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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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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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의 기억
지난겨울에는 혼자 있었습니다.
연락되지 않는 전화번호로 끊임없이 다이얼을 돌렸습니다만
수화기 저켠에서는 부재중을 알리는 기계음이나,
우울한 신호음뿐이었습니다. 창밖으로는 뜻 모를 전언을 입에 문 새들이
계속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아 새들은 다 어디서 어디로 가는 것이었을까요.
나는 무료하게 앉아 그쯤 어디로
당신이 날려 보낸 새가 보이지나 않는지
오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새들의 입을 벗어난 전언들이
나의 창 언저리에 날아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리 쉬 녹아버리는 눈발처럼, 그것들은 제 손에 닿기 전
자모子母로 분리되어 버릴 뿐이었습니다.
나는 전언들을 이리저리 모아붙이며 퍼즐게임이나 하다가,
가끔씩 어렴풋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전언들과
끝말잇기놀이나 하다가, 새우처럼
구부려 누웠습니다. 잠속으로 꿈이 들어
자음과 모음이 분리된 저 전언들처럼 내 몸도 가벼워진다면
중천 어디쯤을 ᄀᄂᄃᄅ로,
ㅏㅑㅓㅕ 로 흩날릴 수 있었을까요.
새들의 전언이나 눈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흩날리던
겨울의 것들은 거리에 쌓여
바람이 부는 대로 이쪽저쪽 몰려다니고,
어딘가로부터 타전되는 모로스 부호들이
해체된 새들의 가슴이나, 벽이나, 전신주나,
말없이 서있던 나무들의 옆구리에 툭툭 박히기도 하던
겨울은 그렇게 흐르고, 그쯤 어디에 나도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만,
대체로 평온하게,
대체로 연인들은 연애를 하고,
바라보는 자는 바라보고,
술 마시는 자들은 술을 마시면서,
꿈꾸는 자의 곁을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닭을 죽였다.
나는 닭을 죽였다.
날개를 가지고도 날지 않다니
새가 한 뼘의 땅만 쳐다보고
땅거지처럼 돌아다니다니
나는 몹시 화가 나서
날선 칼로 닭의 목을 내리쳤다.
닭은 날개를 파닥이다가
붉은 것을 왁왁 쏟아내며
바닥에 거꾸러졌다.
닭은 죽고,
이제 나는 닭을 죽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닥에는
흰 날개를 가진 새 한 마리
파르르 떨며 누워 있고, 죽은 닭은
죽은 몸을 투욱투욱 털며
벌써 저만치 가고 있다.
환 청
A는 모른다. 내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무심히 그러라던 A는, 밤이면 내가 듣는 소리를 환청이라고 생각한다. A는 창문을 닫는다. 그렇지만 정말 갔다 올 수는 있나요. 물론 없다. 네 살 때 제 형은 시장을 다 나다녔는데 저놈은 왜 일곱 살이 넘도록 대문을 못 나설까...... 하지만 어머니, 바다에 가고 싶어요. 밀려나온 해초를 밟고 푸석푸석 걸어 보고 싶어요. A는 문을 잠근다. 하나․둘․셋, 차례로 둔탁한 쇳소리를 내는 3중의 문고리, A는 비로소 안심한다. 그런데 말들이 해초를 먹나요. 어제 그 찻집 말이에요. 벽에 걸려 있던 말들, 하얗게 물을 차며 달리는 대로 부서져 날리는 파도, 파도소리……. 이상하죠, 말들이 왜 소리를 지르며 달릴까요. A는 옷을 벗는다. 하나 둘 셋, 차례로 열어 보이는 바다, 바닷새 나르는 모양. 나는 다시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웅크리지만 말고 시간을 좀 내봐요. 아니, 시간은 항상 있어. 비가 온다. 3중의 문고리, 견고한 2중의 창문으로 흐르는 비, 빗소리, 빗소리 같은……. 무슨 소리 들려, 소리 안 들려. A는 내가 듣는 소리를 환청이라고 생각한다.
섬
나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습니다. 남해군도南海群島 어디쯤 물세 험하여 아직 사람 발들인 적 없고 어째 곁에선 고기도 잡히지 않아 뱃사람조차 곁꺼리는, 섬 하나 물알갱이 말간 모습으로 떠다닌다는 것을. 그러한 섬 있어 어슴푸레 날 터올 녘이면 해무에 씻긴 흰 머릴 들고 우어 우어어 소리를 내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게 숨이 있나 보지요. 모질은 숨 있어 억 겁 실한 울음 풀리는 바다 저 모양으로 진저리인가 보지요. 하지만 한 사나흘 자리잡고 앉아 눈 부벼 봐도 날 사나워 배 한 척 없는 바다엔 드센 물결소리뿐입니다. 햇살 맑은 날이면 그 녘에 다시 삐쭉하니 고개 쳐들고 간간이 흰 알몸 내보이기도 한다는 그 섬.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안개 자욱한 남해군도 어디쯤 몸 사려 떠다니는지.
오늘은 피곤했어요, 흰 등허리 보이며 당신이 돌아누운 밤 몸 뒤척이며 나는 다시 바다를 꿈꿉니다. 끈적이는 욕정으로 달려가 안아 보는 바다, 하지만 출렁이는 물결 속 몸 던져 봐도 나는 반쯤으로밖에 잠기지 못합니다. 바다는 어떤 부력으로 나를 밀어내는지요. 감추어야할 치부는 왜 감추어지지 않고 떠오르기만 하는지요.
