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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아-단편소설3(2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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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히피소녀를 사랑하다
Intro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 ‘지금이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가을비가 내리는 한 밤중, 나는 결단을 내렸다.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히말라야로 떠날 마음의 준비가 된 것이다. 그곳으로 가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꿈꾸는 보헤미안
꽤 더운 초 여름날이었다. 나는 기차 플랫폼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기차를 집어타려 하고 있었다. 그 때 내 나이는 20살이었는데 갓 대학을 입학한 새내기였다. 이래서 다 대학가나 싶을 정도로 정말 한가로운 생활이었다. 아직 6월 중순인데 벌써 방학이라니. 불과 작년만 해도 비좁은 교실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펜을 굴리고 있었을 텐데. 고등학교의 그 긴장감과 대학교의 이 느슨함을 섞어 반씩 공평하게 나눴으면 좋겠다. 이건 도대체 적응이 되질 않으니 말이다. 어제 종강을 하고 과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시고는, 정오가 다 되어갈 즈음에 겨우 일어났다. 목은 말랐고 머릿속은 공허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물을 마셨다. 속이 메슥거렸다. 아마도 어제 술 때문인가 보다. 머리가 띵하다. 물을 한 잔 더 마시고는 다시 누웠다. 집이 찜통이다. 바람이나 좀 쐴까 하는 생각에 옷을 대강 주워 입고는 골목으로 나왔다. 바람 한 점 없는 정말 화창한 날씨였다. 한여름 같군.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텅 빈 머리로 계속 걸었다. 마치 내 몸에 발만 있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발이 멈춘 곳은 엉뚱하게도 기차역이었다. 왜 이런 곳까지 와 버린 거지? 역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 심지어 검표원 까지도. 모두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멍한 기분으로 기찻길이 있는 밖으로 나갔다. 칠이 벗겨진 알록달록한 벤치가 몇 개 있다. 여긴 바람도 제법 분다. 좋아. 여기서 좀 쉬었다 가야지. 벤치에 길게 누웠다. 졸린다...
누군가 귀에다 대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거리에 비둘기 날고 노래가 날고...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그건 정말 멋진 얘기야...”
눈을 떴다. 온통 꽃밭이다. 내가 왜 꽃밭에 누워있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깜짝 놀랐다. 분홍빛 눈동자 두 개가 나를 보고 있다. 빨강의 기다란 속눈썹이 깜빡깜빡거린다. 머리카락은 짙은 초록색인데, 구불구불하고 무릎까지 닿아있다. 머리칼 사이에는 눈동자 색깔과 같은 꽃 덩이들이 매달려있다. 난 한동안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입김이 뜨거웠다.
“넌 누구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딸기향이 났다.
“난 핑크레인-레드윈디-그린우드-사파이어-카시오페이아야. 짧게는 핑키라고 불러.”
정신이 없다. 저 분홍빛 눈은 도대체 뭐고, 초록색 머리는 뭐고, 우습지도 않은 긴 이름은 다 뭐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저 여자 홀딱 벗고 있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여긴 어디지?”
“알프스 산이야.”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 알프스라... 뭐라고? 그럼 저 기슭에는 멍청한 슈샤드들이 어슬렁거리고 있고, 어디선가 하이디가 구슬 같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달려오겠군! 내가 어처구니 없어하는 동안 그녀는 나에게 담배를 건넸다. 필터에서 딸기향이 난다. 한 모금 빨아들였다. 거대한 폭포 위에서 신나게 아래로 다이빙하는 기분이 든다. 아래로...아래로... 필터를 봤다. 레모네이드 체리콜라 럭키 스트라이크. 이상한 이름이다. 그리고 연기도 안 난다. 입에서 물방울이 나온다. 여긴 물 속이다. 난 정말 다이빙을 한 것이다! 나는 물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그녀도 내 주위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초록색의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해초 같다. 푸른 물의 색깔과 머리카락의 초록색이 퍽 어울린다. 수면에 햇빛이 반짝인다. 나는 천천히 헤엄을 친다. 기분이 좋다. 마치 한 마리의 플랑크톤이 된 기분이다.
갑자기 밑이 축축하다. 눈을 떴다. 익숙한 벽지의 무늬가 보인다. 아. 여기는 내 방이지. 아니. 내가 잠시 어딘가에 다녀왔었나. 나는 바다로 가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아니. 산에 갔다 온 것 같기도 하군. 이런. 오줌을 쌌다! 20살에도 오줌을 싸다니. 지린내가 난다. 속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가족들이 베란다 문을 열어놓고 대나무 자리 위에서 자고 있다. 속옷을 꺼내어 갈아입고는 이불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가족들 옆에 누웠다. 내가 정말 알프스에 갔다왔었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20살의 어린 보헤미안이다.
21C 펑크보이
전화가 왔다. 스킨헤드다.
“여~펑크뽀이! 뭐하냐? 오늘밤에 클럽에서 공연 있는 거 알지?”
그렇다. 오늘은 수요일. 펑크 록 클럽 ‘플라스틱’에서 정기공연이 있는 날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또한 ‘펑크보이와 떨거지들’의 광란의 슬램파티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펑크보이와 떨거지들’은 총 4명인데, 모두 클럽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내가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창 밖을 보니 주위가 새파랗다. 아무리 긴 여름해도 지긴 지나보다. 얼른 헤어 젤을 들고 거울 앞으로 갔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한껏 부풀린 다음, 헤어 젤을 머리카락에 꼼꼼하게 발라 한 올 한 올 세웠다. 도깨비 머리 같다. 그리고 피를 흘려 쓴 듯한 붉은 글씨로, 가슴 한 가운데 ‘Kill ME(날 죽여줘)!'라고 쓰여진 하얀 티셔츠를 입었다. 거기다 쇠 장식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가죽 목걸이와 팔찌도 하고, 쫙 달라붙는 가죽바지 주머니에는 쇠줄을 달아 늘어뜨렸다. 그리고 번쩍이는 워커를 신고는, 마지막으로 코에 안전핀을 꽂아 포인트를 주었다. 펑크 룩 완성!
골목으로 나왔다. 이제 완전히 어두웠다. 거리마다 네온사인이 번쩍이기 시작하고, 한껏 꾸민 젊은이들이 집에서 꾸역꾸역 몰려나와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찾아 대학로를 헤맨다. 대학로에는 웬만한 종류의 음악클럽은 다 모여있다. 얼터너티브, 하드코어, 펑크, 그런지, 힙합, 테크노, 재즈, 헤비메탈...등등. ‘떨거지들’은 클럽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네온사인이 깜빡이는 간판들을 보며 걷노라니 어지러웠다. 아. 찾았다! 형광빨강으로 ‘punx rock club PLASTIC'이라고 씌어진 거대한 하얀 날개 밑에 서있는 떨거지 셋 ― 스킨헤드, 불 대가리, 멜랑콜리 ―가 보였다. 스킨헤드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는 짧게 치켜 깎아 올린 머리에, 아래위가 붙은 형광주황색의 카레이서 옷을 입고 있다. 불 대가리는 마침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고 있었는데, 양쪽 머리를 아예 밀고 안쪽 머리만 남겨 닭 벼슬처럼 세운 일명 ‘모히칸 스타일’은 멀리서도 한 눈에 띄었다. 아니. 빨강으로 염색까지 했군! 진짜 닭 벼슬 같다. 멜랑콜리는 언제나 그렇듯 울적하다는 표정으로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바닥만 보고 있다. 그의 노란 티셔츠에는 ‘인생은 지루하다’라는 로고가 프린트되어 있다.
