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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협-시(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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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할머니
초가을, 할머니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서,
발툽 깎으신다.
젊은 시절 청천벽력 같던
역정 하나 없이 순(順)하시다.
시린 무릎 굽히시며 할머니
발툽 깎으신다.
툭,투욱,툭
이승보단 저승에 닿을 그 소리
이제 몇 번 남지 않으셨다.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아오신
당신 세월의 굳은, 살을 깎아 오셨어요
걷지 않고도 걸으실 날 얼마 남지 않으신 당신
이제, 내생으로 환(幻)하실 채비
언제 놓을지 모르는 이 生
그래서 매일 목간하고, 성장(盛裝)하신 단다.
봄밤에
아직도 나를 기웃거리는 아픔들을 호명해
줄 세우고 따귀 때리며 말하네 '이 악물라고!'
이를 앙다물면 안면근육 당기고
아프면서 선명해지는 아픔의 악관절
겨우내 지겹던 울상의 골상(骨象) 이
조금씩 지워지네
새 봄
다시,
꿈을 입고 희망을 고쳐매며
나 아귀차게 거울을 보네
새봄 산뜻하게 이발하고 목간하면
밤에도 앞산 초록 새순이 다 환히
들여다 보이네
내 온 아픔들이 야반도주 줄행랑 치는 봄밤에
일어서는 山
밀가루 고운 채 치듯 눈이 오고
눈발은 골짜기 함성으로 웅웅
몰려다니며 세상의 겨울山을
번쩍 일으켜 세우네
제 몸 던진 눈송이는
이내 궁금하던 바람의 길을 펼쳐 보이며
산뢰로 사람의 길을 덮고
벌목의 소름 돋치던 기억도
이제는 심플한 백색창연(白色蒼然)
굳고 빈 마음으로
감았던 눈 번쩍 뜨면 저먼 산 코숭이께
오오 희디흰 반죽처럼 빚어지는 신세계
벌거숭이山, 바위山, 뒷동山, 野山 들이 모두
홍진(紅塵)의 제 이름 버리고 오롯이 서는
山
밀가루 고운 채 치듯 숫눈이 쌓이고
백색의 새 세상에서
크르릉 일어서는 山
한밤의 국도1 <꽃서리>
대낮의 꽃나무
너무 눈부셔
한밤에 꽃서리
나서는 길
중인리 매화꽃밭
남몰래 눈에 담고
되돌아오는 참
잘익은 그 꽃들
한아름을 길 위에
뿌려두었어
그리고
온 길보다 멀리 돌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생에 이 길로
다시 들 날 있을까?
그 생각들이
치르치르 미치르의
꽃잎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잘못든 길 끝에서
밤에 핀 꽃들에
눈독들이는 일이여
너를 사랑한 일처럼
生이란 우연 투성이구나
그리고 나, 너 모르게
까치발로 살금 살금
멀찍이도 돌아가야 하는 구나
윈도우 98
그리하여
내 煎世紀의 추억은 조각모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당신을 찾기 위해 많은 想像들을 설치 했지만
폴더 속 진실들은 이미 delete 되고
껍데기로 남은 제 이름만 반짝입니다
그대 맘에 좀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만든 단축아이콘은
어차피 휴지통에 버려도 그만입니다
아직도 기억의 껍질조차 쉽게 버리지 못해
추억 깊숙한 폴더에 압축하고
조심스레 시간 순 정렬을 해 보는 디지털 시간들
이제 내게 남은 기억과 그대에게 남은 기억의 충돌로
마침내 내 동경의 창들을 닫을 수밖에 없는 지금
내 맘의 창 다시 열 때엔 Headscan이 필요 할 것 같습니다
참고 참다 다시 한번 죽어 가는 뇌세포를 더블 클릭하여 찾은 당신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으니 프로그램을 종료 해주시길 바랍니다
竹비소리
나 세상에 태어나 도를 구 한적 추호도 없다.
욕심 없이 그냥 살다 간다고 그리 다짐해도
세상일 만만치 않을 때 그래서
홀로 취해 나를 가눌 수 없는 밤
술친구 한 놈 슬며시 옆자리 차지하고는
나 잘살고 있다고 잘해 왔다고,
그리 말하지 않고
꾀병 그만 부리라며
따끔하게 쓴 소리 한마디
그리고는
둘이 취해 서로를 가누는 밤
우리 잘살고 있다고 잘해 왔다고
그리 말하지 않고
서로 술잔만 오가는 밤
얼마 만이니, 친구야.
그래 그때는 무척 큰 안경테를 썼었지 우리
그래도 세상을 조금은 넓게 보았드랬지 우리
갑작스레 탁!하고 등치며
침묵 깨는 혀 꼬인 한마디
ꡒ나 같은 놈 하나 내 옆에 살고있다고, 그래서 기쁘다고ꡒ
내 마음에 일침 가하는 竹비소리
비, 혹은 , 눈으로 오는 신경통
-1-
소낙비 호되게 지나간 회벽색 오후
땅딛는 발자국 소리로
저벅 저벅 잰걸음으로
전생보다 먼 곳으로 몰려가는
아득한 빗소리
선잠결 귀엣말처럼
소스라치게 들리는
강의 몸 뒤척이는 소리와
흰 파도 혀 놀리는 소리들이 돌아와
자꾸만 귀에 감겨와
아무도 보지 않는
공채널 TV의 소음처럼
머리맡에 재방송되는 물소리
물의 전생이 환생처럼 재생되는
오수(午睡)의 환청이
등허리 께를 흠뻑 적신다.
