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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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호-시(2003) 타지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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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영초
고요한 네 몸살 들여다 본다
아파도 내색하지 않는 차가운 얼굴
슬퍼도 울 수 없는 밤
자꾸만 달빛 서성이며
부엉이 한마리 뜬금없이 눈알을 부라린다
그리움 먼지처럼 쌓여 가고
푸르게 살이 아프다
네 슬픈 눈망울에 남 몰래 이슬 어리면
희디흰 속살에 붉은 해도 슬퍼라
저 멀리서 숨은 향기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새벽빛에 바람 불고
숲 가만히 몸 떨면
네 둥근 숨소리 단내를 풍기는데
잠 들지 못하는
푸른 눈꺼풀에 흰 새 앉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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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뱀장어 스튜
너를 벗기고 식탁에 눕힌다
두 팔 들어 항복하는 너의 자세를
억지로 무너 뜨리며 네 꼬리지느러미에 칼을 댄다
꼬물거리는 너의 대가리에 식초를 들이 붓는다
탈바꿈하던 때를 기억하는
너의 시린 눈을 들여다본다
칼날 감추며 나뭇잎 서걱이던
담장에 익어가는 햇볕 먹고
마약 먹은 듯 비비 꼬이며
실처럼 엉키던 날들 흘러 갔다
바다와 민물을 오가며
북적도 해류에 몸 식히는 오늘
대륙의 허벅지에 누워
머리 팔 하늘 날개를 펼친다
네가 푸른 알을 낳고 죽는 날 나도 죽으리라
3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어떻게 알을 낳으러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네가 새겨준 몸의 나침반을 읽는다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북적도 해류에 몸 식히며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뜨겁게 끓는 스튜에 머리를 담그고
네 눈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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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레몬의 죽음 1
레몬 굴러 떨어지고 깨진 입술에서 검은 물 흘렀다
뜨겁게 익은 지붕에서 고양이 서성이고 강물에 불기둥 솟았다 꿈처럼 잠자리 한마리 창 밖에 보였다 눈물 없는 시간이었다 밤 내내 들녘에 바람 불고 누운 풀꽃 무덤 속 네 눈알에 벌레들 굼실거렸다 지나온 길이 산산히 뭉그러진 얼굴 짓무른 눈가 곱게 쓰다듬고
푸른 물의 잔주름 네 눈에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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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레몬의 죽음 2
어떤 나무 급히 금 가고 우리는 한없이 머뭇거리며 침몰했다 무덤가에 푸른 이끼 조금씩 돋아났다 네 눈 파먹고 게슴츠레한 별자리에 어둠 졌다 꽃은 상처 깊어 네 주름진 뱃속에서 울었다 강물 쩍쩍 금 가기 시작했지만 너는 미친 듯 석양 아래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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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레몬의 죽음 3
새벽 하얗게 젖어가던 밤 숲은 무언가를 읖조리며 연신 웃었다 떠도는 영혼처럼 당신 녹슬어가고 젖은 흙에 바람 불면 무덤가에 상처 하나 피어 올랐다 바람 속에 흰 뼈를 내어 놓았다 흰뼈에서 붉은 피 뚝뚝 흐르고 햇살의 사악한 칼 목마른 눈동자에 꽂히면 붉은 강물 저만치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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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레몬의 죽음 4
폐허에 푸른 빛 고이고
달빛에 네 고운 속살 환해졌다
나방 한마리 비명 지르며
황량한 사막으로 날아갔지만
얼어붙은 핏자욱처럼 뒤흔들리며
꽃 쓰러졌지만 말없이 죽어가는 침묵
피의 강에 무정하게도 함박눈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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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숲
숲에 간다
어머니의 작은 우주 자궁에 간다
숲은 붉은 등 반짝이며 타오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화려한 자궁에 누워
숲의 커다랗게 부푼 가슴을 만졌다
어머니는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나뭇잎 떨구며 숲의 은빛 입술에
가만히 귀를 대어 보았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푸른 손 들어
내 썩은 뼈를 가만히 만져 주었다
나는 빗소리에도
훌쩍이는 숲의 출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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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새 1
길 잃어 푸른 경련
두 팔 늘어뜨리고 하늘 저 편 서 있는 구름
어린 딸 같은 꽃잎 하나 물고
새벽 산길 사슬 끄는
가파르게 떨어진 낙엽
둥근 달 경련하듯
바람에 녹슨 시간 떨어지면
소란스럽게 나뭇가지 흔들며
동굴처럼 텅텅 울리던
네 둥근 어깨
참았던 비명
시퍼렇게 퍼덕이는 칼부림에
비 오 듯 아픈 사지
살점 떨어지고
쉽게 지워질 발자국 환한 울음 우는 너
자작나무 흔들어 깨우고
그간의 세월 모르게 달려가는 네 속도
창 밖 빗소리 꽃망울 나뭇가지에
머무는 서늘한 흰 잔등
허물어진 폐가 감싸 안으며
숨죽인 나무 등걸에 앉아 성근 숲 데운다
간밤 흐르는 강물 출렁이던
네 서글픈 몸 뜨겁게 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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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새 2
불을 꺼 주세요
사시사철 눈 뜬 망막
고이는 빗물
쿵쿵 뒤통수를 때리는 문명의 드럼 소리
소주 마셔 침침한 귀에 네 둥근 맺힘 들리지 않았다
손 등에 떨어진 코피
떨어질 듯 비릿한 증오
수평선 막막한 하얀 파도
차라리 떨어졌으면
거리의 붉은 등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새가 날았다
찬 커피를 마시고 불면의 밤
도시의 무릎 아래로 흐르고
너는 어디로 가는걸까
불을 꺼야 할까
모래알 같이 터진 너의 부르튼 살갗에
푸른 칼 꽂혔다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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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새 3
어두운 지하 저 너머 보여주지 않는 벽
한참동안 바라 보았다
반사광처럼 영문 없이 지하철이 달려온다
시시각각 목 죄어 오는 시간
실수 없이 죽음은 달려 오고
젖은 날개를 접고 레일 위에 떨어지고 싶은 자여
뜨거운 이별은 천둥처럼 찾아 왔다
백마리의 새가 날아 오른다
고삐 풀린 한낮의 열기에 숨 막힌 까마귀떼
캄캄한 한낮에 날아 오르며 물을 찾아 나선다
너 날아간 텅빈 거리에는
바퀴벌레처럼 수북이
황홀한 알을 까는 소문들만 무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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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새 4
그들은 산 채로 잡혔다
붉은 피 흘리며
모두 꼬챙이에 꿰어져야 했다
충혈된 눈들이 의심스런
일렬횡대로 너를 노려 보고 있다
어린 날개에 접힌 생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듯
한 점의 고기에 만족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의 정원을 보았다
나무 잎사귀마다
죽은 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네게로 가는 길은 온 사방 막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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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눈 꼭 감았습니다
두 사람 걸어온 길
이 세상 온갖 더러운 꼴 보러온 길
한 사람 먼저 떠났습니다
네 애꾸눈 흉터 깊은 줄 몰랐습니다
네 넓은 가슴
그리 왜소한 줄 몰랐습니다
절규하며 들꽃 보았습니다
들풀마다 맺힌 눈물에 눈물 섞으며
깜빡 잠들었습니다
황홀한 잠이었습니다
남모르게 버린 악수였습니다
파도 일어나듯 마음 한 구석에 후회 일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먼 길 걸으며
한 발 절뚝거렸습니다
당신이 저 먼 하늘 밝은 곳에서
하얗게 손 흔들 때
내 마음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눈 감아 버린 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눈 꼭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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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안산으로 가는 길
하루 네 시간 꼬박 사년 동안
신촌과 안산을 오가던 길
그 새 벌써 까먹었는지,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화분이 무겁다
타오르던 푸름 불꽃이 죽어 가고 있다
퇴화한 눈이 지하를 그리워 하는 것 일게다
갑자기 다가온 햇빛에 잠깐 눈 멀었다
어머니에게 짐을 지워 주었다
걸어가는 길에 본 하천
구멍 난 비닐 하우스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 꽃은 어머니의 손길에서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살아 나리라
하나의 꽃이 피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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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울역
외로운 거지가 지하철 바닥에 신문지 깔고
지친 날개 접고 있다
무언가를 소중하게 늘어놓고 파는 사람들
비둘기떼 웅성거리는 서울역 오후
때절은 할머니가
지하철 바닥에 털썩 안방처럼 앉았다
미역을 싼값에 팔고 있다
땀 질질 흘리며 남도의 신경세포 짠내음이
삐쩍 메마른 사지를 툭툭 건드린다
할머니의 욕설이 절반인 경상도 사투리
가만히 듣고 서 있었다
서서히 몸이 풀리고
여기저기 구멍에서 진물이 흐른다
콧구멍에 실실 바람이 드는지
그렇고 그런 설레임이 보였다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오라
서울의 예수는 성경을 헐값으로 팔고 있었다
간이 남산만큼 부어도
소주 여전히 들이키는 거지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썩은 냄새 풀어 헤치고 있었다
