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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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서-수필1(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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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날들이 아름답다
재빨리 스탠드 불을 켠다. 대체 새들의 몸에는 시계라도 내장되어 있는 건가. 오늘도 정확히 5시 10분. 젖은 조약돌처럼 촉촉한 음색으로 일제히 노래하기 시작하는 뜨락의 참새들. 언제부터였나 새소리가 내게 알람이 되기 시작한 것은. 양치질만으로 현관을 나선다. 물집이 잡힌 발가락. 점차 영역을 넓혀가는 발바닥의 굳은 살 그러나 올라가야 할 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그저 황송할 뿐.
떡갈나무, 아카시아 잡목 숲이 머리채를 마구 흔들고 있다 울부짖고 있다 미처 날뛰는 짐승의 갈기처럼 아니 퇴근길 빈 도시락 동댕이치며 검단머리 풀어헤치고 포효하던, 시집오곤 친정 나들일랑은 아예 접어야 했던 우리 엄마, 뜻밖의 외할어버지 부고장, 섬뜩했던 그날의 슬픔처럼.
가다보니 오솔길을 가로지르던 샛빨간 애벌레 한 마리, 어느 등산화에 꼬리 쪽이 짓이겨졌다. 끈적한 진액이 벌건 흙과 엉긴 채 꿈틀거리는 놈의 처절한 몸짓. 주검의 냄새를 맡은 개미들이 몰려든다. 타는 단풍빛 농염한 애벌레 몸에서 몽글몽글 솟는 저 초록의 피. 꼬챙이를 주워 으깨진 몸통과 진액을 걷어준다. 잠시 추스려보던 놈, 간다. 간다 놈이. 무거운 육신 끌고, 질질 끌고 배로 밀면서, 밀면서 간다.
“뿌리가 깊지 않아서야”
컴컴한 지층과 지층 사이, 아득히 널을 뛰고 있는 나에게 툭, 던지던 우연히 산에서 마주친 한 동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생각할수록 확실한 진단이란 결론 앞에 선다. 가슴 속 까끌까끌 와 박히는 서글픔과 회한의 입자들. 벌거벗은 내 모습. 넙치처럼 바닥에 엎드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바닥-, 그래 여기가 원래 내 자리야.
동그마니 트인 진초록 수풀 사이로 거대한 신도시가 보인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콘크리트 누각들. 급기야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 하늘이 시커먼 먹물을 풀어 놓았다. 수숫대같은 비. 와스스, 숲이 소란스러워 진다. “아,악,헉…” 숲보다 더한 단절음, 변칙음을 내며 흩어지는 사람들. 약수터 대야가 우당탕 바람에 날아간다. 좌충우돌 부딪힌다 부딪히다 날아가다 계곡 쪽에 푹, 고꾸라진다. 배드민튼 장 비닐 펄럭이는 소리. 저 소리! 아, 저 펄럭이는…….
“며늘 오고 올 가실은 딱 세 가마가 더 나왔는기라, 허허!
너른 시골마당 한 켠, 차곡차곡 쟁여둔 볏가마를 툭툭 치시던 시아버지. 그 볏
- 1 -
가마 위로 둘러쳐진 겹겹의 낡은 비닐. 넝마 거적떼기같이 찢길 대로 찢긴. 파득
파득 떨고 있는 문풍지. 쉴 새없이 덜컹거리던 뒷간 문짝……. 먼 들판 건너와
마을을 삼킬 듯 휘몰아치는 시골바람에 어이없이, 대책없이 나부끼던 존재의, 갈갈이 찢겨져 펄럭이고 부시럭대던 내 존재의 나부낌-.
몰랐다. 낯선 그 바람이 그렇게 날 억장 무너지게 할 줄은. 서성이면서, 휘청이면서 소리없이, 하염없이 11월이 그렇게 녹아 내릴 줄은. 바람이 약수터 조롱박들을 난타하고 있다. 흔들리는 조롱박들이 서로 부딪히며 목어 두드리는 소리, 핸드벨 소리를 낸다. 몸서리를 치다 수북이 떨어져 내린 푸른 잎사귀들. 길과 숲의 경계가 없어졌다.
“야호! 정상이다”
태풍 소식에 발정 난 암코양이처럼 아니 생리 전 증후군에 시달리는 여인의, 끝내 터지고 나서야 진정되는 그것같은 이 기운. 무엇일까 이따금 맞닥뜨리는 이런 원초의 혼돈과 뇌파의 불안정은. 앙다문 입을 비집고 들어오는 빗물, 빗물. 울컥 서러워진다. 비, 장대비, 작살같이 내리 꽂히는..... 자율 신경계처럼 뻗치며 번뜩이며 섬광이 쩍쩍 하늘을 쪼갠다. 먹빛 하늘을 부글부글 끓이며 다가오는 저 원시의 소리. 비로소 불끈거리던 내 속의 굉음 하나 묻혀서 잦아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판판한 돌짝 하나 옮겨다 엉덩이를 걸친다. 더욱 흉흉해 지는 바람. 아랫녘을 굽어보며 담 너머 새상 보일 듯 보일 듯 부푼 담쟁이처럼 문득 노래 부르고 싶어진다.
