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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선-단편소설1(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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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꽃들에게 사랑을..,
정 명 선
1
지구의 성층권을 달구는 뜨거운 공기 층-
끓는 양철 판과 같은 대지, 엘리뇨 현상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 현상, 이러한 날에는 창밖에 놓아둔 식물들을 잘 돌보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은 식물들이 고사 당하기 쉽상이었다.
온몸이 끈적끈적하고, 무언가 불쾌한 꿈으로 지쳐있던 장은 두 눈을 뜨려고 꿈벅거렸지만 눈꺼플 위에 쇠 조각을 용접해 놓은 것처럼 빠알간 불덩이 같고 묵직했다. 이른 아침의 직사광선이 두 눈을 내리 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금속판 위에 올려진 끓는 물처럼 두 눈을 바르르 떨다가 번쩍 눈을 떴다. 책상 위에 타원형의 푸른 탁상시계가 눈에 박혀왔다. 7시 30분,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녹슨 기계처럼 뻐걱거리는 머리를 돌려 말라죽어 가는 식물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설사 지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식물을 직장으로 가져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직장에는 오래된 신들린 당 나무 같은 늙은 여자가 있다. 생 (생 단발머리)이라고 불려지는 그녀는 외모부터가 특이한 여자였다. 커다란 장독을 연상 게 하는 굴곡이 없는 몸매와 작달막한 키, 장날 뚝배기를 뒤집어씌운 듯한 얼굴, 그 위에 엉성하게 얹은 실타래 같은 숱이 없는 생 단발머리, 눈 꼬리가 가늘게 살짝 치켜 올라간 작은 눈, 밋밋한 낮은 코, 얇고 큰 입, 전체적인 인상은 마치 푸짐한 음식점의 마음씨 좋은 주인집 아줌마 같아 보이는 여자, 그녀는 식물 기르기에 무척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그는 허둥지둥 세면을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면서도 베란다의 화분을 집어 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문 밖을 나왔을 때에는 후끈한 바깥바람이 숨통을 콱 막고 서있었다. 그는 딱정벌레 같은 자신의 아토스에 몸을 실었다. 옆 좌석에는 고사직전에 처한 그라디올러스가 애인처럼 앉아 있다.*
직장 사무실에서 어제와 똑같이 반복된 일상적인 조회가 시작되었다. 직원조회가 끝나자마자, 그는 화분을 들고 그녀가 있는 미용 반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교실은 다른 반과는 사뭇 달랐다. 복도 커다란 창가에는 크고 작은 분속에서 수줍게
얼굴을 내민 작은 채송화와 입술이 여린 분꽃, 활짝 핀 라일락과 채송화.., 여러 종류의 크고 작은 식물들이 투명한 복도 창을 관통해 들어오는 말 알간 햇살을 삼키려고 입술 같은 잎을 오므리기도 하고 벌리기도 하여 창살 안의 무거운 분위기를 재잘거리며 항의하고 있는 듯 했다. 그가 미용 실습 장과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는 교사 실로 들어섰다. 그녀가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웬일이세요. 장 선생님이.”
“이걸 선생님에게 드릴려고..,”.”
그는 화분을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아직 죽지 않은 것 같은데.., 잘살려 보시지 왜? 절 주시는 거예요.”
그녀는 화분을 받아들며 말하였다.
“제 힘으로는 너무 늦었어요, 선생님은 분명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전문가시니까..,"
“선생님도 별 말씀을..,"
그녀가 화분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저-그 녀석 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요. 제 딴에는 이쁘게 기르고 싶었는데, 보통 정성이 들어가야지요."
그녀는 동정어린 눈으로 탁자 위의 식물을 바라보았다.
“불쌍한 녀석이군요. 선생님은 식물에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젊어요. 저같이 늙은 여자나 소일거리로 식물을 기를 수 있는 거예요.”
“아니예요. 제가 너무 게을러서.., 이-식물은 선생님이 갖고 있는게 좋을 거 같아요.. 제가 가지고 있으면 아무 쓸모 없는 죽은 나무 가지를 화분 속에 박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같아요. 좋은 선물을 드렸어야 하는데 다 죽어 가는 식물을 드려서 죄송해요”
“온 김에 차라도 한 잔 하시고 가세요.”
“그러면 좋겠지만 사무실에 밀린 업무가 있어서,“
그가 문 쪽으로 다가서며 말하였다.
그가 나가자, 그녀는 탁자 위에 올려있던 화분을 정성스레 새 화분에 옮겨 심고는 충분히 물을 주었다. 그리고 양분의 유출을 막기 위해 그늘진 한구석에 갖다 놓았다. 그녀는 책상머리 앞에 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실습 장과 이어져 있는 창문 너머 작업대에 서서 마네킹 머리를 열심히 다듬고 있는 한 아이에게로 못박아졌다. 그녀의 얼굴이 창가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에 의해 무거운 표정으로 그늘졌다. 마침내 고기의 입술 같은 그녀의 얇은 입이 열렸다.
“진희야. 이리와 보렴.”
“예 선생님.“
소녀가 하던 일을 멈추고 교사 실 창문 앞에 다가와 섰다.
성숙할 대로 성숙한 아이다. 늘씬한 키에 여린 얼굴 선을 따라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오똑한 코, 타원형의 작은 은테 안경 알 속에서 빛나는 크고 그늘진 눈, 그 눈 속에는 아직도 소녀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순수와 호기심 어린 열정과 장난기로 눈웃음치고 있다.
“여기에 앉아.”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쇼파에 앉았다.
“진희야.”
“예 선생님”
“너 꽃 좋아하니?”
“선생님도 참.., 꽃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녀는 구석에 놓여있는 식물을 가리켰다.
“저-식물을 봐.”
“다- 시들었어요. 금방 죽을 거 같아요.”
“그래 네 말대로 금방 죽을 거 같구나. 하지만 사람이나 식물이나 사랑을 해주면은 살아 날 수 있는 거란다. 지금은 볼품없어 보이지만 꽃이 피면은 참 예쁠 거야. 아마 우리 진희 만큼이나 예쁠 텐데."
소녀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아이여서,
“선생님 제가 한번 살려 보도록 하겠어요. 저같이 예쁜 꽃이라니 꼭 살려야 되겠네 요.”
“그래 줄 수 있겠니?“
“그럼요.”
“이제야 선생님 마음이 놓이는 것 같구나. 자-이젠 자리에 가서 실습해야지.“
소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하며 흡족해 하였다. 소녀는 실습 장으로 돌아와 마네킹 머리에 꼽혀있던 분홍 롤 핀을 뽑았다. 금새 마네킹 머리가 유쾌하게 굼실굼실 되살아났다.
2
특활시간 문예반,
장이 아이들에게 쓰도록 한 자작 詩 중 한 개를 선택해 낭독하였다.
사랑은 미로와 같은 것 투명한 상자 속에 갇힌 슬픈 인형처럼
멍하니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만 있지.
누군가 동전을 주고 유리상자 속에 뚜껑을 열고
손을 집어넣으면은 선택된 슬픈 인형은 사랑을 얻은 거지.
사랑은 그러한 것 선택할 수 없고 선택받기만을 기다리는 것
우리의 사랑은 유리상자 속에 갇힌 슬픈 인형이지
아주 슬프고 외로운 인형이지
누군가를 선택할 수 없고 선택받기만을 기다리는..,
장은 칠판에 아이들이 쓴 詩 중 한 개를 선택해 낭독하고는 ‘슬픈 인형’이라는 단어에 분필로 밑줄을 긋었다.
“여기서 슬픈 인형은 누구를 지목하고 있는 걸까? 아는 원생 없어요.”
아이들은 잠잠하다. 잠잠할 뿐만 아니라 어수선하다. 저희들끼리 무엇이 좋은지 키득거리고 딴청이다. 도저히 수업에 열의가 없자, 장은 그 詩를 쓴 아이를 지목하여 물었다.
“슬픈 인형은 누굴까?”
소녀는 일어나 무표정하게 말하였다.
“슬픈 인형은 우리들 이예요.”
“우리들.. 어째서?”
“우리들을 어른들이 늘 장난감처럼 갖고 놀잖아요.“
소녀는 장을 민망스러울 정도로 쏘아보며 말하였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다. 난장판이다. 장은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거리며 교탁을 주먹으로 꽝 꽝 쳤다.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詩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거야. 어떤 詩든 그 詩를 쓴 시인의 마음이 담겨있는 거란다. 그걸 비웃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다. 아마도 이 詩를 쓴 진희는 자신의 슬픈 과거를 이야기했던 것 같다. 여러분들은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성인들이 갖고있는 부조리한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 性을 주고 파는 어른들의 슬픈 자화상을.., 하지만 이-세상에 꼭 그러한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란다. 정말 순수하고 진실 된 사랑은 이-세상엔 얼마든지 있을 걸로 선생님은 생각한다. 단지 우리 자신들이 타락해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마치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러한 가식과 거짓의 색안경을 벗고 맑고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이-詩는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 詩였던 것 같다.”
장은 아이들에게 주의력을 주기 위해 기계적으로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또 다시 어수선하다. 딴청을 피우거나 그렇지 않으면은 초 점 없는 멍한 눈으로 쇠창살이 쳐진 창 밖을 응시 할 뿐이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일반학교와는 달리 미래의 진로를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비행한 아이들을 법이라는 강압 앞에 붙들
어 놓고 수업이랍시고 하는 공부니 잘될 일이 만 무다. 아이들은 하루 빨리 법의 시효에서 벗어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인들 맥이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중 한 아이만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장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러한 아이들의 진지함이란 도대체 다수의 어수선함과 주의력 없는 아이들에 의해 묻혀 버리고 때마침 울리는 종소리에 특할시간 문예반 수업은 끝마쳐졌다. 와작 거리며 아이들이 교실 문을 열고 나갔다. 기껏 나가봐야 철 장 안, 화장실이나 자신이 본래 배치될 본 반이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끝남이란 자유와 연관되는 모양인가 보다.
