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리토피아 신인상

신인상
수상자
투고작

안대근-희곡1(2003)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97회 작성일 04-11-16 08:41

본문

  자살 연습.

  등장인물
  한이상 : 30대 후반의 남자. 매점 주인.
  나재수 : 20대 후반의 남자. 실업자.

  때.
  어느 여름철 저녁.

  곳.
  어느 산 중턱에 있는 허름한 컨테이너 매점.

  무대 왼쪽을 카운터로 하고 카운터 위에는 작은 금고가 놓여있다.
  오른쪽을 매점 출입문으로 하고 중앙에 빈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있다.  
  무대 벽 중앙에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이 있고 벽에 사냥용 장총이 걸려있다. 창문 옆으로 수십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어지럽게 붙어있다.  
  
  무대 조명 밝아오면 한이상이 의자에 앉아 사냥용 장총에 총알을 장전하고 세워서 턱에 대고 있다.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치나 심하게 손이 떨린다.

  한 이 상 : (한숨을 내쉬며) 젠장.

  한이상이 일어나서 벽에 총을 걸어두고 카운터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허름한 옷차림에 안경을 쓰고 일견 유약해 보이는 나재수가 가방 하나를 들고 출입문으로 들어온다.

  나 재 수 : 저어, 먹을 것 좀 있습니까?
  한 이 상 : (퉁명스럽게) 뭘 먹고 싶소?
  나 재 수 : 혹시 술 있으면.
  한 이 상 : 없소.
  나 재 수 : 그럼, 아무거나요.
  
  한이상이 카운터 아래에서 주전자와 사발면을 꺼내 포장을 뜯고 물을 부으려한다.

  나 재 수 : 밥 종류는 없습니까?
  한 이 상 : (물을 부으며) 없소. 이천 원이오.
  
  돈을 준 나재수가 사발면을 들고 의자에 앉는다.
  한이상이 계속 무언가를 쓰다가 볼펜을 ꡐ탁ꡑ 내려놓으면 나재수가 어깨를 들썩이며 먹는 모습이 보인다.
  
  한 이 상 : 라면이 맛이 없소?

  나재수가 눈물을 훔친 후, 손목시계를 본다. 그리고 사발면을 들고 카운터로 온다.

  나 재 수 : 아뇨. 맛은 있는데 더는 못 먹겠습니다. 근데, 저 산엔 사람들이 많이 올라               가나요?
  한 이 상 : 올라갈 사람들은 올라가지.
  나 재 수 : 그런데 뭘 그렇게 쓰신 겁니까?
  한 이 상 : 알 거 없소. 새벽 등산 가는 길인가 본데 어서 올라가 보슈.
  
  나재수가 창문으로 다가가 장총을 본다.

  나 재 수 : 이 총은 장식용인가요?
  한 이 상 : (혼잣말로) 쓰기 나름이지.
  나 재 수 : 총알도 있습니까?
  한 이 상 : 건들지 마슈. 장전된 거니까.
  나 재 수 : 보안용인가 보군요. 그런데, 이 사진들은 다 뭡니까? 전부 산만 찍은 거군               요. 취미신가 보죠?
  한 이 상 :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취미? 취미라구!
  나 재 수 : 죄, 죄송합니다.
  한 이 상 : (목소리를 낮추며) 자네 갈 길이나 가.
  나 재 수 : (힘없는 목소리로) 가야죠...... 근데, 산 정상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한 이 상 : (한숨쉬며) 올라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수. 당신, 안 갈 거요?
  나 재 수 : ...... 수고하십시오.

  나재수가 가방을 들고 출입문으로 나간다.

  한 이 상 : 별 시덥지 않은 놈. 죽을 놈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젠장.
  
  한이상이 카운터 아래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마신다.
  암전.

  조명 밝아오면 카운터에 엎드려서 자고 있는 한이상이 있다.
  나재수가 들어온다.

  나 재 수 : (한이상을 흔들며) 아저씨...... 아저씨?

  나재수가 일어나지 않는 한이상을 잠시 보다가 작은 금고를 들어보나 들리지 않는다. 나재수가 한이상의 몸을 뒤지기 시작한다.

  한 이 상 : (깬 듯 몸을 약간 일으키며) 물...... (카운터 아래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마시다 나재수를 발견하며) 뭐, 뭐야!

  나재수가 재빨리 벽에 걸린 장총을 들고 한이상을 겨눈다.

