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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근-단편소설2(2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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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02회 작성일 04-11-16 10:00

본문

톱밥


"첫 번째 메세지입니다."
실낱같은 구멍을 통과한 듯, 수화기에서는 전선을 통과한 작은 숨소리만 계속 된다. 채연이는 수화기를 귀에 붙여 본다. 역시 아무 말소리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수화기는 분명 숨소리를 말해주고 있고, 공중전화박스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소름이 돋는다.
"나······나 여기 놀이턴데······"
'지훈이였구나!'
드디어 동생의 목소리에 안도의 숨을 뱉어본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초침사이 분명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채연이의 관심은 자신의 호출기에 처음으로 음성을 담은 지훈이의 목소리였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듯.
"누나. 오늘 회사에서 회식 있다고 했나? 끝나고 놀이터로 와줄래?"
지훈이 목소리가 점점 이상해졌다. 무언가 망설이면서······
"오늘 아빠를 밀었어. 아빠 머리가 문고리에 부딪쳤거든? 하필 문짝에 그토록 불쌍하게 넘어지셨지?"
지훈이가 말하는 사건에 크게 놀라지는 않는다. 이제동안 아빠와 지훈이 사이에 수없이 예고되어 온 사건이기에······
"나 아빠가 무슨 일을 하시던 지, 무슨 병에 걸리던지 아무 생각 없이 있던 놈이야. 그런데  그 늙은이가 왜 그렇게 불쌍하게 넘어지셨지? 왜 그렇게 넘어지셨지?"
목소리는 점점 물을 먹고 있었다.
"그 늙은이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어? 등록금 착실히 학교에 갔다 받친 거? 하루세끼 너저분한 반찬으로 배 채운 거? 가끔 누나 통해서 용돈이나 조금 쥐어준 거?"
짐승처럼 울부짖는 동생 목소리에 채연이의 가슴도 점점 긴장되어 갔다.
"아빠······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한 때 좋아했던 거야? 그런 거야?······"
지훈이의 목소리는 이제야 주저앉았다.
"아냐. 예전에는 몰라도 이젠 좋아하지 않아. 혹시 그 늙은이가 나에게 자식의 정이 있느니 없느니 따지기 전에 이젠 나부터 우리 가족이 싫증나. 우리가족이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 이번 기회에 그냥 집 나가려고. 이놈의 집구석 다시는 안 들어올려고."
다음메시지는······"
수화기를 놓고 허둥지둥 박스 안을 나왔다. 그리고 전화기는 주인 없는 전화카드를 뱉어냈다.

무엇이든 호기심 가득한 눈을 봐야 할 여섯 살 때, 지훈이가 호기심으로 바라본 것은 황금색 눈발이었다.
"쓰윽, 쓰윽, 쓰윽······"
한쪽에는 나무가 수북히 쌓여 있었고, 아버지는 그 나무를 톱과 대패로 이리저리 다듬고 있었다.
"삐이익······ 119경찰이다. 앞에서 가로막는 차들은 피해주길 바란다."
아빠 주먹만한 나무토막은 지훈이의 경찰 차였다. 어머니는 지훈이 걸음마를 시작하였을 적부터 없었다. 집에 놀 사람이라곤 나이차이 많은 누나, 그리고 없었다. 친구도 싫었다. 대신 쌓여 있는 황금색 톱밥을 가로질러 길을 만드는 재미는, 백화점에서나 만지작거릴 수 있는 장난감의 재미보다 더하면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가 계셨다.
"아빠. 경찰이야 비켜."
아빠의 톱밥먼지 가득 묻은 양말에 끼운 슬리퍼가 가로막았다. 아빠는 지훈이를 보고 얼굴에서 함박 웃음을 만들었다.
"비켜. 비켜······"
지훈이는 나무토막으로 아빠의 슬리퍼를 찍었다.
"이놈이······"
아빠는 연한톱밥을 한 주먹 집어다가 지훈이의 옷 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옷 위를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아······ 아빠······ 따가워······ 따가워······"
흔히 잡업장 안에서 어린 지훈이의 장난끼에 잠시나마 껴들고 싶은 아버지의 방법이다.
