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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원-단편소설1(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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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24회 작성일 04-11-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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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못갖춘마디
  

물론 내가 고작 사춘기의 방황도 마스터하지 못한 아직 애송이 계집아이를 면치 못했지만 여중생이 되면서부터 줄곧 내 꿈은 `비인(Wien)’이었답니다. 두런두런 비라도 뿌리는 날이면 노란 우산을 처억 받쳐들고 다뉴브(Danube)강가를 거닐 것이었어요. 타국에서의 잠 못 이루는 어느 날 밤에는 두고 온 머나먼 동쪽 하늘 우러르며 고향 산천(온통 콘크리트로 뒤덮인 회색 도시의 그나마 후미진 암울한 둑방 너머 동네이긴 하지만)도 짐짓 그리워하고 고국에 계신 보고픈 어머니께 길다란 안부 편지도 써보낼 참이었답니다.
비창(悲愴, 차이코프스끼 교향곡 제6번 B단조)의 선율을 아십니까? 모짜르뜨의 방자하기까지 한 기쁨은 또 어떻고요.

그러나 여러분들도 익히 알다시피 세상사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죠. 딱하게도 벌써 열 세 살에 나는 사람이 산다는 게 결코 고상하지 않다는 걸 알아버렸지 뭡니까. 딱한 건 산다는 게 고상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러한 사실을 내가 알아버렸다는 그 사실도 아니며, 그딴 게 뭐 대수냐는 듯 아랑곳 않고 잡초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던 내 열 세 살이었답니다. 둑방 너머 동네의 아이들이란 그랬죠. 일테면 잡균이 창궐하는 진창에서 온몸으로 뒹굴어도 잔병치레 한번 않고 저 혼자 자라나는 게 우리들이었어요. 기대가 없는 만큼 실망도 없었죠.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가 왔다간 가는 거였어요. 그럼 어제보다 요만큼 자라난 거지요. 그러던 언제부턴가 젖가슴이 봉긋하게 부풀어올랐고 이윽고 나는 생리도 시작했지요. `여자’라는 또 하나의 질곡, 하지만 뭐 그것도 대수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아니, 엄마에게 남편은 남편이 아니라 원수였죠. 당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희생이었죠. 대충 짐작하겠지만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어요. 물론 돈벌이는 않는 실업자였고요. 아버지도 나름대로 괴롭고 억울했지요. 그러자니 당기는 게 술이고 들어부으면 밑 빠진 독이고 취하면 만만한 게 자기 새끼고 마누라였죠. 더러는 앙칼지게 대들어보는 언니지만 그런 언니를 꾸짖는 엄마였습니다. 그럼 엉엉 울어버리는 언니였어요. 울음소리가 하늘을 찔러요. 언니의 울음소리는 왜 그토록 크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꾸짖는 엄마가 그만큼 미웠을까요,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미웠을까요? 그러나 언니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미웠을지도 모릅니다. 요것밖에 아닌 열 아홉 살 짜리 계집애... . 아무튼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내 나이 열 세 살이었답니다.
엄마는 여기서 늘어놓기 따분하게도 이것저것 안 해본 것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곤 파출부의 일을 했어요. 언니도 전수(專修)여상을 졸업하고 경리로 취직되어 가계를 도왔죠. 사정은 한결 좋아졌지요. 그 즈음 나는 어엿한 여중생이 되었고요.
그런데 참으로 엉뚱하게도 우리 동네, 그러니까 그 둑방 어귀에 난데없이 피아노교습소란 게 생겨났던 것입니다. 상호도 그럴듯해서 `희망 피아노의 집’이었어요. 피아노라는 악기가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있었죠. 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말로만 듣던 그게 정말로 있어 실제로 보고 만져보기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둑방 너머 동네에 피아노교습소라니요. 어떤 아이가 있어, 복에 겨운 어떤 어린이가 있어 거기서 그 피아노란 걸 배울까요.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았죠. 더군다나 그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는 색싯집이 득시글거려 운집하고 있었지요. 아마도 피아노를 배우겠다던 어떤 계집아이는 피아노는 고사하고 새삼 내려다보니 자기의 몸뚱이가, 아니, 그 아랫도리가 얼마나 훌륭한 자본(資本)인가를 깨닫고 돌아갈는지 모르죠.
그래도 나는 거기가 여간 궁금하지 않았어요. 등하교 길에 느린 걸음으로 힐끔힐끔 훔쳐봤죠. 역시 다 쓰러지는 하꼬방인데 그 판자지붕 처마 한 켠에 서툰 못질로 매달려있는, 그녀(선생님)가 손수 페인트칠 한 게 분명한 밝은 그린 색의 간판, `희망 피아노의 집’. 그 밑으로 유리 미닫이문이 있고 투명한 유리 너머에 새까만 피아노 한 대, 그리고 그 무수히 도열하는 새하얀 건반들... . 한 아이가, 어떤 복에 겨운 한 어린이가 피아노를 치고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죠.
그런데 어느 하교 길에선가, 나는 거기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을까요? 그만 그녀에게 들키고 말았답니다. 선생님한테요. 미닫이문을 열고 그녀가 내게 아는 체를 했어요. 난생 처음 보는데 말이죠. 피아노를 치고 싶냐며 상냥하게 물어오더군요.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뒷걸음질쳤지요. 나는 잘 알죠. 색싯집 여자들이 뭇 남성에게 던졌던 추파들, 그녀의 그것도 그 호객행위에 다름 아니었던 겁니다. 흥-, 그런 일이 있고 나는 더 이상 그쪽에다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죠.