밀어드는 파도 맨몸으로 맞으며 나는 수음을 합니다. 반쯤으로 잠긴 아랫도리 끌어넣고, 치떨며 흰 섬 하나 떠올리는 바다. 그러고 보면, 당신의 흰 등허린 해무에 둘려 보이지 않던 섬 아니었을까요. 온몸 풀어서도 잠길 수 없어 숨 가쁘던 바다, 온전히 떠 있던 이끼 푸른 그 섬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몸 비어 서서 나는 당신을 바라봅니다. 찾을 수 없어 빈 가슴으로 돌아서던 뒤 켠, 나직한 숨소리로 떠 있던 당신을.
어두운 잠
자다가 일어나
어머니 말없이 걸어
나가시네
소리 없이 방문
붉은 빛으로 열리네
어머니, 그 곳은 밝은가요
이렇게 어두운 어머니의 방
붉은 빛 감은 눈가에 어려
나는 아직 어두운 잠을 자고
어머니, 잠에서 일어나
저 밖으로
말없이 걸어 나가시네
흔적
아이는 소라며 조개껍데기
파도에 잘 닳아진 돌멩이를 줍습니다.
그건 뭐하게,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통 갯바닥을 헤집어
집히는 것마다 끄집어냅니다.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공기하듯 손등에 올려놓기도 하고
그러다가 볼품이 없으면 휘익 던져 버립니다.
뭘하는 걸까. 빼꼼히 눈을 세우고 바라보던 갯개들
화들짝 놀라 쏙쏙 구멍 속으로 도망칩니다.
흥, 개딱지같은 놈들... 아이는
까르륵까르륵 놈들을 비웃어 줍니다.
스윽 파도가 밀려와
아이가 허질러놓은 갯바닥을 쓸고 갑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한 여름날의 흔적은
그렇게 사라져 버립니다.
거울
거울은 나를 두 개로 만들고
두 개의 거울은 나를 무한대로 만든다.
거울 사이에서 모든 내가 나의 뒤통수를 바라본다.
나는 생각을 멈춘다. 모든 내가
동시에 생각을 멈춘다.
이건 정말 끔찍해, 그러자 모든 내가
동시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저 모든 내가 똑같은 생각을 하다니.
네가 모든 나라니.
나는 거울 사이에서 벗어나
생각이 다른 나에게로 간다.
거기 스무 살쯤의 언덕
벗은 몸으로 서 있는 나는 아직 가볍고
비어 있고 무균스럽다.
아직 아무 흔적도 없는 거울 속에는
푸른 성애만 푸르게 빛나고
날선 풀잎들 스윽스윽 살갗을 베며
내 빈 속을 다시 헐어낸다.
거울 밖으로 나오니 참으로 시리다.
나는 다시 모든 나에게로 간다.
7 층에서 산다
1.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서서히 닫히는 외부. 7층을 누르고 둘러본다. 미어캣처럼 모두들 정면을 바라본다. 15도 위쪽 빨간 비상버튼. 아래 사용자 안전수칙. 아래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았거나 지킨 사람을 위한 인터폰. 혹, 혹시 거기 사람 있나요. 엘리베이터가 멈, 멈췄.
「......추지 않았을 때 인터폰 사용을 금함.」
아니 멈췄다니까, 문이 안열려, 거 거기 사, 사, 사람 없. 6 개의 면, 12 개의 직선, 24 개의 직각으로 닫혀진 사용인원 8인의 정육면체와 선사시대 가족공동 목곽분(木廓墳)의 상사성. 오, 그러나 삐 ─ 신호음과 함께
스스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기적처럼)
7층입니다 신호음이 들리면, 당당하게(나자로처럼)
외투를 벗어 왼쪽 팔에 걸치며(수의를 벗듯)
사무실로 들어선다(웃는 얼굴로)
어이 모두들 안녕하신가.
2.
또는 B.C 1840년경 스토운헨지의 거석群과 A.D 2004년 한강변에 배열된 아파트먼트群 또는 무교동 스카이 라인을 구성하는 인텔리젼트 빌딩群의 상사성. 또는 혈거(穴居)중인 피테칸트로푸스와 엘리베이터로 7층에 오르는 나.
3.
7층에서 손을 내밀면 7층 높이의 하늘이 만져진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여기선 바람이나 구름이 아무렇지 않게 내 몸을 관통하며 지난다. 3층쯤에서 나부끼는 깃발. 5층쯤의 점멸식 광고판. 7층은 새들 나르는 높이의 하늘을 기대고 있다. 미스 리, 바다는 몇 층에서 보여. 바다라구요? 창 밖으론 바람과 하늘 구름 소리가 섞여 흐르고 가끔씩 끼루욱 끼루욱 바닷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4.
그러고 보니 당신 양서류였군. 구부정한 등어리로 흘러내린 지느러미, 발가락 사이 저 물갈퀴 좀 보라구. 저 끈적거리는 습성피부...... 흉측스러워라. 저 비릿한 걸 왜 아직 달고 다니는 걸까. 움직일 때마다 당신에게서 묻어나는 점액질. 이젠 진저리가 난다구. 여기서 바다를 꿈꾸다니, 이건 도덕적이지 못해.
5.
미스 리는 다이어트를 한다. 아침은 미네랄-워터 한 잔과 토우스트 반 쪽 점심은 야채 쥬스 저녁엔 저칼로리 비스케트와 소프트 커피. 7층에서 살려면 가벼워야 해요. 지난 달엔 5킬로그램이나 뺏다구요. 그녀는 관성(關性)을 잃는다. 더 가벼웁기 위해 살을 조금씩 헐어 고탄성 신소재로 바꾸는 그녀.