그렇게 놀다가 아빠는 다시 연장을 만져야 했다.
"아빠 더워······"
"아이스크림?"
아버지가 고사리 손에 천원짜리를 쥐어주면 두발을 한꺼번에, 팔짝팔짝 빨리도 뛰어간다.
"아빠 것도 사올께."
지훈이는 금세 들어온다.
지훈이가 보기엔 작업대 위에 놓여진 아이스크림에 아빠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지훈이는 톱밥 먼지가 덕지덕지 엉킨 아이스크림을 삼키며, 줄곧 시선을 아빠의 아이스크림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것도 먹을래?"
역시 아버지는 눈치가 빨랐다.
아버지는 연필로 긋고 다시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다듬고, 그리고 한번 소매로 땀을 닦는다.
그리고 어느새 지훈이는 작업장 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 머리 위로 황금색 눈발이 여기저기 날리고 있었다. 더운 여름 하루 중 지훈이가 제일 달게 자는 낮잠이었다.
어느 덧 시계가 다섯 시를 가리킬 무렵이었다.
"콜록······ 콜록······"
지훈이가 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아이스크림 조금만 먹지 그랬어. 감기 걸렸나 부다."
아빠는 자신의 먼지 덮인 작업복으로 지훈의 온몸을 포근히 덮어주었다.
하지만, 지훈이는 그 날 밤까지 기침을 심하게 했고, 다음날 병원에서 진단이 나왔다. 먼지 등으로 인해 폐에 먼지가 쌓여 폐렴까지 갔고, 결국 결핵균까지 옮겨 폐결핵이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 뒤로 병원에만 줄 곧 다녀야 했고, 다시는 작업장에 갈 수 없었다. 그렇게 아빠가 보고 싶어, 작업장 문을 어느 날 몰래 열었을 때, 지훈이는 아빠에게 처음으로 나무회초리로 호되게 맞았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해 주던 아빠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뒤에 마음속에 흘릴 아빠의 눈물을 모르고 지훈이는 집으로 울면서 뛰어갔다. 다시는 작업장에 가질 않겠다는 결심과······.
결핵과 1년에 걸친 오랜 투쟁이 있었다. 지훈이가 병이 낳은 뒤에도 아빠, 채연이, 그리고 지훈이······
오랫동안 이 가족에는 침묵과 공백기간이 있었다. 지훈이는 어려서 놀았던 작업장의 일을 빨리도 잊어버렸다. 아마 그날  아빠의 그 무서운 눈초리에 억지로 노력했을 것이다.
이젠 그 오랜 침묵이 쌓여 아버지와 지훈이 간에 무서운 자존심으로 변하고 만다.

"삐거덕······삐거덕······"
아이들이나 태우는 낡은 그네는 지훈이의 엉덩이를 지탱하기에는 너무 힘겨웠다. 그네는 녹쓸은 마찰력으로 신음을 하며 힘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멈춰있는 그네에는 채연이가 앉아 있다.
"아버지는 그 시절 니가 어렸을 때, 원래 나 같은 채연이는 안중에도 없었어. 너만 얼마나 끔찍이 사랑했는데······"
그 동안 얼마나 참아왔던 말이었던가.
아버지와 지훈이의 차가운 감정들이 자신의 곁을 지날 때마다, 채연이는 이 말을 십년이고 꾹 참아왔다. 어쩌면 수없이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강하게 외면하는 지훈이를 보며 자신만 더 상처받고 말았다. 오늘은 다르다. 지훈이가 먼저 물어 온 것이다. 어떤 결과이건, 채연이는 동생이 자신과 이러한 얘기하기를 원한다는 사실 하나로 너무 만족스럽다. 평소에 그렇게 철없게만 느껴졌던 동생의 낯선 얼굴도 도무지 예뻐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작은 것에······
"사랑이라······ 얼어죽을 놈의 사랑. 내가 폐병에 걸려 병원에 나가게 된 이후 그 늙은이는 나에게 관심도 없었는데······"
"아버지는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데 대한 죄책감 이였을 꺼야."
"됐어. 별로 듣기 싫어."
