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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웅-단편소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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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92회 작성일 04-11-16 09:50

본문

바람은 기대어 서지 않는다
                                                       1

태화는 하루종일 젖은 몸을 시원한 샤워기 아래 내어민 채 하얀 거품을 문지르며 씻어내기 시작했다. 사십을 훌쩍 넘은 몸매지만 현장에서 힘들게 일하는지라 군살이 붙을 겨를이 없어 매끈한 몸매였다.태화는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몸매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어젯밤 주영으로 부터 받은 전화는 정말 뜻밖이었다.고향에서 남녀공학인 중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주영이었다.주영인 일학년 이학기 때 읍내 여중학교에서 전학을 왔다.주영인 읍내물을 먹은 탓인지 남달리 뽀얀 얼굴을 하고 특히 노래를 잘 불렀다.음악시간이면 으례히 앞에 나가 음악선생님의 풍금에 맞쳐 노래를 부르곤 했다.태화는 주영이 전학을 온 그날 부터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지만 다가설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그러던 어느날 체육시간에 태화는 당번으로 남게 되었다.태화는 노우트 한장을 찢어 주영에게 대한 마음을 적어 주영의 책갈피 속에 넣어주었다.주영인 그 쪽지를 보았는지 못보았는지 눈빛이 마주칠 땐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졸업을 하고 훌쩍 부산으로 떠나 버렸다.그 후 종종 소문으로만 들을 수 있는 주영의 소식은 태화의 마음을 아! 프게 했다.구남매 중의 둘째 딸인 탓으로 비교적 시골 형편으로서는 부유한 편이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한 주영은 회사에 취직을 하여 기숙사 생활을 한다는 것과 얼마 후 스물하나의 나이로 중매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태화는 주영의 소식을 접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어젯밤 난데없이 주영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태화는 옷을 갈아 입고 거울을 한번 더 들여다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평소에 거울 한번 보지 않는 태화였다.태화는 시계를 들여다 보며 버스를 탓다.퇴근시간이라 밀리는 차들로 태화는 몸이 달았다.서면에 있는 카페'아가페'의 문을 열고 들어선 태화는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태화는 창가에 홀로 앉아 있던 한 여인이 일어서며 망설이고 있는 곁으로 다가섰다.
"저-."
"아! 태화! 태화 맞지? 이 태화!"
"그래,주영이 맞구나! 그 때 그 얼굴 그대로 남아 있어.야!이게 얼마만이야?"
태화는 너무나 성숙된 한 여인 앞에 엉거주춤거리며 선뜻 앉지도 못하고 빙그레 미소만 지어며 서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으-응,그래."
태화는 주영의 그말에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마즌편에 앉았다.
"예전의 태화는 뽀얀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구리빛이네."
"응, 먹고 산다고 햇볕하고 싸우다 보니 이렇게 됐어."
"참 보기 좋은데 뭐.건강미가 넘치고 야성적이잖아?"
"야성적이라고---."
태화는 주영의 그말에 씁쓰럼한 입맛을 다셨다.
"왜 그래? 뭐가 언짠아?"
"아니 언짢기는,그냥 나 혼자 해본 소리야."
"태화야! 오늘 나 술 한잔 사 줄래? 비싼 양주말고 바닷가에 가서 회라도 먹으며 소주 한잔 하고 싶은데---."
태화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떡이며 주영의 차리한 머리결에 시선이 멈춰섰다.고운 향내가 풍겨왔다.검은 스커트에 하얀 샤츠의 교복을 입은 주영이 새앙머리를 하고'바위고개'를 부르고 있었다.태화는 그당시 유심히 보지못했던 부분들을 하나씩 양파껍질을 벗기듯 주영을 벗겨보기 시작했다.가느다란 목선 밑으로 탐스럽게 솟아 팽팽한 틀을 유지하고 있는 젖가슴이며 가느다란 팔만으로도 여인을 느끼고도 남을 것 같았다.
  
광안리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서걱거리는 발밑의 모래는 내딛는 발걸음에 장단을 맞추며 감미롭게 울려왔다.
"너 아니, 이제부턴 태화씨라고 불러야겠다.태화씨는 집 나간 사람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어?"
"아니 그것을 어떻게?"
"응,얼마 전에 성희를 만났는데 그때 태화씨 이야기를 들었어.태화씨 전화번호도 성희 한테서 알아냈어."
"그랬구나."
태화는 바다 위에 웅장하게 서 있는 광안대교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대교 탑 꼭대기 위에 걸린 낙조가 기울어지며 한가로이 날고 있는 갈매기의 등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벌써 삼년이나 되었어.하이칼라를 선호하는 마누라는 나의 초라한 몰골에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나 봐."
"결혼하기 전에 태화씨 직업을 알고 결혼 했을 것 아냐?"
"물론 그랬지.그렇지만 큰애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부터 조금씩 그러한 면이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둘째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아에 부부가 동행할 자리에는 무슨 핑계로든 빠지는 거야."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가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야튼 그 정도는 점차 심하여져 갔어.낸들 어데 입을 줄 모르고 부릴 줄 몰라서 멋을 모르겠어.결혼 하자마자 꼬박꼬박 봉투째로 갔다준 봉급은 처가집 살림 사너라 남아날 겨를이 없는 거야.양복이라고는 결혼식 때 입은 까만 예복 한벌 밖에 없다면 말 다했지."
태화는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사랑의 첫동정을 앓은 그것도 이십여년이 훌쩍 지나 처음으로 대면하는 여인 앞에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하지만 이미 알고 온 여인에게 달리 둘러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태화씨 마음고생이 컸구나."
"그정도는 그래도 견딜만 했어.그러다가 춤을 배운 거야.처음엔 거짖말을 하며 춤추러 나가더니 아에 내놓고 놀아나는 거야.이거 참 사람 환장하겠더만 때려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고 장모와 장인이 와서 야단을 쳐도 그때 뿐이던 걸."
하얀파도가 밀려와 발밑의 모래성을 허물어 놓고는 이내 사그라져 갔다.다시는 되쌓을 수 없는 모래성을 파도는 아금아금 허물고 지나갔다.

