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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선-희곡2(2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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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둥에 묶인 남자
등장인물 남자, 남자2, 어머니, 여동생
무대
한 가운데 커다란 기둥이 있다. 기둥 뒤에는 흰 창이 있다.
기둥 바로 밑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남자 한 명이 앉아 있다.
흰 창 뒤에 남자2가 기둥 밑 남자처럼 의자에 앉아있다. 창에 비친 남자2의 그림자.
무대 가장자리에 작은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있다.
기둥 밑 남자의 표정이 심각해 보인다. 곧이어 여자 둘이 나온다. 어머니와 여동생. 여자들의 표정은 무척 밝다. 여자들 남자의 주의를 빙빙 돈다. 남자, 여자들 바라본다. 어지러운 남자.
어머니 일어났니?
여동생 오빠, 안녕.
남자 (일어선다. 귀찮듯이)그래.
어머니 얘야, 어디가 아픈 건 아니니, 안색이 안 좋구나.
남자 아니예요.
어머니 그럼, 무서운 꿈이라도 꾼 게야?
여동생 악몽이라도.
어머니 호호, 네 오빠는 악몽을 꿀 때면 늘 나를 찾곤 했지.
“엄마! 엄마!”하면서 말야. 그럼 나는 사랑스럽게 안아주었단다. 기억나니 아들아?
남자 네.
어머니 그러고 보니 널 안아본지도 꽤 오래됐구나.
이젠 컸다고 이 에미한테 안기는 걸 부끄러워하는거니?
여동생 부끄러워 하는 거야?
남자 아니예요.
어머니 그럼 한번 안아볼까. (안는다)
여동생 나도 안아볼까.(안는다)
남자 전 조금 더 쉬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오늘은 휴일이잖아요.
여동생 오늘은 휴일. 노는 날. 좋아라 좋아라.
어머니 일년 삼백 육십 오일이 휴일인 네가 좋기도 하겠다.
여동생 너무해. 너무해 너무해.
남자 조금만 더 쉴게요. 아침은 필요없어요.
어머니 그래도 아침 먹고 또 자던가 해야지. 몸 상할까 걱정된다.
규칙적인 식사가 중요한 건데 아휴, 먹는 게 그리 부실해서야.
남자 괜찮아요. 지금은 밥보다 좀 쉬고 싶어요.
여동생 어제도 늦게 온 거야?
남자 어. 요즘 좀 바쁘구나.
어머니 그 회사는 왜 그런다니, 차라리 네 대신 이 에미가 일을 하는 게 낫지.
여동생 엄마가 일하는 게 낫지. 오빠 회사 그만 둬.
어머니 얘가, 조용히 하지 못해.
여동생 애이, 엄마는 허풍쟁이
남자 저, 조금만 더 잘게요. 네?
어머니 그래. 그럼 점심 식사 전까진 일어 나야한다. 네가 좋아하는 칼국수를 할테니까.
여동생 칼국수를 할테니까. 근데, 또 칼국수야?
남자 그래요. 힘든데 놔두세요.
어머니 이 에민, 네가 맛있게 먹는 걸 보면 힘이 솟는걸.
여동생 애이, 엄마는 거짓말쟁이 .
맨날 아프다고 하면서. 허리야 다리야, 지긋지긋한 관절염아.
어머니 쉿!
남자 (한숨쉰다)점심 전까진 일어날게요. 죄송해요.
어머니 그럼 푹 쉬거라.
여동생 푹 쉬어.
남자 네.
(퇴장하며)
여동생 근데 엄마 진짜로 또 칼국수 할거야?
어머니 조용히 못해.
여동생 아이, 싫은데.
의자에 앉은 남자, 불편한지 엎치락뒤치락 한다.
조명 어두워지고 창에만 비춘다. 창 밖의 남자2, 의자에서 일어나 서서히 움직인다.
남자2 밖으로 나온다. 창을 뚫고 나온 남자2. 다시 조명이 환해진다.
남자2,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본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며 쳐다본다.
남자의 코앞까지 왔다.
남자, 눈치챈다.
남자 어, 당신, 당신은 누구죠?
남자2 (조소 섞인 웃음)
남자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당장 나가요!
남자2 어디로?
남자 밖으로 당장 나가지 못해요!
남자2 너나 나가.
남자 뭐요? 어…어….
남자2 어머니를 부르시겠다. 하하하 한번 불러보시지.
남자 이상하군. 말이 안나와. 어….
남자2 이상할거 하나도 없어. 내가 최면을 걸어놨거든.
남자 최면? 그럼 다른 사람이라도.
남자2 그만 둬. 여긴 우리 둘 뿐이야. 알았니, 사랑스런 아가야.
남자 뭐라고요? 당신 뭐야? 뭔데 이 새끼(멱살 잡는다)
남자2 하하하하
남자 미쳤군. 제 정신이 아니야.
남자2 날 똑바로 보라구. 누군지 모르겠어?
남자 이런, 나잖아. 나!
남자2 그래, 너 맞아. 이제야 날 알아보는군.
남자 그럴 리 없어. 혹시 쌍둥이 형제라도 나타난건가?
남자2 무슨 헛소리야. 사라졌던 쌍둥이 형제. 웃기는군. 난 그저 너 일뿐이야. 너.
남자 아, 내가 꿈을 꾸는건가. 맞아, 그럴거야. 꿈이 분명해. 이건 악몽이라고.
남자2 꿈? 꿈이라. 네가 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
남자 맞아. 꿈인 거야. 깨고 싶어 얼른 깨야해.
남자2 미치겠군. (때린다)정신차려.
남자 뭐야, 꿈이 아니잖아. 이렇게 아픈걸 봐선.
어떻게 또 다른 내가 있을 수 있는 거지? 내가 죽기라도….
아니, 미스테리 추리물에서 본 적이 있어. 분신이라는 거. 당신이 그럼 내 분신?
남자2 웃기는 소리 좀 하지마.
남자 분신을 보면 죽는다는데. 그럼 내가 곧 죽는다는 건가?
남자2 이젠 짜증까지 나는군. 짜증나 죽겠어.
남자 죽는다고? 난 아직 죽기는 싫어. 내 인생을 펴보지도 못했다고.
일어나자마자 회사에선 일에 치이고 집에 와선 가족들에 치이고.
그런데 죽는다고. 못 죽어. 난 절대 죽을 수 없어.
요즘 일이 많이 몸이 힘들고 나른했는데 그새 병이 든건가? 암? 불치병?
남자2 오버 좀 하지마. 누가 너 더러 죽는다냐? 내가 저승사자로 보이니?
남자 글쎄? 그러고 보니 검은 두루마기에 갓도 안 썼네.
남자2 이렇게 잘 생기고 깔끔하고 지적이고 세련되면서
수려한 말솜씨까지 가진 나한테 뭐라고?
남자 나?
남자2 음. 이제, 바보 같은 소린 집어치자고! 난 당신 내면의 자아야. 자아. 알겠어?
남자 내면의 나? 그런 것도 있나?
남자2 사람들에겐 누구나 있어. 하지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남자 지금 내 눈엔 당신이 보이는데.
남자2 내가 나타났으니까.
남자 갑자기 왜 나타났거죠? 그럼.
남자2 난 늘 네 옆에 있었지. 그림자가 되어서 말야.