지훈이는 또 다시 속에서 뭔가 참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오르려고 했다. 분노. 또 다시 안에서 무언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얼마나 너만큼 괴롭게 고민하셨는데, 아니······ 니가 아버지를 향한 원망보다 훨씬 더한 괴로움일 꺼야. 조그만 아들이 밤바다 기침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을 치며 얼마나 미안해 하셨는지······ 그래도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니가 고통스럽게 기침하는 날이면 나는 매일 아버지의 무표정에서 눈물자국을 봤거든."
"아들에게 미안해 해? 그래서 자식 때리는데 취미가 붙으셨나?"
지훈이를 태우던 그네도 멈추었다. 그 순간 사방의 어둠은 작은 모기소리마저 먹어 치웠다.

지훈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학교에서는 'cK' 상표의 가죽허리띠가 유행이었다. 그때부터 지훈이의 학교친구들은 문제집 값을 두 배로 늘여 부모님에게 넉넉한 값을 받아내고, 만오천원 하던 체육복 값은 삼만원 짜리 영수증으로 기가 막히게 둔갑하기도 해 어떻게든 돈은 마련되었다. 그리고 허리띠 도난 사고도 많은 한 때였다.
"야 오늘 동대문에 허리띠 사러 가자. 엄마한테 15000원 사기 쳤어."
그러한 친구의 자랑에 지훈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누나한테 허리띠를 사달라고 해야하나.  사달라고 마구 조르기에는 20000원짜리가 누나에게는 너무 황당한 소리로 들릴 것 같았다. 허리띠를 만지는 친구의 행복한 표정을 보며 아버지의 얼굴까지 떠올려 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에게 직접 사달라는 소리한번 못해 보았다. 누나에게 필요한 것만 말하면 누나는 아빠에게 돈을 받아 사주곤 했다. 그것은 당연한 습관이 되었고, 지훈에게 아버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때로는 나쁜 성적표를 받은 날은 맞을까봐 잔뜩 긴장하고도 싶었고, 좋은 물건이 있으면 즉시 아버지 얼굴을 떠올리며 사달라고 조르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너무 멀게만 느껴졌었다. 어릴 적 작업장에서 머물던 기억은 잊은 체······ 병에 걸린 이후로 그런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애들은 아버지에게 시험을 못 봤다고, 뺨을 맞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지훈이의 성적표를 보는 거 마저 하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비싸고 좋은 물건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조르며 사달라고 해서 얻기도 하지만, 지훈이는 아버지에게 말 한마디 못해보고, 대신 누나에게 꾸지람만 당하기 일쑤였다.
'요새 아버지 일감도 적은데, 그리고 니가 부자 아들이야? 이런 거 가지고 놀게?'
누나는 꼭 필요한 것만 사주곤 했던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게 돈을 받곤 했는데······ 이번만은······ 허리띠만은······.
다시 아버지의 얼굴이 지훈이의 머리를 스치자 지훈이는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생각을 말았어야 했다.
"야. 나도 영수증 하나 만들어 줘."
친구에게 부탁해 영수증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 내 그날 저녁 지훈이는 비싸다고 투덜대는 누나에게 삼만원을 받아 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지훈이는 큰 기대 속에 친구들에게 자랑할거 생각하니 웃음이 자신도 모르게 삐져 나오기도 했다.
"야. 나도 오늘 누나한테 15000원 사기 쳤어.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동대문 가는 거다."
허리띠를 사고 집에 오는 길에 수없이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라이터로 이리저리 허리띠를 지져 보았다. 진짜 가죽이었는지 오랜 어느 불의 고통에도 거짓말하지 않았다. 밤새 허리띠는 교복바지에 엉켜 있지 않고, 책상 위에 고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잠을 청했다.
한편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자신의 허리띠에서 띠를 고정해 주는 구멍이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채연아 혹시 훈이 방에 남는 허리띠 있는지 좀 봐라."
채연이가 지훈이의 방에 들어가자 난생 처음 보는 허리띠가 책상에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채연이는 무심코 허리띠를 집었다. 화근의 시작이었다.
그 날 아침, 지훈이는 허둥지둥 집안을 뛰어다니며 정신없었다.
"허리띠 어딨어? 누나. 허리띠 못 봤어? 내가 어제 허리띠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 났거든?"
