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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아-단편소설1(2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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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나비에게
1997년의 봄. K는 그 봄날 내내 멍했다.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잊은 듯 머리에 나사가 늘 한 두 개정도 빠져있는 기분이었다. 눈만 감으면 몽상에 빠져들었고, 그 달콤하던 몽상은 결국 눈물과 아픔으로 끝났다. 현실은 언제 베일 지 모르는 날카로운 칼끝을 손가락에 바짝 들이대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우리는 항상 상처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너무 쉽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1. 달콤한 대추 절임
종이 울리자 교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북새통 속에서 조용하게 도시락을 꺼내는 아이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J였다. J가 사각의 은색 철 도시락을 책상 위에 탁 소리나게 놓는 순간, 그녀의 자리와 약 250cm가량 떨어진 자리에 앉아있던 K의 시선은 섬광처럼 그 도시락으로 달려가 꽂혔다.
J는 무심한 표정으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여 도시락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그녀가 도시락 뚜껑에 손을 댄 순간부터 K는 벌떡 일어나 질풍 같은 속도로 달려, 도시락 뚜껑이 완전히 열렸을 때쯤엔 J의 바로 앞에 착지해 있었다. 옅은 먼지바람이 휙 일었지만 워낙 어지럽게 떠드는 아이들 속에서는 티도 나지 않았다.
마침내 J가 반짝이는 철제 도시락의 뚜껑을 툭 하고 내려놓자, 하얀 밥알들이 직사각형으로 빼곡이 들어차 가지런히 미소짓는 가운데 새빨간 대추알이 정 중앙에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K는 젓가락을 섬광과 같은 속도로 놀려, 그 대추알을 정확히 단번에 찍어 입 속에 쏙 하고 집어넣었다. 순간 K의 입 속에는 달짝지근하고 향긋한 대추알의 매끈거리는 껍질이 혀를 통해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눈 속 눈물샘에서 약간의 물이 고이자, 대뇌는 재빠르게 공상을 시작하였다.
K는 어느새 조금은 차가운 초 봄 눈이 드문드문 덮여있는 마당 한 구석에 단발의 생 머리가 꼿꼿한, 콧물을 훌쩍이는 어린아이가 되어 누군가에게 안겨있었다.
- 할머니. 뭐 하는 거야?
- 나무를 심는 거란다.
품안은 단단하면서도 따뜻했다. 할머니는 몸을 숙여 막 파낸 조그만 흙구덩이에 씨를 넣고는 다시 삽으로 잘 다듬었다. 안겨있던 K는 품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구덩이를 자근자근 밟으며 원을 그리면서 폴짝폴짝 뛰었다. K가 혀 안에서 굴리던 대추알을 마침내 씹는 순간, 꿀과 섞인 달콤한 과즙이 배어 나오면서 구덩이 속에 들어있던 씨앗들이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수십 번의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햇빛이 내리쬐는 동안에도 그녀는 씨앗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녀 역시 씨앗처럼 쑥쑥 자라고 있었다. K가 대추를 씹는 동안 어느새 씨앗은 땅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그늘을 드리우며 그녀를 굽어보는 커다란 나무로 변해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고 뛰기를 멈추었다. K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세상이 옆으로 휙휙 돌고 어느새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땅에 누워 한참동안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고 나자 비로소 눈을 뜰 수가 있었다.
눈을 뜨자 그녀는 J의 책상 앞에서 대추를 씹던 입을 헤 하고 벌리고 멍청하게 서 있는 채였다. J는 그런 K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도시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나른한 손동작으로 젓가락질을 하면서 중간이 옴폭 들어간 덩어리진 밥을 조금씩 부수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K는 입안의 것들을 꿀꺽 삼키고는 자신의 자리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도시락을 들고 비어있는 J의 옆자리에 앉았다. 뚜껑을 열자 신 김치 냄새와 느글대는 스팸의 기름냄새가 얼굴을 확 끼쳤다. J는 K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말없이 네모난 스팸을 한 조각 집어 맨 밥에 얹어 입안에 넣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그 한 가운데 그녀들만이 조용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2. 오후의 티타임
점심시간을 마치는 종이 울려도 K가 J의 옆자리에서 움직일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자, J의 짝은 그녀에게 몇 번 투덜거리더니 K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감자라는 별명을 가진 수학선생이 들어왔다. 수학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 중 하나였다. 졸린 눈으로 칠판을 바라보고 있자니 글자가 스물스물 움직이며 다가와 눈꺼풀을 간질였다. 마치 잔잔한 바람이 부는 강가에 있는 키 작은 버드나무 가지 아래 두 눈을 감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팔을 툭 치는 기분이 들었지만 K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나무 아래에 계속 서 있으려니 온 몸이 흐물흐물 녹아 내릴 것 같았다. 몸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침이 한 방울 책 위에 똑 하고 떨어졌다. 글자가 푸른색으로 번졌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것은 네모나게 접은 쪽지 한 장이었다.
‘화장실로 와.’
K는 의자를 살그머니 빼고는 허리를 숙여 조심조심 교실을 걸어나갔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수면제 병 속에서 헤엄치는 꼴이었다. 뒤에는 자리를 깔고 자고 있는 아이들도 있어서 그들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고개를 들어 선생을 보니 그는 무한개념에 대해서 밑도 끝도 없이 지루한 설명을 해대고 있었다. 복도로 나오자 약한 꽃향기를 머금은 봄바람이 살랑 머리를 스쳤다. 기분이 좋았다. 꽃향기가 점점 오줌냄새로 바뀌고 K는 마침내 화장실이 있는 통로에 이르렀다. 화장실을 지나 세면대로 가자, 햇살 속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단발머리가 찰랑 하고 흔들리며 고개를 휙 돌리자 K는 비로소 그 소녀가 J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K의 손을 잡고는 세면대 끝에 있는 철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치마 주머니에서 머리핀을 꺼내 열쇠구멍에 넣고 몇 번을 돌리고는 천천히 커다란 철문을 열었다. 문은 낮게 비명을 지르듯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햇살, 바람이 두 소녀의 동그스름한 얼굴로 가득 쏟아졌다. K의 눈은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졌다.
