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 신인상
- 수상자
- 투고작
조은영-희곡1(2003)
페이지 정보

본문
이 사
등장인물
남편 - 70대 초반
아내 - 60대 중반
때 - 저녁 무렵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
곳 - 노부부의 방
무대 - 방안에는 노부부가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해묵은 가구들―장롱, 문갑, 경대,―색 바 랜 청사 초롱, 구형 텔레비전, 전화기가 놓여있고, 한켠에 천 조각을 꿰매 이은 크고 작 은 보따리들이 쌓여있다. 오른쪽에 문, 왼쪽에 창문 하나, 창문 가까이 흔들의자가 있 다. 벽엔 오래 되어 퇴색하고 크기도 제각각인 가족 사진들로 빽빽한 액자를 중심으로 자손들 학교 졸업, 결혼, 돌, 백일, 회갑을 기념하는 사진들로 가득하다. 낡은 세간살이 가 방안 가득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노부부가 마주앉아 저녁 식사중이다. 아내의 반백 머리에 화려한 핀이 양쪽으로 꽂혀있다. 남편이 밥 위에 고기를 얹어 ‘아’ 하면 아내는 입을 크게 벌려 냉큼 받아먹기를 반복한다. 그 모습이 정겹다.
남편 - 많이 먹어.
아내 - 고기만 줘.
남편 - 고기만?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부인 입에 넣어주며) 맛있어? (부인, 우걱 우걱 먹는 모습 보며 흐뭇하다. 사이.) 고기라면 입에 넣지도 않던 사람이…….
아내 - (트림 끄윽) 배불러. 약 줘.
남편 - 또, 또. 밥숟가락 빼자마자 약 타령이야. 식후 30분!
아내 - (고개를 덜렁덜렁 끄덕이며) 알았어. (사이.) 왜 안 먹어?
남편 -입맛이 없어. (방안을 휘둘러보며) 이제 이 집에 머무는 것도 마지막이니 아름답고 경건하게 작별을 해야겠지.
(아내, 세간살이를 정리하며 짐을 꾸리다가 절로 흥이 나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를 흥얼거린다. 남편, 부인하는 양을 자그시 바라본다.)
남편 - 뭔 줄이나 알고 남의 애창곡을 가로채는 거야? 그게 우리 아버지가 만주에서 독 립운동 할 때 불렀던 독립군 아리랑이야. 모기 죽어 가는 소리 내지 말고 사명감 을 짊어지고 씩씩하고 힘차게! (사이.금세 풀이 죽어) 이사 가는 게 좋아?
아내 - (하던 일 계속하며) 좋지. (사이.) 맘이 가뿐해.
남편 - 이 집에 이사 온 첫날 당신이랑 약속했었는데…더 이상 이사 안 다니기로……. 이번엔 진짜 약속해. 마지막 이사야. 새집으로 이사만 가면 거기가 우리 보금자 리가 될 거라구. (사이.) 그 집은 참 아늑해. 이사 갈 집 말야… 내 맘에는 꼭 드 는데…….
아내 - (보따리를 동여매려는데 밥상이 걸리적거리자 엉덩이로 밀어낸다.)
남편 - (굳은 결심이라도 하듯) 그래, 조금이라도 기운이 남았을 때 이살 가야지. (상을 들 고 일어서며) 자, 치우자. (방문 앞에서) 여보, 문!
아내 - (방문 앞으로 달려가 서성인다.) ….
남편 - 열어야지.
아내 - 열어? 뭘?
남편 - 문. 아휴…팔 떨어지겠다. (아내, 그제야 문을 열면, 나간다.)
아내 - 참, 그 밥상도 싸야 하는데…….
남편 - (소리) 이 고물을? 상다리도 휘었어. 여기저기 칠도 벗겨졌구.
아내 - 그래도 그거 없으면 이사 가서 당장 어디다 밥 먹어? 다 씻어서 갖고 들어와.
남편 - (소리. 싱크대 물소리와 함께) 예, 마님. 길게 말해 뭐하겠어요.
(싱크대 물소리, 그릇 부딪는 소리. 아내, 짐 꾸리는 일에 여념이 없다. 빗소리.)
남편 - (소리) 비 와. (사이.) 비 온다구. (사이. 조금 큰 소리로) 여보. 지금 뭐 해?
아내 - (하던 일 계속하며) 이삿짐 싸지.
남편 - (소리) 우리 이사 가는 거 좀 미룰까?
아내 - 왜?
남편 - (소리) 밖에 비도 오고 …… 이 집에서 당신이랑 쬐금 더 오순도순 살까 하구.
아내 - 얼마나?
남편 - (소리) 누룽지만큼. 하루… 이틀… 며칠…… 까짓 것! 한 달쯤 더!
아내 - 집 쥔네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비워 달래잖아. (속삭이듯) 좀 아까도 그 여 편네 신혼 부부 이사 올 건데 이사 안 간다고 지랄 떨고 간 거 보면서두 그래.
남편 - (소리)집 주인은 미국 가 사는데?
아내 - (하던 일 멈추고) 그럼, 방금 전에 왔다 간 그 여자는 누구야?
남편 - (소리) 주인 여자 미국 딸네 집 갔잖아. 비행기타고.
아내 - (버럭 화를 내며) 이 양반이 무슨 낮도깨비 같은 거짓말을 해!
남편 - (소리) 아휴. 미안. 화내지마. (사이. 상위에 행주와 씻은 식기 포개들고 들어오며) 여기 대령했나이다. (물기 있는 그릇, 행주질한다. 사이. 부인의 눈치를 살피고) 생각 안나? 미국에 사는 딸네 애 봐주러 간지가 반년이 다 돼 가는데…
아내 - (노발대발 고함을 지르며) 왜 자꾸 거짓말을 하는 거야? 왜? 미쳐! 내가 미쳐!
남편 - 미안, 미안. (행주질 계속하며) 미안해. 내가 잘못 알았나 봐.
아내 - 남자가 무슨 행주질이야! (행주를 빼앗아 행주질하며 금세 순해져서) 물기 하나 없이 꼬들꼬들 닦아야지.
남편 - 당신 아파서 부엌 살림 놓은 지가 육년 일세. 부엌살림 박사한테 무슨 섭섭한 소 리…
아내 - (짜증 부리듯) 행주가 왜 이렇게 더러워?
남편 - 헤헤. 삶아도 삶아도 색이 그래. 너무 오래 썼나 봐. (사이.) 흐응. 세월이 흘러도 탈색되거나 퇴색하지 않은 게 하나 있긴 있지. (운을 띄워) 남편은?
아내 - (행주질 계속하며) 하늘.
남편 - 아내는?
아내 - (행주질 계속하며) 땅.
남편 - 이럴 땐 딱 예전 선녀같은 내 각신데……. 당신 많이 변한 거 알어? 고기라면 입 에 대지도 않던 사람이 고기 없이는 한끼도 안 먹지. 화도 잘 내지 고집 부리지 변덕 많은 장마철 날씨마냥 갰다 흐렸다 좋았다 나빴다. 내 말이라면 해도 달이던 사람은 어디 가버린 거야?
(아내, 벽에 붙은 사진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사이. 벽에서 사진액자를 하나씩 떼어 방바닥에 펼치는 일로 분주하다. 사진액자 하나씩 벽에서 떨어져갈 때마다 벽에 사진액 자 자국 무늬처럼 남는다.)
남편 - 당신 뒤따라 나도 어디 갔는지 많이 변했어. 첫째, 좋아하는 술 입도 안대지. 둘 째, 수다쟁이 여편네들처럼 말 많아졌지. 당신하고 살려면 할 수 없어. 셋째, 운동 이라면 걷기도 안 하던 내가 꼭두새벽부터 역기 들고 운동 했다구. 왜? 내가 건강 해야 당신 돌보니까. 당신 그건 인정해 줘야 돼. 요즘엔 아파서 통 못했지만…….
(고요히 빗소리. 아내, 바닥에 펼쳐진 액자들 굽어보며 넋을 잃는 사이, 남편, 벽에 남 은 액자 무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남편 - (벽에 남은 액자 자국을 어루만지며) 너희들이 살던 집이로구나. 여기가 너희들 마지 막 보금자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아내 - (한숨 내뱉고) 애들 보고 싶다.
남편 - (아내에게로 다가와서) 알겠어? (아내, 머리를 끄덕이면, 남편, 사진 하나를 들며) 이 건 언제야?
아내 - 내 회갑연 때였잖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큰아들 진수, 둘째 윤수, 우리 딸 선영 이. 넷째 선수, 우리 막내 미영이.
남편 - 그래, 그래. 내친 김에 손자들 이름 한번 대 봐.
아내 - (남편을 곱게 흘기고) 얜 우리 장손 용현이, 은희, 민국이… 민희…… 석희. (더듬더 듬) 현…… 현희… 얜 용…… (남편 얼굴 쳐다보면)
남편 - 용석이.
아내 - 용석이, 용…호. 아, 참. 내년 봄에 미영이 애기 낳으면 손자 하나 더 생기네요.
남편 - (대견스레) 우리 마누라, 오늘 최고로 잘했어. 박수.
(둘이서 마주 웃으며 좋아라 손뼉을 친다. 사이.)
남편 -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 봐. 당신 함박 웃고 있잖아. 당신 회갑연 때 행복했지?
아내 - 그럼.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행복했지.
남편 - 더 좀 오래오래 행복하게 아프지 말지 그랬어.
아내 - (미동도 않는 채 살풋 웃는다.)….
남편 - 아들, 딸, 손자, 며느리와 행복했던 그 때 정신을 놓긴 왜 놓아버려. 꼭 붙들고 놓 아주지 말았어야지.
아내 - (액자를 하나씩 상자에 넣는다.)…….
남편 - 그 날 저녁 먹을 때까지 괜찮더니……수줍은 신부처럼 말도 없이 하도 얌전히 앉 아만 있길래 손님 치르느라 피곤해 그런 줄만 알았지. 큰 며늘애가 “아버님. 어머 님이 이상해요.” 큰 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길래 “너희들도 금방이다. 천년 만년 검은머리로 산다든!” 호통부터 쳐놓고선 당신을 보러가지 않았겠어? 컴컴한 방에서 청사 초롱 밝혀두고 다 늙은 할망구가 신방 차린 각시 흉낼 내면서 눈알 또롱또롱 굴리며 신랑 각시 하자고 얼굴 들이미는데 가슴이 쿵 내려앉더라구.
아내 - (액자가 담긴 상자를 보자기에 싸고 꽁꽁 동여매느라 쌕쌕거린다.)
남편 - 삼백예순날 중에 백날은 꾸리는 이삿짐. 작은 보따리 큰 보따리 바리바리 저 보 따리도 모자라 챙길 보따리 또 있어? 오늘이 무슨 날인 줄이나 알아? 당신이 나 한테 시집 온 날이라구. 이 할망구야. 다 잊어 버렸지? 허긴 신랑도 잊어버린 사 람이 시집온 날은 기억하고 있겠어? 공기 빠진 풍선처럼 몸 떠난 생각들은 다시 는 돌아올 줄 모르면서 이삿짐 꾸리는 거 보면 신기하다니까.
