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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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영-희곡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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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
등장인물
부친 - 60대 후반
모친 - 60대 중반
성자 - 장녀. 40대 후반
성철 - 장남. 40대 중반
성환 - 차남. 40대 초반
성희 - 막내. 30대 중반
성철처 - 40대 초반
성환처 - 30대 후반
화수 -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리따운 여인
민희 - 종손녀
행자 - 식모
때 - 봄날 오후
곳 - 한옥. 고가(故家)의 어느 방.
무대 - 방안엔 고풍스런 가구들이 정갈하다. 무대전면 중앙에 누웠는 부친의 금침, 부친 의 머리맡께 수틀 앞에 앉아 그림자처럼 조용히 수를 놓는 모친, 열을 지어 앉았는 가족 들마저도 정갈한 느낌이다. 다만 가족들의 잠 못잔 피로한 얼굴, 맨 끝의 민희, 카세트를 손에 들고 헤드폰을 낀 채 누울락 앉을락 깰락 졸락 흐트러진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다. 왼쪽에 문, 오른쪽 벽에 둘러쳐진 화려한 자수 병풍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화목해 보이 는 가족 사진이 벽에 걸렸다. 고요하다. 밖에서 개 짖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린다.
성희 - (졸린 눈을 비비고 수틀을 들여다보며) 꽃 사이 나풀나풀 나비춤이요?
성자 - 엄마 수놓는 건 팔자구랴. 이렇게 캄캄한데서 눈도 침침하실 텐데…….
성희 - 아버지 병원에 계신 동안, 수 못 놓아 어떻게 참으셨수?
모친 - (침 묵)
성철처 - 여드레 밤을 꼬박 새시고 드시지도 않고……. 저러다 어머니마저 쓰러지 실 까 봐 염려돼요.
성희 - (개 짖는 소리에) 개가 웬 극성이람?
성철처 - 백구가 새끼를 낳으려나 봐요.
성희 - 엄마, 저 개 족보 있다고 했지? 새끼 낳으면 한 마리 줘. 흰둥이니 새끼도 희겠지?
모친 - (침 묵)
성철처 - 아버님이 애지중지 애끼시던 거니 깨시면 여쭤 보세요.
성자 - 아버지 깨시면 또 무슨 말이 나올지 오금이 저려.
(무거운 침묵. 사이. 문이 열리고 성철, 멍한 시선으로 등장. 모두 성철을 주시한 다. 사이.)
성자 -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의원이 뭐래?
성철 - (누구에게 랄 것도 없이 낮은 소리로) 오늘을 넘기시기 어렵겠대.
(모친, 수놓던 손길을 멈추고, 모두 놀라 입을 열지 못한다. 민희, 손에 들린 카 세트가 방바닥에 떨어지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 무슨 영문인지 몰라 헤드폰을 빼자 최신 랩송이 흘러나온다. 사이. 성철처, 얼른 카세트를 끄고 민희를 쥐어박는다.)
모친 - 저승길이 대문 밖이라 더니……그 날 아침녘에 봄꽃 구경 가신다고 민희 손 잡고 문을 나섰는데……민희야. 무슨 일 없었니? 벌에 쏘인 일 말고…….
성희 - 벌에 쏘여 이렇게 됐다는데 왜 믿질 않우?
민희 - (고개를 빼꼼 내밀며) 예. 할머니. 말씀드린 대로예요. 뒷산에 올랐어요. 약수 드시고 산에서 내려와 과수원에 들러 배꽃 구경을 한참 하시다 제가 그만 벌을 잘못 건드려 벌에 쏘이셨어요.
성희 - 그러게 벌을 왜 건드려서…
성자 - 시끄러워. 너 앞뒤 분별 없는 건 시집을 가도 여전하구나.
민희 - 배꽃이 한창이라 과수원에 벌 나비가 많았어요. 벌을 피하느라 손사래를 쳤 던 게 그만…
모친 - 하늘이 하는 일 가지고 애 놀라게 마라. 이게 어디 벌에 쏘여 될 일이니?
성희 - (답답해서) 병원에서 그러잖우. 김박사님도 아나필락시스 쇼크라구…
성자 - 난 의사들 떠드는 소리, 아무리 들어두 모르겠더라. 사람도 만들겠다는 세상 이 그깟 벌에 쏘인 우리 아버지 하나 못 살린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사이.) 양의도 한의도 손 들었다면 우리 이대로 넋 놓고 앉아 아버지 보내 드려야 하는 거니? (눈물 찍어내며 운다.)
(사이. 개 울음소리 처연하게.)
모친 - 짐승도 저 귀여워하는 사람이 죽는 걸 아는지 애가 닳는 모양이다. (사이.) 그 날 대문을 나서는 느 아버지 뒷모습이 허청해 뵈는 게 눈에 밟혔더니라.
(부친, 움찔한다. 성철, 얼른 무릎을 꿇고 정좌를 하니 수런수런 모두 꿇어앉는다.)
부친 - (잘 알아듣지 못할 음성으로)…화수……화수……
(방안의 분위기는 침통하게 가라앉는다. 맨 끝의 멀뚱한 민희만이 부친의 말소리 에 귀를 쫑긋 세운다. 모친, 다시 수를 놓기 시작한다.)
성철 - (모친을 쳐다보며) 어떻게 할까요?
모친 - (수 놓는 손길 달라진다.)….
성희 - 어떻게 하긴 뭘요? 큰오빠가 늘 그 모양이니 우리 꼴만 우습게 되어 가는 거 아니우?
성철처 - 애기씨는 무슨 말씀이 그래요? 이 사람도 하느라고 하는데…….
성희 - 누가 뭐 안 한다고 뭐래요? 안 할 일을 한다니 그렇죠!
부친 - (몸부림치며) 벌…벌…벌이다!
성철처 - (이불자락을 여미며) 아버님. 벌은 없어요.
부친 - (이불을 젖히며) 화수…….
성철 - (벌떡 일어서며) 가서 모셔 오겠어요.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가 없어요.
성희 - (성철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오빠. 이런 법은 없어.
성철 - 아버지 이렇게 그냥 보내면 후회 할 것 같다.
성자 - 엄마…우리 엄마 생각을 해야지.
성철 - 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이에요. 보고 싶은 사람 보게 해 드립시다.
모친 - (계속 수를 놓으며) 장손 없이 일 치를 수는 없다.
성철 - 금방 다녀올께요.
모친 - 집은 아니?
성철 - ……예.
모친 - (수 놓던 손을 멈추고) 니가 그걸 어떻게……
성희 - 아버지, 큰오빠, 한 통속으로 우릴 속였어. 우리 다 깜박 속아 살았다구. 엄 마두 세상 헛 살았수!
성자 - 시끄러워, 이것아! 민희도 앉아 있어. 안 보여?
성희 - (바락바락 대들며) 안 보여! 아무것두 안 보여! 여태껏 내가 그걸 모르다니 장님이지!
성자 - 그동안 니가 몰랐던 게 다행이지, 알았으면 집안이 조용할 수 있었겠니? 그 괄괄대는 성질에…지금도 봐. 너 위에 아무도 없지.
성희 - 우리 그이가 일이 생겨 함께 못 온 게 천만다행이지. 우리 시댁에서 이일 알아 봐. 아휴, 창피해. 낯부끄러워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녀? 교육계의 거 목이신 우리 아버지 명예에 걸맞게 “인류대학 전 총장 임종에 숨겨둔 여인 찾다.” 잡지에라도 실으실라우?
성철 - 아버지 돌아가시는 마당에 체면 따위가 뭐 중요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 데 아버지 마지막 원 하나 못 풀어드려!
(성철, 방문을 확 열고 부리나케 나간다. 모친, 성자, 성화를 부리던 성희까지도 잠자코만 있다. 모친, 수를 놓는다. 방안에 다시 적막감이 깃든다. 개 짖는 소리, 전보다 사나와진 듯하다. 사이. 멀리서 대문 빗장 여는 소리와 함께 소란한 인기 척.)
행자 - (멀리서 소리.) 조용히 해! 조용히 못해! (문 가까이서) 서울 아저씨 오셨어 요.
성희 - 장차 국회의원 나리 행차 신게로군.
성철처 - (문을 열고 맞이하며) 서방님 어서 오세요. (성환 처, 인사하면) 응. 동서도 왔어.
(이윽고 성환, 성환 처, 등장해 서로 인사 주고받고 성환,부친을 내려다보며 안쓰 럽다.)
성철처 - 어젯밤엔 매우 위중하셔서 저희 모두 가슴이 철렁했어요. 새벽에 잠깐 깨 시더니 서방님을 찾으셨어요. 지금은 한결 돌리신 거예요.
성환처 -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네요. 어머나! 이렇게 여위시다니…….
부친 - (소란한 소리에 깨어 눈을 뜬다.)
성환 - 아버지. 저예요.
부친 - 우리……작은 아들……하마터면 못 보고……죽을 뻔했구나.
성환 - 왜 그런 약한 소릴 하십니까?
성희 - (못마땅해) 이럴 때나 얼굴 뵙지. 아버지. 작은 며느리도 왔어요.
성환처 - (성희의 눈총을 피해 성환 옆에 바짝 붙어 앉고) 아버님.
