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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근-단편소설3(2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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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99회 작성일 04-11-16 10:00

본문

토기

부엉이의 울음은 이미 아무도 없는 밤을 위한 노래였다. 이미 해는 몸을 가린 지 오래였고, 그것을 대신해 전혀 익숙하지 않은 달빛이다. 빛 가린 어둠의 횡포는 끊임없이 그를 바닥에 넘어뜨리려 하였고, 잠깐 쉴만한 바위들로 그를 유혹하였다. 하지만 그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어딘가 홀려버린 눈가에는 땀이 고였고, 미친 사람처럼 입가의 흘린 침도 닦지 않았다. 어깨까지만 내려오는 짧은 머리는 풀어 해쳤으며, 어디 하나 기운데 없는 깨끗한 상놈의 옷이 그의 신분을 더욱 어색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분명 미친 사람도 그 시대의 천민도 아니었다. 바로 보령군수 송태민의 아들 지원이었다.
어느 것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어둠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짚신으로 메마른 땅을 밟는 소리가 멀리까지 달렸고, 간혹 토했던 한숨마저도 숨길 수 없는 정적함이었다. 그는 맘에 들지 않았다. 자꾸 낮의 일을 생각나게 하는 정적함 가운데 그는 땅을 더욱 세게 밟아 소리를 내었다.
‘그래 호족의 자식이 배가 불러 뵈는 게 없더냐?'
아버지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주위의 고요함을 짓밟았다.
“젠장할.......”
‘셋째아들은 오늘부터 죽었습니다.'
‘도공이라?.....’
‘생각 오래했습니다.'
‘그래 네 처는 어쩔 샘이냐?'
‘안정되면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래 결국 나무때기처럼 흙을 빌어 살겠느냐?'
‘소자는 결국 가옵니다.'
평소에도 부자의 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다른 식구들은 이 일로 크게 안절부절 하지 않았다. 맏형 지학과 둘째형 지수와는 달리 지원은 둘째 부인 소생이었고, 지원이가 열살 적에 어머니는 종놈과의 연분이 들통나, 자신이 보는 앞에서 처참한 비명가운데 죽었다.
평소에도 성격이 사납기로 유명한 악처로 소문나 있었고, 그녀에게 동정을 줄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친아들 지원이 이외에는...... 지원은 그 외로운 비명을 기억한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원망이 쌓인 증오도 십년동안 놓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떠돌이 화공을 쫓아다니며 그림을 배웠는지 모른다. 무언가 비뚤어지고 싶은 마음은 이제 절정에 다다랐다.
‘스무년동안 이 집에서 자라온 머리올시다.'
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종이 가지고 온 칼로 머리를 베었다.
‘여기다 두고 가겠나이다. 이젠 이 천한 몸은 송 아무개가 아니올시다.'
‘자신을 버린 죄인으로 만들 계획이었더냐? 끝내 후회하며 지내게 만들 계획이었느냐? 너는 실패하였느니라. 평생 가지고 있던 종기 빠진 기분으로 사느니라. 모자란 놈 같으니.'
송태민은 비웃었다. 그러한 모습을 한참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모두들 들으라고 크게 웃었다. 어쩌면 지원이의 위로 두 형님이 건강하기에 가능한 아버지의 모진 역할이었다.
지원은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 했었기 때문이다.
“젠장할 놈의 마을은 아직 멀었는가?"
또다시 낮의 일이 살아나려 하고 있다.
지원은 자신의 머리를 자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미리 준비했던, 당시 천민들이나 입는 헝겁을 걸쳤다.
옆에 있는 부인은 물어 보지 않았다. 눈에 고인 물이 그 질문을 대신했다.
‘조만간 데리러 올 것이오. 반드시 데리러 올 것이오.'
지원이 도공마을을 선택하기에 제일 망설이게 한 것은 당연히 자신의 아이를 뱃속에 간직한 부인이었다. 성혼을 가진지 일년도 되지 않아 책임지지 못할 짓을 하는 자신이 부인에게 너무 미안하기 전에 어이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결국 도공의 길을 버리지 못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호족이라는 신분에 대한 반항이었는지 모른다. 그래 이토록 평생 비뚤어지고 싶은 나에 대한 고집이겠지...... 이것은 또 무슨 지랄 같은 이유란 말인가?'