아내 - (꽁꽁 동여맨 보따리를 보따리더미에 쌓아 두고 자리에 돌아와 앉다 말고 퍼뜩 달려가 방문을 열려고 끙끙 애를 쓴다.)
남편 - 왜? 화장실은 아까 갔잖아. (방문을 열어주며) 이렇게 밀면 돼. 이젠 문 여는 것도 잊어 버렸어? 날마다 한가지씩 보태면 어쩌잔 말이야? (아내, 냉큼 나가면, 남편, 한숨 내쉬고) 그래도 고맙지. 죽을 병 안 걸리고 내 옆에 살아 있어 준 게…….
(아내, 그릇, 양푼, 솥, 요강, 양은 냄비, 주전자 등이 들어 있는 커다란 통을 낑낑거리 며 들고 등장. 남편도 거든다.)
남편 - 아이쿠. 이 잡동사니는 다 뭐야? 어휴, 구질구질해. (아내가 솥 안에 요강 넣는 걸보 며) 그건 또 뭐야? 드럽게…….
아내 - 솥 안에 요강을 넣어가야 복 받고 만수무강 하는 거예요. 이사 그렇게 다니구두 여태 그것두 몰랐어요?
남편 - 그래서 우리가 만수무강 하는 거라구? 흥. 옆집 똥개가 웃겠군.
아내 - (그릇들을 보며) 이사를 수도 없이 다녔어.
남편 - 이사 다니랴 그만큼 고생했으면 젤로 먼저 잊어버릴 일이지, 정신만 놓았다 하면 그놈의 이사, 이사, 이삿짐 꾸리다 죽을 팔자를 안고 태어났나?
아내 - (그릇들을 만지작거리며) 그럴 때마다 요녀석들도 우릴 꼭 붙들고 따라 다녔구… (표정 밝아지며 누가 옆에 있기라도 하듯이) 하, 이것 봐요. 이건 우리 큰애 밥그릇 이었다우. 이 큰 건 윤수거, 우리 윤수는 먹성이 좋았다우. 그땐 다 같이 못살던 시절 찬이랄 게 뭐 있어 김치 하나면 밥 한 그릇이 뚝딱이었지.
남편 - 그 걸 여태도 끌고 다녔어? 이 봐. 금이 쫙쫙 가고 이가 나갔다구. 옆집 똥개 밥 그릇이나 할까 그 걸 뭐에 써? 당신 머릿속 창고에 이 허름한 것들 빼곡이 쌓아 놓았지? 보따리 보따리……꽃 같은 이름 석자, 지 화자도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 이…….
아내 - (그릇들을 조심조심 다뤄 늘어놓는다.) ….
남편 - 육이오 전쟁 터져 피난 가던 살림도 이보단 나았다. 이건 모양도, 크기도, 색깔도 죄다 각각. 엿이나 바꿔 먹자.
아내 - 애 안 낳아 보셨수? 한배로 낳은 내 자식도 아롱이 다롱입디다. 죄다 각각. 그래 도 나, 엿 안 바꿔 먹었수. (남편, 기가 막히다. 아내, 주전자를 쳐들며) 쯔쯔쯔쯧.
남편 - 형편없이 찌그러졌군. 엿도 안 바꿔 주겠다. 그건 왜 그래?
아내 - (벌떡 일어나) 술 마시고 생트집 잡아 행패 부렸지. (발을 구르며) 이놈! 남편 - (두 팔로 머리를 막으며) 생각 안나. (고개를 빼꼼 내밀고) 뭣 때문에?
아내 - (달겨들어 남편을 할퀴고 뜯고 두들기다 결국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그 속을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웬수야!
남편 - (이리저리 피하다 결국 다 맞아주고 숨을 헐떡이며) 어……이제야 본성이 나오는고만. 아프다는 핑계로 그 때 못했던 거 지금 다 하는 거지, 이 여편네야? 감쪽같이 속 아 살았다니까. 천사의 탈을 쓴 야수 같으니라고. (머리를 내두르며) 이럴 때 보면 꼭 말짱한 정신갖고 복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웃음이 터진다. 서서히 웃음을 그치고 주전자를 돌려보며) 이 녀석은 우리도 잊어버린 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군.
아내 - 할아버지. 우리 신랑 어딨어요?
남편 - 댁에 신랑 여깄어요. 당신 이럴 때마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알아? 당신, 어디 딴 살림 차려놓고 잠시 나 보러 들른 것 같단 말야. 몹시 서운하다구.
아내 - 우리 신랑 아침도 안 먹고 나갔는데…….
(빗소리. 아내, 창문을 열고 멍한 시선으로 밖을 내다본다.)
남편 - 밖에 비 오니까 나갈 생각 마. (창문을 닫으며) 서둘러. 집주인이 이사 재촉하러 와 또 지랄 떨면 어떻게 해?
아내 - 엉? 집주인 미국 갔잖아요. 비행기타고.
남편 - 응? … 응. 그렇지. 내가 오락가락해.
(남편, 손톱을 깎는다. 딱. 딱. 손톱 잘리는 소리. 아내, 장롱 서랍을 열어 옷가지를 개 며 넋을 잃는 사이 과거도 현재도 아닌 어떤 시간을 사는 듯하다. 마치 장롱이나 서랍 속에 누가 있기라도 하듯 세간살이며 옷가지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아내 -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집주인은 이사를 재촉하고 손수레에 보따리 가득 싣고 남편은 끌고 나는 밀고 산동네 꼬부랑길을 허위허위 숨이 차게 올랐어. 월세방, 전세방, 산동네, 지하 단칸방, 육개월에 한번씩 세간살이 들쑤셔가며 자식새끼들 줄줄이 허리춤에 꿰차고 이살 다녔지. (다른 서랍을 연다.)
남편 - 성천 집은 고속도로에 깔리고, 구로동 집은 공장 세운다고 굴뚝의 연기처럼 사라 지고, 신트리 지하 방은 높은 빌딩에 주저앉고, 앙월리 집은 인공 댐 막아 물에 잠기고, 미아리 산 동네 꼭대기 집은 아파트에 헐리고……우리가 살다온 그 수많 은 집에 지금은 누가 살까?
아내 - (다른 서랍을 열며) 애들 우는 소리 시끄럽다 이사간지 한 달도 채 못돼 다시 이삿 짐을 꾸려야 했던 때도 있었지. 윤수가 빽빽 울기도 참 울었어. 윤수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온 동네가 떠나갔으니까. (다른 서랍을 연다.)
남편 -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헌옷가지 따라 술술 풀려 나오 는가?
아내 - 집 없는 게 참 서러웠어.
남편 -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성수동에 판자집을 마련했을 때 당신 얼마나 좋아 했다구.
아내 - (부르르 몸을 떨며) 성수동 판자집! 장마가 막 시작되려는 여름이었지. 사흘도 채 못 가 홍수가 나서 물이 집안까지 들어와 물을 퍼냈어. 벌벌 떨면서 엉엉 울었 지. 등에 업힌 윤수도 울고…….
남편 - 집 값이 싸더라니! 아얏. (손톱을 들여다보며) 너무 많이 깎았어.
아내 - (옷 보따리를 동여매며) 진수, 윤수 한방을 써서 방 둘이면 괞찮았는데 셋째딸 선 영이가 자라기 시작하자 방이 셋은 있어야 했지. 자식 넷, 다섯이 되면서 방 많 은 집으로 이살 가야 했고 집은 점점 커졌어. (옷보따리를 보따리더미에 쌓으며) 제법 큰 집이었지. 전세도 주고 월세도 주고 다섯 채를 세 들여 살았으니까. 그 동네에선 알부자 소리 들었지.
남편 - 암. 그때 그 집만 갖고 있었다면 지금도 부자 소리 듣지. 윤수놈 그 놈이 항상 사 단이야. 우리가 그놈 때문에 팔았던 집이 몇 채야?
아내 - 자식이 감옥소 가게 생겼다는데 집 아니라 내 몸뚱일 팔아서라도 못 가게 막아 야지. 그건 천번만번 잘한 일이야.
(남편, 손톱을 다 깎았는지 양손을 쫙 펴보며 흐뭇하게 미소짓고 발톱을 깎기 시작한다.
아내, 옷 보따리를 보따리더미에 쌓아 두고 돌아서다 말고 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내 - 여기 뭔가 있었는데 ……. (사방을 둘러본다.)
남편 - (딱딱 발톱 튀길 때마다 바닥에서 줍는 동작 이따금) 첫아들 장가 보낼때 집 한 채 팔고 둘째 때 줄이기 시작하던 것이 기둥뿌리 뽑아 딸년 시집 보내랴 넷째 장가 보내랴 막내 시집보내랴 그 때마다 번번이 무슨 행사처럼 정신 없이 이살 다녔어. 막내 시집 보내고 둘이서 오붓하게 숨 좀 돌리려니까…
아내 - (장롱 문을 열어보고 서랍 문을 열었다 닫았다 분주하다.) 우리 애들이 없어졌어.
남편 - (뒤돌아보고 계속 발톱을 깎으며) 당신 치매 앓아서 탁노소라는 데도 맡겨보고 입원 도 시켜보고 하느라 살던 집까지 팔아치우고 사유재산이라곤 달랑 방 한 칸에 부 엌 딸린 이 알량한 남의 집 더부살이. 자식 하나 더 있었으면 아주 길바닥에 나 앉을 뻔했지 뭐야.
아내 - (몸을 굽혀 발톱 깎는 남편 얼굴을 들여다보며) 우리 애들 어디다 감췄어?
남편 - (발톱을 계속 깎으며) 애들 사진? 당신이 잘 챙겨뒀잖아. (아내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 를 끄덕이고) 안심해. 애들은 당신 보따리 속에 잘 있으니까…….
(아내, 그제야 얼굴 펴지며 흔들의자에 앉아 천천히 몸을 흔든다. 남편, 계속 발톱 깎는다.)
아내 - (옆에 누가 있는 것처럼) 이건 우리 큰애가 사준 거라우.
남편 - 작년에 진수네 이민 가면서 버린 걸 당신이 떼써서 집으로 가져 온 거야. 당신 그 때 진수 따라 간다고 울고불고 했잖아. 창피하게…
아내 - (남편을 흘기고는 계속) 우리 장손 용현이가 공부가 일등이라우.
남편 - 일등은 아니구 잘 하는 축에 들지.
아내 - 아저씨! 시끄러. (계속) 우리 장손주 공부 때문에 저어기 먼 나라 누스… 라…
남편 - 유질랜드.
아내 - 응. 유지랜드로 이사 갔다우.
남편 - 이민 갔다니까. 우리나라 교육이 영 틀려서……. 복덕방 영감 하는 얘기가 여기서 큰 회사 사장 밑에 있던 놈들도 거기 가면 접시 닦고 청소한대. 그것도 부부가 팔 걷어 부쳐야 먹고 산다는데 우리 큰놈은 회사에서 잘려 나갔으니 밥이나 안 굶는 지 몰라. 하긴 중국이니 삘리핑이니 하는 데서 온 사람들 고생하는 거 보믄 뻔한 이치지. 사람 사는 게 다를 것 같어두 다 같은 거라구. 진수 따라 갔으면 당신 후 회했을 거야. 우리가 짐이 됐을 테니까…….
