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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선-단편소설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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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49회 작성일 04-11-16 10:03

본문

누가. 누가. 인형을 사랑하겠어.
한번 생각을 해 봐. 생각을-
현실의 벽을 부숴 버려- 깨어 부숴 버려-
네 사랑은 저-만치 가고 있잖아. 있잖아.
현실의 벽을 부숴라. 부숴-- 깨어 부숴라-
사랑을 위해서---

진희는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을 무시한 채 찌푸린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옆에 앉아있던 진희가 이상해 보였던지
“언니 어디 아퍼? 얼굴이 안돼 보이는데.”
“아프긴.., 별 일 아니 야.”
진희는 귀찮은 듯 짤막하게 대꾸하였다. 소년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동정은 갔지만 너무 어리고 어떤 때는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도 비행을 저질러 소년원에 들어 왔지만 최소한 그런 애들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탈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일반 철없는 아이들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만용 때문에 하지만 그보다도 진희는 정말로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을 하고 싶었다. 가슴 속 깊이 잠재된 사랑이 싹트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유별나게 죽어 가는 식물을 살리려 했던 생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죽어 가는 식물을 정성스레 가꿈으로 인해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 주려했던 그녀.., 하지만 사랑이란 늘 바라만 보고있는 죽어 가는 꽃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은 이탈을 하는 것이다.
버스는 분주한 시내를 뱀처럼 빠져 나와 톨게이트를 돌자,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고속도로를 질주하였다. 시간을 두고 차창 밖으로 파란 들녘이 바람에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서너 개 넘어오자, 서녘 하늘 한켠에서 뭉게구름이 짙게 피어오르더니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투명한 유리 창 가를 긁어 놓으며 사라졌다. 불안하다 비가 오면은 모든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봐서.., 소년원 선생들은, 그러나 더욱더 불안한 것은 진희였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장의 여행용 가방을 진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곤충 더듬이처럼 불안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이내 앞 자크를 열고는 준비한 작은 편지를 집어넣었다.
버스가 정차하였다. 잠시 쉬었다 가려는 모양이었다.
“잠시 쉬었다 가니까. 볼 일 볼 사람들은 질서 있게 내리도록..,”
여직원의 마이크소리가 짤막하게 흘러나왔다.
여 나무명의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렸다. 그 중에는 진희도 있었다. 소녀는 맨 끄트
머리 화장실 칸에 조심스레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정말로 급한 볼일이 있는 사람처럼 뛰어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세상과 차단된 밀폐된 작



은공간, 그 안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곳이다. 악취 풍기는 현실을 인정하는 곳이다. 구지 프로이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있어 구강기의 심리가 사람들의 성격 형성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던가? 모든 것은 가장 불순하고 은밀한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진희는 뱃속에 숨겨온 금발을 뒤집어쓰고, 허리춤에 숨겨온 붉은 바탕에 흰 점이 땡땡 박힌 헝겁 주머니 속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은테 선글러스를 코끝에 걸고는
반항기 가득한 얼굴을 치켜 떴다. 위장이다. 위장, 틀에 박힌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입고있던 문장 같던 거치장스러운 복장도 벗어 던졌다. 배 암이 허물을 벗 듯 타는 듯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딱딱한 껍질을 벗는 것이다. 옷을 벗자 소녀는 자신이 마치 한 마리 작은 새가 된 것처럼 홀가분했다. 겨드랑이 끝이 허전하다. 그 허전한 겨드랑이의 말랑말랑한 속살을 뚫고 새하얀 깃털이 달린 날개가 뾰족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복장이 볼 쌍 사납다. 악취를 풍기고 있다. 흔적은 불쾌한 것이다. 어느 해 초등학교 가을 소풍 때 숲 속에서 보물찾기를 하다가 배 암 껍질 때문에 화들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날은 보물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나무 둥지 밑이나 바위 틈 구멍과 구멍 속에 허물벗은 배 암이 또아릴 틀고 앉아 독을 가득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소녀는 한켠에 놓여있는 플라스틱 휴지통 속에 바닥에 떨어진 복장을 밀어 넣었다. 마치 징그러운 배 암 껍질을 나무 구멍 속에 밀어 넣듯 화장실 문밖에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중년이 소녀와 마주치자, 놀란 두 눈이 톡 불그러져 나온 고양이 눈처럼 동그랗게 변하여 코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비모양의 금테안경을 고쳐 만지며 자신의 두 눈을 만화처럼 일그러뜨렸다. 소녀는 그 중년의 의식적인 기묘한 표정에 불안과 초조로 심장이 떨려왔다. 금방이라도 통로 한켠에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있는 젊은 여선생이 기겁을 하고 달려와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귀 썀을 올려붙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뿌드득 어금니가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다물고는, 무슨 힘에 이끌려 가 듯 통로 한켠에 설치된 붙박이 거울이 달린 세면기 앞에 다가가 섰다. 거울 속에는 낯
선 금발이 서있다. 검정 나시티로 인해 더욱 더 선명한 우유 빛 피부와 날렵한 허리선, 검정 바탕에 빠알간 줄이 쳐진 허벅지가 팽팽한 핫 팬티,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녀처럼 거울 앞에 바싹 주문을 외우듯 얼굴을 깊숙이
들이밀었다. 금발과 조화롭지 못한 얼굴선, 다행히 푸른빛이 감도는 은테 선글라스는 그러한 부조화를 차단시켜 주며 비밀스러움을 더해 주었고, 그런 대로 오뚝 선 코는 실추된 소녀의 자존심을 살려주었다. 하지만 미간이 짧은 여린 입술은 못다 핀 꽃잎처럼 희미했다. 소녀는 들고있던 헝겊 주머니 속에서 몇 가지 작은 유리병과 가름한 립스틱을 꺼내 입술을 정렬 적으로 고치고 음영이 엷은 광대와 볼 사이,