- 이런 곳이 다 있었구나!
J는 씩 웃으며 파릇파릇한 낮은 풀들이 무성한 땅으로 발을 내딛었다.
- 나만의 비밀 장소지.
K역시 그녀의 손에 이끌려 풀들을 밟았다. 그곳은 온통 오후의 무르익은 햇살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봄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작은 들판이었다. 싱그러운 냄새가 공기 속에 떠다녔다. K가 들판을 뛰어다니다가 토끼풀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서 반지를 만들려고 몸을 굽히는 순간, 갑자기 몸이 휘청하면서 땅이 높이 들리더니 솟구치기 시작했다. K는 순식간에 튕겨진 듯 곧게 펴진 몸으로 경사진 길을 마구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서운 기분이 들기보다는 몹시 즐거웠다. 두꺼운 박스를 타고 경사진 잔디 위를 질주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땀구멍에서 땀이 송글송글 솟아나고 숨이 턱까지 차 오를 무렵, 이제 그만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그녀는 무언가가 발을 쑥 잡아당기는 바람에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K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녀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땅 속은 생각보다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리고 깨끗하고 넓었다. K는 빨간 체크무늬 천이 씌워진 작은 티 테이블 앞의 나무흔들의자에 앉아있었다. 카라멜 냄새가 났다. 나지막하게 물 끓는 소리도 들려왔다. 의자를 조금씩 흔들대면서 주위를 둘러보자 앞치마를 두른 토끼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람 만한 토끼였다. 그녀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 하자, 토끼는 웃으며 K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놀라지 말아요.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요. 지금은 오후의 티타임이랍니다.
토끼는 가스레인지에서 꽃무늬가 그려진 작은 주전자를 내려와 테이블 위의 받침에 놓았다. 그리고는 찬장에서 역시 같은 꽃무늬가 그려진 하얀 찻잔과 받침대를 두 개 꺼내 그녀와 자신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서 홍차 티백 두 개를 주전자 안에 넣고 찬장으로 깡충거리며 돌아가 각설탕과 크림을 꺼내고, 오븐에서 갓 구운 쿠키들을 내어 접시에 담아서는 다시 테이블로 왔다. 토끼는 앞치마를 벗고는 느긋한 자세로 맞은 편의 흔들의자에 앉았다. 이번에도 소리 없이 토끼는 K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 사양 말고 천천히 맘껏 들어요. 오후는 길어요.
토끼가 왔다갔다하는 것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의자에 붙박인 듯 말없이 앉아있던 K는 그때서야 약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홍차를 마셨다. 쌉쌀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기분 좋게 따뜻하고 아주 맛있었다. 쿠키를 하나 집어 입안에 넣었다. 버터와 우유, 땅콩의 맛이 한데 어우러져 부드럽게 씹히는 가운데 은은한 바닐라향이 났다. 그녀는 쿠키를 하나 더 집으려고 접시에 손을 뻗다가 누군가의 손과 부딪혔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J가 역시 찻잔을 들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 아야!
K는 팔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캔 홍차였다. J가 그녀에게 던진 것이다. 그녀의 손은 아직도 토끼풀을 잡고 뽑으려 하고 있었다. K는 문득 홍차를 끓여주던 토끼가 생각나 그 풀을 슬그머니 놓았다. 그리고는 캔을 따서 홍차를 물 마시듯 벌컥벌컥 마시고는 들판 어딘가 휙 던져버렸다. J가 철문 밖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얼른 달려갔다. 철문은 다시 끼익 하고 닫혔다.
3. 우리의 소원은
K는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어두운 거리와 네온사인 아래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우두커니 서 있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K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J였다. 그녀에게서는 특유의 향냄새가 났다. 향수냄새가 아닌 절에서 피우는 향의 냄새. 그런 것이었다. 사람이 자신만의 향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것 같다. 특히 기분 좋은 향기를 가진 사람은 왠지 그 사람마저 좋은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K의 옆에 나란히 선 그녀는 가만히 말했다.
- 강을 보러가지 않을래?
K는 좋다고 했다.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어느새 J는 하얗게 빛나는 자전거를 옆에 끌고 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넓은 16차선 도로 위에는 그날 따라 차가 별로 많지 않았다. J는 자전거를 잘 몰았다. 그들은 도로 가장자리로 신나게 달렸다. 밤 공기가 약간 차가우면서도 시원했다. 강변에 도착하자 추울 정도였다. 자전거를 풀밭에 던져두고 J와 K는 강으로 다가갔다. 강은 건너편의 빌딩들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반짝반짝 비쳐서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듯 했다. K가 가만히 서서 그 반짝임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J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풀밭에 서서 K에게 이리오라고 손짓했다.
- 이것 봐. 누가 깜빡 잊고 놔두고 갔나봐.
그것은 폭죽들이었다. 특이한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생일케이크에 딸려 있는 폭죽이 아니라, 금박으로 먼 나라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여러 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새빨간 꾸러미의 폭죽들이라는 것이었다.
- 어떻게 터뜨리는 거지?
K가 호기심에 가득한 표정으로 꾸러미의 작은 폭죽마다 달려 있는 끈들 중 하나를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펑 하는 가벼운 폭발음과 함께 작은 종이 조각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간절히 빌어보세요. 이루어집니다.’
K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한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작은 폭죽 몇 개가 저절로 터지더니 나무 조각들을 토해냈다. 그녀가 가만히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조각들은 저절로 움직여 한데 모여서 유선형의 미끈한 배 한 척을 이루었다. K는 놀라움에 휩싸여 배 위에 발 한 짝을 가만히 넣어보았다. 그러자 배는 꿈틀대더니 놀라운 속도로 잔디를 스치며 휙휙 날았다. K는 얼떨결에 나머지 발도 배 안에 넣었다. 그러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날아 강물 속으로 돌진했다.