그러나 더욱 엉뚱한 일이 일어났지 뭐예요. 어느 날 엄마가 어처구니없게도 내게 피아노를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글쎄. 오고 가며 엄마도 거기에 자못 신경이 손상을 입었던 거지요. 가뜩이나 썩은 간장인데 별 것도 아닌 것이 엄마를 괴롭혔다는 게 나는 속상했어요. 원래 임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사그라졌으나 자꾸 눈에 보일 때 마음은 여전히 괴로웠잖아요. 임은 헤어질 거면 말없이 깨끗하게 떠나는 게 좋았고 우리 둑방 너머 동네에 희망(피아노의 집)은 어귀에서 알짱거리는 게 아니었죠. 하지만 엄마한테 분연히 피아노를 사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었답니다. 아니, 그날 밤 툇마루로 나와 걸터앉아 교교한 달빛아래 뭇 별들을 헤며, 피아노를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 자신이었답니다. 기어이 눈물마저 찔끔거렸지 뭐예요. 내가 바로 복에 겨운 계집아이였어요. 개천에서 용 났지요. 터무니없이 허튼 꿈은 그렇게 싹을 틔운 거지요.
며칠 후 엄마와 함께 `희망 피아노의 집’을 찾아갔더니 그녀는 아닌 척해도 `그때 말없이 뒷걸음질 쳤던 아이’를 기억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다만 나를 피아노 앞으로 데려갈 뿐이었어요.
`저마다의 사정은 모른 척 덮어둘 것.’
그녀가 용케도 이쪽 특별 구역, 둑방 너머 동네의 특수한 예의 규범을 숙지하고 있었던 거죠. 덕분에 어차피 이쪽에서 그쪽 세계로 넘어가자면 의당 치러야 했던 자존심의 현저한 상처도 얼마간 잊고(외면하고) 그쪽으로 살포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과연 사뭇 다른 그쪽 세계더군요. 겉으로 보아서는 거기도 별 수 없는 하꼬방이었는데 말이죠. 내게는 차라리 신비로웠던 피아노가 바로 내 코앞에 틀림없이 있다는 게 이미 다른 세계였죠. 이제 가까이 다가가 스스로 건반을 두드리면 울려져 나오는 소리는 끝내 가슴 떨리는 경이감이었어요.
정작 그 소리의 상서로움에 눈을 뜬 건 한참 나중이었답니다. 희피집(희망 피아노의 집)은 자그마하나마 최신형 오디오 세트도 구비했죠. 그게 진열품만은 아니어서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별도의 음악 감상시간을 마련해 주었지요. 물론 우리들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연주며 작곡가들이었습니다만 선생님은 그녀 특유의 희망과 나름대로의 치밀한 계획 아래 이런저런 협주곡들을 설명을 곁들여 들려주었지요.
그런 세월이 훌떡 4개월이고 5개월이었어요. 음악도 음악이려니와 위대한 것은 그 시간의 힘이었죠. 차츰 음악이라는 그러한 소리가 표현하려는 환희랄까, 기쁨, 더러는 절망이랄까, 슬픔이 어렴풋 보일랑 말랑 하는 거예요. 눈을 떴다면 샛눈을 뜬 거지요. 소리에서 뿜어지는 광채를 본 적이 있나요? 소리는 다분히 시각적이었어요.
`중학 미술’ 화보를 장식하며 게재된 여러 그림 가운데서 빈센트 반 고흐란 화가가 그린 `해바라기’를 대하고 나는 잠깐 멈칫했죠. 노랑과 주황으로 어지러운 듯 정돈되어 성큼 다가선 해바라기, 그 분출하는 색채의 심포니에서 나는 난데없이 모짜르뜨를 들었지 뭐예요. 높은 채도의 광적이기까지 한 색채의 화려함 이면에 내재하는 슬픔, 그 방자하기까지 한 기쁨,  ...내가 정녕 무엇을 들었다면, 아니, 보았다면 오로라(Aurora)가 이럴까요? 아님 그건 신기루(蜃氣樓)였을까요?
이제 막 사춘기를 맞은 계집아이의 호들갑이며 턱없는 과장이라도 좋아요. 아무튼 선생님은 언제이던가 오스트리아에서 얼마간 체류했던 모양입니다. 그 나라의 수도, `비인’이란 도시에서 보낸 며칠 밤이 그녀로서는 참으로 인상 깊었던가보지요. 걸핏하면 우릴 앉혀놓고 장황하게 그 얘기였으니까요. 다뉴브강에 비라도 뿌릴라치면... , 어느새 꿈꾸는 소녀로 돌변하곤 하던 그녀를 내가 여러 번 목격했답니다.
그런데 그건 나의 꿈이 되고 말았지 뭐예요. 물론 막연했지요. 그치만 꿈이란 게 뭐 다 그런 거죠. 하물며 열 세 살 짜리 여자아이인 바에야.
나는 비 내리는 다뉴브강가를 거닐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란색의 우산을 받쳐들 참이에요. 어느 날 잠 못 드는 밤에는 어머니에게 절절한 안부 편지도 써 보낼 테고요. ...이것이 내 최초의 꿈이었지요.