우리는 다 같이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실 문을 열자 땀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런 캐럿’이라는 펑크밴드가 한창 공연중이다. 목이 말랐다. 나는 우선 bar로 가서 냉장고에서 차가운 버드와이저를 한 병 꺼내 마셨다. 시원하다. 이 기분이다. 떨거지들은 벌써 미친 듯이 슬램을 하고 있다. 멜랑콜리가 가장 열성적이다. 그는 슬램을 할 때는 평소와는 완전 다른 사람이다. 그는 옷을 벗으면서 일명 ‘스트립쇼 슬램’을 하는데, 오늘은 정말 찬란한 팬티를 입었다. 반짝이 깃털이 달린 끈 팬티다. 그래도 경범죄로 경찰서에 잡혀 갈까봐서 겁나는지 그 안에 반바지를 입었다. 정말 희한한 녀석이다. 불 대가리의 붉은 머리가 미친 듯이 왔다갔다하는 것도 보인다. 좋아. 나도 슬슬 시작해 보실까. 귀가 멍멍해지면서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그래. 바로 이거다. 젊음의 느낌. 손가락에서 발끝 하나 하나까지 피가 돌고 살아있다는 느낌. 새벽 1시가 되어서야 갈기갈기 찢어진 티셔츠를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난 완전히 탈진했다. 옷을 벗는 둥 마는 둥 하고, 바로 방바닥에 고꾸라져 시체처럼 잠이 들었다. 죽음 같은 밤이다.
머리에 꽃을
벌써 8월의 마지막 주다. 황금 같은 20살의 여름날도 거의 끝나 간다. 낮에 너무 더워서 늘어져 있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깨어보니 저녁 무렵이었다. 배가 고팠다. 나는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는 듯한 기분으로, 어디론가 가서 저녁밥 대신 맥주를 진탕 마시기로 했다. 잘 때 입고있던 후줄근한 반바지와 티셔츠에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는 거리를 나섰다. 좀 열에 들 뜬 듯한 멍한 기분으로 간판들을 보았다. 거리의 불빛들이 환상적으로 뒤틀려 보였다.
마침 눈에 띄는 가게가 있다. 새하얀 눈송이 같다. 하얗고 동그란 가게. ‘club HIPPIE'. 동그란 통나무로 된 문에 달린 사과모양 손잡이를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은 온통 진초록이다. 푹신한 초록색 의자에 앉으니 커다란 사과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메뉴가 적힌 나뭇잎을 가져다주었다. 여자의 머리엔 노란색의 커다란 꽃이 꽂혀있다.
버터맥주. 땅콩맥주. 크림소다맥주. 사과맥주...특이한 메뉴들이군. 나는 메뉴에 있는 총 8가지의 맥주를 각각 한 병씩 시켰다. 무슨 맛일까 기대하면서 의자에 푹 꺼져들어 앉아 있으려니 어디선가 기타소리가 났다. 아. 클럽이니까 음악도 연주해 주나보군.
형들이 모이면 술 마시며 밤새도록
하던 예기 되풀이해도 싫증이 나질 않는데
형들도 듣기만 했다는
먼 얘기도 아닌 바로 10여 년 전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안에 어떤 곳에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머리에 꽃을 꽂았다고
거리에 비둘기 날고 노래가 날고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그건 정말 멋진 얘기야
그러나 지금은 지난 얘기일 뿐이라고
지금은 달라 될 수가 없다고
왜 지금은 왜 지금은
난 보고 싶은데
머리에 꽃을 머리에 꽃을...
(머리에 꽃을/ 전인권 글.곡)
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음악인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라디오에서? 아냐. 그건 아닌데.
문득 고개를 들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기다란 초록색 머리를 무릎께까지 늘어뜨리고는 분홍 꽃이 잔뜩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미니스커트에 가죽부츠를 신고,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여자인데. 어디서 봤더라.
노래가 끝나고 그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난 세 병째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땅콩맥주였다. 고소하고 달았다.
“앉아도 돼?”
“좋으실 대로”
그녀는 크림소다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시더니, 나에게 무언가를 주었다. 담배 한 갑이다. 레모네이드 체리콜라 럭키 스트라이크. 담뱃갑에 그렇게 적혀있었다. 핑크빛 눈동자 두 개가 날 보며 웃고 있다. 난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옷 입었네. 이거 피워도 되는 거야? 설마 또 폭포에서 다이빙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블라우스에 달린 수많은 꽃들 중에 두 개를 떼 내어, 한 송이를 내 머리칼에 꽂아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송이는 자기 머리칼에 꽂았다. 우리는 그렇게 머리칼에 분홍빛 꽃을 꽂은 상대방을 보면서 남은 맥주들을 다 마셨다. 밖으로 나오니 밤 공기가 쌀쌀하다. 어느덧 가을이 다가오고 있나보다. 마음이 춥다. 이젠 사랑을 할 때가 되었나보다.
그들의 연애행각
1. 일탈과 모방
펑크보이와 히피걸은 하릴없이 쌀쌀한 가을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하늘은 더 없이 맑고 높았고, 공기는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들은 심심했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데이트란 대개 뚜렷하게 할 일이 없다. 그냥 보고싶어서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백화점의 멀티 텔레비전 앞의 의자에 앉아 서로 손을 꼭 잡고서는 ‘천장지구’라는 홍콩영화를 보았다. 그들의 눈이 빛나면서 곧 영롱한 광채를 띠었다. ‘우리, 저거 따라 해보자!’ 그들의 눈은 마주보며 즐겁게 속삭였다.
우선 웨딩드레스가 필요했다. 펑크보이는 웨딩드레스 숍으로 히피걸을 데리고 갔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가게 앞의 커다란 돌을 쇼윈도에 던졌다.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면서 웨딩드레스가 눈앞에 있다. 펑크보이는 그 중 하나를 얼른 마네킹에서 벗겨 멍청하게 서있는 히피걸의 손을 잡고 냅다 달렸다. 그리고는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세워져있는 오토바이를 타고 도시 근교로까지 달렸다. 저 멀리 풀밭이 보였다. 펑크보이는 그 곳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히피걸이 웨딩드레스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는 풀밭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풀꽃화관이었다. 반지도 함께. 웨딩드레스를 입은 히피걸은 청초하게 빛나는 수줍은 소녀였다. 펑크보이는 그녀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고는, 반지는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리고는 히피걸에게 오토바이를 천천히 몰 테니, 아스팔트 도로를 맨발로 걸어서 따라오라고 했다. 어느덧 저녁 노을이 지고있었다. 도로에는 그들뿐이었다. 그들은 오렌지 빛 세상에 잠겨있다. 완전히 어두워지자, 펑크보이는 히피걸을 뒤에 태우고 시내로 돌아왔다. 훗날, 그 날을 회고할 때면 펑크보이는 이렇게 덧붙인다.