           2

칠층의 창가 확트인 바다 위를 노을 조차 숨죽이고 광안대교 위를 빠르게 질주하는 차량들의 손짖이 눈길을 주저하지 못하게 한다.현수에 매어 달린 파란 눈망울에선 서서히 빛을 발하며 다가서는 밤바다를 안으려 준비를 하고 있고 미처 늦은 고기잡이로 귀항하지 못한 통통배 서너척이 바다를 울리며 분주히 내질러 보지만 좀체 좁혀지지 않는 고즈녘한 풍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횟집이 태화는 맘에 들었다.
"태화씨 여기 자주 와 봤어?"
"아니,한번 와 봤어.회사에서 같은 동료들 끼리 노동절날 회식비로 나온 돈으로 여기에 와서 배 터지게 먹어봤어.그땐 저 광안대교는 듬성듬성 다릿발 몇 개씩만 보였었는데 오늘 완성된 것을 보니 참으로 굉장하네.가슴이 뿌듯해지는데."
"난 제법 자주 와 봤는데 오늘 보니 또 새롭네.아마도 태화씨랑 같이라서 그런것 같아."
"듣기 싫지는 않은데."
"싱겁긴 예나 지금이나 똑 같아.태화씨! 생각나.내 책가방의 책속에 끼워 놓아둔 쪽지 말이야."
태화는 주영의 그말에 얼굴이 확끈 달아올랐다.
"아니 그럼, 그걸 주영이 봤단 말이야."
"그럼 내가 보라고 보낸 것인데 내가 안보고 누가 보겠어."
"그런데 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어?"
주영은 멀쭉이 바다 위로 시선을 던지며 도톰한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고 있었다.
"사실 그땐 태화씨를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겼었어.그냥 장난 정도로만 받아들였던 거야.내가 태화씨를 생각해 낸 것은 부산으로 와서 회사에 다니면서 야간학교를 다닐 때였어.태화씨가 J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줄곧 망설였어.누군가에게 태화씨의 주소를 물어볼까 하고 말이야.하지만 결국 접고 말았어.왜냐면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주지 못한 내가 무슨 염치로 다가설 수가 있었겠어.그때의 내 심정은 적어도 그랬어.물론 지금에 와서 뱉어내는 나의 변명이라고 생각해도 난 아무런 할 말도 없지만---."
태화는 주영의 말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그저 주영이 쏟아놓는 이야기에 촉촉히 눈빛만을 적셔갈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커다란 접시에 아직도 팔딱거리고 있는 머리통을 그대로 얹어놓은 싱싱한 광어회를 내어왔다.
"야! 이것 아직도 눈빛이 살아 있네."
"그럼!사람이고 동물이고 간에 눈빛이 살아 있어야만 해.그래야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있단 말이야."
주영은 태화의 눈빛 타령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네.눈빛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 만큼 참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 비록 갈 때 갈 지언정 자기만의 의미로 남아 있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해."
태화가 소주병을 들어 주영이 앞에 놓인 술잔에 따르려 하자 주영은 술잔을 들어 받았다.
"이거 남자 대 여자로서 받는 술잔이 몇 년 만인가 모르겠네."
"나 또한 여자에게 따르는 것이 몇 년 만인가 모르겠네."
"호호호, 이거 피장파장이네요 그려."
태화와 주영은 술잔을 들고 한바탕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이미 창밖은 불빛만을 의지한 채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는 밤바다에 빠져들어 있었다. 주영이 술잔을 들어 태화의 술잔에 부딪치며 건배를 제의했다.
"건배라 그래,우리 무슨 건배를 할까?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아니 이게 좋겠다.잊어버린 꿈을 찾아서---."
"잊어버린 꿈을 찾아서---.그럴쏴 한데."
태화는 흐릿하게 떠오르는 옛 그림자를 들고 있는 술잔 속에 빠뜨려 보았다.새앙머리를 한 주영이 다소곳이 손을 끼고 바윗고개를 부르고 있었다.
"좋아! 잊어버린 꿈을 찾아서."
태화는 술잔을 주영의 술잔에 가져다 '쩽그렁'부딪히고는 목젓 너머로 털어넣었다.술잔에 일렁거리던 주영이 꿈털대며 목젓을 타고 파고들었다.
"태화씨!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 해봐."
주영은 태화의 생활을 엿보고 싶었다.
"좋아! 까짖것 이왕에 벗은 몸인데 무엇을 감추겠어.내 다 이야기 하지 뭐."
태화는 엎드러진 술병만큼 제법 취기가 올라 상당히 들떠 있었다.그러는 태화에게 주영은 술병을 들어 한잔을 더 따라 주었다.태화가 잡은 술잔에 형광등 불빛이 파르르 떨며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일을 끝내고 들어오니 마누라가 집에 없는 거야.설마 또 카바레에 갔겠거니 하고 부엌으로 가서 밥상을 챙겼더니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질 않지 않겠어.밤이 늦어도 들어오질 않길래 애들과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혹시나 하고 처갓집에 전화를 해봤더니 그곳에도 오지 않았다는 거야.이상한 예감이 들어 옷장을 열어 봤더니 입을 만한 옷가지들만 싸들고 집을 나간 거야.두주일 후에 처갓집으로 부터 사는 곳을 알아내고는 애 둘을 데리고 찾아갔었어 그랬더니 나 보다도 나이가 훨씬 들어보이는 그런데도 얼굴은 곱상하게 생긴 남자와 대낮에 들어누워 있지 않겠어.난 그냥 집으로 가자고 했어 당신이 있을 자리는 우리 네식구의 숨소리가 들리는 우리집이라고---.그랬더니 다짜고짜 죽어도 못가겠다는 거야.달랑 부엌 하나 딸린 단칸방에 살면서 그래도 그렇게 사는 게 더 행복하다는데 도저히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결국 애들에게 못보여줄 것을 보여준 채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어.참으로 암담하더만.난, 도저히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잘못 살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사흘을 꼼짝도 않고 들어누워 있었어.애들이 저희 외할머니 한테 전화를 했나! 봐.그대로 놓아두었다간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나 봐."
태화는 어께를 추스리고는 목이 타는 듯 술잔을 들어 톡 틀어 넣었다.
'이서방! 다 내잘못이네.내가 딸년을 저렇게 키운 죄인이네.털털 틀고 일어나서 앙갚음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나는 장모님의 말에 마누라가 불쌍해서 못견디겠더라고.그래서 일어나 할줄도 모르는 기도를 했어.그저 두손을 꼬옥잡고 이왕에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면 아무런 문제없이 잘살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어.빌어보기는 나고 나서 처음이었어.그러고 나니 마음이 좀 가라앉더라고."
"태화씨는 부처야? 바보야?"
"부처? 바보? 그래 까짖것 아무려면 어때.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 숨쉰다는 것이니까.그날 이후 난 다시 붓을 들었어.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땐 화폭에 무엇이든 그리기 시작했어."
"잘했어.무엇에 든 쏟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지름길인 것 같아.그것은 나도 경험한 바가 있어니까."
"그랬어?"
"응,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태화씨 이야기나 계속 해봐."
태화는 술잔을 들었다.광안리 해안의 불빛들이 꿈틀대며 다가셨다.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태화는 자꾸만 술잔으로 손이 자주 갔다.

