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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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단편소설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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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 신인상 응모작품 단편 부문
제목 : 다시 일상이다.
원고분량 : 102매
사방이 깨어진 햇살 투성이다. 10인용 원탁에 구색이라도 맞춘 양 그를 빙 둘러싼 회전 의자, 그 역시 널브러진 햇살은 여전하다. 팔자 좋은 놈들 같으니라고. 어느덧 바야흐로 봄이건만, 이 청춘은 아직도 지난겨울에 시위한다. 제길, 입춘 지난 지가 벌써 언제인데... .
“제길, 겨울 지난 지가 벌써 언젠데 아직도 이 모양들이야? 다들 동아건설 짝 나고 싶어서 그래? 요즘 이 바닥 경기가 무경기라는거 몰라서 이래? 김 부장,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끊임없이 날아드는 저 질책, 이젠 히스테리컬 하기까지 하다.
“그게 저,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공사자금도 회전이 잘 안되고, 무엇보다 공사 일정이 너무 빡빡하게 짜여져 있어서 아무래도 애당초 무리가 아니었나 하고”
“뭐야.” ‘쨍그랑’ 아슬아슬하게 두상을 비껴 지나간 재떨이가 바닥에서 비명횡사를 지른다.
“그게 얼마 짜리 공사인데 미스를 내고 있어? 하루 손해비용이 얼만 줄 그 머리로 계산하고도 이따위 보고서를 올리나? 이 달 안에 마무리 못 지으면, 책임질 각오나 하고 있게.” 임직원 실에서 흔들리는 건 이것 뿐. 머리채를 쥐어 잡힌 양 흔들려보나, 역시 종이일 뿐이다.
“죄송합니다. 이번엔 실수 없이 다시 시정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나가 봐.”
“예.” 허나 자리로 돌아온 김 부장은 울그락불그락 성난 황소 마냥 ‘씩씩’ 가쁜 숨을 밭아낸다.
“내 참, 애당초 무리한 계획을 통과시킨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발뺌이야 발뺌은.”
“네?”
“아니, 누가 이런 거 갖다 달랬나? 왜 시키지도 않은 짓하고 그러나? 도로 가져가게.”
“아니, 전 부장님 생각해서... .”
“아,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아? 도로 가져가.”
“네.” 괜히 애꿎은 아랫사람만 잡는 격인가.
“김 과장.” 다시 그를 불러 세운다.
“네?”
“이거 다시 해 오게.”
“네? 이건 부장님이 이미 결재하신 것인”
“아, 어쨌든 다시 시정해서 보고 올리라면 그런 줄 알아. 지연된 석 달 손해비용하고, 당시 구체적인 지연 명분과 상황이 중요해. 알겠나?”
“그건 이미 결재된 내용에 들어있는 줄 압니다만.”
“아, 글쎄, 전무님 성격 몰라서 그래? 좀더 리얼하게 보고하란 말야. 알았어?”
“네, 그럼 이만.”
“김 과장.” 다시 그를 불러 세운다.
“네?”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 돌아서다니, 자네 대체 정신 어디다 놓고 다니는 사람이야? 응? 그딴 정신상태로 일하니 이 모양 아닌가? 응?”
“...... .”
“앞으로 남은 공사, 이 달 말까지 완성 못하면, 옷 벗을 각오하게. 알겠나?”
“부장님. 경황 뻔히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돌아가는 경황을 아니까 이런 소릴 하지 않나. 긴말 않겠네, 가봐.” 또 역시 괜한 사람만 잡은 격은 아닌 듯도 한데, 혹시 또 괜한 사람만 잡은 격이면 어떡하나.
이놈의 월요병. 햇살이 이토록 눈부신들 뭐하나. 부셔본들 수북한 일감들은 여전한데. 별 뾰족한 수가 없군 없어... 후. 당분간 집과는 담쌓을 수밖에.
전화벨이 울린다.
“네, 전무님.”
“김 부장 좀 오라고 해.”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만, 현장에 계시는데 호출할까요?”
“그래. 5시까지 내방으로 오라고 해.” 더 이상의 용건은 없다는 듯 카랑카랑한 허 전무의 음성은 사라진다. ‘뚜 뚜 뚜... .’
화요일, 그러니까 벌써 만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지난 화요일. 허나 허 전무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군. 이 달 안에 못 끝낼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자네도 제법이야.”
“제법이면 뭐합니까? 몰아붙인 철야 한 달에 망가진 인간이 어디 한 둘 입니까? 보십쇼, 지금 우리 꼴이 어디 사람 꼴인지.” 하긴 보아하니 그렇긴 하다. 제멋대로 자라다 못해 덥수룩하기까지 한 수염은 그렇다 치고, 이발조차 못한 머리엔 언제 감았는지 희뿌연 먼지가 마치 시멘트 포대라도 뒤집어 쓴 사람 같다.
“아 그걸 누가 모르겠나. 우리 일 생리구조 자체가 이런걸. 나도 거짓말 안하고, 지난 한 달간 집 대문조차 못 밟아 봤네. 하는 김에 조금만 더 하세. 다음달엔 보너스도 더 오르잖나.”
“하긴 그런 것도 없으면 정말 살맛 안 나죠.” 김 과장의 대답이다.
“회사도, 직원도, 다 같이 살자고 이러는 거 아닌가. 조금만 더 해 보세. 난 지금 사무실 들어가 봐야되니까, 오늘 일은 자네가 잘 마무리하고. 일 다 끝나면 회식이나 하지.”
“한 번 갖곤 안 되는 데... 한 두 세 번은 해야...하하하.”
“하하하...알았네.”
김 부장의 차가 현장을 떠난다. 백미러에 언뜻 비춰지는 현장, 언뜻 보기엔 완공된 듯 보여지는 건물들. 마치 앓던 이를 뽑아버린 사람 마냥 ‘씨익’.
김 부장은 지난 한 달 중 제법 통쾌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화요일, 그러니까 현장으로 출근도장을 찍은 지 꼬박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지난 셈이다.
“전무님이 찾으신다고?”
“네. 다섯 시까지 전무님 방으로 오시라고 하십니다.”
“그래? 흠.” 김 부장은 사무실을 한 번 ‘휘이’ 둘러본다. 마치 그가 사무실을 비운사이 바뀐 것은 없나하고 확인도장이라도 찍고 싶은 눈길로 말이다. 그러다 ‘멈칫’ 벽거울 앞에서 시선이 멎는다.
“아니, 저건 뭔가?”
“드라이...입니다만... .”
“아니, 사무실에 저게 왜 있는 거지?”
“모르시고 계셨어요? 부장님, 김 과장님, 기사들 현장에서 야근하는 동안, 다른 분들도 야근하시느라... .”말꼬리를 감추는 관리부대리.
“저걸로 머리 감고 말렸단 말이겠군. 아닌가?”
“네. 저... 부장님도 머리 감으시겠어요?”
“흠 흠, 난 됐네.” 화장실로 향하는 김 부장. 거울을 보며 머리를 털어 낸다. 손으로 머리를 가다듬고는 ‘흠, 그래도 생각 보단 제법 재치가 있단 말이야.’ 김 부장은 이 대리가 둘러댄 말이 제법이었다는 듯 ‘피식’ 하고 웃어버린다.
‘흘끔’ 시계를 보니 어느덧 5시. 아직 이른봄이라 이러한가! 5시만 되면 어눅어눅 추운 낯빛을 내뿜던 겨울과는 사뭇 다르질 않나. 걷혀진 블라인드를 뚫고 못다 뿜은 낯의 햇빛이 전무의 얼굴을 비춘다. 그래, 일러도 봄은 봄인 게지.
“아, 김 부장 왔군, 현장에서 바로 오는 길인가?”
“네.”
“흠. 어떻게 돼가나?”
“네. 지금 마무리 단계입니다. 며칠 안에 끝나면 한번 둘러보시지요.”
“흠. 수고했네.”
“그럼 손님이 계신 것 같으니, 전 나중에”
“아닐세, 늦었지만 인사 나누게. 이 쪽은 시공을 책임지는 김 부장이요. 이 분은 설계와 의장은 물론 광고업계의 베테랑인 이소희 부장. 앞으론 건축 설계 사무소는 물론 카피라이터도 외주를 줄 필요가 없게 됐네. 허허허.”
허나 이소희의 얼굴을 본 김 부장의 얼굴은 돌연 얼어붙어 버린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소희예요. 잘 부탁드려요.” 소희가 내민 악수에 마지못해 응하는 김 부장.
“... 잘 부탁하오.” 악수에 응하는 김 부장의 경직된 시선이 소희의 반지에 머무른다.
“허허허. 특기가 많은 사람이요. 경력이 화려하지.” 정말이지 근 한 달만에 들어보는 허 전무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사무실을 울리고 있는 것인 게다.
“무슨?”
“차차 알게 될 거요. 김 부장도 일전에 광고제작에 참가한 경험이 있으니 앞으로 자사 홍보용 광고는 물론 타사 광고오너도 잘 해내리라 믿소. 그러니 광고분야는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줘야겠소. 그럼 나가들 보시오.”
“네, 그럼.” 돌아서다 말고 김 부장.
“헌데 언제부터 출근이죠?”
“일주일 전부터요.” 소희의 대답에 허 전무.
“아아... 자네가 현장에 매여있느라 경황이 없을 것 같아 소개를 미루었던 거네... 자 그만 나가들 보게.”
방문을 닫고 이마에 손을 짚는 김 부장. ‘그럼 스카웃인 게로군.’
“어디 불편하세요?”
“...... .난 그만 가보겠소.” 여전히 소희의 반지에 시선을 멈춘 채, ‘툭’ 무덤덤한 그 음성이 ‘툭’ 쏟아지나,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김 부장. 그의 눈동자엔 어느덧 한줄기 불꽃이 타오른다. 조금 전 현장에서 맛본 통쾌함의 쾌감이 일순 편두통으로 변해 김 부장의 마음으로 집요히 달려들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현장, 누구는 공사 마무리 잘 짓겠다고 아침 여섯 시 반에 출근해서 철야하는데, 이게 또 웬 유도심문인 겐가.
김 과장이 마른하늘을 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뭘 좀 제대로 알아보고 전화하시오. 난 절대 그런 일에 협조한 적이 없소. 에잇.”
‘탁’ 죄 없는 핸드폰의 폴더만 박살이 날 지경이라니.
“제길, 설마 부장님이? 어쩐지 감이 안 좋더라니. 제기랄 재수가 없으려니까 아침부터 지랄들이야.” 김 과장은 낮게 욕설을 지껄인다.
화사한 수요일 아침이다. 허나 유달리 이 아침이 김 과장을 자주 찾고 있는지도.
“네.”
“본사요. 김 부장이 자금을 유용할 목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이 서류를 만들어 준 게 아니요?”
“나 참, 그건 위에서 工務(공무)에 사용될 목적이라고 그 서류를 작성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지, 내가 미쳤소? 난 그런 구린내 나는 일 따위 딱 질색인 사람이야, 이거 왜 생사람 잡고이래?” 급기야 받칠 대로 받치는 화에 이젠 막 반말이다.
“나 원, 이것 보시오. 김 부장이 이미 시인한 일이라니까.”
“아니 대체 뭘 시인했다는 겁니까?”