턱 밑에 짙은 화장을 해댔다. 여자들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 처음 배우는 기술은 화장이다.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고- 그건 여자들이 인류 최초로 만들어낸 마술이었다. 자신을 교묘하게 위장시키기 위한.., 위선이며 가식이었다. 잠깐 사이에 소녀의 얼굴은 순수와 진실의 반대편에 서있는 본능적인 여자로 변해있었다. 이제는 여리디 여린 소심한 소녀가 아니라, 넘치는 자신감으로 원
생들을 감시하는 여선생의 모습이 어슬렁어슬렁 자신의 거울 뒤편에 나타나도 장난기 있게 윙크를 하고 빠알간 혀까지 날름거리는 여유를 보였다.
소녀는 휴게실 안쪽으로 이어져 있는 화장실 입구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용변을 마친 아이들이 남선생과 여선생들의 감시 하에 줄을 서있다. 아이들의 수많은 시선이 탄환처럼 날아와 변장한 자신의 몸에 날아와 박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쪽은 만만치가 않았다. 설사 그곳을 여유 있게 빠져나간다고 하여도 다른 버스를 이용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을 성싶었다. 더욱이 자신은 땡전 한푼조차 없는 처지 아닌가? 결국은 반대편 입구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반대편은 화장실 뒤켠이고, 비탈길 아래로 탁 트인 들녘을 가로질러 을씨년스러운 미루나무가 띄엄띄엄 서있는 비포장 도로 가에 길게 누워 있었다. 간간히 꿈결처럼 차도 달리고 있다. 그러나 그곳도 결코 만만치만은 않았다. 장이 입구에서 서성거리며 보초를 서고 있다. 다행히 그는 비가 오는지 손바닥을 허공에다 몇 번씩 펼쳐 보이며 비를 피하기 위하여 휴게소 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녀는 그를 보자 혈액이 응축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선생님 전 당신 때문에 이탈을 하는 거예요. 부디 당신이 이 세상에 아직도 꿈결처럼 남아있을 진실한 사람이기를 바래요.”
하고 속으로 뇌까렸다. 소녀는 입구를 빠져 나와 비탈길 아래로 배회하는 여행객처럼 어정거리다가 선생님이 안 보인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정신없이 달렸다.
비다. 한바탕 소나기가 굵게 토닥거렸다. 소녀가 쓴 푸른 선글라스에 파란 잉크 색으로 번지며 투명한 안경알로 바뀌었다. 쟂 빛으로 세상이 일렁거렸다. 눈앞이 침침하다. 안경을 벗어 던졌다. 멀리 뛰어 달아나는 소녀의 뒤에 벗어 던져진 안경이  몇 발치 가서 짐승 가죽 같은 털이 부슬 부슬한 금발이 퍼붓는 비를 맞고 있다. 아련히 그것은 초라한 흔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소녀가 나오지 않자. 여선생들은 통로 변에 칸칸이 박혀있는 화장실 문을 왈칵 왈칵 열었다. 간혹 화장실 문을 잘못
열어 용변을 보는 젊은 여자의 상스러운 욕지거릴 듣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지만,
그만큼 다급해 있었다. 마침내 나이가 지긋이 든 뚱뚱한 여선생이 끄트머리 화장실에서 복장을 꺼내들고 나왔다.    
“이 것 보세요. 선생님들..,”
“이 녀석이!”
선생들의 얼굴이 침울하게 일그러졌다. *



소녀는 빗속을 내내 걷고 있었다. 제 발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다. 도로는 물로 질척질척하여 얕은 개울을 걷는 것 같다. 비의 커튼 너머로 서치라이트의 빛이 다가온다. 검정승용차는 소녀의 희디흰 종아리에 물을 뿌리며 지나가고 갑자기 서치라이트처럼 강렬한 빛이 비추어 소녀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빛을 띤 비는 뾰족
하고 바늘처럼 세차게 내려 정수리에 구멍을 뚫고 두뇌를 차갑게 냉동시키는 것만 같다. 냉동된 동태처럼 하얗게 서리가 일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리며 이빨이 우들우들 떨린다. 이럴 바에는 죽는다! 죽어! 소녀는 순간적으로 도로 한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저- 만치서 냉동트럭이 크락숀이 급히 울렸다. 귀청을 찢는 위급한 소리, 그 바람에 소녀는 예민한 짐승처럼 도로가로 튕겨 나왔다. 차 창가로 운전 수의 당혹한 얼굴이 비의 장막 너머로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뿌연 물안개 속으로 뒤꽁무니를 보인 채 달아나는 냉동 트럭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아쉬운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온통 세상이 슬픔으로 뒤덮여 넘실거리고 있다. 저-만치서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 냉동트럭이 급히 정차하였다. 높다란 차 문이 벌컥 열리고 반가운 한쪽 팔이 빗속을 가르며 날개처럼 퍼득 인다. 소녀는 냉동트럭으로 달려갔다. 고개를 두텁게 썰은 듯한 사내의 두툼한 손이 소녀의 손을 꽉 잡고는 기계적으로 소녀를 힘있게 옆 좌석에 앉혔다. 운전 수는 군에서 갖 제대한 사회 초년생 같았다. 다부진 체구에 아직 덜 자란 스포츠 머리, 그는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소녀에게 건네며 검게 그으른 얼굴로 인해 유난히 희게 보이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아따. 아가씨 땜 시 큰 일 나는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아저씨.
소녀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저씨.., 내가 어디로 봐서 아저씨로 보인다 요. 젊은 오빠 제. 그나저나 아가씬 못 땜 시 이렇게 비를 된통 맞고 다닌 다요.”
사낸 기름진 목소리로 느물느물하게 말하였다. 소녀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운명을 내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가 건넨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친구와 놀러 갔다 오다가 일행을 잃어 버렸어요. 여기서 시내가 꽤 먼가요?”
“도통 지리를 모르는가 보지라. 쬠만 가면 시내랑 게. 내 알아서 목 좋은 곳에서 세
워 줄텐게 걱정이랑 붙들어 매시랑 게.”
진희는 사내의 말투에 무언가 이상한 직감이 와 닿았다. 사내들이란 다 그런 거다. 그를 이용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머리와 얼굴의 물기를 닦고 있던 수건으로 자신
의 허연 허벅지를 닦아 내려갔다. 사내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머리맡에 붙어있던 백미러를 고쳐 만지며 진희의 하얀 허벅지를 힐끔힐끔 주시



하였다. 그걸 의식한 소녀는 좀더 은밀한 곳을 수건으로 닦아 내려갔다. 사내의 시선이 소녀의 사타구니로 모아지며 제풀에 소름 같은 휘 바람을 불어 재 켰다. *
갑자기 퍼붓던 비도 그쳤다. 거짓말처럼 정오의 햇살이 들녘 가득히 내리 쬐고 있
었다. 장은 펼쳐진 검정우산을 접고는 논두렁에 버려진 가발과 안경을 집어들었다. 그의 얼굴이 근심으로 묘하게 일그러지며 미루나무가 을씨년스러운 비포장 도로를 아련히 바라보았다. 몇-대의 자동차가 달릴 뿐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도로는 텅비어 있다. 저-도로가로 소녀가 햇살에 증발해 버린 수증기처럼 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장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혹시 진희가?”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 버스에 올라 소녀가 앉았던 자리로 가보았지만 텅 빈자리에는 자신의 단조로운 여행용 가방이 숨죽인 채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그는 힘없이 가방을 집어들고는 털썩 주 져 앉아버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던지 가방의 앞 자크를 열었다. 그의 손끝에 기계적으로 딸려 나온 것은 작은 편지였다.
담당 계장은 도심으로 통하는 톨게이트에 수사 조 두-명만을 남겨 놓고는 소년원으로 되돌아가는 조치를 취하였다. 아침녘에 떠날 때 기분하고 완연히 다른 침울한 분위기로 버스 앞머리에 비상등을 번쩍이며 심상치 않게 소년원으로 향하였다.
소년원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새장 속의 새처럼 철 장안에 갇혀 버렸고, 선생들은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