그 동안은 꾹 참고 있었는데 더 이상은 안되겠더군.
남자 무슨 말인지. 난 통 모르겠군.
남자2 (화내며)답답해. 그 놈의 답답함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정도야.
남자 무슨 말인지. 난 영.
남자2 나는 답답한 건 딱 질색이야. 내가 분명 너의 자아가 맞긴 하지만 너와 난 달라.
전혀 템포가 맞지 않는다고. 여태껏 참은 것만 해도 놀라울 만큼 말야.
남자 모를 말만 하는군요.
당신이 내 내면이라면 당신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니야?
근데 난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남자2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남자 그래요.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아직까지 내면의 자아라는 말도 생소하고. 이게 현실인지 조차 가늠하기 어렵다고요.
남자2 너라는 녀석은 늘 그래. 꽉 막힌 것이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고. 난 너라고. 너!
남자 내면의 나와 그리고 진짜 나.
남자2 그래, 바로 그거야. 그리고 다음. 내가 이곳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
남자 그래요 우선 그 이유부터 듣겠어요. 근데 왜 아까부터 반말이죠?
남자2 억울하면 너도 반말 해.
내가 이렇게 네게 나타난 이윤. 아까도 말했지만 다시 한번 말한다.
이번엔 잘 들어. 난 이제 널 벗어나려고 한다 그거야.
너의 답. 답. 함. 때. 문. 에.
남자 내가 답답하다고?
남자2 그래. 넌 날 숨막히게 해.
남자 숨이 막힌다고? 나 때문에? 내가 뭘 어쨌길래?
남자2 그걸 몰라서 물어?
넌 늘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 이십하고도 구 년 육 개월을.
남자 (의자에 앉아 매만지며)그러고 보니 오랜 시간을 이 의자와 함께 보냈군.
남자2 훗, 몹쓸 놈의 애착심.
남자 애착심이라고? 이건 그저 정일 뿐이야. 정.
남자2 정. 그 놈의 정 드럽게 끈끈하네.
지겹지도 않아? 그 놈의 의자 냄새 좀 맡아봐.
뭐가 네 엉덩이 냄새고 뭐가 이 의자 냄샌지 분간도 못하겠어.
남자 이 의자는 내 휴식처라고. 지친 몸의 기댈 수 있는.
남자2 세상을 봐. 눈을 크게 떠보라고. 이 의자보다 좋은 것들이 얼마든지 있어.
두 발을 쭉 필수 있는 흔들의자도 있고. 의자가 아닌 침대도 있다고.
남자 두 발을 쭉 핀다고.
남자2 그래, 이제 이 의자는 네게 너무 작아졌어.
남자 전보다 작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야. 어릴 땐 무척이나 넓어 보이고 편안했는데.
남자2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 군. 이런 낡은 의자는 던져 버리자고.
남자 버려? 그건 안돼.
근데, 당신 진짜 나 맞아? 난 여기 이렇게 있는데 나라니.
남자2 돌겠네. 난 말야.
이 놈의 집구석에만 갇혀 있는 바로 너의 내면이란 말야. 알아듣겠어.
남자 그럼 난 누구지?
남자2 너는 껍데기일 뿐이야 꽉 막혀버린 껍데기.
남자 뭐, 껍데기... 내가 껍데기라고? 살아있는 껍데긴 세상에 없어.
남자2 웃기는 군. 아주 재미있어.(손뼉을 친다)
머리가 없다면 말이 다르지. 생각할 수 있는 머리 말야.
남자 아니야, 난 생각할 수 있어. 생각할 수 있다고…
남자2 그래? 근데 네 가족 앞에선 이상하게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더군.
남자 우리 가족은 날 최고로 여긴다고. 최고 말야. 내가 못할 말은 없어.
남자2 훗, 정말 그럴까? 하하하, 넌 껍데기에 불과해. 껍데기말야. (남자 주위를 돈다)
남자 (의자를 끌어안고)아냐 아니라고.
남자2 창안으로 들어가고 탁자에 앉아있던 어머니, 여동생 놀라며 남자에게 간다.
무대 위, 탁자엔 칼국수 만들던 모습. 도마에 칼.
어머니 무슨 일이니? 아들아!(남자 얼굴을 만지며)
여동생 오빠?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악몽이라도.
어머니 호호, 네 오빠는 악몽을 꿀 때면 늘 나를 찾곤 했지.
“엄마! 엄마!”하면서 말야. 그럼 나는 사랑스럽게 안아주었단다. 기억나니 아들아?
남자 네.
어머니 그러고 보니 널 안아본지도 꽤 오래됐구나.
이젠 컸다고 이 에미한테 안기는 걸 부끄러워하는거니?
여동생 부끄러워 하는 거야?
남자 아니예요.
어머니 그럼 한번 안아볼까. (안는다)
여동생 나도 안아볼까.(안는다)
어머니 어서, 나오너라 네가 좋아하는 칼국수가 다 됐다.
여동생 그래, 오빠만 좋아하는 칼국수가 다 됐어.
남자 (멍하게 두 여자 바라본다)
어머니.
어머니 그래, 그래 나 여기 있다.
여동생 나도 여기 있어.
남자 (벌떡 일어나서)어떤 사람이 내 방에 들어왔어요.
그 사람은 내가 껍데기라며 실컷 비웃었죠. 여기 그 사람이 있어요.
(손가락으로 주위를 가리키며) 여기, 아니 여기에도 그가, 그가 있었는데….
어머니 이런. 네가 너무 피곤했나보구나. 악몽 아님 허깨빌 거다.
여동생 악몽 아님 허깨비
남자 악몽을 꾼 것도, 허깨빌 볼 것도 아니 예요. 나였어요. 바로 나였어요.
어머니 사람이 피곤하다 보면 가끔 헛 걸 보기도 한단다. 심신이 약한 덴 쉬어야해.
여동생 좀 쉬는 게 좋겠어.
어머니 그래, 쉬고 나면 좋아질 거야.
남자 껍데기, 껍데기...나는 나보고 껍데기라 말했어요.
어머니 껍데기? 껍데기가 먹고 싶으냐? (딸 보며)얘야 껍데기 좀 사오너라.
여동생 껍데기? 소 껍데기, 돼지 껍데기, 조개 껍데기, 개 껍데기….
어머니 그래, 껍데기 껍데기. 근데 무슨 껍데기지?
남자 (멍하다)
어머니 맛있는 걸로 사오라는 구나.
여동생 그럼, 야들야들하고 기름이 자글자글 흐르는 돼지 껍데기를 사와야지.
어머니 무슨 소리니, 소 껍데기가 제일이지. 바삭하게 구워서 참기름 소금 장에 찍어 콕.
거기에 소주 한 잔. 캬
여동생 아니 아니야. 돼지 껍데기가 제일이라니까.
어머니 아니라니까 그러네.
여동생 오빠가 말 좀 해봐.
어머니 그래, 소껍데기지?
여동생 돼지껍데기지?
남자 인간 껍데기.
여동생, 어머니 뭐? 인간 껍데기!
어머니, 여동생 탁자로 가서 의자에 앉는다.
어머니 지금 오빠가 뭐라고 그랬지?
여동생 인간 껍데기.
어머니 내가 귀가 먹은 건 아니구나.
