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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호/평론/디오니소스의 힘으로 ‘극복’하기/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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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48회 작성일 06-07-20 14:32

본문

성명 : 정민호
연령 : 26
성별 : 남
주소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1동 1410-3 신성빌라 가동 B01호
       jmh1500@hanmail.net
연락처 : 010-4560-9222



디오니소스의 힘으로 ‘극복’하기
_이명랑의 『슈거 푸시』

1
그녀의 이름은 ‘소희’, 그녀는 분명히 그녀만의 이름이 있다. 하지만 소희의 삶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다. 청소, 설거지, 칭얼대는 아이 달래기, 빨래 등의 가사일로 “머리를 풀 시간조차 없는” 그녀의 삶은 타인을 위한 것이다. 소희,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가사라는 단어에 삶을 빼앗긴 ‘전형적인’ 가부장제 속의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소희는 전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부장제 속의 여성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친정어머니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흔히 친정어머니하면 딸을 자신처럼 생각하며 딸을 위해 희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딸이 잠시라도 쉴 수 있도록 손녀, 손자를 보살펴주는 친정어머니의 모습은 얼마나 친숙하게 여겨지는 풍경인가? 하지만 소희의 어머니는 다르다. “여왕벌”과 꼭 빼닮은 행동양식을 보이며 딸의 모든 것을 있는 족족 빨아먹으려는 그 어머니의 모습은 결코 익숙한 풍경은 아니다.
소희는 ‘모든 것’을 빼앗긴다.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 철저하게 빼앗긴 상태다. 더욱이 미래의 모든 것들까지 저당 잡혔다고 할 정도로 소희의 미래는 결여되어 있다. 때문에 소희의 얼굴에서는 살아가려는 의지나 희망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가꾸는 것에 정신을 쏟을 여력도, 의지도 없는 소희는 누가 봐도 “포기, 체념이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는 인간이다. 그렇게 “건조한” 삶을 살아가던 소희는 우연히 백화점에서 라틴댄스 광고 전단지를 보게 된다. 전단지에는 “셀 위 댄스? 라틴댄스!”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있다. 이것은 평범한 광고 문구다. 하지만 그것이 소희의 심장을 흔든다. “고작해야 종이 위에 프린트된 흔한 풍경과 낡은 이미지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문구 하나”지만 소희의 “마음의 지형을” 뒤흔들더니 기어코 소희에게 춤을 배우게 만든다. 어머니에게 도전하는 춤을.
『꽃을 던지고 싶다』(1998)와 『삼오식당』(2002), 『나의 이복형제들』(2004)에서 시장의 황홀하면서도 애처로운 모습을 그려내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작가 이명랑의 『슈거 푸시』는 여러 모로 낯설다. 앞선 세 작품과 달리 시장을 벗어나 백화점을 소설의 공간으로 삼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억척어미’로 그려졌던 어머니를 ‘투쟁의 대상’으로 등장시켰기 때문인가? 앞선 세 작품 중 어느 하나와 『슈거 푸시』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봤을 때 동일 작가의 작품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한국사회에서 ‘소녀’이자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는 ‘여성’이 가부장제에 억압을 받았다고 하면 가해자의 정체는 대부분 아버지의 얼굴에서 찾을 수 있다. 집안의 가장으로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지닌 아버지는 그 존재 스스로가 가부장제라는 단어를 만들어냈고 그 단어를 존속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무능력한 상황에서도 여성이 가부장제에 억압을 받았다면 그때도 가해자를 아버지의 얼굴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특히 이명랑의 소설세계처럼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잠재적 아버지’인 ‘아들’이 부재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한번쯤 어머니라는 존재를 떠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이명랑은 『슈거 푸시』에서 시장 특유의 문화에서 벗어나 백화점의 라틴댄스라는 이국적인 문화에 눈을 돌리더니 그것을 기회로 금기시되는 ‘성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 의해 유지되는 가부장제를 재발견해 그것에 펜 끝을 겨눈 것이다. 그 동안 가부장제를 겨눈 언어들이 아버지를 향했다는 점에서 이명랑의 도전은 ‘문제적’이다.