“공사비 용도의 자금 일부를 流用(유용)했단 사실 말이오. 그리고 당신은 그 사실을 눈치 챘으면서도 서류를 만들고 본사엔 비밀로 한 것 아니요? 알고도 보고 올리지 않는 것은 결국 資金流用(자금유용)을 방치한 책임이 있소. 시말서 정도로 끝내겠소.”
“아니,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시말서를 써? 쓸려면 죄 진 사람이나 쓸 것이지.”
“代身罪(대신 죄) 아니오? 그러기에 알면서 왜 모른 척 덮어두나 덮어두길. 나 원, 또 처음부터 알고 작성한 거라고 시인하면 될 것을, 왜 부인하나 응? 또.”
“아 이 사람 정말 말 안 통하네. 난 서류 작성하라기에 작성하고, 결재 받은 일밖에 없어. 내가 눈치 못 챈 것도 죄가 되요? 뭐, 내가 시말서를 써? 어디다 덤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옆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수군거린다.
“시말서 정도로 끝내는 걸 다행이라 생각하라고. 다행히 큰돈은 아니니까.”
“내가 미쳤어? 억울하게 뒤집어쓰게? 사직서 쓰면 될 것 아냐? 이 현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고.”‘탁’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부장님? 아니 대체 내가 왜 시말서를 써야 됩니까? 네?”
“아, 김 과장 그건 만나서 얘기하지. 거기 있게.”
“아니요, 지금 제가 사무실로 갑니다.” ‘탁’ 옆에서 수군대던 인부들이 하나 둘 흩어진다. 마침 점심시간도 다 됐고, 이런 일은 한 두 번 겪는 일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수저 질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한 세상을 살다가도, 타인은 타인일 뿐이란 겐가!
“제기랄.” 김 과장은 울화통이 터져 버리기라도 할 듯, 성급하게 시동을 건다.
화사한 수요일이다. 허나 사무실은?
“김 과장. 그래 김 과장 잘못이 아니지, 시말서 쓰지 말게나.” 김 과장의 벌건 얼굴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김 부장이 던진 말이다. 순간 멀쑥한 듯 차분해진 김 과장.
“이것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工務(공무) 자금 중 얼마였습니까?”
“흠, 흠. 얼마 안 되네. 천만 단위도 아니고, 달랑 일 백 오십 일세. 후. 나가 보게.”
멀쑥이 대답하는 김 부장을 두고 김 과장은 나간다. 직원 휴게실로 향한다. 담배가 몹시도 고프던 참이었던 것이다.
다시 사무실. 이 차장이 그의 책상에서 전화를 받는다.
“네. ○○토건 이 차장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아직 윗분들은 모르시는군요. 네. 그럼 제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네.” ‘찰칵’
다시 사무실. 김 부장이 그의 책상에서 전화를 받는다.
“네. ○○토건 김 부장입니다. 아, 그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재비용으로 쓰여졌습니다. 하하하, 우리 일이 어떻다는 것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제가 설마 저 혼자만을 위해서 썼겠습니까? 다 직원들 사기 돋구느라고, 예? 아 맞습니다, 물론 자재비용으로 쓰였지요. 하하하. 여부가 있겠소. 하하하.” 통화를 끝낸 김 부장은 서 과장을 불러 몇 가지 지시를 한다. 일순 서 과장의 얼굴에 그늘이 지고, 김 부장의 얼굴 역시 편치 못한 듯 그늘이 지기는 마찬가지다. 화사한 수요일 오후가 그늘지고 있는 마당인 게다.
“여기 있었어?” 직원 휴게실에 들어온 서 과장은 담배를 한 가치 피워 문다.
“응. 젠장, 왜 일이 꼭 무당 선머슴 잡는 식으로 되어가냐? 그렇게 만드는 돌대가리가 대체 누구야? 제길. 현장 일만 해도 눈코뜰새 없이 바쁜데,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게 다 거치적거리네, 젠장.” 평소 서 과장과 김 과장은 밖에선 말을 트고 지낼 만큼 편안한 사이이다.
“이 차장.”
“뭐야?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태우겠나?” 어느새 김 과장의 입가엔 에쎄가 물려 있고, 서 과장은 지포라이터로 손수 불을 붙여준다.
“모르겠나.”
“...말 해 보게.”
“별 거 있겠나, 앙숙인 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격이지!”
“...... !”
“김 부장은 이미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은 사람이고, 이 차장은 그 구멍을 막으려는 사람이지.”
“좀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보게. 대체 두 사람이 일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 중인지.”
“이 일은 본사에선 모르고 넘어갈 일이네. 소위 다른 토건에서 크게 한 탕씩 치는 쓰레기들처럼 몇 천 크게는 몇 억 단위로 자기 호주머니 채우기에 정신없는 놈들, 그런 진짜 쓰레기들 근처엔 근접하지도 못하는 김 부장이지, 그저 코 묻은 용돈 몇 푼이나 챙기는 수준이랄까, 한마디로 진짜 쓰레기는 될래야 그 좁쌀 만한 간으론 될 수도 없는 거고.”
“요점만 말하게.”
“별 거 있겠나, 실권을 누가 잡느냐 그 싸움인 거지!”
“자네 참 답답하군, 이런 상황에서도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는 습관은 여전하군. 난 인내심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야.”
“알겠네. 김 부장의 약점을 수집해 그걸 이용해 김 부장을 갖고 놀겠다는 거지. 김 부장이 회사에 발휘하는 실권을 갖겠다는 거지. 김 부장은 회사에 그대로 세워놓고, 마치 허수아비 조종하듯 움직여 보겠다는 심산 말야. 이것 말고도 여럿 되네. 이 차장이 수집한 김 부장의 구린내 말일세. 물론 본사에선 모르지. 몰라야 하니까. 이 차장이 겉으론 김 부장의 부정을 덮어주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씩 늘어가는 증거들로 김 부장을 갖고 노는 거지. 이 일도 이 차장이 일부러 본사에 정보를 흘려 놓고, 자신의 선에서 헛소문인양 위장하고, 해서 김 부장은 터무니없는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스토리지. 하지만 그건 看山走馬(간산주마)식 스토리일 뿐. 정작 터무니없는 건 쌓여있는 약점을 이용해 이 차장이 이번엔 또 무엇을 달라할지 모르겠네 그려. 자네의 시말서는 이 차장의 만일 대비시 보관용에 불과하고, 그것은 김 부장의 약점 중 하나가 될 뿐인 거지.”
“제기랄. 부정을 계속 저질러온 건 명백한 유죄지.”
“그래서 김 부장이 불쌍한 인간이란 거야. 빼도 박을 수 없는 상황이 어디 한 둘인 줄 아나.”
“하지만 진짜 악질은 이 차장이군 그래, 그렇지 않나?”
“비상하리 만치 교묘한 머리를 가졌지. 아마 사기꾼이 됐으면, 크게 성공하고도 큰집 근처에는 한 번도 못 가볼 인물이 됐을 거야. 내가 가장 경멸해 마지않는 부류의 샘플이라고나 할까!”
“자네 얘기를 듣고 있자하면 큰집 가는 놈들은 그나마 양반출신이군 그래. 우리 상놈들 양반으로 교화 한 번 시켜보면 어떻겠나, 응?”
“아서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것도 모자라서, 기름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려는 것밖엔 안 되잖나. 자네 힘으로 정의 구현이 실현이나 될 것 같은가? 요즘 세상에 그런 理想(이상)은 지나가는 개도 비웃는다네. 그런데 허비할 인생이 남았으면 현실을 위해 사는 것이 낫지.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돈 없고, 백 없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약자들의 현실이지. 서글픈...서글픈 현실... .”
“자넨 서글프리 만치 지독한 현실주의자였군 그래. 게다가 염세적이기까지 한.”
“자네에게 날 이해해달라는 게 아니네. 어차피 자넨 날 이해하지 못할 것이네. 때때로 나 자신조차도 이런 날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까.” 서 과장은 허공을 향해 계속 마른 담배연기 만을 피워댄다. 허공을 응시하는 서 과장의 눈동자가 텅 빈 집 마냥 허전해 보인다.
“정말 그 잘난 얼굴에 사직서랑 돈 일백 오십 만원 확 집어던지고 나오고 싶은 더러운 기분은 굴뚝같지만, 내 잘못이 아닌 이상 그렇게 해 줄 수는 없지. 아직 모르겠네.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인지. 이 사태 역시 마치 남은 삶의 행로를 시험하는 신의 장난 같네 그려.”
“하하하하하하하. 자네도 그런 소릴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군 그래. 뜻밖인 걸.”
“이보게. 극과 극이 통하다 보면 맞닿는 부분도 있는 거지 뭘 그러나. 다 자네 분위기에 전염된 덕택이라고.”
“김 부장이 자네한테 많이 미안해하고 있네. 물론 선택은 자네 몫이겠지. 시말서 역시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야. 생각 잘 하게. 자넬 보면 불안해.”
“뭐?”
“어디로 튈지 모를 탁구공 같다고나 할까.”
“차라리 좀 멋있게 바람 같은 존재라고 해주지 그러나. 응?”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一小一笑(일소일소)에 수요일 오후가 화사하게 익어간다.
임직원실. 걷혀진 블라인드를 통해 내린 오후 3시의 일광마저도 뜨건 시선으로 원탁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김 부장 역시 이소희 부장이 펼쳐놓은 신축공사의 설계도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이건 40동에 3개월에서 6개월 안에 끝내는 작은 규모예요. 또 이건 120동의 일년이 좀 더 걸리는 작지 않은 규모이긴 한데, 아직 디자인이나 설계 면에서조차 많은 분량이 미완성이죠. 어떻죠?”
설계도를 응시하는 김 부장의 눈에 만족감이 떠오른다.
“상당히 정밀하고, 깔끔하군요. 건축 설계 사무소에 일했으면 감리였소?” 이소희나 김 부장 역시 비교적 순탄한 출세길을 밟아온 사람들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리라.
“네. 설계에 시공현장과 감리를 병행했죠.” 30대 중반의 나이와는 달리 무척 앳되어 보이는 여자이다.
“해서 말인데, 규모도 작은 40동은 제가 맡는 것이 어떨까요?”
순간, 김 부장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인다.
“하지만 건축과 토목은 여러모로 틀리지요. 측량 기술자에 물량 조절, 노동력 조절 따위, 현장만 20년인 토목가인 나도 만만찮은 곳이 소음공해 만발한 현장이란 곳이요. 땀의 현장인 그곳들이지. 일이란 건 말이요, 각각의 전문가가 맡은 일만 잘 하면 되게 되어 있소.”
“하지만 일의 능률을 위해서 팀웍은 필수입니다. 팀웍이 깨어지면, 실적은 저조하고, 저조한 실적에 문 닫아거는 회사가 아마 한둘이 아니라 지요? 그럼 이만.”
‘탁’ 이소희는 황급히 챙긴 도면을 들고, 임직원실을 나간다.
“제기랄. 뭐 저런 차가운 여자가 다 있지? 헌데, 이상해. 분명히 안면이 있는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흠. 어째 좀 찜찜한걸. 그나저나.” 갸우뚱거리는 김 부장, 그 때 서 과장이 들어온다. 서 과장은 건축가답지 않게 파리한 안색을 지닌 남자다.
