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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원-단편소설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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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18회 작성일 04-11-16 09:55

본문

단편소설
나는 현정이와 잤다.


   어느 마을이든지 사람들이 모여 아옹다옹 살다보면 크고 작은 일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보다 큰집에서 보다 부자로 살고싶었지만 큰집이란 대개는 높다란 울타리 너머에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다른 큰집하고는 적어도 너덧 집은 살림을 차리고도 남았음직한 맨 땅을 놀려두고 떨어져있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은 몰라도 조용한 만큼 심심했고, 어떤 교분이 오고 가는지 잘은 몰라도 떨어진 만큼 사이는 멀었다. 사이가 멀지 않으면 친했으며 심심하지 않으면 재미있었다면 도리어 사람 사는 맛은 이쪽에 더 있었다. 크고 작은 일, 심지어는 낯뜨겁게 불미스런 일조차도 나중 돌아보면 지지고 볶고 사람 살아가는 맛인 바에야.
내가 새로 짐을 푼 집도 4층 짜리 다세대 주택이었다. 건물은 각 층마다 두 집이 살림하도록 설계됐고 그 맨 꼭대기 층에는 있어 나쁠 것도 없었으나 없어도 그만이었던 덤처럼 방 한 칸일망정 또 한 살림을 하기에 손색없는 옥탑이 얹혀있었다. 이럭저럭 아홉 세대가 저마다의 역사와 사연으로 둥지를 튼 군상(群像)이었다. 아직 아이도 없고 혼인신고나 제대로 했는지 의심스러운 젊은 커플로부터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이 지긋한 중년 부부까지, 3층에 노총각 아들과 함께 홀아비가 냄새 풍기며 사는가하면 그 아래층에는 과년한 딸과 티격태격하며 과부가 살았다. 지하도 아니었으나 1층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맨 아래층에는 무슨 사연인지 학령 이전에 아이를 키우며 사는 노부부와 이웃하며 얄궂게도 아직 늙지도, 그렇다고 젊지도 않은 불임부부가 살았다. 4층에 아무래도 그 불장난처럼 보이는 아직 부부라기엔 미심 적은 데가 있는 젊은 커플과 나란히 현정이네가 살았고 옥탑 방에 내가 혼자서 기거했다. 일테면 현정이네가 그 아홉 세대의 평균값이랄까? 부부는 불임부부와 얼추 같은 연배였으며 그들의 큰딸인 현정이가 올해로 초등학교 4학년 이랬고 현정이의 남동생은 또 노부부가 키우는 아이와 거의 엇비슷한 나이였다.
무엇이 마흔 줄에 들어 혼자 사는 남자를 힘들게 하는가. 이(蝨)가 서 말이라서 힘든 줄 알았다. 하루 세 때, 번번이 끼니 챙겨먹기도 쉽지 않았지만 어려움은 뜻하지 않게 보다 고상한 데에 있었다. 앞에서도 언질 하였거니와 큰집이 싫고 부자가 싫었던 건 결국 사람은 사람 안에 부대껴 살며 도리어 사람 사는 맛을 알겠기 때문이었다. 스무 살 시절처럼 하필 당신이 좋지 않고 사람이 좋았다. 그래, 나는 미운 여자도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최소한 용서는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안에 섣불리 나를 초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보편 타당하지 못한 것은 경계하라. 혼자 사는 중늙은이 남자를 경계하여 마땅했다. 현정이 또래의 아이라면 모를까, 경험이 가르친 대로 경계했던 만큼 짝사랑의 서글픔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이 모르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내가 슬픈 것만은 아니었다. 모짜르뜨의 G단조는 슬픔보다 슬픈 이상한 기쁨을, 기쁨보다 기쁜 이상한 슬픔을 전하고 있었다. 슬픔이 이미 슬픈 것만은 아니었다. 어둠이 내려앉는 초저녁 무렵이 그랬다. 옥상 난간에 걸려 붉게 타는 놀을 바라보자면 나의 슬픔은 기쁘기조차 했다. 해가 완전 꺼지고 둥글게 보름달이 떠올라도 나는 기쁜 듯이 바라보았다. 달이 좀 찌그러져도 상관없었다. 달은 철학 없이 미친 상업주의가 판치는 서울 하늘에 이제 더는 토끼가 방아찧지 않았지만 떠난 지 오랜 가물가물한 임의 얼굴의 기억을 되살렸다. 병이라도 들었는지 창백해도 당신 얼굴 다시 본다는 게 어딘가. 그때처럼 빛나지는 않을지언정 별들도 드문드문 희미하나마 김밥 싸들고 소풍 나왔다. 저희도 그 시절을 못 잊어하며 온 몸으로 반짝였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별 보며 했던 무수한 맹서들, 저희가 사랑의 요지부동한 증거였다.
옥상은 도시가 만든 또 하나의 공간이었다. 도시는 철저한 실용주의에 한 치의 땅도 남아나지 않았지만 사실은 거의 그만한 크기로 남겨진 공간이 옥상이었다. 나무 대신 TV안테나가 숲을 이루고 전깃줄에 참새들이 쉴새없이 들랑거리며 고단해도 거기에는 거기 나름의 정서가 있었다. 고향을 등지고 뿌리가 잘려 나간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어 비록 갖은것 적고 하는 일 사사로웠으나 저마다의 가슴속엔 금의환향의 꿈으로 가득 찼다. 때때로 가벼운 몸짓으로 웃고 즐겨도 결코 가볍지 않았으며 남모르는 애환도 삭혔고 누군가 불어 주는 하모니카 소리에 향수도 달랬다. 이리저리, 한해 이태 살다보면 타향살이에 이골도 나고 발목 잡혀 뜨기도 쉽지 않은 게 도시였다.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의 군상이 또 서울이기도 했다.