여동생 난, 그런 건 못 사와. 어디서 그런 걸 사와. 끔찍도 해라.
어머니 하지만 오빠가 저렇게 찾는데….
여동생 그거 말고 다른 건 다 할 수 있어. 제발.
엄마, 그냥 우리 칼국수나 먹자.
오빤 칼국수를 젤 좋아하잖아.
어머니 칼국수? 그래 칼.
여동생 칼? 칼로 뭘 하려고.
어머니 내 늙은 껍질이라도….(칼을 들이댄다)
여동생 껍질을
어머니 그럼, 네가 할래?(칼을 건내 준다)
여동생 안 할래.
어머니 (다시 칼을 팔에 가져다 댄다)
여동생 근데 우리가 왜 이래야만 하지? 오빠가 뭔데?
어머니 오빠가 없으면 어찌되겠어. 생각해봐.
여동생 생각이라. 오빠가 없으면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나는….
어머니 그래서 이래야만 하는 거야.
여동생 왜 이래야만 하는 거야? 오빤 지금 제 정신이 아니라고.
어머니 쉿.
여동생 쉿.
어머니 원하는 걸 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
여동생 그래도 난 이해할 수 없어.
어머니 넌 모성을 몰라. 이까짓 거 할 수 있어.
여동생 윽(눈을 가리며)전 차마 볼 수가 없어요.
어머니 (고통스런 모습으로 살을 베는 시늉을 한다)다 됐다.
얘야, 이걸 어서 오빠에게 가져다주렴
여동생, 어머니한테서 받아들고 남자 앞에 디민다. 아직도 접시를 쳐다보지 않는다.
여동생 (쳐다보지도 않고 내민다)
남자 (접시 보며)이게 뭐지? 칼국수니?
여동생 껍데기, 오빠가 찾던 그거.
남자 내가 찾던 그거라고. 그게 뭐지?
여동생 내 입으론 말할 수 없어. (몸을 떤다)
어머니 팔에 붕대 감은 채 남자 앞에다가 온다. 여동생, 팔을 보고 또 한번 몸을 떤다.
어머니 어서 맛있게 먹으렴.
남자 전, 먹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나 드세요. (접시 어머니에게 준다)
여동생 자기 살을 자기가 어떻게 먹어.
남자 뭐, 이게 어머니의 살이라고?
어머니 네가 그랬잖니, 인간 껍데기가 먹고 싶다고.
남자 전 그런 말 한 적이 없어요.
여동생 말 한 적이 없다고?
그럼 우리가 들은 말은 뭐야.
어머니 어서 먹으렴. 이 엄마를 사랑한다면 어서.
여동생 어서 먹어. 어서. 엄마를 사랑한다면.
남자 하지만 난….
어머니, 여동생, 남자의 입에 강제로 집어넣는다.
남자 괴로운 모습. 씹지도 않고 그냥 삼킨다.
어머니, 여동생 흐뭇한 표정. 다시 탁자로 돌아가 앉는다.
다시 남자2가 남자 앞에 나온다.
남자 (구역질하며)난 그게 아니었는데...이런.
남자2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군.
남자 누구야? 당신이군. 아깐 어디 간 거지?
남자2 그건 내 마음 아닌가. 내가 어딜 가든. 쳇.
아까부터 쭉 보고 있었지. 아주 끈끈한 가족애 더군.
그래, 네 에미의 살을 먹은 기분이 어때?
남자 난 먹고 싶지 않았어. 정말이야.(남자2 애절하게 보며)
남자2 (웃으며)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누가 네 말을 믿겠어?
이유가 어떻든 넌 어머니의 살을 먹은 거야. 그것도 한 입에 덥썩.
남자 (남자2의 팔을 잡으며)아니야, 너도 봤다면 알 거 아냐.
내가 얼마나 먹길 싫어했는지.
남자2 알지. 암, 알고 말고. 그런데 인육 맛은 어때? 맛있나?
남자 너 까지 날 이해하지 못하는 군.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아.
너도 마찬가지야.
남자2 하하. 그래도 나만큼 널 이해하는 사람은 없어.
(가슴에 얼굴을 대고)너의 심장소리, 이 숨결, 떨리는 목소리.
난, 너의 모든 걸 알고 느끼고 기억하지.
남자 내 모든 걸 다.
남자2 그럼.
남자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남자2 그럼.
남자 내 꿈이 뭔지도?
남자2 그럼.
남자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내가 무엇을 슬퍼하고 내가 무엇을 답답해하는지도...
남자2 그럼. 그럼. 그럼. 난 너의 전부를 이해하니까.
남자 그게 사실이라면 난 어쩜...
남자,남자2 당신을 사랑하게 될 지도 몰라.
어머니, 여동생 남자 앞에 다가오고 남자2 다시 창안으로 들어간다. 아쉬워하는 남자.
남자 (창을 보며)내 사랑.
어머니 아들아, 지금 뭐라고 했니?
여동생 분명, 사랑이라고 말했어. 그렇지 오빠?
남자 그래.
어머니 엄마도 널 사랑한단다.
여동생 우린 한 가족이잖아.
남자 가족. 내겐 가족이 있지.
어머니 그것도 그냥 가족이 아니지.
여동생 맞아. 끈끈한 가족이지.
남자 끈끈한 가족? 누구지 누가 한 말이지?
여동생 오빠가?
남자 내가? 언제? 아니야.
어머니 네가 한 말도 기억 못하겠니? 좀 더 쉬어야겠구나.
여동생 좀 더 쉬어야겠어.
남자 끈끈한 가족이라. 끈끈한.
어머니, 여동생 그래 끈끈한 끈끈한.
주변 조명 어두워지고 남자에게만 비춘다.
어머니, 여동생 탁자로 돌아가 있다. 조명 창으로 향하고 남자2가 나온다.
남자2, 남자 옆에 서서 남자의 행동을 따라하거나 유심히 본다.
남자, 어머니와 여동생 쪽으로 간다.
남자 내겐 가족이 있어. 가족.
어머니 그럼.
여동생 가족보다 중요한 건 없어.
남자 정말 그럴까?
어머니 이렇게 행복하잖아.
여동생 물론. 이렇게 행복하잖아.
남자 모르겠어. 행복이란 게 이런 건지.
어머니, 여동생 심각하게 쳐다본다
어머니 그게 무슨 뜻이니? 아들아 혹시 ….
여동생 혹시 오빠는 행복하지 않다는 거야?
어머니 그만, 그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구나. 어서 아니라고 대답해 주렴.
여동생 너무 행복하다고 말해.
어머니 행복하다고.
남자2. 남자 거의 동시에 대답한다
남자 그래
남자2 아니,
남자 난 행복해
남자2 난 불행해
남자 행복해 죽겠어
남자2 불행해 죽겠다고.
어머니, 여동생 안도의 한숨을 쉬고 퇴장.
남자2 답답하다는 듯
남자2 넌 병신, 머저리만도 못한 놈이야.
남자 어쩔 수 없었어.
남자2 왜 말 못하는 거야. 왜! 왜! 난 지금 불행하다고
남자 우리 가족은 거의 20여 년을 나만 보고 살았어. 오직 나만을.
남자2 그래서?