“부장님. 지금 현장에서 오는 길입니다만, 김 과장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현장으로 출근을 안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辭職書(사직서)를 쓸 생각 같아 보였습니다만.” 그래, 벌써 하루가 지난 목요일 오후인 것이다. 김 부장의 눈이 일순 부리부리해진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이 아닌 것은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는 분명한 성격이다 보니, 그간 부장님께 섭섭한 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걸 왜 이제야 보고해? 辭職書(사직서)라니, 그건 안 돼. 아직 현장 마무리도 덜 지은 대다가, 다음 신축시공 때 말뚝박을 만한 사람도 김 과장 만한 사람이 없어. 토목가치고 그간 설계파트까지 함께 담당해왔던 사람도 김 과장 한 사람이고, 이번 공사나 다음 공사 초기 원본 데이터도 이미 김 과장 손에 있어. 잡아봐.”
“설계파트라면 든든한 이 부장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여잔 내 사람이 아니야. 알겠나. 내게 힘이 될 여잔 아니란 말일세. 가서 김 과장 구슬려 봐. 지금공사 마무리 짓고 나면, 내가 다음 공사에서 한 자리 준다고 해. 알겠나?”
“네.”
“나가보게.” 임직원실을 나선 서 과장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밤. 이미 사방은 사위다 못해 캄캄한 밤. 김 부장은 잠든 아내의 곁을 슬그머니 빠져 나와 주방으로 향한다. 그의 식도로 얼음 섞인 알코올이 흘러내린다. 시바스리갈, 그는 언더락 잔을 쥔 채, 빙긋 웃는다. 이 얼마만의 웃음인가. 그의 머릿속으로 불현듯 지난날의 일들이 필름처럼 돌아간다.
“부드럽군.” 또 한 모금의 알코올이 식도를 적신다.
“역시 부드러워.” 김 부장은 가끔 한밤에 잠에서 깨면, 술을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하며 또 그럴 때면, 그럴 때마다 어이할 수 없는 지난날들의 잔재가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이상해. 오늘따라 그 여자의 얼굴이 또렷하단 말야. 안면이 있는 얼굴이긴 한데, 어디서 본 걸까? 흠... .”그러니까 김 부장은 그가 탐탁해 마지않는 이소희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결혼 12년째, 그는 아내가 낳은 외아들과 단란하지만, 풍족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느덧 빈 잔에 알코올을 채운다. 어느새 밤도 취하는지, 사방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그래, 골몰히 생각에 몰두하다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어 버렸단 말인 게로군.
벽시계가 5시로 향해가고 있었다.
아침.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다니. 금요일 아침. 출근길, 차창 밖으로 스치는 발가벗은 가로수. 오늘따라 발가벗은 그들이 유달리 싸늘함은 아마도 자신이 싸늘해서인지도 모르리라.
김 과장은 본사의 출입문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침. 금요일 아침. 어느새 11시로군. 화장실에서 나오던 김 부장은 한 사내와 시선이 마주친다. 좀 체, 단련된 침착함을 잃지 않던 김 부장답지 않게,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는 저 두발 좀 보라지. ‘맙소사’ 하는 표정인 김 부장의 얼굴에, 사내 역시 뜻밖이라는 듯 흠칫! 허나 곧 김 부장을 노려보는 사내의 눈매는 매서워진다. 곧 멱살이라도 잡아챌 기세인양 말이다.
“자네... 이소엽이 아닌가! 나 김 부장 아니, 김한수일세. 뜻밖이군, 여기서 만나다니.”
“나야말로 뜻밖이군, 자네가 이 회사에서 일하다니.” 어느덧 로비엔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아아. 회사에 볼일이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편의를 봐 줄 수 있었을텐데, 아쉽군.”
“하아. 난 자네 따위와 상종할 만큼 한가한 사람 아니네.” 사내의 휙 돌아선 등에다 대고,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김 부장이 터트리는 말 한마디.
“자네 여동생은 그렇지 않은 것 같던데.” 비꼬는 듯한 김 부장의 음성은 곧 사내에게 멱살을 움켜잡히고 만다.
“이 자식이. 똑똑히 기억해 둬. 이미 12년 전, 너란 자식은 소희의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져버렸다는 것을. 소희는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알겠어? 충격 주면 가만두지 않겠다. 명심해.” 김 부장은 풀려난 멱살에 손을 갇다대고, 사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끙... .소엽을 보고서야 소희를 기억해 내다니. 나란 놈은 대체 왜 이런...... 끙”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김 부장, 답답하다.
술집, 하루종일 혼자서 줄담배만 피워대던 김 부장. 허나 역시 조여오는 답답함을 풀 수가 없었음인가. 술집, 김 부장은 빈속에 양주를 들이 붇고 있다. 지금껏 치밀한 계산 하에 살아온 인생이 쫓기는 기분인양,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의 초점 두울. 잃어버린 초점이 술잔 속에 잠겨든다.
“소희. 소희는...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김 부장은 소엽의 말을 그대로 곱씹어본다.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 충격? 충격! 끙.”
“아니 혼자서 무슨 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예요?” 박 마담이 들어오며 김 부장의 말을 되받는다.
“기억상실증이라고.” 이미 반쯤 꼬부라진 혀가 말을 듣지 않는다.
“어머나, 누가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렸대요?”
“내가 사랑했던 여자 말이야... 이젠 날 몰라본다는 거지.” 고삐 풀린 남자의 혀.
“어머나, 가엾어라... 첫사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 기운 빼고 있는 당신도 가여워 보이고... .”
“첫사랑? 후후후. 가여워? 내가? 이 천하의 김한수가? 이것 봐. 그렇게 보고도 날 몰라? 나 양심이라곤 피 한 방울만큼도 없는 놈이야. 내가 얼마나 독종인지 몰라? 그래, 출세 밖에 모르는 독종이란 놈이 바로 나야, 나. 알겠어?” 알아듣기조차 힘들만큼 꼬여버린 남자의 혀.
“호호호. 벌써 취했나봐, 이런 날엔 그저 마셔요, 마시고 나면 다 잊어버리고. 자요.” 박 마담은 또 술을 따르고. 벌써 빈 양주병만 세 병이다.
“그래, 내가 버렸다. 너무 없어서 버리고, 없는 것 없이 다 가진 여자하고 결혼했다, 왜? 학벌, 명예, 돈, 그래, 안 가진 것 없이 다 가진 여자 말야.”
“어머, 왜 그러셨어요?”
“가난이, 암만 해도 벗어날 길 없는 가난이 지겹다 못해 날 미치게 했어. 그렇게 평생을 사느니 나쁜 놈이 되는 걸 택했던 거지. 후후후... 나 나쁜 놈이야... 정말...정말 못난 놈이지... 후후후... .”
“사는 게 다 꿈 같은 거죠. 꿈속에서 깨어나 눈떠보면 죽음 속이고, 그땐 그냥 악몽 꿨다 생각하면 그만이고, 그래도 찜찜할 땐 하느님한테 용서해주십사 회개하면 좀 개운해지고. 어쩌겠어요, 사는 게 내 뜻대로 되는 거였음, 나도 지금 이렇게는 안 살아요. 알아요? 너무 자학하지 말아요. 당신이 그러면 나도 확 죽어버리고 싶어지잖아요. 자요. 마셔요.” 박 마담은 또 술을 따르고. 벌써 빈 양주병만 네 병이 되어버리는데.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술을 마시던 박 마담의 눈가가 젖어들고. 어느새 술에 곯아떨어졌는지, 뻗어버린 김 부장을 빈방으로 옮긴다. 담배를 한가치 태운 박 마담은 나가려다 말고, 김 부장의 이불을 덮어준다. ‘또각또각’ 로비를 걷는 박 마담의 힐 소리가 어쩐지 불안하게 들리는 한밤이다.
그랬다. 12년 전 봄, 소희는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해 있었다. ‘합포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 제 47회 졸업생 친구들.’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진 호프집. 한마당 호프라 했던가. 네온싸인에 더욱, 또렷해지는 밤.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깨고 사회자가 마이크를 넘긴다.
“나 결혼해. 다들 초청할게. 너희들이 와서 축하해주면, 더 행복한 결혼이 될 거야. 주례사는 담임 선생님께서 해 주시기로 했어, 다들 꼭 와.” ‘와아’ 다들 환호성을 올리는데, 어느덧 방긋 웃으며 청첩장을 돌리는 여자, 그러니까 4학년 졸업에 이어, 곧 올리는 웨딩마치인 셈인 게다.
“어머나, 제 명자잖아, 기억 안나? 나랑 단짝이었던 예쁘장한 여자 얘, 우리 동네에 살았잖아.”
“어머, 몰라보겠다 얘. 어쩜 더 날씬해졌는걸. 젠 어릴 때부터 늘 행복해 보였었어.” 소희의 말이었다.
“그랬니? 헌데.” 하며 수아는 돌려진 청첩장을 펼쳐본다.
“일요일 12시? ‘김한수ㆍ최명자’ 어머, 이게 왠일이니? 동명이인이잖아, 봐, 여기 김한수라고 돼 있어. 헌데 네 애인도 김한수잖아, 그지? 어머, 별일이다, 얘.” 하는데, 마침 등뒤에서 수아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최명자.
“어머, 너 수아지? 나 명자야, 우리 한동네 살았잖아. 기억나?”
“소꿉놀이 할 때 내가 의사 하면 넌 환자하고? 어머, 갑자기 왜 그게 기억나니, 얘.”
“호호호호호. 가만, 넌 소희? 맞지?” 어느덧 수아 옆의 소희에게 눈길을 주는 명자.
“응, 오랜만이야, 예전에도 그러더니, 여전히 행복해 보이는구나, 넌.”
“호호호호호. 내가 그랬었니? 참, 모레 결혼식인 거 알지? 꼭 와야 돼. 소꿉친구들이 빠지면 안 돼지. 꼭 와.” 주거니 받거니 주고받은 말속엔 그간의 안부와, 결혼 축하, 꼭 참석하겠다는 약속 아닌 약속 등이 섞여 있고, 그렇게 붙임성 좋은 명자는 친구들을 오가며 마치 결혼식 홍보 나온 사람 마냥 떠들고 있었다. 그늘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발랄한 여자. 최명자, 그네의 결혼식이 불과 40시간 남아있는 순간인 것이었다.
일요일. 가든예식장을 둘러싼 정원의 수풀에서 지저귀는 자. 그 바로 새일지니. 화사한 봄 햇살처럼 화사한 신부의 얼굴엔 어느덧 윤기가 돌고 있다. 신부대기실. 사교성 좋은 수아의 손길에 이끌려 소희도 이미 신부대기실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였다. 인사치레. 하지만 그것도 살아감에 필요한 것이겠지. 소희의 바로 옆에 앉은 수아. 그네들 주위로 동창생들만 서른 남짓이다. 사회자.
“신랑 입장.”허나 그와 동시에 기가 막힌다는 듯 벌어지는 수아의 입.
“신부 입장.” 흐르는 피아노의 선율에 소희는 사시나무 떨듯 떤다. 그네 역시 한수를 보아버린 것이다.
“저, 저, 김한수. 아니 뭐 저, 저런 자식이” 수아는 차마 말을 맺지 못한 채 벌떡 일어서고, 옆의 소희를 잡아끈다. 당황하는 주례사. 허나 주례사는 두 제자가 조용히 나가주기를 바라는지, 아닌지, 거북한 기침 소리를 연신 낸다. ‘에헴. 흠. 흠.’ 예식 홀에서 조용히 나가던 수아, 소희. 허나 돌연 무슨 생각에선지 수아. 신랑신부가 지나간 꽃무늬 길을 밟고 그들에게 다가가는데.