아니나다를까, 옥신각신하더니 이 저녁도 현정이네 부모는 부부싸움이었다. 내일 날만 밝으면 갈라설 것처럼 칼날은 시퍼렇게 날카로웠지만 베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물이었다. 그들은 사랑하고있구나, 나는 알고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아내는 일찍 돌아오길 당부하며, 어쩌면 애교도 좀 섞어 남편을 출근시키리라. 그쯤은 현정이도 이미 알고있는 눈치였다. 우리 나라 정치가라면 초등학생도 염증을 느낀다고 해서 우리 나라 초등학생을 영악하다 하지 말라! 현정이가 영악해서가 아니었다.
` ...엄마, 아빠, 날 새면 얼굴 바꾸는 변덕, 한두 번도 아니고... 내가 뭐 바본가요... .’
새털구름이 떼지어 몰려오고 따가운 해가 유난히 눈부시던 어느 가을날, 옥상에라면 의례 있는 주워온 나무로 뚝딱거려 만든 긴 의자에 걸터앉아 나는 오후의 나른함과 싸우고있었다. 옥상으로 현정이가 살짝 올라왔다. 층계를 타고 무심코 올라와 맨 처음 나를 발견했지만 얼른 고개를 돌려 난간 쪽으로 갔다. 내게 추호의 관심이 없다는 듯, 그러나 그쪽으로도 별 관심은 없어 보였다. 아이는, 혼자서 옥상에 올라가지 말라는 엄마의 주의를 들은 게 분명했다. 마침 엄마는 동생을 데리고 어딘가 출타 중이었고 혼자 심심하던 아이는 호기심이 동했을 거다. 원래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데엔 우리들이 모르는 무언지가 있었다. 나는 옥상에 아이가 모르는 무언지가 있을 것도 없을뿐더러 혼자서 아이가 올라가서는 안될 옥상이 아닌 걸 무슨 사명감으로 아이에게 알려야만 했다.
“ ...아이야, 너는 4층에 살지?”
“ 네에? ...네에.”
“으응, 반갑구나. 너는 몇 학년이니?”
“ ...4학년, ...4학년이예요.”
“4학년이구나. 이름은? ...이름은 뭐니?”
“네?”
그러나 아이는 슬금슬금 층계 쪽으로 가더니 이내 옥상을 내려가 버렸다. 이것이 나와 현정이의 첫 대면이다. 아이는 이미 일곱 살 이후로서 남녀 칠세 부동석이었을까? 낯선 아저씨이었지만 어느새 여자(?)는 남자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저 또래의 어떤 여자아이가 예쁘지 않을까 마는 내게는 현정이가 여간 예쁘지 않았다. 보라색이 잘 어울렸다. 짧은 앞엣머리는 수줍은 듯 이마를 감췄고 뒤로 넘긴 긴 머리칼은 연보라 땡땡이 무늬가 있는 장식용 머릿수건이 단속했다. 마침 충만한 가을 햇살을 받아 흔들리는 아이의 길게 자란 머리칼은 반드르르 윤기가 흘렀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층계를 내려가며 힐끔 나를 보던 작은 듯한 외 까풀의 알 수 없는 아이의 눈이 아니더라도 나는 현정이의 이름이 궁금해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노부부가 키우는 아이와 불임부부와의 관계는 각별했다.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이는 불임부부에게 더욱 예쁜 사내애였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저토록 예쁘지는 않았다. 그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들 부부의 슬픔도 깊었다. 그럴수록 기쁨이 넘쳐나기도 했다. 아이가 유치원 버스를 타고 내릴  때면 지친 노부부 대신 그들 부부의 아내가 늘상 지켰다. 아이가 엄마의 기억을 말끔히 지울 수야 없었지만 아이에게 이 아줌마는 엄마 버금갔다. 물론 아줌마에게도 이 아이는 아들 버금갔다. 아줌마와 아이가 손잡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영락없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모자지간이었다. 공공연히 불임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잠도 잤다. 아이의 재롱에 웃음꽃 피는 고만고만한 여느 가족과 다르지 않았다. 그 불완전한 행복이 남모르는 그들만의 가슴앓이 탓인지 그 온전한 행복보다 더욱 커 보였다. 무릇 인간은 행복하지 만도, 그렇다고 불행하지 만도 않았다.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았고 홀아비 마음 과부가 알았다. 닳을 만큼 닳은 살에 굳은살도 불거졌고 웬만해서는 낯뜨겁지도 않고 날이라도 궂을라치면 신경통이 도져 만사가 귀찮았지만 3층과 2층, 그 층을 달리하며 보이는 그들의 수상한 행색은 사춘기의 풋사랑을 방불했다. 쉰 줄에 들어 다시 찾아든 봄은 부끄럽기가 진달래보다 붉고 안타깝기가 달팽이보다 느렸다. 소년이 그랬던 거처럼 홀아비는 안 그런 척했고 소녀가 그랬던 거처럼 과부는 모르는 척했다. 어쩌다 내려가고 올라가며 1층 계단에서 마주쳐도 그들은 이웃간에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은 우 아래 살며 참 정도 없다, 했다. 그래도 홀아비 날로 멋쟁이 되어갔고 남몰래 과부 분칠은 짙어갔다. 그러나 가는 건 세월 뿐, 중이 제 머리 못 깎았다. 더욱이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들의 애물단지, 그 노 처녀총각의 행색이 만만찮게 수상했던 것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고 안타깝기가 달팽이보다 느렸으며 부끄럽기가 진달래보다 붉었다. 나는 자꾸만 웃음이 새나왔지만 비극도 그런 비극은 없었다.