어릴적 자주 삐던 발목께
헛딛던 날들의 고통은
부러 긴 시간을 돌아서는
제삿날처럼 때맞춰 돌아오고
걸었던 날들의 통증은 이제 그만
천천히 아프자고 다독이고
늘 절이던 발바닥. 발목께를 붙잡는 한기(寒氣)들
곧, 허리 아래께가 실신한다.
-2-
몇 차례의 겨울비, 다시 몇 일간의 눈소식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雪川面)에서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雪川面)까지
늦은 밤 기습적 북진을 감행하는 폭설
흑백의 명도대비로 맞이하는 아침
소돔성 롯의 妻와 같이
순간의 동작 그만으로
이제 그만 허옇게 설어
그 지점부터 땅까지만
천천히 허공을 밟고 걸어 내려오는 비
춥게 걸었던 날들의 통증은 이제
동상(凍傷)처럼 가렵기만 하고
물빛소리로 울리던 네 기행의 끝에서
걸었던 날들의 통증은 이제 그만
천천히 아프자고 다독이고
蘭芝島
난꽃과 영지가 자랐다던 섬
쓰레기 타는 냄새 는개처럼
강물 건너는 저물녁
밑도 끝도 없이 옛적에 내가 버린
안경….…으로 보던 세상이 그립고
제 눈에 안경이던 날들이 부우옇다
슬쩍 그대로 초점 맞춰지는 어둘녘
전후사정도 밝히지 않고 흐른
세월의 좌우를 위태로이 가르고
피어나는 내 허물 타는 연기들 냄새들
이 난세(亂世)에 가끔은 옛일을 붙잡고
아쉰소리를 해대고 싶다
밑졌고 본전도 아닌 삶의 허물들
모두 한곳으로 모여 섬이 되고 섬은
이미 버린 삶의 껍질들 구워삶아
데리고 무얼 하려던 것일까?
알맹이를 떠났던 허물들
다시 연기로 먼 시간 헤치고 돌아와
내게 스미면, 기억을 분향하는 섬
난지도에 흐릿하게 피는 환한 난꽃들
나는 아직도 근시안에 난시를 앓아
아직도 난지도 잿더미 그 어느께 있을
내가 버린 안경 생각이 간절하고
허물들의 우울함이 침울함을 다독이는 별뜰녘
나만 보았던 사건들이 함께 뜬다.
*내가 버린 안경은 지금 무얼 보고 있을까?
*함민복의 시 "내가 잃어버린 안경은 지금 무얼 보고 있을까?" 에서 발췌
아리랑 variation
아니아니다 쓰리쓰리다. 아가리가 났네..
네가 네 죄의 근원이렸다?
아니아니다
아니면 아플 마음은 아직 갖고 사는가?
쓰리쓰리다.
아픔을 잉태한 내 말 말 말들
내 입이 낳은 거짓들.
아가리가 낳았네
아니아니다 쓰리쓰리다. 아가리가 났네..
아픔의 고개를 넘어서 간다.
詩集을 산다.
얇은 책 한 권이 뭐이리 비싸나 싶다가도
시집 한 권에 오천원
그 안에 시100편
시 한편에 오십원
온 하루를 머리 싸매고
알토란같은 단어들을 고르고 또 속아내는데
담배 한 개비 값, 오십원에 시를 쓰고
그렇게 영혼을 갊아먹는가?
그래도 시집 한 권 못내 본 시인이 태반이란 생각 들다가도
시 한편에 오십원은 역시, 억울한 눈매를 짓게 한다
‘두드린다'고 할지 ‘민다고'할지
두어 시간은 고민하는 답답스런 이들에게
시간당 최저임금 2100원
두어 시간 노동에 시집 한 권 산다라면
시 한편에 오십원은 역시
잉걸불 같이 살 듯 말 듯 하루를 연명해도
하늘,바람,꽃 이런 것만 생각하면 입맛 다시며
책상앞에 앉는 이들이 시 한편 오십원이네
주판알 굴리는 내 모습 보면
"50원이면 知音에게 전화한통 아니오?" 라며
허허롭게 웃겠지만 서도 그들 사는 모양새를
볼라치면 500원은 해야하지 암
신이 인간에게 공평하다면
배고픈 자의 마음이 부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시인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시인이 되는 것 일 테지
그리하여 마음의 창고에 쌓인 양식들로
진수성찬 한상 차려 세상에 마음 헐벗은 이들에게
퍼다 주고 그러는 것일 테지
가난한 이가 시를 쓰고 부자가 시를 사는 것일 테지
신이 공평하다면
매번 나는 밥한끼 굶은 돈으로 시집 한 권을 산다
가난한 사람이, 배고픈 사람이 쓴 것은
그렇게 해야 덜 미안할 것 같기에
시 100편이 이리도 쌀까? 생각하며
공복에 시집을 산다
이름 : 이상협
출신학교 : 고려대학교 미술교육과
생년월일 : 1974년 8월 27일
주소 :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 105번지 sk아파트 102동 2306호
전화 : 011-9049-1905
이메일: bird94@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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