  나 재 수 : (떨리는 목소리로) 금고 열어. 빨리!
  한 이 상 : (차분한 목소리로) 왜, 돈이라도 가져가게?
  나 재 수 :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열어.
  
  한이상이 금고번호를 돌려 열면 공책들만 가득하다.

  나 재 수 : 돈만 꺼내. 빨리!
  
  한이상이 공책들을 꺼내 카운터 위에 놓고 카운터 아래에서 지갑도 꺼내 놓는다.

  한 이 상 : 지갑에 한 만 오천 원 정도 있을 거야. 그거라도 가져가.
  나 재 수 : 그 공책들은 뭐지?
  한 이 상 : 잘 되면 돈이고 안 되면 쓰레기지.
  나 재 수 : 지금 장난하는 줄 알아! 쏠 수도 있어.
  한 이 상 : 못 믿겠으면 확인해 봐.

  잠시 한이상이 나재수를 보다가 직접 공책을 넘기고, 지갑에서 몇 장의 지폐를 카운터 위에 놓는다.

  한 이 상 : 이거라도 가지고 꺼지던가 날 쏘라구!

  한이상이 나재수에게 다가간다.

  나 재 수 : 오, 오지 마! 젠장, 나 죽어버릴 거야.

  나재수가 총을 턱에 댄다.
  
  한 이 상 : (멈추며) 죽으려면 다른 데 가서 죽지, 왜 여기서 이래!
  나 재 수 : 어쩔 수 없어요. 아저씨가 이해해 주세요. 이게 최선의 방법이라구요!
  한 이 상 : 지랄하고 있네. 내가 왜 당신을 이해해야 되는데?
  나 재 수 :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잖아요.
  한 이 상 : 당장 그 총 놓고 꺼지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나 재 수 : 다른 사람 손에 죽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예요.
  한 이 상 : 죽으러 올라갔으면 혼자 죽어야지, 왜 남한테 피해를 입히고 그러냐구?
  나 재 수 : 제가 죽으러 올라간 걸 어떻게 아셨죠?
  한 이 상 : 당신 같이 티내고 가는 놈들 많아. 웃기는 놈들이지.
  나 재 수 : 그래요. 전 웃기는 놈입니다. 그래서 죽으려고 한다구요!
  한 이 상 : 신세타령은 술집에서나 해. 저 혼자 힘들고 저 혼자 세상 고민하는 줄 아               는 놈. 난 너 같은 놈을 제일 경멸해. 누구나 삶의 무게는 똑같은 거야. 너               만 힘들고 너만 죽고 싶은 줄 알아!
  나 재 수 : 아저씨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러세요? 내 죽고 싶은 처지를 아냐구                요!
  한 이 상 : 너희 같은 놈들이야 여기서 수도 없이 봐왔어. 뻔하다구! 빚더미에 올라앉               았거나 죽을 병에 걸렸겠지. 설마하니 계집 문제로 죽으려고 하는 건 아니               겠지? 하여튼, 가서 죽어버려. 속 시원하게 말이야.

  한이상이 카운터에서 소주병을 꺼내 이로 뚜껑을 연다.

  나 재 수 : (조용히) 그러다 이빨 상해요.
  한 이 상 : (소주를 마시며)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군.

  나재수가 다가가 한이상의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아 조금 마신다.

  나 재 수 : 술 없다면서요.
  한 이 상 : 자네랑 노닥거릴 생각 없으니까 꺼져.
  
  나재수가 단번에 남은 소주를 다 마셔버리곤 울먹인다.

  한 이 상 : (나재수를 보고 어이없어하며) 이런, 젠장. 딱 고거 남았는데.
  나 재 수 : (눈물을 훔치며) 죄송합니다.

  천둥치고 비 내리는 효과음이 들린다.

  한 이 상 : 뭐야?
  나 재 수 : 비가 오고 있어요. 천둥도 치더군요. 술 마시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으니               알 턱이 없겠죠.
  한 이 상 : 그래서 안 죽은 거로군? 한심한 놈.
  나 재 수 : 그래요. 비가 억수같이 오더군요. 그래도 힘들게 정상까지 올라갔어요. 큰               소나무가 있더군요. 친절하게도 밟고 올라설 나무 상자까지 옆에 있었습니               다.
  한 이 상 : 거기가 명당자리야. 숱하게들 죽었지.
  나 재 수 : (가방에서 밧줄을 꺼내 바닥에 던지고) 밧줄을 나뭇가지에 걸고 목에 맸는                 데 으실으실 추웠습니다.
  한 이 상 :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시 내려와? 그딴 정신머리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봤자 남들한테 피해나 주는 거라구.
  나 재 수 : 그래서 죽으려고 합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손가락질이나 받는 내 자신               이 한심해서요.
  한 이 상 : 그럼, 죽어. 누가 말려? 단 내 집에서 나가서 죽으라구.