현정이네와 같은 층에 젊은 커플은 이 마을에서 하나의 외딴섬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이웃간에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물 속에 기름처럼 한사코 섞이지 않았다. 그들의 살림은 구체적 생활이기보다 은밀한 남녀의 추상적 밀회로 비췄다. 내가 말로만 듣던 신세대의 사랑 방식이었을까? 불같이 타올랐으나 만남은 이미 준비된 이별이었다. 지금은 좋아 비록 결혼의 형식을 빌어 살아도 헤어질 때 이혼의 절차는 불필요했다. 어쩐지 그들에게선 그런 오렌지 냄새가 풍겼다. 저희들은 클리어하고 샤프한지 몰라도 기어이 헤어진다면 이 또한 어찌 슬프지 않은가.
늦은 가을비가 진종일 청승맞게 뿌렸다. 이 비가 그치면 성큼 겨울이 닥쳐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도 있었다. 아직은 신경통이 도지는 건 아니더라도 빗소리가 괜스레 우울하고 서글펐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신체의 쇠약만 초래하지 않았다. 그 마음의 황량은 약도 없었다. 또 겨울이 온다기에 서러웠다. 아직 나이가 적어 기쁜 줄 알면 기쁘지 않은 어린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옥탑 처마 밑에 혼자 놀고있는 현정이를 발견하곤 내가 거추없이 기뻐지는 건 내가 방금 그렇게 슬펐기 때문이었다. 현정이가 기쁠 것이라는 가설은 나의 그 슬픔으로부터 유추되었다. 내가 삐걱 소리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 현정이는 이제쯤 내가 나오리란 걸 미리 알고있던 아이 마냥 물론 놀라지도 않았거니와 작정한 대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단풍잎 만한 두 손으로 작은 오목 그릇을 만들어 디밀어 받아 모으고 있었다. 그릇은 깨졌거나 금이라도 갔는지 한두 방울씩 물이 샜다.
“ ...... ”
“ ...현정이야요. 김현정.”
“현정이구나. 김현정!”
그러나 아이가 기쁜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아이의 감정은 충분히 복잡했으며 심지어는 어른을 뺨치는 반대급부가 있었다. 현정이는 순순히 제 이름을 얘기해야 했지만 어느새 자존심에 심각한 손상도 입었다. 내가 생각하는 만큼 그 사람의 이름 석 자는 큰 의미가 없었는지 모른다. 이 아이의 이름의 섣부른 확대 해석은 금물이었다.
“ ...오늘은 소풍날이었어요.”
“이런! 이 비가 너무 미웠겠구나.”
“네. 정말 미웠어요.”
“ ...내려가는 거니?”
“네. 아직 숙제도 안 한 걸요.”
현정이는 처마 밑에서 나와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이는 인사도 없이 층계를 내려가 버렸다. 내가 궁금했던 현정이의 이름을 이윽고 알았으나 그 이름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면 소풍의 날에 비가 왔고 아직 숙제도 안 했으며 이름 순순히 알려줬으나 현정이는 비교적 성공한 셈이었다.
성공으로 치면 이 마을 사람들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젊은 커플도 다분히 즉흥적이며 그 맹종하는 향락의 결국 우울한 종말에도 불구하고 당장은 꿈결같은 밀월의 시간을 보내고있었고, 다 늦어 아이를 키워야 했던 노부부도 이웃하는 불임부부 덕분에 거의 뒤짐 지고 거저 아이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더러는 생색마저 낼 수 있었다. 불임부부야말로 노부부의 생색도 감수했으며 그들의 불행이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면 도저히 맛보지 못했을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일 지경이었다. 그런 만큼 아이도 헤어져야만 했던 엄마, 아빠의 기억은 까마득하게 잊은 듯이 보였다.
칼로 물 베기 라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이어지던 부부싸움은 징글징글하기도 했다. 현정이네가 그랬다. 더 미워지기 전에 모든 남녀의 이별이 우울한 것만은 아니었다. 젊은 커플의 방식이 한 세대 진화한 진보된 삶의 방식이었을까? 그러나 그들도 이웃하며 생색내며 사는지 몰랐다.
무엇보다 괄목할 만한 성공을 보인 건 3층과 2층, 우 아래 사는 홀아비와 과부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행보가 느려도 로마로 갈 수 있었던 건 거기로 길이 통해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잠깐 한눈 파는 사이 그들의 역사는 시작됐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시간의 차이를 두고 귀가했지만 내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그들은 미리 봐둔 근사한 한식당에서 마주앉아 저녁을 들고 근처 노래방에도 들러 평소 누구 못지 않던 숨은 노래 솜씨도 자랑했으리라.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갖지 못한 것 남이 갖아 시기하지도 않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것 남이 하여 배 아파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들의 달성한 바 마음으로부터 축하를 보냈으며, 그리고 사나흘쯤 지났을 것이다. 모처럼 친구를 만나 묵은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고 주거니 받거니 마신 술도 주량을 훌쩍 넘어있었다. 2차 가자는 친구를 얌전히 마누라한테 돌려보내고 얼근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가는 세월 그 누가 잡을 수가 있~나요. 흘러가는 저 강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 ”
옥탑은 마치 두둥실 떠도는 구름 위에 지어진 작은 오두막이었다. 주인이 지상으로 내려가느라 접어두었던 층계를 길게 펼쳐 내려뜨려 놓았다. 이제 주인이 그 층계를 타고 오르면 다시 층계는 접어 매어두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운행을 재개할 것이다. 바람이라도 부는지 층계는 좌우로 흔들렸다. 간신히 올라와 구름에 안착했다. 그러나 역시 꿈은 일장춘몽이었다. 층계를 접어 올리기도 전에 꿈은 깨어졌다. 옥상에는 질퍽한 진창의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그 구석에 한 쌍의 남녀가 또아리를 틀며 엉겨 붙어 키스하고있었다. 하지만 남녀는 다름 아닌 그들의 애물단지, 그 노 처녀총각이었던 것이다. 나는 결코 배 아파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사랑에 전폭적 지지를 보내지도 못했다.