“내가 그때 쌍권총을 차고 있지 않았던 게 유일한 아쉬움이었지.”
그러면 누군가는 꼭 이렇게 말하겠지.
“그럼 너는 왜 가스통에 맞아 죽지 않고 그렇게 살아있는 거지?”
2. 유치, 티내기
펑크보이와 히피걸은 오늘 펑크보이의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스킨헤드와 불 대가리, 멜랑콜리 말이다. 그들의 아지트인 ‘플라스틱’에서 만나기로 했다. ‘플라스틱’은 수요일에 하는 공연 외에는 그냥 맥주를 파는 곳이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펑크보이는 왠지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 히피걸도 있고 하니, 더욱 그랬다. 그는 헤어 젤을 머리에 잔뜩 발라 머리칼을 뒤로 완전히 넘겼다. 하얗고 갸름한, 잘생긴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리고는 하얀 셔츠에다 검은색 넥타이를 헐렁하게 메고는 그 위에 가장 아끼는 가죽 점퍼를 입었다. 밑에는 빨간 체크무늬의 치마바지를 입고, 멋으로 바이올린 케이스를 등에 맸다. 눈썹에 핀을 꽂는 것도 잊지 않았다. 커다란 워커를 신고는 그는 거리로 나섰다. 펑크 룩 완성!
펑크보이가 만난 지 100일 되는 오늘, 처음으로 그의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니 히피걸의 마음도 설레었다. 모두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특히 펑크보이에게는 더욱 더.
그녀는 약속시간 3시간 전부터 화장대에 앉았다. 머리를 땋았다, 틀어 올렸다, 묶었다, 풀었다...그녀의 손놀림은 정신이 없었다. 결국 무릎까지 오는 기다란 초록머리카락을 몇 가닥만 땋아서 분홍 꽃을 묶기로 했다. 나머지는 그냥 구불구불하게 흘러내리도록 놔두었다. 까무잡잡하고 조그마하면서, 오목조목 어여쁜 그녀의 얼굴이 더욱 섹시하게 보였다. 이마와 팔에는 반짝이로, 가장 예쁘다고 생각되는 아라베스크 문양을 그렸다. 그리고는 연보라색 바탕에 하얀 꽃이 그려진 블라우스를 입고, 반짝이 미니 스커트를 입었다. 쇠 징이 박힌 가죽부츠를 신고 그녀는 즐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히피 룩 완성!
‘플라스틱’의 커다란 날개 간판 아래, 한껏 멋을 낸 두 명의 젊은이가 앉아있다. 나른하게 앉아있는 모양이 꼭 날개를 잃어버린 천사들 같다. 그들은 벌써 두 시간째 펑크보이의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지루해진 히피걸은 펑크보이에게 놀이를 하자고 한다. 그들은 공기놀이를 했다. 돈까스도 했고, 오징어 달구지도 했다. 고무줄 놀이도 하고, 실뜨기도 했고, 짤짤이도 했다. 왕자와 거지도 했고, 꼬마신랑 놀이도 하고, 구슬치기, 딱지치기, 심지어 푸른 하늘 은하수까지 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오지 않았고 그들은 그만 일어서기로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쳤다. 뭔가 즐거운 일들이 잔뜩 일어나리라고 기대했던 날이었는데. 우리의 100일. 그들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허리띠 모양의 똑같은 은반지를 두 개 사서 서로에게 끼워주었다. 펑크보이는 히피걸의 왼손 검지에. 히피걸은 펑크보이의 왼손 약지에. 히피걸은 이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자 검지에 꼭 맞는 반지가 남자 약지에 꼭 맞으면, 둘은 둘도 없는 천생연분이래.”
그리고 그녀는 씩 웃었다. 펑크보이도 웃었다. 그들은 커플가발도 샀다. 샛노란 바나나 색의
구불구불한 긴 머리 가발이다. 200일 때 맞춰 쓰기로 약속을 했다. 그들 주위에만 달콤한 딸기향의 공기가 머물고 있는 것 같다. 둘은 각자 마음속으로만 ‘삶은 참 아름답다’라고 생각했다.
3. 피터팬 신드롬
우울하게 하늘이 내려앉은 겨울밤이다. 히피걸은 겨울을 싫어한다. 꽃들도 더 이상 피지 않고, 새들도 그녀에게 속삭여주지 않고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늘색의 물감으로 팔에 꽃과 새들을 그렸다. 파랑새가 어디선가 날아올 것만 같다. 누군가 창문을 톡톡 두드린다. 정말 파랑새가 날아온 걸까? 유리창에 김이 서려 밖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유리창을 조심스레 열었다. 이런! 루돌프처럼 코가 빨갛게 된 펑크보이다. 그는 히피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놀랍게도 무척이나 따뜻한 손이다. 손을 잡고는 펑크보이는 히피걸에게 가장 즐거웠던 추억을 마음속에 떠올려보라고 한다. 히피걸은 가만히 생각하다, 히말라야 산맥의 평원에서 열렸던 히피들의 거대한 파티를 떠올리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펑크보이와 히피걸은 순식간에 하늘을 날아올랐다. 밤하늘은 생각보다 훨씬 따스했고 아름다웠다. 5년에 한번씩 열리는 그 파티 때에는 평소에 유럽․소아시아․아메리카 등의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있던 히피들이, 모두 히말라야 산맥의 양지바른 평원에 모인다. 그들이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를 다들 하나씩 들고서. 그 무언가는 악기가 되기도 하고, 술이 되기도 하고, 화분이 되기도 하고, 동전이 되기도 하고...아무튼 가지각색의 물건들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언어로 속삭이는 히피들로 평원이 술렁대면서, 그곳이 거의 다 찼을 때쯤이면 파티를 시작한다. 악기를 가져온 사람들은 일제히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춤을 추기도 하고, 그 동안 새로이 만들어낸 아라베스크 문양을 다른 히피의 팔에 그려주기도 하고, 자신이 나누었던 굉장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아무튼 가지각색의 일들을 한다. 술을 가져온 히피들은 돌아다니며 술을 나누어준다. 그녀는 4년 전에 이 파티에 다녀왔었는데, 그때엔 우연찮게도 104명의 히피가 백 파이프를 들고 와서, 그 청아한 소리에 맞추어 즐겁게 춤을 춘 기억이 있다. 그 때 그녀는 16살이었고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었는데, 17살의 체코에서 온 히피보이와 사랑을 나누었었다. 드넓은 히말라야의 눈 쌓인 거대한 산봉우리를 보면서. 그것이 그녀의 첫 경험이었다. 일주일간의 파티가 끝나고 히피보이와 히피걸은, 손을 꼭 잡고 머리에는 꽃을 꽂고 네덜란드로 가기로 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풍차 밑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보거나, 튤립을 꺾어 서로의 머리에 꽂아주기도 했다. 어느 날 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히피걸이 안네 프랑크의 동상을 보며 멍청하게 생각에 잠겨있을 동안 히피보이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그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하늘을 볼 때면 가끔씩 가슴이 아파 오면서 그의 하늘빛 눈동자가 생각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는 그녀에게 있어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눈이 따가웠다.