‘김한수ㆍ최명자’는 주례사의 점점 거북해지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표정이다.
소희는 부른다. ‘수아야.’ 소희가 수아를 불러 세우려는 듯 입술을 여나, 파르르 떨릴 뿐. 말 한마디 흘러나와 주지를 않는다. ‘수아야, 그러지마.’ 그저 입 모양만이 말을 할 뿐.‘끙... .’ 소희의 신음소리. 돌연 사람들이 수근거린다. ‘아니, 사람이 기절했잖아. 여기 머릴 부딪혔어. 앰뷸런스, 어서.’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에 수아 역시 소희에게로 황급히 뛰어가고. 신랑ㆍ신부가 흘낏. 소란에 뒤를 돌아보나, 그들은 수아의 등에 가려 소희의 얼굴은 볼 수가 없다. 곧 소희가 실려가고,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는 소희의 곁에서 수아, 의식 없는 소희를 붙들고 눈물범벅이다.
종합병원. CT촬영된 환자의 뇌를 바라보며 신경외과 의사.
“코마(혼수상태)입니다만, 두상에는 아무런 외상도 내상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충격으로 깨어나려는 의식에 제동을 거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듯 합니다만. 후. 경과는 차차 두고 봅시다. 일단 환자 분이 깨어나면 신경정신과로 옮기셔야 할 듯 합니다.”
“...... .”소엽과 수아는 밖으로 나온다. ‘탁’ 하고 닫혀진 문. 3일째, 소희는 벌써 3일째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내, 이 자식을. 그냥.” 소엽은 너무나도 분한 듯 격분한 눈동자로 벌떡 일어서고, 수아는 그런 소엽을 한사코 제지한다.
“안돼요. 지금은 누워있는 소희가 먼저예요.” 힘주어 말하는 수아의 눈동자엔 어느덧 눈물이 맺혀든다. 정말이지 사람의 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만 같다.
그날 오후. 소희의 병실. 수아는 죽은 듯 자고 있는 그네의 얼굴을 바라다본다. 봄날치고는 아닌게 아니라 햇살이 스산하다. 소엽은 병실 문을 닫고 나온다. 절망적이다. 휑휑한 복도, 의자에 앉은 채 깍지를 낀 소엽이 고개를 숙이는데. 잔인한 시간은 그저 휑휑히 흐르기만 한다.
밤. 수아가 황급히 병실을 뛰쳐나온다.
“의식이 돌아왔어요.”
“의사 불러.” 간호사와 의사가 급히 들어오고, 소엽은 소희의 손을 꼭 쥐고 있다.
“소희야, 나야, 오빠 알아보겠니?” 소희는 눈을 크게 뜬다, 그러고는.
“여기가 어디야?” 생뚱한 그네의 목소리. 그것이 그네가 건넨 첫 마디였다.
“병원이야, 왜 기억 안나? 너 거기서 쓰러졌었잖아?” 수아가 한마디 거든다.
“쓰러져? 내가? 어디서? 헌데 넌 여기 왠일이야?” 일순 모두들 입을 굳게 다문다. 곧 의사가 처방한 진정제의 효과로 소희는 곧 잠 속으로 빠져드는데. 아니나다를까, 모두들 사면초가라는 듯 얼굴이 굳어있다.
다음날, 소희에게 몇 가지 테스트를 해 본 정신의는 말한다.
“이소희 씨는 역행성 기억상실증입니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충격당시나 그 직전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장애의 일종이지요. 허나 치료를 받게 되면 기억을 돌릴 수는 있습니다만, 환자 본인의 의사가 중요합니다.”
“소희가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소엽이 되묻는 것이다.
“아닙니다, 아직 환자 본인은 모르고 있습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의사는 정신의학, 최면을 통한 단기간의 치료로 잊혀진 기억을 되찾을 마음이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결정을 해야 하니까요. 아직 소희에겐 비밀로 하지요.” 하긴, 의사도 왜 그렇지 않겠냐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상황이 좋지 않다. 기억장애도 병이라면 병이겠지만, 글쎄.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소희의 병실. 소희는 또 잠들어 있다. 며칠 째 링겔로 영양을 공급받고 있었다.
커피숍. 커피 잔을 쥔 수아의 눈이 동그래진다.
“뭐라고요? 하지만”
“아니, 모르는 게 나아, 아니 몰라야 해.” 완고한 목소리.
“하지만”
“그런 부정한 기억을 살려서 뭘 어쩌자는 거지? 상처받고, 방황하고, 그렇게 폐인 같은 시간들이 흘러가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분하긴 하지만, 어차피 그 놈은 기억할 가치도 없는 놈이니까.”
“하지만 행여 만나게라도 되면 어떡할 거예요? 사람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때 받을 충격이 더 클지도.” 수아의 말을 끊는 소엽. 단호하다.
“유학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소희도 유학 가서 공부 더 하겠다고 했으니까 수아 너만 비밀로 해 주면 돼. 집안 식구들도 그냥 쓰러진 줄로만 알지,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으니까. 이 이야기조차도 네 무덤 속에서까지 비밀이어야 해, 그 누구에게라도. 그래 줄 수 있겠니!”
“...... ! 알았어요, 지킬게요.” 소엽의 말에 어렵사리 대답하는 수아의 모습이 파리하게 비춰진다.
한달 후, 초여름의 그 어느 날. 공항이다. 소희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소엽이 부랴부랴 준비한 유학 길에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3년 후, 소엽의 결혼식에 맞춰 귀국한 소희는 결혼식장에 있다. 흘러나오는 피아노의 반주에 신부가 걸어 들어온다. 턱시도를 깔끔히 차려입은 소엽이 신부에게 반지를 끼운다. 신부가 살짝 웃는다. 수아는 소희에게 미안한 듯 하면서도, 결혼의 단꿈에 젖어있는 27세의 올케. 수아의 부케를 받은 소희, 허나 곧 소희는 유망한 건축가로 활동을 시작하고, 이미 삼십대 중반인 지금의 나이에도 ‘일과 함께 사는 여자’로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 놀러오는 여섯살박이 조카와 놀아줄 때는, 영락없는 여섯 살 짜리 꼬마아이가 되지만 말이다.
다시 금요일 밤. 11시. 늦은 술자리에 앉는 김 과장은 빙긋빙긋 알 들 모를 듯 한 미소를 짓는다. 허나 그건 쓴웃음. 김 과장은 서 과장이 건넨 소주잔을 받아 마시며 말을 잇는다.
“오늘 본사에 다녀왔네.”
“아니, 설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辭職書(사직서) 던지면서 다 말해버린 것은 아닐 테지, 안 그런가.” 서 과장, 말을 밭아놓고서 말실수라도 했다는 듯 ‘아차’하는 표정을 짓는다. 자작 잔을 따라 마시며 쓴웃음을 뱉어내는 김 과장.
“자넨 내가 그럴 사람 같아 보이나? 물론 사장이 날 스카웃 형식으로 고용하긴 했지만, 해서 자네 말대로 辭職書(사직서)라도 내면 아마 사장이 해고할 때 그 이유를 물었을 테고, 그럼 이번 일이 어떻게 돌아갔을 지는 말 안 해도 뻔하겠군. 하지만 이보게. 나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굳은 사람이고, 이 차장이 김 부장 물 먹이고 있는 판에, 나까지 부장 물 먹일 필요가 어디 있겠나. 출세 길에 너무 집착해서 그렇지, 그래도 내 상관 아닌가. 사내들이 출세욕에 허덕허덕 대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하긴, 이 바닥에서 일하자면 겪을 일 안 겪을 일 한 두 번쯤은 다 겪게 돼지. 어디 건설업만 그런가, 사회 생활하자면 간 쓸개 다 빼 놓고 해야 그나마 원만하다는 소리 듣는 거 아닌가. 나도 좋아서 이짓 하겠나. 집에 처자식 밥숟가락 놓게 할까봐 이러고 살지. 안 그런가. 아 자넨, 아직 혼자니 잘 모르겠군. 헌데 본사엔 그럼 무슨 일로?”
“한번 다녀와야 할 일이 있었어. 자넨 신경 안 써도 되네.”
“그래도 김 부장이 말이야. 아직 현장 마무리도 덜 지었는데, 자네한테 또 일을 주더군. 진담인지 농담인지 다음 공사에서 한자리 주겠다는 소리도 하고 말야. 후후.” 서 과장은 취기가 돌기 시작하는지 은근히 기분이 좋아 보인다.
“돌아가는 분위기 보니, 시말서 따위 안 써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야. 김 부장이 이 차장하고 술자리라도 한번 할 모양이야. 그렇게 커버할 모양이지.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지. 그래, 옳든 그르든 간에 이게 현실이라는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일세.” 씁쓸한 표정으로 술잔을 드는 서 과장에게.
“그야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겠지. 하지만 현실이 추하다고 해서 다들 개망나니처럼 살아가는 건 또 아니네,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지, 안 그런가?”
“그야 그렇지.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너무 맑은 물엔 고기가 살지 않는 법이야. 그러니 자네도 현실을 너무 비판적으로 바라보진 말게, 자네 혼자만 피곤해지지 그 뉘라 알아주겠나. 자자. 또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흘러가는 군. 자 그 이야긴 그쯤하고 오늘은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이나 마시세 그려.” 서 과장은 얼른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소주잔을 내민다. 적당히 현실에 분개하면서, 하지만 또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면서! 이미 사회생활에 찌든 기성인의 냄새가 적당히 베어 나오는 그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이 사회의 모습인가? ...... !
“내일은 사무실 들렀다 현장 나가게.”
“아니 왜?”
“김 부장이 지금 자넬 애타게 찾거든. 하하하하하하하.” 그에 ‘피식’ 하는 김 과장. 한 밤의 술자리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토요일 오전 7시 반. 김 과장은 회사로 향한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가로수, 여전히 앙상한데.
‘그래, 내 마음 역시 앙상한 뼈뿐이다. 이틀만에 복귀하는 나, 김 명길. 허나 나는 현실에 굴복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 현실을 극복하려 가고 있는 것이다. 새겨들어라.
나 김 명길은, 반드시 왜곡된 현실을 극복하고야 만다는 것을!’
교차로의 푸른 등이 어느덧 붉은 등으로 바뀌는 찰나, 잠시 멈췄던 그의 차가 질주하기 시작한다. 마치 자신 속에 반목하는 또 다른 자신이라는 쿠테타를 정복해 버리기라도 할 듯.
‘그래, 이렇게 나는 복귀한다. 아름답지도 않은, 그렇다고 지독하게 추하지도 않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일상, 그 일상 속으로!’ 마치 자신에게 시위라도 하는 냥 질주하는 김 과장. 열린 차창으로 그의 머리카락마저도 맹렬히 나부끼는 아침이다.
성명 : 김 지 영
성별 : 여
연령 : 24세
주소 : 경상남도 마산시 합포구 산호2동 387-10번지 1/1 (631-482)
이메일 주소 : kissmyredlips@hanmail.net
전화번호 : 055. 222. 7936 / 055. 223. 7958. / 016. 849. 5864.
