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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미/수필/확인과 확신/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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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89회 작성일 06-07-20 14:27

본문

<수필>
확인과 확신

            박 혜 미

오랜만에 편히 앉아서 또박또박 글씨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흘리듯 써 내려간 무기력한 나의 글씨는, 이 사회에 때묻어버렸다는 증거인 것 같아 내가 이렇게 변했나 싶었는데, 조금만 노력해도 되찾을 수 있는 것들이 사실은 참 많은가 봅니다.
내일이면 7월 1일, 발령 5개월째 되는 날입니다. 3월 한 달 동안에는 낯선 곳에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4월에는 슬슬 적응하면서 살이 붙기 시작하더니, 잠시 덮어두었던 당신에 대한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더군요.
건드리는 것조차 아파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으려는 그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정은이가 터키로 여행을 가고, 몇 시간이고 부대끼고 앉아서 수다를 떨곤 했던 친구들마저 신규 발령으로 제 한몸 건사하기 버거워하고, 그래서 나는 홀로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살이 다시 빠지기 시작하고, 많이 아프기도 하였지요. 다른 사람들은 신규가 고생이 많아서 야위어 간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당신들이 뭘 알아 쓸쓸히 중얼거려 보기도 했습니다.
꽃이 유난히 예뻤던 토성 학교의 5월, 난데없는 낯선 남자의 등장으로, 괜히 숨죽여 있던 당신이라는 존재를 나는 또 다시 자극하고야 말았습니다.
오래도록 앓았습니다. 오래도록 끌어안고 놓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감정은 옅어지고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바랬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과거에 얽매어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숨이 막혔습니다. 스스로 만든 울타리 안에 갇혀 누구에게도 제대로 마음을 열지 못하고 흔들림마저 부정하려는 내 자신이 점점 불쌍해졌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연락하지 말자던 약속을 깨고 전화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야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또 다시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음과, 돌이키기엔 너무 겁쟁이가 되어버린 나를 힘겨워 하는 6월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이미 나를 질려하고 있다는 걸 내가 또 다시 확인하게 될까봐,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싹을 짓눌러 밟은 건 나 자신임을 자책하게 될까봐, 나의 무모함은 어느새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정은이가 돌아오고, 그 곳에서 만난 터키인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많이도 쩌릿쩌릿하였습니다. 이미 난 나 자신을 그 터키인에게, 당신을 정은이에게 감정이입 혹은 동일시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새 나는 정은이를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이유가 있고, 악역은 죽어도 맡기 싫어하고, 천사의 탈을 쓴 악마처럼 나를 괴롭히던 당신이지만, 차마 나는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했던 그 말들을 정은이가 고스란히 반복하는 것입니다. 많이도 정은이를 다그치면서, 너 그러면 안 된다고 야단했습니다. 그렇게 나를 위로했습니다.

내 이성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하지 않겠냐고 늘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선 비슷한 소개팅도 몇 번 해 보았지만, 시작을 하려던 게 아니라, 당신이라는 그림자에 갇혀버린 나 자신을 다독이기 위한 이기적인 마음뿐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요, 보상심리. 위축된 자존감을 다시 일으키려는, 힘에 부친 노력이었습니다. 일일 데이트를 참아주신 그 분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존감을 잃어서 버거워한다지만, 나는 자존감이 너무 강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나의 밖에서 시작된 문제이면 좋으련만, 내 안에서 끄집어  내려니 공허하기만 하고, 답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내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심지어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생각을 억지로 어떻게든 합리화시키게 되고, 나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싶고, 목 놓아 울어보고도 싶고, 교사로서의 나는 있는데, 나로서의 나는 없구나 괴로워도 하고, 그렇게 몸부림 치고 있었습니다.

어떤 공백도 없이, 스물 넷, 교사라는 이름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게, 순탄하게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은 흔하지 않은 인생 경로의 주인공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와 더불어, 뭐든 앞으로도 이렇게 척척 해결되어야 한다는, 교만함과 열등감이 뒤섞인 강박관념까지 만들어 주었습니다. 취업도 했으니 이제는 결혼만 하면 된다는 생각. 이왕 일찍 자리 잡았으니 일찍 결혼하고, 젊은 엄마로 멋지게, 쿨하게, 행복하게 살아야지 생각했습니다. 계획대로 되어야 하는데, 연애나 결혼은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죽어도 이룰 수 없는 과업이라는 걸 외로움이 증명해 주었습니다. 또 다시 몸과 마음은 지쳐가고, 당신이란 존재는 죽어도 내 길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채 살려두고. 누군가에게 의지해버리고 남은 일생 편하게, 편하게. 그래도 되는 걸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우선 나부터 일으켜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바로서지 못한 채로는, 어떤 남자를 만나더라도 행복할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같은 남자는 이 세상에 아버지 단 한 사람만 존재할 뿐. 그러므로 내 욕심과 기대버리고 싶은 무기력함, 어리광은 누구도 이겨낼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 부족함마저 채워줄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 주면서, 남은 일생을 살고 싶습니다. 나 자신도 일으키지 못하면서, 내 욕심이 과했습니다. 맺고 끊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쿨하게 안녕!을 외치대던 과거도 지금은 부끄럽지만 언젠가는 웃어넘기고 마는 그런 날이 오겠지요.
운명의 짝을 만나게 되었을 때, 남자는 그 여자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 오기를 부리고, 여자는 현실과 타협해 버린다고 하더군요. 당신과의 인연은, 운명이었을까요. 아직도 진행중인, 기막힌 운명일까요. 부질없다 싶어도, 여전히 이렇습니다. 당신이 했던 말들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기가 막히게도 전부 다 맞는 말이라고 이제야 고개 끄덕이며 슬퍼지게 만듭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내게 어떻게든 가르쳐 주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가르쳐 줄 수 없어서 오죽 답답했을까요. 자신이 직접 겪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이렇게도 미련한가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이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하나 봅니다. 짠한 마음뿐입니다.
지금처럼, 연락하려하면 얼마든지 할 수도 있는 그러한 상황 말고, 군 입대 하여 100일 휴가 전까지의 기간처럼, 도저히 방법이 없는 그러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에게 정은이 같은 존재가 당신에게도 있지요. 그 분을 찾아내어 묻고 싶습니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나요. 이렇게 말입니다. 우습지요? 내가 아직도 이렇습니다. 또 하나 더 물을까요? 제가 오빠 기다리면 안될까요.
언젠가 정은이가, 웃는 방법과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방법에는 익숙해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상처받지 않고 들이대는 방법은 아직도 배우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말한 상처 받지 않고 들이대는 방법은 곧, 사랑하는 방법이겠지요. 나는 들이대기는 했으나 상처 받았다고 온갖 난리를 치며 당신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웠고, 당신처럼 정은이는 상처받을까봐 들이대지도 않았습니다. 여튼 농담처럼 나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당신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진심입니다. 이렇게나마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당신 덕분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란 확인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모두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확신을 주지 못했고, 당신은 확인시켜주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내 하루의 배경음악은 얄궂게 이별을 노래하는데, 정은이의 메시지에는 후회와 여전한 망설임이 뒤섞인 그리움의 향기가 배어납니다.
(끝)



주소: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죽현마을 동원로얄듀크 313동 202호
전화번호: 011-9172-6133
본명: 박 혜 미
약력: 1983년 9월 2일 생
    을지초-신기중-안양고-
    서울교대 영어교육과 졸업
    현, 서울토성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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