그러나 우리 둑방 너머 동네 아이들이란 꿈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하든 말든 그 꿈은 그 꿈으로서 이미 훌륭했던 겁니다. 그게 둑방 너머 동네였어요. 거기에 싸질러놓은 게 올망졸망 우리들이었고요. 나는 그런 꿈의 실체를 만져보고 싶기라도 했을까요? 코 묻은 돈을 꼬기 모아 의기양양 시장 통으로 진출해 남몰래 노란 우산을 벌써 뿌듯해하며 장만했지요. 그걸 만지작거리며 나는 정말로 꿈을 어루만지고있었어요. 적어도 꿈이 있다는, 내게도 그 꿈이 있다는 것만은 몸서리쳐지는 절대 현실이었던 겁니다.
물론 어느 날인가 늦은 하오, 우리 둑방 너머 동네에도 드디어 한 두 방울씩 비가 뿌렸고 나는 비 내리는 창가에 바짝 다가가 앉았으되 노란 우산을 부둥켜안은 채 차마 밖으론 나아가지 못하고있었어요. 그러기를 얼마, 제법 굵어진 빗줄기는 타닥타닥 판자지붕을 때리고 어설픈 창문틀 틈새로 빗물은 어김없이 스며 배어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언니의 기척이 어수선한 빗소리 너머로 들려왔죠. 그제야 생각이 미친 게 아침엔 말짱했던 날씨 탓에 우산을 갖지 않고 출근한 언니였어요. 나는 팔짝 놀라 툇마루로 튀어 나갔어요. 그러자니 노란 우산은 여전히 손에 든 채로 이었죠. 언니는 언제나 그렇듯 그늘이 드리운 얼굴로 각박한 현실에 지친 기색을 못내 감추지 못하며 이제 돌아와 쉴 곳, 판잣집 처마 밑에 당도해, 그러나 엄연한 우산을 접고 있었어요. 우산은 오로지 비 맞지 않기 위한 시퍼런 1회성 비닐우산이더군요. 언니가 비 맞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잠깐, 나는 슬그머니 내 노란 우산을, 내 꿈을 뒤 춤으로 감출 수밖에 없었죠.
지금은 내 노오란 우산을 내 높다란 다락방 깊숙이 숨겨 두었답니다. 나 오늘 비록 의기소침하여 다락방에서 무르팍을 세우고 쪼그려 앉았지만 그래도 마냥 신날 수 있는 게 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아직은 새파랗게 어린 나였으니까요.

희피집은 나날이 번창하였지요. 제법 문하생도 들랑거렸고 개중에는 나말고도 복에 겨운 어떤 아이가 있어 또 어딘가에 노란 우산을 감춰둔 눈치지 뭐예요. 내가 그랬듯 그 애에게도 그건 무슨 이유에선지 비밀이었고, 그 애가 모른 척 해준 거처럼 나도 모른 척 해줬어요. 그렇게 모르는 척 시름없는 세월이 흐른 거지요. 어느덧 나는 여중 2학년이 되었어요. 신학기가 되면서 내 삶도 하나의 전환점을 맞았죠.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으면서 그런데도 사무치게 아파 오는 느낌, 그런 찜찜함, 그렇게 생리가 시작된 거예요.
그 즈음 희피집에는 한 남자아이가 새로 등록했지요. 아이는 둑방 저쪽에 산다는데 이번에 중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이라는군요. 그러니까 나보다 한 학년 아래의 이를테면 나한테는 연하의 남자였죠. 그러나 실은 내가 2월 생으로서 아직 일곱 살 때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때문에 어쩌면 그 애와 나는 동갑 나기인지 몰랐어요. 하지만 그걸 실토할 내가 물론 아니었죠. 나는 시치미 떼고 그 애의 어엿한 누나였어요. 그 애도 천진스레 (좀 징그럽기도 한) 누나, 누나를 난발하며 나를 깎듯이 예우하며 퍽이나 잘 따랐지요.
그야 모든 남녀가 그러하듯 처음에는 그 필요 이상으로 서먹서먹하기는 했죠. 그런데 세월이 약이어서 차츰 얼굴도 익고 아직 어린 남자는 술주정뱅이가 아니어서 괜찮았으며 어쩌다 언뜻 나와 마주친 눈길을 지가 먼저 팔짝 피하는 폼이 아직 어린 남자는 착했어요. 못생긴 얼굴도 자주 보니까 귀엽더라구요. 그리고 그 얼굴이 늘 진지한데 그게 날 웃겨줘요. 하루는 참지 못하고 키득키득 웃음을 토해내고 말았지 뭐예요. 뭐냐하면 얼굴이 아니라 이름이었어요. 박병균... , 걔는 또 웬일인지 학급 네에서의 자기의 별명을 스스로 흘렸는데 그게 `박테리아’라는군요. 마침 성씨가 박씨라 맞아떨어진 거죠. 그렇다 치고요, 그러나 한낱 박테리아에게도 희로애락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박병균의 진지한 표정은 자꾸만 나를 웃겨줬죠. 어쨌거나 내가 박병균 앞에서 웃음을 참아내지 못한 사건이 있고 우리는 부쩍 친숙해진 느낌이었어요. 하기는 처음에야 키득키득 웃는 나를 자기로서는 억울하다는 듯 멀뚱 쳐다볼 때만해도 자칫하면 우리의 관계가 앙숙으로 치달을 고비에 직면했죠. 그렇듯 남녀의 관계가 처음에 그 필요 이상으로 서먹했다면 마찬가지로 왜곡되기가 다반사였으며 또 쉽게 상처를 입는 게 우리 또래였으니까요. 하지만 박병균은 이게 다 자신의 업보라는 듯 순응하며 이내 자기도 비실비실 웃음으로써 잠깐의 긴장은 와해됐고 어느새 화해의 국면이었지요.