아침에 일어나 방을 이리저리 뒤져보아도 허리띠는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아버지 허리띠가 고장나서 니꺼 줬는데?"
"이런······ 친구들한테 오늘 보여줘야 되는데, 하필이면 아빠가······"
하루동안만 허리띠가 없었지만, 하루 내내 허리띠를 완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뭔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다. 오자마자 가방을 맨 체로 안방부터 찾았다. 안방에는 톱밥먼지가 잔뜩 묻은 새 허리띠가 아버지 작업복 사이에 끼어져 있었다.
"아빠 뭐야. 왜 말도 없이 내 허리띠 가져가."
오랜만에 아들이 아버지 방에 스스로 찾았다. 아버지는 지훈이가 무슨 일인가 하며 속으로는 아들과 오랜만에 이런 저런 대화를 했으면 하는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표정에서 아버지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너 이 세끼. 오랜만에 아빠 방에 와서 말하는 싸가지가 그게 뭐야? 다시 정중하게 말못해?"
아빠의 큰 목소리에 채연이가 황급히 안방에 들어왔다.
"난 저 톱밥 먼지만 봐도, 옛날 그 약 냄세 때문에 지긋지긋해. 나는 아빠 그 톱밥먼지 때문에 죽을 뻔했단 말이야."
채연이가 말릴 틈도 없이 아버지의 손바닥이 지훈이의 뺨을 쳤다.
"그래, 아버지한테 말하는 싸가지가 그게 뭐야. 아빠한테 죽고 싶어?"
그리고는 가위를 꺼내 허리띠를 마구 잘라 내었다.
채연이가 아버지를 부둥켜 앉고 울면서 아버지를 말릴 때, 지훈이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허리띠를 잃은 억울함도 아니었다. 맞아서 아픈 느낌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원인 모를 이 눈물은 자기 자신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눈물이었다.
지훈이와 그러한 일이 있었던 늦은 밤, 아버지는 집을 나왔다. 평소에도 뭔가 속상한 일이 있으면 아버지는 새벽에도 작업장을 찾았다. 화를 풀어줄 아내도 없었고, 술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아버지한테는 항상 작업장에서의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 그 날은 지훈이는 평소에도 아무감정이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에게 첫 번째 손찌검을 당한 것이다. 지나가다 무심코 지나치게 된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뭔가 삐뚤어지고 싶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그 후로부터 학교에서 그의 행동은 차츰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해 지기 시작했다. 싸우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면 때리는 강도는 더욱 가중되었다.  어린 나이에 나쁜 친구들을 계속 접하며 술을 배우고, 담배를 배웠다. 반 친구들을 툭하면 때리고, 숙제를 시키는 등 지훈이의 성격은 안전핀을 잃은 폭탄처럼 급변했고, 그러한 행동으로 선생님께 불려가 두들겨 맞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러할수록 조그만 일이 거리적 거려도, 자신 안에 있는 화를 절대 감추지 않고, 폭발시키고야 말았다.
톱니바퀴는 이가 맞지 않아 맞물리지 않았다. 그래도 돌아보려고 힘을 쓸수록 톱니만 상하고 만다. 지훈이와 아버지에게는 이미 크기가 맞지 않은 톱니가 가족이라는 축으로 억지로 맞물려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며칠 후 여느 때처럼 마루에서 TV연속극에 빠져 아들에게 신경 쓰지 않게 될 인사를 하고 지훈이는 방에 들어갔다. 그나마 악몽은 시간에 의해 잊혀져 갔다. 비교적 쉽게 잊을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평소에 가지고 있던 정이 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훈아."
분명 지훈이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것도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TV연속극을 하는 시간에·····
지훈이가 의문스런 살짝 방문을 열었다.
"친구한테 빌려온 테이픈데 이거 좀 틀어봐라."
"시간 없으니까. 이따가 보던지, 누나보고 틀어 달라고 그래."
그래도 허리띠를 잃은 감정이 아직 크게 남아있었다.
"아니. 이 싸가지 없는 말투는 아직도 못 고쳤네."
아버지는 또 다시 크게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나불대봐. 다시 한번 나불대보지 못해?"
채연이가 방에서 황급히 나와 또 다시 아버지를 붙잡았다.