  나재수가 의자에 앉아서 총을 턱에 댄다.
  한이상이 다가오면 다시 겨눈다.

  나 재 수 : 가까이 오면 쏠 거예요.
  한 이 상 : 자네, 총이나 쏠 줄 알아? 군대 안 갔다 왔지?
  나 재 수 : 그래요! 난 신의 개자식입니다. 면제된 게 그렇게 웃기는 일입니까? 평발               이라 면제된 게 내 탓이냐구요. 차라리 군대라도 가고 싶습니다!
  한 이 상 : 누가 웃기다고 했어? 폼을 보니까 어수룩해서 그렇지. 자. (팔을 벌려 점                점 다가가며) 쏜다며?  

  한이상이 점점 다가가면 나재수가 뒷걸음질친다.

  한 이 상 : 쏴 봐!
  나 재 수 : 내가 죽는 거랑 남을 죽이는 거랑 같아요?
  한 이 상 : 그럼, 총 내려놔. 죽이는 일, 죽는 일, 함부로 하는 거 아냐.

  나재수가 총을 테이블에 놓는다.
  한이상이 의자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 재 수 : 저도 하나 주십시오.

  한이상이 담배와 라이터를 주면 나재수가 불을 붙인다.

  한 이 상 : 그렇게 자네 엄살을 받아줄 사람이 없나?
  나 재 수 : 살기가 힘들더군요. 숨쉬는 것조차 세상에 미안할 정돕니다.
  한 이 상 : 누구나 그래. 그러면서 사는 거지. 숨쉬고 먹고 사랑하고. 그냥 그렇게 사               는 거야. 그러다 때 되면 죽는 거고.
  나 재 수 : 지방에서 공고를 나왔습니다. 취직이 안 되더군요.
  한 이 상 : 일자리는 많아. 자네가 골라서 그렇겠지.
  나 재 수 : 환경미화원을 뽑는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래. 이거라도 하자. 노는 거 보단               낫다.
  한 이 상 : 그거 돈 많이 벌어.
  나 재 수 : 경쟁률이 4.5대 1이더군요.
  한 이 상 : 떨어졌군?
  나 재 수 : 매일 새벽같이 인력시장에 나갔습니다. 아무도 절 뽑지 않더군요.
  한 이 상 : 나 같아도 자넬 안 뽑겠어. 그 몸으로 밀통이나 제대로 지겠어?
  나 재 수 : 처음으로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절 위로했죠. 언젠가 기회               가 올 거다. 용기를 가져라.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그나마 모아놓은 제 피               같은 돈을 가지고 만난 지 한 달도 안 돼서 가지고 날랐다구요. 나쁜 년!                동전통까지 가져갔더군요.
  한 이 상 : (혀를 차며) 안경까지 꼈으면서 여자 보는 눈이 꽝이로군. 그래, 취직도 안               되고 사기 당해서 죽겠다?
  나 재 수 : (담배를 바닥에 끄며) 세상에 누구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더군요. 이 나이               돼서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 갈 수도 없잖습니까. 빌어먹을, 이 넓은 땅바               닥에 내가 맘 편히 누울 자리 하나 없다니! 단 삼십 분이라도 제 얘길 들               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부 아저씨 같은 소리만 했다구요. 자네만 힘               든 줄 알아? 나도 힘들어. 죽는 소리 할려거든 가 죽던가 악착같이 돈을                벌어, 돈!
  한 이 상 : 그럼, 악착같이 벌지, 왜 죽으려고 해?
  나 재 수 : 땅 파면 돈이 나옵니까? 동전 하나 없는 마당에 노숙자 생활을 하게 됐습               니다. 그나마 낫더군요. 저와 같이 생활하던 사람들은 제 얘길 들어줬습니               다. 같이 신세한탄하고 덮고 잘 박스도 마련해주고.
  한 이 상 : (담배를 바닥에 끄며) 그럼, 그렇게라도 살아.
  나 재 수 : 하루는 무료 급식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식판에 따뜻한 밥과 고기국을                줬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식사였어요. 그렇게 한 그릇을 먹었는데               도 배가 고프더군요. 줄을 서서 다시 한 그릇을 더 받았습니다. 옆에서 먹                 고 있는데 퍼주는 사람들이 숙덕거리더군요. 젊은 사람이 일할 생각은 안 하               고 거렁뱅이 짓을 한다구요. 눈물이 나오더군요. 그래도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열심히 밥을 먹었습니다.
  한 이 상 : 그래서 죽겠다? 나 같으면 도둑질이라도 해서 살겠다.
  나 재 수 : 그래서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좋은 집은 보안 장치가 잘 돼 있어서               허름한 집을 들어갔죠. 할머니 한 명과 학생인 손녀 둘이 자고 있더군요.
  한 이 상 : 그래서 털었어?
  나 재 수 :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뺏을 생각을 하니.
  한 이 상 : 천상 도둑질은 못할 인간이군.
  나 재 수 : 그때, 할머니가 깼습니다. 절 보더니 밥은 먹었냐고 그러시더군요.