팅커벨이 그녀에게 다가와 마법의 가루를 뿌려준다. 히피걸은 눈가에 눈물을 닦아낸다. 그것들은 반짝이며 하늘에 흩뿌려져 검은 밤하늘에 수를 놓는다. 펑크보이의 따뜻한 손이 히피걸의 손을 더욱 꼭 잡는다. 그는 아, 아 ,음, 헛헛 하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흐른 흔적이 있었어
너의 눈을 바라봤을 때
서툴게 - 웃던 너의 모습이
오히려 날 더 속상하게 해
듣고 싶은데 - 들을 수 있을까
네가 지금 지닌 아픔을
나도 아직 - 너만큼 어리지만
같이 아파해 줄 순 있어
너에 대한 나의 믿음이
네 곁으로 날아가서 - 널 지켜주길
언젠가 네가 보여줬던
저 하늘 너의 별에 - 간절히 소망해
정말로 싫어도 - 어른이 되겠지
현실 속에 묻혀 지쳐가겠지
그전에 느끼는 이런 슬픔들은
오히려 소중할 지도 몰라
기억이 되 버린 날엔
사진처럼 남는다는 걸...
(웬디에게/ valentine 글.곡)
그녀는 그에게 방긋 웃어 보인다. 그들은 그렇게 손을 잡고서는 따뜻한 겨울 밤하늘을 날고 또 날았다.
4. 변종
화창한 어느 봄날. 펑크보이와 히피걸은 한가로이 공원 잔디 위에 누워있었다. 우뚝 솟은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그늘 밑에 누운 그들은 졸렸다. 히피걸이 투명한 오렌지빛깔의 CD 플레이어를 꺼냈다. 둘은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들었다. 여자 보컬의 목소리가 상큼하다. 귓속에서 톡톡 터진다. 레몬사탕 같다.
어두웠던 번데기 시절 예쁜 꽃들도 구경 못하고
쭈글거리는 주름 벗고 화려한 옷을 입고서
날아가자 얼룩무늬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자
잠자리와 벌들의 친구 되어 풀잎 위에서 노랠 부르고
날아가자 얼룩무늬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자
날아가자 얼룩무늬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자
색동옷을 입고서 저 위로 날아가자
꽃 냄새를 맡으며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껏 날아가자
날아가자 얼룩무늬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자 가고 싶은 곳으로
( 빠삐용/ 삐삐밴드)
그들은 나비가 되었다. 노래에 맞추어 오색 구름사이를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펑크보이는 얼룩무늬 날개를 단 나비가 되었다. 히피걸은 알록달록한 꽃무늬의 날개를 단 나비가 되었다.
둘은 꽃 속을 뒹굴면서 꿀을 실컷 빨아먹었다. 날아다니면서 먹기도 하고, 누워서 먹기도 하고, 서로 대롱을 엇갈려서 러브 샷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보드라운 꽃잎을 덮고는 나란히 잠이 들었다. 뭔가 차가운 것이 몸을 스치는 느낌에 깜짝 놀라 펑크보이는 잠에서 깨었다. 잔디밭의 스프링 쿨러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원하게 뻗어 나오는 물줄기가 햇빛에 부서져 반짝반짝 빛이 난다. 은가루 같다. 펑크보이는 스프링 쿨러로 가까이 다가갔다. 물줄기가 몸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기분이 좋다. 그는 펑크댄스를 추기 시작한다. 입을 쭉 내밀고는 비쩍 마른 몸을 건들건들 거리며 설쳐대는 모양이 해괴하다. 히피걸도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펑크보이와 함께 춤을 추고 있다. 그녀는 히피댄스를 추는 걸까. 아니. 그냥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 사이에 동그랗고 어여쁜 무지개가 뜬다.
어른이 되다
5월 셋째 주 월요일이다. 나는 21살이므로 오늘 성인이 된다. 그리고 그녀 ― 핑키 ―도 성인이 된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다. 아침에 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큰 목소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떨거지들이었다. 나는 잠이 덜 깬 부스스한 모습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자마자, 스킨헤드가 내 멱살을 홱 낚아채더니 나를 문 밖으로 끌어냈다.
“어른이 된 걸 축하한다아! 이 어린눔아!!”
불 대가리와 멜랑콜리가 나에게 밀가루를 뿌린다. 거의 한 포대는 족히 되는 것 같다. 그러고는 떨거지들은 후닥닥 도망을 친다. 밀가루사람이 된 나는 눈이 겨우 보이게 되자 그 녀석들을 잡으러 달려갔다. 멜랑콜리가 뒤돌아보며 씩 웃더니 새총으로 달걀을 던진다. 퍼억!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다. 정말 아프다. 나는 그 녀석들을 쫓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성인이 되는 것은 이렇게 아픈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길 한복판에 멍청하게 서서 이마를 문질렀다. 햇빛에 눈이 부셔서인지 눈물까지 찔끔 난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붙은 시간표를 봤다. 음. 오늘은 수업이 없군. 참. 나는 휴학을 했지? 바보가 된 기분이다. 저녁엔 스무 송이 장미와 향수를 들고 ‘club HIPPIE'에 가야겠다. 그녀를 찾아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지도 한 달이 넘어간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니. 갑자기 그녀가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투명한 풍선 같은 분홍빛 눈동자가 보고싶다.
해가 질 때 즈음하여 거리로 나왔다. ‘club HIPPIE'의 사과손잡이를 잡고 있으려니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그 곳에 없을 것 같은 느낌. 문을 열었다. 진 초록색이 눈에 가득 찬다. 백곰의 등 같은 새하얀 털로 가득 덮인 무대 위에서 그녀가 노래를 하고 있다. 그녀는 노란색의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서, 머리에는 보라색 꽃이 잔뜩 달린 수영모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튜브까지 몸에 끼고 있다. 백조모양의 튜브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밖으로 나가버린다. 난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
등을 보이고 서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분홍빛 눈동자가 일순, 물을 머금어 반짝 하는 듯 했다. 그녀는 조그맣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히말라야 평원으로...”
그녀는 그렇게 나에게서 떠나갔다. 내가 성인이 되던 바로 그날에. 그녀는 떠났지만 나는 남았다. 너는 꿈속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현실 속을 살아가야 한다...
Outro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밤, 문득 지금으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20살의 나의 이야기들이 생각나는 것을 왜일까.
그녀는 어쩌면 나에게 젊은 날의 환상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워렌 비티와 나탈리 우드가 출연한 영화 ‘초원의 빛’에서처럼 청춘의 꽃은 시들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안정되었지만 재미없는 삶. 세계로 통하는 무선국의 안테나를 내려버리고, 차가운 냉소와 비판의 얼음 속에 심장을 담가 버린 삶. 얼어붙은 심장이 가끔 녹는 날 밤에 나는 꿈을 꾼다. 나는 물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그녀도 내 주위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초록색의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해초 같다. 푸른 물의 색깔과 머리카락의 초록색이 퍽 어울린다. 수면에 햇빛이 반짝인다. 나는 천천히 헤엄을 친다. 기분이 좋다. 마치 한 마리의 플랑크톤이 된 기분이다.
이젠 그 꿈에서 깨어날 때면 나는 오줌을 싸는 대신 눈물을 흘린다.
