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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례-단편소설2(20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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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
기억은 언제나 거기 머물러 있었다. 붉은 꽃이 만개한 장미 덩굴이 기왓장을 얹은 토담을 타고 그 가지가 휘어지도록 뻗어가고 있었다. 마당 가운덴 입이 큰 콘크리트 관 같은 우물이 떡 서 있었으며 그 주위로 채송화와 봉숭아, 보랏빛의 난초 그리고 오랑캐꽃이 호랑나비 날개 같은 점박이 꽃을 한없이 피워냈다.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그 계절을 종잡을 수는 없다. 흰빛으로 회칠을 한 바람벽을 따라 올라가면 꺼무스름한 기왓장을 얹은 지붕에 초록 융단 같은 이끼가 끼어있고 풀포기도 바람결에 날아와 헤싱헤싱 자라고 있었다.
그 집에 어미 새의 깃털 속 같은 따스함을 가진 할머니가 있었다. 늘 섭이 긴 적삼을 단정하게 입으시던 할머니는 자나 깨나 내 머리, 등짝을 쓸어 줄만큼 한량없이 정스러웠다. 부족한 게 없었다. 애초부터 나는 그 밖의 것을 몰랐으므로 더 바랄 게 없었다. 지금처럼 그리움이 무엇인지도 어머니가 누구이며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아니 그런 이름이 주는 의미심장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 무언지도 나는 몰랐다.
그 나날들- 가끔씩 푸른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찾아왔다. 와서는 가지가지 예쁘고 오밀조밀한 물건들을 내 품에 안겨주었다. 머리핀이며 머리방울, 양말, 타이즈 , 운동화, 그 빨간 구두도 다 푸른 제복의 아저씨가 사다 준 거였다. 내 작은 몸에 입혀졌던 옷들도 그가 사다 준 거였다. 건빵이며 초콜릿 등등의 맛도 그를 통해서 알았다. 대문턱으로 들어서는 그를 보면 난 반사적으로 튀어나갔고 그는 쩍 팔을 벌리고 있다가 그런 나를 안고 삥 돌았다. 그러면 내 잘록한 치맛단은 주름부채 모양으로 착 펴져서 빙글빙글 돌았고 입에서는 자글자글 웃음소리 들끓었다. 그러면 우리 위에서 금빛으로 빛나던 햇살도 나를 따라 자글자글 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후, 그는 다신 오지 않았다. 내게 빨간 타이즈를 눈물로 안겨주고 돌아서갔다. 그리고 나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천사원으로 보내졌다. 처음 천사원에서 나는 날이면 날마다 울어 자치기만 했다. 늘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고 그 잠마저도 가위눌린 꿈속이거나 선잠 정도가 다였다. 나는 거의 먹지도 않았으므로 꼬챙이처럼 말라갔고 키도 자라지 않았다. 고아원물에 길들여지기까지 무려 2년이나 걸렸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겨우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으니까.
“ 세상에나 너 같은 아이는 처음이었어, 보모 생활 30년 동안...... ”
“ 어찌나 울음 끝이 질기던지 밤이면 아예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힘들었다니까.”
먼 후일, 보모님과 친구들은 그렇게 나를 기억했다. 어린 나는 그 기와집을 떠나온 게 그리도 큰 심연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품이 그리워 한번도 바로 누워 자질 못했다. 두 손을 가슴에 모두어 얹고 바싹 오그라진 새우잠이거나 궁둥이를 천정으로 쳐든 새우잠을 잤다. 한번도 바로 누워 자질 못했다. 가슴을 펴고 자질 못했다. 그러면 가슴이 허전해서 무섭도록 허전해서 잠들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남과 같은 잠을 자지 못한다. 그 오랜 습관으로 인해. 이제는 그때 보다는 풀어진 자세이지만 아직도 새우잠을 면치는 못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나는 열아홉의 끝이었다. 어느 시기가 되면 원생들을 사회로 내보는 게 천사원의 규칙이었다. 고교를 졸업하는 원생들은 두 말할 나위 없이 그 대상에 속하게 되어있었다. 나는 여상을 나온 덕에 부기와 주산, 타이프에 대한 실력이 어느 정도 붙어서 중소기업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의 모집공고 내용에 합당하는 경리과에 발을 붙이지는 못했다. 고아라는 이유였다. 든든한 재정보증인이 필요한 경리과의 특성상 고아출신은 무리였을 거였다. 나는 대신 총무부의 일각에서 타이피스트 노릇을 하게 되었다. 사내의 모든 문서를 도맡아 타이핑 처리해야하는 자리였다. 만만치 않은 작업량이었다. 하지만 타자 2급 국가 검정 자격증이 있는 나는 그 일을 큰 무리 없이 소화해 내었다. 내성적인 나는 언제나 말없이 내 할일을 해치우고는 퇴근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집- 그때로서의 내게 집이라는 표현은 영 어색할 때였다. 천사원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였고 또한 그 집이라는 게, 천사원 친구들 세 명과 함께 어울려 얻은 초라한 사글세 단칸방이었으니까. 아니 그보다는 내 자란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집이라는 개념은 아무리 익숙해지려해도 낯선 그 무엇이었다.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 ‘집’이라는 것을 셋집으로 표현하려 한다.
나는 셋집과 회사만을 오가는 얌전한 처녀였다. 같이 기거하는 친구들은 그런 내게 자기들의 연애 담이랄지 펜팔하는 남자친구 얘기를 즐거운 비명처럼 쏟아놓았다. 그래 어쩌면 그건 그 나이 또래의 우리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또 하나 세상과의 조우였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시 내 깊은 곳에 잠겨서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했다. 나는 늘 내 안의 저 깊은 곳에 가라앉아있는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었다.
붉은 꽃이 만개한 장미 덩굴로 덮인 토담과 우물이 있는 그 기와집, 그리고 할머니와 푸른 제복의 아저씨를 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푸른 제복의 아저씨-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는 그 무엇이었다. 물에 개지 않은 짙푸른 물감을 하얀 화폭에 한줄기 선연하게 발라놓은 것 같은 그 무엇이었다.
그 마지막 날을 나는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한다. 빨간 타이즈가 든 선물꾸러미를 내게 안겨주고는 눈물로 돌아서던 그 모습.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텔레비전에서나마도 그토록 슬프게 우는 남자는 보지 못했다. 그는 누구였을까? 나는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내가 그를 못 잊어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는 누구였을까. 나를 이토록 놓아주지 않는 그는 누구인가.
스물아 홉이었을 때 나는 푸른 제복의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회사와 집만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오가는 나를 직장상사가 잘 봐준 덕에 중매로 그를 만났다. 애초에 나는 미래의 내 가정이라는 것에 대해 스산한 정서를 가지고 있던 터였다. 손에 꽉 움켜쥐면 버썩 으스러질 것 같은 거로, 그래서 살포시 잡아 봐도 또 다시 한번 꽉 움켜줘 봐도 그만 주먹 새로 흘러버리고 마는 강물 같은 것으로 다가오는 그런 거였다. 내가 혼길 놓친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거다. 나와 함께 기거하던 친구들이 고아라는 남다른 처지를 벗어나고 싶어 서둘러 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못한 것은......