부친 -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아가…오느라 수고했다. (사이. 이불을 확 젖히며) 갑 갑하다. 민희야. 문을 좀 열어다오.
(민희, 문을 열면, 봄 햇살 가득 들어와 방안이 환해진다. 모두, 밖을 내다본다.)
부친 - (거친 숨소리) 눈이 부시구나! (사이. 가래 끓는 소리로) 하늘에 구름이 있누?
민희 - 구름 한 점 없어요. 할아버지.
성환처 - (읊조리듯)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아지랑이가 하늘하늘 봄비단을 짜는 아름다운 봄날이에요, 아버님. 이이 요번 시장 선거에 출마해요. 어서 일어나셔서 응원해 주셔야죠.
부친 - (성환의 손을 잡고 눈을 스르르 감았다 뜬다.)…….
성철처 - 드디어 서방님도 출마를 하시는군요. 축하드려요.
성환 - 예. 다 집안 어른들, 부모님, 형수님 덕분이죠.
성자 - (눈물 찍어내며) 이런 경사스런 날에 아버지는 ……흑흑.
부친 - 바깥 세상을 보았던 게 언제였더라……과수원에 갔던 게……거기서 꽃 본 나비를 보았다. 민희야. 그 게 언제냐?
민희 - 아흐레 전이요, 할아버지. 지금은 꽃잎이 다 떨어지고 벌 나비도 없어요.
부친 - (고개를 주억거리며) 천지가 온통 하얗게 배꽃으로 흐드러졌다. 그 사이를 하 늘에서 내려온 선녀들마냥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활짝 핀 배꽃으로 내려 앉았다. 그 얇은 날개가 접히면서 파르르 떨리는데 황홀 하더구나. (사이.)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세상이 아름답다더니 그 날 내가 그 걸 봤으니 죽는가보다. (긴 사이.)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겠지…….
모친 - 문, 닫아라. 느 아버지한테 봄바람은 해롭다.
(민희, 문을 닫자 방안을 비추던 햇살이 사라지고 어두워진다.)
부친 - 밖은 화창한 봄날인데 이 어둑신한 무덤 같은 방에서 마치, 무슨 벌이라도 받고 있는 것 같구나.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꿇어앉았니? 얘, 둘째 아가, 편히 앉아라. 다들 편히 앉아.
성환처 - (편히 앉으려다 모두 꿈쩍 않는 걸 보고 다시 꿇어앉는다.)
부친 - (무겁고 차분한 음성으로) 모두 게 있니? 우리 귀염둥이 종손녀 민희야.
민희 - 예?
부친 - (고개를 끄덕하고) 천방지축이 막내딸, 성희 게 있냐?
성희 - 네.
부친 - (고개를 끄떡하고) 내 마누라 끔찍이도 위해주는 우리 큰 딸 성자도?
성자 - 예.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부친 - (흐뭇해하며) 작은 아들 성환이. 작은 애기까지 다 와 줬어. (사이. 손을 내밀 며) 어멈아.
성철처 - (그 손 잡으며) 예 아버님.
부친 - (잡은 손을 꼭 쥐려하나 힘이 없다.) 너 고생한 거 다 안다.
성철처 - (감정에 복받쳐서) 아버님…….
부친 - 종가로 시집와 일년 열 아홉 번 제사에 종부 노릇까지 훌륭히 해줘서 정말 고맙다. (사이.) 아범아.
성자 - (사이) 어딜 좀 갔어요.
부친 - 어딜?
성자 - (사이.) 곧 와요.
부친 - 다들 모여 앉았으라고 일렀건만……. (다정하게) 임자.
모친 - (수 놓는 손길, 멈추지 않고)…….
부친 - 임자한테 잘못한 게 있으면 지금 말해.
모친 - (눈물을 꾹 참고 수를 놓으며)…
부친 - 그래야 용서라도 빌고 죽지.
모친 - (수를 놓으며) 누구도 당신처럼 잘 할 수 없어요. 오죽하면 사람들이 우릴 잉꼬부부라고 부러워할까?…… 당신은 최고였어요.
부친 - (흐뭇해하며) 임자도 최고였어. (사이) 아들 둘, 딸 둘, 자식 농사 잘 지었어 지? 모두 시집 장가 보내 무사히 잘들 사니 이만하면 말지. 안 그런가, 임 자?
모친 - (고개를 끄덕인다)….
부친 - 손주 녀석들이 빠졌군. 사위들도…
성환처 - 기영이 영철이는 시험이라서 못데리구 왔어요.
성희 - 김 서방은 일이 생겨서… 검사라는 직업이 워낙…
부친 - (귓등으로도 듣질 않으며) 이젠 때가 됐다. 민희야. 그걸 틀어라.
민희 - 예. 할아버지. (카세트 켠다.)
부친 - (카세트 돌아가면 한숨 길게 뱉고) 나는 이제 죽어.
성환 - 그런 말씀 마세요. 기운 차리셔야죠.
부친 - 잡음 넣어서 남은 기운 다 빼앗지마라. 내 너희들에게 부탁이 있다. 녹음기 를 끌어들여 내 말소릴 남기려는 것은 문중 어른들의 큰 반발이 우려돼서다 나는 선산에 안 간다. 묘 쓰지마라. 비도 세우지 마라. 불에 태워다오.
성자, 성환 - 아버지!
부친 - 옷도 관도 다 필요 없다. 내 몸뚱아리 나왔던 대로 춥지나 않게 흙이나 몇 삽 덮어 불에 활활 태워다오. 타고남은 재는 과수원길 은행나무 밑에 묻어 다오.
성자, 성환, 성희 - (흐느끼며) 아버지!
부친 - 과수원이 훤히 보이게……씨앗을 뿌리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늬들 이 수확하는 모습도 볼 수 있겠지. 내 자식들, 슬퍼마라, 그렇게 이생의 목 적을 다 이루고 나면 시들고 썩고 사라지는 거야. 흙에서 자라 나올 때 그 랬듯이 묵묵하고 단호하게 흙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것이 땅위에서 빛나지 도 계속되지도 않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않는다. 울지 마라. 울지마. 울 것 없다. 이렇게……너희들 배웅을……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가족들, 애통하고 절절하게 목놓아 운다. 부친, 정신이 혼미해지며 까무러치자, 한동안 긴장이 감돈다.)
부친 - ……화……수……
성자 - 성철이가 부르러 갔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부친 - 화수야…… (목소리 사그라지며 조용해진다.)
성환처 - 화수가 누구죠?
성환 - (다급하게) 녹음기 꺼!
(방안 공기가 침통하게 가라앉는다. 민희, 어리둥절해서 카세트를 끈다.)
모친 - 기어이 가시려나 보다. (수 놓던 손을 멈추고) 우리두 채비를 해야지. 거울 치 워라. (성환,성철 처, 거울 내가면) 느이 아버지 이날 평생을 맑은 정신으로만 사신 분이다. 술을 자셔도 허튼 소리 한번 않으시고 한결같이 고고하신 분 아니냐. (다시 수를 놓는다.)
성희 - 고고하신 분이 첩이 뭐래요? (성환 처, 눈이 휘둥그레진다.)
성자 - 시끄러워! 민희가 듣는다.
성희 - 문틈으로 보나 문 열고 보나…오빠두 알고 있었던 거야? (성자의 암묵적인 표시에) 위선자들…….
(문이 열리고 성철 처, 성환 등장.)
성환 - 형님은 아버지 임종 안 지키고 거길 왜 가셨답니까?
성희 - 하늘이 내린 효자 아니우. 그 황소 고집을 누가 말려? 작은 오빠가 좀 일찍 와서 말리지 그랬수?
성환처 - (물 만난 고기처럼 호기심에 가득 차서) 당신도 작은 어머니 봤어요?
성자 - 작은 어머니? 우리 엄마 앞에서 올케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성환처 - 형님. 그래도 우리는 공대를 해야죠. (성철 처에게 동의를 구하며) 안 그래 요, 형님?
성희 - 며느리와 딸이 같겠수? 말이 한 식구지 며느리는 남이라우.
성환처 - 이이 빼고 여기 며느리 아닌 사람 없네요. 참, 민희도 빼야겠네. 어머니 도…….
성자 - (수 놓는 모친을 보며) 엄마는 일하나 잘 잡았수? 한땀 한땀 수 놓는 것만이 엄마가 맡은 유일한 일이라는 듯 쉬지도 않고…….
성환처 - 어머니 수놓는 솜씨야 어디 예사 솜씬가요? (병풍을 감상하며) 예술이죠.
성자 - 울 엄마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한올한올 꽃밭이 숯검댕이다.
성희 - (성환 처에게) 그 진주 목걸이 못 보던 거네? 오빠가 사줬어요?
성환처 - 이이는 진주라는 게 어디서 나오는지도 몰라요. 상처받은 진주조개가 쓰 라린 고통 속에서 분비작용을 반복하며 진주를 만들어 내는 거룩한 일을 이 이가 어떻게 알겠어요?
성자 - 그건 나도 몰랐네. 그런 거라면 (병풍을 보며) 우리 엄마 저 병풍 속에도 수 많은 진주가 알알이 박혀 있겠다.
(민희, 심심하고 따분해서 카세트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친다. 개 짖는 소리. 행자, 개를 나무라는 소리.)