병째 나팔 부는 거지의 눈치를 보며
슬쩍 백원짜리 만지작거렸다
몇일간 산에 오르지 않았다
서울역에서 남산까지 가는 길에
자주 보이던 창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찾다가
눈에 밟히는 나무들
남산에서 서울역을 형제처럼 바라본다
별들이 다 모였다
창녀 거지 목사가 함께 모여
화투를 치고 있다
올 사람이 다 온 것일까
레닌그라드 뉴욕 북경 동경
날개 쉬는 듯 다 모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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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풀꽃의 슬픔
서성이는 풀꽃
메마른 도시에 녹슨 쇠덩이처럼 찾아온 너
방학역 담벼락에 핀 엷게 퇴색한
어둠처럼
떠나는 자의 푸른 목덜미 조르며
풀꽃 서성이고 있었다
새벽안개 무심히 바라보는
가로등 불빛 간신히 먹고
푸른옷 입은 네 어깨여
하얀 갈매기의 맑은 눈처럼
가로등 불빛
푸른 바다
부푼 파도에 꽂히면
깊은 생각에 잠긴
풀의 허리를 분지르며
지하철 굴러갔다
수없이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도
으르렁거리며 돌멩이처럼
발길에 채이고,
가볍게 햇빛 하늘에 번지면
가로등의 뜨거운 눈 감기우고
나만이 담벼락에 핀 풀꽃 바라다본다
가슴 깊이 그대를 그리워함은
가로등의 한없이 서성이는 눈빛일까
너를 떠나지 못함은
담벼락에 핀 풀꽃의
아무렇지 않은 슬픔일까
위태롭게 벼랑 끝에 매달린
네 녹슨 쇠덩이를 바라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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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도봉동 고시원의 밤
고시원의 밤은
붉은 야시장처럼 분주하다
갈 곳 없는 먼지들이 모여
한웅큼의 재채기를 하고 있다
옆방 유씨는 귀티가 줄줄 흐르는
미남인데도 웃지를 않았다
소주 한잔에도 저녁해처럼 타올라
자기 이야기를 강물에 툭툭 던지던 그가
벽 너머에서
오늘 낮에 공사장에서
귀하게 얻어온 허리병을
쓰다듬고 있다
매일 밤 종이보다 얇은 벽을 타고
그의 신음소리는
거미처럼 내 귀를 타고 흐른다
이제는 그가 웃지 않는 이유를 알지만
거미 보이지 않으면
거미줄만 그의 방에 꽉 차 있으리라
몇일 전에 새로온 남자는
목욕탕에서 신나게
검게 그을은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의 팔뚝에서 푸른 갈매기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끼룩거리고 있었다
밤마다 그는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내가 아니란 말이야 나 아니야
그는 또 총무에게 불려 나간다
푸른 갈매기가 착한 양처럼 질질 끌려 나간다
구르지 않는 돌멩이들이 모여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인다
어디에서도 부르는 이 없는지
오늘도 유씨의 신음소리 붉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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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잠
두 줄로 서서
끝없이 길 가는 철로
자꾸만 네 가시에 찔리며
철로의 무심한 잠에 고개 숙였다
물방울로만 얘기하는
파도 소리 들으며
지난 가을 바닷가를 떠났다
관절과 관절이 부딪히는
도시의 녹슨 시계 소리 들으며 잠 깼다
땅에 내리고 싶은 날개
퍼덕이며 울리는 시계 보지 않았다
너는 후렴구로만 답장을 보냈다
녹슬어 가는 너의 기억 무덤에 묻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인 것 같아 신열은 차 올랐다
무르익지 않던 봄
먼지처럼 버석거렸다
구르는 돌 뒹굴며
정거장에서 내리지 않았다
모두가 떠난 버스에는
네 심장 썩어 가는 냄새만이 부끄러웠지만,
비가 돌연 쏟아졌다
구르는 돌 깨우고 심장 썩어 가는 냄새 흩어지고
두 줄로 선 철로 맞붙었다
철로의 무심한 잠 깨우고
시계 본다 오랜만에 땅에 날개 기대어
빗줄기 속에 나를 보낸다
유위의 잠
깊어 가고
네 눈 밝아지는 날
관절 소리 정겨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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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내에게
언젠간 죽으리라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 속에 숨어도
네 얼굴이 둥그렇게 열렸다
절뚝거리는 네 힘겨운 발걸음이
내 심장에 못을 박았다
절뚝거리더라도 아직 누워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젯밤 꿈에 너는 힘차게 달려가는 야생마
부리를 힘차게 휘두르는 서슬 푸른 독수리
산양을 한입에 먹어 삼키는 붉은 호랑이였다
하루하루 네가 시들어가는 정원을 떠나
씩씩한 사람들 속에 숨어 있지만
네 얼굴은 둥그렇게 열렸다
네 눈빛은 더운 목덜미 시원하게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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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촉석루
돌처럼 단단한 사랑이 흐른다
익어가는 너의 뼈 마디마다
이끼 푸르게 맺혀
천년 이어온 그리움 피어나고
가끔씩 찾아온 바람에
멍든 가슴을 쓸어 안는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머물러야 할
숙명이라면 네가 되고 싶다
연약한 돌
나무의 윤곽 곁을
동백 목련이 차갑게 지키고 서 있다
세월을 가르던 강물 타오르려 일렁이지만
든든한 돌 허벅지
네 척추 곧추 세우는구나
만년설을 얹고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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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지렁이
지렁이는 기어가며
홀로 너의 지나간 길을 읽었다
흙에서 본 너의 얼굴
그림자 없고
땅 속 깊이 파들어간 그리움
끝이 났다
수없이 꿈틀대는 주름
겹겹이 너의 얼굴은
보인다
앞 뒤로 기대고 싶은 마음은
저 멀리 파도에 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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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북한산
그 여자는 모든 남자를 받아 내었다
하루에 수십명 남자들이 그녀를 거쳐갔다
그녀는 남자들의 찢어진 가슴 위에서
풍만한 젖가슴
펑퍼짐한 엉덩이
크고 넓은 얼굴
몽고 스타일의 동양여자였다
한줌의 흙 뿌리는 여자는
거대한 대륙이었다
허벅지 사이에서 꿀물 흐르?위대한 어머니의 따뜻한 손
남자의 돌같이 굳은 얼굴 감싸 주었다
입맞추는 그녀의 누런 이빨 사이 쉰 냄새
오히려 남자는 편안했다
남자의 다리 사이에서 헝클어진 미움의 검은 실타래가 보이자 여자는 가위로 뭉텅 잘라 주었다
한올한올 실타래 풀어주며 남자의 말을 들어 주는 진지한 그녀가
우리 동네 신부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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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푸른 그림자
하늘로 가는 계단 용케 기어 오르는 너를 보면
언제나 같이 올라가고 싶다
네가 남긴 멍 든 발자국
텅 빈 음악 듣다 보면 푸른 그림자
잎사귀
여전히 불을 꺼야 한다
지하철에서 구입한 화분을 앞에 두고
이 놈을 어떻게 햇빛을 쪼여줄까 고민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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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장갑 한짝
흐린 등
인적 드문 벤치에
누군가 흘린 장갑 한짝
시린 손 따뜻이 데워주던 장갑이 한짝 남아
이제 만져줄 용기, 건넬 온기도 없이
차게 시큰둥하게 식어만 가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장갑 한짝을 주머니에 넣고
이리저리 마음에 장갑을 얹는다
소녀가 누구에게 주려고 짠 털장갑이었을까?
다른 한짝은 어느 곳에서
소년의 손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안타까운 마음은 흘러흘러
집까지 함께 걸어갔다
화해의 손을 건넨다
그냥 흘렸을 뿐이었다고
버린게 아니었다고
굳게굳게 믿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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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가고 오면서
가고 오면서
떨어진 잔뼈
떼어온 굵은 뼈
살점 떨어져 시린 뼈
그렇게 잃고 모으다보니
어느덧 듬성듬성한 허수아비
봄바람 불어 온다
가고 오면서
잃어버린 사람들
봄날 같이
춥게 모인 사람들
언젠가는 다시 모일 날
바람 앞에 마주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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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흙 파는 노인
흙 파는 노인
주름진 얼굴
겨울땅은 쉽게 자신을 열어 보이지 않았다
창문 밖 누군가가 정원의 흙을
열심히 파는 것을 보았을 때
한마리 붉은 곰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무덤을 파듯이
한무더기의 돌덩이를
야윈 손으로 들어 옮겼다
창백하게 떨고 있는 아이를
가슴에 안고 옮기고 있었다
아늑한 봄날 같은 졸음처럼
잊고만 싶은 계절이 흘렀다
정원에는 한 그루 자작나무
자작나무의 발끝에는
노인이 소중히 옮기려 했던
돌무더기가 비석처럼 서 있다
노인이 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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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꽃
하나의 꽃이 피기 위해서는
하나의 분노가 죽어야 한다
너를 가둔 물 속에서
달걀 삶아 지듯이
분노가 지독하게 익어가고 있다
은근히 나를 태우는 촛불
어느 으슥한 물 속
풀숲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꽃 바라보다가
물 속에 풀잎 떨구었다
쓰레기란 쓰레기 모두 모여
부둥켜 안고 있는 물 속
물고기 한마리가
물 속에서 풀잎 툭툭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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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섬
하늘에 올라오니
땅 좋은 지 알겠다
발 아래 바다 강물 산맥 구름
번진 물감이구나
비행기 비좁은 의자에 사지 쑤셔 넣으니
비좁은 쪽방이라도 내 집 넓었구나
빗물 한 두 방울
이내 섬 한 입에 삼키고
빗줄기에 섬 멱살 잡히고
검은 돌덩이 바닷물에 흔들거린다
바람 한 두번만 불어도
섬 허리 들썩이며 울었다
철없는 연인들은
바지 걷고 바닷가 서성이고
돌 바다 바람
섬은 하얗게 지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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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우물
네 속에 무엇이 있을까
아무 것도 없을지 몰라 서성였다
네 안에 몰래 독을 붓기도 하였지만
