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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혁-단편소설2(2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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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를 켜는 영혼
오상혁
희정은 아파트 문 앞에서 불안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키를 꽂아 문을 열었다. 그녀는 좁은 거실에 벌어져 있는 풍경에 시선을 쏟아 붓고 서서 뼈마디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희정의 남편은 카펫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구겨진 신문지 한 장을 얼굴에 덮고 그 위에 팔을 얹은 채로. 그녀 쪽을 향해 드러난 그의 더러운 발바닥을 보자 그녀는 구역질이 났다. 빈 맥주 깡통들이 바퀴벌레처럼 그의 주변에서 우글거렸다. 길가 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이 열려진 사이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람이 누런 신문지들을 이리저리 날렸다. 희정은 매번 면역조차 되지 않는 고통을 삼키며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엎어진 맥주 깡통에서 흘러나온 술이 카펫 위에 쏟아져 발 밑이 물컹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깡통을 냅다 걷어찼다. 그것은 총알처럼 날아가 벽에 부딪히면서 비명을 질렀다. 남편이 신문을 홱 젖히고 일어나 살쾡이처럼 그녀에게서 가방을 나꿔채 내동댕이친 것도 거의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끈이 끊어져 개꼬리같이 늘어진 가방에서 이가 맞지 않는 도시락 통이 튕겨져 나왔고, 먹다 남은 밥알과 멸치, 콩나물 대가리들이 어수선하게 쏟아졌다. 아,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인 양 그녀를 부끄럽게 했다.
“병―신!”
희정은 그녀의 입에서 시위를 떠난 화살이 남편의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질린 듯 유령처럼 밖으로 나갔다. 희정은 눈알이 빠지도록 그가 사라지고 없는 빈 자리를 노려보았다. 한참 후 그녀는 정신이 들어 시계를 보았다. 여섯 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민호는 어디 갔을까. 이런 집안 골이 싫어 나갔겠지, 방학인데 온종일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하면서 희정은 온통 수라장인 집안을 치워나갔다. 그리고 서둘러 샤워를 하고 부엌으로 갔다. 뭐 데워먹을 것이 없나 하고 냉장고 문을 여니 어제 형님 댁에서 준 잡채 한 접시가 보였다. 희정은 그것을 꺼내 다시 볶았다. 오늘은 일부러 한 시간 반이나 일찍 공장에서 나왔다. 그런데 교통 사고를 낸 차가 두 개의 차도를 막고 있는 바람에 후리웨이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야 말았다. 제발 오늘은 평탄하고 기분 좋게 보낼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가.
식탁에 간단한 음식 몇 가지를 놓고 있을 때 민호가 왔다.
“엄마, 나 늦지 않았지?”
하며 희정의 얼굴을 살폈다.
“일찍 오지, 엄마가 걱정했잖아. 혹시 잊어버렸나 하고.”
희정은 민호의 얼굴을 보자 맺히고 쓰린 가슴이 스르르 진정되었다.
“스미스하고 스미스 커즌하고 팍에 가서 놀았어. 스미스 아빠가 늦게 데리러 와서 늦었어. 엄마, 미안.”
“괜찮아, 아유 이 땀냄새. 그래도 지금 샤워할 시간은 없다. 손하고 얼굴 씻고 와서 밥 먹어. 빨리 빨리.”
희정은 배가 고팠지만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해치우고 옷을 입었다. 스웨터 하나도 여분으로 꺼내놓았다. 민호에게도 옷을 따뜻하게 입으라고 일렀다. 벨소리가 난다고 방에서 민호가 소리쳤다.
아파트 주인 여자였다. 일본 여인답지 않게 뚱뚱하고 거친 그 여자는 벌레씹은 얼굴을 하고 문밖에 버티고 서 있었다.
“당신 남편 어젯밤 집에 있었나요?”
희정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대답을 못했다. 또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세스 청이 내게 전화했어요. 당신 남편이 어젯밤에 저기서 오줌을 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틀림없이 당신 남편이었대요.”
그 여자는 당신 남편이라는 말에 꽝꽝 못을 박으면서 아파트 건물 한편에 자리한 화단을 연신 가리켰다. 그리고는 내가 얼마나 힘들여 가꾼 화단인데 네 남편이 그따위 몹쓸 짓을 하느냐고 부르르 떨며 쇳소리를 뽑아내었다. 희정은 항상 뱀같이 쪼아보는 미세스 청, 그 늙은 중국 여인을 떠올렸다. 주인 여자와 친구라는 권세를 힘입어 마주칠 때마다 당당하고 뻣뻣했다. 민호가 친구라도 데려와 마당에서 놀라치면 그 여자는 발코니에 나와 시종 쏘아보면서 아이들의 기를 죽였다. 어느 날은 아이들이 수영장에 돌을 집어넣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가보면 돌멩이는 보이지도 않았다. 고주망태 술꾼인 남편은 그 여자의 먹이였다. 이번엔 옳게 걸렸지.
“그럴 리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꽃밭 앞에 서 있는 것을 잘못 보았겠지요.”
희정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늙은 중국 여자가 정확히 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능히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렇다고 주인 여자 앞에서 어찌 그것을 인정하겠는가.
“미세스 청도 놀라고 창피해서 눈 여겨 볼 수는 없었대요. 밤이었으니까 잘못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신 남편 어쩐지 기분 나빠요. 앞으로 다시 한번 그런 신고를 받게 되면 경찰에 알리고 당신들을 내쫓겠어요.”
주인 여자는 나치와 같이 서슬이 퍼랬다. 민호가 야단맞은 아이처럼 우울한 표정으로 곁에 서 있었다. 주인 여자가 돌아서다 말고 다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왜 아직도 쓰레기통들이 밖에 나와 있지 않지요? 전번같이 아침에 내놓으려는 건 아니겠지요. 지금 당장 해요.”
아, 왜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밥은 못 먹어도 그 일부터 해놓았어야 했는데. 희정은 석 달을 기다려온 음악회가 저만치 떠나가고 있음을 보았다. 음악회 입장권 두 장을 받아 쥐고 아이와 펄쩍펄쩍 뛰다가 그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세라 이곳에서는 생전 입을 것 같지 않은 겨울 코트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두고 살그머니 꺼내보곤 했었다. 그 먼 먼 기다림의 끝이 오늘이었다.
희정은 쓰레기장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민호가 쓰레기통 하나를 밖으로 내가고 있었다.
“저것이…….”
희정은 눈앞이 뿌예졌다. 열두 개의 커다란 양철통들이 입이 터지도록 쓰레기를 물고서 바닥 위로 줄줄 흘리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양이들이 플라스틱 봉지들을 찢고 꺼내먹다 흘린 음식 찌꺼기가 발 밑에서 마구 밟혔다. 왕파리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튀어나와 윙윙거리며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희정은 쓰레기통을 도르래 위에 싣고 번개처럼 나르면서 남편을 저주했다. 밤이나 낮이나 술만 쳐 먹고 방바닥 위에 나뒹구는 버러지, 쓰레기.
그녀가 이곳으로 이사오던 날, 주인 여자가 넌지시 물어왔다. 한 달에 두 번 아파트 물청소를 해주고, 일주일에 한 번 쓰레기차가 치워가도록 쓰레기통들을 길가로 내다놓는 일을 해보겠느냐고. 그러면 아파트 렌트비에서 백 불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희정은 2층 건물의 크지도 않은 아파트를 둘러보고서 쉽게 응낙하였다. 차라리 고마운 일이었다. 열 살 되는 민호를 위해 방 두 개 짜리 아파트를 얻는 일은 아무리 그의 형님이 도와준다고 해도 혼자 벌어서 살아가는 희정에게는 무리였다. 그러나 술 취한 아빠를 피해 이곳저곳에서 쓰러져 자는 아이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곳으로 왔다. 제 방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민호의 환한 얼굴이 희정의 눈에는 쓰라리기만 하여 어린것을 가슴에 품고 속으로 울었다.
일이 다 끝나고 보니 7시 20분이었다. 제발 길만 막히지 말아다오, 길만 막히지 말아다오 하고 희정은 빌었다.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그녀는 쓰레기통 밑바닥에서 새어나온 오물이 신발 속으로 흘러 들어갔음을 알았다. 희정은 스타킹을 신은 채 수돗물에 발을 씻어냈다. 신발도 그렇게 몇 번 흔들어대다가 물기를 뺐다. 휴지 몇 장을 신발 안쪽에 깔았다. 그 모양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민호에게 희정은 씽끗 웃어 보였다. 괜찮다는 뜻에서였다. 그들이 드디어 차에 올랐을 때 두 사람의 몸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쓰레기 냄새를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안고 달렸다.