남자 그래서라니? 난 그들을 배신할 수 없다고. 그 믿음, 그 바램. 시선까지도
남자2 좋아. 그럼 넌 이대로 평생을 살아봐. 난 이만 가겠어.
남자 가지마.
남자2 가지 말라고? 그런데, 아까 날 사랑한다고 했던가? 사랑 말이야.
남자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지. 널 사랑한다고 하진 않았어.
남자2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뭐가 그리 길어.
남자 모르겠어.
남자2 모르겠어. 잘 모르겠어. 모르겠군. 잘 모르겠군.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살아오면서 한 말들이야. 잘 생각해 보라구.
남자 그래. 난 언제나 색으로 따지면 회색이었지. 흑과 백도 아닌 색.
남자2 그런 너가 물론 싫었겠지. 네 모습이.
남자 넌 날 잘 알잖아. 난 내 자신이 싫어. 텅 빈 껍질만 남은 내가.
남자2 이제부터라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어.
남자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어머니, 여동생 등장.
어머니 좀 괜찮니. 창 밖 좀 보면 나아질지도 몰라. 어머나, 저기 꽃이 피었구나.
남자 네, 꽃이 폈네요.
어머니 네가 좋아하는 장미도 있구나.
남자 그건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이죠.
여동생 오빤 튤립을 좋아해.
남자 그건 네가 좋아하는 꽃이지.
어머니 얘야, 이 에미는 무슨 꽃을 닮았니?
여동생 나는?
남자 해바라기.
어머니 해바라기? 오직 해님만을 따라 다니는 해바라기라.
여동생 일편단심 해바라기? 민들레?
어머니 이 어미는 행복하구나. 네가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오. (뽀뽀하려 한다)
남자 어머니가 행복하시면 됐어요.
하지만….
어머니 하지만?
여동생 하지만 뭐지?
남자 아니 예요.
남자2 어서 말을 해. 당신들은 내게 부담이 될 뿐이라고.
남자 아니 예요.
남자2 뭘 망설여. 젠장. 난 그만 가겠어. 가겠다고.
남자2, 여동생, 어머니 가다가 다시 되돌아서고.
남자 가지마, 제발 내 곁에 있어 줘.
어머니, 여동생 물론이지. (손을 잡는다)
남자2 나야, 아님 저들이야! 양쪽에서 네 손을 모두 잡고 있으니 난 널 잡을 수 없어.
남자 그럼….
남자2 손을 놓아 그리고 내 손을 잡아. 내 손을.
남자, 생각하다 손 뿌리친다
어머니 왜 그러느냐? 이 에미의 손을 뿌리치다니.
여동생 그냥 손이 미끄러진 걸거야.
남자 아니, 이 손으로 이 손으로 날 잡을 거야.
남자2 손 잡아준다.
여동생 오빠가 이상해.
어머니 이런. 우리 기둥아. 내 아들
남자 더 이상 집안의 기둥이 되기 싫어요.
어머니 절대로 무너지면 안 된다.
여동생 무너지면 안돼.
남자 난, 난 이제 지쳤어.
남자2 그래 잘했어. 아주 잘 했어.
어머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가 널 이렇게 망가트렸지? 누가.
여동생 누구야?
남자 아니야. 아니라고. 그 동안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몰라. 난 떠날거야.
어머니 너가 떠나면 난 어쩌라고 그러니. 이 불쌍한 에미는.
여동생 이 불쌍한 동생은.
남자 이제야 홀가분한 걸요. 내게 기둥은 어울리지 않았어요.
남자2 가자. 너의 찬란한 미래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어서
남자, 남자2를 따라 가고. 어머니, 여동생 붙잡는다.
어머니 네가 정 간다면 날 죽이고 가거라. 난 네가 없는 세상은 꿈꿀 수도 없어.
여동생 죽이고 가.
남자 멈춰 선다.
남자2 지금 가지 않는다면 넌 변할 수 없어. 변할 수 없다고.
남자 하지만. 하지만.
남자2 뭘 망설이는 거야? 넌 저 둘을 떠나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행복해 지고 싶지 않나?
남자 행복해 지고 싶어. 그래 가는 거야.
어머니 난 네가 없이는 불행해 죽어버릴 거야.
여동생 나 또한 마찬가지.
남자 하지만.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남자2 가자고. 가잔 말야. 벌꿀과 기름이 흐르는 밖으로 말야.
어머니 제발 우리를 떠나지 말아다오.
여동생 떠나지마 제발.
남자2 네가 안 간다면 혼자라도 가겠어. 더 이상 더 이상은 못 참아
남자 하지만.
남자2 가자
어머니 가지마
남자2 가자
여동생 가지마
남자, 소리 지르며 쓰러진다.
조명 어두워진다.
남자,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다.
어머니 오, 내 아들. 우리 집 기둥.
여동생 오빠가 돌아와서 기뻐. 정말로.
남자 그럼 난… 떠나지 못한 거야. 지금이라도 가야해.
어머니 안돼!
여동생 더 이상 안돼.
남자 그게 무슨 뜻이지? 난 가야한다고. 또 다른 나를 따라 가야 한다고.
어머니, 여동생 절대 그럴 수 없어.
어머니, 여동생 남자2의 몸을 기둥과 함께 밧줄로 감는다.
남자 이게 무슨 짓이야. 그만 둬.
어머니 우리 집 기둥은 흔들려선 안 돼. 꽉 동여매거라.
기둥이 흔들리면 우리집은 무너진다.
여동생 물론이지. 더 꽉 꽉
남자 숨을 쉴 수가 없어. 내게 왜 그러는거야. 도대체.
어머니 네가 꼭 필요해 이러는 것뿐이란다. 우린 널 사랑해.
여동생 우린 한 가족. 사랑해.
남자 뭐? 난 더 이상 지긋지긋한 기둥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어머니 네 병이 나을 때까지만 참으렴.
여동생 병이 나을때까지만.
남자 난 병든 게 아니라고. 그래 기나긴 투병 속에서 씻은 듯 일어났는데.
여동생 맞아. 오빤 병들었어.
남자 무슨 말이야. 난 어느 때보다도 멀쩡하다고.
어머니 오냐, 잠시 쉬고 나면 예전처럼 괜찮을거야.
여동생 예전처럼 괜찮을 거야.
예. 전. 처. 럼.
남자 아니야. 싫어 싫다고.
여동생 엄마 저러다 영영….
어머니 쉿, 들을라.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을게다.
여동생 정말, 쉽게 무너지지 않을까?
어머니 지금은 잠시 보수 공사에 들어간 것 뿐이야.
다 끝나면 더 튼튼해 질 테니 걱정 말아라.
여동생 더 튼튼해 질거야.
남자 아니, 아니야. 난, 난 기둥이 아니라고.
남자 계속 아니라고 머리를 젓는다.
어머니 쉿, 나는 널 사랑한단다.
여동생 나도 사랑해
어머니 어서 대답해야지. 사랑해요 라고.
여동생 우린 끈끈한 가족이잖아. 가족
어머니 그럼. 우린 끈끈한 가족이지.
절대로 헤어질 수 없는 한 가족 말이야.