누나도 누나려니와 희피집에서의 체르니(Czerny) 100번을 치는 저만치 앞선 진도로 나는 박병균에게 감히 넘볼 수 없는 명실상부 누님이었어요. 키도 나보다 작으면 작았지 크지 않았죠. 더군다나 바야흐로 신체의 여기저기에서 은밀한 변화가 도도히 진행 중에 있어 서둘러 암컷의 처녀가 다 되어 가는 우리 여자들에 비해 게네들은 여전히 개구쟁이 때를 못 벗고 수컷은 아직 먼 모범적 소년이었고요. 남녀가 칠 세면 이미 부동석이긴 했지만 그러나 그딴 게 박병균, 아니, 박테리아와 내가 가까울 수 있는 선행 조건이었는지도 모르죠. 내가 누나 이전에 걔는 동생이었어요. 말 잘 듣는, 더러 짓궂은 장난질이지만 여자 애들의 치마를 들추는 따위의 터무니없이 어린 개구쟁이는 이제 아니었고요.
그런데 무엇이 어떠하든 언니의 때 이른 결혼은 내게는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끔찍했던, 그래서 결국 모든 남자에 대한 기억을 언니가 벌서 잊었던 걸까요? 유난스런 어떤 남자가 죽음을 무릅쓰고 히말라야에 등정했다면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살림을 차린다는 게 그 못지 않은 모험이었어요. 그야 그 여자가 평생 독신으로 산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었지만요. 다만 스물 한 살 짜리 여자에게는 그것들을 유예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겁니다.
과연 그 여자의 운명은 다른 여자도 아닌 그 여자가 얼마큼 주인 행세를 할까요? 듣기로는 언니의 남자는 소심하긴 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은근과 끈기의 소유자였대요. 의지의 한국인이랄까요? 적어도 그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요. 남자는 언니가 처음으로 일자리를 얻은 사무실의 말단 상사였다는데 언니가 입사한 이래 지금껏 남자는 언니에게 목을 맸다는군요. 자그마치 그런 나날이 무려 2년여 세월이라는 거죠. 언니는 또 어떤 언니입니까. 구김 없이 해맑아야 했을 동심과 꿈의 성장기는 온통 아버지의 무능력과 포악함, 그 술 주정으로 점철된, 결국 남자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 이하의 것이었죠. 언니에게 사랑이라는 사탕발림의 미명 아래 남자의 접근은 차라리 저돌적 도전이었을 겁니다. 공산당처럼 오로지 쳐부수어 무찔러야 할. 아니나 다를까 언니는 그토록 남자가 목을 매며 달려들던 지난 1년 이상의 세월동안 단 한번의 커피도 마셔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 또한 어떤 나입니까. 그런 언니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요.
그러나 정녕 그 여자의 운명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그러던 어느 날인가, 언니는 지쳐 뵈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는 거지요. 고개를 떨구고 한숨짓는 남자가 자못 안쓰러웠다지만 사실은 언니가 문득 외로움을 통감했는지 모르죠.
그날 퇴근길에 남자는 불량배가 다 되어서 언니를 잡아 끌었다는군요. 언니는 말없이, 말없는 남자의 뒤통수를 응시하며 끌려갔습니다. 그리곤 언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대요. 놓고 가라고요. 남자를 뿌리칠 수도, 소리지를 수도 있었으나 언니는 스스로 삼갔답니다. 남자는 순순히 놓아주었고 놓여난 언니는 분명 자력(自力)으로 남자를 따라 나섰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남자를 따르고있는 자신을 그 나중에 깨달았다지 뭐예요. 그 뜻밖에 외로움도요.
단 한번의 커피를 마셔주었는데 이제 언니는 시집을 갑니다. 그 남자와 한 살림을 차리는 거예요. 엄마가 아버지와 그랬던 거처럼...... .