성자 - (두려움에 싸여) 무슨 소리야? 누가 왔나?
(성철 처, 문을 열고 퇴장. 모친, 열린문을 주시한다. 성철 처, 행자와 얘기하는 소리. 방안을 억누르는 무거운 분위기.)
성자 - 저 문으로 그 여자가 들어올 걸 생각만해도 오금이 저린다.
성희 - (문을 노려보며) 한발짝도 못 들어와.
모친 - 문, 닫아라. (민희, 문을 닫는다.)
성철처 - (문을 열고 들어오며) 아무두 안 왔어요. 백구가 밥을 안 먹는대요.
성환처 - 여보. 작은댁이 가까워요?
성환 - (아랑곳없이 수를 놓는 모친을 살피며) 그리 멀지 않다고 들었어. 형수님은 모 르세요?
성철처 - 전 까맣게 몰랐어요.
성자 - (성환에게) 그 집 살림 돌보랴 푼푼히 용돈도 보탰다는 늬가 집을 왜 몰라?
성환 - (아내의 눈치에 변명하듯) 그거야…내키지 않지만 형님이 자식된 도리라니까 용돈만 조금 보탰지…뭐가 좋다고 찾아다니기까지 해요?
성자 - 어떤 여자래?
성환 - 전혀 몰라요.
성자 - 하긴, 우리 형제 자매 모이면 그런 말 섞을 짬이나 나?
성희 - 다 모일 수나 있나? 작은 오빠 얼굴 본 게 2년만인데… (성환 처를 노려보며) 언니는 그 사회복지 사업인가 뭔가로 양로원 고아원은 전전하면서 기영이, 영식이는…
성환처 - 영철이예요. 고모.
성희 - (무안하여) 그래… 영철이는 지금도 사설 보육시설에 맡기고 방학 때면 아예 여기 내려보내 큰 올케 손에 키우시나? 언닌 어떻게 장차 국회의원 나리 되 실 작은오빠보다도 바쁘우?
성환처 - 큰일하는 사람들, 본래 안 사람이 닦아놓은 거동 길 아니겠어요, 아가씨? 고모가 돼서 조카 이름자도 모르고 조카는 하냥 엄마 젖찾는 어린앤 줄…
성자 - 시끄러워! (눈물 찔끔거리며) 아버지는 사경을 헤매고 계시는데……흐흐흑.
성환 - 아버지 이렇게 위중하신데 왜 진즉 연락하지 않구요.
성희 - 작은오빤 워낙 귀하잖우. 엄마가 큰일하는 사람 한테 헛 전화질 말라셔.
성철처 - 그 동안 의식도 없으셨어요. 아버님 쓰러지시고 오늘 처음으로 이렇게 맑 은 정신으로 오랫동안 말씀두 하시고 사람도 잘 알아보시고…
(카세트로 장난치던 민희의 실수로 할아버지의 유언이 흘러나온다. 순간, 방안은 고요하다.)
부친 - (목소리 랩송 가사처럼 빨리 감기며)옷도관도다필요없다.내몸뚱아리나왔던대 로춥지나않게흙이나몇삽덮어불에활활태워다오타고남은재는과수원길은행나무 밑에묻어다오(민희, 허둥대며 카세트를 원상 복구하려하나 잘 되지 않자, 부친의 목소리, 엿가락처럼 늘어져서 기괴하게)-씨-앗-을―뿌-리-고―꽃-이-피-고- ―열-매-가―맺-고―늬-들-이―수-확-하-는―모-습-도―볼―수―있-겠- 지―그-렇-게― (민희, 카세트를 원상복구하면, 자식들 우는 소리.) 내 자식들, 슬퍼 마라. 그렇게 이생의 목적을 다 이루고 나면, 시들고, 썩고, 사라지는 거야. 흙에서 자라 나올 때 그랬듯이 묵묵하고 단호하게 흙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것이 땅위에서 빛나지도 계속되지도 않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않는 다. (모두 슬피 우는 소리 더욱 커지며) 울지 마라. 울 것 없다. 이렇게……너 희들……배웅을……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카세트에 귀 기울이며 모두 숙연하다. 카세트에선 가족들, 아버지! 외쳐 부르며 목놓아 우는 소리, 초상집을 방불케 애통하고 절절하다. 성자, 혼자서 눈물을 찔끔 거린다. 테잎은 계속 돌아간다.)
성환처 - 아버님 유언을 이렇게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부친 - (목소리) …화……수……
성희 - 저 여자 이름을 들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성자 - (목소리) 성철이가 부르러 갔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성희 - 어림없는 소리마! (문 쪽을 노려보며) 누가 이 방안에 한 발짝이라도 들여놓 게 한대!
성자 - (부친을 보며) 아버지 우리랑 정떼고 가실 모양이다.
성희 - 망령이 나셨지.
성환 - 말조심해라.
부친 - (목소리) 화수야……
성환처 - (목소리) 화수가 누구죠?
성환 - (다급한 목소리) 녹음기 꺼!
(가족들, 흉물이라도 보듯 카세트를 외면한다. 테잎은 계속 돌아가고 방안은 쥐죽 은듯 고요하다. 성환, 거칠게 카세트 버튼 눌러 끈다.)
성철처 - 서방님. 어쩌시려구요?
성환 - (테잎을 되감으며) 지우려구요.
모친 - (수 놓는 손을 멈추고) 느 아버지 마지막 말씀이시다. 손 못 댄다.
성환 - (카세트에 귀 기울이며 껐다 켰다하며) 아버지 유언을 지우려는 게 아닙니다. (카세트를 켠다.)
부친 - (목소리) ……화……수……
성환 - (카세트 끄며) 아버지 입에서 새나오는 이 낯선 여자를 지우겠다는 겁니다. 당장 문중 어른들께 이 사실을 알리고 싶으신 건 아니죠?
모친 - (침 묵)
(사이. 성환, 테이프 지우면, 모친, 수를 놓는다. 개 짖는 소리. 모두 문을 주시한 다. 방안을 억누르는 무거운 분위기.)
성자 - (긴장하며) 성철이 온 거 아냐?
성철처 - (귀기울이며 사이.) 아무두 안왔어요. 도대체 이 양반이 어떻게 된 거야?
성자 - 하긴 성철이가 그 여잘 데리고 올 걸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사이.) 엄만 정말 아버지가 밉지 않우?
모친 - (침 묵)
성희 - 엄마. 정말 몰랐수?
모친 - (침 묵)
성자 - (한숨을 내쉬며) 알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랬지. 알았으면 울엄마 먼저 초 상났다.
성환처 - 아버님 장례식엔 사람들로 파도를 이루겠죠? 한 인파가 밀려오면 한 인파 가 밀려가고…….
성희 -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수?
(개 짖는 소리. 모두 문을 주시한다. 사이. 아무런 기척 없다.)
성환처 - 큰 선거가 아니라 시장 선거는 집안 일에 민감하거든요. 부디 선거에 지 장이 없어야 할 텐데…….
성자 - 올케,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성환처 - 십리가 모랫바닥이래도 눈 찌를 가시나무가 있다는데 선거전이라는 게 본 래 가시덤불에 뛰어드는 거 아니겠어요? 헤치고 나와보면 온 몸에 상처뿐 인…….
성희 - 그 영광과 명예는 어디 가고 상처뿐이우?
성자 - 성환이도 이제 빛 좀 보는 거 아니야?
성환처 - 그거야 전쟁에서 이긴 자에게만 돌아가는 거죠. 어찌나 중상모략들을 해 대는지 지키는 사람 열이 도둑 하나를 못 당하고 큰 방죽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댔다고 집안에서 쉬쉬하는 작은 흠집이라도 있는 날엔, 덫에 치인 범이요. 그물에 걸린 고기 신세죠. (사이.)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지…….
성자 - 올케 하는 소린 시 같기도 하고 시조 같기도 하네.
성환처 - 무릇, 정치란 시심이 있어야 한다기에 요즘 시집을 좀 읽고 있긴 해요.
성희 - 작은 오빠가 정치를 할 건지 언니가 할 건지 모르겠수.
(부친, 움찔하자, 모두, 정좌를 하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부친, 시름시름 앓는다.)
성환 - (안타까워) 아버지……아버지…….
성희 - (방안을 둘러보며) 누군가 낯선 사람이 들어와 우릴 괴롭히고 있는 것만 같 아. 아버지도, 우리도 꼼짝 못하고 당하고만 있잖우.
성철처 - 아버님이 이상해요.
(모친, 수놓던 손을 멈추고, 모두, 두려움에 떨며 부친을 바라본다. 한동안 엄숙한 긴장이 감돈다. 성환, 공포에 질려 조심조심 부친의 가슴에 귀를 기울인다.)
성환 - (침묵을 깨뜨리며) 아마 잠이 드신 모양이에요.
모친 - (가족 사진을 지그시 바라본다. 사이.) 사진도 내려 놓아야지.
성철처 - (벽에 걸린 사진을 떼며) 아버님 퇴임하시고 어머니랑 두 분 과수원 일 도 우시면서……옆에서 뵙기 참, 흐뭇했어요.
성희 - (사진을 보며) 차라리 아버지 빨리 돌아가셨음 좋겠다, 죄 받을 소리지만 …….