날마다 그녀의 몸은 가벼워진다.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는 피부. 허리로 흘러내린 균형잡힌 곡선. 팡팡한 힙, 팽팽한 다리. 나는 그녀와의 정사를 생각한다.
(옷을 벗긴다. 몇 개의 스위치 버튼이 장치되어 있는 가슴. 누른다. 첫 번째 버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분출되는 사향. 두 번째 버튼, 가슴이 융기되고 아랫도리가 촉촉히 젖는다. 세 번째 버튼, 적당히 교성을 지르기 시작하는 그녀. 준비되었음, 시작해도 좋습니다.)
6.
창문으로 빗겨드는 오후가 타닥타닥 타이핑되고 있다.
링겔 수액처럼 흘러내리는 햇빛
끈적거리는 점착력이 펼친 아스팔트 위로 벌레 한 마리 지나고
그리로 시간이 조금씩 묻어 나왔다가 사라진다.
흐트러진 사물들로 꼴라쥬된 풍경을
회칠한 마르디-가르소의 얼굴로 失笑하는 오후, 미스 리
타이핑페이퍼를 색종이로 바꾸면 어때, 바꾸나마나
종이쪽, 질펀히 널려진 事物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려는 시도는
하지만 없다. 나는 성욕을 잃는다.
저녁 무렵
새남터에서 노량진 앞강으로
노을지는 모습을 보다 보면 가끔
한강철교 위를 나르는 갈매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서울 한복판에 갈매기라니
신기하지 않은가요.
이렇게 살면서 보자면 오이도나 소래 포구가
꽤 멀리 있긴 합니다만
새들 나르는 정도로는 그게 뭐 별로
먼 거리가 아닌 듯 합니다.
날이 풀리니까 바람에 실린 채
방심해 버린 건지, 수산시장 뒷터에서
먹을거나 찾아볼 요량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사람 사는 모양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는 것일까요.
아무튼 이렇게 푸대자루처럼
도시형 시내버스에 실려가면서, 흐린 창문으로
바닷새 나르는 모양을 본다는 건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흰 것들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갓 입학한 아이를 기다립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며 하얀 운동복을 입은 아이들이 밀려나오는데요. 서로 부딪치면서 다투면서 넘어지면서 무엇이 그리 우스운 지 까르륵까르륵 웃습니다. 한 켠에 장난감 자동차를 손에 꼭 쥐고 있는 내 아이도 보입니다. 나를 보자 와락 달려와 안기며 울음을 터트립니다. 아마 첫 수업이 못마땅했나 보지요. 그러더니 금새 깔깔거리면서 다시 친구들에게 달려가 장난을 칩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맨 땅에 벌러덩 눕기도 하고 제 어깨춤에 맞는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기도 합니다. 저들끼리는 어느 새 익혔는지 서로 이름을 부르는데요. 하늘이 담비 연심이 솔이 유림이... 어쩌면 이름을 저리 곱게 지었을까. 교정 한 켠 벚나무에서는 흰 것들이 와락와락 밀려나옵니다. 서로 흰 살을 만지며 소스라치기도 하고 잔 바람에도 온 몸을 흔들며 환하게 호들갑을 떱니다. 그 곁으로 한 무더기 아이들 소리를 지르며 달려갑니다.
몸에 대한 한 생각
뻣뻣하던 몸
흐물흐물해지다가
갤(gel)처럼 되었다가
액체가 되었다가
걸즉한 것 다 두고 빠져나가
한 방울의 물로 맺히면
다시 이승의 처마 밑 떨어지며
툭,
떨어지는 소리
낼 수 있을까.
나는 중앙으로 간다.
1.
사방의 한 가운데. 내가 아는 中央은 그렇다. 중앙박물관․중앙선․중앙아시아․중앙처리장치․중앙통신․중앙방송국... 사람들이 中央으로 모이듯 모든 변두리가 中央을 지향하듯 나도 中央에 대한 얼마간의 동경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한때는 中央이 여인의 성기를 뜻한다고 생각했었고 여인의 中央에 이르는 건 성지순례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나를 中央에 이르게 해줘. 원하는 것을 주겠어. 그러나 여인은 나의 제의를 턱없어 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中央은 없어요. 中央은 허구렁일 뿐이에요. 뒤에 나는 포르노 잡지에서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여인을 보았지만 내가 생각했던 中央은 그곳에 없었다.
中央은 없다. 中央은 허구렁일 뿐이다. 나는 여인의 말을 믿기로 했고, 중앙에 대한 동경과 콤플렉스도 차츰 시들해져 갔다. 뒤에 나는 中央이 입에 손가락을 대거나(中), 입을 가리는 사람(央)이라는 말을 들었다.
2.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中央이 있다. 그 곳에는 스스로 빛나는 눈이 있어 세상에 모든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 그게 얼마나 밝은지 빛을 마주 보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소문은 그 눈을 보기 직전 눈을 감아 겨우 죽음을 면했다는 한 장님에 의해 퍼트려졌다. 그러나 장님이 시름시름 앓다 죽은 뒤에도 흉흉한 소문들은 먼지처럼 일어나 다시 떠돌아 다녔다. 한 노동자가 불온한 짓을 하다가 中央으로 끌려갔다. 한 학생이 유언비어를 퍼트리다 체포되었다. 첩자의 혐의를 쓴 대학교수가 고문 끝에 죽었다. 한 이방인이 중앙을 비방하다가 사살됐다... 그러한 소문은 모두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이제 中央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몹시 두려워했다. 누가 그렇게 말하는 것, 심지어 그런 말을 듣는 것조차 불경스러워 하며 몸서리 쳤다.