0.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관한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벽에 담쟁이덩굴 잎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꺼져가는 한 생명을 연장시켰던 노 화가는 훌륭한 휴머니스트는 될 수 있었는지 몰라도 진정한 예술가는 못 되었다. 나는 자연의 순응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 늦은 가을비가 그치고 마지막 잎사귀가 최후 고비에 떨다 결국 떨어지고 말았을 때 나는 자연에 순응하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닥쳐오는 겨울을 겸손하게 나는 기꺼이 맞이하였던 것이다. 창문 틈에 문풍지도 발랐고 보일러의 시운전으로 사전 점검도 마쳤으며 장롱 서랍 속에 잠들어있던 오리털 파카도 끄집어내어 일껏 일깨웠다. 결빙이 시작되고 유리창에는 하나 가득 오묘한 서리꽃도 피었다.
잠깐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마을 어귀에서 현정이를 만났다. 무언지 생각에 골똘하느라 현정이가 먼저 나를 발견했다.
“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 현정이구나. ...하교길이니?”
“네. 오늘 방학했어요. 겨울방학이예요.”
“ ...좋겠구나.”
그러고 보면 현정이가 나를 보고 아는 체해서 드디어 나도 이 마을에 어엿한 이웃이 되었다.
“ ...... ”
“ ...... ”
“ ...아저씨!”
“으응? 왜?”
“ ...아냐요. 아무 것도 아니 야요.”
“ ...... ”
“ ...... ”
“ ...현정아!”
“네? 왜요?”
“ ...아냐.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나 나는 현정이와 무척 친해진 느낌이었다. 무언지 궁금했으며, 궁금한 게 무언지 궁금했다. 아이는 선뜻 물어오지 못했지만 또 그 하루를 넘기지도 못했다. 현정이는 제 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으나 그 어스름에 인기척이 있어 나가보았더니 현정이였다. 얼음이 어는 계절, 바람막이 없는 옥상은 추웠다. 더욱이 아이의 양 볼은 빨개왔는데 별로 춥지 않다고 그랬다. 내가 아는 한 끝내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던 여자도 어느 순간 달려들어 이내 부담스러운 게 여자이기도 했다. 흔히 어른들은 아이를 아직 미숙한 어린애로만 봤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었다. 오히려 아이는 어른보다 천성에 가까웠다.
“ ...별로 춥지 않아요.”
“아니, 추워. 요렇게 볼이 빨갛잖아. 추운데 뭐해? 혼자서... ”
“정말! 아저씬 왜 혼자 세요? 아줌마도 없고 저 같은 딸도 없으세요.”
“ ......추워. 내려가, 어서.”
현정이는 고분고분 내 말을 들어 순순히 내려가 줬다. ......현정아, 내게도 너처럼 예쁜 딸이 있었단다. 그 즈음도 정은이가 겨울방학을 맞이했었지.
< ...웬수야! 찾지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웬수가.>
퇴근하고 돌아와 화장대 위에 아내가 휘갈겨 쓴 쪽지편지를 내려다보며 나는 도리어 옅은 미소를 짓고있었다. 이번 냉전이 여느 때보다 비교적 길어진 것도 사실이었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다. 방학이 되면 정은이도 외할머니 댁에 내려가길 고대했고 이왕에 아내에게도 친정에서의 며칠 휴가를 주곤 했었다. 티격태격하긴 해도 나도 쓸 때는 크게 인심 쓰는 배포 큰 남편이었다. 정은이가 겨울방학하기 무섭게 아내는 정은이를 끼고 친정 행 시외버스를 탔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정말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은이와 아내가 탄 시외버스가 과속으로 달리다 급커브 길에서 그만 미끄러져 전복되고 말았다. 아내는 사고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정은이는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숨이 끊겼다. 아내가 당신 죽으면 새로 시집가서 잘 살 것이며, 내가 죽거든 당신도 새 장가 들어 잘 살라고 나 몰래 들어 둔 생명보험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었다. 그렇게 나도 현정이를 통해 이 마을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있었는지 모른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바로 이 마을이 바람 잘 날 없었다. 현정이네는 그만 두고라도 그토록 살을 섞어 같이 있은 들 끝없이 그리웠던 젊은 커플에게도 전운이 감돌았다. 홍수, 아니면 가뭄이었다. 나는 한 쌍의 남녀가 보여주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 상상력의 고루함을 절감했다. 그 뜨겁던 난로의 급격한 냉각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그날 밤 옥신각신했고 크게 소란스럽지도 않았으나 그날 이후 나는 한참동안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이 불길처럼 타올랐던 사랑이란 말인가? 적어도 사랑은 미련(未練)의 카테고리였다. 아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건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아내는 나를 사랑하고있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사랑은 또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제 홀아비의 사랑은 노골적이었다. 사랑에 국경이 없고 나이 불문이었다. 아랫집 과부도 싫지 않았으나 단지 그 낯이 홀아비보다 엷은 편이었다. 허나 아무도 사랑을 속이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옥상에서 몰래 한 사랑을 내게 들켜버리고 다시 같은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았으되 그들의 고민은 역력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은 그 이상이 아니기도 했다. 