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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혁-단편소설1(2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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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넷 회상
오상혁
1989년, 그 당시 스물 네 살이었던 나에게 학벌에 대한 열등의식은 발정하듯 도지는 지랄병이었다. 대입참고서를 구비한 서점 앞을 지나다가도, 대학 다니는 녀석들이 소주를 마시며 ‘이슈’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형이상학적 고찰’이니 따위를 안주 대신 씹는 포장마차의 구석자리에 찌그러져 있다가도, 신문의 구인광고란에 ‘학력: 대졸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소지자’란 문구가 눈에 띄어도, 뇌세포가 바르르 경련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서점에 달려가 대입참고서를 사서 밤새 뒤적거리는 것으로 발작을 달랬다. 그럭저럭 효과가 있는 마약이었지만, 도대체 돈이 남아도는 일이 없었던 난 발작할 때마다 참고서를 살수는 없었다. 대개 그런 날은 동네 구멍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외상으로 사들고 골방으로 돌아와 가난한 아버지를 원망하며 마셨다. 그리고는 풀무질하듯 수음을 한 뒤 가까스로 잠이 들곤 했다.
정혜를 처음 만나게 되던 그날도 그렇게 밤늦게까지 소주병을 끌어안고 강간한 끝에 잠든 날이었다.
“아홉 시가 다됐는데 공장 안가고 여적 자빠져 있냐?”
방문이 덜컥 열리며 아버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내 머리를 쥐어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졸린 눈으로 머리맡을 더듬거렸다. 탁상시계가 8시 24분이라고 시간을 세어 주었다.
‘통근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는 시간은 20분전인데. 지금이라도 가야 할텐데…….’
생각과는 달리 고개가 다시 때 절은 베개 위로 처졌다.
그날도 석 달 내내 그랬던 것처럼 사출공장에 출근해 플라스틱 사출기가 바가지나 반찬통 따위를 토해 내면 그 꽁지를 잘라주어야 했다. 변화란 눈꼽만큼도 없는 반복 또 반복의 연속인 공장생활. 공장생활의 변화라고는 그 날에 뽑아야 할 제품의 수와 색깔뿐이었다. 반복이란 것은 정말 지겨운 고문이었다. 내가 그토록 고문을 당하는 이유는 오로지 월급 몇 푼을 적선 받기 위함이었다.
‘오늘은 공장에 가지 말까? 아프다는 핑계는 지난주에 써 먹었구…….’
월요일만 되면 더욱 공장에 출근하기가 싫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난 잔머리를 굴렸다.
“정전 땜에 오후 한 시까지 오랬단 말예요.”
그 순간 내가 다니는 사출공장은 까닭 없이 정전이 되어버렸다. 수요는 공급을 낳고 필요는 궁리를 낳고 강요는 편법을 낳는다. 아버지는 헛기침소리와 함께 후퇴했고 난 12시 10분까지 지각을 만끽했다.
그림자도 없는 공돌이 하나가 어슬렁거리며 버스정류장에 나타난 지 10분쯤 지나자 하늘색 줄무늬가 쳐진 시내버스가 도착하더니, 그 공돌이를 냉큼 주워 실었다. 몇 번을 오라이와 스톱을 외쳐 대던 버스안내양은 그 공돌이에게 150원의 뇌물을 받고는 사거리에 그 녀석을 슬쩍 내던지고 가버렸다. 그곳은 간선도로와 새마을 포장로가 교차하는 곳으로 공장들이 밀집한 지대였다. 대명화학, 삼양고무, 동진기계, 한진사출 따위의 글씨들과 함께 화살표가 페인트로 그려진 철판이 기둥에 여러 개 매달려 있었다. 철판은 녹이 잔뜩 나 마치 각종 지옥의 입구를 가리키는 것처럼 스산해 보였다.
‘오 버스 안내양이시여!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여기가 아니옵니다. 꿀과 젖이 흐르는 낙원, 자유와 희망이 있는 나라, 낭만과 열정이 있는 언덕으로 인도해 주옵시기를……! 빌어먹을 아멘. 엿이나 잡수소서……!’
사거리부터 내가 다니는 화학공장까지는 꽤 멀었다. 15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였지만 나는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이대로 걷는다면 30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지옥으로 서둘러 들어가고 싶은 맘은 없었다.
나는 걸어가며 담뱃불을 붙이려다가 돌부리에 걸려 중심을 잃고 길 옆의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풀숲에서 비둘기 몇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랐고 뒤에서 깔깔거리는 여자의 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아마도 그 여자는 버스정류장에서부터 내 뒤를 가만히 따라왔던 것 같았지만 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림자를 잃어버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난 풀숲에서 어기적거리며 나왔다. 그리고는 킥킥거리고 있는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머 저렇게 생긴 여자애가 다 있담?!’
아담한 체구, 날씬한 청바지, 하얀 파카, 긴 생 머리, 고른 치아, 커다란 검은 눈……. 유치하게도 마치 천사 같았다. 나는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찾아보기 어려운 분위기를 가진 그녀가 웃음이 멈추고 머쓱해 하다가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일 때까지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몇 발자국을 걷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나의 뒤를 쫓아오며 대명화학이란 공장이 어디인지 물었다. 생산직 사원으로, 그러니까 공순이로 취직하려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거긴 내가 다니는 플라스틱 사출공장이었다.
“그 곳은 지옥이나 마찬가진데……. 댁은 공장에나 취직할 만한 사람 같지 않은데요?”
그녀는 내 말에 픽 웃고는 대답했다.
“지옥도 천당으로 바꿀 수 있어요. 신념만 있다면 말예요.”
그러나 오히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엔 가물가물한 체념이 어렸다가 꺼졌다. 내게는 그런 그녀의 눈빛에서 그녀가 말하는 신념이란 것이 체념과 비슷한 의미로 와 닿았지만 어떻든 난 그녀의 말대로 신념을 가지기로 하고 그녀에게 엉뚱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내 신념은 천사류의 사람들에겐 따로 갈만한 천당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어코 대명화학을 찾아왔다.
그런 우습지도 않은 인연과, 알고 보니 그녀와 난 동갑내기라는 것 때문에 금방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쉽게 친해질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그녀가 정혜였다.
“자네, 사출부 직원 아냐? 잔업 안하고 어디 가나?”
6시 정각에 퇴근하려고 공장 정문을 나서던 난 생산과장에게 덜미를 잡혔다. 고등학교 중퇴인데다가 생산직 사원 출신인 그는 관리직 중에서 제일 승진이 느렸다. 그나마 몸을 사리지 않고 충성을 한 덕에 사십 줄에 알량한 생산과장 자리를 꿰찬 것이 겨우 두어 달 전이었다. 당연히 그는 위로는 비벼대고 아래로는 쥐어짜는,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잔업은 하고 싶은 사람이나 실컷 시키세요. 난 하기 싫으니까.”
난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라구?”
과장의 인상이 구겨졌다. 요런 맹랑한 놈 봐라 하는 얼굴이었다.
과장이 나에게 한마디하려는 순간 퇴근하던 사장 차가 우리에게 비켜서라고 크락션을 울렸다. 과장은 얼른 옆으로 비켜서서 고개를 깊이 숙였지만 난 뻣뻣하게 서서 지나가는 차 안의 사장 얼굴을 노려보았다. 사장의 얼굴은 똥파리처럼 통통하고 반짝거렸다.
“자네. 왜 사장님께 인사도 안 하나?”
“동네 아저씨도 아니고 나라를 구한 독립투사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인사를 합니까.”
난 간단히 코웃음쳤다.
“임금만 제대로 줘도 열심히 인사하겠다.”
과장은 얼굴이 노래졌다.
“자네 이름이 뭐야?”
“공돌이가 이름이나 제대로 있나?”
난 과장이 사납게 노려보는 것을 무시하고 공장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지랄병의 발작이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20 시 50 분까지 공장에 남아 잔업해야 한다는 산업전사의 사명을 이행할 맘이 도저히 내키지 않는 날이 늘어만 갔다. 그만큼 서점 앞이나 구멍가게 앞을 서성이는 날이 늘어만 갔다.