아내 -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서 오세요. 구경하세요.
남편 - 손님 오셨어?
아내 - (속삭이듯) 귀부인, 귀부인. (장롱 쪽으로 가) 장롱 보시게요?
남편 - (양복을 꺼내 펼쳐들며) 어제 빳빳하게 다려 놓았지. (바지 주름을 잡으며) 시퍼런 칼 날 선거 보이지? 이래뵈도 왕년엔 멋쟁이였다구 (하다말고 어디가 아픈지 상을 찌푸리며 가슴을 끌안고 엎드려 옴쭉달싹 않는다.)
아내 - 나 시집올 때 어머니가 해 주신 거니까 (양손을 펴 곱아보고는) 오년 밖에 안됐어 요. (문을 열자 삐그덕 소리.) 우리 애들이 매달려 타고 노느라 문짝이 좀 안 맞아 요. 거기 생채기요? 그건 우리 집 양반이 술을 좀 하시거든요. 여기 이것두…… 남자 여자 만나 자식 낳고 살다보면 이 정도 생채기야 양반이지요. 다리 하나가 다르다구요? 눈이 참 밝으시네요. 이사 몇 번 다니다보면 장롱 다리 하나 잃어버 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호호호호. 한번은 글쎄 이삿짐을 다 풀어놓고 보 니 우리 막내딸이 없지 뭐예요. 어디서 찾았냐구요? 전에 살던 집에서요.
(남편, 고개를 들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한숨 길게 내뱉고 아내 보면, 아내, 들리지 않는 전화벨소리를 듣고 달려가 수화기를 든다. 남편, 옷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는다.)
아내 -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대고 귀기울이며)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해야지. (수화기를 탕 내려놓고) 우리 진수였나? (자신의 귀를 때리며) 이놈의 귓구 멍이 칵 막혀서…
남편 - (옷 입으며) 이사 안 갈 거야?
아내 - 엉? 가야지.
(아내, 이삿짐을 꾸리고, 남편, 옷을 갈아입으면, 거울 앞에 선다.)
남편 - (거울을 들여다보며) 이 쭈그렁바가지……고향 땅에서 뿌리 뽑혀 열아홉에 월남해 서 낯선 땅에 임시로 심어졌다가 다시 짐을 싸서 떠나는 실향민 신세…… (거울 깊숙이 들여다보며)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이런 모습일까? 유질랜드로 이민간 우리 큰 아들놈이 돌아오면 이런 모습일까?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거울 앞에 선건 분명 난데 이게 누구의 초상화야? 이 거울 도 우리하고 같이 늙어온 셈이지? 우리랑 너무 오래 살아서 요게 요술을 부리는 모양이야. 멋쟁이 신사를 못 알아보구. 다 두고 갈까? 당신 힘들게 보따리 챙길 필요도 없잖아. 여보, 우리 새집으로 이사 가면서 새로 살림 쫙 장만할까? 신혼처 럼…….
아내 - 어떻게?
남편 - 장롱은 진수, 요새 애들 말로 화장대는 윤수, 세탁기는 선숙이, 냉장고는 선수, 미 영이더러 우리 먹을 밥 그릇, 수저 사달라지.
아내 -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기울이며 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고) 쉿! 발자국 소리. 우리 애 들이 오나 봐. (황급히 나간다.)
남편 - (따라 나가며) 또 어딜 가려고? (소리.) 밖에 비가 와서 안 돼. (아내 끌고 들어오 며) 애들 기다려? 저번 날 윤수 왔었잖아. 어젠 선수한테 전화 왔구.
아내 - 언제?
남편 - 어제. 기억 안나? 사돈 양반이 손주들 보느라고 몸살이 났대.
아내 - 애들 에미는 뭐하구?
남편 - 우리 며느리 학교 다니잖아.
아내 - 아직도 학교 공부해?
남편 -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는 선생님이잖아! 맨 날 까먹어!
아내 - (고개를 숙인다. 자신이 수치스럽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울음.)
남편 - (사이.) 당신 혼자 여기서 살래?
아내 - (터진 울음 사이로) 싫어!
남편 - 그럼, 요양원에 갈래?
아내 - (울음 뚝 그치고 불안해서)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두 손 싹싹 비비며 무릎 꿇고 빈 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남편 - (아내 보듬고) 당신 안 맡겨. 내가 깜빡했어. 당신 요양원에서 나오던 날 우리 약 속했지? 무슨 일이 있어도 옆자리 비우지 않기로……
아내 - (사이.) 답답해. 가슴이 답답해요. (창문을 열면, 빗소리. 처음 알기라도 하듯) 비가 오네?
(빗소리.)
남편 - 길이 미끄러울 텐데……. 더 있으라 이슬비가 저리오네.
아내 - 가라고 가랑비가 내려오네.
남편 - 윤수 왔다 갔어.
아내 - 얼굴만 봤어.
남편 - 당신이 윤수를 못 알아보니까 윤수가 펑펑 울더라구.
아내 - 몰래 숨어서…….
남편 - 돈 해 달래.
아내 - 여우가 둔갑을 했어.
남편 - 돈이 어딨어? 미친놈! 지 말은 사업 할 거라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아내 - 과부년 주제에 어딜 넘 봐!
남편 - 옛날 같았으면 당신 이렇게 말했겠지. “난 윤수가 고마워요.” 미치고 팔짝 뛸 노 릇이지. 아직 철도 안든 아들놈이 마흔 고갤 훌쩍 넘었는데 고맙다… 흥! 옆집 똥 개가 웃겠군. 그럼 당신, “자식 근심 걱정거리 하나쯤 있어야 부모 노릇 할 재미 가 나지요.” 아마 그랬을 거야. 우리가 등이 휘도록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자식새 끼들 줄줄이 허리춤에 꿰차고 이살 다녔던 그 때가 좋았어. 그 때는 우리가 부모 였던 것 같아. 뭔가를 해줄 수 있었으니까. 등이 휘도록 그 애들을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있었으니까…….
아내 - (흑흑 눈물 찍어내며) 우리 집 양반 바깥잠 자고 왔어요.
남편 - 또, 그 얘기야? 장마 걷힌 하늘처럼 당신 머릿속 맑을 때 용서를 구했어야 했는 데……한 삼십년 전에 잠깐 한눈 팔았던 거……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어. 난 당신이 모르는 줄 알고 무덤 속까지 갖고 갈 비밀인양 꼭꼭 숨겨두 고 살았지. 혼자서 그렇게 속상했어? 눈물까지 찔끔거리게? 맹세코 아무것도 아 니야. 당신하고 팔짱끼고 길가다 짧은 치마 입은 이쁜 여자 다리 한 번 쳐다본 죄. 그거라구. 나한텐 당신 뿐이야. 지금이라도 용서 빌게. 너무 늦은 건가?
(아내, 창 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홀연히 나간다.)
남편 - 어디 가? 어딜 가냐니까? 안 돼. (쫓다 말고 가슴을 움켜쥐고 신음하며 쓰러진다.)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워. 돌아와. (기어서 가며) 이젠 당신 쫓아다닐 힘이 없어. 파출소로 부랑자 숙소로 사방 당신 찾으러 다닐 힘두 없이 고물이 다 됐어. 당신 똥오줌 받으러 쫓아다닐 힘두 이제 다 빠져 나갔다구. 몇날 며칠씩 바작바작 태 울 간도 남지 않고 폐기처분만 기다리는 고물이 다 됐단 말야…… (어렵게 약병 을 손에 쥔다.)
아내 - (비에 젖어 벌벌 떨면서 등장.) 아저씨. 비 좀 못 오게 막아 줘요. 예? 우리 남편도 없는데 어쩐대요. 애들하고 저 밖에 없는데… 부엌에 물이 찼어요. (허둥댄다.)
남편 - (약을 꺼내 입에 물고) 여보…… 물!
아내 - 방안에 물이 들어오면 큰일나요. 우리는 어디서 살라고 비가 이렇게 온대요?
남편 - (부엌 쪽을 가리키며) 물… 물… 물 좀 줘!
아내 - (허겁지겁 방문을 닫고 보따리를 옮겨 막고 장롱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린다.)
남편 - (신음하며 약을 씹어서 삼킨다.)
아내 - 아저씨. 우리 좀 살려 주세요.
남편 - (신음하며) 난 더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벼텼다구.
아내 - (업힌 애 달래는 시늉하며) 윤수야. 울지마. 울지마. 그만 울어. 뚝. (바가지로 물 퍼 내는 시늉한다.)
남편 - 간암 말기래. 너무 고물이라 버려야 한대. 환자 의지가 어쩌구저쩌구 씨부리길래 탁 까놓으랬더니 한달 살지 석달 살지 모르겠대. 한달은 버텼으니 낼모레지.
아내 - (바가지로 물 퍼내는 시늉 계속) 엄마 여깄어. 울지 마라. 울지 마……
남편 - (몸을 일으켜 약병을 매만지며) 이건 진통제라는 거야. 잠깐 아픔을 못 느끼게 속임 수를 쓰는 거지. 이걸 삼키고 나면 살만해. 언제 아팠나 싶게…… 당신이랑 백년 해로는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속임수는 영원 할 수 없거든. 거짓말이 결국 들통나고 말 듯이.
아내 - 할아버지. 이 손님이 세간살이가 자기 거라구 자꾸 우겨요. (누가 있기라도 하듯) 썩 꺼져! 이건 내 손때 묻고 내 혼이 담긴 내 자식 같은 것들이야. (장롱 앞을 가 로 막으며) 썩 꺼져!
남편 - 망가지고 문짝도 안 맞아 삐그덕 삐그덕 이젠 쓸모도 없는 고물…… 줘 버려.
아내 - (바짝 장롱에 달라붙어) 아무도 손 못 대! 이건 우리 거야! 진수 윤수 매달려 타고 노느라 문이 망가져서 삐그덕거리는 거야. 그걸 누가 알아? 우리 아니면 그걸 누 가 아느냐구?
남편 - (애처롭다. 울음에 가까운 고함) 그만, 그만, 그만해! 그만 하라구!
(아내, 고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기가 질려서 보따리더미 옆에 짐짝처럼 움츠리고 있다. 남편, 아내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남편 - (흐느끼며) 이 고집쟁이 여편네야. 고집 좀 그만 부려. 우리 게 어딨어? 여기 우리 게 어딨다고 생고집을 부리는 거야.
(아내, 남편과 눈 마주친다. 사이. 아내, 남편에게 폭 안긴다.)
남편 - 이사 안 갈 거야? 당신 허름한 가슴 속 세간살이도 저 보따리에 질끈 동여매야 지.
(빗소리.)
