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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미선/단편/둥지/06.07.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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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14회 작성일 06-07-20 14:13

본문

리토피아 신인상 응모작
(제목 : 둥  지)

지원부문
단편소설
작 품 명
둥    지
성    명
명 미 선 (여)
연    령
28세(만26세)
이 메 일
impalpable@hanmail.net
주    소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3동 3-148
연 락 처
016-239-6486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리자 시야를 가득 메우던 암흑이 사라지고 불빛이 각막에 쏟아진다. 원형의 전구 여섯 개가 꽃잎처럼 둥글게 모여 만들어진 커다란 조명이 서서히 눈앞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오 분이나 지났을까, 마취에서 풀리지 않은 몸뚱이를 가눌 수 없어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수술대에서 내려왔다. 수술대에 몸을 뉘인 게 벌써 다섯 번째다.
마취제가 몸 안에서 서서히 분해 되는 께름칙한 느낌보다 내가 아직도 생식기능을 버리지 못한 암컷이라는 생각이 더 지독하고 고통스럽다.
여자들이 위대해 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은 달리 하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며 궁극적인 목표인 '종족 번식'을 충실히 잘 해내는 ‘노예’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이 병원에 와서 의사와 상담을 하고, 수술을 하고 내려와 누워있는 지금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삼십 여분일 것이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기분 나쁜 변화를 깨닫기까지는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더 지났는데, 그 시간이 단 삼십여 분 만에 처음처럼 되돌려 졌다는 게 어쩐지 좀 싱겁다는 생각이 든다.
초음파 검사를 하고 수술 의사를 밝히자, 의사라는 작자는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자궁 속에다 메스를 들이댔는지 용케도 알고서 내게 물었다.
  "지금 몇 번째 수술이시죠?"
  "다섯번짼데요"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찡그리는 게 마치 오물이 묻은 더러운 걸레를 보는 듯한 표정이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나 같은 여자들 때문에 돈을 벌고, 골프를 치고, 병원을 늘리고, 밥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다는 걸 순간순간 잊어버리고 사나 보다.
그들 앞에 가랑이를 벌리고 앉은 여자들이나 그런 여자들의 가랑이속에 메스를 들이대는 자들이나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마는, 그래도 그들은 우리보다 고고하고 깨끗한 사람이고 싶어 한다.
  "이번에는 그냥 수술해 드릴 수 있지만, 다시 이런 경우가 생기면 그때는 수술이 어려워집니다. 잦은 수술로 인해 자궁내벽이 심하게 얇아진 상태입니다. 다음 번 수술시 출혈로 환자의 생명까지 위협받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수술이 잘 된다고 해도 세균에 의한 감염 확률이 높아요. 후에는 다시 임신하기도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부득이한 상황이라면 피임시술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처음에야 내가 무지해서라고 쳐도 두 번째 수술을 하고 나서는 피임시술을 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이유도 없이 그냥 거절해 버렸다.
아니, 어떤 일에든 이유가 없는 행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난 여자로서의 생식기능을 상실하고 싶은 거다.
조물주가 사람을 만들 때 눈, 코, 입이 마땅히 가져야 할 기능을 주신 것처럼 세상에 여자라는 존재를 만들었을 때에는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
그런데, 그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 내 생명도 위협받게 된다니.
난 다만 여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것인데, 그 권리는 내 삶까지도 담보로 잡고 있다. 내게 주어진 여성을 포기하는 것이, 결국 나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신성한 권리가 아니라 가혹한 형벌이다.

