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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아-단편소설2(2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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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반짝이는 물고기의 하늘
1.
꿈을 꾼다. 항상 같은 꿈이다. 나는 거대한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된다. 하늘은 어둡지만 왠지 눈이 부셔서 눈물이 찔끔 난다. 빌딩 숲을 부유하다보면 미끄러질 듯한 빌딩유리에 내 모습이 비춰지곤 한다. 자세히 보려고 하지만 눈물 때문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늘이 오색으로 번뜩인 찰나, 유리가 와장창 깨지면서 나는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피 대신 식은땀을 온 몸에 흘리면서...
2.
시끄러운 소음. 소음들. 가슴이 쿵쿵 뛰고 귀가 먹먹하다. 이대로 이 소음들 속에 빨려 들어가는 건 아닐까? 이윽고 소음이 잦아들고 점점 고요해 지는 것을 느낀다. 현란한 조명아래 가느다란 내 몸이 힘없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창백하고 푸른 피부 아래 솟아나는 뜨거운 땀. 땀만이 오직 살아서 힘차게 뛰놀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사람들의 무리 속에 익사할 수 있다면. 때때로 플랑크톤과 속삭이고 해초의 머릿결을 쓰다듬기도 하면서. 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어느새 머릿속에 바다의 한 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투둑”
뒤에서 누가 세게 치는 바람에 목걸이가 터졌다. 더러운 바닥에 목걸이 줄이 날렵한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펜던트는? 그 펜던트는 내가 몹시 아끼던 것으로, 10원 짜리 동전 만한 크기의 얇은 은 판에 신비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물고기가 새겨진 것이었다. 어디로 날아가 버린 걸까? 한참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난 후에야,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아니, 그를 발견했기 보다 그의 시선을 먼저 느꼈다고 할까. 사람들을 헤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몹시도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으로 펜던트를 애무하는 듯 하더니 말없이 조금은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바다의 차갑고도 상쾌한 바람이 한 줄기 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펜던트를 내 손에 쥐어주더니,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거대한 댄스홀의 열기가 다시 썰물처럼 내 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전처럼 몸을 흐느적대며 춤을 추다가, 견딜 수 없이 목이 마르면 bar로 가서 샴페인을 한 잔씩 마셨다. 새벽 3시쯤 되어서야 친구 진이와 나는 클럽에서 나와 대학로에 진입했다.
3.
진이와 나는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우린 보육원에서 만났다. 그녀와 나는 처음에는 라이벌 관계였다. 서로 다른 초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우리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하루가 멀다하고 미술상장을 집으로 날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둘의 상장을 합친 높이가 마침 그날 새벽에 누군가가 보육원 문 앞에 놔두고 간 아기의 키와 비슷했다. 중학교 무렵부터 그녀와 나는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십여 년 넘게 경쟁자라는 자리에 놓여져 있던 진이는 어느새 내가 가장 필요로 하게된 친구의 자리로 옮겨와 있었다. 우리는 입양되거나 양녀로 다른 집에 가지는 않았지만 누군지 모를 후원자가 있어 고등학교까지는 그럭저럭 별 걱정 없이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대학진학을 결정할 때가 다가오자 후원자로부터 연락이 뚝 끊겨버렸고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학에 진학해서 그림을 더 그리고 싶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던 우리는 미대에 합격을 했는데도 입학금을 낼 돈이 없었다. 그렇게 우울한 몇 달을 보내고 있으려니 고등학교 때의 미술선생님으로부터 갑작스런 연락이 왔다. 국비지원장학생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우리는 시험을 쳤고 합격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보육원을 나와 대학로에 살게 되었다. 국비지원장학생 조건에 기숙사도 있었지만 진이나 나나 왠지 답답한 기분이 들어 거절했다. 그리고 이 대학로에 하숙을 하게 되었는데, 이 대학로의 분위기는 마치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을 연상케 했다. 샤갈과 모딜리아니가 어딘가 어두운 까페의 구석에 앉아 기욤 아폴리네르와 같은 시인들과 속삭이며 압상트 주를 마시거나, 꼽추화가 로트렉이 화려한 밤거리의 어디선가 환락에 젖어있을 그런 분위기 말이다. 이런 밤의 불빛에 취해 진이와 나는 마치 부나방처럼 밤거리를 쏘다녔다. 그리고 우리 나이의 젊은 아이들이 모여있는 떠들썩한 곳이라면 어디든 들어갔다. 들어가 보면 그곳은 거의 레이브 파티장이거나 테크노 클럽, 힙합 클럽, 펑크록 클럽 등이었는데 음악을 가리지 않고 진이와 나는 흐느적대며, 혹은 격렬하게 몸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개는 새벽 3시가 넘어서야 하숙집으로 돌아와서는 복숭아 맛이 나는 샴페인을 터트리고는 한 병을 둘이서 다 비우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4.
“젠장. 또 그 꿈을 꾸었어...”
어떤 꿈 인줄 뻔히 알면서도 의례
“무슨 꿈?”
이라고 물어봐 주는 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하얀 침대시트에 부서지는 햇살이 따갑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다. 침대에 누워서 꼼지락대던 나는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가야하는 날인데. 나는 격일제로 수업 시간표를 짜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2시부터 8시까지 비디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늦었다! 얼른 옷을 주워 입고 식탁에 뒹굴던 식빵을 하나 입에 물고 냅다 뛰었다. 다행히 비디오방은 하숙집에서 도보로 20분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조금 늦었지만 주인이 별로 겁나지는 않았다. 나를 해고하고 나면 주인은 쉬는 날도 없이 혼자 일 해야될게 뻔하니까, 그렇게 하진 못할 것이다. 왜냐면 이 비디오방 주인 아저씨는 이 근방의 대학생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파다하게 변태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이 비디오방이 처음 생겼을 무렵, 아르바이트라고는 믿을 수 없는 높은 시간당 급여에 아이들은 돈에 눈이 멀어, 너나 할 것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몰려들었었다. 하지만 다들 일주일을 못 넘기고 그만두고 말았다. 이 주인이 여자 아르바이트생만 뽑아서 성희롱을 한다는 후문이었다. 하지만 돈에 눈먼 나는 한 번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전날 라면을 잔뜩 먹고 퉁퉁 부은 얼굴로 커다란 멜빵바지를 입고 비디오방을 찾아갔다. 주인이 뚱뚱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후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생이 없어 며칠째 쉬지도 못하는 곤욕을 치르고 있던 주인은 쌍수 들고 나를 환영했다. 다음날부터 부기가 쭉 빠진 나의 날카로운 얼굴과 말라빠진 몸매의 진상을 안 주인은 뒤늦게 나를 고용했음을 후회했지만 뭐 별다른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를 가만 내버려두었다. 물론 나에겐 손도 대지 않았다. 마른 여자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나 뭐라나 하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일은 하품 날 정도로 쉬웠다. 무언가 부끄럽기도 하고 성급해 보이기도 하는 남녀가 들어와서 비디오를 고르면 방 번호를 알려주고 비디오를 틀고 끄면 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남녀가 머리는 까치집을 짓고 입술은 빨갛게 되어 상기된 모습으로 가게를 나가고 나면, 그 방을 치우면서 방에 가득 찬 후끈한 열기와 매캐하고 야릇한 냄새로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 어렴풋이 짐작해 볼뿐이었다. 가게에는 정말 볼만한 비디오가 없어서 나는 6시간 동안 작은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거나,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5.
그 날도 나는 세 쌍의 남녀에게 비디오를 틀어주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었다. 문득 어제 펜던트를 주워준 남자가 생각났다. 그 남자의 희고 길다란 손가락. 나는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을 가진 사람은 여자나 남자나 병적으로 좋아했다. 이유는 확실치 않다. 그냥 그런 손가락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고 좋을 뿐이다. 그런 손가락을 볼 때마다, 나는 무턱대고 달려들어 입에 넣고 손가락들을 빨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왠지 그 손가락들에서는 달콤한 꿀이 흘러나올 것 같았기 때문일까.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빼서 펜던트를 보았다. 반짝이는 은빛 수면에 유영하는 한 마리의 푸른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이 물고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혼자 있어서 외롭지는 않을까. 순간 물고기가 아주 희미하게나마 파닥거린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본 걸까. 눈을 비비고 물고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그런데 푸른빛이 아주 조금 투명해 진 것 같다.
6.
졸다 보니 벌써 여덟 시다. 방을 한 번 빙 둘러보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주인 아저씨가 올 때가 됐는데...