                           3

광안대교에는 불빛들의 행열이 삼차원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태화씨! 나 오늘 좀 취해도 눈감아 줘."
"나도 취하고 싶은데."
"그럼 우리 둘 다 취하지 뭐."
"나한테서 홀애비 냄새 안나?"
"그렇지 않아.태화씨는 기품이 있어서 아무리 환경에 젖어도 그 기품은 변하지 않아."
"그까짖 기품 벌써 저바다에 던져버린지 오래야.내가 조선소에 입사하면서 던져버렸는 걸."
"타고난 기품은 옷가지나 화장으로 치장할 수 있는 게 아냐.조금은 우아하게 보일 수 있을련지 몰라도---."
"주영이도 이런면이 있었네.좋아! 임 주영! 앞으로 난 널 새로이 받아들일게."
"호호호, 새롭게? 무슨뜻인데? 설마 새색시라는 말은 아닐 게고."
"말하자면, 예전의 그 새앙머리 하얀소녀가 아닌 인생의 친구로서 라고나 할까---.사람은 보아주는 상대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지 주영이가 말했듯이 치장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지."
"애들 엄마하고는 어떻게 하려고 해.그래서 이혼은 한 거야?"
"무슨이혼? 이세상이 걸핏하면 이혼인데 난 적어도 그렇게 하고 싶지않아.물론 애들 엄마가 원한다면 그렇게는 해 주겠어.하지만 내 스스로 하지는 않을 거야.그렇게 버티어 온 게 벌써 삼년이나 됐어."
태화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바깥으로 흘러보내지 못하고 속으로 웃으넘겼다.
"애들은 저희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데?"
"애들은 애들 생각이고 난 나의 생각이야.단순히 시험을 치듯 오-엑스로 답을 지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
태화와 주영은 이야기 만큼이나 술병을 죽이고서야 하얀 포말이 다가와 사그라지는 모래사장으로 나왔다.상큼한 바람이 얼굴을 애무해 주었다.술과 이야기에 올라있던 열기는 파도가 곰삭여 주기 시작했다.
"주영이 네 이야기 좀 들어보고 싶은데? 하기 싫음 안해도 되고."
주영인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집어내는가 싶더니 '찰칵'하고 불을 지폈다.
"나 담배 피워."
태화는 뜻밖이었다.
"그-래! 어디 나도 한대 줘 봐."
태화는 담배를 끊은지 상당히 오래 되었다.마누라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기도 했지만 기관지가 별로 좋지않은 것이 더 큰 이유였다.
"태화씨 담배 안피는 것 같던데?"
"응,평소엔 안피워.하지만 특별할 때는 이렇게 피워."
"그럼 오늘이 특별한 날이네?"
"그렇게 되나."
태화는 모처럼 큰 소리로 웃음을 웃어 보았다.
"태화씨! 우리집을 잘 알련가 모르겠지만 우리집은 밥을 펄 때 마다 밥그릇이 하나정도는 모자라는 게 일쑤였어.자그마치 구남매나 되다 보니 아침이면 정신이 없었어.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책가방이 여섯개나 되었으니 오죽했겠어.결국 그래서 언니와 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나는 부산으로 내려와 회사에 취직을 해서 그나마 야간학교에 다니긴 했지만---.나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
"그것은 나도 알아.늘 너의 그 '바위고개'를 떠올려 보곤 했으니까."
"그랬어? 그러나 그 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어.겨우 할 수 있었던 것이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던 거야.다행히 지금은 그것으로 먹고살지만---."
태화는 주영의 말이 감이 잡히질 않았다.그저 묵묵히 주영이 주섬거리는 대로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아무런 토도 달지를 않고 슬금슬금 엿모습을 훔쳐보기만 했다.