-끝 이민선 E-mail: min0602@dreamwiz.com
corea-01@hanmail.net Tel: 011-9071-2080
이민선(李旻宣) 1980년 서울출생
주소:서울시 강서구 화곡6동
min0602@dreamwiz.com
등장인물 남자, 남자2, 어머니, 여동생
무대
한 가운데 커다란 기둥이 있다. 기둥 뒤에는 흰 창이 있다.
기둥 바로 밑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남자 한 명이 앉아 있다.
흰 창 뒤에 남자2가 기둥 밑 남자처럼 의자에 앉아있다. 창에 비친 남자2의 그림자.
무대 가장자리에 작은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있다.
기둥 밑 남자의 표정이 심각해 보인다. 곧이어 여자 둘이 나온다. 어머니와 여동생. 여자들의 표정은 무척 밝다. 여자들 남자의 주의를 빙빙 돈다. 남자, 여자들 바라본다. 어지러운 남자.
어머니 일어났니?
여동생 오빠, 안녕.
남자 (일어선다. 귀찮듯이)그래.
어머니 얘야, 어디가 아픈 건 아니니, 안색이 안 좋구나.
남자 아니예요.
어머니 그럼, 무서운 꿈이라도 꾼 게야?
여동생 악몽이라도.
어머니 호호, 네 오빠는 악몽을 꿀 때면 늘 나를 찾곤 했지.
“엄마! 엄마!”하면서 말야. 그럼 나는 사랑스럽게 안아주었단다. 기억나니 아들아?
남자 네.
어머니 그러고 보니 널 안아본지도 꽤 오래됐구나.
이젠 컸다고 이 에미한테 안기는 걸 부끄러워하는거니?
여동생 부끄러워 하는 거야?
남자 아니예요.
어머니 그럼 한번 안아볼까. (안는다)
여동생 나도 안아볼까.(안는다)
남자 전 조금 더 쉬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오늘은 휴일이잖아요.
여동생 오늘은 휴일. 노는 날. 좋아라 좋아라.
어머니 일년 삼백 육십 오일이 휴일인 네가 좋기도 하겠다.
여동생 너무해. 너무해 너무해.
남자 조금만 더 쉴게요. 아침은 필요없어요.
어머니 그래도 아침 먹고 또 자던가 해야지. 몸 상할까 걱정된다.
규칙적인 식사가 중요한 건데 아휴, 먹는 게 그리 부실해서야.
남자 괜찮아요. 지금은 밥보다 좀 쉬고 싶어요.
여동생 어제도 늦게 온 거야?
남자 어. 요즘 좀 바쁘구나.
어머니 그 회사는 왜 그런다니, 차라리 네 대신 이 에미가 일을 하는 게 낫지.
여동생 엄마가 일하는 게 낫지. 오빠 회사 그만 둬.
어머니 얘가, 조용히 하지 못해.
여동생 애이, 엄마는 허풍쟁이
남자 저, 조금만 더 잘게요. 네?
어머니 그래. 그럼 점심 식사 전까진 일어 나야한다. 네가 좋아하는 칼국수를 할테니까.
여동생 칼국수를 할테니까. 근데, 또 칼국수야?
남자 그래요. 힘든데 놔두세요.
어머니 이 에민, 네가 맛있게 먹는 걸 보면 힘이 솟는걸.
여동생 애이, 엄마는 거짓말쟁이 .
맨날 아프다고 하면서. 허리야 다리야, 지긋지긋한 관절염아.
어머니 쉿!
남자 (한숨쉰다)점심 전까진 일어날게요. 죄송해요.
어머니 그럼 푹 쉬거라.
여동생 푹 쉬어.
남자 네.
(퇴장하며)
여동생 근데 엄마 진짜로 또 칼국수 할거야?
어머니 조용히 못해.
여동생 아이, 싫은데.
의자에 앉은 남자, 불편한지 엎치락뒤치락 한다.
조명 어두워지고 창에만 비춘다. 창 밖의 남자2, 의자에서 일어나 서서히 움직인다.
남자2 밖으로 나온다. 창을 뚫고 나온 남자2. 다시 조명이 환해진다.
남자2,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본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며 쳐다본다.
남자의 코앞까지 왔다.
남자, 눈치챈다.
남자 어, 당신, 당신은 누구죠?
남자2 (조소 섞인 웃음)
남자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당장 나가요!
남자2 어디로?
남자 밖으로 당장 나가지 못해요!
남자2 너나 나가.
남자 뭐요? 어…어….
남자2 어머니를 부르시겠다. 하하하 한번 불러보시지.
남자 이상하군. 말이 안나와. 어….
남자2 이상할거 하나도 없어. 내가 최면을 걸어놨거든.
남자 최면? 그럼 다른 사람이라도.
남자2 그만 둬. 여긴 우리 둘 뿐이야. 알았니, 사랑스런 아가야.
남자 뭐라고요? 당신 뭐야? 뭔데 이 새끼(멱살 잡는다)
남자2 하하하하
남자 미쳤군. 제 정신이 아니야.
남자2 날 똑바로 보라구. 누군지 모르겠어?
남자 이런, 나잖아. 나!
남자2 그래, 너 맞아. 이제야 날 알아보는군.
남자 그럴 리 없어. 혹시 쌍둥이 형제라도 나타난건가?
남자2 무슨 헛소리야. 사라졌던 쌍둥이 형제. 웃기는군. 난 그저 너 일뿐이야. 너.
남자 아, 내가 꿈을 꾸는건가. 맞아, 그럴거야. 꿈이 분명해. 이건 악몽이라고.
남자2 꿈? 꿈이라. 네가 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
남자 맞아. 꿈인 거야. 깨고 싶어 얼른 깨야해.
남자2 미치겠군. (때린다)정신차려.
남자 뭐야, 꿈이 아니잖아. 이렇게 아픈걸 봐선.
어떻게 또 다른 내가 있을 수 있는 거지? 내가 죽기라도….
아니, 미스테리 추리물에서 본 적이 있어. 분신이라는 거. 당신이 그럼 내 분신?
남자2 웃기는 소리 좀 하지마.
남자 분신을 보면 죽는다는데. 그럼 내가 곧 죽는다는 건가?
남자2 이젠 짜증까지 나는군. 짜증나 죽겠어.
남자 죽는다고? 난 아직 죽기는 싫어. 내 인생을 펴보지도 못했다고.
일어나자마자 회사에선 일에 치이고 집에 와선 가족들에 치이고.
그런데 죽는다고. 못 죽어. 난 절대 죽을 수 없어.
요즘 일이 많이 몸이 힘들고 나른했는데 그새 병이 든건가? 암? 불치병?
남자2 오버 좀 하지마. 누가 너 더러 죽는다냐? 내가 저승사자로 보이니?
남자 글쎄? 그러고 보니 검은 두루마기에 갓도 안 썼네.
남자2 이렇게 잘 생기고 깔끔하고 지적이고 세련되면서
수려한 말솜씨까지 가진 나한테 뭐라고?
남자 나?
남자2 음. 이제, 바보 같은 소린 집어치자고! 난 당신 내면의 자아야. 자아. 알겠어?
남자 내면의 나? 그런 것도 있나?
남자2 사람들에겐 누구나 있어. 하지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남자 지금 내 눈엔 당신이 보이는데.
남자2 내가 나타났으니까.
남자 갑자기 왜 나타났거죠? 그럼.
남자2 난 늘 네 옆에 있었지. 그림자가 되어서 말야.
