 여자였기에 더 이상 물을 수도 그렇다고 자신이 어떤 위로를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가녀린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여자의 뒷모습을 볼 때면 준석도 모르게 가슴이 아프고 마음으로나마 그녀를 위로해 주곤 했었다.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어느새 준석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오늘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좋은 경치를 구경시켜 주려고 생각한 자신이 준석은 한없이 기특하기만 하다.
삼계탕을 주문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준석은 장사를 하면서 만난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같은 장사꾼으로 한 동네에서 자주 부딪치기도 하는 최씨아저씨와 한씨형님에게서 주워들은 농담들도 이야기 해준다. 숫기라곤 없어 처음 여자와 만났을 때만 해도 서먹하고 어색해하던 준석이 오늘 따라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놓는다.
여자는 준석이 하는 얘기를 물끄러미 듣고만 있다가 준석이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는 양이 우스워 간혹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준석은 웃는 여자를 보며 더욱 과장되고 큰소리로 웃어보이곤 했다. 여자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고개를 들자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청주에서 태어났어요.
올해 서른하나 구요. 보기보단 꽤 젊죠?
가족은 부모님과 저 세 식구였어요.
부모님은 시내에서 조그만 과일가게를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때 시골 과수원에서 과일을 사가지고 오시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전 그때부터 스물다섯 살이 될 때 까지 과일이라곤 먹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부모님처럼 과일장사를 하고 있으니 참 알 수 없는 노릇이죠?
이 일을 시작한지는 4년 쯤 됐어요.
참 우습죠. 시간이란 건 그렇게 아픔까지도 무뎌지게 하나 봐요.
녹차의 쌉싸름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간다.
창밖으로 성남시내를 내려다보는 준석을 여자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무언가 준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했지만, 그저 입 안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여자는 그만 포기하고 준석처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불을 끄고 누웠다.
자리를 펴고 누웠지만 준석은 잠이 오지 않는다.
여자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엔 슬그머니 일어나 앉는다.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잠이 안 와요?"
준석의 물음에 여자는 준석이 누운 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무릎에 턱을 고인다. 준석도 일어나 앉는다.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빛에 두 사람의 형체가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다.
"그리스신화 좋아하세요?"
여자가 준석에게 묻는다.
갑작스런 질문에 준석은 대충 얼버무린다.
어느 나라에 세 공주가 있었대요.
그 중에서 셋째인 프시케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보다 더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곤 했어요. 신에게 바쳐야 할 칭송을 인간이 받자 이를 질투한 아프로디테가 프시케에게 저주를 내렸대요.
"너는 인간이 아닌 괴물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저 산 꼭대기에 너의 남편이 될 이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곳으로 떠나거라."
프시케는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을 거부할 수 없어, 그를 찾아 산으로 갔어요.
남편이 될 이를 찾아 간 프시케는 호화로운 궁전에서 맛있는 음식과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대요.
하지만, 자신의 남편이 될 거라는 괴물은 그녀 앞에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그녀를 찾아와 날이 밝기 전에 떠나곤 했어요.
그녀는 떠나지 말고 얼굴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으나, 남편은 들어주지 않았어요.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면, 이 행복은 영원히 깨져버리는 거라고... 절대로 자신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말라고...
남편의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 프시케는 칼을 들고 남편이 잠든 방을 찾아가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신 중 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에로스였대요.
아프로디테의 명을 받고 저주를 내리러 갔던 에로스가 그만 프시케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버린 거죠.
에로스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프시케를 버리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대요.
프시케와 에로스.
에로스는 약속을 져 버린 프시케를 버리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대요.
날개옷을 절대로 주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잊어버린 나무꾼이 선녀에게 날개옷을 꺼내주자 선녀는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대요.
마치 어렸을 때 들었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준석은 생각했다.
에로스의 약속과 선녀의 날개옷.
준석은 여자가 한 이야기가 마치 여자에 대한 금기의 말처럼 들린다.
어둠 속에서 등을 구부리고 앉은 여자의 윤곽이 희미하게 비친다.
금방이라도 여자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이고 만다.