남편은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인 상처한 경험이 있는 처지였고 딸아이를 하나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뚝 박은 육군상사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가 푸른 제복을 입고 있다 는 것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여섯 살 박이 딸아이가 있다는 것이 내게는 결격사유가 아니라 강한 연민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으로 작용했다. 나는 그들과 그 옛날로 돌아가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남몰래 꿈을 꾸었다. 옛집의 풍경을 그 집에서 재현시키려 했다. 담장에 붉은 꽃을 피워내는 덩굴장미를 심고 우물을 파고 지붕은 꺼무스름한 기왓장을 얹었다. 우물 둘레엔 채송화와 봉숭아를, 그리고 보랏빛의 난초를 구해다가 심었으며 산에서 오랑캐 뿌리를 캐어다가 모종을 했다. 딸아이는 지난날의 내 모습이었다. 나는 그 애에게 빨간 타이즈와 가지가지 머리방울과 머리핀 그리고 건빵과 초콜릿 등등을 사다 주었다. 그러면 그 애는 빛나게 웃으며 마당 가운데서, 방 가운데서 또는 마루에서 빙그르르 한바퀴 돌았다. 하면 그 애의 잘록한 치마 단은 주름부채 모양으로 착 펴져서 아름다운 원을 그리며 그 앨 따라 또 돌았다. 나는 그 속에서 그렇게 꿈을 꾸었다. 내안의 그곳에 안온한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나의 세계를.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인 나를 떠났다. 먼 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길을. 한마디 언질도 없이 떠나가 버렸다. 빨간 구두를 건지려다, 우물 속에 빠트린 그 빨간 구두를 건지려다 우물 속 그 깊은 심연으로 곤두박질쳐서 영영 가버렸다. 우물 속에 둥둥 떠 있던 그 빨간 구두,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떠올라 그 빛이 우물 한가운데에 꽂혔을 때 붕 떠오르던 그 애. 악! 나는 붉은 불덩이에 떠밀리어 혼절을 하고 말았다.
아아, 어쩌지. 빨간 구두, 빨간 타이즈, 빨간 장미가 하나의 불덩이로 솟아올랐다가 내 가슴으로 가라앉는 것을. 지는 해로 내 가슴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그러면 겉잡을 수 없이 외로웠다. 미치도록 외로워서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그때부터 나는 집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밥을 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청소를 하다가도 , 꽃밭을 가꾸다가도 그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나는 열일 중단하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처음엔 정처 없이 배회하던 발길이었다. 기차역에 가서 떠나고 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고 이윽고 그들이 보이지 않으면 철길을 따라 또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면 기적소리, 레일 위를 미끄러지는 기차 바퀴소리가 꿈속처럼 다가와서 오래 참아온 내 속의 그리움 같은 것을, 설움 같은 것을 깊은 골짝으로 밀어 넣었다. 작은 평화가 깃든 곳이었다. 상처받은 나를 위무해 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었다. 어둡고 비좁은 공간, 성애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그러나 정작 섹스 하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들이 이성친구와 함께 숨어드는 곳, 그런 은밀한 공간 같은 것이었다. 짧으나 나는 그 속에서 소꿉장난 같은 행복을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짧은 동안 위로를 받았다. 가슴에 뚫린 바람구멍을 한순간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지 못했다. ‘영원’ 이란 단어는 나를 웅웅거리며 휘감아 돌다 가슴 언저리에 허한 구멍을 남기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린 바람소리 같은 거였다, 밤하늘의 유성 같은 거였다. 한줄기 소낙비 같은 거였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한순간의 영롱한 이슬일 뿐이었다. 아아, 나는 어디로 가나. 어디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하나.
그 길에서 돌아오다가 나는 ‘푸른 방’에 들렀다. ‘푸른’이라는 단어에서 묻어나는 그 낯익은 느낌으로 무심히 들어 가본 그곳은 성인 여자들의 휴식공간이었다. 화상테이트, 실내골프, 전화데이트,등등 다양한 놀이거리들이 한데 어우러져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오예! 사광이다! 오예! 오광이다! 고스톱하는 무리들이었다. 여자들 여럿이 어우러져 고스톱을 치고 있었는데 무엇이 그리 자지러지게 좋은지, 마치 임산부가 레몬 맛에 취해갈 때처럼 그들은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짜릿짜릿함을 느꼈다. 누군가 판돈을 다 거머쥐었을 때 나는 이상한 체험을 했던 거였다. 가슴 속의 그것이 더 이상 나를 외롭지 않게 하는 거였다. 이상한 흥분이 오는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것에게 다가갔고 그리고 그것과 어울렸다. 궁합이 아주 잘 맞는 남여처럼 . 그것과 나는 밤이 새도록 양귀비꽃을 피워냈다. 나는 잠을 자다가도 붉은 불덩이가 솟아올랐다가 지는 해로 내 가슴을 물들이면 홀연히 그곳으로 갔다. 이슥한 밤중이고 새벽녘이고를 가리지 않았다. 가서는 수도 없는 양귀비꽃을 또 피워내는 걸로 그 지독한 외로움을 상쇄해가는 것이었다.
남편은 이제 그런 나를 무슨 벌레 보 듯하기 시작했다. 가까이 사는 시댁붙이들도 그랬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남편이 그들에게 하소연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즉부터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내가 천애고아라는 이유로 . 그들은 보이지 않는 가시를 세워 내게 생채기를 내었다. 내가 아무리 내 속으로 낳지도 않은 딸아이에게 정성을 쏟아도 그들은 시큰둥했었다. ‘너는 그래야만 돼, 그게 네 운명이니까. 고아라는 처치로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거야.’ 라는 것을 은연 중 내게 심어주었으며 ‘자 된장 간장이다. 넌 친정도 없는 적막강산 걸, 내가 아니면 누가 이걸 주겠니? 어서 넣어둬라 .’ 하는 식으로 같은 말을 해도 그들은 언제나 뼈있게 굴곤 했다.
푸른 제복의 남편에게서, 기억 속 푸른 제복의 아저씨를 만나려했던 것부터가 잘못된 인연의 시작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남편을 통해서, 딸아이를 통해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했으므로. 오직 그것만 가지고 나는 그와 결혼했으니까. 그는 내게 과거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길로 들어간 나는 잠시 안옥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애틋한 꿈길이었다.
오늘 나는 밤이 이슥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나를 남편은 문밖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근본도 없는 기집 같으니라고, 애초부터 고아 따윌 상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울화 끝의 남편은 제 풀에 겨워 자신까지도 타박을 했다.
그래 그런 게 아니었어요. 고아는 별종이잖아요.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는 내지 못했다. 입속으로만 웅얼거렸다.
“하지만 갈 데가 없는 걸요, 이대로 어딜 가요...... 날 받아줘요 , 다신 안 그럴게요.”
매달리는 날 남편은 더 멀리 밀어내고는 안에서 문을 걸어버렸다. 허물어진 자세를 고쳐 세우고 꼼짝 않고 문 쪽을 이윽히 바라보던 나는 서서히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림자 하나가 그런 나를 따라 나왔다. 그 집 울안에서 안식을 찾으려던 고단한 내 넋이 밤잠에서 깨어 홀연히 나를 따르고 있었다.