이번 역시 준희의 아이는 아니다.
지난번 취재를 계기로 알게 된 시우일 것이다.
시우는 내가 다니는 잡지사에서 이번 달 화제의 인물로 선정된 재즈칼럼니스트였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재즈카페에 들어섰을 때 카페에선 귀에 익은 선율의 곡인 "Feeling so good"이 들려왔다.
나와 통화하면서 미팅 스케줄을 잡을 때만 해도 먼저 가서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던 사람이 아직 도착 전 인 것 같다.
  '그러면 그렇지. 음악 한다는 작자들은 거만하기 짝이 없어...'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면서 속으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뀐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담배 한대를 거의 다 피웠을 즈음, 연주가 끝난 무대에서 노래 부르던 남자가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최도해씨 되십니까?"
"네, 그런데...."
"아, 맞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시우라고 합니다. 제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미인 이시네요."
  얼굴 가득 지나치다 싶을 만큼 반가움을 표하며, 내게 인사를 청하는 남자.
재즈칼럼니스트라 하여 구레나룻까지 길게 수염을 기르고, 곱슬거리는 장발에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를 가진 30대 중반의 남자를 상상하고 있던 내게 시우의 등장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내 또래이거나 옷 스타일에 따라서는 훨씬 더 어려 보일 수 있는 앳된 외모에 흰색 셔츠를 받쳐 입은 갈색의 브이넥 니트. 주름이 잘 선 면바지와 세무재질의 단화, 방금 수염을 깎고 나온 듯 깔끔한 턱 선과 이지적으로 보이는 살짝 웨이브 진 긴 커트머리, 차갑고 깊은 까만 눈동자.
그에게선 결벽증에 가깝도록 깔끔한 비누냄새가 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상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의외성 때문에 그에게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원만하길 바랬던 그와의 관계가 삐걱거리게 된 건 이번 일 때문이 아니다.
내 몸 어딘가에 그의 흔적을 새겨버렸다고 해서 괴로워하며 그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런 일로 헤어짐을 택할 만큼 난 가볍지가 않다.
그는 내 삶에 끼어들고 싶어 했다. 쿨한 남자인줄 알고 만난 그는 몇 번의 잠자리를 하면서 내게 첫눈에 반했다며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얘기했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상대가 나였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결혼을 택하기 위해 여자들은 많은 것을 포기한다.
자신의 이름과 사회적 지위와 오랜 친구와 결국엔 자신의 삶까지도 말이다. 결혼은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누군가의 삶에 편입되는 것이다. 나를 버린다는 건 무엇보다 고통스럽고 끔찍한 일이다.
아마 이번 역시 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가 다 일 것이다.


  병원에서 나오자 택시 한대가 스르르 미끄러져 오더니 내 앞에 멈춘다.
일부러 손을 뻗어 멈추라는 신호를 하거나 택시를 타고 갈 사람이라고 애써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 다행이다.
뒷좌석에서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리는 요란하고 촌스런 아줌마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내가 병원에서 나온 모습을 봤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혹여나 그 모습을 봤다 손 치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곳과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이 곳에서 우연히 스친 중년의 여자가 과연 나를 기억이나 할까. 설사 기억하고 있다 해도 나와 무슨 연관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하는 내 꼴이 참으로 우스워 견딜 수가 없다. 무엇이 두려운 건지 연고지 전혀 없는 이 동네, 그것도 제일 후미진 이 병원으로 찾아든 것만 보더라도 내 모순성에 대한 충분한 반증이리라.
조금 전 그녀의 체온이 아직 남아 아랫도리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온다.
겉모습은 촌스럽고 싸구려 같은 저 여인이 어쩌면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는 금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우스워져 피식 웃는다. 창을 내리고 제법 서늘해진 바깥공기를 한껏 크게 들이마셨다.
찬바람이 뺨에 닿는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 냉랭한 시선과 함께 내게 던져지던 간호사의 말들이 바람과 함께 문틈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온몸에 스민다.
'찬바람 오래 쏘이지 마시구요, 아랫배를 따뜻하게 하구 누워 계세요. 최소한 일주일정도는 집에서 쉬시구요, 대중목욕탕 같은데 가지 마시고, 2, 3일 지나면 가볍게 샤워하셔도 되요. 술, 담배도 하시면 안되구요, 이틀 후에 병원 다시 오세요...'
마치 교본을 읽기라도 하듯 높낮이가 없는 일정한 톤으로 이야기하고 나서 "주의사항"이라는 제목으로 큼직하게 몇 줄 적혀있는 A4용지 한 장을 건넨다.
그래, 이걸로 끝이다.