남편 - (창 밖을 보며) 비가 계속 올라는가? 비에 젖었잖아. (아내의 젖은 몸을 닦아주며) 갖은 아양 떨어가며 기껏 목욕시켜 놨더니……손 좀 이리 줘. 손톱에 초생달이 떠올랐네? 발톱은? 어이쿠야! 호랑이 배도 타겠네.
아내 - (부끄러워 손과 발을 감춘다.)….
(남편, 아내의 손톱, 발톱 깎는다)
아내 - 이사 가면 애들 우리 집 구경 오겠지요?
남편 - 애들 보고 싶어?
아내 - (고개를 덜렁 덜렁 끄덕인다.)…….
남편 - 진수는 저어기 머언 나라에 있어. 너무 멀어서 올 수두 없어. 당신도 아까 보니까 알고 있든데? 윤수는 꼴이 말이 아니야. 새로 하던 사업 또 말아먹고 도망다니나 봐. 에미는 집 나가고 애들이 고생이지.
아내 - (손 빼며) 나, 안 깎어.
남편 - (부인의 손 가져오며) 미안. 사알살 깎을게. 응? (사이) 우리 이사하면 나오는 이 집 전세금 윤수 몫으로 해 뒀어. 잘했지? (아내 얼굴 쳐다보면)
아내 - (아파서 입을 벌리고 오만상을 짓고 있다.)…….
남편 - 엄살은… 천번 만번 잘한 일이라고 당신이 한마디 해주면 힘이 절로 나는데…….
아내 - 아이, 아파라.
남편 - (아내의 손을 호호 불어주며) 호호. 우리 큰딸 선숙이는 자식들 중에 제일 착해. 당 신 보고 싶다고 울면서 전화 자주 하는 거 당신도 알지? 시집 간 딸년이 층층시 하에 시어른들 모시고 살면서 친정 한번씩 들르기가 어디 쉬운가?
아내 -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갯짓하며 ‘날 좀 보소’를 흥얼거린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좀보소 정든임 오셨는데 인사를못해 행주치마 입에물 고 입만벙긋
남편 - 선수는 대학 선생 돼서 지방 내려갔잖아. 그 집도 이산가족이야. 학교 때문에 애 들하고 어멈은 여기 남았어. 안사돈이 들어와 살고 있어. 애들이 아직 어려서… 딸만 쪼르르 셋인데 그래도 그것들이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달려들어 봐. 얼마나 이쁘다구. 이젠 유아원 다닌다고 코빼기도 못 봐. 고것들 얼굴 본 게 까마득해.
아내 - 아저씨. 아직 멀었어요?
남편 - 다 돼 갑니다. 이뿌게 깎아 드릴게요. (아내, 다시 노래 흥얼거리면) 우리 막내딸 미 영이는 몸이 무겁잖아. 우리 외손주 배고 있느라고. 입덧이 심하대. 통 먹질 못하 나 봐. 걱정이야. 허허허, 우습지? 그 애가 애를 낳는대? 신통방통해. 어리광만 피 우는 줄 알았더니……. 애가 애를 낳아 어떻게 기를까 몰라?
아내 - (도리질 쳐대며) 나, 그만해.
남편 - 다 됐습니다. 마님.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다 깎은 손톱, 발톱을 모아 주머니 안에 모아 넣고, 옷을 꺼내어 부인 앞에 내민다.)
아내 - 이게 뭐야?
남편 - 당신 맨 날 새 옷 사달라고 졸랐잖아.
아내 - (옷을 펼쳐보며) 와. 예쁘다.
남편 - 당신이 좋아하는 철쭉꽃 색이야. 맘에 들어?
아내 - 응. 맘에 꼭 들어.
남편 - 입어 봐야지.
아내 - (옷을 목에 걸치며)….
남편 -옷을 벗어야지. (부인의 옷을 벗긴다. 익숙한 솜씨다) 팔. (상의를 벗기면) 발.(아내, 속 옷차림. 새옷을 입히며) 우리 마누라 오늘 목욕 깨끗이 하고 손톱 발톱도 깎고 (아 내, 원피스 차림이다.) 잘했어. 가만. 앉아 봐. (남편, 아내의 머리핀을 뽑고 머리를 빗 겨준다. 천천히.) 새 옷 입고 머리도 빗고 새색시 같은데?
아내 - (부끄럽다.)….
남편 - 거울 한번 봐야지?
아내 - 거울 가져와.
남편 - 아니…… 거울 보러 당신이 가야지.
아내 - 응. 알았어. (거울 앞에 총총히 달려가 들여다보며) 와, 예쁘다. (이리저리 돌아보고 거 울을 보며 기쁘다.)
남편 - 그렇게 좋아?
아내 - 그럼. 이제 개나리 피면 봄나들이 갈 거야.
남편 - 철쭉꽃 맵시보다 못하진 않겠어. (넥타이 꺼내와) 옛날처럼 당신이 넥타이 좀 매 줘. (아내, 넥타이를 어떻게 매는지 몰라 쩔쩔맨다. 사이. 남편이 아내의 손을 잡고 넥 타이를 매며) 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다 매면) 나, 어때?
아내 - 아, 근사하다. 새 신랑 같은데?
(남편, 아내 옆에 나란히 서서 거울을 들여다본다. 남편, 아내 손을 잡으면 아내, 아이 처럼 신난다.)
남편 - 자, (눈감으며) 뽀뽀. (아내, 수줍다.) 빨리.
아내 - (수줍게 남편 볼에 입맞춘다.)
남편 - 아직도 두 뺨에 노을처럼 얼굴을 붉혀? 그것 하나 열아홉 꽃 같던 지 화자, 머리 에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고 스물넷 피 끓던 박 봉수한테 시집올 때 그대로군.
아내 - (망연히 거울을 들여다보며) 할머니는 누구세요?
남편 - (방비를 들고) 자, 이삿짐 다 꾸렸으면 이제 청소해야지. 먼지가 푹 쌓였어.
아내 - (남편의 손에 들린 방비를 확 잡아채며) 복 쓸어 버리시려우? 이사 갈 때는 못쓰는 물건도 함부로 버려서는 안되고 방을 쓸어내서도 안돼우. 함께 했던 티끌까지도 고이고이 따라가는 거라우.
남편 - 깜짝이야. 나는 또 한방 맞을 줄 알았지. (방문을 열고 나간다.)
아내 - (남편을 따르며) 어디 가?
남편 - 으응. 약 가지러. 따라 오지 마.
아내 - (어깨춤을 추며 노래 부른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좀 보소.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임 오 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물고 입만벙긋
남편 - (소리) 기분 좋아?
아내 - 응. 기분 최고야.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 났네.
남편 - (소리) 오늘 약 건너 뛸까?
아내 - 뭐라구?
남편 - (소리) 약 건너뛰자구.
아내 -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마냥) 약 줘! 빨리 줘! 빨리빨리!
남편 - (소리)예. 마님. 금방 올리겠읍니다.
아내 - (금세 흥이 나 노래) 꽃같은 날두고 왜한번도 안오나 아이구야 보고파서 환장을 하 네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남편 - (쟁반에 약사발 두개를 받쳐들고 들어오며) 그렇게 간들간들 요사스럽게 간드러지는 게 아니고 사명감을 짊어지고 씩씩하고 힘차게!
(남편, 쟁반을 내려놓고 아내와 함께 노래한다. 신명나게.)
남편,아내 -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싶어지나 / 날 두고 가신임은 가고싶어 가나
청천에 하늘엔 잔별도 많고 / 요내야 가슴엔 희망도 많다.
세월아 봄철아 오고가지 말어라 / 사뜰한 내청춘 다늙어진다
후렴: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났네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노래 마치면, 남편과 아내, 숨을 헐떡이며 서로의 등을 기대어 오붓이 앉는다. 빗소리.)
아내 - (입을 크게 벌려 하품) 아―아. (눈을 비빈다.)
남편 - 피곤하지? (장롱에서 이부자리 꺼내 펼친다. 낡은 혼수 이불이다.)
아내 - (이불 위에 몸을 던져 아이처럼 뒹굴며) 아이. 좋다. (반듯하게 누우며 하품을 늘어지 게) 아―음. 불 꺼.
남편 - (청사 초롱을 밝히고 불을 끈다.) 약 먹고 자야지.
아내 - (몸을 일으키면 남편과 눈 마주친다. 사이. 약사발을 쭉 들이킨다.)
남편 - 잘했어. (약사발을 들이킨다.)
(고요히 빗소리. 남편과 아내 청사 초롱만 우두커니 바라본다.)
남편 - 오늘 밤 암팡진 이 처녀와 재미를 많이 봐야지.
아내 - (청사 초롱 바라보며) 첫날밤 새색시 밤새도록 꼭두각시 인형처럼 앉혀두고 청사초 롱 꿈벅꿈벅 졸고 있을 때…
아내,남편 - (동시에) 우리 신랑 술만 마셨지.
(함께 웃는다. 사이. 빗소리.)
아내 -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잘한 일이예요.
남편 - 뭐가?
아내 - 이사 가기로 결정한 거요.
남편 - (침묵)
아내 - (몸을 눕히며) 이제껏 당신이 한 일 중에 최고로 잘한 일이에요. (베개를 베며) 천 번만번 잘한 일이예요.
남편 - 쳇. 어디로 이사 가는지도 모르면서…….
아내 - 어디면 어때요? 당신과 함께면 됐지. 당신 맘에 꼭 들었다면서요. 그럼 보나마나 내 맘에도 꼭이예요.
남편 - 새집에 새옷에 말년 복이 이만하면 말지. 안 그래? (사이.) 우리 이사 가면 우리 자식들 맘 아플까 봐 그게 하나 걸려. (사이.) 여보. 사람들이 우리 자식들한테 맘 아픈 소리하면 어쩌지?
아내 - 어느 눔이 귀한 내 새끼들 맘 아픈 소릴 해? 가만 안 둬! 그냥 칵―. 사람들이 뭘 안다구…….
(빗소리.)
아내 - 어떤 집이예요?
남편 - 땅이 평평하고 흙이 부드러워. 남향에 앞이 훤히 트여 햇볕도 잘 들고 뒤로 산이 있어 바람을 막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곳.
아내 - 거기에 샘이 하나 있어 물이 좋으면 최고지.
남편 - 터가 좋아. 자손 대대로 번성할 터지. (사이.) 미영이 산달이 언제라구?
아내 - (목소리 작아지며) 내년 봄이요.
남편 - 고걸 못 보고 가는군.
아내 - (기어드는 목소리로) 우리…이사……가는…집…뜰에…나무도…있어요?
남편 - (천천히 몸을 눕히며) 내년 봄이면……새파란 움이……손주 새끼들처럼…… 툭…… 툭…… 불거져 나올걸……
(남편, 아내의 손을 잡는다. 거세진 빗소리. 긴 사이. 남편, 아내의 손을 한번 더 꽉 쥔 다. 긴 사이. 잡은 손 맥없이 놓인다.)