집집의 창을 통해 느껴져 오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따듯하게 느껴져 왔다. 간간히 희미한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는 불 켜진 창들도 있었다. 그들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뻗고 싶었다.
다신 안 그럴게요. 한 번만 용서해줘요, 네?
그러자 남편의 소리가 들려왔다.
“근본도 없는 기집 같으니라고, 애초부터 고아 따윌 상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
나는 자괴지심으로 화끈 달아오르는 뺨을 감싸 쥐며 주택가 골목길을 내달린다. 이차선 도로가 보이자 나는 쉬엄쉬엄 속도를 늦춘다. 불빛들이 모닥모닥 피어있는 차도가 뜻 모를 위안을 준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그러면서도 나는 쉬지 않고 내쳐 걷는다.
어디선가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들려온다. 이 밤이 새도록 그것은 이어질 것인가. 벌써 삼일 째다. 나는 기실 간밤에 방송국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푸른방에 가고 싶은 맘이 간절했지만 간밤에 만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어제도 그제도 방송국 주위를 서성였었다. 푸른 제복의 아저씨를 행여 만나기 위해 정안수를 떠 놓고 비는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방송국엘 갔었다. 하지만 나는 어제 등을 보이고 푸른 제복의 아저씨를 찾았다. 고아라는 것이 나는 왜 그리 부끄러운지 모른다. 만인 앞에 내 얼굴을 드러내고 피켓을 들고 있다는 건 상상하기 조차도 싫은 일이다. 치욕이랄 수도 있겠다. 어차피 푸른 제복의 그는 내 얼굴을 모를 것이다. 잘해야 어릴 때의 내 모습을 실루엣처럼 떠올리다가 놓치고 마는 순간의 그 느낌 정도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를 그렇게 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푸른 제복으로만 선연히 떠오를 뿐이다. 하얀 화폭에 한줄기 발라놓은, 물에 개지 않은 짙푸른 물감 같은 것으로 그는 떠오를 뿐이다.
“붉은 꽃이 만개한 장미덩굴이 기왓장을 얹은 토담을 타고 그 가지가 휘어지도록 뻗어가고 있었습니다. 마당 가운데엔 입을 벌린 콘크리트 관 같은 우물이 떡 서 있었으며 그 둘레로는 채송화와 봉숭아, 보랏빛의 난초 그리고 오랑캐꽃이 호랑나비 날개 같은 점박이 꽃을 하염없이 피워냈습니다.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그 계절을 종잡을 수는 없습니다.
흰빛으로 회칠을 한 바람벽을 따라 올라가면 꺼무스름한 기왓장을 얹은 지붕에 초록융단 같은 이끼가 끼어있고 풀포기도 바람결에 날아와 헤싱헤싱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 어미 새의 깃털 속 같이 따스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늘 섭이 긴 적삼을 단정히 입으시던 할머니는 자나 깨나 내 머리며 등짝을 쓸어 주었습니다.
그 나날들- 가끔 푸른 제복의 아저씨가 찾아왔습니다. 와서는, 와서는... “
간밤, 나는 울먹이느라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여자 아나운서가 따듯한 손길로 내 등을 토닥여주면서 다음 말을 기다려주었다. 그사이로 흘러간 가요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잔잔한 몸매에 빛나는 눈, 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그러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다음 말을 잇기는커녕 거센 물살 같은 감정에 떠밀리어 나는 흑흑 느껴 울기까지 했다. 철들면서부터는 누구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면 비루하도록 초라해 보일까봐, 고아라는 외로움 때문에 그런다는 눈총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것이 두려워 나는 절대로 울지를 못했었다. 아나운서가 내 다음 말을 대신해 주었다.
“ ...... 와서는- 가지가지 예쁘고 오밀조밀한 물건들을 내게 안겨주었습니다. 머리핀이며 머리방울, 양말, 타이즈, 운동화, 그 빨간 구두도 다 푸른 제복의 아저씨가 사다 준 거였습니다. 내 작은 몸에 입혀졌던 옷들도 그가 사다 준 거였습니다. 건빵이며 초콜릿 등등의 맛도 그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후, 그는 다신 오지 않았습니다. 내게 빨간 타이즈를 눈물로 안겨주고 돌아서 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사원으로 보내졌습니다. “
아나운서의 낭독이 다 끝이 났다.
누가 그 아일 모르시나요? 여섯 살의 추미애를...... 푸른 제복의 아저씨를......?
푸른 네온이 켜진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푸른방’ 그 푸른 글씨가 뇌수 속에 박힌 그 무엇처럼 선연하다. 나도 모른다. 애초에 여길 올 작정은 아니었다. 다만 내 황막한 어느 곳에서 솟아오른 붉은 불덩이 하나가 가슴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지는 해로 내 가슴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어디선가 화투짝 치는 소리 탁탁 들린다. 오예! 사광이다. 오예! 오강이다. 짜릿짜릿 전율이 온다, 발기하는 여자의 유두처럼.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쾌감 먼저 느낀다. 입안을 녹이는 박하사탕의 그 화한 맛이 느껴진다. 절정에 달한 섹스의 그 순간이 오래오래 지속되는 그 화한 상태가 뇌수를 하얗게 비운다. 나는 또 수 없는 양귀비꽃을 피워낼 것이다. 밤이 새도록 그 내음에 취해서 내 속의 저 깊은 심연을 위로 받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를 보는 여자들의 눈길이 가늘어진다. 남편의 눈길도 저랬다. 시댁붙이들의 눈길도, 어느 날부터인가 저랬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상대하려들지 않는다. 요새 탈탈 빈주머니로 이곳을 찾았었다. 근래 들어 남편이 모든 돈줄을 차단시킨 탓에. 그러자 처음엔 잔심부름을 해주고 고리를 뜯어 한판씩 끼워들기도 했지만 이젠 그 짓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이제 내가 목을 빼고 기다려도 고리 뜯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아무리 살랑거려도. 오불관언식이다. 아니 나는 그들에게서 나를 향한 냉소를 읽는다. 나는 편치 못한 자세로 앉는다.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치맛단을 밑으로 자꾸 끌어내린다. 그러고 내내 앉아 요요한 양귀비꽃을 피워내는 그들을 간절히 바라본다. 오에! 사광이다. 엣다, 오광이다. 손끝이 간질간질하다. 정수리도 간질거린다. 왼발 엄지발가락도 간질거린다. 아아, 가슴속의 것을, 이 지독한 것을 풀어내었으면...... 새벽녘이 돼서야 판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집을 떠올리자 내 속의 깊은 심연이 적막하게 들여다보인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현기증이 난다. 요 며칠, 하얀 밤을 보냈다.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에 출연하는 절차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동안 마음이 들떠있었던지,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던지 내내 뇌수의 그곳이 열려 있었다.