사람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게 그나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간섭하고 있는 사람은 준희 뿐이었다.
내가 대학 3학년이 되던 해에 준희는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이었고, 동아리모임에서 처음 알게 된 그 날부터 한결같이 나를 챙겨주던 남자였다. 내가 그 외의 숱한 남자들을 만나고 헤어진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었다.
하지만, 준희를 보면서 어떤 애틋함을 느끼거나, 설렌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감정은 이적지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다만 곁에 누군가 필요할 때는 그를 부르곤 했다.
그럴 때의 그는 마다하지 않고 언제든지 내게 달려와 주었었다.
준희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넉 달쯤 전이었을 거다.
난데없이 준희는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술에 취해 나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준희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넌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니?"
한참 후에 그는 조용히 내게 물었다.
  "난 어딘가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아."
  "결혼이 너에게 굴레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살림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건 생각만 해도 지옥 같아. 혹시나 내가 사회생활을 하게 되더라도 남편과 아이라는 족쇄는 그대로잖아. 나도 남들처럼 무언가에 얽매이게 될까봐 두려워. 난 그냥 어떤 제약도 없이 평생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사랑하는 사람과 아침에 함께 눈을 뜨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여행도 가고. 사계절이 변할 때마다, 세월이 변할 때마다 그 변하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고, 평생 추억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친구가 생기는 거잖아. 너를 닮은 예쁜 아이와 그리고 너의 모든 걸 용서하고 감싸줄 수 있는 사람. 너의 든든한 편이 생기는 거야."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그 사랑이란 것도 언젠가는 변하게 마련이잖아. 사랑이 영원하다면 왜 서로 싸우고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찾으려고 애쓰는 걸까?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사랑이 변하는 걸 본다는 건 너무 큰 고통일 거야. 날 닮은 아이... 또 다른 내 모습이겠지? 또 다른 내가 점점 자라기 시작한다면 다른 하나는 점점 없어지고 말겠지. 내 존재를 상실하게 되는 거야."
  "그건 지나친 비약이야. 넌 자기애가 너무 강해. 부정적인 거 말고 긍정적인 것만 생각해도 좋은 일들이 얼마든지 있어."
  "맞아. 나는 자기애가 강해. 내가 왜 이렇게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 된 건지는 나도 모르겠어. 난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게 싫어. 결혼이라는 건 내 이름을 버리는 거야. 결혼과 동시에 사람들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난 한사람으로서의 최도해가 아니라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로 불리게 될 테니까."
  "혹시 결혼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니니? 처음엔 네가 정말 혼자이길 원한다고 생각했었어. 근데, 어느 순간 넌 결혼을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남들처럼 행복해질 자신이 없어서. 아니면, 너의 결혼에 어떤 불행이 찾아 올까봐 주춤하고 있는 건 아닐까? 넌 혼자로서의 삶에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이 두려운 거야. 그렇지 않니?"
  "설마 너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사랑을 믿지 못하는 네가 너무 가엾어."
눈가에 이슬이 맺힌 그의 눈은 너무나 깊고 투명하다.
갑자기 준희가 안고 싶어졌다.
앙상한 겨울나무 같던 내 몸뚱아리가 준희로 인해 촉촉히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하나, 둘 모든 허물을 벗어버리고 준희를 안았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다정하게 그의 고통과 슬픔을 애무하고, 그의 모든 걸 내 안에 받아들였다.
그를 내 안에 가두었다. 어쩌면 준희를 계속 내 안에 붙잡아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온 힘을 다해 준희를 감싸안은 채 내 안의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없이 깊고 메마른 우물은 그의 외로움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준희가 얕은 신음을 내뱉는다.