그러다가 그러한 되새김을 부정하는 그림 같은 순간이 눈앞을 지나간다. 흙으로 뭉쳐져 자신의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 도자기들......
숨을 헐떡거리며 옆에 있는 나무를 의지했다. 그리고 눈은 자연히 앞에 있는 장관에 홀려버리고 있었다. 야산 한 자락을 감싸안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낮은 담은 거의 형식적이었고, 서로 붙어 있는 집들이 다정스럽다. 보름달에 가까운 달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냇가에 반사되어 살며시 반짝이는 마을을 보았다. 도시를 떠난 자유가 엿보인다. 도공마을이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예민한 개들의 움직임이 느껴졌고, 이내 짖어댄다. 아직 해가 오르기에는 이른 시각, 지원은 그냥 가는 대로 걷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멈춰 섰다. 짖어 대는 개들의 소리 가운데 미세하게 돌림판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토기를 돌릴 때 쓰는 돌림판의 소리가 가까이 에서 들려왔다. 개들의 소리를 서서히 밀어냈고, 자신은 어느새 어느 집 앞에 머물렀다.
작은 초가 옆에 도방이 있었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대나무로 엮은 발이나마 도방을 드나드는 문 역할을 하였다.
“이른 시각 실례인줄 알지만 먼 곳에서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개들의 소란가운데 크게 외친 두 번째 물음에도 기별이 없다. 돌림판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송지원은 난감하였다. 다른 곳으로 움직일 곳이 없었다. 이미 지친 발은 움직일 줄 몰랐다. 아는 곳도 없는 이 마을에 소리나는 곳은 단지 이곳뿐이었다.
그 때 돌림판이 멈추고 잠시 후 도방을 가로막은 발이 올려졌다.
“뭐요?"
짧았다. 만사가 귀찮은 한마디였다.
나이는 사십대 가량으로 보였고, 크지 않은 키에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상대방을 뚫어보는 눈만은 살아있었다. 지원은 그 눈이 마주치기가 무서웠다.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대답이 없어 계속 말을 이었다.
“만우 선생님이 이 마을에 산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
갑자기 그의 표정이 변하였다.
“만우 선생? 흙이 묻혀 사는 상놈에게 선생이라....."
그는 비웃었다.
“고생하지 않은 얼굴이 껍데기만 상놈인데, 호족 나으리께서 흙이나 묻혀 사는 상놈에게 선생이라...."
지원은 떨고 있었다. 자신을 완전히 위압하는 상놈의 눈앞에서 떨고 있었다.
“그분이 사는 곳이 어디요?"
어쨋든 그 눈만은 피하고 싶었다.
“만우께선 제자가 나 뿐이요. 데체 어디서 온 뉘요?'
“의심 지우시오. 오늘 아침 비단을 벗은 상놈이요. 과거는 모르오나 지금은 당신과 같은 처지란 말이오. 다시는 비단을 걸치지 않기로 한 상놈이요."
상놈이라는 말만 반복되었다. 무슨 말보다도 상대방에게 자신이 편하게 다가갈 수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한층 누그러졌다. 지원의 더듬거리는 듯한 말씨에서 솔직한 얼굴을 읽어낸 것이다.
“그 분은 열흘 전에 세상을 떠났소. 이만 돌아가 보시오."
“열흘전?"
지원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곰곰이 계산해 보았다.
자신이 개경에서 돌아온 게 나흘 되었다. 보름 전에 보령의 군수였던 아버지는 고려 제 18대 임금 의종의 즉위식을 가져야 했다. 근래 몸이 불편해 큰아들 지학을 보내 대신 경축했고, 지원은 개경에 혹시 좋은 붓이 있나해서 개경 길을 같이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흘 전에 돌아왔다.
그리고 한달 전 만우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아버지 송태민은 도자기에 관심이 있어 수중에 귀한 도자기 몇 점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원은 이제동안 보지 못했던 도자기에서 살아 움직이는 학을 발견한 것이다. 가뜩이나 평소에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지원은 한 동안 그 도자기를 멍청하게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도자기를 만든 도공마을의 만우를 청한 것이다.
‘학을 살리기 위해선 몸에 흙을 묻혀야 하오. 흙을 가슴으로 느껴야 하오. 도공이 되고 싶거든 먼저 위에 걸친 비단을 벗고 오시오. 흙을 사랑하지 않고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릴 수는 없으니......'
‘흙이라.......’