  나재수가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린다.

  나 재 수 : (잠시 숨을 고르며)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었습니다. 나오려는데 저한               테 만 원을 쥐어주시더군요. 밥 사먹고 다니라고.

  나재수가 다시 오열을 한다.

  나 재 수 : (호흡을 고른 후) 친한 노숙자한테 만 원 중에 오천 원을 주고 여기로 올               라 온 겁니다.
  한 이 상 : 그랬군. 그래, 그런 이유로 죽으려고 했으면 죽지 왜 못 죽고 여길 다시                  들어 왔어?
  나 재 수 : 무서웠어요. 이렇게 죽으면 누구하나 저한테 관심을 가져주는 것도 아닌                 데. 억울했습니다. 이렇게 죽기가요.
  한 이 상 : 그럼, 살어.
  나 재 수 : 아저씬 계속 그런 식이군요. 죽어, 살어. 아저씨 눈엔 세상이 그렇게 단순               하게 보이나 보죠?
  한 이 상 : 자네 눈엔 내가 생각 없이 사는 인간으로 보이나? 하긴, 지금껏 산 아래                여인숙과 여기만 오가며 단순하게 살았으니.
  나 재 수 : 아저씬 그냥 그렇게, 지금처럼 살면 되겠죠. 하다못해 이런 매점이라도                       있으니.
  한 이 상 : 이런 매점이라...... 내 마누라가 채려준 거야.
  나 재 수 : 아저씬 여우같은 와이프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라도 있겠죠. 누군가 기다려               주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라도 있을 테고.
  
  한이상이 일어나 카운터에 놓여있는 공책들을 바닥에 던진다.

  한 이 상 : (자조적인 목소리로) 나도 몰라. 내가 왜 계속 이따위 짓을 하는지. 마누란               내 글을 보고 반했대. 습작 수준도 안 되는 글을 보면서 웃어주고 울어주               고...... 그래서 결혼했어. 내가 글 쓰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싶다고 말이야.               (살짝 웃으며) 가난했지만 우린 행복했지.
  나 재 수 : 나도 그런 진짜 행복을 단 한 시간만이라도 느끼고 싶다구요.
  한 이 상 : 돈을 벌어야 했어. 우린 너무 없었거든. 마누란 밖에 나가 일하고 난 집에               쳐 박혀서 같잖은 글들을 써냈지. 조금만 기다려라. 내 글만 팔리면 너 고               생 안 시킨다. 빌어먹을 출판사 놈들. 염병할 심사위원들! 목수가 연장 탓               한다는 소릴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 애새끼 낳을 생각도 못했어. 입에 풀               칠하기도 바빴으니까.
  나 재 수 : 가족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한 이 상 : 소주병이나 빠는 형? 노름에 빠져있는 매제? 그들은 가족이 아니야. 적이               야, 적!
  나 재 수 : 그래도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행복한 겁니다.
  한 이 상 : 한 달 두 달. 추운 날에도 새벽 같이 나가는 마누라를 어떤 남편이 좋다고               보겠나. 그러다 마누라가 전세금을 빼서 이걸 차려줬지. 제 신경 쓰지 말               고 여기서 조금이라도 생활비 벌면서 계속 쓰세요. 자기는 머물 데가 있다               더군. 난 여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악착같이 써냈어.
  나 재 수 : 아저씬 목표라두 있잖아요.
  한 이 상 : 목표? 개 같은 소리 말어. 몇 푼 더 벌어보겠다고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덜               컥 죽어버린 마누라야. 내 글을 읽어줄 유일한 사람이 나 몰래 죽었는데                목표? 그래. 마누라 무덤에 당선된 글을 보여주고 죽자. 아니, 그렇게 보낸               마누라를 위해서 꼭 돈 많이 버는 작가가 되자! 그렇게 이 곳에서 보낸 세               월이 십 년이야, 자그만치 십 년!  
  나 재 수 : 그래서 아저씨도 여차하면 죽으려고 이 총을 갖다놓으신 겁니까?
  한 이 상 : 그래도 난 너처럼 징징 짜면서 엄살이나 부리진 않아. 자기 혼자 힘들다고               죽을 용기조차 없으면서 어리광부리진 않는다구!
  나 재 수 : 그래요. 대단하시네요. 아저씬 충분히 죽을 이유가 있군요. 십 년 동안 붙               잡고 있는데 안 되니까 자기는 충분히 죽을 이유가 있다!
  한 이 상 : 건방진 소리하지 말고 꺼져! 내가 죽든 말든 네 놈하곤 상관없으니까.