헐리웃 볼로 바지는 길에서 차는 완전히 정지되었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 함께 멈추어 선 차들이 모두 음악회로 향하는 것 같았다. 그들 무리에 섞여 있으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공연 시작 시간인 8시가 넘어서야 희정은 간신히 후리웨이 출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파킹 안내원들이 늘어서서 열심히 팔을 휘젓고 있는 곳에 다다랐어도 희정은 차를 세울 수 없음을 알았다. 그들은 음악당과는 반대 방향으로 몰려오는 차들을 보냈다. 길 양편으로 아직도 많은 무리들이 음악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 끝 쪽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나왔다. 저들은 어디에다 차를 세우고 오는 것일까.
“엄마, 어떻게 하지 응? 엄마, 미안.”
민호는 자신의 탓인 양 미안해했다.
“괜찮아, 왜 네가 미안하다고 그래, 그런 말 하지마. 그리고 걱정마. 걱정한다고 빨리 가는 것 아니잖아? 우리 마음 편하게 먹자.”
희정은 심약한 아이를 달랬다. 말은 그랬어도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이대로 무작정 따라만 갈 수가 없어서 그녀는 다시 음악당을 향해 차를 돌렸다. 그러나 아까와 같이 그 근처에서 다시 밀려났고, 이제는 북쪽으로 정처 없이 갔다. 차들도 행인도 뜸해졌다. 희정은 개천가를 따라가다가 다리를 건너 다시 북쪽으로 갔다. 차 한두 대가 멋모르고 그녀를 따라왔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오르다가 차를 세울 만한 자리를 보았다. 차 한 대가 거기 세워져 있었다. 그 뒤에 차를 세우고 거기서부터 그들은 뛰기 시작했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쏟아져 내렸다. 아무리 아무리 달려도 목표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노래 한 곡이 끝난 듯 천지에 우박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간신히 입구에 다다랐을 때 캄캄하던 음악당 안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영문을 묻자 안내원이 휴식 시간이라고 말했다. 둘은 길 옆 돌의자에 주저앉았다. 한발조차 내디딜 수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희정은 신발을 벗고 모래와 작은 돌멩이들을 털어 냈다. 물기 먹은 휴지 조각들이 갈갈이 흩어져 나왔다.
“뭐 좀 마실래?”
희정은 손수건으로 아이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물었다. 민호는 화가 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스낵 파는 곳이 조금 한가해지자 희정은 콜라 한 캔을 사다가 민호에게 줬다. 아이는 달게 마셨다. 그녀도 몇 모금 얻어 마셨다.
희정은 프로그램 한 권을 얻어가지고 자리를 찾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민호가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울었다. 희정은 영문을 몰라하다가 손수건을 꺼내주며 민호의 어깨를 흔들었다.
“왜 그래, 왜 우는 거야. 다 큰 사내녀석이.”
민호는 손수건을 받아들고는 아예 얼굴을 파묻고 더욱 세게 어깨를 들먹였다.
“정말 이 애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희정의 화난 음성에 민호가 얼굴을 들었다.
“엄마가 이 콘서트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난 다 알아, 엄마 마음이 슬프다는 걸…….”
희정은 목젖이 찢어지게 아파 왔다. 옆자리의 서양 할머니가 아이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희정은 그가 늦게 와서 놓쳐버린 노래들 때문에 속이 상해 운다고 말했다. 그 할머니는 좋은 노래는 이제부터 시작이니 걱정 말라고 말해 주라고 했다. 희정은 팔을 돌려 민호를 안아주었다. 이윽고 사방의 불빛은 사라지고, 저 아래 까마득한 무대만이 목화송이 같이 따뜻하고 환하게 피어올랐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지휘자 뒤를 따라서 등장했다. 박수 소리는 사라지고 오케스트라가 포문을 열었다. 희정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온통 드러낸 보름달이, 그녀의 동네보다 훨씬 많고 영롱한 별들이 거기에 있었다. 파바로티의 노랫소리는 무대에서가 아닌 저 하늘 머나먼 곳에서 이쪽으로 흘러왔다. 별나라 지나 산 넘고 강 건너 온 바람으로, 뇌성으로.
희정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의 솜털이 가시가 되어 빠득빠득 살아온 5년의 세월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남편은 죽으면서 살고 그녀는 살면서 죽어갔다. 그러나 지금 희정은 그녀 앞에 벌어지고 있는 어떤 삶도 실감되어지지 않았다. 핏발선 두 눈이 스르르 감기고 새벽 바다 물안개에 포근히 젖어가듯 그녀, 사막의 혼은 흥건히 젖어갔다.
희정은 사람의 물결을 따라 지하도 층계를 내려가면서 민호의 손을 잡았다.
“어때, 좋았어?”
“응, 많이. 엄마는?”
“굉장했어. 마지막 앵콜 송으로 내슨 도르마를 들은 것은 정말 기가 막혔어, 아!”
흥분한 두 사람은 한참 지껄이며 가다가 어딘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얘, 민호야. 올 때는 이렇게 많이 안 왔잖아? 잘못 왔나봐.”
“그래 엄마, 다시 돌아가야 돼.”
희정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하도 층계를 내려가자마자 바로 왼쪽으로 꺾어 올라가야 했다. 차 있는 곳으로 가야할 일도 아득한데 이 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다니. 허벅지에서부터 발바닥까지 못 견디게 아파 왔다. 둘은 벽 쪽으로 붙어 익스큐즈 미, 익스큐즈 미 하며 가지런한 비늘을 꺾듯 어렵게 앞으로 나아갔다.
희정이 그녀 앞에 우뚝 선 사람을 본 것은 그로부터 몇 분 후.
두 사람은 말을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최도현, 그가 희정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도현과 동행인 것 같은 남자도, 민호도 영문을 모른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비켜 갔다.
“희정아, 너지? 너지?”
“…….”
희정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 애가 민호냐? 이렇게 컸어? 아, 총각이구나. 길에서 보면 모르겠네.”
시키지 않았어도 민호가 꾸벅 인사를 했다. 희정은 도현의 환한 얼굴을 눈부시게 바라보았다. 그를 만난 것으로 고통의 세월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성급한 갈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도현이는 여전하네.”
희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느리게 입을 떼었다.
“그런데 어딜 가는 거야, 왜 이쪽으로 오고 있지?”
“길을 잘못 들었어. 다시 돌아가야 돼. 내 차가 있는 곳은 한참 먼 곳이야.”
“네가 길을 잘못 든 덕분에 만났구나. 이거 참 희한한 일인데, 내 차로 데려다줄게. 같이 나가자.”
희정이와 민호는 방향을 돌려 그들과 함께 나갔다.
“홍철이는 어디 갔냐, 그 자식 어디 있어?”
“어디 좀 갔어.”
희정이 내키지 않는 대답을 했다.
“그자식, 작년에 서울 왔다갔다는 소식을 나중에야 들었어. 알고보니 내게만 연락 안한 게 아니라 우리 패거리 모두에게였더라구.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모이면 씹고 씹었다. 그자식…….”
도현은 민호를 의식한 듯 입을 다물었다.
“이거, 소개가 늦었군요. 이쪽은 헨리 김, 회사 동료시고, 이쪽은 강희정 씨, 희정씨와 희정씨 남편은 제 대학 동창입니다.”
도현을 양옆으로 끼고 두 사람이 조금 고개를 내밀어 인사를 나눴다.
“도현이는 언제 이곳에 왔어?”
“3개월이 되어 가. 우리 회사 지사가 여기 있거든. 2주 후에는 돌아가.”
“민희씨랑 애들도 잘 있고?”
“응, 난 유럽에서 반 년 살고 집에서 반 년 살고 하는 바람에 식구들에게는 말이 아니지 뭐. 그건 그렇고. 정말 홍철이하고 너, 소식 끊은 거 용서 못한다. 여기 와서도 한동안 찾았어. 난 너희들이 딴 주로 가버린 줄 알았다.”
“하는 일은 어때?”
희정은 어색한 듯 말머리를 돌렸다.
“항상 배우는 거지 뭐.”
희정은 도현이 아버지의 근엄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였고 도현은 그의 충실한 아들이었다. 어디에도 모난 구석이 없는 도현. 부잣집 아들이란 티도 안 내고 그렇다고 굳이 겸손해 하지도 않는 깨끗한 공기처럼 편안한 사람이었다. 젊은 날의 희정이 눈에는 그런 그가 너무 개성이 없다고 구박만 하였었지. 히스클리프 같이 애증의 눈알을 번뜩이는 홍철에게 미쳐 돌아가던 때였으니까.