"테이프 그냥 집어넣으면 돼. 아빠 그렇게 무식해? 그래서 말투도 그렇고 머리도 그렇게 무식해? 대체 아는 게 뭐야?"
"그래 이 이놈아. 아빠 평생 너희들 밥 굶기는 거 싫어서 무식하게 일만했어. 뉴스도 보고 싶고, 다른 것도 하고 싶어도 일만했어. 이 싸가지 없는 놈아."
아버지는 갑자기 성급히 아까 테이프가 들었다던 봉지를 지훈이의 면상에 던지고 또 다시 밖에 나가셨다. 그 안에 테이프는 없었다. 지훈이 손에는 봉지만 들렸고, 한참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잃었지만 분명 바코드가 붙어 있는 새 허리띠가 말렸던 몸을 풀며 지훈이의 손안을 벗어났다.

"이래봐도 그 허리띠 비싼 거였어. 그 날 너 때리고 다음날 아버지가 묻더라. 허리띠가 좋은 게 얼마나 하냐고. 허리띠를 봉지에 싸고 집에 오는 길에 속으로 아들의 웃는 모습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겠지."
엄지손가락 만한 돌을 부서져라 꽉 쥐었다. 그리고 힘껏 놀이터 밖으로 던졌다. 하지만 지훈이의 신경은 날아간 돌에도, 또 다시 줍는 돌에도 없었다. 채연이는 여전히 그네에 앉아 지훈이의 표정을 일일이 관찰하고 있었다.
"그래, 당장 가자. 아버지한테 당장 사과하러 가자."
이번에는 더 멀리 던져 본다고 힘껏 던졌지만, 이번에도 역시 저기 앞에 있는 파란 대문을 넘기지 못했다.
"웃기지마. 사과? 나 이놈의 집구석 아에 떠날지도 모른다니까?. 그러기 전에 누나 한번보고 갈려고 부른 거야."
"니가 갈 곳이 어디 있긴 있어?
이번엔 자리에 엉거주춤 앉아 주먹만한 돌을 집어 흙 땅에 이리저리 긁어 보았다.
"우선은 며칠 친구네 가 있다가, 주유소나 어디 좋은데 있으면 갈려고."
"왜 갑자기 아버지와 사이가 그렇게 됐는지······."
"어쩌면 갑자기가 아니지······ 어렸을 때부터 그 늙은이는 무관심했으니까······ 나도 그 늙은이한테 신경 쓰기 싫었고."
"아버지가······"
갑자기 채연이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만다. 그리고 두 손에 꽉 힘을 주며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훈이는 잠시 긴장한 체로 누나를 보았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폐렴에 심하게 걸려 기침도 심하게 하시고, 이젠 고르게 숨쉬기도 힘드셔······."

"너 진짜 니가 만들 꺼야? 다른 애 시켜"
어느새 1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미술시간에 무엇을 하던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지훈이었지만 친구들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지훈이는 조각칼로 신중하게 나무를 깎고 있었다. 아마 다른 때였으면 지훈이의 성질에 아마 다른 아이가 지훈이의 숙제를 대신 해야 했다.
"내가 칼질은 잘 하잖아."
반 아이들이 신중하게 나무를 깎는 모습에 지훈이도 갑자기 하고 싶은 호기심이 있어 났다. 그런데 친구들이 의아해 하며 다른 일을 할 때, 갑자기 무언가 하나씩 자신을 휘감는 기억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나뭇조각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갑자기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화가 있었다. 무엇일까? 자꾸 죽이고 싶어도 살아나는 이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지훈이가 칼로 나무를 그어 나갈 때마다 떨어지는 나뭇조각을 보며 그 화는 더했다. 떨어지는 톱밥······.그 톱밥이었다.
'죽여야 한다. 그 늙은이와 과거 유치했던 어렸을 적 생각들을 죽여야 한다.'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절대 아니었다. 그러한 아버지를 미워했던 못난 자신을 향한 분노······
그 때 힘을 주었던 조각칼의 날은 왼쪽 엄지손가락을 부욱 찢으며 지나갔다.