어느새 너는 맑은 물을 건넸다
너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검은 물의 차가운 눈빛
마구 창문 틈 들썩이는 겨울 바람
네 안에 든 우물물을 다 버려야
생명이 자란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도 뒷산에 올라 갔다
네 속에 우물이 과연 들어 있을까
아무리 너를 흔들어도
우물물은 없고 그럼 출렁이는 게 무얼까
눈빛일까 겨울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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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봄의 악몽
검은 눈을 보았다
계절은 회전하고 있었다
소용돌이 치는 바람의 눈
무서워 도망치다 보면
봄 끝 무렵
안개비였다
움푹 패인 봄 골짜기
네게 고이는 빗방울마다
진한 피의 냄새가 났다
푸른 산에 붉은 피 흐르면
몸소리 치도록 네가 무서웠다
외로운 목숨 구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 왔다
불어오는 칼 바람에
네가 아프게 구르고 있었다
잠들 수 없는 봄 밤
빗물처럼 아무렇지 않게 흘렀다
낮에 만질 수 없던 돌의 얼굴
꿈 속에서야 쓰다 듬었다
창백한 표정으로
돌이 꿈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버석이는 먼지처럼
계단에 구르는 꿈
깨고 나면
수많은 어둠의 가시가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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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목성
태양계에서 가장 크고
무겁다는 그 곳에 가고 싶다
지름이 지구의 열한배
공전주기는 11.86년
질량은 지구의 317.89배
평균 표면온도는 섭씨 -110도
바닷물에 썩어가는 내 몸 담그고
끈덕지게 흘러 흘러 용케 수증기 타고 올라
먼 길 네 불모의 땅에 스미는 물이 되고 싶다
쉽게 잊혀진 너
울지 않고 너를 본 자가 있을까
죽어 갈 수 있다면 가고 싶은 땅
목성은 9시간 55분이면 빙그르르 돈다
빠른 자전
구름이 적도에 팽팽한 가로줄 무늬로 흐르고 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네 얼굴에 흘렀다
아직도 부풀어가는 울음 덩어리
꽃의 폭풍 네 고운 폭풍
이제 그만 떨구어라
네가 흐느끼는 우주에
어깨 들썩이며 한없이 서성이는 뿌리
이제 그만 울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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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삼십대
남루 삼십대
귀하신 분들 아래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부들부들 떨며
막 눈물 떨어질 듯한 삼십대
비둘끼떼처럼 모여
아직도 담배를 피고 있다
뻐끔뻐끔 삼십대
기우다 만 헝겁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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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다락방의 고해성사
그대 보고 싶으면
내 오랜 다락방에 오릅니다
비 오는 소리 가만히 다락방에서 울려 퍼지면
착한 아이의 눈빛으로
내 쓸쓸한 다락방에 오릅니다
이미 부서진 유리 파편들
내 가슴을 콕콕 찌르면 눈물을 감추고
유령의 서커스를 보러 갑니다
날카로운 도시의 주사바늘이
척추를 찌르고
지식의 거머리들이 혈관을 타고
정수리를 아프게 눌러 오면,
세상의 온갖 비밀 가슴에 품고 다락방은
이 어둠에도 가쁜 숨소리입니다
악마와 악수하는 아버지의 역사를 읽습니다
누워 지는 해를 바라 봅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다락방은 작은 강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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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동묘에서
문 밖은 온갖 잡새
실신하듯 미치도록 펄펄 날아 다니고
먼지 겹겹이 중고판 복사본
아직도 건재한 한국 경제여
눈 둘 곳 없어
저 문을 넘어야 널 볼 수 있으리
자유의 깃발 잎잎이 달고 있는 나무들
굳은 각오로 두 발 뿌리 박은 동묘
새로울 것 없는 굶주림 가득 안고
이제 다리 펴기 영 쉽지 않은 할아버지 몇몇
뻐끔 담배를 피고 있다
쭈구렁 할머니들은
어느새 내 주변에 비둘기처럼 옹기종기
싸구려 과자 부스러기를 시원스럽게 털어 먹고 있다
이미 고향을 떠난 자식들 미국에서 잘 지낼까
마땅히 당신의 걱정은 누가 할까
푸른 사색 잎잎이 달고 있는 나무들 곁
진정한 이 시대의 자유인들이 모여 있다
한 젊은 거지가 빙빙 돌며
낮은 포복으로 내게 걸어온다
담배 한 모금 빌려 달라고 하여 한 갑 채 주었지만
별 고맙다는 얘기도 없다
오히려 수상한 듯 나를 쳐다보던 자유인
녹슨 검은 물
빗줄기 내려 꽂히는
동묘 처마에 잠깐 동안 네 모습 보였다
마침 붉은 꽃잎 뚝뚝 떨어지고
지나가는 쓰레기차에선 밝은 노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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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거울
끊임없이 회전하는 너
나를 언제나 거꾸로 세우고
킬킬 웃는 거울이여
비행기가 활공을 하면 들판 나무들도 두 팔 벌려
너를 안고 뒹굴고 입술과 입술 부딪혀 드디어 이빨 깨지다
거울에 없는 너
거울에 있는 나와 함께 뒹굴며
키득 웃는 거울의 무심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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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뭍에서의 짧았던 시간들
한여름 태양빛에 우리의 사랑 익어가고
가을 잎새처럼
하늘 올려다보던 솜털 보송보송한 네 얼굴
구름처럼 서성이며
따뜻한 손에 우리의 차가운 사랑 데우던
고운 시절
때 늦은 사랑입니다
레몬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우리는 아팠지만 울지도 못하고 술만 마셨습니다
비만 울리고 잠 속에서
서성이는 철로처럼
시계 소리 들리면
한뼘 남짓 남은 인생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그 먼 곳
그 곳에서 너는 돌처럼 굳어가겠지요
풀들의 무심한 잠 깨우며
바람 불어 오고
무서운 산 어둠 보며
메아리 없는 사랑을 속삭입니다
막차는 오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대답 없이
눈 멀도록 바다만 바라 보았습니다
알콜중독에 빠진 남자를 구원할 것은
죽음 뿐일까요
여자의 푸른 눈물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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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어머니학교 봄 소풍
유치원 아이들이 어미닭을 따라가 듯
앳된 선생님의 눈을 바라봅니다
오고 가는 가족 나들이의 고운 발걸음
비 온 뒤 푸른 햇살 밟히고
나이 든 어머니 학생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빨강 풍선처럼 화려합니다
일산 시민공원 연못에 비친 어둠의 칼날이
둥글게 파문을 그립니다
유치원 아이들도 어머니 학생들도
어둠의 기억도 함께 웃는 봄 소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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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죽어가는 자에게
도봉산이 어둡다
방에 누운 지 벌써 사흘째
옆방의 숨소리 아득하게 들려온다
먼지 소리 구르는 지하철 옆 길
몸은 움직일 수 없는데
자꾸만 이상한 단어들이 말을 걸어온다
문맥없이 대가리만 흔드는 뱀
유혹의 밤을 길게 보내렴
모래알 흐르면 태어나는 고통
바다가 꽃 피면 무덤에서 손 흔들며
나무 날아 오른다
죽어가고 싶은가 보다
이제 손을 흔들어야 하리라
무의식처럼 손을 들어 머리를 만진다
밀폐된 빵 봉지가 부풀어 오른다
손톱에 비친 혈색은 하얗다
커튼 너머로 그녀가 얼굴을 들이민다
창문을 연다 계단을 타고 올라야 한다
한발을 허공에 올린다
또 다른 한발을 누군가가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너는 누구냐 입이 보이지 않는다
방에는 거울이 없다 거미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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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촛불처럼 타오르고 싶다
촛불을 들고 바다로 간 적 있나요
속이 텅 빈 대나무 숲에는
바람소리
파도 되어 흐르고
성난 파도가 네 가슴을 쥐어 뜯으면
갈대숲은 날카로운 잎새로
그대에게 생채기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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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도토리
그녀는 저절로 샘솟는 우물
스스로 강물로 흐르는
단물
달콤쌉싸름
혀 적시는
깊은 잠 아래 놓여
설익은 잠 아래 놓여
뒤통수 때리는 그녀
툭
도토리 떨어진다
그녀는 둥근 산 아래
된장독처럼
혼자서 익어간다
쓰윽
입맛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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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무화과나무
네바다로 가는 광속 기차 안에서
아버지는 눈을 부릅 떴다
죽어가며 주사기를 잔뜩 꽂은 채
속도 마약 도박으로 쪼그라든 두 팔
아버지는 카레이서처럼 병나팔을 불려고 했다
이튿날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들판에 선 땅의 두 팔이 조금씩 들리고 있었다
시장한 하늘의 입술에서
뿌리 돋는지
까마귀 날아 왔다
뜻밖에 피가 흘렀다
나에게 꿈의 소금 뿌리며
아버지가 어서 나가 보라고 고함을 질렀다
전쟁터에 핀 꽃에는 눈물 자국 없었다
피에 굶주린 뱀의 혀를 지나
저 멀리 잎사귀 푸른 눈
무화과나무에
앵무새 혀만 수북이 쌓여
나무에는 뱀 허물 벗은 소문만 무성했다
여자는 아버지는
때 이른 고통이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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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美人 1
방학역에서 도봉산 방향을 바라 본다
붉은 등 세 개 역삼각형 세 모서리
윗 변에 멍한 눈 들이 댄다
금방 온 세상은
컴컴한 어둠으로 花한다
붉은 점
굵게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불타 오르고
정신 없이 눈 돌리다가
좌우로
들여다 보다가
어느새
번쩍
인천행 지하철 들어온다
불타는 죽음을 견딘
허무의 불빛이여
우리 모두가 잠긴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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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美人 2
한낮의 열기
밤의 품에 안겨 울고 있다
도봉동 아줌마의 손 끝에서
석화가 피어 오르면
우르르 주당들의 행진은 오늘도 계속된다
석화 한 점에 소주 한 잔
군대 간 막내 아들의 하루도 나처럼 힘들까