“딸랑”
가게문의 방울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주인 아저씨 인가보다. 얼른 일어서려는데 쌓아두었던 비디오테이프에 그만 머리가 부딪쳐 와르르 무너지는 비디오테이프들을 온 몸에 맞고 말았다.
“우씨, 장난 아니게 아프잖아.”
일어서는데 피식 웃고있는 하얀 얼굴이 보였다. 어제의 그 펜던트 남자였다!
“은아, 되게 아프겠다.”
진이가 얼른 달려왔다. 나는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아 참, 인사해. 내 남자친구 재영이야. 나이는 우리랑 동갑이야. 소개가 늦어져서 미안해.”
진이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 재영아. 얘는 내 단짝인 은이야. 되게 좋은 애야.”
재영이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다랗고 흰 손가락. 하지만 두 번 다시 자연스레 이 손을 잡기는 어려우리라. 그는 진이의 남자친구였으니까 말이다. 하긴 내가 남자라도 진이를 좋아할 테지. 머리카락은 기다랗게 굽이쳤지만, 바싹 마른 데다 항상 인상을 쓰고 다니며 신경질적으로 굴던 나와는 달리, 진이는 여성스런 단발에 귀염성 있는 외모와 붙임성을 지닌 아가씨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주인 아저씨가 들어왔다. 비디오 가게를 나온 우리는 여느 때처럼 대학로를 쏘다니다가 레이브 파티가 열리고 있는 클럽에 들어갔다. 그 날 따라 bar에 앉아 샴페인만 들이붓고 있던 나는 진이와 재영이의 부축을 받아서 겨우 하숙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7.
꿈을 꾼다. 나는 거대한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된다. 하늘은 어둡지만 왠지 눈이 부셔서 눈물이 찔끔 난다. 빌딩 숲을 부유하다보면 미끄러질 듯한 빌딩유리에 내 모습이 비춰지곤 한다. 자세히 보려고 하지만 눈물 때문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늘이 오색으로 번뜩인 찰나, 갑자기 눈을 씻은 듯 시야가 맑아지면서 유리 속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곳엔 길다랗고 굽슬굽슬한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신비한 은빛 머리칼을 곱게 빗고 있는 한 마리의 인어가 보였다. 유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유리에서 강한 전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와, 나는 몸서리치며 꿈에서 깨었다.
8.
“진이야, 나 오늘 말이야... 평소와 다른 꿈을 꾸었어.”
“어떤 꿈이었는데?”
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조차 그 꿈이 무얼 뜻하는지 몰랐으니까 말이다. 평소에 그 꿈의 의미를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막상 그 내용이 바뀌고 나니 왠지 호기심이 생긴다. 꿈은 왜 바뀐 걸까? 나는 하루종일 어젯밤에 꾼 꿈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비디오 방 카운터에 앉아있는 지금까지. 생각을 하느라 무심결에 목걸이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해서인지 목걸이가 ‘탁’하고 떨어졌다. 만들어진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목걸이를 걸기 시작한 것이 그러니까... 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내가 이 목걸이를 어디서 샀더라. 생각은 십여 년 전의 인도인들이 살던 골목으로 넘어간다.
9.
어릴 적, 그러니까 초등학교를 들어가기도 전이였다. 내가 사는 보육원에서 쭉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큰 초록색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그 나무다리를 지나 좀 걷다보면 어느덧 나의 눈에는 신기한 풍경들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요술과도 같았다. 어느 날 술래잡기를 하다가 길을 잘못 찾아들어 헤매다 발견한 그 인도거리에 나는 곧 매혹되어버렸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인도인들이 살던 거리 특유의 향불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은은하고도 어지러운,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냄새. 그 냄새에 이끌려 나는 열에 들뜬 마음으로 그 거리의 골목골목을 누볐었다. 골목에서는 카레 냄새가 나기도 했고, 담배가 구수하게 타는 냄새라든지, 쌀 볶는 냄새가 풍겨져 나오곤 했다. 하루는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마치 귀신에 홀린 듯, 호랑이가 늦은 밤에 아이들 이름을 불러서 잡아먹었듯, 무언가에 홀린 듯한 몽롱한 눈으로 비칠거리며 다리를 건너 그 거리로 갔었다. 때마침 그곳은 정말 전설의 고향이라도 되듯, 푸르스름한 새벽공기에다 안개까지 자욱히 끼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곳곳에 깜빡이는 노인들의 기다란 담배 쌈지에서 나오는 하얀 불빛들만이 마치 반딧불처럼 거리의 이정표 역할을 해 줄 뿐이었다.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간신히 걸어가던 나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에서 피가 났다. 겨우 일어서서 옷을 털고 왜 넘어졌나 땅바닥을 살펴보았더니 노란색의 작은 판자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판자에는 붉은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웃고있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판자 뒤편에는 너무 자욱한 안개 때문이었는지,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한 노파가 마치 유령처럼 앉아있었다. 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노파는 알록달록한 무지개색깔의 모자를 쓰고, 나무판에 노란 천을 깔아 무언가를 팔고 있었다. 천 위에 쭉 늘어서 있는 자잘한 것들이 무엇인가 하고 쪼그려 앉아 유심히 살펴보려니, 물고기들이 그려진 목걸이, 귀걸이, 반지, 팔찌 등의 장신구들이 아주 많았다. 물고기가 그려진 반지, 은 물고기가 달린 은 귀걸이, 검은 물고기가 새겨진 금팔찌 등이 그 가판대의 주된 상품들이었다. 반짝이는 그것들을 한참을 보고 있으려니 노파가 나에게 무어라고 말을 했다. 아니, 소리내어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신기하게도 마음속으로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어떠니?’
“무척 예뻐요. 물고기들이 반짝반짝하고 빛이 나요.”
노파는 얼굴에 잠깐 웃음을 머금었다. 문득 알록달록한 모자 아래 노파의 얼굴이 복숭아 빛으로 물들면서 나와 같은 또래의 아이얼굴로 보였다. 머리가 하얗게 샌 것만 빼면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내가 깜짝 놀라서 노파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으려니 노파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주름이 지고 눈이 움푹 들어간 고목같이 변해있었다. 아니, 원래 그랬던 건가. 모르겠다. 이 곳에 오면 언제나 시간과 공간이 없어지고 내가 없어진 듯한 야릇한 기분이 든다. 노파는 또 나에게 물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골라보렴. 선물로 줄게.’
나는 푸른빛이 도는 물고기가 그려진 은목걸이를 들어올리며
“이게 제일 예뻐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파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잔잔한 웃음을 눈가에 지으며 말했다. ‘넌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평생 있게 될 거다. 영원히...’
자욱한 안개를 뒤로하고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목걸이를 두 손에 꼭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나는 그 목걸이를 항상 소중하게 여기며 목에 걸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목걸이의 펜던트를 보았다. 기분 탓인가. 물고기가 그 전보다 많이 투명해 진 것 같다.
10.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왔다.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 샤워를 하고 창고로 내려가서 샴페인을 한 병 꺼내서는 거실로 가서 비디오를 켰다. 내가 하숙하는 집 지하창고에는 샴페인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하숙집 주인의 말로는 지금은 죽고 없는 남편이 주조공장을 했었다고 한다. 이 집도 그 공장 터였는데, 갑자기 부도가 나서 남편은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산 속을 헤매며 풀밭에서 아무렇게나 자곤 하다가 그만 유행성 출열혈에 걸려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연으로 미망인이 된 부인을 동정해 빚쟁이들은 더 이상 빚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하긴 사람이 죽고 난 마당에, 갚을 능력이 없는 죄 없는 사람을 족쳐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공장을 개조해 집을 지어 하숙을 들였다. 그 공장에서 주로 만들어진 술이 샴페인이었는데, 덕분에 채 팔지도 못한 샴페인은 지하창고에 들어가서 조용히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 부인은 하숙한 사람들 중 생일을 맞은 사람이 있기라도 하면 창고로 가서 샴페인을 내어 왔는데,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지하창고로 내려가서 꺼내 먹어도 좋다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매일 샴페인을 먹을 수 있었는데, 과거의 아픔을 간직한 것이라 그런지 샴페인의 맛은 기가 막혔다. 특히 복숭아 맛 샴페인이 가장 달콤하고 향이 풍부하고 부드러웠는데, 그래서 진이와 나는 저녁마다 샴페인을 거의 입에 달고 살았다. 아르바이트 비로 하숙비를 대서 늘 가난에 시달리던 우리는, 어떤 날은 밥 대신 샴페인으로 배를 채우기도 할 정도였다. 그래도 지하창고의 샴페인 병 탑들은 워낙 어마어마해서 조금도 축나지 않은 듯이 보였다. 지하창고에 들어가면 조금 눅눅한 공기에는 언제나 코를 찌르는 듯한 달콤하고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향내가 터질 듯이 녹아있었다. 냄새만 맡고도 취한다던가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거다.