나는 느리게 그리고 이따금 어지러운 발짝 소리도 내며 어느 주택가 낯이 선 골목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나는 보았다. 그 주택가 골목길을 돌아 나오다 나는 보았다. 그 집을. 길을 잘못 들어 헤매던 그 골목길에서 나는 보았다. 꿈에 그리던 기와집을. 여섯 살적 그 기와집을. 붉은 장미꽃이 새벽이내에 거무스름하게 피어있는 담장을 나는 보았네.
일보이보, 나는 그 리듬에 맞춰 하늑하늑 다가간다. 훨훨 다가간다. 키 작은 대문이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세상에나 어쩜 마당 가운데 우물도 있네. 채송화, 봉숭아, 오랑캐꽃. 쏟아지는 달빛이 꽃 이름을 불러준다. 나는 대문을 흔든다. 누구 없어요? 어서 문 열어봐요! 나는 자꾸 대문을 흔든다. 이윽고 창안에서 불이 켜지고 희미한 그림자 일렁인다. 신발 끄는 소리 나다가 한 소리 들려온다. 이 밤에 누구 길래 대체......
“...... 뒤신데요?”
“저예요, 할머니, 저 미애예요! ”
“ ......?”
대문 열고 나오는 그이는 정말 내 여섯 살적 할머니였다.
“오오 할머니, 저 미애예요, 미애라구요!”
그러나 그인 저만큼 물러난다. 달려드는 나를 피해 뒷걸음질친다.
“가지 말아요, 할머니. 나랑 있어줘요......”
“나는 댁을 모른다우. 아마 집을 잘못 찾아들었나 보우.”
손사래 치는 그이가 야속해 나는 울먹인다. 주저앉는다. 안에서 식구들이 하나 둘 나온다.
“ 푸른 제복의 아저씬 어디 있지요 할머니?”
“ 할머니, 112를 부를까요? 저 여자 이런가 봐요.”
식구 하나가 불쑥 끼어들어 허공에 동그라미를 만들어 뱅글뱅글 돌린다.
“ 푸른 제복의 아저씬요 ?”
“ 할머니 무서워요!”
아아, 저 소리, 내가 하던 저 소리. 천사원에서 밤마다 내가 하던 저 소리. 그때 나는 날개 다친 어린 새였다. 둥지 밖으로 밀려난 어린 새는 밤마다 낯선 그곳에서 하염없이 몸을 떨었다. 나는 제물에 가위모양으로 가슴을 안는다. 파들파들 심장 뛰는 소리. 그 어린 것의 심장박동은 또 얼마나 가련했던가. 할머니, 무서워요. 할머니, 무서워요. 할머니 무서워요. 그 앤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비상 사이렌소리 들려온다. 요란한 나선무늬의 음파가 귓속까지 후비고 들어와 소용돌이친다. 강렬한 불빛이 눈을 찌른다. 손을 펴서 불빛을 막는다. 그러나 강렬한 햇살이 투영된 유리파편에서 되쏘는 그 산산이 부서지며 튀어 오르는 햇살의 반사 빛 마냥, 무수한 빛살의 쏘임이 멈추질 않는다. 목을 틀어 시선을 돌린다. 시야가 깜깜하다. 먹지로 눈을 가린 것 같다.
" 이 분입니까? “
남자가 손전등을 거두고 뚜벅뚜벅 걸어온다. 와서는 내 등을 토닥인다.
“아주머니 꼭두새벽에 웬일이세요?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댁이 어디시죠?”
“.........”
나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집을 모르세요? 잊어버리셨어요?”
“ 붉은 꽃이 만개한 장미덩굴이 담장을 타고 그 가지가 휘어지도록 뻗어가고 있었습니다. 마당가운데엔 콘크리트 관 같은 우물이 떡 서 있었으며 흰빛으로 회칠한 바람벽을 따라 올라가면...”
“아주머니...”
예의 그 목소리가 나를 흔든다.
“정신 차리세요.”
억센 손길이 내 어깨를 잡아 흔든다.
“그 집이에요, 여기 내 집이 있어요......”
나는 한바퀴 휙 돌고는 오른손 검지를 세운다.
“보세요. 저 기와지붕, 우물, 담장의 붉는 장미를요. 나는 25년 동안이나 그 집을 찾아 헤맸어요. 하지만 아직도 푸른 제복의 아저씬 만나지 못했어요. 보고 싶어요. 그가 그리워요. 미치도록 그리워요. 그는 어디 있을까요? 그는 어디에 있을까요......”
등 뒤에서 예의 그 손길이 어깨를 반짝 들어 잡는다. 그러고 나를 어디론가 앞세운다. 경광등이 켜진 차 뒷문을 열고 그 안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도 따라들어 온다. 내 옆에 앉는다. 운전석의 남자가 나를 힐금거린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지금 내 자신을 추스릴 수가 없다. 누가 내 등을 떠밀면 그대로 밀려 어디론가 흘러가버리고 말 것만 같다. 정신은 그런대로 말짱한데 제어 능력이 터럭만큼도 없는 것 같다. 나는 파출소를 거쳐서 경찰서로 인계되었다. 거기서는 남편얼굴이 보였다가 말았다가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다음날 나는 하얀 집으로 옮겨졌다. 지붕이 없는 하얀 회칠을 한 콘크리트 집이었다. 하얀 가운의 사람들이 간간히 보였고 침상에는 여러 여자들이 누워있거나 앉아있거나 울거나 웃거나, 쫑알쫑알 거리고 있었고 특이하게도 빨간 구두를 부여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여자도 있었다. 아가, 우리 아가 ,금자동아 , 은자동아,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 등을 토닥여준다. 머리도 쓸어준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나를 돌아본다. 빨간 구두를 내민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내 자리로 사뿐히 돌아온다.
신애야, 이 보렴 빨간 구두란다. 네가 우물 속에 빠트렸던 그 빨간 구두란다. 이제야 우물 속서 네 넋을 건진 거야. 미안해, 정말...... 나는 빨간 구두를 가슴에 꼬옥 모두어 안는다. 나는 애틋이 신애의 체취를 맡는다. 어린 추미애의 체취도 헤아려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도리질을 한다. 미치겠어, 그렇게 밖에 너를 사랑하지 못한 게 . 자장자장 우리아가, 금자동아 은자동아, 자장자장 우리아가,
나는 살금살금 하얀집을 나온다. 품안에 빨간 구두를 안고. 하얀집은 한적한 숲 속에 있었다. 나는 길을 따라 자꾸자꾸 걷는다. 달빛 따라 걷는다. 푸르스름한 새벽이내가 보일 때야 나는 그 집 앞에 당도한다. 문은 잠겨있다. 나는 말없이 그 집 안을 들여다보다가 대문 앞에 자리를 잡고 길게 눕는다. 빨간 구두를 품에 안고 바로 눕는다. 이렇게 누워본지가 언제 적인지 모른다. 달빛이 아직 스러지지도 않았고 별들도 아직 스러지지 않은 새벽하늘 아래서 나는 스르르 잠이 든다. 깊고 깊은 층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든다. 언제였는지 모른다. 이렇게 누워본지가......