서점의 참고서 코너에서 꼭 한 권의 참고서 값인 삼천 원이 꼬깃꼬깃 접힌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리며 참고서를 살까, 아니면 현찰로 소주 한 병과 담배 5갑을 살까를 망설이며 ‘성문핵심영어’의 유혹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가만히 내 옆구리를 찔렀다. 서점의 통로가 비좁았으므로 지나가려는 사람인 줄 알고 난 책장에 바짝 붙어 섰다. 성문핵심영어의 표제가 요염하게 부풀어올랐다.
“대학 가려구?”
누군가 내 귓속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돌아보니 정혜가 내 곁에 서서 또랑또랑한 눈매로 쳐다보고 있었다. 난 잔뜩 발기한 자세를 풀었다.
“너두 잔업 안 하구 나왔나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참고서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마치 내가 그 참고서를 정복해서 승리감으로 환호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난 소주와 담배 다섯 갑 쪽이 훨씬 아쉬운 처지였기 때문에 그냥 서점을 나왔다.
정혜가 쪼르르 쫓아 나오며 물었다.
“참고서 안 사?”
“아니, 그냥 구경한 거야…… 돈도 없어.」
“내가 꿔 줄께.”
그녀는 얼른 파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 대학 갈 돈이 없다구.”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린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체념하고 말았다.
거리는 시시덕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참새처럼 행복해 보였다. 정혜와 나만이 그런 분위기에서 겉돌고 있었다. 우린 말도 없이 방향도 정하지 않은 채 거리 위를 떠다녔다.
“왜 날 자꾸 쫓아 다녀?”
기차가 하루에 몇 번쯤은 섰다가 간다는 역전 앞을 지날 때 정혜에게 뚱하게 말했다.
난 그녀를 떼어놓고 싶었다. 난 그녀가 늘 내 옆자리를 차지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공장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나, 노조회의를 할 때나, 가끔 휴식시간에 모여 있을 때나, 그녀는 그림자처럼 꼭 내 옆자리나 뒷자리를 차지했다. 첨엔 그저 제일 먼저 낯을 익힌 사람이라서 그러겠거니 했다. 그러나 점차 내가 그녀에게 관찰 당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그녀의 빤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조각 해체되는 것 같았다.
“우리 술 마시러 가자.”
정혜가 오히려 달라붙었다.
예의 그 빤한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나 좋아해?”
포장마차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공돌이가 옆자리의 말끔하게 생긴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가 공돌이를 쳐다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응. 좋아해.”
나는 그녀의 눈동자 대신 소주잔을 쳐다보면서 쓰게 웃었다.
나는 소주를 싫어했다. 투명한 잔에 담긴, 투명한 액체가 그렇게 쓰고 짜다는 것에 심한 배신감마저 느끼곤 했다.
“우린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야. 비슷하지도 않아.”
나는 단정짓듯 말했다.
“넌 그럼 누가 너랑 비슷하다고 생각해?”
“공순이, 접대부, 창녀…… 이런 여자들.”
나의 목소리엔 자조가 어렸다.
“난 지금 공순이고 얼마든지 창녀도 할 수 있어. 정말야.”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줏감들 속에는 닭똥집이 벌겋게 까발려져 있었다.
“임재석이라는 사람을 만났어.”
내 말에 소주잔을 애무하던 정혜의 손길이 딱 멈췄다. 정혜의 긴 머리카락이 수그러드는 고개를 넘어 가닥가닥 흘러내렸다.
“너에 대해서 들었어.”
며칠 전 난 정혜가 다니던 대학의 서클 선배라는 사람을 출근하던 길에 우연히 만났다. 그날도 적당히 음모를 꾸며 지각하던 날이었는데, 한 공장 담 옆에 서서 안을 기웃거리는 그를 발견하고는 수상히 여겨 탐색하는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는 나에게 들키자 지레 더듬거리다가 정혜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혹시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난 그를 경계하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다음 말들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햇볕이 드는 길가에 쪼그리고 앉더니 담배를 피우며 담배연기를 내뿜는 사이사이 열병환자처럼 중얼중얼 정혜에 대한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녀가 대학생 출신이라고 했다.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나는 육감적으로 그녀가 위장취업을 했다는 사실을 냄새맡고 있었으니까.
그의 말은 담배가 다 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혜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구로공단에서 야학을 했던 일과 그후에 위장취업 했던 봉제공장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전경들에게 붙잡혔던 일,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공원 출신의 노동운동가 하나가 필사적으로 막다가 맞아 죽었던 일, 충격을 받은 그녀는 더욱 노동운동에 매달렸고 결국 그것으로 형무소까지 다녀온 일…….
그런 것들은 노동자인 내 입장에선 체감적인 얘기였으나 아주 동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처럼 들렸다. 날품 파는 사람들에게는 부초같은 기질이 있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난 그의 마지막 담배꽁초가 그의 발 밑에 구겨질 때까지 결국 한 마디도 맞장구쳐 줄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정혜를 찾아온 목적을 끝내 말하지 않고 가버렸지만 그가 여기까지 그녀를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 운동가…… 정규교육이라곤 국민학교 밖에 안나온 공원이었어. 그렇지만 살아있는 눈빛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었어. 난 그의 여자가 되고 싶어했어.”
정혜는 문득 고개를 들더니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그 말을 했다. 그리고는 소주를 삼켰다.
우리는 포장마차를 나왔다. 술값은 정혜가 냈다. 난 치사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이의를 제기할 형편은 아니었다. 밖으로 나온 정혜는 똑바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꽤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짱해 보였다.
“오늘 나랑 같이 자자. 우리, 섹스하자.”
그녀는 웃지도 않으면서, 수줍어하지도 않으면서, 발음이 꼬이지도 않으면서, 그 말을 했다.
난 소름이 돋았다.
“싫어.”
난 그녀의 제의를 외면했다. 그녀는 내 한쪽 팔을 감아서 자기 옆구리에 끼웠다.
“여자랑 자본 적 있어?”
그녀는 입술만 일그러뜨려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창녀의 미소였다.
“왜 이래, 너?”
난 그녀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성을 냈다. 그녀가 다가오는 방법은 정말 나를 주눅들게 했다.
“천 원만 내. 거의 공짜야. 여관비가 모자라.”
나는 다시 매달리려는 그녀를 뿌리쳤다. 그 서슬에 그녀는 길바닥에 풀썩 엎어졌다. 난 그녀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나에게 손을 내밀고 애원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날 좀 일으켜 줘. 부탁이야. 기운이 하나도 없어. 우린 서로 도와야해.”
나는 그 말에 그녀에게 적개심이 부글부글 일어났다.
“넌 지금 사치하는 거야! 난 너 같은 것들 보면 역겨워. 이런 생활이 너한테는 즐거운 선택일 테지만 나한테는 피할 수 없는 족쇄란 말야!”
그녀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고 앉은 채로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내 정강이를 후려치려고 애썼다. 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이런 바보 같은 새끼가…… 잘나빠진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주제에……!! 뭐가 어떻다구? 니가 뭘 알아!”
그녀는 내가 손에 잡히지 않자 제풀에 지쳐 흐느적대다가 기어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꺼져. 꼴 보기도 싫어! 똥통에서 영원히 잘먹고 잘살아라. 병신같은 새끼……!”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삼켰다. 나도 그녀를 안아 일으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를 꿰뚫어보는 그녀에게 겁먹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찬 바닥에 그대로 내버려두고서는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의 꼬깃꼬깃한 천 원 짜리 지폐 석 장을 만지작거리며 서둘러 걷는 데만 몰두했다. 발걸음이 자꾸 엉켰다.
2
계절은 분명히 한겨울이었다. 징글벨이 징글징글하게 요란을 떨던 성탄절이 지난 지 열흘밖에 안됐을 때이므로 시간 관념상 틀림없는 한겨울이어야 했다. 뼈가 아삭아삭하도록 매서운 추위가 나다니고 가끔 공장의 뿌옇게 흐려진 창문 밖으로 눈발도 날려야 했다.
그런데 온종일 비가 오고 있었다. 라디오의 일기예보는 20년 만이라던가 25년 만이라던가 이상고온이라고 했다. 객관적인 목소리를 가진 아나운서는 눈이 없어서 스키장이 울상이라는 먼 나라의 떫은 소식과 올해 김 양식을 망쳤다는 이웃집 어부들의 한숨어린 소식을 같은 톤으로 전해주고 나서 뉴스를 마쳤다. 음악프로가 이어졌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 가수가 ‘인생이란 주연배우’라며 발광했다.