11.
나는 샴페인이 좋다. 그 달콤한 과일향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모르게 기분 좋게 만취해서 다른 나라로 가버린 다는 것이 좋았다. 죽음도 그렇게 고통 없이 달콤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샴페인을 마시며 비디오 테이프를 보다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디선가 감미로운 여가수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온 샹송이 부드럽게 내 귀를 감싼다. 꿈을 꾼다. 나는 거대한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된다. 하늘은 어둡지만 왠지 눈이 부셔서 눈물이 찔끔 난다. 빌딩 숲을 부유하다보면 미끄러질 듯한 빌딩유리에 내 모습이 비춰지곤 한다. 자세히 보려고 하지만 눈물 때문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늘이 오색으로 번뜩인 찰나, 갑자기 눈을 씻은 듯 시야가 맑아지면서 유리 속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곳엔 길다랗고 굽슬굽슬한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신비한 은빛 머리칼을 곱게 빗고 있는 한 마리의 인어가 보였다. 유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유리에서 강한 전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와, 나는 몸서리치며 꿈에서 깨었다.
12.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든다. 왜 일까. 잠에 취한 눈을 억지로 뜨자, 나의 기다란 머리카락에 목걸이가 걸린 것을 발견했다. 목걸이를 머리카락에서 떼어내고 고리를 풀어서 펜던트를 가만히 보았다. 물고기를 자세히 살피던 나는 깜짝 놀랐다. 물고기가 언제 이렇게 희미해졌지? 칠이 벗겨진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다. 수업도 없고 해서 진이와 나는 하루종일 열리는 ‘이어도’의 레이브 파티에 가기로 했다. ‘이어도’는 우리가 잘 가는 테크노 클럽이었다. 진이의 남자친구 재영이도 오기로 했다. 도시락으로 샴페인을 몇 병 싸들고 가야지.
13.
10시쯤 되어 ‘이어도’로 갔다. 사람들이 벌써부터 많이들 와서 커다란 댄스홀이 가득 들어찼다. 디제이들이 위에서 열심히 판을 스크래치하고 믹싱하고 있다. 오늘의 선곡은 왠지 행복하고도 아련한 기분이 들게 한다. 나는 댄스홀에서 흐느적대며, 긴 머리를 나풀대며 춤을 계속 추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 테이블에 앉아있는 진이와 재영이가 보인다. 둘은 바싹 붙어 앉아 키스를 하고 있다. 왠지 슬퍼진다. 눈에 물기가 고인다. 이건 눈물인가. 누군가 나에게 푸른빛이 나는 담배를 준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모금 빨아들였다. 몽롱하다. 조명이 핑핑 돌고, 바닥이 나를 들어올렸다 내렸다하며 철썩철썩 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파도처럼 말이다. 문득 나의 손에 차가운 무언가가 쥐어진다. 뭐지? 손을 위로 올렸다. 총. 총이다! 어지럽고 현란한 조명, 푸르스름하게 반짝이는 블랙등, 쿵쿵거리는 기계음의 스크래치 사운드, 흐느적대며 춤추는 사람들, 어디선가 불어오는 희미한 마리화나 연기, 이 곳은 지금 거대한 혼돈. 그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로지 내 주위만이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다. 식은땀이 한줄기 등을 타고 흘렀다. 내 손에 들린 총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총을 든 채로 진이와 재영이가 키스하고 있는 데로 갔다. 둘은 지금 한창 서로의 입에 혀를 밀어 넣고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는 중이었다. 나는 재영이의 머리를 확 잡아채 그의 입술을 격렬하게 빨고는 그의 입에 혀를 집어넣었다. 놀란 재영이의 혀는 새로운 상대에 깜짝 놀라는 듯 했으나, 곧 적응하고 받아들였다. 두 혀가 격렬하게 엉키고 재영이가 침을 삼키는 찰나, 나는 총을 정확히 그의 정수리에 갖다댔다.
14.
“탕!”
재영이가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 엄청난 소리의 파장으로 이곳의 모든 공기는 이질감으로 압축되어 흘렀다. 아니, 주위의 모든 소음과 공기는 나에게로 빨려 들어와서, 나를 통해 다시 흘러나와 ‘이곳’은 ‘이곳’ 아닌 다른 곳이 되었다. 주위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나는 머리가 날아가 버릴 듯한 공포를 느끼며 총을 그대로 한 손에 들고, 동굴 속 어둠같이 깜깜한 눈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내달았다.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었다. 무작정 달리는 나를 따라오는 진이의 맞잡은 손에 땀이 촉촉하게 배여 나왔다. 순간적으로 손이 미끌렸다. 진이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멍하게 서 있었다. 차가 한 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진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시끄러운 경적소리를 내면서. 진이는 그 소리가 안 들리나보다. 나는 절망적인 슬픔을 느끼며 그녀에게로 내달았다. 자동차의 불빛이 점점 다가왔다.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다. 늦었다! 나와 그녀는 차에 함께 깔릴 것이다. 순간적으로 목걸이의 펜던트가 찰랑. 펜던트 속의 물고기가 없다. 나는 그 때 보았다. 밤하늘을 수놓으며 은빛 물살을 가르는 푸르고 투명한, 거대한 별빛 물고기를. 내 꿈속에 항상 나오던 그 물고기였다. 나는 진이를 꼭 끌어안았다.
15.
햇빛이 눈부시던 어느 오후였다. 보육원의 원장님은 원생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새로운 친구가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새로 들어온 그 아이의 이름은 은진이였다. 원장님은 나와 그 애가 동갑이니, 나보고 특히 신경을 써서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라고 하셨다. 나는 그 애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길다란 그녀의 머리는 끝에 퍼머를 했는지 곱슬곱슬했다. 가늘고 숱 많은 그녀의 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는 순간 덴마크에 있다는 인어공주 동상이 생각났다. 파도치는 넓은 바위 위에 가련하고도 애달픈 표정으로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 청동동상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었다. 사진에서 본 인어공주처럼 진이도 반짝이며 빛나고 있고,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한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과 빨간 입술.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난 그때부터 진이가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이는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그냥 저 만큼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여기고 사사건건 경쟁하려 들었다. 어릴 적의 그녀는 나에게 그렇게 적대적이었다. 그 때의 그녀는 마치 아기고양이 같았다.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동그랗고 귀여운 발 밑에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고 눈을 빛내는 그런 아기고양이 말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녀와 나를 가까워지도록 만들었고, 그렇게 나는 20살이 된 지금까지 그녀의 곁에 자연스레 머물러 있게 되었다. 진이를 처음 본 날부터 나는 죽 머리를 길러서 머리카락이 기다란 데다가, 제법 갸름하고 해사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남자애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같은 머리를 했다고 해서 내가 진이처럼 여성스러워 질 수는 없었다. 나는 남자애들이 싫었다. 그 애들은 더럽고 땀 냄새가 났다. 말하는 것도 거칠고 맘에 들지 않았다. 진이의 머리카락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로부터 점점 짧아져 갔다. 하지만 그와 반비례해 그녀의 여성스러움은 사과처럼 점점 더 농염해져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은은하던 향기는 어느새 터질듯해 나를 종종 어지럽게 했다. 진이에게 온 남자애들의 편지는 내가 전해준다는 핑계로 받아서는 불태워 버렸으며, 등하교길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은 진이 몰래 골목으로 끌고 가 흠씬 두들겨 패줬다. 그것도 모르고 진이는 나에게
“은이는 참 남자한테 인기가 많구나. 그런데 난 아무도 좋아해 주질 않아. 내가 그렇게 밉게 생겼니?”
하며 참으로 고민스러운 얼굴로 골똘히 물어오곤 해서 나의 마음을 헤집고는 했었다.
16.