그 맨 아래층에서 사랑은 진정되었다. 노부부에게는 철없는 아이의 희희낙락이 편편치만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연인만 눈멀지 않고 사랑에 빠진 불임부부가 눈멀었다. 절실했던 만큼 아이에의 사랑은 집요한 거의 집착에 가까웠다. 홀아비 속은 과부가, 과부 속은 홀아비가 안다는 것은 결국 그 같은 처지가 이해한다는 거였다. 불임부부의 타는 속을 실은 내가 알지 못했다. 덜컥 임신된 아내의 배가 불러오기 전에 식을 올려야 했던 우리로서는 아기가 들어앉았다는 건 도리어 곤란의 처지였다. 그건 노부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더욱이 비록 지금은 떨어져있을지언정 모르긴 몰라도 아이에게는 어디에선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엄연히 부모가 있었다. 노부부로서는 아이에게서 잊혀지는 부모를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아이와 불임부부는 지척에 두고 이별 아닌 이별이 불가피했다. 무 자르듯 하지는 못했더라도 꽁뜨보다 짧은 그들의 좋았던 시절도 다 간 듯 보였다.
그해 겨울도 그렇게 함박눈이 내렸다. 동장군의 기세도 한풀 꺾이고 눈 내리는 마을은 어느 크리스마스 카드에서처럼 한가롭기까지 했다. 싼타 할아버지를 태운 마을버스는 골목골목을 빠뜨리지 않고 미끄러져 훑어나갔다. 하얀 날개를 너울거리며 어린 천사 서넛이 그 위를 날아 다녀도 크게 무리가 아니었다. 창틀로 마감된 한 폭의 미술작품을 감상하다 참지 못하고 내가 그 세계로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아이들의 눈싸움이 한창 이었다. 호각지세의 전선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좀체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이쪽 특공 대원의 활약이 두드러져도 저쪽 마지노선의 수성도 완강했으며 저쪽의 전면전 양상의 대 역습으로 이쪽의 게릴라전술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가하면 이쪽 진영의 횡으로 포진된 잠복 병력의 협공으로 저쪽 진영의 대 역습도 주춤했다. 잠시 소강상태에 화력을 보충한다. 방어진지의 개 보수도 일사불란 이뤄진다. 다시 특공 대원들의 치고 빠지는 작전이 수행되면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재개된다. 옥상에서 한가하게 관망하던 내가 불현듯 저쪽 마지노선에 공습을 퍼부은 건 순전히 이쪽 진영의 이 선에서 현정이를 발견하고 나서다. 나는 어디까지나 현정이네 편이었다. 요새를 자랑하던 성벽도 공습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현정이네 편대는 잠복병력까지 동원해서 전면전을 펼쳤다. 무너진 마지노선을 접수하고 포위망을 좁혀갔다. 사면초가에 전의마저 상실한 그쪽 진영은 오합지졸로 전락하고 산산이 흩어졌다. 상황은 종료됐다. 골목을 점령한 아이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썰매를 지치고 커다랗게 눈사람을 만들며 놀았다. 눈은 멎었으나 아이들에게 결코 눈은 그치지 않았다. 한 움큼 움켜쥐고 공중에 흩뿌리면 눈은 다시 내렸다. 현정이도 마냥 좋았다. 물론 나도 신났다.
그러나 파티는 길지 않았다. 퇴각했던 저쪽 아이들이 와신상담, 군비를 재정비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골목으로 진격해왔던 것이다.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현정이들이 방어진지에 몸을 숨기고 동태를 살폈다. 저쪽 아이들은 요번에는 공습에도 충분히 대처하며 사정거리 바깥에 아지트를 마련했다. 내가 선제 공격을 해봤지만 과연 그들은 내 사정권에 들지 않았다. 이쪽 특공 대원들이 재 결성되어 유인작전을 펼쳤으나 저쪽도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저쪽도 정예의 특공 대원을 선발하여 염탐을 시도했다. 산발적인 교전이 이따금 정적을 깰 뿐, 긴장감만 고조되었다. 현정이가 옥상으로 올라온 건 그때였다. 현정이가 내민 눈 뭉치를 받아들고 나는 시금치를 먹은 뽀빠이처럼 힘이 솟구쳤다. 젖 먹던 힘을 다한 나의 폭격은 놀랍게도 저쪽 아지트에 정확히 명중했다. 그걸 신호탄으로 이쪽의 대 공세가 시작됐다. 물론 저쪽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전선은 혼전의 양상을 띠었다. 나의 공습도 처음만큼 큰 힘은 못되었다. 결정적으로 저쪽의 정예 특공 대원들에게 옆집 옥상으로까지 침투를 허용하고 전선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나는 기습적인 측면 공격을 받고 타격을 입는다. 더욱 상황의 악화는 현정이가 얼굴에 눈 뭉치를 맞고 중대한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 틈에 저쪽의 입체 공격은 불을 뿜었다. 공습에는 무방비이던 이쪽 진영은 우왕좌왕했다. 제공권을 장악 당한 이쪽 대열은 급격히 와해되고 결국 풍지박산나고 말았다. 그러나 내게는 더 이상 전쟁의 승패가 중요하지 않았다. 옥탑은 단지 훌륭한 엄폐물이었다. 사선을 함께 넘나들며 뜨거운 인간애를 나누었던 전우가 그랬듯 나는 현정이의 간호에 전심치지했다. 흉탄의 파편을 수습하고 보니 우측 눈 아래가 빨갰다. 가뜩이나 내가 못 견디게 괴로웠던 건 현정이의 눈가에 소리 없이 눈물이 맺혀왔다는 거다. 여리디 여린 마음에는 관통상을 입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처럼 전우는 무능하고 나약하기만 했다. 그저 손을 잡아주는 게 고작이었다. 할 수 있다면 후송을 서둘렀을 뿐이다. 나는 내 넓은 어깨로 인간 방탄벽을 만들어 현정이를 안전하게 4층까지 후송했다. 현정이가 집으로 무사히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전선을 살필 수 있었다. 어느새 이쪽 아이들은 온데 간데 없었으며 골목을 탈환한 저쪽 아이들의 한바탕 자축연이 벌어졌다. 눈은 멎었으나 아이들에게 결코 눈은 그치지 않았다.