도현의 차를 타고 길을 찾아가는 동안 모두들 말이 없었다. 희정이 때때로 이쪽으로, 저쪽으로 하는 방향 지시 외에는. 도현은 희정이 급속도로 무거운 침묵에 쌓여 가는 것을 조심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그녀의 초라한 행색이 그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어쩐지 홍철이가 잘못되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야.”
희정의 차가 무당벌레같이 아주 작은 모습으로 달빛을 받고 있었다. 도현이 그 뒤에다가 차를 정지시키고 희정을 바라보았다.
“너 아직도 굉장한 사람이구나. 여기서부터 뛰어갔다는 말이지?”
“응.”
“알 만하다. 죽을 고생을 했겠구나. 파바로티가 네 정성을 알았다면 한 곡조 더 뽑았을 텐데 말이야.”
모두들 하하 하고 웃었다. 도현은 운전석에 앉아 희정이 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내일 볼 수 있을까? 홍철이하고.”
희정이 종이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내 이름 대면 바꿔줄 거야.”
“집 전화는?”
희정은 그 말에는 대꾸도 안하고 시동을 켰다.
“잘 가.”
집에 돌아온 희정은 거실 램프 불부터 켰다. 남편은 소파 위에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소리에 예민한 그가 그네들이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듣고, 약하게 코마저 고는 것을 보니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술은 더 먹지 않았는지 방안이 깨끗했다. 희정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나 앙상히 말랐는지 부피라곤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얇고 누추한 헝겊 조각이었다. 실험실 한구석에 보초를 서고 있는 스켈레톤처럼 살덩이를 거부한 비참한 골격만이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 같았다. 아니 그녀를 향해 죽일 듯 항변하고 있었다. 오늘밤 어찌된 영문으로 그를 이렇듯 살펴보고 있는 것인가. 희정은 냉소를 지으며 그 자리를 떴다.
희정은 정성스레 몸을 닦았다. 젖은 머리를 말려 웨이브를 넣으면서 어깨 너머로 넘실거리는 머리칼을 쓸어 내렸다. 머리를 싹독 자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야 하고 뇌까렸다. 진하지는 않으나 곱게 얼굴을 다듬었다. 민호가 불안한 듯 다가왔다.
“엄마, 어제 그 아저씨 만나?”
“그래.”
“아빠는? 그 아저씨 아빠 친구 같던데.”
“아빠는 뭐 하시니?”
“내 방에서…….”
뒷말을 못 잇는 것을 보니 술을 마시고 있겠지.
“엄마 혼자만 나가.”
거 보란 듯이 힘주어 말했다. 민호가 입을 삐죽하면 방을 나갔다. 옷치장을 끝낸 희정도 곧 뒤따라 나왔다. 그때 희정은 화장실에서 나오는 남편과 마주쳤다. 그녀는 거기에 사람이 없는 듯 지나쳤다. 진한 향수냄새가 획을 그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민호가 엄마 언제 와, 하고 물었다.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마.”
희정은 남편을 의식하며 조금 크게 대답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는 저녁 시간이 이른 탓인지 비어있는 자리가 많았다. 도현은 우선 바에서 한잔하려고 했으나 희정이 노천 테이블로 나가자고 했다. 웨이터가 테이블 위에 땅콩을 수북히 깔아주고 갔다.
해풍이 바다 비린내를 묻혀와 희정의 전신에 쏟아 부었다. 그녀의 실크 드레스가 부드럽고 섬세한 파문을 일으키며 추운 살갗을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노란 부리, 흰 가슴의 물새들이 그들 머리 위로 낮게 날아갔다. 바다가 해지는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그쪽을 향해 앉은 도현은 눈이 부셔 가는 시선으로 희정의 안색을 살폈다. 이런 시간도 내게 오는구나. 따뜻한 남자가 내 옆에 있고…… 희정은 달콤한 잠에 빠지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걷어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도현의 팔목에 수북한 솜털을 쓸러주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 지금 너무너무 좋아. 이건 그냥 은총이라고 부르고 싶어.”
“정말이지?”
도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이렇게 되물었으나 그 말이 그녀의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신신 당부했는데도 홍철이를 동반하지 않고 혼자 나와서,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지금의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녀의 허기를 매번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희정은 술잔을 들면서 음식을 먹으라는 도현의 요청에 고개를 저었다.
“얼음물이면 최고야. 술기운으로 얼버무릴 생각은 없어.”
“무슨 뜻이야?”
“난 오늘밤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말짱한 정신으로 도현에게 다가갈 테니까.”
희정은 절대로 농담이 아니란 투로 정색을 하고 말했다. 도현은 씹지 않은 입안의 음식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그녀를 수용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그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여자가 정녕 희정이란 말인가. 도현은 수십 번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 아래로 내려가자.”
식사가 끝나자 도현은 희정을 일어서게 했다. 모래알은 아직도 태양의 체온을 지니고 있었다. 발끝까지 달려온 파도가 자꾸만 흰 거품을 물어다주었다. 모래 위에 물새 발자국은 무수히 또렷한데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희미한 지평선마저 거두어가고, 하늘과 바다가 검게 한 몸이 되었다.
“정 선생님 사모님이 돌아가셨다며?”
“응. 재작년에. 그 소식은 어디서 들었어?”
“……바람결에.”
“정 선생님, 사모님 여의시고 근 1년을 죽은 사람같이 지내셨어. 신혼 초부터 사모님 고생시키신 거야 세상이 다 알잖아. 지금처럼 대연출가로 인정을 받고 있으셔도 집안일 안 돌보시는 것은 여전하셨어. 그래서 고통이 더욱 크셨겠지.”
“지금도 일 안 하셔?”
“아니, 참 기이한 일로 선생님 살아나셨어.”
“어떻게?”
“작년에 누군가가 희곡 한 편을 집으로 보내왔대. 그것을 읽으시고 회생하신 거야.”
“누가 썼는데?”
“그게 말이야, 겉봉에 쓰인 주소는 맞는데 그곳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거야. 그 주소를 거쳐간 사람들을 거슬러 올라가도 감 잡을 만한 사람을 못 찾았대. 작가 미상이라 떨떠름하게 보던 관계자들도 한번 읽어보고 두말을 안 했대. 작품명이 「불꽃살인」이라나봐. 내가 여기 오기 전에 한참 연습 중이었는데 지금 공연 두 달째래. 그 굉장한 반응은 물어보나 마나고.”
“연극 얘기는 흥미 없어.”
“그럼, 선생님 얘기는 왜 물어?”
“선생님 가끔 보고 싶어.”
젊은 부부가 아이를 목마 태우고 그들 옆으로 지나갔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어린 풀잎처럼 싱그러웠다.
희정이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홍철이 얘길 해봐.”
도현이 바다 쪽을 향해 서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희정은 대답이 없다. 그녀가 구두를 벗어들고 모래 위에 발자국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자, 도현이 뒷짐을 지고 따랐다. 언덕 위 레스토랑에서 이따금 알 수 없는 노래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사람 죽어가…… 살기 싫어하니 죽어가는 것 아니겠어?”
“어떻게 하고 있는데?”
“술, 술만 먹고 나자빠져 있어. 지금은 특히 심해. 밥 한술 안 먹은 지가 보름은 되었을걸. 그래도 난 상관 안 해. 우리는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으니까.”
모래사장 편편한 가슴 위로 그녀가 찍어내고 있는 발자국마저 섬뜩해 보였다. 도현은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는지 답답했다. 해초냄새 몰고 오는 바람 앞에서도 밀실에 갇힌 양 목구멍이 조여왔다. 자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망가져 여기까지 와 있는 동안 자기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하고 가슴을 쳤다.
“연극을 하게 하지 그래. 그 녀석에게서 연극을 빼면 시체잖아?”
“연극에서 손을 떼겠다고 한 것이 누군데? 그것을 말린 것은 누구고?”
희정이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이 아름다운 밤을 썩어 냄새나는 그의 이야기로 망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모두 토해 내고도 싶었다.
“이곳에 온 후 얼마 동안은 이것저것 의욕 있게 해보는 듯했어. 어딜 가도 6개월을 못 넘겼지만. 나중에 공부나 해보라고 그의 형님이 대학엘 가게 했지. 그 일 년 동안이 가장 편안했어. 그러더니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사람 바로 추락해 갔어. 어쩌다 입을 열면 한다는 말이 캘리포니아 태양이 자기를 죽이고 있다는 거야. 참다 참다못해 서울 가서 다시 연극을 해보겠냐고 물어도 별 반응이 없었어. 작년에 서울간 것도 내가 쫓아보낸 거야. 그가 연극을 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으니까. 그랬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도현이나 다른 동료들은 하나도 안 만나고 여관방에서 색시 데려다놓고 놀았다더군.”