  신호등이 지금 막 주황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뀐다.
택시가 멈춰서고, 내가 탄 차 옆으로 검은색 소나타가 슬며시 정차한다.
보조석에 탄 여자가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꼬마아이들에게 애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웃으며 뭐라고 말을 건네고 있다. 그리고 다시 운전석의 남자와 함께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한 가족처럼 보인다.
단란한 가정의 모습이 저런 걸까. 단란한 가정. 이 말이 내게도 어울린 적이 있었던가...


  엄마는 오늘도 내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올 때까지 거실의 흔들의자에 온 몸을 파묻은 채 앉아 있다.
"나 왔어. 엄마 뭐해? 오늘두 바깥구경 하는 거야?"
역시나 어느 한 곳을 보고 있다기 보다는 자기 안의 우물을 들여다보듯 깊고 멍한 눈빛이다. 엄마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나를 본다.
초점 없는 싸늘한 눈동자다.
  "밥 먹어."
힘없이 한 마디 하고 나서 다시금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본다.
베란다에는 잎이 누렇게 말라버린 난 화분 다섯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엄만 뭐하는 사람이야? 딸이 왔는데 제대로 눈도 안 맞추고,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했잖아. 집안 꼴이 이게 뭐야? 엄마가 반찬하나 제대로 만들어 준 게 언젠 줄 알아? 대체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한테까지 이러는 거야? 말을 해봐, 말을 해보라구!"
갑자기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라 엄마한테 마구 쏟아 붓고 말았다.
엄마는 요즘 고모의 도움을 받으며 병원에 다니는 중이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다시 예전처럼 생기 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으면 하고 항상 소원했었다. 나의 외침에 잠시 움찔하며 의자에서 일어난 엄마의 흔들리는 두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우리 도해는 크면 뭐가 될까? 우리 도해 똑똑하고 야무지니까 자기 일 하면서 멋있고 당당하게 사는 커리어우먼이 될거야. 그치? 남자들 보다 훨씬 멋지게 말이야..."
하늘거리는 긴 원피스에 곱슬거리는 파마머리를 하나로 예쁘게 묶은 엄마는 그네가 흔들거릴 때마다 그네에 몸을 의지한 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잘게 부서지는 오후의 봄 햇살이 공원의 흙먼지 위에서 어떤 환영을 만들고 있었다.
엄마는 결혼 전에 시내에 조그만 꽃집을 했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머리를 하나로 묶고 부서질 듯한 꽃잎보다 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꽃을 팔았을 것이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가게에 화분을 사러 온 아빠와 첫눈에 반해 6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결혼과 동시에 엄마의 꽃집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졌고, 엄마는 그때부터 집에서 꽃꽂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엄마 우리 시내 구경갈까?"
여린 꽃잎처럼 새초롬한 엄마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거리를 걸었다. 가끔 낯선 사람과 어깨를 부딪쳐도 엄마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거리에는 리어카에 온갖 잡다한 물건을 가득 쌓아놓고 파는 상인들이 호객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옷가게에는 올 봄에 유행하게 될 옷들이 쇼윈도에 걸려 봄 처녀들의 시선을 잡아끌며 한껏 맵시를 뽐내고 있다. 마치 이 거리가 처음 와 본 곳이라도 되는 듯 엄마는 신기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둘러본다. 양말이며 머리핀, 하늘거리는 스카프와 천 원 짜리 면 티와 원색의 여성 니트, 흔히 볼 수 있는 그 것 들도 오랜만의 외출인 엄마에게는 모든 게 처음 보는 물건처럼 새로워 보이는가 보다. 한 옷가게에 들러 신상품 딱지가 붙은 옷을 이것저것 입어보기도 하고, 가게 앞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튀김으로 고픈 배를 채웠다.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하자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는 길, 우리는 조그만 꽃가게에서 꽃을 포장하고 있는 한 아줌마를 보았다.
나이를 짐작 건데 엄마 또래이거나 조금 더 많아 보인다.
꽃가게 앞에서 엄마의 걸음은 잠시 동안 멈추어져 있다.
그 날 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야만 했다.
울면서 애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아빠의 고함소리에 묻힌다.
  "여자가 어딜 싸돌아 다녀! 우리가 집이 없어, 차가 없어? 내가 돈을 적게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가져다 준 돈으로 도해 학교 보내고 살림하고 우리 세 식구 넉넉하게 잘 쓰는데, 당신이 뭐하러 또 돈을 벌어. 용돈?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 되지 당신이 무슨 돈 쓸데가 있어서 용돈이야? 자고로, 여자하고 사기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면 깨지기 마련이라고 했어. 여자가 집안 건사하고 살림만 잘하면 되지. 한번만 더 밖으로 나돌겠단 소리하면 당신 쫓겨날 줄 알아!"
아마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봄볕에 반짝이는 투명한 모래알 같던 엄마의 웃음은 봄의 자취가 사라질 무렵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엄마가 차려준 밥상은 시어터진 김치와 소금을 얼마나 넣었는지 짜디짠 콩나물국과 계란 프라이, 말라비틀어진 멸치볶음이 전부다.
그래도 얼마 만에 받아본 엄마의 밥상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엄마한테 너무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 코끝이 찡해진다.
밥을 먹다가 말고 상을 치우는 날 보며 식탁 맞은편에 멍한 얼굴로 앉아 있던 엄마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만 먹어? 많이 먹어야 빨리 크고 힘이 나지."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얼굴이 너무나 서글퍼져 그만 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맑고 투명한 웃음으로 사랑스럽게 나를 보던 엄마는 내겐 더 이상 없었다.