지원이 마음속에 새록새록 피어나는 이 한 마디이다.
한편 그 때 당시 만우는 지원이 정말 천민의 길을 택하리라 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한달 전 만우와의 만남이었다. 자신이 개경을 갔다온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요? 한달 전만 해도 건강하셨소."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요. 돌아가 보시오."
그리고 그는 몸을 돌아섰다.
“반드시 알아야겠소. 무슨 일이요?"
지원은 급히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지원에게 돌아섰다.
“한가지 명심하시오. 옷은 갈아입을 수 있어도 신분은 갈아입을 수 없소."
지원의 손은 힘을 잃었다. 그가 도방으로 들어가 다시 돌림판을 돌렸고, 지원은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소리나는 쪽을 향해 부르짖었다.
“나 역시 호족 따위는 반갑지 않소. 단지 도공이 되고 싶었을 뿐이요. 나에게도 흙을 만질 수 있는 손이 있고 흙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흙을 느낄 수 있는 가슴이 있소."
고요한 가운데 도방을 가렸던 발이 다시 서서히 올랐다.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 때 새벽을 알리는 첫닭이 울었다. 지원의 시작을 의미하는 소리들이 주위에서 연이어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햇빛은 바깥은 두껍게 메우고 있었다. 그가 흙을 만질 동안 지원은 계속 그렇게 서 있었다.
“배가 고프지 않소?"
“말 놓으세요. 저는 제자로서 여기 서 있습니다.."
그 소리에 그는 미약한 웃음을 지었다. 지원의 경직된 모습에 하마터면 웃음이 빠져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나이가 어떻게 되나?"
“범띠 됩니다."
그는 다시 시선을 앞에 있는 흙덩이에게 돌렸다.
“아홉살 차인가? 내 아우나 하지. 내 신세에 스승이니 제자니 하는 게 밖에선 우스우니까."
“아직 존함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겐 존함 같은 거는 없고, 그냥 석울세, 돌을 가리키는 석자와 비를 가리키는 우짤세."
또 다시 실수했음을 느꼈다. 분명 지원 앞에 있는 천민은 이름이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아직 호족 냄새가 드러나는 것이 지원 자신은 석우에게 아직 마땅치 못한 것 같은 느낌에 안타깝기만 하다.
“저에 대해 또 궁금하신 거라도......”
“호족신분으로 그런 거지꼴을 하고 온 것이 무슨 사정은 있는 거 같은데 궁금하지도 않고 억지로 알고 싶지도 않어. 그냥 어려운 처지인 거 같으니 여기 숨어 지내라고. 어구. 벌써 아침인가? 시장할 터이니 아침이나 해결하러 가지."
석우는 무거운 엉덩이를 올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 뒤를 따라오는 지원을 문득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당부해 두겠는데, 나는 자네에게 스승의 예의를 받아가며 가르칠 실력도 없고,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이 곳엔 스승이 없단 말일세. 잠깐 손을 주게나."
지원이 주춤거리는 손을 억지로 잡아끌어 갑자기 흙덩이에 갔다 붙였다.
“스승은 흙을 만질 때 느낄 수 있는 자네 마음뿐일세."
지원의 어리둥절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투벅투벅 옆집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지원의 하얀 얼굴을 갑자기 떠올려 보았다.
“마을이 당분간 시끄러워 지겠구나."
지원은 석우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훈이네는 식사했는가?"
석우는 가정 꾸리기를 매우 귀찮아했다. 마을 인심이 워낙 좋았고, 석우네가 이 마을에선 매우 유명한 터라 만길네에서 대부분의 식사를 해겨하곤 했다.
“오늘은 좀 늦었구만"
방문을 열고 석우를 맞이하려던 만길은 문을 여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아 다름이 아니고 양주 살 적에 동네 아우였는데, 인사해라 여기가 너의 밥줄이 되실 만길이 형님이여."
“안녕하십니까?"
만길의 식구는 모두 나와 신기하듯 지원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름이 뭔가?"
“본관은....."
그 때 석우의 손이 재빨리 지원의 어깨에 얹혀졌다.
“만석이여."
지원은 성이 없는 자신의 이름을 듣자 아차 했다. 어느새 지원의 등은 젖어 있었다.
“어여 아침 올려."
만길댁은 서둘렀고, 그 때까지 얼어붙어 있던 훈이와 동생 돌이는 동네를 뛰어다니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분명 가만있지 않으실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마을에 분명 화풀이를 한다.'