서 있기도 힘들다
하늘로 기운 차게 오르던 나뭇잎
밤새 가위에 뭉텅 잘리고
밤의 어머니
石花 되는 밤
잘린 잎새가
푸드덕거리며 땅바닥을 뛰어 오르네
푸른 까까머리에서
어머니의 손이 툭 튀어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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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美人 3
우울한 일요일에는 천사의 노래를 들어야 해
네가 무슨 짓을 하든지간에
네게로 가는 발걸음 새콤달콤 울려 퍼질라치면
어둠은 신선한 산정 이슬 달고
바다 바람에 넓은 잎사귀를 말린다
코끼리 한 마리 쿵쿵거리며 경쾌하게 달려가고 있다
푸른 잎사귀를 흩날리며 그대가 올까봐 귀 기울이며
문고리 쥐어 뜯는 소리
커텐 찢어지는 소리
병 깨지는 소리
어둠의 끝인지 절벽인지
코끼리 한마리 포효하고
서성이던 나무가 툭 부러지고
슬픔에 다가가는 마음은
푸른 멍 투성이라도 좋았던 걸거야
코끼리 발 밑에 깔려 납작한 길을 야금야금 먹는 꿈
기다란 어금니로 푹 찔리면 아플까
갸우뚱거리며
소년의 꿈
천사의 노래가 끝나면
더 이상 우울하지 않은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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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美人 4
해가 죽은 자처럼 불 타며 탄식했다
으스름이 깔리는 저녁
고양이 눈알만큼 동그래진 네 눈을 들여다 본다
한낮 동안 산 자와 깊은 뿌리 박았던 사지
가지처럼 뻗어
네가 선 땅에 그리움을 보냈다
위험한 강가의 아이처럼
생각의 골격은 엉성해 보였다
밤새워 내리는 빗물 같았다
흙탕물의 깊이는 더해 갔다
연꽃을 애써 검은 물에 띄워 보냈지만
어떤 목소리도 강을 따라 내려 오지 않았다
산정에 솟은 소나무
푸른 옷 입은
그녀에게 찾아가는 날은
검은 눈빛
푸르게 멍 드는 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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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꿈꾸는 시 1
일회용 컵에 묻은 그녀의 입술 자국
사내는 가만히 떨리는 입술을 붉은 루즈에 댄다
붉은 입술의 분명하지 않은 선의 윤곽
그녀의 前生을 읽은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헤어져야 할 운명을 읽은 것일까
사내는 종이컵을 내려 놓고 담배를 피운다
자판기에 손을 짚고
이글거리는 태양빛을 바라본다
사내는 현기증을 잠깐 느낀다
푸른 별에 닿고 싶은 여자는 말이 없었다
사내의 멍한 눈빛이 갑갑했다
커피를 묵묵히 마시며 여자는
시끄럽게 지나가는 버스 학생들 연인들
노인 바퀴 소리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여자는 아주 뜨거운 물 아니면
얼음 같이 차가운 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뭇잎 들여다보면
나무의 전생이 들여다 보인다
아직 가지에 매달린 잎새
땅바닥을 구르며
땅의 나이를 읽고 가는
죽어가는 잎새들까지
가끔은 웃고
가끔은 울면서
가을 가을 소곤거렸다
물을 샤워기로 얼굴에 뿌리면
가만히 뚝뚝 떨어지거나
물방울로 맺혀 있거나
주르르 흐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물의 전생이
내가 아닐까
또는 그 여자
그 여자의 독한 손
사내가 흘렸을 눈물
그녀가 무심하게 쳐다 보았을
멍한 눈빛 등이
그립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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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꿈꾸는 시 2
서두르지 말렴
자작나무의 리듬은 산타나 産 미니 메가 박스
조금씩 바람 불면 흔들어 주어야 해
오늘 밤에 꾸는 꿈은
아득한 연기
바다에 뜬 불
붉은 혀
도시를 휘감으면
향기롭게
시커멓게
그을은 주전자에서
피는 쪼그라들고
우리는 각자 몸 안에
검은 우물 하나 씩 가지고 있어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리듬
홀로 아침에 눈 뜨는 아이
아픈 그늘이지
코러스 하 듯 빗방울 천둥 땅 울리고
하나 둘 늘어가는 묘비명
조금씩 흔들어주렴
서두르지 말고
묘비명에 許한 이름을 보태며
잔가지를 흔들며
누런 이빨로 웃어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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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그 여자가 생각난다
붉은 등은
녹꽃처럼 방 한 구석에서 떨고 있었다
그리도 버리고 싶었던 길
장대비에 사정 없이 얼굴 뭉그러지던 세상
그 날은 무슨 일로 환한 등 달았던가
녹슨 철로가 새벽녘
분주히 녹꽃을 피우 듯
나는 어두운 골목을 마냥 헤매었을까
얼굴 없는 손
붉은 등 아래 차분히 손을 모으며
이제 그만 달빛이 되고 싶다던 여자
가만히 커튼을 열었다
꼬리뼈가 뒷걸음 치며
그 시절로 간다
잘린 뼈가 칼을 세운다
청명한 새벽 이슬
세상은 환했다
다만 아름답지 않았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꽃은
녹 슬어가며 이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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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후렴구처럼 살고 싶다
그냥 느낄 수만 있었으면
반복되는 후렴구처럼 7초가 똑딱거리면
햇빛 잔뜩 충전한 사과 먹고 절로 붉어지는 숲
쉽게 부른 노래 가사처럼 살고 싶다
아쉽게 지나친 그녀의 집
너에게 돌려 주지 못한 책에 읽지 못한 엽서를 꽂는다
숲 속에 울리는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새 흘러 버린 7초
버리지 못한 나무조각만 들고
돌아 오는 길
낙엽의 뱃가죽처럼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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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삶은 제한 변역에 시들어 가는 꽃
또 다시 찾아온 침묵
꽃이 시들어 가고 있다
그녀의 노래소리가 울려 퍼지는데도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을 감은 하얀 꽃
비상구를 막은 벽
누구에게 보여 주어야 이 답은 풀릴까
제한 변역에만 눈 두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삶의 포물선과 진실의 직선은 두 점에서 만날 수도 있다
한 점에서 접할 수도 있다
아예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제한 변역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데도
우리는 문을 넘지 못한다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물어 보아도
그는 침묵할 뿐이다
그냥 문을 넘어가면 될 것을
우리는 문을 넘지 못한다
답을 보아도 만져지지 않는
무언가의 커다란 아가리
단칼에 쳐라
그리고 잊을 것
==========================
50.
길 끝에서
언제까지 도망쳐야
이 길은 끝나는 길인가요
그대가 나에게 준 나침판을 따라
북극성 그 길을 찾아
하늘을 보면
언제나 어두컴컴
땅 끝에서 올라오는 안개는
언제나 암모니아 가스
질식입니다
숨 막힌 사지를 끌고
또 가야만 하는 길
아이들은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 웃자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찌푸린 얼굴
웃었습니다
나무 잎사귀 다는 이유를
알 것도 같고
잎새에 이슬 다는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길 끝입니다
한 발만 더 디디면 벼랑이군요
==============================
51.
오늘의 눈물은 악어 눈물일까
술을 먹으니 눈물이
하염없이 나옵니다
이름을 잃어
갈 곳 없는 참새처럼
죄 없는 수풀만
뒤적거리다가
먼지만 뒤집어 썼습니다
그대를 위해
진실의 포물선을 그려서는 안된다고
푸른 갈매기가
아침에 얘기했습니다
그의 말에 수긍이 가면서도
눈물은
정말 지랄 같이 흐르는군요
왜 초침이
똑딱거리는데도
벼랑으로 나아가는데도
그대를 위한
음악이 정녕 흐르는데도
까맣게
잊혀지기는 커녕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지
지랄같이
눈물 방울이
하염없이
검은 구멍에서
튕겨 나오는지
정말 신경질이 나더군요
===============================
52.그녀가 보고 싶다
담배 냄새가 향기롭습니다
그녀가 보고 싶어집니다
독일에 있는 그녀
포항에 있는 그녀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그녀들
사랑에 중독되면 그리움인가요
미움인가요
음악이 좋군요
피아노 소리 그리고 그녀의 노래 소리
그녀가 여러명이라고 하여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요
그녀들 모두가 한 몸으로
하늘을 나는 새로 보입니다
하늘을 탈출하는 빗줄기로 보입니다
한명의 여자는 죽어가고
한명의 여자는 칼에 찔리고
한명의 여자는
어려운 책들에 둘러 싸인
시들어가는 꽃잎입니다
한명의 여자는
독일의 우울과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그리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나를 욕한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웃으며 손등에
못을 견디겠습니다
===================================
53.03년 5월의 일상사
전처에게서 메일이 왔다
그동안 내가 쓴 50 여편의 시를
몇일전 바치겠다고 보냈더니
기껏 답장이라고 온 편지 내용
모두 지우라고 한다
자신과 아이를 팔아 먹지 말라는 주문이다
그래서 오케이했다
두려워말아요
저기 마구 나서는
사내들은 새들의 부리에
콕콕 쪼일
마른 빵 부스러기 일 뿐이니까요
악어가 두렵나요
까짓것 콱 물리면
그 뿐이겠지요
구멍 난 가슴에는
그대에게 바칠 꽃 한송이
꽂으면 이쁘지 않을까요
===================================
54.데이빗의 하루
랄랄라, 너에게 가려던 예약을 취소했어 오래 기다렸으리라 우리 만날 날 언제일지 모른다
허탈한 마음에 팔은 저려온다 오랫동안 멍하게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에서 날카로운 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돌덩이처럼
마른 잎사귀처럼
죽어가는 호랑이 이빨처럼
텅텅 빈 박제처럼
먼지 쌓인 뇌를 꺼내 햇볕에 말린다 데이빗은,
데이빗은 오랫동안 묵은 빨래를 세탁기에 넣는다 창문 너머 새털 구름을 본다 밝은 햇살 사이로
구름은 서서히 날개를 들어 올리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은 구름의 날개짓일까
서늘한 네 입김 뒤통수가 따갑다 뒤 돌아 보니 세탁기가 드럼을 치고 있다
보송보송한 옷을 만지니 옷은 빙그레 웃는다 이제 파티에 가야 할 시간이야 라고 속삭인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다
탁자가 식어가고 있다
지붕이 눅눅해지고 있다
<있다>가 <없어지고> 있다
커피가 식어가고
탁자가 식어가고
지붕이 눅눅해지고
사람들의 입 속으로 커피가 탁자가 지붕이 쑥쑥 잘도 들어갔다
데이빗은 취한 발걸음에 강가로 나선다 강가에 핀 장미 넝쿨이 곱다 데이빗은
장미를 만지려던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파티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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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만호