기상 측정이래 폭설로 한차례 대란을 치르고 길가에 쌓아둔 눈 더미는 흉물스런 쓰레기 더미로 추락했다. 축복과 은총으로 대변되었으며 환상의 은세계를 연출했던 순백은 한낱 질척이는 잿빛 진창의 재앙이며 저주였다. 아이들도 더는 즐겁지 않았다. 눈(雪)은 물(水)의 물리학적 변화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아갔다. 그 사나흘쯤 흘렀을까? 달도 자취를 감춰버린 습한 밤이었다. 안개도 끼었는지 전망도 희미했고 축축한 겨울밤 찬 대기도 썩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 탓이었을까? 다시 현정이네가 시끄러웠다. 남녀가 살을 섞어 오랜 시간을 살다보면 진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첨예하게 의견이 충돌되었으며 한번 양보하면 죽는 줄 알고 목소리 커지는 게 다반사인 걸 나도 익히 아는 바였다. 그래서 갈라서는 부부가 있다면 도리어 그들은 정상적으로 싸울만한 합당한 이유로 싸웠다. 역시 나는 그들은 사랑하고있구나, 생각하고있었다. 걸리는 건 현정이였다. 아이가 영악해서가 아니라 경험으로 안다고는 해도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엄연히 틀렸으며 아직 그 불합리를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무언지 깨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유별나게도 사랑하는군...... ’
나는 별도 없는 밤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뚫어지면 별이 쏟아지기라도 하는 듯이. 별이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현정이가 옥상에 나타났다.
“현정아!”
“ ...... ”
아이는 긴 나무의자에 나랑 나란히 앉았다. 과연 현정이는 아직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고개를 숙이고있구나 싶었는데 현정이는 훌쩍훌쩍 울고있었다.
“ ...울지마아.”
“ ...그치만 ...너무 걱정은 마세요. ...엄마, 아빠, 날 새면 얼굴 바꾸는 변덕, 한두 번도 아니고... 내가 뭐 바본가요... ”
그러나 현정이는 얇은 스웨터 차림이었다. 축축하고 찬 밤 공기가 스며들어 아이의 입술은 금세 보라색으로 질려갔다.
“ ...현정이, 추워서 어떡하니? ......아저씨네 방에 들어갈래?”
현정이는 천진난만하게 네! 하고 대답했다.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글썽글썽했는데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변덕이야말로 현정이는 천상 아이였다. 하지만 아이가 내 방으로 들어설 때는 어리지만은 않은 야릇한 두려움과 묘한 호기심이 엇갈리고있다는 걸 읽을 수 있었다. 현정이는 돌연 부끄럽기도 했다.
“ ...앉아. 따뜻할 거야. 여긴 괜찮니? ...안 아파?”
나는 일전에 눈 뭉치를 맞은 아이의 오른쪽 눈 아래를 가리켰다. 현정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이었으면 두리번거릴 만도 했건만 어느새 숙녀가 다 되어 얌전을 뺐다. 내가 먼저 털썩 앉아 모르는 척 TV를 켰다. 못 이겨하며 현정이도 앉았다. 그러나 손님 접대를 위하여 나는 다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딸애가 좋아하던 코코아가 있었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코코아는 늘 비치해 두었다. 추위에 입술이 새파래진 아이에게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은 딱 좋았다. 나는 아내가 그랬던 거처럼 너무 달지 않게 코코아를 끓였다. 현정이도 코코아를 좋아했다. 딸애를, 정은이를 쏙 뺀 현정이의 후후- 소리내어 코코아를 마시는 모습에 그만 나는 코끝이 시려왔다. 그때 나는 버릇처럼 실없이 웃었다.
문풍지는 외풍을 막아주고 따스한 차 한 잔은 얼었던 아이의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아이에게는 너무 긴 하루였을까? 그런데도 아래층 소란은 잠들 줄 몰랐고 아이는 지쳐갔다. 머리가 무거웠다. 세워 끌어안은 무릎 위에 현정이는 머리를 얹고 TV를 봤다. 아이들은 잠들었을 시간, TV는 별로 재미없었다. 황우 장사도 들어올리지 못했던 눈까풀, 무릎을 끌어안은 팔도 천근 만근이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정은이의 작은 베개 위에 너의 무거운 짐 내려놓거라.’