3.
나는 텔레비전에서 中央에서 나왔다는 사람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아주 겸손하게 자신이 대변인일 뿐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中央이 틀림없다고 수근거렸다. 그는 부드럽지만,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결코 中央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中央은 당신들 모두이다. 이 모든 힘은 당신들에게서 나온다. 그는 中央의 권능과 단호함에 대하여 中央의 자애로움에 대하여 中央이 하는 일과 드러난 효과에 대하여 알기 쉬운 비유를 들어가며 말했다. 사람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다.
4.
中央에서 나온 이들은 소문과는 달리 아주 부드럽고 예의바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늘 온화하게 웃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들이 다녀간 뒤에는 넉넉하게 떡과 술이 나누어졌다. 간혹 中央이 아주 무섭다거나 사람을 고문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지만 이제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불온한 소문을 퍼트린 사람은 즉시 中央에 밀고되었고 밀고자에게는 큰 상이 주어졌다. 中央과의 소통은 이제 기쁜 일이 되었다. 中央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누구든 3자리 전화번호만 누르면 언제 어디서든 중앙을 만날 수 있었다.
5.
나는 中央에 가보기로 했다. 떠도는 소문을 따라 무작정 길을 나섰다. 모든 길이 中央으로 나 있으니 길 잃을 염려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길에서 농부를 만났다. 中央으로 가는 길을 묻자 농부는 경건하게 말했다. 우리는 中央 덕에 배고픔에서 벗어났소. 저 색색의 기와를 얹은 집을 보시오. 콘크리트로 잘 닦여진 마을길을 보시오. 中央의 은전이 미치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소. 하지만 농부는 中央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했다.
길에서 순례중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경전을 높이 들면서 말했다. 中央은 어디에든 있다. 너의 마음 속에 저 높은 곳과 지극히 낮은 곳에 있다. 염소똥 한 알에도 中央은 있다. 그러니 믿으라. 믿는 곳에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르면 中央을 만나리라.
길에서 사색중인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 질문이 어리석다며 말했다. 中央은 아무 곳에도 없다. 없는 곳에 있다. 모든 형체 있는 것은 사라지며, 사라지는 건 애초에 없었던 것, 中央도 사라질 것이니 없는 것과 같다.
길에서 걸인을 만났다. 그는 몹시 귀찮아하며 말했다. 中央은 두려움 때문에 존재한다. 나는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게 없고 잃을 게 없으니 두려움도 없다. 두려움이 없으니 어찌 中央이 있겠는가.
길에서 유곽의 여자를 만났다. 그는 치마를 들추어 보이며 말했다. 가랑이 사이에 中央이 있다. 이 곳에서 모든 생명이 시작되니 나의 샘으로 목을 축이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中央으로 가기를 원한다면 이리로 들라.
길에서 군인을 만났다. 그는 한 손에 당나귀 머리뼈를 들고 말했다. 강한 것에게서 단 것이 나오고 먹는 자의 입에서 먹을 것이 나온다. 강한 것과 먹는 자는 누구이며 단 것과 먹을 것은 무엇인가. 나는 답하지 못했고 그는 나를 저울에 달았다. 그대는 아직 심장의 무게가 부족하다. 돌아가 기일을 지켜 번제를 올리고 더 먼 길을 돌아 다시 이르라.
7.
오랜 고행 뒤에 나는 中央에 닿았다.
문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中央이 이렇게 허술하다니
나는 미심쩍어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벼움
걷고 살을 만지고 웃는 일이며
지난 계절을 기억하는 일이
터럭 하나 흔들리는 것만큼이나 가벼울 것임을 안다.
잊혀진 내 어릿짓처럼
쉬 스치어 지나는 날들에 기대어
이렇게 겨워하며 목메이는 일이
얼마나 가벼울 일임을 안다.
그럼에도 이 가벼움에 길들여져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절망 또한 얼마나 가벼운가.
바다에 가는 일이며 그리워하는 일이며
세속의 인연을 위하여 전화를 거는 일이
얼마나 가벼운지 나는 알며 아는 만큼 가벼워진다.
아 세상은 이렇구나.
이제 눈이 밝다
거울 앞에 서서
음흉하게 웃고 있는 사내를 봅니다.
음흉한 웃음을 웃게 하는 생각을 봅니다.
내 눈이 거울은막을 지나
저 사내의 거죽을 지나, 회백질부를 지나
툴툴 말린 연두부 안쪽에 닿습니다.
그리고 아메바처럼 꿈틀거리며
살갗으로 음흉한 웃음을 짓게 하는
생각을 보는 것입니다.
아 저건 누구인가요, 아침마다
음흉함을 스킨 로션으로 척척 지우고
짐짓 아무렇지 않게 문을 나서는
저 자는.
바다는 어디 있는가
나는 바다에 다녀오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눈부신 모래알과 흰 파도를 보았고, 바람에 모자가 날릴까봐 움츠린 계집아이 새 밀려나온 물풀 바위틈에 숨어 있던 작은 물고기를 보았다. 낮에 나는 바다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미시령을 넘으면서 더 길게 굽은 산길을 돌아 내려오면서 내가 바다를 보았다고 저 풍경과 소리 틈에 서 있었다고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눈앞이 흐릿해서 운전을 잘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압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 바다를 찾는지 정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겨울에는 혼자 있었습니다.