여자는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에로스는 프시케를 다시 찾아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여자는 하늘거리는 긴 원피스를 입고 있다.
원피스는 땅에 닿아 끌릴 정도로 치마 끝이 길게 늘어져 있다.
여자는 오늘 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항상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도 없다.
그녀는 밝게 웃고 있었다.
준석은 여자의 모습이 참 눈부시다고 생각하며 한발 한발 여자의 곁으로 다가간다.
여자가 준석을 보며 환하게 웃어준다.
준석은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여자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웬일인지 여자에게 다가 갈수록 여자는 더욱 멀어지기만 한다.
준석은 더 가까이 여자에게 다가가려 한다.
하지만 여자는 점점 멀어져 가고 웬일인지 준석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준석은 여자를 쫓아가려고 버둥거리다 그만 잠에서 깬다.
등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젖은 웃옷을 벗다가 여전히 웅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띈다. 다가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준석의 행동에 여자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든다. 아마도 그 상태로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여자는 준석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준석은 여자의 옆에 앉아 여자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댄다.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달콤한 향기가 난다.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준석을 바라보자 준석은 가만히 여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여자의 손이 준석의 등에 닿는 순간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밀치고 그녀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포갠다.
좁은 방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가 서서히 높아진다.
에로스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프시케를 버리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대요.
아직도 여자가 해 주었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준석은 여자의 벗은 몸을 처음 보았다. 여자의 살결이 참 보드랍다고 느끼며 여자의 허리를 가만히 쓸어내린다. 여자는 두 눈을 꼭 감고 있다.
준석은 여자의 두 다리를 가만히 쓰다듬다가 조심스럽게 여자의 안으로 들어간다.
앰뷸런스는 어느새 저만치에 사라졌지만 아직도 귓가에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여자가 떠나 버린 1년 전에도 준석은 이 길을 달리고 있었다.
여자가 떠나던 날. 방안에는 여자가 입고 있던 원피스와 재킷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고, 꼭 갚는다던 돈 50만원이 든 흰 봉투가 재킷 위에 올려져 있었다. 책상위에는 어느 날 새끼와 짝을 잃은 백조 한마리가 여전히 쓸쓸한 모습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여자가 남긴 건 준석이 사준 몇 벌의 옷과 비누로 깎아 만든 백조 한마리가 전부였다.
불이 꺼진 방문을 열고 들어가던 준석은 아직도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던 여자를 생각한다. 그녀가 떠난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아무렇게나 옷을 걸어둔 행거에는 아직도 여자가 입던 재킷이 그대로 걸려있다.
준석은 문득 생각났는지 재킷에 손을 넣어본다.
얼마나 자주 꺼내 봤던지 모서리가 너덜너덜 해지기 시작한 사진 속에는 1년 전에 떠난 여자가 한 남자와 다정하게 웃고 있다.
그들 옆에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프로디테가 요염한 포즈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준석은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는다.
다시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던 준석은 라이터 불을 사진의 한쪽 모서리에 갖다댄다.
불은 서서히 그들의 가슴을 태우고, 목을 태우고, 얼굴을 태우고 있다.
타들어 가는 사진을 보면서 준석은 생각한다.
다음달부터는 천 원짜리 잡화들을 떼어다 팔아야겠다고.
(제목 : 프시케의 날개)
지원부문
단편소설
작 품 명
프시케의 날개
성 명
명 미 선(여)
연 령
28세(만26세)
주 소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3동 3-148
이 메 일
impalpable@hanmail.net
연 락 처
016-239-6486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려 하네. 예정된 시간 속으로 떠나려 하네."
라디오에선 귀에 익은 트롯가수의 걸쭉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준석은 오늘도 반 이상이나 남은 야채와 과일을 고스란히 트럭에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장사가 녹록치 않은 탓에 예전에 비해 물건 떼 오는 양도 거의 절반이나 줄었건만 요즘은 그마저도 반타작이다. 할인마트가 곳곳에 들어서고 체인점이 대형화 되면서 야채며 과일도 이젠 도매를 거치지 않고 직거래를 하기 때문에 어디서든 싸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잔일 싫어하는 요즘 젊은 주부들은 흙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트럭행상의 야채들 보다는 할인마트에서 파는 깔끔하게 손질해서 세척까지 되어 나오는 것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벌이가 시원찮은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아무래도 이제 종목을 바꿀 때가 됐다보다 하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노래가 끝나자 라디오에선 뉴스가 흘러나온다. 준석은 손을 뻗어 좀 더 볼륨을 높인다.