3
난 공기보다 가볍고 투명한 영혼-
이-세상 가득히 채우고 싶은-
텅 빈 운동장 가득히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수많은 칼날, 칼날..,
두터운 대지 위의 가죽을 뚫고 뚫는-
땅속 깊은 심장 속으로 성난 열기가 환상처럼 쉴새없이 꿈틀거린다.
나는 죽었다. 뜨거운 텅 빈 운동장 속에서 간신히 숨만 꼴닥 거리는 작은 굼뱅이
였는데..,
투명한 칼날에 찔렸다. 죽은 영혼은 운동장 저편에서 쉴새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아지랑이, 아지랑이.., 수천, 수만, 수억의 가느다란 실뱀들-
순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하늘 하늘로 승천하는-
그 속을 뚫고 하늘에서 下降한 듯 다가오는 사내-
그는 哲人이었다. 꿈꾸고 있던 동화 속의 왕자였다. 소녀는 멍하니 쇠창살 밖으로 들어오는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며 넋 나간 사람처럼 생각에 잠겨있었다. 현실은 얼음보다도 차갑다. 어쩜. 이 세상에 순수와 진실은 나하고는 거리가 너무나 멀구나. 십대의 마지막 벼랑에 서서..,나는 순수와 진실을 잃어 버렸어. 벌레 먹은 장미처럼 심장이 뻥 뚫려 버렸어. 꽃이 피기도 전에 하지만 십 대의 끄트머리에 서서
그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가 나를 선택할 수만 있다면.., 큐 피트의 정확한 화살처럼 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다. 아니 야. 절대 그는 나를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더럽혀진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이 그와 난 선생과 원생이라는 관계에 있지 않는가? 현실의 견고한 사슬로 동여 메어진 사이..,차라리 그럴 바에는 내가 그를 선택하는 거야. 운명처럼.., 그를 위해 편지를 써야 되겠어. 소녀는 일과가 끝난 오후에는 자신의 감방창살이 쳐진 견고한 창문에 나비처럼 달라붙어서 생각에 잠기었다.
4
장은 문예반 특활 시간만 되면은 소녀를 의식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 애의 눈빛이 집요하다는 것을.., 그 눈은 아이들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표정을 띠고 마치 남을 무시하는 듯한 반항적인 광채를 뿜으며 어딘지 모르게 그늘진 애수를 띠고 있었다. 그는 그러면 그럴수록 좋든 싫든 간에 줄곧 소녀를 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혹 소녀의 눈길이 자신을 향하면 그는 흠칫하고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곤 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소년원 아이들이 선생님의 수업에는 별다른 관심 없이 딴청을 피우기 일쑤였지만 그 소녀만큼은 유별날 정도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단연 돋보적이고 개성적인 존재로 보였고 또한 쉽게 눈에 띄었던 것이었다.
매사 수업 같지 않은 수업을 마치고 교사 실로 돌아가는 도중 소녀는 장의 뒤에서 걸어왔다. 다른 애들이 뿔뿔이 자신들이 배치된 본 반으로 흩어져 버렸지만, 소녀는 장을 뒤쫓아와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을 건네었다. 그 인사말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퍽이나 어른스러운 여인의 수줍은 떨리는 음성이었다.
“선생님 저.., 선생님한테 드릴 편지가 있어요.“
소녀는 편질 그에게 건네었다. 그는 싫지 않은 기분이 되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가 사무실로 돌아와 편지를 펼쳐 보았다. 보기 드문 성숙하고 순수한 아이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
창 밖 너머
모든 세상이 갇혀있습니다.
파란 하늘과 솜사탕 같은 구름, 화단에 나무랑, 꽃, 텅 빈 운동장도-
시간이 정지된 세상 속으로-
꽃향기에 도취된 흰나비 한 마리만이 홀로 남아 자유롭게 날아다닙니다.
결국 그 나비는 저- 높이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밤에는 그 나비는 작은 별이 되겠지요. 아무도 없는 깜깜한 밤에 어디선가 부끄러운 얼굴로 선생님을 몰래 지켜보고 있을..,전 그 작은 별이고 싶습니다. 어디서든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
지켜보고 있는..,
선생님- 전 지금도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활시간에 제 형편없는 詩를 읽어보시고 세상에는 순수와 진실 된 사랑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하신 말씀, 단지 우리들이 타락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전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짧은 生. 짧지만 고통스럽고 타락한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게 절망스러웠지요 하지만 전 이제서야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얇디얇은 거미줄 보다 더 얇은 희망이 바로 내 옆에 있었다니.., 선생님이 순수한 사랑의 씨앗을 주셨기 때문이예요. 전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못할 겁니다. 지금도 선생님이 창밖에 서 계시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한번 뵙고 따뜻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아주 가까이 가까이서-
어두운 창가에 서서- 진희 드림
그는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깊은 상념에 잠기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직원의 비웃음 섞인 비아양 거림에도 불구하고, 그건 본시 마음이 여린 장의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이곳에 입사해서 생긴 우울증 때문이었다. 소녀가 쓴 편지의 내용 중에 세상이 갇혀있다는 표현에서는 더욱 더 그러했다. 결국은 자기자신도 감금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식마저도 그래도 처음에 입사할 때에는 포부도 컸 것만.., 자신의 성격에 어울릴 법한 외진 직장이라는 생각과 비행한 아이들에게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낯간지러운 사명감도 얼추 갖고 있었는데, 소재거리가 충분한 허울 좋은 문학에 대한 열정은 어떻고, 늘 그건 휘발유처럼 현실을 살아가는데 동력원이 되어주질 않았던가? 하지만 장은 당직근무를 하고 나서 거울 앞에선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피곤과 권태로 지칠 대로 지친 고사직전에 처한 식물처럼 휑한 눈과 초췌한 몰골에 헝클어진 머리.., 오히려 소녀로 하여금 권태로운 현실에 투명한 낭만의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장은 직장동료들 속에 속하면서도 자신이 늘 고독했고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르게 행동하려 하였다. 그건 그로 하여금 수용기관이라는 의식이 감금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순수성을 고집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더 더욱 자신의 직장으로부터 떠나기가 어려워 갔다. 회식장소에서 그렇게 술을 진탕 마시고 허튼 소리를 펑펑 쏘아대고 하던 짓이 과연 진실로 즐거웠는가를.., 지금껏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불안정한 경험 때문에 그는 오래도록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속마음은 언제나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그건 부드럽고 내성적인 그러면서도 열렬한 마음의 움직임이 꿈틀거리는 것을 스스로 두려워하며, 자주 찾아드는 우아스러운 사랑의 상념에 불안을 느낀곤 하였는데 그로인해 작은 소녀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게되었고, 심지어는 두터운 관복을 벗고 허
울 좋은 현실의 굴레를 넘어서고 싶었는데.., 결국 그에게 크게 결핍되었던 것은 벗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에 있는 오랜 벗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 후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5
저녁나절에는 한낮의 뜨거운 기온하고는 달랐다. 제법 스산한 게 제철 기온을 되
찾은 것 같았다. 기형적인 날씨 탓이었다.
천장에는 불안스러워 보이는 커다란 선풍기가 매달려 삐걱거리며 천천히 돌아 가고있었다. 그 선풍기는 밤에는 장식용 같았다. 장은 그러한 술집에서 친구 호와 마주 대하고 있었다. 호는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창의력과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와 장의 성격은 대조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상스러울 정도로 서로가 잘 어울렸다.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이 사회에서 만난 사이였다면.., 그들은 순수와 열정으로 맺어진 학창시절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그는 수다스러울 정도로 너스레를 떨었다. 대부분 동창들이 그렇듯이 벗과의 비교를 통해서 성공여부를 가리고 자만하기 일쑤였다. 결국 장도 현실 속의 인물이었다. 나름대로 모순되지만, 여러 가지 교육방안을 통해 사회에서 버림받은 비행청소년들에게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호는 그의 직업을 전혀 이해를 못했다. 그런 못된 아이들은 혼 구멍을 내주어야 한다고 하며. 혹시 그곳 감방에 저명인사인 아무개가 들어와 있지 않느냐고 물어왔다. 호는 교도소와 소년원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러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설사 관심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명예와 연관 짓거나 그렇지 않으면은 종교적인 열정으로 맹목적인 사랑에 빠지기 쉽상이었다. 마침내 자만심으로 부플 대로 부픈 호가 젊은 유흥 접객 원을 부르는 객기를 부렸다. 장이 그를 좋아하는 것도 그러한 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겉으로는 도덕주의자인 척 살아가는 자신의 감정을 느슨하게 해주는 힘이 그에게는 있었다. 심한 음주는 도덕주의자인 척 살아가는 그를 무장 해제시켜 버렸다.
기억의 끄트머리-
엿 가락처럼 늘어진 시간이었다. 그 때쯤, 장은 어느 호텔 방에 팽개쳐져 있었다. 쑤신 머리를 간신히 들었다. 동굴 같은 훵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두리번댔다. 사방의 꽃무늬 벽이 일렁거리며 퉁겨 나올 것만 같았다.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침대 옆에는 노랑 긴 머리가 배를 앞으로 깔고는 가르릉거렸다. 매우 평온하고 조심스러운 암코양이 같았다. 그는 그녀의 미끈한 몸매를 즐겼다. 즐거운 상상이 안개처
럼 부드럽게 흘러 퍼졌다.
“저-여자와 어젯밤 어떤 일이?”