자신이 이 마을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았다. 송지원 자신보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느낌이 앞선다.
“어여 들어와"
그 때까지 멍하니 있던 지원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둘이서 식사를 할 동안 만길네 마당에서 지원을 구경온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어디 초상났어?"
석우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마땅치 않은지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워매 귀한 머리는 왜 짤랐데."
“살결이 여자 살결이구먼?"
“결혼은 했는가?"
석우는 또 다시 장난끼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넘보지 말어. 이미 양주에 애가 둘이나 있는 몸인께. 첩도 있다고 그랬나?"
지원은 석우의 갑작스런 물음에 잠시 멈짓하더니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걸었다.
‘애가 둘이라.'
지원은 하필은 이럴 때 부인을 생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을 비웃었다. 그리워하기엔 너무 우습기만 한 숫자, 하루가 지나갔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파묻혀 지원은 움직일 줄 몰랐다.
“아 비켜"
석우가 겨우 길을 열어 따라 나섰다.
이날 밤 도공마을의 잔치분위기는 좀처럼 식으려 하지 않았다.
마을 남정네들은 모여 지원을 환영했고, 아낙네들은 지원의 존재에 대한 소문을 이래저래 만드는 재미를 맛보고 있었다.
“잘 왔구먼. 이 손은 이미 선태받은 손이구먼."
“어르신두. 다 늙은 마당에 젊은 남자에게 욕정이 생기셨나? 이제 그만 그 손 놔요 놔."
만길이의 말에 사람들은 집이 흔들리도록 통쾌하게 웃었다.
“이 보령자기가 양광은 고사하고 개경까지 유명하다는 소문은 들었지?"
만길은 술에 취했는지 몸이 곧게 서지 않는다.
“이 곳은 원래 개가 쳐 먹는 밥그릇이나 궁둥짝이 쳐 박는 요강이나 만들어 냈던 곳이었단 말이여."
사람들은 만길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듯 말리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만길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우가 이곳에 오고 요강에 학 몇 마리 날리더니 호족들 눈깔이 커졌단 말이여. 그런데 그 놈의 호족들이 우리 자기를 맘대로 가져가더니, 자기 자기 빼돌렸다고 만우를 죽였단 말이여."
“개같은 호족들"
여기저기에서 분통의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개같은 호족이라.'
변명하지 않았다. 아니 변명하기 싫었다.. 자신은 이미 호족이 아니라는, 남 모르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놈의 보령군수가....."
만길은 말은 멈쳤다. 옆에 있던 석우의 술잔이 깨진 것이다. 그리고 단단히 쥔 주먹에는 피가 낭자했다.
“내가 만우 형님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지?"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 마리 짐승인 마냥 문을 박차고 방을 나섰다.
‘보령군수가......'
지원은 계속 얼어붙어 있었다. 무언가의 섬짓한 기운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겨우 입을 열었다.
“보령군수가 어쨌다는 거요?"
무언가 자신이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용하다. 아마 석우의 움직임 때문일 것이다. 결국 지원도 방을 나왔고 석우가 있는 도방에 들어갔다.
“물어볼게 있소?"
“뭐야"
석우는 자신의 앞에 있는 도자기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보령군수가....."
“나한테 한가지 명심할게 있는데, 다시는 그 얘기 내 앞에서 꺼내지 말게."
지원은 속에서 무언가 울부짖음을 느꼈다.
“내가 바로 보령군수의 아들이요."
도자기를 만졌던 석우의 손이 멈췄다.
“내가 바로 보령군수의 셋째 아들이란 말이요."
그리고 지원은 방을 박차고 나서려 했다.
“나와 조용히 얘기 좀 할 텐가...."
석우의 잔잔한 속삭임이었다. 지원의 눈에 고인 눈물이 눈가에 지탱하지 못하고 뺨을 타고 사뿐히 내려앉는다.

방을 밝히기에는 너무 미약한 초롱이었다. 두 개의 큰 그림자는 쉬지 않고 춤을 추고 있었다.
“만우 그 분은 원래 양주의 장씨 가문의 외아들이셨네. 그 분 역시 호족이었지."
“아...."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는 같으나 나의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었고........"