성명 : 김설아
성별 : 여자
연령 : 24세
주소 :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현대한누리 103-507
e메일: bbosasi80@hanmail.net
전화 : 011-839-3088
Intro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 ‘지금이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가을비가 내리는 한 밤중, 나는 결단을 내렸다.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히말라야로 떠날 마음의 준비가 된 것이다. 그곳으로 가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꿈꾸는 보헤미안
꽤 더운 초 여름날이었다. 나는 기차 플랫폼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기차를 집어타려 하고 있었다. 그 때 내 나이는 20살이었는데 갓 대학을 입학한 새내기였다. 이래서 다 대학가나 싶을 정도로 정말 한가로운 생활이었다. 아직 6월 중순인데 벌써 방학이라니. 불과 작년만 해도 비좁은 교실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펜을 굴리고 있었을 텐데. 고등학교의 그 긴장감과 대학교의 이 느슨함을 섞어 반씩 공평하게 나눴으면 좋겠다. 이건 도대체 적응이 되질 않으니 말이다. 어제 종강을 하고 과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시고는, 정오가 다 되어갈 즈음에 겨우 일어났다. 목은 말랐고 머릿속은 공허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물을 마셨다. 속이 메슥거렸다. 아마도 어제 술 때문인가 보다. 머리가 띵하다. 물을 한 잔 더 마시고는 다시 누웠다. 집이 찜통이다. 바람이나 좀 쐴까 하는 생각에 옷을 대강 주워 입고는 골목으로 나왔다. 바람 한 점 없는 정말 화창한 날씨였다. 한여름 같군.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텅 빈 머리로 계속 걸었다. 마치 내 몸에 발만 있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발이 멈춘 곳은 엉뚱하게도 기차역이었다. 왜 이런 곳까지 와 버린 거지? 역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 심지어 검표원 까지도. 모두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멍한 기분으로 기찻길이 있는 밖으로 나갔다. 칠이 벗겨진 알록달록한 벤치가 몇 개 있다. 여긴 바람도 제법 분다. 좋아. 여기서 좀 쉬었다 가야지. 벤치에 길게 누웠다. 졸린다...
누군가 귀에다 대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거리에 비둘기 날고 노래가 날고...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그건 정말 멋진 얘기야...”
눈을 떴다. 온통 꽃밭이다. 내가 왜 꽃밭에 누워있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깜짝 놀랐다. 분홍빛 눈동자 두 개가 나를 보고 있다. 빨강의 기다란 속눈썹이 깜빡깜빡거린다. 머리카락은 짙은 초록색인데, 구불구불하고 무릎까지 닿아있다. 머리칼 사이에는 눈동자 색깔과 같은 꽃 덩이들이 매달려있다. 난 한동안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입김이 뜨거웠다.
“넌 누구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딸기향이 났다.
“난 핑크레인-레드윈디-그린우드-사파이어-카시오페이아야. 짧게는 핑키라고 불러.”
정신이 없다. 저 분홍빛 눈은 도대체 뭐고, 초록색 머리는 뭐고, 우습지도 않은 긴 이름은 다 뭐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저 여자 홀딱 벗고 있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여긴 어디지?”
“알프스 산이야.”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 알프스라... 뭐라고? 그럼 저 기슭에는 멍청한 슈샤드들이 어슬렁거리고 있고, 어디선가 하이디가 구슬 같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달려오겠군! 내가 어처구니 없어하는 동안 그녀는 나에게 담배를 건넸다. 필터에서 딸기향이 난다. 한 모금 빨아들였다. 거대한 폭포 위에서 신나게 아래로 다이빙하는 기분이 든다. 아래로...아래로... 필터를 봤다. 레모네이드 체리콜라 럭키 스트라이크. 이상한 이름이다. 그리고 연기도 안 난다. 입에서 물방울이 나온다. 여긴 물 속이다. 난 정말 다이빙을 한 것이다! 나는 물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그녀도 내 주위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초록색의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해초 같다. 푸른 물의 색깔과 머리카락의 초록색이 퍽 어울린다. 수면에 햇빛이 반짝인다. 나는 천천히 헤엄을 친다. 기분이 좋다. 마치 한 마리의 플랑크톤이 된 기분이다.
갑자기 밑이 축축하다. 눈을 떴다. 익숙한 벽지의 무늬가 보인다. 아. 여기는 내 방이지. 아니. 내가 잠시 어딘가에 다녀왔었나. 나는 바다로 가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아니. 산에 갔다 온 것 같기도 하군. 이런. 오줌을 쌌다! 20살에도 오줌을 싸다니. 지린내가 난다. 속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가족들이 베란다 문을 열어놓고 대나무 자리 위에서 자고 있다. 속옷을 꺼내어 갈아입고는 이불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가족들 옆에 누웠다. 내가 정말 알프스에 갔다왔었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20살의 어린 보헤미안이다.
21C 펑크보이
전화가 왔다. 스킨헤드다.
“여~펑크뽀이! 뭐하냐? 오늘밤에 클럽에서 공연 있는 거 알지?”
그렇다. 오늘은 수요일. 펑크 록 클럽 ‘플라스틱’에서 정기공연이 있는 날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또한 ‘펑크보이와 떨거지들’의 광란의 슬램파티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펑크보이와 떨거지들’은 총 4명인데, 모두 클럽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내가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창 밖을 보니 주위가 새파랗다. 아무리 긴 여름해도 지긴 지나보다. 얼른 헤어 젤을 들고 거울 앞으로 갔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한껏 부풀린 다음, 헤어 젤을 머리카락에 꼼꼼하게 발라 한 올 한 올 세웠다. 도깨비 머리 같다. 그리고 피를 흘려 쓴 듯한 붉은 글씨로, 가슴 한 가운데 ‘Kill ME(날 죽여줘)!'라고 쓰여진 하얀 티셔츠를 입었다. 거기다 쇠 장식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가죽 목걸이와 팔찌도 하고, 쫙 달라붙는 가죽바지 주머니에는 쇠줄을 달아 늘어뜨렸다. 그리고 번쩍이는 워커를 신고는, 마지막으로 코에 안전핀을 꽂아 포인트를 주었다. 펑크 룩 완성!
골목으로 나왔다. 이제 완전히 어두웠다. 거리마다 네온사인이 번쩍이기 시작하고, 한껏 꾸민 젊은이들이 집에서 꾸역꾸역 몰려나와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찾아 대학로를 헤맨다. 대학로에는 웬만한 종류의 음악클럽은 다 모여있다. 얼터너티브, 하드코어, 펑크, 그런지, 힙합, 테크노, 재즈, 헤비메탈...등등. ‘떨거지들’은 클럽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네온사인이 깜빡이는 간판들을 보며 걷노라니 어지러웠다. 아. 찾았다! 형광빨강으로 ‘punx rock club PLASTIC'이라고 씌어진 거대한 하얀 날개 밑에 서있는 떨거지 셋 ― 스킨헤드, 불 대가리, 멜랑콜리 ―가 보였다. 스킨헤드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는 짧게 치켜 깎아 올린 머리에, 아래위가 붙은 형광주황색의 카레이서 옷을 입고 있다. 불 대가리는 마침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고 있었는데, 양쪽 머리를 아예 밀고 안쪽 머리만 남겨 닭 벼슬처럼 세운 일명 ‘모히칸 스타일’은 멀리서도 한 눈에 띄었다. 아니. 빨강으로 염색까지 했군! 진짜 닭 벼슬 같다. 멜랑콜리는 언제나 그렇듯 울적하다는 표정으로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바닥만 보고 있다. 그의 노란 티셔츠에는 ‘인생은 지루하다’라는 로고가 프린트되어 있다.