한국 문학에서 어머니는 어떻게 다루어졌는가? 한국 문학은 어머니에게 인자했다. 아버지가 가해자로 될 때 어머니는 대부분 ‘모성본능’으로 특징지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사회 통념과도 맥을 닿고 있는데 아버지하면 가장으로서 권위적으로 여겨지는데 반해 모성본능을 지녔다는 어머니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식들을 사랑한다는 인식이 소설세계에까지 뿌리 깊게 닿았던 것이다.
『슈거 푸시』는 이러한 ‘통념’에 도전한다. 이명랑은 여성으로서 같은 피해자였음에도, 권력을 손에 쥐자 누구보다 잔악한 가해자가 되어 다른 피해자를 더욱 처참하게 짓밟는 어머니의 모습을 포착해 폭로하고 있다. 이러한 포착은 모성본능으로 상징되던 통념 속의 어머니들을 생각한다면 낯설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명랑의 앞선 세 작품에서의 어머니들 또한 통념 속의 어머니와 동일시되었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일까. 이명랑의 변화가 심상치 않다. 이명랑 소설세계의 획기적인 변화는 물론, 통념에 도전하는 문제작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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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거 푸시』에서 어머니는 어떤 의미를 띄고 있는가? 어머니가 ‘투쟁’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만큼 어머니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 어느 것보다 선행돼야 하는데 눈여겨볼 것은 이명랑은 발표하는 소설 순서대로 어머니의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순차적으로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이명랑이 소설가로 첫 선을 보인 『꽃을 던지고 싶다』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삼오식당』에서 어머니는 번잡한 시장판에서 가정을 책임지고 나아가 시장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듬직한 존재로 그려진다. 어머니의 이러한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부장제에서의 아버지를 ‘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리하기 위한 상황은 크게 두 가지인데 전자는 아버지가 ‘부재’한 경우이며 후자는 아버지가 ‘무능력’한 경우다. 그렇다면 이명랑은 무엇을 선택했는가? 이명랑은 『삼오식당』을 제외하고는 눈에 띌 정도로 후자의 경우로 어머니가 권력을 소유하게 됐다고 강조한다. 때문에 이명랑의 여성 화자들은 아버지를 가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여성 화자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병신”(꽃을 버리고 싶다)이자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는”(나의 이복형제들) 무능력한 존재로 비춰진다. 그렇기에 이명랑 소설세계에서 존재해서 더욱 초라한 것이 아버지이며 그런 아버지가 있기에 어머니는 더욱 위풍당당해진다.
『꽃을 던지고 싶다』나 『삼오식당』에서 ‘가장’이었던 어머니는 『나의 이복형제들』에서 ‘만신의 대리’로 등장한다. 그리곤 『슈거 푸시』에서 ‘만신’을 자처하기에 이르는데 이 과정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 등장했던 독재자들이 하늘과 신의 뜻을 알고 있다며 ‘만신의 대리’를 자처하다가 ‘만신’이 되는 수순을 밟았듯 어머니는 『나의 이복형제들』에서 『슈거 푸시』 사이에 독재자로 등극한 것이다. 반면에 아버지는 딸에게 눈빛으로 안부를 물어야 하는 “들러리”로 등장할 뿐이다.
독재자는 절대적인 ‘통제’와 ‘복종’을 원한다. 물론 가장의 역할이나 만신의 대리를 자처하던 때도 통제를 원하지만 독재자가 원하는 통제는 그 수준이 다르다. 독재자는 영원히 반역하지 못하도록 물질적인 영역을 넘어서 ‘운명’적인 것까지 통제하려 한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자식들의 운명을 통제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결혼’이다. 『슈거 푸시』에서 소희의 배우자를 결정하는 것은 어머니다. 소희는 사랑은커녕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하달”받는 처지인데 이러한 모습들은 가부장제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시대를 연상케 한다.