“홍철이가 아마 달라진 서울 분위기를 알아채고 지레 접근을 안 한 것이겠지. 내 후배 한 놈이 연극 공연장에서 객석에 앉아 있는 홍철이를 보았다는 거야. 그가 왔다는 소식을 못 들었기에 비슷한 사람인가 보다 했었대.”
“세상에 어느 누가 어서 오십시오, 하고 자기를 위해 자리를 깔아준대? 지가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매사에 부딪혀 보지도 않고 물러서는 그 패배자의 꼬락서니가 나는 너무너무 싫어. 진저리가 나. 아니 싸워보지도 않았으니까 패배자 축에 낄 수도 없겠군. 한때 그 사람이 혼신을 다해 연기를 했다는 것도 이제 와보니 다 거짓이야, 기만이야. 그가 무대 위에 올랐을 때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던 내 이 두 눈을 흔적도 없이 씻어내고 싶어.”
“희정아,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돼. 네 미움이 너무 그를 다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네가 뭐라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연극인인 그를 인정해. 난 배우는 아니지만 그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홍철이가 사랑한 것은 연극 그 자체만은 아니었어.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가 하던 말이 생각나니? 무대 장치를 만들기 위해 꽝꽝 못질하는 그 소리가 자기를 흥분시킨다고 했었어. 대패로 문지르고, 톱으로 자르고, 바닥에 톱밥이 떨어지면 주머니에 가득 주워 담고 웃었지. 시끄럽고 번잡하고 긴장과 열기, 허튼 소리로 가득한 그 공기마저 다 마셔버리고 싶다고 했었잖아. 난 잊혀지지 않아.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연출 선생의 욕지거리를 들을 수 없어 힘줄이 약해진다고 했었지. 김밥 나르던 할머니를 우리 연극 동료라고 누구에게 소개하던 그 놈이야. 그런 놈이 혼자 남겨지면 죽게 되지.”
“지금 내 현실하고는 너무 동떨어진 얘기야. 내가 그런 것 몰랐었나? 그런 그를 사랑한 것은 바로 나였어. 하지만 그 사람 곁에 살아보지 않고는 아무도 몰라. 그가 지금 혼자라면, 그래서 죽게 된다면 그것은 그가 선택한 마지막 연기가 되겠지. 그 사람 자신이나 나나 민호, 이웃들, 이 모두가 그가 사랑할 대상 아니야? 지금 바로 이 삶의 무대에서 어우러져야 하는 그의 역할을 외면하려 드는 것이지? 난 그래도 오랫동안 그를 동정했어. 그에게 산소를 공급해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니 내 몸의 산소마저도 다 빠져갔어. 그가 술을 마시며 휘청거릴 때 나는 봉제 공장에서 실 먼지를 마시며 헝겊 조각을 산더미같이 쌓아올렸어. 전기 재봉틀이 드르륵 내 심장을 갉아갈 때도 난 울지 않았어. 그가 내 목을 조여올 때 맞서 싸워준 것은 깨진 지구라도 꿰맬 것 같은 그 소리 때문이었지. 헝겊 조각 밑에 그를 깔아 넣고 마구 박아댔으니까. 이렇게 이를 갈면서, 하루에도 수백 번 살인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아이의 양식을 사다니 제정신이 들면 너무 슬퍼져.”
희정은 지친 듯 모래 위에 주저앉았다. 도현은 홍철이의 밥상에서 수저를 빼앗은 것은 정녕 무엇인가 생각했다. 하얀 물새 한 마리가 어둠 저편에서 파도를 타고 있었다. 파도를 타고 있으면 물결 따라 가까이 다가와야 할텐데, 새는 뒤뚱거리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쪽으로 오려는 간절한 몸짓 같기도 하고 거기 머물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새가 희정을 안타깝게 했다. 희정의 긴 머리칼이 깃발처럼 날렸다. 도현은 그녀의 우울한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었다. 그의 손길이 이마 위에 느껴지자 불길이 희정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파도처럼 그것은 거듭거듭 밀려왔다. 얼음장같은 절망을 안고서라도 이 밤 도현에게 투신하고 싶었던 옹골찬 독기가 이제 살아서 목마른 세포 밖으로 맥없이 빠져나갔다.
“희정아, 그래 오늘밤 나하고 있자.”
도현은 희정의 머리를 감싸쥐고 그 작은 섬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를 만지고 싶은 불길 한 가닥을 비수처럼 품고서 그녀의 주변을 맴돌다가 친구라는 어정쩡한 위치로 들어앉고 만 젊은 날의 공허가 오늘 그 빚을 갚기 위해 기다렸나보다. 희정의 머리칼이 도현의 손가락 사이에서 한 올, 한 올 기쁨의 춤을 추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오래도록 그녀의 이마 위에 머물러, 한겨울 삭풍에 견디어온 마른 나뭇가지의 떨림을 닦아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그곳에서 도현은 긴 속눈썹을 어우르고 콧등으로, 그리고 힘차게 입술을 열었다.
목놓아 부서지는 바다의 외마디가 이어졌다 끊어지고 끊어졌다 이어졌다.
물새는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파도가 튀어 오르면 보이지 않다가 그것이 스러지면 새는 살아났다. 숨바꼭질하듯 그러나 한 치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도현의 어깨 너머 허공을 맴돌던 희정의 풀어진 눈동자가 수십 번의 앵글을 돌려 초점을 찾았고, 새가 이제 새가 아님으로 하여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희정은 벙어리가 된 듯 말을 토해 내지 못하고 손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도현이 그녀가 가리키는 손끝의 방향을 못 따라가자 희정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불꽃살인! 그건 그의 것이야.”
언젠가 기억할 수 없는 날짜 밑에 <불꽃살인 탈고>라고 적힌 그의 메모지를 보았던 것이다. 새는, 아니 홍철은 검은 바다 한가운데서 그렇게 첼로를 켜고 있었다.
홍철은 아내가 남기고 간 짙은 향수 자리에 서서 이제는 홀가분해졌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랫동안 밥을 먹지 않고도 허기를 몰랐던 주린 창자가 신호를 보냈다. 따뜻한 밥을 먹고 더운물에 몸이라도 담그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이빨부터 닦아 구린내를 몰아내고 싶기도 했다. 바싹 마른 쇠똥처럼 되어 어디 핏줄이라도 한 가닥 흐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육식이 부스스 눈을 여는 것이었다. 아내가 수십 년을 건너뛰어 그녀 본연의 자태로 돌아간 오늘밤의 모습이 그의 남은 생명 얼마를 살아 있게 만들다니 신기했다. 너 때문에 나까지 죽어간다고 가슴을 쥐어뜯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홍철은 추락해 가는 무서운 속도를 멈추고 그녀를 그의 영역 밖으로 떼밀어 낼 수 없음을 얼마나 저주했던가. 아내가 오늘밤 어느 사내의 품속에서 잠이 든다고 해도 그것은 그녀의 생존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홍철은 온몸이 쥐가 난 듯 찌릿찌릿해 오자 민호의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밥을 먹어본다던가, 목욕을 한다던가 하는 따위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육신의 여력을 그는 갖고 있지 못했다.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안된다 하면서도 그대로 꼼짝 않고 몇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홍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이라도 무서운 두통과 환청에서 벗어나고 싶어 머리를 흔들었다.
홍철은 아무도 들춰보지 않는 선반에서 힘겹게 원고 뭉치들을 끄집어냈다. 두 권으로 분리해 놓은 것을 한데 묶었다. 그는 아직 죽지 않은 광대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작은 메모지에 <이것을 정수만 선생께 전해주시오.>라고 적어 그 위에 놓았다. 그리고 그는 방을 나왔다. 여태껏 잠들지 않은 민호의 얼굴을 보자 마음에 동요가 왔다. 녀석을 한번 가슴에 안아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가 고작 한 일이라고는 <짜식, 잘 자.> 이것뿐이었다.
70년도형 낡은 왜건 한 대가 깃털처럼 가벼운 육신, 그러나 고단한 영혼 하나를 태우고 바퀴를 돌렸다.