우리는 다 같이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실 문을 열자 땀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런 캐럿’이라는 펑크밴드가 한창 공연중이다. 목이 말랐다. 나는 우선 bar로 가서 냉장고에서 차가운 버드와이저를 한 병 꺼내 마셨다. 시원하다. 이 기분이다. 떨거지들은 벌써 미친 듯이 슬램을 하고 있다. 멜랑콜리가 가장 열성적이다. 그는 슬램을 할 때는 평소와는 완전 다른 사람이다. 그는 옷을 벗으면서 일명 ‘스트립쇼 슬램’을 하는데, 오늘은 정말 찬란한 팬티를 입었다. 반짝이 깃털이 달린 끈 팬티다. 그래도 경범죄로 경찰서에 잡혀 갈까봐서 겁나는지 그 안에 반바지를 입었다. 정말 희한한 녀석이다. 불 대가리의 붉은 머리가 미친 듯이 왔다갔다하는 것도 보인다. 좋아. 나도 슬슬 시작해 보실까. 귀가 멍멍해지면서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그래. 바로 이거다. 젊음의 느낌. 손가락에서 발끝 하나 하나까지 피가 돌고 살아있다는 느낌. 새벽 1시가 되어서야 갈기갈기 찢어진 티셔츠를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난 완전히 탈진했다. 옷을 벗는 둥 마는 둥 하고, 바로 방바닥에 고꾸라져 시체처럼 잠이 들었다. 죽음 같은 밤이다.
머리에 꽃을
벌써 8월의 마지막 주다. 황금 같은 20살의 여름날도 거의 끝나 간다. 낮에 너무 더워서 늘어져 있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깨어보니 저녁 무렵이었다. 배가 고팠다. 나는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는 듯한 기분으로, 어디론가 가서 저녁밥 대신 맥주를 진탕 마시기로 했다. 잘 때 입고있던 후줄근한 반바지와 티셔츠에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는 거리를 나섰다. 좀 열에 들 뜬 듯한 멍한 기분으로 간판들을 보았다. 거리의 불빛들이 환상적으로 뒤틀려 보였다.
마침 눈에 띄는 가게가 있다. 새하얀 눈송이 같다. 하얗고 동그란 가게. ‘club HIPPIE'. 동그란 통나무로 된 문에 달린 사과모양 손잡이를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은 온통 진초록이다. 푹신한 초록색 의자에 앉으니 커다란 사과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메뉴가 적힌 나뭇잎을 가져다주었다. 여자의 머리엔 노란색의 커다란 꽃이 꽂혀있다.
버터맥주. 땅콩맥주. 크림소다맥주. 사과맥주...특이한 메뉴들이군. 나는 메뉴에 있는 총 8가지의 맥주를 각각 한 병씩 시켰다. 무슨 맛일까 기대하면서 의자에 푹 꺼져들어 앉아 있으려니 어디선가 기타소리가 났다. 아. 클럽이니까 음악도 연주해 주나보군.
형들이 모이면 술 마시며 밤새도록
하던 예기 되풀이해도 싫증이 나질 않는데
형들도 듣기만 했다는
먼 얘기도 아닌 바로 10여 년 전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안에 어떤 곳에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머리에 꽃을 꽂았다고
거리에 비둘기 날고 노래가 날고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그건 정말 멋진 얘기야
그러나 지금은 지난 얘기일 뿐이라고
지금은 달라 될 수가 없다고
왜 지금은 왜 지금은
난 보고 싶은데
머리에 꽃을 머리에 꽃을...
(머리에 꽃을/ 전인권 글.곡)
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음악인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라디오에서? 아냐. 그건 아닌데.
문득 고개를 들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기다란 초록색 머리를 무릎께까지 늘어뜨리고는 분홍 꽃이 잔뜩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미니스커트에 가죽부츠를 신고,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여자인데. 어디서 봤더라.
노래가 끝나고 그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난 세 병째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땅콩맥주였다. 고소하고 달았다.
“앉아도 돼?”
“좋으실 대로”
그녀는 크림소다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시더니, 나에게 무언가를 주었다. 담배 한 갑이다. 레모네이드 체리콜라 럭키 스트라이크. 담뱃갑에 그렇게 적혀있었다. 핑크빛 눈동자 두 개가 날 보며 웃고 있다. 난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옷 입었네. 이거 피워도 되는 거야? 설마 또 폭포에서 다이빙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블라우스에 달린 수많은 꽃들 중에 두 개를 떼 내어, 한 송이를 내 머리칼에 꽂아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송이는 자기 머리칼에 꽂았다. 우리는 그렇게 머리칼에 분홍빛 꽃을 꽂은 상대방을 보면서 남은 맥주들을 다 마셨다. 밖으로 나오니 밤 공기가 쌀쌀하다. 어느덧 가을이 다가오고 있나보다. 마음이 춥다. 이젠 사랑을 할 때가 되었나보다.
그들의 연애행각
1. 일탈과 모방
펑크보이와 히피걸은 하릴없이 쌀쌀한 가을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하늘은 더 없이 맑고 높았고, 공기는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들은 심심했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데이트란 대개 뚜렷하게 할 일이 없다. 그냥 보고싶어서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백화점의 멀티 텔레비전 앞의 의자에 앉아 서로 손을 꼭 잡고서는 ‘천장지구’라는 홍콩영화를 보았다. 그들의 눈이 빛나면서 곧 영롱한 광채를 띠었다. ‘우리, 저거 따라 해보자!’ 그들의 눈은 마주보며 즐겁게 속삭였다.
우선 웨딩드레스가 필요했다. 펑크보이는 웨딩드레스 숍으로 히피걸을 데리고 갔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가게 앞의 커다란 돌을 쇼윈도에 던졌다.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면서 웨딩드레스가 눈앞에 있다. 펑크보이는 그 중 하나를 얼른 마네킹에서 벗겨 멍청하게 서있는 히피걸의 손을 잡고 냅다 달렸다. 그리고는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세워져있는 오토바이를 타고 도시 근교로까지 달렸다. 저 멀리 풀밭이 보였다. 펑크보이는 그 곳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히피걸이 웨딩드레스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는 풀밭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풀꽃화관이었다. 반지도 함께. 웨딩드레스를 입은 히피걸은 청초하게 빛나는 수줍은 소녀였다. 펑크보이는 그녀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고는, 반지는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리고는 히피걸에게 오토바이를 천천히 몰 테니, 아스팔트 도로를 맨발로 걸어서 따라오라고 했다. 어느덧 저녁 노을이 지고있었다. 도로에는 그들뿐이었다. 그들은 오렌지 빛 세상에 잠겨있다. 완전히 어두워지자, 펑크보이는 히피걸을 뒤에 태우고 시내로 돌아왔다. 훗날, 그 날을 회고할 때면 펑크보이는 이렇게 덧붙인다.
“내가 그때 쌍권총을 차고 있지 않았던 게 유일한 아쉬움이었지.”