모친 - (수를 놓으며) 시끄럽다.
성희 - (사진 속 아버지 어루만지며) 난 우리 아버질 세상에서 제일 존경했어. 그건 모두 알고 있지? (사이.) 우리 아버지 근엄하셨지만 인자하시고…
성환처 - 다정하시고 푸근하시고 멋진 분이시죠.
성희 - 그런 아버지를 잃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잃은 것 같은데 내가 품에 안겨 마 냥 좋아했던 우리 아버지가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라니…… 우리 집 얼마 나 화목했수?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모두 연극이었다고? 큰오빠, 작은 오 빠, 그동안 이 사실 숨기면서 우릴 속여 왔지? 그래, 속아줄께. 지금까지처 럼 그렇게 속아줄테니 계속 속이란 말야. 제발……. 왜 끝까지 속이지 못하 고 지금 와서 뒤집어 놓으냔 말야? 왜? 왜? 왜? 왜 끝까지 숨기지 못하우. 잉꼬부부로 소문난 우리 엄마 아빠처럼 한평생 늙겠다는 내 꿈은 그럼, 뭐유? (긴 사이) 난 날 속인 아버지 보다 어수룩한 오빠들이 더 미워.
부친 - (가쁜 숨을 몰아쉰다.)
모친 - (수놓던 일을 멈추고 부친을 바라보며) 팔과 다리를 주물러 드려라.
(성자, 성환 처, 부친의 발을, 성철 처와 성환은 부친의 팔을 천천히 가볍게 주무 른다. 모친, 불안한 시선으로 수를 놓는다. 성희, 이불자락을 여며주면, 부친, 자꾸 끌어내린다. 개 짖는 소리. 밖에서 인기척. 일순, 긴장감이 감돈다. 모두 문을 주 시한다. 모친의 수놓는 손길이 달라져 있다. 민희가 이를 지켜본다.)
성철처 - (긴장하여) 왔어요.
성철 - (소리.) 들어가세요.
성환처 - 내가 왜 이렇게 떨리지?
성자 - 엄마. 마음 단단히 잡수.
모친 - (천천히 수를 놓는다. 시선은 허공을 헤맨다.)
성희 - (밖에 대고) 감히 어딜 들어온다는 거야?
(이윽고 성철, 등장. 모두 성철을 원망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성철, 부친을 살피 고 안심한 듯 마음을 가라앉힌다.)
성철 - 우리 집에 찾아오신 손님이시다. 더구나 아버지가 청해서 모셔온 분 아니 냐? 예를 갖춰라.
성환 - 형님. 저 여태껏 형님 뜻 한번도 거스른 적 없었어요. 하지만 이건 아닙니 다. 이대로 평안히 가시게 해 드리자구요.
성철 - 아버지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치실 수 있게 해 드리자.
성환 - 형님만 효자고 우린 다 불효자들이에요? 아버지 한평생 누구보다도 훌륭했 습니다. 왜 오점을 남기시려는 거요?
성철 - (침 묵.)
성환 - 여기 어머니도 계시고 민희도 있어요. 지금 와서 저 낯선 여잘 여기 들이겠 다는 이유가 뭐요? 아버지는 지금 돌아가시면 그뿐이지만 우린 살아야 할 것 아니에요?
성자 - 성철아. 우리 엄마 두 눈 멀쩡히 뜨고 이런 치욕감을 삼켜야 하니?
부친 - (호흡 곤란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떠듬떠듬)……화……수……화수……
성철 - (퇴장. 소리) 어서, 어서 드세요. 아버지께서 찾으세요.
성환 - (부친에게 엎드려 울며) 아버지 한평생이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네?
성희 - 못 들어와. 한 발짝도 못 들어와.
(화수, 등장. 엷은 의상이 우아하고 가냘픈 꽃같다. 맵시 있는 걸음으로 부친 곁에 앉는 품이 다소곳하다. 순간, 방안은 고요하다. 세찬 거부의 소리들이 기가 죽어 잠자코만 있다.)
성철 - 아버지. 이분이 누구신지 아시겠어요?
부친 - (맥 하나 없이 시들부들 꿈인지 생신지 반갑다.)…
화수 - (슬픔에 겨워) 저 왔어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부친 - (고개를 끄떡하고)……화수……
(부친, 환한 표정으로 화수를 바라보고 화수, 슬픔에 눈이 젖는다. 숨이 막히게 고 요한 사이.)
부친 - (가물가물한 목소리로)살아서는……너를……못……볼 줄……알았……는데……
화수 - 말씀 많이 하시지 마세요, 선생님. (흐느낀다.)
부친 - 손……손……손을……이리……줘.
(모친, 떨리는 손으로 수를 놓고 있다. 가족들 놀라 서로 쳐다보며 어쩔 줄 모른 다.)
성희 - 안 돼!
성자 - (흐느끼며) 아버지! 엄마.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떻게 해.
부친 - (새파랗게 질린 손을 훼훼 저으며) 어디……있니……화수야……손을……이 리……다오……
(화수의 하얀 손이 부친의 새파랗게 질린 손을 잡으면, 부친, 그 손을 파들파들 꼭 잡으려 애쓴다. 순간, 방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성철 처, 민희를 꼭 부둥 켜 안는다. 모친, 떠듬떠듬 수놓는 손길, 몹시 떨린다. 어느 누구도 가느다란 숨 조차 쉬질 않는다. 개 짖는 소리 한 마리가 아닌 듯 사납다.)
성희 - 안 돼! 안 돼! 안 돼!
성철 - 잠자코 있어.
성철처 - 민희야! (눈짓하며) 나가!
성희 - 이런 횡포가 어딨어? 마지막 순간에 웬 횡포냐구!
성철 - 소란 피우지마라. 아버지 가시는 길 평안하게 해 드리자.
성희 - (앙칼지게 고함치며) 저 여잔 도대체 누구야? 누군데 평화로운 우리 집을 짓 밟고 쳐들어와 이 소란을 피우는 거야? 이 침입자!
성철 - 데리고 나가.
성희 - (성철 처, 성환 처, 성환에게 팔을 붙들려 버티다 끌려나가며) 나가! 나가! 나 가란 말야! 맞서 싸울 무기 하나 없이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야? 작은 오 빠, 저 여자 좀 쫓아버려. 작은오빠!
(성환, 성철 처, 성환 처, 성희를 달래며 퇴장. 부친, 환한 미소를 머금고 화수의 손을 잡고 있다. 성환, 등장. 어색한 사이. 개가 미친 듯이 짖어댄다.)
화수 - (불안하게) 선생님.
성자 - 엄마. 아버지가……아버지!
(모친, 수틀을 치우고 부친 곁에 앉으면, 화수, 부친의 손을 살그머니 놓는다. 사 이. 부친, 숨이 넘어간다. 미친 듯이 짖어대던 개가 별안간 신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주둥이를 꾹 다문다.)
모친 - (부친의 눈을 쓸어 내리며) 운명하셨다.
성자,성철,성환 - (통곡하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통곡소리에 성철 처, 성환 처, 뛰쳐 들어와 함께 엎드려 운다. 모친, 부친의 왼손 을 위로 하여 배 위에 올려놓고 두 발을 가지런히 모은다. 문갑에서 꺼낸 보따리를 풀어 솜으로 부친의 입, 코, 귀를 막는다. 성철 처, 모친의 시중을 든다. 모친, 부 친의 두발을 나란히 모아 붕대로 묶는다. 어느새 성희, 등장해 기운 없이 서있고, 민희, 이 광경을 지켜본다.)
모친 - (하얀 천을 펼쳐 성철에게 주며) 덮어 드려라.
(성철, 하얀 천을 부친 위에 덮으면 통곡소리 더욱 커진다. 화수, 천천히 일어난 다.)
모친 - 병풍 쳐라.
(성철과 성환, 병풍을 쳐 시신을 가린다. 화수, 힘없이 퇴장.)
모친 - 방에 불 빼라. (사이.) 친지들께 알려야지.
(성철, 성환 퇴장. 활짝 열린 문으로 저녁 노을이 비낀다. 병풍 안쪽에 모친, 홀로 부친 곁에 남는다. 성자, 성철 처와 성환 처의 어깨를 빌어가며 꺼억꺼억 섧게 울고, 성희, 문에 기대어 저녁 노을 바라본다.)
성희 - 우리 아버지 저 노을 속으로 가셨을까?
행자 - (소리) 백구가 새끼를 낳았어요.
성철처 - 몇 마리든?
행자 - (방안을 기웃거리며) 한 마리요.
성희 - 흰둥이지?
행자 - (보이지 않는 병풍 쪽을 기웃거리며) 아니요. 점박이요.
성희 - 어떻게 그럴 수가…….
성환처 - (속삭이듯) 그 손님은 가셨니?
행자 - 예. 개를 한 마리 데리고 왔더라구요. 검둥이요.
(모두, 퇴장하고 문이 닫히면 방안에 비낀 저녁 노을 사라지고 어두워진다. 병풍 안쪽에 모친, 부친 곁에 홀로 남아 가족 사진을 들여다본다.)