입은 여전히 다물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대감은 금 국하고의 역적모의로 모함 받아 사형 당하셨지. 그리고 삼족을 멸한다는 개경의 소식이 들려 온 거야. 대감 마님은 이미 쓰러지셨고, 우리 어머니 또한 무사할 리 없지. 대감마님은 마님보다 기생을 더 좋아하셨으니까."
갑자기 나온 석우의 한숨이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삼족을 멸한다는 말에 양주에서 도망쳐 나와 이곳 보령까지 오게 된 거야. 그런데 원래 형님은 송에서 들어오는 자기에 관심이 많았던 분이셨단 말이야.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해서. 이곳 도공마을에서 도공이 되기로 하셨지. 그림만큼 흙의 매력에도 흠뻑 취해 가지고...... 송의 상감을 본 따 사람들의 도자기에 학을 그리기 시작한거야."
“저도 도자기에서 숨쉬는 학을 보았습니다."
“십여년 연구 끝에 자기 만드는 일에 익숙했고, 공주의 상감과 함께 양광도에서 유명해 지기 시작한 거지. 나야 어려서부터 싸움만 하고 자랐는데, 형님의 말솜씨에 끌려 나도 결국 평생 흙을 묻히기로 했더니 점점 매력이 느껴지더군."
“저는 사실 자기에 박힌 그림을 배우러 왔습니다."
“그림을 그릴 줄 아는가?"
석우의 흥분된 물음이었다. 그리고 지원은 웃었다.
“따라오게나."
석우가 잡은 손은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아파 왔다. 그리고 도방까지 끌려간 것이다.
석우는 초벌구이 된 자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앞이 뾰족한 송곳 같은 것을 몇 개 주어왔다.
“이걸로 자기에다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려보게나."
지원은 어안 벙벙했다가 곧 그것을 받아 쥐었다. 그리고 자기에 조그만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석우도 돌림판 위에 앉았다.
“형님은 일 년여 고민가운데 수십 마리의 학이 한꺼번에 오르는 훌륭한 도자기를 하나를 완성했지. 그런데 갑자기 보령군수의 종놈들 몇이 오더니, 그 도자기에 대한 내력을 묻더군. 형님은 이것은 내 몸이라고, 끝까지 안 판다고 고집 부렸어.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종놈들은 보령군수에게 올 도자기를 빼돌렸다고 우기면서 형님을 끌고 갔지. 나는 말이야...... 그 때 어디 있었는 줄 아나?"
지원은 그저 앞에 있는 도자기에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숨어서 그냥 지켜보고 있었어. 당당하게 잡혀가는 형님의 모습이 이해가지 않은체 그냥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흙이나 만질 줄 아는 상놈이라 그 사람들이 무서웠어. 쳇...... 그런데 자네가 공교롭게도 보령군수의 아들놈이구먼."
석우에게는 오랜만에 채워진 만우의 자리에 들떠 있었다.
“호족이라고 했는가?"
지원의 손은 드디어 선을 긋기 시작했다.
“나는 호족을 제일 싫어하지. 형님은 왜 좋아했는지 아나? 호족이 아니기 때문이야. 이 방에서는 호족이 아니었네. 자네도 역시 여기에서는 호족이 아니지......"
그리고 흡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구 요 방정맞은 입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난리 구만."
학은 한쪽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흙에 대해 한마디 들려주도록 하지."
그리고 이미 지원의 손에서 나는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사람이 맨 처음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는가?"
이미 한 마리 학이 창공을 향했다. 그리고 지원은 두 번째 학을 파기 시작했다.
“조그만 바늘에도 흠집이 나는 이 살덩이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아는가?"
긴박하게 익숙해져 가는 손놀림이다.
“하얀 솜털에 비단을 덮었나? 아니면 고운 나무에 윤을 냈나?"
그 가운데 또 다시 학의 날개짓이 시작되었다.
“바로 이 거친 흙이라네. 사람은 호족의 아니꼬운 비단의 우아함도, 빛나는 장신구의 화려함이 아니라 바로 이 거친 삶인 게야. 암. 사람은 이런 뜻으로 만들어졌지."
또 다시 한 마리의 학이 자유로왔다.
“땅위에 있는 진물이란 모조리 다 빨아먹는 비싼 사람의 몸뎅이는 결국 한줌의 흙인게지. 하지만 흙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네. 같은 흙이라도 도자기로서의 가치와 길가의 한줌의 흙으로서의 가치는 다르지 않나?"