성명: 오상혁
*성별: 남
*주소: (690-170)제주도 제주시 연동 2307-4
정한아파트 가동 102호
*이메일주소: tin2580@hanmail.net
*전화번호: (064)744-2580
*휴대폰번호: 016-9839-3400
오상혁
희정은 아파트 문 앞에서 불안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키를 꽂아 문을 열었다. 그녀는 좁은 거실에 벌어져 있는 풍경에 시선을 쏟아 붓고 서서 뼈마디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희정의 남편은 카펫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구겨진 신문지 한 장을 얼굴에 덮고 그 위에 팔을 얹은 채로. 그녀 쪽을 향해 드러난 그의 더러운 발바닥을 보자 그녀는 구역질이 났다. 빈 맥주 깡통들이 바퀴벌레처럼 그의 주변에서 우글거렸다. 길가 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이 열려진 사이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람이 누런 신문지들을 이리저리 날렸다. 희정은 매번 면역조차 되지 않는 고통을 삼키며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엎어진 맥주 깡통에서 흘러나온 술이 카펫 위에 쏟아져 발 밑이 물컹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깡통을 냅다 걷어찼다. 그것은 총알처럼 날아가 벽에 부딪히면서 비명을 질렀다. 남편이 신문을 홱 젖히고 일어나 살쾡이처럼 그녀에게서 가방을 나꿔채 내동댕이친 것도 거의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끈이 끊어져 개꼬리같이 늘어진 가방에서 이가 맞지 않는 도시락 통이 튕겨져 나왔고, 먹다 남은 밥알과 멸치, 콩나물 대가리들이 어수선하게 쏟아졌다. 아,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인 양 그녀를 부끄럽게 했다.
“병―신!”
희정은 그녀의 입에서 시위를 떠난 화살이 남편의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질린 듯 유령처럼 밖으로 나갔다. 희정은 눈알이 빠지도록 그가 사라지고 없는 빈 자리를 노려보았다. 한참 후 그녀는 정신이 들어 시계를 보았다. 여섯 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민호는 어디 갔을까. 이런 집안 골이 싫어 나갔겠지, 방학인데 온종일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하면서 희정은 온통 수라장인 집안을 치워나갔다. 그리고 서둘러 샤워를 하고 부엌으로 갔다. 뭐 데워먹을 것이 없나 하고 냉장고 문을 여니 어제 형님 댁에서 준 잡채 한 접시가 보였다. 희정은 그것을 꺼내 다시 볶았다. 오늘은 일부러 한 시간 반이나 일찍 공장에서 나왔다. 그런데 교통 사고를 낸 차가 두 개의 차도를 막고 있는 바람에 후리웨이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야 말았다. 제발 오늘은 평탄하고 기분 좋게 보낼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가.
식탁에 간단한 음식 몇 가지를 놓고 있을 때 민호가 왔다.
“엄마, 나 늦지 않았지?”
하며 희정의 얼굴을 살폈다.
“일찍 오지, 엄마가 걱정했잖아. 혹시 잊어버렸나 하고.”
희정은 민호의 얼굴을 보자 맺히고 쓰린 가슴이 스르르 진정되었다.
“스미스하고 스미스 커즌하고 팍에 가서 놀았어. 스미스 아빠가 늦게 데리러 와서 늦었어. 엄마, 미안.”
“괜찮아, 아유 이 땀냄새. 그래도 지금 샤워할 시간은 없다. 손하고 얼굴 씻고 와서 밥 먹어. 빨리 빨리.”
희정은 배가 고팠지만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해치우고 옷을 입었다. 스웨터 하나도 여분으로 꺼내놓았다. 민호에게도 옷을 따뜻하게 입으라고 일렀다. 벨소리가 난다고 방에서 민호가 소리쳤다.
아파트 주인 여자였다. 일본 여인답지 않게 뚱뚱하고 거친 그 여자는 벌레씹은 얼굴을 하고 문밖에 버티고 서 있었다.
“당신 남편 어젯밤 집에 있었나요?”
희정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대답을 못했다. 또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세스 청이 내게 전화했어요. 당신 남편이 어젯밤에 저기서 오줌을 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틀림없이 당신 남편이었대요.”
그 여자는 당신 남편이라는 말에 꽝꽝 못을 박으면서 아파트 건물 한편에 자리한 화단을 연신 가리켰다. 그리고는 내가 얼마나 힘들여 가꾼 화단인데 네 남편이 그따위 몹쓸 짓을 하느냐고 부르르 떨며 쇳소리를 뽑아내었다. 희정은 항상 뱀같이 쪼아보는 미세스 청, 그 늙은 중국 여인을 떠올렸다. 주인 여자와 친구라는 권세를 힘입어 마주칠 때마다 당당하고 뻣뻣했다. 민호가 친구라도 데려와 마당에서 놀라치면 그 여자는 발코니에 나와 시종 쏘아보면서 아이들의 기를 죽였다. 어느 날은 아이들이 수영장에 돌을 집어넣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가보면 돌멩이는 보이지도 않았다. 고주망태 술꾼인 남편은 그 여자의 먹이였다. 이번엔 옳게 걸렸지.
“그럴 리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꽃밭 앞에 서 있는 것을 잘못 보았겠지요.”
희정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늙은 중국 여자가 정확히 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능히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렇다고 주인 여자 앞에서 어찌 그것을 인정하겠는가.
“미세스 청도 놀라고 창피해서 눈 여겨 볼 수는 없었대요. 밤이었으니까 잘못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신 남편 어쩐지 기분 나빠요. 앞으로 다시 한번 그런 신고를 받게 되면 경찰에 알리고 당신들을 내쫓겠어요.”
주인 여자는 나치와 같이 서슬이 퍼랬다. 민호가 야단맞은 아이처럼 우울한 표정으로 곁에 서 있었다. 주인 여자가 돌아서다 말고 다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왜 아직도 쓰레기통들이 밖에 나와 있지 않지요? 전번같이 아침에 내놓으려는 건 아니겠지요. 지금 당장 해요.”
아, 왜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밥은 못 먹어도 그 일부터 해놓았어야 했는데. 희정은 석 달을 기다려온 음악회가 저만치 떠나가고 있음을 보았다. 음악회 입장권 두 장을 받아 쥐고 아이와 펄쩍펄쩍 뛰다가 그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세라 이곳에서는 생전 입을 것 같지 않은 겨울 코트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두고 살그머니 꺼내보곤 했었다. 그 먼 먼 기다림의 끝이 오늘이었다.
희정은 쓰레기장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민호가 쓰레기통 하나를 밖으로 내가고 있었다.
“저것이…….”
희정은 눈앞이 뿌예졌다. 열두 개의 커다란 양철통들이 입이 터지도록 쓰레기를 물고서 바닥 위로 줄줄 흘리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양이들이 플라스틱 봉지들을 찢고 꺼내먹다 흘린 음식 찌꺼기가 발 밑에서 마구 밟혔다. 왕파리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튀어나와 윙윙거리며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희정은 쓰레기통을 도르래 위에 싣고 번개처럼 나르면서 남편을 저주했다. 밤이나 낮이나 술만 쳐 먹고 방바닥 위에 나뒹구는 버러지, 쓰레기.
그녀가 이곳으로 이사오던 날, 주인 여자가 넌지시 물어왔다. 한 달에 두 번 아파트 물청소를 해주고, 일주일에 한 번 쓰레기차가 치워가도록 쓰레기통들을 길가로 내다놓는 일을 해보겠느냐고. 그러면 아파트 렌트비에서 백 불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희정은 2층 건물의 크지도 않은 아파트를 둘러보고서 쉽게 응낙하였다. 차라리 고마운 일이었다. 열 살 되는 민호를 위해 방 두 개 짜리 아파트를 얻는 일은 아무리 그의 형님이 도와준다고 해도 혼자 벌어서 살아가는 희정에게는 무리였다. 그러나 술 취한 아빠를 피해 이곳저곳에서 쓰러져 자는 아이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곳으로 왔다. 제 방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민호의 환한 얼굴이 희정의 눈에는 쓰라리기만 하여 어린것을 가슴에 품고 속으로 울었다.
일이 다 끝나고 보니 7시 20분이었다. 제발 길만 막히지 말아다오, 길만 막히지 말아다오 하고 희정은 빌었다.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그녀는 쓰레기통 밑바닥에서 새어나온 오물이 신발 속으로 흘러 들어갔음을 알았다. 희정은 스타킹을 신은 채 수돗물에 발을 씻어냈다. 신발도 그렇게 몇 번 흔들어대다가 물기를 뺐다. 휴지 몇 장을 신발 안쪽에 깔았다. 그 모양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민호에게 희정은 씽끗 웃어 보였다. 괜찮다는 뜻에서였다. 그들이 드디어 차에 올랐을 때 두 사람의 몸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쓰레기 냄새를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안고 달렸다.