성별 남자
연령 36세
주소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 진우2차 102-204
이메일주소 syto@korea.com
전화번호 031 487 3833 (019 567 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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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영초
고요한 네 몸살 들여다 본다
아파도 내색하지 않는 차가운 얼굴
슬퍼도 울 수 없는 밤
자꾸만 달빛 서성이며
부엉이 한마리 뜬금없이 눈알을 부라린다
그리움 먼지처럼 쌓여 가고
푸르게 살이 아프다
네 슬픈 눈망울에 남 몰래 이슬 어리면
희디흰 속살에 붉은 해도 슬퍼라
저 멀리서 숨은 향기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새벽빛에 바람 불고
숲 가만히 몸 떨면
네 둥근 숨소리 단내를 풍기는데
잠 들지 못하는
푸른 눈꺼풀에 흰 새 앉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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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뱀장어 스튜
너를 벗기고 식탁에 눕힌다
두 팔 들어 항복하는 너의 자세를
억지로 무너 뜨리며 네 꼬리지느러미에 칼을 댄다
꼬물거리는 너의 대가리에 식초를 들이 붓는다
탈바꿈하던 때를 기억하는
너의 시린 눈을 들여다본다
칼날 감추며 나뭇잎 서걱이던
담장에 익어가는 햇볕 먹고
마약 먹은 듯 비비 꼬이며
실처럼 엉키던 날들 흘러 갔다
바다와 민물을 오가며
북적도 해류에 몸 식히는 오늘
대륙의 허벅지에 누워
머리 팔 하늘 날개를 펼친다
네가 푸른 알을 낳고 죽는 날 나도 죽으리라
3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어떻게 알을 낳으러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네가 새겨준 몸의 나침반을 읽는다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북적도 해류에 몸 식히며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뜨겁게 끓는 스튜에 머리를 담그고
네 눈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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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레몬의 죽음 1
레몬 굴러 떨어지고 깨진 입술에서 검은 물 흘렀다
뜨겁게 익은 지붕에서 고양이 서성이고 강물에 불기둥 솟았다 꿈처럼 잠자리 한마리 창 밖에 보였다 눈물 없는 시간이었다 밤 내내 들녘에 바람 불고 누운 풀꽃 무덤 속 네 눈알에 벌레들 굼실거렸다 지나온 길이 산산히 뭉그러진 얼굴 짓무른 눈가 곱게 쓰다듬고
푸른 물의 잔주름 네 눈에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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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레몬의 죽음 2
어떤 나무 급히 금 가고 우리는 한없이 머뭇거리며 침몰했다 무덤가에 푸른 이끼 조금씩 돋아났다 네 눈 파먹고 게슴츠레한 별자리에 어둠 졌다 꽃은 상처 깊어 네 주름진 뱃속에서 울었다 강물 쩍쩍 금 가기 시작했지만 너는 미친 듯 석양 아래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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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레몬의 죽음 3
새벽 하얗게 젖어가던 밤 숲은 무언가를 읖조리며 연신 웃었다 떠도는 영혼처럼 당신 녹슬어가고 젖은 흙에 바람 불면 무덤가에 상처 하나 피어 올랐다 바람 속에 흰 뼈를 내어 놓았다 흰뼈에서 붉은 피 뚝뚝 흐르고 햇살의 사악한 칼 목마른 눈동자에 꽂히면 붉은 강물 저만치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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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레몬의 죽음 4
폐허에 푸른 빛 고이고
달빛에 네 고운 속살 환해졌다
나방 한마리 비명 지르며
황량한 사막으로 날아갔지만
얼어붙은 핏자욱처럼 뒤흔들리며
꽃 쓰러졌지만 말없이 죽어가는 침묵
피의 강에 무정하게도 함박눈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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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숲
숲에 간다
어머니의 작은 우주 자궁에 간다
숲은 붉은 등 반짝이며 타오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화려한 자궁에 누워
숲의 커다랗게 부푼 가슴을 만졌다
어머니는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나뭇잎 떨구며 숲의 은빛 입술에
가만히 귀를 대어 보았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푸른 손 들어
내 썩은 뼈를 가만히 만져 주었다
나는 빗소리에도
훌쩍이는 숲의 출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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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새 1
길 잃어 푸른 경련
두 팔 늘어뜨리고 하늘 저 편 서 있는 구름
어린 딸 같은 꽃잎 하나 물고
새벽 산길 사슬 끄는
가파르게 떨어진 낙엽
둥근 달 경련하듯
바람에 녹슨 시간 떨어지면
소란스럽게 나뭇가지 흔들며
동굴처럼 텅텅 울리던
네 둥근 어깨
참았던 비명
시퍼렇게 퍼덕이는 칼부림에
비 오 듯 아픈 사지
살점 떨어지고
쉽게 지워질 발자국 환한 울음 우는 너
자작나무 흔들어 깨우고
그간의 세월 모르게 달려가는 네 속도
창 밖 빗소리 꽃망울 나뭇가지에
머무는 서늘한 흰 잔등
허물어진 폐가 감싸 안으며
숨죽인 나무 등걸에 앉아 성근 숲 데운다
간밤 흐르는 강물 출렁이던
네 서글픈 몸 뜨겁게 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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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새 2
불을 꺼 주세요
사시사철 눈 뜬 망막
고이는 빗물
쿵쿵 뒤통수를 때리는 문명의 드럼 소리
소주 마셔 침침한 귀에 네 둥근 맺힘 들리지 않았다
손 등에 떨어진 코피
떨어질 듯 비릿한 증오
수평선 막막한 하얀 파도
차라리 떨어졌으면
거리의 붉은 등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새가 날았다
찬 커피를 마시고 불면의 밤
도시의 무릎 아래로 흐르고
너는 어디로 가는걸까
불을 꺼야 할까
모래알 같이 터진 너의 부르튼 살갗에
푸른 칼 꽂혔다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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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새 3
어두운 지하 저 너머 보여주지 않는 벽
한참동안 바라 보았다
반사광처럼 영문 없이 지하철이 달려온다
시시각각 목 죄어 오는 시간
실수 없이 죽음은 달려 오고
젖은 날개를 접고 레일 위에 떨어지고 싶은 자여
뜨거운 이별은 천둥처럼 찾아 왔다
백마리의 새가 날아 오른다
고삐 풀린 한낮의 열기에 숨 막힌 까마귀떼
캄캄한 한낮에 날아 오르며 물을 찾아 나선다
너 날아간 텅빈 거리에는
바퀴벌레처럼 수북이
황홀한 알을 까는 소문들만 무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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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새 4
그들은 산 채로 잡혔다
붉은 피 흘리며
모두 꼬챙이에 꿰어져야 했다
충혈된 눈들이 의심스런
일렬횡대로 너를 노려 보고 있다
어린 날개에 접힌 생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듯
한 점의 고기에 만족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의 정원을 보았다
나무 잎사귀마다
죽은 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네게로 가는 길은 온 사방 막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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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눈 꼭 감았습니다
두 사람 걸어온 길
이 세상 온갖 더러운 꼴 보러온 길
한 사람 먼저 떠났습니다
네 애꾸눈 흉터 깊은 줄 몰랐습니다
네 넓은 가슴
그리 왜소한 줄 몰랐습니다
절규하며 들꽃 보았습니다
들풀마다 맺힌 눈물에 눈물 섞으며
깜빡 잠들었습니다
황홀한 잠이었습니다
남모르게 버린 악수였습니다
파도 일어나듯 마음 한 구석에 후회 일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먼 길 걸으며
한 발 절뚝거렸습니다
당신이 저 먼 하늘 밝은 곳에서
하얗게 손 흔들 때
내 마음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눈 감아 버린 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눈 꼭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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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안산으로 가는 길
하루 네 시간 꼬박 사년 동안
신촌과 안산을 오가던 길
그 새 벌써 까먹었는지,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화분이 무겁다
타오르던 푸름 불꽃이 죽어 가고 있다
퇴화한 눈이 지하를 그리워 하는 것 일게다
갑자기 다가온 햇빛에 잠깐 눈 멀었다
어머니에게 짐을 지워 주었다
걸어가는 길에 본 하천
구멍 난 비닐 하우스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 꽃은 어머니의 손길에서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살아 나리라
하나의 꽃이 피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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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울역
외로운 거지가 지하철 바닥에 신문지 깔고
지친 날개 접고 있다
무언가를 소중하게 늘어놓고 파는 사람들
비둘기떼 웅성거리는 서울역 오후
때절은 할머니가
지하철 바닥에 털썩 안방처럼 앉았다
미역을 싼값에 팔고 있다
땀 질질 흘리며 남도의 신경세포 짠내음이
삐쩍 메마른 사지를 툭툭 건드린다
할머니의 욕설이 절반인 경상도 사투리
가만히 듣고 서 있었다
서서히 몸이 풀리고
여기저기 구멍에서 진물이 흐른다
콧구멍에 실실 바람이 드는지
그렇고 그런 설레임이 보였다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오라
서울의 예수는 성경을 헐값으로 팔고 있었다
간이 남산만큼 부어도