그 동안은 꾹 참고 있었는데 더 이상은 안되겠더군.
남자 무슨 말인지. 난 통 모르겠군.
남자2 (화내며)답답해. 그 놈의 답답함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정도야.
남자 무슨 말인지. 난 영.
남자2 나는 답답한 건 딱 질색이야. 내가 분명 너의 자아가 맞긴 하지만 너와 난 달라.
전혀 템포가 맞지 않는다고. 여태껏 참은 것만 해도 놀라울 만큼 말야.
남자 모를 말만 하는군요.
당신이 내 내면이라면 당신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니야?
근데 난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남자2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남자 그래요.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아직까지 내면의 자아라는 말도 생소하고. 이게 현실인지 조차 가늠하기 어렵다고요.
남자2 너라는 녀석은 늘 그래. 꽉 막힌 것이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고. 난 너라고. 너!
남자 내면의 나와 그리고 진짜 나.
남자2 그래, 바로 그거야. 그리고 다음. 내가 이곳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
남자 그래요 우선 그 이유부터 듣겠어요. 근데 왜 아까부터 반말이죠?
남자2 억울하면 너도 반말 해.
내가 이렇게 네게 나타난 이윤. 아까도 말했지만 다시 한번 말한다.
이번엔 잘 들어. 난 이제 널 벗어나려고 한다 그거야.
너의 답. 답. 함. 때. 문. 에.
남자 내가 답답하다고?
남자2 그래. 넌 날 숨막히게 해.
남자 숨이 막힌다고? 나 때문에? 내가 뭘 어쨌길래?
남자2 그걸 몰라서 물어?
넌 늘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 이십하고도 구 년 육 개월을.
남자 (의자에 앉아 매만지며)그러고 보니 오랜 시간을 이 의자와 함께 보냈군.
남자2 훗, 몹쓸 놈의 애착심.
남자 애착심이라고? 이건 그저 정일 뿐이야. 정.
남자2 정. 그 놈의 정 드럽게 끈끈하네.
지겹지도 않아? 그 놈의 의자 냄새 좀 맡아봐.
뭐가 네 엉덩이 냄새고 뭐가 이 의자 냄샌지 분간도 못하겠어.
남자 이 의자는 내 휴식처라고. 지친 몸의 기댈 수 있는.
남자2 세상을 봐. 눈을 크게 떠보라고. 이 의자보다 좋은 것들이 얼마든지 있어.
두 발을 쭉 필수 있는 흔들의자도 있고. 의자가 아닌 침대도 있다고.
남자 두 발을 쭉 핀다고.
남자2 그래, 이제 이 의자는 네게 너무 작아졌어.
남자 전보다 작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야. 어릴 땐 무척이나 넓어 보이고 편안했는데.
남자2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 군. 이런 낡은 의자는 던져 버리자고.
남자 버려? 그건 안돼.
근데, 당신 진짜 나 맞아? 난 여기 이렇게 있는데 나라니.
남자2 돌겠네. 난 말야.
이 놈의 집구석에만 갇혀 있는 바로 너의 내면이란 말야. 알아듣겠어.
남자 그럼 난 누구지?
남자2 너는 껍데기일 뿐이야 꽉 막혀버린 껍데기.
남자 뭐, 껍데기... 내가 껍데기라고? 살아있는 껍데긴 세상에 없어.
남자2 웃기는 군. 아주 재미있어.(손뼉을 친다)
머리가 없다면 말이 다르지. 생각할 수 있는 머리 말야.
남자 아니야, 난 생각할 수 있어. 생각할 수 있다고…
남자2 그래? 근데 네 가족 앞에선 이상하게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더군.
남자 우리 가족은 날 최고로 여긴다고. 최고 말야. 내가 못할 말은 없어.
남자2 훗, 정말 그럴까? 하하하, 넌 껍데기에 불과해. 껍데기말야. (남자 주위를 돈다)
남자 (의자를 끌어안고)아냐 아니라고.
남자2 창안으로 들어가고 탁자에 앉아있던 어머니, 여동생 놀라며 남자에게 간다.
무대 위, 탁자엔 칼국수 만들던 모습. 도마에 칼.
어머니 무슨 일이니? 아들아!(남자 얼굴을 만지며)
여동생 오빠?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악몽이라도.
어머니 호호, 네 오빠는 악몽을 꿀 때면 늘 나를 찾곤 했지.
“엄마! 엄마!”하면서 말야. 그럼 나는 사랑스럽게 안아주었단다. 기억나니 아들아?
남자 네.
어머니 그러고 보니 널 안아본지도 꽤 오래됐구나.
이젠 컸다고 이 에미한테 안기는 걸 부끄러워하는거니?
여동생 부끄러워 하는 거야?
남자 아니예요.
어머니 그럼 한번 안아볼까. (안는다)
여동생 나도 안아볼까.(안는다)
어머니 어서, 나오너라 네가 좋아하는 칼국수가 다 됐다.
여동생 그래, 오빠만 좋아하는 칼국수가 다 됐어.
남자 (멍하게 두 여자 바라본다)
어머니.
어머니 그래, 그래 나 여기 있다.
여동생 나도 여기 있어.
남자 (벌떡 일어나서)어떤 사람이 내 방에 들어왔어요.
그 사람은 내가 껍데기라며 실컷 비웃었죠. 여기 그 사람이 있어요.
(손가락으로 주위를 가리키며) 여기, 아니 여기에도 그가, 그가 있었는데….
어머니 이런. 네가 너무 피곤했나보구나. 악몽 아님 허깨빌 거다.
여동생 악몽 아님 허깨비
남자 악몽을 꾼 것도, 허깨빌 볼 것도 아니 예요. 나였어요. 바로 나였어요.
어머니 사람이 피곤하다 보면 가끔 헛 걸 보기도 한단다. 심신이 약한 덴 쉬어야해.
여동생 좀 쉬는 게 좋겠어.
어머니 그래, 쉬고 나면 좋아질 거야.
남자 껍데기, 껍데기...나는 나보고 껍데기라 말했어요.
어머니 껍데기? 껍데기가 먹고 싶으냐? (딸 보며)얘야 껍데기 좀 사오너라.
여동생 껍데기? 소 껍데기, 돼지 껍데기, 조개 껍데기, 개 껍데기….
어머니 그래, 껍데기 껍데기. 근데 무슨 껍데기지?
남자 (멍하다)
어머니 맛있는 걸로 사오라는 구나.
여동생 그럼, 야들야들하고 기름이 자글자글 흐르는 돼지 껍데기를 사와야지.
어머니 무슨 소리니, 소 껍데기가 제일이지. 바삭하게 구워서 참기름 소금 장에 찍어 콕.
거기에 소주 한 잔. 캬
여동생 아니 아니야. 돼지 껍데기가 제일이라니까.
어머니 아니라니까 그러네.
여동생 오빠가 말 좀 해봐.
어머니 그래, 소껍데기지?
여동생 돼지껍데기지?
남자 인간 껍데기.
여동생, 어머니 뭐? 인간 껍데기!
어머니, 여동생 탁자로 가서 의자에 앉는다.
어머니 지금 오빠가 뭐라고 그랬지?
여동생 인간 껍데기.
어머니 내가 귀가 먹은 건 아니구나.