헐리웃 볼로 바지는 길에서 차는 완전히 정지되었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 함께 멈추어 선 차들이 모두 음악회로 향하는 것 같았다. 그들 무리에 섞여 있으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공연 시작 시간인 8시가 넘어서야 희정은 간신히 후리웨이 출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파킹 안내원들이 늘어서서 열심히 팔을 휘젓고 있는 곳에 다다랐어도 희정은 차를 세울 수 없음을 알았다. 그들은 음악당과는 반대 방향으로 몰려오는 차들을 보냈다. 길 양편으로 아직도 많은 무리들이 음악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 끝 쪽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나왔다. 저들은 어디에다 차를 세우고 오는 것일까.
“엄마, 어떻게 하지 응? 엄마, 미안.”
민호는 자신의 탓인 양 미안해했다.
“괜찮아, 왜 네가 미안하다고 그래, 그런 말 하지마. 그리고 걱정마. 걱정한다고 빨리 가는 것 아니잖아? 우리 마음 편하게 먹자.”
희정은 심약한 아이를 달랬다. 말은 그랬어도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이대로 무작정 따라만 갈 수가 없어서 그녀는 다시 음악당을 향해 차를 돌렸다. 그러나 아까와 같이 그 근처에서 다시 밀려났고, 이제는 북쪽으로 정처 없이 갔다. 차들도 행인도 뜸해졌다. 희정은 개천가를 따라가다가 다리를 건너 다시 북쪽으로 갔다. 차 한두 대가 멋모르고 그녀를 따라왔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오르다가 차를 세울 만한 자리를 보았다. 차 한 대가 거기 세워져 있었다. 그 뒤에 차를 세우고 거기서부터 그들은 뛰기 시작했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쏟아져 내렸다. 아무리 아무리 달려도 목표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노래 한 곡이 끝난 듯 천지에 우박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간신히 입구에 다다랐을 때 캄캄하던 음악당 안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영문을 묻자 안내원이 휴식 시간이라고 말했다. 둘은 길 옆 돌의자에 주저앉았다. 한발조차 내디딜 수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희정은 신발을 벗고 모래와 작은 돌멩이들을 털어 냈다. 물기 먹은 휴지 조각들이 갈갈이 흩어져 나왔다.
“뭐 좀 마실래?”
희정은 손수건으로 아이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물었다. 민호는 화가 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스낵 파는 곳이 조금 한가해지자 희정은 콜라 한 캔을 사다가 민호에게 줬다. 아이는 달게 마셨다. 그녀도 몇 모금 얻어 마셨다.
희정은 프로그램 한 권을 얻어가지고 자리를 찾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민호가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울었다. 희정은 영문을 몰라하다가 손수건을 꺼내주며 민호의 어깨를 흔들었다.
“왜 그래, 왜 우는 거야. 다 큰 사내녀석이.”
민호는 손수건을 받아들고는 아예 얼굴을 파묻고 더욱 세게 어깨를 들먹였다.
“정말 이 애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희정의 화난 음성에 민호가 얼굴을 들었다.
“엄마가 이 콘서트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난 다 알아, 엄마 마음이 슬프다는 걸…….”
희정은 목젖이 찢어지게 아파 왔다. 옆자리의 서양 할머니가 아이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희정은 그가 늦게 와서 놓쳐버린 노래들 때문에 속이 상해 운다고 말했다. 그 할머니는 좋은 노래는 이제부터 시작이니 걱정 말라고 말해 주라고 했다. 희정은 팔을 돌려 민호를 안아주었다. 이윽고 사방의 불빛은 사라지고, 저 아래 까마득한 무대만이 목화송이 같이 따뜻하고 환하게 피어올랐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지휘자 뒤를 따라서 등장했다. 박수 소리는 사라지고 오케스트라가 포문을 열었다. 희정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온통 드러낸 보름달이, 그녀의 동네보다 훨씬 많고 영롱한 별들이 거기에 있었다. 파바로티의 노랫소리는 무대에서가 아닌 저 하늘 머나먼 곳에서 이쪽으로 흘러왔다. 별나라 지나 산 넘고 강 건너 온 바람으로, 뇌성으로.
희정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의 솜털이 가시가 되어 빠득빠득 살아온 5년의 세월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남편은 죽으면서 살고 그녀는 살면서 죽어갔다. 그러나 지금 희정은 그녀 앞에 벌어지고 있는 어떤 삶도 실감되어지지 않았다. 핏발선 두 눈이 스르르 감기고 새벽 바다 물안개에 포근히 젖어가듯 그녀, 사막의 혼은 흥건히 젖어갔다.
희정은 사람의 물결을 따라 지하도 층계를 내려가면서 민호의 손을 잡았다.
“어때, 좋았어?”
“응, 많이. 엄마는?”
“굉장했어. 마지막 앵콜 송으로 내슨 도르마를 들은 것은 정말 기가 막혔어, 아!”
흥분한 두 사람은 한참 지껄이며 가다가 어딘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얘, 민호야. 올 때는 이렇게 많이 안 왔잖아? 잘못 왔나봐.”
“그래 엄마, 다시 돌아가야 돼.”
희정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하도 층계를 내려가자마자 바로 왼쪽으로 꺾어 올라가야 했다. 차 있는 곳으로 가야할 일도 아득한데 이 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다니. 허벅지에서부터 발바닥까지 못 견디게 아파 왔다. 둘은 벽 쪽으로 붙어 익스큐즈 미, 익스큐즈 미 하며 가지런한 비늘을 꺾듯 어렵게 앞으로 나아갔다.
희정이 그녀 앞에 우뚝 선 사람을 본 것은 그로부터 몇 분 후.
두 사람은 말을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최도현, 그가 희정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도현과 동행인 것 같은 남자도, 민호도 영문을 모른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비켜 갔다.
“희정아, 너지? 너지?”
“…….”
희정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 애가 민호냐? 이렇게 컸어? 아, 총각이구나. 길에서 보면 모르겠네.”
시키지 않았어도 민호가 꾸벅 인사를 했다. 희정은 도현의 환한 얼굴을 눈부시게 바라보았다. 그를 만난 것으로 고통의 세월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성급한 갈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도현이는 여전하네.”
희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느리게 입을 떼었다.
“그런데 어딜 가는 거야, 왜 이쪽으로 오고 있지?”
“길을 잘못 들었어. 다시 돌아가야 돼. 내 차가 있는 곳은 한참 먼 곳이야.”
“네가 길을 잘못 든 덕분에 만났구나. 이거 참 희한한 일인데, 내 차로 데려다줄게. 같이 나가자.”
희정이와 민호는 방향을 돌려 그들과 함께 나갔다.
“홍철이는 어디 갔냐, 그 자식 어디 있어?”
“어디 좀 갔어.”
희정이 내키지 않는 대답을 했다.
“그자식, 작년에 서울 왔다갔다는 소식을 나중에야 들었어. 알고보니 내게만 연락 안한 게 아니라 우리 패거리 모두에게였더라구.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모이면 씹고 씹었다. 그자식…….”
도현은 민호를 의식한 듯 입을 다물었다.
“이거, 소개가 늦었군요. 이쪽은 헨리 김, 회사 동료시고, 이쪽은 강희정 씨, 희정씨와 희정씨 남편은 제 대학 동창입니다.”
도현을 양옆으로 끼고 두 사람이 조금 고개를 내밀어 인사를 나눴다.
“도현이는 언제 이곳에 왔어?”
“3개월이 되어 가. 우리 회사 지사가 여기 있거든. 2주 후에는 돌아가.”
“민희씨랑 애들도 잘 있고?”
“응, 난 유럽에서 반 년 살고 집에서 반 년 살고 하는 바람에 식구들에게는 말이 아니지 뭐. 그건 그렇고. 정말 홍철이하고 너, 소식 끊은 거 용서 못한다. 여기 와서도 한동안 찾았어. 난 너희들이 딴 주로 가버린 줄 알았다.”
“하는 일은 어때?”
희정은 어색한 듯 말머리를 돌렸다.
“항상 배우는 거지 뭐.”
희정은 도현이 아버지의 근엄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였고 도현은 그의 충실한 아들이었다. 어디에도 모난 구석이 없는 도현. 부잣집 아들이란 티도 안 내고 그렇다고 굳이 겸손해 하지도 않는 깨끗한 공기처럼 편안한 사람이었다. 젊은 날의 희정이 눈에는 그런 그가 너무 개성이 없다고 구박만 하였었지. 히스클리프 같이 애증의 눈알을 번뜩이는 홍철에게 미쳐 돌아가던 때였으니까.