배경이 현대인만큼 어머니가 원하는 상대를 딸과 결혼시킨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소희의 회상으로 알려지는 ‘소희의 남자에 대한 어머니의 행각’을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어머니는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아니면 갖은 수를 써서라도 소희와 이별하게 만든다. 딸과 사귀는 남자의 어머니에게 딸의 ‘난잡한’ 생활까지도 폭로할 정도니 소희가 무슨 수를 쓴다 해도 결혼 상대를 자신의 의지대로 고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선택한 남편감은 누구인가? 그는 이제 막 부사관이 된 군인인데 남편의 직업은 대단히 상징적으로 여겨진다. “복종”을 “강조하는” 직업인 군인은 사회 속의 가부장제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소희를 둘러싼 가부장제가 더욱 공고해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분고분 좀 해봐. 나는 도대체가 당신이란 여자를 이해할 수가 없어. 뭐든지 그냥, 쉽게 네! 하고 대답하면 안 돼? 벗어. 속옷 같은 바지를 입고 가서 장모님한테 내가 사줬다고 할 거야?” (80쪽)

어머니는 “유능한 조련사”답게 결혼으로서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딸을 통제할 수 있는 충성스러운 협력자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통제 방법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방법이 아버지들의 것이라면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만의 것이 있다. 어머니들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부엌’을 소유하고 있는 어머니는 ‘음식’으로 딸을 통제할 수 있다.
소희는 젊은 시절 어머니에게 반항을 시도한다. 원하는 옷을 입고, 원하는 남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인데 어머니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소희는 단식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이런 경우 아버지들은 달래도 보고 윽박지르거나 스스로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으로 대처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르다. 부엌을 소유한 어머니는 어머니만의 히든카드인 음식으로서 딸을 농락한다. 어머니는 아버지들의 히든카드와 어머니들의 히든카드를 동시에 소유한 명실 공히 유일한 권력을 손에 쥔 ‘만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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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랑 소설세계에서 어머니의 변화는 권력을 지향하는 순차적인 변화 과정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이 시점에서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명랑이 왜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화시켜놓았느냐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버지들의 가부장제에서 아버지는 독재자이더라도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려고 시도하는데 반해 『슈거 푸시』의 어머니는 딸을 철저하게 짓밟아야 할 대상으로 그리고 있으니 그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어머니가 딸을 ‘공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딸이 어머니의 시어머니가 되는, 이 남자 저 남자 품을 돌아다녔던 할머니의 핏줄이자 할머니의 손에서 키워졌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할머니는 아름다웠던 젊은 날 여러 번 결혼을 하며 자유롭게 살다가 늙어서 갈 곳이 없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머니를 마땅치 않게 본다. 하지만 이들은 할머니를 용서하고 할머니는 그 대가로 소희를 키우게 되는데 『슈거 푸시』에서 소희를 대하는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희를 키운 할머니, 나아가 이명랑 소설세계에서 ‘복수 이상의 남자들과 관계를 맺은 여성’들에 대한 ‘어머니의 시선’을 분석해야 한다.
이명랑 소설세계에서는 데뷔작부터 줄곧 여자를 나누는 이분법이 발견된다. 그것은 ‘순수/걸레’, ‘깨끗함/더러움’으로 나누는 극단적인 분류인데 이것은 이명랑이 만든 것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한 남자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만든 것이다. 그녀들에 따르면 여자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한 남자’에 만족한 ‘아내’가 있고 ‘복수 이상의 남자’ 품에 안긴 ‘창녀’가 있다.
분류가 행해지면 아내들은 창녀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원죄’를 지닌 것처럼 취급한다. 자식들에게 “양공주의 최후는 공중화장실”(꽃을 버리고 싶다)이라고 믿게 만들 정도로 아내들에게 원죄는 죽는 순간에도 씻기지 않는 ‘절대악’이다. 이러한 이분법에 따르면 할머니도 어머니에 의해 원죄를 지닌 창녀가 된다. 원죄를 지닌 창녀는 가부장제를 파괴하는 일탈행위를 유발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할머니를 극도로 경계하고 혐오스럽게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머니는 할머니에 대한 혐오가 지나친 나머지, 또한 소희가 할머니처럼 아름답기 때문에 할머니의 원죄가 소희에게 유전되거나 영향을 줬다고 믿는다. 소희를 할머니와 ‘동일화’해 극도로 경계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무엇이든지 이상하게 보이기 마련인데 소희를 보는 어머니가 그렇다. 소희가 자신을 꾸미자 “술집 작부”라고 말하는 어머니는 젊은 시절 소희가 가출하고 돌아오자 곧장 산부인과로 데려간다. 자신이 믿는 이분법대로 소희가 더럽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다.