"난 태화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일 때쯤 중매로 결혼을 했어.언니의 소개로 선을 봤는데 비교적 듬직하고 성실해 보여서 결혼관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이 어른들의 의견에 따라서 선을 보고 두어달도 안되어서 식을 올렸어.남편은 나를 무척이나 아끼며 사랑했던 것 같아.나의 말이면 거진 다 들어 주었으니까.결혼한지 삼년만에 난 시골에 남편 몫으로 배당 받은 논을 팔아와서 지금의 집을 장만했어.모두들 처음엔 별나다고 말들도 많았지만 불과 이년도 채 안되어서 난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고 시집에서는 복덩어리가 들어 왔다고 나만 보면 모두들 좋아해주었어.집값이 서너 배로 뛰어버렸거든.비록 아들은 못낳았지만 먹고사는데 큰 부담이 없으니까 딸 하나만으로도 나의 위상은 어느정도 높아져 있었어.그런데 새옹지마라고나 할까,우리 딸애가 세돌이 되기 이틀 전 남편은 교통사고로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지."
주영은 담배를 한대 더 꺼내어 물었다.초여름의 밤 하늘에서 내려 쏟는 별빛은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맡기며 주영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양 파도에 밀려 발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으-음,그런일이 있었구나."
"내 나이 겨우 스물다섯이었어.참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는 말은 이럴 때나 쓰는 것 같았어.근 일년을 시골에서 가져다 주는 식량으로 딸애만을 키우면서 보냈어.막상 그때엔 남편이라는 존재는 살아가는 기구로만 생각되어졌던 것 같아.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아가다 막상 그 돈줄이 끊기고 나니까 어떻게 살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오더군.다행히 죽어라는 법은 없다더니만 우리집 근처로 개발이 시작되면서 난 배워둔 피아노 실력으로 피아노 교습소를 낼 수 있었어.이층은 살림집으로 하고 아래층의 전세를 물리고 학원을 냈어.아이들과 손가락이 아프도록 건반을 두드렸지.내 나이 삼십 중반이 넘어서니 사는 게 이것만이 아니구나 하는 것에 봉착하게 되더라고.달리 길이 없는 것을 알고는 난 더욱 아이들과 일에 매달리면서 방송통신대학에 늦깍기 면학을 즐기기 시작했어.오직 딸애 하나만을 키우면서 그저 나 혼자만으로 잘 키웠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야."
주영은 담배연기가 살에 걸렸는지 갑자기 목속 깊이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태화는 그러는 주영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바다바람이 시원해서 그런가 아니면 모처럼 하는 남자와의 데이트라서 그런가 술기가 확 가셔버리네.어째 술기가 떨어지니 이야기가 무척 쑥스러워지는네."
"그래! 그럼 여기 잠간만 앉아 있어 내 금방 가서 시원한 캔맥주 좀 사올게."
태화는 주영을 앉게 하고 냅다 뛰었다.거친 숨을 몰아쉬며 캔 맥주 다섯개를 사들고 태화는 주영이 앉아 있는 백사장으로 달려왔다.
"자! 이것 마셔.시원할 거야."
태화는 맥주 한캔을 따서 주영에게 건네고 자신도 한개를 따서 마셨다.
"저 바다바람 만큼 시원하네.이런 기분으로만 살 수는 없을 까?"
"그렇게 살기로만 마음 먹으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금방 실증날 걸."
"실증? 실증날 망정이라도 그래봤으면 좋겠어.이런 낭만과 바다바람 보다도 더 싱그러운 태화씨 같은 남자의 향기를 맡으며 말이야---."
태화는 주영의 '남자의 향기'라는 말에 그동안의 주영이 주린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공안대교 저 너머로 고기배들의 집어등 불빛이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옷을 벗었다 입었다 하고 있었다.