메일주소:ko7721@hanmail.net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풍림아파트 106동 1305호 011-778-7721 고선례 (피토피아 신인상 소설부분 응모작)
기억은 언제나 거기 머물러 있었다. 붉은 꽃이 만개한 장미 덩굴이 기왓장을 얹은 토담을 타고 그 가지가 휘어지도록 뻗어가고 있었다. 마당 가운덴 입이 큰 콘크리트 관 같은 우물이 떡 서 있었으며 그 주위로 채송화와 봉숭아, 보랏빛의 난초 그리고 오랑캐꽃이 호랑나비 날개 같은 점박이 꽃을 한없이 피워냈다.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그 계절을 종잡을 수는 없다. 흰빛으로 회칠을 한 바람벽을 따라 올라가면 꺼무스름한 기왓장을 얹은 지붕에 초록 융단 같은 이끼가 끼어있고 풀포기도 바람결에 날아와 헤싱헤싱 자라고 있었다.
그 집에 어미 새의 깃털 속 같은 따스함을 가진 할머니가 있었다. 늘 섭이 긴 적삼을 단정하게 입으시던 할머니는 자나 깨나 내 머리, 등짝을 쓸어 줄만큼 한량없이 정스러웠다. 부족한 게 없었다. 애초부터 나는 그 밖의 것을 몰랐으므로 더 바랄 게 없었다. 지금처럼 그리움이 무엇인지도 어머니가 누구이며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아니 그런 이름이 주는 의미심장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 무언지도 나는 몰랐다.
그 나날들- 가끔씩 푸른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찾아왔다. 와서는 가지가지 예쁘고 오밀조밀한 물건들을 내 품에 안겨주었다. 머리핀이며 머리방울, 양말, 타이즈 , 운동화, 그 빨간 구두도 다 푸른 제복의 아저씨가 사다 준 거였다. 내 작은 몸에 입혀졌던 옷들도 그가 사다 준 거였다. 건빵이며 초콜릿 등등의 맛도 그를 통해서 알았다. 대문턱으로 들어서는 그를 보면 난 반사적으로 튀어나갔고 그는 쩍 팔을 벌리고 있다가 그런 나를 안고 삥 돌았다. 그러면 내 잘록한 치맛단은 주름부채 모양으로 착 펴져서 빙글빙글 돌았고 입에서는 자글자글 웃음소리 들끓었다. 그러면 우리 위에서 금빛으로 빛나던 햇살도 나를 따라 자글자글 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후, 그는 다신 오지 않았다. 내게 빨간 타이즈를 눈물로 안겨주고 돌아서갔다. 그리고 나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천사원으로 보내졌다. 처음 천사원에서 나는 날이면 날마다 울어 자치기만 했다. 늘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고 그 잠마저도 가위눌린 꿈속이거나 선잠 정도가 다였다. 나는 거의 먹지도 않았으므로 꼬챙이처럼 말라갔고 키도 자라지 않았다. 고아원물에 길들여지기까지 무려 2년이나 걸렸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겨우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으니까.
“ 세상에나 너 같은 아이는 처음이었어, 보모 생활 30년 동안...... ”
“ 어찌나 울음 끝이 질기던지 밤이면 아예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힘들었다니까.”
먼 후일, 보모님과 친구들은 그렇게 나를 기억했다. 어린 나는 그 기와집을 떠나온 게 그리도 큰 심연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품이 그리워 한번도 바로 누워 자질 못했다. 두 손을 가슴에 모두어 얹고 바싹 오그라진 새우잠이거나 궁둥이를 천정으로 쳐든 새우잠을 잤다. 한번도 바로 누워 자질 못했다. 가슴을 펴고 자질 못했다. 그러면 가슴이 허전해서 무섭도록 허전해서 잠들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남과 같은 잠을 자지 못한다. 그 오랜 습관으로 인해. 이제는 그때 보다는 풀어진 자세이지만 아직도 새우잠을 면치는 못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나는 열아홉의 끝이었다. 어느 시기가 되면 원생들을 사회로 내보는 게 천사원의 규칙이었다. 고교를 졸업하는 원생들은 두 말할 나위 없이 그 대상에 속하게 되어있었다. 나는 여상을 나온 덕에 부기와 주산, 타이프에 대한 실력이 어느 정도 붙어서 중소기업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의 모집공고 내용에 합당하는 경리과에 발을 붙이지는 못했다. 고아라는 이유였다. 든든한 재정보증인이 필요한 경리과의 특성상 고아출신은 무리였을 거였다. 나는 대신 총무부의 일각에서 타이피스트 노릇을 하게 되었다. 사내의 모든 문서를 도맡아 타이핑 처리해야하는 자리였다. 만만치 않은 작업량이었다. 하지만 타자 2급 국가 검정 자격증이 있는 나는 그 일을 큰 무리 없이 소화해 내었다. 내성적인 나는 언제나 말없이 내 할일을 해치우고는 퇴근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집- 그때로서의 내게 집이라는 표현은 영 어색할 때였다. 천사원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였고 또한 그 집이라는 게, 천사원 친구들 세 명과 함께 어울려 얻은 초라한 사글세 단칸방이었으니까. 아니 그보다는 내 자란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집이라는 개념은 아무리 익숙해지려해도 낯선 그 무엇이었다.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 ‘집’이라는 것을 셋집으로 표현하려 한다.
나는 셋집과 회사만을 오가는 얌전한 처녀였다. 같이 기거하는 친구들은 그런 내게 자기들의 연애 담이랄지 펜팔하는 남자친구 얘기를 즐거운 비명처럼 쏟아놓았다. 그래 어쩌면 그건 그 나이 또래의 우리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또 하나 세상과의 조우였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시 내 깊은 곳에 잠겨서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했다. 나는 늘 내 안의 저 깊은 곳에 가라앉아있는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었다.
붉은 꽃이 만개한 장미 덩굴로 덮인 토담과 우물이 있는 그 기와집, 그리고 할머니와 푸른 제복의 아저씨를 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푸른 제복의 아저씨-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는 그 무엇이었다. 물에 개지 않은 짙푸른 물감을 하얀 화폭에 한줄기 선연하게 발라놓은 것 같은 그 무엇이었다.
그 마지막 날을 나는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한다. 빨간 타이즈가 든 선물꾸러미를 내게 안겨주고는 눈물로 돌아서던 그 모습.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텔레비전에서나마도 그토록 슬프게 우는 남자는 보지 못했다. 그는 누구였을까? 나는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내가 그를 못 잊어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는 누구였을까. 나를 이토록 놓아주지 않는 그는 누구인가.
스물아 홉이었을 때 나는 푸른 제복의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회사와 집만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오가는 나를 직장상사가 잘 봐준 덕에 중매로 그를 만났다. 애초에 나는 미래의 내 가정이라는 것에 대해 스산한 정서를 가지고 있던 터였다. 손에 꽉 움켜쥐면 버썩 으스러질 것 같은 거로, 그래서 살포시 잡아 봐도 또 다시 한번 꽉 움켜줘 봐도 그만 주먹 새로 흘러버리고 마는 강물 같은 것으로 다가오는 그런 거였다. 내가 혼길 놓친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거다. 나와 함께 기거하던 친구들이 고아라는 남다른 처지를 벗어나고 싶어 서둘러 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못한 것은......