연락되지 않는 전화번호로 끊임없이 다이얼을 돌렸습니다만
수화기 저켠에서는 부재중을 알리는 기계음이나,
우울한 신호음뿐이었습니다. 창밖으로는 뜻 모를 전언을 입에 문 새들이
계속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아 새들은 다 어디서 어디로 가는 것이었을까요.
나는 무료하게 앉아 그쯤 어디로
당신이 날려 보낸 새가 보이지나 않는지
오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새들의 입을 벗어난 전언들이
나의 창 언저리에 날아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리 쉬 녹아버리는 눈발처럼, 그것들은 제 손에 닿기 전
자모子母로 분리되어 버릴 뿐이었습니다.
나는 전언들을 이리저리 모아붙이며 퍼즐게임이나 하다가,
가끔씩 어렴풋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전언들과
끝말잇기놀이나 하다가, 새우처럼
구부려 누웠습니다. 잠속으로 꿈이 들어
자음과 모음이 분리된 저 전언들처럼 내 몸도 가벼워진다면
중천 어디쯤을 ᄀᄂᄃᄅ로,
ㅏㅑㅓㅕ 로 흩날릴 수 있었을까요.
새들의 전언이나 눈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흩날리던
겨울의 것들은 거리에 쌓여
바람이 부는 대로 이쪽저쪽 몰려다니고,
어딘가로부터 타전되는 모로스 부호들이
해체된 새들의 가슴이나, 벽이나, 전신주나,
말없이 서있던 나무들의 옆구리에 툭툭 박히기도 하던
겨울은 그렇게 흐르고, 그쯤 어디에 나도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만,
대체로 평온하게,
대체로 연인들은 연애를 하고,
바라보는 자는 바라보고,
술 마시는 자들은 술을 마시면서,
꿈꾸는 자의 곁을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닭을 죽였다.
나는 닭을 죽였다.
날개를 가지고도 날지 않다니
새가 한 뼘의 땅만 쳐다보고
땅거지처럼 돌아다니다니
나는 몹시 화가 나서
날선 칼로 닭의 목을 내리쳤다.
닭은 날개를 파닥이다가
붉은 것을 왁왁 쏟아내며
바닥에 거꾸러졌다.
닭은 죽고,
이제 나는 닭을 죽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닥에는
흰 날개를 가진 새 한 마리
파르르 떨며 누워 있고, 죽은 닭은
죽은 몸을 투욱투욱 털며
벌써 저만치 가고 있다.
환 청
A는 모른다. 내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무심히 그러라던 A는, 밤이면 내가 듣는 소리를 환청이라고 생각한다. A는 창문을 닫는다. 그렇지만 정말 갔다 올 수는 있나요. 물론 없다. 네 살 때 제 형은 시장을 다 나다녔는데 저놈은 왜 일곱 살이 넘도록 대문을 못 나설까...... 하지만 어머니, 바다에 가고 싶어요. 밀려나온 해초를 밟고 푸석푸석 걸어 보고 싶어요. A는 문을 잠근다. 하나․둘․셋, 차례로 둔탁한 쇳소리를 내는 3중의 문고리, A는 비로소 안심한다. 그런데 말들이 해초를 먹나요. 어제 그 찻집 말이에요. 벽에 걸려 있던 말들, 하얗게 물을 차며 달리는 대로 부서져 날리는 파도, 파도소리……. 이상하죠, 말들이 왜 소리를 지르며 달릴까요. A는 옷을 벗는다. 하나 둘 셋, 차례로 열어 보이는 바다, 바닷새 나르는 모양. 나는 다시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웅크리지만 말고 시간을 좀 내봐요. 아니, 시간은 항상 있어. 비가 온다. 3중의 문고리, 견고한 2중의 창문으로 흐르는 비, 빗소리, 빗소리 같은……. 무슨 소리 들려, 소리 안 들려. A는 내가 듣는 소리를 환청이라고 생각한다.
섬
나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습니다. 남해군도南海群島 어디쯤 물세 험하여 아직 사람 발들인 적 없고 어째 곁에선 고기도 잡히지 않아 뱃사람조차 곁꺼리는, 섬 하나 물알갱이 말간 모습으로 떠다닌다는 것을. 그러한 섬 있어 어슴푸레 날 터올 녘이면 해무에 씻긴 흰 머릴 들고 우어 우어어 소리를 내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게 숨이 있나 보지요. 모질은 숨 있어 억 겁 실한 울음 풀리는 바다 저 모양으로 진저리인가 보지요. 하지만 한 사나흘 자리잡고 앉아 눈 부벼 봐도 날 사나워 배 한 척 없는 바다엔 드센 물결소리뿐입니다. 햇살 맑은 날이면 그 녘에 다시 삐쭉하니 고개 쳐들고 간간이 흰 알몸 내보이기도 한다는 그 섬.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안개 자욱한 남해군도 어디쯤 몸 사려 떠다니는지.
오늘은 피곤했어요, 흰 등허리 보이며 당신이 돌아누운 밤 몸 뒤척이며 나는 다시 바다를 꿈꿉니다. 끈적이는 욕정으로 달려가 안아 보는 바다, 하지만 출렁이는 물결 속 몸 던져 봐도 나는 반쯤으로밖에 잠기지 못합니다. 바다는 어떤 부력으로 나를 밀어내는지요. 감추어야할 치부는 왜 감추어지지 않고 떠오르기만 하는지요.