‘지랄 염병하네. 어느 인생극장에서 공돌이가 주연배우로 나온담.’
나는 괜스레 라디오 스피커를 째려보다가 내 앞의 7호기에 문제가 생긴걸 감지했다. 사출기는 덩치가 사람 키보다 커서 바로 앞의 사출기를 운전하는 사람이 보이진 않았지만 이상이 있는가 없는가는 금형의 철컹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인지 아닌지로 알 수 있었다.
내 사출기를 잠깐 멈추어놓고 7호기로 가 보았다. 정혜가 고집불통인 사출기와 버거운 씨름을 하고 있다가 내 모습을 보자 사출기에서 물러났다.
금형에 도시락 뚜껑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거 좀 줘 봐요.”
그녀는 들고 있던 놋쇠 꼬챙이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금형과 도시락뚜껑 사이에 박아 넣고 지렛대처럼 힘주어 튕겨냈다. 투명한 연보라색 반찬통 뚜껑이 우두둑 깨지면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는 그것을 주워서 재생용 제품을 담는 자루에 처박으면서 날 흘깃 쳐다보았다. 새삼 그녀가 보라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정혜는 나에게 놋쇠꼬챙이를 되돌려 받으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금형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형제를 5개에 한 번씩 뿌려 줘요.”
숙련공이 견습공에게 사출기의 충실한 종으로서의 의무를 일러주었다. 그래도 그녀는 별 대꾸가 없었다. 그녀의 긴 머리가 나의 시선을 떨쳐 버리려는 듯 두어 번 출렁였을 뿐이었다.
그녀가 입사한 다음 날, 점심 시간에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했고 그녀는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말을 트고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자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와 소주를 마신 다음 날, 우리는 너무 달라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나는 일방적으로 그 조약을 철폐시켰었다. 그녀는 그것에 항거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난 네가 싫어!’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르고 싶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왔다. 그녀가 할 얘기가 있느냐는 표정으로 빤하게 쳐다봤다. 난 그녀의 시선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뱃속이 부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 사출기로 돌아와서도 뱃속은 계속 부글거렸다. 그러고 보니 야간근무 삼 일째였다. 그녀에 대한 거부감이 소화불량을 촉진시킨 모양이었다.
사출기는 장시간 작동을 멈추면 기계 안에 남아 있는 적잖은 재료가 고열로 변질되어 못쓰게 된다. 회사에서는 작업효율의 극대화를 이룩하고 재료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막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24 시간 동안 사출기를 운행하였고, 당연히 공원들을 2 개조로 나누어 주야로 작업을 시켰다. 주간근무와 야간근무를 일주일 단위로 바꾸었는데 교대 후 이삼일간은 적응이 안돼 무척 피곤했다. 졸립고 소화도 잘 안되고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쓰레기를 씹는 맛이다. 낮에도 밤에도 적응이 안 되는 야간근무 삼 일째가 가장 견디기 힘든 날이었다.
따르르릉.
일초, 일초 헤아리던 억만 겁이 지나고 벨소리가 아득한 곳에서부터 들려 왔다. 그들이 산업전사인 우리에게 꼭 어울리는 만찬을 마련해 둔 2시가 되었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굶주림과 졸음으로 핏발이 선 전사들은 송아지 불고기와 통돼지 바베큐, 상어지느러미로 만든 수프가 천장에 닿도록 쌓여 있을 식당으로 몰려갔다.
‘뼈다귀고 접시고 남김없이 모조리 먹어 치워 주리라!’
그러나 그날은 시금치를 넣은 된장국이 스페셜 요리였다. 7년째 이 공장을 다니고 있는 노총각 송 반장이 된장국을 퍼서 전사들 앞에 한 그릇씩 놓아주었고, 전사들은 송아지고기를 뜯는 것보다 더 열심히 퍼먹었다.
난 소화불량 탓에 별로 밥 생각이 없었던 터라 부역을 하듯 숟가락질을 했다. 옆의 동료들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리학적 진리를 게걸스럽게 증명하고 있었다. 튼튼한 위장을 가진 그들이 부러웠다. 밥알이 씹으면 씹을수록 쓰게만 느껴졌다.
동료들은 저마다 일용할 양식을 깡그리 뱃속으로 쓸어 넣은 후, 식사시간의 나머지를 충혈 된 졸음에 투자하기 위해 앞다투어 작업장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때서야 비로소 나도 부역행위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여전히 끊길 듯 끊기지 않는 빗발을 바라보며 식당 앞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여 폐부 깊숙이 당겼다가 뿜어냈다. 나에게 흡연이란 유일한 생명연장 수단이었다. 나는 마지막 한 모금까지 악랄하게 빨아먹고 담배꽁초를 흙바닥에 던져 짓뭉게버렸다. 마치 그들이 우리를 그렇게 하는 것처럼.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작업장까지 뛰어갈까 걸어갈까 생각했다. 뛰어가기로 결심을 했지만 발길이 따라주지 못해 결국 천천히 걸어갔다. 땅바닥이 물기로 부드러워져 질퍽거렸다.
작업장 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정혜가 작업장 문 옆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여공들은 야간근무를 하지 않았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야간작업을 하는 여공이었는데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여자도 야간 근무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에겐 의무였고 그녀에겐 권리였다.
작업장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그녀의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었고,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이 났다.
“넌 죽어가고 있어.”
그녀의 말이 빗물처럼 차갑게 내 얼굴에 스쳤다.
“반말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난 우리의 조약을 상기시켰지만 그녀에겐 아무런 제동도 걸리지 않았다.
“흘러가지 않는 물이 썩듯이 움직이지 않으려는 인간도 죽은 거나 똑같아.”
난 진창에 버티고 서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졸음과 소화불량으로 늘어진 다리 근육에 힘을 주며 악착같이 한마디를 했다.
“난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 생각은 없습니다.”
“흥, 몽상과 희망의 중요한 차이점이 뭔지 알아?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느냐 있느냐가 달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가 있는가는 합리적인 노력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의해 결정지어지구. 그래, 넌 네 목표를 위해 어떤 합리적인 노력을 하고 있어?”
그녀의 말들이 날카롭게 가슴을 찢고 들어왔다. 그러나 난 그녀의 말에 간단히 수긍할 맘이 없었다.
“잘난 척 하지마.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행동양식이 있는 거야. 다 똑같을 수는 없어.”
나는 이 말을 내뱉고는 작업장으로 들어가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린 사출기들이 나에게 덤벼드는 것 같았다. 나는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문가에 주춤거렸다.
정혜가 등뒤로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돌아 서 봐.”
난 작업장으로 들어가기도 두려웠고 그녀를 돌아보기도 두려워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돌아 서 보라니까!”
그녀는 화를 내며 나를 억지로 잡아 돌렸다. 내가 마지못해 돌아서자 그녀의 얼굴이 내 얼굴로 달려들었다.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이 짧은 순간 포개어졌다가 떨어졌다. 그녀는 곧 내 목을 두 팔로 끌어안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황한 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그녀를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녀의 눈이 감기자 용기가 생긴 나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 보았다. 차갑던 그녀의 입술이 따뜻해져갔다. 그녀의 혀가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할 때 난 얼른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녀가 눈을 뜨고 날 쳐다보았다. 난 머쓱해졌다.
“우리 지금 나가자.”
그녀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싫어!”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에 그녀는 집으로 헌책을 한 보따리 들고 와 나에게 주었다. 1, 2년 정도 지난 대입참고서와 문제집들이었다. 내가 필요 없다고 박박 우기자 그녀는 그렇다면 밑닦는 데나 쓰라며 변소 앞에 그 책들을 팽개치고 가버렸다.
나는 소주를 사다가 그 헌책들을 노려보며 반병쯤 마셨다. 그리고는 그 책들을 끌어다가 방 한 구석에 처박아 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그 헌책들을 가지고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후로 서점에서 배회하는 버릇은 없어졌다.
정혜는 그 헌책들을 가져다 준 후 그게 밑닦개로 쓰이는지 뭐에 쓰이는지 일체 물어보지 않았다. 나에게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다. 나와 마주칠 때마다 한 쪽 눈을 찡긋하는 거였다.
“뭐하는 거야?”