                                  11

땅을 기어가는 듯한 땅딸막한 키에 오기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진 작고 창백한 얼굴, 쏘아보는 듯한 날카로운 독선적인 눈, 간혹 가다 기관장으로서의 여유를 보이기 위해 하얗게 웃지마는 오히려 창백한 피부와 맞물려 소름끼칠 정도로 빈틈없고 찰 진 여원장, 그녀는 파랗게 흥분되어 있었다.
“이번 사고는 우리가 소홀했기 때문 이예요. 설마하고 생각했던 일이 생겼잖아요. 늘 제가 뭐라고 하면은 잔소리하고 생각했지요. 이래도 잔소리라고 생각하세요. 이
번 사고도 잔소리라고 할 수 있나요.”
그녀 특유의 기계가 움직이는 듯한 딱딱거리는 억양으로 회의실에 모여있는 직원들을 거칠게 질책하며 평소의 말을 반증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다 제풀에 감정을 억제
하기 위해 말을 끊고는 작은 머리를 골똘히 굴리며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진희란 아이가 무엇 때문에 이탈을 했는지 담임선생님은 아이
에 대해 의심이 갈만한 곳이 없었나 요.”
생은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지며 고개를 몇 번씩 정중히 숙여 죄송하다는 말을 번



복하였다. 물론 진희가 이탈을 한 것은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애에게서 발견된 비밀일기라 던 지..., 실습을 하다말고 멍하니 뭐에 홀린 사
람처럼 생각에 집착해 있거나, 시들어 가는 식물을 귀찮아하고 관심을 덜 갖는다 던 지,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습지식물처럼 그늘진 구석만 찾아다니는.., 그건 분명 사랑에 빠진 거다. 장과 어떤 보이지 않는 관계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가늘디 가는 투명한 거미줄에 달라붙은 나비처럼 남자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이거나 육체적인 관계는 성립될 수 없을지라도.., 그 아이는 자신의 혼을 빼앗긴 것이다. 만약 그러한 심증과 그리고 그와 관련된 물증을 지금 이 순간에 폭로해 버린다면, 분명 여 원장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분개할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남자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여자 아닌가? 늘 남자보다 앞서야 하고.., 자신이 승진에 밀려나 뒤늦게 기관장이 된 것도 남자들의 권위와 위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다.
사람이 성숙할수록 원숙 미가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열정적으로 불타오르는 가시 돛친 장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은은한 국화꽃 같은 향기 원숙 미.., 남과 여 늘 불안전한 존재들이다. 비록 한 때의 여름 같은 열정으로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사상에 대치할 수 있어도 결국은 동반자다. 그리고 스스로가 조물주가 준 性 자체의 순수성을 인정하며 고개 숙인 곡식처럼 영글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숙한 중년 앞에 서면은 남과 여라는 성의 구별이 안들 때가 많은 것이다. 여자의 좁은 어깨에 남자처럼 포용적인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고 남자들의 포악성과 투박함이  어느새 여자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모습으로 변해 있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숙한 중년의 모습은 남과 여라는 불완전한 性의 굴레를 벗어나 中性의 모습으로 변해가야 한다.
긴급회의를 마치자, 직원들은 유사시를 대비해 편성된 수사 조대로 진희가 갈만한 곳으로 수사에 착수하였다. 생은 수사에 나가기 전 소녀의 호실을 면밀히 조사하였다. 소녀의 관물함 속에 비밀 일기가 있었다. 생은 심각하게 소녀의 비밀일기를 읽
다가 미심쩍은 부분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찢어 자신이 들고있던 검정 거북무늬
핸드 빽 속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청사 앞에 나왔을 때에는 이미 납작하게 코를 박고 엎드려 있던 차들이 하나, 둘.., 불안스레 밖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수사 파트너는 장이었다. 장은 이미 자신의 승용차 운전석에 앉아 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스형의 품이 넓은 흰 바탕에 달팽이 모양의 무늬가 박힌 난방과 미색 바지 차림의 그녀가 뒤뚱거리며 손바닥만한 둥근 직사각형의 백미러를 통해 들어왔다. 장은 그녀가 다고 오자, 몸을 옆으로 돌려 팔을 뻗어 차 문을 열었다. 그녀가 옆에 앉았다, 장은 자신의 아토스를 움직여 소년원 밖으로 빠져 나왔다.
“뭐 좋은 단서라도 찾았나요?”



“글쎄요. 단서라고 해도 좋을까요?”
“뭔데 그러세요.”
차들이 밀리는 도심으로 통하는 커브진 도로에서 딱정벌레 같은 아토스는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의 핸드백 속에서 찢어온 몇 장의 비밀 일기를 그에게 건네었다.
“그건 진희가 어젯밤 썼던 비밀일기예요. 뭔가 단서가 될 거 같아서.., 제가 찢어
가지고 온 거예요.”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차갑게 말하였다.

5월 15일 수요일 맑음

나는 세상에서 외톨이다. 누구도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다. 내가 여태까지 세상 생활을 하면서 보아온 출세한 자들은 모두가 철면피처럼 얼굴가죽이 두껍고 냉혹한 자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흉내내지 못한다. 그들이 나는 밉다. 기성세대란 허울 좋은 낯가죽을 가지고.., 세상을 더럽게 만들고 있다. 겉으로는 신사처럼 행동하지만 속은 늑대와 같다. 나는 그들을 부정하면서도 결국은 그들과 놀아났다. 나 또한 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하루 종일 순수한 열정에 들떠 꿈에 부풀어 있어야 할 사춘기를 다 망가뜨려 버리고는..., 나의 의지력 부족일까? 아. 아 어쩌면 나는 곧 죽을 지도 모를 일이다. 냉혹한 세상 사람들을 보는 불행을 견디지 못하고.., 지금 나의 머릿속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정말로 순수하고 진실 된 사랑이 있어 단 한번만이라도.., 아니 그러한 사랑이 실재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다면. 나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고사직전에 처한 식물이 따스한 햇살과 물을 만나 꽃을 피우듯이..,

6월 10일 금요일 맑음

오늘은 선생님과 상담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부르신 거다.
나는 뛰는 가슴으로 그와 마주 대하였다. 그렇게 가까이 대하고 싶었던 분이었는
데.., 막상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결국 상담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깊은 사랑의 감정이 느껴져서-
그 분에 비하면은 나 혼자 열정에 들떠 있는 것 아닐까? 언제쯤 선생님과 마음 편
히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까?
보고 싶어요. 선생님-