제목 : 다시 일상이다.
원고분량 : 102매
사방이 깨어진 햇살 투성이다. 10인용 원탁에 구색이라도 맞춘 양 그를 빙 둘러싼 회전 의자, 그 역시 널브러진 햇살은 여전하다. 팔자 좋은 놈들 같으니라고. 어느덧 바야흐로 봄이건만, 이 청춘은 아직도 지난겨울에 시위한다. 제길, 입춘 지난 지가 벌써 언제인데... .
“제길, 겨울 지난 지가 벌써 언젠데 아직도 이 모양들이야? 다들 동아건설 짝 나고 싶어서 그래? 요즘 이 바닥 경기가 무경기라는거 몰라서 이래? 김 부장,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끊임없이 날아드는 저 질책, 이젠 히스테리컬 하기까지 하다.
“그게 저,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공사자금도 회전이 잘 안되고, 무엇보다 공사 일정이 너무 빡빡하게 짜여져 있어서 아무래도 애당초 무리가 아니었나 하고”
“뭐야.” ‘쨍그랑’ 아슬아슬하게 두상을 비껴 지나간 재떨이가 바닥에서 비명횡사를 지른다.
“그게 얼마 짜리 공사인데 미스를 내고 있어? 하루 손해비용이 얼만 줄 그 머리로 계산하고도 이따위 보고서를 올리나? 이 달 안에 마무리 못 지으면, 책임질 각오나 하고 있게.” 임직원 실에서 흔들리는 건 이것 뿐. 머리채를 쥐어 잡힌 양 흔들려보나, 역시 종이일 뿐이다.
“죄송합니다. 이번엔 실수 없이 다시 시정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나가 봐.”
“예.” 허나 자리로 돌아온 김 부장은 울그락불그락 성난 황소 마냥 ‘씩씩’ 가쁜 숨을 밭아낸다.
“내 참, 애당초 무리한 계획을 통과시킨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발뺌이야 발뺌은.”
“네?”
“아니, 누가 이런 거 갖다 달랬나? 왜 시키지도 않은 짓하고 그러나? 도로 가져가게.”
“아니, 전 부장님 생각해서... .”
“아,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아? 도로 가져가.”
“네.” 괜히 애꿎은 아랫사람만 잡는 격인가.
“김 과장.” 다시 그를 불러 세운다.
“네?”
“이거 다시 해 오게.”
“네? 이건 부장님이 이미 결재하신 것인”
“아, 어쨌든 다시 시정해서 보고 올리라면 그런 줄 알아. 지연된 석 달 손해비용하고, 당시 구체적인 지연 명분과 상황이 중요해. 알겠나?”
“그건 이미 결재된 내용에 들어있는 줄 압니다만.”
“아, 글쎄, 전무님 성격 몰라서 그래? 좀더 리얼하게 보고하란 말야. 알았어?”
“네, 그럼 이만.”
“김 과장.” 다시 그를 불러 세운다.
“네?”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 돌아서다니, 자네 대체 정신 어디다 놓고 다니는 사람이야? 응? 그딴 정신상태로 일하니 이 모양 아닌가? 응?”
“...... .”
“앞으로 남은 공사, 이 달 말까지 완성 못하면, 옷 벗을 각오하게. 알겠나?”
“부장님. 경황 뻔히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돌아가는 경황을 아니까 이런 소릴 하지 않나. 긴말 않겠네, 가봐.” 또 역시 괜한 사람만 잡은 격은 아닌 듯도 한데, 혹시 또 괜한 사람만 잡은 격이면 어떡하나.
이놈의 월요병. 햇살이 이토록 눈부신들 뭐하나. 부셔본들 수북한 일감들은 여전한데. 별 뾰족한 수가 없군 없어... 후. 당분간 집과는 담쌓을 수밖에.
전화벨이 울린다.
“네, 전무님.”
“김 부장 좀 오라고 해.”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만, 현장에 계시는데 호출할까요?”
“그래. 5시까지 내방으로 오라고 해.” 더 이상의 용건은 없다는 듯 카랑카랑한 허 전무의 음성은 사라진다. ‘뚜 뚜 뚜... .’
화요일, 그러니까 벌써 만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지난 화요일. 허나 허 전무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군. 이 달 안에 못 끝낼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자네도 제법이야.”
“제법이면 뭐합니까? 몰아붙인 철야 한 달에 망가진 인간이 어디 한 둘 입니까? 보십쇼, 지금 우리 꼴이 어디 사람 꼴인지.” 하긴 보아하니 그렇긴 하다. 제멋대로 자라다 못해 덥수룩하기까지 한 수염은 그렇다 치고, 이발조차 못한 머리엔 언제 감았는지 희뿌연 먼지가 마치 시멘트 포대라도 뒤집어 쓴 사람 같다.
“아 그걸 누가 모르겠나. 우리 일 생리구조 자체가 이런걸. 나도 거짓말 안하고, 지난 한 달간 집 대문조차 못 밟아 봤네. 하는 김에 조금만 더 하세. 다음달엔 보너스도 더 오르잖나.”
“하긴 그런 것도 없으면 정말 살맛 안 나죠.” 김 과장의 대답이다.
“회사도, 직원도, 다 같이 살자고 이러는 거 아닌가. 조금만 더 해 보세. 난 지금 사무실 들어가 봐야되니까, 오늘 일은 자네가 잘 마무리하고. 일 다 끝나면 회식이나 하지.”
“한 번 갖곤 안 되는 데... 한 두 세 번은 해야...하하하.”
“하하하...알았네.”
김 부장의 차가 현장을 떠난다. 백미러에 언뜻 비춰지는 현장, 언뜻 보기엔 완공된 듯 보여지는 건물들. 마치 앓던 이를 뽑아버린 사람 마냥 ‘씨익’.
김 부장은 지난 한 달 중 제법 통쾌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화요일, 그러니까 현장으로 출근도장을 찍은 지 꼬박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지난 셈이다.
“전무님이 찾으신다고?”
“네. 다섯 시까지 전무님 방으로 오시라고 하십니다.”
“그래? 흠.” 김 부장은 사무실을 한 번 ‘휘이’ 둘러본다. 마치 그가 사무실을 비운사이 바뀐 것은 없나하고 확인도장이라도 찍고 싶은 눈길로 말이다. 그러다 ‘멈칫’ 벽거울 앞에서 시선이 멎는다.
“아니, 저건 뭔가?”
“드라이...입니다만... .”
“아니, 사무실에 저게 왜 있는 거지?”
“모르시고 계셨어요? 부장님, 김 과장님, 기사들 현장에서 야근하는 동안, 다른 분들도 야근하시느라... .”말꼬리를 감추는 관리부대리.
“저걸로 머리 감고 말렸단 말이겠군. 아닌가?”
“네. 저... 부장님도 머리 감으시겠어요?”
“흠 흠, 난 됐네.” 화장실로 향하는 김 부장. 거울을 보며 머리를 털어 낸다. 손으로 머리를 가다듬고는 ‘흠, 그래도 생각 보단 제법 재치가 있단 말이야.’ 김 부장은 이 대리가 둘러댄 말이 제법이었다는 듯 ‘피식’ 하고 웃어버린다.
‘흘끔’ 시계를 보니 어느덧 5시. 아직 이른봄이라 이러한가! 5시만 되면 어눅어눅 추운 낯빛을 내뿜던 겨울과는 사뭇 다르질 않나. 걷혀진 블라인드를 뚫고 못다 뿜은 낯의 햇빛이 전무의 얼굴을 비춘다. 그래, 일러도 봄은 봄인 게지.
“아, 김 부장 왔군, 현장에서 바로 오는 길인가?”
“네.”
“흠. 어떻게 돼가나?”
“네. 지금 마무리 단계입니다. 며칠 안에 끝나면 한번 둘러보시지요.”
“흠. 수고했네.”
“그럼 손님이 계신 것 같으니, 전 나중에”
“아닐세, 늦었지만 인사 나누게. 이 쪽은 시공을 책임지는 김 부장이요. 이 분은 설계와 의장은 물론 광고업계의 베테랑인 이소희 부장. 앞으론 건축 설계 사무소는 물론 카피라이터도 외주를 줄 필요가 없게 됐네. 허허허.”
허나 이소희의 얼굴을 본 김 부장의 얼굴은 돌연 얼어붙어 버린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소희예요. 잘 부탁드려요.” 소희가 내민 악수에 마지못해 응하는 김 부장.
“... 잘 부탁하오.” 악수에 응하는 김 부장의 경직된 시선이 소희의 반지에 머무른다.
“허허허. 특기가 많은 사람이요. 경력이 화려하지.” 정말이지 근 한 달만에 들어보는 허 전무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사무실을 울리고 있는 것인 게다.
“무슨?”
“차차 알게 될 거요. 김 부장도 일전에 광고제작에 참가한 경험이 있으니 앞으로 자사 홍보용 광고는 물론 타사 광고오너도 잘 해내리라 믿소. 그러니 광고분야는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줘야겠소. 그럼 나가들 보시오.”
“네, 그럼.” 돌아서다 말고 김 부장.
“헌데 언제부터 출근이죠?”
“일주일 전부터요.” 소희의 대답에 허 전무.
“아아... 자네가 현장에 매여있느라 경황이 없을 것 같아 소개를 미루었던 거네... 자 그만 나가들 보게.”
방문을 닫고 이마에 손을 짚는 김 부장. ‘그럼 스카웃인 게로군.’
“어디 불편하세요?”
“...... .난 그만 가보겠소.” 여전히 소희의 반지에 시선을 멈춘 채, ‘툭’ 무덤덤한 그 음성이 ‘툭’ 쏟아지나,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김 부장. 그의 눈동자엔 어느덧 한줄기 불꽃이 타오른다. 조금 전 현장에서 맛본 통쾌함의 쾌감이 일순 편두통으로 변해 김 부장의 마음으로 집요히 달려들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현장, 누구는 공사 마무리 잘 짓겠다고 아침 여섯 시 반에 출근해서 철야하는데, 이게 또 웬 유도심문인 겐가.
김 과장이 마른하늘을 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뭘 좀 제대로 알아보고 전화하시오. 난 절대 그런 일에 협조한 적이 없소. 에잇.”
‘탁’ 죄 없는 핸드폰의 폴더만 박살이 날 지경이라니.
“제길, 설마 부장님이? 어쩐지 감이 안 좋더라니. 제기랄 재수가 없으려니까 아침부터 지랄들이야.” 김 과장은 낮게 욕설을 지껄인다.
화사한 수요일 아침이다. 허나 유달리 이 아침이 김 과장을 자주 찾고 있는지도.
“네.”
“본사요. 김 부장이 자금을 유용할 목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이 서류를 만들어 준 게 아니요?”
“나 참, 그건 위에서 工務(공무)에 사용될 목적이라고 그 서류를 작성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지, 내가 미쳤소? 난 그런 구린내 나는 일 따위 딱 질색인 사람이야, 이거 왜 생사람 잡고이래?” 급기야 받칠 대로 받치는 화에 이젠 막 반말이다.
“나 원, 이것 보시오. 김 부장이 이미 시인한 일이라니까.”
“아니 대체 뭘 시인했다는 겁니까?”