고등학교 때쯤이었을 것이다. 자다가 목이 말라 깬 나는 물을 마시려고 부엌으로 갔다. 물을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키고 방으로 돌아오니, 같은 방에서 자고 있던 진이의 자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진이와 나는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났다. 막 성숙기를 마친 부드러운 가슴과 허리의 곡선, 날씬한 팔 다리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무릎을 꿇고 곤히 자고있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새빨간 입술. 그 농염한 붉은 빛은 터질듯했고 교교한 달빛을 받아 더욱 나를 미치게 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신선한 과일의 육즙을 한 입 베어먹은 듯 했다. 달콤하고도 한없이 우울한 그런 맛이었다. 그녀는 다행히 깨지 않았다. 진이의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주고 나는 그날 밤 내내 울었다.
17.
나는 거대한 한 마리의 물고기다. 하늘은 어둡지만 왠지 눈이 부셔서 눈물이 찔끔 난다. 빌딩 숲을 부유하다보면 미끄러질 듯한 빌딩유리에 내 모습이 비춰지곤 한다. 자세히 보려고 하지만 눈물 때문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늘이 오색으로 번뜩인 찰나, 갑자기 눈을 씻은 듯 시야가 맑아지면서 유리 속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곳엔 길다랗고 굽슬굽슬한,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신비한 은빛 머리칼을 곱게 빗고 있는 한 마리의 인어가 보였다. 유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유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나는 유리조각들을 피하며 인어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아니었다. 진이구나! 그녀는 진이였다. 진이는 애달픈 곡조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산호로 만든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다. 그녀가 나를 본다. 보랏빛의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친다. 거대하고 투명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물고기. 그녀는 나의 등을 쓰다듬는다. 나는 그녀의 손길이 너무 간지럽고 기분이 좋아서 지느러미를 움찔거린다. 나는 등에 그녀를 태운다. 그녀와 나는 바다 속 여행을 떠난다. 별로 뒤덮인 바다다. 그녀는 낚싯대로 여러 가지 색깔의 별을 낚아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건다. 귀에도 붉은 별, 푸른 별을 하나씩 꽂았다. 그녀는 나에게도 별 목걸이를 만들어준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진이와 나는 구름을 한 조각씩 마시고, 배가 고파지면 달을 한 조각씩 뜯어먹었다.
18.
이렇게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시간들은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늘의 어디선가 구멍이 생겨버렸는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별 바다의 코발트 블루의 바닷물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물이 반쯤 빠지자 물고기인 나는 숨쉬기가 힘들어 헐떡대었다. 착한 진이는 나에게 키스로 공기를 불어넣어 주었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물이 거의 다 빠지자 진이도 고통으로 힘들어했다. 나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마지막 힘을 다해 아가미를 한 번 움찔거리자, 갑자기 엄청나게 강렬한 빛이 들어왔다. 나는 눈도 뜨지 못하고 눈물만 흘려대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에서 풍겨져 나오는 냄새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진이였다. 엄청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게 분명하지만, 그녀와 나는 함께 있는 것이다! 기쁨에 가슴이 뭉클해져서 크게 소리지르고 싶었다. 나의 귀에는 커다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 아기가 아니라 두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19.
산모가 핼쑥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
“내 아기, 아기는 건강한가요?”
“저 그게...”
의사는 말끝을 흐렸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산모가 몸을 일으켜 아이를 보려고 했다.
“세상에나...!”
“샴 쌍둥이를 낳으셨어요.”
산모는 기절해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의 괴이한 형태를 보고, 혹시 괴물이 아닐까 하는 극도의 공포심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샴 쌍둥이를 낳으면? 우선 떼 내어야 한다. 두 아이가 그렇게 붙은 채로 살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을 떼 내기 위해서는 한 아이를 죽여야 한다. 죽은 아기는 생선토막처럼 잘려서 검은 비닐봉투에 버려졌다.
20.
누군가 나의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있다. 아플 텐데 아픈 느낌이 없다. 아니, 사실은 엄청난 고통이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가고 있지만, 왠지 내가 죽어야 진이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그저 머리와 꼬리가 없어지는 게 조금 허전할 뿐이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검은 기름으로 가득 찬 바다에 버려졌다. 진이와 내가 놀 던 별 바다와는 전혀 다른 바다. 나 같은 물고기들이 몇 마리 살고 있다. 그들의 몸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와 다른 물고기들은 저 찬란한 별빛바다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21.
열살 난 현이의 조그만 엉덩이에는 푸른 물고기가 한 마리 그려져 있다. 엉덩이의 몽골반점도 없어진지가 오래인데, 이상하게 이 푸른 물고기만은 문신을 한 듯 선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엉덩이에 있다는 물고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위치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저 엄마에게 보고 그려달라고 해서 모양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가을소풍을 갔다. 장소는 매년마다 가는 식물원이었다. 사생대회 시간에 현이는 흙바닥에다 물고기를 한 마리 그렸다. 그리고 보니 자신의 엉덩이에 있다는 물고기와 꽤 닮았다. 가을 햇살에 노곤해진 현이는 은행나무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다.
“푸드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현이는 잠에서 깨었다. 어디서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푸드득”
아까 들은 소리와 같은 소리다. 어디서 난 것인가 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이 잠들기 전에 그린 물고기가 푸드득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고기는 몇 번 지느러미를 푸드득거리더니 곧 투명한 푸른빛이 되어 하늘로 두둥실 날아올랐다. 마치 거대한 물고기 애드벌룬처럼. 현이는 자신이 잠에 덜 깬 것이 아닌가 하고 눈을 몇 번이고 비빈 뒤 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여전히 그 거대한 물고기가 눈부신 가을햇살을 투명한 온 몸 가득 받고, 구름을 가르며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22.
여전히 푸른 물고기를 엉덩이에 간직한 채로 현이는 20살이 되었다. 20살이 되던 생일날, 어머니는 현이에게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현이가 샴 쌍둥이로 태어났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죽어간 또 다른 자신을 생각하며 조금 울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소녀는 자신의 엉덩이에 그려진 푸른 물고기와 상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23.
생일을 맞아 현이는 저녁에 친구들과 ‘푸른 물고기’를 찾았다. ‘푸른 물고기’는 얼터너티브 록 클럽이다.
코발트 블루로 페인트칠이 된 그 지하의 클럽에 들어서면, 현이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편안한 의자에 푹 꺼져 들어가 예쁜 글라스에 담긴 샴페인을 홀짝이며 밴드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따스하고, 아늑하고, 어쩌면 조금은 애달프기도 하고, 행복이 깨질까 두려워하는 자신이 미약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그런 행복이었다. 샴페인의 달콤한 향내를 타고 조용하면서도 맑은 보컬의 노랫말이 들려왔다.
현이는 그날 따라 유난히 샴페인을 많이 마셨다. 그녀는 원래 샴페인을 좋아했다. 샴페인은 마셔도 마셔도 눈물이 나지 않는 술이라나. 만취가 된 그녀는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그 날 클럽에서 들은 노래를 흥얼거리다 그녀는 잠이 들었다.
24.
꿈을 꾸었다. 작고 푸른빛을 내는 물고기가 바닷길을 안내해 주었다. 그것은 별빛 바다였다. 현이는 별 꽃을 꺾어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물고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물고기는 붉은 색이 될 정도로 부끄러워하면서도 좋아했다. 물고기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 입을 조금 달싹이는 것일 뿐이었는데, 그녀에게는 의미가 분명하게 전해져 오는 그런 말이었다.
“내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의 꿈속에 나타날 거예요. 나는 물고기가 아니에요. 당신의 샴 쌍둥이였죠. 다시 내가 당신 꿈에 나타난다면, 난 조금 더 커져있을 거예요. 그리고 꿈에 나타날 때마다 점점 커져, 내가 어릴 적에 당신이 본, 하늘을 날던 물고기 만해지면 나와 함께 별빛바다로 떠나기로 해요.”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그맣고 푸른빛이 나는 물고기가 마치 아주 오랫동안 사귄 친구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는 아주 빨리 헤엄쳐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검은 심해로 빠져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몹시도 가슴이 아팠다.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울고 있었다.
25.
현이는 꿈을 꾸었다. 매년 생일 때마다 꾸는 꿈이다. 올해로 현이는 50살이 되었으니, 벌써 서른 번째로 꾸는 꿈이다. 매년 반복된 그녀의 꿈속에서 푸른 물고기는 어느새 거대해져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흰머리로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을 풀었다. 어느새 그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굽이쳤다. 끝 부분은 곱슬곱슬한 은 보랏빛 머리칼이었다. 그녀는 한 마리의 인어였다. 그녀는 거대한 물고기의 등에 올라탔다. 그들은 그렇게 둘이서 행복하게 별빛이 흩뿌려진 바다를 끊임없이 유영해 나갔다.