소주 여전히 들이키는 거지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썩은 냄새 풀어 헤치고 있었다
병째 나팔 부는 거지의 눈치를 보며
슬쩍 백원짜리 만지작거렸다
몇일간 산에 오르지 않았다
서울역에서 남산까지 가는 길에
자주 보이던 창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찾다가
눈에 밟히는 나무들
남산에서 서울역을 형제처럼 바라본다
별들이 다 모였다
창녀 거지 목사가 함께 모여
화투를 치고 있다
올 사람이 다 온 것일까
레닌그라드 뉴욕 북경 동경
날개 쉬는 듯 다 모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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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풀꽃의 슬픔
서성이는 풀꽃
메마른 도시에 녹슨 쇠덩이처럼 찾아온 너
방학역 담벼락에 핀 엷게 퇴색한
어둠처럼
떠나는 자의 푸른 목덜미 조르며
풀꽃 서성이고 있었다
새벽안개 무심히 바라보는
가로등 불빛 간신히 먹고
푸른옷 입은 네 어깨여
하얀 갈매기의 맑은 눈처럼
가로등 불빛
푸른 바다
부푼 파도에 꽂히면
깊은 생각에 잠긴
풀의 허리를 분지르며
지하철 굴러갔다
수없이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도
으르렁거리며 돌멩이처럼
발길에 채이고,
가볍게 햇빛 하늘에 번지면
가로등의 뜨거운 눈 감기우고
나만이 담벼락에 핀 풀꽃 바라다본다
가슴 깊이 그대를 그리워함은
가로등의 한없이 서성이는 눈빛일까
너를 떠나지 못함은
담벼락에 핀 풀꽃의
아무렇지 않은 슬픔일까
위태롭게 벼랑 끝에 매달린
네 녹슨 쇠덩이를 바라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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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도봉동 고시원의 밤
고시원의 밤은
붉은 야시장처럼 분주하다
갈 곳 없는 먼지들이 모여
한웅큼의 재채기를 하고 있다
옆방 유씨는 귀티가 줄줄 흐르는
미남인데도 웃지를 않았다
소주 한잔에도 저녁해처럼 타올라
자기 이야기를 강물에 툭툭 던지던 그가
벽 너머에서
오늘 낮에 공사장에서
귀하게 얻어온 허리병을
쓰다듬고 있다
매일 밤 종이보다 얇은 벽을 타고
그의 신음소리는
거미처럼 내 귀를 타고 흐른다
이제는 그가 웃지 않는 이유를 알지만
거미 보이지 않으면
거미줄만 그의 방에 꽉 차 있으리라
몇일 전에 새로온 남자는
목욕탕에서 신나게
검게 그을은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의 팔뚝에서 푸른 갈매기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끼룩거리고 있었다
밤마다 그는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내가 아니란 말이야 나 아니야
그는 또 총무에게 불려 나간다
푸른 갈매기가 착한 양처럼 질질 끌려 나간다
구르지 않는 돌멩이들이 모여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인다
어디에서도 부르는 이 없는지
오늘도 유씨의 신음소리 붉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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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잠
두 줄로 서서
끝없이 길 가는 철로
자꾸만 네 가시에 찔리며
철로의 무심한 잠에 고개 숙였다
물방울로만 얘기하는
파도 소리 들으며
지난 가을 바닷가를 떠났다
관절과 관절이 부딪히는
도시의 녹슨 시계 소리 들으며 잠 깼다
땅에 내리고 싶은 날개
퍼덕이며 울리는 시계 보지 않았다
너는 후렴구로만 답장을 보냈다
녹슬어 가는 너의 기억 무덤에 묻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인 것 같아 신열은 차 올랐다
무르익지 않던 봄
먼지처럼 버석거렸다
구르는 돌 뒹굴며
정거장에서 내리지 않았다
모두가 떠난 버스에는
네 심장 썩어 가는 냄새만이 부끄러웠지만,
비가 돌연 쏟아졌다
구르는 돌 깨우고 심장 썩어 가는 냄새 흩어지고
두 줄로 선 철로 맞붙었다
철로의 무심한 잠 깨우고
시계 본다 오랜만에 땅에 날개 기대어
빗줄기 속에 나를 보낸다
유위의 잠
깊어 가고
네 눈 밝아지는 날
관절 소리 정겨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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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내에게
언젠간 죽으리라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 속에 숨어도
네 얼굴이 둥그렇게 열렸다
절뚝거리는 네 힘겨운 발걸음이
내 심장에 못을 박았다
절뚝거리더라도 아직 누워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젯밤 꿈에 너는 힘차게 달려가는 야생마
부리를 힘차게 휘두르는 서슬 푸른 독수리
산양을 한입에 먹어 삼키는 붉은 호랑이였다
하루하루 네가 시들어가는 정원을 떠나
씩씩한 사람들 속에 숨어 있지만
네 얼굴은 둥그렇게 열렸다
네 눈빛은 더운 목덜미 시원하게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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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촉석루
돌처럼 단단한 사랑이 흐른다
익어가는 너의 뼈 마디마다
이끼 푸르게 맺혀
천년 이어온 그리움 피어나고
가끔씩 찾아온 바람에
멍든 가슴을 쓸어 안는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머물러야 할
숙명이라면 네가 되고 싶다
연약한 돌
나무의 윤곽 곁을
동백 목련이 차갑게 지키고 서 있다
세월을 가르던 강물 타오르려 일렁이지만
든든한 돌 허벅지
네 척추 곧추 세우는구나
만년설을 얹고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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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지렁이
지렁이는 기어가며
홀로 너의 지나간 길을 읽었다
흙에서 본 너의 얼굴
그림자 없고
땅 속 깊이 파들어간 그리움
끝이 났다
수없이 꿈틀대는 주름
겹겹이 너의 얼굴은
보인다
앞 뒤로 기대고 싶은 마음은
저 멀리 파도에 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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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북한산
그 여자는 모든 남자를 받아 내었다
하루에 수십명 남자들이 그녀를 거쳐갔다
그녀는 남자들의 찢어진 가슴 위에서
풍만한 젖가슴
펑퍼짐한 엉덩이
크고 넓은 얼굴
몽고 스타일의 동양여자였다
한줌의 흙 뿌리는 여자는
거대한 대륙이었다
허벅지 사이에서 꿀물 흐르?위대한 어머니의 따뜻한 손
남자의 돌같이 굳은 얼굴 감싸 주었다
입맞추는 그녀의 누런 이빨 사이 쉰 냄새
오히려 남자는 편안했다
남자의 다리 사이에서 헝클어진 미움의 검은 실타래가 보이자 여자는 가위로 뭉텅 잘라 주었다
한올한올 실타래 풀어주며 남자의 말을 들어 주는 진지한 그녀가
우리 동네 신부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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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푸른 그림자
하늘로 가는 계단 용케 기어 오르는 너를 보면
언제나 같이 올라가고 싶다
네가 남긴 멍 든 발자국
텅 빈 음악 듣다 보면 푸른 그림자
잎사귀
여전히 불을 꺼야 한다
지하철에서 구입한 화분을 앞에 두고
이 놈을 어떻게 햇빛을 쪼여줄까 고민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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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장갑 한짝
흐린 등
인적 드문 벤치에
누군가 흘린 장갑 한짝
시린 손 따뜻이 데워주던 장갑이 한짝 남아
이제 만져줄 용기, 건넬 온기도 없이
차게 시큰둥하게 식어만 가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장갑 한짝을 주머니에 넣고
이리저리 마음에 장갑을 얹는다
소녀가 누구에게 주려고 짠 털장갑이었을까?
다른 한짝은 어느 곳에서
소년의 손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안타까운 마음은 흘러흘러
집까지 함께 걸어갔다
화해의 손을 건넨다
그냥 흘렸을 뿐이었다고
버린게 아니었다고
굳게굳게 믿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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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가고 오면서
가고 오면서
떨어진 잔뼈
떼어온 굵은 뼈
살점 떨어져 시린 뼈
그렇게 잃고 모으다보니
어느덧 듬성듬성한 허수아비
봄바람 불어 온다
가고 오면서
잃어버린 사람들
봄날 같이
춥게 모인 사람들
언젠가는 다시 모일 날
바람 앞에 마주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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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흙 파는 노인
흙 파는 노인
주름진 얼굴
겨울땅은 쉽게 자신을 열어 보이지 않았다
창문 밖 누군가가 정원의 흙을
열심히 파는 것을 보았을 때
한마리 붉은 곰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무덤을 파듯이
한무더기의 돌덩이를
야윈 손으로 들어 옮겼다
창백하게 떨고 있는 아이를
가슴에 안고 옮기고 있었다
아늑한 봄날 같은 졸음처럼
잊고만 싶은 계절이 흘렀다
정원에는 한 그루 자작나무
자작나무의 발끝에는
노인이 소중히 옮기려 했던
돌무더기가 비석처럼 서 있다
노인이 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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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꽃
하나의 꽃이 피기 위해서는
하나의 분노가 죽어야 한다
너를 가둔 물 속에서
달걀 삶아 지듯이
분노가 지독하게 익어가고 있다
은근히 나를 태우는 촛불
어느 으슥한 물 속
풀숲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꽃 바라보다가
물 속에 풀잎 떨구었다
쓰레기란 쓰레기 모두 모여
부둥켜 안고 있는 물 속
물고기 한마리가
물 속에서 풀잎 툭툭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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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섬
하늘에 올라오니
땅 좋은 지 알겠다
발 아래 바다 강물 산맥 구름
번진 물감이구나
비행기 비좁은 의자에 사지 쑤셔 넣으니
비좁은 쪽방이라도 내 집 넓었구나
빗물 한 두 방울
이내 섬 한 입에 삼키고
빗줄기에 섬 멱살 잡히고
검은 돌덩이 바닷물에 흔들거린다
바람 한 두번만 불어도
섬 허리 들썩이며 울었다
철없는 연인들은
바지 걷고 바닷가 서성이고
돌 바다 바람
섬은 하얗게 지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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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우물
네 속에 무엇이 있을까