도현의 차를 타고 길을 찾아가는 동안 모두들 말이 없었다. 희정이 때때로 이쪽으로, 저쪽으로 하는 방향 지시 외에는. 도현은 희정이 급속도로 무거운 침묵에 쌓여 가는 것을 조심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그녀의 초라한 행색이 그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어쩐지 홍철이가 잘못되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야.”
희정의 차가 무당벌레같이 아주 작은 모습으로 달빛을 받고 있었다. 도현이 그 뒤에다가 차를 정지시키고 희정을 바라보았다.
“너 아직도 굉장한 사람이구나. 여기서부터 뛰어갔다는 말이지?”
“응.”
“알 만하다. 죽을 고생을 했겠구나. 파바로티가 네 정성을 알았다면 한 곡조 더 뽑았을 텐데 말이야.”
모두들 하하 하고 웃었다. 도현은 운전석에 앉아 희정이 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내일 볼 수 있을까? 홍철이하고.”
희정이 종이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내 이름 대면 바꿔줄 거야.”
“집 전화는?”
희정은 그 말에는 대꾸도 안하고 시동을 켰다.
“잘 가.”
집에 돌아온 희정은 거실 램프 불부터 켰다. 남편은 소파 위에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소리에 예민한 그가 그네들이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듣고, 약하게 코마저 고는 것을 보니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술은 더 먹지 않았는지 방안이 깨끗했다. 희정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나 앙상히 말랐는지 부피라곤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얇고 누추한 헝겊 조각이었다. 실험실 한구석에 보초를 서고 있는 스켈레톤처럼 살덩이를 거부한 비참한 골격만이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 같았다. 아니 그녀를 향해 죽일 듯 항변하고 있었다. 오늘밤 어찌된 영문으로 그를 이렇듯 살펴보고 있는 것인가. 희정은 냉소를 지으며 그 자리를 떴다.
희정은 정성스레 몸을 닦았다. 젖은 머리를 말려 웨이브를 넣으면서 어깨 너머로 넘실거리는 머리칼을 쓸어 내렸다. 머리를 싹독 자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야 하고 뇌까렸다. 진하지는 않으나 곱게 얼굴을 다듬었다. 민호가 불안한 듯 다가왔다.
“엄마, 어제 그 아저씨 만나?”
“그래.”
“아빠는? 그 아저씨 아빠 친구 같던데.”
“아빠는 뭐 하시니?”
“내 방에서…….”
뒷말을 못 잇는 것을 보니 술을 마시고 있겠지.
“엄마 혼자만 나가.”
거 보란 듯이 힘주어 말했다. 민호가 입을 삐죽하면 방을 나갔다. 옷치장을 끝낸 희정도 곧 뒤따라 나왔다. 그때 희정은 화장실에서 나오는 남편과 마주쳤다. 그녀는 거기에 사람이 없는 듯 지나쳤다. 진한 향수냄새가 획을 그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민호가 엄마 언제 와, 하고 물었다.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마.”
희정은 남편을 의식하며 조금 크게 대답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는 저녁 시간이 이른 탓인지 비어있는 자리가 많았다. 도현은 우선 바에서 한잔하려고 했으나 희정이 노천 테이블로 나가자고 했다. 웨이터가 테이블 위에 땅콩을 수북히 깔아주고 갔다.
해풍이 바다 비린내를 묻혀와 희정의 전신에 쏟아 부었다. 그녀의 실크 드레스가 부드럽고 섬세한 파문을 일으키며 추운 살갗을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노란 부리, 흰 가슴의 물새들이 그들 머리 위로 낮게 날아갔다. 바다가 해지는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그쪽을 향해 앉은 도현은 눈이 부셔 가는 시선으로 희정의 안색을 살폈다. 이런 시간도 내게 오는구나. 따뜻한 남자가 내 옆에 있고…… 희정은 달콤한 잠에 빠지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걷어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도현의 팔목에 수북한 솜털을 쓸러주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 지금 너무너무 좋아. 이건 그냥 은총이라고 부르고 싶어.”
“정말이지?”
도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이렇게 되물었으나 그 말이 그녀의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신신 당부했는데도 홍철이를 동반하지 않고 혼자 나와서,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지금의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녀의 허기를 매번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희정은 술잔을 들면서 음식을 먹으라는 도현의 요청에 고개를 저었다.
“얼음물이면 최고야. 술기운으로 얼버무릴 생각은 없어.”
“무슨 뜻이야?”
“난 오늘밤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말짱한 정신으로 도현에게 다가갈 테니까.”
희정은 절대로 농담이 아니란 투로 정색을 하고 말했다. 도현은 씹지 않은 입안의 음식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그녀를 수용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그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여자가 정녕 희정이란 말인가. 도현은 수십 번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 아래로 내려가자.”
식사가 끝나자 도현은 희정을 일어서게 했다. 모래알은 아직도 태양의 체온을 지니고 있었다. 발끝까지 달려온 파도가 자꾸만 흰 거품을 물어다주었다. 모래 위에 물새 발자국은 무수히 또렷한데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희미한 지평선마저 거두어가고, 하늘과 바다가 검게 한 몸이 되었다.
“정 선생님 사모님이 돌아가셨다며?”
“응. 재작년에. 그 소식은 어디서 들었어?”
“……바람결에.”
“정 선생님, 사모님 여의시고 근 1년을 죽은 사람같이 지내셨어. 신혼 초부터 사모님 고생시키신 거야 세상이 다 알잖아. 지금처럼 대연출가로 인정을 받고 있으셔도 집안일 안 돌보시는 것은 여전하셨어. 그래서 고통이 더욱 크셨겠지.”
“지금도 일 안 하셔?”
“아니, 참 기이한 일로 선생님 살아나셨어.”
“어떻게?”
“작년에 누군가가 희곡 한 편을 집으로 보내왔대. 그것을 읽으시고 회생하신 거야.”
“누가 썼는데?”
“그게 말이야, 겉봉에 쓰인 주소는 맞는데 그곳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거야. 그 주소를 거쳐간 사람들을 거슬러 올라가도 감 잡을 만한 사람을 못 찾았대. 작가 미상이라 떨떠름하게 보던 관계자들도 한번 읽어보고 두말을 안 했대. 작품명이 「불꽃살인」이라나봐. 내가 여기 오기 전에 한참 연습 중이었는데 지금 공연 두 달째래. 그 굉장한 반응은 물어보나 마나고.”
“연극 얘기는 흥미 없어.”
“그럼, 선생님 얘기는 왜 물어?”
“선생님 가끔 보고 싶어.”
젊은 부부가 아이를 목마 태우고 그들 옆으로 지나갔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어린 풀잎처럼 싱그러웠다.
희정이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홍철이 얘길 해봐.”
도현이 바다 쪽을 향해 서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희정은 대답이 없다. 그녀가 구두를 벗어들고 모래 위에 발자국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자, 도현이 뒷짐을 지고 따랐다. 언덕 위 레스토랑에서 이따금 알 수 없는 노래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사람 죽어가…… 살기 싫어하니 죽어가는 것 아니겠어?”
“어떻게 하고 있는데?”
“술, 술만 먹고 나자빠져 있어. 지금은 특히 심해. 밥 한술 안 먹은 지가 보름은 되었을걸. 그래도 난 상관 안 해. 우리는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으니까.”
모래사장 편편한 가슴 위로 그녀가 찍어내고 있는 발자국마저 섬뜩해 보였다. 도현은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는지 답답했다. 해초냄새 몰고 오는 바람 앞에서도 밀실에 갇힌 양 목구멍이 조여왔다. 자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망가져 여기까지 와 있는 동안 자기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하고 가슴을 쳤다.
“연극을 하게 하지 그래. 그 녀석에게서 연극을 빼면 시체잖아?”
“연극에서 손을 떼겠다고 한 것이 누군데? 그것을 말린 것은 누구고?”
희정이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이 아름다운 밤을 썩어 냄새나는 그의 이야기로 망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모두 토해 내고도 싶었다.
“이곳에 온 후 얼마 동안은 이것저것 의욕 있게 해보는 듯했어. 어딜 가도 6개월을 못 넘겼지만. 나중에 공부나 해보라고 그의 형님이 대학엘 가게 했지. 그 일 년 동안이 가장 편안했어. 그러더니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사람 바로 추락해 갔어. 어쩌다 입을 열면 한다는 말이 캘리포니아 태양이 자기를 죽이고 있다는 거야. 참다 참다못해 서울 가서 다시 연극을 해보겠냐고 물어도 별 반응이 없었어. 작년에 서울간 것도 내가 쫓아보낸 거야. 그가 연극을 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으니까. 그랬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도현이나 다른 동료들은 하나도 안 만나고 여관방에서 색시 데려다놓고 놀았다더군.”