놀이공원에서 그녀가 즐겨 타는 기구들처럼 물에 흠뻑 젖을 것이라 생각한 K는 눈을 꼭 감았다. 몇 분이 지났는데도 잔잔한 물소리만이 들려올 뿐, 물을 흠뻑 뒤집어써서 몸이 차가워질 것이란 생각과 달리 따뜻한 습기가 점점 주위를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K가 눈을 살며시 뜨자 풍경과 함께 시끌벅적한 이국의 언어가 들려왔다. 습기 찬 초록빛 물 속에 배들이 천천히 흘러 떠다니고, 주위에 자욱한 안개 속에 드문드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그녀의 눈앞에 커다란 보아 뱀을 갖다대어 흠칫 놀라기도 했다. 보아 뱀이 어떤 것인지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왠지 맞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인가 푸드득 하고 머리를 스치고 날아가는 것은 선사시대의 익룡이었다. 오색으로 빛나는 비단의 빛깔이 눈을 자극하며 쓱 몸을 훑고 지나가기도 했고, 구수한 고기국물 냄새와 국수 삶는 냄새, 새콤달콤한 진물이 흐르는 과일의 향기와 매운 향신료의 톡 쏘는 냄새, 제례의식에 쓰이는 찰그락 대는 악기의 소리 등이 온통 뒤섞여 K의 눈과 귀와 코와 온 몸에 스며들었다. 천천히 흘러가는 배에 몸을 맡기고 몸을 바닥에 누이고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소리들이 점점 작아져 결국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고요한 가운데 볼이 간지러웠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풀잎으로 그녀의 볼을 간질거리던 J는 깔깔대며 K의 얼굴에다 대고 폭죽다발을 터뜨렸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K는 풀밭에 픽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아스팔트 바닥에 옆으로 누워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나고 몸에 눌린 왼쪽 팔이 아파 왔다. 눈을 뜨자 사람들이 동그란 원을 그리고 자신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원 안에 별이 총총히 뜬 밤하늘이 보였다. K가 일어서려고 몸을 뒤척이자 사람들은 우우 물러났다. 그녀는 교복을 털고 조용히 일어서서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근심스러운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학생. 괜찮아?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 곧 빨간 불인데 건너면 어떡해. 자. 이상 있으면 이리로 연락해. 응?
남자는 K의 손에 명함과 만 원권 두 장을 밀어 넣으며 불안한 미소를 지었다. K는 그 손을 거절하며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 괜찮아요.
구름을 밟는 듯 정신없이 걸어서 집에 간신히 도착하자, 문을 열어준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다. 멍하니 서 있는 K의 눈앞에 어머니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부산하게 왔다갔다하고, 아버지가 황급히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광경이 거울처럼 비쳤다. K는 이마에 뭔가 끈적거리는 것을 느끼고 손을 들어 쓱 닦았다. 거울에 비친 것은 새빨간 피였다. 세상이 핑그르르 돌았다.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것이 점점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동시에 J의 웃음 띤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 우리의 소원은 수상시장에 가보는 것이었어.
박 선생은 교무실 안의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하여, 그 앞에 놓인 하얗고 두꺼운 캔버스 지가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종이 다발은 검은 끈으로 묶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검은 교복을 입은 파리하고 무표정한 한 소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몇 줄의 검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듯이 보임. 늘 책을 읽고 있음. 좀 더 나이에 맞는 활동성을 요함.’
박 선생은 갓 대학을 졸업한 신출내기 교사였다. 그런 만큼 의욕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매일 설렘과 의욕을 가지고 자신이 처음으로 맡게 된 학급의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럭저럭 활기에 차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다소 까불거나 다소 사춘기의 내숭이 남아 있거나 차이일 뿐, 대개의 아이들이 비슷비슷한 그 또래의 발랄함을 지니고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40여명의 아이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아이의 사진을 그는 지금 앞에 두고 살펴보고 있다. 박 선생이 처음으로 학급에 들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수십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들과 한꺼번에 마주치게 된 당황되고 벅찬 순간에도 그 아이만은 고개를 숙이고 책상 앞에 펼쳐진 책을 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담당인 문학수업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는 늘 무슨 책인가를 보고 있었다. 박 선생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 책들 때문이었다. 그도 역시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가 할리퀸 로맨스라든지 쓸데없는 쓰레기 같은 책들을 읽고 있으면 얼른 그것을 압수할 작정으로 무슨 책을 읽고 있는 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책들은 대개 얇은 문고판 책이었지만, 때로는 동화책이거나 두껍고 좁은 여행가이드일 때도 있었다. 나쁜 책들은 아니었다. 로맨스는 더더구나 아니었다.
며칠 전 박 선생이 그 아이의 책장을 슬쩍 넘겨다보았을 때의 책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모모’와 ‘오즈의 마법사’ 다음으로 그녀의 책상에 놓여진 책이었다. 물론 책들은 좋은 것이었지만 그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아직 첫 시험의 성적이 나오진 않았지만 이대로는 아이가 학습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 학습 의욕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전에는 태국의 여행안내책자를 유심히 읽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박 선생은 아이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늘 책 속에 코를 박고 있는 그녀를 방해해서 무언가를 취조해 내기도 싫었다. 그는 아직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신출내기 교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은 아이의 부모와 면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 그녀의 어머니가 교무실로 찾아오기로 되어있었다.
4. J이야기
K는 희미한 회색의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어둠 속에 발이 빠지는 듯 무거운 걸음걸이로 하염없이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멀리서 조그만 빛이 보였다. 그 빛은 점점 그녀에게로 다가오면서 커졌다. K는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렸다. 가느다랗게 뜬 눈 사이로 신비한 푸른빛의 옷을 입은 J의 모습이 보였다. J는 웃으며 K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한참을 그렇게 나란히 어둠 속을 걸어가는 동안 주위의 풍경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 그때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어요...
싸늘하던 공기가 훈훈하게 변하고 그들은 어느새 따뜻한 아랫목에서 뜨거운 군고구마를 손에 쥐었다 놓았다 호호 불며 깔깔대고 웃고 있었다. K의 눈에 비친 J는 작은아이로 보였다. 그 아이는 밝은 갈색 머리를 양옆으로 묶고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책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정신없이 웃어대고 있었다. 그 책은 어린 소녀가 소풍을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상한 나라로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늘 웃고 있는 고양이가 나오는 대목에서 그들은 정신없이 방안을 뒹굴면서 눈물을 흘릴 때까지 웃고 또 웃었다. 그림 속에 그려진 고양이의 웃는 모습이 너무나 익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웃고 나자 K는 다시 책을 집어들고는 J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J는 고인 눈물을 닦아내고는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 ... 사정이 어려워서 우리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만 하던 때였어요.