그러면 누군가는 꼭 이렇게 말하겠지.
“그럼 너는 왜 가스통에 맞아 죽지 않고 그렇게 살아있는 거지?”
2. 유치, 티내기
펑크보이와 히피걸은 오늘 펑크보이의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스킨헤드와 불 대가리, 멜랑콜리 말이다. 그들의 아지트인 ‘플라스틱’에서 만나기로 했다. ‘플라스틱’은 수요일에 하는 공연 외에는 그냥 맥주를 파는 곳이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펑크보이는 왠지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 히피걸도 있고 하니, 더욱 그랬다. 그는 헤어 젤을 머리에 잔뜩 발라 머리칼을 뒤로 완전히 넘겼다. 하얗고 갸름한, 잘생긴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리고는 하얀 셔츠에다 검은색 넥타이를 헐렁하게 메고는 그 위에 가장 아끼는 가죽 점퍼를 입었다. 밑에는 빨간 체크무늬의 치마바지를 입고, 멋으로 바이올린 케이스를 등에 맸다. 눈썹에 핀을 꽂는 것도 잊지 않았다. 커다란 워커를 신고는 그는 거리로 나섰다. 펑크 룩 완성!
펑크보이가 만난 지 100일 되는 오늘, 처음으로 그의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니 히피걸의 마음도 설레었다. 모두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특히 펑크보이에게는 더욱 더.
그녀는 약속시간 3시간 전부터 화장대에 앉았다. 머리를 땋았다, 틀어 올렸다, 묶었다, 풀었다...그녀의 손놀림은 정신이 없었다. 결국 무릎까지 오는 기다란 초록머리카락을 몇 가닥만 땋아서 분홍 꽃을 묶기로 했다. 나머지는 그냥 구불구불하게 흘러내리도록 놔두었다. 까무잡잡하고 조그마하면서, 오목조목 어여쁜 그녀의 얼굴이 더욱 섹시하게 보였다. 이마와 팔에는 반짝이로, 가장 예쁘다고 생각되는 아라베스크 문양을 그렸다. 그리고는 연보라색 바탕에 하얀 꽃이 그려진 블라우스를 입고, 반짝이 미니 스커트를 입었다. 쇠 징이 박힌 가죽부츠를 신고 그녀는 즐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히피 룩 완성!
‘플라스틱’의 커다란 날개 간판 아래, 한껏 멋을 낸 두 명의 젊은이가 앉아있다. 나른하게 앉아있는 모양이 꼭 날개를 잃어버린 천사들 같다. 그들은 벌써 두 시간째 펑크보이의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지루해진 히피걸은 펑크보이에게 놀이를 하자고 한다. 그들은 공기놀이를 했다. 돈까스도 했고, 오징어 달구지도 했다. 고무줄 놀이도 하고, 실뜨기도 했고, 짤짤이도 했다. 왕자와 거지도 했고, 꼬마신랑 놀이도 하고, 구슬치기, 딱지치기, 심지어 푸른 하늘 은하수까지 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오지 않았고 그들은 그만 일어서기로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쳤다. 뭔가 즐거운 일들이 잔뜩 일어나리라고 기대했던 날이었는데. 우리의 100일. 그들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허리띠 모양의 똑같은 은반지를 두 개 사서 서로에게 끼워주었다. 펑크보이는 히피걸의 왼손 검지에. 히피걸은 펑크보이의 왼손 약지에. 히피걸은 이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자 검지에 꼭 맞는 반지가 남자 약지에 꼭 맞으면, 둘은 둘도 없는 천생연분이래.”
그리고 그녀는 씩 웃었다. 펑크보이도 웃었다. 그들은 커플가발도 샀다. 샛노란 바나나 색의
구불구불한 긴 머리 가발이다. 200일 때 맞춰 쓰기로 약속을 했다. 그들 주위에만 달콤한 딸기향의 공기가 머물고 있는 것 같다. 둘은 각자 마음속으로만 ‘삶은 참 아름답다’라고 생각했다.
3. 피터팬 신드롬
우울하게 하늘이 내려앉은 겨울밤이다. 히피걸은 겨울을 싫어한다. 꽃들도 더 이상 피지 않고, 새들도 그녀에게 속삭여주지 않고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늘색의 물감으로 팔에 꽃과 새들을 그렸다. 파랑새가 어디선가 날아올 것만 같다. 누군가 창문을 톡톡 두드린다. 정말 파랑새가 날아온 걸까? 유리창에 김이 서려 밖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유리창을 조심스레 열었다. 이런! 루돌프처럼 코가 빨갛게 된 펑크보이다. 그는 히피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놀랍게도 무척이나 따뜻한 손이다. 손을 잡고는 펑크보이는 히피걸에게 가장 즐거웠던 추억을 마음속에 떠올려보라고 한다. 히피걸은 가만히 생각하다, 히말라야 산맥의 평원에서 열렸던 히피들의 거대한 파티를 떠올리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펑크보이와 히피걸은 순식간에 하늘을 날아올랐다. 밤하늘은 생각보다 훨씬 따스했고 아름다웠다. 5년에 한번씩 열리는 그 파티 때에는 평소에 유럽․소아시아․아메리카 등의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있던 히피들이, 모두 히말라야 산맥의 양지바른 평원에 모인다. 그들이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를 다들 하나씩 들고서. 그 무언가는 악기가 되기도 하고, 술이 되기도 하고, 화분이 되기도 하고, 동전이 되기도 하고...아무튼 가지각색의 물건들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언어로 속삭이는 히피들로 평원이 술렁대면서, 그곳이 거의 다 찼을 때쯤이면 파티를 시작한다. 악기를 가져온 사람들은 일제히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춤을 추기도 하고, 그 동안 새로이 만들어낸 아라베스크 문양을 다른 히피의 팔에 그려주기도 하고, 자신이 나누었던 굉장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아무튼 가지각색의 일들을 한다. 술을 가져온 히피들은 돌아다니며 술을 나누어준다. 그녀는 4년 전에 이 파티에 다녀왔었는데, 그때엔 우연찮게도 104명의 히피가 백 파이프를 들고 와서, 그 청아한 소리에 맞추어 즐겁게 춤을 춘 기억이 있다. 그 때 그녀는 16살이었고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었는데, 17살의 체코에서 온 히피보이와 사랑을 나누었었다. 드넓은 히말라야의 눈 쌓인 거대한 산봉우리를 보면서. 그것이 그녀의 첫 경험이었다. 일주일간의 파티가 끝나고 히피보이와 히피걸은, 손을 꼭 잡고 머리에는 꽃을 꽂고 네덜란드로 가기로 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풍차 밑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보거나, 튤립을 꺾어 서로의 머리에 꽂아주기도 했다. 어느 날 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히피걸이 안네 프랑크의 동상을 보며 멍청하게 생각에 잠겨있을 동안 히피보이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그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하늘을 볼 때면 가끔씩 가슴이 아파 오면서 그의 하늘빛 눈동자가 생각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는 그녀에게 있어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눈이 따가웠다.