6월 14일 화요일 비

창살 밖으로 검은 비가 나리고 있다.
내 마음속에도 비는 검게 내려 검은 빗물이 가득 고였다.
가슴이 답답하다. 미칠 것만 같다.
무언가 찢어버리고만 싶다.
모든 걸 잊고 싶다.
잠시라도 밖에 나가 머리를 깨끗이 씻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창살밖에는 검은 비가 나리고 있다.
내 마음속에도.
내가 왜 이럴까? 무슨 말이든 팬이 굴러가는 대로 쓰고 싶다.
저-만치서 당직 선생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괴롭다. 늘 감시 받는 느낌.
난 지금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괴로운 것이다.
잊자. 잊어.
모든 것을.
ㅈ ㅇ ㄱ 선생님을 잊자.
하지만 어떻게..,

6월 17일 금요일 맑음

떠나고 싶다.
멀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혼자서 외로이-
그러면 선생님이 찾아 오실까?
혼자 산다면 사랑도 미움도 모르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텐데.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을 테다.
더욱이 짝사랑은.
자꾸만 창 밖의 창살이 옭조여 오는 것만 같다.
언젠가 나에게 사랑을 하라고 하면은 난 미쳐 버릴 것이다.
그래 난 미칠 것이다.
지금도 내 머리는 미쳐 버릴 것만 같으니까..,
선생님!
지금 뭘 하고 계세요.



진희는 이렇게 마음을 아파하고 있는데도..,
당신의 숨결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더 이상 못 참겠다.

장은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흔들리는 아토스 안에서 비밀일기를 엿보는 것은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었다. 마치 장의 가슴속에 얄팍한 이성의 가열된 불 판 위에 올려진 불안과 초조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튀어 달아나 듯이..,
생은 나름대로 이번 이탈은 장과 연관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이탈하기 전 진희가 쓴 일기의 내용이 심상치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기를 읽고 있는 장의 옆얼굴도 예의 주시할 만 했다. 갑자기 숙연해지며 빠르게 차를 몰고 있다. 그건 심정적으로 불안해 진거다. 그 일기를 읽고서.., 하긴 그의 평소에 성격상 쉽사리 진희와 불륜에 빠질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남,녀 관계란 어떻게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저런 남자가 은밀히 밀회를 즐길 수도 있지 않은가? 치밀하고 주도 면밀하게.., 아님? 연애 경험이 없는 생은 여러 각도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장을 의심하다가 현실적인 불안스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짐작이 가는 곳이 있어요.”
“어딘데 요?”
“부둣가.“
“거기서 놀던 아이가 아닌데?”
“영특한 아이예요. 뻔히 소년원에서 수사 나올 걸 알고 있는 녀석인데,”
“그래도 그렇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근거.., 일 단 절 믿어 보세요.”
장은 앞 뒤 설명 없이 자신의 의도를 고집스레 관철시키려고 했다.
생은 직감적으로 그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내심 불만스러웠다. 결국은 깊은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불만스레 그의 약점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제 생각에는 진희는 누군가를 죽도록 흠모하고 있다가 이탈을 한 거 같아요. 혹시 장 선생님하고 관련 있는 거 아니 예요?”
장은 여전히 무표정하였다. 그건 대부분 소년원 직원들의 독특한 심리였다. 오랫동안 비행문화에 익숙한.., 그것을 넘어선 듯한 무감각하게 굳은 얼굴 표정.
“물론 저라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선생님.., 우리 아이들이 이성관계가 복잡한
아이란 걸 선생님이 더 잘 아시잖아 요,”
장은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차갑게 반문하였다.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성을 가진 생은 장의 그러한 태도에 울먹거리며 얇고 가



는 입술을 오무려 끊길 듯이 중얼거렸다.
“진흰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이였어요. 그래서 전 그 아이에게 죽어가는 그라디올러스에 온 정성을 쏟아 살려보라고 했던 거예요. 그건 내 나름대로 터득한 아이들을 위한 심성훈련이었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심성을 바꿔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이런 일이 내가 데리고 있던 아이가 이탈을 하다니..,“
그녀의 얼굴이 침울하게 일그러지며 가늘고 작은 눈에서 이슬이 맺혔다. 장을 의식해서인지 핸드백 속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꼭꼭 찍 듯이 닦아 내려가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 나름대로 소년원에서 인정받아 왔던 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아무리 심성이 나쁜 아이일지라도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사랑을 해주면은 상대편을 생각해서라도 이탈만은 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탈을 한 것이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인가?  마치 숙명처럼 아이들을 위해 살아 왔 것만.., 하긴 자신의 참을 수 없는 고독과 단조로운 삶과 연관된 조건화된 사랑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조건없이 순수한 열정만으로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나름대로 독특한 동기로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것 아닐까?
그녀가 침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마침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너무 경솔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는 진희의 행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긴급회 때 차마 발표할 수 없었다. 그건 소녀와 보이지 않는 약속 때문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 애의 행방을 알림으로 인해 생길지 모를 자신의 신상도 간과 할 수 없는 현실적인 처지여서 일단은 은밀히 숨기고 진희를 만나면은 하나, 하나.., 얼킨 실타래를 풀 듯 풀어 나가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진정하세요.”
“아니 예요. 제가 괜시리 너무 흥분해서.., 못 볼 것을 보이네요.”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흰 찾을 수 있어요. 실은 이런 말 안 드리고 진희를 데리고 와서 말씀드릴려고 했는데.., 진희가 이탈하기 전 버스 안에서 내 가방 속에 편지를 남겨 놓았어요?“
그녀는 놀란 얼굴로 변하였다.
“편지요?”
“예”
“그런데 왜? 회의실에서 말씀을 안 하신 거죠?”
“편지의 내용상 어쩔 수 없었어요.”
“편지의 내용이 뭐 길래?“
“거짓말 같지만 편지에는 선생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실 진희가 거주할 약도가



그려 있었고 저보고 찾아오라는 거예요. 그것도 혼자서 요. 만약에 다른 선생님들한테 알려 버리면은 죽어 버리겠대요. 정말 치밀한 아이예요.“
그는 흥분된 어조로 빠르게 말하였다. 그녀는 진희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한가지 의문점은 있어서..,
“그렇다고 말씀을 안 하시다니.., 그건 좀..?”
“의심이 가시겠지만 진희가 편지 맨 끄트머리에 뭐라고 썼는지 아세요?”
“...,?”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뒤척이더니 꾸겨진 작은 종이를 한 장 꺼내 그녀에게 건네었다. 정말로 그가 말한 내용 그대로였다. 그리고 편지 맨 끄트머리에는 빠알간 볼펜으로

세상은 연극이다. 하지만 연극이 아니길 확인하고 싶다. 단 한번만이라도 순수한 사랑을 통해서 남자들의 진실을 알고 싶다.  