따뜻하던 공기는 다시 서늘하게 변했다. 그들은 매미가 우는 커다란 나무 그늘아래의 평상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할머니가 새빨갛게 잘 익은 수박을 가져다주었다. K는 수박을 한 입 베어 물며, 할머니에게 엉겨붙기 시작하는 J에게 속삭였다. 지금 여기보다 더 더운 곳이 있대. 거기는 지금 두 배로 더 덥대. 우리가 그 곳에 간다면 당장 더위 때문에 숨이 턱 하고 막혀 버릴 거야. K가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쥐고 혀를 빼물고는 켁켁대는 시늉을 하자, J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K는 수박을 한 입 더 베어 물고는 평상 저 편에 던져져 있던 책을 집어들고 잠시 읽더니, 다시 J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더워서 물위에 집을 짓고 산대. 뭔가 필요할 때는 배를 타고 시장을 보러간대. 그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먹고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시장에 나오는 물건들도 가지각색이래. K는 J에게 바짝 다가가서는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커다란 뱀들이랑 무서운 아프리카의 동물들에서부터. 그러더니 J에게 약간 떨어져서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달콤하고 향긋한 과일들과 산해진미란 것이 수북하게 쌓여있대. J의 눈이 K와 동시에 마주쳤다. 눈에서 기쁨이 반짝이며 피어올랐다. 그들은 동시에 외쳤다. 와! 한 번 가보고 싶다.
- 위험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 사실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래저래 생각한 끝에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연락을 드렸어요...
풍경은 또 스르륵 바뀌어 따스한 햇살이 K의 갈색 머리를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해가 막 지려는 듯이 마지막 남은 햇빛을 모두 토해내려고 애쓰는 동안, 그녀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J와 함께 누워있던 나무 아래였다. K는 소리를 질렀다. 어서 내려와. 점점 가슴이 뛰었다. 쿵쿵. 어서 내려오라니까. 심장 박동 소리가 계속 빨라졌다. 쿵쿵쿵. 나무 위에서 양 갈래로 쫑쫑 땋은 머리를 늘어뜨리며 애쓰고 있는 소녀는 K의 마음을 모르는 지 계속 꾸물대며 뭔가를 따내려고 하고 있었다. 자꾸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쿵쿵쿵쿵. K는 이제 부들부들 떨며 마구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서 내려오라니까! 나무 위의 소녀는 보이지 않고 대신 밝은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이제 거의 다 됐어. 세 개나 땄는걸. 어어... 곧 이어 퍽 하는 소리가 들리고 찢어지는 듯한 여자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K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두 귀를 양손으로 감싸쥐고 토할 듯이 웩웩거렸다.
- ...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막 퇴근을 하고 샤워를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어요. 끈질기게 울리더군요... 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모... 몹시... 흐... 전화를 받았어요... 어머니시더군요. 더욱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식은땀이 흐르더군요... 흑...
K의 머리에 정지된 화면들이 펑펑 소리를 내며 스틸사진처럼 휙휙 스쳐지나갔다. 담 너머로 급히 달려나가는 할머니의 모습. 깨어진 유리파편이 가득한 가운데 J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모습. 마침 파편이 든 수레를 몰고 가던 고철장수 아저씨의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 전화기를 열심히 돌리는 할아버지. 요란한 앰뷸런스의 붉고 푸른 등. 새하얀 천으로 덮인 J의 시신.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검은 양복을 입고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상자에 든 가루를 뿌리는 부모님들의 모습. 거대한 울음소리. 그리고 침묵. 끝없는 어둠.
- ...한 동안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알아듣지 못했어요. 외... 외계의 말처럼 들렸어요... 흐... 흑... 흑흑... 자...작은아이가 주...죽었다고...
K가 헛구역질을 하며 온 몸을 뒤틀자 누군가 그녀의 배를 눌렀다. K가 눈을 뜨자 눈동자 속에 고여있던 눈물이 한 줄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몹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K는 오래 전에도 이런 구도에서 누군가와 마주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그녀가 서 있는 채였지만 말이다. 앰뷸런스가 멈추자 차 문이 열리고 들것이 들렸다. 응급실로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부모님들의 따스한 손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앉았다. 양 손 모두 불가사의한 힘으로 K의 몸에 따스한 활력과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손은 그녀의 오른손에서 겹쳐진 채였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J가 환하게 미소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K는 끝없이 편안한 마음이 되어 눈을 감았다. 이제 모두 알 듯 했다. 봄날 내내 나를 괴롭히던 사실을. 긴장이 탁 하고 풀리자 스르르 잠이 왔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날, 할머니가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 속에 붉은 대추씨를 심던 날. K는 차가운 겨울 햇살이 뿌려진 마당에서 마냥 찧고 까불며 그 씨앗이 묻힌 구덩이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박수를 치며. 깔깔 웃으며. J 역시 K와 함께 박수를 치고 웃으며 원을 그리면서 나풀나풀 뛰어다니고 있었다. K가 점점 커가고 나무도 쑥쑥 커 가는 동안 J는 고치에 갇혀 수많은 봄과 가을, 여름과 겨울을 나고 십 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하얀 날개를 팔랑이는 나비가 되어 K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떠나갔다. 그녀는 이렇게 따뜻한 봄날을 기다렸을지도 몰라. 따뜻하고도 눈물이 나는 봄날을.
지금 K는 병실의 침대에 베개를 괴고 앉아서 병 문안을 온 담임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박 선생은 아이의 얼굴에 드리워져있던 그늘이 옅어진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 선생님. 저길 보세요. 나비예요.
박 선생이 고개를 돌리자, 창가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던 새하얀 나비는 이내 눈부신 햇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K는 조용히 쓴웃음을 지으며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 J는 내 동생이었어.