언니가 결혼 의사를 알렸을 때 엄마는 엄마대로, 나는 나대로 일테면 희비가 교차하고있었어요. 그건 당사자인 언니조차도 그랬으니까 크게 무리도 아니었죠. 트라이앵글처럼 3모녀는 마주 대한 듯 외면한 듯 엇비슷이 앉아 잠시 교착상태에 빠졌어요.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그렇듯 흐르는 물 따라 가는 데까지 가보는 거였지요. 다만 애석한 것은 뛴들 벼룩이어서 남자는 그 역시 지지리도 가난했던 겁니다. 가난이 죄는 아닐진대 그 벌은 가혹했죠. 더러 어떤 세계에서는 벌 없는 죄도 있어 상쇄하자면 다른 세계에서 죄 없는 벌도 있어야 했나보죠? 하여간 어쨌든 이래봬도 가난에는 일가견이 있는 나 아닙니까. 벌써 언니가 치를 죄 없는 벌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나를 슬프게 하였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가난은 죄가 아니었고, 분연히 나는 언니에게 가슴으로부터 축하를 보낼 수 있었지요.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형부(남자)가 아버지만 같지 않길 바랄 따름이었습니다.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어요. 언니는 웨딩드레스 따위에는 미련도 갖지 않았지요. 산다는 게 뭔지 아는 언니였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발등 찧는 현안은 이쪽에서의 이별이었습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었어요. 언니가 새로 삶을 꾸릴 터전은 그 도시의 저쪽 외곽, 달리 조성된 둑방 너머 동네였거든요. 둑방 너머 동네란 게 고만고만해서 이쪽과 저쪽은 얼추 사촌쯤 돼 보였지만 도시를 동서로 가로지른 그 거리만큼은 만만찮았어요. 저 현란하게 번쩍이는 도시 한 가운데를 관통하자니 거리(距離)는 그 실제의 길이보다 더 길었는지 모릅니다. 그 거리가 우리들 이별의 거리였죠.
생각보다 이별은 중대했습니다. 생각보다 3모녀는 끈끈한 정으로 얽매여 있었던 거예요. 자매도 그렇거니와, 어떤 모녀인들 헤어진다는 일이 생각마저 간단했을까요. 돌이켜보면 다 엊그제 같다고는 해도 흐른 세월이 20년이 넘다보면 강산조차 두 번 변하지 않았던가요. 하물며 사흘이 멀다하고 울며 지샌 밤들하며 오직 `먹고사는’ 거대 이슈 아래 모든 여타의 쟁점은 `배부른 소리’로 낙인 된 오명(汚名)의 세월, 궁색할수록 못 다한 정은 서로가 깊어만 갔지요. 실상은 아직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했는데 느닷없이 헤어져야 한다니요. 이렇게 끝장내야 하다니요. 그것이 우리 3모녀의 끈끈한 정이었습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죠. 결국 언니는 떠나고 말았어요. 몇 번이고 자꾸만 이쪽을 돌아보면서요. 그러나 엄마는 이제 그만 뒤돌아보고 어여 앞으로 쌩쌩 나아가라는 거예요. 당신은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언니는 극단적 진퇴양난에 빠졌으나 형부가 어깨를 감싸주자 진정 이쪽으로는 작별을 고하고 점점 작아져 사라져갔습니다. 떠나는 언니나 보내는 엄마나 지난 세월일랑 가슴속에 묻어두고 새 날의 새 희망의 두레박질이었죠. 아침 햇살에 하염없이 반짝이며 찰랑찰랑 넘쳐나던 샘물처럼 모름지기 미래는 부디 찬란하며 충만 되길... , 그래도 공공연히 기대가 되는 건 우리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 미래라는 세계였으니까요. 슬퍼하기에 아직 이르지 않았을까요?

희피집 또한 괄목할만한 하나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어느덧 2학년도 제 2학기로 접어들면서 가을도 성큼 다가와 흐드러졌죠. 가을의 이미지는 성숙, 결실, 일련의 풍성함으로 대변되었으나 그건 또 퇴색, 쇠퇴, 결국 몰락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지요. 가을이면 곧 겨울이었으니까요.
그 즈음이었어요. 희피집에 묘령의 색시(?) 두 명이 출현했던 거예요. 어젯밤 피에로처럼 차라리 익살맞던 화장은 말끔히 지워졌고 금박물린 깨끼저고리랑 아가씨 마음씨 같은 열 두 폭 치말랑은 차려 입지 않았어도 나는 대번에 이 여자들이 그 엎어지면 코 닿을 데서 온 색시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죠. 그것이 내 이쪽에서의 잔뼈 굵은 관록이었죠. 그러나 실은 화장 않고 옷 바꿔 입고 나니 잘 돼서 우리들의 언니 또래나 될까 말까한 그녀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두 명의 보통 여자이더군요. 화장기 없는 색시의 멀쩡한 얼굴에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과 회한, 그리고 부끄럼마저도 잔재하는 또 하나의 안타까운 우리들의 언니였어요. 그들이란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제 3의 성(性)으로 믿고있던 내게는 뜻밖에 희망이자 다음 순간 여지없는 절망이었지요. 더군다나 그들이 희피집의 미닫이문을 어렵사리 밀치고 나타났던 겁니다.