― 막 ―
이름 : 조 은 영
성별 : 여
연령 : 32세
주소 : 경기도 안성시 봉남동 26-1
전화 : (031) 672- 9106
e-mail : ehdmsehdms@hanmail.net
등장인물
남편 - 70대 초반
아내 - 60대 중반
때 - 저녁 무렵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
곳 - 노부부의 방
무대 - 방안에는 노부부가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해묵은 가구들―장롱, 문갑, 경대,―색 바 랜 청사 초롱, 구형 텔레비전, 전화기가 놓여있고, 한켠에 천 조각을 꿰매 이은 크고 작 은 보따리들이 쌓여있다. 오른쪽에 문, 왼쪽에 창문 하나, 창문 가까이 흔들의자가 있 다. 벽엔 오래 되어 퇴색하고 크기도 제각각인 가족 사진들로 빽빽한 액자를 중심으로 자손들 학교 졸업, 결혼, 돌, 백일, 회갑을 기념하는 사진들로 가득하다. 낡은 세간살이 가 방안 가득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노부부가 마주앉아 저녁 식사중이다. 아내의 반백 머리에 화려한 핀이 양쪽으로 꽂혀있다. 남편이 밥 위에 고기를 얹어 ‘아’ 하면 아내는 입을 크게 벌려 냉큼 받아먹기를 반복한다. 그 모습이 정겹다.
남편 - 많이 먹어.
아내 - 고기만 줘.
남편 - 고기만?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부인 입에 넣어주며) 맛있어? (부인, 우걱 우걱 먹는 모습 보며 흐뭇하다. 사이.) 고기라면 입에 넣지도 않던 사람이…….
아내 - (트림 끄윽) 배불러. 약 줘.
남편 - 또, 또. 밥숟가락 빼자마자 약 타령이야. 식후 30분!
아내 - (고개를 덜렁덜렁 끄덕이며) 알았어. (사이.) 왜 안 먹어?
남편 -입맛이 없어. (방안을 휘둘러보며) 이제 이 집에 머무는 것도 마지막이니 아름답고 경건하게 작별을 해야겠지.
(아내, 세간살이를 정리하며 짐을 꾸리다가 절로 흥이 나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를 흥얼거린다. 남편, 부인하는 양을 자그시 바라본다.)
남편 - 뭔 줄이나 알고 남의 애창곡을 가로채는 거야? 그게 우리 아버지가 만주에서 독 립운동 할 때 불렀던 독립군 아리랑이야. 모기 죽어 가는 소리 내지 말고 사명감 을 짊어지고 씩씩하고 힘차게! (사이.금세 풀이 죽어) 이사 가는 게 좋아?
아내 - (하던 일 계속하며) 좋지. (사이.) 맘이 가뿐해.
남편 - 이 집에 이사 온 첫날 당신이랑 약속했었는데…더 이상 이사 안 다니기로……. 이번엔 진짜 약속해. 마지막 이사야. 새집으로 이사만 가면 거기가 우리 보금자 리가 될 거라구. (사이.) 그 집은 참 아늑해. 이사 갈 집 말야… 내 맘에는 꼭 드 는데…….
아내 - (보따리를 동여매려는데 밥상이 걸리적거리자 엉덩이로 밀어낸다.)
남편 - (굳은 결심이라도 하듯) 그래, 조금이라도 기운이 남았을 때 이살 가야지. (상을 들 고 일어서며) 자, 치우자. (방문 앞에서) 여보, 문!
아내 - (방문 앞으로 달려가 서성인다.) ….
남편 - 열어야지.
아내 - 열어? 뭘?
남편 - 문. 아휴…팔 떨어지겠다. (아내, 그제야 문을 열면, 나간다.)
아내 - 참, 그 밥상도 싸야 하는데…….
남편 - (소리) 이 고물을? 상다리도 휘었어. 여기저기 칠도 벗겨졌구.
아내 - 그래도 그거 없으면 이사 가서 당장 어디다 밥 먹어? 다 씻어서 갖고 들어와.
남편 - (소리. 싱크대 물소리와 함께) 예, 마님. 길게 말해 뭐하겠어요.
(싱크대 물소리, 그릇 부딪는 소리. 아내, 짐 꾸리는 일에 여념이 없다. 빗소리.)
남편 - (소리) 비 와. (사이.) 비 온다구. (사이. 조금 큰 소리로) 여보. 지금 뭐 해?
아내 - (하던 일 계속하며) 이삿짐 싸지.
남편 - (소리) 우리 이사 가는 거 좀 미룰까?
아내 - 왜?
남편 - (소리) 밖에 비도 오고 …… 이 집에서 당신이랑 쬐금 더 오순도순 살까 하구.
아내 - 얼마나?
남편 - (소리) 누룽지만큼. 하루… 이틀… 며칠…… 까짓 것! 한 달쯤 더!
아내 - 집 쥔네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비워 달래잖아. (속삭이듯) 좀 아까도 그 여 편네 신혼 부부 이사 올 건데 이사 안 간다고 지랄 떨고 간 거 보면서두 그래.
남편 - (소리)집 주인은 미국 가 사는데?
아내 - (하던 일 멈추고) 그럼, 방금 전에 왔다 간 그 여자는 누구야?
남편 - (소리) 주인 여자 미국 딸네 집 갔잖아. 비행기타고.
아내 - (버럭 화를 내며) 이 양반이 무슨 낮도깨비 같은 거짓말을 해!
남편 - (소리) 아휴. 미안. 화내지마. (사이. 상위에 행주와 씻은 식기 포개들고 들어오며) 여기 대령했나이다. (물기 있는 그릇, 행주질한다. 사이. 부인의 눈치를 살피고) 생각 안나? 미국에 사는 딸네 애 봐주러 간지가 반년이 다 돼 가는데…
아내 - (노발대발 고함을 지르며) 왜 자꾸 거짓말을 하는 거야? 왜? 미쳐! 내가 미쳐!
남편 - 미안, 미안. (행주질 계속하며) 미안해. 내가 잘못 알았나 봐.
아내 - 남자가 무슨 행주질이야! (행주를 빼앗아 행주질하며 금세 순해져서) 물기 하나 없이 꼬들꼬들 닦아야지.
남편 - 당신 아파서 부엌 살림 놓은 지가 육년 일세. 부엌살림 박사한테 무슨 섭섭한 소 리…
아내 - (짜증 부리듯) 행주가 왜 이렇게 더러워?
남편 - 헤헤. 삶아도 삶아도 색이 그래. 너무 오래 썼나 봐. (사이.) 흐응. 세월이 흘러도 탈색되거나 퇴색하지 않은 게 하나 있긴 있지. (운을 띄워) 남편은?
아내 - (행주질 계속하며) 하늘.
남편 - 아내는?
아내 - (행주질 계속하며) 땅.
남편 - 이럴 땐 딱 예전 선녀같은 내 각신데……. 당신 많이 변한 거 알어? 고기라면 입 에 대지도 않던 사람이 고기 없이는 한끼도 안 먹지. 화도 잘 내지 고집 부리지 변덕 많은 장마철 날씨마냥 갰다 흐렸다 좋았다 나빴다. 내 말이라면 해도 달이던 사람은 어디 가버린 거야?
(아내, 벽에 붙은 사진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사이. 벽에서 사진액자를 하나씩 떼어 방바닥에 펼치는 일로 분주하다. 사진액자 하나씩 벽에서 떨어져갈 때마다 벽에 사진액 자 자국 무늬처럼 남는다.)
남편 - 당신 뒤따라 나도 어디 갔는지 많이 변했어. 첫째, 좋아하는 술 입도 안대지. 둘 째, 수다쟁이 여편네들처럼 말 많아졌지. 당신하고 살려면 할 수 없어. 셋째, 운동 이라면 걷기도 안 하던 내가 꼭두새벽부터 역기 들고 운동 했다구. 왜? 내가 건강 해야 당신 돌보니까. 당신 그건 인정해 줘야 돼. 요즘엔 아파서 통 못했지만…….
(고요히 빗소리. 아내, 바닥에 펼쳐진 액자들 굽어보며 넋을 잃는 사이, 남편, 벽에 남 은 액자 무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남편 - (벽에 남은 액자 자국을 어루만지며) 너희들이 살던 집이로구나. 여기가 너희들 마지 막 보금자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아내 - (한숨 내뱉고) 애들 보고 싶다.
남편 - (아내에게로 다가와서) 알겠어? (아내, 머리를 끄덕이면, 남편, 사진 하나를 들며) 이 건 언제야?
아내 - 내 회갑연 때였잖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큰아들 진수, 둘째 윤수, 우리 딸 선영 이. 넷째 선수, 우리 막내 미영이.
남편 - 그래, 그래. 내친 김에 손자들 이름 한번 대 봐.
아내 - (남편을 곱게 흘기고) 얜 우리 장손 용현이, 은희, 민국이… 민희…… 석희. (더듬더 듬) 현…… 현희… 얜 용…… (남편 얼굴 쳐다보면)
남편 - 용석이.
아내 - 용석이, 용…호. 아, 참. 내년 봄에 미영이 애기 낳으면 손자 하나 더 생기네요.
남편 - (대견스레) 우리 마누라, 오늘 최고로 잘했어. 박수.
(둘이서 마주 웃으며 좋아라 손뼉을 친다. 사이.)
남편 -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 봐. 당신 함박 웃고 있잖아. 당신 회갑연 때 행복했지?
아내 - 그럼.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행복했지.
남편 - 더 좀 오래오래 행복하게 아프지 말지 그랬어.
아내 - (미동도 않는 채 살풋 웃는다.)….
남편 - 아들, 딸, 손자, 며느리와 행복했던 그 때 정신을 놓긴 왜 놓아버려. 꼭 붙들고 놓 아주지 말았어야지.
아내 - (액자를 하나씩 상자에 넣는다.)…….
남편 - 그 날 저녁 먹을 때까지 괜찮더니……수줍은 신부처럼 말도 없이 하도 얌전히 앉 아만 있길래 손님 치르느라 피곤해 그런 줄만 알았지. 큰 며늘애가 “아버님. 어머 님이 이상해요.” 큰 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길래 “너희들도 금방이다. 천년 만년 검은머리로 산다든!” 호통부터 쳐놓고선 당신을 보러가지 않았겠어? 컴컴한 방에서 청사 초롱 밝혀두고 다 늙은 할망구가 신방 차린 각시 흉낼 내면서 눈알 또롱또롱 굴리며 신랑 각시 하자고 얼굴 들이미는데 가슴이 쿵 내려앉더라구.
아내 - (액자가 담긴 상자를 보자기에 싸고 꽁꽁 동여매느라 쌕쌕거린다.)
남편 - 삼백예순날 중에 백날은 꾸리는 이삿짐. 작은 보따리 큰 보따리 바리바리 저 보 따리도 모자라 챙길 보따리 또 있어? 오늘이 무슨 날인 줄이나 알아? 당신이 나 한테 시집 온 날이라구. 이 할망구야. 다 잊어 버렸지? 허긴 신랑도 잊어버린 사 람이 시집온 날은 기억하고 있겠어? 공기 빠진 풍선처럼 몸 떠난 생각들은 다시 는 돌아올 줄 모르면서 이삿짐 꾸리는 거 보면 신기하다니까.