여동생 난, 그런 건 못 사와. 어디서 그런 걸 사와. 끔찍도 해라.
어머니 하지만 오빠가 저렇게 찾는데….
여동생 그거 말고 다른 건 다 할 수 있어. 제발.
엄마, 그냥 우리 칼국수나 먹자.
오빤 칼국수를 젤 좋아하잖아.
어머니 칼국수? 그래 칼.
여동생 칼? 칼로 뭘 하려고.
어머니 내 늙은 껍질이라도….(칼을 들이댄다)
여동생 껍질을
어머니 그럼, 네가 할래?(칼을 건내 준다)
여동생 안 할래.
어머니 (다시 칼을 팔에 가져다 댄다)
여동생 근데 우리가 왜 이래야만 하지? 오빠가 뭔데?
어머니 오빠가 없으면 어찌되겠어. 생각해봐.
여동생 생각이라. 오빠가 없으면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나는….
어머니 그래서 이래야만 하는 거야.
여동생 왜 이래야만 하는 거야? 오빤 지금 제 정신이 아니라고.
어머니 쉿.
여동생 쉿.
어머니 원하는 걸 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
여동생 그래도 난 이해할 수 없어.
어머니 넌 모성을 몰라. 이까짓 거 할 수 있어.
여동생 윽(눈을 가리며)전 차마 볼 수가 없어요.
어머니 (고통스런 모습으로 살을 베는 시늉을 한다)다 됐다.
얘야, 이걸 어서 오빠에게 가져다주렴
여동생, 어머니한테서 받아들고 남자 앞에 디민다. 아직도 접시를 쳐다보지 않는다.
여동생 (쳐다보지도 않고 내민다)
남자 (접시 보며)이게 뭐지? 칼국수니?
여동생 껍데기, 오빠가 찾던 그거.
남자 내가 찾던 그거라고. 그게 뭐지?
여동생 내 입으론 말할 수 없어. (몸을 떤다)
어머니 팔에 붕대 감은 채 남자 앞에다가 온다. 여동생, 팔을 보고 또 한번 몸을 떤다.
어머니 어서 맛있게 먹으렴.
남자 전, 먹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나 드세요. (접시 어머니에게 준다)
여동생 자기 살을 자기가 어떻게 먹어.
남자 뭐, 이게 어머니의 살이라고?
어머니 네가 그랬잖니, 인간 껍데기가 먹고 싶다고.
남자 전 그런 말 한 적이 없어요.
여동생 말 한 적이 없다고?
그럼 우리가 들은 말은 뭐야.
어머니 어서 먹으렴. 이 엄마를 사랑한다면 어서.
여동생 어서 먹어. 어서. 엄마를 사랑한다면.
남자 하지만 난….
어머니, 여동생, 남자의 입에 강제로 집어넣는다.
남자 괴로운 모습. 씹지도 않고 그냥 삼킨다.
어머니, 여동생 흐뭇한 표정. 다시 탁자로 돌아가 앉는다.
다시 남자2가 남자 앞에 나온다.
남자 (구역질하며)난 그게 아니었는데...이런.
남자2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군.
남자 누구야? 당신이군. 아깐 어디 간 거지?
남자2 그건 내 마음 아닌가. 내가 어딜 가든. 쳇.
아까부터 쭉 보고 있었지. 아주 끈끈한 가족애 더군.
그래, 네 에미의 살을 먹은 기분이 어때?
남자 난 먹고 싶지 않았어. 정말이야.(남자2 애절하게 보며)
남자2 (웃으며)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누가 네 말을 믿겠어?
이유가 어떻든 넌 어머니의 살을 먹은 거야. 그것도 한 입에 덥썩.
남자 (남자2의 팔을 잡으며)아니야, 너도 봤다면 알 거 아냐.
내가 얼마나 먹길 싫어했는지.
남자2 알지. 암, 알고 말고. 그런데 인육 맛은 어때? 맛있나?
남자 너 까지 날 이해하지 못하는 군.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아.
너도 마찬가지야.
남자2 하하. 그래도 나만큼 널 이해하는 사람은 없어.
(가슴에 얼굴을 대고)너의 심장소리, 이 숨결, 떨리는 목소리.
난, 너의 모든 걸 알고 느끼고 기억하지.
남자 내 모든 걸 다.
남자2 그럼.
남자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남자2 그럼.
남자 내 꿈이 뭔지도?
남자2 그럼.
남자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내가 무엇을 슬퍼하고 내가 무엇을 답답해하는지도...
남자2 그럼. 그럼. 그럼. 난 너의 전부를 이해하니까.
남자 그게 사실이라면 난 어쩜...
남자,남자2 당신을 사랑하게 될 지도 몰라.
어머니, 여동생 남자 앞에 다가오고 남자2 다시 창안으로 들어간다. 아쉬워하는 남자.
남자 (창을 보며)내 사랑.
어머니 아들아, 지금 뭐라고 했니?
여동생 분명, 사랑이라고 말했어. 그렇지 오빠?
남자 그래.
어머니 엄마도 널 사랑한단다.
여동생 우린 한 가족이잖아.
남자 가족. 내겐 가족이 있지.
어머니 그것도 그냥 가족이 아니지.
여동생 맞아. 끈끈한 가족이지.
남자 끈끈한 가족? 누구지 누가 한 말이지?
여동생 오빠가?
남자 내가? 언제? 아니야.
어머니 네가 한 말도 기억 못하겠니? 좀 더 쉬어야겠구나.
여동생 좀 더 쉬어야겠어.
남자 끈끈한 가족이라. 끈끈한.
어머니, 여동생 그래 끈끈한 끈끈한.
주변 조명 어두워지고 남자에게만 비춘다.
어머니, 여동생 탁자로 돌아가 있다. 조명 창으로 향하고 남자2가 나온다.
남자2, 남자 옆에 서서 남자의 행동을 따라하거나 유심히 본다.
남자, 어머니와 여동생 쪽으로 간다.
남자 내겐 가족이 있어. 가족.
어머니 그럼.
여동생 가족보다 중요한 건 없어.
남자 정말 그럴까?
어머니 이렇게 행복하잖아.
여동생 물론. 이렇게 행복하잖아.
남자 모르겠어. 행복이란 게 이런 건지.
어머니, 여동생 심각하게 쳐다본다
어머니 그게 무슨 뜻이니? 아들아 혹시 ….
여동생 혹시 오빠는 행복하지 않다는 거야?
어머니 그만, 그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구나. 어서 아니라고 대답해 주렴.
여동생 너무 행복하다고 말해.
어머니 행복하다고.
남자2. 남자 거의 동시에 대답한다
남자 그래
남자2 아니,
남자 난 행복해
남자2 난 불행해
남자 행복해 죽겠어
남자2 불행해 죽겠다고.
어머니, 여동생 안도의 한숨을 쉬고 퇴장.
남자2 답답하다는 듯
남자2 넌 병신, 머저리만도 못한 놈이야.
남자 어쩔 수 없었어.
남자2 왜 말 못하는 거야. 왜! 왜! 난 지금 불행하다고
남자 우리 가족은 거의 20여 년을 나만 보고 살았어. 오직 나만을.
남자2 그래서?