그런데 색시들이 어인 일로 희망 피아노의 집을 다 찾았을까요? 어쩌면 학원(學園)가에서 그들이 발붙이지 못하고 축출됐던 거처럼 여기에서 희피집은 불허한다는 자기들의 합의된 입장을 명명백백 표명하려는 모처럼 외출인지도 몰랐죠. 공생하기 위해서는 악어와 악어새가 그랬던 것과 같이 서로의 이익이 교환될 때 가능했으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악어새는 악어의 좋은 먹이 감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색시들의 합의도 다소간 일리가 있었어요. 어쨌든 학원 가에서 그들을 축출했던 건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다행이게도 색시들은 그 점에 있어서 너그러웠지요. 뿐만 아니라 그 밤의 위용은 온데 간데 없고 잔뜩 풀이 죽어서는 글쎄, 색시들이 피아노를 배워보겠다지 뭐예요. 난감이라 할까요, 곤혹이라 할까요? 색시는 색시다워야 했거든요. 선생님도 `희망’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이 둑방 너머 동네에 피아노의 집을 열었을 때에는 무슨 남다른 대단한 취지도 있었나보지만 사태가 사태이니 만큼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더군요. 난감이거나 곤혹스러움을 감추기에 급급했어요. 희피집에는 잠시 숨막힐 거 같은 침묵이 흘렀어요. 박병균은 어땠냐하면 공연히 주변을 알짱대며 바지주머니에 죄 없는 손을 찔러 넣었다가 뺐다 했어요. 호기심이 발동하는 게지요. 색시는 박병균에게 또 다른 별도의 도전이었는지도 모르죠. 나는 박병균도 아닌 박테리아에게 다가가 알밤을 먹이려다 참았지요. 내가 그렇듯 그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을 테니까요. 물론 선생님이, 희피집이 색시를 거부하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다만 외부의 충격에 잠깐 움찔했을 뿐이죠. 그런데 색시들은 굳이 덧붙였지요. 피아노는 여학생 때 꿈이었노라 고요. 여학생, 꿈... , 그랬습니다. 색시들에게도 한때 꿈꾸던 여학생 시절이 있었던 거예요. 지금은 아스라이 멀어져 간 그 시절, 그 꿈을 얘기하며 못내 쑥스러운 듯 희미하게 미소 짓는 색시의 화장독 오른 얼굴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높다란 벽을 쌓은 그 너머에 두고 동정을 살피며 염탐하며 때론 총질이며, 엄폐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대치했던 적군이 막상 벽을 허물고 보니 사무치는 우리 편, 아군이었던 겁니다. 더욱이 헐벗고 상처 입은 채 고립되어 구조를 요청하는.
색시들은 다음 날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희피집을 떠났습니다. 선생님은 손꼽아 기다리겠노라고 굳이 문밖까지 배웅했어요. 색시들의 돌아서던 뒷모습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리지 않았냐는 회의이거나 언감생심의 자책이 배어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요. 다음 날에 그녀들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꼭 돌아오고 말리라는... . 박병균이 제법인 게 제 깐에도 색시들이 자못 애석했던 모양이죠? 그도 예의 색시들의 귀추에 주목하며 아무쪼록 여자가 잃어버렸던 꿈을 뒤늦게나마 되찾게 되길 전폭적으로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영악한 박병균이었죠. 그렇게 색시들이 왔다간 돌아가고 보름쯤 지났을까요, 날은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어요. 그녀들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고 덧없는 가을만 깊어갔어요. 귀뚜라미는 무엇이 그토록 서럽기에 밤새워 울어대는지요. 이제는 타성이 되어버린 울음입니다. 그 가을에 부쩍 엄마는 불면증에 시달렸어요. 언니가, 당신의 큰딸이 남기고 간 빈자리가 너무 컸을까요? 이리저리 뒤척이며 엄마도 울고있었는지 모르죠. 그러나 나는 잘 압니다. 귀뚜라미의 울음이 그랬던 거처럼 당신의 슬픔은 이제와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것을, 타성이 되어버린 슬픔이었지요. 그렇게 가을이 가면 겨울이 닥쳐올 것입니다. 여느 해가 그러했듯. 그러니까 색시들과 관련해서도 섣부른 속단은 말아야지요. 그래봤자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걸요. 모르긴 몰라도 어떠한 경우든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그걸 기다려주는 건 우리 몫이었습니다.
그날 박병균은 도무지 내가 알고있는 박병균이 아니었죠. 내가 희피집에 도착했을 때 걔는 이미 반복연습을 마치고 있었어요. 내가 연습일 때는 집에 갈 생각도 않고 책가방을 부둥켜안은 채 한쪽에 쭈그려 앉아 있더군요. 쟤가 왜 저래? 나는 뒤통수에도 눈이 있었을까요? 나는 피아노를 치며 그렇게 꼼짝 않고 있는 박병균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윽고 내가 연습을 마치고 희피집을 나서자 걔는 나를 따라붙었지요. 그리곤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지 뭐예요. 나는 박병균이 건방졌지만 소년의 얼굴은 때아닌 비장함도 불사하고 있었어요. 나는 별수 없이 그와 함께 둑방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죠. 서로 말없이 얼마를 걸었을까요. 뉘엿뉘엿 둑방 저 너머 가을 하루해는 발갛게 저물고 있었어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던 소년은 갑자기 멈춰 서며 가로막고 나를 똑바로 응시하더군요. 얘가 왜이래...? 저무는 노을 빛에 물들어서인지, 아님 실지 부끄럼에 상기되어서인지 소년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지요. 그 두 눈은 반짝, 주황 노을 빛을 반사했던 것도 같아요. 아무튼 나는 박병균에게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는 형국이었어요. 소년은 무엇을 음모하는가? 얘가 감히 누나한테 뭘 어쩌자는 것인가!