― 막 ―
침 입 자
이름 : 조 은 영
연령 : 32세
주소 : 경기도 안성시 봉남동 26-1
전화 번호 : (031) 672 - 9106
016 -764 - 3898
등장인물
부친 - 60대 후반
모친 - 60대 중반
성자 - 장녀. 40대 후반
성철 - 장남. 40대 중반
성환 - 차남. 40대 초반
성희 - 막내. 30대 중반
성철처 - 40대 초반
성환처 - 30대 후반
화수 -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리따운 여인
민희 - 종손녀
행자 - 식모
때 - 봄날 오후
곳 - 한옥. 고가(故家)의 어느 방.
무대 - 방안엔 고풍스런 가구들이 정갈하다. 무대전면 중앙에 누웠는 부친의 금침, 부친 의 머리맡께 수틀 앞에 앉아 그림자처럼 조용히 수를 놓는 모친, 열을 지어 앉았는 가족 들마저도 정갈한 느낌이다. 다만 가족들의 잠 못잔 피로한 얼굴, 맨 끝의 민희, 카세트를 손에 들고 헤드폰을 낀 채 누울락 앉을락 깰락 졸락 흐트러진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다. 왼쪽에 문, 오른쪽 벽에 둘러쳐진 화려한 자수 병풍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화목해 보이 는 가족 사진이 벽에 걸렸다. 고요하다. 밖에서 개 짖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린다.
성희 - (졸린 눈을 비비고 수틀을 들여다보며) 꽃 사이 나풀나풀 나비춤이요?
성자 - 엄마 수놓는 건 팔자구랴. 이렇게 캄캄한데서 눈도 침침하실 텐데…….
성희 - 아버지 병원에 계신 동안, 수 못 놓아 어떻게 참으셨수?
모친 - (침 묵)
성철처 - 여드레 밤을 꼬박 새시고 드시지도 않고……. 저러다 어머니마저 쓰러지 실 까 봐 염려돼요.
성희 - (개 짖는 소리에) 개가 웬 극성이람?
성철처 - 백구가 새끼를 낳으려나 봐요.
성희 - 엄마, 저 개 족보 있다고 했지? 새끼 낳으면 한 마리 줘. 흰둥이니 새끼도 희겠지?
모친 - (침 묵)
성철처 - 아버님이 애지중지 애끼시던 거니 깨시면 여쭤 보세요.
성자 - 아버지 깨시면 또 무슨 말이 나올지 오금이 저려.
(무거운 침묵. 사이. 문이 열리고 성철, 멍한 시선으로 등장. 모두 성철을 주시한 다. 사이.)
성자 -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의원이 뭐래?
성철 - (누구에게 랄 것도 없이 낮은 소리로) 오늘을 넘기시기 어렵겠대.
(모친, 수놓던 손길을 멈추고, 모두 놀라 입을 열지 못한다. 민희, 손에 들린 카 세트가 방바닥에 떨어지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 무슨 영문인지 몰라 헤드폰을 빼자 최신 랩송이 흘러나온다. 사이. 성철처, 얼른 카세트를 끄고 민희를 쥐어박는다.)
모친 - 저승길이 대문 밖이라 더니……그 날 아침녘에 봄꽃 구경 가신다고 민희 손 잡고 문을 나섰는데……민희야. 무슨 일 없었니? 벌에 쏘인 일 말고…….
성희 - 벌에 쏘여 이렇게 됐다는데 왜 믿질 않우?
민희 - (고개를 빼꼼 내밀며) 예. 할머니. 말씀드린 대로예요. 뒷산에 올랐어요. 약수 드시고 산에서 내려와 과수원에 들러 배꽃 구경을 한참 하시다 제가 그만 벌을 잘못 건드려 벌에 쏘이셨어요.
성희 - 그러게 벌을 왜 건드려서…
성자 - 시끄러워. 너 앞뒤 분별 없는 건 시집을 가도 여전하구나.
민희 - 배꽃이 한창이라 과수원에 벌 나비가 많았어요. 벌을 피하느라 손사래를 쳤 던 게 그만…
모친 - 하늘이 하는 일 가지고 애 놀라게 마라. 이게 어디 벌에 쏘여 될 일이니?
성희 - (답답해서) 병원에서 그러잖우. 김박사님도 아나필락시스 쇼크라구…
성자 - 난 의사들 떠드는 소리, 아무리 들어두 모르겠더라. 사람도 만들겠다는 세상 이 그깟 벌에 쏘인 우리 아버지 하나 못 살린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사이.) 양의도 한의도 손 들었다면 우리 이대로 넋 놓고 앉아 아버지 보내 드려야 하는 거니? (눈물 찍어내며 운다.)
(사이. 개 울음소리 처연하게.)
모친 - 짐승도 저 귀여워하는 사람이 죽는 걸 아는지 애가 닳는 모양이다. (사이.) 그 날 대문을 나서는 느 아버지 뒷모습이 허청해 뵈는 게 눈에 밟혔더니라.
(부친, 움찔한다. 성철, 얼른 무릎을 꿇고 정좌를 하니 수런수런 모두 꿇어앉는다.)
부친 - (잘 알아듣지 못할 음성으로)…화수……화수……
(방안의 분위기는 침통하게 가라앉는다. 맨 끝의 멀뚱한 민희만이 부친의 말소리 에 귀를 쫑긋 세운다. 모친, 다시 수를 놓기 시작한다.)
성철 - (모친을 쳐다보며) 어떻게 할까요?
모친 - (수 놓는 손길 달라진다.)….
성희 - 어떻게 하긴 뭘요? 큰오빠가 늘 그 모양이니 우리 꼴만 우습게 되어 가는 거 아니우?
성철처 - 애기씨는 무슨 말씀이 그래요? 이 사람도 하느라고 하는데…….
성희 - 누가 뭐 안 한다고 뭐래요? 안 할 일을 한다니 그렇죠!
부친 - (몸부림치며) 벌…벌…벌이다!
성철처 - (이불자락을 여미며) 아버님. 벌은 없어요.
부친 - (이불을 젖히며) 화수…….
성철 - (벌떡 일어서며) 가서 모셔 오겠어요.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가 없어요.
성희 - (성철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오빠. 이런 법은 없어.
성철 - 아버지 이렇게 그냥 보내면 후회 할 것 같다.
성자 - 엄마…우리 엄마 생각을 해야지.
성철 - 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이에요. 보고 싶은 사람 보게 해 드립시다.
모친 - (계속 수를 놓으며) 장손 없이 일 치를 수는 없다.
성철 - 금방 다녀올께요.
모친 - 집은 아니?
성철 - ……예.
모친 - (수 놓던 손을 멈추고) 니가 그걸 어떻게……
성희 - 아버지, 큰오빠, 한 통속으로 우릴 속였어. 우리 다 깜박 속아 살았다구. 엄 마두 세상 헛 살았수!
성자 - 시끄러워, 이것아! 민희도 앉아 있어. 안 보여?
성희 - (바락바락 대들며) 안 보여! 아무것두 안 보여! 여태껏 내가 그걸 모르다니 장님이지!
성자 - 그동안 니가 몰랐던 게 다행이지, 알았으면 집안이 조용할 수 있었겠니? 그 괄괄대는 성질에…지금도 봐. 너 위에 아무도 없지.
성희 - 우리 그이가 일이 생겨 함께 못 온 게 천만다행이지. 우리 시댁에서 이일 알아 봐. 아휴, 창피해. 낯부끄러워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녀? 교육계의 거 목이신 우리 아버지 명예에 걸맞게 “인류대학 전 총장 임종에 숨겨둔 여인 찾다.” 잡지에라도 실으실라우?
성철 - 아버지 돌아가시는 마당에 체면 따위가 뭐 중요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 데 아버지 마지막 원 하나 못 풀어드려!
(성철, 방문을 확 열고 부리나케 나간다. 모친, 성자, 성화를 부리던 성희까지도 잠자코만 있다. 모친, 수를 놓는다. 방안에 다시 적막감이 깃든다. 개 짖는 소리, 전보다 사나와진 듯하다. 사이. 멀리서 대문 빗장 여는 소리와 함께 소란한 인기 척.)
행자 - (멀리서 소리.) 조용히 해! 조용히 못해! (문 가까이서) 서울 아저씨 오셨어 요.
성희 - 장차 국회의원 나리 행차 신게로군.
성철처 - (문을 열고 맞이하며) 서방님 어서 오세요. (성환 처, 인사하면) 응. 동서도 왔어.
(이윽고 성환, 성환 처, 등장해 서로 인사 주고받고 성환,부친을 내려다보며 안쓰 럽다.)
성철처 - 어젯밤엔 매우 위중하셔서 저희 모두 가슴이 철렁했어요. 새벽에 잠깐 깨 시더니 서방님을 찾으셨어요. 지금은 한결 돌리신 거예요.
성환처 -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네요. 어머나! 이렇게 여위시다니…….
부친 - (소란한 소리에 깨어 눈을 뜬다.)
성환 - 아버지. 저예요.
부친 - 우리……작은 아들……하마터면 못 보고……죽을 뻔했구나.
성환 - 왜 그런 약한 소릴 하십니까?
성희 - (못마땅해) 이럴 때나 얼굴 뵙지. 아버지. 작은 며느리도 왔어요.
성환처 - (성희의 눈총을 피해 성환 옆에 바짝 붙어 앉고) 아버님.