1.
꿈을 꾼다. 항상 같은 꿈이다. 나는 거대한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된다. 하늘은 어둡지만 왠지 눈이 부셔서 눈물이 찔끔 난다. 빌딩 숲을 부유하다보면 미끄러질 듯한 빌딩유리에 내 모습이 비춰지곤 한다. 자세히 보려고 하지만 눈물 때문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늘이 오색으로 번뜩인 찰나, 유리가 와장창 깨지면서 나는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피 대신 식은땀을 온 몸에 흘리면서...
2.
시끄러운 소음. 소음들. 가슴이 쿵쿵 뛰고 귀가 먹먹하다. 이대로 이 소음들 속에 빨려 들어가는 건 아닐까? 이윽고 소음이 잦아들고 점점 고요해 지는 것을 느낀다. 현란한 조명아래 가느다란 내 몸이 힘없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창백하고 푸른 피부 아래 솟아나는 뜨거운 땀. 땀만이 오직 살아서 힘차게 뛰놀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사람들의 무리 속에 익사할 수 있다면. 때때로 플랑크톤과 속삭이고 해초의 머릿결을 쓰다듬기도 하면서. 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어느새 머릿속에 바다의 한 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투둑”
뒤에서 누가 세게 치는 바람에 목걸이가 터졌다. 더러운 바닥에 목걸이 줄이 날렵한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펜던트는? 그 펜던트는 내가 몹시 아끼던 것으로, 10원 짜리 동전 만한 크기의 얇은 은 판에 신비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물고기가 새겨진 것이었다. 어디로 날아가 버린 걸까? 한참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난 후에야,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아니, 그를 발견했기 보다 그의 시선을 먼저 느꼈다고 할까. 사람들을 헤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몹시도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으로 펜던트를 애무하는 듯 하더니 말없이 조금은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바다의 차갑고도 상쾌한 바람이 한 줄기 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펜던트를 내 손에 쥐어주더니,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거대한 댄스홀의 열기가 다시 썰물처럼 내 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전처럼 몸을 흐느적대며 춤을 추다가, 견딜 수 없이 목이 마르면 bar로 가서 샴페인을 한 잔씩 마셨다. 새벽 3시쯤 되어서야 친구 진이와 나는 클럽에서 나와 대학로에 진입했다.
3.
진이와 나는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우린 보육원에서 만났다. 그녀와 나는 처음에는 라이벌 관계였다. 서로 다른 초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우리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하루가 멀다하고 미술상장을 집으로 날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둘의 상장을 합친 높이가 마침 그날 새벽에 누군가가 보육원 문 앞에 놔두고 간 아기의 키와 비슷했다. 중학교 무렵부터 그녀와 나는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십여 년 넘게 경쟁자라는 자리에 놓여져 있던 진이는 어느새 내가 가장 필요로 하게된 친구의 자리로 옮겨와 있었다. 우리는 입양되거나 양녀로 다른 집에 가지는 않았지만 누군지 모를 후원자가 있어 고등학교까지는 그럭저럭 별 걱정 없이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대학진학을 결정할 때가 다가오자 후원자로부터 연락이 뚝 끊겨버렸고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학에 진학해서 그림을 더 그리고 싶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던 우리는 미대에 합격을 했는데도 입학금을 낼 돈이 없었다. 그렇게 우울한 몇 달을 보내고 있으려니 고등학교 때의 미술선생님으로부터 갑작스런 연락이 왔다. 국비지원장학생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우리는 시험을 쳤고 합격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보육원을 나와 대학로에 살게 되었다. 국비지원장학생 조건에 기숙사도 있었지만 진이나 나나 왠지 답답한 기분이 들어 거절했다. 그리고 이 대학로에 하숙을 하게 되었는데, 이 대학로의 분위기는 마치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을 연상케 했다. 샤갈과 모딜리아니가 어딘가 어두운 까페의 구석에 앉아 기욤 아폴리네르와 같은 시인들과 속삭이며 압상트 주를 마시거나, 꼽추화가 로트렉이 화려한 밤거리의 어디선가 환락에 젖어있을 그런 분위기 말이다. 이런 밤의 불빛에 취해 진이와 나는 마치 부나방처럼 밤거리를 쏘다녔다. 그리고 우리 나이의 젊은 아이들이 모여있는 떠들썩한 곳이라면 어디든 들어갔다. 들어가 보면 그곳은 거의 레이브 파티장이거나 테크노 클럽, 힙합 클럽, 펑크록 클럽 등이었는데 음악을 가리지 않고 진이와 나는 흐느적대며, 혹은 격렬하게 몸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개는 새벽 3시가 넘어서야 하숙집으로 돌아와서는 복숭아 맛이 나는 샴페인을 터트리고는 한 병을 둘이서 다 비우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4.
“젠장. 또 그 꿈을 꾸었어...”
어떤 꿈 인줄 뻔히 알면서도 의례
“무슨 꿈?”
이라고 물어봐 주는 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하얀 침대시트에 부서지는 햇살이 따갑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다. 침대에 누워서 꼼지락대던 나는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가야하는 날인데. 나는 격일제로 수업 시간표를 짜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2시부터 8시까지 비디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늦었다! 얼른 옷을 주워 입고 식탁에 뒹굴던 식빵을 하나 입에 물고 냅다 뛰었다. 다행히 비디오방은 하숙집에서 도보로 20분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조금 늦었지만 주인이 별로 겁나지는 않았다. 나를 해고하고 나면 주인은 쉬는 날도 없이 혼자 일 해야될게 뻔하니까, 그렇게 하진 못할 것이다. 왜냐면 이 비디오방 주인 아저씨는 이 근방의 대학생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파다하게 변태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이 비디오방이 처음 생겼을 무렵, 아르바이트라고는 믿을 수 없는 높은 시간당 급여에 아이들은 돈에 눈이 멀어, 너나 할 것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몰려들었었다. 하지만 다들 일주일을 못 넘기고 그만두고 말았다. 이 주인이 여자 아르바이트생만 뽑아서 성희롱을 한다는 후문이었다. 하지만 돈에 눈먼 나는 한 번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전날 라면을 잔뜩 먹고 퉁퉁 부은 얼굴로 커다란 멜빵바지를 입고 비디오방을 찾아갔다. 주인이 뚱뚱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후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생이 없어 며칠째 쉬지도 못하는 곤욕을 치르고 있던 주인은 쌍수 들고 나를 환영했다. 다음날부터 부기가 쭉 빠진 나의 날카로운 얼굴과 말라빠진 몸매의 진상을 안 주인은 뒤늦게 나를 고용했음을 후회했지만 뭐 별다른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를 가만 내버려두었다. 물론 나에겐 손도 대지 않았다. 마른 여자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나 뭐라나 하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일은 하품 날 정도로 쉬웠다. 무언가 부끄럽기도 하고 성급해 보이기도 하는 남녀가 들어와서 비디오를 고르면 방 번호를 알려주고 비디오를 틀고 끄면 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남녀가 머리는 까치집을 짓고 입술은 빨갛게 되어 상기된 모습으로 가게를 나가고 나면, 그 방을 치우면서 방에 가득 찬 후끈한 열기와 매캐하고 야릇한 냄새로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 어렴풋이 짐작해 볼뿐이었다. 가게에는 정말 볼만한 비디오가 없어서 나는 6시간 동안 작은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거나,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5.
그 날도 나는 세 쌍의 남녀에게 비디오를 틀어주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었다. 문득 어제 펜던트를 주워준 남자가 생각났다. 그 남자의 희고 길다란 손가락. 나는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을 가진 사람은 여자나 남자나 병적으로 좋아했다. 이유는 확실치 않다. 그냥 그런 손가락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고 좋을 뿐이다. 그런 손가락을 볼 때마다, 나는 무턱대고 달려들어 입에 넣고 손가락들을 빨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왠지 그 손가락들에서는 달콤한 꿀이 흘러나올 것 같았기 때문일까.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빼서 펜던트를 보았다. 반짝이는 은빛 수면에 유영하는 한 마리의 푸른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이 물고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혼자 있어서 외롭지는 않을까. 순간 물고기가 아주 희미하게나마 파닥거린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본 걸까. 눈을 비비고 물고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그런데 푸른빛이 아주 조금 투명해 진 것 같다.
6.
졸다 보니 벌써 여덟 시다. 방을 한 번 빙 둘러보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주인 아저씨가 올 때가 됐는데...