엄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붙들리자마자 산부인과로 끌려갔고 담당의사는 아빠의 친구였다. 내가 집을 나가자마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빠의 친구가 운영하는 산부인과를 물색했다. 병원에 끌려갔을 때는 그는 이미 나의 소변을 받아 검사를 해야만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의 등 뒤에서 엄마는 일사불란하게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의 원대로 내가 임신까지 해주었더라면 금상첨화였겠지. (192쪽)

이러한 어머니의 태도는 지나치게 병적이다.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어머니의 이런 심리는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이분법을 나누는 것은 어머니와 같이 한 명의 남편에게만 만족하는 아내들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아닌 여성들과 남성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들은 아내가 아닌 여성들이 아름답기에 선택할 자유가 있고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사는 것이라 믿는다. 물론 이들은 창녀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대신 ‘자유’를 강조한다.
이것에 따르면 소희나 할머니는 아름다워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고 어머니는 그렇지 못한 것이 된다. 이때 어머니는 심각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권력을 이용해 여성의 아름다움은 “대가리에 똥만 든 것”이라고 욕하며 아름다운 여성들을 “미친년”이라고 매도한다. 소희 역시 그런 이유로 억압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가족에 대한 작가의 ‘재발견’에서 찾을 수 있다. 『슈거 푸시』 이전에 이명랑은 자본주의가 팽배한 시장 한복판에서 억척어미들로 하여금 인간애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었다. 『삼오식당』만 보더라도 가족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아는 놔두고 가라니까! 그럼 삼십만 원 받고 새벽부터 와서 애봐줄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려? 내 몸뚱이 성할 때 니들 돈 벌라니까 왜 그려? 내 몸땡이 성할 때 니들 돈 벌라니까 왜 그려? 아는 놔두고 가! 큰애야! 최 서방! 내 몸땡이 성할 때, 내가 이거 식당이라도 할 때 니들은 돈 벌라니까 왜들 지랄이여, 지랄이! 내가 시방도 시퍼렇게 멀쩡한디.” (『삼오식당』, 109쪽)

하지만 『슈거 푸시』의 어머니는 멀쩡하다 하여 딸을 돕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의 삶이 부정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딸을 억압하는 어머니는 멀쩡할 때 영원히 멀쩡 하려고 딸의 모든 것을 착취한다.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이다. 어머니가 이렇게 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는 이명랑이 가족 안에서의 ‘권력’투쟁을 주목했고 그것으로 가족을 재발견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명랑의 소설세계에서 남자들은 무능력하다. 자연스럽게 권력의 향방은 여자들에게 흐르게 되는데 그럴 경우 어머니와 딸은 자연스럽게 경쟁상대가 된다. 실제로 이명랑의 앞선 세 작품과 달리 『슈거 푸시』에서는 모녀의 관계가 단적으로 정리되고 있는데 그 정리에 따르면 모녀관계는 “쌍살벌”의 사회와 같다. 그 사회에 따르면 여왕벌은 같은 계급의 개체를 만나면 “우위성”을 표현하고 그것을 “독점”하기 위해 “산란 억제”를 사용해 하위자의 산란을 방해한다. 쌍살벌이 집을 갖고 살아가는 고등 곤충임에도 상당히 “치졸하고 쩨쩨”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인데 『슈거 푸시』에서의 모녀 관계 나아가 가족의 관계도 이런 형태로 그려진다. 이것을 따른다면 이명랑은 기존의 가족에서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가족의 모습을 재발견했고 그것에서 변형된 가족의 모습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이유에 의하면 결국 어머니가 딸을 후계자가 아닌 억압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벌들과 마찬가지로 생리적인 이유가 있기도 하거니와 여자로서 아름다워서 어머니가 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있다는 피해의식,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위협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경계심리, 자신을 부정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런 의식에 사로잡힌 어머니는 한때 딸이었기에 딸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아버지들보다 더욱 철저하게 딸을 억압할 수 있다. 그렇기에 소희는 더 이상 반항할 방법도, 그럴 여력도 갖지 못한다.

4
니체는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에 따르면 아폴론적인 것은 창조와 질서, 조화와 균형을 뜻하며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파괴와 광란, 혼란과 도취를 뜻한다. 예술의 장르에 따라서 아폴론적인 것이 우세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더 우세하게 드러나는 장르가 있다. 전자는 회화나 조각이 대표적이고 후자는 음악과 춤이 대표적이다.