그녀는 편지를 그에게 다시 건네었다.
“진흰 무서운 아이예요. 마음만 먹으면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아이라고요. 마치 바람이 잔뜩 들어 있는 터지기 일보직전의 풍선 같은..,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꽝! 하고 터져 버릴 것만 같은 .., 후. 후. 후.”
그는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도 모를 이상한 쾌감에 젖어 들었다. 그건 자신
을 향해 순수한 열정으로 달겨들고 있는 어린 소녀가 대견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달리던 차가 시흥 쪽으로 가는 신호등 앞에서 갑자기 정차하였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열정적으로 달겨들고 있는 소녀에게서 풍기는 애틋한 감정은 짙은 동정심으로 변하여 그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남, 녀 간의 사랑은 그만큼 미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며칠 전에 어린 유흥 접객 원과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고개를 절
래절래 흔들었다. 결국 진희는 사회에서도 순수치 못한 아이다. 만약 그 애와 관계를 맺는다면.., 그는 현실과 비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모순된 순수 앞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신호가 바뀌자, 그는 서서히 엑셀을 밟았다. 다시 아토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국도 변은 차들이 분주하여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파란 가로수와 공장에서 막 찍어 낸 듯한 직사각형의 아파트들이 빽빽한 숲을 지나 톨게이트를 돌아 아토스는 경인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제 서야 그는 속력을 낼 수가 있었다. 침묵 속에서 운전을 하고 있던 그의 얼굴이 차 창 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방향에 따라 희게도 붉게도 보였다. 마치 복잡한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 듯 그는 갑자기 앞서가던 트럭을 빠르게 추월하였다. 그녀는 “좀 천천히 운전하세요.” 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의 얼굴이 붉어지지 않고 좀 핼쑥한 얼굴 선이 부드러우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



는 완고한 굵은 턱 선만은 금방 뭐라고 하면은 “왝”하고 소릴 지를 것만 같아 꾹 참았다. 하긴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가 잘 생긴 그를 이성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진희를 좀 더 세밀하게 관찰했었더라 면은 이러한 일은 없었을 텐데..,”
그녀는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그 말을 용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어떠케 아이들 마음을 일일이 파악할 수 있겠어요. 신이 아닌 이상. 선생님은 최선을 다하신 거예요. 단지 운이 나빴을 뿐 이예요.”
“아무튼 일차적인 책임은 담임인 저에게 있어요.”
“...,?”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말 선생님은 진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사람처럼 왜? 그러시는 거예요. 장 선생님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요. 선생님이야말로 운이 나빴을 뿐이예요.”
“운이 나빴다고요. 상부에서도 운으로 볼 까요? 분명 불륜의 관계로 낙인찍을 테고 곧바로 조치가 내려오겠지요.”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원에서는 분명히 자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냥 이렇게 진희처럼 증발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붉은 황혼이 짙푸른 어둠으로 변하여 목구멍처럼 검게 삼키어졌다. 높은 곳에 올라 보면은 검푸른 너른 바다와 일직선으로 나열된 도심 자체의 모든 빛을 커다랗게 내려앉은 황혼이 훑고 지나가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 닷 속으로 침몰해 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도심 자체가 어둠에 휩싸여 있다. 도심의 도로 변으로 들어가면은 길 양 켠에 처마를 나란히 하고선 요정과 음식점에서 빨강과 보라색 셀로판 종이에 싸인 전구가 유아등처럼 눅눅한 빛을 내고 활짝 열린 문안, 겨우 너 댓 명이나 앉을까 말까한 조그마한 바에 어떤 여자는 서고 어떤 여자는 앉아서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 여자들은 마치 푸줏간에 걸려있는 고깃덩이처럼 푸르둥둥 한 게 남의 살 처럼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간혹 어둡고 좁은 골목과 이어져 있는 코너에서 짓밟아 뭉개진 석류처럼 쭈글쭈글한 장년의 여자가 불쑥 튀어나와 지나가는 남자들을 세워놓고 호객을 한다.
그들이 탄 백색 아토스는 천천히 환락의 거리를 따라 움직이며 번득이는 물고기
눈처럼 헤드라이트를 켜고 거리의 풍경을 놓치지 않고 탐닉하고 있다.
그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탄성처럼 소리쳤다.
“저-저길 보세요. 선생님?”
“어디요.“
“두 번째 코너 골목 말이 예요.“



그녀는 그가 지목한 곳을 빠르게 응시하였다. 그곳에는 노란 형광 간판에 보라색 장미 꽃무늬가 박혀있는 직사각형의 간판이 바닥에서 불쑥 솟아오른 듯 서있었다.
“저 곳 이예요. 진희가 있던 곳이..,”
“노랑?”
“예”
그는 골목에 있는 빈 공터에 차를 주차하였다.
“제가 데리고 오겠어요.”
“저도 가도 될까요? 내가 애 담임인데..,”
“잘못하다가는 그 앤 사고를 저지를 수도 있어요. 그 애와의 신의도 있고..,”
그는 단 숨에 말해버렸다.
“하긴 그 앤 나 몰래 교묘하게 이탈까지 한 앤데..,”
그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차 창가에 얼굴을 들이대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갔다 올 테니까요.”
그는 어둠 속으로 술집 간판이 현란한 골목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그녀는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무슨 사고를 저지를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혹시..? 하고 그림자처럼 뒤를 밟을 생각을 했지만 그를 믿어야 된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가 좁은 골목 모통이를 돌아, 지하로 이어져 있는 바의 깊숙한 지하 계단으로
내려와 아치형의 붉은 고무판에 꽃무늬 모양의 반짝이는 장식 못이 박혀있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요정 안, 단조롭게 붉은 벽돌로 둘러쳐져 있는 벽은 뜨문뜨문 고개를 꺽은 도라지 꽃 모양의 조명이 노란빛을 은은히 발하고 있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둥그런 무대 위에는 소매가 없는 노랑 쫄티 차림의 긴 생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 맨 젊은 여자가 자기보다 키가 큰 콘드라베이스를 둥둥 켜고 있다. 그 음을 반주 삼아 흰색 가벼운 여름 양복 차림의 마른 중년 신사가 코끼리 코같이 긴 금빛 섹스 폰을 불고 있었다. 마치 그 중년은 자신의 몸의 일부 인냥 섹스폰을 자유자제로 다루었는데, 그 음은 깊디깊은 우물 속에서 금빛 햇살에 찰랑거리는 물을 길어 올리는 듯하고 고독에 지친 한 마리 늑대의 긴 울음소리와도 흡사하고, 경쾌하게 빠르게 음이 퍼질 때에는 풀어 재쳐진 비단결처럼 홀 안을 넘나들고 있었다.
장은 손님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심각하게 담배연기를 날리며 음악을 감상하거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담소하며 맥주를 마시는 연인들, 술을 마시며 여럿이
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하이카라들 사이를 지나 홀 한구석에 놓여있는 호젓한 빈 자리에 우두커니 앉았다. 먼저 그가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은 손님들의 주문을 받으러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핫팬티와 쫄티 차림의 여종원들 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주의 깊게 여종원들의 행동을 낱낱이 훑으며 지나갔지만 진희는 눈에 띄지 않았다. 흡사 그들은 기계에서 뽑아낸 똑 같은 물건처럼 서로를 분간할 수 없었다. 여