뉴스에선 연일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고조에 달했다며 최근의 경제사정을 20대의 실업률로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매스컴에서는 마치 그게 어제, 오늘 닥친 일처럼 떠들어 대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미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대학졸업을 앞둔 젊은이들은 어려운 취업문을 뚫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도서관에 쳐 박혀 고시준비를 하는 게 다반사가 되었다.
5년 전 준석이 남들보다 2년이나 더 걸려 학사모를 쓸 때만 해도 준석에게도 남들 못지않은 부푼 꿈과 기대가 있었다.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준석은 군대를 제대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간신히 등록금을 마련해 지방의 전문대에 입학을 했고, 남들보다 두 배로 열심히 뛰면서 2년 동안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준석은 전자업체에 수없이 원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실패를 하고 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이 부족한 것은 낮은 토익점수 뿐이라는 것 외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로 상념에 잠겼던 준석은 쓴 웃음을 지으며 채널을 바꾸려고 손을 뻗는다.
‘끼~익~’
귀를 찌르는 듯한 브레이크 소음이 멈추는 순간 준석의 등에서도 한줄기 식은땀이 등을 타고 내린다.
준석의 트럭으로 뛰어들었던 녀석은 공을 들고 어느새 저만치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준석의 손에 잡히기라도 할까봐 꽁지가 빠지게 뛰는 녀석의 뒤통수에다 대고
"이 망할 놈의 자식!"
하고 소리쳐 보지만, 이미 소년은 준석의 외침이 닿지 않을 만큼 멀리 가 버린 후였다.
분이 삭지 않아 벌개진 얼굴로 씩씩대며 거칠게 트럭을 출발시킨다.
뒤쪽에서 앰뷸런스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준석은 앰뷸런스가 지나갈 수 있게 차를 옆으로 비켜준다.
과거의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준석의 머릿속을 자꾸만 헤집어 놓는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한적한 시내 변두리 곳곳에선 어둠을 밝히려는 조명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다. 준석의 기억은 어느새 과거 속으로 자꾸만 줄달음친다.
고단한 몸을 좀 쉬어야겠다고, 목이 쉴 때까지 내내 같은 말을 반복하느라 쉭쉭 바람소리가 나는 목도 좀 달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뻐근해진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조금이나마 피로를 풀 양으로 가볍게 목운동을 하던 준석의 눈앞에 갑자기 차로로 뛰어드는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끼~익!’
급브레이크와 함께 핸들위로 쏠린 상체를 재빨리 수습한 준석은 부리나케 트럭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한 여자가 이마에 상처를 입은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허둥지둥 여자를 차에 태우고 급히 병원을 찾아 차를 출발시키며 준석은 생각한다.
내일은 공과금을 내는 날이고, 다음주엔 25만원이나 하는 월세를 내야한다고.
응급실 침대위에는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여자가 팔뚝에 링거 바늘을 꽂은 채 잠들어 있다.
응급실로 들어오는 준석의 머릿속에 조금 전 담당의사가 한 이야기가 메아리처럼 맴돈다.
"차와 부딪친 순간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습니다. 충격이 심하지 않아 특이하거나 심한 외상은 없습니다. 잠시 의식을 잃은 상태니까 깨어나는 데로 퇴원해도 괜찮습니다."
준석은 이만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칫 했다가 어마어마한 수술비까지 낼 뻔 했으니 얼마나 식겁했던지,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호흡을 한다.
지나던 간호사들이 저희들끼리 대화하는 소리가 얼핏 귀에 스친다.
"핸드폰도 없고, 가방에는 지갑도 없어요. 신분 확인이 안 되서 보호자에겐 어떻게 연락하죠?"