                          4

"남들이 이야기 하는 불혹의 나이 사십줄에 들어서면서 난 무척 방황을 했어. 작은 밤바람에도 난 쉽게 흔들리던 걸.그러던 어느날 우연찮게 한 사내를 알게 되었어.피아노 학원 원장들과 월례모임을 하고 이차로 나이트 클럽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만났지.모대학교의 교수라고 하며 그 사내는 다가섰어.난 너무나 쉽게 그 사내를 받아들이고 말았던 거야.아마도 내가 더 요구했지 않았나 싶어.우린 참 자주 만났어.일주일에 두세번을 만나면서 난 모르고 지내온 육체의 욕망을 불태우기 시작했던 거야."
주영은 목이 타는지 맥주를 벌컥벌컥 들여마셨다.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태화에게 까지 들렸다.
"늦게 배운 도둑이 밤새는 줄 모른다고 난 육체의 쾌락에 빠져 허우적대며 그 사내만을 기다리는 시간을 동그라미로 그려넣고 있었지.무슨 연유로든 한 두어번만 만나지 못해도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어.왜 진작에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즐겁고 아름다운 육체의 사랑을 몰랐던가 하고 후회스럽기 까지 했다면 넌 믿을까?"
태화는 주영의 이야기를 들어며 아내 윤희를 생각했다.목젖이 타들어 오고 있었다.태화는 단숨에 캔맥주 한개를 비웠다.'그래,윤희가 집을 나가게 된 동기를 부여한 건 바로 나야.'태화는 혼자말로 주섬거렸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이제사 알 것만 같아.윤희가 집을 나간 이유를---."
"윤희? 아마 마눌님 이름이 윤흰가 보지."
주영은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향해 돌아서서 한숨을 내어 쉬었다.
"내가 술이 취했나 봐.지금 왜 태화씨 앞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주영이! 우리 여기 좀 앉자!"
"응, 그래.저 시끄먼 바닷물에 아에 좀 활퀴었으면 좋겠어."
"왜 그런 생각을---?"
"뭐라고 꼭 꼬집어 이야기 하기는 좀 그렇네. 그저 때로는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으-음."
태화는 주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파도에 흔들리는 불빛들의 천태만상과도 같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변했고 또 지금도 변하고 훗날에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
"태화씨! 난, 나를 잊어버리고 싶을 때 바다를 찾아 오곤 해.참 묘해.나를 찾자마자 나를 잊어버려야만 한다는 것이---.그 사내랑 근 육개월을 재채기 사랑을 하면서 난, 나를 찾았다고 생각했었거든."
"재채기 사랑?"
"호호호,좀 더 들어보면 알게 돼.정말로 사는 것 같았어.남자의 육체가 그토록 깊은 샘물로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기만 했어.몸은 날아갈듯이 가벼웠고 사는 것이 아름답게만 다가서며 일주일 아니 한달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것 같아 아쉬울 정도였으니까."
"그러고 보면 난 그럼 목석인가? 그래서 마누라가 저렇게 되도록 놓아두었단 말인가?"
"아냐,태화씨가 목석이라서가 아니라 남녀관계란 서로가 맞는 궁합이 있어서 그래.서로가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이 같을 때 비로소 좋은 궁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물론 그기에는 서로의 육체적 접촉이 감미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더욱 중요하지만."
"그럼 우리는 궁합이 안맞아서 그런건가?"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로를 같이 느끼려 하지 않은 데서 불균형이 시작된 것 같아.말하자면 여자는 사랑을 먹고 사는 것처럼---.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녀관계란 한번 삐걱거리고 나면 다시 회복되기가 어렵다는 거야."
주영은 태화에게 맥주 한캔을 더 달라고 했다.태화가 맥주캔을 따는 순간 십여미터 옆에서 폭죽이'퍽'소리와 함께 바다 위를 날랐다.한발의 폭죽을 신호로 대여섯명의 젊은 남녀는 계속해서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했다.
"참으로 낭만적이네.주영이와 이렇게 아름다운 밤에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낭만, 참 좋다."
"태화씨가 좋다니까 나도 좋아.편하게 내 이야기 들어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네."
"그건 피장파장이야.이제껏 주영인 내 이야기 고스란히 들어줬잖아."
"아마도 너무 좋으면 신이 질투를 하나봐.참으로 꿈 같은 육개월이었어.그날이 오늘 같은 여름밤 토요일이었어.그 사내랑 난 이곳 광안리에서 저녁을 먹고 거나하게 취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두시간 잤을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그 사내가 수화기를 들었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여자의 육감이랄까 심상치 않는 공기가 무계를 누르더라고.그 사내는 부시시 일어나 아무런 말도없이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기 시작했어.한 이십분이나 흘렀을가 또다시 전화벨이 울려 난 수화기를 들고'여보세요'로 응답을 했지. 그랬더니 전화선 저 너머에선 낭낭한 여자의 목소리가 한점 떨림없이 들려왔어.'난 댁이 누군지 궂이 알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 이쯤에서 나의 남편을 그냥 놓아주세요.지금 바로 놓아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그곳으로 경찰을 데리고 가겠어요.'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어.난 그만 수화기를 떨구고 말았어.그때 그 사내가 샤워를 끝내고 나오며 그 광경을 보고는 나에게로 다가와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의 귀에서는 읽어내지를 못했어.난 미친 사람처럼 알몸으로 창가로 가서 바다를 내다 보았지.바다는 ? 銓?있었어.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후둑이는 빗줄기를 애써 안아주고 있었지.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어.그 사내는 주섬주섬 옷을 걸쳐입고는 나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해고는 잽싸게 현관문을 열고는 나갔는데 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지금도 생각이 안나."
"그래서 그것이 마지막이었나?"
주영은 목이 마른지 맥주를 찾았다.태화는 마지막 남은 맥주 한캔을 따서 주영에게 내어 밀었다.
"아니,그일이 있은 후 딱 한번 만났어.난 그 사내보다 그 부인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죄스러웠어 그리고 그 부인이 너무나 존경스러웠어.보통 그 지경이 되면 우선 집어뜯고 부터 보는 것이 통례인데 그 부인은 정말 사람을 다스릴 줄 아는 것 같았어.그런 부인에게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성이라고 생각하니 남녀간의 성은 이렇다 하고 한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는 것 같아.만일에 그 부인이 과격하게 나왔다면 난 아마 더욱 그 사내를 놓지 않았을 것 같아.결국 그 부인의 나즈막한 재채기 한번에 우리의 사랑은 돛을 내리고 항해를 중단하고 말았어."
주영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떨리고 있었다.
"재채기 사랑---."
태화는 혼자말로 중얼거려 보았다.