기억을 더듬으려 했지만 깨지듯 머리가 아팠다. 목은 메말라 마른 펌프 속의 껄껄한 주둥이 속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는 생 수병을 움켜쥐고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 마셨다. 침대에는 아직도 젊은 여자가 자고 있다. 그녀도 숙취로 온몸을 왁신왁신 떨고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젯밤., 어젯밤? 그는 그녀의 얼굴이 몹시 보고싶어졌다. 마침내 조심스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황금빛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제 서야 그녀는 머리를 부시시 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앉아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잠이 덜 깬 깊은 눈과 알맞게 높은 코, 아직 어리고 애 띤 얼굴선.., 놀랍게도 그녀의 얼굴에서 직장에 있는 진희의 얼굴과 묘하게 교차되어 감을 느꼈다. 그만큼 그녀는 어려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 어린 여자와..? 장은 갑자기 이성적인 생각이 종이 장보다도 얇은 본능의 벽을 뚫고 한꺼번에 몰려옴을 느꼈다.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야 된다.” 그는 강박감 속에 방바닥에 벗어 던져진 옷을 허둥지둥 주워 입었다. 대조적으로 그 소녀는 아침 햇살 속에서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담배연기를 여유 있게 날리며.
“오빠 어딜 가.., 돈 때문에 가는 거야. 어제 돈은 친구가 다 지불했는데..,”
“출근해야 돼. 늦었단 말이야.”
장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해대며 호텔 방을 빠져 나왔다.
호텔 방에 어린 암거미가 끈적끈적한 체액을 품고 있다가 자기보다 몇 배 더 큰 먹이가 나타나면은 뒤집어씌우는 듯한 숨막히는 불쾌감을 느끼며 직장으로 향하였다. 햇살이 아침부터 따가웠다. 오늘도 이상고온 인 듯 했다. 늙은 굼뱅이가 바깥 세상으로 나와 놀란 것처럼 그는 지하도로 뛰어 들었다. 밀리고 밀리는 사람들 사이로 그들 하나 하나가 죽어 가는 생물이라고 생각하였다. *
장은 공문을 만들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좌판을 연실 두드려 보았지만 좌판 위에서 손가락이 자꾸만 미끄러져 갔다. 어제 과음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침나절에 호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었는데 그는 여전히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 똑같이 술을 마셨 것만 자신이 더 취한 것만 같았다. 자신은 넙죽넙죽 술을 잘도 받아 넘겼지만 그는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세상은 결국 자신같이 미련한 놈의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치밀하고 계산적인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차라도 한잔 마시는 것이 좋을 성싶었다. 다행히 생의 교사 실은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곳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지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차나 가벼운 다과를 내놓고 수 다를 떨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대화 자체가 무미건조한
일상사가 고작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홀로 있다는 것은 고독과 함께 찾아오는 참을 수 없는 가볍고도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것을 해소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의 하찮다고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대소사를 기억해내고 관심을 갖고 수다를 떨며 무서운 고독을 달래야만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사소한 관심은 아이들에게도 깊은 사랑으로 이어져 헌신적인 교사상으로 칭송 받아왔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고단한 생의 한가운데 서서 스스로가 중요한 존재임을 묵시적으로 일깨우며 침묵 같은 무거운 미소를 짓곤 하였다. 언젠가 그녀는 모든 직원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초대를 한 적이 있었다. 장도 본의 아니게 그녀의 집에 초대되었는데, 대부분 초대된 직원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녀의 집안 꾸밈에 대해 칭찬을 해댔으나 그는 달랐다. 방안과 거실 가득히 헛점 없이 꽉 들어찬 크고 작은 가구와 장식들, 베란다에 빼곡이 들어찬 식물들, 불필요할 정도로 차려진 음식.., 오히려 주의 깊은 관찰력을 가진 그는 그건 그녀가 공허한 내면을 채우기 위한 보상심리로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
생은 요즘 들어 마음이 상해있었다. 진희가 죽어 가는 식물에 별 달리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이 꺼림칙하게 머리 속에 떠올랐다. 마침 그가 자신의 교사 실에 나타났다. 하지만 쉽사리 겉으로 그러한 묘한 기분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가 복도 창문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가깝게 보이다가 교사 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보다 과장되게 자신의 코앞을 손으로 가로 저었다.
“ 어 휴. 술 냄새. 장가도 안간 새파란 총각이 웬 술을 그렇게 마시고 다녀요.
머리에 꼭지가 다 풀어지겠네.“
“술은 먹고 싶어서 먹어요. 괴로워요. 사는 게..,”
“나이든 사람 앞에서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생님은 술에 대해서 몰라요. 술 먹는 사람들 마음을 이핼 못하실 거예요.”
그는 괜 시리 호들갑을 떠는 그녀에게 투박하게 말하였다. 창가로 성큼 다가간 그는 지난번에 들고 온 식물의 잘린 허리를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끈끈한 식물의 수액이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듯 했다. 화제 거리도 바꿀 겸 장이 말하였다.
“이 식물이 살아날 수 있을까요.”
“살아날 수 있겠지요.”
생은 습관적으로 커피포트에 코드를 꽂으며 말을 이었다.
“웬일로 이곳까지 오신 거죠?”
그는 죽어 가는 식물에 일부러 눈을 떼지 않고는 속으로 “제가 여기 온 것은 이 녀석만이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저도 죽어가고 있다고요. 그래서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이 담긴 차라도 한잔 마시고 싶어서 왔어요.” 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는 꾹 참았다. 그가 말이없자, 생은 얇은 입술을 벌려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 좀 뵐 생각을 했어요.”
“무슨 일로”
“장 선생님 혹시 저희 반 진희에 대해 알고 계세요?”
그녀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실습 장과 연결되어 있는 창가를 가리켰다.
진희가 자기 앞에 모델로 앉아있는 아이의 얼굴에 분주하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모델의 화장이 너무 짙어 유흥 접객 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은 불현듯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허둥지둥 그가 말하였다.
“진희요. 그 앤 저희 문예반 특활시간에 들어오는 걸요. 보기 드물게 진지한 녀석
이죠.”
“진희가 선생님을 좋아 하나봐 요.”
그녀가 말하였다.
“저를 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지난번엔 그 애한테 편지까지 받아 보았는 걸요.”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커피포트에서 물이 끓었다. 그녀는 투박한 회색 잔에 물을 따르고 커피를 넣고는 티 스픈으로 천천히 저었다.
“선생님도 참.., 그렇게 쉽게 생각을 하다니.., 진흰 집착이 강한 아이예요. 어제 당직근무를 하다가 진희의 호실 관물함에서 비밀일기가 발견되었지 뭐예요. 선생님을
죽도록 사랑한다고 쓰여 있더라고요. 애가 선생님한테 그럴 수가 있는 거예요. 숨
만 꼴닥 거리는 물고기처럼 푹 빠진 꼬낙서니가 말이 아니었어요.“
장은 그녀가 손수 타준 커피 잔을 입가에 천천히 갖다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불쾌하기도 했지만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십이 넘도록 독신으로 살아온 늙은 그녀에게는 남,녀 간의 관계란 신경과민일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더욱이 남자 관계에 백치에 가까운 그녀에게 아이들 하나, 하나가 자신이 결핍된 사랑을 꽃필 울 수 있는 식물같은 존재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이성 관계에는 나약해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리는 여린 풀잎처럼..,
7
책상머리 앞에 앉아 빳빳한 서류철을 뒤척이고 있는 장의 모습이 지쳐 보였다. 부조화처럼 그의 손과 머리가 따로 움직이고 있다.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숙취로 흐리뭉텅 해진 머리 속에 박힌 미세한 악성 병균처럼 그건 기억의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숨만 꼴닥 거리며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것.., 어린것에게,
귀여운 작은 악마, 껍질이 채 벗겨지지도 않은.., 장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언어를 미
친 놈처럼 뇌까리다가 진희를 연상해 보았다. 모델이 된 아이의 화장을 짙게 하고 있던.., 그는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기계적으로 사무실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4단 짜리 서랍이 박힌 직사각형의 서류함 앞에 다가서서 공책 두께만 한 소년부라고 쓰여진 기록 철을 꺼내들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진희의 신상기록을 엿볼 생각이었다. 그 애도 어쩌면.., 어젯밤 그 작은 소녀와 똑같은.., 귀여운 작은..악마..,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길고 가는 그의 손가락이 소녀의 신상 기록 철을 넘길 때마다 숙취로 빛 잃은 희미한 두 눈이 검정 뿔테안경 너머로 생기
를 되찾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성명: 진 희
나이; 만18세 (현19세)
비 행 명: 윤락행위 방지 법 위반 및 절도
공범관계: 유 미 나
유복한 가정에서 외동딸로 태어난 소녀는 유아기 때에는 양친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평범한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소녀기로 접어들면서 부가 사업에 실패하게 되자, 소녀의 운명도 어둡게 변해갔다. 더욱이 궁여지책으로 부가 어렵사리 다니던 공장이 부도로 문을 닫게되자, 부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술로다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더욱 더 나쁜 것은 부가 놀음판에 뛰어 들면서부터였다. 자연히 가정에는 등한시하게 되었고, 부부간의 갈등은 심해져 잦은 싸움을 하게 되었다. 싸움을 할 때면은 거친 막말들이 오가곤 하였다.
“집에서 애나 잘 키우면 될 일이지. 남자하는 일에 웬 관심이 그렇게 많아!”
“여봇 그래도 이게 아니잖아! 난 그렇다 치고 하나 밖에 없는 진희는 어떠케! 놀음판에나 뛰어들고 그러면 집안 꼴이 뭐가 되겠어! 말이 아니잖아!”
“됐어! 됐어! 됐다고. 그 만 좀 해!”
남편이 벌떡 일어나 커다랗게 소리쳤다. 아내도 핏발 선 눈으로 남편의 얼굴에 침을 튀겨대며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대든다.
“몰 그만해! 몰! 내가 괜한 말 한 거야! 응!”