남편은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인 상처한 경험이 있는 처지였고 딸아이를 하나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뚝 박은 육군상사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가 푸른 제복을 입고 있다 는 것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여섯 살 박이 딸아이가 있다는 것이 내게는 결격사유가 아니라 강한 연민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으로 작용했다. 나는 그들과 그 옛날로 돌아가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남몰래 꿈을 꾸었다. 옛집의 풍경을 그 집에서 재현시키려 했다. 담장에 붉은 꽃을 피워내는 덩굴장미를 심고 우물을 파고 지붕은 꺼무스름한 기왓장을 얹었다. 우물 둘레엔 채송화와 봉숭아를, 그리고 보랏빛의 난초를 구해다가 심었으며 산에서 오랑캐 뿌리를 캐어다가 모종을 했다. 딸아이는 지난날의 내 모습이었다. 나는 그 애에게 빨간 타이즈와 가지가지 머리방울과 머리핀 그리고 건빵과 초콜릿 등등을 사다 주었다. 그러면 그 애는 빛나게 웃으며 마당 가운데서, 방 가운데서 또는 마루에서 빙그르르 한바퀴 돌았다. 하면 그 애의 잘록한 치마 단은 주름부채 모양으로 착 펴져서 아름다운 원을 그리며 그 앨 따라 또 돌았다. 나는 그 속에서 그렇게 꿈을 꾸었다. 내안의 그곳에 안온한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나의 세계를.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인 나를 떠났다. 먼 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길을. 한마디 언질도 없이 떠나가 버렸다. 빨간 구두를 건지려다, 우물 속에 빠트린 그 빨간 구두를 건지려다 우물 속 그 깊은 심연으로 곤두박질쳐서 영영 가버렸다. 우물 속에 둥둥 떠 있던 그 빨간 구두,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떠올라 그 빛이 우물 한가운데에 꽂혔을 때 붕 떠오르던 그 애. 악! 나는 붉은 불덩이에 떠밀리어 혼절을 하고 말았다.
아아, 어쩌지. 빨간 구두, 빨간 타이즈, 빨간 장미가 하나의 불덩이로 솟아올랐다가 내 가슴으로 가라앉는 것을. 지는 해로 내 가슴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그러면 겉잡을 수 없이 외로웠다. 미치도록 외로워서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그때부터 나는 집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밥을 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청소를 하다가도 , 꽃밭을 가꾸다가도 그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나는 열일 중단하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처음엔 정처 없이 배회하던 발길이었다. 기차역에 가서 떠나고 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고 이윽고 그들이 보이지 않으면 철길을 따라 또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면 기적소리, 레일 위를 미끄러지는 기차 바퀴소리가 꿈속처럼 다가와서 오래 참아온 내 속의 그리움 같은 것을, 설움 같은 것을 깊은 골짝으로 밀어 넣었다. 작은 평화가 깃든 곳이었다. 상처받은 나를 위무해 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었다. 어둡고 비좁은 공간, 성애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그러나 정작 섹스 하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들이 이성친구와 함께 숨어드는 곳, 그런 은밀한 공간 같은 것이었다. 짧으나 나는 그 속에서 소꿉장난 같은 행복을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짧은 동안 위로를 받았다. 가슴에 뚫린 바람구멍을 한순간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지 못했다. ‘영원’ 이란 단어는 나를 웅웅거리며 휘감아 돌다 가슴 언저리에 허한 구멍을 남기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린 바람소리 같은 거였다, 밤하늘의 유성 같은 거였다. 한줄기 소낙비 같은 거였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한순간의 영롱한 이슬일 뿐이었다. 아아, 나는 어디로 가나. 어디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하나.
그 길에서 돌아오다가 나는 ‘푸른 방’에 들렀다. ‘푸른’이라는 단어에서 묻어나는 그 낯익은 느낌으로 무심히 들어 가본 그곳은 성인 여자들의 휴식공간이었다. 화상테이트, 실내골프, 전화데이트,등등 다양한 놀이거리들이 한데 어우러져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오예! 사광이다! 오예! 오광이다! 고스톱하는 무리들이었다. 여자들 여럿이 어우러져 고스톱을 치고 있었는데 무엇이 그리 자지러지게 좋은지, 마치 임산부가 레몬 맛에 취해갈 때처럼 그들은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짜릿짜릿함을 느꼈다. 누군가 판돈을 다 거머쥐었을 때 나는 이상한 체험을 했던 거였다. 가슴 속의 그것이 더 이상 나를 외롭지 않게 하는 거였다. 이상한 흥분이 오는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것에게 다가갔고 그리고 그것과 어울렸다. 궁합이 아주 잘 맞는 남여처럼 . 그것과 나는 밤이 새도록 양귀비꽃을 피워냈다. 나는 잠을 자다가도 붉은 불덩이가 솟아올랐다가 지는 해로 내 가슴을 물들이면 홀연히 그곳으로 갔다. 이슥한 밤중이고 새벽녘이고를 가리지 않았다. 가서는 수도 없는 양귀비꽃을 또 피워내는 걸로 그 지독한 외로움을 상쇄해가는 것이었다.
남편은 이제 그런 나를 무슨 벌레 보 듯하기 시작했다. 가까이 사는 시댁붙이들도 그랬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남편이 그들에게 하소연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즉부터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내가 천애고아라는 이유로 . 그들은 보이지 않는 가시를 세워 내게 생채기를 내었다. 내가 아무리 내 속으로 낳지도 않은 딸아이에게 정성을 쏟아도 그들은 시큰둥했었다. ‘너는 그래야만 돼, 그게 네 운명이니까. 고아라는 처치로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거야.’ 라는 것을 은연 중 내게 심어주었으며 ‘자 된장 간장이다. 넌 친정도 없는 적막강산 걸, 내가 아니면 누가 이걸 주겠니? 어서 넣어둬라 .’ 하는 식으로 같은 말을 해도 그들은 언제나 뼈있게 굴곤 했다.
푸른 제복의 남편에게서, 기억 속 푸른 제복의 아저씨를 만나려했던 것부터가 잘못된 인연의 시작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남편을 통해서, 딸아이를 통해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했으므로. 오직 그것만 가지고 나는 그와 결혼했으니까. 그는 내게 과거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길로 들어간 나는 잠시 안옥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애틋한 꿈길이었다.
오늘 나는 밤이 이슥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나를 남편은 문밖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근본도 없는 기집 같으니라고, 애초부터 고아 따윌 상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울화 끝의 남편은 제 풀에 겨워 자신까지도 타박을 했다.
그래 그런 게 아니었어요. 고아는 별종이잖아요.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는 내지 못했다. 입속으로만 웅얼거렸다.
“하지만 갈 데가 없는 걸요, 이대로 어딜 가요...... 날 받아줘요 , 다신 안 그럴게요.”
매달리는 날 남편은 더 멀리 밀어내고는 안에서 문을 걸어버렸다. 허물어진 자세를 고쳐 세우고 꼼짝 않고 문 쪽을 이윽히 바라보던 나는 서서히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림자 하나가 그런 나를 따라 나왔다. 그 집 울안에서 안식을 찾으려던 고단한 내 넋이 밤잠에서 깨어 홀연히 나를 따르고 있었다.