그녀의 윙크를 서너 번쯤 받았을 때 무슨 엉뚱한 짓인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윙크를 하면서 대답했다.
“그냥.”
나는 피식 웃고 말았고 그 다음부터는 나도 장난 삼아 윙크를 했다. 그래서 우린 서로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윙크를 했다. 여전히 말은 별로 하지 않았다.
3
정혜와 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흠뻑 마셨고 섹스를 했다. 아니 사실은 섹스는 안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깨지는 아픔과 갈증으로 문득 정신이 들어보니 여관이었다. 아직 새벽이었는데 그녀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옆에 누워 있었다.
“머리가 아파 죽겠다……”
“술 깰 때는 머리가 아프잖아.”
“목도 말라……”
“물 마셔.”
난 물주전자를 집어들고 컵에 따를 새도 없이 주전자 째 벌컥 벌컥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나니 조금 정신이 났다. 그녀가 일어나 앉아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만 좀 쳐다 봐. 내가 네 눈빛에 얼마나 질렸는지 알기나 하니?”
내가 투덜댔지만 그녀는 시선을 거두어가지 않고 계속 날 쳐다봤다. 결국 나도 뚱한 시선으로 그녀를 한참 쳐다보았다. 결국 그녀가 고개를 먼저 돌렸다.
“우리 섹스했어.”
그녀는 나를 외면한 채 말했다.
“정말?”
난 얼른 나와 그녀의 옷차림을 살피면서 끊어진 기억들을 더듬어 봤다. 여관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여관에 들어오기 전에 처음 키스를 했고…… 아니야. 그건 두 번째 키스였고, 술집을 나와 어느 골목 담 그늘에서 처음 키스를 했어. 그리고 방 안에 들어와서 세 번째 키스를 했던 것 같아. 맞아 그리고…….”
그 다음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지만 섹스까지 했다면 분명히 기억이 날 것이다.
“옷도 그대로 다 입고 있는데? 거짓말 하지마.”
난 자신없는 말투로 부정했다.
“거짓말 아니야! 정말 했다니까!”
그녀는 나를 노려보며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녀가 화까지 내는 걸 보고는 정말 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미안해.”
나는 입맛이 썼다. 정혜를 절대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 또…… 할까?”
정혜가 머뭇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싫어.”
난 단호하게 거절했다.
“정말…… 싫어?”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싫다니까.”
“왜……? 우리가 서로 달라서……? 그래서 싫은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떨리고 있었다.
“넌 어차피 내 곁에서 떠날 게 분명해. 언제까지 네가 그리워서 목이 메이고 싶지 않단 말야.”
“아까도 했단 말야…….”
그 말을 하면서 그녀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아까는 아무 것도 기억 나지 않아. 네가 아무리 우겨도 난 기억나는 것이 없으니까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그녀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이마를 무릎에 댄 채 한참 동안 꼼짝하지 않았고, 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녀는 계속 그렇게 꼼짝도 않다가 내가 담배를 세 가치 째 피워 물었을 때 문득 고개를 들더니 내 손에서 담배를 뺐어 재떨이에 눌러 껐다.
“그만 좀 피워.”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걸 어떡해.”
난 말하면서 라이터를 켰다 껐다 하다가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왜 울어?”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지만 가슴 한 쪽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넌 말야…… 아주 나쁜 놈에다 멍텅구리야. 잘나빠진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오기나 부리고…… 겁먹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만 곤두세우고…….”
내 가슴은 그녀의 코 먹은 목소리에 점점 젖어 들었다.
“넌 어쩌면 그렇게 그 사람하고는 전혀 딴판이니?”
그녀를 구하려다 죽었다는 그 사람. 그녀가 사랑했던 그 사람일 것이다.
그녀는 내게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난 담배를 다시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잘 빨리지 않아 담배를 살펴보니 중동이 부러져 있었다. 난 새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려다가 정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몹시 가늘고 부러지기 쉽다고 느꼈다.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가 눈물젖은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다. 실낱같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져갔다.
4
“조선시대에는 물이 깊었었나봐. 바다에서 여기까지 나룻배가 오가곤 했다더라. 국민학교 다닐 때는 여기서 붕어나 피라미, 송사리 같은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어. 간혹 팔뚝만한 잉어가 잡히기도 했는데.”
풀잎이 돋아나는 자리에 골라 앉은 난 정혜에게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하천은 공장폐수로 오염되어 있었다. 회색빛 물은 그 위로 검은 부유물들이 둥둥 떠다녔고 매캐한 화공약품 냄새와 수초들이 썩어 가는 냄새가 뒤섞여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런 하천 가에도 푸른빛의 풀들이 자라난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직 겨울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풀잎들이 한 뼘 정도 자라나 있었다.
“이젠 전설이겠구나.”
그녀는 제방을 따라 멀어지는 하천 끝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 관뒀다며?”
난 그녀가 내 옆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나는 과장과 싸운 이후로 대명화학을 그만 두었지만 그녀는 계속 다니고 있었다.
“그놈이 기어코 내가 위장 취업자라는 걸 알아냈어.”
그녀는 썩어 가는 하천을 내려다보며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어 나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따 봐.”
내가 이빨로 병 뚜껑을 따서 그녀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그녀는 소주병을 입에 대고 한 모금을 꼴칵 마시고 말했다.
“어지간한 회사는 위장취업자 리스트를 가지고 있어서 이젠 위장 취업하기도 어려워. 그놈이 이 근처 공장에는 모두 알려줬어.”
그녀는 소주병을 나에게 넘겼다. 나도 그녀처럼 한 모금 꼴칵 마셨다. 소주맛은 여전히 몹시 쓰고 짰다.
“위장취업자 없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노동운동 안 하면 되잖아. 근본적인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소용없는 거라구.”
그녀는 대답 없이 소주를 또 한 모금 마셨다.
난 언젠가 그녀가 대명화학의 나약한 노조를 바꾸어야한다고 역설했던 것을 두고 얘기했다. 물론 아무도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공원들은 여기가 맘에 안 들면 저기로 가야지 하는 생각들뿐이었다. 무엇인가를 바꾸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녀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은 뻔히 보이는 길을 안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구, 어떤 사람은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길을 억지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
그녀의 시선이 악취 나는 하천에서 내 얼굴로 옮겨왔다.
“네 생각엔 누가 더 바보냐?”
나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소주를 나눠 마셨다.
결국 소주는 다 떨어지고 그녀가 먼저 일어섰다.
“나 그만 갈게.”
나도 따라 일어서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건데? 또 공장에 다닐 거야?”
그녀는 미소짓는 얼굴로 날 쳐다보다가 말했다.
“넌 어디로 갈 건데? 또 공장에 다닐 거니?”
나는 그 말에도 웃기만 했다. 똑같은 질문이었지만 똑같지 않은 질문이었다.
“저기 큰 길로 가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어디든 같이 갈래?”
나는 그 말에도 마찬가지로 웃기만 했다.
“또 만나자.”
그녀는 못내 아쉬운 듯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제방 둑을 따라 걸어갔다. 그 제방 둑은 아스팔트 도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도로는 하천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머언 바다까지 갈 수가 있다고들 했다. 난 문득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지곤 했었다. 자가용 승용차가 있는 사람들은 아주 가깝다고 했다. 그러나 시외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가야하는 내게는 너무 멀기만 한 거리여서 쉽게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몇 번 시외버스터미널의 매표소 근처를 어정거려 본 것이 시도의 전부였다.
정혜의 긴 뒷머리가 넘실거리면서 멀어지고 있었다. 난 별안간 정혜와 함께라면 바다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강원도 어느 산골짝가지 나를 끌고 가지 않았던가. 나는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정혜야아!”
그녀는 발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내가 달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파도치듯 일렁였고, 그녀의 머리 위로 바다처럼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잘 가아―”
그녀에게 큰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소리쳤다.
“같이 갈래애―?“
정혜가 나팔손을 대고 소리쳤다.
“아니야. 이젠 혼자 가 볼래― 걱정 말고 잘 가아―”
내가 다시 한 번 소리치자 그녀는 한 손을 높이 들어 힘차게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멀어져 갔다. 그것이 플라스틱 사출공장에서 만났던, 나에게 강제로 키스했던 정혜와의 마지막이었다.