성미가 급한 남편의 심장이 벌렁거리고 억센 손에는 혈관이 미친 듯이 날뛴다.
“이 여편네가!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어!”
퍽! 하고 아내를 후려갈겼다. 아내가 꼬꾸라지는가 싶더니 용수철처럼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날 쳐! 날! 쳐봐! 쳐보라고! 이젠 말로 안되니까 날 쳐! 너 죽고 나 죽자!"
아내는 악을 바락 쓰며 남편의 머리채를 갈구리처럼 거머쥐고는 뒤흔들었다. 남편은 “ 이년이!” 하고 손으로 힘껏 아낼 밀쳤다. 아내가 힘없이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래도 독한 그녀의 손에 한 옴큼 뽑힌 남편의 머리카락이 으스스하다.
소녀는 옆방에서 책상 위에 얼굴을 쳐 박고는 흐느껴 울고 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서럽다. 서러워. 저주스럽고..., 제풀에 문을 꽝! 닫고는 마루가로 뛰쳐나와 신발을 아무렇게나 신고는
“그 만들 해! 그 만들 하라고요!”
하고 비명 같은 소릴 지르고는 밖으로 뛰쳐나왔다. 남편과 아내의 얼굴에 비통함이 흐른다. 서로에 대한 저주와 배신의 빛이 뒤범벅이 되어 깊은 분노로 바뀌었다.*
도심은 어둠으로 잠기기 시작했다.
커다란 태양이 도심을 삼킬 듯이 내려와 자신의 내면 깊숙한 심장 속에서 발산하고 있던 순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속 깊숙이 잠적해 버렸다. 이제는 태양의 작렬함은 없다. 어둠 속 도심 곳곳에 잠복하고 있던 빛만이 환락처럼 나타나 춤을 춘다. 영원히 이 도시에 태양이 떠오르지 않기를 바라 듯 미친 듯한 빛만이 도심 속에서 날뛴다.
천장에는 은빛 점멸등이 빙빙 맴돌며 날카롭게 빛을 발산하고 있다. 그 점멸 등 아래, 전자 음이 팩팩 울어대고, 디스코 택에는 젊은 남,녀가 마치 작동불능인 기계가 움직이 듯 격렬한 몸 동작을 하고 있다. 흠뻑 땀에 젖은 진희가 디스코 택의 강렬한 조명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유미나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숨을 헐떡이며 앉았다. 차가운 글라스를 움켜쥐고는 맥주를 마신다. 천천히 목구멍을 햝고 지나가는 맥주는 진희를 흥분으로 빠알갛게 달아오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진희야. 노친네들 다그렇치. 오늘 기분 좀 풀어라.”
유미나가 가느다란 박하담배 한 개피를 입가에 빨아대며 말하였다. 진희는 맥주 글라스를 내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한바탕 뛰고 나니까 좀 풀리는 것 같다. 얘. 요즘 들어선 벌레가 된 기분이야. 책 좀 볼라고 하면은 집안 박살나는 소리고.., 매일매일 기분이 엉망이야. 이럴 봐엔 왜? 날 났어. 저희들 노리개로 났나.”
“됐다. 됐어. 그만해 자-오늘밤은 다 잊고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자.”
유미나는 노랑 가발머리를 흔들어대며 일어나 진희의 손을 잡고는 불빛이 현란한 디스코 택으로 향하였다. 빨강, 노랑 색 셀로판 비닐로 싼 듯한 유아등 같은 조명 불빛이 강렬함과 유약함을 발산하며 두 소녀의 자아를 발 밑부터 흔들어댔다.
빠른 조명 불빛 속에서 유미나의 노랑 가발머리가 흔들리고, 아슬아슬한 살과 살이 날뛴다. 두 사내의 가슴이 집요하게 유미나와 진희의 팽팽하게 긴장된 가슴에 바싹
달라붙을 것 같고, 가면 같은 사내들의 얼굴이 빠른 조명 불빛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 제들 괜찮은 거 같은데.., 쓸만해. 낚아 볼 까?”
팩팩거리는 랩 음 속에서 조그마한 음성이 뒤섞여있다. 빠른 음이 끝나자, 몇 명의 남, 녀만이 남고 나머지는 뿔뿔이 어둠 속의 테이블로 흩어져 버렸다.
“기분 어때? 괜찮은 거 같은데..,”
“한 잔 하자.”
유미나와 진희가 맥주글라스를 쩅! 하고 부딪치며 입 속에 맥주를 털어 넣었다. 디
스코택에는 곡이 바뀐 랩 음이 흐르고 있다. 우울한 곡명이지만, 곡과 음이 부조화를 이루며 강한 비트의 음으로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반항이라도 하 듯,
그때 조명이 번쩍이는 디스코 택을 등지고 두 명의 사내애들이 나타나, 유미나와 진희의 테이블로 다가와 섰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흰 바탕에 푸른 꽃
무늬가 새겨진 몸에 착 달라붙은 검정 쫄티 차림이었다. 그들의 귀에는 조그마한 은빛 귀걸이가 간간이 비추어대는 푸른 조명 빛에 살랑거린다.
“아가씨들 동석해도 될까요.?”
크고 마른 한 남자아이가 말하였다.
진희는 가슴이 떨려옴을 느끼며, 늘 그렇듯이 유미나가 하는 대로 따를 작정이었다. 한참만에 유미나가 자존심 강한 입을 뾰족히 내밀며 입을 열었다.
“예의가 바르신거 같군요. 어디서 오셨나요.”
“예. 저희들은 요- 아래 동네에 살고있는 왕잔님 이랍니다.”
비교적 균형잡힌 체구의 소년이 우스꽝스럽게 말하였다. 그 소년들은 태연스레 유미나와 진희의 앞에 동석을 하였다. 그 소년들은 옷차림이 똑같고 얼굴도 흡사하다. 요즘 젊은 세대들답게 형식을 벗어났지만 획일적인 서구적인 얼굴이다. 얼굴의 전면이 둥글고 넓적하지 않고 갸름하며 옆얼굴이 길다. 마치 동물처럼 혀만 길게 빼며는 짐승같다.
“저부터 소개할게요. 제 이름은 김종수구요.”
“전 김민기예요.”
“거의 환상에 커플이지요.”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였다.
“짝이 잘맞는거 같군요.”
“저희가 만난걸 기념해서 한 잔 살게요.”
크고 마른 종수가 테이블 위에 램프형의 붉은 조명을 치켜들고는 흔들었다. 깔금하게 단장한 웨이터가 주문 판을 들고 다가왔다. *
그들이 락카페를 나왔을 때에는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유미나는 자신의 미제
금도금제 베르사체 시계를 바라보았다.
“너무 늦었다. 얘.”
유미나가 괜시리 남자들 앞에서 호들갑을 떨어 보였다.
“빨리 집이 가셔야 되겠네요.”
“그럼요.”
“택시 잡아 줄게요.”
남자들이 도로가로 뛰어나가 지나가는 빈 택시를 잡고 있다. 유미나가 불안한 음
성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집이 갈거니?”
“응 별 수 없잖아.”
“우리 집이 비었는데.., 집이 가기 싫으면은 우리 집에 가자.”
진희는 순간 일그러진 얼굴에 엄마와 아빠가 떠올랐다. 진저리가 쳐졌다.
“그럴까. 제들은 어쩌지?”
“그냥 보내 버려. 처음부터 여자가 헤프면은 못쓰니까. 내 핸드폰 번호 제들한테 가르쳐 주었어."
유미나는 바지 주머니 속에서 작고 귀여운 하얀 핸드폰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남자들이 택시를 잡아 세웠다.
두 소녀는 택시에 올라탔다.
남자들이 아쉬운 듯 차창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헤죽 거렸다. 어둠 속에서 기형적으로 커보이는 커다란 히멀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둠이 그들을 삼켜 버렸다. 차창 밖으로 흔들리는 거리의 불빛이 불안스러웠다. *
진희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자구책을 만들 생각을 하였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하지만 학교는 어떻게 하고.., 등록금도 며칠째 미납되었다. 공부는 게속 하고 싶은데.., 유미나에게 아르바이트 자리 좀 부탁했는데.., 며칠 째 학교에 등교를 안하고 있다. 어디에 간 걸까? 그리고 아빤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는 걸까? 바보같이 엄마와 날 두고 집을 나가 버렸다. 엄마는 어디서 들었는지 아빠가 딴 살림을 차렸다고 푸념을 하신다. 분명 엄마 성질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 엄마는 궁여지책으로 식당엘 다니고 있다. 늘 자정이 넘어서 들어오시곤 한다. 진희는 점심시간이 되면은 교정 등나무 그늘 아래에 홀로 앉아 머릴 움켜쥐고는 고통스러워했다. 소녀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그 때 평소에 사이가 좋지않은 민정이와 두 서너명 되는 그들 패거리가 모여 쑥덕거리고 있다. 진희가 나타나자, 금새 경직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던 진희는 미친 듯한 분노로 심장이 벌렁거렸다. 관자놀이에 핏발이 섰다. 금새 엄마의 화난 모습과 일치되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민경이! 너희들 내 얘 길하고 있는 거지!”
거칠다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가 튀어나왔다.
“뭐야! 너 넷 멋대로 넘겨집지 말어! 백날 습지식물처럼 구석에만 쳐 박혀 있는 주제에!”
“뭐.., 습지식물.., 이 기집애가 꺅!”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민경이에게 달겨 들었다.
“진희 너 못됐구나. 왜? 괜한 사람 생트집 잡고 난리야. 난리.”