집집의 창을 통해 느껴져 오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따듯하게 느껴져 왔다. 간간히 희미한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는 불 켜진 창들도 있었다. 그들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뻗고 싶었다.
다신 안 그럴게요. 한 번만 용서해줘요, 네?
그러자 남편의 소리가 들려왔다.
“근본도 없는 기집 같으니라고, 애초부터 고아 따윌 상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
나는 자괴지심으로 화끈 달아오르는 뺨을 감싸 쥐며 주택가 골목길을 내달린다. 이차선 도로가 보이자 나는 쉬엄쉬엄 속도를 늦춘다. 불빛들이 모닥모닥 피어있는 차도가 뜻 모를 위안을 준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그러면서도 나는 쉬지 않고 내쳐 걷는다.
어디선가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들려온다. 이 밤이 새도록 그것은 이어질 것인가. 벌써 삼일 째다. 나는 기실 간밤에 방송국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푸른방에 가고 싶은 맘이 간절했지만 간밤에 만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어제도 그제도 방송국 주위를 서성였었다. 푸른 제복의 아저씨를 행여 만나기 위해 정안수를 떠 놓고 비는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방송국엘 갔었다. 하지만 나는 어제 등을 보이고 푸른 제복의 아저씨를 찾았다. 고아라는 것이 나는 왜 그리 부끄러운지 모른다. 만인 앞에 내 얼굴을 드러내고 피켓을 들고 있다는 건 상상하기 조차도 싫은 일이다. 치욕이랄 수도 있겠다. 어차피 푸른 제복의 그는 내 얼굴을 모를 것이다. 잘해야 어릴 때의 내 모습을 실루엣처럼 떠올리다가 놓치고 마는 순간의 그 느낌 정도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를 그렇게 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푸른 제복으로만 선연히 떠오를 뿐이다. 하얀 화폭에 한줄기 발라놓은, 물에 개지 않은 짙푸른 물감 같은 것으로 그는 떠오를 뿐이다.
“붉은 꽃이 만개한 장미덩굴이 기왓장을 얹은 토담을 타고 그 가지가 휘어지도록 뻗어가고 있었습니다. 마당 가운데엔 입을 벌린 콘크리트 관 같은 우물이 떡 서 있었으며 그 둘레로는 채송화와 봉숭아, 보랏빛의 난초 그리고 오랑캐꽃이 호랑나비 날개 같은 점박이 꽃을 하염없이 피워냈습니다.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그 계절을 종잡을 수는 없습니다.
흰빛으로 회칠을 한 바람벽을 따라 올라가면 꺼무스름한 기왓장을 얹은 지붕에 초록융단 같은 이끼가 끼어있고 풀포기도 바람결에 날아와 헤싱헤싱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 어미 새의 깃털 속 같이 따스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늘 섭이 긴 적삼을 단정히 입으시던 할머니는 자나 깨나 내 머리며 등짝을 쓸어 주었습니다.
그 나날들- 가끔 푸른 제복의 아저씨가 찾아왔습니다. 와서는, 와서는... “
간밤, 나는 울먹이느라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여자 아나운서가 따듯한 손길로 내 등을 토닥여주면서 다음 말을 기다려주었다. 그사이로 흘러간 가요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잔잔한 몸매에 빛나는 눈, 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그러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다음 말을 잇기는커녕 거센 물살 같은 감정에 떠밀리어 나는 흑흑 느껴 울기까지 했다. 철들면서부터는 누구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면 비루하도록 초라해 보일까봐, 고아라는 외로움 때문에 그런다는 눈총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것이 두려워 나는 절대로 울지를 못했었다. 아나운서가 내 다음 말을 대신해 주었다.
“ ...... 와서는- 가지가지 예쁘고 오밀조밀한 물건들을 내게 안겨주었습니다. 머리핀이며 머리방울, 양말, 타이즈, 운동화, 그 빨간 구두도 다 푸른 제복의 아저씨가 사다 준 거였습니다. 내 작은 몸에 입혀졌던 옷들도 그가 사다 준 거였습니다. 건빵이며 초콜릿 등등의 맛도 그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후, 그는 다신 오지 않았습니다. 내게 빨간 타이즈를 눈물로 안겨주고 돌아서 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사원으로 보내졌습니다. “
아나운서의 낭독이 다 끝이 났다.
누가 그 아일 모르시나요? 여섯 살의 추미애를...... 푸른 제복의 아저씨를......?
푸른 네온이 켜진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푸른방’ 그 푸른 글씨가 뇌수 속에 박힌 그 무엇처럼 선연하다. 나도 모른다. 애초에 여길 올 작정은 아니었다. 다만 내 황막한 어느 곳에서 솟아오른 붉은 불덩이 하나가 가슴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지는 해로 내 가슴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어디선가 화투짝 치는 소리 탁탁 들린다. 오예! 사광이다. 오예! 오강이다. 짜릿짜릿 전율이 온다, 발기하는 여자의 유두처럼.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쾌감 먼저 느낀다. 입안을 녹이는 박하사탕의 그 화한 맛이 느껴진다. 절정에 달한 섹스의 그 순간이 오래오래 지속되는 그 화한 상태가 뇌수를 하얗게 비운다. 나는 또 수 없는 양귀비꽃을 피워낼 것이다. 밤이 새도록 그 내음에 취해서 내 속의 저 깊은 심연을 위로 받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를 보는 여자들의 눈길이 가늘어진다. 남편의 눈길도 저랬다. 시댁붙이들의 눈길도, 어느 날부터인가 저랬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상대하려들지 않는다. 요새 탈탈 빈주머니로 이곳을 찾았었다. 근래 들어 남편이 모든 돈줄을 차단시킨 탓에. 그러자 처음엔 잔심부름을 해주고 고리를 뜯어 한판씩 끼워들기도 했지만 이젠 그 짓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이제 내가 목을 빼고 기다려도 고리 뜯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아무리 살랑거려도. 오불관언식이다. 아니 나는 그들에게서 나를 향한 냉소를 읽는다. 나는 편치 못한 자세로 앉는다.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치맛단을 밑으로 자꾸 끌어내린다. 그러고 내내 앉아 요요한 양귀비꽃을 피워내는 그들을 간절히 바라본다. 오에! 사광이다. 엣다, 오광이다. 손끝이 간질간질하다. 정수리도 간질거린다. 왼발 엄지발가락도 간질거린다. 아아, 가슴속의 것을, 이 지독한 것을 풀어내었으면...... 새벽녘이 돼서야 판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집을 떠올리자 내 속의 깊은 심연이 적막하게 들여다보인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현기증이 난다. 요 며칠, 하얀 밤을 보냈다.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에 출연하는 절차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동안 마음이 들떠있었던지,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던지 내내 뇌수의 그곳이 열려 있었다.