아내 - (꽁꽁 동여맨 보따리를 보따리더미에 쌓아 두고 자리에 돌아와 앉다 말고 퍼뜩 달려가 방문을 열려고 끙끙 애를 쓴다.)
남편 - 왜? 화장실은 아까 갔잖아. (방문을 열어주며) 이렇게 밀면 돼. 이젠 문 여는 것도 잊어 버렸어? 날마다 한가지씩 보태면 어쩌잔 말이야? (아내, 냉큼 나가면, 남편, 한숨 내쉬고) 그래도 고맙지. 죽을 병 안 걸리고 내 옆에 살아 있어 준 게…….
(아내, 그릇, 양푼, 솥, 요강, 양은 냄비, 주전자 등이 들어 있는 커다란 통을 낑낑거리 며 들고 등장. 남편도 거든다.)
남편 - 아이쿠. 이 잡동사니는 다 뭐야? 어휴, 구질구질해. (아내가 솥 안에 요강 넣는 걸보 며) 그건 또 뭐야? 드럽게…….
아내 - 솥 안에 요강을 넣어가야 복 받고 만수무강 하는 거예요. 이사 그렇게 다니구두 여태 그것두 몰랐어요?
남편 - 그래서 우리가 만수무강 하는 거라구? 흥. 옆집 똥개가 웃겠군.
아내 - (그릇들을 보며) 이사를 수도 없이 다녔어.
남편 - 이사 다니랴 그만큼 고생했으면 젤로 먼저 잊어버릴 일이지, 정신만 놓았다 하면 그놈의 이사, 이사, 이삿짐 꾸리다 죽을 팔자를 안고 태어났나?
아내 - (그릇들을 만지작거리며) 그럴 때마다 요녀석들도 우릴 꼭 붙들고 따라 다녔구… (표정 밝아지며 누가 옆에 있기라도 하듯이) 하, 이것 봐요. 이건 우리 큰애 밥그릇 이었다우. 이 큰 건 윤수거, 우리 윤수는 먹성이 좋았다우. 그땐 다 같이 못살던 시절 찬이랄 게 뭐 있어 김치 하나면 밥 한 그릇이 뚝딱이었지.
남편 - 그 걸 여태도 끌고 다녔어? 이 봐. 금이 쫙쫙 가고 이가 나갔다구. 옆집 똥개 밥 그릇이나 할까 그 걸 뭐에 써? 당신 머릿속 창고에 이 허름한 것들 빼곡이 쌓아 놓았지? 보따리 보따리……꽃 같은 이름 석자, 지 화자도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 이…….
아내 - (그릇들을 조심조심 다뤄 늘어놓는다.) ….
남편 - 육이오 전쟁 터져 피난 가던 살림도 이보단 나았다. 이건 모양도, 크기도, 색깔도 죄다 각각. 엿이나 바꿔 먹자.
아내 - 애 안 낳아 보셨수? 한배로 낳은 내 자식도 아롱이 다롱입디다. 죄다 각각. 그래 도 나, 엿 안 바꿔 먹었수. (남편, 기가 막히다. 아내, 주전자를 쳐들며) 쯔쯔쯔쯧.
남편 - 형편없이 찌그러졌군. 엿도 안 바꿔 주겠다. 그건 왜 그래?
아내 - (벌떡 일어나) 술 마시고 생트집 잡아 행패 부렸지. (발을 구르며) 이놈! 남편 - (두 팔로 머리를 막으며) 생각 안나. (고개를 빼꼼 내밀고) 뭣 때문에?
아내 - (달겨들어 남편을 할퀴고 뜯고 두들기다 결국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그 속을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웬수야!
남편 - (이리저리 피하다 결국 다 맞아주고 숨을 헐떡이며) 어……이제야 본성이 나오는고만. 아프다는 핑계로 그 때 못했던 거 지금 다 하는 거지, 이 여편네야? 감쪽같이 속 아 살았다니까. 천사의 탈을 쓴 야수 같으니라고. (머리를 내두르며) 이럴 때 보면 꼭 말짱한 정신갖고 복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웃음이 터진다. 서서히 웃음을 그치고 주전자를 돌려보며) 이 녀석은 우리도 잊어버린 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군.
아내 - 할아버지. 우리 신랑 어딨어요?
남편 - 댁에 신랑 여깄어요. 당신 이럴 때마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알아? 당신, 어디 딴 살림 차려놓고 잠시 나 보러 들른 것 같단 말야. 몹시 서운하다구.
아내 - 우리 신랑 아침도 안 먹고 나갔는데…….
(빗소리. 아내, 창문을 열고 멍한 시선으로 밖을 내다본다.)
남편 - 밖에 비 오니까 나갈 생각 마. (창문을 닫으며) 서둘러. 집주인이 이사 재촉하러 와 또 지랄 떨면 어떻게 해?
아내 - 엉? 집주인 미국 갔잖아요. 비행기타고.
남편 - 응? … 응. 그렇지. 내가 오락가락해.
(남편, 손톱을 깎는다. 딱. 딱. 손톱 잘리는 소리. 아내, 장롱 서랍을 열어 옷가지를 개 며 넋을 잃는 사이 과거도 현재도 아닌 어떤 시간을 사는 듯하다. 마치 장롱이나 서랍 속에 누가 있기라도 하듯 세간살이며 옷가지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아내 -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집주인은 이사를 재촉하고 손수레에 보따리 가득 싣고 남편은 끌고 나는 밀고 산동네 꼬부랑길을 허위허위 숨이 차게 올랐어. 월세방, 전세방, 산동네, 지하 단칸방, 육개월에 한번씩 세간살이 들쑤셔가며 자식새끼들 줄줄이 허리춤에 꿰차고 이살 다녔지. (다른 서랍을 연다.)
남편 - 성천 집은 고속도로에 깔리고, 구로동 집은 공장 세운다고 굴뚝의 연기처럼 사라 지고, 신트리 지하 방은 높은 빌딩에 주저앉고, 앙월리 집은 인공 댐 막아 물에 잠기고, 미아리 산 동네 꼭대기 집은 아파트에 헐리고……우리가 살다온 그 수많 은 집에 지금은 누가 살까?
아내 - (다른 서랍을 열며) 애들 우는 소리 시끄럽다 이사간지 한 달도 채 못돼 다시 이삿 짐을 꾸려야 했던 때도 있었지. 윤수가 빽빽 울기도 참 울었어. 윤수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온 동네가 떠나갔으니까. (다른 서랍을 연다.)
남편 -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헌옷가지 따라 술술 풀려 나오 는가?
아내 - 집 없는 게 참 서러웠어.
남편 -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성수동에 판자집을 마련했을 때 당신 얼마나 좋아 했다구.
아내 - (부르르 몸을 떨며) 성수동 판자집! 장마가 막 시작되려는 여름이었지. 사흘도 채 못 가 홍수가 나서 물이 집안까지 들어와 물을 퍼냈어. 벌벌 떨면서 엉엉 울었 지. 등에 업힌 윤수도 울고…….
남편 - 집 값이 싸더라니! 아얏. (손톱을 들여다보며) 너무 많이 깎았어.
아내 - (옷 보따리를 동여매며) 진수, 윤수 한방을 써서 방 둘이면 괞찮았는데 셋째딸 선 영이가 자라기 시작하자 방이 셋은 있어야 했지. 자식 넷, 다섯이 되면서 방 많 은 집으로 이살 가야 했고 집은 점점 커졌어. (옷보따리를 보따리더미에 쌓으며) 제법 큰 집이었지. 전세도 주고 월세도 주고 다섯 채를 세 들여 살았으니까. 그 동네에선 알부자 소리 들었지.
남편 - 암. 그때 그 집만 갖고 있었다면 지금도 부자 소리 듣지. 윤수놈 그 놈이 항상 사 단이야. 우리가 그놈 때문에 팔았던 집이 몇 채야?
아내 - 자식이 감옥소 가게 생겼다는데 집 아니라 내 몸뚱일 팔아서라도 못 가게 막아 야지. 그건 천번만번 잘한 일이야.
(남편, 손톱을 다 깎았는지 양손을 쫙 펴보며 흐뭇하게 미소짓고 발톱을 깎기 시작한다.
아내, 옷 보따리를 보따리더미에 쌓아 두고 돌아서다 말고 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내 - 여기 뭔가 있었는데 ……. (사방을 둘러본다.)
남편 - (딱딱 발톱 튀길 때마다 바닥에서 줍는 동작 이따금) 첫아들 장가 보낼때 집 한 채 팔고 둘째 때 줄이기 시작하던 것이 기둥뿌리 뽑아 딸년 시집 보내랴 넷째 장가 보내랴 막내 시집보내랴 그 때마다 번번이 무슨 행사처럼 정신 없이 이살 다녔어. 막내 시집 보내고 둘이서 오붓하게 숨 좀 돌리려니까…
아내 - (장롱 문을 열어보고 서랍 문을 열었다 닫았다 분주하다.) 우리 애들이 없어졌어.
남편 - (뒤돌아보고 계속 발톱을 깎으며) 당신 치매 앓아서 탁노소라는 데도 맡겨보고 입원 도 시켜보고 하느라 살던 집까지 팔아치우고 사유재산이라곤 달랑 방 한 칸에 부 엌 딸린 이 알량한 남의 집 더부살이. 자식 하나 더 있었으면 아주 길바닥에 나 앉을 뻔했지 뭐야.
아내 - (몸을 굽혀 발톱 깎는 남편 얼굴을 들여다보며) 우리 애들 어디다 감췄어?
남편 - (발톱을 계속 깎으며) 애들 사진? 당신이 잘 챙겨뒀잖아. (아내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 를 끄덕이고) 안심해. 애들은 당신 보따리 속에 잘 있으니까…….
(아내, 그제야 얼굴 펴지며 흔들의자에 앉아 천천히 몸을 흔든다. 남편, 계속 발톱 깎는다.)
아내 - (옆에 누가 있는 것처럼) 이건 우리 큰애가 사준 거라우.
남편 - 작년에 진수네 이민 가면서 버린 걸 당신이 떼써서 집으로 가져 온 거야. 당신 그 때 진수 따라 간다고 울고불고 했잖아. 창피하게…
아내 - (남편을 흘기고는 계속) 우리 장손 용현이가 공부가 일등이라우.
남편 - 일등은 아니구 잘 하는 축에 들지.
아내 - 아저씨! 시끄러. (계속) 우리 장손주 공부 때문에 저어기 먼 나라 누스… 라…
남편 - 유질랜드.
아내 - 응. 유지랜드로 이사 갔다우.
남편 - 이민 갔다니까. 우리나라 교육이 영 틀려서……. 복덕방 영감 하는 얘기가 여기서 큰 회사 사장 밑에 있던 놈들도 거기 가면 접시 닦고 청소한대. 그것도 부부가 팔 걷어 부쳐야 먹고 산다는데 우리 큰놈은 회사에서 잘려 나갔으니 밥이나 안 굶는 지 몰라. 하긴 중국이니 삘리핑이니 하는 데서 온 사람들 고생하는 거 보믄 뻔한 이치지. 사람 사는 게 다를 것 같어두 다 같은 거라구. 진수 따라 갔으면 당신 후 회했을 거야. 우리가 짐이 됐을 테니까…….