민경이 패거리들이 진희를 일방적으로 몰아 세우며 뜯어 말렸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진희는 제풀에 걸상에 푸석 주져 앉아 울먹거렸다. *
마침 쉬는 시간이 끝나는 수업 종이 울렸다. 간신히 마음을 안정시키고는 세면장에 가서 세수를 하고는 교실로 돌아왔다. 진희는 수업시간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진지해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의 손가락에서 획일적이고 질서정연하게
칠판에 쓰여진 하얀 분필 글씨를 응시하면서도 아주 무겁게 보이는 눈꺼플과 연하게 그늘진 눈은 꿈꾸듯 다른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현실의 갈등구조에 얽매여 계속 학업을 할 수 있을까? 에 대해 고민하였다. “나는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유별나 만사에 충돌 적이고 선생님들과는 사이가 나쁘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현실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거야. 그건 내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저- 선량한 학생들, 착실하고 평범한 아이들을 보라지.., 그들은 선생들의 권위를 우스꽝스럽게 생각지 않고 詩도 쓰지 않으며 누구나 큰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한다. 타는 듯한 한 여름에 줄지어 굴속으로 움직이는 개미 떼처럼 하나의 관문만을 통과하려는 존재들이지. 유미나, 유미나는 뭘 할까? 그 앤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다. 깊은 사고를 갖고 사는 아이는 아니지만,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는 아이지. 그 애는 물질적으로 풍부한 아이라서 그런지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경험에 자신의 행동을 맞추거나 그것에서 실제적인 이득을 끌어내는 일은 결코 없는 아이다. 그러한 모든 면이 자신과 잘 부합되어 있다. 소녀는 그 애를 만나면은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운명은 예언과도 같은 것일까? *
방과 후-
초여름의 조금은 색 바랜 빛은 어느새 푸른 하늘 위에 풀려 퍼져나간 갸날픈 조각 구름들이 주홍 띠를 이루고 있었으나 태양은 여전히 교정 위에 햇살을 샅샅이 비추고 있었다.
유미나가 저-만치서 손짓하고 있다. 진희는 그 애를 보자, 차갑게 발바닥이 얼어 붙는 것만 같았다. 그 앤 너무나 성숙해 보였다.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아이같아 보였다. 그 앤 획일적인 빛 바랜 교복대신에 듬성듬성 찢어진 히끗 히끗 살이
보이는 색바랜 청바지와 빠알간 티셔츠 차림이었다. 늘 밖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는 노랑 커트 머리였지만 이젠 가발이 아닌 듯 싶다.
“유.미.나.”
진희는 그 애에게 가까이 다가가 낯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떨리는 음성으로 수줍게 그 애를 불러 보았다. 대조적으로 그 애는 예전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널 기다리고 있었어. 진희야. 집이 가니?”
“응.”
“나하고 갈 데가 있어.”
“어딜..?”
“따라 오기나 해. 내가 택실 잡을 게.”
“....,”
진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미나 앞에서는 이상하리 만치 수동적으로 변해갔다. 그 애는 틀에 박힌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자아 같은 존재였다. 그 애가 초록색 택시를 하나 잡아 세웠다. 그들은 택시에 올라탔다.
“어딜 갈 건데..?”
“우리 집.”
“왜?”
“그 애들이 너하고 같이 나오래.”
‘누굴?“
“잊었니?”
“종수와 민구.”
‘아-게들.., 그런데 너희 집은 왜? 가.“
“...,”
“너 옷갈아 입어야 되겠어. 교복차림으로 되겠니?”
“...,”
진희는 무언가 틀에 박힌 일상을 벗어나는 신나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벌써부터 가슴이 떨려왔다.
유미나의 집은 부잣집이었다. 집 담 장에는 장미넝쿨이 빠알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 황혼과 어우러진 이글거리는 정열의 향기가 장미 꽃 속에 파묻혀진 꿀벌처럼 황홀로 도치되어 있었다.
그 애가 벨을 눌렀다. 네모 반듯한 작은 인터 컴에서 중년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누구세요.”
“저예요.“
“빨리 문 열어요.”
덜컥 문이 열렸다. 두 소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앞마당에는 커다란 호두나무가 지
는 황혼 빛에 길게 해 그늘을 길게 드리우고 있었고, 동그랗게 가지치기가 잘 된
정원수가 고풍스러웠다. 그 집 벽은 고급스러운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다. 중년의 여자가 현관문 앞에 서서 근심스럽게 그 애를 반겼다.
“아가씨 며칠째 집이 안 들어오시고.., 주인 마님이 아시면은 어쩌려고..,“
“됐어요. 잔소리 좀 그만 하세요. 언제 엄마가 내 생각했어요.”
“그래도 아가씨 그러시면 안돼요.”
“,...,”
‘오빤 있어요.“
“오빤 매일 늦게 들어오니까요.”
그 애들은 집안으로 들어섰다. 마루바닥이 마케도니아 산 목재로 윤택이 반질반질 했다. 진희는 유미나의 집에 여러 번 방문 한 적이 있어 그 집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그 애의 아빠는 대기업의 중견간부 직원으로 5년 전부터 미국 지점에 근무하고 있다. 그는 북미와 남미 쪽의 무역을 개척하고 있는 중이다. 마침 엄마는 달포 전부터 남편이 있는 미국에 가있다. 자식과 함께 있는 시간이 적어지자, 그들은 아이들 교육은 가정교사한테 맡겨 버렸다. 대부분 부자들이 그렇듯이.., 그 애는 그러한 자신의 환경을 저주스러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과 정 반대되는 가난한 진희에게 호감을 갖고 벗으로 사귀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
진희는 유미나의 집에서 하얀 반바지와 소매가 없는 검정 쇼티를 입고, 챙이 달린 가벼운 여름 모자를 빌려 썼다. 유미나가 진희를 데리고 간 곳은 공원이었다. 찌는 듯한 한낮에 일렁거렸던 녹음은 해 그늘에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간간이 벤치에는 연인들이 마주 앉아 달콤한 밀회를 즐기고 있었고, 군데군데 솜사탕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간단한 군것질거리를 파는 잡상인들도 눈에 띠였다. 공원 한켠에 마련된 마로니에 공원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자, 나무로 만든 간이 무대에서 한창 공연 준비로 부산했다. 유미나와 진희가 그 앞을 지나칠 때였다. 두 대의 번쩍이는 오토바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에 다가와 섰다. 그들이 검정 하이 바를 벗자, 눈에 익은 종수와 민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 타세요.”
유미나가 싫은 기색도 없이 뒤꽁무니에 바싹 붙어 앉았다. 망설이다가 진희도 민구의 오토바이 뒤에 올라앉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원을 한바퀴 선회한 오토바이는 곧바로 이어져 있는 도로 한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위험천만하게 오토바이는 곡예를 하 듯 질주하고 있다. 아무도 그 무서운 질주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질주하는 오토바이가 정차한 곳은 한강고수 부지였다. 그들은 오토바이를 한켠에 세워 놓고는 흐르는 강물을 주시하
였다. 무언가 협상을 하 듯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내용은 진희의 일자리와 관련된 거였다. 이미 유미나는 밤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희는 잘 알고 있
었다. 자신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하지만 그러한 일을 안 한다면 마땅하게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입술을 깊게 깨물고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어차피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옳고 그름이 있는거다. 흔히 옳다고 하는 일들이 고지식한 습성에 억매일 경우가 많다. 고지식.., 그렇다 고지식한 것이다. 그르다고 하는 일들이 어째서 나쁜 것만으로 간주한단 말인가? 어차피 세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세계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만 한다.
종수가 한강 둔치에 있는 작은 간이 편의점에서 소주와 오징어를 사왔다. 진희는
그들이 따라주는 술을 종이컵에 따라 한잔 마셨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빙그르르 세상이 한바퀴 도는 것만 같았다. 그래. 세상은 어차피 하루에 한번씩 자전하고 있는 거야. 단지 내가 술을 먹었다고 해서 나만이 돌았다고 손가락질 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몸통 한가운데 붙은 시계추처럼 무겁게 자아가 흔들리고 있었다.
한강 다리 위로 전동차가 길게 창가로 빛을 발하며 어둠을 가를 때마다 흔들리는 강물 위에 흩어진 불빛이 깊은 잔영을 이루고 있었다. 소녀는 그 강물 속으로 어느 누군가가 몸을 던졌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집은 겨우 서너 명이 다리를 뻗으면 잘 수 있는 벌통이라고 불리는 몇 평 안 되는 납작한 스레트 집에 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종수와 민구도 집을 나와 전전하는 애들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제 딴에는 귀공자처럼 행동을 하지만 그건 다 보기 좋은 껍데기에 불과한 거라고, 요즘은 못 가진 애들이 더욱 더 자신을 숨기기 위해 설친다니까, 그렇지 않음 소외될까봐. 진희는 취기에도 그들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도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어울려야 한다.
“진희야. 한 숨 자고 가라.”
“여기서.“
“그래 뭐 어떠니? 그 몸에 집이 갈 수 있겠어.”
“난 일 때문에 가봐야 되겠어.”
유미나와 종수가 약속이나 한 듯 밖으로 나갔다. 그들을 따라 나서기 위해 온몸을 휘청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려했다. 민구가 진희의 흔들리는 어꺠를 잡았다. 두텁고 힘있는 손이었다.
“피곤할 텐데. 자고 가. 부담 갖지 말고..,”
“....,”
진희는 털썩 방바닥에 주져 앉아버렸다.
“이불 펴줄게.”
“그래 줄래,“
진희는 술기운에 정신이 몽롱해지며 지금 이순간 만큼은 그 애에게 의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오래 전에 사귀어온 친구처럼,
요즘 아이들은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자동자판기에 동전을 덜그락 집어넣고 자기가 선택한 내용물이 곧바로 쏟아져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리모콘으로 선택된 화상을 켜 듯 모든 걸 즉석에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자리에 누운 진희는 잠이 오지를 않았다. 술기운이 전신에 퍼져 모든 세포가 나른했지만 이상하리 만치 정신만은 불안과 기괴한 상념으로 광기를 띄고 있었다. 옆에 민구가 있기 때문일까? 그 애도 눕기는 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는 모양이다. 민구의 심장소리가 땅속 깊숙한 곳에서 용암이 끓는 듯 하고, 긴장된 혈관이 부풀어 오른 링게루 줄처럼 팽팽하다. 하지만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감았다.