“딸랑”
가게문의 방울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주인 아저씨 인가보다. 얼른 일어서려는데 쌓아두었던 비디오테이프에 그만 머리가 부딪쳐 와르르 무너지는 비디오테이프들을 온 몸에 맞고 말았다.
“우씨, 장난 아니게 아프잖아.”
일어서는데 피식 웃고있는 하얀 얼굴이 보였다. 어제의 그 펜던트 남자였다!
“은아, 되게 아프겠다.”
진이가 얼른 달려왔다. 나는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아 참, 인사해. 내 남자친구 재영이야. 나이는 우리랑 동갑이야. 소개가 늦어져서 미안해.”
진이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 재영아. 얘는 내 단짝인 은이야. 되게 좋은 애야.”
재영이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다랗고 흰 손가락. 하지만 두 번 다시 자연스레 이 손을 잡기는 어려우리라. 그는 진이의 남자친구였으니까 말이다. 하긴 내가 남자라도 진이를 좋아할 테지. 머리카락은 기다랗게 굽이쳤지만, 바싹 마른 데다 항상 인상을 쓰고 다니며 신경질적으로 굴던 나와는 달리, 진이는 여성스런 단발에 귀염성 있는 외모와 붙임성을 지닌 아가씨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주인 아저씨가 들어왔다. 비디오 가게를 나온 우리는 여느 때처럼 대학로를 쏘다니다가 레이브 파티가 열리고 있는 클럽에 들어갔다. 그 날 따라 bar에 앉아 샴페인만 들이붓고 있던 나는 진이와 재영이의 부축을 받아서 겨우 하숙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7.
꿈을 꾼다. 나는 거대한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된다. 하늘은 어둡지만 왠지 눈이 부셔서 눈물이 찔끔 난다. 빌딩 숲을 부유하다보면 미끄러질 듯한 빌딩유리에 내 모습이 비춰지곤 한다. 자세히 보려고 하지만 눈물 때문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늘이 오색으로 번뜩인 찰나, 갑자기 눈을 씻은 듯 시야가 맑아지면서 유리 속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곳엔 길다랗고 굽슬굽슬한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신비한 은빛 머리칼을 곱게 빗고 있는 한 마리의 인어가 보였다. 유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유리에서 강한 전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와, 나는 몸서리치며 꿈에서 깨었다.
8.
“진이야, 나 오늘 말이야... 평소와 다른 꿈을 꾸었어.”
“어떤 꿈이었는데?”
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조차 그 꿈이 무얼 뜻하는지 몰랐으니까 말이다. 평소에 그 꿈의 의미를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막상 그 내용이 바뀌고 나니 왠지 호기심이 생긴다. 꿈은 왜 바뀐 걸까? 나는 하루종일 어젯밤에 꾼 꿈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비디오 방 카운터에 앉아있는 지금까지. 생각을 하느라 무심결에 목걸이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해서인지 목걸이가 ‘탁’하고 떨어졌다. 만들어진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목걸이를 걸기 시작한 것이 그러니까... 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내가 이 목걸이를 어디서 샀더라. 생각은 십여 년 전의 인도인들이 살던 골목으로 넘어간다.
9.
어릴 적, 그러니까 초등학교를 들어가기도 전이였다. 내가 사는 보육원에서 쭉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큰 초록색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그 나무다리를 지나 좀 걷다보면 어느덧 나의 눈에는 신기한 풍경들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요술과도 같았다. 어느 날 술래잡기를 하다가 길을 잘못 찾아들어 헤매다 발견한 그 인도거리에 나는 곧 매혹되어버렸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인도인들이 살던 거리 특유의 향불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은은하고도 어지러운,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냄새. 그 냄새에 이끌려 나는 열에 들뜬 마음으로 그 거리의 골목골목을 누볐었다. 골목에서는 카레 냄새가 나기도 했고, 담배가 구수하게 타는 냄새라든지, 쌀 볶는 냄새가 풍겨져 나오곤 했다. 하루는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마치 귀신에 홀린 듯, 호랑이가 늦은 밤에 아이들 이름을 불러서 잡아먹었듯, 무언가에 홀린 듯한 몽롱한 눈으로 비칠거리며 다리를 건너 그 거리로 갔었다. 때마침 그곳은 정말 전설의 고향이라도 되듯, 푸르스름한 새벽공기에다 안개까지 자욱히 끼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곳곳에 깜빡이는 노인들의 기다란 담배 쌈지에서 나오는 하얀 불빛들만이 마치 반딧불처럼 거리의 이정표 역할을 해 줄 뿐이었다.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간신히 걸어가던 나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에서 피가 났다. 겨우 일어서서 옷을 털고 왜 넘어졌나 땅바닥을 살펴보았더니 노란색의 작은 판자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판자에는 붉은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웃고있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판자 뒤편에는 너무 자욱한 안개 때문이었는지,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한 노파가 마치 유령처럼 앉아있었다. 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노파는 알록달록한 무지개색깔의 모자를 쓰고, 나무판에 노란 천을 깔아 무언가를 팔고 있었다. 천 위에 쭉 늘어서 있는 자잘한 것들이 무엇인가 하고 쪼그려 앉아 유심히 살펴보려니, 물고기들이 그려진 목걸이, 귀걸이, 반지, 팔찌 등의 장신구들이 아주 많았다. 물고기가 그려진 반지, 은 물고기가 달린 은 귀걸이, 검은 물고기가 새겨진 금팔찌 등이 그 가판대의 주된 상품들이었다. 반짝이는 그것들을 한참을 보고 있으려니 노파가 나에게 무어라고 말을 했다. 아니, 소리내어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신기하게도 마음속으로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어떠니?’
“무척 예뻐요. 물고기들이 반짝반짝하고 빛이 나요.”
노파는 얼굴에 잠깐 웃음을 머금었다. 문득 알록달록한 모자 아래 노파의 얼굴이 복숭아 빛으로 물들면서 나와 같은 또래의 아이얼굴로 보였다. 머리가 하얗게 샌 것만 빼면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내가 깜짝 놀라서 노파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으려니 노파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주름이 지고 눈이 움푹 들어간 고목같이 변해있었다. 아니, 원래 그랬던 건가. 모르겠다. 이 곳에 오면 언제나 시간과 공간이 없어지고 내가 없어진 듯한 야릇한 기분이 든다. 노파는 또 나에게 물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골라보렴. 선물로 줄게.’
나는 푸른빛이 도는 물고기가 그려진 은목걸이를 들어올리며
“이게 제일 예뻐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파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잔잔한 웃음을 눈가에 지으며 말했다. ‘넌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평생 있게 될 거다. 영원히...’
자욱한 안개를 뒤로하고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목걸이를 두 손에 꼭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나는 그 목걸이를 항상 소중하게 여기며 목에 걸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목걸이의 펜던트를 보았다. 기분 탓인가. 물고기가 그 전보다 많이 투명해 진 것 같다.
10.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왔다.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 샤워를 하고 창고로 내려가서 샴페인을 한 병 꺼내서는 거실로 가서 비디오를 켰다. 내가 하숙하는 집 지하창고에는 샴페인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하숙집 주인의 말로는 지금은 죽고 없는 남편이 주조공장을 했었다고 한다. 이 집도 그 공장 터였는데, 갑자기 부도가 나서 남편은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산 속을 헤매며 풀밭에서 아무렇게나 자곤 하다가 그만 유행성 출열혈에 걸려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연으로 미망인이 된 부인을 동정해 빚쟁이들은 더 이상 빚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하긴 사람이 죽고 난 마당에, 갚을 능력이 없는 죄 없는 사람을 족쳐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공장을 개조해 집을 지어 하숙을 들였다. 그 공장에서 주로 만들어진 술이 샴페인이었는데, 덕분에 채 팔지도 못한 샴페인은 지하창고에 들어가서 조용히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 부인은 하숙한 사람들 중 생일을 맞은 사람이 있기라도 하면 창고로 가서 샴페인을 내어 왔는데,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지하창고로 내려가서 꺼내 먹어도 좋다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매일 샴페인을 먹을 수 있었는데, 과거의 아픔을 간직한 것이라 그런지 샴페인의 맛은 기가 막혔다. 특히 복숭아 맛 샴페인이 가장 달콤하고 향이 풍부하고 부드러웠는데, 그래서 진이와 나는 저녁마다 샴페인을 거의 입에 달고 살았다. 아르바이트 비로 하숙비를 대서 늘 가난에 시달리던 우리는, 어떤 날은 밥 대신 샴페인으로 배를 채우기도 할 정도였다. 그래도 지하창고의 샴페인 병 탑들은 워낙 어마어마해서 조금도 축나지 않은 듯이 보였다. 지하창고에 들어가면 조금 눅눅한 공기에는 언제나 코를 찌르는 듯한 달콤하고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향내가 터질 듯이 녹아있었다. 냄새만 맡고도 취한다던가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거다.