오랜만에 엄마와의 외출을 생각하며 들뜬 기분으로 들어선 집에는 고모가 와 계신다.
고모는 날 보더니 왠지 주춤거리는 듯하다가 안방으로 들어가 여행용 가방을 꺼내 나오신다. 이어서 외출복 차림의 엄마가 아빠의 한쪽 팔 안에 얌전히 갇힌 채 걸어 나온다.
  "도해야, 오랜만에 엄마하고 외출이나 하자."
아빠는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지만, 난 그 외출의 의미가 무언지 알 것 같았다.
차를 타고 두 시간쯤 걸려 도착한 곳은 어느 깊은 산 속의 외진 건물이었다.
정문부터 을씨년스런 철창이 달린 게 보기만 해도 가슴이 꽉 막힐 듯 답답함이 밀려온다.
아빠는 차를 세우고 고모와 함께 엄마를 부축한 채 건물을 향해 들어가신다.
나는 엄마의 옷가지와 소지품이 들었을 가방을 든 채 몇 걸음 따라 들어가다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왠지 저 안으로 들어가면 영영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아.
엄마를 불러야 해. 엄마를 못 가게 붙잡아야 해.
하지만, 단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고, 더 이상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막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엄마가 나를 향해 돌아서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작별을 고하듯이 희미한 미소를 짓는 엄마의 얼굴이 내 시선에 매달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것이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분명 아빠는 엄마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곳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곳은 엄마의 병을 고치기는커녕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도록 엄마를 송두리째 삼켜버리고 말았다.
엄마의 존재가 사라짐과 동시에 난 내 가슴속에 있는 아빠라는 존재도 함께 떠나보냈다.