여자는 준석이 막 병원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치료비까지 계산했으니 그냥 가도 되겠다 싶었던 준석은 여자가 깨어나자 조심스럽게 다가가 나지막하지만 감정실린 목소리로 한마디 쏘아붙인다.
"이것 봐요~ 웬만하면 아무 말 않고 가려고 했는데, 죽으려면 혼자 죽지 엄한 사람까지 살인자 만들려고 작정 했수? 안 죽고 살았으니 망정이지. 젠장.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네."
십년감수한 탓에 여자에게 한바탕 퍼붓고 나오긴 했지만, 준석은 여자가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왜 자살하려고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여기서 나가서 또 다른 차에 뛰어들면 어쩌나 내심 걱정도 된다. 응급실을 나와서도 자꾸만 이런 저런 생각들로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 준석의 시선에 여자의 가냘픈 모습이 잡힌다.
"저기~ 잠깐 나 좀 봐요!"
딴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자는 준석을 뒤로 하고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식당에 앉아서 두어 개 되는 반찬이 상에 놓일 때 까지도 준석과 여자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머쓱해진 준석이 한마디 내뱉는다.
"지금은 시간도 늦었고, 어찌 됐든 내 차에 치일 뻔 했으니 오늘은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리다. 차림새는 어디 부잣집 고명딸 같은데 무슨 일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기운 차리고 마음 단단히 먹고 살아요. 인생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멍한 눈으로 바닥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준석은 여자의 눈이 참 깊고 어둡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머쓱해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는 사이 주문한 두 그릇의 설렁탕이 상위에 놓였다. 준석은 여자에게 어서 먹으라는 시늉을 하고 벌건 깍두기 국물을 설렁탕 그릇에 붓고는 한 숟갈 푸짐히 떠서 입안에 넣는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국물을 두어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는다. 그러다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식당 밖으로 뛰쳐나간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뛰쳐나가는 여자에게 쏠리지만, 준석은 아무렇지 않게 입안에 있던 밥과 깍두기를 씹어 넘기며 여자가 뛰쳐나간 식당입구로 걸음을 옮긴다.
동이 트기 시작한 동쪽하늘은 어느새 붉은 기운이 넘쳐난다.
준석은 피곤하지만 동틀 무렵의 서늘한 바람이 부는 새벽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하루를 기대하게 만드는 설렘의 시간, 시작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간, 준석은 하루하루를 그렇게 희망에 기대 살아가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채 하품을 한번 길게 하고는 집에 있는 여자를 생각한다.
어제 준석은 여자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왔다.
여자에게 어떤 흑심이 있거나, 아니면 나쁜 맘을 먹고 어떻게 해 볼 요량으로 데리고 간 건 아니었다.
여자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집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여자는 갈 곳이 없다고 했다.
물론, 그 말을 믿은 건 아니지만, 여자에겐 무언가 생각하고 결정할 시간이 필요할거라고 혼자 단정 지어 버렸다.
준석의 집으로 온 여자는 처음에는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니만, 이내 준석이 봐 준 잠자리에 들어 곤히 잠이 들어버렸다.
준석은 쌔엑쌔엑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여자의 곁에서 쭈그리고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마치 악몽을 꾼 듯 어제의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준석은 방에 식사를 차려놓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곤 여자가 다시는 어제와 같은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아마 퇴근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면 여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아야~ 점심은 묵었냐?"
이 동네로 양말장사를 나오는 최씨가 준석의 트럭 뒤에 주차를 하며 준석을 부른다.
"네. 아까 여기서 자장면 시켜 먹었어요."
"아따 자슥. 니는 맨날 자장면만 묵냐? 그랑께 몸이 부실하제. 우리같이 여그 저그 떠돌믄서 장사하는 치들한테는 체력이 질이랑께. 만날 그런 밀가리 음석만 묵지 말고 밥도 묵고 그래야써."
"네. 아저씨는 식사하셨어요?"
"그람. 오전에 저짝 돌고 오믄서 식당에서 혼자 묵었다. 나 잠깐 화장실 잠 댕겨올랑께 손님오믄 니가 쪼까 봐줘라잉~"
"네. 다녀오세요."