춤, 그것은 어느 예술보다도 디오니소스적이다. 춤은 광란을 더욱 광기 어리게 만들고 이성을 압도하는 정열적인 힘을 발산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니체의 예술관에 의거할 때 소희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행위이다. 어머니가 창조해놓은 가부장질서를 파괴할 수 있으며 자기도취가 가능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정열을 만들기 때문이다. 일종의 마법에 빠져드는 것이다.
어머니의 뜻대로 예술이 완전히 결여된 삶을 살던 소희는 춤을 배우고 싶다는 욕망에 처음으로 자신의 “명의”로 된 수강증을 끊게 된다. 남편이 주는 빠듯한 생활비에서 수강증을 끊기 위한 6만5천원을 확보하기란 결코 만만치 않으며 그것의 대가가 ‘모욕’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소희는 디오니소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혼 후 최초로 ‘반역’행위를 하게 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빠져든 소희는 그곳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아름다워지려는 여자들을 만난다.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대가리에 똥만 잔뜩 든 미친년들의 짓거리”를 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이곳에서 소희는 ‘세상물정’을 배운다. 세상물정이란 여자가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것인데 그 방법이란 것들은 어머니나 남편이 형성해놓은 가부장제에서 죄악으로 취급받는 것들이다. 때문에 그것을 접한 순간 소희는 당황한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의 유혹에 빠진 그녀는 그녀들의 교육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을 억압하는 가부장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기 시작한다. 여자들과 함께 결혼 후 처음으로 자신의 옷을 사러 간다든지 파라 할머니로부터 반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까만 벨벳 치마”를 받아 몰래 숨겨놓는 행위 등이 대표적인 그것이다.
라틴댄스 수강 기간이 끝나가는 것과 동시에 소희는 꿈을 갖게 된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 살아라’이다. 이것은 누구나 품는 꿈이지만 춤을 배우기 전에 소희는 그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춤과 함께 그녀는 그것을 꿈꾸고 그것을 위해 어머니에 대한 반역을 꿈꾼다. 디오니소스적인 정열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희는 어떤 방식으로 어머니에 대한 반역을 가능케 하려고 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소희를 변하게 하는 계기, 즉 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소희가 배운 춤이 왜 라틴댄스인가 하는 점이다. 춤의 종류가 수십 가지인 것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소희가 배운 춤이 굳이 라틴댄스라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소희가 배운 춤이 라틴댄스인 까닭은 무엇인가? 라틴댄스의 특징은 “가능하면 섹시하게! 이왕이면 요염하게! 뒤꿈치로 음흉스럽게!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바닥에 볼이 닿을 때마다 은밀하게!”로 요약할 수 있다. 라틴댄스는 춤을 추는 이가 사교의 무대를 밟도록 하거나 멋을 낼 수 있게 도와주는 춤이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흥을 위한 춤인데 이 춤은 소희에게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각성 뒤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까지 알려준다. 나이를 한참 웃도는 외모를 지녀 춤을 배우는 여자들에게 핀잔을 받는 소희는 아름다운 춤선생 ‘나비’를 동경한다. 그래서 선생처럼 “섹시”하고 이왕이면 “요염”하게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체제에 안주하고서는 그럴 방법이 없다. 그렇기 위해서는 체제에 반역을 가하는 “음흉”한 꿈을 키워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조심”하면서도 “은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소희는 깨닫게 된다. 라틴댄스가 소희를 구체적으로 이끄는 것이다.
눈에 띄는 것은 이명랑이 나비와 같은 프로만이 조심하면서도 은밀한 이것을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는 것이다. ‘아마추어’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명랑의 앞선 작품들이 미친 영향이다. 『꽃을 던지고 싶다』에서 반장으로 작은 권력을 손에 쥔 소녀 ‘이량’은 놀랍도록 지능적인 행동을 보인다. 학교의 문제아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만들 줄 알고 사람들 몰래 성관계를 갖으면서도 시종일관 모범생으로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는다. 하지만 이량은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였다. 냉혹한 세상에서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는 금세 실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이량은 초라한 뒷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나의 이복형제들』의 유랑거지 신세인 ‘영원’도 마찬가지다. 중국 여인과 인도 청년을 도와주는 등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시장 속의 유랑민을 도우려 애썼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자신 또한 주민등록증이 없으면서도 중국 여인을 위해 통장을 만들겠다고 나섰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영원은 마음만 앞설 뿐 세상살이를 모르는 아마추어 중의 아마추어이기에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인데 이들은 소희가 배격해야 할 대상이 된다.