아내 -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서 오세요. 구경하세요.
남편 - 손님 오셨어?
아내 - (속삭이듯) 귀부인, 귀부인. (장롱 쪽으로 가) 장롱 보시게요?
남편 - (양복을 꺼내 펼쳐들며) 어제 빳빳하게 다려 놓았지. (바지 주름을 잡으며) 시퍼런 칼 날 선거 보이지? 이래뵈도 왕년엔 멋쟁이였다구 (하다말고 어디가 아픈지 상을 찌푸리며 가슴을 끌안고 엎드려 옴쭉달싹 않는다.)
아내 - 나 시집올 때 어머니가 해 주신 거니까 (양손을 펴 곱아보고는) 오년 밖에 안됐어 요. (문을 열자 삐그덕 소리.) 우리 애들이 매달려 타고 노느라 문짝이 좀 안 맞아 요. 거기 생채기요? 그건 우리 집 양반이 술을 좀 하시거든요. 여기 이것두…… 남자 여자 만나 자식 낳고 살다보면 이 정도 생채기야 양반이지요. 다리 하나가 다르다구요? 눈이 참 밝으시네요. 이사 몇 번 다니다보면 장롱 다리 하나 잃어버 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호호호호. 한번은 글쎄 이삿짐을 다 풀어놓고 보 니 우리 막내딸이 없지 뭐예요. 어디서 찾았냐구요? 전에 살던 집에서요.
(남편, 고개를 들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한숨 길게 내뱉고 아내 보면, 아내, 들리지 않는 전화벨소리를 듣고 달려가 수화기를 든다. 남편, 옷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는다.)
아내 -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대고 귀기울이며)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해야지. (수화기를 탕 내려놓고) 우리 진수였나? (자신의 귀를 때리며) 이놈의 귓구 멍이 칵 막혀서…
남편 - (옷 입으며) 이사 안 갈 거야?
아내 - 엉? 가야지.
(아내, 이삿짐을 꾸리고, 남편, 옷을 갈아입으면, 거울 앞에 선다.)
남편 - (거울을 들여다보며) 이 쭈그렁바가지……고향 땅에서 뿌리 뽑혀 열아홉에 월남해 서 낯선 땅에 임시로 심어졌다가 다시 짐을 싸서 떠나는 실향민 신세…… (거울 깊숙이 들여다보며)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이런 모습일까? 유질랜드로 이민간 우리 큰 아들놈이 돌아오면 이런 모습일까?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거울 앞에 선건 분명 난데 이게 누구의 초상화야? 이 거울 도 우리하고 같이 늙어온 셈이지? 우리랑 너무 오래 살아서 요게 요술을 부리는 모양이야. 멋쟁이 신사를 못 알아보구. 다 두고 갈까? 당신 힘들게 보따리 챙길 필요도 없잖아. 여보, 우리 새집으로 이사 가면서 새로 살림 쫙 장만할까? 신혼처 럼…….
아내 - 어떻게?
남편 - 장롱은 진수, 요새 애들 말로 화장대는 윤수, 세탁기는 선숙이, 냉장고는 선수, 미 영이더러 우리 먹을 밥 그릇, 수저 사달라지.
아내 -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기울이며 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고) 쉿! 발자국 소리. 우리 애 들이 오나 봐. (황급히 나간다.)
남편 - (따라 나가며) 또 어딜 가려고? (소리.) 밖에 비가 와서 안 돼. (아내 끌고 들어오 며) 애들 기다려? 저번 날 윤수 왔었잖아. 어젠 선수한테 전화 왔구.
아내 - 언제?
남편 - 어제. 기억 안나? 사돈 양반이 손주들 보느라고 몸살이 났대.
아내 - 애들 에미는 뭐하구?
남편 - 우리 며느리 학교 다니잖아.
아내 - 아직도 학교 공부해?
남편 -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는 선생님이잖아! 맨 날 까먹어!
아내 - (고개를 숙인다. 자신이 수치스럽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울음.)
남편 - (사이.) 당신 혼자 여기서 살래?
아내 - (터진 울음 사이로) 싫어!
남편 - 그럼, 요양원에 갈래?
아내 - (울음 뚝 그치고 불안해서)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두 손 싹싹 비비며 무릎 꿇고 빈 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남편 - (아내 보듬고) 당신 안 맡겨. 내가 깜빡했어. 당신 요양원에서 나오던 날 우리 약 속했지? 무슨 일이 있어도 옆자리 비우지 않기로……
아내 - (사이.) 답답해. 가슴이 답답해요. (창문을 열면, 빗소리. 처음 알기라도 하듯) 비가 오네?
(빗소리.)
남편 - 길이 미끄러울 텐데……. 더 있으라 이슬비가 저리오네.
아내 - 가라고 가랑비가 내려오네.
남편 - 윤수 왔다 갔어.
아내 - 얼굴만 봤어.
남편 - 당신이 윤수를 못 알아보니까 윤수가 펑펑 울더라구.
아내 - 몰래 숨어서…….
남편 - 돈 해 달래.
아내 - 여우가 둔갑을 했어.
남편 - 돈이 어딨어? 미친놈! 지 말은 사업 할 거라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아내 - 과부년 주제에 어딜 넘 봐!
남편 - 옛날 같았으면 당신 이렇게 말했겠지. “난 윤수가 고마워요.” 미치고 팔짝 뛸 노 릇이지. 아직 철도 안든 아들놈이 마흔 고갤 훌쩍 넘었는데 고맙다… 흥! 옆집 똥 개가 웃겠군. 그럼 당신, “자식 근심 걱정거리 하나쯤 있어야 부모 노릇 할 재미 가 나지요.” 아마 그랬을 거야. 우리가 등이 휘도록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자식새 끼들 줄줄이 허리춤에 꿰차고 이살 다녔던 그 때가 좋았어. 그 때는 우리가 부모 였던 것 같아. 뭔가를 해줄 수 있었으니까. 등이 휘도록 그 애들을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있었으니까…….
아내 - (흑흑 눈물 찍어내며) 우리 집 양반 바깥잠 자고 왔어요.
남편 - 또, 그 얘기야? 장마 걷힌 하늘처럼 당신 머릿속 맑을 때 용서를 구했어야 했는 데……한 삼십년 전에 잠깐 한눈 팔았던 거……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어. 난 당신이 모르는 줄 알고 무덤 속까지 갖고 갈 비밀인양 꼭꼭 숨겨두 고 살았지. 혼자서 그렇게 속상했어? 눈물까지 찔끔거리게? 맹세코 아무것도 아 니야. 당신하고 팔짱끼고 길가다 짧은 치마 입은 이쁜 여자 다리 한 번 쳐다본 죄. 그거라구. 나한텐 당신 뿐이야. 지금이라도 용서 빌게. 너무 늦은 건가?
(아내, 창 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홀연히 나간다.)
남편 - 어디 가? 어딜 가냐니까? 안 돼. (쫓다 말고 가슴을 움켜쥐고 신음하며 쓰러진다.)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워. 돌아와. (기어서 가며) 이젠 당신 쫓아다닐 힘이 없어. 파출소로 부랑자 숙소로 사방 당신 찾으러 다닐 힘두 없이 고물이 다 됐어. 당신 똥오줌 받으러 쫓아다닐 힘두 이제 다 빠져 나갔다구. 몇날 며칠씩 바작바작 태 울 간도 남지 않고 폐기처분만 기다리는 고물이 다 됐단 말야…… (어렵게 약병 을 손에 쥔다.)
아내 - (비에 젖어 벌벌 떨면서 등장.) 아저씨. 비 좀 못 오게 막아 줘요. 예? 우리 남편도 없는데 어쩐대요. 애들하고 저 밖에 없는데… 부엌에 물이 찼어요. (허둥댄다.)
남편 - (약을 꺼내 입에 물고) 여보…… 물!
아내 - 방안에 물이 들어오면 큰일나요. 우리는 어디서 살라고 비가 이렇게 온대요?
남편 - (부엌 쪽을 가리키며) 물… 물… 물 좀 줘!
아내 - (허겁지겁 방문을 닫고 보따리를 옮겨 막고 장롱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린다.)
남편 - (신음하며 약을 씹어서 삼킨다.)
아내 - 아저씨. 우리 좀 살려 주세요.
남편 - (신음하며) 난 더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벼텼다구.
아내 - (업힌 애 달래는 시늉하며) 윤수야. 울지마. 울지마. 그만 울어. 뚝. (바가지로 물 퍼 내는 시늉한다.)
남편 - 간암 말기래. 너무 고물이라 버려야 한대. 환자 의지가 어쩌구저쩌구 씨부리길래 탁 까놓으랬더니 한달 살지 석달 살지 모르겠대. 한달은 버텼으니 낼모레지.
아내 - (바가지로 물 퍼내는 시늉 계속) 엄마 여깄어. 울지 마라. 울지 마……
남편 - (몸을 일으켜 약병을 매만지며) 이건 진통제라는 거야. 잠깐 아픔을 못 느끼게 속임 수를 쓰는 거지. 이걸 삼키고 나면 살만해. 언제 아팠나 싶게…… 당신이랑 백년 해로는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속임수는 영원 할 수 없거든. 거짓말이 결국 들통나고 말 듯이.
아내 - 할아버지. 이 손님이 세간살이가 자기 거라구 자꾸 우겨요. (누가 있기라도 하듯) 썩 꺼져! 이건 내 손때 묻고 내 혼이 담긴 내 자식 같은 것들이야. (장롱 앞을 가 로 막으며) 썩 꺼져!
남편 - 망가지고 문짝도 안 맞아 삐그덕 삐그덕 이젠 쓸모도 없는 고물…… 줘 버려.
아내 - (바짝 장롱에 달라붙어) 아무도 손 못 대! 이건 우리 거야! 진수 윤수 매달려 타고 노느라 문이 망가져서 삐그덕거리는 거야. 그걸 누가 알아? 우리 아니면 그걸 누 가 아느냐구?
남편 - (애처롭다. 울음에 가까운 고함) 그만, 그만, 그만해! 그만 하라구!
(아내, 고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기가 질려서 보따리더미 옆에 짐짝처럼 움츠리고 있다. 남편, 아내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남편 - (흐느끼며) 이 고집쟁이 여편네야. 고집 좀 그만 부려. 우리 게 어딨어? 여기 우리 게 어딨다고 생고집을 부리는 거야.
(아내, 남편과 눈 마주친다. 사이. 아내, 남편에게 폭 안긴다.)
남편 - 이사 안 갈 거야? 당신 허름한 가슴 속 세간살이도 저 보따리에 질끈 동여매야 지.
(빗소리.)
남편 - (창 밖을 보며) 비가 계속 올라는가? 비에 젖었잖아. (아내의 젖은 몸을 닦아주며) 갖은 아양 떨어가며 기껏 목욕시켜 놨더니……손 좀 이리 줘. 손톱에 초생달이 떠올랐네? 발톱은? 어이쿠야! 호랑이 배도 타겠네.