부친 -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아가…오느라 수고했다. (사이. 이불을 확 젖히며) 갑 갑하다. 민희야. 문을 좀 열어다오.
(민희, 문을 열면, 봄 햇살 가득 들어와 방안이 환해진다. 모두, 밖을 내다본다.)
부친 - (거친 숨소리) 눈이 부시구나! (사이. 가래 끓는 소리로) 하늘에 구름이 있누?
민희 - 구름 한 점 없어요. 할아버지.
성환처 - (읊조리듯)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아지랑이가 하늘하늘 봄비단을 짜는 아름다운 봄날이에요, 아버님. 이이 요번 시장 선거에 출마해요. 어서 일어나셔서 응원해 주셔야죠.
부친 - (성환의 손을 잡고 눈을 스르르 감았다 뜬다.)…….
성철처 - 드디어 서방님도 출마를 하시는군요. 축하드려요.
성환 - 예. 다 집안 어른들, 부모님, 형수님 덕분이죠.
성자 - (눈물 찍어내며) 이런 경사스런 날에 아버지는 ……흑흑.
부친 - 바깥 세상을 보았던 게 언제였더라……과수원에 갔던 게……거기서 꽃 본 나비를 보았다. 민희야. 그 게 언제냐?
민희 - 아흐레 전이요, 할아버지. 지금은 꽃잎이 다 떨어지고 벌 나비도 없어요.
부친 - (고개를 주억거리며) 천지가 온통 하얗게 배꽃으로 흐드러졌다. 그 사이를 하 늘에서 내려온 선녀들마냥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활짝 핀 배꽃으로 내려 앉았다. 그 얇은 날개가 접히면서 파르르 떨리는데 황홀 하더구나. (사이.)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세상이 아름답다더니 그 날 내가 그 걸 봤으니 죽는가보다. (긴 사이.)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겠지…….
모친 - 문, 닫아라. 느 아버지한테 봄바람은 해롭다.
(민희, 문을 닫자 방안을 비추던 햇살이 사라지고 어두워진다.)
부친 - 밖은 화창한 봄날인데 이 어둑신한 무덤 같은 방에서 마치, 무슨 벌이라도 받고 있는 것 같구나.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꿇어앉았니? 얘, 둘째 아가, 편히 앉아라. 다들 편히 앉아.
성환처 - (편히 앉으려다 모두 꿈쩍 않는 걸 보고 다시 꿇어앉는다.)
부친 - (무겁고 차분한 음성으로) 모두 게 있니? 우리 귀염둥이 종손녀 민희야.
민희 - 예?
부친 - (고개를 끄덕하고) 천방지축이 막내딸, 성희 게 있냐?
성희 - 네.
부친 - (고개를 끄떡하고) 내 마누라 끔찍이도 위해주는 우리 큰 딸 성자도?
성자 - 예.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부친 - (흐뭇해하며) 작은 아들 성환이. 작은 애기까지 다 와 줬어. (사이. 손을 내밀 며) 어멈아.
성철처 - (그 손 잡으며) 예 아버님.
부친 - (잡은 손을 꼭 쥐려하나 힘이 없다.) 너 고생한 거 다 안다.
성철처 - (감정에 복받쳐서) 아버님…….
부친 - 종가로 시집와 일년 열 아홉 번 제사에 종부 노릇까지 훌륭히 해줘서 정말 고맙다. (사이.) 아범아.
성자 - (사이) 어딜 좀 갔어요.
부친 - 어딜?
성자 - (사이.) 곧 와요.
부친 - 다들 모여 앉았으라고 일렀건만……. (다정하게) 임자.
모친 - (수 놓는 손길, 멈추지 않고)…….
부친 - 임자한테 잘못한 게 있으면 지금 말해.
모친 - (눈물을 꾹 참고 수를 놓으며)…
부친 - 그래야 용서라도 빌고 죽지.
모친 - (수를 놓으며) 누구도 당신처럼 잘 할 수 없어요. 오죽하면 사람들이 우릴 잉꼬부부라고 부러워할까?…… 당신은 최고였어요.
부친 - (흐뭇해하며) 임자도 최고였어. (사이) 아들 둘, 딸 둘, 자식 농사 잘 지었어 지? 모두 시집 장가 보내 무사히 잘들 사니 이만하면 말지. 안 그런가, 임 자?
모친 - (고개를 끄덕인다)….
부친 - 손주 녀석들이 빠졌군. 사위들도…
성환처 - 기영이 영철이는 시험이라서 못데리구 왔어요.
성희 - 김 서방은 일이 생겨서… 검사라는 직업이 워낙…
부친 - (귓등으로도 듣질 않으며) 이젠 때가 됐다. 민희야. 그걸 틀어라.
민희 - 예. 할아버지. (카세트 켠다.)
부친 - (카세트 돌아가면 한숨 길게 뱉고) 나는 이제 죽어.
성환 - 그런 말씀 마세요. 기운 차리셔야죠.
부친 - 잡음 넣어서 남은 기운 다 빼앗지마라. 내 너희들에게 부탁이 있다. 녹음기 를 끌어들여 내 말소릴 남기려는 것은 문중 어른들의 큰 반발이 우려돼서다 나는 선산에 안 간다. 묘 쓰지마라. 비도 세우지 마라. 불에 태워다오.
성자, 성환 - 아버지!
부친 - 옷도 관도 다 필요 없다. 내 몸뚱아리 나왔던 대로 춥지나 않게 흙이나 몇 삽 덮어 불에 활활 태워다오. 타고남은 재는 과수원길 은행나무 밑에 묻어 다오.
성자, 성환, 성희 - (흐느끼며) 아버지!
부친 - 과수원이 훤히 보이게……씨앗을 뿌리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늬들 이 수확하는 모습도 볼 수 있겠지. 내 자식들, 슬퍼마라, 그렇게 이생의 목 적을 다 이루고 나면 시들고 썩고 사라지는 거야. 흙에서 자라 나올 때 그 랬듯이 묵묵하고 단호하게 흙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것이 땅위에서 빛나지 도 계속되지도 않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않는다. 울지 마라. 울지마. 울 것 없다. 이렇게……너희들 배웅을……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가족들, 애통하고 절절하게 목놓아 운다. 부친, 정신이 혼미해지며 까무러치자, 한동안 긴장이 감돈다.)
부친 - ……화……수……
성자 - 성철이가 부르러 갔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부친 - 화수야…… (목소리 사그라지며 조용해진다.)
성환처 - 화수가 누구죠?
성환 - (다급하게) 녹음기 꺼!
(방안 공기가 침통하게 가라앉는다. 민희, 어리둥절해서 카세트를 끈다.)
모친 - 기어이 가시려나 보다. (수 놓던 손을 멈추고) 우리두 채비를 해야지. 거울 치 워라. (성환,성철 처, 거울 내가면) 느이 아버지 이날 평생을 맑은 정신으로만 사신 분이다. 술을 자셔도 허튼 소리 한번 않으시고 한결같이 고고하신 분 아니냐. (다시 수를 놓는다.)
성희 - 고고하신 분이 첩이 뭐래요? (성환 처, 눈이 휘둥그레진다.)
성자 - 시끄러워! 민희가 듣는다.
성희 - 문틈으로 보나 문 열고 보나…오빠두 알고 있었던 거야? (성자의 암묵적인 표시에) 위선자들…….
(문이 열리고 성철 처, 성환 등장.)
성환 - 형님은 아버지 임종 안 지키고 거길 왜 가셨답니까?
성희 - 하늘이 내린 효자 아니우. 그 황소 고집을 누가 말려? 작은 오빠가 좀 일찍 와서 말리지 그랬수?
성환처 - (물 만난 고기처럼 호기심에 가득 차서) 당신도 작은 어머니 봤어요?
성자 - 작은 어머니? 우리 엄마 앞에서 올케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성환처 - 형님. 그래도 우리는 공대를 해야죠. (성철 처에게 동의를 구하며) 안 그래 요, 형님?
성희 - 며느리와 딸이 같겠수? 말이 한 식구지 며느리는 남이라우.
성환처 - 이이 빼고 여기 며느리 아닌 사람 없네요. 참, 민희도 빼야겠네. 어머니 도…….
성자 - (수 놓는 모친을 보며) 엄마는 일하나 잘 잡았수? 한땀 한땀 수 놓는 것만이 엄마가 맡은 유일한 일이라는 듯 쉬지도 않고…….
성환처 - 어머니 수놓는 솜씨야 어디 예사 솜씬가요? (병풍을 감상하며) 예술이죠.
성자 - 울 엄마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한올한올 꽃밭이 숯검댕이다.
성희 - (성환 처에게) 그 진주 목걸이 못 보던 거네? 오빠가 사줬어요?
성환처 - 이이는 진주라는 게 어디서 나오는지도 몰라요. 상처받은 진주조개가 쓰 라린 고통 속에서 분비작용을 반복하며 진주를 만들어 내는 거룩한 일을 이 이가 어떻게 알겠어요?
성자 - 그건 나도 몰랐네. 그런 거라면 (병풍을 보며) 우리 엄마 저 병풍 속에도 수 많은 진주가 알알이 박혀 있겠다.
(민희, 심심하고 따분해서 카세트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친다. 개 짖는 소리. 행자, 개를 나무라는 소리.)