“언제부터 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내가 이 빗속에 서 있었을까~”
여치 더듬이처럼 허공의 나체를 더듬다가, 먼지 뽀얀 나뭇잎 그 가슴을 쓸어 내리다가, 홀로 바다를 보고 앉은 바위 그 굳은 침묵을 토닥여 주다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들의 무욕. 저 무화에 들기까지 대체 나는 얼마나의 욕망과 집착과 번뇌로 나를 태우고 뒤집히고 들끓어야 하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내 삶은 엉키기 시작했을까. 엊저녁, 센서가 엉켜버린 드럼 세탁기처럼 회로가 엉켜버린, 그 속에 갇힌 빨래처럼 구겨지고 뒤틀린 채 동그란 창구로 다만 바깥 세상을 내다보고 있을 뿐인-.
열정이 수난의 또 다른 의미인 줄 나는 이 나이에사 알았다. 유전인자 탓이리라. 이 불가분의 고리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심연 가운데 빠지게 되는 악순환은. 그러나 바닥-, 이 칠흑의 “바닥”에서 날 선 “ㄱ" 받침 하나 내려놓으면 바다, ”바다“가 되리. 언젠가 잔잔해진 바다 베고 하늘 우르를 수 있으리. 얼마나 행복
- 2 -
한가 아직은 내다 볼 바깥이 있다는 것. 풍우대작 세찬 비바람에 젖지 않는 삶 어디 있으며 흔들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뿌리가 저 홀로 깊어질 수 있으랴
숲이 서서히 울음을 추스린다. 나도 하산 채비를 한다. 엉긴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듣는 빗방울. 어느새 터진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사닥다리를 내려놓
았다. 여기저기 알록달록 이런저런 모습의 사람들. 어디다 제 한몸 숨겼다 나오는지 젖은 몸에서 꿈결처럼 모락모락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묵묵히 비 청소 나서는 약수터 노인들. 폭풍우 지난 세상은 저리도 맑고 고요한가.
개벽의 그 날처럼 햇살, 눈 부시다.
- 3 -
재빨리 스탠드 불을 켠다. 대체 새들의 몸에는 시계라도 내장되어 있는 건가. 오늘도 정확히 5시 10분. 젖은 조약돌처럼 촉촉한 음색으로 일제히 노래하기 시작하는 뜨락의 참새들. 언제부터였나 새소리가 내게 알람이 되기 시작한 것은. 양치질만으로 현관을 나선다. 물집이 잡힌 발가락. 점차 영역을 넓혀가는 발바닥의 굳은 살 그러나 올라가야 할 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그저 황송할 뿐.
떡갈나무, 아카시아 잡목 숲이 머리채를 마구 흔들고 있다 울부짖고 있다 미처 날뛰는 짐승의 갈기처럼 아니 퇴근길 빈 도시락 동댕이치며 검단머리 풀어헤치고 포효하던, 시집오곤 친정 나들일랑은 아예 접어야 했던 우리 엄마, 뜻밖의 외할어버지 부고장, 섬뜩했던 그날의 슬픔처럼.
가다보니 오솔길을 가로지르던 샛빨간 애벌레 한 마리, 어느 등산화에 꼬리 쪽이 짓이겨졌다. 끈적한 진액이 벌건 흙과 엉긴 채 꿈틀거리는 놈의 처절한 몸짓. 주검의 냄새를 맡은 개미들이 몰려든다. 타는 단풍빛 농염한 애벌레 몸에서 몽글몽글 솟는 저 초록의 피. 꼬챙이를 주워 으깨진 몸통과 진액을 걷어준다. 잠시 추스려보던 놈, 간다. 간다 놈이. 무거운 육신 끌고, 질질 끌고 배로 밀면서, 밀면서 간다.
“뿌리가 깊지 않아서야”
컴컴한 지층과 지층 사이, 아득히 널을 뛰고 있는 나에게 툭, 던지던 우연히 산에서 마주친 한 동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생각할수록 확실한 진단이란 결론 앞에 선다. 가슴 속 까끌까끌 와 박히는 서글픔과 회한의 입자들. 벌거벗은 내 모습. 넙치처럼 바닥에 엎드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바닥-, 그래 여기가 원래 내 자리야.