“홍철이가 아마 달라진 서울 분위기를 알아채고 지레 접근을 안 한 것이겠지. 내 후배 한 놈이 연극 공연장에서 객석에 앉아 있는 홍철이를 보았다는 거야. 그가 왔다는 소식을 못 들었기에 비슷한 사람인가 보다 했었대.”
“세상에 어느 누가 어서 오십시오, 하고 자기를 위해 자리를 깔아준대? 지가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매사에 부딪혀 보지도 않고 물러서는 그 패배자의 꼬락서니가 나는 너무너무 싫어. 진저리가 나. 아니 싸워보지도 않았으니까 패배자 축에 낄 수도 없겠군. 한때 그 사람이 혼신을 다해 연기를 했다는 것도 이제 와보니 다 거짓이야, 기만이야. 그가 무대 위에 올랐을 때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던 내 이 두 눈을 흔적도 없이 씻어내고 싶어.”
“희정아,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돼. 네 미움이 너무 그를 다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네가 뭐라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연극인인 그를 인정해. 난 배우는 아니지만 그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홍철이가 사랑한 것은 연극 그 자체만은 아니었어.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가 하던 말이 생각나니? 무대 장치를 만들기 위해 꽝꽝 못질하는 그 소리가 자기를 흥분시킨다고 했었어. 대패로 문지르고, 톱으로 자르고, 바닥에 톱밥이 떨어지면 주머니에 가득 주워 담고 웃었지. 시끄럽고 번잡하고 긴장과 열기, 허튼 소리로 가득한 그 공기마저 다 마셔버리고 싶다고 했었잖아. 난 잊혀지지 않아.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연출 선생의 욕지거리를 들을 수 없어 힘줄이 약해진다고 했었지. 김밥 나르던 할머니를 우리 연극 동료라고 누구에게 소개하던 그 놈이야. 그런 놈이 혼자 남겨지면 죽게 되지.”
“지금 내 현실하고는 너무 동떨어진 얘기야. 내가 그런 것 몰랐었나? 그런 그를 사랑한 것은 바로 나였어. 하지만 그 사람 곁에 살아보지 않고는 아무도 몰라. 그가 지금 혼자라면, 그래서 죽게 된다면 그것은 그가 선택한 마지막 연기가 되겠지. 그 사람 자신이나 나나 민호, 이웃들, 이 모두가 그가 사랑할 대상 아니야? 지금 바로 이 삶의 무대에서 어우러져야 하는 그의 역할을 외면하려 드는 것이지? 난 그래도 오랫동안 그를 동정했어. 그에게 산소를 공급해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니 내 몸의 산소마저도 다 빠져갔어. 그가 술을 마시며 휘청거릴 때 나는 봉제 공장에서 실 먼지를 마시며 헝겊 조각을 산더미같이 쌓아올렸어. 전기 재봉틀이 드르륵 내 심장을 갉아갈 때도 난 울지 않았어. 그가 내 목을 조여올 때 맞서 싸워준 것은 깨진 지구라도 꿰맬 것 같은 그 소리 때문이었지. 헝겊 조각 밑에 그를 깔아 넣고 마구 박아댔으니까. 이렇게 이를 갈면서, 하루에도 수백 번 살인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아이의 양식을 사다니 제정신이 들면 너무 슬퍼져.”
희정은 지친 듯 모래 위에 주저앉았다. 도현은 홍철이의 밥상에서 수저를 빼앗은 것은 정녕 무엇인가 생각했다. 하얀 물새 한 마리가 어둠 저편에서 파도를 타고 있었다. 파도를 타고 있으면 물결 따라 가까이 다가와야 할텐데, 새는 뒤뚱거리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쪽으로 오려는 간절한 몸짓 같기도 하고 거기 머물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새가 희정을 안타깝게 했다. 희정의 긴 머리칼이 깃발처럼 날렸다. 도현은 그녀의 우울한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었다. 그의 손길이 이마 위에 느껴지자 불길이 희정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파도처럼 그것은 거듭거듭 밀려왔다. 얼음장같은 절망을 안고서라도 이 밤 도현에게 투신하고 싶었던 옹골찬 독기가 이제 살아서 목마른 세포 밖으로 맥없이 빠져나갔다.
“희정아, 그래 오늘밤 나하고 있자.”
도현은 희정의 머리를 감싸쥐고 그 작은 섬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를 만지고 싶은 불길 한 가닥을 비수처럼 품고서 그녀의 주변을 맴돌다가 친구라는 어정쩡한 위치로 들어앉고 만 젊은 날의 공허가 오늘 그 빚을 갚기 위해 기다렸나보다. 희정의 머리칼이 도현의 손가락 사이에서 한 올, 한 올 기쁨의 춤을 추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오래도록 그녀의 이마 위에 머물러, 한겨울 삭풍에 견디어온 마른 나뭇가지의 떨림을 닦아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그곳에서 도현은 긴 속눈썹을 어우르고 콧등으로, 그리고 힘차게 입술을 열었다.
목놓아 부서지는 바다의 외마디가 이어졌다 끊어지고 끊어졌다 이어졌다.
물새는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파도가 튀어 오르면 보이지 않다가 그것이 스러지면 새는 살아났다. 숨바꼭질하듯 그러나 한 치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도현의 어깨 너머 허공을 맴돌던 희정의 풀어진 눈동자가 수십 번의 앵글을 돌려 초점을 찾았고, 새가 이제 새가 아님으로 하여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희정은 벙어리가 된 듯 말을 토해 내지 못하고 손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도현이 그녀가 가리키는 손끝의 방향을 못 따라가자 희정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불꽃살인! 그건 그의 것이야.”
언젠가 기억할 수 없는 날짜 밑에 <불꽃살인 탈고>라고 적힌 그의 메모지를 보았던 것이다. 새는, 아니 홍철은 검은 바다 한가운데서 그렇게 첼로를 켜고 있었다.
홍철은 아내가 남기고 간 짙은 향수 자리에 서서 이제는 홀가분해졌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랫동안 밥을 먹지 않고도 허기를 몰랐던 주린 창자가 신호를 보냈다. 따뜻한 밥을 먹고 더운물에 몸이라도 담그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이빨부터 닦아 구린내를 몰아내고 싶기도 했다. 바싹 마른 쇠똥처럼 되어 어디 핏줄이라도 한 가닥 흐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육식이 부스스 눈을 여는 것이었다. 아내가 수십 년을 건너뛰어 그녀 본연의 자태로 돌아간 오늘밤의 모습이 그의 남은 생명 얼마를 살아 있게 만들다니 신기했다. 너 때문에 나까지 죽어간다고 가슴을 쥐어뜯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홍철은 추락해 가는 무서운 속도를 멈추고 그녀를 그의 영역 밖으로 떼밀어 낼 수 없음을 얼마나 저주했던가. 아내가 오늘밤 어느 사내의 품속에서 잠이 든다고 해도 그것은 그녀의 생존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홍철은 온몸이 쥐가 난 듯 찌릿찌릿해 오자 민호의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밥을 먹어본다던가, 목욕을 한다던가 하는 따위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육신의 여력을 그는 갖고 있지 못했다.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안된다 하면서도 그대로 꼼짝 않고 몇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홍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이라도 무서운 두통과 환청에서 벗어나고 싶어 머리를 흔들었다.
홍철은 아무도 들춰보지 않는 선반에서 힘겹게 원고 뭉치들을 끄집어냈다. 두 권으로 분리해 놓은 것을 한데 묶었다. 그는 아직 죽지 않은 광대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작은 메모지에 <이것을 정수만 선생께 전해주시오.>라고 적어 그 위에 놓았다. 그리고 그는 방을 나왔다. 여태껏 잠들지 않은 민호의 얼굴을 보자 마음에 동요가 왔다. 녀석을 한번 가슴에 안아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가 고작 한 일이라고는 <짜식, 잘 자.> 이것뿐이었다.
70년도형 낡은 왜건 한 대가 깃털처럼 가벼운 육신, 그러나 고단한 영혼 하나를 태우고 바퀴를 돌렸다.
성명: 오상혁
*성별: 남
*주소: (690-170)제주도 제주시 연동 2307-4
정한아파트 가동 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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