성명: 오상혁
*성별: 남
*주소: (690-170)제주도 제주시 연동 2307-4
정한아파트 가동 102호
*이메일주소: tin2580@hanmail.net
*전화번호: (064)744-2580
*휴대폰번호: 016-9839-3400
오상혁
1989년, 그 당시 스물 네 살이었던 나에게 학벌에 대한 열등의식은 발정하듯 도지는 지랄병이었다. 대입참고서를 구비한 서점 앞을 지나다가도, 대학 다니는 녀석들이 소주를 마시며 ‘이슈’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형이상학적 고찰’이니 따위를 안주 대신 씹는 포장마차의 구석자리에 찌그러져 있다가도, 신문의 구인광고란에 ‘학력: 대졸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소지자’란 문구가 눈에 띄어도, 뇌세포가 바르르 경련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서점에 달려가 대입참고서를 사서 밤새 뒤적거리는 것으로 발작을 달랬다. 그럭저럭 효과가 있는 마약이었지만, 도대체 돈이 남아도는 일이 없었던 난 발작할 때마다 참고서를 살수는 없었다. 대개 그런 날은 동네 구멍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외상으로 사들고 골방으로 돌아와 가난한 아버지를 원망하며 마셨다. 그리고는 풀무질하듯 수음을 한 뒤 가까스로 잠이 들곤 했다.
정혜를 처음 만나게 되던 그날도 그렇게 밤늦게까지 소주병을 끌어안고 강간한 끝에 잠든 날이었다.
“아홉 시가 다됐는데 공장 안가고 여적 자빠져 있냐?”
방문이 덜컥 열리며 아버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내 머리를 쥐어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졸린 눈으로 머리맡을 더듬거렸다. 탁상시계가 8시 24분이라고 시간을 세어 주었다.
‘통근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는 시간은 20분전인데. 지금이라도 가야 할텐데…….’
생각과는 달리 고개가 다시 때 절은 베개 위로 처졌다.
그날도 석 달 내내 그랬던 것처럼 사출공장에 출근해 플라스틱 사출기가 바가지나 반찬통 따위를 토해 내면 그 꽁지를 잘라주어야 했다. 변화란 눈꼽만큼도 없는 반복 또 반복의 연속인 공장생활. 공장생활의 변화라고는 그 날에 뽑아야 할 제품의 수와 색깔뿐이었다. 반복이란 것은 정말 지겨운 고문이었다. 내가 그토록 고문을 당하는 이유는 오로지 월급 몇 푼을 적선 받기 위함이었다.
‘오늘은 공장에 가지 말까? 아프다는 핑계는 지난주에 써 먹었구…….’
월요일만 되면 더욱 공장에 출근하기가 싫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난 잔머리를 굴렸다.
“정전 땜에 오후 한 시까지 오랬단 말예요.”
그 순간 내가 다니는 사출공장은 까닭 없이 정전이 되어버렸다. 수요는 공급을 낳고 필요는 궁리를 낳고 강요는 편법을 낳는다. 아버지는 헛기침소리와 함께 후퇴했고 난 12시 10분까지 지각을 만끽했다.
그림자도 없는 공돌이 하나가 어슬렁거리며 버스정류장에 나타난 지 10분쯤 지나자 하늘색 줄무늬가 쳐진 시내버스가 도착하더니, 그 공돌이를 냉큼 주워 실었다. 몇 번을 오라이와 스톱을 외쳐 대던 버스안내양은 그 공돌이에게 150원의 뇌물을 받고는 사거리에 그 녀석을 슬쩍 내던지고 가버렸다. 그곳은 간선도로와 새마을 포장로가 교차하는 곳으로 공장들이 밀집한 지대였다. 대명화학, 삼양고무, 동진기계, 한진사출 따위의 글씨들과 함께 화살표가 페인트로 그려진 철판이 기둥에 여러 개 매달려 있었다. 철판은 녹이 잔뜩 나 마치 각종 지옥의 입구를 가리키는 것처럼 스산해 보였다.
‘오 버스 안내양이시여!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여기가 아니옵니다. 꿀과 젖이 흐르는 낙원, 자유와 희망이 있는 나라, 낭만과 열정이 있는 언덕으로 인도해 주옵시기를……! 빌어먹을 아멘. 엿이나 잡수소서……!’
사거리부터 내가 다니는 화학공장까지는 꽤 멀었다. 15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였지만 나는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이대로 걷는다면 30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지옥으로 서둘러 들어가고 싶은 맘은 없었다.
나는 걸어가며 담뱃불을 붙이려다가 돌부리에 걸려 중심을 잃고 길 옆의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풀숲에서 비둘기 몇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랐고 뒤에서 깔깔거리는 여자의 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아마도 그 여자는 버스정류장에서부터 내 뒤를 가만히 따라왔던 것 같았지만 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림자를 잃어버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난 풀숲에서 어기적거리며 나왔다. 그리고는 킥킥거리고 있는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머 저렇게 생긴 여자애가 다 있담?!’
아담한 체구, 날씬한 청바지, 하얀 파카, 긴 생 머리, 고른 치아, 커다란 검은 눈……. 유치하게도 마치 천사 같았다. 나는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찾아보기 어려운 분위기를 가진 그녀가 웃음이 멈추고 머쓱해 하다가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일 때까지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몇 발자국을 걷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나의 뒤를 쫓아오며 대명화학이란 공장이 어디인지 물었다. 생산직 사원으로, 그러니까 공순이로 취직하려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거긴 내가 다니는 플라스틱 사출공장이었다.
“그 곳은 지옥이나 마찬가진데……. 댁은 공장에나 취직할 만한 사람 같지 않은데요?”
그녀는 내 말에 픽 웃고는 대답했다.
“지옥도 천당으로 바꿀 수 있어요. 신념만 있다면 말예요.”
그러나 오히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엔 가물가물한 체념이 어렸다가 꺼졌다. 내게는 그런 그녀의 눈빛에서 그녀가 말하는 신념이란 것이 체념과 비슷한 의미로 와 닿았지만 어떻든 난 그녀의 말대로 신념을 가지기로 하고 그녀에게 엉뚱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내 신념은 천사류의 사람들에겐 따로 갈만한 천당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어코 대명화학을 찾아왔다.
그런 우습지도 않은 인연과, 알고 보니 그녀와 난 동갑내기라는 것 때문에 금방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쉽게 친해질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그녀가 정혜였다.
“자네, 사출부 직원 아냐? 잔업 안하고 어디 가나?”
6시 정각에 퇴근하려고 공장 정문을 나서던 난 생산과장에게 덜미를 잡혔다. 고등학교 중퇴인데다가 생산직 사원 출신인 그는 관리직 중에서 제일 승진이 느렸다. 그나마 몸을 사리지 않고 충성을 한 덕에 사십 줄에 알량한 생산과장 자리를 꿰찬 것이 겨우 두어 달 전이었다. 당연히 그는 위로는 비벼대고 아래로는 쥐어짜는,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잔업은 하고 싶은 사람이나 실컷 시키세요. 난 하기 싫으니까.”
난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라구?”
과장의 인상이 구겨졌다. 요런 맹랑한 놈 봐라 하는 얼굴이었다.
과장이 나에게 한마디하려는 순간 퇴근하던 사장 차가 우리에게 비켜서라고 크락션을 울렸다. 과장은 얼른 옆으로 비켜서서 고개를 깊이 숙였지만 난 뻣뻣하게 서서 지나가는 차 안의 사장 얼굴을 노려보았다. 사장의 얼굴은 똥파리처럼 통통하고 반짝거렸다.
“자네. 왜 사장님께 인사도 안 하나?”
“동네 아저씨도 아니고 나라를 구한 독립투사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인사를 합니까.”
난 간단히 코웃음쳤다.
“임금만 제대로 줘도 열심히 인사하겠다.”
과장은 얼굴이 노래졌다.
“자네 이름이 뭐야?”
“공돌이가 이름이나 제대로 있나?”
난 과장이 사납게 노려보는 것을 무시하고 공장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지랄병의 발작이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20 시 50 분까지 공장에 남아 잔업해야 한다는 산업전사의 사명을 이행할 맘이 도저히 내키지 않는 날이 늘어만 갔다. 그만큼 서점 앞이나 구멍가게 앞을 서성이는 날이 늘어만 갔다.