                       5

밤이 익을수록 광안리의 거리는 더욱 술렁거리고 있었다.길 옆 전봇대에 기대어 서서 오로지 두사람의 사랑에만 열중하너라 사람들이 오가는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있는 연인들이 줄잡아 팔구명은 되었다.거리는 젊었다.불빛마저도 젊어서 날뛰고 있었다.태화는 주영이 끄는대로 자동문을 열고 들어섰다.광안대교의 여인의 아이새도우 같은 불빛이 자욱한 담배연기에 가려 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 맥주 좀 줘요 그리고 안주는 과일로..."
주영이 메뉴판을 내미는 남자웨이트에게 주문을 했다.
"그리고 요! 외람된 부탁일지 모르지만 혹시 가곡'바위고개'가 있을까요?"
태화가 뜬금없이 바위고개를 들고 나오자 주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 바위고개!!"
"으-응,그저 막연히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네가 곧잘 부르던 노래였는데---."
"이런데서 그런 노래 들으면 남이 흉 봐."
"흉? 저렇게 서로 부둥켜 안고 뽀뽀하는 것은 흉이 안되고 그래 가곡 하나 듣는게 흉이 된다고? 내 참 기가 막혀서---."
"세태가 그런걸 어떻해.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지."
태화와 주영이 말씨름을 하고 있는데 시끄럽던 실내가 잠잠해 지는가 싶더니 '바위고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노래는 우리벽에 부딪치면서 점점 거센 파도를 타고 있었다.맥주를 들고오는 남자 웨이트 뒤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가슴에 장미 한송이를 달고 나풀대며 다가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이집 마담 채 송이에요.모처럼 감상적인 노래를 신청하신 분이 누구신가 해서 이렇게 왔어요."
"그러세요,이름이 참 이쁘네요.채 송이,이름만큼 아름다워요."
"고마워요,우리집은 보시다시피 아주 젊은층들이 오는 곳이라 감상적인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어요 그런데 오늘 공교롭게도 두분께서 오셔서 이런 영광을 안겨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어요.보세요 그 시끌벅적하던 실내가 음악 하나에 확연히 달라지잖아요."
"녜,그렇군요.그러지말고 이리로 앉아요,앉아서 같이 술 한잔 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송이는 태화를 보며 의중을 떠 보았다.
"그래요,노래도 보내주시고 했는데 당연히 그래야죠."
"두분은 친구 사이?"
"그렇게 보이나요?"
"적어도 내 눈에는 요.이 장사 십수년에 남은 건 눈치 뿐이거든 요."
"대단하시네요.주영이와 난 중학교 동창이에요.졸업하고 오늘 처음 만났는데 주영이 음악시간이면 반을 대표해서 이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새앙머리를 하고 하얀 교복 위에 다소곳이 손을 얹고 부르던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어요.그래서인지 오늘따라 그 노래가 듣고 싶잖겠어요.다행이 송이씨께서 분위기를 맞춰주시니 정말로 고마와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감상적인 사람이 끼가 많거든요.물론 주영씨야 음악 쪽일 것이고 태화씨는 음악 쪽은 아닌 것 같고 그림을 그리시나요?"
"아니 송이씨 혹시 점장이 신가요? 어떡게 그렇게 알 수 있어요? 참 신기하네요."
"호호호,내가 뭐랬어요? 물장사 십수년이라고 했잖아요.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은 화려하게 그리면서도 자신은 치장을 잘 안해요 그리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거든요."
"맞아요.태화씨는 화가로서 내노라 하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지만 어릴적 부터 아주 그림을 잘 그렸어요.지금은 아픈 마음을 아마도 화폭에 심는가 봐요."
"아픔이 있나 보군요.모두들 하나쯤은 아픔을 가지고 살지요.하지만 그래서 또 끼가 발동하고 그 끼는 바람을 일으켜 더욱 더 깊은 세계로 빠져들기도 하지요.그래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기도 하고요."
"아니에요,난 아직 아마인데요 뭘."
태화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전문가에게서는 냄새가 나죠.뭐랄까, 꼭 소금에 저린 생선냄새 같다고나 할까? 뭐 그런 냄새가 요.그것에 비하면 아마츄어는 얼마나 신선한지 몰라요.잡아올리기 전의 물고기 거든요.망망대해를 자유로이 헤엄치며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그러다가 프로라는 거물에 걸려 틀 속에 갇혀버리면 영영 그 틀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소금에 저린 생선냄새만을 풍기며 자유로이 노닐든 망망대해를 동경하게 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친정 같은 것이 되어버리죠."
태화는 낭낭히 토해내는 송이의 가슴에 달린 장미를 그윽히 바라보고 있었다.어느새 그 장미는 선혈이 되어 흘러내렸다.그랬다.그것은 분명 장미가 아니고 피였다.심장을 소용돌이 치는 바로 그 피였다.죽은 것에는 피가 나질 않는다.살아 있었다.살아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태화의 심장이 끌어 오르고 있었다.이제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심장의 박동소리를 태화는 듣고 있었다.
"송이씨! 우리 무슨 연유로든 다시 한번 만나요."
태화는 용기가 났다.예전에 감히 할 수 없었던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그러는 태화를 주영이 눈이 휘둥그러지면서 쳐다 보았다.
"아니,태화씨!태화씨 바람 난 것 아냐?"
"그래 바람이면 어떻고 파도면 어떠냐.더도 덜도 말고 지금의 그대로 만나요.다만 밤 보다는 낮이 좋겠어요.지금의 송이씨를 화폭에 담고 싶어요.내 일생 처음으로 남에게 해 보는 부탁이자 마지막 부탁일 거에요."
송이와 주영은 서로 처다보며 태화의 제의에 놀라워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먼저 말을 꺼낸 쪽은 주영이였다.
"송이씨! 우리 그렇게 해요.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그까짖 소원 하나 못들어 주겠어요."
송이는 자신을 화폭에 담고 싶다는 태화의 제의에 적잖이 놀라웠다.한참을 생각하던 송이는 자신의 모델로 한사람의 끼가 발동한다면 그 또한 보람있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자 승낙을 하고야 말았다.
"좋아요.대신 장소는 제가 정할게요."
"좋아요 얼마든지---."
태화는 주영의 의중은 떠 보지도 않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송정에 가면 내 친구가 하는 카페가 있어요.그곳에는 라이브 시설이 되어 있어 그렇잖아도 주영씨를 한번 초대하면 어떨까? 하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때요? 주영씨? 피아노도 있어요."
"주영이! 좋잖아.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잖아.매사의 단조로운 생활에서 벗어나서 내게 큰 의미로 남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용기있는 일이야?"
광안리의 밤은 취해 있었다.모든것이 흥건히 취해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있었다.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이 밤을 사랑하고 사람이 불빛을 사랑하고 스쳐가는 바람을 사랑하고 사랑이 사랑을 사랑하고 있었다.