“공사비 용도의 자금 일부를 流用(유용)했단 사실 말이오. 그리고 당신은 그 사실을 눈치 챘으면서도 서류를 만들고 본사엔 비밀로 한 것 아니요? 알고도 보고 올리지 않는 것은 결국 資金流用(자금유용)을 방치한 책임이 있소. 시말서 정도로 끝내겠소.”
“아니,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시말서를 써? 쓸려면 죄 진 사람이나 쓸 것이지.”
“代身罪(대신 죄) 아니오? 그러기에 알면서 왜 모른 척 덮어두나 덮어두길. 나 원, 또 처음부터 알고 작성한 거라고 시인하면 될 것을, 왜 부인하나 응? 또.”
“아 이 사람 정말 말 안 통하네. 난 서류 작성하라기에 작성하고, 결재 받은 일밖에 없어. 내가 눈치 못 챈 것도 죄가 되요? 뭐, 내가 시말서를 써? 어디다 덤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옆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수군거린다.
“시말서 정도로 끝내는 걸 다행이라 생각하라고. 다행히 큰돈은 아니니까.”
“내가 미쳤어? 억울하게 뒤집어쓰게? 사직서 쓰면 될 것 아냐? 이 현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고.”‘탁’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부장님? 아니 대체 내가 왜 시말서를 써야 됩니까? 네?”
“아, 김 과장 그건 만나서 얘기하지. 거기 있게.”
“아니요, 지금 제가 사무실로 갑니다.” ‘탁’ 옆에서 수군대던 인부들이 하나 둘 흩어진다. 마침 점심시간도 다 됐고, 이런 일은 한 두 번 겪는 일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수저 질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한 세상을 살다가도, 타인은 타인일 뿐이란 겐가!
“제기랄.” 김 과장은 울화통이 터져 버리기라도 할 듯, 성급하게 시동을 건다.
화사한 수요일이다. 허나 사무실은?
“김 과장. 그래 김 과장 잘못이 아니지, 시말서 쓰지 말게나.” 김 과장의 벌건 얼굴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김 부장이 던진 말이다. 순간 멀쑥한 듯 차분해진 김 과장.
“이것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工務(공무) 자금 중 얼마였습니까?”
“흠, 흠. 얼마 안 되네. 천만 단위도 아니고, 달랑 일 백 오십 일세. 후. 나가 보게.”
멀쑥이 대답하는 김 부장을 두고 김 과장은 나간다. 직원 휴게실로 향한다. 담배가 몹시도 고프던 참이었던 것이다.
다시 사무실. 이 차장이 그의 책상에서 전화를 받는다.
“네. ○○토건 이 차장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아직 윗분들은 모르시는군요. 네. 그럼 제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네.” ‘찰칵’
다시 사무실. 김 부장이 그의 책상에서 전화를 받는다.
“네. ○○토건 김 부장입니다. 아, 그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재비용으로 쓰여졌습니다. 하하하, 우리 일이 어떻다는 것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제가 설마 저 혼자만을 위해서 썼겠습니까? 다 직원들 사기 돋구느라고, 예? 아 맞습니다, 물론 자재비용으로 쓰였지요. 하하하. 여부가 있겠소. 하하하.” 통화를 끝낸 김 부장은 서 과장을 불러 몇 가지 지시를 한다. 일순 서 과장의 얼굴에 그늘이 지고, 김 부장의 얼굴 역시 편치 못한 듯 그늘이 지기는 마찬가지다. 화사한 수요일 오후가 그늘지고 있는 마당인 게다.
“여기 있었어?” 직원 휴게실에 들어온 서 과장은 담배를 한 가치 피워 문다.
“응. 젠장, 왜 일이 꼭 무당 선머슴 잡는 식으로 되어가냐? 그렇게 만드는 돌대가리가 대체 누구야? 제길. 현장 일만 해도 눈코뜰새 없이 바쁜데,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게 다 거치적거리네, 젠장.” 평소 서 과장과 김 과장은 밖에선 말을 트고 지낼 만큼 편안한 사이이다.
“이 차장.”
“뭐야?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태우겠나?” 어느새 김 과장의 입가엔 에쎄가 물려 있고, 서 과장은 지포라이터로 손수 불을 붙여준다.
“모르겠나.”
“...말 해 보게.”
“별 거 있겠나, 앙숙인 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격이지!”
“...... !”
“김 부장은 이미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은 사람이고, 이 차장은 그 구멍을 막으려는 사람이지.”
“좀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보게. 대체 두 사람이 일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 중인지.”
“이 일은 본사에선 모르고 넘어갈 일이네. 소위 다른 토건에서 크게 한 탕씩 치는 쓰레기들처럼 몇 천 크게는 몇 억 단위로 자기 호주머니 채우기에 정신없는 놈들, 그런 진짜 쓰레기들 근처엔 근접하지도 못하는 김 부장이지, 그저 코 묻은 용돈 몇 푼이나 챙기는 수준이랄까, 한마디로 진짜 쓰레기는 될래야 그 좁쌀 만한 간으론 될 수도 없는 거고.”
“요점만 말하게.”
“별 거 있겠나, 실권을 누가 잡느냐 그 싸움인 거지!”
“자네 참 답답하군, 이런 상황에서도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는 습관은 여전하군. 난 인내심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야.”
“알겠네. 김 부장의 약점을 수집해 그걸 이용해 김 부장을 갖고 놀겠다는 거지. 김 부장이 회사에 발휘하는 실권을 갖겠다는 거지. 김 부장은 회사에 그대로 세워놓고, 마치 허수아비 조종하듯 움직여 보겠다는 심산 말야. 이것 말고도 여럿 되네. 이 차장이 수집한 김 부장의 구린내 말일세. 물론 본사에선 모르지. 몰라야 하니까. 이 차장이 겉으론 김 부장의 부정을 덮어주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씩 늘어가는 증거들로 김 부장을 갖고 노는 거지. 이 일도 이 차장이 일부러 본사에 정보를 흘려 놓고, 자신의 선에서 헛소문인양 위장하고, 해서 김 부장은 터무니없는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스토리지. 하지만 그건 看山走馬(간산주마)식 스토리일 뿐. 정작 터무니없는 건 쌓여있는 약점을 이용해 이 차장이 이번엔 또 무엇을 달라할지 모르겠네 그려. 자네의 시말서는 이 차장의 만일 대비시 보관용에 불과하고, 그것은 김 부장의 약점 중 하나가 될 뿐인 거지.”
“제기랄. 부정을 계속 저질러온 건 명백한 유죄지.”
“그래서 김 부장이 불쌍한 인간이란 거야. 빼도 박을 수 없는 상황이 어디 한 둘인 줄 아나.”
“하지만 진짜 악질은 이 차장이군 그래, 그렇지 않나?”
“비상하리 만치 교묘한 머리를 가졌지. 아마 사기꾼이 됐으면, 크게 성공하고도 큰집 근처에는 한 번도 못 가볼 인물이 됐을 거야. 내가 가장 경멸해 마지않는 부류의 샘플이라고나 할까!”
“자네 얘기를 듣고 있자하면 큰집 가는 놈들은 그나마 양반출신이군 그래. 우리 상놈들 양반으로 교화 한 번 시켜보면 어떻겠나, 응?”
“아서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것도 모자라서, 기름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려는 것밖엔 안 되잖나. 자네 힘으로 정의 구현이 실현이나 될 것 같은가? 요즘 세상에 그런 理想(이상)은 지나가는 개도 비웃는다네. 그런데 허비할 인생이 남았으면 현실을 위해 사는 것이 낫지.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돈 없고, 백 없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약자들의 현실이지. 서글픈...서글픈 현실... .”
“자넨 서글프리 만치 지독한 현실주의자였군 그래. 게다가 염세적이기까지 한.”
“자네에게 날 이해해달라는 게 아니네. 어차피 자넨 날 이해하지 못할 것이네. 때때로 나 자신조차도 이런 날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까.” 서 과장은 허공을 향해 계속 마른 담배연기 만을 피워댄다. 허공을 응시하는 서 과장의 눈동자가 텅 빈 집 마냥 허전해 보인다.
“정말 그 잘난 얼굴에 사직서랑 돈 일백 오십 만원 확 집어던지고 나오고 싶은 더러운 기분은 굴뚝같지만, 내 잘못이 아닌 이상 그렇게 해 줄 수는 없지. 아직 모르겠네.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인지. 이 사태 역시 마치 남은 삶의 행로를 시험하는 신의 장난 같네 그려.”
“하하하하하하하. 자네도 그런 소릴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군 그래. 뜻밖인 걸.”
“이보게. 극과 극이 통하다 보면 맞닿는 부분도 있는 거지 뭘 그러나. 다 자네 분위기에 전염된 덕택이라고.”
“김 부장이 자네한테 많이 미안해하고 있네. 물론 선택은 자네 몫이겠지. 시말서 역시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야. 생각 잘 하게. 자넬 보면 불안해.”
“뭐?”
“어디로 튈지 모를 탁구공 같다고나 할까.”
“차라리 좀 멋있게 바람 같은 존재라고 해주지 그러나. 응?”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一小一笑(일소일소)에 수요일 오후가 화사하게 익어간다.
임직원실. 걷혀진 블라인드를 통해 내린 오후 3시의 일광마저도 뜨건 시선으로 원탁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김 부장 역시 이소희 부장이 펼쳐놓은 신축공사의 설계도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이건 40동에 3개월에서 6개월 안에 끝내는 작은 규모예요. 또 이건 120동의 일년이 좀 더 걸리는 작지 않은 규모이긴 한데, 아직 디자인이나 설계 면에서조차 많은 분량이 미완성이죠. 어떻죠?”
설계도를 응시하는 김 부장의 눈에 만족감이 떠오른다.
“상당히 정밀하고, 깔끔하군요. 건축 설계 사무소에 일했으면 감리였소?” 이소희나 김 부장 역시 비교적 순탄한 출세길을 밟아온 사람들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리라.
“네. 설계에 시공현장과 감리를 병행했죠.” 30대 중반의 나이와는 달리 무척 앳되어 보이는 여자이다.
“해서 말인데, 규모도 작은 40동은 제가 맡는 것이 어떨까요?”
순간, 김 부장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인다.
“하지만 건축과 토목은 여러모로 틀리지요. 측량 기술자에 물량 조절, 노동력 조절 따위, 현장만 20년인 토목가인 나도 만만찮은 곳이 소음공해 만발한 현장이란 곳이요. 땀의 현장인 그곳들이지. 일이란 건 말이요, 각각의 전문가가 맡은 일만 잘 하면 되게 되어 있소.”
“하지만 일의 능률을 위해서 팀웍은 필수입니다. 팀웍이 깨어지면, 실적은 저조하고, 저조한 실적에 문 닫아거는 회사가 아마 한둘이 아니라 지요? 그럼 이만.”
‘탁’ 이소희는 황급히 챙긴 도면을 들고, 임직원실을 나간다.
“제기랄. 뭐 저런 차가운 여자가 다 있지? 헌데, 이상해. 분명히 안면이 있는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흠. 어째 좀 찜찜한걸. 그나저나.” 갸우뚱거리는 김 부장, 그 때 서 과장이 들어온다. 서 과장은 건축가답지 않게 파리한 안색을 지닌 남자다.