밀어드는 파도 맨몸으로 맞으며 나는 수음을 합니다. 반쯤으로 잠긴 아랫도리 끌어넣고, 치떨며 흰 섬 하나 떠올리는 바다. 그러고 보면, 당신의 흰 등허린 해무에 둘려 보이지 않던 섬 아니었을까요. 온몸 풀어서도 잠길 수 없어 숨 가쁘던 바다, 온전히 떠 있던 이끼 푸른 그 섬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몸 비어 서서 나는 당신을 바라봅니다. 찾을 수 없어 빈 가슴으로 돌아서던 뒤 켠, 나직한 숨소리로 떠 있던 당신을.
어두운 잠
자다가 일어나
어머니 말없이 걸어
나가시네
소리 없이 방문
붉은 빛으로 열리네
어머니, 그 곳은 밝은가요
이렇게 어두운 어머니의 방
붉은 빛 감은 눈가에 어려
나는 아직 어두운 잠을 자고
어머니, 잠에서 일어나
저 밖으로
말없이 걸어 나가시네
흔적
아이는 소라며 조개껍데기
파도에 잘 닳아진 돌멩이를 줍습니다.
그건 뭐하게,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통 갯바닥을 헤집어
집히는 것마다 끄집어냅니다.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공기하듯 손등에 올려놓기도 하고
그러다가 볼품이 없으면 휘익 던져 버립니다.
뭘하는 걸까. 빼꼼히 눈을 세우고 바라보던 갯개들
화들짝 놀라 쏙쏙 구멍 속으로 도망칩니다.
흥, 개딱지같은 놈들... 아이는
까르륵까르륵 놈들을 비웃어 줍니다.
스윽 파도가 밀려와
아이가 허질러놓은 갯바닥을 쓸고 갑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한 여름날의 흔적은
그렇게 사라져 버립니다.
거울
거울은 나를 두 개로 만들고
두 개의 거울은 나를 무한대로 만든다.
거울 사이에서 모든 내가 나의 뒤통수를 바라본다.
나는 생각을 멈춘다. 모든 내가
동시에 생각을 멈춘다.
이건 정말 끔찍해, 그러자 모든 내가
동시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저 모든 내가 똑같은 생각을 하다니.
네가 모든 나라니.
나는 거울 사이에서 벗어나
생각이 다른 나에게로 간다.
거기 스무 살쯤의 언덕
벗은 몸으로 서 있는 나는 아직 가볍고
비어 있고 무균스럽다.
아직 아무 흔적도 없는 거울 속에는
푸른 성애만 푸르게 빛나고
날선 풀잎들 스윽스윽 살갗을 베며
내 빈 속을 다시 헐어낸다.
거울 밖으로 나오니 참으로 시리다.
나는 다시 모든 나에게로 간다.
7 층에서 산다
1.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서서히 닫히는 외부. 7층을 누르고 둘러본다. 미어캣처럼 모두들 정면을 바라본다. 15도 위쪽 빨간 비상버튼. 아래 사용자 안전수칙. 아래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았거나 지킨 사람을 위한 인터폰. 혹, 혹시 거기 사람 있나요. 엘리베이터가 멈, 멈췄.
「......추지 않았을 때 인터폰 사용을 금함.」
아니 멈췄다니까, 문이 안열려, 거 거기 사, 사, 사람 없. 6 개의 면, 12 개의 직선, 24 개의 직각으로 닫혀진 사용인원 8인의 정육면체와 선사시대 가족공동 목곽분(木廓墳)의 상사성. 오, 그러나 삐 ─ 신호음과 함께
스스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기적처럼)
7층입니다 신호음이 들리면, 당당하게(나자로처럼)
외투를 벗어 왼쪽 팔에 걸치며(수의를 벗듯)
사무실로 들어선다(웃는 얼굴로)
어이 모두들 안녕하신가.
2.
또는 B.C 1840년경 스토운헨지의 거석群과 A.D 2004년 한강변에 배열된 아파트먼트群 또는 무교동 스카이 라인을 구성하는 인텔리젼트 빌딩群의 상사성. 또는 혈거(穴居)중인 피테칸트로푸스와 엘리베이터로 7층에 오르는 나.
3.
7층에서 손을 내밀면 7층 높이의 하늘이 만져진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여기선 바람이나 구름이 아무렇지 않게 내 몸을 관통하며 지난다. 3층쯤에서 나부끼는 깃발. 5층쯤의 점멸식 광고판. 7층은 새들 나르는 높이의 하늘을 기대고 있다. 미스 리, 바다는 몇 층에서 보여. 바다라구요? 창 밖으론 바람과 하늘 구름 소리가 섞여 흐르고 가끔씩 끼루욱 끼루욱 바닷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4.
그러고 보니 당신 양서류였군. 구부정한 등어리로 흘러내린 지느러미, 발가락 사이 저 물갈퀴 좀 보라구. 저 끈적거리는 습성피부...... 흉측스러워라. 저 비릿한 걸 왜 아직 달고 다니는 걸까. 움직일 때마다 당신에게서 묻어나는 점액질. 이젠 진저리가 난다구. 여기서 바다를 꿈꾸다니, 이건 도덕적이지 못해.
5.
미스 리는 다이어트를 한다. 아침은 미네랄-워터 한 잔과 토우스트 반 쪽 점심은 야채 쥬스 저녁엔 저칼로리 비스케트와 소프트 커피. 7층에서 살려면 가벼워야 해요. 지난 달엔 5킬로그램이나 뺏다구요. 그녀는 관성(關性)을 잃는다. 더 가벼웁기 위해 살을 조금씩 헐어 고탄성 신소재로 바꾸는 그녀.