                         6

유월의 이글거리는 때앙볕은 갑판데크를 달구워 두꺼운 안전화의 바닥이 후끈거렸다.금새라도 계란을 뜰어뜨리면 후라이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태화는 훔뻑 젖은 작업복 윗도리를 벗고 그늘을 찾아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었다.영도대교 아래서 부터 비릿한 바닷바람이 휘몰아쳐 왔다.목줄기가 시원하다는 느낌과 함께 핸드폰의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응, 이서방인가? 여기 사직동일세."
"녜,장모님."
"이서방 이럴 어쩌나.자네 장인어른이 그만 쓰러졌네."
태화는 장모님의 전화를 받고 선수로 가서 바다를 건너 바라보았다.어디라고 눈동자를 고정시키지 못한 채 그저 용두산 타워를 향했다가 금새 부산역으로 그리곤 다시 길게 널어진 도심의 꿈틀대는 몸뚱아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아내 윤희가 집을 나갔다는 것을 알고 쓰러진 장인은 조금씩 호전되는가 싶었다.태화가 병문안을 갈 때 마다 장인은 태화의 손을 꼬옥 잡고 당신의 죄인 양 눈물을 떨구곤 했다.그럴 때 마다 태화는 당신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아주었다.결코 당신의 죄가 아니라 이것은 순수한 나의 죄라고,내가 제대로 처신을 못한 탓이라고 장인을 위로했었다.아내 윤희가 집을 나간지 삼년이나 흘렀지만 장인과 장모를 한번도 서운하게 하지 않았다.명절이나 생일이면 으례히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건너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이 물살을 가르며 바다 수면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태화는 이제는 저 쾌속선 같이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화는 간단히 샤워를 하고 동료들이 술 한잔 하자는 것을 뿌리치고는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개금에 있는 백병원 현관문 열고 들어서자 득실거리는 사람들이 다 환자같이만 여겨졌다.'무슨놈의 환자들이 이리도 많아'태화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장인이 누워 있는 병실을 찾아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순간 심장에서 송이의 가슴에 흘러나오던 선혈이 터저 나오는 것만 같았다.그곳에는 아내 윤희가 그 사내와 같이 와 있는 것이 아닌가.태화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서오게 이서방."
장모는 태화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았다.태화는 그저 묵묵히 장인이 누워 있는 침상만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조금 있자 그 사내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태화는 침상 곁으로 다가가 장인의 손을 잡았다.
"여기 당신 따님이 왔군요.부디 일어나십시요 그래서 행복하게 사는 따님의 사랑을 받으셔야 하지 않겠어요."
장인은 무슨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는 듯 했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눈에선 눈물만 주루루 흘러 내렸다.윤희가 태화을 쳐다보며 눈을 흘기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태화는 장모에게 준비해간 봉투 하나를 내어 밀었다.
"윤희가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이제 의엿이 두사람이 같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제가 서야 할 자리를 찾아야 겠읍니다.이제는 저와의 인연을 접어 주십시요.여기 얼마되지 않지만 마지막 저의 정성을 담았읍니다.무슨일이 있더라도 앞으로는 연락하지 마십시요."
"이서방! 이서방!"
장모는 태화를 불러놓고 그 다음 말을 잊지를 못했다.태화는 병실을 나왔다.태화가 병실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윤희기 다가섰다.
"여긴 뭣하러 왔는데?"
목을 꼿꼿이 세우고 막무가내로 뭣하러 왔냐며 따져묻는 아내가 너무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어.다시는 오지 않을게.이것으로 너와의 인연을 끝내고 싶어.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마.그냥 가도록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
테화는 윤희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마지막 한마디를 던지고는 복도를 따라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포도주빛 노을이 낙동강에 빠져들고 있었다.태화는 벤치에 앉아 포도주빛 노을을 폐속 깊숙히 빨아들였다.심호흡은 어수선한 가슴을 다소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태화는 비탈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내려오기 시작했다.지워야 하는 것을 하나하나 발걸음에 세면서---.