  나재수가 손목시계를 본 후, 가방을 들고 일어나 힘없이 문으로 간다. 문을 미나 열리지 않는다.

  나 재 수 : 문이, 문이 안 열리는 데요?
  한 이 상 : 문은 뭐하러 잠궜어?
  나 재 수 : 그래도 안 돼요.

  천둥치고 비 내리는 효과음이 들린다.
  한이상이 다가와 문을 미나 열리지 않는다.
  나재수가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들추면 창문 색이 진갈색이다.

  나 재 수 : 흙? 아, 아저씨!
  
  한이상이 다가온다.

  한 이 상 : 젠장, 산사태야. 매몰돼서 문이 안 열리는 거라구.
  나 재 수 : 그럼, 우린 여기서 못 나가는 건가요? 죽는 거냐구요!
  한 이 상 : 원래 죽으려고 했잖아.
  나 재 수 : 그, 그렇기는 하지만...... 전화! 없으면 휴대폰이라도 있을 거 아니예요?
  한 이 상 : 좀 전에 약이 다 달았어.
  나 재 수 : 이렇게 죽기는 싫다구요!
  한 이 상 : 그럼 어떻게 죽길 바래?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죽고 싶               어 하는 놈을 죽게 만들었으니.
  나 재 수 : 그래요. 고맙군요. 죽여줘서 참 고맙습니다!
  한 이 상 : 시끄러!

  암전.

  무대 밝아지면 한이상이 카운터 의자에 앉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꽁초를 끈다.
  나재수가 의자에 앉아있고 총은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다.