날마다 그녀의 몸은 가벼워진다.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는 피부. 허리로 흘러내린 균형잡힌 곡선. 팡팡한 힙, 팽팽한 다리. 나는 그녀와의 정사를 생각한다.
(옷을 벗긴다. 몇 개의 스위치 버튼이 장치되어 있는 가슴. 누른다. 첫 번째 버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분출되는 사향. 두 번째 버튼, 가슴이 융기되고 아랫도리가 촉촉히 젖는다. 세 번째 버튼, 적당히 교성을 지르기 시작하는 그녀. 준비되었음, 시작해도 좋습니다.)
6.
창문으로 빗겨드는 오후가 타닥타닥 타이핑되고 있다.
링겔 수액처럼 흘러내리는 햇빛
끈적거리는 점착력이 펼친 아스팔트 위로 벌레 한 마리 지나고
그리로 시간이 조금씩 묻어 나왔다가 사라진다.
흐트러진 사물들로 꼴라쥬된 풍경을
회칠한 마르디-가르소의 얼굴로 失笑하는 오후, 미스 리
타이핑페이퍼를 색종이로 바꾸면 어때, 바꾸나마나
종이쪽, 질펀히 널려진 事物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려는 시도는
하지만 없다. 나는 성욕을 잃는다.
저녁 무렵
새남터에서 노량진 앞강으로
노을지는 모습을 보다 보면 가끔
한강철교 위를 나르는 갈매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서울 한복판에 갈매기라니
신기하지 않은가요.
이렇게 살면서 보자면 오이도나 소래 포구가
꽤 멀리 있긴 합니다만
새들 나르는 정도로는 그게 뭐 별로
먼 거리가 아닌 듯 합니다.
날이 풀리니까 바람에 실린 채
방심해 버린 건지, 수산시장 뒷터에서
먹을거나 찾아볼 요량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사람 사는 모양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는 것일까요.
아무튼 이렇게 푸대자루처럼
도시형 시내버스에 실려가면서, 흐린 창문으로
바닷새 나르는 모양을 본다는 건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흰 것들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갓 입학한 아이를 기다립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며 하얀 운동복을 입은 아이들이 밀려나오는데요. 서로 부딪치면서 다투면서 넘어지면서 무엇이 그리 우스운 지 까르륵까르륵 웃습니다. 한 켠에 장난감 자동차를 손에 꼭 쥐고 있는 내 아이도 보입니다. 나를 보자 와락 달려와 안기며 울음을 터트립니다. 아마 첫 수업이 못마땅했나 보지요. 그러더니 금새 깔깔거리면서 다시 친구들에게 달려가 장난을 칩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맨 땅에 벌러덩 눕기도 하고 제 어깨춤에 맞는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기도 합니다. 저들끼리는 어느 새 익혔는지 서로 이름을 부르는데요. 하늘이 담비 연심이 솔이 유림이... 어쩌면 이름을 저리 곱게 지었을까. 교정 한 켠 벚나무에서는 흰 것들이 와락와락 밀려나옵니다. 서로 흰 살을 만지며 소스라치기도 하고 잔 바람에도 온 몸을 흔들며 환하게 호들갑을 떱니다. 그 곁으로 한 무더기 아이들 소리를 지르며 달려갑니다.
몸에 대한 한 생각
뻣뻣하던 몸
흐물흐물해지다가
갤(gel)처럼 되었다가
액체가 되었다가
걸즉한 것 다 두고 빠져나가
한 방울의 물로 맺히면
다시 이승의 처마 밑 떨어지며
툭,
떨어지는 소리
낼 수 있을까.
나는 중앙으로 간다.
1.
사방의 한 가운데. 내가 아는 中央은 그렇다. 중앙박물관․중앙선․중앙아시아․중앙처리장치․중앙통신․중앙방송국... 사람들이 中央으로 모이듯 모든 변두리가 中央을 지향하듯 나도 中央에 대한 얼마간의 동경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한때는 中央이 여인의 성기를 뜻한다고 생각했었고 여인의 中央에 이르는 건 성지순례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나를 中央에 이르게 해줘. 원하는 것을 주겠어. 그러나 여인은 나의 제의를 턱없어 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中央은 없어요. 中央은 허구렁일 뿐이에요. 뒤에 나는 포르노 잡지에서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여인을 보았지만 내가 생각했던 中央은 그곳에 없었다.
中央은 없다. 中央은 허구렁일 뿐이다. 나는 여인의 말을 믿기로 했고, 중앙에 대한 동경과 콤플렉스도 차츰 시들해져 갔다. 뒤에 나는 中央이 입에 손가락을 대거나(中), 입을 가리는 사람(央)이라는 말을 들었다.
2.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中央이 있다. 그 곳에는 스스로 빛나는 눈이 있어 세상에 모든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 그게 얼마나 밝은지 빛을 마주 보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소문은 그 눈을 보기 직전 눈을 감아 겨우 죽음을 면했다는 한 장님에 의해 퍼트려졌다. 그러나 장님이 시름시름 앓다 죽은 뒤에도 흉흉한 소문들은 먼지처럼 일어나 다시 떠돌아 다녔다. 한 노동자가 불온한 짓을 하다가 中央으로 끌려갔다. 한 학생이 유언비어를 퍼트리다 체포되었다. 첩자의 혐의를 쓴 대학교수가 고문 끝에 죽었다. 한 이방인이 중앙을 비방하다가 사살됐다... 그러한 소문은 모두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이제 中央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몹시 두려워했다. 누가 그렇게 말하는 것, 심지어 그런 말을 듣는 것조차 불경스러워 하며 몸서리 쳤다.