서점의 참고서 코너에서 꼭 한 권의 참고서 값인 삼천 원이 꼬깃꼬깃 접힌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리며 참고서를 살까, 아니면 현찰로 소주 한 병과 담배 5갑을 살까를 망설이며 ‘성문핵심영어’의 유혹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가만히 내 옆구리를 찔렀다. 서점의 통로가 비좁았으므로 지나가려는 사람인 줄 알고 난 책장에 바짝 붙어 섰다. 성문핵심영어의 표제가 요염하게 부풀어올랐다.
“대학 가려구?”
누군가 내 귓속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돌아보니 정혜가 내 곁에 서서 또랑또랑한 눈매로 쳐다보고 있었다. 난 잔뜩 발기한 자세를 풀었다.
“너두 잔업 안 하구 나왔나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참고서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마치 내가 그 참고서를 정복해서 승리감으로 환호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난 소주와 담배 다섯 갑 쪽이 훨씬 아쉬운 처지였기 때문에 그냥 서점을 나왔다.
정혜가 쪼르르 쫓아 나오며 물었다.
“참고서 안 사?”
“아니, 그냥 구경한 거야…… 돈도 없어.」
“내가 꿔 줄께.”
그녀는 얼른 파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 대학 갈 돈이 없다구.”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린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체념하고 말았다.
거리는 시시덕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참새처럼 행복해 보였다. 정혜와 나만이 그런 분위기에서 겉돌고 있었다. 우린 말도 없이 방향도 정하지 않은 채 거리 위를 떠다녔다.
“왜 날 자꾸 쫓아 다녀?”
기차가 하루에 몇 번쯤은 섰다가 간다는 역전 앞을 지날 때 정혜에게 뚱하게 말했다.
난 그녀를 떼어놓고 싶었다. 난 그녀가 늘 내 옆자리를 차지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공장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나, 노조회의를 할 때나, 가끔 휴식시간에 모여 있을 때나, 그녀는 그림자처럼 꼭 내 옆자리나 뒷자리를 차지했다. 첨엔 그저 제일 먼저 낯을 익힌 사람이라서 그러겠거니 했다. 그러나 점차 내가 그녀에게 관찰 당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그녀의 빤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조각 해체되는 것 같았다.
“우리 술 마시러 가자.”
정혜가 오히려 달라붙었다.
예의 그 빤한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나 좋아해?”
포장마차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공돌이가 옆자리의 말끔하게 생긴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가 공돌이를 쳐다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응. 좋아해.”
나는 그녀의 눈동자 대신 소주잔을 쳐다보면서 쓰게 웃었다.
나는 소주를 싫어했다. 투명한 잔에 담긴, 투명한 액체가 그렇게 쓰고 짜다는 것에 심한 배신감마저 느끼곤 했다.
“우린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야. 비슷하지도 않아.”
나는 단정짓듯 말했다.
“넌 그럼 누가 너랑 비슷하다고 생각해?”
“공순이, 접대부, 창녀…… 이런 여자들.”
나의 목소리엔 자조가 어렸다.
“난 지금 공순이고 얼마든지 창녀도 할 수 있어. 정말야.”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줏감들 속에는 닭똥집이 벌겋게 까발려져 있었다.
“임재석이라는 사람을 만났어.”
내 말에 소주잔을 애무하던 정혜의 손길이 딱 멈췄다. 정혜의 긴 머리카락이 수그러드는 고개를 넘어 가닥가닥 흘러내렸다.
“너에 대해서 들었어.”
며칠 전 난 정혜가 다니던 대학의 서클 선배라는 사람을 출근하던 길에 우연히 만났다. 그날도 적당히 음모를 꾸며 지각하던 날이었는데, 한 공장 담 옆에 서서 안을 기웃거리는 그를 발견하고는 수상히 여겨 탐색하는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는 나에게 들키자 지레 더듬거리다가 정혜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혹시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난 그를 경계하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다음 말들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햇볕이 드는 길가에 쪼그리고 앉더니 담배를 피우며 담배연기를 내뿜는 사이사이 열병환자처럼 중얼중얼 정혜에 대한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녀가 대학생 출신이라고 했다.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나는 육감적으로 그녀가 위장취업을 했다는 사실을 냄새맡고 있었으니까.
그의 말은 담배가 다 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혜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구로공단에서 야학을 했던 일과 그후에 위장취업 했던 봉제공장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전경들에게 붙잡혔던 일,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공원 출신의 노동운동가 하나가 필사적으로 막다가 맞아 죽었던 일, 충격을 받은 그녀는 더욱 노동운동에 매달렸고 결국 그것으로 형무소까지 다녀온 일…….
그런 것들은 노동자인 내 입장에선 체감적인 얘기였으나 아주 동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처럼 들렸다. 날품 파는 사람들에게는 부초같은 기질이 있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난 그의 마지막 담배꽁초가 그의 발 밑에 구겨질 때까지 결국 한 마디도 맞장구쳐 줄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정혜를 찾아온 목적을 끝내 말하지 않고 가버렸지만 그가 여기까지 그녀를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 운동가…… 정규교육이라곤 국민학교 밖에 안나온 공원이었어. 그렇지만 살아있는 눈빛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었어. 난 그의 여자가 되고 싶어했어.”
정혜는 문득 고개를 들더니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그 말을 했다. 그리고는 소주를 삼켰다.
우리는 포장마차를 나왔다. 술값은 정혜가 냈다. 난 치사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이의를 제기할 형편은 아니었다. 밖으로 나온 정혜는 똑바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꽤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짱해 보였다.
“오늘 나랑 같이 자자. 우리, 섹스하자.”
그녀는 웃지도 않으면서, 수줍어하지도 않으면서, 발음이 꼬이지도 않으면서, 그 말을 했다.
난 소름이 돋았다.
“싫어.”
난 그녀의 제의를 외면했다. 그녀는 내 한쪽 팔을 감아서 자기 옆구리에 끼웠다.
“여자랑 자본 적 있어?”
그녀는 입술만 일그러뜨려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창녀의 미소였다.
“왜 이래, 너?”
난 그녀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성을 냈다. 그녀가 다가오는 방법은 정말 나를 주눅들게 했다.
“천 원만 내. 거의 공짜야. 여관비가 모자라.”
나는 다시 매달리려는 그녀를 뿌리쳤다. 그 서슬에 그녀는 길바닥에 풀썩 엎어졌다. 난 그녀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나에게 손을 내밀고 애원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날 좀 일으켜 줘. 부탁이야. 기운이 하나도 없어. 우린 서로 도와야해.”
나는 그 말에 그녀에게 적개심이 부글부글 일어났다.
“넌 지금 사치하는 거야! 난 너 같은 것들 보면 역겨워. 이런 생활이 너한테는 즐거운 선택일 테지만 나한테는 피할 수 없는 족쇄란 말야!”
그녀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고 앉은 채로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내 정강이를 후려치려고 애썼다. 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이런 바보 같은 새끼가…… 잘나빠진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주제에……!! 뭐가 어떻다구? 니가 뭘 알아!”
그녀는 내가 손에 잡히지 않자 제풀에 지쳐 흐느적대다가 기어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꺼져. 꼴 보기도 싫어! 똥통에서 영원히 잘먹고 잘살아라. 병신같은 새끼……!”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삼켰다. 나도 그녀를 안아 일으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를 꿰뚫어보는 그녀에게 겁먹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찬 바닥에 그대로 내버려두고서는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의 꼬깃꼬깃한 천 원 짜리 지폐 석 장을 만지작거리며 서둘러 걷는 데만 몰두했다. 발걸음이 자꾸 엉켰다.
2
계절은 분명히 한겨울이었다. 징글벨이 징글징글하게 요란을 떨던 성탄절이 지난 지 열흘밖에 안됐을 때이므로 시간 관념상 틀림없는 한겨울이어야 했다. 뼈가 아삭아삭하도록 매서운 추위가 나다니고 가끔 공장의 뿌옇게 흐려진 창문 밖으로 눈발도 날려야 했다.
그런데 온종일 비가 오고 있었다. 라디오의 일기예보는 20년 만이라던가 25년 만이라던가 이상고온이라고 했다. 객관적인 목소리를 가진 아나운서는 눈이 없어서 스키장이 울상이라는 먼 나라의 떫은 소식과 올해 김 양식을 망쳤다는 이웃집 어부들의 한숨어린 소식을 같은 톤으로 전해주고 나서 뉴스를 마쳤다. 음악프로가 이어졌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 가수가 ‘인생이란 주연배우’라며 발광했다.