11.
나는 샴페인이 좋다. 그 달콤한 과일향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모르게 기분 좋게 만취해서 다른 나라로 가버린 다는 것이 좋았다. 죽음도 그렇게 고통 없이 달콤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샴페인을 마시며 비디오 테이프를 보다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디선가 감미로운 여가수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온 샹송이 부드럽게 내 귀를 감싼다. 꿈을 꾼다. 나는 거대한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된다. 하늘은 어둡지만 왠지 눈이 부셔서 눈물이 찔끔 난다. 빌딩 숲을 부유하다보면 미끄러질 듯한 빌딩유리에 내 모습이 비춰지곤 한다. 자세히 보려고 하지만 눈물 때문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늘이 오색으로 번뜩인 찰나, 갑자기 눈을 씻은 듯 시야가 맑아지면서 유리 속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곳엔 길다랗고 굽슬굽슬한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신비한 은빛 머리칼을 곱게 빗고 있는 한 마리의 인어가 보였다. 유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유리에서 강한 전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와, 나는 몸서리치며 꿈에서 깨었다.
12.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든다. 왜 일까. 잠에 취한 눈을 억지로 뜨자, 나의 기다란 머리카락에 목걸이가 걸린 것을 발견했다. 목걸이를 머리카락에서 떼어내고 고리를 풀어서 펜던트를 가만히 보았다. 물고기를 자세히 살피던 나는 깜짝 놀랐다. 물고기가 언제 이렇게 희미해졌지? 칠이 벗겨진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다. 수업도 없고 해서 진이와 나는 하루종일 열리는 ‘이어도’의 레이브 파티에 가기로 했다. ‘이어도’는 우리가 잘 가는 테크노 클럽이었다. 진이의 남자친구 재영이도 오기로 했다. 도시락으로 샴페인을 몇 병 싸들고 가야지.
13.
10시쯤 되어 ‘이어도’로 갔다. 사람들이 벌써부터 많이들 와서 커다란 댄스홀이 가득 들어찼다. 디제이들이 위에서 열심히 판을 스크래치하고 믹싱하고 있다. 오늘의 선곡은 왠지 행복하고도 아련한 기분이 들게 한다. 나는 댄스홀에서 흐느적대며, 긴 머리를 나풀대며 춤을 계속 추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 테이블에 앉아있는 진이와 재영이가 보인다. 둘은 바싹 붙어 앉아 키스를 하고 있다. 왠지 슬퍼진다. 눈에 물기가 고인다. 이건 눈물인가. 누군가 나에게 푸른빛이 나는 담배를 준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모금 빨아들였다. 몽롱하다. 조명이 핑핑 돌고, 바닥이 나를 들어올렸다 내렸다하며 철썩철썩 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파도처럼 말이다. 문득 나의 손에 차가운 무언가가 쥐어진다. 뭐지? 손을 위로 올렸다. 총. 총이다! 어지럽고 현란한 조명, 푸르스름하게 반짝이는 블랙등, 쿵쿵거리는 기계음의 스크래치 사운드, 흐느적대며 춤추는 사람들, 어디선가 불어오는 희미한 마리화나 연기, 이 곳은 지금 거대한 혼돈. 그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로지 내 주위만이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다. 식은땀이 한줄기 등을 타고 흘렀다. 내 손에 들린 총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총을 든 채로 진이와 재영이가 키스하고 있는 데로 갔다. 둘은 지금 한창 서로의 입에 혀를 밀어 넣고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는 중이었다. 나는 재영이의 머리를 확 잡아채 그의 입술을 격렬하게 빨고는 그의 입에 혀를 집어넣었다. 놀란 재영이의 혀는 새로운 상대에 깜짝 놀라는 듯 했으나, 곧 적응하고 받아들였다. 두 혀가 격렬하게 엉키고 재영이가 침을 삼키는 찰나, 나는 총을 정확히 그의 정수리에 갖다댔다.
14.
“탕!”
재영이가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 엄청난 소리의 파장으로 이곳의 모든 공기는 이질감으로 압축되어 흘렀다. 아니, 주위의 모든 소음과 공기는 나에게로 빨려 들어와서, 나를 통해 다시 흘러나와 ‘이곳’은 ‘이곳’ 아닌 다른 곳이 되었다. 주위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나는 머리가 날아가 버릴 듯한 공포를 느끼며 총을 그대로 한 손에 들고, 동굴 속 어둠같이 깜깜한 눈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내달았다.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었다. 무작정 달리는 나를 따라오는 진이의 맞잡은 손에 땀이 촉촉하게 배여 나왔다. 순간적으로 손이 미끌렸다. 진이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멍하게 서 있었다. 차가 한 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진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시끄러운 경적소리를 내면서. 진이는 그 소리가 안 들리나보다. 나는 절망적인 슬픔을 느끼며 그녀에게로 내달았다. 자동차의 불빛이 점점 다가왔다.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다. 늦었다! 나와 그녀는 차에 함께 깔릴 것이다. 순간적으로 목걸이의 펜던트가 찰랑. 펜던트 속의 물고기가 없다. 나는 그 때 보았다. 밤하늘을 수놓으며 은빛 물살을 가르는 푸르고 투명한, 거대한 별빛 물고기를. 내 꿈속에 항상 나오던 그 물고기였다. 나는 진이를 꼭 끌어안았다.
15.
햇빛이 눈부시던 어느 오후였다. 보육원의 원장님은 원생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새로운 친구가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새로 들어온 그 아이의 이름은 은진이였다. 원장님은 나와 그 애가 동갑이니, 나보고 특히 신경을 써서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라고 하셨다. 나는 그 애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길다란 그녀의 머리는 끝에 퍼머를 했는지 곱슬곱슬했다. 가늘고 숱 많은 그녀의 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는 순간 덴마크에 있다는 인어공주 동상이 생각났다. 파도치는 넓은 바위 위에 가련하고도 애달픈 표정으로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 청동동상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었다. 사진에서 본 인어공주처럼 진이도 반짝이며 빛나고 있고,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한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과 빨간 입술.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난 그때부터 진이가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이는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그냥 저 만큼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여기고 사사건건 경쟁하려 들었다. 어릴 적의 그녀는 나에게 그렇게 적대적이었다. 그 때의 그녀는 마치 아기고양이 같았다.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동그랗고 귀여운 발 밑에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고 눈을 빛내는 그런 아기고양이 말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녀와 나를 가까워지도록 만들었고, 그렇게 나는 20살이 된 지금까지 그녀의 곁에 자연스레 머물러 있게 되었다. 진이를 처음 본 날부터 나는 죽 머리를 길러서 머리카락이 기다란 데다가, 제법 갸름하고 해사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남자애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같은 머리를 했다고 해서 내가 진이처럼 여성스러워 질 수는 없었다. 나는 남자애들이 싫었다. 그 애들은 더럽고 땀 냄새가 났다. 말하는 것도 거칠고 맘에 들지 않았다. 진이의 머리카락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로부터 점점 짧아져 갔다. 하지만 그와 반비례해 그녀의 여성스러움은 사과처럼 점점 더 농염해져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은은하던 향기는 어느새 터질듯해 나를 종종 어지럽게 했다. 진이에게 온 남자애들의 편지는 내가 전해준다는 핑계로 받아서는 불태워 버렸으며, 등하교길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은 진이 몰래 골목으로 끌고 가 흠씬 두들겨 패줬다. 그것도 모르고 진이는 나에게
“은이는 참 남자한테 인기가 많구나. 그런데 난 아무도 좋아해 주질 않아. 내가 그렇게 밉게 생겼니?”
하며 참으로 고민스러운 얼굴로 골똘히 물어오곤 해서 나의 마음을 헤집고는 했었다.
16.