팅커벨이 그녀에게 다가와 마법의 가루를 뿌려준다. 히피걸은 눈가에 눈물을 닦아낸다. 그것들은 반짝이며 하늘에 흩뿌려져 검은 밤하늘에 수를 놓는다. 펑크보이의 따뜻한 손이 히피걸의 손을 더욱 꼭 잡는다. 그는 아, 아 ,음, 헛헛 하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흐른 흔적이 있었어
너의 눈을 바라봤을 때
서툴게 - 웃던 너의 모습이
오히려 날 더 속상하게 해
듣고 싶은데 - 들을 수 있을까
네가 지금 지닌 아픔을
나도 아직 - 너만큼 어리지만
같이 아파해 줄 순 있어
너에 대한 나의 믿음이
네 곁으로 날아가서 - 널 지켜주길
언젠가 네가 보여줬던
저 하늘 너의 별에 - 간절히 소망해
정말로 싫어도 - 어른이 되겠지
현실 속에 묻혀 지쳐가겠지
그전에 느끼는 이런 슬픔들은
오히려 소중할 지도 몰라
기억이 되 버린 날엔
사진처럼 남는다는 걸...
(웬디에게/ valentine 글.곡)
그녀는 그에게 방긋 웃어 보인다. 그들은 그렇게 손을 잡고서는 따뜻한 겨울 밤하늘을 날고 또 날았다.
4. 변종
화창한 어느 봄날. 펑크보이와 히피걸은 한가로이 공원 잔디 위에 누워있었다. 우뚝 솟은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그늘 밑에 누운 그들은 졸렸다. 히피걸이 투명한 오렌지빛깔의 CD 플레이어를 꺼냈다. 둘은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들었다. 여자 보컬의 목소리가 상큼하다. 귓속에서 톡톡 터진다. 레몬사탕 같다.
어두웠던 번데기 시절 예쁜 꽃들도 구경 못하고
쭈글거리는 주름 벗고 화려한 옷을 입고서
날아가자 얼룩무늬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자
잠자리와 벌들의 친구 되어 풀잎 위에서 노랠 부르고
날아가자 얼룩무늬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자
날아가자 얼룩무늬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자
색동옷을 입고서 저 위로 날아가자
꽃 냄새를 맡으며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껏 날아가자
날아가자 얼룩무늬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자 가고 싶은 곳으로
( 빠삐용/ 삐삐밴드)
그들은 나비가 되었다. 노래에 맞추어 오색 구름사이를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펑크보이는 얼룩무늬 날개를 단 나비가 되었다. 히피걸은 알록달록한 꽃무늬의 날개를 단 나비가 되었다.
둘은 꽃 속을 뒹굴면서 꿀을 실컷 빨아먹었다. 날아다니면서 먹기도 하고, 누워서 먹기도 하고, 서로 대롱을 엇갈려서 러브 샷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보드라운 꽃잎을 덮고는 나란히 잠이 들었다. 뭔가 차가운 것이 몸을 스치는 느낌에 깜짝 놀라 펑크보이는 잠에서 깨었다. 잔디밭의 스프링 쿨러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원하게 뻗어 나오는 물줄기가 햇빛에 부서져 반짝반짝 빛이 난다. 은가루 같다. 펑크보이는 스프링 쿨러로 가까이 다가갔다. 물줄기가 몸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기분이 좋다. 그는 펑크댄스를 추기 시작한다. 입을 쭉 내밀고는 비쩍 마른 몸을 건들건들 거리며 설쳐대는 모양이 해괴하다. 히피걸도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펑크보이와 함께 춤을 추고 있다. 그녀는 히피댄스를 추는 걸까. 아니. 그냥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 사이에 동그랗고 어여쁜 무지개가 뜬다.
어른이 되다
5월 셋째 주 월요일이다. 나는 21살이므로 오늘 성인이 된다. 그리고 그녀 ― 핑키 ―도 성인이 된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다. 아침에 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큰 목소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떨거지들이었다. 나는 잠이 덜 깬 부스스한 모습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자마자, 스킨헤드가 내 멱살을 홱 낚아채더니 나를 문 밖으로 끌어냈다.
“어른이 된 걸 축하한다아! 이 어린눔아!!”
불 대가리와 멜랑콜리가 나에게 밀가루를 뿌린다. 거의 한 포대는 족히 되는 것 같다. 그러고는 떨거지들은 후닥닥 도망을 친다. 밀가루사람이 된 나는 눈이 겨우 보이게 되자 그 녀석들을 잡으러 달려갔다. 멜랑콜리가 뒤돌아보며 씩 웃더니 새총으로 달걀을 던진다. 퍼억!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다. 정말 아프다. 나는 그 녀석들을 쫓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성인이 되는 것은 이렇게 아픈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길 한복판에 멍청하게 서서 이마를 문질렀다. 햇빛에 눈이 부셔서인지 눈물까지 찔끔 난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붙은 시간표를 봤다. 음. 오늘은 수업이 없군. 참. 나는 휴학을 했지? 바보가 된 기분이다. 저녁엔 스무 송이 장미와 향수를 들고 ‘club HIPPIE'에 가야겠다. 그녀를 찾아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지도 한 달이 넘어간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니. 갑자기 그녀가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투명한 풍선 같은 분홍빛 눈동자가 보고싶다.
해가 질 때 즈음하여 거리로 나왔다. ‘club HIPPIE'의 사과손잡이를 잡고 있으려니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그 곳에 없을 것 같은 느낌. 문을 열었다. 진 초록색이 눈에 가득 찬다. 백곰의 등 같은 새하얀 털로 가득 덮인 무대 위에서 그녀가 노래를 하고 있다. 그녀는 노란색의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서, 머리에는 보라색 꽃이 잔뜩 달린 수영모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튜브까지 몸에 끼고 있다. 백조모양의 튜브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밖으로 나가버린다. 난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
등을 보이고 서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분홍빛 눈동자가 일순, 물을 머금어 반짝 하는 듯 했다. 그녀는 조그맣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히말라야 평원으로...”
그녀는 그렇게 나에게서 떠나갔다. 내가 성인이 되던 바로 그날에. 그녀는 떠났지만 나는 남았다. 너는 꿈속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현실 속을 살아가야 한다...
Outro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밤, 문득 지금으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20살의 나의 이야기들이 생각나는 것을 왜일까.
그녀는 어쩌면 나에게 젊은 날의 환상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워렌 비티와 나탈리 우드가 출연한 영화 ‘초원의 빛’에서처럼 청춘의 꽃은 시들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안정되었지만 재미없는 삶. 세계로 통하는 무선국의 안테나를 내려버리고, 차가운 냉소와 비판의 얼음 속에 심장을 담가 버린 삶. 얼어붙은 심장이 가끔 녹는 날 밤에 나는 꿈을 꾼다. 나는 물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그녀도 내 주위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초록색의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해초 같다. 푸른 물의 색깔과 머리카락의 초록색이 퍽 어울린다. 수면에 햇빛이 반짝인다. 나는 천천히 헤엄을 친다. 기분이 좋다. 마치 한 마리의 플랑크톤이 된 기분이다.
이젠 그 꿈에서 깨어날 때면 나는 오줌을 싸는 대신 눈물을 흘린다.
성명 : 김설아
성별 : 여자
연령 : 24세
주소 :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현대한누리 103-507
e메일: bbosasi80@hanmail.net
전화 : 011-839-3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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