남자 그래서라니? 난 그들을 배신할 수 없다고. 그 믿음, 그 바램. 시선까지도
남자2 좋아. 그럼 넌 이대로 평생을 살아봐. 난 이만 가겠어.
남자 가지마.
남자2 가지 말라고? 그런데, 아까 날 사랑한다고 했던가? 사랑 말이야.
남자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지. 널 사랑한다고 하진 않았어.
남자2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뭐가 그리 길어.
남자 모르겠어.
남자2 모르겠어. 잘 모르겠어. 모르겠군. 잘 모르겠군.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살아오면서 한 말들이야. 잘 생각해 보라구.
남자 그래. 난 언제나 색으로 따지면 회색이었지. 흑과 백도 아닌 색.
남자2 그런 너가 물론 싫었겠지. 네 모습이.
남자 넌 날 잘 알잖아. 난 내 자신이 싫어. 텅 빈 껍질만 남은 내가.
남자2 이제부터라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어.
남자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어머니, 여동생 등장.
어머니 좀 괜찮니. 창 밖 좀 보면 나아질지도 몰라. 어머나, 저기 꽃이 피었구나.
남자 네, 꽃이 폈네요.
어머니 네가 좋아하는 장미도 있구나.
남자 그건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이죠.
여동생 오빤 튤립을 좋아해.
남자 그건 네가 좋아하는 꽃이지.
어머니 얘야, 이 에미는 무슨 꽃을 닮았니?
여동생 나는?
남자 해바라기.
어머니 해바라기? 오직 해님만을 따라 다니는 해바라기라.
여동생 일편단심 해바라기? 민들레?
어머니 이 어미는 행복하구나. 네가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오. (뽀뽀하려 한다)
남자 어머니가 행복하시면 됐어요.
하지만….
어머니 하지만?
여동생 하지만 뭐지?
남자 아니 예요.
남자2 어서 말을 해. 당신들은 내게 부담이 될 뿐이라고.
남자 아니 예요.
남자2 뭘 망설여. 젠장. 난 그만 가겠어. 가겠다고.
남자2, 여동생, 어머니 가다가 다시 되돌아서고.
남자 가지마, 제발 내 곁에 있어 줘.
어머니, 여동생 물론이지. (손을 잡는다)
남자2 나야, 아님 저들이야! 양쪽에서 네 손을 모두 잡고 있으니 난 널 잡을 수 없어.
남자 그럼….
남자2 손을 놓아 그리고 내 손을 잡아. 내 손을.
남자, 생각하다 손 뿌리친다
어머니 왜 그러느냐? 이 에미의 손을 뿌리치다니.
여동생 그냥 손이 미끄러진 걸거야.
남자 아니, 이 손으로 이 손으로 날 잡을 거야.
남자2 손 잡아준다.
여동생 오빠가 이상해.
어머니 이런. 우리 기둥아. 내 아들
남자 더 이상 집안의 기둥이 되기 싫어요.
어머니 절대로 무너지면 안 된다.
여동생 무너지면 안돼.
남자 난, 난 이제 지쳤어.
남자2 그래 잘했어. 아주 잘 했어.
어머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가 널 이렇게 망가트렸지? 누가.
여동생 누구야?
남자 아니야. 아니라고. 그 동안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몰라. 난 떠날거야.
어머니 너가 떠나면 난 어쩌라고 그러니. 이 불쌍한 에미는.
여동생 이 불쌍한 동생은.
남자 이제야 홀가분한 걸요. 내게 기둥은 어울리지 않았어요.
남자2 가자. 너의 찬란한 미래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어서
남자, 남자2를 따라 가고. 어머니, 여동생 붙잡는다.
어머니 네가 정 간다면 날 죽이고 가거라. 난 네가 없는 세상은 꿈꿀 수도 없어.
여동생 죽이고 가.
남자 멈춰 선다.
남자2 지금 가지 않는다면 넌 변할 수 없어. 변할 수 없다고.
남자 하지만. 하지만.
남자2 뭘 망설이는 거야? 넌 저 둘을 떠나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행복해 지고 싶지 않나?
남자 행복해 지고 싶어. 그래 가는 거야.
어머니 난 네가 없이는 불행해 죽어버릴 거야.
여동생 나 또한 마찬가지.
남자 하지만.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남자2 가자고. 가잔 말야. 벌꿀과 기름이 흐르는 밖으로 말야.
어머니 제발 우리를 떠나지 말아다오.
여동생 떠나지마 제발.
남자2 네가 안 간다면 혼자라도 가겠어. 더 이상 더 이상은 못 참아
남자 하지만.
남자2 가자
어머니 가지마
남자2 가자
여동생 가지마
남자, 소리 지르며 쓰러진다.
조명 어두워진다.
남자,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다.
어머니 오, 내 아들. 우리 집 기둥.
여동생 오빠가 돌아와서 기뻐. 정말로.
남자 그럼 난… 떠나지 못한 거야. 지금이라도 가야해.
어머니 안돼!
여동생 더 이상 안돼.
남자 그게 무슨 뜻이지? 난 가야한다고. 또 다른 나를 따라 가야 한다고.
어머니, 여동생 절대 그럴 수 없어.
어머니, 여동생 남자2의 몸을 기둥과 함께 밧줄로 감는다.
남자 이게 무슨 짓이야. 그만 둬.
어머니 우리 집 기둥은 흔들려선 안 돼. 꽉 동여매거라.
기둥이 흔들리면 우리집은 무너진다.
여동생 물론이지. 더 꽉 꽉
남자 숨을 쉴 수가 없어. 내게 왜 그러는거야. 도대체.
어머니 네가 꼭 필요해 이러는 것뿐이란다. 우린 널 사랑해.
여동생 우린 한 가족. 사랑해.
남자 뭐? 난 더 이상 지긋지긋한 기둥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어머니 네 병이 나을 때까지만 참으렴.
여동생 병이 나을때까지만.
남자 난 병든 게 아니라고. 그래 기나긴 투병 속에서 씻은 듯 일어났는데.
여동생 맞아. 오빤 병들었어.
남자 무슨 말이야. 난 어느 때보다도 멀쩡하다고.
어머니 오냐, 잠시 쉬고 나면 예전처럼 괜찮을거야.
여동생 예전처럼 괜찮을 거야.
예. 전. 처. 럼.
남자 아니야. 싫어 싫다고.
여동생 엄마 저러다 영영….
어머니 쉿, 들을라.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을게다.
여동생 정말, 쉽게 무너지지 않을까?
어머니 지금은 잠시 보수 공사에 들어간 것 뿐이야.
다 끝나면 더 튼튼해 질 테니 걱정 말아라.
여동생 더 튼튼해 질거야.
남자 아니, 아니야. 난, 난 기둥이 아니라고.
남자 계속 아니라고 머리를 젓는다.
어머니 쉿, 나는 널 사랑한단다.
여동생 나도 사랑해
어머니 어서 대답해야지. 사랑해요 라고.
여동생 우린 끈끈한 가족이잖아. 가족
어머니 그럼. 우린 끈끈한 가족이지.
절대로 헤어질 수 없는 한 가족 말이야.
-끝 이민선 E-mail: min0602@dreamwiz.com
corea-01@hanmail.net Tel: 011-9071-2080
이민선(李旻宣) 1980년 서울출생
주소:서울시 강서구 화곡6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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