지쳐 쓰러져 잠든 아이는 그대로 천사였다. 그만 나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내가 모든 짐 내려놓고 아이처럼 잠들고 싶었다. 찰랑이던 긴 머리칼도 잠시 접은 날개처럼 하얀 목덜미를 감싸고 잠시 쉬고 있다. 정말 나도 졸렸다. 나는 무책임한 불침번이 되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땐 이미 동이 터 오고있었다. 낭패였다. 천사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있었으나 나는 흔들어 깨우지 않을 수 없었다. 천사는 눈을 뜨자 제일 먼저 인간의 가면을 갖춰 썼다. 현정이는 걱정스런 얼굴로 돌아갔다.
1층 노부부가 무거운 짐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들의 딸로 보이는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데리러 왔다. 몇 개월 만이었는지, 모자는 상봉했다. 무슨 기구한 사연인지는 몰라도 어미는 아이를 끌어안고 북받쳐 울었다.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아이도 그 동안 어린것이 엄마도 찾지 않고 잘 지낸다 싶었는데 어미를 보자 다시는 놓아주지 않겠다고 꼭 붙들고서 서럽게 흐느꼈다. 이제야 나타난 엄마 가슴팍을 고사리 손으로 때리며 원망도 했다. 노부부도 슬픈 가운데 기쁨의 눈물을 훔쳤다. 그 기쁨이 기쁘기만 했던들 이토록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내가 명절 때나 맡았던 음식 냄새도 솔솔 풍겨왔다. 덩달아 밤하늘도 맑게 개여 초생달이 한껏 날씬한 몸매를 뽐냈고 별들도 밤 마실 나와 날새는 줄 몰랐다.
이튿날 아침해는 유난히 싱그러웠다. 여름철이면 맛보지 못한 머리카락이 서는 선뜩함까지. 아이가 엄마 품으로 돌아가 축하해 주는 이 또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불임부부였다. 아침이 다 가기 전에 아이의 짐은 챙겨졌다. 몇 개월 새 아이의 짐도 많이 불어있었다. 불어난 짐만큼 아이와 그간 이쪽이 쌓은 정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헤어질 것이 염려되어 경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모르는 사이 정은 눈덩이처럼 커져있었다. 만나면서 헤어질 걸 염려했듯 헤어지며 다시 만날 걸 믿을까? 님은 차마 떨치고 갔어도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지만 불임부부는 차마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보내주었다. 아이는 엄마 손을 꼭 붙들고, 다시는 놓아주지 않으며 가면서도 자꾸만 아줌마를 돌아보면서 갔다. 불임부부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띄우고 하염없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힘에 부친 짐을 든 엄마에게 매달린 아직 어린아이는 또 하나의 짐일 뿐 도움은 못 되었다. 그 모자가 골목을 다 빠져나가기까지 불임부부의 손은 여전히 나부끼고있었다. 모자가 보이지 않고 돌아서던 불임부부의 함박 웃는 주름진 눈가에 맺혀오는 눈물을 나는 먼발치로도 능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날 오전 중에 한 경찰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현정이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일테면 그에게서 잠시 서(署)까지 동행을 요청 받았다.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번거롭더라도 잠시 저와 가주셔야 겠습니다... ”
정중했으나 들어 기분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흡사 좋은 것만을 골라 합성된 완벽한 목소리가 절대 좋은 인간의 음성이 아니었다. 마치 스위치를 올려 작동된 듯한 그의 음성에 나는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고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인근 파출소에 옮겨져 육면체의 한 공간에 갇혔다.
“ ...그날 밤 현정이란 아이와 무슨 일이 있었소?”
“ ...무슨 일? 무슨 말이 듣고 싶소?”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만 말하시오.”
“그렇소. 나는 현정이와 잤소.”
“잤다는 건 무슨 뜻이오?”
“잤다는 건 잠을 잤다는 뜻이오.”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인 여자아이와 잤다는 거요?”
“그렇소. 잤소. 그게 무슨 잘못이오?”
“이 양반, 큰일날 양반이네. 그럼 그날 이후 아이의 아래에서 피가 나는 걸 어떻게 설명하겠소?”
“피!”
구구했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로서도 피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해가 바뀌어 5학년이 된다고는 해도 설마 현정이가 생리를 하리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중에 현정이 최초의 월경으로 판명되고 사건은 흐지부지 무마되었지만 나는 침통했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불침번의 무책임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만 않았던 것이다. 아이는 성큼성큼 자라나고 있었고 내가 아는 것보다 현정이는 부쩍 성숙해있었다. 나는 그 이상으로 신중해야 했다. 어쩌면 현정이는 어느덧 인간 칠정을 알아버리고 이미 천사가 아니었는지 몰랐다. 기쁜가하면 화나기도 했고 슬프면 즐겁기도 했으며 사랑하면 미워도 했고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심까지.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너무 어린 여자와 잤던 것이다.