자들의 얼굴이란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질식할 것만 같다. 어린것이 날 유혹하고 속이고 결국에는 이런 곳까지 날 오게 해서 지치게 하다니.., 그는 불현듯 진희에 대한 증오심으로 부글부글 온몸이 끓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가 그러한 증오심으로 이를 갈고 있을 때, 진희가 불현듯 나타나 애교를 떨었다.
“오빠 요즘 통 안 오시더니 웬일이세요?‘
“이 곳은 처음인데 어떠케..?”
그는 불현듯 나타난 진희를 알아보지 못하고 당혹한 얼굴로 진희의 얼굴 선을 깊이있게 바라보았다. 깊고 우수에 찬 커다란 눈, 화장기가 짙지만 여린 얼굴선.., 그렇다면?
“혹시.., 아가씬.., 진희.,?”
장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떠듬떠듬 말하였다.
“선생님!”
진희였다. 짙은 화장기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그는 진희로 확인되자, 신경이 뚝 끊기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며 진희에 대한 증오심으로 부글부글 끓던 감정들이 삽시간에 신비할 정도로 기괴한 상념으로 바뀌며 음울한 섹스폰 음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선생님 죄송해요.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걸 보았지만 손님들 때문에 바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어요. 일단 사람들 눈이 있으니까 피해야 되겠어요.”
진희는 주위를 힐끔힐끔 살피며 차리에서 일어났다. 장도 뭐에 이끌리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따라 오세요.“ 장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진희가 밖에 나오더니 제멋대로 행동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진희를 따라 나서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진희는 테이블 사이를 가볍게 빠져 나와 주방과 이어져 있는 비밀통로로 장을 이끌고 들어갔다. 한발자국 앞서 걷고있는 진희는 원생이 아니라 성숙한 여자라
는 생각이 섬뜻 머리 속을 스쳐지나 갔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에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탄력적인 엉덩이는 미끈하게 빠진 다리의 각선미와 어우러져 머리가 혼미할 정도로 야릇한 체취를 풍기고 있다. 순간 장은 그런 선정적인 아이가 순수와 진실
을 논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집요하게 머리 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또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옴을 느꼈다. 그것 또한 모순 아닌가?
비밀 통로로 이어져 있는 맨 끄트머리 그 곳에는 미닫이문이 있는 방이 하나 있었다. 진희가 스륵 방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진희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며 말하였다.
두-평 남짓한         방안에는 머리가 혼미할 정도의 싸구려 향수 냄새와 여자들의 체취



로 뒤범벅이 되어 코끝을 찔렀다. 비키니 옷장 하나가 놓여있고 벽에는 옷들이 잔뜩 걸려 있었고, 방 한구석 직사각형의 작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검붉게 말라버린 몇 송이 장미가 담긴 양주병과 몇 권의 흐트러진 주간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진희가 몸을 뒹굴며 잘 거라는 생각이 들자, 장은 괜한 독기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왔지만 꾹 참았다.
‘너 여기서 자려고 했니?“
“예. 언니들 하고요.”
진희가 얼굴을 떨구었다.
“선생님 앉으세요.”
그가 앉자 소녀도 따라 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그와 짧은 핫팬티의 히끗한 무릎을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앉은 아슬아슬한 소녀와 대조적으로 보였다.
“진희야 네가 정말 이랬어야 했니?”
진희는 눈물을 찔금거렸다.
“선생님 절 이상하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전 선생님을 사랑하기 때문 이예요.”
“사랑하기 때문.., 난 네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러면 서로가 불편할 뿐
이야.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겠니?“
그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며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너무나 현실적 이예요. 사실 현실의 그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많은 세계가 있어요.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이 세상- 설사 많은 사람들이 낮에는 나쁘게 취급하는 일들이 밤만 되면은 불현듯 욕정에 가득한 얼굴로 돌변하고 말지요. 마치 낮과 밤처럼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변한다고 요. 무엇이 선이고 악이지요. 밤만 되면 쾌락의 가면을 쓰고 풀통 속에 빠진 파리처럼 허우적거리는 그들.., 아침이면 간교하게 말쑥한 차림에 넥타이를 동여매겠지요. 어차피 이 세상은 타락했어요. 저도 그렇고 그나마 전 소년원에 들어와서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었어요. 차분히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도 생겼고.., 제가 오래 전에 잊고 있던 순수한 사랑을.., 내 나이 또래 애들이 한 번쯤 꿈꾸었을 사랑을 되찾은 거 같았어요. 누구 때문 이었는 지 아세요..., 결국.., 그것.. 때문에.., 흑.흑. 이렇게 이탈까지.., 하게 되었지만..,
흑.흑..,”
장은 진희의 흐느낌이 뒤섞인 두서없는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미 그
는 이성적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그가 평소에는 지독한 몽상에 잠겨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지독하게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아니 이성적인 사람인 척했다. 이중성. 이중성. 그게 나이든 사람들의 속성이었다. 진희가 십대의 열정으로 앞 뒤 판단 없이 한가지의 상념에만 골몰 한다면은 짧지만 인생의 깊이가 조금은 있다고 자부하는 장은 그러한 모든 상념과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하였다. 마



치 스폰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고 자신의 잇속이 될만한 것을 현실 상황에 적절하게 토해내는 것이다. 그만큼 순수성은 상실되는 거겠지만.., 진희가 열정적으로 다가올수록 그는 한발자국 물러서 끓는 흥분과 예민한 감수성을 억제해야만 했다. 그럴수록 진희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제발! 제발! 밖에 나와서 까지 절 원생 취급하지 말라고요! 단 한순간이라도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하실 순 없는 거예요. 전 단 한순간의 순수한 사랑 때문에 이렇게 이탈까지 했는데.., 선생님은 딱딱하게 죽어버린 곤충처럼 그러실 거예요. 선생님! 너무해요. 너무 하다고요. 어쩌면 제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세요!”
진희는 목젖을 가늘게 떨며 말끝을 흐렸다. 희고 가는 목선을 따라 들먹거리는 등언저리가 슬퍼 보였다. 그는 그제 서야 현실의 굴레에서 서서히 진정한 사랑의 힘을 발견하였다. 평소에도 문학적인 감수성으로 몽상 적인 상념에 잠겨 그러한 사랑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러한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현실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했었는데..,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자신한테 생긴 것이다. 무섭게 침투하는 봄 햇살 속의 눈처럼 그의 마음은 따스한 감정이 솟구치며 또 한편으로는 불안과 초조로 가슴이 떨려왔다. 혹시 저러다가 진희가..? 하지만 그 앤 날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자신의 잃어버린 순수한 사랑을 되찾은 것만 같아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현실의 냉정함 위에 불타오르는 철판 위에 올려진 고기덩이처럼 헐떡거리고 있다. 그는 현실과 비 현실의 상념에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진희의 어깨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울지마. 바보같이 울기는..,”
“흑..흑.., 울기는 제가 왜? 울어요. 전 선생님을 사랑해요.”
진희는 비극배우처럼 흐느껴 울면서도 영특하게도 불안스러워 하는 그의 미세한 신경조직까지 느낄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그에 대해 진실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모든 남자들은 자신을 본능적으로 대했지만 그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가 소년원 선생이라는 특수신분에 있기는 하지만은, 그보다 더한 자들도 자신 앞에 본능적인
인간으로 변해가지 않았던가?
“진희야. 이제 그만 일어나자. 니 마음 충분히 이해하겠어. 이젠 그만 울고..,”
그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입안에서 맴도는 현실적인 언어에 지독한 결핍을 느꼈다. 비참하게 일그러진 진희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진희는 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한 듯
“선생님.., 저- 안 울 거예요.. 흑. 흑. 하지만 선생님한테는.., 다른 사람들한테 느낄 수 없는 감정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