“부장님. 지금 현장에서 오는 길입니다만, 김 과장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현장으로 출근을 안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辭職書(사직서)를 쓸 생각 같아 보였습니다만.” 그래, 벌써 하루가 지난 목요일 오후인 것이다. 김 부장의 눈이 일순 부리부리해진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이 아닌 것은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는 분명한 성격이다 보니, 그간 부장님께 섭섭한 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걸 왜 이제야 보고해? 辭職書(사직서)라니, 그건 안 돼. 아직 현장 마무리도 덜 지은 대다가, 다음 신축시공 때 말뚝박을 만한 사람도 김 과장 만한 사람이 없어. 토목가치고 그간 설계파트까지 함께 담당해왔던 사람도 김 과장 한 사람이고, 이번 공사나 다음 공사 초기 원본 데이터도 이미 김 과장 손에 있어. 잡아봐.”
“설계파트라면 든든한 이 부장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여잔 내 사람이 아니야. 알겠나. 내게 힘이 될 여잔 아니란 말일세. 가서 김 과장 구슬려 봐. 지금공사 마무리 짓고 나면, 내가 다음 공사에서 한 자리 준다고 해. 알겠나?”
“네.”
“나가보게.” 임직원실을 나선 서 과장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밤. 이미 사방은 사위다 못해 캄캄한 밤. 김 부장은 잠든 아내의 곁을 슬그머니 빠져 나와 주방으로 향한다. 그의 식도로 얼음 섞인 알코올이 흘러내린다. 시바스리갈, 그는 언더락 잔을 쥔 채, 빙긋 웃는다. 이 얼마만의 웃음인가. 그의 머릿속으로 불현듯 지난날의 일들이 필름처럼 돌아간다.
“부드럽군.” 또 한 모금의 알코올이 식도를 적신다.
“역시 부드러워.” 김 부장은 가끔 한밤에 잠에서 깨면, 술을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하며 또 그럴 때면, 그럴 때마다 어이할 수 없는 지난날들의 잔재가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이상해. 오늘따라 그 여자의 얼굴이 또렷하단 말야. 안면이 있는 얼굴이긴 한데, 어디서 본 걸까? 흠... .”그러니까 김 부장은 그가 탐탁해 마지않는 이소희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결혼 12년째, 그는 아내가 낳은 외아들과 단란하지만, 풍족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느덧 빈 잔에 알코올을 채운다. 어느새 밤도 취하는지, 사방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그래, 골몰히 생각에 몰두하다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어 버렸단 말인 게로군.
벽시계가 5시로 향해가고 있었다.
아침.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다니. 금요일 아침. 출근길, 차창 밖으로 스치는 발가벗은 가로수. 오늘따라 발가벗은 그들이 유달리 싸늘함은 아마도 자신이 싸늘해서인지도 모르리라.
김 과장은 본사의 출입문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침. 금요일 아침. 어느새 11시로군. 화장실에서 나오던 김 부장은 한 사내와 시선이 마주친다. 좀 체, 단련된 침착함을 잃지 않던 김 부장답지 않게,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는 저 두발 좀 보라지. ‘맙소사’ 하는 표정인 김 부장의 얼굴에, 사내 역시 뜻밖이라는 듯 흠칫! 허나 곧 김 부장을 노려보는 사내의 눈매는 매서워진다. 곧 멱살이라도 잡아챌 기세인양 말이다.
“자네... 이소엽이 아닌가! 나 김 부장 아니, 김한수일세. 뜻밖이군, 여기서 만나다니.”
“나야말로 뜻밖이군, 자네가 이 회사에서 일하다니.” 어느덧 로비엔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아아. 회사에 볼일이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편의를 봐 줄 수 있었을텐데, 아쉽군.”
“하아. 난 자네 따위와 상종할 만큼 한가한 사람 아니네.” 사내의 휙 돌아선 등에다 대고,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김 부장이 터트리는 말 한마디.
“자네 여동생은 그렇지 않은 것 같던데.” 비꼬는 듯한 김 부장의 음성은 곧 사내에게 멱살을 움켜잡히고 만다.
“이 자식이. 똑똑히 기억해 둬. 이미 12년 전, 너란 자식은 소희의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져버렸다는 것을. 소희는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알겠어? 충격 주면 가만두지 않겠다. 명심해.” 김 부장은 풀려난 멱살에 손을 갇다대고, 사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끙... .소엽을 보고서야 소희를 기억해 내다니. 나란 놈은 대체 왜 이런...... 끙”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김 부장, 답답하다.
술집, 하루종일 혼자서 줄담배만 피워대던 김 부장. 허나 역시 조여오는 답답함을 풀 수가 없었음인가. 술집, 김 부장은 빈속에 양주를 들이 붇고 있다. 지금껏 치밀한 계산 하에 살아온 인생이 쫓기는 기분인양,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의 초점 두울. 잃어버린 초점이 술잔 속에 잠겨든다.
“소희. 소희는...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김 부장은 소엽의 말을 그대로 곱씹어본다.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 충격? 충격! 끙.”
“아니 혼자서 무슨 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예요?” 박 마담이 들어오며 김 부장의 말을 되받는다.
“기억상실증이라고.” 이미 반쯤 꼬부라진 혀가 말을 듣지 않는다.
“어머나, 누가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렸대요?”
“내가 사랑했던 여자 말이야... 이젠 날 몰라본다는 거지.” 고삐 풀린 남자의 혀.
“어머나, 가엾어라... 첫사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 기운 빼고 있는 당신도 가여워 보이고... .”
“첫사랑? 후후후. 가여워? 내가? 이 천하의 김한수가? 이것 봐. 그렇게 보고도 날 몰라? 나 양심이라곤 피 한 방울만큼도 없는 놈이야. 내가 얼마나 독종인지 몰라? 그래, 출세 밖에 모르는 독종이란 놈이 바로 나야, 나. 알겠어?” 알아듣기조차 힘들만큼 꼬여버린 남자의 혀.
“호호호. 벌써 취했나봐, 이런 날엔 그저 마셔요, 마시고 나면 다 잊어버리고. 자요.” 박 마담은 또 술을 따르고. 벌써 빈 양주병만 세 병이다.
“그래, 내가 버렸다. 너무 없어서 버리고, 없는 것 없이 다 가진 여자하고 결혼했다, 왜? 학벌, 명예, 돈, 그래, 안 가진 것 없이 다 가진 여자 말야.”
“어머, 왜 그러셨어요?”
“가난이, 암만 해도 벗어날 길 없는 가난이 지겹다 못해 날 미치게 했어. 그렇게 평생을 사느니 나쁜 놈이 되는 걸 택했던 거지. 후후후... 나 나쁜 놈이야... 정말...정말 못난 놈이지... 후후후... .”
“사는 게 다 꿈 같은 거죠. 꿈속에서 깨어나 눈떠보면 죽음 속이고, 그땐 그냥 악몽 꿨다 생각하면 그만이고, 그래도 찜찜할 땐 하느님한테 용서해주십사 회개하면 좀 개운해지고. 어쩌겠어요, 사는 게 내 뜻대로 되는 거였음, 나도 지금 이렇게는 안 살아요. 알아요? 너무 자학하지 말아요. 당신이 그러면 나도 확 죽어버리고 싶어지잖아요. 자요. 마셔요.” 박 마담은 또 술을 따르고. 벌써 빈 양주병만 네 병이 되어버리는데.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술을 마시던 박 마담의 눈가가 젖어들고. 어느새 술에 곯아떨어졌는지, 뻗어버린 김 부장을 빈방으로 옮긴다. 담배를 한가치 태운 박 마담은 나가려다 말고, 김 부장의 이불을 덮어준다. ‘또각또각’ 로비를 걷는 박 마담의 힐 소리가 어쩐지 불안하게 들리는 한밤이다.
그랬다. 12년 전 봄, 소희는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해 있었다. ‘합포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 제 47회 졸업생 친구들.’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진 호프집. 한마당 호프라 했던가. 네온싸인에 더욱, 또렷해지는 밤.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깨고 사회자가 마이크를 넘긴다.
“나 결혼해. 다들 초청할게. 너희들이 와서 축하해주면, 더 행복한 결혼이 될 거야. 주례사는 담임 선생님께서 해 주시기로 했어, 다들 꼭 와.” ‘와아’ 다들 환호성을 올리는데, 어느덧 방긋 웃으며 청첩장을 돌리는 여자, 그러니까 4학년 졸업에 이어, 곧 올리는 웨딩마치인 셈인 게다.
“어머나, 제 명자잖아, 기억 안나? 나랑 단짝이었던 예쁘장한 여자 얘, 우리 동네에 살았잖아.”
“어머, 몰라보겠다 얘. 어쩜 더 날씬해졌는걸. 젠 어릴 때부터 늘 행복해 보였었어.” 소희의 말이었다.
“그랬니? 헌데.” 하며 수아는 돌려진 청첩장을 펼쳐본다.
“일요일 12시? ‘김한수ㆍ최명자’ 어머, 이게 왠일이니? 동명이인이잖아, 봐, 여기 김한수라고 돼 있어. 헌데 네 애인도 김한수잖아, 그지? 어머, 별일이다, 얘.” 하는데, 마침 등뒤에서 수아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최명자.
“어머, 너 수아지? 나 명자야, 우리 한동네 살았잖아. 기억나?”
“소꿉놀이 할 때 내가 의사 하면 넌 환자하고? 어머, 갑자기 왜 그게 기억나니, 얘.”
“호호호호호. 가만, 넌 소희? 맞지?” 어느덧 수아 옆의 소희에게 눈길을 주는 명자.
“응, 오랜만이야, 예전에도 그러더니, 여전히 행복해 보이는구나, 넌.”
“호호호호호. 내가 그랬었니? 참, 모레 결혼식인 거 알지? 꼭 와야 돼. 소꿉친구들이 빠지면 안 돼지. 꼭 와.” 주거니 받거니 주고받은 말속엔 그간의 안부와, 결혼 축하, 꼭 참석하겠다는 약속 아닌 약속 등이 섞여 있고, 그렇게 붙임성 좋은 명자는 친구들을 오가며 마치 결혼식 홍보 나온 사람 마냥 떠들고 있었다. 그늘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발랄한 여자. 최명자, 그네의 결혼식이 불과 40시간 남아있는 순간인 것이었다.
일요일. 가든예식장을 둘러싼 정원의 수풀에서 지저귀는 자. 그 바로 새일지니. 화사한 봄 햇살처럼 화사한 신부의 얼굴엔 어느덧 윤기가 돌고 있다. 신부대기실. 사교성 좋은 수아의 손길에 이끌려 소희도 이미 신부대기실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였다. 인사치레. 하지만 그것도 살아감에 필요한 것이겠지. 소희의 바로 옆에 앉은 수아. 그네들 주위로 동창생들만 서른 남짓이다. 사회자.
“신랑 입장.”허나 그와 동시에 기가 막힌다는 듯 벌어지는 수아의 입.
“신부 입장.” 흐르는 피아노의 선율에 소희는 사시나무 떨듯 떤다. 그네 역시 한수를 보아버린 것이다.
“저, 저, 김한수. 아니 뭐 저, 저런 자식이” 수아는 차마 말을 맺지 못한 채 벌떡 일어서고, 옆의 소희를 잡아끈다. 당황하는 주례사. 허나 주례사는 두 제자가 조용히 나가주기를 바라는지, 아닌지, 거북한 기침 소리를 연신 낸다. ‘에헴. 흠. 흠.’ 예식 홀에서 조용히 나가던 수아, 소희. 허나 돌연 무슨 생각에선지 수아. 신랑신부가 지나간 꽃무늬 길을 밟고 그들에게 다가가는데.