"에이. 이런······"
조각칼을 책상 앞에 있는 나뭇조각에 푹 박았다. 그 소리에 반 전체가 잠시 술렁거렸다. 그리고 그 날 지훈이는 또 한번 선생님께 혼나는 습관을 겪었다.
여름 퇴교 길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인규가 만두집으로 오래."
선생님께 엉덩이가 시뻘겋토록 맞은 지훈이를 위로차 친구들이 신장개업 하는 만두집에 모였다는 소식이다.
"가자······"
이리 꺾고 저리 꺾고······. 지훈이는 자기 집과는 가까운 만두집을 가던 중 발을 멈추었다.
낡은 간판에 있는 글씨가 겨우 보이는 엉성한 판잣집······
"야······ 판잣집 이름이 니 이름인데? 여기 금방 망하겠다."
그 안에는 분명 아버지가 구부정한 허리를 밖으로 보여지게 일하고 계셨다. 12년전 이던가······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의 신신당부로 절대 이 근처에도 오지 못했던 설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쨌든 12년만에 우연히 오늘에서야 다시 지나게 되었다.
“이런 늙은이······. 오늘 뭔가 재수 없는 날이야. 크악······ 퉤."
가래침이 빗물에 섞이지 않은 체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빗물은 지훈이가 지나간 자리에도 여전히 시원하게 퍼붓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였다. 바로 오늘이다. 머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자꾸 잡아먹는 톱밥조각······.뭔가 그러한 것들을 지워버려야 했다. 담배······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질 여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 화근이 될지는 피는 순간 짐작하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빠가 마루를 밟는 소리와 기침하는 소리를 정확히 직감했던 지훈이가 그 날 따라 불편한 심기 때문에 듣지 못했다.
십 년이 넘도록 사적인 일로 제대로 열어보지 못한 아들 방의 방문이었다. 뭔가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버지는 계속 망설이며 고민해왔고, 어렵게 방문을 열었다.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지훈이는 급히 꽁초를 구겼다.
"콜록, 콜록, 뭐야. 너 이 세끼. 담배도 펴?"
지훈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손이 가만있질 않았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지훈이는 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또 왜 때리는데······ 아빠가 뭔데 자꾸 때리는 거야."
또 다시 심한 모멸감이었다. 한번 더 손이 가려는 순간 아버지를 밀치는 지훈이의 손이 더 빨랐다. 아버지는 넘어지며, 그만 문짝에 붙은 문고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나 이 집구석 당장 나가. 절대 안 들어와. 안 들어온다고······"
지훈이는 이런저런 짐을 구별할 틈도 없이 가방을 들고 작은 연립주택의 지하층을 나왔다. 어디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걱정을 뒤로하고, 지훈이는 문고리에 머리를 부딪친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렇게 불쌍하게 넘어지셨는가? 그리고 또 다시 톱밥······ 또 다시 연상되는 톱밥······
전화박스 안에 잠시 웅크리고 있었다. 힘없이 자신이 잘 아는 번호를 눌렀다. 삐삐는 음성을 재촉해도, 지훈이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놀이터에 벤치에 가만히 앉아 누나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을 괴롭히는 고민들이 너무 싫었다.

"그래도 정말 갈 꺼야?"
"언제부터 그러셨어? 늙은이 병원에는 제대로 다녀?"
옛날부터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시면 버릇처럼 기침하시곤 했다. 사실 신경은 안 써도 요새 따라 아버지가 기침이 심하시다 는 것은 가끔 느끼곤 했다.
"지훈아······저번에 화장실에서 피 묻은 휴지도 발견했어. 그 나마 동네 작은 병원은 다니시나봐. 지훈아······."
“멍청한 늙은이 같으니······ 큰 병원에 좀 가보지······”
동생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며 무언가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지훈아······ 아버지는 속으로 얼마나 니가 스스로 성적표 보여주길 원하셨는지 아니? 니가 스스로 비싼 신발 사달라고 하기를 원하셨는지 아냐고?······. 아버지는 니가 먼저 따뜻하게 아빠라고 불러주길 원하셨고, 기다리셨어.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왜 이렇게 아버지를 이해 못하는 거니?"
"칫······"
이럴 때는 비웃는 게 제일 적당했다. 그런데 자꾸 망설이게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지훈이는 누나의 이러한 말보다 자꾸 아버지가 힘들게 기침하시는 소리가 자신을 심하게 망설이게 했다.