아무 것도 없을지 몰라 서성였다
네 안에 몰래 독을 붓기도 하였지만
어느새 너는 맑은 물을 건넸다
너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검은 물의 차가운 눈빛
마구 창문 틈 들썩이는 겨울 바람
네 안에 든 우물물을 다 버려야
생명이 자란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도 뒷산에 올라 갔다
네 속에 우물이 과연 들어 있을까
아무리 너를 흔들어도
우물물은 없고 그럼 출렁이는 게 무얼까
눈빛일까 겨울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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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봄의 악몽
검은 눈을 보았다
계절은 회전하고 있었다
소용돌이 치는 바람의 눈
무서워 도망치다 보면
봄 끝 무렵
안개비였다
움푹 패인 봄 골짜기
네게 고이는 빗방울마다
진한 피의 냄새가 났다
푸른 산에 붉은 피 흐르면
몸소리 치도록 네가 무서웠다
외로운 목숨 구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 왔다
불어오는 칼 바람에
네가 아프게 구르고 있었다
잠들 수 없는 봄 밤
빗물처럼 아무렇지 않게 흘렀다
낮에 만질 수 없던 돌의 얼굴
꿈 속에서야 쓰다 듬었다
창백한 표정으로
돌이 꿈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버석이는 먼지처럼
계단에 구르는 꿈
깨고 나면
수많은 어둠의 가시가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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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목성
태양계에서 가장 크고
무겁다는 그 곳에 가고 싶다
지름이 지구의 열한배
공전주기는 11.86년
질량은 지구의 317.89배
평균 표면온도는 섭씨 -110도
바닷물에 썩어가는 내 몸 담그고
끈덕지게 흘러 흘러 용케 수증기 타고 올라
먼 길 네 불모의 땅에 스미는 물이 되고 싶다
쉽게 잊혀진 너
울지 않고 너를 본 자가 있을까
죽어 갈 수 있다면 가고 싶은 땅
목성은 9시간 55분이면 빙그르르 돈다
빠른 자전
구름이 적도에 팽팽한 가로줄 무늬로 흐르고 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네 얼굴에 흘렀다
아직도 부풀어가는 울음 덩어리
꽃의 폭풍 네 고운 폭풍
이제 그만 떨구어라
네가 흐느끼는 우주에
어깨 들썩이며 한없이 서성이는 뿌리
이제 그만 울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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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삼십대
남루 삼십대
귀하신 분들 아래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부들부들 떨며
막 눈물 떨어질 듯한 삼십대
비둘끼떼처럼 모여
아직도 담배를 피고 있다
뻐끔뻐끔 삼십대
기우다 만 헝겁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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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다락방의 고해성사
그대 보고 싶으면
내 오랜 다락방에 오릅니다
비 오는 소리 가만히 다락방에서 울려 퍼지면
착한 아이의 눈빛으로
내 쓸쓸한 다락방에 오릅니다
이미 부서진 유리 파편들
내 가슴을 콕콕 찌르면 눈물을 감추고
유령의 서커스를 보러 갑니다
날카로운 도시의 주사바늘이
척추를 찌르고
지식의 거머리들이 혈관을 타고
정수리를 아프게 눌러 오면,
세상의 온갖 비밀 가슴에 품고 다락방은
이 어둠에도 가쁜 숨소리입니다
악마와 악수하는 아버지의 역사를 읽습니다
누워 지는 해를 바라 봅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다락방은 작은 강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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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동묘에서
문 밖은 온갖 잡새
실신하듯 미치도록 펄펄 날아 다니고
먼지 겹겹이 중고판 복사본
아직도 건재한 한국 경제여
눈 둘 곳 없어
저 문을 넘어야 널 볼 수 있으리
자유의 깃발 잎잎이 달고 있는 나무들
굳은 각오로 두 발 뿌리 박은 동묘
새로울 것 없는 굶주림 가득 안고
이제 다리 펴기 영 쉽지 않은 할아버지 몇몇
뻐끔 담배를 피고 있다
쭈구렁 할머니들은
어느새 내 주변에 비둘기처럼 옹기종기
싸구려 과자 부스러기를 시원스럽게 털어 먹고 있다
이미 고향을 떠난 자식들 미국에서 잘 지낼까
마땅히 당신의 걱정은 누가 할까
푸른 사색 잎잎이 달고 있는 나무들 곁
진정한 이 시대의 자유인들이 모여 있다
한 젊은 거지가 빙빙 돌며
낮은 포복으로 내게 걸어온다
담배 한 모금 빌려 달라고 하여 한 갑 채 주었지만
별 고맙다는 얘기도 없다
오히려 수상한 듯 나를 쳐다보던 자유인
녹슨 검은 물
빗줄기 내려 꽂히는
동묘 처마에 잠깐 동안 네 모습 보였다
마침 붉은 꽃잎 뚝뚝 떨어지고
지나가는 쓰레기차에선 밝은 노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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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거울
끊임없이 회전하는 너
나를 언제나 거꾸로 세우고
킬킬 웃는 거울이여
비행기가 활공을 하면 들판 나무들도 두 팔 벌려
너를 안고 뒹굴고 입술과 입술 부딪혀 드디어 이빨 깨지다
거울에 없는 너
거울에 있는 나와 함께 뒹굴며
키득 웃는 거울의 무심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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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뭍에서의 짧았던 시간들
한여름 태양빛에 우리의 사랑 익어가고
가을 잎새처럼
하늘 올려다보던 솜털 보송보송한 네 얼굴
구름처럼 서성이며
따뜻한 손에 우리의 차가운 사랑 데우던
고운 시절
때 늦은 사랑입니다
레몬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우리는 아팠지만 울지도 못하고 술만 마셨습니다
비만 울리고 잠 속에서
서성이는 철로처럼
시계 소리 들리면
한뼘 남짓 남은 인생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그 먼 곳
그 곳에서 너는 돌처럼 굳어가겠지요
풀들의 무심한 잠 깨우며
바람 불어 오고
무서운 산 어둠 보며
메아리 없는 사랑을 속삭입니다
막차는 오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대답 없이
눈 멀도록 바다만 바라 보았습니다
알콜중독에 빠진 남자를 구원할 것은
죽음 뿐일까요
여자의 푸른 눈물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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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어머니학교 봄 소풍
유치원 아이들이 어미닭을 따라가 듯
앳된 선생님의 눈을 바라봅니다
오고 가는 가족 나들이의 고운 발걸음
비 온 뒤 푸른 햇살 밟히고
나이 든 어머니 학생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빨강 풍선처럼 화려합니다
일산 시민공원 연못에 비친 어둠의 칼날이
둥글게 파문을 그립니다
유치원 아이들도 어머니 학생들도
어둠의 기억도 함께 웃는 봄 소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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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죽어가는 자에게
도봉산이 어둡다
방에 누운 지 벌써 사흘째
옆방의 숨소리 아득하게 들려온다
먼지 소리 구르는 지하철 옆 길
몸은 움직일 수 없는데
자꾸만 이상한 단어들이 말을 걸어온다
문맥없이 대가리만 흔드는 뱀
유혹의 밤을 길게 보내렴
모래알 흐르면 태어나는 고통
바다가 꽃 피면 무덤에서 손 흔들며
나무 날아 오른다
죽어가고 싶은가 보다
이제 손을 흔들어야 하리라
무의식처럼 손을 들어 머리를 만진다
밀폐된 빵 봉지가 부풀어 오른다
손톱에 비친 혈색은 하얗다
커튼 너머로 그녀가 얼굴을 들이민다
창문을 연다 계단을 타고 올라야 한다
한발을 허공에 올린다
또 다른 한발을 누군가가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너는 누구냐 입이 보이지 않는다
방에는 거울이 없다 거미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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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촛불처럼 타오르고 싶다
촛불을 들고 바다로 간 적 있나요
속이 텅 빈 대나무 숲에는
바람소리
파도 되어 흐르고
성난 파도가 네 가슴을 쥐어 뜯으면
갈대숲은 날카로운 잎새로
그대에게 생채기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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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도토리
그녀는 저절로 샘솟는 우물
스스로 강물로 흐르는
단물
달콤쌉싸름
혀 적시는
깊은 잠 아래 놓여
설익은 잠 아래 놓여
뒤통수 때리는 그녀
툭
도토리 떨어진다
그녀는 둥근 산 아래
된장독처럼
혼자서 익어간다
쓰윽
입맛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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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무화과나무
네바다로 가는 광속 기차 안에서
아버지는 눈을 부릅 떴다
죽어가며 주사기를 잔뜩 꽂은 채
속도 마약 도박으로 쪼그라든 두 팔
아버지는 카레이서처럼 병나팔을 불려고 했다
이튿날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들판에 선 땅의 두 팔이 조금씩 들리고 있었다
시장한 하늘의 입술에서
뿌리 돋는지
까마귀 날아 왔다
뜻밖에 피가 흘렀다
나에게 꿈의 소금 뿌리며
아버지가 어서 나가 보라고 고함을 질렀다
전쟁터에 핀 꽃에는 눈물 자국 없었다
피에 굶주린 뱀의 혀를 지나
저 멀리 잎사귀 푸른 눈
무화과나무에
앵무새 혀만 수북이 쌓여
나무에는 뱀 허물 벗은 소문만 무성했다
여자는 아버지는
때 이른 고통이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떠났다
===================================
41. 美人 1
방학역에서 도봉산 방향을 바라 본다
붉은 등 세 개 역삼각형 세 모서리
윗 변에 멍한 눈 들이 댄다
금방 온 세상은
컴컴한 어둠으로 花한다
붉은 점
굵게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불타 오르고
정신 없이 눈 돌리다가
좌우로
들여다 보다가
어느새
번쩍
인천행 지하철 들어온다
불타는 죽음을 견딘
허무의 불빛이여
우리 모두가 잠긴다
아프다
========================
42. 美人 2
한낮의 열기
밤의 품에 안겨 울고 있다
도봉동 아줌마의 손 끝에서
석화가 피어 오르면
우르르 주당들의 행진은 오늘도 계속된다
석화 한 점에 소주 한 잔
군대 간 막내 아들의 하루도 나처럼 힘들까
서 있기도 힘들다
하늘로 기운 차게 오르던 나뭇잎
밤새 가위에 뭉텅 잘리고
밤의 어머니
石花 되는 밤
잘린 잎새가
푸드덕거리며 땅바닥을 뛰어 오르네
푸른 까까머리에서
어머니의 손이 툭 튀어 나오네
===================================
43.