소희는 알고 있다. 자신이 라틴댄스를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혹은 다른 것을 통해 각성했다면 필시 그녀들의 실수를 반복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 의미에서 앞선 작품들의 여성화자는 소희에게 ‘반면교사’가 된다. 소희는 그녀들처럼 자신의 세계에 갇혀, 마음만 앞서서 행동하는 아마추어를 경멸한다. 그래서 프로를 찬양하며 거듭해서 “조심”과 “은밀”을 다짐하는데 그런 모습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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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희는 음흉한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조심하고도 은밀하게 무엇을 준비하는가? 대답은 『삼오식당』에서 0번 아줌마의 영악한 셋째 딸로 등장하는 현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어른이 아니어서 할 수 없는 거, 그건 대체 뭐냐고 물었더니 현미는 눈물자국마저 깨끗이 닦아낸 얼굴로 쾌활하게 대답했다.
“아, 그거? 우리 작은 언니가 그러는데, 그건 생활이래.” (『삼오식당』, 78쪽)

소희는 성인이지만 실상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생활’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춤을 배우기 전의 소희는 자신의 힘으로는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나의 이복형제들』의 영원과도 같다. 하지만 라틴댄스를 배우는 계기로 그곳에서 세상물정을 배운 그녀는 구체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방법들을 깨우쳐 나간다. 그 과정에서 소희는 그것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행동을 하는데 라틴 댄스 수강증을 만들 듯 “내 명의로 된 통장”의 소유를 시도하는 것이다.
과욕이 넘쳐서인지 이 장면에서 이명랑은 실수를 범했다. 소희는 통장을 만들기 위해 방문한 은행에서 도장이 없다는 이유로 “외국인인 경우라면 몰라도 한국 사람은 거의 사인은 사용하지 않는대요”라며 여직원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은행에서 나오게 된다. 이것은 생활력이 전무한 소희의 무능력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여직원의 말과 달리 요즘 어느 은행이나 사인으로 통장을 만들어주고 있다. 소희의 처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과정에서 빚어진 실수로 볼 수 있는데 여하튼 소희는 “어쩌면 도전장을 내밀게 될지도 모를” 행동을 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소희가 어른으로서의 ‘경제력’을 깨우쳐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어른은 경제력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적절한 히든카드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정치력’ 또한 있어야 하는데 소희는 춤 덕분에 그것 또한 깨우친다. 춤을 배우던 중 소희는 남편에게 비밀스럽게 간직하던 과거의 것들을 들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혼한 친구 혜선의 유혹을 받게 된다. 이 때 춤을 배우기 전의 소희라면 혜선과 같이 ‘공간’을 벗어나는 방법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희는 이미 라틴댄스를 배운 뒤다. 그래서 라틴댄스의 스텝인 ‘터닝 베이직 스텝’으로 제자리에 돌아온다. ‘터닝 베이직 스텝’이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것이긴 했지만, 다시 같은 자리이긴 해도 회전을 하기 전과 한 바퀴 돌고 난 뒤는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소희가 배운 정치력의 상징적인 의미가 된다.
아이들은 유혹에 잘 넘어간다. 하지만 ‘터닝 베이직 스텝’으로 어른이 된 소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소희는 남들에 이끌려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대신 그곳에서 남들의 말에서 지향하고 지양해야 할 것들을 ‘선별’할 능력을 갖게 된다. 자신에게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인데 그 덕분에 혜선이나 함께 춤을 배우며 자신에게 세상풍경을 알려주던 여자들을 어설픈 프로로 볼 수 있게 된다. 세상물정을 배우고 나자 그녀들의 속마음이 뻔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소희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머니조차 어설픈 프로로 보인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소희는 어머니에게 도망치고 싶어 했다. 전형적인 아이들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또한 반발 심리로 어머니가 인정하지 않는 것을 하려 했다. 그것 또한 전형적인 아이들의 모습이다. 어느 것도 어른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의 정열로 터닝 베이직 스텝을 한 소희는 정치력을 배웠다. 그 결과 소희는 도망치고 싶었던 그 자리에서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자리에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 생각과 동시에 소희는 어머니에게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명랑은 어른이 되어가는 소희에게 손을 들어준다. 딸의 반역이 성공할 것임을 예고한 것인데 그것은 또 다른 모녀관계인 최 선생의 가능성에서 찾을 수 있다.