택시에서 내려 오피스텔에 들어서자 마취가 풀리기 시작한 아랫배에서 찌릿찌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느닷없는 통증 때문에 몰입해 있던 생각들에서 벗어났다.
일부러 방안의 온도를 알맞게 맞춰놓고 나갔는데도 텅 빈 방은 을씨년스런 기운이 감돈다.
기분 탓일까. 방이 조금 추운 것 같다.
내 마음이 추운 건 아니겠지.
늘 혼자였으면서도 이적지 가져보지 못한 감정이란 생각이 든다.
극도로 혐오하는 감정. 나는 지금 외로워하고 있다.
처음으로 내 몸뚱이에 기생해서 자라기 시작한 다른 생명을 가위로 잘라내 버렸을 때도 이렇게 내 몸 한 구석이 비어버렸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얼까. 정체 모를 지금의 내 모습이란.
갑자기 누군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자궁 안 쪽의 살 점 들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며 난 전화기를 향해 기다시피 다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막상 전화기를 들긴 했지만, 내 목소리를 반갑게 들어줄 사람은 없다.
그렇지. 아무도 내 인생에 끼어들었던 사람이 없었던 탓이겠지.
문득 벽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남성용 셔츠가 눈에 띈다.
지난번 마지막 잠자리를 끝으로 몇 개월 동안 연락이 없는 준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케도 준희의 휴대폰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준희의 음성을 기다린다.
  "여보세요?"
  "연락 없길래 어디 먼데라도 떠난 줄 알았더니 아직 서울에 있나 보지?"
  "........"
  "여보세요? 듣고 있니?"
  "응, 얘기해."
준희의 목소리에서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냉정함이 묻어난다.
  "그냥 내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아. 한번도 이런 감정 느껴본 적 없는데, 느닷없이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거야. 고고한 척 고독을 즐기던 인간이 갑자기 외롭다는 게 말이나 되?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인가? 넌 이해할 수 있니?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사는 것에 대해 혐오하던 내가 남들처럼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나 그래서 어쩌면...."
  "저기, 도해야"
  "응? 뭐?"
  "사실은 좀 더 일찍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깜빡 잊고 있었어. 나 결혼하게 됐어. 집에서 하도 선을 보라고 해서 나갔는데, 너무 착하고 좋은 여자더라. 너하곤 정 반대지만, 그래도 좋은 여자 인 것 같아. 수줍음도 많이 타고 말이 없는 편이지만, 마음이 참 따뜻한 여자야. 나도 이젠 누군가에게 정착하면서 가정을 꾸릴 나이가 됐잖아. 그쪽 집에서도 나이 찰 만큼 찼으니 이왕 말 나온 김에 빨리 서두르자고 해서 그렇게 됐어. 다음달 14일이니까 꼭 와라. 너한테 축하 받고 싶어. 올 거지?"
난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했다.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과장된 목소리라 그게 좀 걸리긴 했지만, 우린 아마 늙어서까지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거라며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깜빡 잊고 있었던 건 무엇일까? 나한테 연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말일까? 아니면... 나를 잊고 있었다는 말일까.
그렇게나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 왔으면서도 하루아침에 나를 잊을 수가 있을까. 나랑 정 반대인 여자라고? 나라는 인간이 지긋지긋해져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싫어서 나와 반대인 여자를 찾았던 건 아닐까.
난 분명 준희에게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심장에서 심한 한기가 느껴진다.
휑한 바람이 자꾸 심장을 건드리는 게 틀림없이 내 몸 어딘가에 커다란 큰 구멍이 뚫려 버린 것이다. 그 구멍은 점점 커져서 결국 내 몸뚱아리를 잠식해 가겠지.
그러다 보면 나라는 존재는 흔적도 없이 공중분해 되고 말거야.
갑자기 무서움증이 온 몸 가득 소름으로 돋아난다.
여기 있으면 난 언제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고.
강박적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짐을 꾸리고 있다.

자유롭게 떠도는 새들에게도 각자 저마다의 둥지가 있다고 했다.
언제라도 찾아가 쉴 수 있는 둥지가.
오랜 여행에 길들여진 철새들에게도 언젠간 찾아갈 둥지가 있게 마련이라 했다.
긴긴 여행이 끝나면 고단하고 지친 날개를 쉴 수 있는.
나에겐. 내게도 그런 둥지가 있을까. 내게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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