민구의 입에는 군침이 돌았다. 꿀꺽하고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혼미하다. 사타구니가 팽창하고 터질 것만 같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스스로 자제를 하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은 본능의 힘은 이성을 제압하였다. 갑자기 민구는 몸을 반쯤 일으켜 진희의 옆으로 다가갔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속으로 뇌까리며 힘없는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진희야. 자니?”
“....,”
아무런 대꾸도 없다, 단지 쌔근거리는 숨소리만이 공허한 방안에 유별나게 크게 들려오고 있다. 민구는 괜한 오기와 흥분으로 온몸이 떨려오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뭐가 뭔지. 에잇” 민구는 거칠게 몸을 일으켜 진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머! 민구야.., 왜이래? 이러지 마!”
민구의 귀에는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돼! 이거 놔 야!”
민구의 입술이 진희의 입술에 포개졌다. 저항을 해보지만 미약하다. 어차피 현실은 이럴거라고 생각을 한 듯 체념해 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흘렀다. 이제서야 고통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랫도리의 욱신거림과 불쾌감까지 어쩔 도리가 없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오늘밤은 이곳에서 같이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미안하다.”
민구가 짤막하게 말하였지만 습관에 불과하다. 늘 해오던 것처럼.
진희는 힘없이 방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왔다. 민구도 따라 나왔다.
“미안해. 어떠케 갈래.”
“...,”
“내가 택시 잡아줄게.”
“....,”
낮은 스레트 지붕의 어술렁한 어둑한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가에서 민구는 택시를 잡아 세웠다. 그리고는 미리 운전 수에게 돈을 지불하였다. 소년은 진희에게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
붉은 조명 불빛, 좁은 칸막이 안에 하얀 와이셔츠 차림의 서너 명의 사내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진희는 한쪽 테이블에 민구와 마주 앉아 유미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능숙한 손놀림, 그리고 일상을 벗어난 듯한 사내들의 기름에 튀긴 듯한 니글니글한 역겨운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진한 농담, 유미나는 즐기듯이 그들의 언어를 탐닉하고 받아넘겼다. 시간이 흘렀다. 밖은 불야성 같은 흔들리는 밤이었다. 이젠 집으로 가야 한다. 민구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진희는 민구의 허리를 바짝 잡고는 뒤꽁무니에 올라탔다. 동네어귀에서 민구와 헤어졌다. 이젠 며칠이면은 자신도 바에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러한 일을 구지 해야할 지 모르겠다. 섣불리 결심이 서지를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못 볼 것을 보았다. 집과 이어져 있는 코너에서 익히 잘 아는 여자, 구지 엄마라고 딱 잘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마는 그녀가 낯선 남자와 캄캄한 담벼락에 거미처럼 붙어서 있었다. “그랬구나. 그녀는 그랬었구나.
속물처럼.., 그래서 나에게는 관심이 없었구나. 매일 밤 피곤으로 지쳐 보이는 그녀
는 악착같이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구나.”
소녀는 깊은 배신감과 분노로 심장이 새까맣게 불타 올랐다. 결국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시내로 돌려버렸다. 도심의 불빛 속으로 걷고있는 사람들은 뇌가 없는 마
네킹처럼 살결이 차갑고 시장바닥에 널 부러져 있는 비릿한 생선의 눈알처럼 두 눈은 초점 없이 흩어져 있다. 진희는 불빛이 훤한 장난감 가게 앞에 섰다. 형광등 불빛이 차가운 진열장 속에 크고 작은 곰 인형과 강아지, 돼지, 너구리, 머리가 노란
미미, 녹색 둘리.., 현실과 상상 속에서나 있음직한 크고 작은 인형들이 벽에 걸려 있기도 하고 진열장 속에 갇혀 초점 없는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 소녀는 인형들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그 인형들이 한꺼번에 와작거리며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복수를 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때에는 인형 대신에 자신이 유리 진열장 속에 갇혀 누군가가 자신을 데려가 주기만을 마음속으로 애타게 기다리며 빛 잃은 두 눈을 멍하니 뜨고 있을런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낮에는 유미나가 세를 얻어놓은 작은 슬라브 집에서 쉴 수 있었다.
“나 잠깐 집이 좀 갔다올게.”
“왜? 무슨 볼 일로.”
“피곤할 텐데 한 숨 자야지.”
“옷 좀 가지러.”
“옷 많이 샀잖니.”
“그래도 늘 상 입던 옷들이 집이 있는데..,”
“집이 걱정되어서 그렇구나.”
“그렇지 않아. 집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해.”
진희는 단호하게 말하였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집에 대한 갸날픈 그리움과 기대로 뒤섞여 있었다. 소녀는 비키니 옷장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잡아탔다. 한 여름의 따가운 햇살 속으로 눈에 익히 익은 납작한 스래트 지붕이 즐비하게 늘어선 좁은 언덕길을 따라 집 앞에 섰다. 소녀는 녹슨 파란 대문을 열었다. 정겨운 손바닥만한 마당가에는 햇살이 하나 가득 공허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 집에서 얼마나 많은 희노애락을 느꼈던가? 소녀는 오래 전에 집을 나온 사람처럼 왠지 집이 낯설었다. 목덜미가 따금거렸다. 찐득한 더위 때문이었다. 마당가에 일직선으로 서있는 낮은 수돗 꼭지를 돌렸다. 텅 빈 마른 구멍 속에서 물줄기가 시원스레 쏟아져 내렸다. 소녀는 손을 씻었다. 얼굴을 닦을까 하다가 짙은 화장이 지워질까 봐 단념하였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작은 마루가에 시선을 돌렸
다. 반질반질한 구두 한 켤레가 덩그마니 놓여있었다. 소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빠. 아빠가 집에 돌아오신 것 일까?” 갸날픈 기대감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아빠
가 나를 보면은 얼마나 슬퍼하실까? 그냥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았다. 하지만 떨리는 불안감 속에서도 믿기지 못 할 이상한 증오심이 방항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소녀는 갑자기 반항기 가득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신을 벗고는 마룻 가에 조심스레 발을 내딛고는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연 순
간 소녀의 떨리는 기대감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방안에는 낯선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놀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부시시 일어서고 있었다. 문득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생각 엄마의 정부..,
"네가 진희니?"
"그런데요. 아저씬 누군데 남의 집에 계시는 거예요?"
소녀는 하얗게 눈을 흘기며 쏘아보았다.
"난 이 집에서 네 어머니와 살고 있는 사람이야."
"아직 젊으신 거 같은데 우리 엄마같이 늙은 여자랑 살아요. 이해가 안되네요."
조롱하는 언어와 당돌함이 남자를 묘한 기분에 사로잡게 만들었다. "맹랑한 것.., 보통 당돌한 녀석이 아니다." 그러나 그 애에게서 느껴지는 자극적인 언어와 일치하여
흥분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소녀는 아무 일없던 것처럼 오래된 호마이카 장롱을 열고 요란스럽게 옷가지를 가방에 챙겼다. 남자는 한눈에 봐도 소녀가 바에 나갈거라 고 짐작하였다. 허벅지가 다 보이는 소매가 없는 짧은 검정 원피스와 금방 머릴 감고 나온 것만 같은 무스가 반질반질한 노랑 숏커트.
“너.., 짐 챙기니? 아직 어린 것 같은데.., 그러면 쓰겠니? 어머니 생각 좀 해야지.“
“어머니. 어머니! 자꾸 어머니 어머니 하지 마세요! 당신이 뭔데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거예요!”
“뭐야!”
가뜩이나 소녀의 노골적인 옷차림에 자극되어 있던 남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흥분으로 온 몸이 파랗게 떨려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에게 다가가 소녀의 가는 허리를 움켜쥐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짧은 스커트자락 속에 손을 쑥 밀어 넣었다. 당황한 소녀는
“뭐야! 야. 이 개새끼 야! 이거 안 놔! 놔! 놓으란 말이야!”
하고 날카롭게 소릴 질렀다.
비록 바에서 밤일을 하지마는 엄마의 정부와 살을 섞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막무가 내었다. 사내의 억센 손에 의해 짧은 스커트 자락이 찢겨지고 사내의 혁띠의 버클 풀리는 소리와 지퍼 열리는 소리가 황급하게 들려왔다. 그의 한 손은 여전히 소녀의 허리를 움켜쥐고 있다. 이윽고 사타구니 사이로 욕망에 가득한 딱딱한 물체가 비집고 들어왔다.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소녀를 괴롭혔다. 벌레를 씹은 듯한 얼굴이 일그러지며 “헉!”하고 소녀는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서 이를 꽉 다물었다. 남자의 움직임이 더욱 더 빠르고 거칠어지기 시작하였다. 머릿속이 텅 빈 것만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았다. 정말 세상이 왜? 이런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마리 짐승에게 유린당하는 자신이 정말 싫었다. 그로 인해 소녀의 떨리는 갸날픈 기대감은 무참하게 사내의 험상궂은 얼굴과
한낮의 불쾌와 욕정으로 짖밟혀 버리고 소녀의 자아는 걷잡을 수 없는 질곡 속으로 추락해 버리고 말았다. *
진희가 다니는 바는 제법 잘 운영되었다. 진희와 유미나의 덕분이었다. 간혹 사복
경관들이 단속을 나오기는 했지만, 바 주인은 요령껏 잘도 법망을 빠져나갔다. 아마도 주인은 경관들과 뒷거래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이 묘하게 되려는지.., 민구가 술이 만취된 상태에서 교통사고를 냈는데 전적으로 민구의 잘못으로 되어 있었다. 무면허에다 음주.., 늘 눈에 가시처럼 불똥을 튀고 질주하는 십대들의 오토바이 그런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법망에 빼도 박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 보다도 우선은 민구의 적지 않은 입원비가 문제였다. 결국은 유미나가 생각해 낸 것이.., 아래와 같은 도발적인 행위였다.