아내 - (부끄러워 손과 발을 감춘다.)….
(남편, 아내의 손톱, 발톱 깎는다)
아내 - 이사 가면 애들 우리 집 구경 오겠지요?
남편 - 애들 보고 싶어?
아내 - (고개를 덜렁 덜렁 끄덕인다.)…….
남편 - 진수는 저어기 머언 나라에 있어. 너무 멀어서 올 수두 없어. 당신도 아까 보니까 알고 있든데? 윤수는 꼴이 말이 아니야. 새로 하던 사업 또 말아먹고 도망다니나 봐. 에미는 집 나가고 애들이 고생이지.
아내 - (손 빼며) 나, 안 깎어.
남편 - (부인의 손 가져오며) 미안. 사알살 깎을게. 응? (사이) 우리 이사하면 나오는 이 집 전세금 윤수 몫으로 해 뒀어. 잘했지? (아내 얼굴 쳐다보면)
아내 - (아파서 입을 벌리고 오만상을 짓고 있다.)…….
남편 - 엄살은… 천번 만번 잘한 일이라고 당신이 한마디 해주면 힘이 절로 나는데…….
아내 - 아이, 아파라.
남편 - (아내의 손을 호호 불어주며) 호호. 우리 큰딸 선숙이는 자식들 중에 제일 착해. 당 신 보고 싶다고 울면서 전화 자주 하는 거 당신도 알지? 시집 간 딸년이 층층시 하에 시어른들 모시고 살면서 친정 한번씩 들르기가 어디 쉬운가?
아내 -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갯짓하며 ‘날 좀 보소’를 흥얼거린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좀보소 정든임 오셨는데 인사를못해 행주치마 입에물 고 입만벙긋
남편 - 선수는 대학 선생 돼서 지방 내려갔잖아. 그 집도 이산가족이야. 학교 때문에 애 들하고 어멈은 여기 남았어. 안사돈이 들어와 살고 있어. 애들이 아직 어려서… 딸만 쪼르르 셋인데 그래도 그것들이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달려들어 봐. 얼마나 이쁘다구. 이젠 유아원 다닌다고 코빼기도 못 봐. 고것들 얼굴 본 게 까마득해.
아내 - 아저씨. 아직 멀었어요?
남편 - 다 돼 갑니다. 이뿌게 깎아 드릴게요. (아내, 다시 노래 흥얼거리면) 우리 막내딸 미 영이는 몸이 무겁잖아. 우리 외손주 배고 있느라고. 입덧이 심하대. 통 먹질 못하 나 봐. 걱정이야. 허허허, 우습지? 그 애가 애를 낳는대? 신통방통해. 어리광만 피 우는 줄 알았더니……. 애가 애를 낳아 어떻게 기를까 몰라?
아내 - (도리질 쳐대며) 나, 그만해.
남편 - 다 됐습니다. 마님.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다 깎은 손톱, 발톱을 모아 주머니 안에 모아 넣고, 옷을 꺼내어 부인 앞에 내민다.)
아내 - 이게 뭐야?
남편 - 당신 맨 날 새 옷 사달라고 졸랐잖아.
아내 - (옷을 펼쳐보며) 와. 예쁘다.
남편 - 당신이 좋아하는 철쭉꽃 색이야. 맘에 들어?
아내 - 응. 맘에 꼭 들어.
남편 - 입어 봐야지.
아내 - (옷을 목에 걸치며)….
남편 -옷을 벗어야지. (부인의 옷을 벗긴다. 익숙한 솜씨다) 팔. (상의를 벗기면) 발.(아내, 속 옷차림. 새옷을 입히며) 우리 마누라 오늘 목욕 깨끗이 하고 손톱 발톱도 깎고 (아 내, 원피스 차림이다.) 잘했어. 가만. 앉아 봐. (남편, 아내의 머리핀을 뽑고 머리를 빗 겨준다. 천천히.) 새 옷 입고 머리도 빗고 새색시 같은데?
아내 - (부끄럽다.)….
남편 - 거울 한번 봐야지?
아내 - 거울 가져와.
남편 - 아니…… 거울 보러 당신이 가야지.
아내 - 응. 알았어. (거울 앞에 총총히 달려가 들여다보며) 와, 예쁘다. (이리저리 돌아보고 거 울을 보며 기쁘다.)
남편 - 그렇게 좋아?
아내 - 그럼. 이제 개나리 피면 봄나들이 갈 거야.
남편 - 철쭉꽃 맵시보다 못하진 않겠어. (넥타이 꺼내와) 옛날처럼 당신이 넥타이 좀 매 줘. (아내, 넥타이를 어떻게 매는지 몰라 쩔쩔맨다. 사이. 남편이 아내의 손을 잡고 넥 타이를 매며) 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다 매면) 나, 어때?
아내 - 아, 근사하다. 새 신랑 같은데?
(남편, 아내 옆에 나란히 서서 거울을 들여다본다. 남편, 아내 손을 잡으면 아내, 아이 처럼 신난다.)
남편 - 자, (눈감으며) 뽀뽀. (아내, 수줍다.) 빨리.
아내 - (수줍게 남편 볼에 입맞춘다.)
남편 - 아직도 두 뺨에 노을처럼 얼굴을 붉혀? 그것 하나 열아홉 꽃 같던 지 화자, 머리 에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고 스물넷 피 끓던 박 봉수한테 시집올 때 그대로군.
아내 - (망연히 거울을 들여다보며) 할머니는 누구세요?
남편 - (방비를 들고) 자, 이삿짐 다 꾸렸으면 이제 청소해야지. 먼지가 푹 쌓였어.
아내 - (남편의 손에 들린 방비를 확 잡아채며) 복 쓸어 버리시려우? 이사 갈 때는 못쓰는 물건도 함부로 버려서는 안되고 방을 쓸어내서도 안돼우. 함께 했던 티끌까지도 고이고이 따라가는 거라우.
남편 - 깜짝이야. 나는 또 한방 맞을 줄 알았지. (방문을 열고 나간다.)
아내 - (남편을 따르며) 어디 가?
남편 - 으응. 약 가지러. 따라 오지 마.
아내 - (어깨춤을 추며 노래 부른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좀 보소.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임 오 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물고 입만벙긋
남편 - (소리) 기분 좋아?
아내 - 응. 기분 최고야.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 났네.
남편 - (소리) 오늘 약 건너 뛸까?
아내 - 뭐라구?
남편 - (소리) 약 건너뛰자구.
아내 -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마냥) 약 줘! 빨리 줘! 빨리빨리!
남편 - (소리)예. 마님. 금방 올리겠읍니다.
아내 - (금세 흥이 나 노래) 꽃같은 날두고 왜한번도 안오나 아이구야 보고파서 환장을 하 네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남편 - (쟁반에 약사발 두개를 받쳐들고 들어오며) 그렇게 간들간들 요사스럽게 간드러지는 게 아니고 사명감을 짊어지고 씩씩하고 힘차게!
(남편, 쟁반을 내려놓고 아내와 함께 노래한다. 신명나게.)
남편,아내 -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싶어지나 / 날 두고 가신임은 가고싶어 가나
청천에 하늘엔 잔별도 많고 / 요내야 가슴엔 희망도 많다.
세월아 봄철아 오고가지 말어라 / 사뜰한 내청춘 다늙어진다
후렴: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났네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노래 마치면, 남편과 아내, 숨을 헐떡이며 서로의 등을 기대어 오붓이 앉는다. 빗소리.)
아내 - (입을 크게 벌려 하품) 아―아. (눈을 비빈다.)
남편 - 피곤하지? (장롱에서 이부자리 꺼내 펼친다. 낡은 혼수 이불이다.)
아내 - (이불 위에 몸을 던져 아이처럼 뒹굴며) 아이. 좋다. (반듯하게 누우며 하품을 늘어지 게) 아―음. 불 꺼.
남편 - (청사 초롱을 밝히고 불을 끈다.) 약 먹고 자야지.
아내 - (몸을 일으키면 남편과 눈 마주친다. 사이. 약사발을 쭉 들이킨다.)
남편 - 잘했어. (약사발을 들이킨다.)
(고요히 빗소리. 남편과 아내 청사 초롱만 우두커니 바라본다.)
남편 - 오늘 밤 암팡진 이 처녀와 재미를 많이 봐야지.
아내 - (청사 초롱 바라보며) 첫날밤 새색시 밤새도록 꼭두각시 인형처럼 앉혀두고 청사초 롱 꿈벅꿈벅 졸고 있을 때…
아내,남편 - (동시에) 우리 신랑 술만 마셨지.
(함께 웃는다. 사이. 빗소리.)
아내 -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잘한 일이예요.
남편 - 뭐가?
아내 - 이사 가기로 결정한 거요.
남편 - (침묵)
아내 - (몸을 눕히며) 이제껏 당신이 한 일 중에 최고로 잘한 일이에요. (베개를 베며) 천 번만번 잘한 일이예요.
남편 - 쳇. 어디로 이사 가는지도 모르면서…….
아내 - 어디면 어때요? 당신과 함께면 됐지. 당신 맘에 꼭 들었다면서요. 그럼 보나마나 내 맘에도 꼭이예요.
남편 - 새집에 새옷에 말년 복이 이만하면 말지. 안 그래? (사이.) 우리 이사 가면 우리 자식들 맘 아플까 봐 그게 하나 걸려. (사이.) 여보. 사람들이 우리 자식들한테 맘 아픈 소리하면 어쩌지?
아내 - 어느 눔이 귀한 내 새끼들 맘 아픈 소릴 해? 가만 안 둬! 그냥 칵―. 사람들이 뭘 안다구…….
(빗소리.)
아내 - 어떤 집이예요?
남편 - 땅이 평평하고 흙이 부드러워. 남향에 앞이 훤히 트여 햇볕도 잘 들고 뒤로 산이 있어 바람을 막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곳.
아내 - 거기에 샘이 하나 있어 물이 좋으면 최고지.
남편 - 터가 좋아. 자손 대대로 번성할 터지. (사이.) 미영이 산달이 언제라구?
아내 - (목소리 작아지며) 내년 봄이요.
남편 - 고걸 못 보고 가는군.
아내 - (기어드는 목소리로) 우리…이사……가는…집…뜰에…나무도…있어요?
남편 - (천천히 몸을 눕히며) 내년 봄이면……새파란 움이……손주 새끼들처럼…… 툭…… 툭…… 불거져 나올걸……
(남편, 아내의 손을 잡는다. 거세진 빗소리. 긴 사이. 남편, 아내의 손을 한번 더 꽉 쥔 다. 긴 사이. 잡은 손 맥없이 놓인다.)
― 막 ―
이름 : 조 은 영
성별 : 여
연령 : 32세
주소 : 경기도 안성시 봉남동 26-1
전화 : (031) 672- 9106
e-mail : ehdmsehdms@hanmail.net
추천0
- 이전글조은영-희곡2(2003) 04.11.16
- 다음글이영인-희곡1(2002) 04.11.1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