한 동네를 자주 다니다 보면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 안면도 트이게 마련이다.
이 바닥 역시 종목이 같은 장사치들 사이에선 서로의 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또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싸움이 일기도 하는 치열한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자연섭리가 어김없이 존재한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발악이란 건 밥그릇만은 뺏기지 않으려는 악착같은 생존욕구랄까, 그래서 남들 보다 더 독하게 으르렁대는 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건 그렇게 고지탈환을 위해 생사를 거는 전쟁과도 같다.
그렇게 살벌한 영역다툼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건 참으로 큰 마음의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종목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또 그 나름대로의 유대관계가 형성이 되고, 동병상련인지 통하는 게 있어서 일까 서로에 대한 어떤 신뢰 같은 것도 생기게 마련이다.
지루하게 혼자 서서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것 보다야 말동무라도 있는 게 조금이라도 고단함을 덜 수 있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데에도 그들은 적이 아니라 동지이기 때문이다.
단 하루 동안의 짧은 만남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와의 인연을 지속하게 된 연유가 첫 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여자가 떠났으리라 생각하고 집으로 갔을 때 준석의 큼지막한 옷을 입고 저녁준비를 하고 있던 여자를 그냥 둔 때문만도 아니었다.
준석이 여자와 두 번째 식사를 마주하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내일은 여자에게 옷이라도 한 벌 사다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아마 그때부터 였으리라고.
어쨌든 준석은 죽을 결심으로 자신의 트럭으로 뛰어들었던 낯선 여자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에 대해서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녀의 이름이 수인이라는 것 외에는...
준석은 오늘 점심도 자장면을 시켜놓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리에 서서 그릇째 들고 식사를 했다. 자리를 비우면 물건을 대신 봐 줄 이도 없거니와 내심 그 사이에 손님이라도 놓칠까봐 걱정스런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벌써 세 시간째 이 길목을 지키고 있건만 이 구역에선 아직도 개시 전이다. 찾아가지 않은 자장면 그릇에는 남은 자장이 식은 채 굳어가고 어느 새 파리들이 떼로 몰려 활개를 친다.
혼자 사는 데는 꽤나 익숙해진 준석이지만, 아직까지도 혼자서 밥을 먹으려면 목이 매여 잘 넘어가지 않았다. 비워진 그릇을 보니 집에 있는 여자가 생각난다.
여자는 속이 좋지 않아 식사를 많이 하지도 못하고, 어쩌다 많이 먹었다 싶을 때면 금새 방문 앞 숫제 구멍에 다 게워내 버리곤 했다.
오늘도 장사를 나오면서 여자에게 병원에 가보라고 2만원을 두고 나오긴 했지만, 갔을지는 의문이다.
준석은 장사길목의 돌계단 위에 앉아 다시 여자의 생각에 몰두한다.
요즘 들어 부쩍 여자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기 시작한다.
어제는 집에 갔더니 책상으로 쓰는 소반위에 비누조각 3개가 놓여 있었다.
크기가 비슷한 백조 두 마리와 앙증맞고 귀엽게 생긴 새끼백조 한 마리였다.
비누로 깎아 만든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잘 만들기도 했기에 어디서 샀냐고 물었더니, 여자는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시간도 꽤나 흘렀고, 이젠 제법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다.
친구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느 연인들 같은 관계도 아니고 두 사람의 관계는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나름대로 서로에게 편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속이 좋지 않은 여자는 식사량에 비해 제법 살이 오른 것도 같다.
준석은 여자에게 가끔 용돈을 주었고, 준석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올 때 쯤 이면 여자는 저녁준비를 해 놓고서도 순대며 족발이며 군것질거리를 사다놓고 먹기도 했다.
그런 여자를 보면서 보기와는 다르게 먹성이 좋구나 하고 혼자 생각하곤 했다.
오늘도 장사는 고만고만하다.
뭐 아쉬운 데로 하루벌이는 하긴 했지만, 날이 갈수록 장사가 신통치 않은 게 이러다 물건이나 제대로 댈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준석은 트럭 안에 있을 때면 내내 여자에 대한 추리와 상상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대체 무얼 하는 여자일까? 여자의 존재는 촉수 낮은 가로등 밑을 가로질러 가는 낯선 사람의 윤곽처럼 희미하다.