99년 겨울 진희와 유흥업소에서 손님을 상대로 윤락행위 및 절도행위가 있었음을 확인.
장은 참담한 심정으로 진희의 신상기록을 읽어 내려갔으나 무감각하였다. 그러한 일이란 이곳에 들어온 소녀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라서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오래된 물건 위에 쌓인 먼지를 털 듯 털어 버리면은 그 뿐이다. 이 곳은 무감각해 있어야 살아남는 것이다. 민감하게 반응하면은 지속성이 없고 쉽게 지치고 말뿐이다. 끝없는 인내심과 현실의 부조화와 비합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 소녀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그 애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연민은 우물 속에 홀로 남아 조용히 노닐고 있는 비단잉어처럼..., 그의 가슴속에 소리 없는 하나의 존재로 남아 있었다. 결국 그는 소녀를 하나의 실체로 받아들이고는 그 애와 좀 더 진지한 상담을 해야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몰론 느껴지는 감정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실체였고 버거운 상대라는 것을 짐작을 하면서도..,
8
진희는 상담실 문을 열었다. 장은 상담실의 잘 구운 고등 색 식빵 같은 푹신한 쇼파에 깊숙이 파뭍혀 있었다. 소녀는 순간적으로 그가 어느 요정 밀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밤손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넓은 이마와 완고한 굵은 턱선, 부드러우면서도 무언가 위엄이 서린 그의 두 눈과 마주치자 자신의 몹쓸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미용 반으로 인터폰을 해 자신을 부를 때만 하여도 흥분과 기대로 들떠 복도를 걸어 왔 것만 막상 그 앞에 서면은 초라한 한 원생에 불과했다.
“앉아라.”
소녀는 그와 마주한 쇼파에 앉았다. 그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애 띤 청순한 여린 얼굴, 부모를 잘 만났더라면 한참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는 나이인데.., 장은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진실로 한 아이의 선생으로서 믿음과 사랑을 심어주고 싶었다.
“요즘 생활하기 어떠니?”
“....,?”
소녀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없다. 괜 시리 마음속으로 형언하지 못할 슬픔과
서러움이 북 바쳐 왔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그를 대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해서 였을까? 하지만 그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아 의례적으로
“괜찮아요. 선생님.”
하고 힘없이 말하였다.
“그래 다행이다. 좀 힘들어도 참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잖니?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값진 교육은 인내심이야. 분명히 넌 앞으로 잘 될 거야. 이렇게 어렵게 세상을 살아 왔는데..., 앞으로 너에게 분명히 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어쩌다 제가 이렇게 되었는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았어야 했는데..,”
진희는 장의 말에 순간적으로 용기를 얻어 한껏 들뜬 기분으로 말하였으나 가슴 속
한구석에서는 형언하지 못할 슬픔과 서러움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사실 소녀는 그와 상담을 하면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 듯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 내심 기대를 했었는데.., 그래서 지난번에 그에게 편질 쓴거였고.., 그러나 자신의 현실은 거대한 거인 앞에 서있는 작은 소녀처럼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그는 여전히 소녀 앞에서 경직된 표정을 지으며 직원으로서의 의무감과 작은 연민으로 입을 놀렸다.
“진희야. 너 면회는 오니?”
“면회요.., 아무도 안 와요.”
진희는 면회라는 말에 서글픈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훌쩍거렸다. 그 때 만큼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그에게 위로 받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장은 직원으로서의 융통성 없는 고 지식의 딱딱한 굴레에 서서 자신의 깊은 내면의 감성과 열정은 얘기하지 못하고 쇠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진희야 면회오지 않는 사람이 너 하나 뿐이겠냐? 그럴수록 마음 단단하게 먹어. 그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자꾸 자신이 약해지는 거야.”
장은 말을 끊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진희야.”
“예. 선생님.”
장은 감정에 젖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였다. 그 바람에 진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녀의 두 눈이 해바라기처럼 열정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네가 밖에 있는 다른 아이들보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란 걸 잘 알고 있어. 하
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열심히 살아가는 거야. 이번 기회에 자격증도 따고..,
시간이 있으면 검정고시 자격증도 취득해. 그러면 사회에 나가서도 도움이 될 거야. 창 밖을 봐라. 비바람을 맞으며 자란 나무들이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온실 속의 식물보다 더욱더 크고 튼튼하게 자라잖니? 너도 마찬가지야. 비록 어려운 환경이지만 열심히 살아간다면 넌 틀림없이 지금보다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진심 어린 의무감으로 소녀에게 도움이 될 말을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소녀는 그도 어쩔 수 없이 딱딱한 껍질 속에 갇혀진 곤충처럼 자신의 깊은 내면세계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터무니없는 생각 같지만 예전에 첫 업소에서
일할 때에도 그러하였다. 잘 다려 입은 말쑥한 신사복 차림의 어느 정도 여유와 사회적인 명성이 있었던 남자들을 대할 때면은, 괜 시리 주눅이 들어 가슴이 떨려오고 감히 어떻게 저런 사람한테.., 하고 생각을 했지만 그들도 본능적인 수컷들에 불과 하였다. 위선적인 가면을 벗고 나면은 지저분하게 자신의 짧은 스커트 속이나 더듬는..., 하지만 그에게는 사뭇 다른 감정이 들긴 하였다. 그건 순수와 진실이라는 자신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의식이었다. 그러한 것 때문에 그를 더욱 더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사랑을 싹틔울 수 있었던 것이다. 진희는 속으로 “선생님 전 그런 애숭이가 아닌란 말이예요. 전 선생님의 설굘 듣자는 것이 아니예요. 전 제가 쓴 편지와 진실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예요.” 하고 소릴 지르고 싶었지만 감히 그러한 말은 하지 못하고 고사직전에 처한 식물처럼 고개를 꺽은 채 있었다. 그제서야 장은 진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가식에 찬 음성으로 말하였다.
“진희야. 지난번에 준 편지 고맙게 잘 받아보았어..., 실은 그것 때문에 너하고 상담하고 싶어서.., 넌 무언가 진실 되고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것 같더라. 하지만 진희야. 사람이란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거란다. 대부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소설 속의 아름다운 사랑은 서로의 신분의 벽과 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장 벽을 극복하려 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들 하지. 그리고 실제로 사춘기의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는 현실을 벗어난 그러한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며 그와 비슷한 대상을 찾으려고 노력도 하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현실적으로 바뀌고 그러한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 게 된 단다. 만약에 정말로 신분의 벽을 뛰어 넘는 사랑을 현실 속에서 했다고 가정을 해보자. 정말로 그러한 사랑은 소설처럼 아름다웠다고 해보자. 하지만 결국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은 예전에 아름다웠다고 느꼈던 그러한 감정들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불씨로 남아 무거운 짐이 되는
거란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었다. 소녀에게 너무나 현실적이고 냉정한 모습으로 비춰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간교하게 가늘게 뜨고는 회심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나즉이 말하였다.
“사실 나도 너만 했을 때에는 학교 여 선생님을 굉장히 짝사랑한 적이 있었는데.., 밤잠을 설쳐대며 그리워하던 연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은 한순간의 열정이었어. 너도 시간이 지나면은 이해하게 될 거야. 누구나 그러한 순수한 열정은 한-두 번씩 있기 마련이야. 좀 더 현실을 냉철하게 생각해 보자. 그리고 먼 훗날 진희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은 하나의 작은 추억으로 기억해 두는 게 어떨까?”
한참 동안 장이 하는 말을 꼼작 않고 듣고있던 진희는 그의 말은 단지 직업적인 본능으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좀 더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를 애기할 수
없는 것일까? 단지 현실적인 관념에 얽매여 진실한 사랑을 왜곡시키는 것은 아닐까? 분명 그의 내면은 그렇지 않을 거다. 그리고 설사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진희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지며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만! 그만! 말씀하세요. 선생님 전 선생님을 사랑해요! 하지만 선생님으로서 요.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이시지 말라고요!”
그는 당혹하였다. 그러나 침착함과 이성적인 표정으로 바뀌며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물론 알아. 내가 그런 감정으로 애기했다면 미안하다. 너희들 때에는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럴 수도 있는 건데..., 내가 너무 현실적으로 말했나 보다."
소녀는 의외로 침착한 표정으로 발빠르게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그가 얄밉게
도 보였지 만은 현실의 장벽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서 북 박 쳐오는 서러움으로 깊이 있는 말을 구사하지 못하였다.
사실 장은 학창시절 여선생을 짝사랑한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쉽사리 표현하질 않았었는데.., 지금 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한치도 거르지 않고 얘기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긴 진희는 예삿 아이가 아니다. 가엾은 아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가엾게 피어나려 했던 여린 들꽃, 아무도 그 아이에게 보호막이 되어 주질 않았다. 단지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되어 더러운 욕망을 쓰레기더미 한구석에 오줌을 누듯 배설을 했을 뿐, 장은 심한 자괴감에 빠져들어 현실적인 말만 나올 뿐이다.
“그래.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지. 하지만 진흰 앞으로 앞날이 챙챙한 사람이야. 앞으로 살다보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모든건 떄가 있는 거란다.”