장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사랑에 무슨 조건이 있단 말인가? 서로가 마음을 주고 받으면 그만이지. 그렇다 진희는 순수한 사랑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내팽개치고 이탈을 하지 않았던가? 결국 사랑을 넘어선 심한 질투와 오기까지 보이는 것 아닌가?  그런데 자신은 어떠했는가? 지독히 현실적인 생각에 얽매여 선생이라는 가장된 모습으로 교묘하게 진희에게서 빠져나가려 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지금 소녀 앞에 비굴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이다. 마치 커다란 벽 앞에 걸려있는 상술적으로 만든 작품을 훌륭한 작품이라고 철없는 아이들에게 속이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는 가늘게 귓가를 파고드는 재즈 음에 맞춰 모순된 현실을 즉시하며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고전음악도 아니고, 대중음악도 아닌 불협화음 속에서의 조화 재즈, 어쩌면 인생은 재즈인지도 모른다. 가늘게 흐느끼듯이 들려오다 경쾌하게 빠른 음으로 내뱉는 섹스 폰 음, 모순된 현실을 즉시하며 아직도 실오라기처럼 남아있는 이성적인 생각이 얼음이 녹 듯 흐르는 샘물처럼 장의 머리 속에 깊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서서히 펼쳐진 날개를 펄럭거릴 때마다 찬란한 금빛이 쏟아지며 환상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다.
소녀는 자신의 허벅지까지 팽팽하게 긴장된 반바지를 벗었다. 그 앤 검정팬티를 입고있었다. 그건 간신히 음부를 가린 가늘고 얇은 검정 끈과 같았다. 그 얄팍한 줄을 서서히 발목까지 내리자, 털이 숭숭 박힌 조개 모양의 음부가 보였다. 장은 소녀에게 앉은뱅이 책상에 손을 집게하고는 허리를 구부린 채 뒤편으로 음부를 보이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허리끈을 풀고는 바지를 벗었다.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간 그는 헐렁한 반바지 모양의 군청색 트렁크 팬티를 벗고는 욕망으로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자신의 자주 빛 맨질 맨질한 귀 두를 속살이 헤 벌어진 조개 같은 소녀의 음부에 집어넣었다. 욕망으로 가득 찬 깊은 숨소리가 작은 방 안을 뒤흔들고.., 그때였다. 취한 듯한 섹스 폰 음이 끊기고 조그마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상상의 나래는 창공으로 높이높이 비상하면 할수록 서서히 욕망에 가득 찬 펄럭이는 하얀 깃털이 달린 날개는 엿가락처럼 녹아 흐르고 있었다. 마침내 힘을 잃은 새는 악취를 풍기는 시커먼 부유물이 독버섯처럼 기포를 일으키며 흐르는 개천 위에 머리를 꺽은 채 쳐 박혀버렸다. 저-만치서 한 소녀가 다가왔다. 소녀의 손에는
길쭉한 작대기를 하나들고 있었다. 그것으로 죽은 새의 날개를 쿡쿡 찔러댔다.
마치 예고된 일처럼 소녀의 푸른 영혼이 가슴 속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장은 순간적으로 저 무대 뒤편에 서서 들려오던 박수소리가 끊기자, 이성의 가날픈 빛을 발견하였다. 그건 상상의 새를 추락시킨 태양이었다. 좀더좀더 소녀에게 진실해야 한다. 소녀의 등을 두어 번 투닥거렸다. 그리고는 진정 어린 나직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진희야. 울지 말고 날 똑바로 봐라.”



소녀는 살아나는 식물처럼 고개를 서서히 쳐들고는 장의 두 눈을 깊이 있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진실과 우울로 무겁게 변하였다.
“진희야. 네가 상처가 깊은 아이란 걸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누구나 상처를 받으며 성장하는 거란다. 하긴 네가 감당하기에는 그 상처가 너무나 깊겠지만.., 너에겐 내가 소년원 선생이라 완벽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도 선생이기 이 전에 한 남자에 불과해. 정말 내가 네 앞에서 선생이 아니라 다른 남자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니?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알아야 할게 있어. 내가 며칠 전 밤 친구를 만나 술집엘 갔었는데.., 어린 유흥 접객 원과 같이 잠을 잤었어. 너와 똑같은 또래의 아이와.., 난 술이 깨고 나서 널 생각했었어. 난 네가 생각 하 듯이 그렇게 순수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그래도 날 네가 꿈꾸는 순수한 사람으로 생각하겠니? 오히려 난 너로 인해 순수한 사랑을 되찾은 것만 같은데.., 하. 하. 하. 정말 우스운 일이지. 세상은 모든 게 부조화라고.., 세상 사람들은 널 타락한 못된 아이로 알고 손가락 질 하겠지.., 그러면서도 밤만 되면 너같이 젊고 싱싱한 아이들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겠지..,
장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거칠 대로 거친 언어들을 미친 사람처럼 짓 꺼려 댔다. 마치 하나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내면과 외면을 분리해 놓은 판도라의 상자가 뒤집어 지 듯 혼돈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밉기지 못할 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세상은 혼돈이다. 부조화고 그렇지만.., 진희 네 말대로 오래 전에 망각하고 있던 전설처럼 순수와 진리가 어딘가 에서 싹을 틔우고 있을 거야. 그걸 믿으면서 사는 거지 사람들은..거짓말처럼 말이야. 후. 후. 후..,”
“선생님 됐어요! 이젠 그만 말씀하세요!”
소녀는 장의 가슴에 와락 안기었다. 그는 자신을 원생이 아니라 동등한 개체로 대
해 주시는 거다. 소녀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대
로 이대로 영원히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장의 두 눈에는 오랫동안 메말라 있던 순수의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또 다시
섹스 폰 음이 가늘게 들려왔다. 그들은 마치 커다란 나팔꽃 모양의 금관 악기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간 퍼덕이는 곤충처럼 허우적거렸다. 그들은 세상과 차단된 우물 속에 감금된 슬프고 외로운 이단아들 이겠지만 그들에게는 삭막 할대로 삭막한 사막 한구석에 불현듯 솟아 오른 오아시스였다. 그 작은 세계에 먹구름이 한 조각 흘
렀다. 그리고 번개가 치고 천둥쳤다. 짙게 내뱉는 섹스 폰 음처럼 불협화음과 화음 속으로, 갑자기 하나의 돌이 굴러 떨어졌다. 우물 한 귀퉁이 벽에 반항아처럼 불쑥 튀어나온 돌이 시간의 오랜 잔 영을 견디지 못하고 흘러 떨어진 거였다. 깊은 나락 속으로 떨어진 돌은 수면 위에 깊은 잔 영을 남기었다. 굉음을 내며 흔들리는 그들