성자 - (두려움에 싸여) 무슨 소리야? 누가 왔나?
(성철 처, 문을 열고 퇴장. 모친, 열린문을 주시한다. 성철 처, 행자와 얘기하는 소리. 방안을 억누르는 무거운 분위기.)
성자 - 저 문으로 그 여자가 들어올 걸 생각만해도 오금이 저린다.
성희 - (문을 노려보며) 한발짝도 못 들어와.
모친 - 문, 닫아라. (민희, 문을 닫는다.)
성철처 - (문을 열고 들어오며) 아무두 안 왔어요. 백구가 밥을 안 먹는대요.
성환처 - 여보. 작은댁이 가까워요?
성환 - (아랑곳없이 수를 놓는 모친을 살피며) 그리 멀지 않다고 들었어. 형수님은 모 르세요?
성철처 - 전 까맣게 몰랐어요.
성자 - (성환에게) 그 집 살림 돌보랴 푼푼히 용돈도 보탰다는 늬가 집을 왜 몰라?
성환 - (아내의 눈치에 변명하듯) 그거야…내키지 않지만 형님이 자식된 도리라니까 용돈만 조금 보탰지…뭐가 좋다고 찾아다니기까지 해요?
성자 - 어떤 여자래?
성환 - 전혀 몰라요.
성자 - 하긴, 우리 형제 자매 모이면 그런 말 섞을 짬이나 나?
성희 - 다 모일 수나 있나? 작은 오빠 얼굴 본 게 2년만인데… (성환 처를 노려보며) 언니는 그 사회복지 사업인가 뭔가로 양로원 고아원은 전전하면서 기영이, 영식이는…
성환처 - 영철이예요. 고모.
성희 - (무안하여) 그래… 영철이는 지금도 사설 보육시설에 맡기고 방학 때면 아예 여기 내려보내 큰 올케 손에 키우시나? 언닌 어떻게 장차 국회의원 나리 되 실 작은오빠보다도 바쁘우?
성환처 - 큰일하는 사람들, 본래 안 사람이 닦아놓은 거동 길 아니겠어요, 아가씨? 고모가 돼서 조카 이름자도 모르고 조카는 하냥 엄마 젖찾는 어린앤 줄…
성자 - 시끄러워! (눈물 찔끔거리며) 아버지는 사경을 헤매고 계시는데……흐흐흑.
성환 - 아버지 이렇게 위중하신데 왜 진즉 연락하지 않구요.
성희 - 작은오빤 워낙 귀하잖우. 엄마가 큰일하는 사람 한테 헛 전화질 말라셔.
성철처 - 그 동안 의식도 없으셨어요. 아버님 쓰러지시고 오늘 처음으로 이렇게 맑 은 정신으로 오랫동안 말씀두 하시고 사람도 잘 알아보시고…
(카세트로 장난치던 민희의 실수로 할아버지의 유언이 흘러나온다. 순간, 방안은 고요하다.)
부친 - (목소리 랩송 가사처럼 빨리 감기며)옷도관도다필요없다.내몸뚱아리나왔던대 로춥지나않게흙이나몇삽덮어불에활활태워다오타고남은재는과수원길은행나무 밑에묻어다오(민희, 허둥대며 카세트를 원상 복구하려하나 잘 되지 않자, 부친의 목소리, 엿가락처럼 늘어져서 기괴하게)-씨-앗-을―뿌-리-고―꽃-이-피-고- ―열-매-가―맺-고―늬-들-이―수-확-하-는―모-습-도―볼―수―있-겠- 지―그-렇-게― (민희, 카세트를 원상복구하면, 자식들 우는 소리.) 내 자식들, 슬퍼 마라. 그렇게 이생의 목적을 다 이루고 나면, 시들고, 썩고, 사라지는 거야. 흙에서 자라 나올 때 그랬듯이 묵묵하고 단호하게 흙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것이 땅위에서 빛나지도 계속되지도 않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않는 다. (모두 슬피 우는 소리 더욱 커지며) 울지 마라. 울 것 없다. 이렇게……너 희들……배웅을……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카세트에 귀 기울이며 모두 숙연하다. 카세트에선 가족들, 아버지! 외쳐 부르며 목놓아 우는 소리, 초상집을 방불케 애통하고 절절하다. 성자, 혼자서 눈물을 찔끔 거린다. 테잎은 계속 돌아간다.)
성환처 - 아버님 유언을 이렇게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부친 - (목소리) …화……수……
성희 - 저 여자 이름을 들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성자 - (목소리) 성철이가 부르러 갔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성희 - 어림없는 소리마! (문 쪽을 노려보며) 누가 이 방안에 한 발짝이라도 들여놓 게 한대!
성자 - (부친을 보며) 아버지 우리랑 정떼고 가실 모양이다.
성희 - 망령이 나셨지.
성환 - 말조심해라.
부친 - (목소리) 화수야……
성환처 - (목소리) 화수가 누구죠?
성환 - (다급한 목소리) 녹음기 꺼!
(가족들, 흉물이라도 보듯 카세트를 외면한다. 테잎은 계속 돌아가고 방안은 쥐죽 은듯 고요하다. 성환, 거칠게 카세트 버튼 눌러 끈다.)
성철처 - 서방님. 어쩌시려구요?
성환 - (테잎을 되감으며) 지우려구요.
모친 - (수 놓는 손을 멈추고) 느 아버지 마지막 말씀이시다. 손 못 댄다.
성환 - (카세트에 귀 기울이며 껐다 켰다하며) 아버지 유언을 지우려는 게 아닙니다. (카세트를 켠다.)
부친 - (목소리) ……화……수……
성환 - (카세트 끄며) 아버지 입에서 새나오는 이 낯선 여자를 지우겠다는 겁니다. 당장 문중 어른들께 이 사실을 알리고 싶으신 건 아니죠?
모친 - (침 묵)
(사이. 성환, 테이프 지우면, 모친, 수를 놓는다. 개 짖는 소리. 모두 문을 주시한 다. 방안을 억누르는 무거운 분위기.)
성자 - (긴장하며) 성철이 온 거 아냐?
성철처 - (귀기울이며 사이.) 아무두 안왔어요. 도대체 이 양반이 어떻게 된 거야?
성자 - 하긴 성철이가 그 여잘 데리고 올 걸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사이.) 엄만 정말 아버지가 밉지 않우?
모친 - (침 묵)
성희 - 엄마. 정말 몰랐수?
모친 - (침 묵)
성자 - (한숨을 내쉬며) 알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랬지. 알았으면 울엄마 먼저 초 상났다.
성환처 - 아버님 장례식엔 사람들로 파도를 이루겠죠? 한 인파가 밀려오면 한 인파 가 밀려가고…….
성희 -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수?
(개 짖는 소리. 모두 문을 주시한다. 사이. 아무런 기척 없다.)
성환처 - 큰 선거가 아니라 시장 선거는 집안 일에 민감하거든요. 부디 선거에 지 장이 없어야 할 텐데…….
성자 - 올케,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성환처 - 십리가 모랫바닥이래도 눈 찌를 가시나무가 있다는데 선거전이라는 게 본 래 가시덤불에 뛰어드는 거 아니겠어요? 헤치고 나와보면 온 몸에 상처뿐 인…….
성희 - 그 영광과 명예는 어디 가고 상처뿐이우?
성자 - 성환이도 이제 빛 좀 보는 거 아니야?
성환처 - 그거야 전쟁에서 이긴 자에게만 돌아가는 거죠. 어찌나 중상모략들을 해 대는지 지키는 사람 열이 도둑 하나를 못 당하고 큰 방죽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댔다고 집안에서 쉬쉬하는 작은 흠집이라도 있는 날엔, 덫에 치인 범이요. 그물에 걸린 고기 신세죠. (사이.)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지…….
성자 - 올케 하는 소린 시 같기도 하고 시조 같기도 하네.
성환처 - 무릇, 정치란 시심이 있어야 한다기에 요즘 시집을 좀 읽고 있긴 해요.
성희 - 작은 오빠가 정치를 할 건지 언니가 할 건지 모르겠수.
(부친, 움찔하자, 모두, 정좌를 하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부친, 시름시름 앓는다.)
성환 - (안타까워) 아버지……아버지…….
성희 - (방안을 둘러보며) 누군가 낯선 사람이 들어와 우릴 괴롭히고 있는 것만 같 아. 아버지도, 우리도 꼼짝 못하고 당하고만 있잖우.
성철처 - 아버님이 이상해요.
(모친, 수놓던 손을 멈추고, 모두, 두려움에 떨며 부친을 바라본다. 한동안 엄숙한 긴장이 감돈다. 성환, 공포에 질려 조심조심 부친의 가슴에 귀를 기울인다.)
성환 - (침묵을 깨뜨리며) 아마 잠이 드신 모양이에요.
모친 - (가족 사진을 지그시 바라본다. 사이.) 사진도 내려 놓아야지.
성철처 - (벽에 걸린 사진을 떼며) 아버님 퇴임하시고 어머니랑 두 분 과수원 일 도 우시면서……옆에서 뵙기 참, 흐뭇했어요.
성희 - (사진을 보며) 차라리 아버지 빨리 돌아가셨음 좋겠다, 죄 받을 소리지만 …….