동그마니 트인 진초록 수풀 사이로 거대한 신도시가 보인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콘크리트 누각들. 급기야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 하늘이 시커먼 먹물을 풀어 놓았다. 수숫대같은 비. 와스스, 숲이 소란스러워 진다. “아,악,헉…” 숲보다 더한 단절음, 변칙음을 내며 흩어지는 사람들. 약수터 대야가 우당탕 바람에 날아간다. 좌충우돌 부딪힌다 부딪히다 날아가다 계곡 쪽에 푹, 고꾸라진다. 배드민튼 장 비닐 펄럭이는 소리. 저 소리! 아, 저 펄럭이는…….
“며늘 오고 올 가실은 딱 세 가마가 더 나왔는기라, 허허!
너른 시골마당 한 켠, 차곡차곡 쟁여둔 볏가마를 툭툭 치시던 시아버지. 그 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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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 위로 둘러쳐진 겹겹의 낡은 비닐. 넝마 거적떼기같이 찢길 대로 찢긴. 파득
파득 떨고 있는 문풍지. 쉴 새없이 덜컹거리던 뒷간 문짝……. 먼 들판 건너와
마을을 삼킬 듯 휘몰아치는 시골바람에 어이없이, 대책없이 나부끼던 존재의, 갈갈이 찢겨져 펄럭이고 부시럭대던 내 존재의 나부낌-.
몰랐다. 낯선 그 바람이 그렇게 날 억장 무너지게 할 줄은. 서성이면서, 휘청이면서 소리없이, 하염없이 11월이 그렇게 녹아 내릴 줄은. 바람이 약수터 조롱박들을 난타하고 있다. 흔들리는 조롱박들이 서로 부딪히며 목어 두드리는 소리, 핸드벨 소리를 낸다. 몸서리를 치다 수북이 떨어져 내린 푸른 잎사귀들. 길과 숲의 경계가 없어졌다.
“야호! 정상이다”
태풍 소식에 발정 난 암코양이처럼 아니 생리 전 증후군에 시달리는 여인의, 끝내 터지고 나서야 진정되는 그것같은 이 기운. 무엇일까 이따금 맞닥뜨리는 이런 원초의 혼돈과 뇌파의 불안정은. 앙다문 입을 비집고 들어오는 빗물, 빗물. 울컥 서러워진다. 비, 장대비, 작살같이 내리 꽂히는..... 자율 신경계처럼 뻗치며 번뜩이며 섬광이 쩍쩍 하늘을 쪼갠다. 먹빛 하늘을 부글부글 끓이며 다가오는 저 원시의 소리. 비로소 불끈거리던 내 속의 굉음 하나 묻혀서 잦아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판판한 돌짝 하나 옮겨다 엉덩이를 걸친다. 더욱 흉흉해 지는 바람. 아랫녘을 굽어보며 담 너머 새상 보일 듯 보일 듯 부푼 담쟁이처럼 문득 노래 부르고 싶어진다.
“언제부터 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내가 이 빗속에 서 있었을까~”
여치 더듬이처럼 허공의 나체를 더듬다가, 먼지 뽀얀 나뭇잎 그 가슴을 쓸어 내리다가, 홀로 바다를 보고 앉은 바위 그 굳은 침묵을 토닥여 주다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들의 무욕. 저 무화에 들기까지 대체 나는 얼마나의 욕망과 집착과 번뇌로 나를 태우고 뒤집히고 들끓어야 하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내 삶은 엉키기 시작했을까. 엊저녁, 센서가 엉켜버린 드럼 세탁기처럼 회로가 엉켜버린, 그 속에 갇힌 빨래처럼 구겨지고 뒤틀린 채 동그란 창구로 다만 바깥 세상을 내다보고 있을 뿐인-.
열정이 수난의 또 다른 의미인 줄 나는 이 나이에사 알았다. 유전인자 탓이리라. 이 불가분의 고리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심연 가운데 빠지게 되는 악순환은. 그러나 바닥-, 이 칠흑의 “바닥”에서 날 선 “ㄱ" 받침 하나 내려놓으면 바다, ”바다“가 되리. 언젠가 잔잔해진 바다 베고 하늘 우르를 수 있으리. 얼마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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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 아직은 내다 볼 바깥이 있다는 것. 풍우대작 세찬 비바람에 젖지 않는 삶 어디 있으며 흔들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뿌리가 저 홀로 깊어질 수 있으랴
숲이 서서히 울음을 추스린다. 나도 하산 채비를 한다. 엉긴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듣는 빗방울. 어느새 터진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사닥다리를 내려놓
았다. 여기저기 알록달록 이런저런 모습의 사람들. 어디다 제 한몸 숨겼다 나오는지 젖은 몸에서 꿈결처럼 모락모락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묵묵히 비 청소 나서는 약수터 노인들. 폭풍우 지난 세상은 저리도 맑고 고요한가.
개벽의 그 날처럼 햇살, 눈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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