성명 : 김설아
성별 : 여자
연령 : 24세
주소 :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현대한누리 103-507
e메일: bbosasi80@hanmail.net
전화 : 011-839-3088
1997년의 봄. K는 그 봄날 내내 멍했다.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잊은 듯 머리에 나사가 늘 한 두 개정도 빠져있는 기분이었다. 눈만 감으면 몽상에 빠져들었고, 그 달콤하던 몽상은 결국 눈물과 아픔으로 끝났다. 현실은 언제 베일 지 모르는 날카로운 칼끝을 손가락에 바짝 들이대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우리는 항상 상처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너무 쉽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1. 달콤한 대추 절임
종이 울리자 교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북새통 속에서 조용하게 도시락을 꺼내는 아이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J였다. J가 사각의 은색 철 도시락을 책상 위에 탁 소리나게 놓는 순간, 그녀의 자리와 약 250cm가량 떨어진 자리에 앉아있던 K의 시선은 섬광처럼 그 도시락으로 달려가 꽂혔다.
J는 무심한 표정으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여 도시락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그녀가 도시락 뚜껑에 손을 댄 순간부터 K는 벌떡 일어나 질풍 같은 속도로 달려, 도시락 뚜껑이 완전히 열렸을 때쯤엔 J의 바로 앞에 착지해 있었다. 옅은 먼지바람이 휙 일었지만 워낙 어지럽게 떠드는 아이들 속에서는 티도 나지 않았다.
마침내 J가 반짝이는 철제 도시락의 뚜껑을 툭 하고 내려놓자, 하얀 밥알들이 직사각형으로 빼곡이 들어차 가지런히 미소짓는 가운데 새빨간 대추알이 정 중앙에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K는 젓가락을 섬광과 같은 속도로 놀려, 그 대추알을 정확히 단번에 찍어 입 속에 쏙 하고 집어넣었다. 순간 K의 입 속에는 달짝지근하고 향긋한 대추알의 매끈거리는 껍질이 혀를 통해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눈 속 눈물샘에서 약간의 물이 고이자, 대뇌는 재빠르게 공상을 시작하였다.
K는 어느새 조금은 차가운 초 봄 눈이 드문드문 덮여있는 마당 한 구석에 단발의 생 머리가 꼿꼿한, 콧물을 훌쩍이는 어린아이가 되어 누군가에게 안겨있었다.
- 할머니. 뭐 하는 거야?
- 나무를 심는 거란다.
품안은 단단하면서도 따뜻했다. 할머니는 몸을 숙여 막 파낸 조그만 흙구덩이에 씨를 넣고는 다시 삽으로 잘 다듬었다. 안겨있던 K는 품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구덩이를 자근자근 밟으며 원을 그리면서 폴짝폴짝 뛰었다. K가 혀 안에서 굴리던 대추알을 마침내 씹는 순간, 꿀과 섞인 달콤한 과즙이 배어 나오면서 구덩이 속에 들어있던 씨앗들이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수십 번의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햇빛이 내리쬐는 동안에도 그녀는 씨앗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녀 역시 씨앗처럼 쑥쑥 자라고 있었다. K가 대추를 씹는 동안 어느새 씨앗은 땅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그늘을 드리우며 그녀를 굽어보는 커다란 나무로 변해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고 뛰기를 멈추었다. K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세상이 옆으로 휙휙 돌고 어느새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땅에 누워 한참동안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고 나자 비로소 눈을 뜰 수가 있었다.
눈을 뜨자 그녀는 J의 책상 앞에서 대추를 씹던 입을 헤 하고 벌리고 멍청하게 서 있는 채였다. J는 그런 K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도시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나른한 손동작으로 젓가락질을 하면서 중간이 옴폭 들어간 덩어리진 밥을 조금씩 부수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K는 입안의 것들을 꿀꺽 삼키고는 자신의 자리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도시락을 들고 비어있는 J의 옆자리에 앉았다. 뚜껑을 열자 신 김치 냄새와 느글대는 스팸의 기름냄새가 얼굴을 확 끼쳤다. J는 K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말없이 네모난 스팸을 한 조각 집어 맨 밥에 얹어 입안에 넣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그 한 가운데 그녀들만이 조용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2. 오후의 티타임
점심시간을 마치는 종이 울려도 K가 J의 옆자리에서 움직일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자, J의 짝은 그녀에게 몇 번 투덜거리더니 K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감자라는 별명을 가진 수학선생이 들어왔다. 수학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 중 하나였다. 졸린 눈으로 칠판을 바라보고 있자니 글자가 스물스물 움직이며 다가와 눈꺼풀을 간질였다. 마치 잔잔한 바람이 부는 강가에 있는 키 작은 버드나무 가지 아래 두 눈을 감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팔을 툭 치는 기분이 들었지만 K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나무 아래에 계속 서 있으려니 온 몸이 흐물흐물 녹아 내릴 것 같았다. 몸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침이 한 방울 책 위에 똑 하고 떨어졌다. 글자가 푸른색으로 번졌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것은 네모나게 접은 쪽지 한 장이었다.
‘화장실로 와.’
K는 의자를 살그머니 빼고는 허리를 숙여 조심조심 교실을 걸어나갔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수면제 병 속에서 헤엄치는 꼴이었다. 뒤에는 자리를 깔고 자고 있는 아이들도 있어서 그들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고개를 들어 선생을 보니 그는 무한개념에 대해서 밑도 끝도 없이 지루한 설명을 해대고 있었다. 복도로 나오자 약한 꽃향기를 머금은 봄바람이 살랑 머리를 스쳤다. 기분이 좋았다. 꽃향기가 점점 오줌냄새로 바뀌고 K는 마침내 화장실이 있는 통로에 이르렀다. 화장실을 지나 세면대로 가자, 햇살 속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단발머리가 찰랑 하고 흔들리며 고개를 휙 돌리자 K는 비로소 그 소녀가 J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K의 손을 잡고는 세면대 끝에 있는 철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치마 주머니에서 머리핀을 꺼내 열쇠구멍에 넣고 몇 번을 돌리고는 천천히 커다란 철문을 열었다. 문은 낮게 비명을 지르듯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햇살, 바람이 두 소녀의 동그스름한 얼굴로 가득 쏟아졌다. K의 눈은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졌다.