모친 - (수를 놓으며) 시끄럽다.
성희 - (사진 속 아버지 어루만지며) 난 우리 아버질 세상에서 제일 존경했어. 그건 모두 알고 있지? (사이.) 우리 아버지 근엄하셨지만 인자하시고…
성환처 - 다정하시고 푸근하시고 멋진 분이시죠.
성희 - 그런 아버지를 잃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잃은 것 같은데 내가 품에 안겨 마 냥 좋아했던 우리 아버지가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라니…… 우리 집 얼마 나 화목했수?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모두 연극이었다고? 큰오빠, 작은 오 빠, 그동안 이 사실 숨기면서 우릴 속여 왔지? 그래, 속아줄께. 지금까지처 럼 그렇게 속아줄테니 계속 속이란 말야. 제발……. 왜 끝까지 속이지 못하 고 지금 와서 뒤집어 놓으냔 말야? 왜? 왜? 왜? 왜 끝까지 숨기지 못하우. 잉꼬부부로 소문난 우리 엄마 아빠처럼 한평생 늙겠다는 내 꿈은 그럼, 뭐유? (긴 사이) 난 날 속인 아버지 보다 어수룩한 오빠들이 더 미워.
부친 - (가쁜 숨을 몰아쉰다.)
모친 - (수놓던 일을 멈추고 부친을 바라보며) 팔과 다리를 주물러 드려라.
(성자, 성환 처, 부친의 발을, 성철 처와 성환은 부친의 팔을 천천히 가볍게 주무 른다. 모친, 불안한 시선으로 수를 놓는다. 성희, 이불자락을 여며주면, 부친, 자꾸 끌어내린다. 개 짖는 소리. 밖에서 인기척. 일순, 긴장감이 감돈다. 모두 문을 주 시한다. 모친의 수놓는 손길이 달라져 있다. 민희가 이를 지켜본다.)
성철처 - (긴장하여) 왔어요.
성철 - (소리.) 들어가세요.
성환처 - 내가 왜 이렇게 떨리지?
성자 - 엄마. 마음 단단히 잡수.
모친 - (천천히 수를 놓는다. 시선은 허공을 헤맨다.)
성희 - (밖에 대고) 감히 어딜 들어온다는 거야?
(이윽고 성철, 등장. 모두 성철을 원망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성철, 부친을 살피 고 안심한 듯 마음을 가라앉힌다.)
성철 - 우리 집에 찾아오신 손님이시다. 더구나 아버지가 청해서 모셔온 분 아니 냐? 예를 갖춰라.
성환 - 형님. 저 여태껏 형님 뜻 한번도 거스른 적 없었어요. 하지만 이건 아닙니 다. 이대로 평안히 가시게 해 드리자구요.
성철 - 아버지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치실 수 있게 해 드리자.
성환 - 형님만 효자고 우린 다 불효자들이에요? 아버지 한평생 누구보다도 훌륭했 습니다. 왜 오점을 남기시려는 거요?
성철 - (침 묵.)
성환 - 여기 어머니도 계시고 민희도 있어요. 지금 와서 저 낯선 여잘 여기 들이겠 다는 이유가 뭐요? 아버지는 지금 돌아가시면 그뿐이지만 우린 살아야 할 것 아니에요?
성자 - 성철아. 우리 엄마 두 눈 멀쩡히 뜨고 이런 치욕감을 삼켜야 하니?
부친 - (호흡 곤란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떠듬떠듬)……화……수……화수……
성철 - (퇴장. 소리) 어서, 어서 드세요. 아버지께서 찾으세요.
성환 - (부친에게 엎드려 울며) 아버지 한평생이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네?
성희 - 못 들어와. 한 발짝도 못 들어와.
(화수, 등장. 엷은 의상이 우아하고 가냘픈 꽃같다. 맵시 있는 걸음으로 부친 곁에 앉는 품이 다소곳하다. 순간, 방안은 고요하다. 세찬 거부의 소리들이 기가 죽어 잠자코만 있다.)
성철 - 아버지. 이분이 누구신지 아시겠어요?
부친 - (맥 하나 없이 시들부들 꿈인지 생신지 반갑다.)…
화수 - (슬픔에 겨워) 저 왔어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부친 - (고개를 끄떡하고)……화수……
(부친, 환한 표정으로 화수를 바라보고 화수, 슬픔에 눈이 젖는다. 숨이 막히게 고 요한 사이.)
부친 - (가물가물한 목소리로)살아서는……너를……못……볼 줄……알았……는데……
화수 - 말씀 많이 하시지 마세요, 선생님. (흐느낀다.)
부친 - 손……손……손을……이리……줘.
(모친, 떨리는 손으로 수를 놓고 있다. 가족들 놀라 서로 쳐다보며 어쩔 줄 모른 다.)
성희 - 안 돼!
성자 - (흐느끼며) 아버지! 엄마.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떻게 해.
부친 - (새파랗게 질린 손을 훼훼 저으며) 어디……있니……화수야……손을……이 리……다오……
(화수의 하얀 손이 부친의 새파랗게 질린 손을 잡으면, 부친, 그 손을 파들파들 꼭 잡으려 애쓴다. 순간, 방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성철 처, 민희를 꼭 부둥 켜 안는다. 모친, 떠듬떠듬 수놓는 손길, 몹시 떨린다. 어느 누구도 가느다란 숨 조차 쉬질 않는다. 개 짖는 소리 한 마리가 아닌 듯 사납다.)
성희 - 안 돼! 안 돼! 안 돼!
성철 - 잠자코 있어.
성철처 - 민희야! (눈짓하며) 나가!
성희 - 이런 횡포가 어딨어? 마지막 순간에 웬 횡포냐구!
성철 - 소란 피우지마라. 아버지 가시는 길 평안하게 해 드리자.
성희 - (앙칼지게 고함치며) 저 여잔 도대체 누구야? 누군데 평화로운 우리 집을 짓 밟고 쳐들어와 이 소란을 피우는 거야? 이 침입자!
성철 - 데리고 나가.
성희 - (성철 처, 성환 처, 성환에게 팔을 붙들려 버티다 끌려나가며) 나가! 나가! 나 가란 말야! 맞서 싸울 무기 하나 없이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야? 작은 오 빠, 저 여자 좀 쫓아버려. 작은오빠!
(성환, 성철 처, 성환 처, 성희를 달래며 퇴장. 부친, 환한 미소를 머금고 화수의 손을 잡고 있다. 성환, 등장. 어색한 사이. 개가 미친 듯이 짖어댄다.)
화수 - (불안하게) 선생님.
성자 - 엄마. 아버지가……아버지!
(모친, 수틀을 치우고 부친 곁에 앉으면, 화수, 부친의 손을 살그머니 놓는다. 사 이. 부친, 숨이 넘어간다. 미친 듯이 짖어대던 개가 별안간 신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주둥이를 꾹 다문다.)
모친 - (부친의 눈을 쓸어 내리며) 운명하셨다.
성자,성철,성환 - (통곡하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통곡소리에 성철 처, 성환 처, 뛰쳐 들어와 함께 엎드려 운다. 모친, 부친의 왼손 을 위로 하여 배 위에 올려놓고 두 발을 가지런히 모은다. 문갑에서 꺼낸 보따리를 풀어 솜으로 부친의 입, 코, 귀를 막는다. 성철 처, 모친의 시중을 든다. 모친, 부 친의 두발을 나란히 모아 붕대로 묶는다. 어느새 성희, 등장해 기운 없이 서있고, 민희, 이 광경을 지켜본다.)
모친 - (하얀 천을 펼쳐 성철에게 주며) 덮어 드려라.
(성철, 하얀 천을 부친 위에 덮으면 통곡소리 더욱 커진다. 화수, 천천히 일어난 다.)
모친 - 병풍 쳐라.
(성철과 성환, 병풍을 쳐 시신을 가린다. 화수, 힘없이 퇴장.)
모친 - 방에 불 빼라. (사이.) 친지들께 알려야지.
(성철, 성환 퇴장. 활짝 열린 문으로 저녁 노을이 비낀다. 병풍 안쪽에 모친, 홀로 부친 곁에 남는다. 성자, 성철 처와 성환 처의 어깨를 빌어가며 꺼억꺼억 섧게 울고, 성희, 문에 기대어 저녁 노을 바라본다.)
성희 - 우리 아버지 저 노을 속으로 가셨을까?
행자 - (소리) 백구가 새끼를 낳았어요.
성철처 - 몇 마리든?
행자 - (방안을 기웃거리며) 한 마리요.
성희 - 흰둥이지?
행자 - (보이지 않는 병풍 쪽을 기웃거리며) 아니요. 점박이요.
성희 - 어떻게 그럴 수가…….
성환처 - (속삭이듯) 그 손님은 가셨니?
행자 - 예. 개를 한 마리 데리고 왔더라구요. 검둥이요.
(모두, 퇴장하고 문이 닫히면 방안에 비낀 저녁 노을 사라지고 어두워진다. 병풍 안쪽에 모친, 부친 곁에 홀로 남아 가족 사진을 들여다본다.)
― 막 ―
침 입 자
이름 : 조 은 영
연령 : 32세
주소 : 경기도 안성시 봉남동 26-1
전화 번호 : (031) 672 - 9106
016 -764 - 3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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