‘지랄 염병하네. 어느 인생극장에서 공돌이가 주연배우로 나온담.’
나는 괜스레 라디오 스피커를 째려보다가 내 앞의 7호기에 문제가 생긴걸 감지했다. 사출기는 덩치가 사람 키보다 커서 바로 앞의 사출기를 운전하는 사람이 보이진 않았지만 이상이 있는가 없는가는 금형의 철컹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인지 아닌지로 알 수 있었다.
내 사출기를 잠깐 멈추어놓고 7호기로 가 보았다. 정혜가 고집불통인 사출기와 버거운 씨름을 하고 있다가 내 모습을 보자 사출기에서 물러났다.
금형에 도시락 뚜껑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거 좀 줘 봐요.”
그녀는 들고 있던 놋쇠 꼬챙이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금형과 도시락뚜껑 사이에 박아 넣고 지렛대처럼 힘주어 튕겨냈다. 투명한 연보라색 반찬통 뚜껑이 우두둑 깨지면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는 그것을 주워서 재생용 제품을 담는 자루에 처박으면서 날 흘깃 쳐다보았다. 새삼 그녀가 보라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정혜는 나에게 놋쇠꼬챙이를 되돌려 받으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금형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형제를 5개에 한 번씩 뿌려 줘요.”
숙련공이 견습공에게 사출기의 충실한 종으로서의 의무를 일러주었다. 그래도 그녀는 별 대꾸가 없었다. 그녀의 긴 머리가 나의 시선을 떨쳐 버리려는 듯 두어 번 출렁였을 뿐이었다.
그녀가 입사한 다음 날, 점심 시간에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했고 그녀는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말을 트고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자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와 소주를 마신 다음 날, 우리는 너무 달라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나는 일방적으로 그 조약을 철폐시켰었다. 그녀는 그것에 항거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난 네가 싫어!’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르고 싶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왔다. 그녀가 할 얘기가 있느냐는 표정으로 빤하게 쳐다봤다. 난 그녀의 시선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뱃속이 부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 사출기로 돌아와서도 뱃속은 계속 부글거렸다. 그러고 보니 야간근무 삼 일째였다. 그녀에 대한 거부감이 소화불량을 촉진시킨 모양이었다.
사출기는 장시간 작동을 멈추면 기계 안에 남아 있는 적잖은 재료가 고열로 변질되어 못쓰게 된다. 회사에서는 작업효율의 극대화를 이룩하고 재료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막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24 시간 동안 사출기를 운행하였고, 당연히 공원들을 2 개조로 나누어 주야로 작업을 시켰다. 주간근무와 야간근무를 일주일 단위로 바꾸었는데 교대 후 이삼일간은 적응이 안돼 무척 피곤했다. 졸립고 소화도 잘 안되고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쓰레기를 씹는 맛이다. 낮에도 밤에도 적응이 안 되는 야간근무 삼 일째가 가장 견디기 힘든 날이었다.
따르르릉.
일초, 일초 헤아리던 억만 겁이 지나고 벨소리가 아득한 곳에서부터 들려 왔다. 그들이 산업전사인 우리에게 꼭 어울리는 만찬을 마련해 둔 2시가 되었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굶주림과 졸음으로 핏발이 선 전사들은 송아지 불고기와 통돼지 바베큐, 상어지느러미로 만든 수프가 천장에 닿도록 쌓여 있을 식당으로 몰려갔다.
‘뼈다귀고 접시고 남김없이 모조리 먹어 치워 주리라!’
그러나 그날은 시금치를 넣은 된장국이 스페셜 요리였다. 7년째 이 공장을 다니고 있는 노총각 송 반장이 된장국을 퍼서 전사들 앞에 한 그릇씩 놓아주었고, 전사들은 송아지고기를 뜯는 것보다 더 열심히 퍼먹었다.
난 소화불량 탓에 별로 밥 생각이 없었던 터라 부역을 하듯 숟가락질을 했다. 옆의 동료들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리학적 진리를 게걸스럽게 증명하고 있었다. 튼튼한 위장을 가진 그들이 부러웠다. 밥알이 씹으면 씹을수록 쓰게만 느껴졌다.
동료들은 저마다 일용할 양식을 깡그리 뱃속으로 쓸어 넣은 후, 식사시간의 나머지를 충혈 된 졸음에 투자하기 위해 앞다투어 작업장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때서야 비로소 나도 부역행위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여전히 끊길 듯 끊기지 않는 빗발을 바라보며 식당 앞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여 폐부 깊숙이 당겼다가 뿜어냈다. 나에게 흡연이란 유일한 생명연장 수단이었다. 나는 마지막 한 모금까지 악랄하게 빨아먹고 담배꽁초를 흙바닥에 던져 짓뭉게버렸다. 마치 그들이 우리를 그렇게 하는 것처럼.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작업장까지 뛰어갈까 걸어갈까 생각했다. 뛰어가기로 결심을 했지만 발길이 따라주지 못해 결국 천천히 걸어갔다. 땅바닥이 물기로 부드러워져 질퍽거렸다.
작업장 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정혜가 작업장 문 옆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여공들은 야간근무를 하지 않았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야간작업을 하는 여공이었는데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여자도 야간 근무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에겐 의무였고 그녀에겐 권리였다.
작업장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그녀의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었고,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이 났다.
“넌 죽어가고 있어.”
그녀의 말이 빗물처럼 차갑게 내 얼굴에 스쳤다.
“반말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난 우리의 조약을 상기시켰지만 그녀에겐 아무런 제동도 걸리지 않았다.
“흘러가지 않는 물이 썩듯이 움직이지 않으려는 인간도 죽은 거나 똑같아.”
난 진창에 버티고 서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졸음과 소화불량으로 늘어진 다리 근육에 힘을 주며 악착같이 한마디를 했다.
“난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 생각은 없습니다.”
“흥, 몽상과 희망의 중요한 차이점이 뭔지 알아?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느냐 있느냐가 달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가 있는가는 합리적인 노력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의해 결정지어지구. 그래, 넌 네 목표를 위해 어떤 합리적인 노력을 하고 있어?”
그녀의 말들이 날카롭게 가슴을 찢고 들어왔다. 그러나 난 그녀의 말에 간단히 수긍할 맘이 없었다.
“잘난 척 하지마.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행동양식이 있는 거야. 다 똑같을 수는 없어.”
나는 이 말을 내뱉고는 작업장으로 들어가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린 사출기들이 나에게 덤벼드는 것 같았다. 나는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문가에 주춤거렸다.
정혜가 등뒤로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돌아 서 봐.”
난 작업장으로 들어가기도 두려웠고 그녀를 돌아보기도 두려워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돌아 서 보라니까!”
그녀는 화를 내며 나를 억지로 잡아 돌렸다. 내가 마지못해 돌아서자 그녀의 얼굴이 내 얼굴로 달려들었다.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이 짧은 순간 포개어졌다가 떨어졌다. 그녀는 곧 내 목을 두 팔로 끌어안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황한 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그녀를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녀의 눈이 감기자 용기가 생긴 나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 보았다. 차갑던 그녀의 입술이 따뜻해져갔다. 그녀의 혀가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할 때 난 얼른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녀가 눈을 뜨고 날 쳐다보았다. 난 머쓱해졌다.
“우리 지금 나가자.”
그녀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싫어!”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에 그녀는 집으로 헌책을 한 보따리 들고 와 나에게 주었다. 1, 2년 정도 지난 대입참고서와 문제집들이었다. 내가 필요 없다고 박박 우기자 그녀는 그렇다면 밑닦는 데나 쓰라며 변소 앞에 그 책들을 팽개치고 가버렸다.
나는 소주를 사다가 그 헌책들을 노려보며 반병쯤 마셨다. 그리고는 그 책들을 끌어다가 방 한 구석에 처박아 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그 헌책들을 가지고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후로 서점에서 배회하는 버릇은 없어졌다.
정혜는 그 헌책들을 가져다 준 후 그게 밑닦개로 쓰이는지 뭐에 쓰이는지 일체 물어보지 않았다. 나에게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다. 나와 마주칠 때마다 한 쪽 눈을 찡긋하는 거였다.