- 이런 곳이 다 있었구나!
J는 씩 웃으며 파릇파릇한 낮은 풀들이 무성한 땅으로 발을 내딛었다.
- 나만의 비밀 장소지.
K역시 그녀의 손에 이끌려 풀들을 밟았다. 그곳은 온통 오후의 무르익은 햇살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봄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작은 들판이었다. 싱그러운 냄새가 공기 속에 떠다녔다. K가 들판을 뛰어다니다가 토끼풀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서 반지를 만들려고 몸을 굽히는 순간, 갑자기 몸이 휘청하면서 땅이 높이 들리더니 솟구치기 시작했다. K는 순식간에 튕겨진 듯 곧게 펴진 몸으로 경사진 길을 마구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서운 기분이 들기보다는 몹시 즐거웠다. 두꺼운 박스를 타고 경사진 잔디 위를 질주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땀구멍에서 땀이 송글송글 솟아나고 숨이 턱까지 차 오를 무렵, 이제 그만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그녀는 무언가가 발을 쑥 잡아당기는 바람에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K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녀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땅 속은 생각보다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리고 깨끗하고 넓었다. K는 빨간 체크무늬 천이 씌워진 작은 티 테이블 앞의 나무흔들의자에 앉아있었다. 카라멜 냄새가 났다. 나지막하게 물 끓는 소리도 들려왔다. 의자를 조금씩 흔들대면서 주위를 둘러보자 앞치마를 두른 토끼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람 만한 토끼였다. 그녀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 하자, 토끼는 웃으며 K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놀라지 말아요.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요. 지금은 오후의 티타임이랍니다.
토끼는 가스레인지에서 꽃무늬가 그려진 작은 주전자를 내려와 테이블 위의 받침에 놓았다. 그리고는 찬장에서 역시 같은 꽃무늬가 그려진 하얀 찻잔과 받침대를 두 개 꺼내 그녀와 자신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서 홍차 티백 두 개를 주전자 안에 넣고 찬장으로 깡충거리며 돌아가 각설탕과 크림을 꺼내고, 오븐에서 갓 구운 쿠키들을 내어 접시에 담아서는 다시 테이블로 왔다. 토끼는 앞치마를 벗고는 느긋한 자세로 맞은 편의 흔들의자에 앉았다. 이번에도 소리 없이 토끼는 K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 사양 말고 천천히 맘껏 들어요. 오후는 길어요.
토끼가 왔다갔다하는 것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의자에 붙박인 듯 말없이 앉아있던 K는 그때서야 약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홍차를 마셨다. 쌉쌀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기분 좋게 따뜻하고 아주 맛있었다. 쿠키를 하나 집어 입안에 넣었다. 버터와 우유, 땅콩의 맛이 한데 어우러져 부드럽게 씹히는 가운데 은은한 바닐라향이 났다. 그녀는 쿠키를 하나 더 집으려고 접시에 손을 뻗다가 누군가의 손과 부딪혔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J가 역시 찻잔을 들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 아야!
K는 팔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캔 홍차였다. J가 그녀에게 던진 것이다. 그녀의 손은 아직도 토끼풀을 잡고 뽑으려 하고 있었다. K는 문득 홍차를 끓여주던 토끼가 생각나 그 풀을 슬그머니 놓았다. 그리고는 캔을 따서 홍차를 물 마시듯 벌컥벌컥 마시고는 들판 어딘가 휙 던져버렸다. J가 철문 밖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얼른 달려갔다. 철문은 다시 끼익 하고 닫혔다.
3. 우리의 소원은
K는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어두운 거리와 네온사인 아래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우두커니 서 있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K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J였다. 그녀에게서는 특유의 향냄새가 났다. 향수냄새가 아닌 절에서 피우는 향의 냄새. 그런 것이었다. 사람이 자신만의 향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것 같다. 특히 기분 좋은 향기를 가진 사람은 왠지 그 사람마저 좋은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K의 옆에 나란히 선 그녀는 가만히 말했다.
- 강을 보러가지 않을래?
K는 좋다고 했다.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어느새 J는 하얗게 빛나는 자전거를 옆에 끌고 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넓은 16차선 도로 위에는 그날 따라 차가 별로 많지 않았다. J는 자전거를 잘 몰았다. 그들은 도로 가장자리로 신나게 달렸다. 밤 공기가 약간 차가우면서도 시원했다. 강변에 도착하자 추울 정도였다. 자전거를 풀밭에 던져두고 J와 K는 강으로 다가갔다. 강은 건너편의 빌딩들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반짝반짝 비쳐서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듯 했다. K가 가만히 서서 그 반짝임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J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풀밭에 서서 K에게 이리오라고 손짓했다.
- 이것 봐. 누가 깜빡 잊고 놔두고 갔나봐.
그것은 폭죽들이었다. 특이한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생일케이크에 딸려 있는 폭죽이 아니라, 금박으로 먼 나라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여러 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새빨간 꾸러미의 폭죽들이라는 것이었다.
- 어떻게 터뜨리는 거지?
K가 호기심에 가득한 표정으로 꾸러미의 작은 폭죽마다 달려 있는 끈들 중 하나를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펑 하는 가벼운 폭발음과 함께 작은 종이 조각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간절히 빌어보세요. 이루어집니다.’
K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한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작은 폭죽 몇 개가 저절로 터지더니 나무 조각들을 토해냈다. 그녀가 가만히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조각들은 저절로 움직여 한데 모여서 유선형의 미끈한 배 한 척을 이루었다. K는 놀라움에 휩싸여 배 위에 발 한 짝을 가만히 넣어보았다. 그러자 배는 꿈틀대더니 놀라운 속도로 잔디를 스치며 휙휙 날았다. K는 얼떨결에 나머지 발도 배 안에 넣었다. 그러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날아 강물 속으로 돌진했다.