美人 3
우울한 일요일에는 천사의 노래를 들어야 해
네가 무슨 짓을 하든지간에
네게로 가는 발걸음 새콤달콤 울려 퍼질라치면
어둠은 신선한 산정 이슬 달고
바다 바람에 넓은 잎사귀를 말린다
코끼리 한 마리 쿵쿵거리며 경쾌하게 달려가고 있다
푸른 잎사귀를 흩날리며 그대가 올까봐 귀 기울이며
문고리 쥐어 뜯는 소리
커텐 찢어지는 소리
병 깨지는 소리
어둠의 끝인지 절벽인지
코끼리 한마리 포효하고
서성이던 나무가 툭 부러지고
슬픔에 다가가는 마음은
푸른 멍 투성이라도 좋았던 걸거야
코끼리 발 밑에 깔려 납작한 길을 야금야금 먹는 꿈
기다란 어금니로 푹 찔리면 아플까
갸우뚱거리며
소년의 꿈
천사의 노래가 끝나면
더 이상 우울하지 않은 월요일
======================================
44.
美人 4
해가 죽은 자처럼 불 타며 탄식했다
으스름이 깔리는 저녁
고양이 눈알만큼 동그래진 네 눈을 들여다 본다
한낮 동안 산 자와 깊은 뿌리 박았던 사지
가지처럼 뻗어
네가 선 땅에 그리움을 보냈다
위험한 강가의 아이처럼
생각의 골격은 엉성해 보였다
밤새워 내리는 빗물 같았다
흙탕물의 깊이는 더해 갔다
연꽃을 애써 검은 물에 띄워 보냈지만
어떤 목소리도 강을 따라 내려 오지 않았다
산정에 솟은 소나무
푸른 옷 입은
그녀에게 찾아가는 날은
검은 눈빛
푸르게 멍 드는 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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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꿈꾸는 시 1
일회용 컵에 묻은 그녀의 입술 자국
사내는 가만히 떨리는 입술을 붉은 루즈에 댄다
붉은 입술의 분명하지 않은 선의 윤곽
그녀의 前生을 읽은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헤어져야 할 운명을 읽은 것일까
사내는 종이컵을 내려 놓고 담배를 피운다
자판기에 손을 짚고
이글거리는 태양빛을 바라본다
사내는 현기증을 잠깐 느낀다
푸른 별에 닿고 싶은 여자는 말이 없었다
사내의 멍한 눈빛이 갑갑했다
커피를 묵묵히 마시며 여자는
시끄럽게 지나가는 버스 학생들 연인들
노인 바퀴 소리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여자는 아주 뜨거운 물 아니면
얼음 같이 차가운 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뭇잎 들여다보면
나무의 전생이 들여다 보인다
아직 가지에 매달린 잎새
땅바닥을 구르며
땅의 나이를 읽고 가는
죽어가는 잎새들까지
가끔은 웃고
가끔은 울면서
가을 가을 소곤거렸다
물을 샤워기로 얼굴에 뿌리면
가만히 뚝뚝 떨어지거나
물방울로 맺혀 있거나
주르르 흐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물의 전생이
내가 아닐까
또는 그 여자
그 여자의 독한 손
사내가 흘렸을 눈물
그녀가 무심하게 쳐다 보았을
멍한 눈빛 등이
그립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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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꿈꾸는 시 2
서두르지 말렴
자작나무의 리듬은 산타나 産 미니 메가 박스
조금씩 바람 불면 흔들어 주어야 해
오늘 밤에 꾸는 꿈은
아득한 연기
바다에 뜬 불
붉은 혀
도시를 휘감으면
향기롭게
시커멓게
그을은 주전자에서
피는 쪼그라들고
우리는 각자 몸 안에
검은 우물 하나 씩 가지고 있어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리듬
홀로 아침에 눈 뜨는 아이
아픈 그늘이지
코러스 하 듯 빗방울 천둥 땅 울리고
하나 둘 늘어가는 묘비명
조금씩 흔들어주렴
서두르지 말고
묘비명에 許한 이름을 보태며
잔가지를 흔들며
누런 이빨로 웃어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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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그 여자가 생각난다
붉은 등은
녹꽃처럼 방 한 구석에서 떨고 있었다
그리도 버리고 싶었던 길
장대비에 사정 없이 얼굴 뭉그러지던 세상
그 날은 무슨 일로 환한 등 달았던가
녹슨 철로가 새벽녘
분주히 녹꽃을 피우 듯
나는 어두운 골목을 마냥 헤매었을까
얼굴 없는 손
붉은 등 아래 차분히 손을 모으며
이제 그만 달빛이 되고 싶다던 여자
가만히 커튼을 열었다
꼬리뼈가 뒷걸음 치며
그 시절로 간다
잘린 뼈가 칼을 세운다
청명한 새벽 이슬
세상은 환했다
다만 아름답지 않았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꽃은
녹 슬어가며 이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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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후렴구처럼 살고 싶다
그냥 느낄 수만 있었으면
반복되는 후렴구처럼 7초가 똑딱거리면
햇빛 잔뜩 충전한 사과 먹고 절로 붉어지는 숲
쉽게 부른 노래 가사처럼 살고 싶다
아쉽게 지나친 그녀의 집
너에게 돌려 주지 못한 책에 읽지 못한 엽서를 꽂는다
숲 속에 울리는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새 흘러 버린 7초
버리지 못한 나무조각만 들고
돌아 오는 길
낙엽의 뱃가죽처럼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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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삶은 제한 변역에 시들어 가는 꽃
또 다시 찾아온 침묵
꽃이 시들어 가고 있다
그녀의 노래소리가 울려 퍼지는데도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을 감은 하얀 꽃
비상구를 막은 벽
누구에게 보여 주어야 이 답은 풀릴까
제한 변역에만 눈 두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삶의 포물선과 진실의 직선은 두 점에서 만날 수도 있다
한 점에서 접할 수도 있다
아예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제한 변역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데도
우리는 문을 넘지 못한다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물어 보아도
그는 침묵할 뿐이다
그냥 문을 넘어가면 될 것을
우리는 문을 넘지 못한다
답을 보아도 만져지지 않는
무언가의 커다란 아가리
단칼에 쳐라
그리고 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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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길 끝에서
언제까지 도망쳐야
이 길은 끝나는 길인가요
그대가 나에게 준 나침판을 따라
북극성 그 길을 찾아
하늘을 보면
언제나 어두컴컴
땅 끝에서 올라오는 안개는
언제나 암모니아 가스
질식입니다
숨 막힌 사지를 끌고
또 가야만 하는 길
아이들은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 웃자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찌푸린 얼굴
웃었습니다
나무 잎사귀 다는 이유를
알 것도 같고
잎새에 이슬 다는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길 끝입니다
한 발만 더 디디면 벼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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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오늘의 눈물은 악어 눈물일까
술을 먹으니 눈물이
하염없이 나옵니다
이름을 잃어
갈 곳 없는 참새처럼
죄 없는 수풀만
뒤적거리다가
먼지만 뒤집어 썼습니다
그대를 위해
진실의 포물선을 그려서는 안된다고
푸른 갈매기가
아침에 얘기했습니다
그의 말에 수긍이 가면서도
눈물은
정말 지랄 같이 흐르는군요
왜 초침이
똑딱거리는데도
벼랑으로 나아가는데도
그대를 위한
음악이 정녕 흐르는데도
까맣게
잊혀지기는 커녕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지
지랄같이
눈물 방울이
하염없이
검은 구멍에서
튕겨 나오는지
정말 신경질이 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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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그녀가 보고 싶다
담배 냄새가 향기롭습니다
그녀가 보고 싶어집니다
독일에 있는 그녀
포항에 있는 그녀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그녀들
사랑에 중독되면 그리움인가요
미움인가요
음악이 좋군요
피아노 소리 그리고 그녀의 노래 소리
그녀가 여러명이라고 하여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요
그녀들 모두가 한 몸으로
하늘을 나는 새로 보입니다
하늘을 탈출하는 빗줄기로 보입니다
한명의 여자는 죽어가고
한명의 여자는 칼에 찔리고
한명의 여자는
어려운 책들에 둘러 싸인
시들어가는 꽃잎입니다
한명의 여자는
독일의 우울과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그리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나를 욕한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웃으며 손등에
못을 견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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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3년 5월의 일상사
전처에게서 메일이 왔다
그동안 내가 쓴 50 여편의 시를
몇일전 바치겠다고 보냈더니
기껏 답장이라고 온 편지 내용
모두 지우라고 한다
자신과 아이를 팔아 먹지 말라는 주문이다
그래서 오케이했다
두려워말아요
저기 마구 나서는
사내들은 새들의 부리에
콕콕 쪼일
마른 빵 부스러기 일 뿐이니까요
악어가 두렵나요
까짓것 콱 물리면
그 뿐이겠지요
구멍 난 가슴에는
그대에게 바칠 꽃 한송이
꽂으면 이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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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데이빗의 하루
랄랄라, 너에게 가려던 예약을 취소했어 오래 기다렸으리라 우리 만날 날 언제일지 모른다
허탈한 마음에 팔은 저려온다 오랫동안 멍하게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에서 날카로운 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돌덩이처럼
마른 잎사귀처럼
죽어가는 호랑이 이빨처럼
텅텅 빈 박제처럼
먼지 쌓인 뇌를 꺼내 햇볕에 말린다 데이빗은,
데이빗은 오랫동안 묵은 빨래를 세탁기에 넣는다 창문 너머 새털 구름을 본다 밝은 햇살 사이로
구름은 서서히 날개를 들어 올리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은 구름의 날개짓일까
서늘한 네 입김 뒤통수가 따갑다 뒤 돌아 보니 세탁기가 드럼을 치고 있다
보송보송한 옷을 만지니 옷은 빙그레 웃는다 이제 파티에 가야 할 시간이야 라고 속삭인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다
탁자가 식어가고 있다
지붕이 눅눅해지고 있다
<있다>가 <없어지고> 있다
커피가 식어가고
탁자가 식어가고
지붕이 눅눅해지고
사람들의 입 속으로 커피가 탁자가 지붕이 쑥쑥 잘도 들어갔다
데이빗은 취한 발걸음에 강가로 나선다 강가에 핀 장미 넝쿨이 곱다 데이빗은
장미를 만지려던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파티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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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만호
성별 남자
연령 36세
주소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 진우2차 102-204
이메일주소 syto@korea.com
전화번호 031 487 3833 (019 567 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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