준석이 여자에게 무언가를 물어도 여자는 한번도 제대로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
처음 여자를 만났을 때 왜 죽으려고 했느냐고 물으면 여자는 금새 어두운 얼굴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곤 해서 이제 더는 묻지도 않는다.
혹시 영화나 드라마 에서처럼 사창가에서 도망쳐 나온 여자는 아닐까?
그래서 자신의 비참한 삶을 비관하여 자살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아니다. 그런 여자로 보기에 여잔 너무 곱게 자란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
화장을 덕지덕지 해대는 여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뾰루지도 없고, 주름 하나 없이 뽀얀 피부를 가진 그녀다.
그렇다면 혹시 부잣집 외동딸이 아닐까?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헤어지고 생면부지의 사람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 비련의 여인은 아닐까?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어야지 생전 처음 본 낯선 남자의 집에 그렇게 있을 리가 없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혹시 기억상실증에 걸린 건 아닐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방황하고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을 하려고 마음 먹게 된 건 아닐까? 그래서 준석이 묻는 질문에 아무것도 답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상상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준석은 첫 번째 추리로 심증을 굳혀 가고 있었다.
청순하고 깨끗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여자의 손은 너무도 거칠고 투박하다.
여자의 손등에 난 수많은 상처가 고생스러웠던 과거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불우한 삶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여자의 손등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생기고, 그 흉터를 지울 수 없게 된 사실을 깨달은 순간 여자는 자신의 생을 끝마치고자 했을 거라고.
준석은 그렇게 여자를 짐작해 본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저녁을 마치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안절부절 못하던 여자는 준석에게 느닷없이 돈을 좀 빌려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꼭 갚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준석은 어디다 쓸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왠지 물어봐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그러마고 했다.
다음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준석은 은행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으로 50만원을 인출했다.
집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준석은 불안하기만 하다.
여자가 그 돈을 가지고 자신을 영영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여자가 집에서 떠났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온다. 준석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집으로 향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대문을 돌아서자 준석의 방 창문에서 빛이 새어나온다.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출입문을 두드린다.
세수를 하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밥상위엔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이 끓여져 있다.
아마도 오늘이 여자의 생일인가보다 하고 준석은 생각한다. 얼핏 스친 책상위에는 한 마리의 백조만이 놓여져 있었다.
"어이~ 준석아! 요즘 얼굴이 폈다. 뭐 좋은 일 있냐?"
"아이고. 형님 오늘 좀 늦으셨어요."
오랜만에 만난 한씨 형님은 나이가 마흔을 바라보고 있지만 여태 장가를 못 든 노총각이다. 그래서 준석은 한씨를 깍듯이 형님이라고 부른다.
한씨는 고등학교까지 고아원에서 살다가 학교를 졸업 하자마자 여기저기 떠돌며 장사를 배웠다고 했다. 그래서 한씨의 가장 큰 소원은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아들, 딸 많이 낳고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 했다. 고아로 자란데다 뚜렷한 직장 없이 여기 저기 떠도는 트럭행상에게 어떤 여자가 시집을 가려고 하겠는가마는 심성이 착한 한씨인지라 요사이 어떤 과부와 눈이 맞아 곧 있으면 장가를 간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었다.
"형님도 신수가 훤해지는 거 보니 요새 뭔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짜슥~ 어디서 또 뭔 소리를 들었는갑지?"
하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연신 싱글벙글 인 게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준석은 한씨의 소원대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언젠가 한씨가 준석에게도 물은 적이 있었다.
"너는 꿈이 뭐냐?"