놀이공원에서 그녀가 즐겨 타는 기구들처럼 물에 흠뻑 젖을 것이라 생각한 K는 눈을 꼭 감았다. 몇 분이 지났는데도 잔잔한 물소리만이 들려올 뿐, 물을 흠뻑 뒤집어써서 몸이 차가워질 것이란 생각과 달리 따뜻한 습기가 점점 주위를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K가 눈을 살며시 뜨자 풍경과 함께 시끌벅적한 이국의 언어가 들려왔다. 습기 찬 초록빛 물 속에 배들이 천천히 흘러 떠다니고, 주위에 자욱한 안개 속에 드문드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그녀의 눈앞에 커다란 보아 뱀을 갖다대어 흠칫 놀라기도 했다. 보아 뱀이 어떤 것인지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왠지 맞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인가 푸드득 하고 머리를 스치고 날아가는 것은 선사시대의 익룡이었다. 오색으로 빛나는 비단의 빛깔이 눈을 자극하며 쓱 몸을 훑고 지나가기도 했고, 구수한 고기국물 냄새와 국수 삶는 냄새, 새콤달콤한 진물이 흐르는 과일의 향기와 매운 향신료의 톡 쏘는 냄새, 제례의식에 쓰이는 찰그락 대는 악기의 소리 등이 온통 뒤섞여 K의 눈과 귀와 코와 온 몸에 스며들었다. 천천히 흘러가는 배에 몸을 맡기고 몸을 바닥에 누이고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소리들이 점점 작아져 결국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고요한 가운데 볼이 간지러웠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풀잎으로 그녀의 볼을 간질거리던 J는 깔깔대며 K의 얼굴에다 대고 폭죽다발을 터뜨렸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K는 풀밭에 픽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아스팔트 바닥에 옆으로 누워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나고 몸에 눌린 왼쪽 팔이 아파 왔다. 눈을 뜨자 사람들이 동그란 원을 그리고 자신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원 안에 별이 총총히 뜬 밤하늘이 보였다. K가 일어서려고 몸을 뒤척이자 사람들은 우우 물러났다. 그녀는 교복을 털고 조용히 일어서서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근심스러운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학생. 괜찮아?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 곧 빨간 불인데 건너면 어떡해. 자. 이상 있으면 이리로 연락해. 응?
남자는 K의 손에 명함과 만 원권 두 장을 밀어 넣으며 불안한 미소를 지었다. K는 그 손을 거절하며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 괜찮아요.
구름을 밟는 듯 정신없이 걸어서 집에 간신히 도착하자, 문을 열어준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다. 멍하니 서 있는 K의 눈앞에 어머니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부산하게 왔다갔다하고, 아버지가 황급히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광경이 거울처럼 비쳤다. K는 이마에 뭔가 끈적거리는 것을 느끼고 손을 들어 쓱 닦았다. 거울에 비친 것은 새빨간 피였다. 세상이 핑그르르 돌았다.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것이 점점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동시에 J의 웃음 띤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 우리의 소원은 수상시장에 가보는 것이었어.
박 선생은 교무실 안의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하여, 그 앞에 놓인 하얗고 두꺼운 캔버스 지가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종이 다발은 검은 끈으로 묶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검은 교복을 입은 파리하고 무표정한 한 소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몇 줄의 검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듯이 보임. 늘 책을 읽고 있음. 좀 더 나이에 맞는 활동성을 요함.’
박 선생은 갓 대학을 졸업한 신출내기 교사였다. 그런 만큼 의욕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매일 설렘과 의욕을 가지고 자신이 처음으로 맡게 된 학급의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럭저럭 활기에 차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다소 까불거나 다소 사춘기의 내숭이 남아 있거나 차이일 뿐, 대개의 아이들이 비슷비슷한 그 또래의 발랄함을 지니고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40여명의 아이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아이의 사진을 그는 지금 앞에 두고 살펴보고 있다. 박 선생이 처음으로 학급에 들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수십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들과 한꺼번에 마주치게 된 당황되고 벅찬 순간에도 그 아이만은 고개를 숙이고 책상 앞에 펼쳐진 책을 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담당인 문학수업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는 늘 무슨 책인가를 보고 있었다. 박 선생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 책들 때문이었다. 그도 역시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가 할리퀸 로맨스라든지 쓸데없는 쓰레기 같은 책들을 읽고 있으면 얼른 그것을 압수할 작정으로 무슨 책을 읽고 있는 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책들은 대개 얇은 문고판 책이었지만, 때로는 동화책이거나 두껍고 좁은 여행가이드일 때도 있었다. 나쁜 책들은 아니었다. 로맨스는 더더구나 아니었다.
며칠 전 박 선생이 그 아이의 책장을 슬쩍 넘겨다보았을 때의 책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모모’와 ‘오즈의 마법사’ 다음으로 그녀의 책상에 놓여진 책이었다. 물론 책들은 좋은 것이었지만 그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아직 첫 시험의 성적이 나오진 않았지만 이대로는 아이가 학습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 학습 의욕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전에는 태국의 여행안내책자를 유심히 읽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박 선생은 아이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늘 책 속에 코를 박고 있는 그녀를 방해해서 무언가를 취조해 내기도 싫었다. 그는 아직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신출내기 교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은 아이의 부모와 면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 그녀의 어머니가 교무실로 찾아오기로 되어있었다.
4. J이야기
K는 희미한 회색의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어둠 속에 발이 빠지는 듯 무거운 걸음걸이로 하염없이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멀리서 조그만 빛이 보였다. 그 빛은 점점 그녀에게로 다가오면서 커졌다. K는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렸다. 가느다랗게 뜬 눈 사이로 신비한 푸른빛의 옷을 입은 J의 모습이 보였다. J는 웃으며 K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한참을 그렇게 나란히 어둠 속을 걸어가는 동안 주위의 풍경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 그때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어요...
싸늘하던 공기가 훈훈하게 변하고 그들은 어느새 따뜻한 아랫목에서 뜨거운 군고구마를 손에 쥐었다 놓았다 호호 불며 깔깔대고 웃고 있었다. K의 눈에 비친 J는 작은아이로 보였다. 그 아이는 밝은 갈색 머리를 양옆으로 묶고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책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정신없이 웃어대고 있었다. 그 책은 어린 소녀가 소풍을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상한 나라로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늘 웃고 있는 고양이가 나오는 대목에서 그들은 정신없이 방안을 뒹굴면서 눈물을 흘릴 때까지 웃고 또 웃었다. 그림 속에 그려진 고양이의 웃는 모습이 너무나 익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웃고 나자 K는 다시 책을 집어들고는 J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J는 고인 눈물을 닦아내고는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 ... 사정이 어려워서 우리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만 하던 때였어요.