나는 느리게 그리고 이따금 어지러운 발짝 소리도 내며 어느 주택가 낯이 선 골목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나는 보았다. 그 주택가 골목길을 돌아 나오다 나는 보았다. 그 집을. 길을 잘못 들어 헤매던 그 골목길에서 나는 보았다. 꿈에 그리던 기와집을. 여섯 살적 그 기와집을. 붉은 장미꽃이 새벽이내에 거무스름하게 피어있는 담장을 나는 보았네.
일보이보, 나는 그 리듬에 맞춰 하늑하늑 다가간다. 훨훨 다가간다. 키 작은 대문이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세상에나 어쩜 마당 가운데 우물도 있네. 채송화, 봉숭아, 오랑캐꽃. 쏟아지는 달빛이 꽃 이름을 불러준다. 나는 대문을 흔든다. 누구 없어요? 어서 문 열어봐요! 나는 자꾸 대문을 흔든다. 이윽고 창안에서 불이 켜지고 희미한 그림자 일렁인다. 신발 끄는 소리 나다가 한 소리 들려온다. 이 밤에 누구 길래 대체......
“...... 뒤신데요?”
“저예요, 할머니, 저 미애예요! ”
“ ......?”
대문 열고 나오는 그이는 정말 내 여섯 살적 할머니였다.
“오오 할머니, 저 미애예요, 미애라구요!”
그러나 그인 저만큼 물러난다. 달려드는 나를 피해 뒷걸음질친다.
“가지 말아요, 할머니. 나랑 있어줘요......”
“나는 댁을 모른다우. 아마 집을 잘못 찾아들었나 보우.”
손사래 치는 그이가 야속해 나는 울먹인다. 주저앉는다. 안에서 식구들이 하나 둘 나온다.
“ 푸른 제복의 아저씬 어디 있지요 할머니?”
“ 할머니, 112를 부를까요? 저 여자 이런가 봐요.”
식구 하나가 불쑥 끼어들어 허공에 동그라미를 만들어 뱅글뱅글 돌린다.
“ 푸른 제복의 아저씬요 ?”
“ 할머니 무서워요!”
아아, 저 소리, 내가 하던 저 소리. 천사원에서 밤마다 내가 하던 저 소리. 그때 나는 날개 다친 어린 새였다. 둥지 밖으로 밀려난 어린 새는 밤마다 낯선 그곳에서 하염없이 몸을 떨었다. 나는 제물에 가위모양으로 가슴을 안는다. 파들파들 심장 뛰는 소리. 그 어린 것의 심장박동은 또 얼마나 가련했던가. 할머니, 무서워요. 할머니, 무서워요. 할머니 무서워요. 그 앤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비상 사이렌소리 들려온다. 요란한 나선무늬의 음파가 귓속까지 후비고 들어와 소용돌이친다. 강렬한 불빛이 눈을 찌른다. 손을 펴서 불빛을 막는다. 그러나 강렬한 햇살이 투영된 유리파편에서 되쏘는 그 산산이 부서지며 튀어 오르는 햇살의 반사 빛 마냥, 무수한 빛살의 쏘임이 멈추질 않는다. 목을 틀어 시선을 돌린다. 시야가 깜깜하다. 먹지로 눈을 가린 것 같다.
" 이 분입니까? “
남자가 손전등을 거두고 뚜벅뚜벅 걸어온다. 와서는 내 등을 토닥인다.
“아주머니 꼭두새벽에 웬일이세요?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댁이 어디시죠?”
“.........”
나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집을 모르세요? 잊어버리셨어요?”
“ 붉은 꽃이 만개한 장미덩굴이 담장을 타고 그 가지가 휘어지도록 뻗어가고 있었습니다. 마당가운데엔 콘크리트 관 같은 우물이 떡 서 있었으며 흰빛으로 회칠한 바람벽을 따라 올라가면...”
“아주머니...”
예의 그 목소리가 나를 흔든다.
“정신 차리세요.”
억센 손길이 내 어깨를 잡아 흔든다.
“그 집이에요, 여기 내 집이 있어요......”
나는 한바퀴 휙 돌고는 오른손 검지를 세운다.
“보세요. 저 기와지붕, 우물, 담장의 붉는 장미를요. 나는 25년 동안이나 그 집을 찾아 헤맸어요. 하지만 아직도 푸른 제복의 아저씬 만나지 못했어요. 보고 싶어요. 그가 그리워요. 미치도록 그리워요. 그는 어디 있을까요? 그는 어디에 있을까요......”
등 뒤에서 예의 그 손길이 어깨를 반짝 들어 잡는다. 그러고 나를 어디론가 앞세운다. 경광등이 켜진 차 뒷문을 열고 그 안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도 따라들어 온다. 내 옆에 앉는다. 운전석의 남자가 나를 힐금거린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지금 내 자신을 추스릴 수가 없다. 누가 내 등을 떠밀면 그대로 밀려 어디론가 흘러가버리고 말 것만 같다. 정신은 그런대로 말짱한데 제어 능력이 터럭만큼도 없는 것 같다. 나는 파출소를 거쳐서 경찰서로 인계되었다. 거기서는 남편얼굴이 보였다가 말았다가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다음날 나는 하얀 집으로 옮겨졌다. 지붕이 없는 하얀 회칠을 한 콘크리트 집이었다. 하얀 가운의 사람들이 간간히 보였고 침상에는 여러 여자들이 누워있거나 앉아있거나 울거나 웃거나, 쫑알쫑알 거리고 있었고 특이하게도 빨간 구두를 부여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여자도 있었다. 아가, 우리 아가 ,금자동아 , 은자동아,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 등을 토닥여준다. 머리도 쓸어준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나를 돌아본다. 빨간 구두를 내민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내 자리로 사뿐히 돌아온다.
신애야, 이 보렴 빨간 구두란다. 네가 우물 속에 빠트렸던 그 빨간 구두란다. 이제야 우물 속서 네 넋을 건진 거야. 미안해, 정말...... 나는 빨간 구두를 가슴에 꼬옥 모두어 안는다. 나는 애틋이 신애의 체취를 맡는다. 어린 추미애의 체취도 헤아려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도리질을 한다. 미치겠어, 그렇게 밖에 너를 사랑하지 못한 게 . 자장자장 우리아가, 금자동아 은자동아, 자장자장 우리아가,
나는 살금살금 하얀집을 나온다. 품안에 빨간 구두를 안고. 하얀집은 한적한 숲 속에 있었다. 나는 길을 따라 자꾸자꾸 걷는다. 달빛 따라 걷는다. 푸르스름한 새벽이내가 보일 때야 나는 그 집 앞에 당도한다. 문은 잠겨있다. 나는 말없이 그 집 안을 들여다보다가 대문 앞에 자리를 잡고 길게 눕는다. 빨간 구두를 품에 안고 바로 눕는다. 이렇게 누워본지가 언제 적인지 모른다. 달빛이 아직 스러지지도 않았고 별들도 아직 스러지지 않은 새벽하늘 아래서 나는 스르르 잠이 든다. 깊고 깊은 층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든다. 언제였는지 모른다. 이렇게 누워본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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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풍림아파트 106동 1305호 011-778-7721 고선례 (피토피아 신인상 소설부분 응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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