지원의 손은 춤을 추고 있었다.
“지네도 기억하게나. 자네는 쓸모 없는 한줌의 흙이 아니네. 하늘이 절대 실패하지 않은 도자기라는 것을...."
그리고 석우의 돌림판이 멈췄다.
“하지만 그러한 도자기 중에서도 다 살아남는 것은 아니네. 많이 깨뜨려 버리시지,  암 많이 깨뜨려 버리시지. 하지만 나는 살아남은 도자기야. 형님처럼 살아남은 도자기의 자존심을 지켜 나갈껄세."
어느새 지원의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석우는 서서히 지원에게 다가갔다.
“형님의 학은 죽지 않았어."
둘은 전혀 느끼지 못한 체 밤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어젯밤 술에 무리를 한 탓인지 햇빛이 가득한 아침에 눈을 뜨기가 꽤 귀찮았다.
“젠장 벌써 날이 밝았나?"
지원도 덩달아 겨우 눈꺼풀을 올렸다.
“게다가 길도 모르는 길음현을 가야 하니....."
‘길음현?'
아버지 심부름 차에 몇 번 길이 익은 고을이었다.
“길음현 이라면 제가 압니다. 제가 가지요."
“그걸 입고 현리의 문을 두드리겠다는 건가?"
지원은 눈꺼풀을 번쩍 올렸다. 역시 비단이 아닌 흙 때묻은 옷이었다.
“그러면 장쇠에게 길만 안내하게나."
석우는 금세 내 건넛집 아들 장쇠를 불렀다. 석우는 조심히 장쇠의 손에 자기를 얹혀 주었다.
“형님의 마지막 자기구먼."
그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가게나."
지원은 앞장서 나왔다. 숲 사이를 지나던 중 갑자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장쇠도 덩달아 몸을 같이 했다.
‘무슨 이유란 말인가'
어느 새 지원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이유로 송대감은 여기까지 나를 찾는단 말인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명 아버지 송대감에게서 자식을 버리겠다는 확답을 들었다. 하지만 저기서 오는 셋은 분명 안면이 있는 수종들이었다.
그들이 어느새 지나갔다.
“아는 얼굴이요?"
장쇠의 조용한 물음이 들려올 리 없었다.
‘도대체 당신은 언제까지 나를 귀찮게 할거란 말이요?'
앞에 있는 소나무가 살짝 흔들리다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저 혼자 갔다 올까요?"
장쇠는 그에게 말을 거리가 매우 불편했다. 하지만 갈 길은 멀고 하는 수 없었다.
“미안하오. 잠시 옛 생각에 격분하고 말았소."
지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장쇠의 얼굴에 미안한 표정을 더욱 진하게 지었다.
“갑시다."
하지만 걸음을 걸으면서 계속 송태민의 얼굴을 지울 수 없었다.
둘은 걸음을 빨리 했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석우의 집 앞에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 마을 어른이 앞서 얼굴을 내밀었다.
“이제 오는가? 큰일 났구먼. 전에 만우가 잡혀가더니 며칠 안돼 이번에는 석우가 잡혀갔어."
지원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앞이 깜깜해져 왔다.
“또 그 보령군수 놈이여. 전에 만우를 잡으러 왔을 때 마을에 온 놈들이 분명하구먼."
그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당신은 정말 개 같은 호족이었소?'
송태민의 얼굴에 정신없이 욕을 뱉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다.
“그래 네놈의 죄를 인정하겠다는 건가?"
송태민은 어느새 말이 부드러워 졌다.
“그래 내가 당신의 도자기를 빼돌렸단 말이요."
석우는 이미 온몸에 멍자국이 난자했다. 게다가 입에서 맺힌 피가 말하는데 귀찮았다.
“그래 형제간에 도둑질한 게 이제야 밝혀졌구먼. 하지만 죄는 시인했기에 손을 자르지 않겠다만 도둑질한 죄는 어찌할 텐가?"
“역시..... 죽일놈. 역시 네놈에게 속았구나."
석우는 이빨을 아물었다.
“어서 저 도둑질한 상놈의 손을 잘라 내어라."
그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하인은 무자비하게 그의 오른손을 작두 위에 올렸다.
“차라리 내 두 다리를 가지시오."
송태민의 수종은 잠시 주춤했다.
“잘라내어라."
송태민의 소리가 또 다시 울리었다.
“차라리 내 두 눈을 파란 말이요."