따뜻하던 공기는 다시 서늘하게 변했다. 그들은 매미가 우는 커다란 나무 그늘아래의 평상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할머니가 새빨갛게 잘 익은 수박을 가져다주었다. K는 수박을 한 입 베어 물며, 할머니에게 엉겨붙기 시작하는 J에게 속삭였다. 지금 여기보다 더 더운 곳이 있대. 거기는 지금 두 배로 더 덥대. 우리가 그 곳에 간다면 당장 더위 때문에 숨이 턱 하고 막혀 버릴 거야. K가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쥐고 혀를 빼물고는 켁켁대는 시늉을 하자, J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K는 수박을 한 입 더 베어 물고는 평상 저 편에 던져져 있던 책을 집어들고 잠시 읽더니, 다시 J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더워서 물위에 집을 짓고 산대. 뭔가 필요할 때는 배를 타고 시장을 보러간대. 그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먹고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시장에 나오는 물건들도 가지각색이래. K는 J에게 바짝 다가가서는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커다란 뱀들이랑 무서운 아프리카의 동물들에서부터. 그러더니 J에게 약간 떨어져서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달콤하고 향긋한 과일들과 산해진미란 것이 수북하게 쌓여있대. J의 눈이 K와 동시에 마주쳤다. 눈에서 기쁨이 반짝이며 피어올랐다. 그들은 동시에 외쳤다. 와! 한 번 가보고 싶다.
- 위험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 사실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래저래 생각한 끝에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연락을 드렸어요...
풍경은 또 스르륵 바뀌어 따스한 햇살이 K의 갈색 머리를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해가 막 지려는 듯이 마지막 남은 햇빛을 모두 토해내려고 애쓰는 동안, 그녀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J와 함께 누워있던 나무 아래였다. K는 소리를 질렀다. 어서 내려와. 점점 가슴이 뛰었다. 쿵쿵. 어서 내려오라니까. 심장 박동 소리가 계속 빨라졌다. 쿵쿵쿵. 나무 위에서 양 갈래로 쫑쫑 땋은 머리를 늘어뜨리며 애쓰고 있는 소녀는 K의 마음을 모르는 지 계속 꾸물대며 뭔가를 따내려고 하고 있었다. 자꾸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쿵쿵쿵쿵. K는 이제 부들부들 떨며 마구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서 내려오라니까! 나무 위의 소녀는 보이지 않고 대신 밝은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이제 거의 다 됐어. 세 개나 땄는걸. 어어... 곧 이어 퍽 하는 소리가 들리고 찢어지는 듯한 여자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K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두 귀를 양손으로 감싸쥐고 토할 듯이 웩웩거렸다.
- ...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막 퇴근을 하고 샤워를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어요. 끈질기게 울리더군요... 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모... 몹시... 흐... 전화를 받았어요... 어머니시더군요. 더욱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식은땀이 흐르더군요... 흑...
K의 머리에 정지된 화면들이 펑펑 소리를 내며 스틸사진처럼 휙휙 스쳐지나갔다. 담 너머로 급히 달려나가는 할머니의 모습. 깨어진 유리파편이 가득한 가운데 J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모습. 마침 파편이 든 수레를 몰고 가던 고철장수 아저씨의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 전화기를 열심히 돌리는 할아버지. 요란한 앰뷸런스의 붉고 푸른 등. 새하얀 천으로 덮인 J의 시신.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검은 양복을 입고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상자에 든 가루를 뿌리는 부모님들의 모습. 거대한 울음소리. 그리고 침묵. 끝없는 어둠.
- ...한 동안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알아듣지 못했어요. 외... 외계의 말처럼 들렸어요... 흐... 흑... 흑흑... 자...작은아이가 주...죽었다고...
K가 헛구역질을 하며 온 몸을 뒤틀자 누군가 그녀의 배를 눌렀다. K가 눈을 뜨자 눈동자 속에 고여있던 눈물이 한 줄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몹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K는 오래 전에도 이런 구도에서 누군가와 마주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그녀가 서 있는 채였지만 말이다. 앰뷸런스가 멈추자 차 문이 열리고 들것이 들렸다. 응급실로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부모님들의 따스한 손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앉았다. 양 손 모두 불가사의한 힘으로 K의 몸에 따스한 활력과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손은 그녀의 오른손에서 겹쳐진 채였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J가 환하게 미소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K는 끝없이 편안한 마음이 되어 눈을 감았다. 이제 모두 알 듯 했다. 봄날 내내 나를 괴롭히던 사실을. 긴장이 탁 하고 풀리자 스르르 잠이 왔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날, 할머니가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 속에 붉은 대추씨를 심던 날. K는 차가운 겨울 햇살이 뿌려진 마당에서 마냥 찧고 까불며 그 씨앗이 묻힌 구덩이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박수를 치며. 깔깔 웃으며. J 역시 K와 함께 박수를 치고 웃으며 원을 그리면서 나풀나풀 뛰어다니고 있었다. K가 점점 커가고 나무도 쑥쑥 커 가는 동안 J는 고치에 갇혀 수많은 봄과 가을, 여름과 겨울을 나고 십 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하얀 날개를 팔랑이는 나비가 되어 K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떠나갔다. 그녀는 이렇게 따뜻한 봄날을 기다렸을지도 몰라. 따뜻하고도 눈물이 나는 봄날을.
지금 K는 병실의 침대에 베개를 괴고 앉아서 병 문안을 온 담임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박 선생은 아이의 얼굴에 드리워져있던 그늘이 옅어진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 선생님. 저길 보세요. 나비예요.
박 선생이 고개를 돌리자, 창가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던 새하얀 나비는 이내 눈부신 햇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K는 조용히 쓴웃음을 지으며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 J는 내 동생이었어.
성명 : 김설아
성별 : 여자
연령 : 24세
주소 :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현대한누리 103-507
e메일: bbosasi80@hanmail.net
전화 : 011-839-3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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