이런 망설이는 시간이 싫었다. 지훈이는 가방을 어깨에 단단히 매었다. 평소처럼 가볍게 어깨를 타던 가방이 아니었다. 그 무거움에 다시 한번 어깨를 추슬렀다.
"갈께······"
더 이상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 집을 나왔는데 곧장 들어가기에는 자신의 너무 의지가 약해 보였다.
"지훈아······."
"아마 진짜 다시는 안 돌아올 꺼야."
채연이는 동생의 진지한 모습이 정말일까 하는 마음에 점점 더 불안했다.
"아들을 좋아하기는······ 그래서 그래 아들만 보면 주저 없이 손찌검이셨나? 다 잊어버릴 꺼야. 늙은이와 누나에 대한 모든 유치한 기억······."
지훈이가 놀이터를 뒤로하고 걸어가는 뒷모습에, 채연이는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아버지와 지훈이의 사이에서 자신은 너무나 힘이 없었다. 여러 별들이 하늘에 붙어 간신히 매달려 있다가 힘을 잃은 별 하나가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채연이는 힘없이 집에 들어와 조심히 현관을 열었다. 아버지가 마루에 가만히 앉아 계셨다.
"아버지······"
"목공소 열쇠를 텔레비전 위에다가 분명 올려놨는데 채연아 거 혹시 못 봤냐? 놓고 왔나?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아 이거 감기 쉽게 안 낳네. 미치것다."
"훈이가······."
뭔가 말을 이어야 하는데······ 채연이는 더 이상 말을 할 힘이 없었다.
"콜록.... 콜록······후······.아무래도 작업장에 가야겠다. 일도 쌓였고, 열쇠도 거기에다 열어 둔 채 그냥 온 거 같어."
"훈이가······"
"안다. 가방 메고 나가 더만······. 그 아는 이미 내 핏줄 아니다. 어디서 그런 자식을 길러갔고······"
아버지는 일어나 배웅 없는 현관을 나섰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깊은 새벽에 정처 없이 걷고 있었던 지훈이는 어느 지점에서 발을 멈추었다. 옆에 있는 간판을 쳐다보았다.
'지훈목공소'
간판이름도 참 유치했다. 한 참 멀뚱히 간판을 쳐다보다가 잘 보이지 않은 목공소 안을, 유리벽에 눈을 붙여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업장의 느낌이 유리에 살짝 붙은 손바닥에 전해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뭔가 따뜻했다.
12년 전 키 작은 지훈이가 잠들던 곳은 분명 작업대 옆에 있는 저곳이었다. 지훈이는 시선은 그곳에 집중했다. 그렇게 옆으로 옆으로 움직이다가 작업장 현관문을 더듬었다. 혹시나 했지만, 현관문은 정말 열려 있었다. 형광등을 어떻게 켜야 하는지 여기저기 더듬어 내다가 포기하고 만다. 어두운 작업장 안을 더듬어 가며 어렸을 적 날마다 잠들었던 그 자리를 찾아내었다. 자리가 좁아 몸을 구겨야 했다. 그리고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콜록······ 콜록······"
살짝 잠이든 몽롱한 상태였다. 그 때 작업장 저쪽에서 누군가의 기침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목공소 현관이 열리고 불이 켜졌다. 지훈이는 그냥 억지로 잠들어 버린다.
아버지도 지훈이를 보고 잠시 멈칫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작업복을 입었다.
"콜록······ 콜록······ 콰악 퉤······"
많은 연습이 되었었는지 쓰레기통으로 가래침은 정확히 들어갔다.
"집 나간다고 하더니······. 그래 갈 곳 없어서 겨우 여기야?"
연필을 귀 사이에 끼어 넣고, 대패를 들었다.
"쓰윽······ 쓰윽······ "
연필로 긋고 다시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다듬고, 그리고 한번 소매로 땀을 닦는다······.
지훈이는 피곤한 더위가 유난히 길었던 여름, 그 여름을 녹여줄 단잠을 자고 있었고, 그 머리 위로 아버지가 입김으로 불어낸 황금색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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