                                7

주영은 운전을 곧잘했다.송이와 태화 세사람을 태운 자동차는 요트 경기장을 지나 해운대로 접어들었고 해운대 해수욕장에는 아직 개장도 안했는데도 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주영은 지름길을 달리하고 일부러 달맞이 고개를 돌아 넘었다.고개마루에 올라서자 망망대해가 펼쳐지며 가슴을 후련하게 해 주었다.자동차는 눈 아래로 소롯이 들어서는 송정해수욕장을 향해 가파른 내리막 길을 시원하게 달렸다.
카페'파도'에는 일요일이라 제법 손님들이 많았다.송이는 태화와 주영에게 카페의 주인이자 친구인 선희를 소개했다.
"저 박 선희에요.송이로 부터 이야기 들었어요.이렇게 만나게 되어 너무나 기쁘군요."
네사람은 창가에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카페'파도'는 파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파도의 음율과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한꺼번에 느낄 수가 있었다.태화는 이젤을 홀 중앙에 세우고 구도를 잡아 보았다.창가에 앉은 송이의 너머로 파도는 넘실대며 다가서고 있었고 하얀 드레스 위에 빨간 장미 한송이는 진한 향기를 품어 내고 있었다.
"어때요? 좋아요?"
송이는 씽긋이 웃으며 포즈를 취해 보였다.
"좋아요.아주 좋아요! 반쯤만 나를 쳐다봐요.좋아요."
태화는 화첩에 스켓치를 하기 시작했다.스켓치가 끝나고 채색을 하기 시작할 무렵 무대에서는 주영이 피아노를 치며 바위고개를 부르기 시작했다.홀 안의 분위기는 고무되어 있었다.한쪽에선 파도가 넘실대는 창가에 앉아 장미 향기를 풍기는 여인을 그리고 있고 무대에선 낭낭한 목소리로 파도소리를 타고 주영이 바위고개를 잘도 넘고 있었다.주영의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박수는 계속 터지며 앵콜이 주문되었다.
"저-,고맙습니다.정말 고맙습니다.여러분들이 환대해 주시니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어릴 때 즐겨 부르던 '섬집 아기'을 불러 보겠읍니다.주영의 인사말이 떨어지자 또 한번 박수는 요란하게 실내를 울려댔다.주영은 피아노에 맞쳐 '섬집 아기'을 부르기 시작했다.어느새 너도 나도 따라 부르며 홀 안은 하나의 분위기로 익어 있었다.그랬다.모두들 잊고 있었다.무슨 무슨 핑계로 꿈을 잊고 있었다.그 꿈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 속에 있었는데 들춰내지를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주영이 노래로서 들추워 내주고 있었다.주영의 무대는 대 성공이었다.사람을 사로잡는 데는 역시 마음의 고향이었다.결국 '오빠생각'을 한곡 더 하고야 주영의 무대는 끝이 났다.
"주영씨! 대단해요.이토록 손님들이 하나가 되어 즐겨보기는 처음이에요.우리집 전속이 되어 주지 않겠어요?"
"좋아요,나의 꿈을 노래할 수 있고 또한 그 노래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꺼이 하지요."
"고마와요.이제 우리 술 한잔 해요.태화씨! 좀 쉬었다 해요."
선희는 맥주를 가지고 나왔다.
"얼마나 그렸어?"
주영이 태화에게 물었다.
"응,거진 다 돼 가.분위기가 좋아선지 오늘은 그림이 잘 되는데."
"그 참 다행이네."
"이게 다 주영이 네 노래 때문이야.네 노래가 잊고 있던 나의 꿈을 찾게 해 주는 것 같아.이제 확연히 나의 꿈을 찾았어."
"그 정말 반가운 소리네요.태화씨! 저 파도에 나를 띄어 보내지는 말아요."
"하하하,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을 까요?"
태화는 모처럼 통쾌하게 웃었다.
"태화씨! 좀 어려운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뭔데 그렇게 어려워요?"
"우선 대답부터 듣고 싶어요."
"오늘의 무대를 제공해준 선희씬데 안들어 줬다간 다시는 못오게 하면 어떡해요.좋아요, 말해 봐요."
모두들 선희의 그 어려운 부탁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선희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은 태어나는 그 순간 부터 구속되지요.그 구속은 생이 다하는 날까지 벗어 날 수가 없어요.그래서 우린 단 순간만이라도 그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안달을 하지요."
선희는 맥주잔을 들어 파도같이 들이켰다.
"그 단순간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무언지 알아요?"
"그게 뭔데?"
송이가 맥주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며 물었다.
"끼!"
"끼?"
"응,끼.조물주는 사람을 구속하는 동시에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끼를 주셨지.끼는 지문과도 같아서 사람마다 다 틀리지.그런데 중요한 건 그 끼를 잠재우고 있다는 거야.끼 자체로서는 벗어날 수가 없어.끼를 찾아 바람으로 승화시킬 때 비로소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는 거지.그 다음은 말 안해도 뻔하잖아."
"맞아,바람은 불어야만 제격이지."
송이가 선희의 말끝을 받아 맞장구를 치자 태화는 주영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주영도 따라 빙그레 웃었다.
"자! 이제 태화씨 제 부탁 들어주는 거죠?"
"녜,선희씨.말해보세요."
"지금 그리고 있는 저 그림 우리 카페에 전시할게요."
"좋아요,기꺼이 그렇게 하지요.잊어버린 내 꿈을 전시할게요."
"우리의 꿈은 바람으로 일어 저 파도 위를 날을거야.자! 우리 기대어 서지 않는 바람이 되기를 위하여 건배를 합시다."
카페'파도'를 향하여 파도는 쉬임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오고 있었다.

                 -끝-

김 종웅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신양복리 139-1
홍익아파트 105/401
전화;031-673-2460
핸드폰;011-9346--7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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