하지만 송태민은 동요하지 않았다. 결국 작두의 두 날은 잔인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석우는 이미 미쳐있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거머쥔 체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석우의 행동에 몸서리 쳤다.
“네 같은 더러운 호족이 보기 싫어 눈을 파라 했다. 네 같은 호족에게 다가가기 싫어 다리를 자르라 했단 말이다. 자 내 눈 똑똑히 보거라. 네놈에게 돌려줄 것이니까......"
이미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역시 만우의 동생이구먼. 만우의 동생놈이 공교롭게도 내 아들놈이 데리고 있다니...... 형제간에 운이 없는 게지....... 네놈, 역겨운 표정이 형이랑 똑같아. 멍석을 내려라."
갑자기 하인들이 무언가 가져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너의 형이 멍청하게 숨을 거둘 때 그 피가 그대로 남아 있는 멍석이란 말이다."
석우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입 속에서 맴돌았고, 송태민에게는 고통스런 모습만 보여 줄 뿐이었다.
“도자기나 굽는 상놈주제에 너희들의 날뛰는 모습들이 너무나 아니 꼬아. 상놈주제에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너희 놈들이 아니꼽단 말이다."
어느새 수종의 손에 팔뚝만한 강목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문밖이 소란스럽다.
“무슨 일이냐?"
송태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문이 큰 굉음을 내며 열렸다.
“역시 네놈이구나."
송태민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지원은 그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석우에게 향했다.
“그 옷이 참 어울리는구나?"
지원은 석우를 등에 업었다. 주위에 수종은 그래도 한 때 도련님이었던 그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제 갈길 가게 놔두어라. 그리고 모두 나와 저 꼬락서니 좀 구경하거라."
송태민은 웃어 제쳤다. 하지만 주위에 그 웃음은 송태민 혼자만의 것이었다.
도공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지원은 정말 이놈의 눈물을 끊으려 어떻게 해보려 했지만 끊이지 않았다. 다시 송태민의 웃음소리가 귀를 아프게 했다. 돌에 걸려 넘어졌다. 등에 업혀 있던 석우역시 탈진했는지 잠이든지 오래다.
갑자기 무슨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멈출 수 없었다. 점점 더 심하게 깔깔거리게 되었다. 한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그 웃음은 부엉이 보다 ,더 멀리 있는 늑대보다 더 한 많은 웃음이었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마을은 잠자고 있었다. 지원은 급히 석우의 방에 조심히 눕혔다. 천으로 대충 여민 손바닥 없는 손을 보았다. 죄책감이 한없이 밀려왔다.
“내 집인가?"
석우는 어느새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평소의 자만 있는 소리는 소실한 체 미약하기만 한 소리였다.
지원은 자신이 말하는 순간 눈물을 제어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잠깐 도방에 나를 데려다 주게나."
“한 숨 푹 자고..... 날이..... 날이 밝으면 가지요?"
지원은 어렵게나마 입을 열었다.
“나를 일으켜 주게나."
석우는 억지로 일어서려 했다. 하는 수 없이 지원은 석우를 부축하게 되었다.
석우는 도방을 우선 한 번 쭉 둘러보는 것이었다.
“아마 낮에 폈던 불이 식었을 게야. 밖에서 불 좀 피게."
갑자기 엉뚱한 명령이었다.
“결국 하늘은 나를 깨뜨려 버리셨어. 모두 실패한 도자기라고..... 하하..... 실패한 도자기라고......"
알아듣지 못할 석우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장작을 열어 죽어 가는 불을 살려냈다. 한참 그렇게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꽃이 튀어 나왔다.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지원은 일어나 다시 도방에 들어갔다.
지원은 분명 눈을 크게 떠보았다. 그런데 분명 석우는 그 자리에 없었다. 화장실에 가 보았지만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지원은 난감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냄새를 맡았다. 갑자기 소름이 끼쳐왔다.
혹시나 했다.
서둘러 도자기가 타고 있는 가마 벽을 뜯어보았다.
그곳에서 석우는 따뜻한 주위가 포근한 듯 웃음을 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석우의 몸 가운데에선 그 웃음이외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서 어제 자신이 그렸던 도자기가 불에 타고 있었다.
“왜 저에게 이렇게 큰짐을 맡기셨습니까?"
지원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자기에서 신음하는 학의 가냘픈 소리가 점점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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