  나 재 수 : (손목시계를 본 후, 힘없는 목소리로) 정말 한 번도 정상에 가 본 적이 없               어요?
  한 이 상 : 그게 이상해?
  나 재 수 : 당연하죠. 심심해서라도 올라가 봤을 텐데.
  한 이 상 : 창문으로 산이 보이지. 그 옆에 있는 총도 함께 말이야. 한 번 올라가면                  다신 못 내려올 거 같더라구.
  나 재 수 : 그래서 저 사진들을 찍은 거군요?
  한 이 상 : 마누라가 죽은 후부터 저 산을 찍은 거야. 한 달에 한 장씩.
  나 재 수 : 왜요?
  한 이 상 : 계속 숨쉴 이유가 필요했거든.
  나 재 수 : 글을 쓰잖아요.
  한 이 상 : (실소를 하며) 아무도 사주지 않는 글? 근데, 자네는 왜 자꾸 시계를 보는               거야?
  나 재 수 : 습관이에요.
  한 이 상 : (실소를 하며) 자네, 정말 웃기는 친구로군.
  나 재 수 : (웃으며) 고아원 나올 때 원장님이 사주신 거예요. 떠나는 아이들한테 항               상 시계를 사주셨죠. 이 시계를 보면서 언제나 열심히 살아라.
  한 이 상 : (한숨쉬며) 결국 이렇게 된 건가?
  나 재 수 : 점점 숨쉬기가 힘든 거 같아요.
  한 이 상 : 호흡을 길게 해 봐. 괜찮을 거야.
  나 재 수 : (몇 번 긴 호흡을 하다가 벌떡 일어나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               예요. 그렇죠?
  한 이 상 : 아까 말했잖아.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구.
  나 재 수 : (총을 들고 한이상을 겨누며) 비상문이라던가, 뭐 그런 거!
  한 이 상 : 이렇게 조그만 매점에 그딴 게 어딨어?
  나 재 수 : 젠장...... (의자에 앉아서 총을 턱에 대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통스럽게 질               식사를 하느니 한 방에 죽겠어요.
  한 이 상 : 끝까지 징징거리는군. 한심한 놈.
  나 재 수 : 아저씨도 다를 바 없어요! 바로 코앞에 있는 산 하나도 못 올라본 주제에.               내가 십 년을 붙잡고 있었다면 벌써 책 냈을 거야.
  한 이 상 : 뚫린 주둥아리라고 함부로 놀리지 마. 내가 너처럼 젊었다면 그딴 이유로                   죽을 생각 않고 열심히 일자리를 알아보겠다. 하다못해 공사판 감독 바짓                  자랑이라도 잡고 늘어지겠다구!
  나 재 수 : 이런데서 쳐 박혀 있는 아저씨가 뭘 안다구 그래요?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한 이 상 : 그럼, 죽어! 병신같이 징징거리지 말구. 살아갈 용기가 없으면 뒈지라구!
  나 재 수 : 아저씨도 마찬가지예요. 씨팔! 말로만 자신 있는 척하면서 돌아서면 죽을                까 말까하는 아저씨보단 차라리 내가 더 솔직하다구요! 아저씬 위선자야.                이 따위 골방에 틀어박혀서 쓴 글, 누가 사줄 거 같아요? 차라리 죽어버                려!
  한 이 상 : (나재수의 멱살을 잡고) 닥쳐! 죽은 내 마누라가 좋아했던 글들이야. 감히               너 따위가 논해? 이 개자식아!

  한이상이 나재수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면 나재수가 총을 든 채 바닥에 쓰러진다.

  나 재 수 : (일어서서 총을 겨누며) 이젠 당신까지 날 무시해? 죽여 버릴 꺼야!
  한 이 상 : 그래, 죽여! 내 손으로 못 죽었다. 니 손으로 나 좀 죽여줘!
  나 재 수 : 씨팔, (잠시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다) 아아악!

  나재수가 천장을 향해 발사하면 ꡐ탕ꡑ하는 총소리 효과음이 들리며 한 줄기 빛이 강하게 비춰진다.
  나재수가 울먹이며 주저앉는다.
  한이상도 거친 호흡을 내쉬며, 잠시 그렇게 두 사람이 있다.
  한이상이 나재수에게 다가와 총을 치운다.

  한 이 상 : (천장을 보며) 완전히 매몰된 건 아니군. 봐. 빛이 들어오고 있어. 해가 떴               다구.

  나 재 수 : (천장을 보며) 그래도 숨쉴 구멍은 생겼군요.
  한 이 상 : 이봐, 젊은 친구. 자네 같으면 벌써 책 냈을 거라구 했지?
  나 재 수 : (울먹이며) 죄송해요. 전 그냥.
  한 이 상 : 아니야. 이제 예전의 자넨 죽었어. 징징거리던 자네는 죽었다구. 다시 태어               난 거야. 그러니 이젠 공사판 감독 바짓자랑이라도 붙잡아 봐.
  나 재 수 : (웃으며) 여기서...... 구조되면요?
  한 이 상 : (같이 웃으며) 그래, 여기서 구조되면.
  나 재 수 : 아저씬요?
  한 이 상 : 자네가 총을 쐈을 때 심장이 덜컥 했어. 수십 번을 쏘고 싶었지. 이 총으                로 나 자신한테 말이야. 차마 그럴 용기가 없더군. 예전의 나도 죽었어. 그               총소리에. (웃으며) 이젠 여길 떠날 때가 된 거 같아. 내 글을 봐주던 마누               라는 갔으니 이젠 모든 사람들이 봐주는 글을 써야지. 돌아다니면 좀 써질               라나?  
  나 재 수 : 결국 우린 못 죽었군요.
  한 이 상 : 연습한 셈 치지, 뭐.
  나 재 수 : 나중에 할 자살을 위해서?
  한 이 상 : 아니, 안 할 걸 위해서.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암전.

  

200  x  76

안 대 근.
29세.
서울시 송파구 가락 2동
신한 에스 빌 101동 502호.
faust715@hanmail.net
02 - 404 - 7887
017 - 720 - 0005
1975. 09. 10.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