의 광막한 작은 세계.., 소녀는 그제 서야 자신의 세계가 거짓임을 깨달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폭염 속에서 메말라 가는 샘물처럼 꿈틀거리는 현기증 속으로 진리의 희미한 잔형이 보였다. 그건 마치 잔잔하게 돌아가고 있는 레코트 판 위에 바늘이 한 홈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였다. 사실 소녀는 처음 집을 나와 남자들을 대할 때에도 순수를 찾으려고 풀통 속에 빠진 파리처럼 허우적거렸지만 기대는 늘 그렇지가 못하였다. 빗나간 현실의 굳은 테두리 속에서 자신의 의식은 초라하게 죽어있었다. 외눈박이가 순수와 진실의 목표를 위해 화살이 장전된 활시위를 당기 듯 결정적인 순간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세상은 그만큼 어둡고 캄캄했다. 됐다. 이만하면 된 거다. 더 이상 마지막 남은 한쪽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진실을 찾기도 전에 실명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진정으로 장을 사랑한다 면은 그를 위해.., 진희는 그의 품에서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진희의 마음을 알리 없는 장은 현실의 불안감으로 온몸을 와들와들 떨며 빠 알간 몸이 여러 개로 갈라진 실지렁이처럼 충혈 된 툭 붉그러진 둥그런 눈으로 진희를 응시하였다.
“선생님 놀라지 마세요. 선생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 예요. 제가 만약 선생님과 본능에 휩싸여 관계를 한다면 저도 선생님이 며칠 전 만난 그 아이처럼 볼품없는 아이가 되겠지요. 전 최소한 선생님한테까지 그런 천박한 아이로 남고 싶지가 않아요. 전 이제서야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선생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진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진실한 어조로 연극배우처럼 말하였다. 그러나 장은 현실과 무의식의 기묘한 부조화를 느끼며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영특하게도 진희가 현실을 바로 즉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한순간이라도 빛을 잃었을지도 모를 자신의 먼지 낀 양심의 껍질이 날카롭게 부서지며 마지막 빛을 발하다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챈 듯 진희의 말이 이어졌다.
“선생님 가요. 소년원으로 말이에요.”
진희가 꺼리김없이 장의 손을 꼭 거머쥐었다. 그도 약속이나 한 듯 진희의 손을 꼭
잡았다. 서로의 혈액이 피부를 터뜨리고 나와 엉겨 붙을 것만 같은 따뜻한 손이었
다. 장과 진희는 요정의 비밀 통로와 연결된 작은 비밀문 밖으로 나왔다.
밖은 처마를 나란히 하고선 요정들이 빼곡한 악취를 풍기는 골목이다. 그러한 골목을 지나 장의 아토스가 주차하고 있는 빈 공터에 갔다. 가로등 불 빛 아래 오래
전 집을 나간 주인집 아이들을 기다리고 서있는 마음씨 착한 하녀처럼 생이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 말 없이 아토스에 올라탔다. 껍질이 하얗게 탈색된 딱정벌레 같은 아토스는 빈 공터와 연결된 좁은 통로를 빠져 나와 도로 한 가운데로 달렸다. 어둠과 불빛을 따라 나는 풍뎅이처럼 소년원으로 가



는 것이었다.*
그들이 소년원의 견고한 현관문 앞에 들어서자, 야간 당직근무를 하고있던 여 직원이 기계적으로 튀어나와 문을 열며 반기었다.
진희는 양옆에 여선생들의 호의 아래, 호실(방)이 길게 늘어서 있는 복도를 따라 걸어들어 갔다. 그 때 문득 유미나가 떠올랐다. 그 애의 호실을 지나칠 때 복도 창문을 관통해 유미나를 엿보았다. 30촉 짜리 백열전구가 희미하게 비추는 서너 평 남짓한 작은 호실 안에서 던져둔 이부자리 속에 아이들의 얼굴과 몸이 몹시도 무거워 보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유미나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두 눈을 의심을 했지만 그 애는 분명 그곳에 없었다. 어쩌면 유미나는 예전부터 이곳에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 아이가 이곳에 들어올 리가 없지. 그 애는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던 거야. 이젠 유미나는 다시는 자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증발해 버린 아침 이슬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마음 속으로 믿고 싶었다. 진희는 유미나가 단정한 교복 차림에 가방을 들고 학교와 도서실, 그리고 공원이나 거리에서 목련 꽃 같은 해말간 웃음을 터트리며 꿈을 키우고 있을 것이라고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
그 후 어느 날
햇살이 말알간 여름날 아침-
소녀가 소리쳤다.
“선생님. 이리와 보세요. 그라디올러스 꽃이 활짝 피었어요. 빨리요!”
“어머 정말 그라디올러스 꽃이 활짝 피었구나!”
생은 소녀의 말에 달려와 꽃처럼 활짝 웃었다. 투명한 햇살이 가득 넘실거리는 미용반 교사실 창문으로 그녀는 행복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 행복은 현실과 대조되어 보였다. 그러나 꽃은 어김없이 피어 있었다. 커다란 그라디올러스 꽃이 탐스럽게, 행복처럼...,


















                  그라디올러스


           그라디올러스의 꽃 낱말은 불륜과 타락입니다.
         하지만 꽃은 그냥 꽃일 뿐입니다. 벌과 나비가 날아오지 않는 꽃은
         꽃이라고 할 수 없듯이..,
         그라디올러스는 여느 꽃들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자신의 환경 속에서
         아무 조건 없이 운명처럼 꽃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꽃인들 아름답게 피어나 벌과 나비의 순수한 몸짓에
         가슴 떨며 사랑을 꽃피우고 싶지 않은 꽃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꽃이 잎을 열기도 전에 불륜과 타락이라는 멍애를
         씌워놓고 짖밣고, 꺽어 버렸는 지도 모릅니다.
         혹시 당신의 어두운 그늘 아래 신음하고 있는 우리의 그라디올러스를
         발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순수와 사랑의 마음
         으로 대해 주십시오. 그건 우리들의 自我象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순수하고 여려 쉽게 가슴 아파하는 우리들의 꽃이기 때문입니다.

  
   정명선
   대전광역시 동구 대성동 295번지 301호
   ☎016 9553-9235, 042 273-9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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