“뭐하는 거야?”
그녀의 윙크를 서너 번쯤 받았을 때 무슨 엉뚱한 짓인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윙크를 하면서 대답했다.
“그냥.”
나는 피식 웃고 말았고 그 다음부터는 나도 장난 삼아 윙크를 했다. 그래서 우린 서로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윙크를 했다. 여전히 말은 별로 하지 않았다.
3
정혜와 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흠뻑 마셨고 섹스를 했다. 아니 사실은 섹스는 안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깨지는 아픔과 갈증으로 문득 정신이 들어보니 여관이었다. 아직 새벽이었는데 그녀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옆에 누워 있었다.
“머리가 아파 죽겠다……”
“술 깰 때는 머리가 아프잖아.”
“목도 말라……”
“물 마셔.”
난 물주전자를 집어들고 컵에 따를 새도 없이 주전자 째 벌컥 벌컥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나니 조금 정신이 났다. 그녀가 일어나 앉아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만 좀 쳐다 봐. 내가 네 눈빛에 얼마나 질렸는지 알기나 하니?”
내가 투덜댔지만 그녀는 시선을 거두어가지 않고 계속 날 쳐다봤다. 결국 나도 뚱한 시선으로 그녀를 한참 쳐다보았다. 결국 그녀가 고개를 먼저 돌렸다.
“우리 섹스했어.”
그녀는 나를 외면한 채 말했다.
“정말?”
난 얼른 나와 그녀의 옷차림을 살피면서 끊어진 기억들을 더듬어 봤다. 여관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여관에 들어오기 전에 처음 키스를 했고…… 아니야. 그건 두 번째 키스였고, 술집을 나와 어느 골목 담 그늘에서 처음 키스를 했어. 그리고 방 안에 들어와서 세 번째 키스를 했던 것 같아. 맞아 그리고…….”
그 다음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지만 섹스까지 했다면 분명히 기억이 날 것이다.
“옷도 그대로 다 입고 있는데? 거짓말 하지마.”
난 자신없는 말투로 부정했다.
“거짓말 아니야! 정말 했다니까!”
그녀는 나를 노려보며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녀가 화까지 내는 걸 보고는 정말 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미안해.”
나는 입맛이 썼다. 정혜를 절대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 또…… 할까?”
정혜가 머뭇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싫어.”
난 단호하게 거절했다.
“정말…… 싫어?”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싫다니까.”
“왜……? 우리가 서로 달라서……? 그래서 싫은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떨리고 있었다.
“넌 어차피 내 곁에서 떠날 게 분명해. 언제까지 네가 그리워서 목이 메이고 싶지 않단 말야.”
“아까도 했단 말야…….”
그 말을 하면서 그녀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아까는 아무 것도 기억 나지 않아. 네가 아무리 우겨도 난 기억나는 것이 없으니까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그녀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이마를 무릎에 댄 채 한참 동안 꼼짝하지 않았고, 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녀는 계속 그렇게 꼼짝도 않다가 내가 담배를 세 가치 째 피워 물었을 때 문득 고개를 들더니 내 손에서 담배를 뺐어 재떨이에 눌러 껐다.
“그만 좀 피워.”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걸 어떡해.”
난 말하면서 라이터를 켰다 껐다 하다가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왜 울어?”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지만 가슴 한 쪽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넌 말야…… 아주 나쁜 놈에다 멍텅구리야. 잘나빠진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오기나 부리고…… 겁먹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만 곤두세우고…….”
내 가슴은 그녀의 코 먹은 목소리에 점점 젖어 들었다.
“넌 어쩌면 그렇게 그 사람하고는 전혀 딴판이니?”
그녀를 구하려다 죽었다는 그 사람. 그녀가 사랑했던 그 사람일 것이다.
그녀는 내게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난 담배를 다시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잘 빨리지 않아 담배를 살펴보니 중동이 부러져 있었다. 난 새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려다가 정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몹시 가늘고 부러지기 쉽다고 느꼈다.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가 눈물젖은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다. 실낱같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져갔다.
4
“조선시대에는 물이 깊었었나봐. 바다에서 여기까지 나룻배가 오가곤 했다더라. 국민학교 다닐 때는 여기서 붕어나 피라미, 송사리 같은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어. 간혹 팔뚝만한 잉어가 잡히기도 했는데.”
풀잎이 돋아나는 자리에 골라 앉은 난 정혜에게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하천은 공장폐수로 오염되어 있었다. 회색빛 물은 그 위로 검은 부유물들이 둥둥 떠다녔고 매캐한 화공약품 냄새와 수초들이 썩어 가는 냄새가 뒤섞여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런 하천 가에도 푸른빛의 풀들이 자라난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직 겨울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풀잎들이 한 뼘 정도 자라나 있었다.
“이젠 전설이겠구나.”
그녀는 제방을 따라 멀어지는 하천 끝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 관뒀다며?”
난 그녀가 내 옆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나는 과장과 싸운 이후로 대명화학을 그만 두었지만 그녀는 계속 다니고 있었다.
“그놈이 기어코 내가 위장 취업자라는 걸 알아냈어.”
그녀는 썩어 가는 하천을 내려다보며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어 나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따 봐.”
내가 이빨로 병 뚜껑을 따서 그녀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그녀는 소주병을 입에 대고 한 모금을 꼴칵 마시고 말했다.
“어지간한 회사는 위장취업자 리스트를 가지고 있어서 이젠 위장 취업하기도 어려워. 그놈이 이 근처 공장에는 모두 알려줬어.”
그녀는 소주병을 나에게 넘겼다. 나도 그녀처럼 한 모금 꼴칵 마셨다. 소주맛은 여전히 몹시 쓰고 짰다.
“위장취업자 없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노동운동 안 하면 되잖아. 근본적인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소용없는 거라구.”
그녀는 대답 없이 소주를 또 한 모금 마셨다.
난 언젠가 그녀가 대명화학의 나약한 노조를 바꾸어야한다고 역설했던 것을 두고 얘기했다. 물론 아무도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공원들은 여기가 맘에 안 들면 저기로 가야지 하는 생각들뿐이었다. 무엇인가를 바꾸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녀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은 뻔히 보이는 길을 안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구, 어떤 사람은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길을 억지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
그녀의 시선이 악취 나는 하천에서 내 얼굴로 옮겨왔다.
“네 생각엔 누가 더 바보냐?”
나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소주를 나눠 마셨다.
결국 소주는 다 떨어지고 그녀가 먼저 일어섰다.
“나 그만 갈게.”
나도 따라 일어서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건데? 또 공장에 다닐 거야?”
그녀는 미소짓는 얼굴로 날 쳐다보다가 말했다.
“넌 어디로 갈 건데? 또 공장에 다닐 거니?”
나는 그 말에도 웃기만 했다. 똑같은 질문이었지만 똑같지 않은 질문이었다.
“저기 큰 길로 가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어디든 같이 갈래?”
나는 그 말에도 마찬가지로 웃기만 했다.
“또 만나자.”
그녀는 못내 아쉬운 듯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제방 둑을 따라 걸어갔다. 그 제방 둑은 아스팔트 도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도로는 하천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머언 바다까지 갈 수가 있다고들 했다. 난 문득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지곤 했었다. 자가용 승용차가 있는 사람들은 아주 가깝다고 했다. 그러나 시외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가야하는 내게는 너무 멀기만 한 거리여서 쉽게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몇 번 시외버스터미널의 매표소 근처를 어정거려 본 것이 시도의 전부였다.
정혜의 긴 뒷머리가 넘실거리면서 멀어지고 있었다. 난 별안간 정혜와 함께라면 바다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강원도 어느 산골짝가지 나를 끌고 가지 않았던가. 나는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정혜야아!”
그녀는 발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내가 달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파도치듯 일렁였고, 그녀의 머리 위로 바다처럼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잘 가아―”
그녀에게 큰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소리쳤다.
“같이 갈래애―?“
정혜가 나팔손을 대고 소리쳤다.
“아니야. 이젠 혼자 가 볼래― 걱정 말고 잘 가아―”
내가 다시 한 번 소리치자 그녀는 한 손을 높이 들어 힘차게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멀어져 갔다. 그것이 플라스틱 사출공장에서 만났던, 나에게 강제로 키스했던 정혜와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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