준석의 꿈은 4년 전에는 전자업체에 들어가 열심히 일해서 승진도 하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그런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연이은 취업의 실패로 트럭행상을 시작하게 됐다. 또래의 다른 이들이 잘 다린 고급 양복을 입고 고층 빌딩의 회전문을 밀고 회사에 출근을 할 때 준석은 트럭에 야채와 과일을 싣고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그날의 매상을 가늠하고 있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준석은 트럭행상을 하면서도 간간이 취업원서를 넣어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는 열리지 않는 좁은 문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젠 컴퓨터가 놓인 책상에 앉아 상사에게 올릴 결재서류를 준비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보다는 서울 시내에 어엿한 준석의 과일가게를 내고 찾아오는 손님에게 덤으로 아오리 사과를 한두 개 얹어주는 모습을 상상하는 게 현실이 되었다.
준석은 꺾여 버린 희망 대신 또 다른 꿈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내려다보는 성남시내는 아기자기하고 참 아담한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준석과 함께 지내면서 조금씩 밝아지는가 싶었던 여자는 최근 들어 더욱 우울해 진 것 같다. 일부러 모른 척 하긴 했지만 가끔 밤에는 몰래 울기도 하는 것 같았다.
준석에겐 아무 말도 않는 여자였기에 더 이상 물을 수도 그렇다고 자신이 어떤 위로를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가녀린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여자의 뒷모습을 볼 때면 준석도 모르게 가슴이 아프고 마음으로나마 그녀를 위로해 주곤 했었다.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어느새 준석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오늘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좋은 경치를 구경시켜 주려고 생각한 자신이 준석은 한없이 기특하기만 하다.
삼계탕을 주문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준석은 장사를 하면서 만난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같은 장사꾼으로 한 동네에서 자주 부딪치기도 하는 최씨아저씨와 한씨형님에게서 주워들은 농담들도 이야기 해준다. 숫기라곤 없어 처음 여자와 만났을 때만 해도 서먹하고 어색해하던 준석이 오늘 따라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놓는다.
여자는 준석이 하는 얘기를 물끄러미 듣고만 있다가 준석이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는 양이 우스워 간혹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준석은 웃는 여자를 보며 더욱 과장되고 큰소리로 웃어보이곤 했다. 여자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고개를 들자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청주에서 태어났어요.
올해 서른하나 구요. 보기보단 꽤 젊죠?
가족은 부모님과 저 세 식구였어요.
부모님은 시내에서 조그만 과일가게를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때 시골 과수원에서 과일을 사가지고 오시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전 그때부터 스물다섯 살이 될 때 까지 과일이라곤 먹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부모님처럼 과일장사를 하고 있으니 참 알 수 없는 노릇이죠?
이 일을 시작한지는 4년 쯤 됐어요.
참 우습죠. 시간이란 건 그렇게 아픔까지도 무뎌지게 하나 봐요.
녹차의 쌉싸름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간다.
창밖으로 성남시내를 내려다보는 준석을 여자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무언가 준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했지만, 그저 입 안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여자는 그만 포기하고 준석처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불을 끄고 누웠다.
자리를 펴고 누웠지만 준석은 잠이 오지 않는다.
여자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엔 슬그머니 일어나 앉는다.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잠이 안 와요?"
준석의 물음에 여자는 준석이 누운 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무릎에 턱을 고인다. 준석도 일어나 앉는다.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빛에 두 사람의 형체가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다.
"그리스신화 좋아하세요?"
여자가 준석에게 묻는다.
갑작스런 질문에 준석은 대충 얼버무린다.
어느 나라에 세 공주가 있었대요.
그 중에서 셋째인 프시케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보다 더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곤 했어요. 신에게 바쳐야 할 칭송을 인간이 받자 이를 질투한 아프로디테가 프시케에게 저주를 내렸대요.
"너는 인간이 아닌 괴물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저 산 꼭대기에 너의 남편이 될 이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곳으로 떠나거라."
프시케는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을 거부할 수 없어, 그를 찾아 산으로 갔어요.
남편이 될 이를 찾아 간 프시케는 호화로운 궁전에서 맛있는 음식과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대요.
하지만, 자신의 남편이 될 거라는 괴물은 그녀 앞에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그녀를 찾아와 날이 밝기 전에 떠나곤 했어요.
그녀는 떠나지 말고 얼굴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으나, 남편은 들어주지 않았어요.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면, 이 행복은 영원히 깨져버리는 거라고... 절대로 자신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말라고...