그건 장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진희 자신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런 뻔한 이야기를 듣자는 것이 아니었다. 소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다. 아직도 도심
한복판에 남아 순수의 꽃을 피우고 있을 진실한 사랑.., 그건 차라리 쓰레기 더미 속에서 한송이 장미가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진심으로 순수
한 사랑이 싹트기를 바랬다. 소녀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두 눈을 부끄러울 정도로 빤히 바라보며 그의 내면을 읽으려고 애쓸 뿐이었다. 결국에는 장은 자신의 뱃속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진희의 시선 때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이젠 그만 일어나자. 반에 들어가서 실습을 해야지. 꾹 참고 실습하면은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
소녀도 따라 일어났다. 두-발자국 앞서 걷고있는 그의 등판이 유난히 공허해 보인
다고 생각하였다. 그건 마치 아내를 잃은 순진한 사내가 업소를 찾아와 밤이 지치도록 술만 퍼마시고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공허한 등판을 보인 채 문을 나서는 손님의 쓸쓸한 뒷모습 같았다. 최소한 그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되었
다. 그는 일반 사람들하고는 다른 이면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있어 순수를 되찾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생각이 집요하게 머릿속에 파고들자,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선생님!”하고 혓 끝이 가는 대로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독백에 가깝지만 밀패된 작은 공간, 바로 코앞에서는 장의 고막을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주춤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정쩡한 모습으로.., 소녀가 그림자처럼 등 뒤에 서있다. 깊고 커다란 우울한 슬픈 두 눈이 원망과 열정으로 금방이라도 울먹거리며 쏟아질 것만 같았다.
“선생님.., 전..”
소녀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상하리 만치 혀끝이 오그라 붙은 듯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놀란 둥그런 두 눈이 빨리 말을 하라고 재촉하고 있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수줍은 두 눈을 떨구었다. 그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알맞게 벌어진 어깨에 다리지 않은 구겨진 하얀 와이셔츠가 현실의 담 장 너머에서 순수와 진실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일 순간 소녀는 뭐에 취한 듯 현기증이 일어, 그의 하얀 꽃잎 같은 가슴에 나비처럼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며 거칠게 그의 손이 날아왔다. 소녀는 잘려나간 식물의 생가지처럼 고개를 꺽고는 수액 같은 눈물을 뚝. 뚝. 흘렸다. 소녀의 두 눈에 모순처럼 남자답지 않게 희고 가는 그의 손이 하얀 와이셔츠 밖으로 가물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깊은 증오심과 애틋한 감정이 서로 뒤엉켜 버리며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희야.”
잠시 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그의 목소리가 나즉이 들여왔다. 소녀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로 그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남자답
지 않게.., 진흰 바보!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냉엄한 현실을 의식하며 안스러워 했다.
“이게 무슨 짓 인냐!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네가.., 씻고 가서 실습이
나 해!.”
그는 애써 자신의 여린 모습을 숨기려고 위엄을 갖추어 말하였으나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9
소녀는 상담을 마친 후 며칠 동안 심한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짐승 이빨 같은 창살이 자신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 숨통을 꽉 막고 서있다는 것을.., 그건 벽이
었다. 더 이상, 뛰어넘을 수 없는 세상과 단절된 벽, 그 벽을 뛰어 넘어야만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대로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사랑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 뒤의 비극은 자신과는 상관이 없어 보였다. 그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였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아직도 순수와 진실이 살아 남아 있다면.., 난 꼭 보여주겠어. 내가 어떻게 현실의 무서운 벽을 뛰어넘는지를.., 난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사회는 용암 위에 얄팍하게 깔려있는 양철판과 같다. 언젠가는 무서운 질곡 속으로 떨어질.., 그 아래의 끝은 새까만 지옥이다. 순수와 진실이 상실된 세상 그것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지옥이었다. 그나마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가져본다. 마치 神이 된 것처럼 자신의 피조물
중에 정말로 고귀한 가치 있는 인간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그것으로 이 세계는 살아남아 있을 만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미치자, 소녀는 영리한 머리를 골똘히 굴려 이탈을 결심하게 되었다. “유.미.나..유.미.나.., 언젠나 자신이 극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머릿속을 맴도는 아이. 자신의 잃어버린 자아처럼.”
다음 날 소녀는 쉬는 시간을 이용해 유미나가 있는 양재 반으로 갔다. 이곳에 들어온 뒤로 유미나에 대해 원망도 많이 해보고, 거리감을 두고 그 애와 여지껏 대화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 애가 긴요히 필요하다. 유미나는 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재봉틀 앞에 앉아 실습을 하고 있었다. 미싱바늘이 기계적으로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윈피스의 한쪽 팔에 촘촘히 실밥이 박히며 옷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바깥에 있을 때에는 제멋대로 였는데.., 나름대로 원 방침에 따라 기술을 배우려고 기를 쓰는 유미나를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진희는 그 애에게 다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너 철들었다. 쉬는 시간인데도 미싱을 다 밟고 있으니.”
“철은 답답하니까 시간 떼우려고 그런데. 웬일이지? 남의 반에 다오고..,”
“부탁할게 있어서..,”
“부탁. 무슨 부탁.?”
“너 전시작품으로 유행하는 옷 만들고 있지?”
“응 여러 가지 옷을 만들고 있지.., 왜?”
“혹시 만든 작품 중에 나시 티와 핫팬티 빌릴 수 있겠니?”
“철장 안에서 뭘 할려고.., 괜히 선생님한테 걸리면 혼 줄이 날텐데..,”
진희는 눈을 하얗게 흘기며
“계집애 너 답지 않게 겁은.., 실은 며칠 뒤에 야영훈련 가잖아. 나도 가게 될 거 같은데.., 속에다 입고 갈려고 그래.”
“너 참 웃긴다. 그걸 속에다 왜? 입어 꼬실 남자도 없을 텐데.”
유미나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진희는 사색이 되어
“야영가서 장끼자랑 시간에 튀어 보일려고 그래. 다른 의도는 없어.”
“다른 의도가 없다니까 내 빌려주지, 화장실에 가있어. 눈을 피해 금방 갈테니까.”
소녀가 화장실로 갔다. 감시의 눈이 많은 이곳 은밀한 사고는 화장실에서 이루어 졌다. 철장 안의 역사는 밤이 아니라 화장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곳에도 감시 카메라가 통로 한켠에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마는 감시 카메라라는 것도 사각지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 사각지대가 카메라 바로 아래 칸 첫 번째 화장실이다. 진희는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는 척 하였다. 마침내 유미나가 주의를 살피며 자연스럽게 첫 번째 화장실로 들어가 뱃속에 숨겨온 검정 나시티와
핫팬티를 전달해 주고는 나갔다. 진희는 옷을 허둥지둥 벗고는 속에다 입었다.*
어느새 산을 깍아 지른 눞은 축대 아래로 해 그늘이 텅 빈 운동장으로 길죽하게
눕더니 차 차츰 파란 기와가 어렴풋한 소년원 지붕 위로 붉은 빛이 감돌다가 이내 목구멍처럼 까맣게 삼켜 버렸다. 정적과 어둠, 몇 군데 간간히 비상가로등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아이들은 밤만 되면은 낮보다도 고립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간혹가다 사방이 유리 창문으로 되어있는 서 너평되는 감시 실에서 핏기 없는 얼굴로 마네킹처럼 앉아있던 담당 직원의 긴 발자국 소리가 저벅거리며 다가올 때마다 괴로운 듯 몸을 뒤척이며 가늘게 눈을 뜨려고 애썼지만, 철 장 위에 매달려 있는 30촉 짜리 취침 등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강렬하게 눈을 찌르는 듯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무거운 눈꺼플 위로 또 다른 불빛이 환상처럼 맴돌고 있었다. 점멸등, 번쩍이는 조명 아래 미친 듯이 춤추는 한 여자아이 잠시 후 자신을 애워 싸고 있는 검정가죽 잠바들 이어지는 작은 골방, 사내의 양어깨에 금방이라도 살아서 꿈틀거릴 것만 같은 파란 용문신, 벽 한구석 계속 같은 음으로 세상을 저주하듯 퍼붓는 반복된 음, 소리, 소리들..., 레코드 판 위에 바늘..., 한 홈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맴도는..,
10
야영훈련을 가는 날, 아침 녁부터 운동장 가득히 안개로 자욱하였다. 그건 마치 10
대 소녀의 알 수 없는 의식과 같이 희미해지다가 서서히 뜨거운 복사열로 변하여 사라져 버리는 아지랑이, 아지랑이.., 운동장 가득히 꿈틀거리는 수천 수억 마리의 실뱀처럼 흐느적거리는 그 알 수 없는 일그러진 풍경 속으로 괴물처럼 서있는 원 버스.
야영 갈 아이들은 어린아이의 손에서 빠져나가 창공으로 두둥실 떠오른 풍선처럼 한껏 들떠있었다. 높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뜨거운 태양광선 아래 산산이 터져 버릴 지도 모르고.., 아이들은 대기한 원 버스에 오를 준비로 부산한 것이다. 진희는 가벼운 사복차림으로 아이들을 체크하고 있는 장과 마주치자, 새벽 이슬을 모금은
채송화 꽃처럼 청초하게 웃어 보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힘드시죠. 제가.., 버스 안에다 갖다 놓을 게요.”
진희는 장의 어깨에 둘러매고 있던 흰 바탕에 단조로운 여행용 가방을 잡아끌며 애교를 떨었다. 장은 며칠 동안 눈에 띄지 않던 진희를 보자, 반가웠다.
“고맙다. 진희야.”
그러나 그건 사고를 알리는 진희의 첫 신호였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차창 문 뒤로 물 무늬 모양의 창살에 감금된 아이들이 창문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자유를 향한 아이들의 모습이 히 멀건 돌무더기처럼 멀어져 갔다. 청기와 집 소년원 지붕만이 산뜻하게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소녀는 멀어져 가는 소년원을 바라보며 두 번 다시 그곳에 오지 않겠다고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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