3.
나는 텔레비전에서 中央에서 나왔다는 사람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아주 겸손하게 자신이 대변인일 뿐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中央이 틀림없다고 수근거렸다. 그는 부드럽지만,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결코 中央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中央은 당신들 모두이다. 이 모든 힘은 당신들에게서 나온다. 그는 中央의 권능과 단호함에 대하여 中央의 자애로움에 대하여 中央이 하는 일과 드러난 효과에 대하여 알기 쉬운 비유를 들어가며 말했다. 사람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다.
4.
中央에서 나온 이들은 소문과는 달리 아주 부드럽고 예의바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늘 온화하게 웃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들이 다녀간 뒤에는 넉넉하게 떡과 술이 나누어졌다. 간혹 中央이 아주 무섭다거나 사람을 고문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지만 이제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불온한 소문을 퍼트린 사람은 즉시 中央에 밀고되었고 밀고자에게는 큰 상이 주어졌다. 中央과의 소통은 이제 기쁜 일이 되었다. 中央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누구든 3자리 전화번호만 누르면 언제 어디서든 중앙을 만날 수 있었다.
5.
나는 中央에 가보기로 했다. 떠도는 소문을 따라 무작정 길을 나섰다. 모든 길이 中央으로 나 있으니 길 잃을 염려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길에서 농부를 만났다. 中央으로 가는 길을 묻자 농부는 경건하게 말했다. 우리는 中央 덕에 배고픔에서 벗어났소. 저 색색의 기와를 얹은 집을 보시오. 콘크리트로 잘 닦여진 마을길을 보시오. 中央의 은전이 미치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소. 하지만 농부는 中央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했다.
길에서 순례중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경전을 높이 들면서 말했다. 中央은 어디에든 있다. 너의 마음 속에 저 높은 곳과 지극히 낮은 곳에 있다. 염소똥 한 알에도 中央은 있다. 그러니 믿으라. 믿는 곳에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르면 中央을 만나리라.
길에서 사색중인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 질문이 어리석다며 말했다. 中央은 아무 곳에도 없다. 없는 곳에 있다. 모든 형체 있는 것은 사라지며, 사라지는 건 애초에 없었던 것, 中央도 사라질 것이니 없는 것과 같다.
길에서 걸인을 만났다. 그는 몹시 귀찮아하며 말했다. 中央은 두려움 때문에 존재한다. 나는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게 없고 잃을 게 없으니 두려움도 없다. 두려움이 없으니 어찌 中央이 있겠는가.
길에서 유곽의 여자를 만났다. 그는 치마를 들추어 보이며 말했다. 가랑이 사이에 中央이 있다. 이 곳에서 모든 생명이 시작되니 나의 샘으로 목을 축이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中央으로 가기를 원한다면 이리로 들라.
길에서 군인을 만났다. 그는 한 손에 당나귀 머리뼈를 들고 말했다. 강한 것에게서 단 것이 나오고 먹는 자의 입에서 먹을 것이 나온다. 강한 것과 먹는 자는 누구이며 단 것과 먹을 것은 무엇인가. 나는 답하지 못했고 그는 나를 저울에 달았다. 그대는 아직 심장의 무게가 부족하다. 돌아가 기일을 지켜 번제를 올리고 더 먼 길을 돌아 다시 이르라.
7.
오랜 고행 뒤에 나는 中央에 닿았다.
문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中央이 이렇게 허술하다니
나는 미심쩍어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벼움
걷고 살을 만지고 웃는 일이며
지난 계절을 기억하는 일이
터럭 하나 흔들리는 것만큼이나 가벼울 것임을 안다.
잊혀진 내 어릿짓처럼
쉬 스치어 지나는 날들에 기대어
이렇게 겨워하며 목메이는 일이
얼마나 가벼울 일임을 안다.
그럼에도 이 가벼움에 길들여져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절망 또한 얼마나 가벼운가.
바다에 가는 일이며 그리워하는 일이며
세속의 인연을 위하여 전화를 거는 일이
얼마나 가벼운지 나는 알며 아는 만큼 가벼워진다.
아 세상은 이렇구나.
이제 눈이 밝다
거울 앞에 서서
음흉하게 웃고 있는 사내를 봅니다.
음흉한 웃음을 웃게 하는 생각을 봅니다.
내 눈이 거울은막을 지나
저 사내의 거죽을 지나, 회백질부를 지나
툴툴 말린 연두부 안쪽에 닿습니다.
그리고 아메바처럼 꿈틀거리며
살갗으로 음흉한 웃음을 짓게 하는
생각을 보는 것입니다.
아 저건 누구인가요, 아침마다
음흉함을 스킨 로션으로 척척 지우고
짐짓 아무렇지 않게 문을 나서는
저 자는.
바다는 어디 있는가
나는 바다에 다녀오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눈부신 모래알과 흰 파도를 보았고, 바람에 모자가 날릴까봐 움츠린 계집아이 새 밀려나온 물풀 바위틈에 숨어 있던 작은 물고기를 보았다. 낮에 나는 바다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미시령을 넘으면서 더 길게 굽은 산길을 돌아 내려오면서 내가 바다를 보았다고 저 풍경과 소리 틈에 서 있었다고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눈앞이 흐릿해서 운전을 잘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압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 바다를 찾는지 정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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