남편의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 프시케는 칼을 들고 남편이 잠든 방을 찾아가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신 중 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에로스였대요.
아프로디테의 명을 받고 저주를 내리러 갔던 에로스가 그만 프시케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버린 거죠.
에로스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프시케를 버리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대요.
프시케와 에로스.
에로스는 약속을 져 버린 프시케를 버리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대요.
날개옷을 절대로 주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잊어버린 나무꾼이 선녀에게 날개옷을 꺼내주자 선녀는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대요.
마치 어렸을 때 들었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준석은 생각했다.
에로스의 약속과 선녀의 날개옷.
준석은 여자가 한 이야기가 마치 여자에 대한 금기의 말처럼 들린다.
어둠 속에서 등을 구부리고 앉은 여자의 윤곽이 희미하게 비친다.
금방이라도 여자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이고 만다.
여자는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에로스는 프시케를 다시 찾아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여자는 하늘거리는 긴 원피스를 입고 있다.
원피스는 땅에 닿아 끌릴 정도로 치마 끝이 길게 늘어져 있다.
여자는 오늘 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항상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도 없다.
그녀는 밝게 웃고 있었다.
준석은 여자의 모습이 참 눈부시다고 생각하며 한발 한발 여자의 곁으로 다가간다.
여자가 준석을 보며 환하게 웃어준다.
준석은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여자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웬일인지 여자에게 다가 갈수록 여자는 더욱 멀어지기만 한다.
준석은 더 가까이 여자에게 다가가려 한다.
하지만 여자는 점점 멀어져 가고 웬일인지 준석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준석은 여자를 쫓아가려고 버둥거리다 그만 잠에서 깬다.
등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젖은 웃옷을 벗다가 여전히 웅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띈다. 다가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준석의 행동에 여자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든다. 아마도 그 상태로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여자는 준석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준석은 여자의 옆에 앉아 여자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댄다.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달콤한 향기가 난다.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준석을 바라보자 준석은 가만히 여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여자의 손이 준석의 등에 닿는 순간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밀치고 그녀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포갠다.
좁은 방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가 서서히 높아진다.
에로스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프시케를 버리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대요.
아직도 여자가 해 주었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준석은 여자의 벗은 몸을 처음 보았다. 여자의 살결이 참 보드랍다고 느끼며 여자의 허리를 가만히 쓸어내린다. 여자는 두 눈을 꼭 감고 있다.
준석은 여자의 두 다리를 가만히 쓰다듬다가 조심스럽게 여자의 안으로 들어간다.
앰뷸런스는 어느새 저만치에 사라졌지만 아직도 귓가에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여자가 떠나 버린 1년 전에도 준석은 이 길을 달리고 있었다.
여자가 떠나던 날. 방안에는 여자가 입고 있던 원피스와 재킷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고, 꼭 갚는다던 돈 50만원이 든 흰 봉투가 재킷 위에 올려져 있었다. 책상위에는 어느 날 새끼와 짝을 잃은 백조 한마리가 여전히 쓸쓸한 모습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여자가 남긴 건 준석이 사준 몇 벌의 옷과 비누로 깎아 만든 백조 한마리가 전부였다.
불이 꺼진 방문을 열고 들어가던 준석은 아직도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던 여자를 생각한다. 그녀가 떠난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아무렇게나 옷을 걸어둔 행거에는 아직도 여자가 입던 재킷이 그대로 걸려있다.
준석은 문득 생각났는지 재킷에 손을 넣어본다.
얼마나 자주 꺼내 봤던지 모서리가 너덜너덜 해지기 시작한 사진 속에는 1년 전에 떠난 여자가 한 남자와 다정하게 웃고 있다.
그들 옆에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프로디테가 요염한 포즈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준석은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는다.
다시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던 준석은 라이터 불을 사진의 한쪽 모서리에 갖다댄다.
불은 서서히 그들의 가슴을 태우고, 목을 태우고, 얼굴을 태우고 있다.
타들어 가는 사진을 보면서 준석은 생각한다.
다음달부터는 천 원짜리 잡화들을 떼어다 팔아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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