남자의 미적거림은 못 이기는 척 기다려주던 여자의 자존심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힐지 몰랐죠. 나는 오히려 히스테리성 짜증을 부리며 박병균을 밀치고 막 나아가려는 참이었어요. 그제야 소년은 지 책가방을 풀어헤치더군요. 그러자 그 책가방 속에서는 요술처럼 한 다발의 장미꽃이 나왔습니다. 꽃은 마침 농밀한 저녁 노을을 머금고 한층 심홍(深紅)으로 빛났습니다. 그러나 꽃은 웬 꽃이죠? 소년은 비죽 내게 그걸 내밀었어요. 생일이야 벌써 지났지만 박병균이 내게 내 나이만큼 장미 송이를 바친 다는군요. 하지만 문제는 헤아려보니 장미는 열 네 송이였던 겁니다. 박병균이 알고있는 내 나이는 열 다섯 살이었는데 말이죠. 나는 마지막까지 시치미를 떼고 모자란 장미 한 송이를 지적하며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오히려 점잖은 목소리로 왜 나이를 속였느냐고 누나한테 힐책이더군요. 그때까지도 나는 어이없다는 듯 난색이었죠. 그나저나 얘가 그 비리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러나 얘가 A란 방법으로 알았는지 B란 방법으로 알았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어요. 중요한 건 이미 얘가 그걸 알아버렸다는 그 사실이었지요. 어쨌든 이것으로써 실각처럼 나는 박병균의 누나는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자가 여자에게, 이제는 엄연한 동갑내기의 여자에게 꽃을, 꽃도 장미꽃을 바칠 때에는 다 꿍꿍이속이 있었죠. 모를 게 사람 속이라지만 또 빤한 게 사람 속이지요. 결국 박병균은 내게 친구가 되고싶다는 둥, 상투적 데이트 신청이더군요. 그렇게 나는 박병균에 있어 손위 누나에서 어느 날 친구로 전락했던 겁니다. 그러나 기분은 묘했어요. 의당 내색은 않고 다만 받아들었던 장미 다발을 도로 내밀었지만요. 그리고 까불지 말라며 일축해버렸고요. 하지만 이미 열 네 살의 쿠데타는 봉기했던 겁니다. 각설하고, 일축해버림으로써 초기 진압은 된 걸까요? 그러나 그건 미봉에 지나지 않았어요. 어쩌면 혁명은 대세였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열 네 살이 그랬어요. 그 전환의 격동의 혼란기... .
하늘은 점차 어둔 갈색으로 뒤덮여가고 있었습니다. 별들은 비로소 칠흑 속에서 실낱처럼 총총 빛날 테지요. 열 네 송이 장미꽃은 아직 내 손에 있었습니다. 나는 박병균에게 생각할 시간을 요청했죠. 허나 필요한 건 생각이 아니라 그저 시간인 느낌이었어요. 소년은 교두보는 확보한 계산이 섰는지 순순히 나의 제의를 받아들이더군요. 소년을 돌려보내고 나는 마저 둑방길을 걸었습니다. 결국 서쪽 하늘 나라는 칠흑으로 멸망해갔습니다. 실낱처럼 별들이 총총 빛날.
나는 실로 거울 앞에 섰죠. 거울 속에 내 얼굴은 얼마나 낯이 익습니까. 그러나 나는 처음 거울 앞에 섰는지 몰라요. 마침내 거울 앞에 선 열 네 살 짜리 계집아이였어요. 거울은 언제나 그렇지만 벙어립니다. 거울 속에 나도 벙어리예요.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죠.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아도 연방 입만 뻥끗거려요. 가련한 생각이 들죠. 쟤가 나 맞긴 맞아요? 찬찬히, 자세히 어디 예쁜 구석을 찾아봅니다. 박병균은 쟤의 어디가 예뻤을까요?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쟤의 어디 한 군데 예쁜 구석을 찾지 못하고도 그런 박병균이 있어 모름지기 나는 예쁘지 뭐예요. 쟤가 그런 자신이 민망하고 쑥스러운 듯 거울에서 사라지기까지 나는 미적대며 거울 앞을 뜨지 못했습니다. 하늘 나라는 어두워서야 비로소 별들이 소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처럼 반짝였어요.

그리고 겨우 사나흘이나 지났을까요, 그 가을이 채 가기도 전에 엄만 돌아가신 겁니다. 산목숨이 산목숨이 아니단 말씀은 바로 당신의 말씀이었죠. 불과 달포쯤 전, 멀지도 않은 옆방 아주머니가 하루 밤새 세상을 뜨자 엄마는 오히려 담담하여 그렇게 누구 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었지요. 산목숨이 산목숨이 아니라고, 푸념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시내버스간에서 당신은 쓰러졌어요. 버스가 급정지했거나 급커브를 틀었던 것도 아니래요. 그저 엄마는 저 혼자 쓰러졌던 거예요.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병원에 도착도 하기 전에 엄마의 숨은 끊어졌다는군요. 언니가 먼저 영안실에 당도해 있었습니다. 그녀는 홀몸도 아니어서 부석한 얼굴로 그토록 헉헉대며 울지만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어요. 나는 슬퍼할 수조차 없었던 거죠. 허무하고 기가 딱 막혀왔습니다.
당신의 잠든 모습에는 주름진 골골 마다 여전히 수심은 깊어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놓아버리고 한없이 평화로웠어요. 그러나 우리가 죽은 이만 못하다고 짊어지고 가던 불행이 이제와 얼마나 가슴 벅찬 행복인지를 통감합니다. 여하한 아직 살아있었으므로...... .