집주인으로부터 방을 빼달라는 통보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마을에도 조촐한 경사가 있었다. 내가 잠시 신경 쓰지 않은 사이 노 처녀총각의 사랑이 빠른 진전을 보여 결실을 맺은 게 그것이다. 노총각은 내게도 청첩장을 보내왔다. 인생에 가장 화려한 시절이 분명했다. 나는 이 마을을 뜨는 마당이었지만 초대받고 응하지 않을 재간도 없었다. 다만 식장에는 좀 늦게 도착해서 그 뒤쪽을 지키다가 제일 먼저 식장을 나섰다. 그래도 나는 누구 못지 않게 그들 앞날에 행복을 아낌없이 축원했다. 신부 치고 예쁘지 않은 신부 없다는 말은 맞았다. 신랑도 내가 동네를 오며 가며 만났던 그 노총각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때깔은 절대 그 사람의 겉모양에 있지 않았다. 그 신랑, 신부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건 이제 사돈이 된 그 과부와 홀아비에 의해서도 입증되었다. 그토록 그들은 곱고 반듯하게 차려 입었으나 좀처럼 때깔이 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앞을 가로막고 자신의 복을 좇겠냐마는 당신들도 사람인지라 한 구석 마음이 휑했다. 남몰래 그들은 둘만의 은밀한 이별의 파티를 하고있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것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만큼 그들은 기뻤다는 것이다. 인간 이전에 생명력을 갖고 살아 움직인다는 모든 것은 종족 번성, 우위에 덕목을 갖지 못했다.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들은 본능적으로 기뻤다. 무차별한 축하도 보냈지만 삼가 경의도 표하고 나는 식이 다 끝나기 전에 식장을 빠져 나왔다.
새로 짐을 풀 방을 물색했다. 거기로부터 너무 멀지 않으나 너무 가깝지도 않은 데에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전혀 새로운 이웃이 살았으나 그들이 크게 다르지도 않다는 걸 나는 알고있었다. 그 이후 현정이는 옥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내와 딸이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을 떠났을 때도 나는 불행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했는데 불행이 성적순이 아니었다. 짐을 많이 처분했다고는 해도 이사가 어디 보통 일인가. 공수래공수거를 아는 이가 행복했다. 부귀영화가 불행이었다. 짐을 꾸리면서 짐을 풀 일이 걱정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봄이 멀지 않다는 거였다. 산천에 꽃이 피고 들판에 새가 울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지... , 이사가는 나는 날은 손 없는 아흐렛날로 택일했다.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으나 꽃샘 잎샘이 마지막 기승을 부렸다. 크지 않은 용달차에 그럭저럭 짐도 다 싣고 누구 하나 내다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보며 그저 그 전체에 작별을 고했다. 그때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더니 왠지 그 귀추가 주목되었던 4층 젊은 커플을 제 코가 석 자이던 나는 아예 잊고있다시피 했다. 그때 골목 저편으로부터 그들이 내 눈으로 들어오자 내게서 거의 망각되었던 그들은 돌연 눈썹이 타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시동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려던 용달차도 나는 잠시 만류하고 숨을 죽였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여자가 아직 배가 불러오는 건 아니더라도 쩔쩔매는 남자의 행동거지로 여자의 임신 사실은 역력해왔다.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고 난 이후, 이제 우리가 헤어질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촌스럽게 굴지 않고 처음 만났던 압구정동에서 서로 웃는 낯으로 돌아섰다. 그 며칠이 지난 후 사랑이 남긴 추억처럼 여자는 임신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여자는 그래서 헤어질 수 없었던 고리타분한 3류 소설은 쓰지 않았다. 전영록이 말한 것처럼 사랑은 연필로 썼다. 아기를 지우다... , 그렇게 깨끗이 지우면 그뿐이었다. 실제로 여자는 병원에도 갔다. 하지만 수술대에 오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자는 어째서 소설이 3류여야 했고 고리타분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이제는 그들이 차세대 아이에게 말하리라. 너희가 살아보라고.
여자가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손길로 아랫배를 감싸고 층계를 올랐다. 남자도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은 손길로 홀몸 아닌 여자가 내 몸보다 중해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구태여 그들이 4층까지 올라가는 걸 지켜보지 않았다.
“갑시다! 떠납시다... ”
덜덜거리던 용달차는 드디어 포승을 풀고 나아갔다. 구름에 달 가듯이 용달차가 갔다. 그렇구나. 실은 달은 가만있고 구름이 갔다. 정처 없이 떠돌았다. 길지도 않은 골목길이 남도 삼백 리였다. 그 끝에 현정이를 발견하고 끝내 아이를 보지 못하고 떠나 안타까운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탄식처럼 아이의 이름을 되뇌었다.
`현정이... , 현정아... ’
상서로운 건 아직도 현정이는 작아 자기 만한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있었다.
“ ...아저씨, 이거요.”
현정이가 내민 건 내가 아직 버리지 못한, 이제야 기어이 버릴 수 있었던 작은 베개, 정은이의 베개였다.
“이걸 빠뜨리셨어요. 이건 그날 내가 베었던 베개잖아요.”
“그렇구나. 내가 이걸 그만 빠뜨렸구나... ”
“ ...아저씨, 머얼리 이사 가세요?”
“응, 그래. 머얼리 간단다.”
나는 현정이한테서 정은이의 베개를, 아니 그날 현정이가 베었던 베개를 받아들었다.
“ ...아저씨. 안녕!”
“그래, 현정아... , 현정이도 안녕...... ”
용달차가 미련 없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너무 멀리, 너무 가깝지도 않은 만큼 달려간 용달차는 다시금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어 가파른 언덕을 탔다. 나는 무릎 위에 베개를 하릴없이 집적거렸다. 내가 짐을 꾸리면서 했던 걱정이 현실화되고있었다.

끝.

지은이;오동원
주소;서울 종로구 홍지동 69-1 완성빌라 1-302
전화;02)395-4622
e-mail;novelrroris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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