나비는 여전히 배추흰나비들과 교대로 춤을 추고 있다. 간간이 최 선생의 눈이 나비에게 가서 멈춘다. 특히 나비의 팔 동작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어떻게 해도 엄마처럼은 될 수 없을 거야. 엄마를 바라보는 최 선생의 눈빛은 절망이기도 하고 체념이기도 하다.
최 선생이 스톱 앤 고의 팔 동작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 순간의 나비의 눈빛, 굉장했다.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아마도 최 선생이 조금 더 발전해 제비나비를 넘어서 긴꼬리 제비나비가 된다거나 하면 최 선생의 엄마인 나비는 아마 몸져누울지도 모르겠다. (210쪽)

6
인간에게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는 두말할 것 없이 소중하다. 인간은 그것이 있어야만 인간다울 수 있다. 하지만 독재자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독재자들은 자신의 권익을 위해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포기하도록 억압한다. 그럴 때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유를 위해 움직여야만 한다. 그래서 『슈거 푸시』의 소희도 움직였다. 라틴댄스의 춤으로.
『슈거 푸시』가 그리는 인간다움의 회복은 아름다운 것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예술의 자아도취적이고 정열적인 힘을 빌려 ‘극복하는 인간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슈거 푸시』는 돋보인다. 모성으로 가장한, 가족을 억압하는 어머니가 만든 가부장제를 극복하고 사회 통념을 극복하며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절망을 ‘극복하는 인간상’의 위대함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이 극복의 형태를 혜선의 경우처럼 도피의 형태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혜선처럼 일단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이혼이나 가출 같은 도피를 한 뒤에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이명랑은 끝내 혜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도피가 아니라 ‘제자리’에서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것이『슈거 푸시』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슈거 푸시』에는 아킬레스건이 있다. 서사를 이끄는 힘인 ‘극복하는 소희’와 ‘억압하는 어머니’의 관계가 약점을 드러내는 아킬레스건이 된다. 이명랑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관계, 소희와 어머니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인색했다.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시어머니와 같이 아름다워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자를 혐오한다고 해서 자신의 친딸을 그렇게까지 억압할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공감대 마련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현실과 소통하는 것임을 상기해보자. 친자식을 ‘학대’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현실과 손을 잡았을 때도 작가의 뜻대로 형상화되기에는 분명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이것이 소설 안에서만 맴돌지 않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심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선행됐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까닭에 소희와 어머니의 관계는 작위적으로 보일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아킬레스건에도 불구하고 『슈거 푸시』는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극복하는 인간을 그렸다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작가 자신의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작품으로도 삼을 수 있기에 그렇다. 이명랑은 ‘영등포 시장 작가’라는 딱지를 떼려는 듯 『슈거 푸시』에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려고 애쓴 티가 역력하다. 그런 점에서 『슈거 푸시』는 과거와의 이별이자 새로운 미래를 여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더욱이 『슈거 푸시』가 예고편 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파괴를 뜻하는 디오니소스적인 힘을 빌려 어머니의 사회를 극복하려는 딸은 극복 이후의 세계를 창조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슈거 푸시』에서 날아오르려는 소희의 몸짓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이명랑은 그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소희는 권력을 나눠 날아오르려는 프로메테우스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타도한 독재자처럼 홀로 영원한 권력을 누리려는 제우스가 될 것인가? 극복과 함께 도전의 의지를 내비친 이명랑이 어떤 세계를 보여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명랑, 그녀가 나비처럼 날아오르기를 응원하며 이제는 그 답을 기다리기로 하자. 섹시하고 요염한, 음흉하고 조심스러운 그리고 은밀한 이명랑의 변화를 축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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