‘김한수ㆍ최명자’는 주례사의 점점 거북해지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표정이다.
소희는 부른다. ‘수아야.’ 소희가 수아를 불러 세우려는 듯 입술을 여나, 파르르 떨릴 뿐. 말 한마디 흘러나와 주지를 않는다. ‘수아야, 그러지마.’ 그저 입 모양만이 말을 할 뿐.‘끙... .’ 소희의 신음소리. 돌연 사람들이 수근거린다. ‘아니, 사람이 기절했잖아. 여기 머릴 부딪혔어. 앰뷸런스, 어서.’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에 수아 역시 소희에게로 황급히 뛰어가고. 신랑ㆍ신부가 흘낏. 소란에 뒤를 돌아보나, 그들은 수아의 등에 가려 소희의 얼굴은 볼 수가 없다. 곧 소희가 실려가고,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는 소희의 곁에서 수아, 의식 없는 소희를 붙들고 눈물범벅이다.
종합병원. CT촬영된 환자의 뇌를 바라보며 신경외과 의사.
“코마(혼수상태)입니다만, 두상에는 아무런 외상도 내상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충격으로 깨어나려는 의식에 제동을 거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듯 합니다만. 후. 경과는 차차 두고 봅시다. 일단 환자 분이 깨어나면 신경정신과로 옮기셔야 할 듯 합니다.”
“...... .”소엽과 수아는 밖으로 나온다. ‘탁’ 하고 닫혀진 문. 3일째, 소희는 벌써 3일째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내, 이 자식을. 그냥.” 소엽은 너무나도 분한 듯 격분한 눈동자로 벌떡 일어서고, 수아는 그런 소엽을 한사코 제지한다.
“안돼요. 지금은 누워있는 소희가 먼저예요.” 힘주어 말하는 수아의 눈동자엔 어느덧 눈물이 맺혀든다. 정말이지 사람의 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만 같다.
그날 오후. 소희의 병실. 수아는 죽은 듯 자고 있는 그네의 얼굴을 바라다본다. 봄날치고는 아닌게 아니라 햇살이 스산하다. 소엽은 병실 문을 닫고 나온다. 절망적이다. 휑휑한 복도, 의자에 앉은 채 깍지를 낀 소엽이 고개를 숙이는데. 잔인한 시간은 그저 휑휑히 흐르기만 한다.
밤. 수아가 황급히 병실을 뛰쳐나온다.
“의식이 돌아왔어요.”
“의사 불러.” 간호사와 의사가 급히 들어오고, 소엽은 소희의 손을 꼭 쥐고 있다.
“소희야, 나야, 오빠 알아보겠니?” 소희는 눈을 크게 뜬다, 그러고는.
“여기가 어디야?” 생뚱한 그네의 목소리. 그것이 그네가 건넨 첫 마디였다.
“병원이야, 왜 기억 안나? 너 거기서 쓰러졌었잖아?” 수아가 한마디 거든다.
“쓰러져? 내가? 어디서? 헌데 넌 여기 왠일이야?” 일순 모두들 입을 굳게 다문다. 곧 의사가 처방한 진정제의 효과로 소희는 곧 잠 속으로 빠져드는데. 아니나다를까, 모두들 사면초가라는 듯 얼굴이 굳어있다.
다음날, 소희에게 몇 가지 테스트를 해 본 정신의는 말한다.
“이소희 씨는 역행성 기억상실증입니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충격당시나 그 직전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장애의 일종이지요. 허나 치료를 받게 되면 기억을 돌릴 수는 있습니다만, 환자 본인의 의사가 중요합니다.”
“소희가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소엽이 되묻는 것이다.
“아닙니다, 아직 환자 본인은 모르고 있습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의사는 정신의학, 최면을 통한 단기간의 치료로 잊혀진 기억을 되찾을 마음이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결정을 해야 하니까요. 아직 소희에겐 비밀로 하지요.” 하긴, 의사도 왜 그렇지 않겠냐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상황이 좋지 않다. 기억장애도 병이라면 병이겠지만, 글쎄.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소희의 병실. 소희는 또 잠들어 있다. 며칠 째 링겔로 영양을 공급받고 있었다.
커피숍. 커피 잔을 쥔 수아의 눈이 동그래진다.
“뭐라고요? 하지만”
“아니, 모르는 게 나아, 아니 몰라야 해.” 완고한 목소리.
“하지만”
“그런 부정한 기억을 살려서 뭘 어쩌자는 거지? 상처받고, 방황하고, 그렇게 폐인 같은 시간들이 흘러가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분하긴 하지만, 어차피 그 놈은 기억할 가치도 없는 놈이니까.”
“하지만 행여 만나게라도 되면 어떡할 거예요? 사람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때 받을 충격이 더 클지도.” 수아의 말을 끊는 소엽. 단호하다.
“유학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소희도 유학 가서 공부 더 하겠다고 했으니까 수아 너만 비밀로 해 주면 돼. 집안 식구들도 그냥 쓰러진 줄로만 알지,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으니까. 이 이야기조차도 네 무덤 속에서까지 비밀이어야 해, 그 누구에게라도. 그래 줄 수 있겠니!”
“...... ! 알았어요, 지킬게요.” 소엽의 말에 어렵사리 대답하는 수아의 모습이 파리하게 비춰진다.
한달 후, 초여름의 그 어느 날. 공항이다. 소희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소엽이 부랴부랴 준비한 유학 길에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3년 후, 소엽의 결혼식에 맞춰 귀국한 소희는 결혼식장에 있다. 흘러나오는 피아노의 반주에 신부가 걸어 들어온다. 턱시도를 깔끔히 차려입은 소엽이 신부에게 반지를 끼운다. 신부가 살짝 웃는다. 수아는 소희에게 미안한 듯 하면서도, 결혼의 단꿈에 젖어있는 27세의 올케. 수아의 부케를 받은 소희, 허나 곧 소희는 유망한 건축가로 활동을 시작하고, 이미 삼십대 중반인 지금의 나이에도 ‘일과 함께 사는 여자’로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 놀러오는 여섯살박이 조카와 놀아줄 때는, 영락없는 여섯 살 짜리 꼬마아이가 되지만 말이다.
다시 금요일 밤. 11시. 늦은 술자리에 앉는 김 과장은 빙긋빙긋 알 들 모를 듯 한 미소를 짓는다. 허나 그건 쓴웃음. 김 과장은 서 과장이 건넨 소주잔을 받아 마시며 말을 잇는다.
“오늘 본사에 다녀왔네.”
“아니, 설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辭職書(사직서) 던지면서 다 말해버린 것은 아닐 테지, 안 그런가.” 서 과장, 말을 밭아놓고서 말실수라도 했다는 듯 ‘아차’하는 표정을 짓는다. 자작 잔을 따라 마시며 쓴웃음을 뱉어내는 김 과장.
“자넨 내가 그럴 사람 같아 보이나? 물론 사장이 날 스카웃 형식으로 고용하긴 했지만, 해서 자네 말대로 辭職書(사직서)라도 내면 아마 사장이 해고할 때 그 이유를 물었을 테고, 그럼 이번 일이 어떻게 돌아갔을 지는 말 안 해도 뻔하겠군. 하지만 이보게. 나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굳은 사람이고, 이 차장이 김 부장 물 먹이고 있는 판에, 나까지 부장 물 먹일 필요가 어디 있겠나. 출세 길에 너무 집착해서 그렇지, 그래도 내 상관 아닌가. 사내들이 출세욕에 허덕허덕 대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하긴, 이 바닥에서 일하자면 겪을 일 안 겪을 일 한 두 번쯤은 다 겪게 돼지. 어디 건설업만 그런가, 사회 생활하자면 간 쓸개 다 빼 놓고 해야 그나마 원만하다는 소리 듣는 거 아닌가. 나도 좋아서 이짓 하겠나. 집에 처자식 밥숟가락 놓게 할까봐 이러고 살지. 안 그런가. 아 자넨, 아직 혼자니 잘 모르겠군. 헌데 본사엔 그럼 무슨 일로?”
“한번 다녀와야 할 일이 있었어. 자넨 신경 안 써도 되네.”
“그래도 김 부장이 말이야. 아직 현장 마무리도 덜 지었는데, 자네한테 또 일을 주더군. 진담인지 농담인지 다음 공사에서 한자리 주겠다는 소리도 하고 말야. 후후.” 서 과장은 취기가 돌기 시작하는지 은근히 기분이 좋아 보인다.
“돌아가는 분위기 보니, 시말서 따위 안 써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야. 김 부장이 이 차장하고 술자리라도 한번 할 모양이야. 그렇게 커버할 모양이지.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지. 그래, 옳든 그르든 간에 이게 현실이라는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일세.” 씁쓸한 표정으로 술잔을 드는 서 과장에게.
“그야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겠지. 하지만 현실이 추하다고 해서 다들 개망나니처럼 살아가는 건 또 아니네,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지, 안 그런가?”
“그야 그렇지.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너무 맑은 물엔 고기가 살지 않는 법이야. 그러니 자네도 현실을 너무 비판적으로 바라보진 말게, 자네 혼자만 피곤해지지 그 뉘라 알아주겠나. 자자. 또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흘러가는 군. 자 그 이야긴 그쯤하고 오늘은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이나 마시세 그려.” 서 과장은 얼른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소주잔을 내민다. 적당히 현실에 분개하면서, 하지만 또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면서! 이미 사회생활에 찌든 기성인의 냄새가 적당히 베어 나오는 그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이 사회의 모습인가? ...... !
“내일은 사무실 들렀다 현장 나가게.”
“아니 왜?”
“김 부장이 지금 자넬 애타게 찾거든. 하하하하하하하.” 그에 ‘피식’ 하는 김 과장. 한 밤의 술자리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토요일 오전 7시 반. 김 과장은 회사로 향한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가로수, 여전히 앙상한데.
‘그래, 내 마음 역시 앙상한 뼈뿐이다. 이틀만에 복귀하는 나, 김 명길. 허나 나는 현실에 굴복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 현실을 극복하려 가고 있는 것이다. 새겨들어라.
나 김 명길은, 반드시 왜곡된 현실을 극복하고야 만다는 것을!’
교차로의 푸른 등이 어느덧 붉은 등으로 바뀌는 찰나, 잠시 멈췄던 그의 차가 질주하기 시작한다. 마치 자신 속에 반목하는 또 다른 자신이라는 쿠테타를 정복해 버리기라도 할 듯.
‘그래, 이렇게 나는 복귀한다. 아름답지도 않은, 그렇다고 지독하게 추하지도 않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일상, 그 일상 속으로!’ 마치 자신에게 시위라도 하는 냥 질주하는 김 과장. 열린 차창으로 그의 머리카락마저도 맹렬히 나부끼는 아침이다.
성명 : 김 지 영
성별 : 여
연령 : 24세
주소 : 경상남도 마산시 합포구 산호2동 387-10번지 1/1 (631-482)
이메일 주소 : kissmyredlips@hanmail.net
전화번호 : 055. 222. 7936 / 055. 223. 7958. / 016. 849. 5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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