고등학교 때쯤이었을 것이다. 자다가 목이 말라 깬 나는 물을 마시려고 부엌으로 갔다. 물을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키고 방으로 돌아오니, 같은 방에서 자고 있던 진이의 자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진이와 나는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났다. 막 성숙기를 마친 부드러운 가슴과 허리의 곡선, 날씬한 팔 다리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무릎을 꿇고 곤히 자고있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새빨간 입술. 그 농염한 붉은 빛은 터질듯했고 교교한 달빛을 받아 더욱 나를 미치게 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신선한 과일의 육즙을 한 입 베어먹은 듯 했다. 달콤하고도 한없이 우울한 그런 맛이었다. 그녀는 다행히 깨지 않았다. 진이의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주고 나는 그날 밤 내내 울었다.
17.
나는 거대한 한 마리의 물고기다. 하늘은 어둡지만 왠지 눈이 부셔서 눈물이 찔끔 난다. 빌딩 숲을 부유하다보면 미끄러질 듯한 빌딩유리에 내 모습이 비춰지곤 한다. 자세히 보려고 하지만 눈물 때문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늘이 오색으로 번뜩인 찰나, 갑자기 눈을 씻은 듯 시야가 맑아지면서 유리 속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곳엔 길다랗고 굽슬굽슬한,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신비한 은빛 머리칼을 곱게 빗고 있는 한 마리의 인어가 보였다. 유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유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나는 유리조각들을 피하며 인어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아니었다. 진이구나! 그녀는 진이였다. 진이는 애달픈 곡조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산호로 만든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다. 그녀가 나를 본다. 보랏빛의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친다. 거대하고 투명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물고기. 그녀는 나의 등을 쓰다듬는다. 나는 그녀의 손길이 너무 간지럽고 기분이 좋아서 지느러미를 움찔거린다. 나는 등에 그녀를 태운다. 그녀와 나는 바다 속 여행을 떠난다. 별로 뒤덮인 바다다. 그녀는 낚싯대로 여러 가지 색깔의 별을 낚아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건다. 귀에도 붉은 별, 푸른 별을 하나씩 꽂았다. 그녀는 나에게도 별 목걸이를 만들어준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진이와 나는 구름을 한 조각씩 마시고, 배가 고파지면 달을 한 조각씩 뜯어먹었다.
18.
이렇게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시간들은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늘의 어디선가 구멍이 생겨버렸는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별 바다의 코발트 블루의 바닷물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물이 반쯤 빠지자 물고기인 나는 숨쉬기가 힘들어 헐떡대었다. 착한 진이는 나에게 키스로 공기를 불어넣어 주었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물이 거의 다 빠지자 진이도 고통으로 힘들어했다. 나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마지막 힘을 다해 아가미를 한 번 움찔거리자, 갑자기 엄청나게 강렬한 빛이 들어왔다. 나는 눈도 뜨지 못하고 눈물만 흘려대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에서 풍겨져 나오는 냄새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진이였다. 엄청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게 분명하지만, 그녀와 나는 함께 있는 것이다! 기쁨에 가슴이 뭉클해져서 크게 소리지르고 싶었다. 나의 귀에는 커다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 아기가 아니라 두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19.
산모가 핼쑥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
“내 아기, 아기는 건강한가요?”
“저 그게...”
의사는 말끝을 흐렸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산모가 몸을 일으켜 아이를 보려고 했다.
“세상에나...!”
“샴 쌍둥이를 낳으셨어요.”
산모는 기절해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의 괴이한 형태를 보고, 혹시 괴물이 아닐까 하는 극도의 공포심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샴 쌍둥이를 낳으면? 우선 떼 내어야 한다. 두 아이가 그렇게 붙은 채로 살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을 떼 내기 위해서는 한 아이를 죽여야 한다. 죽은 아기는 생선토막처럼 잘려서 검은 비닐봉투에 버려졌다.
20.
누군가 나의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있다. 아플 텐데 아픈 느낌이 없다. 아니, 사실은 엄청난 고통이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가고 있지만, 왠지 내가 죽어야 진이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그저 머리와 꼬리가 없어지는 게 조금 허전할 뿐이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검은 기름으로 가득 찬 바다에 버려졌다. 진이와 내가 놀 던 별 바다와는 전혀 다른 바다. 나 같은 물고기들이 몇 마리 살고 있다. 그들의 몸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와 다른 물고기들은 저 찬란한 별빛바다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21.
열살 난 현이의 조그만 엉덩이에는 푸른 물고기가 한 마리 그려져 있다. 엉덩이의 몽골반점도 없어진지가 오래인데, 이상하게 이 푸른 물고기만은 문신을 한 듯 선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엉덩이에 있다는 물고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위치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저 엄마에게 보고 그려달라고 해서 모양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가을소풍을 갔다. 장소는 매년마다 가는 식물원이었다. 사생대회 시간에 현이는 흙바닥에다 물고기를 한 마리 그렸다. 그리고 보니 자신의 엉덩이에 있다는 물고기와 꽤 닮았다. 가을 햇살에 노곤해진 현이는 은행나무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다.
“푸드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현이는 잠에서 깨었다. 어디서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푸드득”
아까 들은 소리와 같은 소리다. 어디서 난 것인가 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이 잠들기 전에 그린 물고기가 푸드득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고기는 몇 번 지느러미를 푸드득거리더니 곧 투명한 푸른빛이 되어 하늘로 두둥실 날아올랐다. 마치 거대한 물고기 애드벌룬처럼. 현이는 자신이 잠에 덜 깬 것이 아닌가 하고 눈을 몇 번이고 비빈 뒤 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여전히 그 거대한 물고기가 눈부신 가을햇살을 투명한 온 몸 가득 받고, 구름을 가르며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22.
여전히 푸른 물고기를 엉덩이에 간직한 채로 현이는 20살이 되었다. 20살이 되던 생일날, 어머니는 현이에게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현이가 샴 쌍둥이로 태어났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죽어간 또 다른 자신을 생각하며 조금 울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소녀는 자신의 엉덩이에 그려진 푸른 물고기와 상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23.
생일을 맞아 현이는 저녁에 친구들과 ‘푸른 물고기’를 찾았다. ‘푸른 물고기’는 얼터너티브 록 클럽이다.
코발트 블루로 페인트칠이 된 그 지하의 클럽에 들어서면, 현이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편안한 의자에 푹 꺼져 들어가 예쁜 글라스에 담긴 샴페인을 홀짝이며 밴드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따스하고, 아늑하고, 어쩌면 조금은 애달프기도 하고, 행복이 깨질까 두려워하는 자신이 미약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그런 행복이었다. 샴페인의 달콤한 향내를 타고 조용하면서도 맑은 보컬의 노랫말이 들려왔다.
현이는 그날 따라 유난히 샴페인을 많이 마셨다. 그녀는 원래 샴페인을 좋아했다. 샴페인은 마셔도 마셔도 눈물이 나지 않는 술이라나. 만취가 된 그녀는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그 날 클럽에서 들은 노래를 흥얼거리다 그녀는 잠이 들었다.
24.
꿈을 꾸었다. 작고 푸른빛을 내는 물고기가 바닷길을 안내해 주었다. 그것은 별빛 바다였다. 현이는 별 꽃을 꺾어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물고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물고기는 붉은 색이 될 정도로 부끄러워하면서도 좋아했다. 물고기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 입을 조금 달싹이는 것일 뿐이었는데, 그녀에게는 의미가 분명하게 전해져 오는 그런 말이었다.
“내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의 꿈속에 나타날 거예요. 나는 물고기가 아니에요. 당신의 샴 쌍둥이였죠. 다시 내가 당신 꿈에 나타난다면, 난 조금 더 커져있을 거예요. 그리고 꿈에 나타날 때마다 점점 커져, 내가 어릴 적에 당신이 본, 하늘을 날던 물고기 만해지면 나와 함께 별빛바다로 떠나기로 해요.”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그맣고 푸른빛이 나는 물고기가 마치 아주 오랫동안 사귄 친구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는 아주 빨리 헤엄쳐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검은 심해로 빠져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몹시도 가슴이 아팠다.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울고 있었다.
25.
현이는 꿈을 꾸었다. 매년 생일 때마다 꾸는 꿈이다. 올해로 현이는 50살이 되었으니, 벌써 서른 번째로 꾸는 꿈이다. 매년 반복된 그녀의 꿈속에서 푸른 물고기는 어느새 거대해져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흰머리로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을 풀었다. 어느새 그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굽이쳤다. 끝 부분은 곱슬곱슬한 은 보랏빛 머리칼이었다. 그녀는 한 마리의 인어였다. 그녀는 거대한 물고기의 등에 올라탔다. 그들은 그렇게 둘이서 행복하게 별빛이 흩뿌려진 바다를 끊임없이 유영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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