언제나 때는 늦어있지요. ...그러나 여기서 더 이상 엄마의 죽음에 관하여 구질구질 얘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그것으로써 나는 우리 둑방 너머 동네를 그만 뜨게 되었던 겁니다. 언니 네로 들어가 살게 되었어요.
내가 태어나서 엄마가 돌아가시기까지, 내 똥 기저귀가 마당 하나 가득 널려 나부끼고부터 내 사용된 생리대가 구겨져 버려지기까지, 울고 웃고 지나온 십 수년 세월동안 좋았던 시절도 없지야 않았건만 이제나저제나 기필코 헤어나야만 했던 한 구렁텅이, 그러나 훌쩍 떠나기도 만만치 않더군요. 그 몸쓸 놈에 정이었어요. 값싼 향수가 발목을 잡지 뭐예요. 철부지 투정질처럼 앞 뒤 없이 떠나기 싫었어요. 미우나 고우나 여긴 내 동심의 고향이었으니까요.
희피집은 더욱 그러했지요. 거긴 내 동심의 오아시스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요. 그러나 도약을 위해서 일단의 단절도 불가피했습니다. 근데 박병균은 어쩌죠? 아직 그에게 확답을 주지 못했는데요. 결국 내 결론은 `그저 헤어짐’이었어요. 우회하는 얼버무림, 어쩌면 그것이 우리들의 최선책이었는지도 몰라요. 아직 우린 어리니까요. 박병균도 더는 추궁하지 않더군요. 열 네 살의 쿠데타는 그렇게 미완인 채로 일단락 되었죠. 박병균은 그 미완의 미학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색시들은 또 어떠합니까. 이쪽으로는 그리곤 그만이었어요. 시간은 아직도 덜 흐른 걸까요? 그래요, 썩지 않고 좀먹지 않는 게 시간이니까요. 아무쪼록 내가 여길 떠난 뒤, 그 언제인가 색시들은 희피집으로, 그녀들의 잃어버린 꿈을 찾아 돌아올 거예요.
물론 나는 나의 꿈, 내 높다란 다락방 구석의 감쳐둔 노오란 우산을 어련히 챙겼습니다. 길다랗게 안부를 여쭐 엄마는 이제 없어도 다뉴브강에 보슬비는 뿌릴 테니까요. 그 축축함을 머금는(선생님의 회고에 의하면) 비인 특유의 우울한 서정적 풍치 또한 알뜰히 보전될 테니까요. 그리고 비창의 서글픈 선율과 모짜르뜨의 E b(flat)장조의 방자한 기쁨조차도.

마지막으로 나는 오랫동안 궁금하던 못갖춘마디를 선생님에게 여쭸어요. 못갖춘마디란 그 노래의 첫마디와 끝마디가 합쳐져서야 온전한 한 마디가 되는, 그러니까 반쪽으로 시작해서 반쪽으로 끝나는 그야말로 못 갖춘 노래였죠. 내가 궁금한 건 그런 음악적 해석은 아니었어요. 그것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문이었죠. 내가 완벽주의는 아니더라도 구태여 불완전을 자초할 이유는 하등 없지 않은가요? 내가 물었을 때 선생님은 다만 그 못갖춘마디의 다른 이름, `여린내기’를 일러주었어요. 그리고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려다간 그만 두는 눈치였지요. 이내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듯 급선회하며 말머리를 돌렸죠. 하지만 어쩌면 선생님은 아직 그 연장선상에서 얘기를 계속 하고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일종 그녀의 고백이었어요. 이제는 내가 뜨려고 하는 여기, 이 둑방 너머 동네가 실은 선생님의 고향이라는 겁니다. 미우나 고우나... . 꼭 나만할 때 선생님도 여기를 떠났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지금 여기에 다시 돌아와 있었던 거죠. 꼭 나만할 때, 여기 둑방 너머 동네를 떠나며 그녀의 꿈은 뭐였을까요? 여기에 다시 돌아와 이렇게 피아노교습소를 차리는 거였을까요? 그토록 소녀처럼 다뉴브강을 얘기하던 그녀였는데요. 그렇담 나도 먼 훗날, 여기에 다시 돌아와 피아노교습소를 안 내란 보장도 없었죠. 정녕 그녀는 왜 하필 여기 둑방 너머 동네에, 우리가 기어이 헤어나야만 했던 구렁텅이로 다시 돌아와 희피집을, 희망 피아노의 집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그러나 선생님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만 여길 어서 뜨라고 내게 독촉이었어요. 나는 내몰리다시피 희피집을, 꿈에 `희망 피아노의 집’을 나섰습니다. 물론 선생님 어깨 너머로 껑충한 박병균도 나를 배웅하고있었지요. 바보처럼 소년은 끝내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말더군요.
`그래, 그냥 거기 있어. 아무 말 없이... , 너도 그 미완의 미학을 알지? 그 여운의 못 갖춘 아름다움을. ...그럼, 선생님 안녕히. 박병균, 아니, 박테리아도 안녕! 그리고 한 구렁텅이, 내 동심의 둑방 너머 동네도...... .’
그리곤 언니 네에서의 내 희망찬,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새 생활을 시작했어요.
이쯤으로 끝내려고 합니다. 별로 유쾌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얘기를 장시간, 끝까지 경청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은이 ; 오동원      
         주소;서울 종로구 홍지동 69-1 완성빌라 1-302
           전화;02)395-4622
           e-mail;novelrroris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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